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3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여호와의 열심 (사 37:30-35)
히스기야의 기도 (사 38:1-8)
신앙과 현실 (사 39:1-8)
하나님의 위로 (사 40:1-11)
하나님과 인간 (사 40:12-26)
나의 종 (사 41:1-16)
허망한 일 (사 41:21-29)
종 (사 42:1-9)
어리석음 (사 42:14-25)
증인 (사 43:1-13)
두종류의 현실 (사 43:14-28)
우 상 (사 44:9-11)
종 (사 44:22-28)
지명하여 불렀나니 (사 45:1-7)
진흙과 토기장이 (사 45:8-13)
나를 앙망하라 (사 45:14-25)
장 부 (사 46:1-13)
종 말 (사 47:1-11)
내 이름을 위하여 (사 48:1-11)
악 인 (사 48:12-22)
종의 임무 (사 49:1-7)
전능자 (사 49:22-26)
도우시는 여호와 (사 50:1-11)
의를 아는 자 (사 51:1-8)
두려운 마음 (사 51:9-16)
깰지어다 (사 51:17-23)
시온의 힘 (사 52:1-2)
좋은 소식 (사 52:3-10)
기구를 메는 자 (사 52:11-15)
누가 믿었느뇨 (사 53:1-6)
여호와의 열심 (사 37:30-35)
지난 시간에는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 올 때는 자기를 포기한 자세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자세로 나오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 안에서의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대군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고 랍사게의 말대로 항복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의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은 하루속히 이 난관에서 무사히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이 마음은 불신자나 신자할 것 없이 누구나 가지는 마음입니다.
랍사게가 지금 조롱하고 있는 말도 그와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조롱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어봐야 필요 없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틀림없이 자기들의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세상 모든 종교의 공통된 것입니다. 때문에 랍사게는 이스라엘도 당연히 이런 어려움에서는 자기들의 신인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너희들의 하나님은 너희를 건지지 못한다'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때 이스라엘의 신앙은 항상 세상적인 힘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불신앙으로 가득차있었고, 그런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그들에게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이 앗수르가 자기들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의 이유도 모른 채 단지 지금의 난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만 가득차있다면 랍사게의 조롱은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봅시다. 앗수르가 포위하고 랍사게가 조롱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무조건 난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난관을 주셨는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과연 랍사게의 조롱에 마음이 흔들리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난관은,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시기 위해서 내 앞에 두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거기에 순종하겠다'라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때, 랍사게가 하는 조롱들이 이스라엘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으면 삽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신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가?'라고 할 때, 평소에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일이 잘되고 복받아 잘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불신자의 말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어려움을 통해서 나를 가르치신다. 때문에 내가 망하는 것도 흥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난관에서 건짐 받는 것보다는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믿음으로 가득차 있다면 '당신의 하나님은 뭐하느냐?'라는 불신자들의 조롱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 올 때는 자기 포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전을 찾고 선지자를 찾은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인 것입니다.
그후에 8절을 보면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랍사게가 돌아가다가 앗수르 왕을 만납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은 다시 사신을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어서 여호와의 도움을 믿지 말고 항복하라는 서신을 전하게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난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있다면 눈앞의 전세를 살펴보면서 낙심하고 앗수르의 왕의 편지에 마음에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가지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펴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는 말을 듣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이 참된 신이심을 증명해 달라고 합니다.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이사야가 전하게 되는데, 응답은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패망을 결정하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은 앗수르를 비웃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후에 오늘 본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구절은 32절입니다.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남는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남는 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떨어진 자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즉 모두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도 마지막 때까지 남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필연코 있어야 하는 일은 남는 자와 떨어진 자를 구분하는 작업입니다.
32절에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것은 마지막까지 남는 자가 있게 하기 위한 여호와의 열심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여러분이 마지막까지 남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열심입니까? 여호와의 열심이 여러분을 남는 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힘쓰고 열심을 내어서 마지막까지 남는 자가 됩시다'가 아니라 '우리를 남는 자가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합시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으로 흘러가 버릴 더러운 우리들을 마지막까지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께 자신을 맡기는 남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자가 나타낼 신앙의 태도는 '내가 지금 나 된 것은 오직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이고 은혜이지 내 열심이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내 열심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신자가 이것을 안다면 자기의 신앙의 열심을 자랑할리가 만무합니다. 때문에 교회가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열심을 내어서 신앙을 유지하도록 유도하고 독려하는 것은 신자를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앙으로 이끌고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자들에게 스스로의 열심을 강조하고 열심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모 교회는 98년 새해가 되어서 전교인에게 성경쓰기라는 새로운 상품을 제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해 동안 교인들이 심심해하지 않을 상품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직접 손으로 기록해서 그것을 가보로 삼고, 성경을 쓰기 위해서 하루의 십일조를 드리자라고 말합니다. 마치 성경을 자신의 손을 직접 기록하는 것을 믿음의 위대한 증표인 것처럼 위조하고 있고, 말씀의 은혜를 받는 귀한 통로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열심으로 신앙을 유지하도록 하는 마귀의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손을 쓰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위대한 신앙의 행위로 여기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손으로 기록을 했든 안했든 중요한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비록 내 손으로 기록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정성과 노력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을 보면서 스스로를 대견해 할 것입니다. 그것을 불태워 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성과 노력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기록해서 가보로 삼자는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남은 자를 남은 자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상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18만 5천명이라는 앗수르의 군대들이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전혀 힘이 없는 나약한 상태입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앗수르를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앗수르가 물러갔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도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난관에 빠져 있습니다. 그 난관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체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그들 앞에 두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 즉 뭐든지 자기들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안되면 세상의 힘을 빌려서라도 해결하려고 하는 습성을 깨뜨리기 위해서입니다. 남는 자는 자기 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에 자기를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들 앞에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있게 하셔서 우리들이 과연 내 열심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열심에 자기를 맡기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시기 위해서 난관을 두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하나님께 생명도 맡기고 살아가십니까? 사실 지금의 시대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목숨이 왔다갔다는 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지금 세상에서 우리에게 어떤 난관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난관들은 믿음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는 시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어버리는 난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난관을 이기지 못한다면 과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있다고 할 때 생명까지도 주님께 맡기는 신자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신자는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그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의 어려움에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어려운 난관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으로 굳게 서 있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자기의 믿음을 확인해 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남는 자의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30절에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 년에는 또 가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 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이사야는 지금의 난관을 이기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금년도 내년도 삼년째도 먹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상황이 우리를 끝장내지는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는 눈앞의 상황에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신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들 보기에는 당황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먹는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시각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난관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첫째 이유가 자신의 어려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 '나는 이런 일을 당할 만큼 나쁜 일 안했다?' '신앙 생활 잘했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 이런 식으로 자신은 어려움을 당해서는 안될 사람으로 여길 때, 어려움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당황하고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사야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어려움이 나에게 주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욥과 같이 주신 분이 여호와이신데 가져가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고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인간인데, 이런 나를 이 정도의 일로 깨우치게 하시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남는 자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흔들어 놓는 과정을 통해서 거룩한 씨만 남게 하는 여호와의 열심을 알았습니다. 결국 남는 자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난관과 어려움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계시입니다. 흔들고 떨어내는 작업이 없으면 마지막까지 달려 있는 남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신자는 흔들림 받는 난관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난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는 자로 만드시기 위한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난관을 당연하게 여기시고, 내가 아직 인간이 덜되었기 때문에 난관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시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이 난관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고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세상 풍파를 거치면서도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내 열심이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 때문이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남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난 관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것이고 파도와 풍랑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평안을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 (사 38:1-8)
지난 시간에는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유지되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할 때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즉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를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 마땅한 것이고, 삶은 삶대로 다르게 간섭하시고 유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과 믿음의 부분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천국 가기 위한 것으로, 삶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으로 따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삶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믿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붙들려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잘살도록 하기 위해서 붙드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을 통해서 믿음이 훈련받고, 삶을 통해서 믿음이 증명되고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삶의 하나 하나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치시고 훈련시켜서 마지막때 남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 난관도 있게 하시고 고통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무작정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면 안됩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믿음을 배워가고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노력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주신 난관과 어려움이라면 그속에서 믿음을 배우고 구원을 이루려고 힘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난관에서 벗어나게 하시든 더 큰 난관을 주시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일뿐입니다. 신자는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하루하루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뿐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뜻을 이루는 삶인가를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많은 신자들에게 유혹이 되는 내용일 것입니다. 본문은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수명이 15년이나 연장됐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또 해그림자가 뒤로 10도나 물러가는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신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성경을 볼 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나도 기도해서 저런 응답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명이 15년 연장됐다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병들었을 때 기도하면 수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수명연장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욕망입니다. 물론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소망둘 것이 없을 때 낙심가운데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신자는 단지 수명 연장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 살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수명을 연장시켜주신다면 여러분은 연장 받은 수명을 무엇을 하며 살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으시다면 왜 오래 살고 싶으신지를 스스로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얼마를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세월 동안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신 인생을 무엇에 허비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살면서 그 인생을 모두 자기의 세계를 이루는데 허비해 버립니다. 이것을 허랑 방탕이라고 말합니다. 탕자가 왜 탕자였습니까? 탕자는 술먹고 노름하면서 돈을 탕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 탕자는 달리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한 것 때문입니다. 나도 내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것, 이것을 가지고 탕자라고 합니다.
탕자는 자기의 세계를 이루어보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리고 실패 속에서 아버지를 찾습니다. 이제는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라면 종으로 살아도 좋다는 것이 실패한 탕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삶을 버리고 아버지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필연코 실패가 필요합니다. 독립된 자기 인생, 자기 세계를 살아보려고 한 속에서 실패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허랑 방탕이란 자기의 세계를 꿈꾸면서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땀흘리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모두 자기를 위해서 허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히스기야의 수명 연장에 매력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위한 인생을 더 살고 싶어하는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의 소유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려주신 생명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데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단지 더 사는 것에 목적을 두고 기도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더 살고 싶고, 또 더 살기 위해서 기도하고 싶다면 이렇게 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헛된 인생을 살았는데 이제야 참된 인생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제가 그 참된 인생을 조금이나마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것이 참된 인생을 아는 신자가 할 수 있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더 살게 해달라는 기도는 병들었을 때나 죽을 지경에 빠졌을 때 하는 기도로 여깁니다. 지금 나는 건강하니까 살기 위한 기도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건강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은 여러분은 하루하루 사는 것을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어제 죽어야 할 인생이 또 하루의 삶을 연장 받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병들어 기도해서 병낫는 것만이 연장 받은 삶이 아닙니다. 하루하루가 모두 연장 받은 삶입니다. 내 인생을 살아라고 연장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생을 살아라고 연장시켜 주셨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15년 수명이 연장된 것이나, 여러분이 오늘 이시간 기도하고 나서 내일 죽지 않고 사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는 내일도 틀림없이 눈뜨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니까 죽을 조건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굳이 지금 기도하지 않아도 내일 산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사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라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살려주기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히스기야가 수명이 연장된 것이나 우리들이 내일을 사는 것이나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수명 연장이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단지 죽기 싫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1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너는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서 히스기야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우연히 죽을병에 걸려서 죽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2,3절"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히스기야의 통곡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죄에 대한 통곡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죽음을 당해야 할 죄를 보게 된 것입니다. 5절 뒤에 보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눈물 속에 실려있는 죄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죄를 드러내며 통곡하는 히스기야를 보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은 죄인이고 그로 인해서 죽어 마땅한 자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자가 어떻게 살아있느냐는 것까지 보게 됩니다. 3절에 보면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라고 하는데, 이 말은 자신이 옛날에 선한 일을 했으니까 그것을 보시고 자기를 살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속에 선한 분이 계실 때 그 분에 의해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해 달라는 기도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죄인이 지금까지 선한 분에게 붙들려 있음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 앞에서 자신을 바라본 히스기야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결코 우리들의 힘이 아닙니다. 선한 분에게 붙들려 있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을 자기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히스기야가 말한 선하게 행한 것이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말한 선하게 행한 것이란 왕이라는 직책과 연관이 있습니다. 왕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왕이 자기를 위해서 살 때 백성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왕의 위치입니다. 히스기야는 이 왕의 위치에 제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6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약속에 대한 징조로서 일영표의 해그림자가 뒤로 십도를 물러가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8절에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 가니라"고 말합니다. 아하스의 일영표라는 것은 아하스가 만든 해시계라는 뜻입니다. 아하스가 만든 일영표의 해그림자가 해는 가만히 있는체 뒤로 십도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하스의 일영표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런 징조를 보여주십니까?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항상 세상의 힘과 지식을 의지하고 살았던 왕입니다. 세상의 기술과 지식으로 이스라엘을 얼마든지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왕입니다. 해시계는 과학입니다. 즉 인간의 부강과 발전을 위한 지식입니다. 아하스는 이것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힘과 지식을 더 필요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를 앗수르를 보내어서 징계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의 지식과 재능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임을 보여 주심으로서 앗수르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징조를 본 히스기야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고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연장 받은 삶을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의 세계를 부정하십니다. 자기의 힘과 지식과 재능을 동원해서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 보겠다는 아하스의 세계를 부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십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병 앞에서 자신의 인생은 죽어야 하고 실패할 인생이지만 선한 분에 붙들림으로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서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가십니까? 입술로는 여호와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을 의지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죽어서 심판에 들어갔어야 할 죄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우리들이 선한 분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연장된 수명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선하게 행하며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이나 과학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자기만의 세계가 있거든 그것을 부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사랑하면서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루하루를 연장된 삶으로 여기고 여러분 자신의 세계는 무너뜨리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면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바르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앗수르의 손에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도 이어질 것을 믿습니다.
신앙과 현실 (사 39:1-8)
영화나 드라마의 마지막은 항상 관객이나 시청자로 하여금 행복을 상상하도록 합니다. 어려움과 역경을 견뎌낸 주인공들이 이젠 그 대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여운을 남겨주는 것이 영화이고 드라마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자신의 행복을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착각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인생을 보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같이 좋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그런 때가 없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내 인생이 행복하다고 해서 내일도 계속 행복하다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입니다. 오늘의 좋은 것이 내일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바램이고 욕망일 뿐 현실은 아닙니다. 즉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행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서 내일도 믿음으로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내일은 믿음을 팽개쳐 버리고 엉망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 내일도 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 속에 어둠의 세력, 즉 죄의 본성이 깨끗이 청소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깊숙한 곳에 숨겨지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지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가 어떤 조건과 환경이 충족될 때 정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비록 죄가 드러날 조건이 충족되지 못해서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도 내일은 어찌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결코 오늘의 믿음에 만족하거나 교만해서는 안되며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말씀을 통해서 점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할 때는 지금의 내 신앙 정도라면 어떤 죄의 유혹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생각은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죄의 유혹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현실이라는 문제와 부딪혔을 때 그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때문에 방구석에 앉아서 가끔 기도하고 성경이나 들여다보는 것으로 '내 믿음 좋다'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죽음을 앞에 둔 히스기야가 회개의 기도를 하고 난 후 생명이 15년이나 연장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에 의해서 연장되어 가는 삶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히스기야가 15년 생명이 연장된 것에 대해서 부러워 할 필요가 없으며 하루하루 연장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여지기 위해서 연장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 맞습니다. 내 생명은 하나님이 연장시켜 주신 삶인데 앞으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로 모여서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이 되고 기도할 때 이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즉 여러분의 결심을 흔들리게 하고 부딪히는 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결심하고 기도하면 뭐합니까? 여러분께 부딪히는 현실에서 여러분이 결심하고 기도한 그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기도는 물거품에 불과할 것이고 천번 만번 결심했다고 해도 하늘에 흩어지는 구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히스기야는 눈물로 기도해서 생명이 15년 연장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볼 때 우리는 앞으로 히스기야는 철저하게 신앙으로 잘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기도해서 살아난 히스기야가 죄를 지을 리가 없다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히스기야가 큰 잘못을 저지릅니다. 믿음이 있고 은혜 받은 사람이 그럴수가 있는가? 라는 의문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인간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입고 죄를 지은 히스기야가 천당갈 수 있는가? 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개인의 구원문제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본문을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에게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들이 히스기야와 같은 실패 속에서 살고 있음을 히스기야의 실수를 통해서 지적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실수는 바로 우리들이 현실 속에서 늘 하는 실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왕이 글과 예물을 보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사신을 맞아서 어떻게 했습니까? 2절에 보면 궁중 보물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무기고와 보물창고에 있는 것들을 다 보여줬다고 합니다.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히스기야가 사신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보여준 것은 '우리도 너희들만큼은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바벨론은 힘이 강한 나라이며 부강한 나라입니다. 그 큰 나라의 사신 앞에서 '우리도 당신들만큼은 세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히스기야의 실수이고 죄악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이 연장된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철저하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때만큼은 히스기야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일 것입니다. 그런 히스기야라면 그가 바벨론 사신에게 보여줄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궁중의 보물이 아니라 자기를 낫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바벨론 왕은 히스기야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바벨론 왕에게 '내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말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수입니다. 복의 내용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은 육교 위에 거지에게 동전 하나 던져 주듯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한 분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희생하신 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단지 복받은 것을 자랑합니다. 복이란 무엇을 얼마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주셨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받은 것을 보여주고 자랑하지 주신 분을 자랑하고 보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히스기야가 이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히스기야에게 갑자기 이사야가 나타나서 묻습니다. 4절에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당연히 이스라엘을 유지하고 있는 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물과 무기를 보여준 것은 바벨론과 똑같이 보물과 무기를 자기들을 유지하고 있는 힘으로 내세우는 불신앙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의 본성입니다. 힘있는 사람 앞에서 자신도 힘이 있음을 과시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 히스기야를 그런 실수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으로 기를 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선 신자들도 세상 것을 가지고 그들을 이기려고 하고 기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본성으로 살아갈 때 과연 무엇이 보여지겠습니까? 상대방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세상 것을 자랑하고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사실 신자들은 하나님 은혜로 산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기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령 출세한 아들을 둔 사람 앞에서 '내 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전혀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시당하고 조롱 받을 말이란 것을 압니다. 때문에 세상 것을 자랑하는 불신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보이지를 못하고 그들과 같이 세상의 것으로 맞부딪히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하나님의 힘으로 세상을 살고 있음을 믿습니까? 진심으로 이 믿음이 여러분의 중심이 되어있는지를 확인하시려면 삶속에서 무엇을 보여주고자 힘썼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살리고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만 보이려고 했는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고 내 자존심을 세우고 자랑거리가 될만한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는 세상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보여줘야 할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자꾸 엉뚱한 것을 보여주려고 하고,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보여주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여주라고 오늘도 살려주시고 은혜로 지켜주시고 건재하게 하신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6절에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히스기야가 자랑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다 바벨론으로 보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무엇을 자랑하며 사십니까? 여호와 말고 자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다면 오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는 자기의 소유된 것은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좋은 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합니다. 이 습성이 우리를 실패의 자리로 끌고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어떤 직책도 보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직책이 높아지면 그 직책을 내세우고 싶어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목사 장로들이 이 유혹에 쉽게 빠져듭니다. 목사나 장로를 높은 직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겸손해 보이던 사람들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된 후에는 목사 장로라는 직책을 보이고 직책을 휘두르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직책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십자가의 피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에게 있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십자가의 피만 전하고 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목사라는 직책이 아까워서 십자가의 피를 전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목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의 실수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히스기야의 실수가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서 오늘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실수와 실패가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실수를 발견하고 '하나님, 제가 바로 히스기야같이 실패하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신앙은 오래 믿는다고 해서 좋아지고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를 믿었든지 '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는 것을 우리의 현실에서 제대로 드러내고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나 믿음 좋다' '내 믿음이라면 얼마든지 바르게 살 수 있다'라고 큰소리 치지만 말고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현실에서 신앙이 제대로 드러나도록 힘쓰십시오. 히스기야처럼 주어진 것을 자랑하고 보려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 사라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린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자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항상 하나님만을 보여주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 (사 40:1-11)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연장된 인생을 살아가게 된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신 앞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보이게 된 실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히스기야는 힘을 가진 자 앞에서 자신도 역시 힘을 드러냄으로서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실수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무엇을 자랑하며 무엇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실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힘에 강한 유혹을 느낍니다. 힘이란 인간의 욕망을 충족 시켜주는 제일의 조건입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의 영광을 높이고, 많은 자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은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 때부터 힘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소유하고자 원했고,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을 정도입니다.
한국교회가 은사를 중요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은사가 곧 힘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은사를 주시는지가 관심이 아니라 은사가 힘이 되는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기도를 더하고 성경을 더 볼 때 그것을 자랑삼아 내세우고 자기보다 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힘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산다고 하면서도 그 은혜를 자기 속에 간직하고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드러내는 인간의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은혜를 아는 히스기야가 실수를 한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히스기야의 실수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자기가 자기를 생각할 때는 신앙의 실수를 하지 않고 믿음으로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인간은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면 결국 자기 중심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기 믿음을 키우려고 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믿음을 키워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래탑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래탑은 처음에는 쌓아져가는 것 같지만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높은 모래탑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래탑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낫는 경험을 했다고 해도 '나는 무너지는 모래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병이 나으면 병이 나은 자기 몸을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나는 은혜를 입었다'라고 하면서 자기와 같은 경험이 없는 다른 사람을 누르는 것입니다. 병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병이 나은 것을 통해서 은혜를 배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렸는데 기도하고 나았다고 해도 그 몸이 특별한 몸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죽을 몸입니다. 그렇다면 병이 나아서 좀 더 산 사람과 병이 낫지 못하고 죽은 사람과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좀더 산다는 것 외에는 아무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10년을 더살고 100년을 더 살면 뭐합니까? 죽어서 멸망으로 떨어진다면 얼마를 더 살아도 실패한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인생이라면 오늘 당장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병이 낫든 낫지 않든 그것이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쌓아보려고 하는 것은 모래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인간은 무너질 것에 불과한 것을 힘으로 삼고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모래탑을 쌓으려고 한 순간부터 불행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모래탑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행복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히스기야에게 이사야를 보내서 예언을 합니다. 히스기야가 자랑한 모든 것을 바벨론에게 빼앗기게 할 것이고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서 환관이 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예언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8절에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될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서 '그 말씀이 좋습니다'고 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런 반응을 하는데 대해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사야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실수를 알고 난 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하시겠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은혜만 드러내는 참된 이스라엘로 만드시기 위한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한 말씀이 좋았던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이상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서 근심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과 견고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마음입니다.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모래탑을 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래탑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모래탑을 모래탑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성취시켜줄 희망으로 보기 때문에 모래탑이 무너질 때마다 실망을 하고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것을 모래탑으로 보셔야 합니다. 자식도 재물도 직장도 모든 것이 모래탑 같은 것입니다. 무너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래탑을 모래탑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모래탑을 의지하다가 실망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래탑의 행복은 잠시 잠간이고 그 순간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위로는 세상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고생하고 힘들게 살 때 그 모든 보상을 자식이나 재물을 통해서 받으려고 합니다. 자식이 성공하는 것으로 보상받고 위로 받으려고 하고, 돈이 모아지는 것으로 위로를 삼으려고 합니다. 남편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모래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이 기대하는 위로입니다. 그러나 신자된 우리의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세상 것이 결코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이 포로될 것에 대해서 예언을 한 뒤 위로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가 전하는 위로가 어떤 것인가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아 고생했다. 이제 포로생활은 끝났다. 고생한 대가로 앞으로 편안한 삶만 주겠다'는 위로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포로 되게 하신 것은 교만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교만을 깨닫지 못하면 죄를 알 수 없고 죄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교만하고 자기의 힘을 내세우기 때문에 은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내 힘 가지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겠습니까? '나는 내 믿음 가지고도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믿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겠습니까?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기 믿음으로 하는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고, 은혜란 바로 좋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로 다가오시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지금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의 신앙을 보면 대다수가 자기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주는 것이지 은혜로 주어진 믿음에 감사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 믿음 가지고 내가 기도하고, 내 믿음 가지고 내가 성경보고, 내 믿음 가지고 내가 봉사하려고만 하지 은혜로 성경보고, 은혜로 기도하고, 은혜로 봉사하게 되어진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 믿음 가지고 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버리십시오. 우리가 뭔가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신 것이지 내가 믿음이 좋아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3-5절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깨끗이 밀어서 평지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마음이 낮아져라는 것입니다. 높은 마음에는 주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마음이 주님을 밀쳐내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말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라는 말은 세례 요한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외침도 결국 주가 오시니까 마음을 낮추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마음이 낮아지지 못하면 주를 영접할 수 없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까? 6-8절을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이 서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낮아지는 마음은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는 것을 아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임을 마음에 담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모래탑이 무너질 때 불행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행복한 삶을 사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다. 나는 모래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것에 대해서 전혀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육체에 대해서 기대도 없고 스스로 쌓은 것이 없기 때문에 무너질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행복은 마음이 낮아지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리 잘나 보여도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풀로 보십시오. 그럴 때 세상의 가진 자들, 힘있는 자들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10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고개 숙일 강한 분은 오직 여호와 한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는 사라질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풀이라는 것을 알 때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는 이것을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위로를 받고자 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세상 것을 통해서 위로를 얻고자 하신다면 불행은 더욱 쌓여갈 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쌓아 가는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모래탑입니다.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지만 그 속에는 예수가 아닌 마귀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라 마귀의 것이 튀어나옵니다. 자기 자랑이 나오고 교만이 나오고 힘이 튀어나오고 욕심이 튀어나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서는 무엇이 튀어나오는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나는 풀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세상을 풀로 보면서 살아갈 때 여러분에게서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높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높이며 살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어서 세상 일로 마음 흔들리지 않고 주님으로 가득찬 신자 되어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 40:12-26)
신자들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정작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것이 말로 그쳐버리고 실제 삶에서 표출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면 분명히 그 모습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세상과 판이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던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떡을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의지해서 살고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나 믿음이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변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불변입니다. 우리가 편안할 때나 어려울 때나 믿음과 말씀은 동일했습니다. 그렇다면 편안하게 살 때 은혜와 사랑을 말하면서 믿음으로 살았다면 어려워졌을 때에도 변함없이 동일한 믿음이어야 편안할 때의 믿음이 진짜였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편안할 때는 교회도 잘나오고 봉사도 열심히 하다가 막상 어려워졌을 때에는 은혜라는 말도 입에서 사라져 버리고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주느냐?'는 원망을 한다면 앞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단지 편안함을 즐기는 여유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믿음의 모습이 언제나 불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이고 은혜도 사랑도 불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말씀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고 난 뒤에 이런 노래를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한 그 상황대로라면 한마디로 망한 인생입니다. 하는 일마다 안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만으로 가득 차고 나는 사라질 때 가능합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 속에 자기만을 가득채운채 삽니다. 자기 외에 다른 것이 들어오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고 남들보다 더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자기로 가득채운채 살기 때문에 자연 인생이 힘들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IMF라는 것 때문에 회사마다 정리해고를 한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직장인들이 불안에 떨면서 회사를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 불안이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안은 결국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실패하면 안돼' '나는 잘돼야해' 이러한 생각들이 자신을 불안과 공포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자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로는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대신 나는 사라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세상에서 악인이 잘되고 번성하고 의인은 오히려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번민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 할 때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소위 악인은 벌을 받아서 고통받고 못살아야 하고 반대로 의인은 복을 받고 잘살아야 한다는 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은 고통을 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너희들이 고통을 받으면 안될 이유가 어디있느냐?'라는 얘기를 하십니다. 이스라엘도 똑같이 악인이다는 것입니다. 피흘린 자들이고 우상을 섬긴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박국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가 자기를 바로 보게 되고 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이런 일을 당하면 안돼'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장 일어나는 반발은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느냐?'라고 반발합니다. 자신을 좀 더 높이 두려고 합니다. 도둑질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나는 한번 했는데 저 사람은 열번 했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꼭 선의 위치에 두려고 합니다. '나는 강도질을 했지만 저 사람은 살인을 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의 비중을 반감시키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평소 이방인과 다르다는 생각에 살아왔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똑같다고 하십니다. 같은 악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의해서 하박국 선지자는 평소에 잘난 인간인줄 알았던 자신도 역시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어떤 고통을 겪든 그것은 당연한 결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기를 아는 자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높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높여드릴 수 있습니까? 입으로 '높으신 하나님'라고 한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내가 낮아지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내가 낮아질 때 자연히 하나님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르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바다 물을 손바닥으로 헤아려 본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을 뼘으로 재어본 사람이 있느냐? 땅에 있는 티끌을 되에 담아본 사람이 있느냐? 산들을 저울에 달아본 사람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어느것 하나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물음을 하신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조차 헤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5절을 보면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의 물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라고 합니다. 열방이란 세상 모든 나라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보시기에는 통에 있는 한 방울의 물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다는 것입니다. 물통에 한 방울의 물은 표도 나지 않습니다. 저울에 티끌이 있어봐야 무게를 잴 수 있습니까? 이처럼 세상의 모든 나라를 합해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나 하나는 뭡니까? 세상의 모든 나라도 한 방울의 물인데 세상의 모든 나라에 비하면 나하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 나하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면 나는 뭡니까? 티끌보다 더 못한 존재가 아닙니까?
한 방울의 물보다 못하고 티끌보다 못한 존재가 무엇을 한들 하나님은 그것으로 기쁨을 삼지 않습니다. 16절에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고 합니다. 티끌보다 못한 우리가 레바논의 짐승을 모두 잡고, 산의 나무를 다 잘라서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또 17절에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나라를 없는 것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단순히 높으신 분이다 크신 분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하심으로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크신 분임을 알게 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크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자연히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할 자격도 없고 걱정할 자격도 없는 것이 바로 인간임을 알 때 제대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티끌 같은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왔습니다. 누구에게 욕먹고 무시당하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티끌이고 마르는 풀이고 시드는 꽃인데 그런 하찮은 자기를 세상에서 대우받아야 할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하나님을 높으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이 주어진 환경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은혜, 사랑은 불변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내가 망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 높임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의 무엇으로 치장을 해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서울대 나온 사람과 초등 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티끌보다 못한 인생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여유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신자들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항상 뭔가에 쫓기듯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짜증내고 슬퍼하고 번민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피곤하고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항상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가고, 자신이 잘되는 것에 삶의 보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유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좀더 나은 환경을 기대하고 내가 높아지기를 소망하며 사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불만을 가지게 되고, 불만은 짜증으로 이어지고, 짜증 속에서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나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능히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욕먹어야 할 인간이고 무시당해야 할 인간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여유 있는 믿음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에는 내가 높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은혜라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받아야 할 은혜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편안한 삶으로 인도해 갑니다. 인간의 근심 걱정은 작아지는 것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낮아지든 작아지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분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무화과에 열매가 없어도 여호와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기 문제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집착할수록 깊은 고민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자기에게 집착될 때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상기하십시오. 나는 생각하지 말고 천국을 생각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천국은 변함없이 존재하며 우리를 기다립니다.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피곤치 아니하다는 것은 몸이 피곤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피곤치 않음을 말합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몸의 피곤을 느끼지 못합니다. 현대인의 피곤은 자기를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곤치 아니한 삶은 자기의 문제로부터 벗어난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체를 깨닫고 높으신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상관없이 여호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피곤치 않고 힘있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나의 종 (사 41:1-16)
인간은 한평생 수평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갑니다. 단 한번도 수직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해보지도 못한 채 땅에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수평적인 삶에서의 구심점은 자기입니다. 모든 세상을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계산하고 움직입니다. 모든 소망과 목적도 자기 자신에게 집중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은 선이 되고, 해가 되는 것은 악으로 규정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위에는 아무도 없으며 오직 자기가 자기의 왕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위해 주기를 바라고, 자기에게 굴복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자기라는 우상에 미쳐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수평적인 삶에서 그대로 안주한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소위 신자라고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열심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외칩니다. 두손을 들면서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면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죄란 죄는 몽땅 회개한척 하면서 하나님을 불러댑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흐뭇해합니다. 스스로도 대견스럽습니다. 기도하면서 믿음이 자란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는 자기를 바라보면서 믿음을 확인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자기 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수평적인 삶에서 매어 있는 채 하나님을 부르는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자기 열성에 도취되어서 교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는 충성스런 일군이 되도록 하는데 목적을 둡니다.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 모든 것이 교회를 위한 충성스런 일군을 배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일하면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단의 종으로 전락한 모습입니다.
수평적인 삶은 사단이 인간의 마음에 집어넣은 삶의 방식입니다. 자기 중심이고, 자기가 우선이고, 자기가 왕이고, 자기를 위해서는 하나님도 뒷전으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 수평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크게 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은 수직적인 삶입니다. 자기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보이고, 자기가 구심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심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높으신 분이라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고 미약한 존재로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높으신 분으로 보고 있는, 수직적인 삶에 서 있는 신자입니다.
신자가 수평적인 삶에 매여 있으면 세상이 좋게 보이고 크게 보입니다. 세상이 좋게 보이고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속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도 세상에서 상승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신분과 환경으로부터 좀더 높은 도약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크고 높으신 분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높이 도약을 한다고 해도 언제나 하나님에 비하면 백사장에 모래알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신분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다고 해도 결국 모래알입니다. 다른 모래알과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모래알입니다. 똑같은 모래알이 단지 세상 것을 겹겹이 껴입은 채 착각 속에서 거들먹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하찮은 모래알로 보지 않고 거대한 바윗돌로 보기 때문에 끝없이 넓으시고 크신 하나님을 제대로 볼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중심의 삶에는 상승과 도약의 욕망만이 표출될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환경을 이용해서 그 욕망을 이루려고 할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대상을 믿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에 굴복하게 되고 그것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한 예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믿는 경우입니다. 직장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밀려나는 것이 더 큰 두려움으로 자리하게 되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결과입니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울 때 믿음의 본색이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평소에 하나님으로 기뻐합시다라고 큰소리치던 사람들이 경제가 어려워지고 생활이 힘들어지자 웃음을 잃어버리고 기쁨이 상실되어 버리고 온통 경제가 회복되기만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동참을 해서 경제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한답시고 온 교인들을 불러놓고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구조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악이 현상화 되어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믿음이란 환경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찾았으면 환난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환경에 좋을 때 하나님으로 즐거워했으면 환경이 좋지 않을 때도 하나님으로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의 환경을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현재의 환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거기에서 좀더 나아지고 싶어합니다. 현재의 삶의 환경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데 돈은 없고, 그러니까 돈타령이나 하고 돈 없음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환경에 수입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수입에 맞춰서 자기 환경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쓸 것 다 쓰고 싶어하면서 돈 없음을 한탄한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나사로의 모습이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부잣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면서도 믿음으로 살았던 나사로의 모습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아있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수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자기의 포부가 무너질 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나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즉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하면 흔히 하나님이 시킨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교회로 연결 지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교회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자입니다. 신자가 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은 보잘것없는 미미한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자신을 미미한 존재로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높으신 분이라고 해도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신자들에게는 별로 놀라움과 감동을 안겨주지 못한 말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기보다는 돈을 더 필요로 하고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필요로 했고, 하나님보다 직장이 더 필요하고, 하나님보다 자식 잘되는 것이 더 필요했는데 정작 하나님은 그러한 자신의 포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10절과 같은 말씀을 들어도 시큰둥해지는 것입니다. 너를 붙들고 도와준다고 분명히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하나도 도움되는 것이 없더라'는 자신의 생각만 꽉 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했으면 틀림없이 도우십니다. 예전에도 도우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도우시고 계십니다. 다만 자기 포부를 앞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도우심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렵게 하신다면 '그속에서도 변함없이 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를 묻기 위함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우시고 붙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에 우리의 소원을 두고 살면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붙드심과 굳세게 하심을 발견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자기의 소원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뇨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합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태초부터 나중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악으로 가득 차서 도저히 어떤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시겠습니까? 멸망이 하나님의 불변의 계획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신자라면 세상에 악한 자들이 잘되든 떵떵거리고 살아가든 그것에 영향을 받겠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교회 밖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이유는 세상이 제멋대로 살아도 하나님이 그냥 허용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잘사는 것이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세상에서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어 주고 지켜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8절에 보면 "그러나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붙드시는 자는 택한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시고 붙드시고 굳세게 하신다고 해서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택한 자와 택하지 않은 자의 구별이 사라져 버립니다. 즉 하나님이 택한 자를 세상에서 잘살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되버린다면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잘살아 가는 사람들과 어떻게 구분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택한 자를 세상이 싫어하는 쪽으로 밀어 넣으심으로서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싫어하는 모습으로 택한 자를 밀어 넣으셔서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는 이렇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확산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가난으로 밀어 넣으셔서 가난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종이 어떤 자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망하고 실패하는 자리로 밀어 넣으셔서 의인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이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세상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심판의 자리에 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종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무시 받고 조롱 받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을 앞세운다고 해서 기죽지 않으려고 같이 힘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돈을 들고 나오든, 지위와 계급을 들고 나오든 상관없이 신자는 믿음만 내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는 말씀으로만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고자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택한 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셔서 무시 받고 조롱 받는 자리에 세우십니다. 세상이 그들을 무시하고 조롱함으로서 그들의 교만이 확실하게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낮아지는 자리로 부름 받았습니다. 14절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렁이로 보고 계십니다. 지렁이 같이 취급받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나 가난하다고 무조건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오직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만 높이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높이십시오.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확신을 가지시고 낮아지는 자리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허망한 일 (사 41:21-29)
신자는 언제나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라는 것은 자신이 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은 종교적인 활동이 왕성할수록 자신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를 판단할 때는 필히 자기 행동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왕성한 종교 활동이 의의 근거가 되어서 자기 부정이 아니라 자기 긍정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스스로 자기를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부정이 하나님을 앎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의 종교적 행동이 소극적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적 행동이 점차 활발해질 때 자기 부정에서 점차 자기 긍정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긍정으로 사는 신자는 자기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고, 구원의 대상으로 못박아 놓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종교 행위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우리를 활발한 종교 행위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결과가 열심이고 열심이 곧 신앙이라는 생각은 극히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결과는 자기 부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슬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굴러가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처럼, 죄의 본질을 가득 안고 태어난 인간이 죄로 흘러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이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슬려야 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구슬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굴러가고 있다면 그것은 필히 외부적인 힘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슬이 외부의 힘으로부터 독립한 채 스스로 굴러가려고 한다면 필시 낮은 곳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잘 굴러가고 있다고 착각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언제나 자신이 외부의 힘에 붙들린 채 살아가는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의심입니다.
신앙은 누군가에게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 41:5절부터 보면 "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끝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하고 목공은 금장색을 장려하며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매질군을 장려하며 가로되 땜이 잘된다하며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강대국을 멸망시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 나라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기 위한 도구로 바사왕 고레스를 사용하십니다. 2절에 보면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동방에서 일으킨 사람이 바로 바사 왕 고레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세워서 바벨론과 바벨론 주위의 강대국들을 하나하나 멸망시키십니다. 그리고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해서 바벨론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을 귀환시키는 조서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고레스를 통해서 일하실 때 열방의 멸망을 보고 있던 나라들이 취한 행동이 5절부터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함께 모여서 각기 이웃을 도왔다고 합니다. 단합을 말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온 국민이 연합하고 서로 담대하라고 격려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믿는 우상을 더욱 단장을 하고 강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나라에 위기를 느꼈을 때 취하는 이방인들의 행동입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힘을 합하고 마음을 합해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에게 붙들려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9절에 보면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붙들고 있으니까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는 '없음'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자기에게 힘이 될 대상이 없음에서 불안과 염려가 인간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러나 '있음'으로 나아갈 때 불안과 염려는 사라지게 됩니다. 인간은 '없음'과 '있음'의 기준을 세상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이 있음으로서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으신 분을 '있음'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친히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 나라를 수치와 욕을 당할 나라로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고 세상의 힘에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세상 마지막에 대한 말씀을 믿는다면 여러분들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분입니다.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4절에 "과연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란 우상을 말합니다. 우상은 장차 세상에 일어날 일도 모르고 복을 내리지도 못하고 화를 내리지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택하는 것은 가증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장래 일도 모르고 장래에 우리를 살릴 수도 없는 것을 택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증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손에서 놓치기 아까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여러분에게 생명을 줄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돈이 장래에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돈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장래 일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복과 화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생명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점차 하나님께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신자의 당연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27절에 보면 "내가 비로소 시온에 이르기를 너희는 보라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고 하십니다.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문제는 예루살렘이 기쁜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5절에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같이 토기장이의 진흙 밟음 같이 밟을 것이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일으키셔서 예루살렘을 심판해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심판이 오기 전에 기쁜 소식 전할 자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전할 기쁜 소식은 심판에서 건짐 받음에 대한 것일 것이고, 그 기쁜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아는 자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란 심판 속에서 우리를 살리는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을 아는 자가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이 이 기쁜 소식을 시큰둥하게 대해버립니다. 세상이 망한다고 말하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대합니다. 물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아는 사람답게 살아갑니까? 기쁜 소식은 심판을 아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심판 속에서 건짐 받을 길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길에 자신을 맡길 것입니다. 현대 교인이 심판에 대해서 긴장감을 가지지 않고 생명에 관심도 두지 않은채 살아가는 것은 가치 기준을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손에 돈이 쥐어지는 것이 기쁜 소식이고 기분 좋은 일이지 심판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소식에 귀를 막고 오히려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심판 속에 있는 그들에게는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이 살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심판을 믿지 않고 있는데 심판을 말하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마치 '나는 신앙 생활을 참 잘하고 있다. 나만한 신자도 없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 '회개하라'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회개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회개하라고 한다면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도 심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짜증나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심판을 믿는 분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렇듯 기쁜 소식을 전하고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허망한 일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허망한 일을 자랑하고 헛된 것을 내세우는 어리석은 무리들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당 크다고 자랑하는 것, 다 허망한 일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그들의 자랑 앞에서 기죽지 않고 언제나 말씀으로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키워서 자신에게 힘을 실으려고 하는 것도 역시 허망한 일입니다. 목사라는 직책도 역시 허망한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라는 직책, 장로라는 직책에 매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허망한 일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판이 있을 때 세상에 남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토록 자랑하던 예배당도, 교회도, 노회도, 직장도, 가족도 다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다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교회도 사라지고 없는데 교회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돈도 사라지고 없는데 돈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그래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다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 보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었고 오늘날에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합니까?
신자들이 심판을 앞당겨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심판에 대해서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십시오. 세상이 다 사라질 것으로 보지 않고 하는 일은 다 허망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손에 쥐고 웃고 즐거워하는 것들은 모두 바람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남은 여생, 허망한 인생을 살지 말고 주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종 (사 42:1-9)
요 17:14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세상이 미워하는 사람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서 어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아버지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합니다. 세상이 아버지의 말씀을 미워한다는 것을 몸소 시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었습니다. 역시 이유는 말씀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고 온 자는 모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예수님이 보내신 신자들이 미움을 받습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은 말씀을 그토록 싫어할까요? 말씀을 들고 온 자를 미워하고 죽여 버릴 정도로 말씀에 귀를 막고 기겁을 할까요? 그 이유는 세상은 땅에 모든 가치관을 두고 땅에서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반면 말씀은 땅에 대한 모든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대한 가치관이 무너져 버리면 세상 사람들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직 땅만 바라보면서 땅을 자신의 모든 희망으로 알고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땅과 한몸되어서 발버둥치며 살았는데 말씀이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 때 순순히 무너질 인간이 있겠습니까? 땅에 대한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은 곧 자신의 자아가 무너지는 것이고, 자아가 무너지는 것은 곧 죽음과도 같은 것인데 어느 누가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인간은 말씀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반응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말씀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셨다면 그 이유가 세상을 전도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아니면 필연코 말씀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고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후자에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것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배척할 것을 하나님이 몰랐을까요? 분명히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아들을 악한 세상으로 투입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고 전도하신다고 해도 전혀 말씀에 순종할 가망성이 없는 그런 인간들로만 가득찬 이 세상에 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세상의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도 말씀을 든 자를 이스라엘로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개인의 생각이나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안겨준 말씀이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든 자를 공격하고 배척할 만큼 귀에 거슬리고 상식에 맞지 않고 인간을 망하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한결같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어떤 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실 선지자나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입은 분들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수모를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도 욕을 먹고 수모를 당하고 싶어서 고의로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욕을 먹고 수모를 당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거부가 보냄을 입은 분들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선지자들에게서 말씀을 제외시켜 버린다면 배척을 받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수모를 당하고 욕을 먹는 것은, 사실 선지자라고 하는 한 인간이 당하는 수모가 아니라 말씀이 수모를 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수모를 당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수모를 당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혹 말씀을 가진 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배척을 받는다'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배척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배척을 받습니다. 말씀에 대한 거부가 말씀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향한 거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혹 말씀으로 인해서 욕을 먹고 배척을 받는 일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자신의 고난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고난으로 보게 되면 고난을 받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것이고, 고난받지 않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게 될 것이고, 자신의 고난받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받음이란 내가 받고 싶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자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입장입니다. 내 잘못은 전혀 없이 단지 부름을 입었을 뿐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했을 뿐인데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로부터의 배척을 자신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나에 대한 배척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배척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종은 세상으로부터 몸소 미움 당함을 겪으면서 세상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음을 폭로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종을 고난의 길로 집어넣은 이유는 장차 세상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까지도 미워하고 배척할 것에 대해서 미리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종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또 어떤 권세와 힘이 주어지는 것이 종이 아닙니다. 종이란 말 그대로 주인의 부름을 받아서 주인의 지시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하나님이 불러서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셨을 때,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미움을 받아도 상관없이 말씀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 여러분을 배척하고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가지고 마음 상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배척을 받고 있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세상이 죄가운데 있다는 증거이고, 결국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단지 그 일에 쓰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종이라고 부릅니다. 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 전할 자를 보낸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기쁜 소식은 단지 들었다고 해서 기쁨이 오는 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아는 자들에게만 기쁨이 되는 소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심판 속에서 살리는 소식이기 때문에 심판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말을 전한 사람을 배척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고, 심판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을 진심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종입니다. 즉 기쁜 소식은 심판이 있는 곳을 향해서 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 전할 자를 보내신다면 결국 예루살렘을 심판의 장소로 보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소위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고 큰소리치면서 조금 착하게 보이는 일을 했다고 해서 자신만만해하는 교회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이미 구원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교회 안에서 '이 교회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히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결국 말씀이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미리 심판에서 제외시켜 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도 여전히 죄가운데 있고 심판 속에 들어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3절에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는 이 말씀을 보통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지 상한 갈대가 아닙니다. 상한 갈대 꺼져 가는 등불은 모두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쓸모 없고 가치 없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그냥 둔다는 것은 결국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 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의로 삼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가 되는 그분을 세워서 백성의 언약이 되게 하고 이방의 빛이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의가 되는 분을 따로 세우시겠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의가 전혀 없음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의가 없기 때문에 의가 되는 분을 따로 세워서 그 분을 통해서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은, 7절에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이것이 의가 되시는 분이 하실 일입니다.
소경의 눈을 밝히고, 옥에서 이끌어 내고,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간이란 토굴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의로 세움 받은 분이 할 일을 세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결국 한가지로 통일됩니다. 그것은 어둠에서 나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어둠을 사는 사람입니다. 옥에 갇힌 자도 어둠에 있는 자이고 토굴도 어둠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모두 외부에서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처지로부터 구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의가 되시는 분은 의가 없어서 어둠을 사는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빼내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의를 선택해서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 오신 분이 우리를 의로 불러들이심으로 어둠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의란 인간의 착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 의를 쌓아서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의로 오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 끌어들이시고 우리 안에 의를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자랑할 것은 나의 의가 아니라 내 안에 새롭게 창조되어진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러분 속에 과연 이 의가 있습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서 창조하셔서 어둠을 싫어하고 빛으로 나아가고자 힘쓰는 그 의가 여러분 속에 있습니까? 의가 있다면 의로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새롭게 의를 창조하신 하나님만 자랑하고 보여주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종으로 사는 것이고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 오신 그분께서 끌어 당겨서 의안에 거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은 의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의 의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의를 자랑하게 하고 의가 없을 때 불안하게 합니다. 신자는 의로 오셔서 우리 안에 의를 창조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지 인간의 가능성이나 인간의 착함에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미 상한 갈대이고 꺼져 가는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를 다시 멀쩡하게 만드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활활 타도록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상한갈대 꺼져 가는 등불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힘을 얻어서 위대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한 갈대는 그대로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은 그대로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사라지고 없어져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의가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대 걸 것은 새로운 의입니다. 의로 오시고 의를 창조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행동도 자기의 의로 삼지 않습니다. 자신은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의를 아는 자로 살아가시고 의의 흔적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리석음 (사 42:14-25)
사람들은 보이는 대상과의 교제를 말하면 쉽게 이해하고 또 교제를 위해서 자기가 뭘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스스로 기준을 세우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교제를 말하면 금방 난감해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에 대해서 뭔가 뚜렷한 기준을 두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신자들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뭐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고 동행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듣지 못하고 단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을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녹이란 사람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린 에녹의 동행을 잠시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유다서에 보면 에녹은 장차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경고하고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의 마음에는 심판이 살아있었으며 에녹의 관심사도 세상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에녹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그냥 보지 않고 심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일고 연관지어 생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만약 심판을 안다고 해도 평소 살아가는 삶에서 심판을 잊어버린 채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신자들은 너무 자기 입장만 내세운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겨우 예배당 안에서나 하나님으로 대우받고 있지 예배당 밖에만 나가면 하나님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생활 속에서 자기 입장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말씀을 듣고 이해했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우리들의 삶속에 그대로 녹아져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을 때는 이해한다고 하면서 막상 교회 밖에서 살아갈 때는 삶속에서 말씀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다고 해서 신자된 것이 아닙니다. 이해한 말씀을 통해서 인생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바르게 알고 이해했다는 것이 신자된 증거도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바르게 배우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믿고 그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분별하기 위해서 말씀을 제대로 배우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즉 삶과 말씀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고 하나님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점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소경이요 귀머거리라고 책망하십니다. 16절에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암흑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금껏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알지 못하는 길로, 첩경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전혀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상을 의지하고 우상을 신이라고 하는 어리석음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광야 40년의 생활은 하나님보시기에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적절한 행로였습니다. 하나님을 보게 하고 자신의 잘못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보지 않은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들의 입장만 철저하게 내세웠습니다. 물론 광야 40년의 생활은 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방식 그대로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에게는 언제나 가장 적절한 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최고의 길입니다. 그러나 내 입장만 생각해 버리면 최고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피하고 싶고 원망이 나오는 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소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도구들입니다. 따라서 진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라면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내 입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애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인생의 사건 속에서 전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잘 알고 바르게 깨닫고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이런 사람이 보지도 못하면서 본다고 하고 듣지도 못하면 듣는다고 큰소리치는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는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발견하며 살아갑니다. 19절에 "소경이 누구냐 내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겠느냐?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야 할 종, 사도들이 소경이요 귀머거리라고 책망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소경이고 귀머거리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20절에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경, 귀머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는 것이 소경이고 귀머거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21절부터 나옵니다. 21절"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하였으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씀에 순종치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이 22절입니다.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도적 맞게 하고 탈취를 당하게 하고 굴속에 잡혀 갇히게 하고 노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말씀에 순종키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적을 맞게 하고 탈취를 당하게 하는 등의 일에는 '너희가 나의 말에 순종치를 않는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이 하신 일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 말을 듣고 나를 본다고 할 수 있느냐? 아니다 너희는 모두 소경이고 귀머거리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스스로 본다고 하고 듣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종이고 보냄 받은 사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소경 아니다' '나는 귀머거리 아니다'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은 지금 내가 소경이고 귀머거리라고 하고 계신다. 내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살피고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 귀머거리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경, 귀머거리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져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다 듣고 계시고 심지어 내 마음으로 말하는 것까지 다 들으시고 내 행동을 모두 보고 계심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내 곁에 계신 분으로 여기지 않고 산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신 일에 전혀 유의치 않을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발견치도 못하고 음성을 듣지도 못한 채 자기 입장만 앞세우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음만 나타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소경으로 귀머거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당에서 신자인척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목사에게 믿음이 있는 척하려고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쓰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에서의 행동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모든 곳에서의 행동을 보십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들은 하나님을 모른 자들이 세상을 사는 것처럼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 입장만 있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서 낙심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는 내 인생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음을 알기에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하고 이 일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깨어있는 신자입니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뒷전이고 자기 일만 우선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신앙생활을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 몸부터 챙기기에 바쁘니까 나오는 것은 변명이고 핑계이고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24절에 "야곱으로 탈취를 당케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도적에게 붙이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백성들이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탈취를 당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도적을 갖다 붙인 분이 여호와라고 합니다. 왜 도적을 이스라엘에게 붙입니까?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잘못했으니까 맛좀봐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만드시기 위해서 도적을 갖다 붙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도적을 맞고 탈취를 당하는 가운데 자기들의 잘못을 깨달으며 하나님을 발견하고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신자가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짜증내고 불평하고 못살겠다고 울지만 말고, 그 일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힘쓰십시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는가?'라고 하면서 여러분의 인생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보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입장만 생각하면서 세상에 마음둔 채 세상사람처럼 불평과 원망이 계속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삶도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가지고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무엇을 가르치시는가? 언제나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생각하십시오. 많은 것을 보면서도 그 일에 유의치 않아서 하나님의 뜻은 전혀 발견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알게 될 것이고 몸은 고달프고 힘들어도 마음은 기쁨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증인 (사 43:1-13)
하나님께서 신자를 부르신 이유는 결코 한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평안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도구로 쓰여지느냐는 것은 쓰시는 분의 자유 의사이지 쓰여지는 도구의 입장에서는 '나를 어떻게 써달라'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신자들은 자신을 도구로 써달라고 말을 하면서 어떤 도구로 써달라는 것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를 교사로 써달라느니, 성가대로 써달라느니 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나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사를 하든 성가대를 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진다는 것은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교회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신자는 도구로 쓰여지지 않다는 결론이 됩니다. 교사를 하건 성가대를 하건 하고 싶으면 하면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은 무엇을 맡아서 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건 현재의 그 위치와 삶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란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역할로서의 도구이지 지상에 세워진 교회를 위해서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자신에게 현재 주어진 모든 환경과 여건이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최적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어려움이든 평안이든 관계없이 언제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삶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며 사는 신자 아닌 신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인생을 자기의 것으로 여깁니다.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에서 열심히 한 것만큼 하나님은 보답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은 좋은 일이 있으면 웃지만,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울고 원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어려움을 주시고 힘들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눈이 감겨 있고 귀가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경과 귀머거리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본문 8절에 나옵니다.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경과 귀머거리로 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에게 맡긴 일이 있는데 그 일은 소경과 귀머거리된 자를 이끌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종, 또는 증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같이 멸망에 빠질 뿐입니다. 귀머거리가 귀머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전달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들은 소경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눈 뜬 자로 삽니까? 귀머거리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듣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점을 오늘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다른 쪽으로 관심을 두고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내 생존을 내가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은 분명히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모든 신자들은 이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생존을 책임지신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책임지실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세상에서 번듯한 인생으로 인도하실 것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생존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말은 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존을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다보니까 자신의 삶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지고 나중에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데 생존이라는 문제에 걸려서 세상과 동일한 모습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생존을 내가 책임지려고 할 때 우리는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에 고개를 숙여야 하고 타협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삶속에서 보여져야 할 하나님의 모습이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함께 소경 되고 귀머거리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생존의 문제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철저히 할 때 신자는 얼마든지 타협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게 되고, 교회에 와서는 안그런척 내숭떨면서 자기 허물을 감추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소경이고 귀머거리입니다.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너를 조성하신 여호와가 말씀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고 우리를 자기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것이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끼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합니다.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자기의 신앙과 삶을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하신 일속에서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하시다가 포기하시거나 그만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를 책임지시겠다고 하셨으면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은 하나님에 하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하는 것도 제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건강주시고 이 자리에 세우셔서 하게 된 것입니다. 은석교회가 지금까지 유지되어 나온 것도 목사의 힘이 아니고 여러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석교회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껏 유지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라고 목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목사라면 자기 힘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자기 힘으로 교회가 유지되는 줄 착각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아니라 소경이고 귀머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서 물과 불을 피해가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물과 불 속에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물과 불을 우리 힘으로 벗어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힘으로 애써보다가 힘이 부족하면 기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물과 불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물 불을 통과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힘이 전혀 아니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사람이 곧 종이고 증인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여러분을 조성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분이 여러분을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은석교회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모여지든 흩어지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분명히 '너는 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은석교회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에 의해서 없애겠다고 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안됩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안됩니다'라고 나선다면 그것은 은석교회를 내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내가 아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린 다만 하나님이 모이라고 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은석교회의 사람 수가 늘든 줄든, 재정이 많든 적든 그것으로 우리가 안타까워하고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안타까워하고 염려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은석교회에 애착을 가지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은석교회를 자기 소유화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심게 되고, 하나님께 자기가 바라는 교회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은석교회에 애착을 가지지 마시고, 십자가를 알고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여러분의 형제 자매를 사랑하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를 가지고 한숨쉬고 걱정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걱정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남는 것은 걱정 근심이고 늘어가는 것은 주름살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은 창조주이시고 능력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내힘으로 살려고 하지 마시고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포기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드러내면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을 자기 힘으로 되어진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소경이고 귀머거리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일에 바쁘신 것을 나무랄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바쁜 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돈 벌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다'라는 생각에 빠져서 자기 바쁜 것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일하심으로 내가 산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살았다는 것만 생각하지 하나님이 배후에서 일하신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가 됩니다.
바쁘게 살아도 내가 바쁜 이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고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일이 없고 한가해져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애당초부터 자신의 힘도 아니고 자기 바쁜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쁘면 바쁜 가운데서, 놀게 되었으면 노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고 증인이다는 것입니다.
5-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은 자를 모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그러면 누가 택한 백성입니까? 그것은 모릅니다. 다만 오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물과 불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모습이라고만 말씀 드릴 뿐이지 누가 택한 백성이다 아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실 문제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과연 택한 백성의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종의 모습으로 증인된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날마다 점검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택한 백성 되려고 하지 말고 택한 백성의 모습이 보여지는지를 살피십시오.
내 생활, 내 신앙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것은 택한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종은 책임이 없습니다. 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13절에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라는 말씀과 같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감사하고 찬송할 뿐입니다. 모든 일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물과 불 속에서도 평안하고 감사하는 신자의 능력을 보이는 증인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현실 (사 43:14-28)
각 사람마다 현실에 대한 감각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주어진 환경과 경험, 지식의 정도 등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현실을 느끼고 반응하는 기준은 자기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처한 환경이나 경험이나 지식 등에 따라서 현실을 느끼는 것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경제가 어렵고 실업자가 속출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렵다는 감각을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살기가 힘들다고 해도 돈이 있는 사람들, 즉 돈에 의해서 압박을 받지 않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어렵다는 현실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아가게 됩니다. 가령 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자기들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고급 자가용을 굴리고 골프를 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돈 있다고 해서 골프 치고 사치한다고 욕을 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는 말들이 그들의 현실에서는 나름대로 타당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돈을 쌓아두고서 다른 사람들이 어렵다고 해서 그 돈을 쓰지 않고 가만히 둔다는 것은 돈 있는 사람들에게는 바보 같은 짓이고 참을 수 없는 일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성경도 사람들의 환경과 경험 지식 등에 따라서 각기 다른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현실을 전혀 다르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각기 다르게 느끼는 현실을 모두 무시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과 인생을 살면서 경험했던 것들 각기 다른 지식들, 그러한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채 새로운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현실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과연 어떠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현실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이 느끼는 현실을 교회도 그대로 느끼고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현대 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을 가르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과 똑같은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본 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교회도 현실 속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가 느끼는 현실도 세상사람들이 느끼는 현실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각기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세상처럼 교회도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각기 다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교회는 돈걱정을 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있고, 돈이 있는 교회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자기들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돈으로 열심히 자기들의 사업을 벌이고 시행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결국 교회는 돈 있는 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 있는 자가 교회를 도와주어야 돈 없는 교회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국 돈 없는 신자는 교인 수를 채워주는 역할로 그쳐버리고 돈 있는 신자는 교인 수를 채워주는 것을 넘어서 가장 중요한 '현실'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이 무엇이기에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현실을 느끼고 그 현실에 매어 사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현실을 생각하는 것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환경이나 인간 경험, 지식 이런 것들을 현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어렵다는 것은 우리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느끼는 현실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낙심하게 되고 염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무엇입니까?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돈이 많은 것이 현실이 아니라 그 돈은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돈이라는 것이 신자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나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신자의 현실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해도 내 소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나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내 소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를 기준으로 한 현실을 살아간다는 증거입니다. 사업이 안돼는 것이 자기 현실이기 때문에 사업이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준으로 한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는 사업이 안된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여깁니다. 그리고 사업이 안되고 어렵다고 해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원에 자기 소원을 두고자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한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고 말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창조하셨고 그들을 구속하셨고 그들의 왕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현실은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현실인데 과연 이스라엘은 이 현실을 현실로 느끼며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을 기준으로 해서 주어진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현실을 느끼며 살았을 뿐입니다. 어려울 때는 원망했고, 잘살 때는 그것이 자기들의 힘으로 된 것인양 교만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현실에는 그들을 구속하시고 창조하셔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전혀 느끼지 못한 현실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신 여호와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지금 여러분들은 지켜주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현실을 살아갑니까? 과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현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적인 어려움은 고민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위에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것 같으면 그 마음속에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창조의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그 능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옛날에 일어난 사건을 회상하는 것으로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고 교회를 찾아 나오게 된 것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게 되었음을 고백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숨을 쉬면서 살아가는 삶이 곧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임을 고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속하시고 성령이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예수를 보게 하신 분이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옛날 천지를 창조하신 그 능력으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새창조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면 지금 이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느껴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창조주이시고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어려운 환경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 능력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살아갈 때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며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16,17절에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려져 일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의 애굽 군사의 추격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서 길을 내시고 이스라엘은 살리시고 애굽을 죽이신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 군대의 추격 때문에 목숨이 위험한 것을 자기들의 현실로 느꼈습니다. 그래도 불안을 느끼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홍해를 갈라서 그들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현실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옛날 홍해를 가르시고 길을 내신 그분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합니다. 그 증거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깨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의 현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닙니다. 위대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 옛날과 동일한 능력으로 여러분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곧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 현실을 현실로 느끼지 못하고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것만 현실로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것은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현실로 느끼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현실을 느끼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느끼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라고 합니다. 또 21절에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었습니다. 사막에 강을 내는 것과 같은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옛적 일, 즉 홍해가 갈라지고 길을 건너는 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그것만이 능력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것도 홍해를 갈라지게 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데 왜 그 능력을 보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은바 된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할 일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뭘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도 창조의 능력이고, 교회를 다니는 것도 창조의 능력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귀찮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보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되어진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창조의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결코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십시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능력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 현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현실을 현실로 여기지 마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여러분을 구속하신 하나님이 반석이 되시고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는 그 현실을 여러분의 현실로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두려움 없는 삶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그 능력을 능력으로 보지 못하고 단지 나를 바라보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여서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왔을 뿐입니다. 아무쪼록 창조의 능력을 맛보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아무리 작게 보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일로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두려움 없는 현실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 상 (사 44:9-11)
9804081572
지난 시간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홍해를 가르신 것만이 능력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이 숨을 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며, 어둠에 갇혀 있어야 할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라고 주를 의지하는 인간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능력을 능력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자가 신앙에 문제가 생기고 조그만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평소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채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기 일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무기력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 세끼 밥먹고 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하루 세끼 밥먹고 사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별 것아닌 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너무 부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는 하루 세끼 먹는다는 것은 별 것 아닌 것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그때는 뭘 먹어도 굶지 않은 것만 가지고도 감사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굶지 않고 사는 것으로는 감사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루하루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이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일어나게 하신 것임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왜 오늘 하루를 살게 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께 헌신되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이런 감사를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숨을 쉬며 살아가고 하루 세끼 먹는 것으로 감사하기에는 우리들의 욕심이 너무 커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지금도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으로 여러분을 지키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된 자들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현실로 생각하지만 신자는 다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것만을 현실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낙심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현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항상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현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현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할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이사야 44장 전체가 우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 대부분은 성경에서 우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일단 안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의 문제는 부처를 안섬기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안하는 것으로 끝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9절에 보면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다고 말합니다. 우상은 무익한 것이고 결국 우리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냥 읽을 때에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해보겠습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이 있습니다. 우상은 죽어있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상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각도 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십니다. 우상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상은 우리를 심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기도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과연 어떤 식으로 믿었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하나님으로 믿었습니까? 우상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했습니까 아니면 진짜 하나님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했습니까. 아마 우상을 대하듯 대한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말한 대로 우상은 보지도 못하고 생명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고 우리를 심판하지도 못합니다. 즉 우상 앞에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행동을 볼 수 없고 나를 심판할 수 없는 우상인데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있으시고 살아 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구원도 하시고 심판도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두려운 마음을 가졌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처럼 대한다는 증거입니다. 죽어있는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살아가는 것은 제 마음대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지도 않고 나를 심판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말씀과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날마다 나를 보고 계시고 마지막 때 내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자기 멋대로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선 당장은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 생활이 나아지고 내가 편해지는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길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항상 눈앞의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상은 항상 눈앞의 일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찾지만 하나님은 나중의 일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찾습니다. 나중일, 우리가 이 땅을 떠난 후의 일에 관심을 두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 해도 우상을 대하듯 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중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하시지 눈앞의 일에 대한 해결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중은 나중 일이고 우선 급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다라고 해버린다면 결국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없고 우상만 남을 뿐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느냐 안섬기느냐의 문제는 부처에게 절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 행동 하나까지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살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보지도 못하고 심판도 하지 못하는 우상을 대하듯,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무시해 버리고 전혀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신, 즉 우상을 섬기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이라는 것은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우상의 문제가 나올 때 '나는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내가 안섬긴다고 마음먹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는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해버리면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되버립니다. 내 의지에 의해서 우상을 스스로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내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나는 우상을 안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우상을 향해 달려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상이 인간의 본성에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 본성을 거스리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 나는 우상을 안섬깁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상을 안섬기는 사람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신자의 감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가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우상을 안섬기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전도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 하나님,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이런 모든 것이 자기가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그냥 우리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박수나 치고 있으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상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특징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하고 그 결과로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것을 구경이나 하면서 잘한 사람은 복으로 갚아주고, 못한 사람은 벌을 내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를 보여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라면 '내가 사랑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랑하게 하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사랑하는 길로 인도하시는데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는 사라지고 하나님만 살아 계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죽어있는 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도 힘들고 신앙생활도 힘들어 집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신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게 되고 결국 피곤하고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
종 (사 44:22-28)
9804151673
사람은 인생이 자신이 뜻하고 예측한 대로 되어지기를 바라고 살아가지만,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미리 예측한다거나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 갈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되어서 웃을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전혀 원하지도 않는 일로 인해서 슬퍼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즉 항상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희비라는 것을 우리가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닥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럭비공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럭비공은 여느 공과는 달리 둥글지가 않고 타원형입니다. 따라서 던진 사람도 그 공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습니다. 둥근 공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튀도록 미리 예측하여 던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럭비공은 공을 던진 사람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한 채 튀어 오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이 어느 방향으로 튀어 오를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럭비공 같은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튈 것인가를 미리 예측해 보기 위해서 토정비결이라는 것을 보기도 하고, 자신이 예측하고 뜻하는 방향으로 인생이 튀기를 원해서 기원, 기도라는 것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가장 편안하게 살아가는 지혜는 인생이 튀는 방향에 자기를 맞추는 것입니다. 이쪽으로 튀면 튄대로, 저쪽으로 튀면 저쪽으로 튄대로 맞추어 살아가면 가장 편안한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내 뜻이라는 것이 포기되어지지 않고 항상 살아서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내 뜻과는 반대로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고, 결국 내 뜻과 현재의 상황의 충돌 속에서 낙심과 절망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내 뜻대로 일이 잘될지 안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 염려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지금 당장은 일이 잘됐다 하더라도 자고 깨고 나면 어떻게 달라질 지 모르는 불확실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일이 잘되었다고 웃고 떠들며 자기가 최고인양 우쭐거리고 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세상 다 산 것같이 낙심해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그런 모양새들이 참으로 덧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현실에 매이지 않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임을 압니다. 그래서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란 말도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란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기 마련이다는 뜻입니다.
새옹지마란 말이 나오게 된 유래는 이렇습니다. 옛날 중국 변두리에 새옹이라는 노인이 살았는데 하루는 그 노인이 기르던 말이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아까운 말을 한 마리 잃어버렸다고 아쉬워 할 때 새옹이라는 노인은 전혀 아까워하는 표정도 없이 덤덤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잃어버린 말이 다시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 아주 좋은 말 한 마리를 같이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이번에는 복이 굴러 들어왔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노인만은 좋아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인의 아들이 그 좋은 말을 타고 놀다가 떨어져 다쳐서 다리 하나를 못쓰게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들 안됐다고 위로했지만 노인은 역시 덤덤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터집니다. 마을 청년들이 모두 전쟁터로 끌려나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못쓰기 때문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새옹지마란 말의 유래입니다.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이 깨달은 인생의 지혜는 복이 복이 아니고 화가 화가 아니니까 복에 매이지 말고 화에도 매이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럭비공 같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살다보면 다시 좋아질 날이 있을 것이니까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인생의 지혜는 철저하게 자기 위주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마음 편하게 살아갈 것인가를 연구하는 가운데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에도 매이지 말고 복에도 매이지 말자는 것은 옳은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매이지 않는 것이 편하게 사는 것이니까 매이지 말자라고 한다고 해서 현실을 초월하여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세상을 럭비공처럼 보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신자는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바라봅니다. 인생이 럭비공이라는 것은 우연이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안에서 움직여진다는 의미로서 럭비공 같은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과 계획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앞세우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인생이 진행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역사 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사 55:8절에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같지 않고 내 길은 너희의 길과 같지 않다"는 말씀이 믿어질 때에 가능합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잘된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못되었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현재를 보고 살아간다면 지금 눈앞의 어려움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까지 같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내뜻대로 살아지지 않을 때 비로소 내 뜻보다 더 높은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수긍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신자의 마음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라는 것이고, 내 종된 너는 내가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건망증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건망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우리를 잊어버리신 적이 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인생을 인도하고 계셨는데, 정작 우리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슬퍼하고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낙심하고 살아왔습니다. 인간의 얕은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아챌 수 없는 하늘의 높은 뜻이 내 인생을 지배하고 계심을 잊어버린 채 내 뜻만 앞세우면서 고집을 부렸던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지금껏 우리들이 인생 속에서 머물렀던 자리입니다.
22절에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어디로 돌아오라고 하십니까? 죄를 사하시고 죄를 없이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돌아오면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를 사해 놓으시고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보면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망설이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너무 죄가 많고 나쁜 인간이어서 도저히 양심상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존심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떳떳한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 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종이라고 보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입니다. 죄를 사하시고 도말 하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곧 종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떳떳함이 없고 오직 죄사하신 하나님의 일만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전한다고 해도 자기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만 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종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자기의 업적을 앞세우고 자기를 자랑하는 거짓 종들이 판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참된 종이 어떤 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하실 때는 가는 그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길이기 때문에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결국 죄사함이 있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외에는 모두가 멸망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기는 하겠지만 하나님께 매이는 것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좋지만 죄사함이 있는 쪽으로는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종이 아닙니다. 종은 매이는 자입니다. 붙들린 자입니다. 자기의 계획과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 더 높은 뜻과 계획을 바라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설령 그 뜻과 계획에 의해서 자신이 엉망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뜻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세상에 한번 태어났으면 한번 멋있게 살다가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위 포부와 욕망이라는 것이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모든 소원까지 다 아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우리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반대의 길로 인도해 가신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뜻을 생각하고 어리석은 얕은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지 않고 친히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내 뜻조차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쉴 곳은 없습니다. 어딜 가도 경쟁이고 싸움입니다. 돈이 효자고 돈이 힘이지 돈 없으면 냉대와 멸시를 받고 사는 곳이 세상입니다. 우리의 쉴곳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고 안식처입니다. 죄사함이 있는 하나님으로 돌아가고 피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지혜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진행하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묻지도 않으시고 자문을 구하지도 않으시고 하나님 마음대로 처리하시고 진행하십니다. 24-28절을 읽어보십시오.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움직여짐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우주 만물 속에 조그만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뜻을 멈추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눈길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뭔가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깨닫지 못했다면 눈길을 나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내 생각이 앞서버리고 근심과 염려에 빠져 있다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깨달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힘들때일수록 내 생각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진짜 죽느냐 사느냐는 고비에 처할 때가 있거든 잠시 고민과 염려를 멈추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분명히 지혜를 주시고 어려움을 이길 능력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시고 도말 하시는 일을 다 마쳐놓으시고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외침에는 관심 없이 내 인생에 몰두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다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으로 부름 받은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지명하여 불렀나니 (사 45:1-7)
9804291874
오늘 읽은 본문 중 4절을 보면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으로서 바사의 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고레스를 부르셨다는 것은 고레스를 통해서 무엇인가 하시겠다는 의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것은 '부르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린 보통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개인의 유익과 연관지어 생각합니다. '나를 복주고 구원시키기 위해서 부르셨다'라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부르신 것이 고레스 개인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고레스를 구원시키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고레스는 분명히 개인의 유익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종,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통해서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무너진 성전을 세우시고자 하십니다. 44:28절의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고 하는 말씀을 봐도 하나님이 고레스를 통하여 무엇을 하실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섣불리 자신의 구원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이지 결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즉 선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선택이지 내 구원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고레스를 부르셨다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방인인 고레스를 쓰시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는 것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라고 겔 36:22,23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부름을 입은 것도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을 위해서 부름을 입은 것이지 나 개인의 축복이나 구원을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신자라면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느냐?'가 관심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 되게 하는 것인가?'에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흔히 부르심에 대해서 가진 오해 중의 하나가 부르심을 직책에 대한 부르심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목사, 장로, 집사, 평신도 같은 직책에 대한 부르심이 아니라 단지 종으로서 부르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통 신학교에 갈 때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하나님은 누구는 목사로 부르시고 누구는 장로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모든 사람을 종으로 부르시고 그 속에서 누구는 목사의 일을 하게 하고, 누구는 교사의 일을 하게 하고, 누구는 장로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에 차별을 두는 것은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소위 목사 같은 특별한 부르심은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는 다른 특별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스라엘 속에서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일을 하게 하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이라고 해도 다같은 종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부르심에도 신자로 부르신 것이 있고, 그속에서 또 누군가를 택해서 목사로 부르신 특별한 부르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고질병입니다. 뭐가 차별화하려고 하고 계층을 두려고 하는 고질병 때문에 한국교회가 엉망이 된 것입니다.
선지자나 사도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입었다면 그들이 특별한 부름을 입어서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 있습니까? 특별 대우를 받았다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매맞아 죽은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고 떠벌리고 있지만 만약 하나님이 선지자나 사도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시겠다고 한다면 목사 하려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은, '이제부터 네 인생은 내가 주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부름을 입었으니까 이제 그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데 쓰여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순간부터 자기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름 받은 자의 운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입었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명하여 부르신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맛있는 사탕을 주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부름 받은 신자가 가져야 할 관심은 하나님이 일이지 내가 구원받고 복받아서 잘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구원, 자기 축복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것부터가 이미 하나님께 관심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도 모르는 이방 나라의 왕인 고레스를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고레스를 불러서 어떤 일에 사용을 하였습니까? 이것을 잘 알아야 우리가 부름 받아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고레스를 불러서 무엇을 하셨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고레스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고 강한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누구도 고레스를 당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레스로 하여금 힘을 주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면서 강대국이 되게 하시는 것은 고레스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44:28을 보면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은 고레스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읍을 다시 중건하시고, 성전을 다시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시기 위해서 고레스를 불러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바벨론을 정복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해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성전은 죄용서를 위해서 제물을 잡고 피를 흘리는 곳입니다. 44:22을 보면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그리고 23절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죄용서의 일을 하십니다. 인간의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 일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성전에는 피흘림이 있고 피흘림으로서 죄가 도말 하여지고 죄가 도말 하여 짐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실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인간의 죄로 인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죄용서가 계속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고레스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성전을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결국 고레스는 죄용서의 일을 하는 성전을 다시 세우시는데 쓰여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하기를 고레스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고레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을 통해서 성전을 다시 세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무너진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 무너진 성전이 있어야 다시 성전을 세우는 일에 쓰여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성전은 우리들입니다. 고전 3: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이 내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전이 세워져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만약 우리 안의 성전이 무너져 있다면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실 자리는 없습니다.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죄로 성전이 무너진 것 같이 오늘날 우리들의 죄, 즉 나의 탐욕, 내 꿈, 내 욕심 등이 성전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할 일은 분명합니다. 내 안에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차근차근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부르신 것은 성전을 다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것도 역시 성전을 다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옛날에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오늘날은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시고 그곳에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우리의 할 일은 내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이끌어 나가시는 것은 모두가 우리를 성전 되게 해서 죄용서의 일이 계속 되어지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고자 일하시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즉 고레스가 세상을 정복하고 힘있는 나라가 된 것은 고레스가 잘나고 특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신 일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도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신자의 인생도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때문에 잘된다고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안된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세상에 대한 탐욕들, 욕심들, 여러분의 꿈과 소망을 하나하나 포기하게 해서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지장이 없는 성전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무너져 있습니다. 온통 내 탐욕으로 가득찬 마음입니다. 그런 우리 마음을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성전은 한번 세워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이 인간의 죄로 무너진 것처럼, 우리 안의 성전도 계속 무너집니다. 세워지고 무너뜨리는 것이 반복됩니다. 내것이 포기되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너진 성전이 다시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 날마다 주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피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이 일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교회를 부흥시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우리들의 안에서 죄용서가 계속 되어지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왜 여러분을 부르셨는지 그 이유를 아셨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세우시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 나오면서 세상에 대해서 포기되어지지 않는 나의 탐욕 욕심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가 내 생명임을 알고 의지함으로서 우리들의 마음은 주님의 피로 가득 채워지고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되어져야 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죄가 사라짐이 없이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죄를 고백하며 성전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부름 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이고 이 일에 충성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흙과 토기장이 (사 45:8-13)
9805061975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을 다시 세우시기 위해서 이방인인 고레스를 부르신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레스라는 한 개인에게 관심을 두고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신자에 대한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하나님이 부르셨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나 개인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관심을 가져주는 분이 직장의 높은 사람일 경우에는 승진과 좋은 보직 등 여러 가지 환상에 사로잡히면서 꿈에 부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도 나에 대한 관심으로 오해하면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으로 쉽게 말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른다고 하는 것에는 관심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망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도 있고, 또는 어떤 일을 시키기 위해서 부르는 것도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직장 상사로부터 전혀 관심을 받을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고, 상사가 원하는 대로 일을 잘하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면 상사가 부른다고 할 때 무슨 생각을 먼저 하겠습니까? '내가 또 무슨 잘못을 범한 것은 아닌가?' '무슨 일을 시키려고 부르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하니까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복을 주시고 천국 보내시려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망상과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관심을 받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고, 복을 받을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가지도 못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행동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면,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할 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나를 불러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는가?'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 자세입니다.
고레스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둘만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 관심을 두고 계시는 성전을 다시 세우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레스는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잠시 이용하기 위해서 우선 고레스가 다른 나라를 점령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약 고레스가 이것을 안다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입장을 바꿔 생각할 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잘되고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잘되어갈 때 자기 딴에는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해서 주어진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아니다 그것은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이용해서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기분 좋을리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고생을 하고 있다면, 그 고생의 대가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래의 마음입니다. 어느 인간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고생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를 불러서 어떤 일을 시키면서 나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말고 다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기쁨으로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고레스를 부르셨다는 것을 내가 고레스가 되어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뭔가 모르게 불편한 심기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하면 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좀 더 관심을 가져주지 않겠는가라는 기대감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대다수의 교인들은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지켜보고 계시다가 뭔가 잘한 일이 있으면 금방 달려와서 복을 주고 잘 안되던 일을 잘되도록 바꾸어 주고 돌아가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같이 열심히 문지르면 자기를 도와주는 종이 나오는 것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가짜 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를 하나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편만 되어준다면 세상 살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교인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 일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설쳐대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두가 '하나님 내편 만들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편도 아니고 오직 자신 편입니다. 목사냐 평신도냐, 기도를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 헌금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일하십니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내 편이 되어주고, 게을리 한다고 해서 내편이 안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내편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뭔가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하시는 일만 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편이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은 '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도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하지 않으시겠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은 의를 원하십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이 이 '의'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 편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의를 드릴 수 없다면 우리는 멸망을 각오해야 합니다.
본문 8절에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늘에서 의를 비같이 부어 내리고 땅에서는 의가 움돋게 하셔서 악으로 더럽혀진 세상을 버리시고 의로 채워진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의라고는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의는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착한 일을 해도 의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의는 누구에게만 있습니까?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께만 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희생을 통해서 그 의를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의가 있으신 예수님편입니다. 즉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하시고 예수님께만 관심을 두시는 것이지 결코 우리들을 중심으로 일하시거나 우리들이 먹고사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의가 없는 인간을 아주 천대하십니다. 왜냐하면 의가 있으신 예수님만 높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의만 높이시고 악은 철저하게 밟고 부숴 버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성경은 모두가 죄를 무너뜨리고 의를 세우는 이야기로 가득차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부르셔서 성전을 다시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도 결국은 죄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심으로 죄를 물리치고 그 자리에 의를 세우시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의를 고집하고 내세움으로서 오히려 예수님의 의를 물리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멸망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는 인간의 의를 부정합니다. 십계명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십계명은 '하나님의 잣대'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면서 의가 있음을 주장할 때 십계명은 인간에게는 의가 없음을 고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은 옛날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길을 그대로 가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것을 자기들이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도우셔서 한다고 하고, 성령의 힘으로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이것은 신앙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힘으로 했다고 하면서도 모든 결과가 자기 것이 되어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나를 얻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안락한 나의 나라를 얻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악임을 십자가가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렇든 자신에게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진짜 십자가,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면 '그럼 인간은 뭐냐?'라는 반발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왜 지으셨고 왜 신자로 부르셨느냐?'라고 반박을 합니다. 최후까지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9절부터의 내용입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를 비같이 내려서 깨끗한 나라를 창조하시고 더러운 세상은 멸망시켜 버리시겠다고 하니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반박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 하시려면 나보다 나쁜 사람들을 심판해야 하고, 나보다 교회에 게으른 사람들을 심판해야지 왜 나까지 심판의 무리 속에 싸잡아 넣느냐는 반발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어떤 일을 했느냐와는 상관없이 자신은 심판을 받아서는 안될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죄속에 있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는 진흙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고 나는 토기장이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의가 없는 인간은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의가 없어서 부숴 버리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이 권한 앞에서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우린 진흙의 한 조각입니다. 부수겠다고 하시면 부서져야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시고자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시고자 하시는 새로운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나에게 의가 없음을 알고 의가 되시는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좁은 길이고 고난과 고통이 있는 길이라고 해도 주님의 의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안 이상 우린 주님의 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고,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울어도 예수님 때문에 울고 웃어도 예수님 때문에 웃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의가 없는 진흙에 불과한 우리들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주님 때문에 눈물 흘리고 웃을 수 있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여러분께 접근해서 여러분에게 있는 십자가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고 애를 쓴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의가 있고, 열심히만 하면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의가 없어서 십자가 지신 그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항상 나에게는 의가 없음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은 내편이 될 수 없음을 알고 내 죄를 인해서 피흘리신 예수님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로 세상에 오신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만 따라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나를 앙망하라 (사 45:14-25)
9805132076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고 하셨으면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로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보여주는 것은 자기를 믿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신 줄을 모릅니다. 그 결과로 마음이 황폐해지고 몸도 망가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의 죄가 있고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살려주심으로써 살아가는 존재인데,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이 나를 주관하심을 알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그 어리석음이 수고로움과 괴로움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뭔가를 생각하고 나름대로 인생을 계획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그 의식이 하나님께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면 인생은 염려와 근심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하면서도 결국 하나님을 거스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도 관심 없고 성경에도 관심이 없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관심이 없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신에게 복이 주어지는 것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직 관심은 '어떻게 하면 내가 영화롭게 되는가?'에만 쏠려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겉모습은 신자인체 하지만 그 속은 불신자와 똑같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하나님께만 관심 두고 성경에만 관심 두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짓고 교인수 늘리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만 가지고는 목회성공 할 수 없다는 말을 쉽게 내뱉고 있는 현실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냐는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서 연구하고 분석한다는 것이 사실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몰라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아버지에 대해서 알 때는 자식이 아버지를 연구해서 알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앉혀 놓고 아버지에 대해서 알려줄 때 알려준 것만큼 알아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도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신자 스스로 연구해서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에 대해서 계시하신 것만큼 알아 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호기심과 자기 만족을 버리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둘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보이시는 분이 아니라 숨어 계시는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 15절에서 그것을 말씀합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합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게 숨어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숨은 그림 찾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숨은 그림 찾기의 그림은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위의 비슷한 그림 때문에 발견되지 않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숨어 계셔서 인간들이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못하고 세상에 난무하는 신으로 행세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숨어있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숨어 있는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의 가짜를 알아보고 그것을 부숴 버리고 가짜를 가짜라고 할 때 그 현장에 나타나십니다. 결국 신자가 가짜를 알고 가짜 속에서 진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더 이상 숨어 있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가짜 신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가짜 신이 인간이 무엇을 제공하고 무엇을 약속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가짜 신도 보이지 않는 신으로 행세합니다. 그러나 약속하고 제공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가짜 신을 따르는 자는 보이는 것에 매이게 되고, 진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따르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약속,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매어 살아가게 됩니다.
20절에 보면 "열방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한가지로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니라"고 합니다.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며 사는 세상 속에서 참된 여호와를 의지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피난 나온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을 찾아서 기도하는 무리들 속에서 빠져 나온 또 하나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능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찾아다니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21절에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가짜 신은 공의를 행하지 못하고 구원을 베풀지 못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하나님은 의를 행하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있는 자를 죄없다고 하신 의입니다. 무턱대고 죄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의 피를 대신 흘리게 해서 우리 죄를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진짜 하나님을 만난 신자는 하나님께 나올 때 '나는 죄 있는 자다'는 것을 앞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죄있는 자를 죄없다고 하신 어린양의 피가 너무 소중해서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신자입니다. 기도를 해도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살렸음을 감사하면서 항상 주님의 피를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봉사를 해도 '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살기 때문에 내 봉사가 귀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가 귀하다'고 하면서 봉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 신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입만 열면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의를 자랑하고,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 복을 외칠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주님의 피보다는 내 희생이 더 소중하고 내 돈이 더 중하고 주님의 십자가보다 자기 인생이 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16절에서 이런 사람들은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고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의가 우리를 영원토록 생명 안에 살게 합니다. 죄가운데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은 내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기 의는 무가치한 것으로만 보이고 오직 주님의 의만 마음에 박힐 뿐입니다. 이런 신자에게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22절에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앙망하십니까? 어떤 하나님을 앙망하십니까?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이 앙망하는 하나님은 자기 사랑에 동조하고, 자기 의를 칭찬하고, 자기를 위한 수호신이 되어주는 하나님 아닌 하나님이지만 참된 여호와를 만난 신자는 우리에게 의를 행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신자이기를 바랍니다. 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앞에 의를 구하는 마음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는 자동적으로 자기의 의가 소멸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함없이 자기의 의를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만나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너무나 귀하고 엄청나기 때문에 그 의 앞에서 감히 쓰레기 같은 인간의 의를 내세울 수 없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알게 된 신자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될만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무엇 하나도 우리를 구원시키지 못합니다. 때문에 여호와를 앙망하라는 것도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의를 행하시는 하나님 한 분임을 알고 그분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있든 없든, 세상 살기가 고달프고 힘이 든다고 해도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것 만으로라도 힘을 얻고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장 부 (사 46:1-13)
9805202177
사람들은 천국과 세상을 각각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즉 지금은 세상만 있고 천국은 세상이 심판을 받으면 그때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세상에서 잘사는 것을 신자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못살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끊이지 않으면 뭔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거나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고 다시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 마음에 들만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천국은 각각 다른 나라이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첩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사라지면 천국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 위에 천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천국을 죽어서 믿음이 좋으면 가는 장소 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세상과 천국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은 한가지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과 천국을 동시에 다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천국을 원한다면 세상을 포기해야 하고, 세상을 원한다면 천국은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동방박사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서 예수님을 찾아 베들레헴으로 옵니다. 그런데 별이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합니다. 박사들은 예루살렘의 헤롯왕과 신하들 앞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있느뇨'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헤롯왕을 왕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있느뇨?'라고 묻는 순간 나라가 둘로 나뉘어져 버립니다. 헤롯이 다스리는 나라와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구분되어 버립니다. 물론 땅덩어리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두 종류로 나뉘어져 버린 것입니다. 즉 헤롯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나라와 예수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나라로 구분되어 버립니다. 이 두 사고방식은 서로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 막혀 있습니다. 교류할 수 없고, 서로 타협이 안되고 양보가 안됩니다. 그래서 한쪽은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이미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침투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앞에는 세상이냐 그리스도냐는 갈림길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을 갔다가 나중에 다시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길은 마귀가 제시하는 길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국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된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는 자연히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의해서 믿음이 흔들리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전히 죄속에 있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죄와 상관이 없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죄속에서 구원자를 바라보게 합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어두움에 갇혀 있는 자신의 소망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장부'입니다. 8절에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고 합니다. 장부라고 할 때 우리는 대장부를 생각하게 됩니다. 대장부란 씩씩하고 힘있고 의지가 굳건한 사람을 가리켜서 부르는 말입니다. 8절에서 '장부'가 되라는 것은 곧 신앙에서 이런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씩씩하고 힘있고 굳건한 신앙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장부가 되라고 하신 것은 지금의 이스라엘은 장부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장부가 아니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6,7절을 보면 우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치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고난과 어려움과 재앙을 미리 피해보고자 하는 심리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나쁜 일이 주어지고 어려움이 오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행복이 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세상적인 조건과 환경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을 위협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지키고 유지하고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어떤 초월적인 신적 힘을 소유하고 있는 대상을 스스로 만들어서 그것을 의지하거나 신적 힘을 발휘하는 방법이나 도구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소위 부적이고, 기도이고, 무당들의 굿입니다. 또한 소위 재수 없다는 행동은 삼가려고 하고, 무슨 일만 일어나도 '혹 내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것은 아닌가?' '내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간 것은 아닌가?'라고 하면서 불안해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고 이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우상입니다. 결국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마음이 굳건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목표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소망인 사람들이 항상 세상에서 일어난 일에 의해서 이리 저리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록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장부답지 못한 신자는 평소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지 모르지만 그 목적은 세상에 힘이 될만한 것을 얻기 위해서 부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이 힘이고 자식이 힘이었습니다. 돈 있고 자랑할만한 자식이 있다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끄떡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들은 결국 돈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면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듯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온갖 호들갑을 다 떨면서 주님을 찾습니다. 자식이 자신을 실망시키면 살 소망이 다 끊어진 듯 한숨을 쉽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걱정이고 자신이 없어져 버립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장부답지 못한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장부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마음 흔들리고 걱정하면서 굳건하지 못한 마음상태를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천국과 세상은 중첩되어 있고 이 둘은 서로 단절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천국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은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세상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장부답지 못한 모습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장부답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마음 졸이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장부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장부란 되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이 일'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9절에 보면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옛적 일을 기억하는 것이 장부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 옛적 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3,4절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옛적 일입니다.
여기 보면 야곱 집, 이스라엘 집에 남은 자가 있습니다. 남은 자란 다 떨어지고 탈락되었는데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들이 끝까지 남을 수 있었던 근거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품으시고 안으신 사람은 사랑해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런 자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3절에 '야곱 집'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누구입니까? 자신의 야망으로 뭉친 사람이고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사기꾼입니다. 여자를 얻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습니다. 순전히 인간을 보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품어주신 것입니다. 야곱 집의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그 남은 자들도 다 야곱과 같은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야곱을 품으신 방식 그대로 그들을 품었기 때문에 남은 자가 된 것임을 말합니다. 이것을 아는 남은 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을 믿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남은 자는 하나님이 날 품으시고 안으셨기 때문에 천국가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의가 될만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교회 나왔다는 생각도 가질 수 없고, 자신이 잘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품으시고 안으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행동의 여하에 따라서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의가 될만한 행동이 있으면 안심하고 든든해하고, 의가 될 행동이 없고 다른 사람보다 뒤쳐진 듯 싶으면 불안해하고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장부답지 못한 신앙입니다. 항상 자기 주위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마음이 요동을 칩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품으시고 안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굳게 서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옛적 일을 기억하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너희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장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야곱 같은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내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나를 품으셨고 안으셨고 나를 구하여 내셨기 때문이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품으시고 안으신다는 것은 어떤 고난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있게 해서라도 세상에서 구하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신자라면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오히려 고난 속에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더욱 믿음에 굳게 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장부입니다.
장부는 세상이 소망이 아닙니다. 때문에 세상일이 잘 안 풀린다고 해서 고민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돈이 없다고 해도 천국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오늘날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장부와 같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장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우리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도 야곱 같이 교만하고 내 이익을 위해서는 남을 속이고 피해를 입히며 살아가는 인생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품으시고 안으셨습니다. 그냥 안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안으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의 피로서 살아난 우리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장부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내놔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의를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그 의로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12,13절에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의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를 만들어 내지 못해서 고난이 온 것은 아닌가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 든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살린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가 의안에서 사는 것이고, 의에 의해서 움직여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천국에 있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세상의 일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배불렀기 때문에 세상 것에 대해서 주려하지 않고 마음 흔들리지 않습니다. 돈 많은 사람을 봐도 공부 잘한 자식을 둔 부모를 봐도 부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이 뭔가 세상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방황이 될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신 일을 생각하십시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붙들어 줄 것입니다.
종 말 (사 47:1-11)
9805272278
누가복음 12:16절부터 보면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소출이 많아서 창고에 쌓아둘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창고를 헐고 더 큰 창고를 지어서 소출을 가득히 쌓아두고 스스로 말하기를 '먹고 쓸 것이 많으니까 이제는 먹고 마시면서 즐겁게 살아가자'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부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모아진 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세상을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립성에 대한 책망입니다.
인간의 죄는 힘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힘이 있어야 살고, 힘이 있어야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이 되는 일에 모든 관심을 둡니다. 이런 죄가 신을 찾는 습성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자기에게 힘이 되는 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단의 인간 접근 방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힘 되는 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하나님 앞에서는 힘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사실에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힘이 필요 없음을 아는 것은 완전한 자기 부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도 예수님 앞에서는 힘이 필요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이루어야 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은 인간이 자기의 노력과 힘을 포기하고 주님이 하신 일만 의지하는 것이라고 할 때,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뭔가 하라고 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믿음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반발하면서 자기의 자립심으로 노력과 힘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죄가운데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자립심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활동이 자신의 생존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는 힘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결국 활동은 곧 힘을 축적하는 쪽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지혜라는 것도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쪽으로 발달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어리석게 생각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의 몸에 전혀 유익 되지 못하는 일에 관심 두고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을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것을 어리석게 보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의 근원은 여호와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오늘밤이라도 그 영혼을 도로 찾으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창고가 가득하다는 보이는 현실 때문에 마음이 든든해져서 창고의 모든 것이 오늘밤이라도 내 것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둔 채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까?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며 여호와의 것이라는 생각아래 모든 일을 처리하며 살아갑니까? 나에게 종말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삽니까? 가령 병이 들었을 때 병든 몸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고 '내 생명은 여호와께 있으니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힘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비록 병든 몸이라고 할지라도 편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죽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종말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질병으로 인해서 고생한다고 해도 낙심하고 신세타령하며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한쪽에 대해서는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돈을 믿지 않겠습니다' '힘을 믿지 않겠습니다'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는 것, 이것이 진실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말하면서 자기라는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 속에서 헤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본문 6-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셔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자 바벨론은 그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이스라엘을 핍박하며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여호와를 신으로 섬기는 민족을 점령하고 그들을 종으로 부리고 있는 만큼 여호와란 신도 자기들의 힘에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자기 힘에 도취한 채 살았습니다. 강한 힘과 평안 속에서 종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고 오히려 늙은이에게조차 심한 멍에를 매우며 자기들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평안이 자기 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한 채 살았습니다. 지금 과부가 안되고 자식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결과임을 잊어버린 채 자기 과시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방인들의 모습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오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 속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신자가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모든 힘을 다해서 유혹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신자들은 이런 마귀의 유혹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자신의 소유를 누가 뺏어갈 때 두 눈뜨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아마 자기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힘으로 대항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날 때부터 마귀의 종입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의로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마귀가 순순히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유혹으로 다시금 자기에게로 시선을 돌리도록 할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교회를 안나가고 기도를 안하고 성경을 안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한 대로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서 힘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마귀 역시 인간을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힘을 포기하는 인간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되는 것을 제공하며 자기 노력과 열심과 땀이 개입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삼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마귀의 이런 의도를 잘아는 신자라면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힘써야 하겠습니까? 종교적 열심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힘이 포기되어지는데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 포기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내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생명으로 인도했음을 알고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되어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 해야할 무엇인가가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살아가면 되었습니다. 먹지 말란 선악과만 안 먹으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행동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로서 뭔가 해야 할 행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 아래 살아가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신자의 할 일이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자꾸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배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게 함으로서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아가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물러갈 마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할 일은 내 배후에서 내 생명을 주장하시고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신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일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쉬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교만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성경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은 자기 포기를 바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가 있고, 자기 경험과 힘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포기라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앞의 자기 소유와 지식과 경험을 앞세울 때는 그 역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르는 무리들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다르게 살라고 뽑힌 자들입니다. 그들이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은 자기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앞세우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평안하고 잘될 때 이제는 우리 힘으로도 살 수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자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했습니다. 바벨론 역시 자기의 힘과 지혜와 지식을 앞세우며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8,10)라고 하면서 교만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모두는 인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종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7절에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종말이 있습니다. 이 종말을 잊어버리고 살 때 자기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해 줄 세상 것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보고 살아가십니까? 믿는다는 말은 수없이 많이 하면서도 돌아서면 결국 내 뜻대로 살아가고 내 지혜와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는 우리 자신의 삶의 잘못됨에 대해서 깊은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아무 것도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질 그 날이 되면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때문에 종말을 마음에 둔 채 살아가는 신자는 결코 그리스도의 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생이 조금 편치 못하고 힘들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 것이 헛된 것으로 보여지기 바랍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사 48:1-11)
9806032379
하나님은 살아있는 신입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인간의 계획과 뜻에 따라서 움직여 주는 허수아비 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움직여 나가시는 신실하신 여호와십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에 대한 판단까지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인간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하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현대 인간이 상상하는 신에 대한 개념은 종교적 인간의 신지식에서 나온 산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지금 신지식이라는 자기 상자에 하나님을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기 상자에 맞지 않는 부분은 잘라내 버리고, 또는 억지로 맞춰가면서 자기의 하나님을 만들려고 기를 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살아 계시는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인간의 타락상에 불과합니다. 종교적 인간의 신지식으로 하나님을 마음대로 상상하며 인간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을 가지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은 음란 비디오를 보거나 음란 만화를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하고 음란하다고 할 때 그 기준은 십자가이지 음란한 만화나 비디오가 아닙니다. 때문에 음란 비디오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음란 비디오를 본 사람보다 깨끗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보지 않거나 보거나 그 마음속에 음란한 생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 12:39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즉 요나의 표적은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신지식은 이미 하나님을 인간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착하고 열심히 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상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인간이 착하게 생각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직 '죄'라는 말 한마디로 현 세상을 판단해 버립니다. 따라서 인간의 신지식은 여기에 거부하게 되고 결국 죄를 얘기하는 자에 대한 핍박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 속에서 발생하는 십자가이고, 지금도 역시 요나의 표적만 얘기하는 것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을 볼 때 악하고 음란한 시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속의 교회 역시 '십자가 지신 주님만 사랑합시다'는 말을 싫어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우기면서 교회를 사랑하지 말고 주님만 사랑하자는 사람을 향해서 압박을 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면 그곳이 곧 교회입니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회란 목사가 있고, 예배당이 있고, 십자가가 붙어 있고, 성가대가 있으며, 많은 조직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교회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목사 없는 교회, 예배당 없고 아무 조직도 없고 아무 일도 안하는 교회를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세 사람만 모여서 내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이면, 즉 주님의 십자가만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모인다면 그곳이 교회 되는 것을 거부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내 소유로서의 교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악하고 음란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종교적 인간의 신지식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앎이 아니라면 우린 스스로에게 속아서 헛된 인생 길을 걸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9절에 보면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11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구절을 볼 때 현대 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신지식에서 나온 하나님은 인간을 돕고 인간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참고 인내하시고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멸절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9,11절을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의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 스스로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자기들이 뭔가 열심히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시고 복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교회 편도 아니고 목사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편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도,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일에 이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귀에 거슬려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선택했다는 말이 듣기 싫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당한다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계획을 세우고 인간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멋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지 이용당하는 도구라고 할 때 인간의 자존심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만 하나님이 쓰시는 일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나를 충분히 이용하실 수 있도록 나를 맡기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태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나서서 '하나님 이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우리를 이용하시는 하나님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다같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1,2절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고 합니다. 거룩한 백성이라고 칭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 이름으로 맹세하고 하나님을 부르는 그들을 4절에 보면 완악하고 목의 힘줄은 무쇠요 이마는 놋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완악함으로 뭉쳐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완악함을 부숴 버리고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6절에서의 새 일이라는 것도 인간의 완악함을 부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줄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아파도 괜찮고 무시당해도 괜찮고 욕먹어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버린 분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단지 내가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그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뭔가를 할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 편에서 여러분의 가정에 무슨 일이 있도록 해서 하나님의 일에 이용하실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사건을 통해서 이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때 그 일에 순종하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이 일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설치겠습니까? 때문에 목사가 교회에서 참된 신자를 찾기 위해서는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웃으며 살아가는 분이 누군가를 보면 됩니다. 비록 어려움으로 둘러 쌓여 있지만, 한숨과 염려로 지새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고 주님 보시기에 최고의 미음의 소유자입니다. 은석교회에 이런 분이 보이시거든 고개를 숙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그분이야말로 은석교회의 진짜 목사입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만 모여야 합니다. 서로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내세우면 내 하나님을 자랑하게 됩니다. 돈을 벌게 하고, 자식 잘되게 한 내 하나님을 자랑할 때 결국 경쟁과 자랑만 있는 가짜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이득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일에 쓰여질 때 기쁘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낮은 자리로 쳐박힌다 할지라도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만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자이기 바랍니다.
악 인 (사 48:12-22)
9806102480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예언하였느뇨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갱이 같아서 그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선파하여 들리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로 목마르지 않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로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은 인간 편에서 인간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점을 여러분이 믿으신다면 당장 있어야 할 작업은 내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불렀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편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내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 역시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 하나님을 내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높일 수 있을까?' 오직 이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에 매어 사는 것은 신자아닌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행동입니다.
신자의 할 일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좋은 일도 돈이 있어야 하고 건강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돈도 없고 건강도 없으면 '불우 이웃'이라고 해서 오히려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평생토록 좋은 일은 한번도 못해보고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보여주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뭔가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돈과 권력 등 세상의 시각으로 축복의 기준을 삼아버리면 결국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돈, 건강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신자의 성공은 소유가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 편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여주는 신자 역시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때 죄가 무엇인가가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악인'입니다. 악인이란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왜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미워하고 사기치고 거짓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본성이 여러 가지 죄의 열매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22절).
현재의 위치에서 보다 더 높아지기를 원하고, 현재의 환경에서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그 마음에 만족이 있겠습니까? 만족이 없는 마음에 평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불만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를 높이는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신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2,13절에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의 뜻은 '야곱아 이스라엘아 나는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든 여호와다 그것을 알리라고 너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자가 할 일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것쯤이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이라는 것은 말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악인에게는 없습니다. 악인은 피조물의 자세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신의 위치에서 살아갑니다. 피조물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에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가난하게 살아라'고 하신다면 '예'하고 불만 없이 순종하는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은 인정하는데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은 도외시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를 신앙이 아닌 길로 가게하고 교회를 십자가의 길이 아닌 길로 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교회가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라고 하면 '맞다'고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라고 하면 '맞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주신대로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하면 표정이 이상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라'는 말은 자기 욕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부정해 버리고,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부정해 버립니다. 현재의 환경과 위치에서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더 높아지고 더 나아지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말을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모두가 싫어하고 외면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그 말을 해야 할 사람들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주어지는 것도 이 삶을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능력은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7절에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환경과 삶을 우리 쪽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할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하신 그 길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도 가르쳐주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 길에서 성령이 가르치시는 대로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할 일은 뭡니까? 순종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멋있게 해보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또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할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우린 단지 인도 받은 길에서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신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8,19절에서 말하기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갱이 같아서 그 이름이 네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만 했다면 평강이 강 같았을 것이고,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고, 자손이 모래 같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순종치 못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복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버렸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복과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뭔가를 해서 복을 받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순종치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순종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행할 길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예수님은 불평하나 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 마지막이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예수님께로 모두 흡수되었습니다. 강과 같은 평강, 바다 물결 같은 의, 끊어지지 아니하는 이름, 이 모든 복은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법을 지킨다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있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하고, 아직도 자신이 스스로 뭔가 지켜서 복으로 나아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악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자신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져야 행동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보상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이 신자로 하여금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되 어떤 보상도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롬 13:8-10절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살인하지 않았다, 간음하지 않았다, 도적질하지 않았다, 주일 지켰다, 이런 것으로 법을 지켰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법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법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신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법이기 때문에 하는 것은 다만 규칙을 지키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신자는 법을 지키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삽니다. 사랑으로 살아갈 때 자연히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일 수 없습니다. 교회의 봉사 역시 법이 아니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봉사를 하면서 어떤 이득을 노리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봉사를 이용한 탐욕에 지나지 않습니다. 봉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은혜 받은 자로서 나누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자로서 헌금하기 때문에 헌금이 봉사가 되고, 은혜 받은 자로서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가 봉사가 됩니다. 그래서 봉사는 '누구누구 하세요'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누구누구 하라고 강요하게 되면 봉사가 아니라 억지가 되버립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지명하여 시키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청소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더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청소를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회를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청소하면서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그 마음속에서 자신의 사랑 없음을 확인하라고 청소를 시킵니다. 청소하는 것을 하찮은 일로 여겨버리고 자신에게 더 필요한 일을 앞에 둘 때 내 마음이 낮은 자리에 있지 못함을 확인하시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모이는 장소를 깨끗이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을 배우시라고 청소를 시킵니다.
악인은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 일하고, 남의 눈 때문에 할 수 없이 하고 대가를 기대하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물을 주시고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원하신 것은 그들이 받은 은혜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모두 예수님의 은혜로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받은 은혜를 내어 보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그 사랑을 내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와도 주일성수라는 법을 지키기 위해서 나온다면 그것은 법 때문에 나오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자발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들에게서 신자의 자세가 보입니까 아니면 악인의 모습이 보입니까? 사랑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고 자유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는 평강이 있습니다. 법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법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과 불안감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으로 살 때 그 사랑은 여러분을 평강으로 의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이름이 주어지는 복된 자리로 인도할 것입니다. 악인이 아닌 신자로 살아가고 사랑으로 주님과 형제를 섬기면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일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종의 임무 (사 49:1-7)
9806172581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육으로 난 사람과 영으로 난 사람, 이렇게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구분을 편하게 신자와 불신자로 생각합니다. 즉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라고 하는 단체의 가입 여부로서 육과 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이란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틀과 구조를 그대로 지닌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죄인의 인간 구조를 벗은 채 살아갑니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생각과 하늘의 틀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육으로 난 인간의 존재 의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에게 모든 의미를 두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 결과 자신의 마음의 소원에 의해서 모든 행동이 연출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으로 난 인간입니다.
육으로 난 인간과 영으로 난 인간은 행동에 의해서 구분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인간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행함으로서 구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행위는 모두가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다면 아무리 고상하고 거룩한 행위를 나타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의 모습은 아니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회의 관습에 의해서 종교생활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특별한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행동을 스스로 이룩해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얼굴에는 항상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고 하고, 말도 고상하고 점잖은 말을 골라서 하려고 하고, 화가 나도 억지로 참으면서 웃음을 띄우는 그런 행동을 연출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고, 사람들로부터는 뭔가 다르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인품이나 성격, 얼굴 표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느냐가 하나님의 관심일 뿐입니다. 평소에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면서 자기의 현재의 처지와 환경에 대해서 감사하고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대한 감사와 은혜가 아니라 나쁜 일이 있을 때에도 감사와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으로 난자와의 차이점입니다.
육으로 난 자는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 때문에 감사합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원망합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울면서 슬픈 일에 빠진 그런 일에 자기에게 발생한 것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그러나 영으로 난 자는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이것은 나쁜 일이 주어질 때 증명됩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비록 눈물은 나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슬픈 일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합니다. 그리고 슬픈 일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슬픈 일이 극복되어집니다. 즉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기의 현 처지를 비관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영으로 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단순한 윤리나 도덕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은 자신의 현재 처지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환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을 뜻합니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 욕망과 포부를 이루는 것이 커다란 목표이고 삶의 목적이겠지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신자라고 할 것 같으면 자기 포부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어떠한 존재이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주님께서 어떤 고초와 희생을 치러야 했던가를 자기 마음속에 더 크게 부각시키며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심 받은 환경과 처지는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악조건이었습니다. 그 악조건 속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만 앞세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자꾸 자신에게 큰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세상에 보냄 받은 의미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이루는 데 모든 힘을 낭비하는 육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곧 사라질 안개 같은 것이고 흙으로 돌아갈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높고 귀한 신분으로 세상으로 살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산다고 해도 그 기간은 70, 80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뜻에 의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보냄 받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영으로 난 사람이고 그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이 곧 여호와의 종입니다.
오늘 본문에 '종'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3절에 보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킨 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종은 오직 여호와가 시킨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종이란 누구 눈치를 보며 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누구의 종인가가 드러납니다. 만약 인간의 눈치를 보고 인간이 시킨 대로 움직인다면 그는 인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목사의 눈치를 보며 목사가 시킨 대로 움직인다면 그는 목사의 종입니다. 목사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며 살지만 장로 눈치보고, 교인들 눈치 보면서 목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에만 급급하다면 그는 인간의 종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을 아무런 생각 없이 쉽게 내뱉습니다. 목사들이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을 많이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종을 잘 대접하라고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서 하나님께 쓰인 사람들이 어떤 처지와 환경 속에서 살다가 죽었는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과연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여호와의 종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까? 이사야는 냉대와 배척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드러냈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은 백성들의 분노 속에 멸시와 배척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종의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대우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호와라는 배경을 이용해서 종으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존귀함을 받기보다는 멸시받기 십상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가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기분 상하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멸시를 받고 배척을 받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중단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헛된 일처럼 보인다고 해도 계속 전해야 합니다. 4절에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을 전한다고 할 때 가지는 바램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고 내 말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대해서 배척을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데도 계속 전해야 하나?'라는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결론은 그래도 전해라는 것입니다. 종은 전할뿐입니다. 내 말을 받아준다 받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100번 전했는데 100번 욕먹고 배척을 받는다고 해도 전해야 합니다. 종은 전할뿐이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결과는 여호와의 손에 있기 때문에 종은 단지 전할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과까지 여러분의 손으로 이루어 보려는 유혹을 버려야 합니다.
7절에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스라엘에 속한 자로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7절에 나온 대로 멸시를 당하는 자, 미움을 받는 자, 종이된 자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종이 이스라엘 속에서 찾은 것은 하나님이 택한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닌 자였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자기가 보기에 좋은 사람,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닌 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약자의 모습입니다. 멸시와 미움을 당하고 종된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들과 함께 약자로 대우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약자들, 병들고 가난하고 죄인으로 멸시받는 사람들만 가까이 하심으로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예수님도 함께 멸시받고 배척받은 것 같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지닌 사람을 모아서 구속하시는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하나님의 사람을 찾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 즉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고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종이라고 인정하지 마시고 그 사람이 누구를 찾기 위해서 목사의 자리에 있는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참된 이스라엘에 속한 자는 약자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누가 약자로 살아가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강자를 찾고 강자에게 가까이 하려는 것은 자신 역시 세상에서 강자로 남고 싶어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목사라하나 여호와의 종이 아니고 사단의 종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1절에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미의 복중에서부터 부르셨습니다. 이유는 세상에서 존귀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종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종은 주인에게 받은 임무가 있습니다. 참된 이스라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부터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약자를 찾기 위해서는 부름 받은 사람부터 약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종은 복음을 이용해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습니다.
2절에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여호와의 종의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종을 화살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칼은 자르는 것이고 화살은 쏘는 것입니다. 결국 종은 세상을 쏘기 위해서, 그 입은 세상을 자르기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담 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을 자르고 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세상을 쏠 때 세상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자를 찾는 자는 함께 약자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내가 이 땅에 보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여호와의 종입니다.
세상과 합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강자를 좋아하고 강자 되고자 하는 세상에서 함께 강자 되기 위해서 강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부름 받은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중에서 부르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이스라엘을 찾는 것, 이 일을 잊지 마십시오. 찾기 위해서 전도하고 돌아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가 보냄 받은 자리입니다. 보냄 받은 자리에서 보냄 받은 종의 할 일을 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전능자 (사 49:22-26)
9806242682
"나 주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열방을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호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전지 전능이란 말에는 '불가능이 없는 초월적인 힘'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에도 역시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능력을 가진 신이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잘못된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이 자기를 위해서 쓰여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인간의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고 할 때 일단 요구되는 조건은 세상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기적같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전지전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신자들이 자기의 삶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구하는 것은 전지전능을 값싸게 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돈문제는 돈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복권을 사서 당첨을 위해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구한다고 합시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남에게 공짜로 몇억을 주는 일도 돈많은 사람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 못하고 권력으로도 못하고 지식으로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의 세력에 붙들린 우리를 구출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내부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누군가가 개입해서 끄집어 내어줄 때 가능한 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우리를 붙들고 있는 죄의 세력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출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용사, 승리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들은 우리를 사로잡아간 세력을 가리킵니다. 또 25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는 말씀을 보면 용사의 손에 빼앗긴 것을 다시 빼앗아 내고, 승리자에게 사로잡혀 간 것을 다시 건져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용사와 승리자를 대적하실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이 싸우신 결과로 발생하는 것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사의 손에서 빼앗아 오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항상 세상의 힘앞에서는 포기하고 낙심하며 살았던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신자들의 문제는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자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이 있어야 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나에게 힘이 없다는 사실에 더 실망을 해 버립니다. 힘을 원하는데 힘이 없을 때 사람의 마음은 조급해지고 그 조급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기도의 응답을 빨리 받는 방법이라는 것도 가르친다고 합니다. 소위 급행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조급증을 이용한 사단의 장난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힘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힘과 권력도 이기시는 분입니다. 신자는 이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세상의 힘을 초월하시고 승리하심을 믿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조용히 살아가지 못하고 남들같이 힘을 가지고 힘있는 자로 살아보고 싶어서 그 욕심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자기 계획과 자기 고집을 앞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힘으로 살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힘되는 것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힘없이 보이는 자리에서라도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에서 건짐 받고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힘없는 자리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22,23절에 "나 주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열방을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호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힘으로 약자를 누르고 정복했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무시하고 멸시했던 힘없는 자들 앞에 엎드려 절하고 티끌을 핥을 때가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신자는 지금은 비록 힘없는 자로, 때로는 무시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느긋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받고 주시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없는 것을 받아보겠다고 조급해하면서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것이 답답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답답하다는 것은 내 속에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을 바라는 욕구는 있는데 그것이 내 소원대로 채워지지 않으니까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은 미움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종도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힘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마지막때 그 힘이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합시다. 조급해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바라보면서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도우시는 여호와 (사 50:1-11)
9807012783
인간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알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속는다거나 믿었다가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입니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눈을 보고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이고 대충이지 깊은 속까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인간관계는 행위를 기준으로 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행위를 통해서 마음을 짐작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라는 것은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고 흉내낼 수 있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위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위선 또는 가식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행동으로 판단할 수밖에는 없지만 단 하나 신앙만큼은 행위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행위는 어느 누구라도 모방할 수 있고 꾸밀 수가 있습니다. 만약 행위로서 신앙을 판단한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앙이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마 목사일 것입니다. 항상 성경책을 가까이 하고 있고, 새벽마다 기도하고, 인자하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을 대하는 목사들을 보고 누가 감히 신앙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장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목사의 이러한 행위를 과연 다른 사람들이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입니까? 충분히 흉내내고 꾸밀 수가 있습니다. 사기꾼도 얼마든지 목사처럼 흉내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교회의 목사는 목사를 가장한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현 교회의 잘못은 신앙의 기준을 행위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사가 신앙적 행위와 비신앙적 행위를 구분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인들을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목사가 신앙적 행위와 비신앙적 행위를 구분하여 가르침으로서 교인들은 신앙적 행위는 부지런히 행하고, 비신앙적 행위는 삼가함으로서 스스로 신자되려고 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의 대다수가 모양만 목사이고 모양만 신자인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되버립니다. 행위란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신자는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마음의 법이 되어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기 때문에 어떤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하면서 자신이 잘못되어 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마음의 법이 되어 있는 사람이고 언젠가는 잘못이라고 느끼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것은 하지 마세요'라고 해버리면 교회 안에서의 자기 체면과 위신 그리고 신자답다는 칭찬을 기대하는 욕심 등이 작용해서 의도적으로 행동을 자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하면서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안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잘못된 행동을 안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이 법이 되어 산다는 것이 기쁘신 것입니다. 뭔가 잘못된 일을 하면 '이렇게 해서는 하나님께 기쁨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택함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돌아올 자인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 보낸 이혼서가 어디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고 합니다. 구원은 어딘가로부터 빼내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빼내주는 곳이 어디냐면 우리가 팔려있던 세력으로부터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다같이 죄에 팔린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절에서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라고 한 말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죄에 팔려 있었기 때문에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죄에 팔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다시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팔린 경험이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A란 사람에게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개가 B란 사람이 주는 음식이 너무 맛이 있어서 그 사람의 집으로 가버립니다. 주인이 판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맛있는 음식에 빠져서 주인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1절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A라는 주인이 와서 아무리 개이름을 불러도 이미 맛있는 음식에 빠진 개는 주인의 음성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 개를 원래 주인의 집으로 돌려놓게 하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택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B란 사람의 개중에서 골라서 끄집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A란 사람의 것이었는데 맛있는 것에 팔려간 개를 가리켜서 선택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는데 죄에 팔려서 마귀에게 붙들린 자를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내셔서 그 음성을 듣고 따라오는 사람을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그분이 우리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 값을 치렀는데 그것이 곧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진짜 신자인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택한 자는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계신 자리로 돌아가면서 '이것은 내 의지로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결과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끌어당길 때 끌려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스스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결코 선택받은 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신 결과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교회에 오는 것까지도 자기 믿음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린 오히려 죄를 따라가는 자입니다. 항상 죄에 팔려 가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한번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서 앞으로는 죄에 팔려가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는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합니다. 문앞에 엎드려서 기다리는 것이 죄입니다. 우린 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교회에 온다면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에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 몸을 위해서 죄와 타협하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4,5절에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깨우치시고 열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는데 그런 자신의 처지를 바르게 아는 사람 같으면 과연 '내가 교회 왔고' '내가 기도했고' '내가 성경 봤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내가 했다'고 하는 사람은, 죄에 팔린 자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일을 모른 사람이기 때문에 택한 자가 아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자는 죄에 팔려 있던 자기의 처지를 압니다. 그리고 주님이 찾아오셔서 자기 생명으로 값을 치르고 그 자리에서 빼내주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신자는 자신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아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또 다시 죄에 팔린다고 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죄에 팔리는 자이면서도 오늘 이렇게 교회로 모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무나 끌어 모아서 교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온 자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몸을 위해 처세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 처세술로 살아갑니다. 아이들까지도 처세를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뭔가 부탁을 할 때 아양을 떨고 애교를 부립니다. 그것도 처세술입니다.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처세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처세술은 꼭 필요합니다. 신자 역시 처세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삽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까지 처세술을 발휘합니다. 교회에서 자기 자리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 목사에게 잘보이려 하고 교인들에게 인심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런 모든 것이 처세술입니다. 처세술은 자기 방어의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신자에게 이런 처세술이 필요한 것입니까?
6절을 보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과연 처세술이 필요했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방어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지키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때리면 맞고 침뱉으면 얼굴을 피하지 않고 욕하면 욕먹겠다고 하신 예수님께 처세술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결국 오늘날 신자들이 처세술을 내민다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뒤를 따라갈 때 자기를 방어하면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앞서 가시면서 우리에게 날아오는 돌과 욕과 침을 대신 받고 막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역시 주님이 당하신 것을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깨달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7절에 주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은 우리로 하여금 수치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게 해주시는 도움입니다.
하나님께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처세술로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린 사람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께 맡기고 삽니다. 죄에 팔린 나를 빼내시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값으로 치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그 은혜만 자랑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여러분을 담대하게 할 것이고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어려움에도 두렵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의를 아는 자 (사 51:1-8)
9807082884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사람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특히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 대한 실수와 잘못은 위신과 체면에 대한 손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중시한 나머지 '어쩔 수 없었다' '본의가 아니었다'는 등등의 말로서 그 책임을 조금이나마 벗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습성은 신앙 속에서도 그대로 보여집니다. 즉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오는 불안감과 낙심이라는 심리적인 압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충실하지 못한 책임을 주위 환경이나 인물 등 여러 가지 여건이 부실한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돈만 많으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 텐데' '자식 걱정만 없으면 열심히 해 볼텐데'하면서 마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원인이 모두 외부 환경에 있는 것처럼 얘기합니다.
왜 이런 풍조나 습성이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앙이라는 것까지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대해서 하나님께 죄송스런 마음을 가지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체면 손상을 염두에 두고, 혹 징벌로 인해서 가정이나 개인의 문제에 불이익이 올 것에 대한 걱정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 안되고 있는 사람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라면 항상 주님께서 죽으신 십자가의 현장 앞에서 자신의 탐욕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의 탐욕 때문이지 결코 주위 환경이나 여건 때문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것이 환경 때문이 아니라 탐욕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아무리 나쁜 환경과 상황 속에 처한다 할지라도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대해서 불평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이런 환경을 내 앞에 두셨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자기 탐욕으로만 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환경의 개선에만 관심을 두게 될 것이고 결국 땅에서 천국을 버리고 사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내용 중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보면 예수님은 신자가 고생스런 세상을 빨리 떠나서 편한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고생을 하지 않고 사느냐에 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신자가 악에 빠지지 않고 보전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인데, 이 말을 악을 행하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인간은 이미 악 속에 살아갑니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움직이는 것, 모든 것을 악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악이 있음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편에서 자기 속에 있는 악에 대한 인식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악이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내 밖에 악이 있게 하십니다. 즉 내 밖의 악을 통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이 내 속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서로 비교함으로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내 속에 악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기가 쉽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역시 자기의 악에 대해서 무감각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속의 악이 꿈틀거리고 그 정체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밖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여러 가지 여건들을 만들어 놓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걱정 근심으로 가득한 채 평소의 신앙 생활에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즉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만 믿었던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것만 골라서 믿었다는 것이 들통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지 않고 사는 것이 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 이런 악이 내 속에 있음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살아갑니다. 내 딴에는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성경도 많이 알고 있고, 선한 일도 많이 하면서 '나는 믿음이 있다'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 착각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깨어지고 믿음 없음이 발각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평소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아이가 아파서 수술비 100만원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때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 100만원일 것입니다. 100만원이 없어서 아이가 죽을 수도 있는 판국에 '나는 하나님만 믿는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결국 '수술비 100만원을 주실 것을 믿는다'는 식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신자였더라면 그러한 일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었구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만 돈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도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을 의지하고 살았음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악이 드러나게 할 사건이 없으면 계속해서 믿음의 환상과 착각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결국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악을 행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악에 속해 있는 실체에 대해서 깨닫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나의 악을 발견하는 것이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왕 악에 속해 있으니까 마음놓고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도 인생 속에서 세상을 의지하게 되는 상황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이 바로 나의 악의 실체이고 나의 본모습임을 깨닫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죄에 팔린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보내서 그 생명을 값으로 주고 우리를 악에서 빼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악에서 빼냈다는 것은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악의 영향력, 즉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주님으로 인해서 생명의 세력 안에서 살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죄에 팔린자였음을 발견하고 오직 주님께만 모든 희망을 걸고 사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신다면 의인의 자리에서 찾으실 것으로 오해합니다. 무엇 때문에 더러운 죄인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죄인의 자리에 있습니다. '나는 죄에 팔린자입니다'라는 죄인의 자리에서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신 그분만 의지하는 분이 참 신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악을 깨닫고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하는 길로 인생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의 환경과 처지를 생각하면서 한숨짓고 원망하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희망을 둔다는 뜻입니다. 내가 죄에 팔린자임을 아는 사람은 자기에게 의가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의에 생명의 희망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여호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습니다. 자기에게서는 생명의 근거가 되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자기에게는 의 없음을 알고 의를 좇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만을 기억합니다'라는 말로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때 그 진실성의 여부는 '자기 행위에 의 없음을 아는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어떤 행위도, 그것이 거룩하게 보이는 종교적인 행위라고 할지라도 결코 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자랑하지 않을 때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마음에 두고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의가 내 생명임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주님의 의를 생명으로 영접했다면 자동적으로 내 안에 있는 내 의는 밀려나고 사라져야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는 말씀도 내가 건짐 받은 자리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의 자리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자리에서 건짐 받은 것이 아니라 추하고 더러운 자리에서, 추하고 더러운 자로 살다가 건짐 받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의를 알고 의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죄에 팔린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신자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죄속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그분의 의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부담을 느끼고 신앙생활에 부담을 가지는 것입니까? 신자가 신앙에 부담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이 되는 일을 해야 신자답다는 생각에 빠져있기 때문에 선을 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의를 알고 의를 좇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부어주기 위해서 일하고 계심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스스로 짐을 지면서 살게 됩니다.
의가 우리의 생명임을 아십니까? 우리 속에 외부에서 의가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로운 자로 여김 받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초청되었음을 아십니까? 이것을 아신다면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어진 의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의가 나를 주장하기를 구하면서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해서 일하시는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언제나 의를 바라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죄에 팔린자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악의 정체를 발견하게 하시고 의없는 자였음을 날마다 깨닫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과 고생의 자리로 밀어붙이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의를 알고 의를 좇는 사람은 세상의 것이 하찮게 보여집니다. 영생이 가장 귀함을 발견한 사람에게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 하찮게 보여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영생을 말하면서 영생의 가치에 대해서는 도외시해 버리기 때문에 우선 당장 필요한 세상 것들을 더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주어지지 않거나 나에게서 사라지는 사건들이 있을 때 흔들리고 낙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3절에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황폐한 곳을 위로하시는데 광야를 에덴으로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으로 만들어서 위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를 에덴 같이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같이 하십니다. 광야를 살면서 에덴을 사는 것처럼 하시고 사막을 걸어가면서 여호와의 동산을 걸어가는 것처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이 위로는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위로는 얻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마음에 두지 않고 내 탐욕과 야심으로 살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4-6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가 세상에 퍼지고 그 의가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때 의를 알고 의를 좇았던 자들만이 생명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나는 의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의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내 인생을 때로 힘들게도 하셨고 어렵게도 만드셨는데 나는 의를 알게 되는 것보다는 내 생활이 편해지는 것에만 마음두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의 악의 정체였음을 깨닫고 다시금 의가 없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의에 다스림 받고 살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2절에서 혈혈단신으로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서 창성케 하셨다는 것도 하나님의 의를 알게 하시고 그 의를 널리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내가 죄인임을 알 때 은혜를 기억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 때 은혜로 받고 은혜로 바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신에게 뭐가 있고 없고가 그렇게 큰 문젯거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의를 아는 자의 평안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7절 말씀처럼 그 누구의 비방도 훼방도 어떤 환경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 (사 51:9-16)
9807152985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 양식이 핍절하지도 아니하리라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
사람에게는 마음이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단순치 못하고 아주 복잡 미묘해서 자기의 마음조차도 자신이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음은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사랑, 탐욕, 두려움 등등 여러 가지의 감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란 그 여러 가지의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보통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은데 그것은 큰 실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만큼 죄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죄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습니다. 가령 구약에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렇게 행동에 대한 규제를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미움도 살인이라고 하시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시면서 마음까지도 죄로 규정하셨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행동에 대한 자제만 하면 죄에 대해서 자유로울 줄 알았던 사람들은 마음을 규제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결국 죄로부터 영원토록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의 본질을 발견해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행동은 스스로 자제할 수 있고 자신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움직여질 수 있지만 마음만큼은 인간의 규제를 벗어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무서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무서운 죄의 심각성을 도외시 해버리고 마음에 자기를 맡긴 채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조그마한 윤리적 도덕적인 흔적을 발견함으로서 아직 신자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죄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안도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죄는 곧 내 속에 있음을 잊어버리는 큰 실수입니다.
인간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이상 죄의 영향력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정복하고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이상 인간은 그 누구도 죄를 이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애당초 인간의 마음에는 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단순한 마음이었습니다. 미움도 몰랐고 시기도 몰랐고 탐욕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인간은 '나'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나'를 알고부터는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움을 알게 되었고 질투 분노 등등 현 인간적 감정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인간적 감정들은 모두가 '나'를 중심으로 해서 발생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것 하나 '나'와 관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에서 '두려움'이란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두려움은 태초의 인간들은 당연히 알지 못했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한 후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맨처음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집니다. 창 3:10절에 보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기가 두려워서 숨었다라고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복잡미묘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찾으실 때 숨어버린 아담의 두려움도 복잡 미묘한 마음에 따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까? 창 3:10절에서는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말합니다. 즉 두려움의 동기는 자신이 벗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이 벗고 있던 것은 창조될 때부터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는 자신의 벗었음에 대해서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후 맨처음의 반응은 자신이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벗었음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진 것은 자신의 실체가 노출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고,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해 입은 것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행동입니다. 즉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최초로 보인 행동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부끄러운 일을 한 것에 대한 인간의 마음이고 숨어버린 것은 하나님의 추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행동인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두려움을 가질 때는 뭔가 신자답지 못하다는 일을 했을 때입니다. 즉 신자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의 징벌을 생각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에서의 두려움입니다. 결국 두려움이라는 것도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발생되어지는 죄의 흔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두려움의 대상은 필히 자신보다 힘이 강한 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지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결국 두려움은 힘에 대한 인간의 굴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린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자는 힘의 세상에 살면서 힘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먼저 9절에 보면 '용'이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용은 지금까지 실제로 보지 못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상상하는 용은 하나같이 강하고 용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용은 곧 영웅을 상징합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용'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용과 같은 자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약자는 강자에 의해서 굴복 당하고 다스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약자는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강자에게 굴복하고 아부해야 합니다.
강한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용을 주가 찌르고 용에게 붙들려 있는 택한 백성을 건져내시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주님을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을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주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음이 있게 하시고 주님을 알게 하셔서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교회로 나오게 하시고 믿음이 있게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신자되게 하신 그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우리를 붙들고 있던 용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용과의 전쟁에서 용을 찌르시고 승리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여호와의 전쟁'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전리품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곧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으로서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과 용의 전쟁, 즉 '여호와의 전쟁'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은 용의 손아귀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이 용과 싸우시고 용을 찌르시므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용은 힘의 존재입니다. 인간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고 힘에 대해서 탐욕을 갖게 하고 힘을 원하며 살게 합니다. 서로가 힘을 원하다보니 인간세계는 싸움과 미움과 시기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속에서 구원받은 신자라면 일단 힘의 세상에서 빠져나온 것이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여전히 힘을 소유하기를 원하면서 힘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을 과연 구원받은 신자라고 할 수 있고,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2절에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 심판 속에서 택한 자를 건지시기 위해서 하신 일, 이 모든 일들이 신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지 결코 세상 것이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위로로 삼고 있습니까? 혹 세상 것을 위로로 삼는 것은 아닙니까? 돈이 있어야 안심하고 자식이 잘돼야 고생한 것에 대한 위로가 되고 성공한 것이 보람이고 착한 남편이 든든한 힘이라면 신자의 위로가 되시는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모르고 죽을 사람들 풀같이 될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즉 힘 가진 자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잊고 살아가는 삶의 결과입니다. 15절에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고 바다의 물결까지도 마음대로 흉용케 할 수 있는 분이신데, 왜 그 이름을 잊어버리고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13절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자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있느냐"고 하십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세상을 움직이시는 여호와는 왜 잊어버리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고 죽을 인생에 지나지 않는 인간을 두려워하냐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입니다. 그리고 택하신 자가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하신 일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에서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 성공한 인생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힘을 가진 자로 사느냐보다는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여주는 신자로 살아가느냐에 더 충실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세상을 두려워하고 힘있는 자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이 과연 만군의 여호와를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자로서 당당하지 못하고 힘과 권세 앞에서 두려움을 나타낸다면 그순간 만군의 여호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죽을 인간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죽이시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강한 힘이 압제할 수 있는 것은 몸이지 영혼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보다는 영혼에 더 마음을 두고 산다면 힘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아직까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고, 힘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린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힘과 권세를 가진 자에 대해서는 굴복하고 엎드리고 아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라고 할지라도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잊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목사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지지 마십시오. 목사 역시 죽어야 할 인간이고 풀 같은 존재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가에 대한 걱정, 돈에 대한 걱정, 경제에 대한 걱정, 이러한 모든 것이 결국은 힘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임을 아십시오. 힘이 되는 세상 것이 자기에게서 사라지고 줄어들수록 두려움을 느끼고 걱정하는 것은 힘으로 사는 세상에 갇혀 있는 인간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이제 우리들 속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으로 인해서 주님의 일을 막아 버립니다. 주님은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시는데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의 따돌림을 두려워한 나머지 복음을 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 주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두려워하십니까? 신자는 내 속의 예수님을 마음껏 드러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눈치를 보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마음놓고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 뭔가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있을 때 내가 여호와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면서 두려움이 없는 신자로서 마음껏 주님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깰지어다 (사 51:17-23)
9807223086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하였도다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너의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당하였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랴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네 주 여호와, 그 백성을 신원하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너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곤고케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찌기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의 앞에 네가 네 허리를 펴서 땅 같게, 거리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본문 17절에 보면 '예루살렘아 깰지어다 깰지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깰지어다'는 말은 한마디로 '정신차려라'는 의미를 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 한마디로 이스라엘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은 심정으로 오늘 우리에게 외쳐지고 있는 말씀임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깰지어다는 말은 잠자고 있는 상태의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에게 '깰지어다'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잠자는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가셔서 기도하실 때 같이 간 제자였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마 26:28)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의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과 같은 관심을 제자들도 가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겟세마네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온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있는 것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란 예수님의 마음에 일치되는 기도가 진짜 기도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의 마음과 전혀 일치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즉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는 말은 '너희는 나와 전혀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험에 든다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거리도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도 아닌 것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런 상태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다른 마음으로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민들이었던 것입니다. 잠자는 상태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외면해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외면해 버리고 오직 자기 마음에 있는 바를 좇아가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예수님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두고 삽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리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죄에도 심판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죄에 대한 심판에 긴장감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주님의 죽으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어야 할 죽음을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시는 십자가에 대해서 깨달았을 것이고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실 때 여자들이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울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불쌍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능하게 십자가지고 끌려가면서 곧 죽어야 할 운명에 빠진 한 남자가 불쌍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짜 불쌍한 자는 예루살렘의 딸들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장차 올 심판의 재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시급한지를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마지막 심판을 보고 울어야 할 처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문에 울지 않습니다. 그들 마음에는 심판에 대한 긴장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처럼 무엇이 시급한지를 알았습니다. 선지자도 심판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고되어진 심판을 마음에 두고 이스라엘을 바라보니까 그들이 너무 한심하고 답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아 깰지어다'라는 말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로 나오십니까? 예수님이 어떤 마음인지 관심 없고 선지자의 마음에도 관심 없고 심판에 대한 긴장감도 없이 다만 자신의 종교적 욕심에 의해서 교회를 찾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야 할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죄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는 다른 목적도 이유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외에 다른 목적으로 우리를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 마음에 다른 것이 자리하고 있다면 결국 우리는 깨어있는 자가 아니라 잠자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에 대한 긴장감도 심각함도 없이 오히려 심판에 대해서 느긋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살아가는 잠자는 자입니다.
17절에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잔을 마셔 다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비록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죄를 씻고 구원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깨어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심판을 마음에 담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이사야에게는 이스라엘에 해방하여 편안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에게는 하루속히 예루살렘이 정신차려서 성전에서 제대로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십자가와 구원이 아니라 내 한 몸 편하게 사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걱정과 근심과 탄식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세상을 보시고 탄식하고 계신다면 과연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통일되지 못한 것 때문에 탄식하시고 걱정하시겠습니까? 통일이 예수님께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통일이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경제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 예수님께 중요한 문제입니까? 경제가 복음입니까? 내 교회가 부흥되고 예배당 건축하는 것이 예수님께 중요한 문제입니까? 예수님께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를 제대로 증거할 수 있는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오직 죄에 대한 심판에만 마음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왜 망했습니까? 내 나라가 강해지고 복받아서 잘 사는 것만이 그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을 향해서 '깰지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무엇에 대해서 깨어야 합니까?
그것은 좋은 소식, 구원을 가져오는 소식에 눈을 떠야 했던 것입니다. 18절에 "네가 낳은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너의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속에는 지금의 환난과 어려움에서 건질 힘있는 자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즉 구원은 외부에서 주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21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은 구원의 좋은 소식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바벨론을 향해 붓겠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소식을 마음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만 마음에 두고 산다면 비록 포로 되어 있는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 속에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심판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좋은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그분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염려될 것이 뭐겠습니까? 주님을 알게 되었고 죄용서 받았고 천국가게 되었는데 뭐가 부족하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삽니까? 항상 부족을 느끼며 삽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우리 마음에 두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문제보다는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더 관심거리고 중요한 문제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으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자는 상태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서 '깰지어다'라고 외치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마지막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사신다면 그 심판 속에서 구원받고 천국가게 되는 것만으로도 주님을 믿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들이 인생에 중요한 문제로 마음에 자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가 들어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감사가 들어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어있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지막 심판입니다. 심판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실체로 이 땅에 오셔서 피흘리신 주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피에 담겨 있는 구원의 소식이 여러분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자의 모습인 것을 잊지 말고 다시 한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점검하시면서 우리들 마음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다스려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시온의 힘 (사 52:1-2)
9807293087
세상은 힘의 나라입니다. 힘을 기준으로 모든 가치가 판단되며 강자는 유능한 자로 대우받고 약자는 무능한 자로 치부되는 곳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든 일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힘있는 자가 대우받는 세상이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들은 힘을 비축하고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능하고 무시 받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자 하는 것도 결국 그 지식이 힘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잘 키우고자 하는 것도 역시 자식이 잘됨으로서 부모에게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고 크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자 하는 것도 큰 회사라는 것이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힘을 기준으로 비교하고, 힘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가 판단되는 세상에서 힘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힘을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미련하고 바보스런 짓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저는 '세상을 변화시키자'라고 외치면서 이런 저런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마음만 굳게 먹으면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별 것 아닌 세상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입니다.
사 51:9절을 보면 세상을 '용'으로 표현합니다. 용이란 힘의 상징입니다.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힘이라는 사고방식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사단의 사고방식입니다. 힘있는 사람이 최고로 인식되며 힘있는 자만이 사람 행세할 수 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반면에 힘없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된 채 온갖 설움과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이 변화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이 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심으로 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고 해서 세상이 변화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셔야 한 것입니까? 아무리 인간이 윤리적으로 산다고 해도 결국 세상은 힘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윤리도덕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힘을 포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힘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학교 갈 때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을 하고 들어가지만 졸업을 하고 목회를 할 때는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었고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현실은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아니라 유능한 목사를 원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끝까지 바른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무능한 목사라는 지적과 비난과 개의치 않겠다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도 유능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 교회를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인생이 피곤하고 힘든 이유도 경쟁을 해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의 세상에 발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경쟁을 한다는 것은 피곤하고 힘들고 마음 고생이 되는 일입니다. 항상 경쟁자를 의식해야 하고 쉬고 싶어도 경쟁자 때문에 쉬지 못하기 때문에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좋은 것을 소유했을 때 '나는 왜 저 사람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하는가?' '나는 왜 저 사람보다 돈이 없는가?' 이런 생각에 빠진 채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기 때문에 인생이 재미없어지는 것입니다. 남들이 뭘 가지든 말든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내 인생은 이것만큼 가지는 것이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남들처럼 멋있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채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려서 힘들고 피곤하고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절에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라는 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시온은 곧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또는 시온으로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이 곧 예루살렘이고 시온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시온, 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부르는 것은 장차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거할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즉 말을 바꾸어서 말한다면 '영원토록 나와 함께 거할 내 백성들아 깰지어다'라는 의미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다시 한번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시온'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 이것이 신자된 우리들의 인생 목적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들이 인생의 목적지를 분명히 정하지 못하고 썩어질 것에 불과한 세상에서의 인생을 더 소중히 여기고 세상 풍조에 빠진 채 힘있는 사람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잠자고 정신차리지 못한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네 힘을 입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힘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는 힘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결국 세상에서 추구하는 힘이 아닌 다른 힘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입어야 할 힘은 어떤 힘입니까? 시온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시온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과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 힘을 입는다면 그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성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그리고 법궤에는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이 돌판은 모세가 직접 만들어서 하나님께 가지고 간 두 번째 돌판입니다.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서 직접 주셨습니다. 돌판에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말씀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씀을 들고 내려왔을 때 이미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어버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을 만들게 되었는데 모세는 두 번째 돌판을 법궤에 집어 넣어버립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질이 없음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말씀을 다시 준들 결과는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궤에는 속죄일 때마다 제물의 피가 뿌려집니다. 이것은 이제 이스라엘은 스스로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법궤가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힘을 중심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법궤를 중심으로 법궤에 뿌려지는 피의 정신으로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법궤를 믿고 법궤를 의지할 때는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여리고성에서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실력을 의지하고 힘을 중심으로 할 때면 아무리 법궤가 있다고 해도 전쟁에서 실패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이성에서의 패배입니다.
1절에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은혜의 땅은 용서받지 못한 자는 들어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더러운 자이고 은혜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자이지만 그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입을 아름다운 옷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도 역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궤에 뿌려지는 거룩한 피라는 옷입니다. 그 옷이 이스라엘을 은혜의 땅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희생의 피가 이스라엘의 더러움과 모든 죄를 가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 받지 아니한 더러운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땅을 이스라엘은 누군가의 희생 덕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네 힘을 입을지어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라는 말은 법궤에 뿌려지는 피가 곧 힘이고 아름다운 옷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목적지가 시온성이라는 것을 안다면 오직 희생의 피를 힘입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목적지가 시온인 성도들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다같이 힘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힘을 원합니까? 세상에서 유능한 자로 대우받도록 해주는 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옷을 입는 힘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피의 흔적이 있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힘은 우리를 시온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힘이지 세상에서 복받고 잘살게 하시는 힘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힘을 구할 때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 풍조에 마음 뺏기지 않고 우리를 깨끗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힘'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눈에 보이는 세상이라는 현장에서 소유한 것을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지만 신자만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시온성이라는 곳을 마지막 목적지로 하고 성공과 실패를 판단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 시온성에 들어가는 자가 인생의 성공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생을 산다면 세상에서의 성공이 결코 성공이 될 수 없음을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그 약속을 힘으로 삼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의 실체로 주신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럴 때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못 갈 곳이 없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인생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남들이 천하게 본다고 해서 못할 직업이 없고 무시 받는 일이라고 해서 하지 못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체면이나 자존심이란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 힘을 포기하지 못했을 때의 자기 고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은혜로 사는 인생이지 힘으로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은 예수님이고 아름다운 옷도 역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인생은 피곤하지 않고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으로는 아무 힘도 없는 예수님을 내 힘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힘을 의존해서 인생을 살지말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큰 일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살고자 하는 자기 욕심을 정죄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는 분명히 인생의 최고의 성공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힘입고 살아갈 때 그 힘은 세상에서는 별 쓸모 없이 보일지 모르나 마지막 심판과 멸망에서는 여러분을 구출하는 놀라운 힘입니다. 이 힘을 의지하는 자는 자연히 세상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힘보다 더 위대하고 놀라운 시온의 힘을 입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좋은 소식 (사 52:3-10)
980805318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이왕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였었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곧 내니라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지어다 너의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마치 무인도에 표류되어 있다가 지나가는 배에 의해서 겨우 구출되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는 분위기입니다. 사방이 바다로 뒤덮인 외딴섬에 혼자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자기를 구원하러 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너를 구출해 줄 자가 간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기쁜 소식이며 기쁜 소식이란 복음을 말합니다. 즉 좋은 소식은 복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좋은 소식은 듣는 자들에게는 평화가 되고, 구원이 되고, 9절의 말씀대로 기쁜 소식을 발하며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오늘날 사람들은 좋은 소식, 즉 복음의 소식을 듣고도 그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보면 분명 좋은 소식은 즐겁고 기쁜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나는 복음의 소식을 듣고도 그와 같은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분명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좋은 소식을 들어도 기쁘지 않고 싱숭생숭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소식이 듣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준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구원해 준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 보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들으면서도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는 주된 이유는 구원을 단지 자신을 천국 보내준다는 뜻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나오면서부터 예수 믿으면 천국 보내준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에 천국 보내준다는 말에 식상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천국을 가게 되었다면 그것은 어딘가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벗어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가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소식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벗어난다는 것은 '구출'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구원이란 '구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출은 어딘가 갇혀 있는 곳으로부터 빼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고립되어 있는 무인도로부터 벗어나는 감격의 분위기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이왕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였었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갇혀 있던 애굽에서 구출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압박 받던 앗수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그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소식이란 갇혀 있고 붙들려 있는 상태에서 빼내주겠다는 소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소식에 진심으로 기쁨하고 즐거워 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갇혀있고 붙들려 있는 자들입니다. 내가 갇혀 있고 붙들려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만이 그 자리에서 자신을 구출해줄 소식을 기다릴 것이고, 그 소식이 들려질 때 기뻐하고 마음을 평화를 누릴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나는 갇혀있지도 않고 붙들려 있지도 않다.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무리 들려져도 결코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갇혀 있고 붙들려 있는 자신의 처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자유를 잃어버린 채 뭔가에 갇혀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갈 3:22를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참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 속에 살아간다고 믿고 있지만, 성경은 인간을 전혀 다르게 판단합니다. 자유가 아닌 갇힌 자라고 말합니다. 속박 당해 있는 것입니다. 죄에 갇혀 있고 죄에 속박 당해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를 이길 만한 힘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기의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에 붙들려서 끌려가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의지로 살아간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구출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이미 구출되어진 자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구출하신다는 좋은 소식에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인간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돈에 매어 있고, 직장에 매어 있고, 자식에 매어 있고, 체면에 매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고, 직장에서도 싫지마는 상사에게 굽실거리고 잘 보이기 위해서 아부해야 하고, 자식 때문에 자존심 굽히는 일들이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놀러가고 싶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놀러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자유인'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뭔가에 갇히고 붙들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죄에 갇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체를 깨달을 때 비로소 복음이 좋은 소식으로 들려집니다. '내가 구출 받아야 한다'는 의식은 자신이 '갇힌 자'라는 것을 발견한 자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만 좋은 소식이 기쁨이 되고 평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세상에 매인 채 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날마다 돈벌기 위해서만 열심이고 지옥이나 천국은 관심도 두지 않고 그저 내 인생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복음이 마음에 와 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점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을 진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걱정에 매어서 신앙의 문제에는 관심이 멀어지고 돈을 더 원하는 자신에 대해서 미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 마음껏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갇혀 있는 자신의 상태를 미처 발견하지도 못하고 심각하게 여기지도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있습니다. 이 문제점 때문에 좋은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도 하나님과 눈이 마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8절에 "들을지어다 너희 파숫군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봄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시온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서임을 말합니다. 즉 죄에 붙들려 있고, 사단에게 붙들린 채 멸망으로 팔려가야 했던 우리들을 흠없는 어린양의 피로 값주고 사셔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신다고 할 때 누가 가장 그 소식을 기뻐하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이 죄에 팔린 자임을 아는 자들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구출해 주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으로 팔려가야 할 자기 상태를 알고 구원자를 기다렸던 자들이 그 소식에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그들의 눈이 마주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신자는 말씀을 들으면서 뭔가 하나님과 내가 일치되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때문에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자신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가 되고 있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평소 살면서 자신이 무엇에 갇혀 있고, 그런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신자만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됨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 때 그것이 부담이 되고 피하고 싶고 밀쳐 내고 싶은 마음입니까? 만약 후자의 마음이라면 그것은 죄에 갇혀 있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심각함이 없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소식에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뻐할 사람은 죄에 팔린 자신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이고 탕자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가 죄에 팔려간 자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 모으는 것이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을 끌어다가 교인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런 말씀들을 예수님을 믿고 있는 여러분들이 들어야 할 이유가 뭐냐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돈에 매이고 세상에 매여 살아가면서 자신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저 태평하게 자기 사는 것에만 열심들이기 때문입니다. 돈벌기에 열심이고 자식 키우는데만 모든 정성을 쏟아 붓고 살아가면서, 우리 죄를 씻기 위해서 죽음을 당하신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팔려 살았던 자신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하시고, 이런 우리를 속량하시고 구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피흘리신 주님의 사건을 마음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온으로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과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소식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되고 평화가 되고 구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갈 때 여러분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구를 메는 자 (사 52:11-15)
9808123289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생활 환경에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사실은 좀 더 편하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이룩해 보고자 하는 열망 때문입니다. 고생하며 사는 것을 좋아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고, 입고 싶은 옷도 마음껏 입고, 여기저기 마음대로 놀러 다니면서 그야말로 신선처럼 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들의 꿈입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연코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놀기 위해서 돈을 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하고싶은 대로하면서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을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꿈꾸는 천국이란 욕망의 완성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소망하는 모든 욕망이 제공되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인간들이 꿈꾸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천국을 좋아하고, 죽어서라도 이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세의 천국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현세에서라도 자신이 꿈꾸는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현 교회에서는 바로 그러한 천국을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시고 그 집에 들어갈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를 위한 종교이고,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고, 자기를 위한 천국으로 착각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간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나왔다'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 교회에서는 '나왔다'는 개념은 삭제해 버린 채 '간다'라는 것만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의미가 뿌리째 흔들려 버린 것입니다.
내가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는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떠나야 합니다. 천국이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내가 현재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살다가 천국에 가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천국은 약속하지 않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떠날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옛날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구세주를 믿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현재 있는 자리에서 떠나야 하고 나와야 하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떠날지어다' '나올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떠나야 하고 나와야 할 자리는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던 자리입니다. 바벨론은 세상 나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세상으로 종으로 살고 세상에 매어 살았던 그 자리에서 떠나고 나와야 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매어 살았던 자리에서 떠나서 어디로 가야 합니까? 11절에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호와의 기구란 하나님의 법궤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법궤를 메고 가야할 장소는 어디이겠습니까? 법궤가 있어야 할 장소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당연히 시온산을 향해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법궤를 멘 자가 가야할 인생의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은 그냥 가면 안되고 여호와의 법궤를 메고 가야 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것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고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해서 죽어야 할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죄를 면제받고 깨끗한 자로서 하나님의 전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도 결국 세상에서 떠나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그곳으로 예수님의 피를 메고 가는 것,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들은 세상에서 나오고 세상에서 떠나서 하나님이 계시는 시온산을 향해 가고 있는 '여호와의 기구를 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시온산을 향해 가고 있는 신자들이 항상 관심 두어야 할 것은 내가 메고 있는 여호와의 기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세상의 돈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우리들의 직분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에는 전혀 마음 두지 말고 의지하지도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여호와의 기구를 메고 시온산을 향해 떠나는 이스라엘의 행렬입니다.
예수님의 피만 믿으면 되는데 오늘날 믿음은 너무 번잡스러워 졌습니다. 믿음이 아닌 것이 믿음 행세를 하면서 신자들을 교묘하게 미혹하고 있습니다. 신자란 바로 그런 것들을 밀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메고 가기 때문에 피 아닌 것이 피의 행세를 하면서 끼어 들어올 때 가차없이 밀어내는 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알았으니까 그것으로 됐다가 아니라 진리 아닌 것이 진리 행세를 하며 믿음에 끼어 들어올 때 밀쳐 내면서 오직 진리만 남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만 크게 부각될 수 있도록 다른 것은 잘라내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를 말하면서 여전히 돈, 지위, 교회, 이런 것들에 마음을 뺏기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1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종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분이 받들어 높이 들려서 존귀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지금껏 예수님이 높이 들리고 존귀하게 되신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떠받들고 있는 예수님은 십자가지고 우리를 십자가의 현장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모든 고생을 면제해주고 오직 축복만 안겨주는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손을 붙들고 우리를 주님의 인생으로 끌어들이는 예수님은 여전히 천대받고 사람들로부터 밀쳐냄을 당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존귀함을 받고 높이 들림 받는 것은 심판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입니다.
14절에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세상에 온 모습을 보니까 약한자, 천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분이 심판주이고 구세주였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밝히 깨달을 때 15절의 말씀과 같이 열방이 놀랄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신자가 존귀함을 받고 높이 들림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실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오직 그 때를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때를 바라보고 날마다 세상에서 떠나고 나오면서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야 하고 떠나야 할 자로서 과연 나 자신이 얼마나 세상에 대해서 탄식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시온산을 소망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고 살아왔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돈도 시시하게 보이고, 세상에서 잘살고 편하게 사는 모든 것이 헛되게 느껴지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가장 귀하고 크게 보일 때 그 피가 여러분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나라에 있게 할 것입니다.
누가 믿었느뇨 (사 53:1-6)
9808193390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나 교인들이 전도라는 것을 할 때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다면 설교나 전도가 누군가를 믿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더욱 잘 믿도록 하고 큰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설교가 필요하고, 안믿는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서 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설교하고 전도할 때 그 언어는 상대방의 이해를 촉구하기 위해서 구사되어지고 반발을 가져올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스스로 삼가하게 되어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상식적인 생각에 앞서서 과연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외침, 그리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 앞서서 등장하셨던 그분들은 어떤 의도로 설교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정확한 진단아래 설교하고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믿게 해서 자기 백성이 되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다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신 예수님의 활동은 대실패작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에는 능력도 소질도 없는 예수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구약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믿도록 하겠다는 의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믿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다면 백성들 전체로부터 반발을 받고 화를 일으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믿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면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이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구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오심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이지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라는 것도 역시 안믿는 사람을 믿게 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별하는 것이 곧 전도입니다. 구별함으로서 자기 백성된 자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믿게 하겠다'는 것은 결국 성령의 일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성령이 오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자기 백성이란 성령 받을 자로 인침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성령이 오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설교는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서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말을 선포함으로서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 즉 성령 받은 자와 성령 받지 못한 자가 구별되어지도록 하는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남겨진 말씀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누가 심판 받을 자이고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구원받을 자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 남겨진 계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은 자는 들어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로만 가득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어두움의 시대에서는 행동과 성격, 성품 등 외형적인 것을 통해서 믿음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만 이해할 수 있는 계시를 이 땅에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내 백성을 구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그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초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초월하지 못하고 집착해 버릴 때 결국 사람 숫자 늘어가는 것에만 재미와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고 한사람이라도 더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듣기 거북한 말은 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두움의 세상 속에서 구별의 기능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말합니다. '누가 믿었느뇨'라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는 믿도록 하기 위한 마음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이 말을 누가 믿겠는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마음으로 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리 전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마음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전하는 것입니까? 설교하면서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을 것이고 이해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전한다면 참으로 맥빠진 설교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구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믿을 사람이 없다'고 간주하고 주어집니다. 계시를 전해도 믿을 사람이 없는데 왜 계시가 주어집니까? 그것은 계시를 믿을 자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백성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고 믿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이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자질이 주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서 믿도록 하셨다는 의미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고 전제하고 주어진 말씀이라면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말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교회 다니면서 예배에 충실하고 세례 받고 직분 맡으면서 교회에 충실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교인들은 믿음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가운데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여기면서 천국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믿음 아닌 것이 믿음의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마지막때 예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구별되어 나타나는가를 직시하고 과연 오늘 나에게 그 믿음이 보여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에 '누가 믿었느뇨?'라고 말씀한 뒤에 우리의 전한 것의 실체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과연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명색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고, 구세주로 오시고 메시아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구태여 이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오셔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구세주, 메시아는 영웅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영웅이란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흠모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행운과 복이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신의 도움이 아니면 가질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들은 타인에게는 영웅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고 흠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영웅의 주위로 모여들면서 자신의 소망과 꿈을 이루어주기를 바랍니다. 영웅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언제나 영웅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탄생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국가와 나의 가정과 나의 행복한 삶이 그 영웅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단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흠모할만한 영웅적인 모습을 갖춘 목사를 찾고 그 목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자신의 복이 그를 통해서 주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흠모할만한 조건이 없는 목사는 목사로서의 자질이나 능력을 구비하지 못한 자로서 종교인들로부터 거부를 당하고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흠모할 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오셨다면 예수님을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은 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전혀 제공해 줄 수 없는 무능력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다가 전혀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자 모두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는 흠모할 만한 모습도 없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님께 대해서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흠모할만한 모습도 없이 오셨으면서 흠모하지 않고 배척한 것을 믿음 없는 것으로 책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백성을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흠모할만한 모습이 있는 자를 흠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러나 흠모할만한 모습이 없는 자를 흠모한다면 그것은 결국 외형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형을 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은 세상에 흠모할 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흠모할만한 모습이 전혀 없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믿음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외형을 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이라면 오늘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과연 나는 외형을 초월하고 살아왔는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이 오셔서 무시와 멸시를 당하셨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신자 역시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풍채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려는 욕심에 대해서는 초월하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형에 대해서는 초월하시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는 쪽으로 오셨는데 정작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인기를 얻으려고 하고 사람으로부터 흠모를 받을만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애를 쓰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믿음의 참된 모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고난받으신 예수님,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이라고 떠들면서 정작 자신은 낮아지는 자리는 외면하고 십자가 지고 고난받는 자리는 질색을 하고 거부한다면 진심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흠모하는 믿음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세상은 모두가 자신의 외형이 뭇사람들에게 흠모를 받을만한 조건을 갖추는 것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외형을 초월한 채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을 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흠모할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오신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들이 믿음 믿음 하면서 예수님만 믿는 것처럼 떠들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채 있었던 인간의 실체일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자신의 외형은 초월한 채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사는 자입니다. 이런 신자는 이미 자기 외형을 초월했기에 남도 외형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외형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을 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를 무시 받고 멸시받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흠모할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실체를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예수님의 요구에는 전혀 동참할 뜻도 없이 오직 남에게 싫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기를 소원하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성경 많이 본다는 흠모의 소리를 좋아했고, 기도 많이 한다는 흠모의 소리에 흐뭇해했고, 믿음 좋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은 아니었습니까? 바로 그러한 습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흠모할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사람들로부터 싫어버림을 당할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흠모할만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면서 교회로 찾아오는 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멸시와 무시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신자와 신자아닌 자를 구별하는 말씀인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 시간 나 자신에게 신자의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출처: 심플 라이프 원문보기 글쓴이: 심플스크랩 강해 이사야 강해 3
'***신구약 성경강해*** > - 이사야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강해 이사야 강해 1 (0) | 2023.04.02 |
---|---|
[스크랩] 강해 이사야 강해 2 (0) | 2023.04.02 |
[스크랩] 강해 이사야 강해 4 (0) | 2023.04.02 |
[스크랩] 참조 이사야 (0) | 2023.04.02 |
[스크랩] 이사야 강해 1 (0) | 2023.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