***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스크랩] 강해 이사야 강해 1

에반젤(복음) 2023. 4. 2. 01:19

이사야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여호와를 버림 (사 1:1-9) 
 (사 1:10-20)
회복 (사 1:21-31)
하나님의 전 (사 2:1-4)
여호와의 날 (사 2:12-22)
행위의 열매 (사 3:1-15)
여인의 사치 (사 3:16-4:1)
남아있는 자 (사 4:2-6)
하나님의 바램 (사 5:1-7)
잘못된 길 (사 5:18-30)
노를 발하심 (사 5:24-30)
여호와 앞의 이사야 (사 6:1-13)
믿지 아니하면 (사 7:1-9)
거룩한 피할 곳 (사 8:9-15)
한 아기 (사 9:1-7)
여호와의 손 (사 9:8-12)
여호와의 노 (사 9:13-21)
불의함 (사 10:1-4)
어처구니 없는 일 (사 10:5-19)
남은 자 (사 10:20-34)
이새의 줄기 (사 11:1-5)
메시야 나라 (사 11:6-9)
남은 자를 부르심 (사 11:10-16)
감사의 노래 (사 12:1-6)
바벨론 심판 (사 13:6-16)
돌아온 자의 노래 (사 14:1-11)
계명성 (사 14:12-20)
경영 (사 14:24-31)
모압의 심판 (사 15:1-9)
피할곳이 되라 (사 16:1-5)

 

 

 

 

 

 

 

여호와를 버림 (사 1:1-9)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원두밭의 상직막 같이,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오늘부터는 이사야서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가리켜서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선지자는 이사야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선지자들마다 각기 나름대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선지자는 모두가 백성들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즉 백성들 편을 들어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던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때문에 선지자는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선지자가 있다면 그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아부하고 거짓으로 평안을 외쳤던 거짓선지자에 불과합니다.

 

 

 

 

선지자가 하는 말은 자기의 말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듣기 싫어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백성들이 아무리 듣기 싫어한다고 해도 자기가 해야 할 말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보면서 말을 바꾸거나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백성은 보지 않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전할 때 사람들은 '너무 심하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이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인데 '그렇게까지 하면 누가 교회 나오겠느냐?'며 말을 삼갈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사야 선지자 시대의 사람들이나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절대 예외는 아닙니다. 자기 마음에 안들거나 자기 생각에 어긋나는 말은 무조건 배척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이사야서를 공부할 것인데 먼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성경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가지고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의례히 하는 말로 여기지 말고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간절히 외치고 있는 이사야의 소리로 듣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며 기뻐하는 것을 홀로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이사야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이사야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2절을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식으로 양육시켰는데 그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3절에서는 짐승보다 못하다고 말합니다. 소도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를 양육한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은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식으로 양육했다고 합니다. 즉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으로 양육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식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깊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신앙생활이 형식과 외식에 치우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성경에 아버지라고 하니까 부르는 것에 불과한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점입니다. 이점을 생각하고 본문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들어갈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약속 안에 있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 안에 있는 자를 만드시는데 그들을 가리켜서 자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식을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되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희생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가지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 되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는 것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아들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홍해에서 애굽 사람은 다 죽었는데 어린양의 피를 발랐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입어서 살아났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을 가리켜서 '자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들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구약의 율법의 정신입니다. 즉 법을 이루는 것은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너희 소돔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은 무엇입니까?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일단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법은 제사, 제물, 즉 예배, 십일조, 주일성수, 봉사 이런 것들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며 약속입니다. 즉 너희가 무엇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 되었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살아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증거는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죽음 속에서 불쌍히 여김 받고 살아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법을 남기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고아와 과부가 있는 것도 그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불쌍히 여김으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살아났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고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의도에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랑을 무시했습니다. 이것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니까 그것이 다 형식으로 그쳐버리게 되고 12절의 말씀대로 마당만 밟고 가는 결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형식이고 그냥 왔다 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 사랑은 불쌍히 여기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입었다면 사랑을 나눠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나눠주는 자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신 사랑입니다. 결국 아들된 자는 영원토록 그 피만을 증거하고 그 피에 대해서 감사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아들된 자에게서 사랑이 나눠진다면 그것은 어떤 사랑이겠습니까? 어려운 자를 단지 물질로 돕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불교에도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된 자가 보여주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피를 전하고 가르쳐서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사랑을 무시했기 때문에 자식으로서 하나님을 버린 자가 된 것이고 결국 그땅이 황무하고 파괴되는 징계를 받게 된 것입니다. 땅이 황무해진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황무함은 사랑이 없는 모습을 말합니다. 즉 지금은 교회가 잘되는 것이 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의 사랑을 드러내느냐를 봐야합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갈 때 그 교회는 사랑으로 번성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렸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신 사랑을 무시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은석교회는 이 사랑으로 번성합니까? 오직 그리스도를 피를 보여주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아들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이 약속 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죄 (사 1:10-2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지난주에 이사야를 시작하면서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는데 다시 한번 말씀 드리는 것은 선지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전혀 거리낌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드러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다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보면 세상에 대하여 너무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위의 반응에 너무 민감하기 때문에 신자로서 당연히 행동해야 할 것도 하지 못하고 감추어 버리는 일들이 참으로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된 우리는 선지자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선지자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했던가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선지자는 오직 말씀을 기준으로 하고 살았습니다. 자기 유익이 기준이 아닙니다. 말씀에 맞으면 좋은 것이고 맞지 않으면 책망하고 나무랬던 것이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양보도 없고 타협도 없이 오직 말씀의 원칙에서 벗어났나 벗어나지 않았나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삶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을 것은 극히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세상의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라면 자신의 유익을 따져볼 필요도 없이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날 손익계산을 따지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에 비하면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성경대로 사는 삶의 어려움을 자신의 종교행위의 게으름을 가지고 말합니다. 즉 성경대로 사는 것을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으로 생각할 때 요즘같이 바쁘고 피곤한 세상에서 새벽기도 나오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성경대로 사는 것을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1년 52주 동안 주일 오전, 오후,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하면서 이것을 신앙의 어려움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대로 사는 것의 어려움은 그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어려움은 그 결과가 사람들이 원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즉 성경대로 살았을 때 하는 일이 잘되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게 되고, 환영을 받는다면 왜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문제는 성경대로 했는데 사람들이 오히려 거부하고, 반대하고, 공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에 대해서 눈치를 보고 산다면 결코 성경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도 초월하고, 세상도 초월하고 모든 관심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가 있지 않으면 선지자 같은 모습은 우리가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에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안하면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타협도 양보도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서를 공부하면서 그런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시각으로 이스라엘을 볼 때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입니까?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고 제사도 제물도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눈에는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것이 이사야의 시각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오직 나라의 부강과 자신의 발전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았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부강하게 되자 온갖 사치와 타락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도 나라의 부강에 모든 관심을 두고 열심히 일한 결과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서 여인들의 사치와 타락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제사도 제물도 받지 않고 기도까지 가증한 것으로 여겨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발전시키라는 요구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라 부강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난 이스라엘로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를 보이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난 그 긍휼과 용서를 보이는 것이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피의 정신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보이심으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할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의 소원을 위해서 살아가는 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단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교회성장이라는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원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맡기신 것은 용서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서 살아난 존재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긍휼과 사랑으로 죽음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것은 용서를 알고 용서를 보이며 살아갈 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용서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용서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 마음속에도 교회에 나오면서 다른 의도가 있고 다른 소원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남겨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개인을 위한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향하신 계획입니다. 나 하나의 섬김과 용서를 보이는 삶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구원받고 용서를 배우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세상에 남겨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직장도 보냄 받은 것이고, 가정도 보냄 받은 것이고, 학교도 보냄 받은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담겨 있는 용서를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살지 못할 때 이사야는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이 보여야 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뭐라고 했습니까? 17절에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합니다. 나라가 부강하자 자연히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들의 격차가 크게 발생합니다. 그러나 잘사는 사람들, 소위 세상에 힘있는 자들은 고아나 과부 같은 약자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보이라는 것은 단지 남을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죽음에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고아, 과부같이 천대받고 무시 받는 그런 모습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그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약자가 있도록 해서 그 약자를 보면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잊지 않도록 하시고자 합니다. 즉 약자를 단지 약한 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모습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용서를 보이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약자를 천대했던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죄를 주홍 같다고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주홍은 곧 피를 의미합니다. 즉 살인을 말하는데 살인이란 실제로 사람을 죽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남을 억울하게 하고 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피눈물나게 한다'는 말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약자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살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를 이웃과의 관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보다 약한 자고, 너보다 못한 자라고 해서 무시하고 업신여기지 않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너 앞에 있는 약한 자의 모습이 바로 너의 모습인데, 네가 그자를 업신여긴다면 너는 내게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무시한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즉 너도 죄인인데 하나님의 용서로 살았다는 것을 알고 이웃을 그렇게 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결국 용서를 아는 자이기 때문에 이웃이 어떤 모습이든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면서 용서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볼 때 주안에서 죄를 가리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나를 자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를 보이는 삶이며 천국은 이런 신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회복 (사 1:21-3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 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현대교회 신자들은 교회에 와서 뭔가 부담이 되는 말을 듣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서 사는 것도 힘들고 어렵고 많은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교회에 오면 그래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세상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말을 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해야 하는데 자꾸 부담이 되는 설교만 하면 신앙생활이 기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이 되어 버립니다'는 말을 한다고 했을 때 이 사람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앙 생활은 내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지 내 기쁨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찾거나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이 기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출발부터가 잘못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자라갈수록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철저하게 무장해 갑니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은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깊이 박히게 됩니다. 내가 남의 기쁨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실체를 알지 못한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다면 결국 그가 찾는 하나님도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쪽에서 뭔가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해주지 않을 때 신앙 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고 결국 교회를 그만두게 되거나, 지금까지 해온 습관에 의해서 억지로 다니게 되거나, 타인에 의해서 끌려 다니는 모습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내가 내 기쁨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만을 찾아갈 때 그 기쁨에 내가 동참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설교가 부담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기쁨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를 해도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하면 기도할 맛도 나고 힘도 나는데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니까 기도할 맛이 나지 않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고 부담만 됩니다'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나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위해서 기도해 왔는데 이제는 나 아닌 다른 존재의 기쁨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내 기쁨을 포기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내 기쁨을 포기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기쁨은 모두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 육신의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육신의 것을 통하지 않고는 기쁨을 누릴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런 줄로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럴 때 신자에게는 하늘에서 주어진 기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끝까지 자기의 기쁨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자기에게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힘든 일로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기도를 해서라도 자기의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수없이 말해왔지만 결국 어떤 어려움으로 인해서 그 믿음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해 버리신다는 말에도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적하는 기쁨은 오직 세상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에 대해서 친근감을 가지고 있고, 세상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심판 당하고 멸망당한다는 말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모습 아닙니까? 이들은 세상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힘을 세상을 잘되게 하는데 쏟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출애굽이고 믿음인데 여전히 세상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기 때문에 믿음다운 믿음이 보이지 않고 온통 죄의 모습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이 심판 당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렇다치고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신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시각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세상을 죄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죄로 본다면 심판 받을 장소로 본다면 결코 세상 방식대로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통해서 기쁨을 얻고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단지 '이스라엘이 잘못해서 심판 당하는구나 우리도 잘못한게 있으면 심판하시겠구나'로 그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로 심판을 받는데 그 죄의 모습이 무엇인가? 그 죄가 오늘 나에게 있다면 그 죄에서 벗어나자. 왜냐하면 그것이 심판 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의 현재를 점검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든 망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변함없이 여호와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제가 좋지 않고 불황이고 살기가 어렵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라고 할지라도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변함없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가 염려가 되고 부담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는데 자꾸 걱정하고 염려하고 울고불고하는 모든 이유가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없고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으니까 좋은 일이 없으면 기쁨이 없게 되고 짜증만 나고 신앙생활도 힘들고 재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자꾸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놓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염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평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서는 우리를 이런 삶으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이방인과 똑같이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나라가 부강해야 자기들이 잘된다는 생각에 나를 부강 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제사만 드려주고 제물만 바치면 그것으로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관심 없고 오직 자기들의 행복이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행복을 위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있게 하신 고아, 과부 같은 약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였습니다. 그것을 21절에서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라는 말을 통해서 살인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삶의 결과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고아, 과부를 신원하고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귀찮은 일이고,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던 이스라엘은 고아 과부를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편에서 원하는 것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이 주신 최선의 축복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23절같이 도적과 짝하게 되고 뇌물을 사랑하게 되고 사례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저기서 도적과 공모하여 공금을 횡령하고 사기를 치고, 자기의 자리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당연한 일을 하고서도 뭔가 대가를 요구하는 모습들이 우리들 주위에서 너무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만연해 있는 모습입니다. 목사가 돈을 사랑하고 사례를 구하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최선의 축복으로 여기지 않은 모습입니다. 언제나 자기편에서 더 나은 것을 원하다보니까 그런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23절의 패역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과 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의 모습입니다. 신자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도 더 갖고 싶어하고 더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언제나 부족을 느끼면서 나보다 많이 있는 자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왜 망합니까? 살인 강도, 도둑, 사기꾼, 폭력배,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다 없애버린다면 세상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까? 세상에 도덕군자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심판해 버리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이유입니다.

 

 

 

 

자기 잘되는 것이 모든 소망이고 꿈이지 도대체 하나님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요?,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천국 보내실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천국에 보내십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쇠하여지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과 같이 나는 망해도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잘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얼마나 하며 살아갑니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잘되는 것은 내가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웃으면서 평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잘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서 기도하며 사는 사람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며 기도한다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기도,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느냐 입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느냐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망하고 고통 당하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셔서 하나님을 잘되게 하는 신자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과연 어땠습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의 기도였습니까? 깊이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왜 우리 육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 말을 굳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다같이 세상의 마지막을 아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의 마지막을 믿지 않고 거부한다면 이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세상의 마지막을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는다면 이사야의 말을 절대로 흘려들어서는 안됩니다. 28절부터 보면 패역한 자 여호와를 버린 자는 멸망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자비와 긍휼을 보이는 일에는 관심 없고 세상에 마음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패망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래도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소홀할 수 있습니까? 이제 남은 문제는 이런 멸망 속에서 살아남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회복과 구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멸망에서 살아나는 자는 회복된 자 구속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심판을 말하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구속을 말씀합니다. 회복, 구속은 은혜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한 죄용서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 심판의 세상에 구속주가 되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구속하신 은혜에만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은 죄용서의 은혜는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용서의 은혜만 있으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용서의 은혜입니다. 심판에 처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삶의 차이는 세상에서는 몇십 년의 기간에 불과하지만 죽어서는 영원한 차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회복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 (사 2:1-4)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세상은 가치 있는 것은 환영을 하고 가치 없는 것은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해서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치 있고 없고의 판단 기준이 자신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고, 이익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되는 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관 속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교회도 진리의 판단 기준을 내 교회에 이익이 되고 안되고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유익 되게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진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교회에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를 따르고 진리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접해야 하고, 무시를 당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어려운 것은 진심으로 진리를 깨닫고 그 말씀대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찾아보기가 힘들고 대다수의 교회가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약하고, 비진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에 결국 이 땅에서는 진리가 비진리에 눌리고 공격당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리임을 알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곧 참된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합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싫어하고 멀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참된 신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 눌린다고 해도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가치를 두고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가치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에게 가치를 두게 되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해야 하고, 눌려야 하고, 어렵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에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에 대한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다.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지옥갈 인간이었는데 남들이 욕한다고 그것을 못참고 원망을 하는가?'하면서 모든 것을 견디어 갈 때 그리스도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하여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는 모든 것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였는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참된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무너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힘들다고 진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절에 보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말일이라는 것은 마지막 때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때에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고 작은 산 위에 뛰어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여호와의 전의 산이라고 합니다. 즉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만이 모든 산위에 굳게 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피해야 할 곳은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입니다. 이곳으로 피할 자는 이곳을 아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는 자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전의 산이란 오늘날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3절을 보면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전을 야곱의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고 에서를 피하여 도망을 칠 때 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곳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오해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며 자기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 것은 그에게 참된 복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장자란 섬기는 자임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야곱은 자기 인생에 개입하셔서 간섭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에서에게 절함으로 장자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전이란 우리에게 세상에서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가르치는 말씀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전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이 있는 여호와의 산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말씀이 다스리고 있는 그 자리를 여호와의 산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산에서 마지막 때까지 남는 신자는 세상의 다른 것에는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을 향해서 올라가며 '이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하면서 참된 말씀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산은 참된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그 자리가 여호와의 산입니다.

 

 

 

 

신자가 여호와의 산에서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을 때 다른 산은 작은 산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굳게 선다고 합니다. 여기서 작은 산은 무엇을 말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아니한 모든 것을 작은 산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이 없는 것을 작은 산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아니한 모든 것은 마지막 때에는 모두 작은 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작은 산에 불과한 것은 아주 큰산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큰산인지를 판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 모든 것이 작은 산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큰산으로 여기며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헌금이 많아지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작은 산에 불과한데 말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큰산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가는 이유도 큰산을 보지 못하고 작은 산을 큰산으로 여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모든 작은 산 위에 곧게 설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산에 서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못견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있는 자들을 작은 산에 서 있는 자들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해도 마지막 때에는 말씀 위에 서 있는 자가 굳게 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에 서서 세상을 바라봅시다. 작은 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의 전부가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벌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산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작은 산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자랑하고 내세운다고 그것 때문에 기가 죽거나 낙심하겠습니까? 오히려 작은 산에서 그것이 최고인줄 알고 자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사는 사람은 세상이 부럽지가 않습니다. 신자는 언제나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4절의 말씀과 같이 경쟁과 다툼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여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이 은석교회가 말씀이 다스리는 여호와의 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 여러분 각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날 (사 2:12-2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 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신자가 복음을 깨닫고,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복음을 호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호응하지 않는 것을 주장하고 산다는 것은 자연히 타인과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소수의 사람이 주장하기란 참으로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부딪히지 않는 복음으로 바꾸어서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곧 양보이고 타협이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복음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절대로 반대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에는 자신을 위한 포기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모든 유대인들의 반대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복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으시다면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복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고집이 아닙니다. 신자가 복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진리라는 차원에서입니다. 여러분이 깨달은 말씀이 하나님 편에서 진리의 말씀이라면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반대와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복음이 아닌 모든 것이 어떻게 되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마지막 때를 모른다면 말씀으로 사는 삶에 조그마한 어려움만 있어도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좀 더 쉬운 길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마지막 때에 살아남을 자와 멸망 받을 자가 누구인가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신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신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이것 하나 때문에 믿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런 저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을 믿는 모습만 보여주며 살면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고 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해하는 성도가 되었다면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께 붙들린 자입니다. 이제 우리 개인의 삶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어야 할 도구로 부름 받은 삶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날, 그런 삶을 산 주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신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세상을 어떻게 하실 것이고 누가 마지막 때에 살아남는 자가 되는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로서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아는 자로서 이스라엘을 볼 때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계획과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그 모든 계획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 계획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계획을 아는 자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획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심판을 아는 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소리에도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자의 삶입니다. 미래를 아는 자로서 세상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게 하신 목적이고 성경을 남겨두신 목적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마지막 때에 살아남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을 의지하지 않고 마지막 때를 바라보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마지막 때 세상의 모든 산은 낮아지지만 하나님의 전이 있는 여호와의 산은 높아진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 산에서는 율법과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산은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있는 그 자리가 곧 여호와의 산입니다. 마지막 때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낮아지고 높아지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이 낮은 것으로 보여지는 것, 이것이 여호와의 산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이렇게 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이 좋아하는 돈도 낮은 자리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지고, 지위도, 자식이 잘되는 것도, 남편이 승진하고 잘되는 것도 모든 것이 낮은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 자신까지도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내 안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귀하게 여김 받는 것이지 나는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자기를 중심으로 살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무슨 일을 당해도 괜찮다. 다만 나 때문에 복음이 왜곡되어진다면 안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나는 망해도 주님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도 요한의 마음이 아닙니까? 이런 삶을 누가 감히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사도 바울같이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께 미친 자가 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말합니다. 5-9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실패의 모습이 나옵니다. 동방풍속이 가득하고, 이방인으로 손을 잡아 언약하고 ,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마필 병거가 가득하고, 우상도 가득하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고, 모든 사람이 거기 절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스라엘의 실패는 곧 오늘 우리들의 실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더 믿음이 갔던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그것도 현재보다는 미래에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그 나라를 보이는 것처럼 살지 못하는 자는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 자와 거만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데 그 날에는 세상에서 높다고 자처하고, 위대하다고, 귀하다고 자처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귀하게 여기고 아름답게 여겼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립니다. 웅장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게 여겼던 예배당도 무너집니다. 귀한 직분이라고 말하는 목사, 장로도 다 낮아지고 어두운 곳으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19절에 나옵니다. 20절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진다는 것도 땅속에 사는 두더지와 같이, 어두운 동굴에 사는 박쥐와 같이 땅속으로 어두운 곳으로 쫓겨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장차 마지막 때 낮아지고, 땅 속 어두운 곳으로 쫓겨가고 도망칠 것을 의지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인생을 마칠 때까지 오직 하나님만 가장 귀한 분으로 알고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적당히 세상 것을 취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고 안해주고와 상관없이 나를 사망에서 건지시고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신 것, 그것만 안다면 하나님이 가장 귀한 분으로 나의 삶에 자리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적당히 세상 것도 취하면서 살고자 하겠습니까?

 

 

 

 

22절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있느뇨"라고 합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의 날에는 다 낮아지고 무너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인간까지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에 매이게 되면 결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가게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가를 보십니다. 여러분 무엇을 의지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마지막 때 사는 자입니다.

 

 

 

 

 

행위의 열매 (사 3:1-15)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 하실 것이며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혹시 사람이 그 아비의 집에서 그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너는 의복이 오히려 있으니 우리 관장이 되어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할 것이면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로 백성의 관장을 삼지말라 하리라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음이라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 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2:22절 말씀인데 그 말씀을 다시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있느뇨"라고 합니다. 인생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다, 없다를 따질 때는 그 기준이 세상적인 기준과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것의 기준은 썩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영원토록 존재하는 것이냐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결국은 사라지고 썩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될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뭔가를 의지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될 때는 의지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곁을 떠나버리게 됩니다. 이렇듯 사람은 이기적입니다. 항상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음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와서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할 때 사람의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불만같은 것이 올라옵니다. 그 이유는 세상 것이 없이는 못산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없이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돈없으면 굶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나는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는 모습입니다. 지금 신자들이 거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라고 하면서도 맡긴다는 것이 자기가 잘되는 쪽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맡긴다는 것입니다. 이미 결론은 내 편에서 내려놓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맡기는 것입니까?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그 처분에 따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 교회는 부흥되어야 한다' '내 자식은 대학에 붙어야 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믿음은 말뿐이고 정작 믿고 있는 것은 세상입니다. 인생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야 행세할 수 있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붙어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굴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인생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식이 대학에 떨어졌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인생을 의지하고 사람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는 믿음 없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내가 못산다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못살기 때문에 남에 보여주기를 꺼려하는 것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인생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인생을 의지하는 모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인생을 의지하는 모습을 소돔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생을 의지하고 살다가 멸망당한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들어서 예루살렘에 유다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도 인생을 의지한다면 인생을 의지하다가 망한 소돔과 같이 너희도 망할 것이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유다 백성들에게서도 옛날 소돔과 똑같은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도 그들과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보는 오늘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본문의 말씀들이 한낱 옛날 이야기로만 들려집니까?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생을 의지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너희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으면 너희도 망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의지하면 망한다는 것이 소돔, 예루살렘, 유다를 들어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소돔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이 있는 그곳이 소돔 같은 꼴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니까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세상의 구분을 두지 않으십니다. 그 누구라도, 그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생을 의지한다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잘못된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진다면 그것이 곧 망하는 모습이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절부터 보면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 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이 의지했던 사람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루살렘에게 그들이 의지하는 사람을 제하여 버리시고 대신 누구를 세우시냐면 아이로 방백을 삼으시고,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5절부터 보면 백성이 서로 학대하고, 이웃을 잔해하고,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긍휼과 자비가 없는 그런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인데 인생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무엇이 보여집니까? 이들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이웃도 해치고 학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 모습 그대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의지하는 나라는 이렇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고 합니다. 아이, 부녀는 앞서 말한 대로 자격이 없는 지도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격이 없는 지도자가 예루살렘을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격이 없는 지도자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생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인생을 의지하는 지도자가 예루살렘 백성들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길이 아니라 자기와 똑같이 인생을 의지하는 망하는 길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백성까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우리 잘못이 아니라 지도자의 잘못이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은 따라간 너희도 잘못이다고 하십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법에 옳지 않은 것을 가르치거나 전파하면 그것을 얼마든지 거부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10절에 보면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의인은 하나님만 의지한 자입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거부한 자입니다. 이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날에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요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추종하지 마십시오. 목사가 잘못된 말을 하면 아니라고 하십시오. 교회가 잘못되는 것은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주님만 의지하십시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여인의 사치 (사 3:16-4:1)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너희 장정은 칼에,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하라 하리라"

 

 

 


사람들은 언제나 앞날에 대한 걱정거리를 안고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시험에 붙기 위해서, 취직을 하기 위해서,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왜 시험에 붙어야 하고, 왜 취직을 해야 하고, 왜 집을 장만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채 단지 남이 하기 때문에 나도 해야 하고, 남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눈앞의 현실 문제에 집착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눈앞의 현실문제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왜'라는 물음은 전혀 하지도 않은 채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점에 급급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관심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믿어 왔던 신에 대한 고정관념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결국 자기의 현실문제를 도와주는 하나님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약속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자들도 현실의 문제에서 어떤 충격을 받게 되면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과 자식을 뒷바라지하면서 그것이 주님이 나에게 맡긴 일임을 믿고 열심히 살고 있는 한 신자가 동창들의 모임에 나가서 사회에서 일하면서 소위 자기발전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현재가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신자의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하나님을 믿으면 뭔가 나아지는 것이 있어야지 왜 항상 이 모양인가?' 이런 생각들이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이 나아지지 아니한 이상 신앙생활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보며 살 수 있는 것은 현실의 마지막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가? 내 인생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것은 숨쉬는 것, 그 하나 때문입니다. 숨쉬는 것이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말을 하고, 생각도 하고, 화도 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숨이 멈추어 버린다면 그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그 숨쉬는 것의 주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아십니까? 사람이 숨을 멈추면 그후는 무엇입니까? 신자는 숨을 멈춘 후의 때가 그 마음속에 박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현재의 나를 지배하며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 나를 지배하고 지금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이미 천국을 살고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본문을 보면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천국을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인들의 사치를 책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그대로 보면 많은 여자들에게 아주 큰 부담이 되는 말씀으로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사치하는 것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들이 지금 여자들이 다 착용하거나 사용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사치가 요새 말로 몇 백만원 또는 몇 천만원 하는 밍크 코트라든가, 몇 카럿트짜리 다이아 반지라든가, 몇 백만원 하는 핸드백이라든가, 몇 십만원 하는 손수건을 말하고 있다면 오늘 여러분은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치라고 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발목고리, 손거울, 예복, 겉옷, 목도리, 손주머니들입니다.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을 그대로 말하면 교회에 올 때는 반지도 하지말고, 목걸이도 하지 말고, 파마도 안되고, 화장도 안되고,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이러이러한 것은 사치니까 이런 사치들을 하지 말자는 캠페인이 아닌 것입니다. 사치하지 말자는 캠페인은 지금 우리나라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사치하지 말자는 것은 국력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국력을 위해서 사치하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사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치를 나무라는 것은 돈을 함부로 쓰고 비싼 것을 사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치를 책망하시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13-15을 보면 장로들과 방백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그들의 포도원을 빼앗고, 짓밟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빼앗은 돈으로 무엇을 합니까? 몽땅 자기들의 쾌락을 위해서 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심판하시는데, 사치하던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고,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런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흔히들 '내돈 가지고 내맘대로 쓰는데 왜 그리 말이 많느냐'고 하는데 그것이 왜 자기 돈입니까? 자기에게 있는 돈을 자기 돈이라고 여긴 것부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야 그럴수 있다고 해도 교회 안의 사람들까지 자기에게 있는 돈을 자기의 소유로 여겨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됩니다. 은혜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빈털터리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고 가나안 땅을 분배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뭔가 가나안 사람들과 달라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인들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를 근거로 해서 살아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그들의 죄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약속의 땅에서 주어진 자기들의 소유에 대해서 만족하고 남의 소유에 욕심을 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있게 하신 가난한 자, 과부들, 고아들과는 서로 나누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탈취하고 그것으로 자기들의 쾌락을 위해서 써버렸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무시하고, 은혜와 자비를 무시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심판 받는 이유입니다. 즉 사치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리워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아는 자는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돈을 자기의 소유로 여기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내세워서 없는 자들을 무시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모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살아갑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현실에 집착해서는 안되고 우리 주위의 없는 자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없는 자는 전혀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 먹고사는 것에만 관심 두고 있다면 그것이 곧 용서를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사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가운데 누군가와 나누면서 삽니까? 아니면 자기 문제에만 빠져서 어려운 자는 관심도 없이 삽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안다면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모습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남아있는 자 (사 4:2-6)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지난 시간에는 여인들의 사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치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용어들을 세상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의미를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의 용어들은 그 용어가 쓰이게 된 성경을 배경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배워오고 알아왔던 세상적인 상식을 버리지 못한채 성경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들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뿐아니라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될 것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사치를 말할 때도 단지 세상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면 돈많이 쓰고, 호화롭게 사는 것을 사치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런 경우 사치의 기준을 정하기가 매우 애매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이상 쓰면 사치다'는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소비를 사치라고 말하지만 과소비란 자신의 소득을 넘어서는 소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달에 몇천만원 버는 사람과 백만원 버는 사람의 소비를 생각할 때 그역시 뭔가 모순이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에서 사치하지 말자는 것을 단지 검소하게 아끼며 사는 것으로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도덕에 불과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치란 어떤 의미입니까? 지난 시간에 사치는 하나님의 용서를 가리는 행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치란 가난한 자들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무시하면서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 47: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치하는 자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주위에 어려움을 당한 이웃이 있는데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웃의 어려움을 염두에 두지도 않은채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는 과부가 아니라 하여 과부의 심정을 외면하고 과부 앞에서 남편 자랑하는 것이나,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 앞에서 아이 자랑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의 어려움,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하고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사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얼마를 쓰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사정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니까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모든 기회를 놓쳐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치를 책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는 삶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심판해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 속에 뭔가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은 여호와의 싹입니다. 2절에서 말하는 그 날이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해 버리시는 날을 말합니다. 그 심판의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자비를 알지 못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압제했던 자들을 흩어버리시고 다시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모으시는 자는 세상에 가진 것이 없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했던 자들입니다. 이들이 곧 여호와의 싹이며 남아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재주있고 실력있는 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사는 자들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남아 있는 자들은 시온에 있으며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이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남아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정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일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데 그 일은 더러움을 씻으시며 정결케 하는 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예루살렘은 장소적인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루살렘을 장소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모두 짐싸들고 이스라엘로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더러움을 씻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을 씻음을 받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이 거룩하다 칭함을 받은 것은 심판하는 영, 소멸하는 영, 즉 성령을 통해서 죄씻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 곧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그것이 곧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알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나아온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죄씻음 받는다고 하는데 이 말은 성령이 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소멸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죄씻음이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성령으로 일어나는 일은 나의 죄를 책망하고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신자는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남아 있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사는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우리를 대신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고 달려가는 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으며 살아도 그 마음은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자들을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이들이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런 신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낮추시고 하나님만 바라는 신자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힘든 일을 겪게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남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바램 (사 5:1-7)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계획과 뜻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나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이나 교회로 모이게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즉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라는 것을 소홀히 생각하고 지나치지만 그러나 이 말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자로 부름 받고 교회로 모인 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라면 신자나 교회가 나아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분명히 우리를 통해서 뭔가 하시고자 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신자다운 신자는 누구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교회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를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분명히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나아가는 것이 가장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단지 우리의 생각대로 모든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오직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자들이나 교회를 보면 대부분이 자기들의 뜻에 맞으면 그것을 곧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실수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해서 찾아가지 않고 모두를 자기를 중심하여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하나니의 뜻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령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거나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어쨌든 교회만 부흥시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당초 교회 부흥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목표, 우리 교회의 목표가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산다면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끝나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성경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며 성경대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께 포도원이 있는데 그 포도원에 극상품 포도를 심었다고 합니다. 포도를 심고 망대를 세우고 술틀도 파면서 좋은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맺힌 포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들포도였습니다. 포도를 가꾸는데 부족함이 있어서 들포도가 맺힌 것이 아닙니다. 3, 4절을 보면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더니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포도원을 위해서 하신 일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들포도가 맺힌 것입니까? 오늘 이 말씀은 지금 우리 자신들을 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나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극상품을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에게서 들포도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입니까? 7절에 보면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나무는 유다라고 하는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공평이고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공평 대신에 포악을 보였고, 의로움 대신에 부르짖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면 왜 유다에게 들포도를 맺었다고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8절에 보면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합니다. 누가 화를 받게 됩니까? 가옥에 가옥을 연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자들입니다. 즉 집을 사고 땅을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집을 사고 땅을 사는 것이 화를 당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당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한다는 것은 결국 많은 재물을 모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재물을 모은 이들이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11, 12절을 보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재물을 중심으로 살면서 온통 세상 재미에 빠져 살다보니 여호와의 일에 관심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극상품으로 심은 유다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부르신 그 뜻과 하나님의 바램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세상에 관심을 두고 살다보니 재물은 많이 모았을지언정 결국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지게 되었고 그것이 화를 받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여기에 얼마나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까? 혹시 자기 인생에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화가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신자가 세상살이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서도 엉뚱한 요구를 하게 됩니다. 목사가 교회 성장에만 관심이 가 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미화시켜서 전도를 강조하고, 헌금으 강조하고, 열심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통 자기 잘되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으니 남은 망해도 내 교회만 잘되면 나쁜 성품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냥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로 모여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17절에 보면 "그 때에는 어린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먹을 것이요 살진 자의 황무한 밭의 소산은 유리하는 자들이 먹으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유리하는 자란 집이없어 정착을 하지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잘사는 사람들이 집도 다 차지하고, 땅도 다 차지해 버리니까 상대적으로 없는 자들은 더 없게 되고 결국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들을 유리하는 자라고 하는데 마지막 때는 이들이 밭의 소산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있든 없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입니다. 예수 안에서 서로 같은 모습으로 모이는 것, 이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다른 관심없이 오직 주님이 좋아서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들의 목표를 가지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좋아서 모이고 흩어지는 것, 그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세상에서 유리하는 신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잘못된 길 (사 5:18-30)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찐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았는도다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 기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실 것이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 올 것이로되 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신들메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그들의 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기어졌으며 그 말굽은 부싯돌같고 차 바퀴는 회리바람 같을 것이며 그 부르짖는 것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물건을 움키어 염려 없이 가져가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리워져서 어두우리라"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고 할 때 일단 무엇이 허용이 안되는가 하면 우리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이 결코 허용이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지시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지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까 못하겠습니다'라는 것이 하나님께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신병이 훈련을 받고 군생활을 시작할 때 유심히 살펴보면 군대라는 환경에 적응을 빨리 하는 사람이 있고, 늦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군대에 대한 적응이 늦고 빠른 그 차이가 어디에 있냐면 군대라는 것에는 나 개인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군대는 명령대로 하는 것이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아니요'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사회임을 알고 자신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군대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못하겠다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불평도 하고, 불만도 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모든 생활을 자기 좋은 대로 하지 못하고 통제를 받으면서 남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와 같습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 맘에 드는 쪽으로 고쳐달라는 불평을 내세울 수 없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재미가 없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에게 재미있는 것을 해야 열심도 있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재미가 있는데, 우리 개인의 재미는 처음부터 사그리 뭉개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라는 이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자기의 계획과 꿈을 버리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움직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이것을 하나님께 원하시는가?' 항상 이것을 묻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좋으면 그것을 옳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우리에게 화로서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있을진저"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지극히 선하고 옳은 것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세상에서 이익이 되거나 즐거움이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은 인간편에서 '그것은 아니다'로 바꾸어 버리고 대신 하나님이 '아니다'고 하신 것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전파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경우는 그 복음이 자기에게 해가 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맞을 때입니다. 그러나 뭔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다고 생각될 때는 성경을 통해서 차근차근 점검해보고자 하는 생각도 없이 아예 처음부터 '넌 틀렸다'라고 배척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을 악하다고 하고 악을 선하다고 하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아닌 것을 맞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를 가리켜서 뭐라고 하느냐면 21절에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있을진저"라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나는 지혜롭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화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용감한 그들은 화있을진저"라고 합니다. 이것은 술마셨기 때문에 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가느냐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을 재미있게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재미있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재미도 누리면서 사십시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멀어지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세상 재미 때문에 말씀을 멸시하게 된다면 그것은 화가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24절을 보면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마른풀이 불속에 떨어짐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버리고 말씀을 멸시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재미를 앞세우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소홀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주의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있습니다. 순간순간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이익이 되는 쪽으로 판단하고 움직입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이 멸시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볼까'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화있을진저'라고 합니다. 신자가 '이렇게 살까? 저렇게 살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재미있게 사는 것인가?' 여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율법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신자의 삶을 빼앗겨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재미있어하고 좋아하는 교회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면서 법을 세워 가는 것이 교회의 목적입니다. 은석교회도 율법을 묵상하고 여호와의 법을 세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많은 것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설교 3편을 주보에 실어주고 있고, 또 주일오전 예배, 오후예배, 수요일 예배, 새벽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들을 기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이런 자리에 관심이 없는 이유가 뭔가하면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는 세상을 이렇게 살겠다'는 자기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조금만 귀찮으면 안나오고, 조금만 피곤해도 안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세상이 사는 것같이 나도 돈벌어서 남들같이 집사고, 좋은 가구 들여놓고, 자식 잘 키우면서 인생을 한번 번듯하게 살아보자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여호와의 말씀에서 멀어져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대로 살겠다는 각오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신다고 하십니다. 25절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꾸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은 세상의 삶 때문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리까지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과연 무엇이 귀합니까? 자신의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노를 발하심 (사 5:24-30)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 기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실 것이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 올 것이로되 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신들메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그들의 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기어졌으며 그 말굽은 부싯돌같고 차 바퀴는 회리바람 같을 것이며 그 부르짖는 것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물건을 움키어 염려 없이 가져가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리워져서 어두우리라"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문명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환경과 문명에 길들여지면 그것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30평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방한칸 짜리 셋방을 사는 사람을 보면서 '나보고 저렇게 살라고 하면 하루도 못살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0평이란 환경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보다 못한 환경에서는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차가 없으면 불편해서 살 수 없을 것같고 걷는 것은 아예 귀찮게 생각하는 것이나, 컴퓨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손으로 글쓰는 것을 불편해 하는 모든 것이 환경과 문명에 길들여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들여진 인간들이 더 나은 환경을 원하게 되고, 더 좋은 문명을 누리면서 보다 좋은 질적인 삶을 누리고 싶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원이라는 형태로 자리하게 되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이 갖가지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를 찾아가서 비는 사람들이 있고, 조상에게 비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오늘 같으면 97년 1월 1일에 뜨는 해는 어떤 특별한 새로움을 담고 뜬다는 착각아래 동해안의 바다를 찾아서 해돋이를 보면서 한해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질세라 가세를 합니다. 즉 신년 축복성회라는 열면서 소원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물론 소원을 가지고 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얼마든지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도우셔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 들고 나오는 소원이 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 아닌 것을 복으로 말하면서 그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은 극히 잘못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시간에 신자는 항상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갈까'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세상을 좀더 편하게, 좀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아갈까에만 관심을 두고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말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모든 일들이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귀찮은 일로 되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급한 것이 아니고 내 사정이 더 급한 문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갈급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갈급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불평이고, 있으면 있는대로 그것 가지고 세상 재미에 빠져서 이래저래 하나님은 뒷전이고 말씀은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임과 동시에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5장에서 하나님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가 맺혔다고 합니다. 그 들포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땅을 주시니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없는 자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것을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해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고 호의호식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노를 발하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복은 8절에 있는 대로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야 살든 죽든 관심 없고 자기 한몸 있는 재산 가지고 한평생을 편하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복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지 않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소유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이유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무조건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를 위해서 주셨다고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내에서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가 발생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돈을 가지고 집사고 땅사고 술마시는데 써버린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은 있는 자들의 그런 욕심 때문에 고통을 받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있는 자들이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 가난한 자는 더욱 고통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눈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덮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책망 받을 죄였던 것입니다.

 

 

 

 

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자로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라는 것은 전혀 성경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복을 생각하기를 내 창고가 차고 넘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어떤 문제인가 하면 하나님이 내 창고를 채우셨으니까 이것은 모두 내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것이고 내 복이라는 것을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고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말 3:10). 하나님의 창고에 양식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했고, 하나님이 창고의 양식은 가난한 자, 고아, 과부를 위한 창고인 것입니다. 그 양식이 곧 우리들의 십일조인 것입니다. 십일조 했으니까 이젠 됐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유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느냐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들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주셨는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것이 나누어져서 누구에게로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들의 육신을 위해서 허비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치라고 말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노를 발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노를 발하시는 이유는 단지 화풀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답게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25절에 보면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노를 누가 받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실패한 이스라엘은 바로 이 자리에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실패한 우리들에게 떨어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내 손에 쥐어진 것을 의지하며 살았고, 하나님을 믿는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우리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의 복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이 주어져 있는데도 살기 어렵다고 탄식이고, 한숨입니까? 죽을 때까지 병에 걸리지 않고, 돈걱정 안하고 사는 것이 복입니까? 그래봐야 지옥 가는 인생이라면 몇십년 편하게 사는 것이 뭐가 그렇게 부럽습니까? 주님의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복을 복으로 여기는 신자라면 어떤 형편에서도 이렇게나마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복은 여러분에게 있는 욕심이 깨어버린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리며 기쁨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앞의 이사야 (사 6:1-13)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 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요즘 국회가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했다는 것 때문에 여기저기서 데모가 일어나고 경제가 어렵다고들 아우성입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나라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노라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그런 것을 바라볼 때마다 나름대로 가지는 생각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혹시 국가의 장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일들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이 말씀대로 세상 나라는 짐승의 나라라는 것을 느낍니다. 짐승의 나라는 장래가 없습니다. 망하는 것이 그 장래이고 끝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천국을 모르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나라가 그들의 전부입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자기 나라가 부강해짐으로 자기 또한 덩달아서 혜택을 보고 발전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기대를 깨버리는 대상에 대해서는 결코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모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자기들의 이익을 생각하고 일을 처리합니다. 나라의 부강과 국민을 위해서 우리 당을 희생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당의 힘을 위해서 국민을 희생시키는 일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정부는 힘이 있습니다. 공권력이라는 힘을 내세웁니다. 공권력이 도전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합니다. 사실 그 힘도 국민에 의해서 주어진 것인데 그 힘이 주어지자 이제는 오히려 그 힘을 가지고 국민을 억누릅니다.

 

 

 

 

저는 지금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데모를 하든 날치기 통과를 하든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복지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 마음이 천국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국가가 흔들리면 두려움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웃시야 왕이 죽습니다. 웃시야 왕은 소위 백성들이 원하는 능력있는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웃시야 시대에 이스라엘은 경제력으로 부강한 시대였습니다. 3장에서 말했던 이스라엘 여인들의 사치나, 5장에서 말했던 돈있는 사람들이 땅을 사고 집을 사모으면서 재산을 불리고 먹고 마시며 호화판으로 살게 된 것이 모두 웃시야 왕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경제력으로 부강해지니까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은 버리고, 말씀에는 관심 없고 오직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세상 재미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는 관심 없이 세상에 빠져 살아가는 그 결과는 결국 망하는 것임을 이사야를 통해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망하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까? 본문에 보면 이사야가 웃시야가 죽던 해에 하나님이 계신 곳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고 천사들은 각기 여섯 날개가 있는데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니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광경을 이사야가 보고 나서 그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사야와 같이 그런 광경을 보게 되었다면 어떤 반응이 나오리라고 생각합니까? '야 기막히다' '야 멋있다'라고 하면서 넋이 나간 채 서있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나오는 반응이 '나는 망하게 되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다'라는 외침입니다. 즉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의 반응입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주님을 만났다'라고 하면서 자랑하고 떠벌리는 사람의 말은 믿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는 자기의 죄를 고백할 뿐입니다. 죄에 대한 고백은 말씀 안에서 만난 하나님으로도 충분합니다. 말씀 안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하고, 꿈에서나 어떤 신비스러운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헛된 것을 쫓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자 상대적으로 추하고 더러운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그 장면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왜 망하는가를 계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더러움을 발견했습니다. 이사야가 더럽다는 것은, 이사야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다 더러움에 빠져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러움에 대한 결과는 영원히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해가 바뀌면 '올해는 좀 나아지려나'라는 기대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을 보면서 올해도 좋아지기는 틀렸다고 한숨을 내쉽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욕을 하면서 나를 부강하게 만들 위대한 인물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지금 관심이 다른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세상은 망한다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망하지 않겠지'라는 기대 속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먼저가 아니라 세상이 먼저이고, 말씀이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로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더러움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내가 망할 존재라는 것도, 세상이 망한다는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데모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헛되고 헛된 것을 추구하다보니까 결국은 헛된 것 때문에 다투고, 헛된 것 때문에 낙심하고, 헛된 것 때문에 슬퍼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유는 결국 천국을 보지 못하고 세상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말씀 앞에 세워 놓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선 급한 것은 세상사는 문제고, 성경은 보지 못해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으면서도 세상에서 문제만 생기면 심각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을 보고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말을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성경을 보라고 말하면 목사니까 의례히 하는 말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의례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지 않으면 자기를 모릅니다. 자기도 망하고 세상도 망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헛된 것에 소망을 두게 됩니다. 성경을 안봐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지 않으므로 자신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지 않게 되고, 그래서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세상으로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당 문만 나서면 말씀과는 상관없는 세상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이 세상을 말씀에 나를 맡기지 않고도 믿음으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말씀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께 나를 맡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웃시야 같은 왕을 기대하지만 신자가 기대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주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할 일은 세상은 망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보냄 받았습니다. 세상은 망한다는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면 (사 7:1-9)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왕 아하스 때에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혹이 다윗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 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지난 시간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고 나서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로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본 이사야의 반응은 자기의 부정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자기만의 부정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전 백성의 부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는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된 것입니다. 즉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두고 말세라고 얘기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말세라는 것은 살인과 폭력이 난무할 때, 전세계에 퍼져있는 핵폭탄의 얘기를 들었을 때, 또는 지진, 홍수, 기상 이변 같은 천재지변 때문에 망할 세상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것들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에 뭔가 소망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야 하지만 다른 세상 사람같이 이 땅에서 많은 것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고자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상 것은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아무리 부귀공명을 누리고 살아봐야 길어야 몇십 년입니다. 그 몇십년 잘살아보겠다고 영원한 복을 포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그 나라 때문에 세상에 소망두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이 볼 때는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심판은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살아가게 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입니다. 못살아도 잠간이고, 잘살아도 잠간입니다. 못산다고 울고 한숨쉴 필요가 없고, 잘산다고 배두드리면서 좋아할 필요 없습니다. 잘살고 못사는 것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남들 만원 쓸 때 나는 천원밖에 쓰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천원가지고 쓸만큼만 쓰고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만원 쓰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나도 만원을 써봤으면" 하니까 자기에게 천원만 있는 것이 그렇게 불만일 수가 없고, 만원을 벌지 못해서 한탄이 나오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환경이 좋아지고 경제가 풍부해진다고 해서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환경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환경에 빠져버리면 그 사람은 자신의 환경을 더 좋은 환경으로 개선하려고 애를 쓰게 될 것이고 그것이 잘 안될 때 낙심하게 되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환경에 매인 삶을 살게 되고 결국 자기를 만족시켜주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행복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보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은 심판 받을 자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사야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다왕 아하스때 아람 왕과 북쪽 이스라엘 왕이 서로 동맹을 하여 유다를 침공합니다. 그 일 때문에 아하스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다고 합니다. 자기 나라 장래에 대한 걱정 근심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기 나라에 대한 걱정이기보다는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 백성인 자기도 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걱정은 자기에 대한 걱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냅니다. 그리고 4절에서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고 하십니다. 아람이나 북쪽 이스라엘이 아무리 힘을 합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지깽이 같은 힘없는 존재밖에 안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또 7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쳐서 아하스를 파하고 대신 자기들 마음대로 왕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워도 그들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여호와의 손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섭 안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계획세우고 힘을 합하여 추진한다고 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앞의 환경보지 말고, 세상보지 말고, 환경도 세상도 마음대로 주관하고 주무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만일 이것을 믿지 못할 때 어떻게 됩니까?? 9절 뒤에 보면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자꾸 세상의 일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까? 세상이 여호와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되어 가는 일이 우리의 계획대로도 안되고, 우리의 힘으로도 안되고, 오로지 하나님의 손안에서 움직여지고 있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아하스 앞에 가서 담대하게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해서 아하스같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같이 마음이 흔들리고 무거운 마음의 짐을 스스로지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실까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갈 때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또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이런 일이 있게 하는가?'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신자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세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지만 아하스가 거절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징조를 구한들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그런 아하스에게 임마누엘을 예언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새로운 왕이 처녀를 통해서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은 망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새로운 나라가 임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새로운 나라가 주어져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라져 버릴 나라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근심하고 울어야 합니까? 세상 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자세로 살아갑시다. 없어서 고생한들 그 세월은 잠간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복된 세월은 영원합니다. 여러분 어떤 세월을 원합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땅에서도 잘되고 하늘나라에서도 잘되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은 오직 여호와를 알았을 때뿐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바라보며 담대하고 힘있게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피할 곳 (사 8:9-15)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유다 왕인 아하스가 북쪽 이스라엘이 아람과 동맹해서 유다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모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서 '걱정마라 그들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말고 낙심하지 말아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무엇을 계획하고 행동한다고 해도 그 모든 도모는 다 여호와의 손에 있으니까 걱정마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믿음이 있는 척하지만 사실 아하스는 이미 다른 믿을만한 것을 붙들고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16:6절부터 보면 아하스는 이미 이스라엘과 아람의 동맹국을 상대하기 위해서 강대국인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아하스에게는 이미 하나님 말고 다른 믿을만한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앗수르가 더 믿음직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앗수르만 도와준다면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믿음직한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놨는데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하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앗수르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이 어려움을 이길 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아하스가 징조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자기의 계획이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만만의 대비책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우리는 그 말씀을 틀렸다고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씀에 자기를 맡기고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힘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중함보다는 세상에서 힘을 소유하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에 말씀은 맞는데도 그 말씀에 자기를 맡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문제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가 더 급한 문제로 되어 있고, 더 큰 관심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하는가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말씀으로 지시하시느냐에 대해서는 아예 눈감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형편입니다. 마치 아하스같이 이런 일에는 이렇게 대처하고 저런 일에는 저렇게 대처한다는 우리들의 계획이 우리들이 원하는 쪽으로 이미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장하시고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말에도 안심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도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찾아가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세요'라는 말로 권면을 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본인조차도 그런 믿음이 없지만 어쨌든 그런 권유를 했을 때 대개의 반응은 '예 그래야죠'라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속마음에는 다른 해결책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기도하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돈 좀 빌려드릴께요'라는 말이 더 귀에 솔깃하고 힘이 되는 말일 것입니다.

 

 

 

 

아하스도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이스라엘과 아람의 공격 앞에서는 하나님을 힘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인 앗수르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징조를 구하라고 하는 말에도 징조는 필요 없다고 거절한 것입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라도 힘이 될만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굳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부유한 것입니다. 마음이 부유하기 때문에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필요성이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 가지고도 얼마든지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포기할때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동원하시는 방법은 인간이 힘으로 여기는 것을 모두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도 아하스가 의지하는 앗수르로 하여금 도리어 아하스를 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장의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속히 망하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5-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일러 가라사대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유다가 실로아 물을 버렸다고 합니다. 실로아 물이란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한 작은 개울물을 말합니다. 그들은 작은 개울물은 버리고 반대로 차고 넘치는 하수, 즉 앗수르가 위치한 유브라데 강을 더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즉 아하스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은 무시해 버리고 단지 자기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큰 강을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하스의 모습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살면서 세상의 좋은 것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 한적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하스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전을 소홀히 생각했기 때문에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앗수르가 부러웠던 것입니다. 생명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지는 생명을 하찮게 여겨버릴 때 생명없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부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망해버릴 세상을 부러워하고, 멸망에 빠질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하스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앗수르를 불러다가 유다를 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심판과 함께 나타납니다. 심판하심으로 남은 자를 가려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재난이 있고, 경제가 흔들리고, 정국이 위태롭다고 해도 너희는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속에서 하나님을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놀라서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모르는 자들이니까 너희는 그들과 똑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고 합니다. 결국 예수안에서 사는 자들은 세상에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변함없이 예수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예수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불안과 염려와 낙심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절의 뒤에 보면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라"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안에 있느냐 예수밖에 있느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의 도움자가 될 수 없습니다. 19절에 보면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고 합니다. 살아있는 자는 누구고, 죽어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 묻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살아있는 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을 전능하시다고 고백하고, 살아계시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죽어있는 세상을 의지하고, 멸망받을 세상의 힘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죽어있는 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피할 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힘으로 살고자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살아계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언제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너무나 하나님을 모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릅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에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주일에만 겨우 기억하는 말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말씀이 곧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떡을 힘으로 삼는 자들은 죽어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부러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세상의 떡보다도 하찮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세상 것 때문에 낙심하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워도 힘든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모습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한 아기 (사 9:1-7)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러분은 세상에 희망을 두고 삽니까 아니면 전혀 희망을 두지 않고 살아갑니까. 세상에 희망을 두고 산다는것은 세상이 달라지면 나도 뭔가 편하고 좋은 인생을 살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고,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사는 것은 세상은 이제 틀렸으니까 다 포기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세상은 이제 틀렸으니까 다 포기하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을 때 가지는 태도이고, 신자는 다릅니다. 신자는 세상은 희망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을 때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누이 말씀드린 대로 신자가 천국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단지 나중에 죽었을 때 가게 되는 좋은 나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이제 좋은 나라가 될 희망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만드실 새로운 나라에 희망을 두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심으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세상은 희망이 아닙니다. 세상에도 희망을 두고 천국에도 희망을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상상한 천국이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천국은 아닙니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 마음에 맞지 않는 세상에서 조금 잘살면 뭐하고, 조금 못살면 또 뭐합니까? 그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입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마음에 맞지 않는 나라는 없애버리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새로운 나라로 교체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관심은 어디를 향해야 합니까? 당연히 새롭게 교체될 새로운 나라에 관심이 가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관심은 세상에 두고 있으면서도 과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제발 좀 달라져가는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살면 항상 현재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면 자연히 과거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하며 살아가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냐면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현재가 과거보다 안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는 아무리 그리워 해봐야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그리워 하다보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이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면서 '나도 옛날에는 예뻤는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라고 하면서 지금 쭈구렁 할머니가 되어 있는 모습에 서글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옛날을 그리워 해봐야 아무런 쓸데없는 짓입니다. 결국 지금 몸은 늙었지만 아직도 그 마음에는 세상을 잊지 못하는 흔적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욕심은 있는데 몸은 그 욕심을 이루어줄 가망성이 없으니까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늙어도, 병이 들어도 천국이라는 미래가 있습니다. 그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까 여전히 세상 속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기대가 천국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기대할 것이 뭐가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2절에 보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아하스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하스는 현재의 위기에 대해서 이미 자기 스스로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려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고, 자기 지혜로 살려고 하고, 자기를 위해서만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온통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뇌물을 주고받고, 분쟁하고 살인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힘없고 약한 자들은 무시당하고 고통 당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스불론, 납달리, 갈릴리가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외곽지역에서 거주하는 자로서 이스라엘로부터는 소외당하고 이방취급을 받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 영화는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는 것입니다. 빛의 시작이 유다가 아니라 이방취급받는 지역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유다를 부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살아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의 힘을 의지하고, 힘있는 자에게 굽실거리고, 힘있는 자의 도움을 구하면서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그런 나라는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세상의 힘만이 자기들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즐거움과 행복은 한 아기를 통해서 온다고 말씀합니다. 6절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고 말합니다. 한 아기를 통해서 즐거움과 행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빛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스불론, 납달리, 갈릴리에서부터입니다. 이것은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별볼일 없는 곳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스불론이나 납달리나 갈릴리는 하찮은 동네입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희망도 없고, 사람들의 원하는 것을 제공해줄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그곳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없습니다. 즐거움과 행복은 한 아기로 오신 그리스도안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서 천국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내 기대를 성취해 줄 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만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기대를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만이 주님이 이 땅에서 보이신 십자가의 정신대로 남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랄 성공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식에게 바랄 성공도 이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가면서 남을 위해서 살아갈 줄 아는 사람되는 것을 배우는 것을 기뻐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의 성공을 기대하면서 산다면 결국 우리는 신자라고 하면서도 어둠의 세상이 같이 어둠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신자는 어둠에서 빛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빛이란 세상에 기대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둠의 사람들과 같이 어둠으로 살아가지 말고 빛으로 오신 한 아기를 바라보면서 빛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손 (사 9:8-12)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 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지금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주된 내용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의 공격에 대해서 아하스가 자기 나름대로 방비책을 세워 놓고 전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사람이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을 힘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한 아기에 대해서 말했는데, 하나님은 세상 나라는 버리시고 다른 한 나라를 세우시는데 그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세상 나라말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의 왕으로 오시는 분을 아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아이는 아주 특별한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겉모습이 특별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서에서 이 아이를 비유하고 있는 말이 아주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는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름보다는 별명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름이 이렇게 많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별명은 그 사람의 특이한 면을 담아서 그것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로 지어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눈이 큰 사람을 보고 '왕눈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왕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아 그 사람이 눈이 큰가 보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별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고(기묘자), 세상의 앞일을 다 아시는 분이고(모사),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원히 계시는 아버지이고, 평강을 다스리는 평강의 왕이라고 하십니다.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은 이와 같은 능력으로 세상에 오십니다. 그런데 그 능력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굳이 예수님을 한 아기로 표현하고 있느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영원히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계속해서 아기로 계신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 자라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할 때에도 예수님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메시야라고 해도 되는데 왜 굳이 한 아이라고 부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로 태어났으니까 아이라고 부르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4절에 나오는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였다'는 말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한 아이라고 지칭한데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아이의 배후에는 부모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한 아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셨습니다. 절대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보시고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도 배후에 있는 부모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어린애의 특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4절의 미디안의 날입니다.

 

 

 

 

미디안의 날이 무엇입니까? 미디안의 날은 삿7장에 나옵니다. 사사기 7장에는 우리가 너무 잘아는 기드온의 300용사가 나옵니다. 우리들이야 말로는 300용사라고 이름 붙여 부르지만 사실 300명은 그냥 뽑힌 것이지 일당백으로 싸울 수 있는 진짜 힘센 용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즉 그들은 용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7장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있는 군사의 수가 너무 많아서 미디안을 너희에게 붙이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만약 군사가 많은 상태에서 전쟁을 해서 이기게 되면 틀림없이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자기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교만해 질것이니까 숫자를 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사람은 돌아가라고 해서 남은 사람이 만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명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골라낸 것이 물을 핥아먹은 300명입니다. 이들이 무슨 용사입니까? 용사를 뽑으려면 체격도 좋고 무술도 잘하는 사람을 뽑아야지 물을 핥아먹었다는 것이 무슨 용사입니까?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이들 300명이 들고 나간 무기입니다. 이들은 빈항아리와 나팔을 무기로 들고 나갑니다. 빈항아리 속에는 횃불을 감추었습니다. 전혀 말도 안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싸움의 결과는 기드온의 승리입니다. 말도 안된 싸움에서 기드온이 이겼다면 결국 무슨 얘기입니까? 기드온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면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300명을 뽑은 것입니다. 즉 300명은 너희들 힘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이겼다면 그것은 너희의 힘이 아니라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힘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300명을 뽑은 것 같이 예수님을 아이라고 묘사한 것도 예수님의 나라는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기 위함인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바라보고 삽니까? 이 땅의 나라가 없어지고 예수님의 나라가 세상을 점령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립니다. 뭔가 긴장하고, 세상이 망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네가 백날 세상은 망한다고 말해봐라 나는 세상 못버린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장래 일을 말하는 계시의 책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좋은 말을 하고 있는 경전 정도로 여겨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나라는 없애버리시고 오직 한 나라, 예수님의 나라만이 존재하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를 소망으로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11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라고 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는 북쪽 이스라엘이 아람 나라 르신과 동맹을 하고 유다를 침공해 오는 것 때문에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방 나라와 손을 잡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착하고 선한데 이방 사람들은 나쁘니까 손잡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방 나라는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들과 손잡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동조한다는 것이 됩니다. 자기들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결국 멸망으로 끌고갈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 나라와 손을 잡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은 세상을 힘으로 사는 이방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람과 손을 잡음으로서 세상 나라와 똑같이 세상의 힘을 강하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힘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새롭게 세우실 나라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더 힘이 더 좋아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가진 자가 부럽고 나도 그 힘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삽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산다면 여러분에게서는 그 흔적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기보다는 언제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하든, 어떻게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내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언제나 관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신자에게서는 모든 일 속에서 항상 주님을 찾고자 하는 흔적이 보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는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흔적보다는 세상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는 흔적이 더 많이 보여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세상을 잡고 있는 손을 치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잡고 있는 손을 놓으라고 치실 때 뭔가를 깨닫고 세상을 놓고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을 동원해서 하나님이 무너뜨린 것을 다시 세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손잡고 있는 르신을 들어서 그들을 쳐버립니다. 즉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대를 모두 버리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잡고 있는 손을 놓기를 주저합니다. 세상의 손을 놓으면 살 수 없을 것같은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잘라버리시는 것입니다. 남편을 통해서 치기도 하고, 부모를 통해서 치기도 하고, 자식을 통해서 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손만 붙잡고 살아가라고 내가 의지하는 것들을 내 손에서 끊어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하여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배후에서 열심히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자 되도록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계속해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없어지고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믿습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달라졌습니까? 달라졌다면 달라진 그 흔적은 무엇입니까? 돈버는 일에만 매달리던 내가 조금씩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으로 되어갑니까? 전에는 내 마음대로 내 좋은대로 살면 최고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되어갑니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낙심하고 그 일의 해결을 위해서만 날뛰던 내가 이런 일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모든 결과가 하나님께 달렸음을 고백하는 사람으로 되어갑니까? 이것이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자의 흔적입니다.

 

 

 

 

우리가 이런 신자가 되도록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 편에 서고자 애쓰는 삶이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천국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면 그런 사람답게 뭔가 다른 삶이 있어야 합니다.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조금씩 달라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달라진 것이 없이 그게 그거라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을 없어져 버릴 세상에서 잘되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할 예수님의 나라에서 잘되기를 소망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을 잡고 날마다 주님을 소망하는 자답게 그 흔적이 보여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노 (사 9:13-21)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대저 악행은 불 태우는 것 같으니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서 연기로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백성은 불에 타는 섶나무와 같을 것이라 사람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이사야 9장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멸망을 받아야 할 세상이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아기의 나라, 즉 예수님의 나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세상의 죄를 해결하고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희망은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환영해야 할 세상은 전혀 그렇지를 못합니다. 구원자로 환영을 해야 할 세상이, 우리를 고통에서 기쁨으로 인도해 주실 분을 환영을 해야 할 세상이, 오히려 그분을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상합니다. 왜 예수님을 싫어할까요? 왜 예수님을 거부할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싫어하고 못박아 죽인 사람들은 옛날 로마군인이고, 유대인들이지 지금 우리들은 아니다. 우린 지금 예수님을 잘믿고 있다.' 이것이 현대 신앙인들의 대부분의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 속에 살기 때문에 - 자신은 예수님을 잘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자는 결코 될 수 없다는 생각 -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죄인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서 바라보게 되고, 때문에 그 사람에게 십자가는 예수님만의 십자가이지 나의 십자가는 아니며 예수님도 자신의 신앙을 칭찬해주고 그 대가로 복이나 주는 그런 예수님으로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고방식인 것을 아십니까? 제가하고 싶은 말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 아니 훨씬 이전에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고방식이나 지금 우리들의 사고방식이나 한치의 다를 바가 없이 동일합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납니다. 아담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봐야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아담의 형상속에서 예수님을 믿을 뿐입니다.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평생을 같은 모습의 죄를 보이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데 '너는 예수를 죽였지만 나는 예수를 죽이지 않는 믿음이 있는 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와 문화와 환경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의 동일한 모습입니다.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죄인된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인간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버리라고 하셨다고 해서 '예'하고 순순히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착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즉 인간이 예수님만 소망하고 사는 인간으로 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신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설교의 마지막에 강조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산다면 그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라지는 삶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흔적은 무엇이고 달라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신자들이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 흔적, 즉 달라진 삶을 행동의 변화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의 흔적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교회 일에 게으르던 사람이 교회 일에 열심을 낸다거나, 십일조를 안하던 사람이 십일조를 하게 되었다거나, 기도를 안하던 사람이 기도를 한다거나, 또는 조그만 일에도 화를 잘내던 사람이 화를 잘 참게 되었다는, 이런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동 자체가 변화의 증거가 아니라 그런 행동들은 달라졌기 때문에 자연히 보여질 수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흔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흔적 외에는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의 흔적은 오직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흔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나는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말만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의 흔적은 '나는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불쌍한 죄인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를 못박은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은 망하고 예수님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 신자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힘을 다 버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나는 목사다'는 힘, '나는 장로다'는 힘, '나는 권사다'는 힘, '나는 돈이 있다'는 힘, '나는 교회를 위해서 이런일 저런일 했다'는 힘, 이런 힘들이 보여지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다 배설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알고 나자 자연히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만이 있게 될 뿐입니다. 이런 신자가 진짜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자로 달라지는 것까지도 나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그렇게 되어졌을 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자기의 무능을 알아야 왜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왜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의 나라만이 유일한 해결책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아기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이유는 10절을 보면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교만이고 완악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희들 힘을 믿지 말고 너희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고 있는 나 여호와를 의지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을 치시면, 그들은 그 일을 통해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우리에게 힘이 있다. 이까짓 실패야 우리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재물을 의지하고 있는 교만을 치기 위해서 재물을 잃게 하시면 '까짓것 내가 아직 젊고 건강한데 이정도 가지고 낙심할 수 없지. 나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 이렇게 끝까지 자기에게 있는 힘과 가능성을 버리지 않는 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믿는 아람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고 블레셋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삼켜 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말씀은 12절 뒤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12절에 한번 나오는 것이 아니라 17절과 21절에서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노는 쉬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손은 여전히 펴져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옛날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았던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와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은 악한 세상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열심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지 열심히 교회 다니고, 구제도하고, 선교, 전도도 열심히 하는 교회는 진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이스라엘은 그 당시의 교회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교회라고 해서, 뭔가 교회다운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은석교회가, 또한 우리 모두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든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옛날 이스라엘과 같은 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노가 계속되어진다는 것은 죄가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진노를 그치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죄를 그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날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이 죄를 그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는 여전히 인간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오늘 우리들에게서 여전히 보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의 힘을 믿는 교만, 완악한 마음이 오늘 우리들에게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 해결책으로 예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라고 합니다. 머리는 장로와 존귀한 자를 비유하고, 꼬리는 선지자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장로가 높고 선지자가 낮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꼬리는 머리의 뒤를 따라갑니다. 결국 어떤 모습이냐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말하는 사람인데 계시를 그대로 말하지 않고 장로의 눈치를 보면서 장로의 원하는 대로 말하며 따라가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가 싫어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장로가 좋아할 말만을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말입니다. 자기 생계유지를 위해서, 장로에게 잘못 보여서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을 염려해서 장로들에게 부딪히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장로는 장로대로 목사가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그것으로 시비를 겁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와 장로가 아닌 일반 성도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까 괜찮은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16절에 보면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같이 망합니다. 잘못 가르치는 것을 듣고 '옳다 옳다 맞다 맞다'하면서 박수치고 좋아하며 따라 다니는 사람들까지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를 통해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예레미야 5:30,31절을 보면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계시가 아닌 것을 계시라고 말하고 있고, 제사장은 제사장직을 권력으로 삼아서 백성을 지배하려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백성들이 그것을 좋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함께 하나님의 계시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바른 계시를 싫어합니다. 옳은 소리를 하고, 참된 진리를 말해주면 그것을 싫어하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참된 계시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말한 선지자치고 백성들의 환영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세상의 소망을 끊게 하는 말씀을 듣기 싫어합니다. 귀를 막아 버리고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가 잘못 가르쳐서 그렇게 됐는데 그러면 평신도는 억울하지 않습니까?' 라고 합니다. 이런 분에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다 그 밥에 그 나물입니다' 성도가 좋아하니까 목사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라는 소리보다, 칭찬을 해주고 복을 빌어주는 말을 더 반겼던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잘못됨을 알면서도 그것을 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은 '교회는 사랑이 있어야 돼'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비판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비판이 아니라 드러난 잘못을 지적할 뿐입니다. 15,16절도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그 당시의 교회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잘못을 그대로 말할 뿐인데 그것을 비판이라 하고 싫어하는 것은 결국 현대의 잘못에 함께 동조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싸움이 없어야 하고 서로 사랑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물론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형제된 사람들이, 혹 육에 속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 때문에 다툼이 발생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십자가 아닌 것을 물리치기 위해서 발생하는 싸움은 분명히 피해서는 안됩니다. 싸워서는 안되고, 다툼이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 때문에 잘못도 그냥 넘기고 입을 다무는 것은 같이 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는 같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 진노에서 살아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이 바로 1-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한 아기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의 나라만 영원히 남고 나머지는 모두 진노 아래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해결책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주님의 희생이 아니면 죽었어야 할 죄인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덕분에 살아있는 사람이 뭐 잘났다고 자랑하고 떠들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은 십자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 손해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모두 자기 인생을 위해서 살아가고 자기인생에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말씀도 뒤로 제쳐버립니다. 하나님이 힘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는, 목이 곧을 대로 곧아져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진노 아래서 사는 자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고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지 내 계획이나 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겸손히 알고 주님만 바라보는 자가 삽니다. 우리를 살리는 주님의 십자가에 다스려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불의함 (사 10:1-4)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에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포로 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입장, 또는 자기 시각, 자기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의 판단을 자기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린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같은 것을 두고서 사람들마다 얘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요즘 한참 시끄러운 정치나 경제문제를 두고 얘기해 봅시다. 요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세상 되어가는 꼴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거의다 지극히 잘못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가 잘못됐다고 말은 하면서도 개중에는 여당이 잘못했다는 사람이 있고 야당이 잘못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입니까? 사실은 다 각자의 기준과 시각에서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사람이 같이 식사를 한다고 합시다. 한사람은 맛이 짜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싱겁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음식은 짠것입니까? 아니면 싱거운 것입니까? 짤수도 있고 싱거울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자기의 입맛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짠데 다른 사람이 싱겁다고 할 때 싱겁다고 한 그 사람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은 '건강에도 안좋은데 좀 싱겁게 먹어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자기 입맛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겐 짠데 싱겁다고 말한 그 사람이 잘못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결국 맛이 싱거운 사람에게는 짜다고 말하는 그 사람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부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 한 죄수가 '무슨 죄로 들어왔느냐?'고 묻자 '나는 죄가 없다.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죄수는 '이 교도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치고 죄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을 합니다. 모두가 할말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입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죄를 지은 것에도 다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존파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그때 자기들이 저지른 모든 일들의 책임을 공평하지 못한 세상 탓으로 돌렸습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또 뭐라고 합니까? 10.26이나 광주사태 등 모든 것을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일념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야 그들이 한 일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절대 잘못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의 잘잘못을 따지려고 한다면 결국 스스로 오류와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오류냐면 다수와 소수의 차이입니다. 약자와 강자의 차이입니다. 다수, 또는 강자는 다 옳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소수, 약자는 옳지 않고 잘못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장으로도, 우리의 기준으로도, 다수라는 숫자의 힘을 가지고도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의 방식은 다수의 의견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다수가 힘이 됩니다. 다수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 당의 국회의원 숫자를 늘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는 옳고 공산주의는 나쁘다고 말하지만 사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얼마든지 독재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는 정치 방식을 이용하기 때문에 자기편을 들어주는 숫자만 많으면 그것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옳고 그른 것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기준으로 사는 인간이 어떻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돈많은 사람들이 비싼 물건을 마구 사는 것을 보고는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 욕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부자가 부자를 욕합니까?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자기 하고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부자들이 하는 모습들을 욕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돈쓰면서 사는 것을 가지고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대로 '내 돈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 '당신들이 피서 가고 놀 때 나는 땀흘리며 일해서 이만한 돈 벌었다 그 돈을 내 마음대로 쓴다는 데 웬 참견이냐'는 말에는 사실 할말없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돈버는데 보태준 것 없잖습니까? 사실 부자들 욕하는 그런 사람들도 돈이 없어서 못쓰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들과 똑같이 하면서 살 것입니다. 결국 나는 하지 못하는 것을 남들은 마음대로 하면서 산다는 것이 마음에 안드는 것이지 돈없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세상의 잘잘못은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는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잘못되어 있고 나쁘지만 그 기준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성을 가지고도 판단할 수 없고, 우리의 양심을 가지고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잘못을 기준으로 삼아 가지고 세상을 멸망시킨다면 멸망당하는 사람들은 아마 많은 항의를 할 것입니다. 자기 입장을 내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금 하나님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세상이 잘못됐다는 말은 똑같이 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자가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과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나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 세상이 잘못됐다는 말은 동일하게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이 잘못됐다는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은 분명히 세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세상을 잘못된 세상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가지고 세상이 잘못됐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세상의 잘못된 모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기준을 가지고, 내 기분에 의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볼 때 세상이 망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9장에 보면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면 다른 세상의 나라는 다 사라지고 맙니다. 같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라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이니까 무조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세상 나라는 망해야 합니까? 그 이유가 9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대로 세상 나라는 자기 힘을 믿는 교만으로 살아갑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고 온통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자기를 위해서 여호와의 말씀까지도 거짓으로 가르치고, 욕심 때문에 형제가 서로 먹고 먹히는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어떻게든 세상에서 잘살아 보겠다고 하나님도 관심 없고, 말씀도 관심 없고, 오직 돈에 정신 팔려서 살아가는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돈에 정신 팔려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씀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세상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천국 가는데 필요하고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역시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의 잘못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절히 원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잘못된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있을진저"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불의한 법령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입니다. 불의한 법령이란 어떤 법을 말하느냐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즘 노동자들은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한 노동법을 악법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한 대로 불의한 법령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전국의 노동자들이 데모하고 파업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법을 통과한 정부는 어떻습니까? 노동법을 악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정부에서는 노동법을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한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정부 입장에서는 노동법이 국가를 위한 선한 법이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악법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입니까?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서로 자기 입장에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동법이 어떤 법인지 잘모릅니다. 다만 정리해고제라는 것은 들었습니다. 회사의 경제적인 사정이 어려울 때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사원을 마음대로 줄일 수 있다는 법이라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회사의 경쟁력을 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불리한 법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회사를 위해서는 필요한 법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옳다 그르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는 불의라는 것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해로우면 다 불의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불리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득이 될 수도 있는데 나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무조건 불의한 것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불의한 것으로 보십니까? 1절을 보면 불의한 법령 때문에 누군가가 억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가련한 백성, 고아 과부들입니다. 한마디로 어떤 법령 때문에 돈없고, 힘없고, 약한 자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백성들은 세상에 가진 것이 없어서 든든한 힘이 없어서 남이 누르는 대로 당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갖 설움을 다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억울함을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의는 한마디로 약자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에 여인의 사치에 대해서 얘기할 때 사치라는 것은 단지 돈을 많이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입장, 자기 기준이 있는데 도대체 얼마를 써야 사치가 되는지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할 수 있습니까? 때문에 사치의 판단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약자입니다.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가련한 백성들이 있게 하셨습니다. 갑자기 남편이 죽어버리고, 부모가 죽어버립니다. 한순간에 세상의 힘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에게 억눌림을 당해도 대신 나서서 힘이 되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무시를 당하고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 편에 서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후견자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고엘사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약자를 실제로 고아나 과부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나님은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된 사람들 편에 서서 일하신다는 얘기가 되어버립니다. 지금은 과부라고 해도 돈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진실된 약자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약자를 있게 하신 것은 그 약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모습을 깨우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학대받고, 눌림 받고, 고통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환경이 바뀌고 형편이 나아지면 자신의 옛모습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가련한 백성이 있게 합니다. 그 의도는 가련한 백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예전에는 자신들도 저런 가련한 모습이었는데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가련한 백성을 바라보면서 저 가련한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절대 자기보다 가련하고 약하다고 해서 무시하고 업신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내 백성을 구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보다 힘없는 자를 무시한다는 것은 현재 자신이 누구의 은혜로 살아가는가를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불의로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라서 불의한 법령이라는 것도 약자가 무시당하고, 손해받고, 눌림 당하게 되는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약자를 무시하고 강자에게 아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불의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시고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내 백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자신이 약자임을 아는 자입니다. 말로만 '나는 약자다'라고 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들 주위에 여러분보다 세상적으로 못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약자를 있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서 네가 진심으로 약자임을 아는지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자기가 약자임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자기가 약자임을 알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 내 힘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이런 신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아 가지고 약자를 무시하거나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보다 여러모로 못나고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이 있게 하신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여러분에게 낮아지는 마음을 가르쳐줄 스승입니다. 약자를 무시하는 것, 이것이 불의함입니다. 이 불의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불의한 법령은 국가 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을 교회 안에서 만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교인들이 모여서 해외여행을 하기로 하고 돈을 모으기로 했다고 합시다. 거기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은 돈없는 약자들입니다. 그것이 불의한 법령이 되는 것입니다. 약자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가 약자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십니까?

 

 

 

 

약자를 무시하는 자는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약자를 무시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도 약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자기의 약한 모습을 보면서 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돈이 있어도 그 돈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않을 것이고, 또 돈이 없어도 이미 하나님이 든든한 힘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이 악한 것은 약자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 악함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자신의 약함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 (사 10:5-19)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하여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를 옮겼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 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 소멸되며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감 같을 것이라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

 

 

 


타락전의 사람과 타락후의 사람의 차이점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느냐, 아니면 자기를 중심으로 사느냐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타락후의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중심적인 삶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입하셔서 일하시는데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이란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인생에서 나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 욕심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인간들이 스스로 신자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자기 인생은 포기하지 않은 채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거의가 자기를 포기하지 하지 않은 믿음입니다. 자기를 지키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숭배하고 있을 뿐이지 결코 성경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들의 삶을 지키고 좀더 편해지기 위해서 수많은 것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종교입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자기들의 삶을 위해서 만든 종교입니다. 단지 편안한 삶을 위해서, 또는 번민이 없고 마음에 평안이 있는 삶을 위해서, 착하고 도덕적인 차원 높은 삶을 위해서 인간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섬기므로 자기들의 삶의 행복을 보장받고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자기포기라는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자기포기란 자기를 위한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신자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물론 신자로서 우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를 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나를 잘되는 쪽으로 도와주고 어려움에서 지켜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자이십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혀 다르다는데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흔히 신자들이 하나님께 바라는 도우심은 무엇입니까? 내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어려운 일이 잘 해결되도록 하시는 것, 내가 원하는 쪽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시는 것, 이것이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원하는 도우심이 아닙니까? 여러분도 이런 하나님을 애타게 찾고 기다렸던 경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지난 시간의 말씀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의 불의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불의함이란 우리가 생각하듯이 강도질하고 도둑질하고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말하지 않고 약자를 무시하고 핍박하는 것을 가지고 불의라고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약자, 즉 가난하고 고아, 과부같이 누구하나 돌봐주고 힘이 되어줄 사람이 없는 존재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이 불의가 되는 이유는, 약자를 핍박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약자임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자라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무능한 인간'임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요, 어렵게 산다면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나에게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약자로 세상을 사는 신자입니다. 때문에 약자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를 말합니다. 나는 무능한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자가 약자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안에 있는 자들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이라고 불렀고, 신약에서는 '새이스라엘'또는 '교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이스라엘로, 교회로 부르셨다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약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지 내 힘으로 얻은 것들이 아니다' 이렇게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지 절대로 자기의 힘과 노력을 앞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보다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육신적으로 약자를 남겨놓으심으로 과연 누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약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약자임을 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무시하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불의함에 빠졌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세상의 힘을 더 앞세웁니다. 세상의 힘으로 자기들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5절을 보면 "화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고 합니다. 앗수르를 막대기 삼아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까 맛좀봐라고 때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도 몰랐던 불의한 자였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 도우심을 위해서 앗수르를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앗수르의 배후에는 누가 계십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배후에서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치도록 일하십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앗수르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것이 당연한데 오히려 치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불의함에 빠져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이것을 오늘 현대식으로 바꾸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여러분을 괴롭히고, 여러분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사기도 치고, 거짓말로 모략하고, 나는 잘해주는데도 오히려 공격했던 사람을 만나신 적 없습니까?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여기서 자기 중심인 사람은 자기가 입은 피해를 참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원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저 원수를 어떻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으로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포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고 피해를 입은 것을 참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일속에서도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원수 같은 그 사람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저 사람을 들어서 나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누가 참된 신자인가가 가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들어서 여러분을 시험하고 연단하면서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앗수르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친한 친구일수도 있고, 친척일수도 있고, 남편일수도 있고, 아내일수도 있고, 자식일수도 있습니다.

 

 

 

 

항상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의 배후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왜 저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인가?' 이렇게만 생각하면 모든 관심은 나를 괴롭히는 자가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자에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내 안에서는 미움이 일어나면서 '두고봐라 내가 꼭 갚아주고 말테다'는 분노를 마음에 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미움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서로가 잘해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일년 365일을 서로가 잘해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속을 썩이면 아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어이구 내가 눈이 삐었지 어쩌다 저런 인간하고 결혼해가지고 내 인생이 이 모양이 되었나.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으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까? 남편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저런 남편을 만나게 하신 것도 다 무슨 뜻이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남편이 힘이 아니니까 남편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라고 그렇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항상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앗수르의 역할을 하는 자가 반드시 등장하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도 하시고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앗수르를 살펴봅시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치고 이스라엘을 진흙같이 짓밟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배후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앗수르는 자기들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보다 더 세다'라고 교만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15절을 보면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함과 일반이로다"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무를 찍을 때는 분명히 도끼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도끼를 들고 나무를 찍는 자가 누구입니다. 도끼 주인입니다. 그런데 도끼가 자기를 들고 있는 주인에게 자기 힘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앗수르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앗수르를 들고 있는데 앗수르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앗수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를 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조금만 잘한 일이 있으면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하고 사랑을 안다고 하는 우리들이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안다면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체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있는 도끼이며 톱에 불과합니다. 나를 붙들고 있고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나를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렵게 될 수 있고, 때로는 평안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린 단지 평안하든 어렵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은혜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염려와 걱정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는데 우리는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만 일이 잘못되면 불안하고 초조함이 떠나지 않게 되고, 근심과 걱정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앗수르가 의지한 것은 삼림과 기름진 밭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소멸해 버리시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심판때 남을 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던 참된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심판때에 남은 자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불안해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일이라면 우리가 염려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염려, 불안, 낙심은 나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라면 어떤 일속에서도 불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마지막때 남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시험하시고 연단 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다가 마지막 죽을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죽어야 합니다. 그 삶을 위해서 매일매일 삶속에서 여러분의 배후에서 일하시며 여러분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배우면서 세상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래야 뭔가 일이 잘됐을 때도 도끼같이 톱같이 자기를 든 자를 향해서 자기를 자랑하는 어처구니없는 앗수르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남은 자 (사 10:20-34)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내가 불구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 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앗수르 왕이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치중을 머무르고 영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 사람은 도망하도다 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찌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찌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맛메나 사람은 피난하며 게빔 거민은 도망하도다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철로 그 빽빽한 삼림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작벌을 당하리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렵다는 하소연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한가지 묻겠습니다. 말씀으로 사는 것이 왜 힘든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세상일은 바쁜데 교회 일도 해야 하고 예배에도 빠지지 않아야 하는 것 때문에 힘든 것은 아닙니까?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화가 나도 참아야 하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해야 하고, 온화한 성품을 보여야 하는 것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겉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문제이지 세상 사람들의 관계에서 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느냐에 아주 민감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듣든 신경 쓰지 말고 살아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야 저 사람은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니고 성격이 참 좋아. 진짜 신자 같애' 이런 말을 들어야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입니까? 많은 신자들이 이런 것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억지로 온화해지려고 하고, 화를 안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성품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의도적으로 신앙을 만들어 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것이 짐이 되고 나아가서는 이것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는 늘상 드렸던 말씀이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신앙생활은 주일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 그 자체가 신앙생활이 아니며 온화한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주어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결국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이 고작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예배와 기도, 성경 보는 것을 무시하고 등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보게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은혜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발견하고, 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사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우리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안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늘에서 큰상을 받아보겠다고 노력과 시간과 돈을 쏟아 붇는 신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버리기 힘든 유혹가운데 하나가 나도 뭔가를 해야 안되냐는 생각입니다. 뭔가 안하고 열심을 내지 않고 있으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 같고, 신앙이 나태한 것 같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이 아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조급하고 기다림이라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시기만 바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신앙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조급합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고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대로 빨리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급해지게 되고 참고 기다리는 모습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에서 힘든 것은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흔히 하는 말은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을 듣는 신자들이 그 말 때문에 힘을 얻고 걱정을 버리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은 맞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언제 도우시느냐는 것입니다. '언제 도우시느냐'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기다린다는 말을 할 때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일 것입니다. 재림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만큼 힘들고 갈등되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언제'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약이 없습니다. 기약도 없는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기다린다고 할 때 필히 있어야 하는 것은 '언제까지'라는 것입니다. 언제라는 것이 있어야 그래도 그 날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재미도 있고 힘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언제라는 기약도 없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비록 신자된 우리로서는 재림을 쉽게 말하지만 사실은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기약도 없이 그냥 온다는 약속만 믿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기약도 없는 기다림은 마음에 두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치우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믿음을 한마디로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다리든 믿음은 기다림이 없이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 것입니다.

 

 

 

 

신자들이 버려야 할 것은 뭐든 지금 당장 이루어지고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신자가 기다리는 신앙이 없으면 꼭 자기의 힘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약속 받은 아브라함은 세월이 지나도 아들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아브라함은 약속도 인간의 조건이 맞아야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때 가능하지 아들을 낳을 수 없을 정도의 나이가 되버리면 하나님의 약속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자기의 힘으로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말씀을 듣고는 120년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홍수의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말씀만 의지하고 묵묵히,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건 말건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오늘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참고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힘이 듭니까? 제가 드릴 말씀은 '참고 기다립시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린 단지 참고 기다리면서 주어지는 환경과 여건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설령 어려움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된다고 해도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누군가로부터 핍박을 받고 욕을 먹습니까? 참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세상을 심판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들여보내시는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잠시 잠간의 세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지를 못하고 세상것 때문에 울고 웃고 인상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참고 기다립시다. 분명히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일하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러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앞의 내용을 다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을 해서 아하스를 공격합니다. 아하스는 이일 때문에 번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다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하나님을 믿고 걱정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 믿고 기다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힘을 더 의지합니다. 그래서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부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이사야가 징조를 구하라는 것도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힘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 있었고 그 불신앙이 그들의 삶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힘을 최고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보다 힘없는 약자를 괴롭히면서 힘으로 세상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유다를 앗수르를 들어서 심판하시고, 도끼를 든 자 앞에서 자기 힘을 자랑하는 앗수르까지 심판해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양쪽을 다 치시는 그 심판 앞에서 남은 자만 돌아온다고 말씀합니다. 21절, 22절에 보면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리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고 합니다. 심판 속에서 남은 자만 돌아옵니다. 그 남은 자란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남은 자는 하나님이 하실 일만 바라보고 기다린 사람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조급해하지 않고, 어렵다고 해서 기약 없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겠지'하면서 묵묵히 참고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남은 자가 누구냐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어려움이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24절부터 보면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때리고 몽둥이로 친다고 해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자는 '언젠가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겠지'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을 괴롭힌 미디안을 하나님께서 평민이었던 기드온을 들어서 심판하신 일이 나옵니다. 또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려먹었던 애굽은 홍해에서 몰살시켰습니다. 즉 하나님은 '내가 심판할 것이다'는 사실을 옛사건을 들어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미디안을 심판하고 애굽을 심판한 것같이 앗수르도 내가 심판한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고 내가 심판할 때만 기다려라'는 의미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려라는 것입니까? 언제까지 고생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다려라고만 하실 뿐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며 기다리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이것을 힘들어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 당장 힘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앞의 일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남은 자는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며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참고 기다리며 사십시오.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사십시오. 그 자가 바로 마지막때 남은 자입니다.

 

 

 

 

 

이새의 줄기 (사 11:1-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드러내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왔다면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앞에서 자신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겠다는 마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들의 생각과 항상 일치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언제나 우리들의 상식과 일치되는 것들이었는데 막상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생각이나 상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갈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머리에 박혀 있던 하나님에 대한 기존의 사고방식이 무너져야 하는 것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게 되는 이유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상식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단정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서로 다른 이유는 관심의 문제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세상의 문제에는 하나님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부터 기존의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상식과 전혀 다릅니다. 보통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상식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들의 세상 문제에 관심을 두고 계시면서 우리가 어려울 때는 와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입장에서의 상식이지 하나님 편에서의 상식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계획을 위해서 창조되어 졌습니다. 때문에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서 자기의 입장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더러 피조물인 자기를 위해서 존재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계획에 따라 쓰여지는 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많은 신자들은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하면서도 창조주더러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들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거부하게 되고 결국 여전히 자기의 뜻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종은 복종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계시된 참된 하나님의 뜻은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복종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굽히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이 말씀을 듣기 때문에 제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세상에서의 삶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앞에 나의 뜻을 굽히겠다는 생각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계획은 세상의 더러운 것은 다 멸하시고 깨끗한 것만 남기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때에 남을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깨끗하다는 인정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보실 때 깨끗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깨끗한 사람이란 양심 바르고, 뇌물 안받고, 거짓말 안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는, 보통 이런 사람들을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깨끗하다는 것은 더러운 세상의 모습과 구별돼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 되고 더러운 것이어서 심판을 면할 수 없다면, 마지막 때 남을 자는 세상의 모습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마지막 때 남을 자는 어떤 자인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깨끗한 것만 남기신다는 것은, 더러운 것은 다 쓸어버리고 그 중에서 깨끗한 것만을 골라서 남기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깨끗한 것은 없습니다. 죄가운데서 모든 것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이 남겨놓으실만한 깨끗한 것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때 남겨놓으실 깨끗한 것은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병든 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이 나무가 뿌리는 성한데 가지가 병이 들었다면 가지만 잘라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뿌리까지 병이 들어서 도저히 고치지 못할 상태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든 나무는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깨끗한 나무를 심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뿌리까지 썩어버린 상태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뿌리째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나무, 깨끗한 나무를 심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뽑힌 자리에 새롭게 심겨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한 인물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지막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채워질 성도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지막때 남을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에 합당한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새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로서 성경에서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서 뭔가 위대한 일을 했다는 기사도 없습니다. 유명한 것으로 치자면 이새보다는 다윗이 더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이새의 줄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새의 줄기에서 한싹이 난다는 이야기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면 '이새의 줄기'라는 말보다는 '다윗의 줄기'라고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새의 줄기이든, 다윗의 자손이든 이 의미들이 혈통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약속을 따라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새의 줄기라는 것도 이새의 계보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새의 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이새 당시의 상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새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다윗은 아주 어린아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새나 다윗이나 세상적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다윗하면 생각나는 것이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골리앗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에 왕다운 왕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서 꼼짝못하는 사울은 결국 왕다운 왕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골리앗 앞에 다윗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세상 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불신앙을 드러내십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 때문에 힘을 얻어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별볼일 없는 다윗을 택하셔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이새의 줄기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메시야 나라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힘으로 다스려지고 힘있는 자가 우대 받고, 힘이 없는 자는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이런 세상은 마지막때 뽑히고 말 것입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서 세상 방식 그대로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고 힘을 원하고 힘을 가지기 위해서 힘썼던 교회 아닌 교회도 다 뽑아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아궁이에 던져 넣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뽑힌 자리에 새롭게 심겨질 나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의 나라입니다.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 성령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변변치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의 나라입니다.

 

 

 

 

마지막 때 남을 자는 누구입니까?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만 경외하며 살았던 신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과 일치하는 신자입니다. 골리앗 같은 세상의 힘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그 힘의 지배를 받고 산다고 할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자는 힘에 굴복치 않고 오직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감으로 세상에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힘이 없음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나에게는 뭐가 없다고 해서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마지막때 세상을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롭게 심겨질 나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 힘이 약함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힘을 믿고 살았던 모든 사람은 다 뽑히고, 날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살았던 사람들이 남은 자로서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메시야 나라 (사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러분 가운데 천국에 가기 싫어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세상을 포기하라는 것은 싫지만, 살아서는 세상을 보장받고 죽어서는 천국을 보장받는다면 그것 같이 금상첨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금상첨화와 같은 천국을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천국과 지옥을 애써 부인하려고 할뿐이지 만약 천국이 있다면 나도 그 천국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때로는 착한 일을 하려고 힘쓰기도 합니다. 착한 사람은 죽어서도 좋은데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이기 때문에 혹시 있을 수도 있는 천국을 대비하기 위해서 나쁜 일은 안하려고 하고,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야 천국 간다'는 말을 싫어합니다. 착하게 살면 천국 가는 것이지 왜 꼭 예수를 믿어야 천국 가느냐는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별 수 없더라. 거짓말하고, 싸움이나 하고, 예수 안믿는 사람보다 더 악하더라'는 말로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안믿어도 착하게 살면 된다는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착하게 산다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천국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 힘으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예수를 믿어야 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은 착한 사람만 사는 천국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착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의지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땅에는 스스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물론 그들은 착하다는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양심 바르게 사는 것을 가지고 착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착한 모습은 죄짓기 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즉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죄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는 착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게 어떤 가능성도 두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천국에 가고 싶다면 '왜 천국에 가고 싶으신 것입니까?' "목사님, 천국은 좋은 곳이니까 가고 싶은 것 아닙니까?" 이런 대답은 안됩니다. 그냥 좋은 곳이니까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살아서는 세상을 보장받고, 죽어서는 천국을 보장받겠다는 그런 생각에서 교회를 나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교회를 나오는 나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해도 뭔가를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왜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동안 천국은 죽어서 가는 좋은 나라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예수를 믿어왔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귀한 나라가 아니라 교회에 다녀준 대가로 가는 나라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왜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라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한마디로 "천국은 죄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의 대답이 시시하게 들립니까? 목사의 입에서는 뭔가 거창한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다 아는 이야기라서 실망했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천국은 죄가 없는 나라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나름대로 수많은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 많은 세월을 살아오시면서 여러분은 세상사는 것이 쉽고 편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도 세상사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고통과 눈물과 어려움 속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눈물과 고통은 돈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식 때문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인간관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고통과 눈물의 세월을 살게된 원인을 항상 세상에 두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나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고통을 겪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닙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눈물은 남의 탓이 아니고 세상 탓이 아니고 바로 여러분 자신의 탓입니다. 내 탓이라는 얘기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준 고통과 눈물이 아니라 내 죄 때문에 스스로 안고 살아왔던 세월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내 탓인지 아십니까?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든 그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면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 걱정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염려 걱정은 내가 어떤 일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욕한다고 합시다. 내가 욕을 먹을 때 그것이 마음에 고통이 되는 것은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에게 뭔가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애매하게 욕먹는 것을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욕을 한다고 해도 내가 나를 보지 않고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고통이 될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남편 때문에 속상하고, 자식 때문에 고통받고, 돈 때문에 친구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눈물과 고통 속에서 살게되는 이유는 그 누구 때문도 아니고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는 죄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이러한 죄가 없습니다. 천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안에서 한몸된 지체를 사랑하며 사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고통과 눈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가 없는 천국이 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제가 저를 포기하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며 사는 죄가 너무 커서 그 때문에 고통이 떠나지 않기 때문에 죄가 없는 천국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죄가 없습니다. 경쟁도 없고 시기도 없는 나라입니다. 사람이 경쟁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피곤합니다. 남이 잘됐을 때 내 마음은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은데, 마음 한구석에는 나보다 더 나아 보이는 상대방을 향해서 시기가 일어나고 질투가 일어나고,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버려지지 않는 자신이 미워질 때, 바로 그러한 시기 질투가 없는 천국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없는 천국은 어떤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이 그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두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의 이야기가 실제로 천국의 모습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천국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천국은 이렇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지금까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오기도 했던 이야기입니다.

 

 

 

 

본문이 논란의 대상이 된 이유는 천국에도 동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때문입니다. 본문을 상징적인 표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천국에는 동물이 없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고, 실제 천국의 모습을 말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국에도 동물은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은 동, 식물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동, 식물은 없이 그냥 부활한 신자들만 있겠습니까? 사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동물이 있든 없든 나중에 천국에 가서 보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싸운다면 결국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편한 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본문이 그것을 언급하고 있으니까 성경을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실제 천국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는 동물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이들은 본문을 천국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싸우는 죄악된 세상에 이새의 줄기로 오신 예수님이 일하신 결과로 사람들의 싸우는 성품이 서로 용납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성품으로 달라진 천국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의 달라진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온 교회가 미움이 없이 시기도 없이 경쟁도 없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천국에는 동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무엇을 근거로 천국에는 동물이 없다고 합니까?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마지막 심판때를 말하면서, 그때에는 하늘도 땅도 불에 타서 녹아지고 사라진다고 말합니다(벧후 3:10,12, 마 24:29, 히 1:10-12, 12:26). 이렇듯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없어지기 때문에 땅위에 있던 모든 동식물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동물의 부활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은 동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본문도 천국의 실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신자가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예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서 강한 것과 약한 것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본문은 천국의 실제 모습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즉 천국도 동물이 있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사 65:25의 구절을 그 증거로 말합니다. 사 65:17절에서는 분명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새 나라의 모습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천국은 동물도 식물도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또 로마서 8:19절을 보면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인간의 죄로 인해서 모든 피조물도 악해졌는데 피조물조차 그 죄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새나라를 창조하시면서 악한 세상을 다 버리시고 새나라를 창조하실 때 모든 동물도 다시 창조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천국도 동물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 편한 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조금 다르게 봐야 합니다. 본문은 새하늘과 새땅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이새의 줄기에서 난 분이 일하신 결과로 이루어지는 나라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힘을 의지하고 힘으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경쟁하며 서로 싸우는 나라입니다. 힘의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남은 자는 누구입니까?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분의 모습과 같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만 의지하며 산 자들입니다. 그 남은 자가 모인 나라의 모습은 약육강식이 아닙니다. 힘을 드러내지 않고 약자를 누르지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는 고통은 누구 탓도 아닙니다. 힘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로 나 자신 탓입니다. 자기를 향한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탓입니다. 그 누구도 탓하지 마십시오. 나를 욕하고 나를 핍박하는 사람도 다 내탓임을 아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이 나를 가만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가 살아있는 세상이 싫어지는 것이고 본문과 같이 강자와 약자가 없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천국을 기다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싸움이 있고 경쟁이 있고 시기 질투가 끊이지 않는 세상을 사시면서 예수님을 알게 된 은혜에 감사하며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남은 자를 부르심 (사 11:10-16)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이 서으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 시키시리라 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가 아니면, 즉 성령이 함께 한 자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말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천국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에게는 계시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가 전달되어져도 계시를 계시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올 때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도로 나와야 그 말씀이 비로소 우리에게 계시로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즉 세상에서 잘되고 출세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를 잘되게 하는 복주시는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주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라고 할 때 그 말씀을 이해할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골치 아프고 지루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세상 것을 다 잃어도 천국만은 놓칠 수 없다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올 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점검할 것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는가'입니다. 스스로 물으면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을 기호로 삼아서 남은 자들이 각처에서 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기호로 삼는다는 것은 신호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즉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이 신호가 돼가지고 각처에 흩어져 있던 남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10:21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은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전에도 남은 자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남은 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10:24절에 보면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장차 앗수르가 애굽같이 너희를 치고 때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미디안 사람을 치듯, 애굽 사람을 치듯 앗수르를 멸하실 것이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서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고 이스라엘의 많은 거민들이 주위의 나라와 먼바다의 섬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망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미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방 각처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을 모으시는데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들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그 원수를 갚아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선택하신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한 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금은 비록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회개하고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고 그때가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지금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존재한다면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사람 아닌 성도들은 뭡니까? 하나님의 선택이 나라 선택과 개인 선택, 이렇게 두가지가 있는 것입니까? 또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려면 유대인이 회개하나 안하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애굽에게 열번째 재앙으로 장자 죽음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무조건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만이 살아난 것입니다. 제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죽습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은 단순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믿는자들로서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무시하면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던 것도 이스라엘에게는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의 희생이 귀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안다면 자기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린양의 피를 귀하게 여기고 그 피의 은혜만을 감사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삶을 보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첫열매를 바치라고 하는 것도 단순한 헌물, 또는 십일조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이렇게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의 차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들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가나안 땅은 그들을 토해버릴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좇아 다니는 자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다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스라엘로 이 자리에 나오셨다면 우리는 다른데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관심 두고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수없이 말하는데 모두가 나를 잘되게 하고 성공하게 하는 은혜이고 사랑이지 나를 위해 죽으신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는 돈보다도, 자식의 출세보다도, 직장보다도, 사업보다도 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보다, 은혜보다 세상의 풍족함이 더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통 세상의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자리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한들 눈이나 깜짝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무리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소리친들 예수님께 돌아가려고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같이 이미 그 마음이 세상의 것으로 부요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갈급함이 있을 리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문밖에 세워둔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사랑이 없이는 한순간도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깊이 아는 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갑니까? 아니면 은혜와 사랑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으로 그 마음이 가득찬 채 부요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요함은 은혜와 사랑이지 결코 세상의 것으로 부요함을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 신호가 돼가지고 앗수르로 인해서 사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남은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는 것입니다. 앗수르 때문에 주위 여러 나라로 피신한 사람들이 앗수르가 멸망당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럴 때 주저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남의 나라에 살면서도 그 나라의 풍족함과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땅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들이 주저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살 때에 날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했던 그 마음과 같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와 같은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여기에서 남은 자란 어떤 자를 가리킵니까? 비록 앗수르에 의해서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지만 언제나 거룩한 성전이 있던 은혜의 땅을 소망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은 돌아오라고 할 때 주저없이 살던 나라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살던 곳에 미련이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재미에 빠져서 은혜도 사랑도 다 잊어버린 사람들은 아무리 돌아오라고 소리쳐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더 재미있기 때문에 돌아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아오라고 할 때 두말없이 기쁨으로 돌아갈 남은 자란 어떤 자이겠습니까?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재미 때문에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가리켜서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다운 모습은 간직하지 못한 채 단지 혈통을 가지고 이스라엘 행세를 한 사람들과 같이 성도가 성도다운 모습은 간직하지 못한 채 단지 예배당에 나오고 예배드리고 있다고 해서 성도 행세하려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이미 모든 관심은 세상에 있고 돈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에 주님이 아무리 내게로 돌아오라고 소리쳐도 들은 척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남은 자가 아닌 것입니다.

 

 

 

 

요즘 현대교인들은 바쁘다는 것을 최고의 변명거리로 삼습니다. 바빠서 신앙생활에 소홀한 것을 당연하게 여겨버립니다. 바쁘고 싶어서 바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쁘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겨버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입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바쁜 것을 애타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들이 없습니다. 이미 돈버는 것이 목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쁜 것을 당연하게 여겨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예수님이 천국에 오라고 하실 때도 바빠서 못가겠다는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쁘기 때문에 성도의 모임에 빠지게 되고, 교회의 여러 일들에 소홀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빠져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나오던 롯의 아내가 무엇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까? 그 좋은 세상을 내버려두고 떠나기가 아쉬웠던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바로 롯의 아내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세상을 떠나기 싫어하는 자가 바로 나 자신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은자, 참된 이스라엘은 비록 몸은 세상을 살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득차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 죄가 싫고 죄가 없는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주님이 오신다는 소리가 최고의 기쁨일 것입니다. 언제든지 손털고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날마다 세상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힘쓰며 살고 있습니까? 이런 신자가 주님이 오라고 하실 때 주저하지 않고 기뻐하며 주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남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노래 (사 12:1-6)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지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사람이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그 일에 서투르기 때문에 남에게 묻고 배워가면서 일을 하게 됩니다. 아마 이럴 때는 남보다 안다고 해서 나서는 일도 없을 것이고, 언제나 뒤에 물러서서 남이 하는 것을 배우기에 모든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일이 손에 익숙해지고 뭔가 알게 되었을 때는 남에게 묻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보다 연륜이 적은 자는 자연히 무시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이러한 과정을 밟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왔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조용하게 남들이 하는 것을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남을 무시할리도 없고,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경쟁도 없고, 비교하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주님을 알게 된 즐거움 속에서 순수하게 주님으로 기뻐하면서 교회생활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기존 신앙인들의 잘못된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교회 일이나 여러 가지의 것에 지식이 쌓이면서 자기의 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예수님이 좋아서 예배당을 찾는 것이 아니라 거의 습관적으로 예배당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스스로 어른 행세를 하게 되고,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으로 간주해 버리면서 교회를 시끄럽게 합니다. 사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과정을 그대로 밟으면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뭔가 안다고 하는 사람들,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지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시는 것도 바로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기뻐하는 순수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같습니다. 처음에는 뭔가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세월이 갈수록 세상의 방식에 같이 동화되어 버리고 나중에는 순수함은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신자가 처음에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정말 순수하게 복음만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졸업할 때는 성장에 원대한 꿈을 지니고 졸업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설령 졸업할 때까지 그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고 해도 목회를 하면서 뭔가 현실을 떠나서는 배겨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교회 성장을 위해서 힘쓰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 교회가 성장해도 순수함만 잃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적당한 타협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동화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모습만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40년을 믿어도 1년을 믿은 듯 신앙생활하자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이나 나중이나 처음의 순수한 그 마음으로 주님을 찾자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고, 내것을 고집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자로서 주님을 찾아 나오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직 주님에게만 관심을 둘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엉뚱한 것으로 얼굴 붉히는 일이 사라질 것입니다. 40년을 믿었어도 일년을 믿은 듯 모이는 교회라면 분명 사랑이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때 주님께로 돌아온 자의 감사의 노래입니다. 1절에 보면 '그 날'이라고 말하는 데 그 날이란 주님께로 돌아오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특별한 날입니다. 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절을 보십시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 날에는 여호와의 진노가 쉬는 일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진노가 그친다는 것입니다. 또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위하십니다. 안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편히 쉬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날, 즉 그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들입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그 날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살아가야 하고, 안위가 없는, 쉼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쉼이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누구나 동일합니다. 죄인의 몸으로서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쉬지 않고 땀을 흘리고 일을 해야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일하고 싶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는, 풍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되기를 원하는 탐욕이 있습니다. 그 탐욕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인간은 일하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결국 세상에서는 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노동은 죄의 결과입니다. 노동이 그치고 안식할 수 있는 날은 그 날이 와야 합니다. 그 날이 바로 우리가 영원히 쉴 수 있는 날입니다. 신자는 그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날을 바라본다는 것은 쉼이 없고 죄만 있는 세상이 싫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싫어지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그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그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비록 쉼이 없는 이 세상에서라도 영원한 안식의 그 날을 소망하며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을 힘들고 피곤하게 살아가면서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가져다주실 영원히 쉬는 날을 미리 기뻐하면서 살았던 자가 그 날에 부르는 감사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기르리라"고 합니다. 이 감사의 노래를 지금 이 땅에서 미리 부르며 살아가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날에 이르러 하실 일을 그때 가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을 아는 자로서 지금 이 땅에서 미리 감사하고 찬송하는 자로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생을 세상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날을 아는 자로서 현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움과 고통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그 날에 주어질 영원한 쉼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결과로 보자는 것입니다.

 

 

 

 

세상은 쉼이 없습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신자는 그 날을 더욱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쉼이 없도록 하는 죄에서 멀어지고자 힘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가 그 날에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기뻐하면서 찬송하면서 주님께로 돌아갈 남은 자인 것입니다.

 

 

 

 

피곤하지 않는 삶을 사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쉼이 없는 세상을 싫어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쉼이 있는 나라, 여호와의 안위가 있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바쁘고, 힘들고, 피곤하게 살아가시면서 바쁜 것도 없고, 피곤도 없는, 죄가 없는 그 나라를 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쁘게 하시고 피곤하게 하셨다면 그것은 안식이 있는 그 나라를 소망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편안하면 그 나라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순수하게 주님만 사랑하면서 그 날을 기뻐하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모이는 교회 되기 바랍니다.

 

 

 

 

 

바벨론 심판 (사 13:6-1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모든 손이 피곤하며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잡혀서 임산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은 불꽃 같으리로다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그들이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같이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만나는 자는 창에 찔리겠고 잡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겠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은 그 목전에 메어침을 입겠고 그 집은 노략을 당하겠고 그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

 

 

 


신자가 세상을 살면서 잊어서는 안될 부분은 세상의 멸망입니다. 세상의 멸망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다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멸망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신자는 인생의 전체를 보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관심이 현재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자가 살아남느냐가 관심거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마지막 때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마지막때 심판받을 자가 누구이고 살아남을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바벨론이라는 나라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그 도구로 사용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벨론을 다시 심판해 버리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말입니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있다면 그 죄는 바로 오늘의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와 동일합니다. 인간의 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죄는 변하지 않고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죄를 알면 사단이 사람들을 어떻게 유혹하는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먼저 11절을 보면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바벨론이라는 한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바벨론의 죄가 곧 온 세상의 죄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을 들어서 세상의 죄와 심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죄를 말합니까? 11절은 바벨론의 교만과 오만과 거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만, 오만, 거만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표현을 이렇게 각각 사용하는 것은 바벨론의 죄가 어떤 것임을 강하게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 1:1절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를 말하는데 이것은 각각 다른 세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의미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악인이 곧 죄인이고 죄인이 곧 오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오만한 자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것이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오만을 얼마나 비중 있게 말씀하시느냐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만은 곧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만이나 교만이라는 것을 세상적인 상식과 시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은 세상이 생각하는 교만과 다릅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과 겸손이라는 것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이해해 버리면 세상에서도 겸손한 자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지막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것이 교만 때문이라면 세상에서도 겸손한 자는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과 교만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겸손은 잘난 척 안하는 사람입니다. 남보다 많이 배웠다고 거들먹 거리지 않고 권세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교만과 겸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벨론의 교만을 알기 위해서 예전에 설교했던 다니엘서를 다시 보겠습니다. 단 4:30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발전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힘과 능력에 대해서 감탄을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면서 느부갓네살이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실제로 그것을 겪으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늘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계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이 자기 뜻대로 행하셔서 바벨론이 부강하게 되었는데 자신은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되어진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교만하게 행하는 자기를 낮추셨다'고 말합니다. 즉 느부갓네살은 위에서 자기 뜻대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교만이란 자기에게 있는 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힘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을 부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즉 교만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내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라고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의지하는 경우가 거의 모두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세상것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을 사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지만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언제나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합니다. 이런 신자가 바로 복된 자입니다.

 

 

 

 

바벨론이 교만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절은 바벨론이 평소에 사랑했던 것을 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것을 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마지막 때를 사는 신자가 할 일을 그것을 부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자가 바로 마지막때 사는 자입니다.

 

 

 

 

 

돌아온 자의 노래 (사 14:1-11)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노비를 삼겠고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를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를 주관하리라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너의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학대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패권자의 홀을 꺾으셨도다 그들이 분내어 여러 민족을 치되 치기를 마지 아니하였고 노하여 열방을 억압하여도 그 억압을 막을 자 없었더니 이제는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니 무리가 소리질러 노래하는도다 향나무와 레바논 백향목도 너로 인하여 기뻐하여 이르기를 네가 넘어뜨리웠은즉 올라와서 우리를 작벌할 자 없다 하는도다 아래의 음부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영웅을 너로 인하여 동하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으로 그 보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신자는 세상을 우습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세상의 것에 붙들려서 근심과 걱정 속에 사는 것은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살아가지 못할 때 예수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힘없고 가난하고 나약한 것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이 자기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살아가는 소위 갑부가 있고, 돈이 없어서 쩔쩔매면서 하나님에게 돈좀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럴 때 갑부는 신자를 바라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아마 하나님도 별 것 아니다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저렇게 약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갑부의 눈에는 하나님이 겨우 돈이나 몇 푼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비춰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도 신자도 믿음도 시시한 것으로 여겨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난주에 얘기했던 바벨론의 교만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게 되는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님이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사람들이 구하고 찾고 기도하는 것들을 보니까 모두가 자기들에게 얼마든지 있는 것들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이 겨우 그런 것이라면 나는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쪽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그릇의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있고,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판단하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고 '나도 가져 봤으면' '나도 저렇게 돼봤으면'하면서 세상을 향해서 군침을 흘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신자 스스로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우습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우습게 보고 싶다고 해서 우습게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별 것 아니고, 우습게 보여지게 되는데는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치 있고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됩니다.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 천하를 다 팔아도 살 수 없는 것,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세상의 것은 자연히 우습게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세상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가장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데 세상 것에 대해서 부러움을 가지겠습니까?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답게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 아니겠습니까? 영생을 어디에 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영생의 가치를 알고 또 영생이 나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면 과연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면서 살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세상의 것은 썩어지고 마지막 때 불에 타서 다 사라져 버릴 것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위 성경을 믿는다는 신자가 그 말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도리어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을 알고 영생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는 세상에 대해서는 자연히 희미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의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그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구했을 때 진주를 자기의 소유로 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소유를 다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재산보다도 진주가 더 가치가 나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물론 장사꾼에게는 자기의 재산보다도 진주가 귀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전재산을 없앨 만큼 진주가 귀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사꾼은 진주를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구원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가치 있는 것이라면 왜 여러분은 가장 가치 있고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가치 없는 세상 것 때문에 고민하고 한탄하고 한숨으로 지내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렇다면 결국 영생은 세상것 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외의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제아무리 누가 돈을 자랑하고 세상 것을 내세운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는커녕 우습게 여겨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신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런 신자는 세상의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할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겸손이라고 한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없이도 내힘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교만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인생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목적을 세워두고 그 목적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결과로 얻어진 모든 열매들을 마지막 때 다 부숴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바벨론의 심판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3장, 14장은 이러한 교만을 드러낸 바벨론에 대한 심판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하나님은 야곱을 긍휼이 여기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이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드러내며 교만한 족속은 다 멸해버리시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야곱 족속만큼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야곱 족속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의 자리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만이 존재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쫓겨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세상에 더 가치를 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심판 당할 때 누가 살아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겸손히 살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는 긍휼이 여기심입니다. 다같이 심판에 들어가야 할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신 은혜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느냐를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안다면 그 사람은 교만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긍휼 하심 때문에 주어졌음을 아는 자가 어떻게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 됨을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임을 아는 자가 곧 은혜를 알고 긍휼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너희는 잃어버린 바 된 경험이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나를 찾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자는 자기를 찾으신 하나님의 은혜에만 감사하지 자기의 의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을 비유함)보다는 잃어버린 바 된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서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 죄인 하나를 찾으신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지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신자가 어떨 때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합니까? 그것은 자신이 한 선한 종교 행위를 떠올릴 때입니다. 자신이 뭔가 열심히 한 종교 행위에 의를 두게 될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의가 드러나지 죄인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신자가 뭔가 했다는 것들이 죄인 됨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은혜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우습게 보입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3-11절까지는 돌아온 자가 부르는 노래인데, 그 노래는 힘을 자랑한 바벨론을 조롱하는 노래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향해서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계명성 (사 14:12-20)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세계를 황무케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않던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 열방의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 중에 자건마는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어쫓겼으니 가증한 나무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빠진 주검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네가 자기 땅을 망케 하였고 자기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일반으로 안장함을 얻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의 후손은 영영히 이름이 나지 못하리로다 할찌니라"

 

 

 


지난 시간에 신자는 세상을 우습게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이것은 신자인 우리가 얼마만큼 세상에서 신자다운 모습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신자가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의 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살아간다면 과연 무엇을 통해서 신자만이 보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우습게 보겠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습게 보여지는 것이지 내가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떨 때 세상이 우습게 보여집니까? 세상이 가지지 못하는 귀한 것을 소유했을 때입니다. 결국 세상을 우습게 볼 수 있는 것은 영생의 가치를 발견한 자들에게서만 자연히 보여질 수 있는 신자의 독특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가치를 발견한 신자들이 세상을 어느 정도 우습게 보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돌아온 자가 바벨론을 향하여 지어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3-20절까지가 바로 바벨론을 조롱하는 노래인데, 그 노래를 가만히 보면 한마디로 '잘난척 하더니 꼴좋다'는 식의 내용입니다. 돈있고, 힘있고, 세상에서 높다고 위세부리고 다른 사람 무시하고 살더니 지금 네 꼴이 뭐냐는 식입니다.

 

 

 

 

바벨론이 어느 정도까지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11절에 보면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라고 합니다. 또 15절을 보면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벨론이 마지막에 당할 모습입니다. 바벨론이 왜 이렇게 된다고 했습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이 그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자기의 수중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벨론을 배우면서, 그리고 바벨론의 마지막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 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계명성이라는 것은 새벽별을 의미하는데 새벽에 아주 빛나는 별을 가리킵니다. 즉 계명성의 의미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아주 부러워하고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나고 주목을 받을 만한, 한마디로 세상적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성이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높은 자같이 교만하고 하나님도 무시하고 힘을 자랑하더니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비참하게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모두 그런 의미의 말입니다. 교만하고 잘난 척하고 자기 힘을 내세운 자는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잘난 인간 되어봐야 그것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목사님, 신자는 다 가난해야 하고 출세하면 안됩니까?" 물론 아닙니다. 신자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높은 지위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세상의 것으로 허세를 부리거나, 힘을 가지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신자라면 돈이 있어도 없는 자로 살아갈 것이고, 높은 지위에 앉아 있어도 낮은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보다 돈이 있는 사람이 겸손하기가 더 힘들고 힘없는 사람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겸손하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겸손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즉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구원을 아는 신자라면 항상 긍휼을 노래하고 긍휼을 내세웁니다. '하나님 나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 때문에 천국가는 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신자는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은혜를 확인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은혜를 고백하고 긍휼을 노래하는 신자들이 모인 교회라면 틀림없이 겸손만 보여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쌍한 사람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입니다. 죄인을 말하는데 죄인이 안보이고, 긍휼을 말하는데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잘났고 모두가 신앙이 좋은 사람만 몰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왜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픈 사람이 의사를 찾는 것같이 죄인이 예수님을 찾게 되어 있는데 죄인도 아니면서 예수님은 왜 찾는 것입니까?

 

 

 

 

교회가 타락해 가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죄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희미하고 속죄에 대해서 무관심 하는 교회가 교회겠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죄인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교만한 자는 모두 음부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 세상에서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이 음부의 밑바닥인 사람들이 뭐 그리 부럽습니까?

 

 

 

 

여러분, 그래도 세상에서 잘나 보이는 사람들이 부럽습니까? 잘난 자식을 둔 부모가 부럽습니까? 마지막을 생각하고 살아가십시오. 교만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항상 교만하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교만이 일어날 형편과 조건이 되지 못하니까 일어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형편과 조건이 충족되면 교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에 붙들린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 비록 교만이 안보인다고 해도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계명성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 마지막은 지옥의 맨 밑바닥입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세상의 것이 없다면 그것으로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없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대로 만약 여러분에게 인간이 자랑하고 내세우고 잘난척할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 겸손하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란 차라리 세상 것이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에게 적절하게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한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계명성같이 우러러 보이는 자리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가 교만해지는 자리이고, 멸망의 자리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불쌍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겸손한 자리에서 날마다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십자가를 붙드는 지혜 있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에게 복이 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경영 (사 14:24-31)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아하스왕의 죽던 해에 받은 경고라 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 열매는 나는 불뱀이 되리라 가난한 자의 장자는 먹겠고 빈핍한 자는 평안히 누우려니와 내가 너의 뿌리를 기근으로 죽일 것이요 너의 남은 자는 살륙을 당하리라 성문이여 슬피 울지어다 성읍이여 부르짖을지어다 너 블레셋이여 다 소멸되게 되었도다 대저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 그 항오를 떨어져 행하는 자 없느니라"

 

 

 


제가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무슨 상을 수상할 때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는 말입니다. 지금 상을 받으면서 기뻐하는 것은 자기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에 기뻐하면서도 자기 영광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도 세상 영광을 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로 인해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뭔가 잘됐을 때 세상 사람들에게 '저 집은 예수를 잘 믿더니 복받았다'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제아무리 돈을 벌어서 재벌이 되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출세하고 성공을 해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득이 되는 분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인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사는데 득이 되기는커녕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일인데 그런 분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관심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지 세상 것이 아닙니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올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 일하고 신학교가서 목사되라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만 사랑하면서 살아갈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을 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예배를 드리겠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배라는 의식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하게 보이고 장엄하게 느껴지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예배의식에 모든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이 자리에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만 이 자리에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자리에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요 5:40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또 42절에 보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설교를 듣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것은 내가 진심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는지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그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가짜가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방지하시는 분입니다. 진짜만 천국에 들여보내십니다. 그 진짜가 무엇입니까? 세상 마지막 때 남은 자입니다. 세상이 다 멸망당할 때 마지막으로 살아남는자,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바로 진짜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짜와 가짜를 가르시는데 그 일을 이 세상에부터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세상을 향한 계획이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일은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십니다. 24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무엇인가 생각하신 것이 있고 계획하신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 일을 고집스럽게 이루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집스럽게 이루고야 마시는 그 일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면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즉 앗수르를 심판하시고 앗수르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앗수르, 바벨론, 블레셋 등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를 심판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26절을 보면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일을 단지 앗수르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온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온세계를 향해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앗수르를 심판해서 이스라엘의 멍에를 벗게 해주시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사 10:27절을 보면 이것과 같은 말이 나오는데 20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앗수르를 치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어깨에서 짐을 벗게 해주신다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진짜 이스라엘로 여기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 이것이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고 목표입니다. 10:23에 보면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고 합니다.

 

 

 

 

그러면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1:1,2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다 없어집니다. 세상에서 힘있는 자들, 힘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고, 교세를 자랑하던 교단, 교회도 다 사라지고, 웅장함을 자랑하던 예배당도 다 불타 없어지고 뭐가 새롭게 존재합니까?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누가 들어갑니까?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 단장한 신부를 예루살렘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하늘과 새땅에 거하는 사람은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 즉 세상 마지막 때 여호와의 긍휼로 부름을 입은 남은 자들이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남은 자를 모으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남은 자만 남기기 위해서 다른 것을 다 쳐버리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짜는 남겨두고 가짜는 다 치시는 일을 하나님은 분명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만 남긴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남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이 하나님의 일에 함께하는 것인데 그 일은 복음만 드러내고 증거해서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은 다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남은 자를 모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신다면 교회는 항상 남은 자가 누구인가가 드러날 수 있는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마음을 아는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번성에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새하늘 새땅에 들어가는 인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남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모압의 심판 (사 15:1-9)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루 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루 밤에 모압 길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털을 없이 하였고 수염을 깎았으며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전사가 크게 부르짖으며 그 혼이 속에서 떨도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귀인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로 도망하여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부르짖으니 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이는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렸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부르짖음이 브엘엘림에 미치며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의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제가 성경을 말하다 보면 목사들과 부딪히는 일이 많습니다. 이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정직하게 그리스도만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 많은 갈등과 당황함 속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주위를 돌아다 볼 때 자기와 같이 성경을 말하는 자가 드물고 거의 모두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흘러 내려오던 그 방식 그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오히려 정직하게 복음만 말한다고 하는 자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을 때 혹시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이라면 듣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한데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는 갈등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그러한 반응은 지금 시대에 보여지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아니 훨씬 그 이전에 선지자시절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복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면 왜 정직하게 그리스도만을 말하는데 거부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관심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사람은 관심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십자가에 있고, 영생에 있고, 영원한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심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십자가가 아닐 때에는 필연코 그리스도의 말이 아닌 것이 나오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관심이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말하면 거부합니다. 관심이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면 거부합니다. 물론 단순히 십자가를 말하면 듣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포기하고, 자기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십자가를 말하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인데 어떻게 세상 것을 포기하는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부흥을 원하시는데 교회 부흥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말과는 다른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는데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의 복을 받는다는 거짓된 약속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회 일을 열심히 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요 6:29) 교회 일을 열심히 해야 충성된 주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에다가 다른 여러 가지 것을 첨가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고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말한다고 하는데 성경과 다른 복음이 나오는 것은 관심이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관심을 두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두고 계셨다면 말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가 말하는 대로 '나를 잘 믿으라 그러면 복을 주겠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과 회개만을 외치셨습니다. 세상 것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고 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염려하고 구하는 것은 다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마 6:31-32). 부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9:23).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마 7:13-1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마 16::24). 이런 말씀들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다른 말이 나옵니까? 다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는 정반대의 말을 하면서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거짓된 것입니까? 성경이 거짓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없는 말을 하는 자가 거짓을 말하는 거짓선지자임이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구하면 주시는데 왜 기도하지 않는가?'라고 다그칩니다. 부자는 천국에 못간다고 하셨는데 교회에서는 교회 봉사하고 십일조 하면 만 배나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은 관심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영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기 때문에 영생에 대해서 말을 해도, 구원에 대해서 말을 해도 그것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무엇 때문에 세상이 듣지도 않는 말을 해야 합니까? 그 길은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망하는 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렇게 힘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리 말하든 저리 말하든 그리스도라는 말만 들어가면 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저 자신부터도 말을 바꾸겠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교회만 나오고 예수 믿는다는 말만 하면 천국 간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는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지막이 절대 같지 않습니다. 이것 하나 때문에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복음입니다. 마지막이 다르기 때문에 말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의 책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 우리의 구원과 연관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경전이 아닙니다. 소위 경전은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인간의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도덕을 말하고 도덕적인 인간을 강조한다면 굳이 성경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복을 받은 것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오히려 구원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성경은 망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남겨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는 채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그야말로 재미없고 무의미하고 부담 가는 책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세상의 복에 성경을 연관지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는 언제나 우리의 구원과 연관지어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도 비록 옛날 모압이란 나라에 대한 심판의 경고이지만 모압 한 나라의 심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계시해 주는 내용으로 봐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압의 심판을 보면서 '아하, 모압이 저래서 심판을 받는구나'를 찾아서 우리는 모압의 길로 가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이러한 얘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방 나라가 심판 받고,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들이 심판 받았던 그 길로 가지 말라는 것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벨론의 심판도 들었고, 앗수르의 심판도 들었고, 블레셋의 심판도 들었습니다. 바벨론의 심판은 교만 때문입니다. 나라의 부강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힘을 제일로 여기는 교만이 심판의 원인입니다. 결국 바벨론의 심판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되는 것을 의지하면 망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앗수르나 블레셋도 다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방 나라에 대해서 심판을 경고하는 것과 모압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이 분위기가 조금 다릅니다. 5절에 보면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라는 말이나 16:11절의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라고 하는 말을 보면 이사야는 모압의 심판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이방 나라의 심판과 다른 점입니다.

 

 

 

 

이 이유를 알려면 모압이란 나라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알면 됩니다. 모압이란 나라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그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같이 멸망해야 할 인간이었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로 인해서 구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롯의 두 딸이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 롯에게 술을 먹이고 같이 동침해서 낳은 아이가 하나는 모압의 조상이 죄었고, 또 한 아이는 암몬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결국 모압과 이스라엘은 전혀 남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모압은 서로 형제처럼 잘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민2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면서 전쟁을 합니다. 호르마란 곳에서 가나안 사람과 싸워 이기고 아모리를 이기고 바산을 이깁니다. 그리고 2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는데 모압 왕인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거민을 하나하나 물리친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이 자기들도 치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은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모압의 죄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대로 모압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 아브라함 때문에 존재하게 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모압은 항상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 나라이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흐르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아난 족속이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선대함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발락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 족속임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됩니다.

 

 

 

 

모압이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왜 저주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축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도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축복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그들이 저주 안에 거하게 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신 23:3-5절을 보면 모압의 심판의 이유는 이스라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것이 심판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심판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 은혜를 무시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도 거부해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이 망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세상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도록 꼬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산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 것을 손에 쥐어줘서 스스로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은혜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고 세상에 눈을 돌릴 때 자연히 복음은 거부하게 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언제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주님을 영접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피할곳이 되라 (사 16:1-5)


"너희는 이 땅 치리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산으로 보낼찌니라 모압의 여자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 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너는 모략을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오정 때에 밤 같이 그늘을 짓고 쫓겨난 자를 숨기며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며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자 앞에서 그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관심에 대한 문제는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관심과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소위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산다는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구분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한다는 일이 결국 자기 만족과, 자기의 높임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은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되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삶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으면서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산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단지 자신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들이 기독교라는 종교 행위와 연관된 것이어서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합시다. 단지 그 행위만 두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목적이, 기도의 내용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열심히 하는 것도, 예배를 빠지지 않고 열심히 드리는 것도 모두 무엇을 위해서 하느냐를 따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자들이 예수님을 상상한다고 합시다. 과연 어떤 모습, 어떤 성격의 예수님을 상상하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는 예수님은 턱에는 수염이 멋있게 자라있고, 머리에는 광채가 나고, 얼굴에도 인자한 미소가 띄고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적어도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사람들의 윤리와 도덕을 바탕으로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소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시킨 사랑의 예수님이라면 적어도 이런 모습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서 전해져 온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의 옷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옷이 진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입으셨던 옷이라고 해도 그게 구원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신자의 표준으로 삼고 그 모습을 닮으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그것은 마귀의 장난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리의 탈을 쓴 양의 모습이다 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절대로 신자다운 모습, 예수님다운 모습을 여러분 멋대로 상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고 있는 것은 결코 신자다운 모습도, 예수님의 모습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듯 신자의 겉모습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겉모습에 관심 두지 마십시오. 겉모습에 관심 두고서 스스로 신자다운 모습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결국은 자기 완성에 대한 하나의 욕구일 뿐입니다. 그 욕구가 교묘하게 신앙으로 위장되어서 신자들에게 파고들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외모에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신자는 이래야 돼, 예수님은 이랬을 것이야' 여기에 관심을 두게 되면 마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생각에 맞는 예수를 제공합니다. 소위 인자한 모습의 예수, 인품 좋은 모습의 예수, 그것을 가지고 예수상이라고 오해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고 그리스도를 닮고 싶다면 예수님의 외모가 아닌 그 정신에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삶의 정신, 삶의 자세, 삶의 태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예수님의 모습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라 우리의 주위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분이 있다면 바로 그런 분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분의 삶의 정신, 태도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삶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배우고 닮아야 할 것들입니다. 외모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과 성격은 서로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얼굴에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도 삶의 정신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말해줍니다.

 

 

 

 

지난 수요일에 모압의 심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모압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아브라함 덕분에 존재하게된 모압이 은혜를 은혜로 갚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위협이 된다고 해서 저주하고 멀리하는 것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의 심판에서 도피자가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가 모압의 도피자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로 시작합니다. 1절에 보면 모압의 도피자를 딸 시온산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것은 결국 유다가 모압의 도피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지 모압의 도피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의도는 모압의 도피자를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 어떤 것임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유다에게 모압의 남은 자를 보호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지만 3절에 들어가면 상황이 바뀝니다. 지금 심판은 이방 민족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모든 자에게 내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유다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유다가 심판을 받을 때 유다에서도 남은 자, 도피자가 발생합니다. 그때 유다의 도피자를 모압이 보호하라고 합니다. 유다의 피할 곳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 피할 곳이 되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유다의 심판은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렘 40:11을 보면 그때 흩어진 유다가 도피한 나라 가운데 모압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할 곳이 되어주어야 할 존재의 모습입니다. 4절에 있는 대로 피할 곳이 되어주어야 할 존재는 토색하는 것이 없고, 힘으로 공격하고 압제하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힘이 없어서 쫓겨난 자들의 피할 곳이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토색하는 자, 멸절하는 자, 압제하는 자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오직 굳게 서는 것은 다윗의 장막뿐입니다. 다윗의 장막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계십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과 자비가 있습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의 장막은 힘이 있고 핍박이 있는 곳에서 쫓겨난 자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쓸데없이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신자다운 외모, 성격을 가지려고 하지 말고 힘에 의해서 눌림 받은 약한 자들의 피할 곳이 되어 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피할 곳이 되어주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겨야 합니다.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약한 자들의 피할 곳이 되어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이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힘없는 자들, 쫓겨난 자들의 피할 곳이 되어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서는 세상의 자랑이 보여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힘이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힘없는 자들이 상처를 입고 쫓겨나게 됩니다.

 

 

 

 

은석교회는 과연 약한 자의 피할 곳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은석교회가 강해서 그 힘으로 약자를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약자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은석교회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감으로써 모든 세상의 힘이 사라지고 은혜로만 살아가는 교회가 될 때 피할 곳이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피난처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시편 144편에 보면 여호와가 우리의 피난처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피난처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눈을 돌릴 때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안식처로 느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여호와가 나의 피난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자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으로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는다면 세상에서 살던 방식은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서로 경쟁하고, 교회 안에서도 경쟁이고, 힘있는 자 힘없는 자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눌림 당한 자의 피할 곳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겉모습에 관심 두지 말고 교회에 와서 모든 것을 버리는 자가 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힘에 눌린 자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교회 되는 것, 그것이 은석교회의 목표입니다.

 

 

출처: 심플 라이프 원문보기 글쓴이: 심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