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스크랩] 강해 이사야 강해 2

에반젤(복음) 2023. 4. 2. 01:15

이사야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이스라엘의 심판 (사 17:4-11)
시온 산 (사 18:1-7)
장망성 (사 19:11-18)
선지자의 역할 (사 20:1-6)
파숫꾼 (사 21:5-12)
다윗 집의 열쇠 (사 22:15-25)
두로의 심판 (사 23:1-7)
땅의 기쁨 (사 24:1-13)
심판의 날 (사 24:14-23)
눈물 (사 25:6-12)
의인의 길 (사 26:1-10)
아름다운 포도원 (사 27:1-6)
백성 (사 27:7-13)
취한 자 (사 28:1-10)
기초돌 (사 28:14-22)
시온산 (사 29:1-8)
입술과 마음 (사 29::9-14)
토기장이 (사 29:15-24)
패역한 백성 (사 30:1-14)
복있는 자 (사 30:15-22)
돌아오라 (사 31:1-9)
믿음의 길 (사 32:1-20)
보배 (사 33:1-6)
처소 (사 33:17-24)
여호와의 칼 (사 34:1-7)
여호와의 신 (사 34:8-17)
거룩한 길 (사 35:1-10)
조롱 (사 36:1-10)
사단의 말 (사 36:11-22)
믿음 (사 37:1-7)

 

 

 

 

 

 

 

이스라엘의 심판 (사 17:4-11)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 살찐 몸이 파리하리니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그러나 오히려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실과 이 삼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사 오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단을 쳐다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며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이는 네가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자기의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식물을 심으며 이방의 가지도 이종하고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로 두르고 아침에 너의 씨로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단지 알고 있다면 예수를 안믿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무엇이 믿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기준으로 내세운다면 겨우 교회를 다니는 것과 다니지 않은 것의 차이 정도로만 생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기준을 알아야 장차 이 땅에 올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심판의 기준을 모르기 때문에 겨우 교회에 성실하게 다니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신의 구원을 기정사실화 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이 천국 간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십자가를 의지하고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것은 신자로서 당연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천국 간다'라고 하면서도 정작 살아가는 것은 천국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천국을 기정사실화하고 사느냐면 교회 다니는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것도 일 이년 다닌 것이 아니고 수십 년을 한결같이 주일 지키면서 성실히 출석하였을 때 그런 생각에 빠지는 것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을 주일을 지키면서, 교회 봉사도 하면서,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부지런히 보면서 십일조도 빠짐없이 하면서 살아왔다면 '이런 내가 천국을 못간다면 세상에 누가 천국에 갈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행여 가지신 분이 계신다면 저는 분명히 그런 생각을 버리시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생각이며 오히려 천국에 걸림돌이 되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항상 관대하며 잘한 것만 머리에 남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면 자기는 그야말로 '신자답다'는 생각만 들게 됩니다. 더군다나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때 그런 잘못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는 다른 신자들처럼 세상 복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고, 돈에도 욕심 내지 않고, 나를 자랑하지도 않고, 없는 자를 무시하지도 않고, 율법적인 신앙에도 빠지지 않고 사니까 나는 틀림없이 신자다운 신자가 아니겠나. 그러니까 나는 천국갈거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즉 성경을 바로 알고 기존 교인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자다운 기준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잘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스스로 판단해서 천국여부를 여러분이 결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여부는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같이 느껴져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지라도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고 살면 됩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수십년 다녔다는 것은 잊어버리십시오.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예배 참석한 것도 잊어버리십시오. 십일조 한 것도 잊어버리시고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산것도 열심히 구제한 것도 다 잊어버리십시오. 그러한 것들이 여러분을 구원시키는 것이 압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만 생각하고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로서의 최선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기억하면서 교회에 나온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책망하는 말에 반감을 하고 불쾌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십년 교회에 다녔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 사람에게 목사가 '교회 수십년 다녔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을 과연 순수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마도 수십년 교회에 다닌 것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불쾌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수십년 교회에 다닌 것을 칭찬하는 말을 하면 마음이 흐뭇해지게 됩니다. 남들이 인정해 준다는 것에 대한 흐뭇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자신의 교회생활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자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이미 기정사실화 해놓고 살아가게 됩니다. '나만큼 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봐라 그래, 이런 교만에 빠지게 되고 결국 '내가 천국못가면 누가 천국에 가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신앙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딴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독사의 자식들아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 가지고는 천국 못간다. 나를 믿으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식의 말씀을 하니까 당시 종교인들이 뭐가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지금까지 그들이 믿어온 믿음은 다 헛것이고, 가르친 것도 다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고 결국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많은 신자들이 그들과 똑같습니다. 잘못된 것을 말을 해도 수십년 믿어온 것이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앙을 의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가지고 나는 천국 간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신자가 천국을 기정사실화하고 살아가면 천국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틀림없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과연 천국에 합당한 자인가?'라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엉뚱한 관심을 두고 살게 됩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설교하면서 목사로서의 제 고민은 '혹시 여러분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을까?'라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나는 목사이니까 틀림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힘든 것은 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점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로 살기도 힘든데 여러분 모두의 신앙을 간섭해야 하고 점검해야 하고 돌아봐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약 천국에 가는 것이 교회 출석 잘하고 기도하고 성경 많이 보고 십일조 잘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얘기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방인의 심판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방인의 심판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니까 심판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심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이방인과 똑같이 심판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에 앞서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심각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만 가지고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는 것이 심판을 피하고 천국에 가는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지금 식으로 하면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총회라고도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제사 잘 드렸고 제물도 바쳤고 절기도 빼놓지 않고 잘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방인과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독교, 불교, 유교 이런 식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종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도와주고 밀어주고 편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졌기 때문에 천국에 보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종교를 가졌느냐는 것을 묻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 나라냐 세상나라냐' 는 것만 묻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나라 편에 선 사람들만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십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이스라엘 민족이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망하는 세상에서 발을 빼려고 하느냐만 보십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은 나라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을 심판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 안에 있는 것은 함께 망합니다. 그런데 마지막때 세상을 심판하시기 앞서서 우리에게 이렇게 이방인들의 심판, 이스라엘의 심판을 계시하시는 것은 세상 안에 있는 모습이 어떤 것이냐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그것을 살펴봤습니다. 세상 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 자기의 힘을 믿고 사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무시하는 것, 이런 것들이 세상 안에 있는 모습입니다. 결국 우리도 교회에 얼마를 다녔느냐는 것과는 상관없이 세상 안에 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과연 세상 안에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삶인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천국을 소망하는 자의 삶입니다.

 

 

 

 

천국 간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도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럼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4,5절을 보면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무리 스스로 뭔가 해보려고 해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7,8절을 보면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단을 쳐다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자기 판단대로 자기 좋은 대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산 것입니다. 유대교라는 종교만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진짜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만든 이유는 이방인들이 잘사는 이유가 우상을 섬기기 때문인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우상을 만든 것은 잘살아보자는 것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잘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이런 모든 것이 심판 받을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목적이 아니라 세상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목적이니까 교회도 억지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그날이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황폐함을 당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산 것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십니까? 아니면 단지 믿는다 하는 말만 있고 마음에 하나님도 두지 않고 세상을 목적으로 삽니까? 다 황폐함 당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심고 가꾸어서 거둔 것이라고 할지라도 다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기억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사는 길입니다.

 

 

 

 

 

시온 산 (사 18:1-7)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 경첩한 사자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도다 세상의 모든 거민,지상에 거하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호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종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 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버려서 산의 독수리들에게와 땅의 들짐승들에게 끼쳐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과하하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과동하리라 하셨음이니라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하며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서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도 심판해 버리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긴장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도 심판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 해서 무조건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신앙 열심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열심은 이스라엘에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도 심판을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이유입니다. 신자가 아무리 자기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산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느냐를 보십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사는 것은 모두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몇 년을 다녔든, 봉사를 얼마나 했고, 헌금을 얼마나 했고, 기도를 얼마나 했든 그것이 여러분을 심판에서 보호하지 못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라고 하는 직책이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합니다. 평생을 예수만 믿었던 기독교 집안이라는 것이 여러분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머리속에서 뭔가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모두 지워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만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전 2:2절에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한 말도 예수님과 십자가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생각도 안하고 다 잊어버리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만 마음에 두고 산다는 것도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의미를 두고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뭔가 긴장됨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이러한 얘기를 듣고도 마음에 긴장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 '나는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나는 천국 간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천국 지옥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나중 일보다는 우선 눈앞의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십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만 말씀 드리면 뭔가 모호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느냐 잊어버리고 사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걱정과 근심과 염려 속에 살아가는지 아니면 평안 속에 살아가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평안 속에 사십니까? 걱정 근심없이 사십니까? 사람이 걱정과 근심이 있다는 것은 세상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걱정, 사업에 대한 걱정, 직장에 대한 걱정 이런 모든 것이 자기가 바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사회에서 뛰어난 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데 공부를 못할 때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어서 많은 돈을 벌고 싶은데 잘 안될 때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항상 잘되는 것, 높아지는 것, 성공하는 것, 이것만 원하기 때문에 실패가 두려워지고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걱정과 근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드렸지만 걱정 근심, 세상의 짐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지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식이 공부를 못하거나 똑똑치 못할 때 그것을 자신의 짐으로 생각합니다. 그 자식을 볼때마다 한숨과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자신에게 짐을 안겨줬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욕심 때문에 스스로 짐을 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 잘되는 것만 마음에 두고 있지 하나님은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하나님은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근심하고 걱정하며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천국을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공부를 잘해서 하버드를 나오고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자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돈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면 멸망 받는다는 것을 잘아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런 신자가 세상사람과 똑같이 똑같은 것을 가지고 근심과 걱정 속에 산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자식이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그것은 타고난 대로 하는 것이고, 일이 잘되건 못되건 그것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갈 뿐이고, 오직 관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냐에 둘 뿐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사는 사람은 자기의 편한 인생을 머리속에 두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머리속에 두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해야 할 고민이라면 이것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혹시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앗수르의 심판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가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시면서 여전히 세상에서 잘 살아보는 것에 관심을 두고 나오셨다면 비록 수요일이어서 예배당은 나왔지만 앗수르가 심판을 받든 말든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의례히 하는 말로만 듣고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 앗수르의 멸망에 우리의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강대한 나라인 앗수르가 멸망을 당한다는 얘기입니다. 앗수르의 멸망을 구스의 사자를 보내서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멸망 역시 단지 앗수르를 징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멸망을 세상 모든 나라가 보라고 하십니다. 장대하고 힘이 세서 사람들의 두려움이 되었던 그 나라가 어떻게 망하는가를 똑똑히 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2,3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힘이 두려운 것 같고 굉장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먼지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세상의 힘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강해지고 잘난 사람되고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다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세상의 강한 힘이 무너지는 것을 거듭해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겠습니까? 힘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강해지고 잘난 사람되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린 여전히 그리스도의 피흘리심보다는 힘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 결과가 걱정 근심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실패를 두려워하고 실패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언제나 염려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이미 벗어나 있는 모습입니다.

 

 

 

 

신자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 힘의 마지막 결과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의 체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걱정과 근심의 삶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7절입니다.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하며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서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고 합니다. 심판 속에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자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무엇을 교훈 받을 수 있습니까?

 

 

 

 

지금 이사야의 눈에는 앗수르, 바벨론, 애굽 이러한 힘센 나라들이 바람이 나는 겨와 같은 존재로만 보여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힘이 되는 것을 가져야 행복할 것 같은데 없는 것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광야생활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애굽의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았던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이 염려와 걱정 속에 산다면 그것이 곧 광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을 가진 자가 부러워지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생활 속에서 빠져나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온 산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시온산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힘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걱정 근심없이 평안으로 사는 길입니다. 앗수르의 심판 속에서 예물을 가지고 시온산에 이르는 사람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결국 심판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광야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치시는 것입니다. 힘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라고 치십니다.

 

 

 

 

여러분, 힘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은혜로 살기를 힘쓰십시오. 그것이 시온산에서 사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욕심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곳입니다. 고통과 염려와 근심만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시온은 평안이 있습니다. 욕심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살기 때문입니다. 잘되든 못되든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인데 걱정 근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원하십니까? 광야의 법칙으로 살지 말고 시온의 법칙으로 사십시오. 없는 것을 가지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주어진 것이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행복입니다.

 

 

 

 

 

장망성 (사 19:11-18)


"소안의 방백은 지극히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모략은 우준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고할 것이니라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지파들의 모퉁이 돌이어늘 애굽으로 그릇가게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사특한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으로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나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나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 그 날에 애굽인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흔드시는 손이 그 위에 흔들림을 인하여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모략을 인함이라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리라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몰라줄 때 부모 입장에서는 아주 섭섭한 마음이 들것입니다. 이것은 부모 자식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친구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줄 때, 또는 제자가 스승의 마음을 몰라줄 때, 또는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몰라줄 때 사람은 자연히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인간관계를 많이 겪으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상대방을 위해서 한 행동이었는데 상대방은 그런 마음을 몰라주고 오히려 오해를 하고 급기야 반감을 가지고 대응하거나 자신을 떠나버릴 때 그 아픈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식다운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친구다운 친구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부부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부부가 부부다운 부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일단 자신에게 해가 된다 싶으면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읽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로운 것이냐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의 자연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믿는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어떤 법에 대한 실천의 여부로서 따지려고 하지만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오직 실천하고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실천만이 법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법을 강조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실천을 강하게 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믿음은 법을 실천하는 정도로서 판가름 되어버립니다. 즉 법이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법을 실천하는 자가 의인이 되고, 실천하지 않는 자는 죄인으로 남아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장차 심판대에서 하나님은 법의 실천 여부를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지의 여부를 따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 묻겠습니다.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이제 갓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신 분도 있고 수십 년의 세월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면서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신자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이 어찌 보면 여러분을 무시한 듯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시간 심각하게 스스로 답을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가지 예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예를 통해서 여러분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신앙생활을 해 오셨는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오시면서 인생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많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일을 추진해도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또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혹 '하나님, 왜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신앙생활을 잘 못해도 저렇게 하는 일마다 잘되면서 재미있게 사는데 왜 나는 이렇게 하는 일마다 꼬이면서 우환이 끊이지 않고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까? 원망을 하셨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린 그분의 자녀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녀된 신자에게 하시는 일은 모두 다 우리에게는 선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좋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자신의 어려움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자연히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믿음은 어려움이 잘풀려가도록 도와주시기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어려움을 하나님의 일로 알고 그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럴 때 신자는 어려움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안한 삶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안식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이 안식을 빼앗긴 채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데 과연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마음도 모르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성경을 통해서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린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산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19장도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9장의 내용을 읽어보시면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19장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9장 처음에는 애굽에 대한 심판의 경고가 나옵니다. 애굽이 어떻게 타락되어가고 어떻게 쇠약해지며 망해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19절부터 이야기의 방향이 전혀 다르게 진행됩니다. 19절을 보면 애굽땅 중앙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있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위한 제단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19절은 애굽을 심판하시는 가운데 여호와께 경배하는 자가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쉽게 이해가 안되는 말씀입니다. 실컷 심판하시고 나서 나중에는 '나의 백성 애굽이여 복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상식에서 생각하면 애굽은 도저히 하나님의 복에 들 수 없는 무리들입니다. 애굽이 어떻게 이스라엘과 함께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로 이러한 점들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고 합니다. 장망성이란 '장차 망할 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 성은 어떤 성이기에 장차 망하는 성이라고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도성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현실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은 남에게 패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패배라는 것은 곧 이 땅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가 그만큼 사라지고 약화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오직 자신의 확대와 자기 이름의 창대를 인생의 모든 목표와 의미로 알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패배는 견딜 수 없는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남보다 앞서야 하고 앞서기 위해서는 나보다 약자는 철저하게 눌러야 하고 강자에게는 아부하면서 그 힘을 빌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 것이 세상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점차 망해가게 하시는데 그것이 2절부터 나옵니다. 2절에 "그가 애굽인을 격동하사 애굽인을 치게 하시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라고 합니다. 형제끼리, 이웃끼리, 성읍끼리, 나라끼리 싸우고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형제도 이웃도 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망성의 모습입니다.

 

 

 

 

불행해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일이 잘 안되고 쇠약해져가니까 우상, 마술사, 신접한 자를 찾아가서 자기들의 앞일을 묻습니다(3절). 불행을 극복하고 기어코 행복을 찾아보겠다는 어리석은 열심입니다. 이것이 장망성으로서의 세상입니다. 장망성에서는 돈이 없으면 기가 죽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힘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지식이라도, 돈도 지식도 없으면 번듯한 자식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기 위해서 애씁니다. 이것이 이미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로 살아가기 때문에 조그만 어려움만 생겨도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장망성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사는 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희생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장망성에서 희생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고난입니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한마디로 '고생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고생한다는 것은 각오해야 한다. 희생하고, 져야하고, 무시도 당해야 하고, 양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신자된 자가 살아가야 할 인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신자는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고집하십니까? 그것은 신자된 우리를 통해서 무엇인가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된 여러분이 세상에서 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아가야 하느냐면 여러분 자신이 천국 가기 위해서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천국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시는 것은 단순히 애굽이 잘못했으니까 징계를 내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고치시기 위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즉 심판을 통해서 누군가가 고침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23절도 보면 애굽만이 아니라 앗수르도 애굽과 마찬가지로 고침 받는 자가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 심판 속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것을 아신다면 하나님이 왜 신자에게 어려움도 있게 하시고 고통도 있게 하시는지 그 마음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나 앗수르에게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당해왔습니다. 힘있는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억누르면서 자기들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약자의 심정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장망성에서 힘이 없이 살고 남에게 맞고 눌림 받으며 산다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그런데 맞고 눌림 받으며 사는 것을 통해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이스라엘이고 오늘날의 신자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자가 평소에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압제하고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열심히 일했는데도 하는 일마다 꼬여서 항상 가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난하게 하신 것입니다. 부자는 이 가난한 자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무시하고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부자가 알거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럴 때 그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어서 남에게 무시를 당할 때 평소 가난한 자를 압제했던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가를 깨닫고 가난한 자의 심정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오게 될 때 그것이 구원 아니겠습니까?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신자에게 약자의 역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역할을 싫어합니다. 결국 주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멸시와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희생의 자리였습니다. 신자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 멸시와 고통까지 내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신자들이 멸시와 고통과는 거리가 멀어있는 채 십자가를 말합니다. 약자의 위치는 절대로 거부하면서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 십자가입니다. 신자는 약자의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압제 당할 때 비로소 주님의 멸시와 고통에 눈이 뜨여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남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왜 나를 그렇게 낮추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는 오직 장망성에서 낮아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입니다. 그 결과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장망성과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낮아짐은 애굽과 앗수르의 누군가를 복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희생의 마음이 없고 낮아짐이 없는 것이 장망성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비록 세상은 장망성이라고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은 현실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조그만 것도 나누면서 사랑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신자를 통해서 앗수르 애굽에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는 자가 있게 됩니다.

 

 

 

 

 

선지자의 역할 (사 20:1-6)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 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뵈이리니 그들이 그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을 인하여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그 날에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교회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항상 내세우는 표어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을 통해서 교회의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정당성을 주지시킴으로서 교회에서 하는 일은 결코 반대하지 못하게 하며 동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들을 보면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전혀 모른 채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남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이용해서 교회의 발전과 부흥을 꾀하고 그로 인해서 결국 인간의 영광과 인간이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거의 모든 신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잘못 생각합니다. 즉 자신이 영광 받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적으로 높아지고 잘되어서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이 기도하는 것도 결국 '하나님, 이번 일이 잘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영광이 목적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라고 할 수 벗습니다. 자기 영광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내가 나를 낮출 때입니다. 나 자신을 낮추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높아집니다. 반대로 나를 높이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감소됩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사는 신자는 언제나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죄인 됨을 고백하며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임을 드러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는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든 관심을 자기에게 두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고 있으니 어떻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점이 드러나고 수치가 보여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약점과 수치 되는 부분은 최대한 감춤으로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죄인된 인간의 본능은 부끄러운 것, 수치된 것은 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죄인이라는 증거는 자신의 약점은 감추고 장점은 드러내려고 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본성은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자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약점이 없는 떳떳한 몸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적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신자로서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하나님을 찾고자 합니다. 신앙적인 자존심을 한껏 세워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떳떳해지기 위해서 열심히 종교행위를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봉사도 부지런히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굴복 당하기 싫어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신자들을 다 이런 식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신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세워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부끄러움이 없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해라고 가르치는 것이 곧 떳떳한 인간, 즉 자존심을 세워서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왜 돈을 벌려고 합니까? 왜 배우려고 합니까? 돈이 곧 자존심이고, 지식이 곧 자존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남들보다 돈이 없거나 지식이 없으면 곧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돈을 벌고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남을 이기는 길이고 남을 이기는 것이 곧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가치관의 세계입니다.

 

 

 

 

돈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약점으로 생각하면서 그 부끄러움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도 있는 척하고, 뭘 몰라도 아는 척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가려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허세'라고 합니다. 돈도 없으면서 여럿이 식사하러 갔을 때 식사비를 자기가 내려고 우긴다든지, 대화를 할 때 일부러 지식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자신이 지식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자기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감추고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같이 약점은 가리고 자랑거리만 보이고 싶어하는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고 낮아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그런 부분들이 많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라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소위 '목사답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목사다운 모습에 장애가 되는 것은 가리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위선과 가식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자기에게 약점이 될만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것이 내 약점입니다. 하지만 이런 약점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목사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한다는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목사가 목사다운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보여져야 하는데, 복음은 뒤로하고 자꾸 외형적인 것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목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목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지 않은 목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목사만이 아닙니다. 장로는 장로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권사도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같습니다. 기도할 때도 자신의 자존심을 생각합니다. 결국 마귀가 어떻게 유혹합니까? 멋있는 기도, 남들이 감탄할 만한 기도, 자기를 돋보이기 위한 기도, 여기에 관심을 두게 합니다. '기도를 잘해야지'라는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기도만이 아니라 구제도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서 합니다. 이런 유혹과 시험에 빠져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믿음의 길을 가는 신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라고 하셨는데 병든 자로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전부 건강한 자로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모습들이 멸망을 피할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신자로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의 약점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은 감추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녔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감추지 말고 드러낼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아주 힘든 일을 시키십니다. 2절에 "곧 그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 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허리에서 베를 끄르라는 것은 겉옷을 벗고 속옷 차림이 되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신을 벗는 것은 노예처럼 천한 모습을 말합니다. 이런 행색으로 삼년을 살아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린 성경을 대수롭지 않게 읽고 있으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처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깊이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신이 이사야처럼 3년을 지낸다고 생각해 보신다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실 것입니다.

 

 

 

 

이사야 입장에서는 온갖 수치와 멸시를 다 받아야 하는 엄청난 고통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힘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신자로 사는 것을 쉽게 하시려고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안해서 신자로 사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사실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수치와 멸시와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사야에게 이런 일을 시키십니까? 단지 이사야를 고생시키기 위해서 3년을 신도 신지 말고 속옷 차림으로 다니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도구로 쓰이고 있는데 그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즉 이사야의 행동은 애굽과 구스에게 어떤 예표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어떤 예표입니까? 이사야가 벌거벗고 다닌 것같이 애굽과 구스인들이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하여 수치를 드러내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는 예표입니다.

 

 

 

 

4절에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 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라고 합니다. 애굽은 부를 자랑하고 학문을 자랑하는 아주 교만한 나라였습니다. 부와 지식으로 인해서 인간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존재임을 전혀 알지를 못했습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 같이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린 부족함이 없다고 큰소리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앗수르로 인해서 온갖 수치를 다 드러내고 앗수르에게 끌려가는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예표로서 보여주는 것이 이사야가 3년 동안 겉옷을 벗고 신을 벗은 채 살아야 했던 이유입니다. 이것은 내 모습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사야가 벗은 몸으로 다닐 때 그것을 보고 '아하 저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냐'라고 깨달은 자가 있다면 그것이 진짜 기적일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가 애굽과 구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들 앞에서 온갖 수치와 멸시를 다 당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치와 멸시는 바로 우리들이 받아야 할 것들이 아니었습니까?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이 수치를 받아야 할 부끄러운 자들인데 오히려 인간이 영광을 취하고 예수님이 수치를 당하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예수님은 수치와 멸시의 자리인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그 앞에 나오는 신자라는 이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아는 모습이겠습니까?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바로 수치와 멸시를 받아야 할 부끄러운 인간임을 알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 신자는 자신의 수치와 멸시를 가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면서 '나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존재다'는 것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도 주님이 다 덮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예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약점과 수치를 솔직하게 드러내려고 해도 '혹시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두려움이 자신을 가로막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인간의 자존심입니다.

 

 

 

 

6절에 해변의 나라는 유다를 가리킵니다. 유다는 앗수르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당시 힘있는 애굽을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애굽의 도움을 얻어서 수치와 멸시에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애굽이 망하자 얼마나 실망을 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힘을 통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 수치를 가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결과는 결국 실망만 남게 될 것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연약한 그 모습 그대로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치와 약점과 부끄러움을 스스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의 모든 수치와 허물을 가리워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일 것이고, 그런 신자는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자존심을 앞세우거나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낮아진 자리에서 주님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이사야에게는 자기 한몸 수치 당하고 멸시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다면 자기 한몸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내 한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감소되는 것보다는 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더 못견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옷을 벗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잘난척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에게 더 관심을 두고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세상의 옷을 벗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이 그토록 입기를 원하는 돈 많다는 옷, 학벌 높다는 옷, 가문 좋다는 옷, 이런 옷들을 다 벗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자기를 낮출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점을 여러분께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세상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고 배우지 못한 것을 약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서 자신을 가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는 집이 초라하다고 생각될 때 친구나 친지가 찾아오는 것을 꺼려하는 것도 결국 헛된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남의 집에 아파트가 몇 평인지 TV가 몇 인치인지 자가용이 어떤 것인지 냉장고가 몇 리터인지 이런 것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남들처럼 좋은 가구 들여놓고 비싼 가전제품 들여놓고 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자기 위신, 체면,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세상 것으로 자기를 치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고통이고 걱정이고 염려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볼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깨달으십시오. 항상 오늘에 감사하고 사십시오. 내일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염려입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고 멸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수치와 멸시를 받아야 할 자신임을 아십시오. 하나님이 망하게 하면 망하겠다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이 믿음이 여러분을 평안으로 인도할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아는 선지자 역할을 하는 신자의 삶입니다.

 

 

 

 

 

파숫꾼 (사 21:5-12)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숫군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너희 방백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숫군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떼와 약대떼를 보거든 자세히 유심히 들으라 하셨더니 파숫군이 사자 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섰었고 밤이 맞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그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숴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대로 너희에게 고하였노라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숫군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성경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무시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반면에 그 누구라 할지라도, 설령 그 사람이 살인 강도 짓을 해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이든, 그보다 더 악한 일을 한 죄수이든 상관치 않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안다면 그 사람에게는 멸망이 아니라 참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이 극복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 안에서 살아갈 때를 전제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는 참으로 위대하며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긍휼과 용서 안에서 산다면 여러분은 그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복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는 수시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은혜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들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휼과 용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 채워지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모습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현재 기독교는 거의 대다수가 죄에 대한 긍휼과 용서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일이고 그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다음부터는 놀라운 육신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세상의 축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과정 정도로 격하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론 외면적으로는 긍휼과 용서를 최고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긍휼과 용서만으로 기뻐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용서 안에 육신의 복을 첨가하여 가르치기 때문에 결국 내면적으로는 긍휼과 용서보다는 복에 더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자가 교회에 나오고도 육신의 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분명히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회개를 해야 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로서 용서해주실 것인데 그 다음부터 하나님은 놀라운 복으로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했으면 반드시 그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증거는 예전의 잘못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회개란 예전의 잘못에서 돌이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킨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자가 모든 관심을 하나님의 사랑에 두게 될 때 자연스럽게 세상에서의 자신의 욕망이 포기되어져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반대로 육신의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돌이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회개가 아니며 여전히 죄가운데 있는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교회가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고 할 때 무엇을 죄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죄에서 돌이키라고 할 때 강조하는 것은 종교행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겨우 십일조 문제나 주일성수 또는 기도에 대한 부분, 나아가서 윤리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회개를 한다고 할 것이고, 그리고 십일조를 잘하고, 주일을 잘 지키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윤리적인 모습을 갖춤으로서 자신은 죄에서 돌이켰다거나 고쳤다고 생각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의 가장 안타까운 실상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에 대한 크나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십일조 안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일에 교회안나오고 새벽기도 안하고 금요 철야기도 안하고 교회 봉사 안한다고 싫어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몸을 위해서 존재하려고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셨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먹을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생명에 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생명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인간에게서 가리워 버립니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소망을 두기보다는 자기 육신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게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발전과 성공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 채워지면 기뻐하고, 채워지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들면 낙심하고 원망하고 슬픔에 빠져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죄인된 인간은 모든 행동의 중심이 자기입니다. 모든 행동을 자신의 발전과 유익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종교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복을 주고, 육신의 문제를 도와주고 해결해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신자되게 하셨는데 우리가 복을 받을 준비를 하지 못해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자들이 말씀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썩어지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한 몸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죄를 모른 채 제아무리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외쳐본들 그것은 헛다리짚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알고자 하신다면 먼저 여러분의 내면에 있는 죄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생명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면 다른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지진이 나건 물가가 오르건 자식이 공부를 못하건 북한이 남침을 하건 상관없이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런 문제들이 여러분을 불안하게 하거나 신앙을 흔들어 놀 조건들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생명을 중심으로 살기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땅의 문제들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고, 항상 염려와 걱정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재미없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생명에 대한 관심은 상실된 채 천국을 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람 빠진 고무풍선이 하늘로 떠오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오직 생명에만 관심을 둔 채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둠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어 세상에 빛을 비추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여러분조차 생명에 관심두기 보다는 세상 살림살이에 더 관심을 둔 채 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파숫군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파숫군이라고 하니까 쉽게 '아하! 신자는 교회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을 파숫군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파숫군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20장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3년동안 속옷만 입고 맨발로 다녀야 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21장에서는 다시 요통을 겪어야 합니다. 3절에 보면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음으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이번에는 허리가 아프게 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임산한 여인이 허리가 아픈 것 같은 아픔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이 요통 속에서 한가지 계시를 받는데 그것은 파숫군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숫군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라고 합니다. 파숫군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밖을 지키고 있다가 어떤 위험한 일이 일어날 징조가 있거나 일어났을 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파숫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파숫군과 파숫군이 아닌 자의 삶의 차이입니다. 파숫군은 안에 있는 자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파숫군이 아닌 자들은 울타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안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즉 자기들의 몸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파숫군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험이 닥쳐와도 그것을 미리 경고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같이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숫군을 세우라고 합니다.

 

 

 

 

1절에 보면 '해변광야에 대한 경고라'고 합니다. 해변광야는 바벨론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바벨론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들을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나라가 엘람과 메대에게 망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바벨론의 멸망을 보여주시면서 파숫군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밖에는 관심 두지 않고 자기들의 힘만 믿고 세상에 빠져 살다가 망한 바벨론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 파숫군을 세우라는 것이다.

 

 

 

 

파숫군은 관심을 울타리 안, 즉 자신의 사람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이미 파숫군이 아닙니다. 파숫군은 항상 밖에 관심을 두고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위험한 일이 있을 때 안을 향해서 그 위험을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파숫군은 잠을 자서도 안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도 밖을 살피는 시선을 거두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기서 잠을 자는 제자들을 향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깨어있으라는 것은 단지 잠을 자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관심을 주님의 십자가에 두라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그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는 말씀도 파숫군을 세우지 않으면 바벨론이 망하는 것 같이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시대에 파숫군입니까? 바벨론의 멸망을 보면서 세상의 마지막이 어떠한가를 깨닫는 자입니다. 그 자가 바로 깨어있는 자며 그 시대의 파숫군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파숫군은 노아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채 살아갔지만 노아만큼은 말씀을 신뢰하며 심판을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파숫군으로 살아가는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용서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둠의 세상에서 파숫군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위가 모두 세상에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만큼은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을 두고 장차 이 땅에 주어질 심판을 의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파숫군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단 한분이 파숫군으로 산다 할지라도 그분을 통해서 경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파숫군은 선지자의 고통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이 받으신 저주를 자기가 받아야 할 저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경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많이 하는 실수는 남이 안하면 나도 안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남은 안하는데 나만하면 괜히 화가 나고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나도 안한다'라는 잘못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숫군의 자리에 서 있는 신자는 남이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합니다. 남이 안하니까 오히려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깨어있지 않으면 나라도 깨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십시오. 남이 나태하다고 해서 나도 나태해지고, 남이 게으르다고 해서 나도 같이 게을러지는 것은 같이 심판에 들어가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파숫군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단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경고를 받고 교회가 깨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마시고 '내가 파숫군의 역할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어둠의 세상에서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다윗 집의 열쇠 (사 22:15-2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속박하고 장사 같이 맹렬히 던지되 정녕히 너를 말아 싸서 공 같이 광막한 지경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 있으리라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고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파쇄되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기독교에 있어서 최대 관심은 천국입니다. 천국이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도 없고 또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소원하는 것은 신자로서는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천국에 대해서 무관심해져 갑니다. 천국에는 무관심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설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종교 놀이터로 전락되어버리고 하나님의 권위보다는 목사의 권위가 더 우위에 있는,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떠들어 대는 이상한 종교집단으로 변모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욕심과 자존심을 한껏 부추겨주는 도구로 이용되어 버리고, 지옥이니 저주니 하는 말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단어로 여겨버리고 자신들은 천국행 티켓은 이미 확보해 놓은 것으로 자신만만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남은 것은 누가 지상에서 복을 더 많이 누리고 천국에서 상을 더 많이 받느냐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천국에 가는 문제는 전혀 심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교회다니고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며 천국에 대한 심각성을 일축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죄인된 인간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그렇게 간단하게만 생각할 문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천국은 하나님 믿으면 간다'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살기좋은 곳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 있는 것은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기쁘게 하고 다른 것을 다 잃어도 천국만 잃지 않는다면 괜찮다는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제를 간단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 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편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확률 제로입니다.

 

 

 

 

사람들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을 표현할 때 '확률이 얼마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우주선을 발사할 때도 고장날 확률이 몇만분의 일, 혹은 몇백만분의 일이라는 말로서 확실성을 나타내곤 합니다. 하지만 확률 제로다라는 말은 쉽게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인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확률 제로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럼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은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죄인이 천국에 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열어 주어야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아무나에게 열려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늘의 문은 누구에게 열리느냐입니다. 누구에게 하늘의 문이 열리는지를 알아야 우리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인가를 점검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사람과 살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을 내세워서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한 그 모습이 천국에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나안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것도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기에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서 이방인인 가나안 민족을 쫓아낸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도 나중에는 그 땅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그 이유는 그들도 약속의 땅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전락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 땅에서 살 수 있는 합당한 사람만 허락합니다. 누구만 허락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만 허락합니다. 그 외에는 누구라고 할지라도 용납하지 않는 곳이 약속의 땅입니다. 천국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이 누구를 거부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살피면서 천국에서 거부당하지 않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 22장이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에 '이상 골짜기에 대한 경고'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이상 골짜기'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의 중심도시입니다. 그런데 그런 도시가 심판을 받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하나님보다는 향락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살아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앗수르가 자기들을 공격하려고 하는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깨닫게 됩니다. 8절에 보면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라는 말이 유다가 그동안 보지 못하고 있는 위험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위기를 깨닫게 되자 어떻게 행동합니까?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봅니다. 즉 자신들의 군사력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성의 무너진 곳을 점검하고 무너진 곳을 수리하기 위해서 가옥까지 헐어냅니다. 그리고 전쟁을 대비해서 먹을 물도 준비합니다. 이것이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책망하십니다. 11절에"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그들이 위기가 닥치니까 자기들의 군사력과 힘으로 위기를 이겨보려고 힘쓰고만 있지 지금 이 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위기가 닥쳤는데도 하나님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채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인간의 힘으로 위기를 넘겨 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임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신다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보다는 눈앞의 인간적인 수단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답답하니까 집이라도 허물어서 성을 단단히 쌓아서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만 하지 하나님이 이 일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이스라엘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기 때문에 무슨 일만 있으면 그 일에 매여서 근심과 걱정에 빠질줄이나 알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깨달아갈 의도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처한 위기를 보게 하셔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에 빠져 살았던 잘못을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이라고 합니다.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회개는커녕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라며 방종으로 나아갑니다. 이왕 죽을바에야 실컷 먹고 싶은것 마음껏 먹고 즐길 것 마음껏 즐기다가 죽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으니까 눈 앞의 순간만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막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악은 죽기까지 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가장 신다다운 태도가 무엇입니까?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 가장 신자다운 태도입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자기 뜻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관자가 계십니다. 주관자의 뜻에 의해서 인생이 흘러갑니다. 피조물에게는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불평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결코 용서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 인생을 주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한 사건을 등장시키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보면 '셉나'라는 사람과 '엘리아김'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셉나는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묘실을 팠기 때문입니다. 셉나는 묘실을 만들 수 없는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습니다. 아마 자기 권력을 믿고 왕족만 묻히는 곳에 묘실을 판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셉나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자기 위에 자신을 주관하는 주관자가 있다는 것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즉 왕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셉나를 쫓아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셉나의 자리에 엘리아김을 집어 넣습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엘리아김을 내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얘기가 무엇을 말하느냐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거부하시고 종으로 살아가는 겸손한 자를 용납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국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만 용납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은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의지하고 살면서 천국에 간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아김에게 어떤 일이 주어집니까? 22절에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자가 없으리라"고 합니다. 즉 엘리아김은 천국의 문을 지키는 파수군의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 천국의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천국의 문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천국의 문이 무엇입니까? 마 7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문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좁은 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다고 합니다. 좁은 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결국 지금 천국의 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다윗 집의 열쇠가 주어져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님만이 열 수 있고 닫을 수 있으며 아무도 그 일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보내기 위해서 주님이 부르신 자를 마귀가 방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쁨을 아십니까? 이러한 기쁨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천국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십자가를 체험한 사람들은 천국을 이미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사는 것입니다. 엘리아김이라는 인간이 다윗 집의 열쇠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엘리아김도 나중에는 결국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 종으로 사는 자에게 다윗집의 열쇠를 맡기십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종의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오직 예수님입니다.

 

 

 

 

천국의 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알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의 문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 그 자리가 천국의 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만이 이 기쁨을 알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문을 열어주시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없습니다. 주께서 세상을 어떻게 사셨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못산다 못산다 해도 주님보다는 낫습니다.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해도 주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아무리 애매하게 욕먹고 무시당한다고 해도 창조주이신 주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한 것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자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산다면 못이길 것이 없는데 우리는 자꾸 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살기 때문에 힘들고 억울하고 상처를 입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언제나 겸손의 자리에서 살도록 하십시오. 어떤 일을 당하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며 사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자리가 천국의 문입니다.

 

 

 

 

 

두로의 심판 (사 23:1-7)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찌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 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니라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고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거민들아 잠잠하라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운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었도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보장이 말하기를 나는 구로하지 못하였으며 생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 남자들을 양육하지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니라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을 인하여 통도하리로다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거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유하던 성이냐"

 

 

 


우리가 성경을 보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돈을 싫어하고, 권력을 싫어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시는 하나님이란 생각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나라는 모두다 부강하고, 돈이 많고, 문명이 발달한 그런 나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은 돈이 많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싫어하시고, 세상의 쾌락을 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느낌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대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그런데 23장을 보면 두로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나쁜 짓을 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두로가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로서 자연히 무역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물질이 풍부해지면서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렇게 되면 두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발달한 문명과 문화를 누리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러한 두로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유하던 성이냐"라고 한 말씀에 두로를 '희락의 성'이라고 칭하여 부르고 있는 말씀 때문에 두로는 세상 희락을 누리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은 인간이 세상의 희락을 누리는 것을 거부하신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모든 영광의 교만을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이 말씀을 봐도 하나님은 세상 영광과 존귀함을 거부하신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영광과 존귀가 무엇입니까? 두로와 같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부귀영화를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가난하고 못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의 편이다라는 잘못된 논리가 성립이 되버립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못배웠다는 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부자로 산다고 해서 그것 역시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돈이 적은 자보다는 세상의 여러 가지 혜택을 좀 더 많이 누리면서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또 돈이 없다면 남들처럼 세상 것을 많이 가지지도 못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돈으로 누릴 편리함도 누리지 못하면서 대신 불편함과 고생을 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돈 없이 고생했으니까 돈을 많이 가지고 살았던 사람보다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가산점을 더 얹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라는 불평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세상의 희락을 누리며 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룸싸롱 가면서 문란하게 사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아닙니다. 희락이란 꼭 술집가면서 여자들과 희희덕 거리면서 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희락이란 즐거움입니다. 골프치고, 해외여행 다니고, 고급 자가용 몰면서 고급음식점 드나드는 것만이 즐거움이 아니라 여러분이 집에서 TV보면서 웃고 재미있어 하고 영화 보러 다니는 그런 모든 것이 다 희락입니다. 무엇 때문에 TV를 보고 영화를 봅니까? 모두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보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다 세상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잘못이라면 우린 모두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문명을 버리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명을 버린다고 해서 즐거움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문명이란 인간이 즐거움을 누리는 하나의 도구이고 수단이지 즐거움 그 자체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같이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때에는 또 그때 나름대로의 문명을 가지고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그 시대의 문명을 누리지 않는다고 해서 즐거움, 곧 희락을 버린 것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는 쪽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산속으로 들어갔다면 그 산에서라도 나름대로 자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즉 여전히 희락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돈을 쓰지 않고 문명을 누리지 않는다고 해서 희락을 떠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락이 나쁘다 그러니까 희락을 누리지 마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희락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신자는 모두가 금욕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금욕이란 자신의 즐거움을 스스로 통제하고 절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로는 왜 심판을 경고 받아야 합니까? 12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두로를 바벨론에 망하게 하심으로 모든 희락과 평안을 빼앗아 버리시겠다는 말씀을 보면 분명 두로의 멸망의 원인은 희락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희락 자체를 잘못으로 보지 않으신다면 왜 두로가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두로가 희락을 누리지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역을 그만두고 부자가 되지 않고 문명의 발달을 위해서 힘쓰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희락을 누리는 것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도 아닙니다. 희락이 지나치다 지나치지 않다는 기준을 어디에 둘 수 있습니까? 두로가 심판을 받은 이유는 한마디로 희락을 전부로 알고 살아간 것 때문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세상의 재미를 누리며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신자라고 해서 불신자보다 금욕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희락 속에 살면서도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불신자와의 차이입니다. 즐거움을 누리며 살면서도 마지막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살기 때문에 마지막때 자신을 살리는 생명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희락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희락을 누리되 희락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두로의 잘못은 희락을 누린 것이 아니라 희락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 선지자가 외치는 경고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무엇 때문에 편안하게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는 그들 앞에 서서 마지막을 외치고 있습니까? 희락이 전부가 아니고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선지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희락은 나쁜 것이니까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희락이든 재미든 누릴 수 있으면 다 누려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 덕인가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재미있게 살아가지만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면서 살지만, 내 마음속에는 변함없이 주님이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세상의 희락을 누리고 사는 자들을 향한 경고가 아니라 희락이 전부이고 돈이 전부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자신의 즐거움이 전부이다 보니까 마지막이 있음을 잊어버리게 되고 희락 속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희락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자를 향한 경고입니다. 희락 때문에 주님을 무시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두로를 희락의 성이라고 부른 이유는 희락으로 가득 차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희락에 빠져서 희락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희락이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고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마지막을 외치는 선지자의 음성에도 귀를 막고 외면해 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희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교를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일반대학을 가는 것은 사람의 뜻이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을 담아두고 살아갈 때 그 신자는 세상을 편안하게 살든 즐거움을 누리며 살든, 아니면 고생을 하며 살든 상관없이 언제나 그 중심은 그리스도일 것이고 그렇다면 희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 것이고, 고통 속에서도 은혜를 알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비록 남들보다 가진 것이 없이 고생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불평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신자에게는 신앙적인 삶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로 같이 희락을 누리는 것은 신앙적인 삶이 아니다라고 해버리면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금욕을 주장하는 분이 되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성경연구하고 설교준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 신앙적인 삶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앙적인 삶을 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종교적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신앙적인 삶이라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들은 하나님이 목사에게 맡기신 일이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맡겨진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그것이 신앙적인 삶이거나 거룩한 삶이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진 그 일이 하나님이 맡기신 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꼭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해야 신앙적인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이 흐르고 있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해도 그것은 신앙생활입니다. 희락을 누리든 무엇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느냐'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희락이 너무 좋아서 마지막을 외치는 음성을 듣기를 싫어하거나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따로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가슴속에 십자가의 피가 흐르고 있는가만 보십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식이 잘되는 것을 주님의 십자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귀하게 여기는 신자가 자식이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자식의 출세가 쓸데없는 문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자식의 출세에 연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것에 욕심을 가지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겠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세상에 욕심을 가지고 살아감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그순간 주님이 나에게서 무시당하고 외면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욕심을 가졌다고 해서 잘못이 아니라 욕심 때문에 그리스도를 외면해 버린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을 마음에 두고 사십시오. 지금 세상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할만큼 좋은 것이 많고 편안한 세상입니다. 편안하게 살고 희락을 누리며 살든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잊어버리지 않게 해달라며 기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땅의 기쁨 (사 24:1-13)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무하게 하시며 뒤집어 엎으시고 그 거민을 흩으시리니 백성과 제사장이 일반일 것이며 종과 상전이 일반일 것이며 비자와 가모가 일반일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일반일 것이며 채급하는 자와 채용하는 자가 일반일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일반일 것이라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거하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거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으며 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하며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하며 소고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마치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 노래하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독주는 그 마시는 자에게 쓰게될 것이며 약탈을 당한 성읍이 훼파되고 집마다 닫히었고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암흑하여 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으며 성읍이 황무하고 성문이 파괴되었느니라 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 같을 것이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각기 경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전들의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인간을 좀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의 목적으로 기록되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종교의 추구점은 현세에서 인격적인 인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이 생각하는 선의 도리를 다하다가 내세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상을 받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러한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적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하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제가 적당히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은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분명한 선을 그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이란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지켜져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즉 자기를 포기하면서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삶도 자신의 유익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반박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종교를 따르지는 않지만 가르치는 내용은 맞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지향하는 것이 착한 사람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자'는 것에 누가 반대를 하겠습니까? 착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말하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되면 그 세상에 몸담고 사는 자신에게도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교육시켜서 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부터 마지막 심판하실 때까지 이 땅에 대해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계시되어 있는 책입니다. 이 우주를 어떻게 움직여 나가실 것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 스스로 밝혀 놓으신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세상 종교의 경전에서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인간들이 상상하는 좋은 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종교의 경전에는 인간을 위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만 성경은 인간을 위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믿든 믿지 않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믿어달라고 사정하지도 않으시고, 믿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지도 않으시고, 또 믿는다고 해서 특별히 이뻐해 주시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자신에게 합리적이고 자신에게 상식적인 인간은 자신에게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성경은 믿지 않도록 되어 있고, 만약 믿는다면 하나님이 믿도록 하신 것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서 특별 대우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믿든 안믿든 관계없이 하나하나 진행되어 가고 이루어져 갑니다. 믿는자가 적다고 해서 계획이 늦추어지거나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때에도 믿는자가 적다고 해서 심판을 늦추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의인이 없다고 해서 심판을 취소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될수록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심판을 보류하시고 참고 계신다는 것은 인간들의 상상에 불과합니다. 심판의 때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때가 되면 구원받을 자가 몇 명이냐에 상관없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세상은 망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서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느냐를 살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인간을 기분 좋게 해주는 말이 없습니다.

 

 

 

 

세상 종교의 경전은 읽으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래 맞는 말이다. 나도 이런 인간으로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데 반하여 성경에는 인간을 기분 나쁘게 하고, 반발이 나게 하는 말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누가 해야 하느냐면 선지자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하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이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이라면 선지자로 사는 것은 전혀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궁중선지자들은 왕에게 기분 좋은 말만 해줬기 때문에 편안한 삶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참된 선지자는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하든 반발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선지자는 애매하게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욕을 먹으면서 돌에 맞기도 하고 죽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특별한 대우가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선지자로 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참된 신자로 산다는 것도 역시 힘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사람들이 반발하고 기분 나빠할 수밖에 없는 말을 하게 하심으로 무엇인가를 구분하시고자 합니다. 그것은 장차 메시아가 세상에 오실 때 누가 과연 메시아를 주로 영접할 것인가를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확인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나중에 틀림없이 메시아도 주로 영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실 말씀은 선지자의 말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장차 오실 메시아의 말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말의 내용이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추구하는 의미가 같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선지자의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고 듣지 않으려고 하고 선지자를 욕하고 때리고 죽인다면 결국 장차 메시아에게도 같은 행동을 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사랑하시는 증거는 오늘 이 시간 선지자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선지자는 지금 우리를 심하게 나무라고 있고 욕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말이 귀에 거슬리고 반발이 되고 싫어한다면 결국 예수님의 말씀도 반발하고 듣기 싫어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세상을 향해서 경고를 합니다. 선지자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세상이 좋다고 웃고 떠들면서 좀더 기쁘고 좀더 재미있게 살아보고자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벌었다고 좋아하고, 그 돈으로 좋은 집사고 맛있는 음식 사먹고 좋은 옷 사 입으면서 세상 살맛 난다고 좋아하고 있는데 그런 세상을 향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무하게 하시며 뒤집어엎으시고 그 거민을 흩으시리니"라고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 사람들 속에 뛰어들어서 훼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선지자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가 세상에서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8절에서 기쁨이 그칠 것이라 하고, 9절에서는 술을 마셔도 즐거움이 없을 것이라 하고, 11절에서는 땅의 기쁨이 소멸될 것이라고 외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세상을 기쁨을 누린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땅의 기쁨만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것 때문입니다. 땅의 기쁨만 추구하고 하늘의 기쁨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땅의 기쁨이란 아주 단순합니다. 땅의 기쁨은 자신을 돋보이는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남을 이기고, 자신이 드러나고, 자기 이름이 알려지고, 칭찬 받는 이 모든 것이 기쁨을 누리는 조건들입니다.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의 관심도 자기를 돋보이는 것입니다. 남에게 무시 받고 따돌림당하는 것을 큰 고통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무시당하지 않고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다수 아이들의 행동이나 옷차림을 같이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돋보이지 못하면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습니다. 친구를 만나도 자기를 돋보일 수 있는 뭔가가 하나라도 있어야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랑할 것이 없을 때는 만남을 기피하게 됩니다. 남들은 자랑하는데 자신은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고통이고 자존심 상하는 문제이고 또 즐거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남을 이기는 즐거움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욕망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있는 여건과 환경이 자신의 그런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사람은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 원망을 하게 되고 분노를 품게 되며 평소에는 나타내지 않던 그 분노가 술을 먹었을 때 자제되지 못하고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즐거움과 기쁨은 자기를 돋보이는데서 얻어집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즐거움이고 기쁨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세상을 향해서 너희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그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단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 때문은 아닙니다.

 

 

 

 

5절을 보면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즉 그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언약을 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까? 율법에는 세상의 기쁨을 누리지 말라는 것이 없습니다. 언약에도 세상 기쁨을 누리지 말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 언약은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을 인하여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즉 그들은 세상의 기쁨에 빠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맨처음의 율법은 유월절 규례입니다. 하나님은 이 규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정신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정신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나에게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안다면 자기를 돋보이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구원을 아는 자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가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내느냐를 보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이름을 돋보이므로 세상의 기쁨을 누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이란 이름은 단지 자신을 천국 보내는 효용으로서만 가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너희가 지금은 세상것 때문에 기뻐하는데 그게 언제까지 가나 보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면 인간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은 그치고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백성과 제사장이 일반일 것이며 종과 상전이 일반일 것이며 비자와 가모가 일반일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일반일 것이며 채급하는 자와 채용하는 자가 일반일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일반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눌린 자와 누르는 자, 있는 자와 없는 자, 천히 여김 받는 자와 귀히 여김 받는 자를 서로 비교하면서 마지막 때는 이것의 구분이 없이 서로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는 자신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는 조건들이 마지막 때에는 전혀 가치 없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를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상의 기쁨, 즐거움을 누리며 사십시오. 하지만 그 기쁨이 자기를 돋보이는데서 나오는 기쁨이라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자기를 돋보이면서 기뻐할 때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분으로 인해서 감추어지고 무시를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에 의해서 눌려지고 상처를 입은 자가 발생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남들이 무엇을 자랑하든 자신을 드러내든 신경 쓰지 마시고 그 모든 것이 마지막 때에는 다 사라지고 그칠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에 관심을 두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늘의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 (사 24:14-23)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을 인하여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궤휼자가 궤휼을 행하도다 궤휼자가 심히 궤휼을 행하도다 하였도다 땅의 거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임하였나니 두려운 소리를 인하여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침망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향해서 기쁨이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심판을 말하는 것은 세상의 기쁨으로 인하여 천국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모습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천국을 마음에 두고 사십니까?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에서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벌리고 아이들이 공부를 잘할 때, 또 다른 기쁜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하면서 기뻐하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전혀 다른데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인생을 나그네, 안개, 풀의 꽃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자리에 영원토록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에 사라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인생을 이렇게 묘사하는 이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잠시 거할 곳과 영원히 거할 곳의 구분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의미를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라면 당연히 잠시 머무는 곳에서의 기쁨보다는 영원히 거할 곳의 기쁨이 더 비중이 커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신자가 진심으로 천국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물론이고 안다고 하는 사람도 천국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오직 땅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 몸바쳐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보다는 육신의 편안함과 행복의 문제가 더 우선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우선 내 인생이 편안할 때 생각할 문제로 여겨버리고 삽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보혈보다도 내 행복을 더 귀히 여기고 세상의 기쁨을 더 좋아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눈독을 들이고 살아가니까 당연히 그 머리 속에서 천국이 사라집니다.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세상에 치우쳐서 천국을 천국으로 여기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장차 천국도 그들을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필연코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버림입니다. 버림이 없는 천국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버림은 무가치한 것에 대한 행동입니다.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에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천국의 가치를 발견한 자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버림이기 때문에, 버림이 없다면 영광의 하나님 나라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천국은 천국의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심판과 연결됩니다. 심판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됩니다. 그 새로운 것은 현재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악한 것이고 더러운 것이고 썩어질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현재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들은 마지막 때에 남아 있지 않을 것들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로 새롭게 교체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이는 것을 포기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모든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들어야 할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고 버리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이 말 외에 다른 말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석교회에 이사야, 예레미야 등 구약의 선지자들이 다시 와서 설교를 한다고 해도 같은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이 아닙니까? 스데반이 다시 살아서 설교를 해도 마찬가지이고, 바울 사도가 와서 설교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설교를 해도 여러분은 같은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선지자 사도 예수님이 하셨던 말을 그대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여러분을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신 것은 천국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여러분들이 천국에 갈 수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때문에 항상 목사 입장에서 여러분께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에 나오실 때 여러분 자신을 부수고 깨뜨리고 찌르는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천국 가는데 도움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나와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전혀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요즘 교회를 보면 교회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상하게 교회가 있다는 것이 신자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신자를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줘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물론 모든 교회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알도록 돕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천국도 말하고 그리스도도 말하고 십자가도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그래 세상은 다 사라지고 썩어질 것밖에 안된다.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렇게 뭔가를 포기하고 버리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에는 희미하게 만들고 반면에 버려야 할 것에 소망을 두게 한다면 그것이 신자를 돕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방해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배로 비유한다면 사람을 태워서 건너편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낸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교회는 사람들이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사람들이 건너편으로 건너가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 아닙니다.

 

 

 

 

유람선은 배를 아름답고 호화롭게 치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즐거움을 손님들에게 제공을 해줘야 합니다. 유람선은 건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재미있게 노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꼭 유람선과 같습니다. 건너가야 할 목적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없이 배에 탄 손님들에게 향응을 베풀고 즐거움을 제공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만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교회는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탄 배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지금 가고 있는 건너편에 대해서 알려주면 됩니다. 이미 떠나온 세상에 미련 두지 않고 지금 건너고자 하는 목적지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교회가 신자를 돕는 것인데 지금 교회는 유람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말한다면 과연 너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보이는 것을 포기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보이는 것에 집착하도록 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좋으면 천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이 있는데 어느 정신나간 사람이 좋은 것을 버리고 보이지도 않는 것에 목숨걸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더 관심을 두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바램은 은석교회가 바로 그런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하신 말씀을 그대로 여러분께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심판을 많이 말씀드렸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어쩌면 굳이 심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세상은 망한다는 것을 잘 아니까 심판이야기는 이제 대충 넘어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심판을 몰라서 심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알면서도 아는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심판을 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는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심판을 아는 사람답게 살아가십니까? 그것을 점검하자고 다 아시는 심판의 이야기를 또 다시 하는 것입니다.

 

 

 

 

19,20절에 보면 심판 때의 땅의 모습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왜 마지막 때의 땅의 모습을 이렇게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지금 세상 사람들이 취해서 살아가는 땅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땅의 영광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장차 깨어지고 흔들리고 갈라지고 비틀거릴 땅과 함께 사라질 운명에 들어 있습니다. 반면에 장차 나타날 영광은 참으로 귀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해서 땅의 영광은 버려도 좋을 만큼 가치 없는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 할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영광 때문에 우리는 땅의 영광은 포기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를 통한 심판의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대로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해서 세상 영광은 형편없는 것이고 진심으로 다 사라지고 버려져도 좋을 만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장차 나타날 영광이 좋으면 뭐합니까? 정작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영광을 모르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영광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은 영광의 가치를 아는 자에게 해당됩니다. 영광의 가치를 아는 신자들만이 '그 영광 때문에 나는 세상의 것을 잃어버려도 좋습니다'라고 할 것이고 천국은 바로 이런 분들이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일을 돕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남들보다 좀 어렵게 살고 힘든 일을 겪는다고 해서 거기에 너무 마음쓰며 살지 마십시오. 마지막 때의 영광된 장래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까지 여러분 홀로 신앙을 지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도우시고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사건과 사고 속에서 지키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구해주기 위해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고난과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함께 하시고 도우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빼내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는 천국을 위해서 세상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고 도우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린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며 도우셔서 우리를 때리시면서까지 가르치셔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선지자의 외침을 들으면서 우리가 너무 세상에 눈독을 들이고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도우십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사는 새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목사는 자신이 목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목사가 목사라는 지위 아닌 지위를 잊어버리지 않을 때 교회로부터 대우받으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장로도 자신이 장로라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신자는 오직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찾을 뿐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모습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사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할 것은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자는 버리기 위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 땅의 심판을 말하는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서 과연 나는 세상에서 멀어지고 버리는 사람으로 살아왔는지 아니면 반대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천국에 대해서 희미해지는 자로 살아왔는지 자신을 점검하며 심판을 기억하고 사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눈물 (사 25:6-1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 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의 초개의 밟힘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그가 헤엄치는 자의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 교만과 그 손의 교활을 누르실 것이라 너의 성벽의 높은 보장을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

 

 

 


지난 시간에 땅이 깨어지고 흔들리고 갈라지는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25:1절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이 말씀을 보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행하시는 것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서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원하는 것은 세상 나라가 발전하고 번영하며 사람들이 살기에 편한 지상 천국 같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이 땅이 깨어지고 심판을 당해도 좋으니까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사사로운 인간 개인의 뜻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망하든 흥하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선지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사야서를 살펴보면서 선지자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기도한 흔적이 있었습니까? 발전과 번영은커녕 오히려 '너희들 그렇게 하다가는 망한다'는 심판만 계속해서 선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66장 끝까지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는 죄로 더러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세상은 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개인적인 마음은 다 접어둔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만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앞에서 인간 개인의 뜻은 고개를 내밀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 개인의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고집을 부린다면 더욱 죄를 쌓아갈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비춰볼 때 종종 기독교계에서 행해지는 '국가의 발전과 번영을 위한 조찬기도회'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남북한의 통일을 위해서,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기도회를 하고 거기에 소위 이름있다는 목사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 사도들이 국가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또는 왕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있다면 궁중에서 왕의 비위를 맞추면서 왕이 듣기에 좋은 말만 해주고 평안하다 편안하다는 말만 했던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오늘날의 조찬기도회라는 것이 그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매일이라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이 있습니까? 남북한의 통일이 있습니까? 왜 통일에 목적을 두고 발전과 번영에 목적을 두고 삽니까? 통일과 발전과 번영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심판으로 들어가고 그때 다 함께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이 아닙니까? 통일이 심판을 이기게 하고 번영한 국가가 심판을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은 분명히 다 불에 타서 사라진다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통일이 되든 발전을 하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통일과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완성될 그날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의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소원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주기도문에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있는데, 우리는 주기도문을 할 때만 아니라 답답하고 막막한 일이 생기거나 일이 잘 안풀려갈 때 기도하면서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아무 생각없이 섣불리 할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에 맡긴다는 기도는 선지자의 마음으로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선지자의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 결과가 좋고 나쁘고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으로 찬송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좋은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잘못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결과에 순복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심으로 선지자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판을 보고 찬송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주님의 뜻을 말하면서 편하고 좋은 길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주님의 뜻에는 좁은 길만 있을 뿐이지 편하고 좋은 넓은 길은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좁은 길로 인도하시고 험하고 고통스러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신자가 진짜 선지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주님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진행시키시는 분입니다. 그 뜻대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주께서 성읍으로 무더기를 이루시며 견고한 성읍으로 황무케 하시며 외인의 궁성으로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영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라고 말합니다. 땅위의 성읍을 무너뜨리시고 황무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만약 이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끝난다면 신자가 바라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심판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6-8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어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만민을 위하여 기름지고 좋은 것으로 잔치를 베푸시고, 사망을 멸하시고, 눈물을 씻기시고, 수치를 제하신다는 것이 심판에 이어서 나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은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뒤에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마지막까지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근시안적인 시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눈앞의 것에만 집중함으로 마지막에 주어질 영광스러운 것을 놓치고 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많은 고통과 욕과 수치를 받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뒤에는 신자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수치를 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 과정만 보면서 쉽게 낙심해 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수치를 제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신자는 눈에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고 수치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눈물을 씻겨주시기 위해서는 흘린 눈물이 있어야 하고, 수치를 제하여 주시기 위해서는 받은 수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흘린 눈물이 없고 받은 수치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눈물을 씻겨주실 수가 있고 수치를 제하여 주실 수가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마지막 뜻은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 때문에 눈물 흘리고 수치를 받고 욕을 먹으며 살았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계시록에도 나옵니다. 7:17"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러라" 또 21:4에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때 있을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의 성실하심과 진실하심으로 이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고 사는 신자라면 이 땅에서 어떤 고통과 수치와 욕이 있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위로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겪는 손해, 고통, 수치 등 모든 것은 마지막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눈물을 씻겨주시고 수치를 제하여 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마지막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겪든 그것이 결코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중에서 일어나는 일에 너무 집착을 하지 맙시다. 마지막 목적지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만 생각하며 삽시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눈물이 없는 삶을 원하지만, 신자가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마지막때 하나님이 씻어주실 눈물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 땅에서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없으면 마지막때 받을 위로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래도 세상을 좀더 편하게 넓은 길로 가면서, 좁은 길은 될 수 있으면 피하면서 살고 싶습니까? 마지막때 주님이 위로해 주고 싶어도 받을 위로가 없는 신자로 남고 싶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신자는 좁은 길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주의 뜻입니다. 우리가 신자로 세상을 살려고 한다면 도저히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좁은 길은 마지막 때도 계속 좁은 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좁은 길에서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마지막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위로만 잊지 않고 산다면 지금 세상에서의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길을 간다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다고 여겨질 때 쉽게 낙심하지 마시고, 아직 천국을 향해 가는 도중이고 마지막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마지막까지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부터 하늘의 위로를 미리 맛보며 살 수 있을 것이며 힘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길에는 눈물도 없고 괴로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천국에 가는 길에서 험하고 나쁜 것은 다 제해 버립니다. 오로지 편안하고 휘파람 불며 여유 있게 놀면서 가는 천국을 제공합니다. 뭔가 인내해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극복해야 되는 것은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 때문에 눈물이 될만한 일을 다 피해버립니다. 수치를 받을 일도 다 피해버립니다. 눈물도 없고 수치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도중에도 눈물이 없고, 장차 천국에 들어가도 눈물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눈물을 흘릴 일이 없었던 자에게 위로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눈물도 없이 수치도 없이 살았던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겠으며 위로한들 그 위로가 기쁨으로 다가오겠습니까?

 

 

 

 

마지막 때는 위로와 함께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8절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는 것'입니다. 사망이란 죽는다는 것인데 그것을 멸한다고 합니다. 존재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망이란 우리의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이 멸망을 당한 것 같이 죄인인 우리도 함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씻어주시겠다고 합니다. 이 날을 기억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이 기쁨으로 열심히 주의 길을 가는 신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 흘릴수록 하나님은 그만큼 많은 위로로 여러분의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의인의 길 (사 26:1-10)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 이로다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뜻은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이어서 성도의 눈물을 씻어주시는 것까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과연 나에게는 주님을 위해서 흘려진 눈물이 있느냐?'는 점을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모든 눈물을 흘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대부분 주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흘려지는 눈물입니다.

 

 

 

눈물이란 자존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존심이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데,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불평과 불만에서 나오는 것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눈물까지 씻어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님 때문에 흘려진 눈물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흘린 눈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인가?' 라는 점입니다. 나를 위해 사는 인생이라면 눈물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눈물일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핍박 속에서 흘려지는 눈물일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육신이 잠시 머물러 살아가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인해서 힘든 일이 있다 할지라도 마지막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참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롬 5:3,4절을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신자가 소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소망이란 마지막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재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소망은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흘러간다는 것을 아는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일임을 믿습니까? 이것만큼은 잊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요즘 세상을 산다는 것이 많이 피곤하고 힘이 드실 것입니다. '사는게 뭔지'라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전쟁터이고 고통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래도 사람들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 꿈이 무엇입니까? 꿈은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향한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꿈은 육신이 잘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일이 꼬이고 잘 안될 때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으려면 방해나 하지 마십시오'하고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댑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인생이 피곤하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도 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향을 받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도무지 하나님의 영향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앞에 두고 살고 말씀을 수시로 읽고 들으면서도 말씀의 영향은 전혀 받지 않고 사는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관공서에 가면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대통령 일굴 익히라고 대통령의 사진을 걸어 놨겠습니까? 관공서에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은 '우리는 대통령의 다스림을 받는다.' 이런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무원들이 과연 사무실에 붙어 있는 대통령의 사진을 보면서 그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까? 대통령은 부정부패를 없애자고 강조하는데, 대통령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사람들은 대통령 사진 앞에서 버젓이 부정부패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단지 관공서에 붙어 있는 대통령 사진 정도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있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뜻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두 무시해 버리고 자기의 뜻과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꿈을 앞세우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영향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에게도 힘이 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의 힘을 빌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돈, 직장, 집, 자식, 남편, 살아가는데 필요한 있을 것은 다 있는데 뭔가 아쉬워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현대교인들이 천국을 기다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제대로 된 신자, 즉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영향을 받아 살면서 주님을 위해 살다가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장차 하나님이 손수 눈물을 씻어주실 신자는 과연 누구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5절 6절을 다시 보면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데 거하는 자, 솟은 성으로 표현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며 세상의 좋은 것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마지막때 낮추고 헐어버린다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좋아 보이고 세상에서 높은 것이 영원토록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지고 헐어지며 짓밟음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누구에게 짓밟게 하십니까? 빈궁하고 궁핍한 자입니다. 즉 빈궁하고 궁핍한 자들이 마지막 때 천국이 오면 세상을 지배하고 짓밟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억눌렸던 한을 풀게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지금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구약에서 빈궁하고 궁핍한 자들을 등장시킬 때는 항상 '자기들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의미로 등장시킵니다. 가진 것이 없고 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믿지도 바라보지도 못하고 항상 제삼자의 도움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바로 빈궁하고 궁핍한 자들입니다. 즉 '가난한 자'의 의미는 '자기 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천국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힘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의지하고 힘으로 삼을 것이 하나도 없이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심령이 가난하다고 합니다. 나에게 돈이 없어서 슬프고, 남들은 다 좋은 집을 사서 잘사는데 나는 셋방살이하는 것 때문에 한스럽고, 남의 아이들은 착하고 공부 잘하는데 내 아이는 왜 공부도 못하고 속만 썩이나 하면서 슬퍼하고 한탄하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세상은 믿음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드물고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슬퍼하고 한탄하면서 의에 대해 주려하고 목말라하는 그런 신자가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믿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 건강, 출세, 이런 것들은 있다가도 없는 것입니다.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없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역시 주관자는 하나님 아니십니까? 남보다 실력 있다고 해서 그 실력을 믿지 마십시오. 공부 잘한다고 해서 그 지식의 힘으로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돈을 벌고, 건강한 몸으로 직장 다니고 공부를 하는 가운데서도 지금 나는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인생을 움직여 나가시는데 우리가 힘이 되고 도움이 되어 드린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도 열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또한 하나님 마음대로 인도해 가십니다. 여러분의 꿈과 희망이 무엇이든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 홀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인도 받는 삶을 살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 뜻대로 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면서 찬송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감상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속에서 울고 웃고 짜증내고 화내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오시면서 기뻐서 웃었던 것, 슬퍼서 울었던 것, 분냈던 것, 이런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웃을 일도 울 일도 화낼 일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야 항상 웃을 일만 있기를 바라면서 살지만 웃을 일을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린 우리의 인생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그저 나에게 좋은 일이면 웃었고, 나쁜 일이면 울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하고, 정 안되면 하나님께 지금 인생이 마음에 안드니까 내 마음에 드는 쪽으로 바꿔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드라마입니다. 하나님이 각본을 쓰시고 하나님이 연출하시는 드라마입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데 드라마 내용이 내 마음에 안든다고 바꿔달라고 하면 방송국에서 그 요구대로 바꿔줍니까?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힘든 일이 있든 편하게 살든 그것은 하나님의 각본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죄가 많아서 힘들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기도할 때도 '하나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게 하소서'라고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좋은 것만 은혜가 아니라 나쁘다고 생각되는 환경에서도 은혜를 발견합니까? 모르겠으면 그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더 좋은 것을 얻으려고 기도하지 말고, 현재 나에게 주어진 것만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런 신자가 마지막때 주의 궁정에서 거할 수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악인도 은총을 입고 삽니다. 햇빛, 물, 공기 등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은총을 모릅니다. 은총으로 살면서도 은총을 모르는 것이 곧 악인의 모습입니다. 모두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잘되면 자기 힘을 과시하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마지막때 멸망을 받는 사람들은 은혜를 안받아서 멸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살았으면서 자기 힘으로 살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멸망 받습니다. 오늘 우리도 은혜로 삽니다. 주어진 은혜가 어떤 것이냐에 관심 두지 마십시오. 저 사람이 받은 것이 내가 받은 것보다 더 좋다는 생각일랑 모두 버리십시오. 어떤 은혜를 받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주어진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의인의 길을 걸어가는 제대로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인의 길을 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포도원 (사 27:1-6)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사람들의 선악체계는 항상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시작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들이 무엇을 두고 좋다, 또는 나쁘다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을 자기에게 두고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에게 이로운 것이면 좋은 것 선한 것이 되고 자기에게 해로운 것이면 나쁜 것 악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선악체계에 빠져서 살아가게 된 모습입니다. 인간은 이 선악체계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고,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 진리의 말씀대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의 특징이라면 인간의 선악체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자가 성경을 보거나 설교를 들을 때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선악체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성경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선악체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말씀을 대하게 되면 결국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나에게 이로운 말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손해가 되고 해로운 말이면 성경적이 아니고 복음이 아닌 이상한 말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기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틀렸다, 맞다라고 결론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을 말하면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이상하다, 틀린 말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상하다, 틀렸다고 말하는 이유는 기존 교회에 유익이 안된다는 것 때문입니다. 교회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교회의 발전을 방해하고,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의 권외를 불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소위 내 목회에 도움이 안되는 말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선악체계이고, 곧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지상에 세워진 교회를 부흥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누구든지 자기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로 영접한 자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 앞에 서면서 그리스도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를 앞세우고 내 탐욕을 앞세운다면 그런 사람에게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 들려진들 과연 진리로 인정을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진리는 내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진리요 내 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이 진리요, 교회라는 자신의 취미생활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진리일 뿐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오해하게 합니다. 그 오해의 결과가 교회가 부흥되고 인생이 잘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반대로 교회가 갈수록 쇠퇴하고 하는 일마다 잘 안되는 것은 사탄이 한 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탄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탄이 자신에게 해를 입힌다고 믿습니다. 물론 사탄은 우리에게 해를 입힙니다. 그런데 어떤 해를 입히느냐가 다릅니다. 보통 생각하기는 사탄은 교회가 부흥이 안되도록 하고, 신자들의 하는 일마다 방해하고 병이 들게 하고 집안에 우환이 생기게 해서 신앙을 방해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탄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안에 우환을 가져오고 질병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최초에 나타난 사탄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처음 접근할 때 사탄이 한 일은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같이 된다' 이것이 사탄이 인간에게 한 말이었는데 이 말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인간은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됩니까? 소위 요즘 많이 유행하는 말로 '비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떤 비전입니까? 하나님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비전이고 소망이고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 하와가 바라본 선악과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열매로 보였던 것입니다. 저것만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열매가 달리 보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란 존재는 하와에게는 귀찮은 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같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선악과를 하나님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사탄은 그때와 똑같이 인간에게 비전, 꿈이라는 것을 갖게 합니다. 지상세계에서 자신이 잘되어야 한다는 꿈을 심어 주었고 그 꿈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것은 선한 것,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방해하는 것은 악한 것, 즉 사탄이 하는 일이라고 믿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꿈을 꺾어버리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사탄은 인간의 꿈을 성취시켜주는 쪽으로 일합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꿈을 가진 인간에게는 사탄이 친구이고 하나님은 방해꾼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교회 부흥이라는 꿈을 가지고 목회하고, 인생의 행복이라는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교회 부흥을 돕고 인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가장한 사탄의 말에 속아 살아가는 소위 신자라고 하고 목회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길 외에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좁은 길에만 생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좁은 길이 달리 좁은 길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꿈과 소망을 포기하고 주님이 가신 길에다가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넓은 길을 말합니다. 넓은 길에는 인간의 비전과 꿈과 환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꿈을 성취시켜 주기 위해서 일하시는 가짜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넓은 길입니다. 단호하게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예수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해도 그 결론이 인간의 꿈과 소망을 부추기고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끝난다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만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것들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고 세상 것을 힘으로 삼고 살게 됩니다. 그것이 곧 사탄입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것도 바로 사탄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은혜로 살아가려고 할 때 사탄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은혜에 대해서 실망하게 하고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하려고 힘씁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수없이 말씀을 듣고 성경을 봐왔지만 말씀을 실천하며 살수가 있었습니까? 듣긴 들었고, 또 내가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대로 아는 대로 살아오지 못했던 것이 바로 우리들 아닙니까? 말씀 때문에 세상에서 눈을 돌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어떤 일로 인해서 은혜는 사라져 버리고 다시금 미움과 짜증과 다툼이 일어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 사탄의 일입니다.

 

 

 

 

이 사탄을 우리들의 힘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기십니다. 1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고 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뱀, 용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죽이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됩니까? 2,3절을 보면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포도원은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죽이시고 하나님이 포도원지기가 되셔서 하나님이 가꾸시고 아무도 상해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말해줍니다. 사탄을 이기는 것도, 천국을 이루는 것도,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도 모두가 우리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입니다. 신앙 생활은 우리 힘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주셔서 그 힘으로 사탄을 물리치며 신앙 생활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를 자랑하게 됩니다. '내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힘을 주시더라'고 자신이 한 행동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꾸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래서 천국에서는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5절에 보면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화친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힘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상태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인간이 마음만 강하게 먹으면 충분히 이겨내고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한다고 해서 사탄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으로 사탄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자신의 신앙을 믿고 자기의 힘을 믿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사탄을 이기신 상태를 말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졌을 때만을 천국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사탄을 이긴 상태로 살아가면 이미 천국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을 이긴 상태라는 것은 하나님이 포도원지기가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가꾸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포도원에 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힘만 의지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친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천국은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게 되면 남들보다 부족한 자신의 힘에 대해서 한탄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은 힘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힘이 있는 자인가 아니면 남들에 비해서 힘이 없는 자인가를 비교하고자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족하지 못하고 내 힘없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언제나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이 포도원지기로서 살아계시고 여러분 자신을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계신다는 것에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6절에 보면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지키시는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화친하며 사는 참된 이스라엘이 움이 돋고 꽃을 피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탄을 이기는 것도 우리를 가꾸어 가는 것도 모두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장차 새하늘과 새땅에서 참된 이스라엘로 결실을 맺는 길입니다.

 

 

 

 

 

백성 (사 27:7-13)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은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살륙을 당하였은들 백성을 도륙한 자의 살륙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 죄를 없이 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하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로 부숴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으로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이 되어 광야와 같았은즉 송아지가 거기서 먹고 거기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이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자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자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일일이 모으시리라 그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선택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택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미리 예정해서 선택해 놓으시고, 그 선택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교리인데 이 선택론이 이상하게 오해가 되가지고 사람들이 쓸데없이 선택론에 빠져서 의혹을 가지기도 하고 자신이 선택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보려고 하는 나쁜 풍조까지 만연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목사들이 선택론을 가르칠 때 어떤 식으로 가르치는가하면 '하나님은 만세 전에 이미 자기 백성을 택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한번 택하신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꼭 구원하시고야 만다. 때문에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은 아무리 타락의 길을 가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기어코 구원시키시고,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싶어도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쓴다고 해도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또 선택 다음에 견인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견인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붙드심' 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죄를 짓고 타락해도 하나님의 손이 그를 붙들고 놓지를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결국 백성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다 보니까 성도들의 마음에 어떤 유혹이 일어나는가 하면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냐?'는 것을 확인해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의 모습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나는 선택받았는가?' '나는 구원받았는가?'에 대해서 확인해 보고 싶어하겠습니까? 그것은 뭔가 안심하고 싶어서입니다.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면 '나는 이제 적당히 죄가운데 살아도 하나님이 기어코 구원하시겠구나'라는 쪽으로 선택을 이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안감 없이 마음대로 죄짓고 싶어서 선택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이런 생각이 있으면 빨리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선택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선택입니다. 유대인들은 선택을 자기들을 위한 선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이방인과 달리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구원을 보장받은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기들을 위한 하나님이었고, 모든 일을 자기들 중심으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생각이 잠재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란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부분을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그 중에 하나가 선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오류가 뭐냐면 선택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선택으로만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선택하셨다' 이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렇게 선택을 자신의 구원에 연관시켜서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히 자신의 선택 여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엡 1:4-6을 보겠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사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아들로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아닙니다. 6절에 보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셔서 아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을 통해서 찬미를 받으시고자 아들들을 택하신 것이지 구원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지, 선택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자신에게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거저 주신 은혜를 찬미하는 사람인데 나는 과연 은혜를 찬미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엡 1:11,12을 보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도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시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입으로 부르는 찬송 말고,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선택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은혜를 찬미하게 하기 위한 선택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도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택하셔서 일하신 것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고 계시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지 그들 개인개인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관심을 자기 개인의 구원에 둘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나님이 은혜를 찬송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관심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거저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선택받은 아들이라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지금 은혜를 찬송하니까 선택받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타락해도 하나님이 다시 부르시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죄가운데로 간다면 그 사람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누가 선택받은 자인가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 한순간 신앙인으로 산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든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세상에서 사는 마지막까지 아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는지 날마다 살피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들로 택함 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름다운 포도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포도원지기가 되셔서 포도원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데 그 속에서 움이 돋고 꽃이 피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만 더불어 화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삶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은 그들을 치시는데, 이때의 징계는 이방인들을 심판하시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7,8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징계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과 화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소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9절에 보면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 죄를 없이 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하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로 부서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으로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아세라와 태양상이라는 우상이 등장합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는 것을 의지하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우상은 자기 유익과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우상의 공통점은 인간의 이익을 위하는데 있습니다. 아세라와 태양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세라는 여신으로서 다산의 신입니다. 아들을 많이 낳게 해주는 신입니다. 우리 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아이를 점지해주는 '삼신할머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양상은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태양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농사꾼들에게 태양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태양을 섬기는 것입니다. 날씨든 비든 항상 자기들에게 좋은 쪽으로 되어지기를 바라면서 태양을 섬깁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가뭄이 오든 홍수가 나든 지진이 나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들이 원하는 쪽으로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때문에 우상을 부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고 살아간다면 더 이상 우상은 필요 없으니까 부숴 버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으니까 더 이상 다른 것을 붙들고 축복을 얻어내고 저주를 피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세라 태양상을 부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만 화친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아세라 태양상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다 부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께 '너희는 진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만약 진실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과만 화친하고 죄씻음 받은 야곱이고 이스라엘이라면, 그런 사람답게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것은 다 부숴 버려야 합니다. 아세라 태양상을 부수는 것 같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세워져 있는 우상을 다 부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의지하는 것도 부수고, 자식을 의지하는 것도 부수고, 직장을 의지하는 것도 다 부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아는 백성의 모습이고 하나님은 그런 백성을 통해서 영광의 찬미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은혜를 아신다면 분명히 그 흔적이 보여져야 합니다. 흔적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것과 화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은 전혀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을 들여다봐도 선택받은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자신의 선택의 문제에 대한 의혹은 다 지워버리고 단 하나만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나에게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흔적이 있고 죄용서 받은 흔적이 있느냐를 찾으시라는 것입니다. 그 흔적이란 내 안의 모든 우상을 부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것, 하나님 외에 화친하는 것을 다 부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엔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만 살아가겠다는 고백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없으면 없는 대로, 병들면 병든 대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11절에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이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자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자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고 합니다. 우린 애당초 지각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자격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를 구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도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은 자가 할 일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백성의 모습입니다.

 

 

 

 

 

취한 자 (사 28:1-10)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 영화의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따서 먹으리로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마는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지금의 수입에 만족하며 사십니까? 아마 만족하시는 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면서 돈에 목말라하는 심정으로 사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돈에 부족을 느낍니까? 그것은 돈이 있어야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소위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의 욕구는 그만큼 더 확장되게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명과 문화들을 누리고 싶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명은 공짜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사람은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만 그 편안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문명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도 같이 확장되기 때문에 결국 문명을 사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게 되고 그만큼 돈에 더욱 목말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돈이 필요하다면 그 쓰임새를 살펴보십시오. 거의 모두가 문명을 누리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사실 하루 세끼 먹는 양식을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습니다. 모두가 주어진 문명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돈입니다. 그렇다고 문명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을 버리고 문명을 누리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을 떠난다고 해서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이 없는 밀림에서 사는 사람들도 밀림의 나름대로 욕심이 존재합니다. 단지 문명이 없어서 문명에 대한 욕심이 없을 뿐이지 그들에게도 문명이 주어지면 오늘날의 문명 사회와 똑같은 욕망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돈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문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되고 그것이 남들은 다 하는 것을 나혼자 하지 못한다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존심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왜 나에게는 다른 사람같이 세상의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라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로서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삶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빠지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누리되 자신에게 주어진 것 안에서 누리라는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면 되는데, 없으면서도 자꾸 옆사람을 돌아보면서 자신도 가지고 싶어하고 누리고 싶어하다 보니까 더 속상해지고, 자신이 한심스럽고, 남편이 미워지고, 하나님께 원망이 되고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욕심을 앞세운 기도밖에 할 것이 없는 신자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요소와 조건들이 모두 세상 안에 갖추어져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만 소유하면 기쁨과 행복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것만 있으면 행복 할텐데'라는 생각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불행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한데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사야를 살펴보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한마디로 세상을 '망하는 장소' 이 외에는 전혀 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가득차고 화려하고 기름진 것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이사야에게는 '점차 소멸되어 가는 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같으니 화있을진저"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란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를 말합니다. 당시 수도인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의 부요함과 번영의 상징이었는데 그러한 사마리아도 이사야의 눈에는 단지 쇠잔해 가는 꽃으로만 보여졌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강하고 힘있는 나라인 앗수르를 들어서 에브라임을 심판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에브라임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이사야의 눈에는 자신들의 부요함과 번영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마리아가 점차 쇠잔해 가는 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아는 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아는 바른 선지자들은 모두 세상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들은 세상의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 잘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자신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주는 곳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행복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결국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람들이 돈, 돈, 돈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미친 자의 모습입니다.

 

 

 

 

당시 에브라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의 부와 번영에 취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는 '취한 자'로 표현합니다. 세상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들이 꼭 술에 취한 사람 같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상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3절에도 보면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7절에는 북쪽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다까지 독주와 포도주에 취한 자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술취한 사람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엉망인 것 같이 지금 에브라임이나 유다가 그와 같이 엉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술을 마시고 취했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술에 취한 자처럼 정상이 아니고 엉망이다는 것이다.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는 선지자로서는 눈앞에 멸망이 닥쳐왔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부요함과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들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사야의 시각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비춰 보십시다. 세상을 번영과 부요함이 가득찬 곳으로 바라보지 말고 코앞에 심판이 닥쳐온 곳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 세상도 이사야 선지자 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이 취한 자입니다. 도대체 어디 하나 정상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모든 사람들이 술에 취한 자처럼 살아갑니다. 행동도 엉망이고 말하는 것도 엉망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돈입니다. 돈이 최고이고 돈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술에 취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세상이 정상적으로 보여지십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세상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돈에 미치고, 권력에 미치고, 출세에 미치고, 성공에 미쳐 살아가는 온통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 취한 자들의 세상으로 보십니다. 노아 시대와 같은 세상이고,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소위 하나님을 안다는 신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세상이지만 신자들만큼은 정상적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데 이사야 선지자 당시 신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7절에 보면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당시 유다 사람들과 제사장 선지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과 목사들의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모두 같이 취했습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취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면 취한 자를 나무라기도 하고 잘못 가는 길을 바로 잡아주기도 할 것인데 모두 같이 취했으니 결국 다같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같이 취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상을 바르게 풀리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사야같이 심판의 자리에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이상을 자기 멋대로 풀면서 말도 아닌 말을 해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제사장 선지자들을 독주와 포도주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옆걸음치고 있는 모습으로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지도 않는 말을 하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술취한 자가 횡설수설하는 것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목사들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취해 살아가면 그것을 경고하고 바른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할 목사들이 자기들도 같이 세상에 취해 있으니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하고 계시도 아닌 것을 계시라고 하면서 말도 아닌 말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술취한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위엣 것을 바라고 살아라고 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교만으로 이끌어 가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술취한 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말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서도 그 믿음을 자신을 죽이는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살리기 위한 믿음으로 말하고 있으니 그 믿음이 어떻게 사람을 살리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말도 아닌 말을 하고 횡설수설을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 서서 심판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상에 취해 있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안됩니다. 같이 앉아서 대화를 한다 해도 한쪽은 천국만 이야기하는데 한쪽은 교회 부흥을 이야기하고, 일년 재정이나 따지고, 교회 키우는 방법 등 성경에도 없는 말도 아닌 말을 하는데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말도 아닌 말에 속아넘어가는 것도 같이 취해있기 때문입니다. 같이 비정상이기 때문에 비정상의 말을 정상적인 말로 듣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마지막은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과연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앉아서 대화를 하면 대화가 통할 수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마지막때 살아남을 자는 누구입니까? 5절에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이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 취한 자들을 모두 치시는 날입니다. 그 날에 남은 백성이 있는데 이들은 겸손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볼 줄 알았던 겸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손수 주시는 영화로운 면류관, 아름다운 화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마지막때 남은 백성, 겸손한 백성들의 면류관 화관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자들이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면류관을 쓰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세상의 면류관에 비할 바 없는 하나님이란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면류관의 소중함을 안다면 과연 세상에 취하고 돈에 취해서 살아가겠습니까?

 

 

 

 

여러분, 취해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지금 세상 구석구석은 멸망의 요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해지고 힘을 가진 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마지막때 하나님이 면류관 되어주시는 겸손한 사람, 남은 백성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십시오. 술취한 세상에서 취하지 않은 자로 산다는 것은 무척 힘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시고 분명히 갚아주십니다. 그때까지 참으면서 같이 세상에 취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기초돌 (사 28:14-22)


"이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경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음부로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유행하고 주야로 유행한즉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나니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 공을 이루시리니 그 공이 기이할 것임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안목을 보면 상당히 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언제나 눈앞의 일에 급급해 하면서 쫓기듯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신자는 분명히 우주의 종말까지 내다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삶 역시 우주의 종말을 아는 자다운 삶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종말을 알고는 있지만, 또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삶에서 종말을 아는 자다운 모습이 보여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며 앎도 참된 앎이 아닙니다. 자신도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말을 하면서, 그리고 마지막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여전히 세상의 것을 손에 쥔 채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삶을 산다면 어느 누가 그 사람이 말하는 세상의 심판을 신뢰하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신뢰하지 못하는 말을 남들이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경고하신 것을 신자가 믿는다면 우선 신자부터 그 경고하신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믿는자로서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말하고 성경을 믿는다는 교회에서부터 경고하신 대로 살아가지 않으면서 누구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외치고 심판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알맹이는 빠져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명목상의 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믿음을 외치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빠져버리고 온통 자기 자신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믿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성경을 선포한다고 하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사람의 말이 외쳐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돈을 믿고, 주 예수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세상 것을 사랑하고 있는 거짓된 신자들이 입으로는 예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믿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구원과 전혀 상관없는 길에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성경을 보고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은, 이런 잘못된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 믿고 있으니까'하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믿음을 신뢰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믿음의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가게 되어 있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순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버리고 말씀을 따라갈 선한 인간들이 절대 아닙니다.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신다고 해서 또 부지런한 봉사가 있고 헌신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을 자신의 강한 믿음으로 승화시켜서 스스로를 믿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스스로 속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서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신자라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리석음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나 자신도 그럴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때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처럼 위험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는 최대한 관대해 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기 생각으로 자기를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있어서 좋은 점들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출석한다거나, 착한 일을 했다거나, 구제를 했다거나, 봉사를 열심히 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역시 나는 믿음이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자신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성경에 입각해서 해야 합니다. 오직 성경앞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성경은 자신의 더러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줄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을 알고 살아가는 신자가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길이고, 마지막때 우리의 구원의 방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마지막을 아는 신자라면 항상 삶의 초점을 마지막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의 일이 급하다고 해서 피해서는 안될 곳으로 피하는 그런 어리석음은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인생의 마지막까지 내다보면서 삶의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살아간다면 눈앞의 일 때문에 조급해지지도 않을 것이고, 잘못된 길로 가지도 않을 것이고, 인생에 파도가 있다고 해서 같이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은 쉽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은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언제나 눈앞의 문제에 급급하고 조급해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는 주 예수님을 신뢰하는 신자로서 눈앞의 문제에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인생의 마지막때 주어질 것에 소망을 두고 여유 있고 넉넉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부탁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는 그리스도의 몸외에는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러한 마지막을 안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내 마음속에는 그리스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하나하나 잘라내는 그런 삶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만 사랑하는 천국의 삶을 지금부터 미리 좋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 13:33에 보면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한 말씀대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누룩이 밀가루 서말을 전부 부풀게 해버린 것 같이, 처음에 예수라는 분은 내 마음속에서 그저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지만 갈수록 점차 그분이 커지면서 나의 마음을 온통 점령해버린 상태, 바로 그것이 신자가 주님께 굴복해 가는 것이고 그 상태를 가리켜서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점점 갈수록 주님에 의해서 내 마음이 점령당해 가는 그런 삶이 아닙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었어도 중요한 것은 여전히 나 자신이고, 돈이고, 직장이고, 가족이었는데 갈수록 주님이 내 삶에서 중요한 분으로 자리잡아 가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라 할 수 있고, 그 마음이 이미 천국입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가장 힘든 것은 주님에게 내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나는 예수 믿는다'고 쉽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과연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주님께 점령당한 삶을 사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삶을 오직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고 살아가는 삶인데, 이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취한 자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위 교회가 취한 자처럼 엉망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서 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선지자 제사장들부터 엉망으로 삽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계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아닌 말이 나옵니다. 말씀이 아닌 것을 여기저기서 끌어다가 마음대로 계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14절에 "이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경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합니다. '경만한 자'라는 것은 앞에 나왔던 계시도 아닌 말을 내뱉는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 그것을 믿는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잘못됨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한 돌을 삼으셨는데 그것이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으신 기초 돌입니다. 기초 돌이란 앞으로 세워지는 것은 모두 이 돌 위에 세우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기초 돌과 세워지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심으신 기초 돌 위에 세워지지 아니한 것은 다 사라지고 무너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기초 돌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과 섬긴다고는 하면서 결국 자기를 섬기는 사람을 구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누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위에 세우면서 살아가느냐 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뭘 하나 해도 그것으로 자기 업적을 삼고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합니다.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려고 하고 자기 이름을 내는 일이 아니라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기초를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위에 세워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모두가 이런 식으로 백성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거짓된 말을 했던 것입니다. 15절에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 도다"는 말씀은 거짓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거짓된 평안을 제공하기 위해서 '백성들아 사망을 두려워 말아라 음부도 두려워 말아라 재앙도 두려워 말아라 우리말만 믿으면 이런 것들은 다 피할 수 있다'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같은 오늘날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모든 재앙이 물러가고 평안을 누린다'고 말하는 것이나 '주를 믿는자는 사망과 음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해놓고는 주를 믿는 표를 '십일조 해라, 주일 지켜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들이 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기초 돌로 세우신 그리스도를 벗어난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풍랑이 오고 바람이 불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일이 아니면 마지막 때는 다 무너지고 부서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살리는 것은 기초 돌이신 그리스도이지 우리의 업적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가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기초돌이신 그리스도 위에 집을 세워 가느냐 아니면 그리스도 밖, 즉 모래 위에 세워 가느냐를 살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너무 이것저것을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이교회 저교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 것들에 매력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 몇독 읽기 운동, 철야기도회, 산상기도회 등등 이것 하다가 안되면 저것 해보고, 저것 하다가 안되면 이것 해보면서 이것저것 찾아다니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삼가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시키시는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신자는 이것저것 찾아다닐 필요없이 오직 그리스도만 찾으면 됩니다. 성경통독운동, 환경운동, 윤리실천 운동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말씀 안에 계십니다. 신자는 말씀에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찾았으면 그 어떤 것보다 주님만 좋아하고, 주님께 나를 복종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것저것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신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병폐는 주님만 섬기는 것으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부족해서 이것저것 다른 것을 첨가시키려고 합니다. 꼭 무엇을 하는 것이 있어야 자신의 믿음에 안심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순수하게 주님만 믿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펴야 할 것은 과연 그리스도를 기초 돌로 삼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2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마지막때 경만한 자는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하시고 언제나 주님 위에 모든 것을 세워 가시기에 힘쓰시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시온산 (사 29:1-8)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군대로 너를 에우며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불려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경각간에 갑자기 이룰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지진과 큰소리와 회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곤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같이,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목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가르침으로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두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목사라는 존재가 오히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 스스로가 목사에 대한 인식을 잘못 가짐으로서 가져오는 결과일 수도 있고, 또 목사 스스로 목사의 존재성을 자기 탐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서 활용할 때 나타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목사가 신자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방해하고 있는 모습들이 너무 많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 방향이 너무 뚜렷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외에 다른 쪽에는 시선을 두지 않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겸손은 '나는 주님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태도를 말합니다. 물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세상의 것이 있든 없든 그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무엇의 영향을 받습니까? 이것을 알려면 여러분을 울게 하고 웃게 하고, 슬프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면 됩니다. 돈이 울게 하고 웃게 했다면 여러분은 돈의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남편과 자식 때문에 기쁘고 슬펐다면 주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자식 때문에 산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교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겸손은 돈 때문에 울음이 나오다가도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웃을 수 있게 합니다. 남편과 자식 때문에 슬프다가도 주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게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신자들을 이러한 겸손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신자들이 겸손으로 나아가는데 목사가 걸림돌이 될 수 있으며, 자칫 잘못하면 목사가 신자를 오히려 교만으로 인도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난처하고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사의 행동이 자칫 잘못하면 신자를 교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신자들은 목사의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목사가 하는 것은 무조건 옳은 행동인줄 알고 무턱대고 그대로 따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여러분들의 세상적인 복을 위해서는 기도를 전혀 안하는 입장입니다. 이사한 가정에 가서나 개업하신 곳을 방문해도 복을 위한 기도는 전혀 안한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목사가 세상적인 복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의 입장에서는 단지 성경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복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 교회를 갓나온 신자라면 얼마든지 인간적인 생각에서 어떤 문제해결을 위해서나 복을 위해서 목사에게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목사가 '그것은 성경이 아니오'하면서 거절해버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저는 얼마든지 기도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자연히 복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고 세상의 복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될 때를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물론 교회를 오랫동안 나오신 분이 그런 부탁을 한다면 그것은 좀 문제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체를 가지고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는 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이 전부인줄로 알고 복에 매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만일 목사가 이러한 마음으로 초보적인 신앙에 있는 성도가 부탁한대로 그러한 기도를 했을 때 만약 그 자리에 다른 신자들이 있었다면 그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목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분들이 '아 복을 위해서 기도해도 되는구나'하면서 마음놓고 복에 매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목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만약 목사가 어떤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 줬을 때 그 기도대로 문제가 해결되어 버렸다면 그분은 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바라보고 목사의 기도의 힘을 의지하게 될 위험이 농후합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는 본의 아니게 신자를 교만으로 인도해 버리게 됩니다. 목사의 기도가 신자로 하여금 '목사의 기도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에 빠지게 만들고 그것이 결국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목사를 중심으로 신앙생활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산다고 하면서 실상은 목사를 중심으로 나아가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저의 관심은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여러분을 교만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일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삼가하고 싶은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행동 하나하나에 여러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교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그토록 염려하느냐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이 그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리엘이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이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데 그 괴로움은 하나님이 주신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괴로움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괴롭게 하신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징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징계를 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징계하신 이유는 그들을 낮아지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그들이 교만했는데 징계를 해서라도 낮추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기뻐하셨다면 지금도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때에 교만한 자를 징계해서라도 낮추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지금도 마찬가지로 교만한 자는 낮추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징계하셔서라도 낮추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교만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기초 돌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28: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기초 돌을 두셨습니다. 기초 돌이란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돌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하시고 징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돌의 의미를 알고 행동하는 사람은 징계를 받지 않고 이 돌의 의미를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은 징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기초 돌은 세상이 망해도 영원히 남는 돌입니다. 그러한 기초 돌을 남겨 놓으신 것은 너희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이 기초 돌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기초 돌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세상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교만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는 징계를 해서라도 낮추시고 기초돌을 바라보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초돌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날 교회의 기준이요 가정의 기준이요 우리 자신의 기준이 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해도 기초 돌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자꾸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니까 징계를 해서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신자들은 징계를 싫어하고, 징계가 있으면 낙심해 버리고 한숨만 쉬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히 12: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5-13절까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도성이 교만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왜 징계를 해서라도 낮추시려고 합니까?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같이 신자들이 징계를 받는 이유는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세상을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징계를 받을 때 우리는 괴로움과 고통 때문에 슬퍼하며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 12:11에서는 징계 받는 당시에는 즐겁지가 않고 슬픔뿐이지만 후에 그 징계로 연단을 받는 자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가득찬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징계하시고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결국 징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아들로 인정하시고 아들로 대우하신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우린 너무 자주 하나님의 사랑을 잊은 채 살아가는 족속입니다.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인데 그것을 내 힘으로 착각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은혜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징계를 하셔서라도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초 돌을 두신 시온산, 즉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징계는 백성을 향한 징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아닌 자를 향한 징계도 있습니다. 그것이 5-8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6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지진과 큰 소리와 회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곤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같이 밤의 환상같이 되리니"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을 친 이방인을 징계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예루살렘을 고치시고자 하는 의도와는 달리 단지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징계를 받았다고 할 때 이 징계가 나를 고치시려는 징계인지 아니면 심판을 위한 징계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징계 후의 태도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고치시고자 징계하셨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징계를 받음으로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닌 자는 징계를 받으면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만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이 아닌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이 신자를 징계하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징계로 인해서 내가 아들임이 더욱 확인되고 주를 바라보고 은혜를 깨닫는 겸손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징계를 부끄러워합니다. 징계 받는 것을 자신의 자존심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면 그것을 비웃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그런 일을 당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분명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린 오직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실 일은 어떤 징계를 받았을 때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징계하심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하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떳떳함이 있어야 합니다. 징계 받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제가 교만으로 나아갈 때 징계해서라도 아들답게 고쳐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참된 아들다운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기초 돌, 그리스도가 놓여 있는 시온산으로서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입술과 마음 (사 29::9-14)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인간은 본성적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목표는 포기한 채 하나님이 인도하신 대로 군소리 없이 따라가야 하고, 인생도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뜻하는데 누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겠습니까?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생의 모든 소망과 욕망을 자기에게 두고 사는 인간이 죽으나 사나 자신은 버린 채 하나님만 위해서 살겠다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서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자나깨나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 인간이 자기의 삶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하나님을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도 싫어하는 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경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9절)는 말씀을 보면 취하고 비틀거리는 것은 당연히 술을 먹어야 나타나는 현상인데 술을 먹지 않았는데도 취하고 비틀거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경된 것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경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소경 되게 하셨습니까?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10절)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서 소경 되게 하고 머리를 덮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머리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데 눈을 감기우고 머리를 덮으셨으니 어느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보지 못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가겠습니까? 볼 수 없는 인간이 본다고 하고, 깨달을 수 없는 인간이 안다고 하니 결국 엉뚱한 가짜 하나님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 눈이 떠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즉 여호와의 신이 우리에게 임할 때 일어나는 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신자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때 설득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설득이란 인간의 말재주를 가지고 상대방의 마음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눈을 뜨게 할 때 가능한 일인데, 과연 인간의 말재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말재주로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부지런히 말하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눈이 떠있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쉬운 문제입니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는 소경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보고 있는 신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분은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하면 잘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을 믿는 문제는 유식하고 무식하고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소경 되게 하셨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전도 기술을 가지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겠다고 설쳐댈 수 있습니까? 결국 그 역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는 소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되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11절)는 말씀대로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모든 자에게 봉해져 있는 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와 같이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봉한 책으로 남겨 놓으셨고, 하나님 자신도 감추셨습니까? 그것은 세상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면 택한 자의 의미가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길을 철저히 막아 놓으시고 죄에 대하여 무서우신 하나님을 보이십니다. 무서우신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소경된 자들이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찾아가는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천국 보내시려고 애를 쓰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 결과로 인간들이 죄에 대해서 담대해졌습니다. 죄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이것이 바로 소경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용서가 없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죄에 대하여 철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눈이 뜨인 자는 무엇을 보겠습니까? 내 옆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있는데 자신은 죄 용서받았다고, 천국가게 되었다고 춤을 추면서 기뻐하겠습니까? 눈이 뜨인 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철저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무서우신 하나님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달려야 할 자리에 대신 달려 있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죄에 대하여 애통하게 됩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가집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오면 주님께 자신의 몸을 던져 헌신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눈이 뜨인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을 말할 때 어떤 하나님을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무서우심과 심판을 그대로 선포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보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가 당시 소경된 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들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인데 외부에서 주어진 은혜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은혜만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은혜 외에 다른 것을 앞세워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무척 많이 말하면서 은혜 앞에 다른 것을 앞세웁니다. 은혜란 인간의 모든 기술과 재능, 인품과 덕목들을 부인하는 말입니다. 신앙을 훌륭한 인격과 덕목으로 연결 지어서 좋은 인품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 앞에 인간의 인품, 덕목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13절)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말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면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척하는데 정작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중심이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라고 합니다.

 

 

 

 

사람의 계명은 은혜 앞에 인간의 노력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인간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어있는 자입니다. 죽어있는 자가 거듭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외부의 힘, 즉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죽어있는 인간이 '깨어나라'한다고 해서 스스로 깨어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교회서는 '거듭나는 비결'이라 해서 인간의 방법을 가르칩니다. 인간 스스로 움직여서 깨어나자는 것입니다. 소경된 사람이 성경을 본다해도 하늘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죽어 있는 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거듭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뭘 해라고 하는 것은 은혜를 부인하는 사람의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계명으로 인해서 입술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때 혹 '신 목사 당신은 무엇을 근거로 남들의 말을 사람의 계명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는가? 그것은 당신의 편협이고 독선 아닌가?'라고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모든 목사들은 자기의 말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하지 '사람의 계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14절) 이 말씀을 보면 당시 이사야의 말이 하나님의 계명이고 거짓 선지자의 말이 사람의 계명이라는 것이 드러날 때는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셨을 때라고 말합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사람의 계명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셨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기이한 일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메시야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경된 자들이 상상하는 메시야는 자기들을 해방시키고 지상 낙원을 이룩해줄 힘있는 용사 같은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전혀 힘이 없고 비천하고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일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계명이란 예수님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계명은 필연코 예수님의 생각과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가지고 오셨는데 인간은 눈에 보이는 땅의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합니다.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윤리 도덕을 통해 신자되고 예수님 만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윤리 도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헌금하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자 되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좋아서 헌금하고 예배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앞세울 때 은혜는 가려지고 맙니다. 교회가 종교생할의 법칙을 만들어 가지고 교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신앙이 있는 척 위장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심히 종교생활에 빠져있다보니 자신이 신앙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이며 죽어 있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에 대하여 눈이 뜨인 자가 되었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소경에서 벗어난 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만 하시면 안됩니다. 실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삶으로 나가야 합니다. 입술은 여호와를 경외하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입술과 마음이 멀어져 있는 사람은 사람의 계명으로 나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하나님을 부르실 때마다 아무 생각없이 입술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토기장이 (사 29:15-24)


"화 있을진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미구에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삼림으로 여김이 되지 않겠느냐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경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그들은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케 하느니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그 얼굴이 이제부터는 실색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 자손은 나의 손으로 그 가운데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교회에서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있는 쓸모 있는 존재임을 부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내가 잘못되면 결국 하나님이 손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교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 인간은 없습니다. 오직 죄인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필요하고 가치가 있어서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무가치한 존재임을 발견하라고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가치있는 인간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가치한 우리를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인 가인을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이 가인이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가인의 죄를 보여주기 위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서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너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았느냐?'를 보실 뿐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자 합니다. 나는 남에게 욕을 먹으면 안되고 칭찬만 들어야 하고, 남에게 뒤떨어지면 안되고 항상 앞서야 하고, 못나 보여서는 안되고 잘나 보여야 한다는 것이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 사는 인간입니다. 결국 이런 인간이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가 높아져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은혜는 소유가 증가하고 자신의 위치가 높아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무가치함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저는 가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말로 고백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안다는 것은 '나는 하루 세끼 밥먹고 살 자격도 없고, 좋은 옷 입고 편안하게 살 자격도 없는 인간입니다'는 것을 진심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만약 신자가 자신의 무가치함을 안다면 필히 현재 자신의 삶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하루 세끼 밥 먹고 살 자격도 없는 내가 밥을 먹고 있으니 무엇을 먹어도 하루 세끼 밥먹는 것으로 감사하고, 옷입을 자격도 없는 내가 옷을 입고 살아가니까 좋은 옷이 아니라도 감사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없는 내가 편안하게 사니까 그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인데 하나님께 무엇을 더 요구하겠습니까? 지금 있는 것도 무가치한 나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안다면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할 필요도 없고 요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직 무가치한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일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에는 은혜로 구원받지만 구원을 얻은 뒤에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선한 행위에 힘을 쓰며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본질을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플 때 놔주는 일회용 주사가 아닙니다. 은혜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나를 덮어 누르고 있는 거대한 지붕과 같은 것입니다. 즉 죽을 때까지 은혜의 지배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이 곧 구원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지만 다음부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것은 은혜의 본질인 인간의 무가치함을 벗어나서 '인간은 그래도 쓸모 있다'는 교만의 자리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사야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했을 때 처음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더러움을 직시했습니다. 쓸모 없고 무가치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죄인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는 외침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망해야 하고 죽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이사야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하고 죽어야 할 자신의 무가치함을 발견했다면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젠 죽었다'하면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성경을 몇 번 통독했고, 십일조를 잘하고, 기도를 몇 시간하고, 봉사를 잘한다는 등의 말이 나오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고,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십자가만 알고자 하는 열망이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실수는 관심을 엉뚱한 데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열망이 주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기 때문에 은혜로 산다고 하면서 세상 일로 속상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일로 속상해 하는 것은 결국 주님보다도 세상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더러움과 무가치함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15,16절은 로마서 9장에 나오는 토기장이 이야기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토기장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면서도 사실 살아가면서 그 말씀에는 전혀 비중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화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화있을진저라는 말은 '너희는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그렇다는 것입니까? 뒤에 보니까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라고 말합니다.

 

 

 

 

화있을 자의 모습은 자기의 도모, 즉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뜻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화있을 행동, 즉 저주받을 행동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쓰시느냐는 전혀 무시해 버린 채 오직 자신을 위한 자기의 계획에만 관심을 두고 살다가, 잘 안되면 잘 안된다고 투덜대는 것이 바로 죄가운데 있는 저주받을 인간의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여기에서 기이한 일이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일을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에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없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고 총명도 총명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만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고 총명이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곧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는 눈앞의 현실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영광된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당장 눈앞의 돈 몇 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 중요하게 앞세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눈앞의 돈을 따라가고 현실에 더 치우쳐서 살아가다 보니까 결국 장차 주어지는 영원한 영광된 나라보다는 지금 당장 먹고 살아가는 문제를 앞세워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사는 신자의 참된 지혜를 토기장이 이야기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나를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라고 요구할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나를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진흙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어떤 모양, 어떤 용도로 만들었든지 진흙이 거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말할 수 없듯이 우린 단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님을 섬길 뿐이지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악하게 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세상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이사야가 본 악한 모습이 없는지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말에 절대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피조물이 피조물답게 살아왔는지 지금까지 우리 삶의 하나하나를 더듬어 봐야 합니다. 그리고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섬기고 경배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거기에서만 은혜가 존재하고 십자가가 존재하고 죄인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조물이면서도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나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되는 인간의 무능력을 고백하면서 주님께 '주님, 진흙인 제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항상 내가 주인 되어서 살아갑니다'하면서 주님의 도우심만 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지혜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17-2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에게 하실 일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며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24절에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총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 힘들고 지치고 속상할 때 '나는 진흙이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다'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시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진흙의 삶의 비밀을 잘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깨달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우리의 부족을 알고 우리의 죄를 알고 진흙의 삶을 살아가는 참된 신자되는 것을 여러분의 열망과 소원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진흙으로서 자신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로 순종하시면서 주어진 위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기에 힘쓰십시오. 진흙이 진흙의 가치를 뛰어넘고 진흙의 위치를 벗어났을 때 주어지는 것은 불만과 불평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화있을진저'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우리는 진흙임을 잊지 마십시오.

 

 

 

 

 

패역한 백성 (사 30:1-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 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그 방백들이 소안에 있고 그 사신들이 하네스에 이르렀으나 그들이 다 자기를 유익하게 못하는 민족을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니 그 민족이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도 못하고 수치가 되게 하며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 남방 짐승에 관한 경고라 사신들이 그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싣고 그 보물을 약대 제물 안장에 얹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 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갔으나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하라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이 죄악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 하셨은즉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 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 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하나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는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로 그쳐버릴 우려가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원하시는지 그 마음도 모른 채 뭔가를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의례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들이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헌금도 부지런히 하고 구제도 많이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전혀 무시해 버린 채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하나님 스스로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인간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원칙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모든 우상들의 공통점은 신을 섬기는 방법을 신이 계시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셨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 그대로 하나라도 가감이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하면 뭔가 허전하고 부족한 것 같이 느껴진다고 해서 인간편에서 자기의 노력과 힘과 재주를 가지고 허전함과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즉 인간이 자기 열심을 내세워서 내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보겠다고 설쳐대지 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주에 얘기한 대로 진흙의 자리에서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나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대로 만들어지고, 사용하시는 대로 사용되어지는 진흙이다'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나 교회에 나와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전에는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죄인인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까? 고전 2:11,12에 보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정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 성령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을 가리켜서 거듭난자라고 말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술먹고 담배 피고 노름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술 담배끊고 노름을 안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채, 전혀 마음에 두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패역한 자식, 패역한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수 있고, 패역한 백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잘 배워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자기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패역한 백성으로 살아가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 마음을 모르는 패역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패역하다는 것은 타락하고 부패해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안따먹고와 상관없이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따라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과 죄인으로 인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하늘로 태어난 아이를 세상에 보냅니다. 그 아이가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아이를 낳기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결국 그 아이는 하늘로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삭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는 것도 이삭은 인간의 혈통으로 따라 나지 않고 하늘로서 태어난 자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이삭의 후손이 이스라엘이고, 그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는 인간이 그 어떤 방법을 총동원해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힘으로 전도해서 교회로 끌어들이고, 여러 가지 훈련과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인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인간의 노력, 교육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하늘로서 태어나야 합니다. 즉 여호와의 신,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으면서 하나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패역한 백성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을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이것이 패역한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또 10,12절에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버리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것이 패역한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패역한 백성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한 채 자기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 때문에 패역하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삭의 후손입니다. 이삭의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면서 모든 희망을 미래에 주어질 영원한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하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해서는 안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쫓겨나게 되고 남의 나라에 포로가 되어서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런 와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사람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징계 속에 자신의 잘못을 아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자기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는 말씀을 의지한 채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이사야서에는 '남은 자'라고 부릅니다. 28:16절에서 하나님이 시온에 한 기초돌을 두었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이 기초돌을 중심으로 해서 새이스라엘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패역한 백성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회복의 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그늘로 몸을 피합니다. 하나님보다는 힘있는 나라가 더 안심이 되고 마음 든든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패역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안심이 되고 마음에 든든함을 줍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돈입니까? 무엇에 더 안심을 하고 믿음을 두고 살아갑니까? 혹시 하나님보다도 돈에, 세상 것에 더 마음 든든함을 가지고 살아가신다면 그것은 패역한 백성의 모습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신자라고 해서 전혀 돈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죄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징계를 하시기도 하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기고 하십니다. 그럴 때 '내가 또 하나님의 마음은 무시하고 내 욕심대로 행동했구나'하면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또 내 욕심대로 행동했습니다. 저는 지옥가도 마땅할 인간입니다'라고 하면 그것이 곧 성령의 의해서 다스림 받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죄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기 위해서 도망친다면 그것이 곧 패역인 것입니다.

 

 

 

 

마치 10,11절의 죄를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것은 틀렸다. 잘못 말했다. 그런 말하지 말아라'하면서 죄를 부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패역한 백성의 모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필연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29:22-24절을 보면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그 얼굴이 이제부터는 실색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 자손은 나의 손으로 그 가운데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남의 나라의 포로로 종살이하면서 고통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왜 자신들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다 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원망하던 것도 그치는 이스라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인생살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좋은 실습 현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모여서 설교를 들으면서 이론을 배웠다면 세상에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을 실제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도저히 희망도 없고 웃음거리도 없고 뭔가 살 재미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세상에서 미래를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만 믿고 장차 주어질 영광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에 남은 자이고 새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패역한 백성은 미래를 보지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에게 오직 의미 있는 것은 현재 강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세상 것을 더 의지하고 오직 자기를 위해서 멋대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결국 그 마지막은 멸망의 자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비록 죄인의 육체를 가지고 있고 흙으로 썩어버릴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백성답게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4절에 보면 장차 세상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같이 아낌없이 파쇄해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때에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이야 세상을 사는데 세상 것이 도움이 된다고 여기겠지만 마지막 때는 그 모든 것은 다 무익한 것이며 오히려 수치거리가 됩니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살기 위해서는 오직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을 담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복있는 자 (사 30:15-22)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 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 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사람들은 근심 걱정 없는 모든 행복의 근원을 세상에 두고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인생을 더듬어 보면 불안과 초조 염려와 걱정의 근원들이 모두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근원을 두고 있는 불안과 염려를 세상의 것을 소유함으로서 해결해 보겠다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라는 것은 세상의 것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확장되는 것이 인간의 불안과 염려입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인생입니다. 소유할수록 더욱 확장되는 것이 인간의 불안이요 염려이기 때문에 결국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소유로부터 벗어나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소유함으로서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결국 더욱 더 깊은 인생의 어둠으로 빠져들어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자신을 괴롭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염려에 빠지게 하고 압박하고 허망하게 하는 것을 오히려 신뢰하는 어리석음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며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패역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12절에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뢰하니"라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리켜서 압박과 허망을 의뢰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오히려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것으로, 허망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애굽에 의해서 오히려 압박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훼파하실 때 그들을 전혀 도울 수 없는 허망한 것을 의뢰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돈, 출세라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오히려 인생은 그것들로 인해서 압박을 받을 것이고, 나중에는 허망한 것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나보다 잘나고 돈많고 힘있는 사람 앞에서는 머리 숙이면서 나보다 약한 자에게는 큰소리치면서 살아온 삶들이 세상 것을 의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불안과 초조함과 염려 속에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것 역시 세상 것을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5절에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함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아니하고" 이 말씀에서 안연히 처한다는 것은 불안과 염려를 더 떨쳐버리고 평안가운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어떤 일이 있어도 불안해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평안에 처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잠잠하게 하나님만 신뢰하고 살아가면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힘있고 빠른 말을 의지해서 도망하고자 하니까 결국 17절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7절"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가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즉 15-17절까지의 말씀을 요약하면 신자가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평소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했으면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된 하나님을 신뢰하고 조용히 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인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세상 힘을 의지해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게 되고, 세상의 힘의 그늘로 피하다보니까 힘있는 자가 큰소리만 쳐도 그 앞에서 벌벌 떨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돈있고 권력 있고 힘있는 자에게 꼼짝 못하고 그들이 한마디만 해도 두려워하게 됩니까? 그 이유는 내 자신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연히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자신이 해야할 일에만 충실히 하면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산다면 모든 일에 당당할 수 있는데 직장을 의지하다보니까 사장 앞에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직장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사장이라는 돈을 가진 자에게 굴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담임 선생님 앞에서 괜히 머리 숙이게 되는 이유도 선생에게 잘보여야 내 아이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촌지를 주면서 선생님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통해서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다 보니까 결국 강한 힘에 굴복하게 되고, 힘있는 한사람이 꾸짖으니 천사람이 도망하고 다섯이 꾸짖으니 다 도망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살게 해달라고 하면서 정작 그 마음속에는 세상을 포기하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의지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는 것 때문에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는 신자다'라고 착각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사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힘에 대해서 탐욕을 가지고 살아가는 증거는 우리의 마음속에 불안과 초조와 염려와 걱정이 발생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불안 초조 염려 걱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있을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심적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은 분명히 이런 반감을 하실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불안 초조 염려를 다 떨쳐 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하는 말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염려 걱정을 다 물리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당장 그런 말하는 목사 자신부터 교인이 줄어들고 재정이 줄어들면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염려하게 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이야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죄인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인간의 삶의 실태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은 불안과 초조와 염려를 버릴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주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신명기 28장으로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28장은 축복 장이 아니라 저주장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무엇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신 28:1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을 누리시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약속대로 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지키지 못할 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저주입니다. 15절에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으면 모든 저주가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65절을 보면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잔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이 말씀대로 평안을 얻지 못하고 쉴곳을 얻지 못하고 마음이 떨리고 정신이 산란한 상태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 67절에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는 말씀은 무슨 일이 생기면 두려움부터 생기고 오늘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것들이 모두 저주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때문에 불안 초조 염려라는 것은 우리들이 물리치겠다고 해서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라는 것이 18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러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이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바로 저주 가운데서 불안함과 초조함과 염려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희망의 말씀입니다. 신자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단 아무것에나 소망을 두면 안되고 오직 하나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에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으신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18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은혜와 긍휼입니다. 저주가운에 있는 우리를 저주속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고 긍휼이 아니면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이것을 깨닫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자 하나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긍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신자야말로 '복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의 자세는 언제나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불쌍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신자가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순순히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을 환난과 징계라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힘들게 하시는 이유도 18절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은혜와 긍휼만을 구하는 참된 이스라엘 되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징계하시면서 어려움으로 빠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인생이 부요와 풍족함으로 나아갔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을 아무리 봐도 불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은 소경, 절름발이, 문둥병자 같은 세상으로부터 천대받고 무시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천대와 무시 때문에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이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자신의 부족과 죄인 됨을 알고 주님께 나와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사람이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새이스라엘이며 교회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새이스라엘 되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와 긍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으시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자리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스승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20,21절에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니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에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라고 말씀한대로 스승으로서의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방법으로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감싸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환난과 고생으로 가르칩니다. 그리고 신자가 항상 정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뒤에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기도할 때는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해놓고는 말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버립니다.

 

 

 

 

우리는 저주 가운데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 모든 말씀에 복종하신 예수님 덕분에 은혜 안에서 삽니다. 예수님이 말씀대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세상적인 시각 말고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때 가장 뛰어난 자가 누구인지 마음에 새겨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평안치 못하고 불안과 염려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마시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그것이 복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기보다는 차라리 천하에 재수 없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시오. 그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 때 비로소 모든 일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있는 자가 나아가야 할 정로입니다.

 

 

 

 

 

돌아오라 (사 31:1-9)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가 불려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인하여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을 인하여 굴복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산과 그 영 위에서 싸울 것이며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하셨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저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우상,금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버릴 것이며 앗수르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키울 것이나 여러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것이라 그의 반석은 두려움을 인하여 물러가겠고 그의 방백들은 기호를 인하여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치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죽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낭떠러지다. 그대로 가면 죽는다'라고 외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같이 그 경고를 무시한 채 낭떠러지를 향해서 자기 생각대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하는 습성을 가진 인간은 경고가 사실로 닥치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노아 때가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것이 변함없는 인간의 죄악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뭔가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겠다는 심보로 살아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눈으로 볼 수있을 때에는 이미 멸망을 피할 수 없을 때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것은 보지 못할 때 보는 것 같이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도 뭔가를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드리기 전에 한가지 우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고가 이번 한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수없이 많이 되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행여 경고에 대해서 무디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계속 되어진 경고로 인해서 뭔가 무디어진 마음이라면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경고를 처음 대하는 심정을 오늘 본문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1절에 보면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있을진저"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화있을진저'라는 말은 저주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한순간도 저주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하면 애굽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내려가는 자들입니다. 무엇 때문에 애굽에 도움을 구하러 내려갑니까? 애굽을 통해서 어떤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1절에 보면 애굽에는 말이 많고 병거가 많고 마병이 강한 나라입니다. 이들은 이것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는 수없이 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의지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에 힘있는 것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을 그대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처럼 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할 때 그 대상을 무너뜨리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셨던 것입니다.

 

 

 

 

애굽에 도움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은 '애굽만 우리를 도와주면 우리는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은 애굽이 됩니다. '우리도 애굽같이 되었으면'하는 것이 그들의 소망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환상은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세상모두가 환상 속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교회는 교회대로의 환상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비록 원하는 것은 다르다 해도 추구하는 그 본질은 같습니다. 힘입니다.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을 보면 '나도 저런 좋은 집에서 살아봤으면',라는 환상에 빠지게 되고, 다른 집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출세를 했다면 '내 아이도 저렇게 되었으면'하는 환상에 빠집니다. 교회는 큰 교회에 대한 환상이 있고, 국가는 부강한 국가라는 환상이 있습니다. 학교는 명문학교라는 환상, 회사는 재벌이라는 환상이 있는 것입니다. 이 환상은 누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차피 인간의 죄가 피조물의 위치를 망각하고 신이 되고자 하는 환상에 빠진 것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환상이란 죄인된 인간에게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상에 빠져 살아갈 때 그 마지막이 멸망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환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즉 인간의 눈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현실은 낭떠러지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자동차입니다. 죽음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하는 환상에 빠진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상에 빠진 사람들은 지금의 자기 환경과 형편에 대해서 절대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항상 불만이고 불평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현실과 소망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환상에 빠진 사람들의 현실과 소망은 오직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낭떠러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환상을 부수고 성경을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물이 떨어져서 목이 말라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물이 가득한 호수가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달려가 보면 호수는 사라지고 없고 모래만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분명히 눈에 보이는 실체를 신기루라고 표현한 것은 장차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얘기하면 역사 세계와 묵시 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우 어려운 말이지만 역사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묵시 세계란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바로 이 묵시 세계입니다. 역사적인 세계는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거품과 같고 안개와 같은 것이 역사 세계입니다. 결국 역사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묵시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역사 세계를 절대로 믿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환상을 벗어나 있는 신자입니다.

 

 

 

 

환상이란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하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생각들이 없습니까? 자식을 대상으로 교회를 대상으로 가지고 있는 환상이 없습니까? 만약 그 환상 속에 빠져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여러분의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는"자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즉 여호와를 앙모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부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순다는 것은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환상을 부수는 것입니다. 환상을 부숴 버릴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은 꿈과 소망이 있는 세상이 아니라 낭떠러지를 향해서 달려가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 이유는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희망 사항에 하나님이 가리워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예 자기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의도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인간의 희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앙모치 않게 하고 여호와를 구하지 않게 합니다. 물론 오직 여호와가 자신의 희망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애굽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애굽보다 더 능력이 있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애굽의 도움을 구하려고 하겠습니까? 인간은 자기의 희망을 가지고 환상 속에서 살아갈 때는 오직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에 목적을 둡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신의 희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쁨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향해서 '화있을진저'라고 경고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3절에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려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해서 마지막때 하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돕는 자도 도움을 받는 자도 다함께 멸망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린 지금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애굽의 도움을 구하러 내려가는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합니다.

 

 

 

 

4,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가 불려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인하여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을 인하여 굴복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영위에서 싸울 것이며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하셨나니"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즉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는 모습은 마치 크고 젊은 사자가 입에 먹이를 물고 그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지키는 것과 같고, 어미 새가 새끼를 품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사자와 같이 어미 새와 같이 지키고 보호하시는데 왜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미 새가 새끼를 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은석교회를 사자가 먹이를 지키는 것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은석교회는 전혀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은 교회를 부흥시키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은 끝까지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신자인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어떤 일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여호와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내려간다면 그것은 결코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인정받는 자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진짜 교회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언제나 평강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희망사항, 모든 환상을 부숴버린채 어떤 일속에서도 조용히 여호와만 앙망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교회로 인정하시고 이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이지 교회라고 간판 붙였다고 해서 다 교회로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6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애굽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거역했던 이스라엘을 향해서 돌아오라고 외치십니다. 지금은 애굽을 의지했다 할지라도 말씀을 듣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리로 돌이킨다면 그 사람은 이스라엘로 인정받습니다. 돌아오는 자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도 은석교회를 향해서 돌아오라고 외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앙망하고 구하는 자리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은우상 금우상을 다 던져 버리고 하나님만 앙망하며 살아갑시다. 그럴 때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을 도우시고 지키십니다. 항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겸손한 신자로 살아가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교회로 인정하시고 여러분이 어디를 가나 사자와 같이 어미 새와 같이 여러분을 지키고 보호하시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끝까지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길 (사 32:1-20)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 할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칭하지 아니하겠고 궤휼한 자를 다시 정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베풀어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빈핍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어니와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명한 일에 서리라 너희 안일한 부녀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년 남짓이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기한이 이르지 않을 것 임이니라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하여 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좋은 밭을 위하며 열매 많은 포도나무를 위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형극과 질려가 내 백성의 땅에 나며 희락의 성읍,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은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상태에 의해서 결정되어집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환경을 기준으로 해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행복하고 환경이 나쁠 때는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평생을 살면서 염려와 걱정이 없는 천국 같은 세상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편안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고 항상 기쁨이 떠나지 않고 웃음이 나오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이런 인생을 가지고 행복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반면에 불행은 문제가 떠나지 않고 걱정거리 근심거리가 끊어질 날이 없는 인생을 살 때 그것을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소원은 언제나 자신의 염려거리 걱정거리들이 해소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소원을 가지는 인간은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자신의 염려거리와 걱정거리가 한순간에 해소해 버릴 수 있는 것을 원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돈입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만가지 걱정을 덜어낼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주기를 기대하고, 또 남편이 속썩이지 않고 열심히 돈만 부지런히 벌어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하나하나 갖추어질 때 사람들은 '나는 염려 없다. 걱정 없다. 행복하다'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염려 없고 걱정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의 신앙을 망하는 길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염려 없고 걱정 없는 행복한 삶을 기대할 때 그 사람은 자연히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가령 '나는 돈만 있다면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돈을 의지하게 될 것이고 돈에 자신을 맡기며 돈에 안주해 버릴 것입니다.

 

 

 

 

청년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할 때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그럴 때 아마 머리 속에는 '내가 직장만 구한다면 참으로 행복하겠다'는 열망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막상 취직이 되었다면 그 청년은 '나는 이제 됐다. 직장이 있으니까 내 한평생은 걱정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 직장에 계속 남아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 충성하는 삶이 되어버릴 것이고 결국 불의와 타협하고 양보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것을 통해서 평안을 누리고 안주하고자 하는 그 자체가 신앙의 타락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에게 행복을 주고 자신의 평생을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세상의 것을 구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교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9-11절에 보면 '안일한 부녀들아, 염려 없는 딸들아, 염려 없는 여자들아, 안일한 여자들아'라는 말들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염려가 없는 것을 안일함과 같은 태도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염려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신앙적인 모습인데 왜 그것을 안일함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면서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긴 자로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고, 본문에서 염려가 없다는 것은 세상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염려 없다. 나는 이만하면 됐다'라고 큰소리 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하고 있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 느긋해 하고 나는 걱정 없다고 하는 것이 곧 염려 없는 여자들의 모습이고 안일한 여자들의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봐야할 이유도 기도를 해야할 이유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데 무엇 때문에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겠습니까? 해봐야 여전히 세상 것을 더 소유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안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일은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계획도 모른 채 자기 생각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자가 창고에 곡식을 가득히 쌓아놓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내 영혼아 이제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 내 영혼을 오늘밤 데려가면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느냐'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계획을 모른 채 세상의 것을 통해서 행복을 찾고 평안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을 안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불변입니다.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계획앞에서 인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면 그 계획에 순종하는 것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망하는 장소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순종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세상 것을 의존해서 행복을 누리고 염려를 없애고자 하고 세상에 안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지 않는 믿음 없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자신의 계획은 버려지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의 계획으로 채워진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나도 세상을 망하는 장소로 보고 산다면 세상 것이 있으나 없으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항상 자신의 계획을 앞세우기 때문에 직장만 구하면 염려가 없을 것 같고,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고, 자식이 공부만 잘하면 날마다 웃으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고 직장이고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도록 요구하고 있고,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도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보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뜻과 계획을 포기할 의도가 없기 때문에 성경을 볼 이유도 기도해야 할 필요성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혹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한다해도 결국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교회에 나올 때 '나는 세상 것만 있으면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채 나온다면 그것이 곧 염려 없는 여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불안해하고 염려로 가득 차면서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라는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면 이런 불만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령 이스라엘이 광야로 인도 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도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고 시험하시기 위함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게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염려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어려움을 없애주세요'라는 기도만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평안을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것 안에서 평안을 누리려는 믿음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는 고통과 멸망이 있을 뿐이라고 경고하십니다. 13,14절에 "형극과 찔레가 내 백성의 땅에서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대저 궁전이 폐한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산과 망대가 영영히 굴혈이 되며 들나귀의 즐겨하는 곳과 양떼의 풀 먹는 곳이 될 것임어니와"라는 말씀이 곧 그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만 풍족하게 주어지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정작 인간의 모든 고통과 염려는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세상의 것을 다 소유한다고 해도 고통과 염려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고, 또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폐한바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기쁨과 즐거움 평안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속에서 또 다른 고통이 나오게 되어 있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도 또 다른 염려가 끊이지를 않는 것이 세상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것 때문에 염려하고 고통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해결점은 세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15절에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성신이 등장합니다. 성신은 성령을 말합니다. 즉 너희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을 받으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고 아름다운 밭이 삼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흔히 이해하는 대로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그 힘으로 광야 같은 땅도 아름다운 땅으로 바꿀 수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신을 부어주신다는 것은 '너희들 힘으로는 안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구원은 너희들 힘으로는 안된다'는 의미가 포함된 사건입니다. 주님이 오신 것이나 성령이 오신 것은 인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난척하고 힘을 내세워봐야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을 아름다운 땅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살기 좋은 땅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환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땅은 성령이 오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땅이 되기 위해서는 죄가 사라지고 의가 들어와야 합니다. 그 의는 성신을 통해서 옵니다. 의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오십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그 무엇도 의가 되지 못합니다. 주님의 세계만이 의의 세계이고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16절부터 보면 의의 나라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여러분, 이 말씀 그대로 세상에는 영원한 평강과 안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서 염려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자는 세상에는 평안과 안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그리스도를 화평의 집으로 여기며 그리스도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의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장차 한 왕이 등장해서 의로 통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바로 그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어떻게 세상을 통해서 평안과 안전을 누리고자 하겠습니까? 세상은 망하고 영원히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의의 사람으로 오신 것도, 이 땅에 의의 모습을 나타내고 그 의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어서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성신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의의 흔적을 가지고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면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부정하고 그 자리에 주님의 의로 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의에 관심을 두고 주님을 화평의 집으로 여기며 주님 안에 거하기에 힘쓰며 살아갈 것입니다. 눈앞의 세상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를 외면하는 안일함에 빠져 살아가지 말고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면서 살다가 인생을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신자가 되기 바랍니다.

 

 

 

 

 

보배 (사 33:1-6)


"화 있을진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진동 시키시는 소리로 인하여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시므로 인하여 열방이 흩어졌나이다 황충의 모임 같이 사람이 너희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의 뛰어 오름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 오르리라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 이는 높은 데 거하심이요 공평과 의로 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신자가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의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들의 관심이 있습니다. 신앙상의 문제는 이 두 관심이 서로 대립될 때 발생합니다. 관심이 서로 다를 때 신자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심의 일치는 하나님의 관심 앞에 우리의 관심을 따로 제시하고 주장하면서 서로 비교하고 수정해 가는 식의 일치가 아니라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관심에 무조건 우리의 관심이 겹쳐져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겹쳐지면서 우리의 관심은 사라지고 대신 하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갈 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합당한 삶이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되는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버려지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의 관심이 채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가 성경을 봐야할 이유도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항상 점검해야 할 부분은 '지금 나의 행동이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된 행동이냐'입니다. 그럴 때 그분은 제대로된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을 목표로 하여 사용되어 집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관심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된 삶을 살지 못할 때 그 힘은 나 자신을 위하는 방향으로만 집중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축적되어진 힘을 반드시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을 때 그것을 과시하고 싶고 그 힘으로 약한 자를 누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보면 우쭐거리고 싶고, 누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는 힘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학대받는 자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이 원할 것은 오직 힘입니다. 힘이 있어야 사람구실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소유하고 모으려고 합니다. 힘이 없음으로 인해서 굴복 당하고 눌림 받고 학대받는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고 반대로 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것은 쾌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모든 소망을 종합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게 됩니다. 공통점이란 현재보다 더 나아지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힘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힘은 곧 환경과 직결됩니다. 그 어떤 강한 힘이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 힘은 환경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사람자체에 힘이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라는 것도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권력자로 만든 것이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서 물러나면 그도 곧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부자가 힘이 있다고 하지만 돈이 없어지고 나면 그 사람도 무시 받고 천대받는 가난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결국 환경과 인간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힘을 원하고 살아가고, 힘은 곧 환경과 직결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불만을 가지고 이런 환경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간다는 신자들에게서도 환경을 원망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야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는 것이 목적이니까 환경을 보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신자는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관심의 차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 되는 것이 관심이라면 그 사람은 결코 환경을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보시고 높여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보시고 구원하시지 환경을 보시고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신자된 자가 기억할 것은 어떤 환경에서든 나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이지 내 환경이 나쁘냐 좋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이 좋지 않아서 신앙생활을 못한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혹 신앙생활에 좋은 환경이 있다고 해도 그런 좋은 환경에서야 누가 신앙생활을 못하겠습니까? 신앙이 환경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어떤 인간이냐?'를 물으실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교회 안에서도 학대하는 자와 학대받는 자, 무시하는 자와 무시 받는 자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고 합니다. 누가 화있을 자입니다. 학대하고 속이는 자입니다. 학대하고 속이는 자가 발생하는 것은 관심이 세상의 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단지 학대하고 속이는 것이 나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화있을진저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살지 않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라고 했습니다. 즉 이 세상이 관심이 아니라 장차 영원히 살아갈 나라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심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힘을 모으기에 발버둥을 치고, 주어진 힘으로 남을 학대하게 되고 속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세상 것을 주셨다면, 즉 어떤 환경을 이루어 주셨다면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라고 주신 것이지 자기의 힘으로 삼아서 약한 자를 학대하고 무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가졌든 남보다 많이 배웠든 그 모두는 하나님을 위해서 주신 것이지 우리를 세상에서 높이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만큼은 명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보지 말고 자신을 보십시오. 내가 지금 하나님의 관심으로 살고 있는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환경을 보게 되면 결국 환경을 통해서 힘을 발산하게 되고 그럴 때 여러분으로 인해서 무시 받고 고통받고 상처받는 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화있을진저'입니다.

 

 

 

 

이렇게 1절이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모습이라면 2절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절에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가 할 수 있는 기도인데 이 기도를 보면 어느 한 곳도 자기의 힘을 내세우거나 힘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고 하나님만 앙망합니다. 은혜만 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은 한마디로 힘이 없는 자입니다. 연약한 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여부에 상관없이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이것은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결과입니다. 환경을 볼 때는 환경 안에 뭔가 믿음직한 것이 자리하기 때문에 은혜를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앙망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도 아예 느끼지를 않습니다.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라고 말씀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연약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연약한 자에게서 어떻게 학대가 나오고 속이는 것이 나오고 무시하는 것이 나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신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환경을 보지 않고 나 자신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도우심이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자임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어진 환경에 묻혀서 힘을 내세우고 과시하고 자랑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힘을 과시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발산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의도적으로 힘을 누르려고 애쓰는 노력이 아니라 관심이 하나님 나라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힘의 원칙에서 점차 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원하십니다. 천국은 힘있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힘없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 하심을 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5,6절에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 이는 높은데 거하심이요 공평과 의로 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너희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시온이 공평과 의로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평안함이 있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기를 위해서 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관심이라면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의 관심과 같아야 바른 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6절 마지막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너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과 전혀 상관없이 산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보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귀한 보배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 신자는 무엇을 해도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구하고 도우심을 구해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구하게 되고 자신의 환경을 좋게 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힘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 세상에서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세상에 나타내고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도우십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하나님께 한 기도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입니다. 그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해서 스데반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고 죽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충만케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위대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의를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 의가 아니라 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나의 힘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의 모습입니다.

 

 

 

 

15,16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높이시는 신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한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높이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한마디로 세상이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관심거리가 되어서 살아가는 신자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고 의를 나타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런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힘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마시고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힘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마지막때 하나님 나라에서 높임을 받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처소 (사 33:17-24)


"너의 눈은 그 영광 중의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하겠고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칭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네가 강포한 백성을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서 네가 알아 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같을 것이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오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었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세상은 흥망성쇠의 기준을 수와 양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의 이치에서 볼 때는 맞습니다. 장사를 해도 손님이 많아야 흥하고 손님이 적으면 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손님이 적은데도 번창하는 장사는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수와 양의 여부를 따져서 흥망성쇠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활동은 실패라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3년간 복음을 전하셨지만 예수님은 그럴듯한 세력하나 만들지를 못하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뒤로하고 도망쳐버렸습니다. 이렇듯 세상 이치를 기준으로 예수님의 일을 살펴볼 때 예수님은 그야말로 무능하고 실패한 인물로밖에 보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전함으로서 세상이 멸망 받아야 함을 심판하시고 참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수의 사람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인해서 기뻐하십니다. 설사 세상이 다 멸망당하고 그 속에서 단 한사람만이 예수님의 참된 백성으로 남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들은 모든 기준을 세상의 이치와 같은 선에 세워 두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자본주의 법칙 위에 세워져 있고, 다수의 원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돈이 곧 힘으로 작용하고 있고 많은 수의 사람이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부흥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옳지 않은 말로 치부해 버리고, 아무리 잘못된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결과가 교회의 부흥과 재정의 증가로 연결되면 곧 진리로 통해버리는 실정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는 한국교회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이 곧 부흥이고 그것이 교회의 힘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마음 뿌듯해하면서도 교인이 한사람 한사람 교회를 빠져나간다면 혹 교회가 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은석교인들이 매주일 한사람씩 빠져나간다면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것이 곧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옆에서 설사 풍랑이 불고 파도가 치고 금방 바다에 빠질 것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거기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다. 교인수가 줄어간다고 해도 사람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은석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어서 교회가 망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영원하십니다. 은석교회는 사라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교회는 결코 사라짐이 없이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은석교회를 구원시키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볼 것은 하나님이지 은석교회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석교회는 절대로 망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거든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혹 은석교회는 바른 교회이기 때문에 망하면 안되고 부흥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이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누군가를 선택하셨을 때 그 사람을 위대하고 잘되고 높아지는 모습으로 만들어서 쓰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서 누군가를 부르셨을 때 때로는 돌에 맞아 죽는 길로, 때로는 톱으로 켜 죽는 길로, 때로는 매맞고 망하는 길로, 그리고 아들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는 길로 이끄셨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어떤 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례 요한같이 '나는 쇠하여도 주님은 흥하여야 하리라'는 마음으로, 나는 비록 쇠하고 은석교회가 망하는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의를 드러내고 주님이 흥하게 되는 길이라면 담대히 갈 수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병들고 망하고 넘어지고 온갖 고통과 풍랑 속에서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긴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나는 주님의 모습만 나타내고 죽겠다고 하는 소원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길이 싫다면 우린 절대로 주님의 종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은석교회를 보지 말고 여러분 자신도 보지 말고 목사도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왕이시고 하나님의 교회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만 의지하는 신앙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말을 합니다. 본문은 장래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러한 예언을 할 때 이스라엘은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에 천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모두 진실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수만의 교회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장차 하나님이 왕이신 영원한 나라가 등장한다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천만의 신자가 다 가짜고 교회도 복음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말씀을 이용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신앙의 상태나 환경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세우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가능성을 보고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믿음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형편이나 환경을 조건 삼지 않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난하든 부하든 어렵든 어렵지 않든 전혀 상관없이 왕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풍랑을 만나고 고통 가운데 처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거나 멀리 했기 때문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 힘들어 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왕이셨고, 심지어 내가 죽어간다면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의 왕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에게는 한가지 반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면 고통과 어려움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당연하지 가만히 두고만 보시면서 어떻게 왕이시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고, 죄를 지었을 때 징계하심으로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 무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죄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안하고 좋을 때 왕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징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고, 이삭은 야곱이 자기의 축복을 가로챘을 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생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싸우고도 살아난 자신을 깨닫고 진짜 축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고, 모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일개 목동으로 전락했을 때 자기의 무능력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택하셔서 쓰셨던 인물들은 모두 고통과 어려움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갔던 것입니다.

 

 

 

 

20,21절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이사야는 지금 영광의 시온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할 때 비로소 모든 사물을 평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번잡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쌓여 있을 때는 그 무엇에서도 평안과 안정됨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면 이사야는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할 상황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의 상태나 그들에게 닥쳐올 징계 등을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리고 걱정과 근심으로 쌓여 있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안정되고 평안하고 영영히 뽑히지 않을 시온성,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성,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내가 포함되어 있음을 보기 때문에 안정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여건과 형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형편을 바라보고 자기 주위를 바라보기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고 힘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가 귀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앞서 말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 둘 교회를 떠날 때 교회를 바라보면 불안하고 근심이 몰려오지만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멀리하는 복음을 나 자신은 믿게 되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수의 교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적은 수라고 할지라도 참된 신자를 찾으십니다.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귀한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마 13장의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장사꾼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좋은 진주를 구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구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진주를 삽니다. 결국 하나님은 좋은 진주, 즉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소유하기 위해서 아들이신 예수님까지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린 이 마음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시선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에 두어야지 결코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있으면 다른 사람은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나오게 됩니다. '왜 나만해야 하나'라는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는 다른 사람들은 안하는 것을 나라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남이 안하니까 나라도 더 힘써서 봉사하자는 것이 바로 왕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입니다.

 

 

 

 

시온성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성전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 안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신자는 항상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신자답게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서로 경쟁하고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나 한사람 잘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힘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여러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성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그럴 수 없는 중에 장차 영광으로 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 것 같이 우리들도 비록 그럴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성전임을 기억하고,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귀한 존재가 되었음에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우리의 눈을 들어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그 나라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힘써 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칼 (사 34:1-7)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 대저 여호와께서 만국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육케 하셨은즉 그 살육 당한 자는 내어던진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며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그를 심판할 것이라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스라에서 희생을 내시며 에돔 땅에서 큰 살육을 행하심이라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한 가지로 도살장에 내려가니 그들의 땅이 피에 취하며 흙이 기름으로 윤택하리라"

 

 

 


인간은 강한 국가를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강한 국가만이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안식처가 될 수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자신의 둥지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둥지 안에서 평안한 삶과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소망입니다. 때문에 국가가 발전하면 자기 자신도 힘이 생기고 기분이 좋아지고, 반대로 국가가 쇠퇴하면 자연히 자신도 불안하게 됩니다. 요즘같이 국가 경제가 불안하고 흔들릴 때 민중들의 마음도 불안해지고 혼란이 일어나는 것도 결국에는 국가라는 자신의 안식처가 기틀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국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국가는 민중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안식처가 아니라 불에 태워지고 사라져야 할 심판의 대상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는 악의 소굴로밖에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고 조금만 노력하면 살기 좋은 안식처, 편안함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둥지가 될 수 있는 세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전혀 다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 즉 국가를 멸망하신다고 할 때 국가를 자신의 안식처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신의 심술 정도로만 여겨버릴 뿐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세상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인격을 다듬고 인간을 타락케 하는 주위 환경들을 개선하면 얼마든지 선한 사람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신의 심판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선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사람도 악한 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는 우리의 안식처가 아닙니다. 국가는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튼튼한 둥지가 아닙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중심으로 모여든 교회일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흔적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 외에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것이 진정한 안식처이며 둥지입니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몰아쳐도 어미 새의 포근한 날개 아래서 평안함과 따뜻함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교회입니다.

 

 

 

 

국가는 이러한 안식과 평안이 없습니다. 국가가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고 국가가 불안하면 같이 불안해야 합니다. 때문에 국가를 안식처로 삼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국가가 흔들릴 때 같이 흔들리고 불안해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신자는 우리의 산성이 되시고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언젠가 우리들이 갈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세상의 피곤과 불안을 물리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를 안식처로 보지 않고 멸망의 장소로 보는 것이 신자의 시각이어야 합니다.

 

 

 

 

오늘 이사야 34장도 그동안 수없이 외쳐 왔던 세상의 멸망에 대해서 거듭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열국의 멸망, 이것은 새삼스러운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면서 수없이 들었던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히 대합니다. 마치 심판을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은 심판 당한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여기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눈에는 잘사는 이방 나라가 보였습니다. 자기들보다도 편안하게 좋은 음식 먹으면서 좋은 집에서 살아가는 이방 나라들이 행복하게 보이고 그들이 부러웠기 때문에 '우리도 저들처럼 잘 살아보자'는 욕심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이방 나라가 행하는 풍습을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나라가 망하는 땅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세상이 망하는 땅으로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탐욕과 똑같은 탐욕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때 누구나 그들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 누구도 수고와 고통과 눈물을 벗어난 행복을 누리는 자들은 없습니다.

 

 

 

 

즉 수고와 고통과 눈물의 결과로 얻어진 잠시 동안의 편안함과 만족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세상이 생각하는 행복은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돈이 풍족할 때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아끼면서 절약하면서 살아가야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돈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을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이 돈입니다. 따라서 돈을 벌기 위해서 수고와 고통과 눈물로 살았던 세월을 돈을 씀으로서 위로를 받는 것이지 결코 행복은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수고와 고통과 눈물을 벗어났을 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종신토록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수고와 고통과 눈물은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수고와 고통과 눈물로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수고와 고통과 눈물이 없는 다른 나라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우리의 안식처가 되고 행복의 둥지가 되는 그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망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자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수고하고 고생하고 눈물을 흘릴수록 가슴에 한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한을 가슴에 품게 되면 믿음을 자신의 한을 해소하는데 이용하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고생을 하고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돈에 대한 한을 마음에 가지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왔을 때 하나님께 과연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때문에 신자는 세상에서 가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한 한을 가슴에 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대한 한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과 안식이 주어지는 다른 나라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신자란 세상에서 고생하고 수고하고 눈물을 흘릴수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원한 그 나라가 그리워지고 기다려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때 세상은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 모습이 어떠할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그를 심판 할 것이라"고 합니다. 멸망은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으신 일입니다. 지금 세상 위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나무 뿌리에 도끼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 위에 놓여 있는 여호와의 칼, 심판의 칼을 보지 못하고 세상과 더불어 희희낙락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면 세상 위에 놓여 있는 여호와의 칼을 보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멸망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가 됩니까? 이것을 6,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스라에서 희생을 내시며 에돔 땅에서 큰 살육을 행하심이라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한가지로 도살장에 내려가니 그들의 땅이 피에 취하며 흙이 기름으로 윤택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편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피를 흘리게 해서 스스로 만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세상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를 흘림으로서 만족케 됩니다.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라는 말씀이 곧 그 의미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희생의 피를 드리지 아니하고 교만히 행하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칼을 들어서 심판을 행하시고 강제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만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살아남을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심판의 칼을 미리 만족케하고 윤택케 하는 사람이 삽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로 강제로 피를 흘리시기 전에 미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자들만이 사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내가 흘려야 할 심판의 피임을 고백하는 자만이 마지막 심판의 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가슴속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심판을 미리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심판이 없습니다. 신자의 마음에서 늘 떠나서는 안되는 것은 '나는 주님의 희생 때문에 산다' 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곧 복된 자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희생 때문에 내가 산다는 것을 아는 자이기 때문에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됩니다. 어제의 십자가가 아니라 오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열국은 망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열국과 다른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중심으로 모인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스도의 피가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피를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같은 피, 같은 민족, 같은 혈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국가입니다. 한 국가 안에서도 또 조상을 따지고 성을 따지고 고향을 따지는 것이 인간의 국가입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의 혈통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피로 이루어진 혈통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혈통은 죄와 죄를 연결 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이유도 인간의 혈통은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혈통은 거부하시고 어린양의 피로 이루어진 새로운 혈통만을 인정하실 뿐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고,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새로운 혈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피로 인해서 태어난 것은 육이요 육은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은 영이요 그들이 마지막때 사는 자들입니다. 신자가 조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도 아브라함을 섬기지 말고, 이삭을 섬기지 말고, 야곱을 섬기지 말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간섭하셨던 그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을 흠모하고 섬기지 말고 그들에게 간섭하셨던 하나님을 흠모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조상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간섭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의지하지 말고 세상의 혈통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세상 국가가 우리가 살아갈 나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모여진 나라가 우리의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진짜 형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모여진 신자입니다. 인간의 피로 맺어진 혈족의 관계는 세상이 망하는 것과 함께 사라집니다.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세상은 여호와의 칼이 놓여있는 장소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강제로 피 흘리시는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미리 심판 받은 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간의 혈통을 자랑하지 말고 여러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피를 자랑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세상에는 비록 육으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안에서는 새롭게 영으로 태어난 자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신 (사 34:8-17)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시랑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수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 거하여 쉬는 처소를 삼으며 부엉이가 거기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그 짝과 함께 거기 모이리라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친수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눠 주셨으니 그것들이 영영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 거하리라"

 

 

 


로마서 5: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한 자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은 자, 즉 죄인 되고 불의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세상의 희생의 차이점입니다.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는 이 말씀이 곧 세상의 희생입니다.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있을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이러한 희생을 간혹 듣게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 불의한 자를 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도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된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도하신 것을 통해서 확증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는 죄인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그 믿음으로 인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분명히 로마서 5:11을 보면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과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신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은 예수 때문에 세상일이 잘 풀려서 기분 좋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 즐거움을 상실한 채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즐거움의 조건을 세상에 두고 있고, 또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일이 잘 안되면 아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한숨과 염려로 가슴이 채워지게 되고, 자기를 돌아볼 때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워 보이면 그 또한 예수님과 상관없이 낙심과 불안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 백성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심과 불안과 갈등 속에 젖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불안과 갈등으로 빠져들게 하는 원인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향해서 수없이 '자신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만 바라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것은 자신에게서 신자된 증거나 신자로서의 자격요건, 또는 성령을 받은 자로서의 모습,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 증거로서의 변화된 모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기대한 것만큼의 변화된 모습을 찾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낙심하고 실망하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신자됨에 대한 것까지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니까, 성령을 받지 못했으니까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생각자체가 마귀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자신을 바라봄으로서 불안과 낙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임은 앞서 말씀드린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우리가 경건치 못할 때, 불의한 자일 때, 죄인일 때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극복하고 구원으로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외적인 실천이 부족해서 신자됨에 대한 의심에 빠진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로 인해서 신자된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 자신이 신자되었는데도 뭔가 변화된 것이 보이지 않아서 실망했다고 한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즐거움을 상실해 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설명할 때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예로 들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지는 것입니까? 자식은 부모로 인해서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자식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지, 부모에게 태어난 자식이 나중에 공부를 잘한다거나, 말썽을 부리지 않고 출세할 때 비로소 자식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식이 '나는 공부를 못하고 부모 속만 썩이는 것을 보니까 아마도 나는 자식이 아닌가보다'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바른 것입니까? 자식은 공부를 못하건 잘하건 상관없이 자식입니다. 만약 자식이 부모 속을 썩일 때 부모가 나무라고 매를 든다면 그것은 자식답게 되어라는 목적이지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매를 든 것은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들이 내가 뭔가를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나는 하나님 백성이 아닌가 보다'라고 낙심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성경을 통해서 나름대로 '신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행동기준을 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롬 12:9절부터 나오는 말씀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서신에는 특히 성도들로 하여금 '∼을 하여라'는 명령의 의미의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말씀을 대하면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실천 요구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뭔가 실천하는 모습이 보여지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교만에 빠지게 되고, 실천을 하지 못하면 실망하고 낙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신자더러 '하라'는 말씀들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만약 성경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반대로 신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요구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신자가 아닌 자도 하나님의 요구를 실천할 수 있다면 도대체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모든 것은 인간으로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실천할 수 있습니까? 성령 받은 자입니다. 성령 받은 자가 실천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신자되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해야 신자 되느냐'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는 말씀을 보면 '아 기도에 힘써야 신자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결국 신자되기 위해서 안나오던 새벽기도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못나올 때 신자답지 못하다는 자기 낙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 일을 도와주거나 힘을 주어서 위대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령은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라는 것은, 무엇을 실천했고,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대로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심판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에서 내 한몸 잘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드러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성령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성령 받은 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의 생각은 성령을 받지 않은 자와는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복수하시는 날이라는 뜻으로서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 심판이 9절부터 등장하는데 한마디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라지고 짐승으로 가득찬 세상으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황폐해질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명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책이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것들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입이 명하신 것들은 하나같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누구를 통해서 이루십니까? 여호와의 신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의 신'즉 여호와의 신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결국 성령은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성령이 해야 할 일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성령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신자 되어라'가 아니고 '신자 되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스스로 신자 되려고 노력하다가 스스로 절망에 빠지고 낙담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성령이 하게 하신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나는 실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 받을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인간이 실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그것은 성령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한다면 그 역시 성령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성령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선을 사랑하는 자신을 기뻐하지 말고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으로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하고 안하고에 상관없이 성령이 함께 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신이 뭔가 실천하지 못했다고 해서 낙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세상에서 눈 돌리고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지만 그것을 누가 실천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세상의 심판을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 삼으면서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신자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살기 때문에 신자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신자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자되기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무엇을 하든 안하든 자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더러 실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성령을 보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했으면 자기 힘으로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는 인간 되게 하소서'라고 할 때 성령이 여러분이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사람된 것으로 기뻐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심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했나 못했나를 살피지 말고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항상 이것을 물으면서 여호와의 신을 바라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길 (사 35:1-10)

 

땅에서의 삶에는 수고와 고통과 눈물이 있지만 천국은 수고와 고통과 눈물이 없습니다. 땅과 천국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 불신자들이 여러분을 향해서 '왜 천국에는 수고와 고통과 눈물이 없느냐?'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천국이니까 없지' 이렇게 답변하시겠습니까?

 

 

 

 

땅과 천국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땅에는 죄가 있고 천국에는 죄가 없다는 것 때문에 서로 전혀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하며 한숨쉬고 불안해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고통을 겪고 불안해하는 것은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환경이 좋으면 착한 인간이 되고, 환경이 나쁘면 악하게 되고 문제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만약 환경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쁜 환경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똑같이 나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좋은 환경에서는 나쁜 사람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에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습니다. 또 비록 나쁜 환경이라 할지라도 착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물론 환경이 영향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환경에서도 잘 자라서 사회생활을 잘하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환경이 어떻든 상관없이 그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신자는 피조물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마음속에다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환경에 상관없이 항상 지금의 삶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그리스도로 더불어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결국 피조물의 마음으로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고, 죄라고 하는 것도 한마디로 말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눈물은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그 이유입니다. 창조주께서 만들어준 그 모습 그대로 감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과 모습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그 어떤 좋은 환경에서 산다고 해도 결코 눈물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지금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부르면 뭐합니까? 이미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나라가 채워져 있는데,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단지 교회에 와서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위로 받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여러분의 마음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채울 것은 채우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으로부터는 멀어지고 하나님 나라에는 가까워지려는 소원으로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속마음에 돈이 없는 불만과 불안으로 가득차 있고, 자식이 변변치 못한 원망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천국에 대한 얘기를 아무리 한들 위로가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에게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상을 더 원하는 마음으로 나오셨다면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세상은 더럽고 악하고 썩어지고 사라질 나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싫을 때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즉 세상이 싫은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은데 무엇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겠습니다. 결국 세상도 좋고 천국도 좋다는 것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좋은 곳에서만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이 욕망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아무도 못 말릴 욕망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이 세상에 대하여 싫어지고 대신 하나님나라로 물들어 갈 때 오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의 것은 다 부숴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다시 만드시는 나라입니다. 본문을 보면 무엇이 무엇으로 된다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광야, 메마른 땅, 사막이 나오고, 3절에 약한 손, 떨리는 무릎, 4절에 겁내는 자, 5절에 소경, 귀머거리, 6절에 저는 자, 벙어리 혀, 7절에 뜨거운 사막, 메마른 땅, 시랑, 8절에 깨끗지 못한 자, 우매한 행인, 9절에 사자, 사나운 짐승, 10절에 슬픔, 탄식,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 표현은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세상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바꿔 놓으시겠다고 합니까? 1절에 기쁨, 백합화, 즐거움, 2절에 기쁜 노래, 레바논 영광, 사론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움, 5절에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고, 6절에 사슴같이 뛰고 혀가 노래하고, 이렇게 계속해서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꾸시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상태를 완전히 뒤바꿔서 만들어지는 나라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상이 아닙니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정상적이지 못하고 저주 아래 있고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을 다 부숴 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라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처럼 세상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고, 세상의 것을 좀 더 많이 쌓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4절에 보면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오셔서 보수(복수)하시고 보복하여 서 우리를 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수하시고 보복하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죄 때문에 눈물 흘리고, 괴로움을 당하고, 수고하며 살았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복수하셔서 우리를 죄없는 상태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기쁨입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의 복수가 우리에게 기쁨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기쁨으로 다가오는지 의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수해주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려면 먼저 우리들이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는 것입니다.

 

 

 

 

복수란 원한을 갚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피해 때문에 원한이 발생했을 때 복수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한을 갚을 힘이 당사자에게 없을 때 대신 복수해 줄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세상의 죄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고 때때로 죄에 끌려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탄식하고 괴로워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복수를 하나님이 대신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죄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탄식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수가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세상에 대해서 한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그냥 죄에 끌려가면서 오히려 죄를 좋아하면서 세상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복수해주시고 우리를 구해주신다는 말에 아무런 기쁨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좋은데 왜 복수하신다고 하느냐?'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는 '하나님, 저는 약해서 항상 죄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세상의 죄에 붙들려 있는 자신에 대해서 탄식하고 회개하면서 하루속히 죄없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날을 고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이 우리편에 되셔서 우리 대신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복수하신다는 말이 기쁨이 될 것이고,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대로가 있습니다. 그 대로는 하나님나라, 깨끗한 나라로 들어가는 대로입니다. 때문에 그 길은 더러운 자들은 지날 수 없는 거룩한 길입니다. 거룩한 길은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모두 더러운 자입니다. 그 누구도 거룩한 길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린 어떤 날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날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복수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그 날을 사모하고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고생하고 눈물 흘리고 괴로움도 당하면서 살아가지만, 깨끗함을 입고 거룩한 길을 지나서 시온으로 들어갈 그 날을 생각하고 기다리면서 힘을 얻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가 하면 10절에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다 달아날지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복수로 인해서 깨끗함을 입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시온에 이르렀을 때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고 슬픔과 탄식은 다 달아나고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날, 이 나라가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죄가 없는 깨끗한 나라가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깨끗한 나라를 그리워하며 사는 사람은 세상의 죄에 대해서 탄식하며 살아갑니다. 죄 때문에 괴로움 당하고, 내 죄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 인생을 미워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복수해주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실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이 나빠서 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죄에 매여있고 피조물의 자리에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숨쉬며 사는 것입니다. 또 그런 여러분 때문에 이웃이 피해를 입습니다. 그럴 때 한숨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것은 전부 내 죄 때문입니다. 속히 나를 죄없는 나라로 데려가 주소서'하면서 살 때 하나님의 복수하실 날이 기다려지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고와 눈물은 모두 내 죄때문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죄없는 나라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죄없는 나라를 생각할 때 자신의 죄에 대해서 미워하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날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날에 거룩한 길을 지나서 시온에 이르고 영영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것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조롱 (사 36:1-10)


지난 시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하나님 나라가 좋은 이유는 죄가 없는 깨끗한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수고와 고통과 눈물과 한숨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우리의 모든 수고를 쉬고, 눈물이 씻김 받고, 고통을 위로 받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이 말이 자동적으로 여러분들의 위로가 되거나 힘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죄가 없는 깨끗한 나라를 사모하면서 상대적으로 세상의 더러움과 죄악에 대해서 미워하고 멀리하고자 힘쓰는 삶에 게을리 하지 아니한 신자들에게만 이 말씀이 위로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를 멀리하고 항상 천국을 소망하며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 말씀들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신앙이 완성된 것도 아니요 죄와 상관이 없이 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을 힘들게 하는 점입니다.

 

 

 

 

창세기 4: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 59:12절을 보면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라는 말씀을 보더라도 죄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 그리고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멀리하거나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한순간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천국을 소망하고 있다고 해서 그 믿음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여기에 대해서 오해를 하기 때문에 분명히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은혜를 알고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기 속에서 악한 생각이 피어나고 탐욕이 보여질 때 스스로 당황해하고 자기에 대해서 낙심하면서 전에 했던 고백과 믿음에 대해서까지 의심해 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된 여러분이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죄와 상관이 없이 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순간 죄가 다스려지고 있는 것이지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아직까지 마귀가 죄로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는 악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이제부터 믿음으로 살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예배당 문을 나서고 또 다시 세상을 대하는 순간 말씀의 감격은 사라져버리고 다시금 염려와 걱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 모두 그런 이유에서인 것입니다. 마귀, 즉 사단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창조되기 전 이미 하늘나라의 천사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천사가 타락해서 사단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단은 무엇을 노리고 있겠습니까? 인간을 노립니다. 그러나 사단은 아무 인간이나 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을 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단이 하는 일을 생각할 때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재앙이나 내리고, 비양심적으로 살도록 유혹하고, 나쁜짓 하게 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일을 상상하지만 사실 사단의 일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무효화하려고 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입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노리는 것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아니한 자들을 사단이 공격하지 아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피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고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 자는 제아무리 착한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을 굳이 공격하고 유혹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벧전 5:8절에 보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 삼킬 자가 누구인가 하면 교회에 잘나오거나 봉사 잘하는 사람이거나 양심대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 즉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면 반드시 사단으로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유혹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사단으로부터 유혹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새삼스럽게 사단의 유혹을 운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유혹에 빠져 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가 신앙이 강하면 아예 사단이 접근을 하지 못하고 유혹을 하지 못할 것인데 신앙이 약하니까 사단이 접근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된 생각입니다. 신앙이 강하기 때문에, 가만히 두면 천국에 갈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유혹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지난 수요일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그래 맞아 세상은 망하는 곳이야 세상을 보지 말고 천국을 보고 살아가야 해'라고 결심했을 때 사단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로 하여금 세상을 보게 만들고, 어려운 일이 다시 생각나게 해서 걱정에 빠져들게 하고 염려하게 만들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을 때 이미 그 마음속에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천국만 바라보고 살아가나. 그래도 역시 돈이 최고다'라는 생각을 가진 채 듣는다면, 제 아무리 천국에 대해서 침을 튀겨가며 말한다고 해도 마음에 감동이 안되는데 그런 사람을 사단이 유혹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충실한 사단의 자식인데 또 다시 자기 자식 만들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 앞서 35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36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조롱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본문에 보면 히스기야 왕때 앗수르 왕이 유다를 공격하면서 랍사게라는 장군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말을 하게 합니다. 그 말이 4절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랍사게가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말은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애굽을 믿는다고? 애굽은 썩은 지팡이다. 또 뭐 하나님을 믿는다고? 웃기지 마라.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가 우리를 너희한테 보내 가지고 너희를 멸망시키라고 했다' 이런 조롱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믿어봐야 별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뭐냐는 것입니다. 이런 조롱을 듣는 순간에 35장을 통한 믿음이 흔들려 버리는 것입니다. 35장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복수해주시고 세상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셔서 깨끗한 나라로 들이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세상에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주만 바라보고 살아야지'라는 결심을 가졌는데, 막상 세상에서 어려움을 대하고 조롱을 받게 되니까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조롱 속에서 뭔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들고, 자신이 지금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세상이 볼 때는 조롱감입니다. 세상은 힘을 추구하고 힘이 최고이고 힘이 목적으로 되어 있는데, 힘과는 아무 상관없이 설사 내가 약해지고 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놓칠 수 없다는 믿음을 주장할 때 조롱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집안에서 나 혼자 있을 때는 믿음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쉽게 할 수 있지만 그 결심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을 때 믿음으로 살기가 쉽지 않는 것입니다. 사단이 가만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갖 상황과 환경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고 천국에 대해서 미심쩍어하게 만들고 돈의 힘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배당에서 설교를 듣고 혼자 말씀을 대하면서 믿음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결심을 하지만 막상 세상에서 살아갈 때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고 공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을 그냥 두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오히려 허용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흔들어서 확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대충 믿으면서 왔다갔다하고 입으로만 하나님을 부르고 자기 잘못을 모르는 사람들을 드러내고 확인하시기 위해서 사단을 허용하십니다. 결국 사단으로 인해서 구별되는 것은 가짜와 진짜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이 욥을 시험코자 했을 때도 그것을 허용하신 이유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신자된 자들이 재물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믿음을 드러내시고 확인하시기 위해서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랍사게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잘된 것이 뭐냐?'는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이 받는 조롱입니다. 또 자기가 자기에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잘된 것이 도대체 뭐냐?'는 조롱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사단의 유혹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당부 드리고 실은 것은 세상의 조롱과 놀림 속에서 마음에 흔들림이 오고 의심이 올 때 거기에 그대로 끌려가지 마시고 평소에 자신을 감동시키고 믿음의 결심을 하게 했던 말씀 위에 자신이 굳게 서있는가를 점검하시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신자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의심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사단은 거짓말하는 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거짓말은 있는 사실을 다르게 말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의 거짓말이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말입니다. 거짓말에 속지 않도록 항상 자신이 말씀에 굳게 서있는지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을 때, 그리고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과 염려에 휩싸일 때 다시 한번 내가 지금 말씀에 굳게 서 있는지 점검하시고 어느 것이 참된 진리의 길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하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만 걸어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사단의 말 (사 36:11-22)


세상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 치고 환난과 어려움을 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불교의 승려들은 일부러 고행을 자청하기도 하지만 그 고행이라는 것은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절제를 훈련하기 위한 육체의 고통이지 세상에서 오는 환난과 어려움의 차원은 아닙니다. 또한 고행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 즉 자신의 정신적 유익에 장애가 되는 육신의 모든 문제를 절제하고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스스로 자청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환난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은 환난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소원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고 한해 신수를 점침으로서 자신에게 닥쳐올 환난을 미리 피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환난을 없기를 바라거나 환난이 있다 해도 자기를 비껴 가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에 있으면서 파도와 풍랑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해도 자기를 비껴 가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신자들은 믿음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몸은 바다에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 방패가 되셔서 불어오는 풍랑과 파도를 다 막아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사는 것이 곧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풍랑을 막아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실 때 풍랑이 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불어오는 풍랑을 없애주신다는 뜻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풍랑도 예수님의 다스림에 있는데 왜 너희가 나를 믿는다하면서 풍랑을 두려워하느냐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풍랑 속에서 담대하게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형편이 좋지 못한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살기가 어렵다고 아우성들입니다. 그 속에 우리 신자들도 함께 몸을 담그고 살아갑니다. 세상이 어려우면 우리도 어려울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 파도가 치면 우리도 그 파도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지금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이는데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해서 특별히 풍랑이 비껴가고 파도가 치지 않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이기주의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라도 하나님 덕분에 편해보자는 이기주의입니다.

 

 

 

 

인생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상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신자도 함께 겪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신자인 사람만 특별히 고통과 어려움에서 제외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어려움을 물리쳐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나오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진리가 관심이 아니라 내 몸 편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파도가 없고 풍랑이 불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도피 이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가 과외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과외비가 들지 않는 나라로 이민 가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어려움 때문에 어려움이 없는 나라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그 나라대로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도 다른 나라로 도망을 치겠습니까? 파도나 풍랑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풍랑이 불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풍랑이 나를 피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인 여러분은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대합니까?

 

 

 

 

신자는 어려움을 피해서 편한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하거나, 내가 편해지는 방법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려움이 왔을 때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작은 것으로 만족하자'라고 했다면, 물론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주어진 것으로 만족할 때 행복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목적이 하나님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 마음 편해지기 위해서라면 잘못이라는 얘기입니다.

 

 

 

 

내 마음 편해지기 위해서 지금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자 애쓴다면 절대로 만족을 느낄 수 없고 오히려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는 걱정과 염려 때문에 더 힘들어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에서 내가 편해질 수 있는가?'로부터 시작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복은 진리를 알았을 때 주어집니다. '어느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라는 인생의 바른 길을 알았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진리를 알므로 마음이 자유로울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편치 못하고 괴로움과 답답함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뭔가 여러분의 마음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 사업, 돈 이런 것들이 여러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장벽인 것입니다. 이 장벽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려움을 해결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서 내 편해지기 위해서만 고민하고 힘쓰지 마시고 어려움 속에서 내가 배울 것이 뭔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려움에서 바른 인생의 길을 배우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편안함을 찾게 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찾아와서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그들을 업신여기며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서 잘된 것이 뭐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14절,15절을 보면 "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히스기야가 너희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는 것을 받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붙임이 되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히스기야를 청종치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히스기야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우리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너희가 하나님 믿어 가지고 잘된 것이 뭐냐? 너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의뢰해도 너희의 신은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앗수르 왕에게 항복해라 그러나 포도와 무화과를 먹을 것이고 우물물을 마실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말입니다.

 

 

 

 

하나님 믿어서 나아진게 뭐냐? 잘된 것이 뭐냐? 혹시 여러분 마음에서 이런 외침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어려울 때 이런 생각에 빠진다면 그것은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피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서 나아진게 뭐냐?'는 생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컨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의 듣는데서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라고 합니다. 지금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향해서 그들을 조롱하고 협박을 하자 대신들이 랍사게에게 부탁하기를 제발 아람말로 하고 유다말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랍사게가 유다 말로 하면 유다 백성들이 다 알아듣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불안해할 것이니까 그들이 못 듣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려움을 피해가자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신 것은 그 어려움을 통해서 뭔가를 가르치고 배울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할 때 목사들이 무슨 말로 위로합니까?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십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어쨌든 불안감을 없애고 어려움을 피하도록 하는 말만하고 있고, 뭔가 어려움 속에서 진리를 배우고 인생의 바른 길을 배우도록 인도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 교회의 큰 문제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배우도록 가르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파도가 치고 풍랑이 분다고 해도 그것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천지를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어려움을 주고 국가를 어렵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배우라고 우리를 파도가 치고 풍랑이 있는 세상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꼭 필요한 태도는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우리는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해결하시도록 나는 뒤로 물러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는데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가 불안해하고 낙심하고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려고 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이란 해결되면 또 다른 어려움이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해결되기만 바라고 있다면 항상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신다면 어떤 파도가 와도 바윗돌 같이 서있게 될 것입니다.

 

 

 

 

파도가 없기를 바라지 말고, 파도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파도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여러분은 뒤로 물러나십시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하실 일만 바라볼 뿐입니다. '하나님 믿어도 별수 없다'는 사단의 말에 빠지지 않고 파도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배워가는 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믿음 (사 37:1-7)


지난 시간에는 앗수르의 장군인 랍사게가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너희가 하나님을 믿어서 잘된 것이 뭐냐?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 말고 힘있는 앗수르 왕에게 항복해라 그러면 잘먹고 잘살 수 있다'는 말로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것을 사단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 들게 하고, 하나님을 믿어도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 는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곧 사단의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나를 조롱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내 안에서 내 본성이 외치는 소리일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랍사게의 조롱의 말을 들은 히스기야가 취한 행동을 통해서 신자가 어려운 난관에 처했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려울 때보다 평안할 때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평안해야 교회 일도 잘하고, 돈이 넉넉해야 헌금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모두 하나님 탓, 환경 탓으로 돌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자에게 있는 어려움은 단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걸림돌로만 여겨지게 될 것이고, 신자들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신앙의 길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속히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만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하나님을 조롱하고 믿음을 조롱하는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버티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이스라엘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시 '하나님 저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저 사람을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무서움을 보여주십시오.'라고 하지는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혹 자신의 자존심 문제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믿음을 조롱하는 것에 대한 분풀이는 아닌지 생각해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자신을 조롱하고 욕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화만 내지 말고 '하나님께서 왜 내 앞에 저 사람을 세우셨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일어난 상황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일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나는 행복 할텐데'라는 생각에 빠져들면서 지금의 상황을 자기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들의 사고방식 속에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일 때문에' '너 때문에' '저 교회 때문에'라는 생각들이 상대방을 미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 때문에 안돼' '이 일 때문에 안돼' '이것만 없으면' '저 사람만 없으면'하는 생각들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며 사단의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내 옆에 있고, 나보다 잘되는 이웃들이 내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너 때문에 안돼'라는 생각이 앞서 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기고 누르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전에는 악에 빠지지 않았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서 악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악을 가진 채 태어납니다. 악은 평소에는 감추어진 채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을 때 드러나지 않던 미움이 드러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신자 앞에 신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자를 세우셨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드러나지 않은 악을 드러내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욕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사람을 세우심으로 '너도 저 사람과 같이 남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욕하는 악이 있지 않느냐?'는 것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자기를 조롱하는 자를 향해서 미움을 가지고 욕을 하고 같이 조롱함으로서 자신도 저 사람과 똑같은 악을 가지고 있는 죄인임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너 때문에'라는 생각에 빠진 채 미움을 드러내고 상대방과 같이 조롱한다면 그것이 곧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인 가인을 세상에 남겨 두시고 보호하시는 것도, 인간에게는 누구나 가인과 같은 악이 있음을 가인을 통해서 발견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랍사게가 이스라엘 앞에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랍사게의 말을 듣고 동요되고 마음이 흔들리면서 하나님의 향한 신뢰가 사라져 버린다면 평소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신앙이 가짜였음이 들통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조그만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 교회가 평소에는 하나님만 섬긴다고 하고 말씀으로만 살자고 가르치는 교회였는데, 어느 날 다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얼마 되지 않아서 기존에 있던 교회보다 더 커졌다고 할 때 평소에 하나님만 섬기고 말씀으로만 살자고 외쳤던 믿음이 진실된 것이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참된 믿음이었다면 다른 교회가 커지든 말든 관심 두지 말고 여전히 변함없이 하나님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보다 부흥된 다른 교회를 보면서 '우리 교회는 뭐하나? 우리 교회는 왜 부흥이 안되나?'라고 하면서 '하나님, 우리 교회가 부흥되게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다른 교회가 들어오기 전 평소에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중심으로 산다고 했던 그 믿음은 진실된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른 교회를 들어오게 하신 것은 아무 뜻이 없이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점검하라고 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염두에 두고 히스기야의 행동을 살펴볼 때 참된 믿음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궁내 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를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랍사게가 조롱하는 말을 듣고 두 가지 행동을 취합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전으로 간 것이고, 또 하나는 대신과 사람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이런 히스기야 행동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는 것, 즉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했다는 것이나, 선지자를 찾아간 것, 즉 오늘날 목사를 찾아가서 상담하는 것은 우리들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행동을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령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여러분의 가족, 또는 친척 중에 권력이 있거나 재물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 기도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 다 찾아보고, 힘있는 사람 다 찾아보다가 이도 저도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이나 불러보자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목사를 찾아오는 것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고 성경적인 길인가를 찾아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세상에 아는 사람도 없고 힘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도 사람을 많이 아는 목사에게 의논하면 뭔가 해결의 길이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목사를 찾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히스기야의 행동을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앗수르의 싸움에서 힘으로 대항하겠다는 생각은 버렸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싸우시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나는 세상 문제를 세상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겠다. 이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에게 대신을 보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앗수르를 물리칠 수 있는 지혜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앗수르를 이기도록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선지자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히스기야는 선지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을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잘 알고 히스기야가 세상적인 방식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가 앗수르를 바라보는 시각과 같은 시각으로 앗수르를 바라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교회 목사에게 상담을 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선지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선지자들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상담하러 왔을 때 무슨 말을 해주겠습니다.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면 어떤 상황을 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그 일을 통해서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낸 것은 일을 해결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를 물어보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오직 문제 해결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빨리 문제가 해결되어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하고만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하고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문제 해결이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인도해 가시든 나는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여지고 말씀을 이루는 일이 되게 하소서'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고 했던 믿음이 어떤 상황을 통해서 진실된 것으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전에는 믿음이 있는 줄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평소의 믿음이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진실된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조롱 앞에서 여호와의 전을 찾고 이사야 선지자를 찾는 것은 한마디로 '자기 포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포기란 이 상황이 자기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해결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찾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뜻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앞세우고자 하는 믿음입니다. 기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기도는 자기를 포기한 기도뿐입니다. 기도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고백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자기 포기가 없는 기도는 자기 탐욕이지 절대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평소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에서 고백을 했다고 하더라도 진실의 여부는 어려움과 난관이 발생했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는 항상 자기 손해를 싫어하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뜻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자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고자 할 때 자기의 이익은 포기한 채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어려움 당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어려움을 당하고, 조롱 받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어떤 조롱도 받겠다는 입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면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헛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만족하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도구만 되려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자기의 이익은 포기한 채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기도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힘쓰십시오. 이것이 신자가 할 일입니다. 자기가 포기되어 있지 않은 자리에서는 하나님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내가 포기되어진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이 보여지고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출처: 심플 라이프 원문보기 글쓴이: 심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