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스크랩] 강해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에반젤(복음) 2023. 4. 2. 01:25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이사야 28장 1-29절

  2010년 3월의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봄바람 소리 들으며 살고 계십니까? 느끼고 계십니까? 자연의 소리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새 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알게 모르게 자연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아니해도 자연에는 귀를 기울이며 자연의 소리에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자연을 창조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에게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본문에도 그러한 자들의 무리들이 보입니다.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24장부터 27장까지 세상 끝 날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35장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경고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해서 멸망 받았다는 사실을 잘 보고, 잘 듣고 깨달아서 택함 받은 너희는 저들이 당했던 그 비참한 일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면하였습니다.
  마지막 때도 세상은 참 진리의 소리에 외면을 할 것입니다. 아무리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외치어도 저들은 외면하고 무시하고 핍박까지 할 것입니다. 예언서를 살펴보면서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들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 에브라임 재앙
(사28:1-6)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4)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 영화의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5)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6)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마는”

  에브라임 지파는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였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말할 때 에브라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예언의 메시지는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멸망당하기 직전에 선포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앗수르는 디글랏 빌레셀 3세 (B.C 745-727) 가 죽고 살마에셀 5세 (B.C 727-722년) 가 즉위하면서 더욱 야심만만하게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서진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므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언제 침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호세아 왕을 비롯하여 지도자들과 백성에 이르기까지 물질적인 풍요에 젖어 방탕과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무렵 북왕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들 즉 아모스와 호세아의 메시지에는 그들의 타락 상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재앙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재앙의 원인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런 재앙을 당하는 데는 분명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로 시작되는 재앙의 경고는 재앙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왕국의 면류관 곧 그들이 자랑하던 성 수도 사마리아의 죄악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것은 “술취함과 교만함” 이었습니다. “술에 빠진 자의 성” 이란 표현은 사마리아 성 전체가 큰 술독에 빠진 것과 같이 방탕에 젖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합 왕의 부친인 오므리 왕 때에 세워진 사마리아 도성은 아름답게 둘러싸인 비옥한 골짜기 끝부분의 언덕 같은 봉우리 (해발 350m) 위에 건설된 성읍으로 “영화로운 관” 처럼 아름다운 성 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관은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라 교만의 면류관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의 대표적인 죄악은 술취함과 교만인데 그들은 물질적인 풍요에 젖어 하나님을 망각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고 방종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마리아가 하나님께 재앙을 당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었습니다.
  술에 취했다는 것은 단순히 술에만 극한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쾌락에 취했다는 것입니다. 먹는 술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듯이 세상 쾌락에 취하면 인간을 어리석게 만들고 맙니다. 세상 쾌락은 마치 늪과 같아서 한번 빠져들면 그 세계에서 나오기가 힘이 듭니다.
(롬8:5-8)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의 쾌락을 좇으며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북이스라엘은 교만했습니다. 그 교만이 물질의 부와 풍요 때문에 왔습니다. 세상적인 물질의 부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최근에 오스트리아 백만 장자인 “카를 라베더”(47) 씨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작은 오두막집 단칸 셋방으로 이사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더 많은 부와 사치가 곧 더 많은 행복을 의미한다고 오랫동안 믿어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치와 소비를 멈추고 진짜 삶을 시작해야 한다” 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한 척하는 직원들도, 중요한 사람인 척 하는 손님들도 모두 배우 같았고, 진짜 사람 같은 사람은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영혼도 없고 감정도 없는 5성급 삶이 얼마나 끔찍한지 깨달았다” 고 말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교만해 진다면 그것은 나를 망하게 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벼는 익으면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입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성공 비결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미쳐라, 둘째는 겸손하라, 셋째는 꿈을 잃지 말어라 는 것입니다.
  특히 반기문 사무총장의 겸손은 외교부에서 모두 다 인정하는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한참 어린 직원이라도 면담 후에는 문을 손수 열어 배웅했고 선배들을 제치고 연일 고속승진을 하던 때 동기와 선후배 100여명에게 손으로 쓴 그의 편지는 외교부내 전설이 됐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과 끝나는 관계가 됨을 깊이 깨닫고 겸손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재앙의 정도입니다.
  북이스라엘에 임하는 하나님의 재앙은 “쏟아지는 우박” 처럼 “파괴하는 광풍” 처럼 “큰 물이 창일함” 같이 임할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주께 있는 강하고 임 있는 자” 를 통해서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앗수르입니다.
  호세아 왕 9년 B.C 722년 앗수르 공격을 받고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렇게도 자랑하던 자신들의 면류관은 앗수르 군대에 의해 땅에 짓밟히고 내던짐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의 부귀와 영화는 시들은 꽃처럼 떨어질 것이고 처음 익은 무화과가 맛있는 것처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군대에게 신속하게 멸망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는 북이스라엘을 앗수르 통해서 철저하게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들이 추구하고 자랑하던 부귀 영화를 한 순간에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 돌이오지 아니하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재앙이 임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는 육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에게 임하는 재앙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그 날에 아무리 땅을 치고 회개를 해도 늦습니다.
(계18:4)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러한 재앙 받지 아니하려면 지금부터 깨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재앙 속에서 남은 자
  예언서에는 남은 자의 신앙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타락한 북이스라엘에도 남은 자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고, 판결하는 신이 되시고, 싸움을 물리치시는 힘이 되실 것입니다.  
  타락한 시대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타락한 시대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시대에 가장 무서운 자신입니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에 내 자신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성령께서 나의 연약함을 감당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성령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115:11)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세상의 환난 속에서 어느 누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의 고통 속에서 어느 누가 나의 아픔을 위로해 줄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나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나의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온전히 나의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남유다 재앙
(사28:7-15)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14) 이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경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5)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임할 재앙에 의해서 남유다 에게도 임할 재앙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사마리아의 타락도 안타까웠지만 그들과 똑같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예루살렘을 보면서 더욱 안타까워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만일 돌이키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남유다 민족들의 모습입니다. (7-8절)
  사마리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백성들도 술 취한 상태였습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온 상황에서 그들은 정신을 차리기는 커녕 쾌락에 빠져 비틀거렸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백성을 지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 곧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역시 독주에 비틀거렸습니다.
  7절에 “독주” 라는 말이 세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주 취해도 고주 망태가 될 정도로 취한 상태입니다.
  “옆걸음 치며” “비틀거리며” “술에 빠졌다” 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의 정도를 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세상 쾌락에 빠져서 살면서 여전히 종교 지도자 역할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판단이 흐려져서 백성들을 지도할 수도 없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를 고수하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에 대해 조롱하는 말로 9-10절에서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자신들의 죄가 지적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지도자들은 “누구를 가르치려 드느냐” 며 빈정거렸습니다. 자신들의 죄악된 모습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사실만으로 권면을 외면하고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그들은 혀 짧은 갓난아이의 말투를 흉내 내며 조롱하였습니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이 말의 의미는 히브리어로 “차우 라차우 콰우 라콰우 콰우 라콰우” 라는 말로 갓난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내는 소리와 같은 무의미한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선지자의 교훈을 갓난아기들이 하는 무의미한 말처럼 무시하며 이사야가 자신들을 귀찮게 하고 있다고 빈정거렸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말씀을 모르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 말씀을 알고 있는 자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는데도 내 죄는 보지 않고 남의 죄만 보이는 그런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전하고 가르치고 있는 자들이 세상의 것들을 좋아하며 이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그러한 생각은 분명코 사탄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래 물도 맑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위에서부터, 말씀을 전하는 자들부터, 종교 지도자들부터 회개의 역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아래서부터 회개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말씀을 전하는 자들부터 철저한 마음을 찢는 회개가 있어야 만이 이 땅의 미래는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루살렘에 소망이 없었던 것처럼 이 땅도 소망이 없습니다.
  둘째. 종교 지도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11-13절) 이사야 선지자의 심각한 경고를 갓난아이의 무의미한 말투로 흉내 내면서 빈정대는 교만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선지자는 가차 없는 반격을 가했습니다.
  “너희들이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경고를 갓난아이의 더듬는 말 정도로 여기는가? 그렇다면 좋다 이제 너희들은 생소한 말을 들을 것이다”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 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 사람의 말을 듣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그곳을 짓밟을 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생소한 방언, 즉 앗수르 군인들의 말을 듣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앗수르 군대에 철저하게 짓밟힐 것을 네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3절 끝에 보면 “뒤로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리며” “잡히리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디로도 이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기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피할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12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곧 우리의 안식이 되어야 하고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기분을 변화시키는 상쾌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곳으로도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좋은 것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즐겨도 내 영혼의 상쾌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듣고 있습니까? 말씀이 진실로 나의 안식이 되고 계십니까?
  말씀을 듣고, 읽으면 기분이 상쾌해 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아프면 안됩니다. 성경책을 펴들면 졸음부터 오면 안됩니다. 사람의 위로로 내 마음에 평안한 안식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위로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기분 전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비웃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도 똑같이 그들을 13절에서 비웃고 계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외면하고 사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비웃음을 사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셋째.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14-
15절) 예루살렘은 종교 지도자들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까지 타락하였습니다. “경만한 자여” 라고 하였는데 “경만하다” 는 것은 “입을 삐죽거리며 비웃고 조롱하는 것” 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도 종교 지도자들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조롱하고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는 길이라고 외치는 선지자에게 지도자들은 두 가지로 비웃었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망과 언약” 이나 “음부와 맹약” 이나 같은 의미이지만 이중적으로 반복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음부의 세력과 맹약을 했기 때문에 음부의 세력이 자신들을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라고 큰 소리 쳤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정치 지도자들은 애굽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온다 할지라도 애굽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그들은 스스로 거짓과 허위로 피난처를 삼았다고 비웃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앗수르가 침공해 올 때에 애굽과 동맹을 맺었는데 실상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과 허위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보였겠지만 그것은 거짓과 허위 속에서 나온 악한 인간들의 속성이었습니다.
  얼마나 어이없는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입니까? 그래도 북이스라엘보다는 남유다 백성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19대 왕조를 거치면서 단 한 명의 믿음의 왕들이 없었지만 남유다는 20대 왕조를 거치면서 그래도 4명의 믿음의 왕들이 있었고 선지자들도 북이스라엘보다 훨씬 많은 선지자들이 활동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모습은 북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북이스라엘보다는 더 가르침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서슴없이 음부와 맹약을 하며 거짓되게 살 것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고, 진실되게 살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이 거짓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유다가 멸망받기 직전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세상이 끝 날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주위에는 믿음이 있다는 자들이 오히려 사탄의 조종을 받고 거짓되게 살아가는 일들이 비일비재 할 것입니다. 왜 믿음의 남유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세력을 더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외침
(사28:16-22)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17)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18)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음부로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19)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유행하고 주야로 유행한즉 그 전하는 도를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20)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나니 (21)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 공을 이루시리니 그 공이 기이할 것임이라 (22)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
  
  패역한 남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외치십니다. 23절에 보면 브라심산에서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 진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브라심 산은 다윗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친 장소입니다. 기브온 골짜기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다섯 왕들의 연합군을 물리쳤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대적해서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심판하시기 앞서 무엇을 외치십니까?
  첫째. 시온에 견고한 기초석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16절) 이 돌은 시험한 돌이요, 귀한 돌이요, 견고한 기초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는 이 돌이 곧 말씀입니다.
  즉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돌은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 통과된 검증된 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수 없이 검증되고 검증된 살아계신 하나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돌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므로 이 돌이 얼마나 견고합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처럼 귀하고 견고한 것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세상 것보다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오늘날 이 돌은 입니까?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을 믿지 아니할 때, 예수를 믿지 아니할 때 환난 앞에서 사람들을 당황하고 허둥댈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굳건히 붙잡혀 있는 자는, 예수께 굳게 붙잡힌 자는 어떤 환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급절은 “당황해서 허둥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남유다 백성들에게 너희가 말씀을 붙잡고 믿음을 가지라고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 공평의 줄과 의의 추로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17-18절)
  하나님의 공평 앞에 하나님의 의 앞에 거짓과 허위는 우박으로 무어질 것이고 숨은다 할지라도 물로써 떠내려가게 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로 세운 언약도 넘치는 재앙으로 짓밟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주야로 두려워 떨게 하리라는 것입니다.(19-20절)
앗수르의 공격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므로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전해 오는 앗수르의 침공 소식에 예루살렘 백성들은 두려워 떨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전했던 가르침을 깨닫지만 깨달은 때는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들은 “침상은 있지만 짧아서 다리를 제대로 펼 수도 없고 이불은 있지만 좁아서 몸을 제대로 덮을 수도 없다”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준비한 정책과 모략이 전혀 쓸모없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 말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세운 대책이 어떤 고난 앞에 “짧은 침상” 이나 “좁은 이불” 처럼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22절에서 하나님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고 하였습니까?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즉 하나님 말씀을 입을 삐죽거리고 조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마음 판에 새기고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하셨습니다. 즉 말씀에 가볍게 여기고 살면 너희의 결박이 더욱 심하게 조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편안한 인생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믿음대로 살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작정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오직 예수 신앙과 오직 말씀 신앙과 오직 성령의 다스리심 속에서 살아가는 귀한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네 번째. 이사야의 외침
(사28:23-29)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4)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26)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27)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하나님의 외침에 이어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이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하나님의 외침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외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일을 행하시며 그 일이 기이한 일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이한 일이 무엇인지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씨 뿌리는 비유로 선지자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혜로운 농부로 택한 백성을 곡물의 씨앗으로 비유하면서 자기 백성을 적절한 방식으로 지혜롭게 다루시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농부는 땅을 갈고 고르고 씨를 뿌린다는 것입니다. (24-26절)
  농부는 땅을 개간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땅도 고르게 합니다. 고르게 한 다음 씨를 뿌리는 것이 농부의 일입니다.
  농부처럼 하나님도 그 대상이 되는 땅 혹은 밭은 택한 백성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칠고 천박한 땅과 같은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갈아 엎으시고 그것을 고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택한 자를 이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마음 밭도 갈아 엎으시지 않으시고 택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임하는 이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앗수르를 통한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땅을 개간하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때로는 이 회개가 징계를 통해서 하는 자도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자는 반드시 회개라는 것을 통해서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자를 택하십니다.
  하나님은 땅을 개간하신 후 땅을 고르게 하십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십니다. 그 평안한 마음에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주목할 것은 곡식 종자를 뿌릴 새 농부는 아무렇게나 뿌리지 않고 반드시 씨앗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파종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마찬가지로 택한 자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6절을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하나님이 농부에게 이러한 농사짓는 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자기 백성을 가장 좋은 적당한 방법으로 인도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 곡물을 타작하는 농부입니다. (27-29절)
  곡물이 성장해서 결실을 맺게 되면 농부는 적당한 때에 타작할 것입니다. 농부가 어떻게 타작 합니까?
  첫째.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고 작대기로 타작합니다. 소회향은 미나리과의 1년생 식물로 주로 맛을 내는 조미료나 약제에 사용됩니다. 소회향처럼 쉽게 떨어지는 열매를 도리깨로 세게 두들겨 타작할 경우에 그 알갱이는 너무 멀리 튀어나가거나 깨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회향을 타작할 경우에는 가는 작대기로 약하게 톡톡 두들기며 타작해야 합니다.
  둘째. 대회향은 수레 바퀴로 굴리지 아니하고 막대기로 타작합니다. 대화향은 소회향보다 굵고 강한 식물로서 음식의 맛을 돋구는데 사용됩니다. 대회향도 소회향처럼 섬세한 곡물이므로 밀이나 보리를 타작할 때 사용하는 타작용 수레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회향보다는 굵은 막대기를 사용하여 타작하였습니다.
  농부가 이처럼 지혜롭게 곡물을 타작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택한 자들을 다루십니다. 택한 자가 소회향 같은 연약한 평신도 일 때는 가는 작대기를 사용하시고 대회향 같은 직분자 일 때는 굵은 막대기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나 사명자들은 어떻게 타작하시겠습니까? 소맥이나 대맥 같은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은 수레 바퀴로 타작하듯이 사명자들에게는 그만큼 더 많은 연단과 시련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셋째. 곡물을 타작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28절)
  농부가 곡물을 타작하는 목적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이 목적 때문에 농부는 적절한 방법으로 타작의 방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택한 자들을 알곡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타작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작대기로, 어떤 때는 막대기로, 어떤 때는 수레 바퀴로 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알곡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깐 애굽을 통해서, 블레셋을 통해서, 앗수르를 통해서, 바벨론을 통해서, 로마를 통해서 타작하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깨뜨리고 부수기 위한 목적이 타작이 아니라 택한 자로서 알곡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모 저모로 타작을 하신 것입니다.
  타작을 할 때 쓸모없는 껍질을 떨구어 내듯이 하나님의 타작도 모난 것들을 부수어 뜨리고, 필요 없는 것들을 떨구어 내기 위한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하나님의 타작이 올 때 “나에게만 왜 이런 고난이 옵니까?” 하지 말고 감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9절 다같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나를 타작하시는 하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그 지혜는 높고 위대하십니다. “나를 왜 이런 고난 가운데 두고 계실가?” “왜 하나님은 나에게 침묵하고 계실가?” “왜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을 보이시지 아니 하실가?”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돌아보시고 계시고 나를 지켜주고 계시고 나를 한 알의 알곡이 되게 하기 위해서 가꾸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농부 되시는 하나님 손에 잘 가꾸어져서 큰 나무들이 되시고 많은 열매를 맺는 귀한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백성들을 보고 참으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생각이 안드십니까? 그렇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저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저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믿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회복” 이라는 영화를 보고 유대인들의 완악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유대인 랍비가 하는 말이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우리들이 버린 쓰레기를 너희들이 신으로 만들었다” 는 말을 듣고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 패역하고 완악한 이스라엘 땅에도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는 “메시아닉쥬” 라는 자들이 있는데 이스라엘 땅에 약 5천명이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완악함처럼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의 패역함과 완악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목이 터져라고 외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이 허공을 친 것처럼 오늘날도 세상의 끝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빈정거리고 조롱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인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는 말씀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그리스도인의 복된 삶 원문보기 글쓴이: 그리스도의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