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스크랩] 이사야 강해 1

에반젤(복음) 2023. 4. 2. 00:57


이사야 강해 1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1999. 6. 30. - 2001. 6. 6.)










目    次
1. 고발당하는 이스라엘 
2. 마당만 밟는 자 
3. 타락, 심판, 회복 
4. 말일과 대비책 
5.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6. 그날 
7. 포도원의 노래 
8. 무지함 
9. 화로다 
10. 나를 보내소서 
11. 스알야숩과 임마누엘 
12. 마헬살랄하스바스 
13. 아침빛을 기다림 
14. 여호와의 열심 
15. 여호와의 진노 
16. 앗수르의 심판과 남은 자의 돌아옴 
17. 메시아 예언과 그의 다스림 
18.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함 
19. 바벨론에 대한 경고 
20. 바벨론의 멸망 
21. 여호와의 세계 경영 
22. 모압에 대한 경고 
23. 다메섹과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24. 구스에 대한 교훈 
25. 애굽에 대한 경고 










이사야 1:1-9  고발당하는 이스라엘  1999. 6. 30.


이사야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활동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 전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북이스라엘은 이사야의 사역 기간에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였고 남유다도 심각한 위기에 처하여 있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스라엘을 향하여 고발합니다. 2절에 보시면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우리가 재판을 하기 위하여 고발을 할 때 증인을 부르는 것처럼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을 때에 증인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입니다.(신4:26, 30:19, 31:28, 32:1) 이중에서 한 곳만 찾아봅시다.

 
 
 
 
신명기 32장 1절입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 지어다” 모세가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마지막 설교를 할 때에 증인으로 하늘과 땅을 부르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고발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모세와 이사야의 연도 차이는 약 600년 정도인데 600년 전에 예언한 그 말씀이 이사야 시대 때에 거의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사야 선지자 때뿐만 아니라 그전과 그후에도 여호와를 반역하는 모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명기 32:1-18절을 한 번 읽어봅시다. 6절에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너를 지으시고 너를 세우신 아버지가 아니냐 너의 아비에게 물어보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구원되어 왔는가를... 그 출애굽의 과정을... 그런데도 너희가 살찌고 배부르니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있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약 60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 그중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고발을 받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 중심으로 성전을 고수하며 그래도 제사를 지내고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그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사정없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배은망덕한 일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유다 백성들에게 짐승만도 못하다고 책망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고 책망합니다. 커다란 소라도 주인집의 아이의 손에 끌립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지요. 짐승뿐만 아니라 새들을 비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한 곳도 있습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렘8:7)
(교원대학원 교수가 갈매기 알을 인공 부화하여 키웠더니 그 갈매기가 갈매기 무리와 함께 살면서도 교수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날아옴.)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인 죄목을 4절에서 말씀합니다.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부패한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라고 책망합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고발은 더 무서운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1절과 1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이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성전에서 무수한 제물을 바칩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절기를 잘 지킵니다. 이러한데도 왜 선지자는 고발을 할까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지요.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의 제물드림과 안식일지킴입니까? ‘내가 이만큼 제물을 드리고 날을 잘 지켰으니 하나님이 복 주실 걸?’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사사시대에 ‘미가’의 집에서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웠으니 복 주실 걸,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사기 17장 1-13절을 봅시다. 미가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은 일천 개를 훔치고, 어머니의 저주를 들은 후 은을 다시 내어놓는데, 어머니는 그 은으로 신상을 만들고 아들 중에 하나를 에봇을 만들어 입혀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레위 소년 하나가 떠돌다가 그 집에 이르자 그가 레위 지파임을 알고 그 집에서 연봉으로 은 열 개, 의복 한 벌, 먹을 것을 제공하기로 하고 제사장을 세우고는 제사장 세웠으니 복 주실 걸, 하는 태도와 지금 이사야에서 유다 백성들이 제사를 많이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마찬가지의 생각이 우리 안에 가득합니다. 주의 은혜로 내가 복을 받는 줄을 모르고 나의 행위로 복을 받는 줄 아는 사람은 꼭 선지서를 다시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는데 실제 알고 보니 자기 욕심에 이끌려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유다 백성들은 얻어터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히 맞았는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을 만큼 온통 상처뿐인데도 주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매는 돌아오라는 신호인데 그것을 거부하고 계속 더 맞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사1:5-6)
 
 
 
 
그러므로 그 당시 이스라엘이 당한 형편이 7-8절입니다. 땅이 황무하고, 성읍은 적군이 쳐들어와 불에 탔고, 토지는 이방인에게 삼키웠고,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량하였는가 하면 포도원의 망대처럼,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께서 은혜로 남겨 두시지 않으시고 행한 대로 갚으셨다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바로 알고 나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오라는 말입니까? 제사 지내고, 안식일 지키고 있는데 무얼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지금 십일조 하고 주일성수 하는데 뭐가 잘못됐다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신명기 8장으로 갑시다.
 
 
 
 
신명기 8:11-20절입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잘나서도 아니요 수가 많음도 아니라 오직 주의 약속을 따라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그 의미를 잊어버린 제사는 그들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무엇입니까? 짐승, 그것도 정결한 짐승의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짐승을 누가 잡습니까? 제사 드리려고 끌고 온 사람이 잡습니다. 그때 짐승을 잡으면 죽을 짐승이 가만히 있습니까?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목을 치고 각을 뜨면 온몸에 무엇을 뒤집어쓰고 갑니까? 피를 뒤집어쓰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사람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내 대신 죄 없는 짐승이 죽었구나. 이것이 제사의 중심입니다. 이 정신이 빠져버린 제사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의미를 상실한 제사를 주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듯이 오늘 우리의 모든 예배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사야 1:10-17  마당만 밟는 자  1999. 7. 7.

‘마당만 밟는 자’ 하면 우선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형식적으로 예배당에만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지요? 예배는 주일 낮 예배만 겨우 드리고 헌금도 제대로 안하는 그런 사람을 성전 마당만 밟는 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신앙 훈련을 그렇게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속이 어떤지는 볼 수도 없으니까 그저 외형적인 것으로만 신앙의 척도를 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사야 1장에서 고발당하고 책망 받는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다면 교회에서 칭찬할까요? 책망할까요? 이들이 얼마나 열심이고 헌신적인지를 봅시다.

 
 
 
 
11절을 봅시다. 무수한 제물이 있습니다. 수양의 번제가 있습니다. 살진 짐승의 기름이 있습니다. 이미 배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제물을 드리는 열심이 이 정도입니다. 제물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도 봅시다. 12절입니다. 내 앞에 보이려고 오니, 안 오는 것이 아니라 오고 있습니다. 내 앞에 보이려고 와야 한다는 것은 유대인이 1년에 세 번씩은 하나님 앞에 보이러 와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14-19절에 보시면, 유대인의 3대 절기가 나옵니다. 첫 번째가 무교절,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 하여 무교절이죠. 이것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유월절입니다. 두 번째는 맥추절인데, 이 절기는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7일을 7번 계수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수장절입니다. 유대인들의 추수감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장막을 만들어 그 안에 지내기도 하여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세 절기가 유월절을 기초로 하여 있는 것입니다. 단지 보리추수, 가을추수만의 의미가 아니라 칠칠절, 장막절이라는 의미는 모두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지키러 오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월삭을 지킵니다. 매월 첫날이 월삭입니다. 안식일을 지킵니다. 대회로 모입니다. 대회란 이스라엘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다 모이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예물 잘 드리죠, 모이기 잘하죠, 이 정도면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자들이 한국교회 오면 헌금 잘하죠, 모이기 잘 하지요, 단번에 장로 권사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제물을 잘 드리고 모이기를 잘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싫다고 하실까요? 어느 정도로 싫어하십니까?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느냐? 나는 이미 배불렀다. 기뻐하지 아니한다. 가증이 여긴다. 견디지 못하겠다. 싫어한다. 무거운 짐이다. 지기에 곤비하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절하시는 것은 이들 가운데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조건 많이 드리고 많이 모이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이 바친 만큼 많이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먼저 무엇을 갖다 바쳐서 복을 받아 낼 사람이 없다고 증거합니다.
 
 
 
 
로마서 11:35절을 봅시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그럴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만물이 주님께로 나와서 주님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데 누가 주께 무엇을 먼저 드린 그 결과로 복을 받아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드려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면 안 드리는 것이 낫지요? 당장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 받으시는 이유는 그 제물드림과 날과 절기를 지킴에 있어 악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악이 무엇입니까?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 피 묻은 손으로 아무리 기도해도 안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피는 무엇입니까? 악업, 악행, 학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물을 풍성히 드리고 절기를 잘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희생제사의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지금 고아와 과부가 학대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너희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이 주님의 언약을 따라 자비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주님의 자비가 그 나라에 얼마나 시행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안에 이 정신이 빠져버리면 이방 나라와 꼭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지금 10절에서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수한 제물을 드리고 날과 절기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킨다고 하여도 그 정신을 잊어버렸을 때는 이방 나라와 꼭 같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21-24절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 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단지 윤리 도덕 차원에서 불쌍히 여겨라, 구제하라는 차원이 아니라 너희가 이방 나그네였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고아와 과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땅에 온갖 학대와 착취가 횡행하니 이것이 어찌 긍휼을 입은 나라인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선지서에서 몇 곳을 찾아봅시다.
 
 
 
 
호세아 6: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 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미가서 6:6-8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는 없이, 힘 있고 세력 있는 자가 가난한 자의 아주 적은 것까지 탐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압제하고 학대하여 빈익빈 부익부가 더욱 심하여지고 마땅히 보살핌을 받아야 할 고아와 과부는 신음과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제물과 제사와 날 지킴은 질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에서는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1: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우리는 이러한 선지서의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지서가 설교되는 곳이 별로 없지요? 선지서를 읽다 보면 우리가 맹종하고 있는 것들이 들통 나기에 선지서를 함부로 설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지서를 설교한다고 해도 겨우 몇 구절만 뽑아 와서 자기 교회 확장하는 일과 예배당 짓는 일에나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지서를 보면서 사회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고 또 민중신학을 이야기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한 신학이 생긴 것이지요. 그러니 이 세상의 나라들은 어느 나라이건 자비와 긍휼이 기초로 된 나라는 없습니다. 오직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이루어진 나라만이 자비와 긍휼이 기초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란 언제나 긍휼을 입은 나라, 대신 희생이 드러나는 나라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가 학대를 받게 되는 것은 이미 이방 나라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헌법 1조 1항이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그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이렇게 시작되지요. 그러나 이걸 믿는 사람은 없지요. 주권이 말로만 국민에게 있지 주권은 언제나 가진 자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18절입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명기 24:17-18절입니다.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이러한 말씀이 아직도 많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거듭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잘 잊어먹는지를 아시니까 자꾸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열심과 그 행위의 동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참으로 긍휼을 입은 자인지 여부가 제사에서 드러나야 하는데, 이들은 그 제사행위 자체가 그들의 의가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긍휼과 자비가 없는데 제사 형식만 갖추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이 말씀을 어디에 적용해야 합니까? 오늘 예수 믿는다는 우리이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교회가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마당만 밟았습니까? 그저 주일성수와 십일조라는 이상한 법에 묶여서 이것 안 지키고, 안하면 벌 받는 것 아닌가? 또는 내가 좀 더 많이 해야 많이 받을 텐데, 하는 그런 생각으로 하였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선지자의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16절에서 17절을 읽겠습니다. 스스로 씻으며, 깨끗하게 하며, 너희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은 그 사람이 자기가 섬긴다는 신에게 그 자신의 정성과 헌신의 양에 따라 그 사람의 반대급부적인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자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자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아와 과부처럼 주님의 도움 외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하는 이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경 한 곳을 더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야! 너희 선생은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 이때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호세아 6: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 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는 이 말씀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그 무엇을 많이 바치고 날과 절기를 잘 지켜내는 나의 능력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배를 통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긍휼을 입어야 하는 자임을 알고서 오직 주의 긍휼만을 바라보는 그 제사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만이 그 아들의 보혈의 공로를 제대로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배당 마당만 밟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그 자비와 긍휼이 흘러넘치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사야 1:18-31  타락, 심판, 회복  1999. 7. 14.

성경을 볼 때 나무와 숲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나무만 보다가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숲만 보다가 나무는 못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한 부분을 가지고 설교하더라도 그 부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맥락과 흐름 안에서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기에 편하고 적용도 쉽게 하는 설교는 한 본문을 택하여 몇 가지의 윤리적 또는 신앙적 교훈을 주게 되고 설교를 듣는 사람은 편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쉽게 하려면,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심판 받는다, 라는 줄거리를 가지고 몇몇 순종하여 복 받은 것처럼 보이는 성경의 인물을 예로 들고, 또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간증들 가운데 순종하고 회개하여 복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결론적으로 우리도 회개하고 순종하여 복 받고 삽시다, 하면 아멘하고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유심히 바라보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18절에서 19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그 모든 죄를,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이 붉은 죄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고,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시면서,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물을 먹을 것이고 불순종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하였으니 순종하여 복되게 살자, 하면 별 무리가 없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주께로 회개하고 돌아올 순종의 능력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순종할 능력이 있었다면 다른 나라에 의하여 칼에 삼키우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가 다른 나라의 칼 앞에 몇 번이나 삼키운 것을 보니 이들은 스스로 순종하는 자들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흐름을 보려면 크게 타락, 심판, 회복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기에 타락한 것이고 이 타락에 대하여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 앞에서 모두가 멸망 받아 마땅한 자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이라는 단절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대로 회복시켜 주시는데, 그것도 모두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만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복되어 돌아온 자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일하심만을, 주님의 은혜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1. 먼저 타락을 봅시다. 21절에서 23절입니다. 전에는 신실하던 성읍이었던 예루살렘 성읍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가장 신실한 성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었지요. 그러나 솔로몬 왕 말기에는 이미 수많은 과중한 세금들로 인해 백성들의 괴로움이 심하였습니다. 공의가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략적인 결혼으로 이방 나라의 공주들과 결혼하면서 온갖 종류의 우상 신당을 만들어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 시대의 그 공의가 지금은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타락을 두 가지로 고발합니다.
 
 
 
 
하나는 신실하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정조를 지키던 하나님의 신부된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였기에 창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치 못하고 온갖 다른 것으로 그들 안에 채워져 있으니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창기가 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이지만, 공평과 의리가 있던 성읍이 살인자들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이 시행되던 그런 성읍이 이제는 도적과 짝하며, 뇌물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뇌물을 바칠 수 없는 고아와 과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고생하는 그런 나라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타락을 혼합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에 ‘네 은은 찌기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타락을 우리나라와 한번 비교하여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을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스라엘이 타락하였다고 책망 받는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하듯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타락이니 죄라는 것이 윤리 도덕적인 심각한 타락의 문제가 아니면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치는 자본의 유무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을 때 흔히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하지요. 분명히 잘못한 사람인데 돈을 많이 써서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한 사람하고 정당한데도 가난하여 변호사도 선임 못한 사람하고 그 결과는 거의 뻔하지요? 경우에 따라 아닐 수도 혹 있지만, 이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은 것이 뭐 그리 대수냐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흐르지 않고 이방 나라를 닮아가는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주변국가의 대표적인 신이 바알입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신이기에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의 논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나라와 본질적으로 달라야 함을 보여야 하는 나라가 그들을 닮아갈 때 하나님께서 타락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착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원리에 비추어보면 창기요, 살인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꾸만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착하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비추어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이 세상의 원리가 얼마나 타락한 세상인지, 우리가 창기요 살인자로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타락에 따른 심판입니다. 24-25절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데 그 심판을 행하셔야만 하는 상황에서 슬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자기 백성이 타락하였기에 하나님이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하고 타락한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대상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대적이라고 하십니다. 유대 땅의 지도자는 세상나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왕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다른 나라는 왕의 말이 곧 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하지 아니하면 선지자의 탄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섬기라고 주신 직분을 가지고 자신들의 신분이 특별한 것처럼 그 지위를 가지고 백성들을 착취한 것입니다. 그러니 왕도, 제사장도, 장관들도, 모든 관리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원수요 대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보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심판을 통하여 그들의 찌끼를 청결하게 하는 것이며, 혼잡물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있는 것이 버리지 않음의 증거가 됩니다. 징계와 심판을 받을 때는 괴롭고 아플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시원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동안 쌓여온 불순불의 찌꺼기가 제하여 지기 때문입니다. 금속의 불순물이 제거되기 위하여 용광로에 들어가야 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물이 제거되기 위하여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백성의 돌이킴과 회복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도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타락과 회개치 않음에 둡니다.
 
 
 
 
28절에서 31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회복을 26절과 27절에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영원한 심판에 이르는 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패역한 자와 죄인이요, 여호와를 버린 자요, 우상숭배자요(상수리나무를 기뻐한 것은 그 나무 아래서 우상숭배 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심판을 행하시는데 물이 없어 말라버린 상수리나무 같고 물 없는 동산이요, 강한 자도 삼오라기 같고, 그 행위는 불티같아서 함께 탈 것인데 불을 끌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에 대하여 시비를 걸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심판받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린다면, 구원도 자기가 회개하고 순종한 결과로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생각하기 전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이 심판으로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재창조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에 따른 심판을 하시고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심판에서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예외가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타락하지 않은 자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회복, 즉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지를 보겠습니다.
 
 
 
 
3. 회복입니다. 26절, 27절입니다. 25절에서 심판을 통하여 무엇을 제거하십니까? 찌끼와 혼잡물이지요? 이러한 찌끼와 혼잡물을 제거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외의 것으로 가득 찬 찌끼와 혼잡물이 제거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거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력이 아니라 타락한 백성을 그대로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심판행위를 통하여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노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구원도, 죄로 인해 멸망의 대상인 우리들을 심판하시는데, 우리가 심판받았다면 그대로 지옥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지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시킨 백성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부르십니까?
 
 
 
 
내가 너의 사사를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처음과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사사와 모사는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원래의 모습, 처음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고야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하리라고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군림하기 위해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섬기는 자세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의의 성읍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러한 때가 언제였는가요? 간혹 잠깐씩 나타납니다.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들의 지도자는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스룹바벨 등은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면서 섬기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장차 섬기기 위하여 ‘왕이 종이 되어 오신 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의의 성읍이 되는 길은 주인이 희생함으로 가능한 나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성읍이요 이들이 참된 시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이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하나님의 심판에서 회복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회복인 것입니다.(시찰회, 노회가 섬기는가? 군림하는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된 것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우리를 심판하시되 우리 대신 심판받으신 분의 그 희생을 통하여, 섬기러 오신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드러나는 바른 교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곳에서 다 망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인데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 70년이 차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때 돌아오면서 부른 노래가 어떤 노래이겠습니까? 시편 126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이것이 오늘날 구원받은 백성의 노래여야 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대사를 행하신 그 결과로 우리의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찬 그런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이 없다면 우리 안에 예수님 외에 너무 많은 찌끼와 혼잡물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저녁 기도회는 이것이 무엇인지 말씀에 비추어 보시고 울면서 씨를 뿌리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실 것입니다. 그 기쁨의 단이 예수님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단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2:1-11  말일과 대비책  1999. 7. 21.

이사야 선지자가 유대와 예루살렘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1장에 이어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첫 번째가 ‘말일’에 관한 것입니다. 말일이란 구약에서 대부분 메시아의 오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메시아의 오심의 날을 말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2절에서 4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은 조그마한 산입니다. 그런데 이 산이 말일에 모든 작은 산위에 뛰어나고 만방이 거기로 모여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초림 하셨으니 그 산이 물리적으로 높아졌습니까? 그런 의미는 아니지요? 그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있던 그 산입니다. 성전의 기능이란 제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되신,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주께로 이끌고 계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주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커다란 그림으로 생각하면 만국에서 주의 백성들이 주께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말일입니다. 우리는 현재는 말일이 아니고 나중에 예수님 재림할 때가 말일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말일로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말일의 한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의 산이 높아지고 영화로워지고 거기로 만민이 순례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서로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왜 여기에서 야곱의 이름만 나오는 것입니까? 흔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많은데 유독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을까요? 야곱에게서 하나님의 선택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일에 만국에서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국에서 주께로 돌아와서 무엇을 합니까? 주님의 도, 율법,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 도와 율법과 말씀이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복음입니다. 이미 있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8절에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어디에서 출발합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그 복음의 사건, 그 십자가의 사건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택함을 입은 만민이 주께로 나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조그마한 나라 대한민국의 한쪽 모퉁이 이 창원에도 주께로 순례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순례자로서 우리는 뭐라고 하면서 나아갑니까?
 
 
 
 
3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이런 말을 하면서, 이런 노래를 하면서 우리는 순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옆에 함께 있는 분들이 모두 한 길을 가는 동료들입니다.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며 순례의 길을 가도록 합시다.
 

 
 

또한 말일에 참된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무기로 사용하던 것이 농기구가 될 것이고 다시는 서로 치지 아니하고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니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평안을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전쟁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이런 화평은 단지 이 세상이 원하는 그런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그러한 평화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일이 선포되었기에 그러한 말일이 이루어진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약 몇 년 전의 예언입니까? 약 2,700년 전의 예언입니다. 그 예언이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이 놀랍지 아니합니까?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만 되어지는 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더욱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일에 대하여 이러한 믿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기적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말일을 선포하고서 야곱 족속에게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하여도 야곱 족속이 여호와의 빛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어두움을 더 좋아하니까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러한 어두움의 일이 무엇인지 한번 알아봅시다. 이러한 어두움의 일이 우리도 꼭 같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이들이 행한 어두움의 일이 무엇입니까?
 
 
 
 
1, 동방풍속이 가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의 풍속을 따르면 안 되는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이어야 하는데, 주변 국가들의 풍습이 가득 찬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도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세상 풍속과 같아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점치는 행위를 따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점치는 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점치는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믿는 사람이 아니지요. 장래일의 두려움 때문에 점을 치는데 우리의 장래는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있기에 미래를 알고 싶어 점치고 싶은 유혹이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말씀의 예언을 보시면 됩니다. 술객들이 결국 어디로 갑니까?(지옥갑니다.)
 
 
 
 
3,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고 언약을 합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그렇게 율법으로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계속하여 이방 나라와 손에 손을 잡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4, 그 땅에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아니 이러한 것이 어두움의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장 바라고 원하는 이상향이 아닙니까? 오늘날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최고로 원하는 상태가 부국강병, 부자이면서 국력도 강한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심판받을 이유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는 황당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자가 되고 나라가 강하게 된 것을 회개하여야 한다고 말하면 돌았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이야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과 다르기에 부국강병 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부국강병책이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금은보화와 군사력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어두움의 일입니다.
 
 
 
 
신명기 17:16-17절을 봅시다.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고대로 갈수록 왕의 세력이 국력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이 말과 아내와 은금을 많이 가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I.M.F 극복 기도회를 교회가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야 부국강병을 외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믿는 것이 그것뿐이니 할 수 없지만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는 교회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을 안 믿기로 작정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은금과 마병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몇 곳 더 찾아보겠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20:7)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시33:16)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시33:17)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라”(시44:6)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52:7)
 
 
 
 
결국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우리도 의지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돈 없이는 교회가 안 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는 못하지만 돈이 많아야 주님의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의 많은 수를 원하고 수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 많은 수에서 힘을 결집하여 큰일을 이루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내셨는데 주님을 따른다는 자들이 주님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기업의 원리를 따라가니 이게 어찌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우상이 가득합니다. 나라는 부하고 강하니 이들이 찾는 것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주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이름이 부처님의 은덕을 기리기 위함이라 하든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든지 간에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은 언제나 그들의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들에 천한 자도 부한 자도 다 절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우상이 없습니까?
 
 
 
 
이러한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목록이 있다고 해서 죄를 몇 가지의 목록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죄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을 보니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죄인이기에 죄의 열매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러한 죄인을 심판하러 오시는데 그들을 용서치 마소서, 라고 합니다. 이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바위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행하심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1절입니다. 그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집니다. 교만한 자가 굴복됩니다. 이렇게 하심은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는 말일을 살고 있습니다. 시온을 향하여 순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시온에서 구원의 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가고 있는 자는 한결같이 홀로 높아지신 분만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높아지신 분이 사도행전 2:33절에서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라고 말씀하십니다. 높아지신 예수님 앞에 죄인들은 엎드릴 뿐인데 그렇지 않고 교만하여 눈이 높아진 자들, 재물이 많음으로, 권세로 여러 가지 높아진 것들이 그날에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높아진 것들을 모두 낮추어 버리는 것이 12절에서 17절까지 세목이 나옵니다.
 
 
 
 
교만자, 거만자, 자고한 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백향목,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나무가 높은 것이 교만입니까?), 모든 높은 산,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 모든 높은 망대, 견고한 성벽, 다시스의 모든 배,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 이러한 것들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높아진 것은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어찌 창조주 앞에서 교만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오늘날 예언하였다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높아진 종탑, 높아진 건물들도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이러한 것은 사람의 교만과 자고함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 교만함이 그 날에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17절을 봅시다. “그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그 날에 높아진 모든 것들의 결과는 18절에서 21절입니다. 심판을 받습니다. 이렇게 높아진 것들은 결국 인생을 의지한 자들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겸손하여 지는데 자꾸만 인생을 의지하다 보니 교만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어, 세상 사람들이 힘을 합하기만 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어, 우리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좋은 세상 만들어 보자, 하는 것들도 인생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히 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는다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특히 남자들 세계에서는 ‘사나 짜슥이 오죽이나 못났으면 신을 다 믿나’ 하지요. 인간이 자신을 믿어야지 의지도 없이 나약해 빠져가지고는 남을 믿느냐?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자는 인생을 의지하지 아니합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도 의지하지 아니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의 호흡이 코에 있으니 수에 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이란 수에 칠 가치조차 없는데 무슨 사람의 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날이 이르기 전에, 미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가, 즉 믿는 자가 복 있는 자임을 아시고 미리 알아서 기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 주님 홀로 높으심을 받을 것입니다.








이사야 3:1-4:1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1999. 7. 28.

우리가 복음을 들으면 그동안 붙들고 의지한 것들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나의 종교적인 모든 공적들이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이 오히려 주님과 나 사이에 장벽이 되어 버렸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잘못된 것들이 뽑혀져 나가고 새로이 주의 말씀으로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데 한 가지는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할 때 그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버리시는 것이며, 또 하나는 지도자들의 부패상에 대하여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심판을 보겠습니다. 무엇을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까?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2:7절에서 그 땅에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다고 하였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이것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2:22절에서는 인생을 의지한 것입니다. 수에 칠 가치조차도 없는 인생을 의지하였기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의지할 만한 것은 무엇이나 다 제거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주님만이 의지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제거하십니까?
 
 
 
 
1, 모든 양식과 물입니다. 사람이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양식과 물입니다. 지금 세계는 양식과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심각한 기근을 당하는 나라들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전쟁은 양식과 물의 확보를 인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사람들이 내다봅니다. 이처럼 중요한 양식과 물을 왜 하나님께서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부강해지자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양식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기에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2, 용사와 전사를 제거합니다. 이들은 전쟁영웅이기에 백성들이 적의 침입에서 자기를 구하여 주고 보호하여줄 자가 용사와 전사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의지하기에 이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말씀을 찾아보았지만 시편 33:16절에서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라는 말씀이 이스라엘의 신앙이어야 하는데 이들은 자기들의 전쟁영웅을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이들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3, 재판관과 선지자를 제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장과 선지자를 제거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따라 재판을 하는데도 백성들은 이들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도 제거의 대상인 것입니다.
 
 
 
 
4, 복술자와 장로입니다. 복술자는 점치는 자인데 이스라엘 가운데서 복술자는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법을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가운데 복술자들이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백성들의 장래를 점치면서 그들의 지도자 노릇하는 것입니다. 또한 장로들입니다. 백성들 가운데 지덕을 겸비한 연장자가 장로인데 이들도 하나님께서 제거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5, 오십부장과 귀인을 제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오십부장은 오십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교인데 이들도 백성들의 의지가 될만하니 제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귀인들은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 좀 나은 자들이지요. 이들도 제하여 버리십니다.
 
 
 
 
6,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입니다. 모사는 자문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공교한 장인은 기술자입니다. 그리고 요술자, 이들도 백성들의 의지가 되니 모두 제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의지할 만한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심은 이미 신명기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전체가 그러한 말씀이지만 8:11-20절까지만 보겠습니다. “봉독” 가나안 땅에서 먹고 배부르고 부자가 될 때 교만하여져서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자기들이 부자가 된 것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된 줄 아는 것이 교만입니다. 오늘 우리가 월급 받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야 자기능력이라고 하지만 신자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능력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교만하여지니 하나님께서 이들의 의지하는 바를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여집사님의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이 분은 모든 환경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작지만 자기 사업장이 두 개나 있었고 자기 집 있고 자녀들은 공부도 잘하여 과학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카이스트에 입학한 자녀를 두고 부러울 것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녀 중에 하나는 애를 먹이게 되고, 다른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모래 채취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들여 겨우 허가를 받자 말자 I.M.F가 터져서 적자가 날 지경이 되고 자기가 투자한 증권은 퇴출회사가 되어버리고 심지어 집까지 경매위기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공공근로로, 자신은 헌옷 수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임을 알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잘난체하는 교만이 깨어지지 않음을 아시기에 자기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랑거리를 없애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의 의지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편의 든든한 직장입니까? 아니면 은행통장입니까? 집안의 배경입니까? 오직 우리의 의지는 주님 한 분뿐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의지물을 제거하여서라도 주의 택한 백성은 주님만 의지하게 만드시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계속 주님 외의 것을 의지한 것입니다. 결국 심판이 임하여 모든 의지하는 것이 제거되고 나자 이제 백성들이 아이를 방백으로 삼고 적자가 다스리니, 백성은 서로 학대하고 각기 이웃을 잔해하고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겨우 옷 한 벌 있는 자를 붙들고 우리의 다스리는 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나로 너희의 관장을 삼지 말라고 합니다.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은 결국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고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의 영광의 눈을 촉범한 것입니다. 이들은 죄를 짓고도 뻔뻔하여 숨기지도 아니하는 소돔과 같은 죄를 짓기에 화를 스스로 자취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는 화가 있지만 그러나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첫 번째 하나님께 심판 받는 이유는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한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심판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시 첫 번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지도자들의 타락입니다. 3:13-1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일어서시는데 심판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장로들과 방백들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의 죄상이 무엇입니까? 포도원을 삼킨 자들입니다. 가나안 땅은 여호와께서 홀로 전쟁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신 땅이기에 땅을 사거나 팔거나 하지 못합니다. 혹 어려운 일이 있어 땅을 팔아야 할 경우 영구히 파는 것이 아니라 희년이 돌아올 때까지 경작권만 팔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라도 형편이 되어 무를 수 있으면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고 또 친척이 물러 줄 수도 있습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땅을 물러 주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업은 누구나 사고팔지 못하는 데도 이미 이스라엘 안에는 사고파는 일이 이방인들처럼 일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힘으로 약한 자의 땅을 강탈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듯이 포도원을 탈취하는 이런 나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장로와 방백들의 집에 있습니다. 이들은 고리대금으로 가난한 자들의 물건을 전집하고서는 돌려주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가나한 자들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이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을 맷돌질 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의 타락 뒤에는 항상 누가 함께 있습니까? 법무부 장관이 경질되고 도지사가 구속되는 그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부인들이 있지요? 그들의 사치를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기도원에 가는데 밍크코트 입고 갔느냐 아니냐 하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았지요?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 뒤에는 그의 아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사야를 보는데 꼭 대한민국을 말하는 것과 같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 나라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같아지면 안 되는데 대한민국과 같아졌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라고 이름하고 있더라도 세상의 원리가 통하는 곳이라면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도자들의 타락과 함께 부녀자들의 사치와 타락을 봅시다.
 
 
 
 
16절에서 23절입니다.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교만하면 고개를 쳐드니까 목이 늘어나는가 봅니다. 정을 통하는 눈으로-음탕한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내며 다니는 것입니다. 이들의 사치품의 종류가 몇 가지가 됩니까? 발목고리, 머리의 망사, 반달 장식-가슴에 메다는 장식, 귀고리, 팔목고리, 면박-얼굴을 가리는 것, 화관, 발목 사슬, 띠, 향합, 호신부-부적같은 것, 지환-도장으로도 활용하는 반지, 코고리, 예복, 같옷, 목도리, 손주머니, 손거울, 세마포옷, 머리수건, 너울. 무려 21가지나 됩니다. 이 정도의 사치품을 착용하려면 얼마나 많은 뇌물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물론 뇌물이 아니라 대가성 없는 정치자금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러한 범죄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심판은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한 것과,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입니다. 그들 뒤에는 부인들의 사치가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는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는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이러한 부정부패가 많습니까? 요람에서 무덤까지 봉투가 있어야 되는 이런 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두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나라는 계속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이방의 강대국이 쳐들어옵니다. 그 호화롭게 사치하던 그 모든 사치품들도 하나님께서 제거하여 버리시고 대신 무엇을 입게 됩니까?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를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 할 것입니다. 여자들의 사치가 끊어질 뿐만 아니라. 25절에 보면 장정과 용사들이 전쟁으로 망하게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한 용사들이 망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문이 슬퍼하고 곡하며 시온이 황무하여 땅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호화롭게 사치하던 여자들이 남자가 전쟁으로 죽었기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우리가 우리 먹을 것은 스스로 해결할 테니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그런 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과연 예수 외의 것을 의지하지 아니합니까?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예수만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그것들을 제하여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이래서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떡을 주나 밥을 주나 그러지요? 우리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시고 우리의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은 오직 주님뿐임을 고백하시고 그 어떤 다른 것으로도 의지의 대상을 만들지 말고 교만하지 말며 주님만으로 행복해 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2-6  그날  1999. 8. 4.

선지서에 “그날”에 대하여 자주 언급합니다. 그날이 어떤 때는 심판의 날이 되고, 어떤 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또 어떤 때는 구원의 날인줄 기다렸는데 구원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구원의 날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기에 앞서서 어떤 일들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이 일어나기 위하여 유다 백성들의 선행적인 조건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심판받는 내용이였습니다.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 거기에 따른 여인들의 사치와 향락, 이런 것이 가득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이었는데 갑자기 아무런 중간단계가 없이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심판을 베풀다가 갑자기 호의를 베푸시는가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하여 헤른트리히(Herntrich)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하는 바는 하나님의 행동을 움직이는 요인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모든 건설적인 행동의 원천은 오로지 하나님의 무상의 은혜에 근거한다. 은혜는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며 인간의 노력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인하여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어떻게 ‘그날’에 이루어지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2절에서,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싹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3:5-6절에서 ‘때가 이르면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의로운 한 가지가 왕이요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부르는 가지를 말씀합니다. 스가랴 6:12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가지’나 ‘순’이라는 맥락에서 ‘여호와의 새싹’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우며, 왕이요, 우리의 의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자는 바로 메시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임하면 여호와의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싹’이라는 것은 ‘새로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것을 단절시키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호와의 싹이 등장해서 그 싹이 일한 결과로 이스라엘을 위한 땅의 소산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언어는 그 당시의 시대적인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약속의 땅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나라에 태풍과 집중호우로 물난리가 났지요. 이러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한마디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땅처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경기도 지역에 많은 피해가 났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창원 사람보다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곳은 지역적으로 물에 약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꼭 그런 식으로 적용하려면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 죽은 자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다, 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풍이나 호우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아홍수 때 주님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물로는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태풍과 호우가 왜 일어납니까? 우리는 자꾸만 나에게 닥치는 직접적인 손해만 생각하는데 만약 태풍이 오지 않으면 창원 같은 분지에 사는 사람들은 공기가 오염되어 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태풍은 도시의 공기를 신선한 공기로 환기시켜 주는 엄청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비가 가장 필요한 때가 여름이지요. 이 비가 오기 전까지는 물이 많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풍으로 바닷물을 흔들어 바다 속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폭풍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내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다 보니, 왜 이리 폭풍이 오며 비가 많이 오는가 하면서 하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어제 뉴스에 어떤 아저씨가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이 물난리를 겪은 지역인데 그 대비책이 소홀하여 일어난 일까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원망이지요. 이것이 선악과 따 먹은 인간의 가치기준이 되어 버렸기에 나타나는 반응입니다만 적어도 예수 믿는 자는 주님의 손길을 자기 이익에 연연해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욥기 38장에서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반박 이후에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25-27절.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레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으로서 까불지 말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 앞에서 자연의 힘을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롭게 될 때에 그 땅에 소산물도 아름답고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메시아의 날에 다른 것도 회복되어 지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풍성함입니다. 또 그날에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는 것입니다. 거룩하다 칭함을 얻는다는 말은 사람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 칭함을 얻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의롭지 않은 자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요.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나의 믿어준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선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이사야서는 우리가 아는 데로 율법시대인데 그런데도 지금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범죄하여 심판의 선고를 받은 자들이 무슨 수로 거룩함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까? 오직 거룩하지 않는 자를 거룩하다 칭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싹 즉, 메시아의 등장으로 이루어질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예루살렘에 남아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으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고 오히려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열심과 내가 예루살렘을 지켜야지 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께서 남겨두신 남은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녹명된 자입니다. 이름이 기록된 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만 거룩함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심판받아 마땅한 유다의 백성들이 거룩하다 칭함을 받는 것일까요? 
 

 
 

4절을 봅시다. ‘이는’ 거룩하다 함을 얻는 이유는,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정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시온의 딸들이 더럽습니다. 예루살렘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만이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택하신 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씻으시기에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씻으시는데 씻으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역시 4절에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영, 소멸하는 영으로 더러움을 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심판하고 소멸한다니까 뭔가 생소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성령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듭니까? 뭔가 펄펄 뛰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워낙 펄펄 뛰어 다니며 이상한 말 하고, 이상한 것 보았다 하고, 기도를 하여도 좀 극성스럽고, 찬송을 하여도 별나고, 무슨 예언 받는다 하고, 예언한다 하고, 이런 생각이 먼저 들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무엇을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심판하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6:8-11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이 하실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보내시는 성령은 심판하시고 소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오늘날 주의 은혜를 입어 택함 받은 자들의 더러움을 심판하는 영, 소멸하는 영으로 정결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이 임한 자는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죄인됨을 알게 되는 죄는 어떤 죄입니까? 세상의 법으로 정한 죄가 아닙니다. 세상의 문화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진 윤리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죄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죄,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죄를 생각할 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 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가정이든 교회생활이든 예수 믿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 증거를 대어볼까요? 세상 염려합니까? 안합니까? 주님의 나라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염려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 주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는 법이 없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주님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책망 받습니다.
 
 
 
 
또 의가 없음을 인하여 책망 받습니다. 의가 되시는 주님을 이 땅의 사람들이 합동으로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의가 되시는 분이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의가 없으면 모두가 심판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이것을 알고 오직 주의 의만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는 세상의 심판을 두려워한 것에 대하여 책망을 받습니다. 이제는 세상 임금이 심판 받았기에 우리의 심판주는 주님이심을 아신다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것에 대하여 주의 성령께서 심판하시고 소멸하심으로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으로 소멸하시는 것입니다. 이래야 거룩하다는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자기 피로 우리를 씻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백성을 새롭게 만드시고는 그 거룩하게 된 백성들과 주님은 동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때 구름기둥 불기둥처럼 이제는 여호와께서 장막을 자기 백성위에 치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영광위에 천막처럼 호위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낮에는 더위를 피하고, 또 바람과 비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5-1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 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그 날을 계시록에서 말씀합니다. 이 보호를 받고 주님과 함께 거할 자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14절) 이들이 바로 성령으로 예수를 믿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 그 백성의 모든 더러움을 어린양의 피로 씻어서 깨끗하게 된 자들 위에 하나님이 영원토록 거하실 장막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안에서 밤낮 주님을 섬기며 다시는 주림과 목마름과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하고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 날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날을 소망하는 자는 날마다 주의 성령의 역사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이기에 복된 자리입니다. 이 복된 자리를 놓치지 마시고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책망을 받아가는 것이 빛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고 지금 책망 받는 것이 ‘그날’을 소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임을 아시고 많이 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5:1-12  포도원의 노래  1999. 8. 11.

오늘 본문의 말씀을 ‘포도원의 노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포도원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1-2절을 봅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노래를 한다면 아름다운 노래인 줄 알았는데 고발하는 노래입니다. 7절에 보시면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시편 80편 8절에 보면,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여 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신 것을,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심으신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를 심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가져다가 열방을 ?아내시고 심으셨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존의 수많은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이 그 당시 주변의 광야지역에 비하여 살기 좋은 곳이기에 강한 부족만이 살아가는 그런 지역입니다. 그런 원주민들을 다 ?아내시고 가나안 땅에 심으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80편 9절에 보면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라고 말씀합니다. 포도나무는 스스로 옮기워지거나 심기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옮기고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을 옮기시고 심으신 주님께 언제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봅시다.
 
 
 
 
오늘 말씀 2절을 봅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팠습니다. 그래서 좋은 포도 맺기를 원하였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왠일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나와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족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부족한 게 있었다면 얼마든지 더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부족한 것이 없이 완벽하게 갖추어 놓았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포도원 만드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는 것이야 다른 나무를 심어도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포도나무는 버팀목이 없이는 설 수 없기에 꼭 버팀목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버팀목을 세우는 일이 어렵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쯤 포도원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시멘트 기둥을 만들고 그 기둥을 밭 전체에 세우고는 그 위로 굵은 철사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워서 그 위로 포도 넝쿨이 자라서 가지를 뻗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른 과일 나무야 심어만 놓으면 잘 자라는데 포도는 늘 자주 손을 보아야 합니다.
 
 
 
 
어릴 때 저의 마을에 한 집에서 포도밭을 만들었습니다. 그 집안에는 아들이 많아서 일도 잘 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포도원을 만들었는데 포도 종자가 여러 가지였습니다. 일찍 나오는 포도도 있고 늦포도도 있어 영 상품가치가 없는 포도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 포도원은 얼마 있지 않아서 팔려 버렸는데 서울에 사는 저의 집안사람들에게 팔렸습니다. 무슨 용도로 팔렸겠습니까? 무덤이었습니다. 일부는 포도나무를 남겨놓아 우리가 잘 따먹었습니다만.
 
 
 
 
이 포도원의 주인은 실수를 하여 포도나무 품종을 잘못 심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잘못 심을 리가 있겠습니까? 실수 없이 완벽하게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정작 맺힌 열매는 들포도라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하면서 고발을 합니다. 극상품 포도열매를 원하였는데 들포도를 맺혔으니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덤으로 사용하도록 팔아 버리겠습니까?
 
 
 
 
5절에서 6절입니다.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하며, 그것으로 황무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버렸기에 손을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가지를 자르거나-해마다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는 겁니다. 거기다가 구름을 명하여 비까지 내리지 말게 하셨으니 그 포도원의 비참함이란 상상이 되시지요. 이 포도원이 누구입니까?
 
 
 
 
7절에 보면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선택하시고 출애굽 시키시고 그 적들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에 심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이방 나라와 꼭 같아 졌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보여 주어야할 나라의 모습은 세상나라와 전혀 다른 가치세계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마땅히 맺어야할 이스라엘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7절 하반절입니다. 공평과 의로움입니다. 즉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공평을 바랐는데 공평은 커녕 포학이 드러난 것입니다. 의로움을 바라셨는데 도리어 부르짖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이처럼 공평과 의로움인데 정작 맺힌 것은 포학과 부르짖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열매를 원하신다면 어떤 열매를 원하실까요?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교회들이 이 성령의 열매를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이 성령의 열매 맺기란 성령이 임하여야 되는데 사람들은 윤리 도덕 실천하는 것처럼 사랑하자, 기뻐하자, 화평하자 하는 식의 표어로 만들어 실천사항으로 삼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래도 다른 목표 보다는 나아보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이 원하신다면서 수많은 목표들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어떤 목표들인지는 주변의 교회들을 둘러보면 얼마든지 나타날 것입니다.
 
 
 
 
지난주 기독신보에 부산의 수영로 교회 광고가 나왔습니다. ‘새성전 기공 감사예배’ 라는 제목으로 ‘수영로 비젼 2000’을 제시합니다. 나중에 신문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도대체 예배당 건물을 세우면서 성전을 기공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허물어 버리신 건물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입니까? 유대인들이 건물성전을 고수하기 위하여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죽인 사실을 목사가 모르고 있는지 교인들이 모르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한국교회의 심각한 질병입니다.
 

 
 

마태복음 26장 60-61절 한 곳만 봅시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습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전을 헐어 버리고 3일 만에 짓겠다는 것입니다. 건물 성전을 헐어버린다는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지요. 지금 2천년이 지난 오늘 이 땅에서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수백억을 들이고 또 그러한 일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더 많은 부동산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땅에 땅을 더하려고 합니다. 교육관 부지가 아니라 이제는 주차공간의 확보는 기본이며 교회묘지 구입을 위하여 부동산 사들이더니 이제는 교회 기도원을 짓는데 수백억을 들여서 호텔수준으로 짓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니 교인들이 따르고 목사들이 그런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공평과 의로움이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열매를 봅시다.
 
 
 
 
8절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포학의 열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땅이기에 부동산 투기를 하면 안 되는 곳입니다. 우리나라는 부동산 투기하여도 편법을 쓰고 세금을 내면, 얼마든지 부동산 투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기에 부동산 투기하면 안 되는데도 이들은 부동산 투기를 한 것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 이 땅 가운데서 살아남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다 이러합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는 살아남아야 해, 하는 이 생각이 모든 사람의 생각입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잘살아야 된다는 사람들의 활동도 크게 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는 같은 인간이니 인간끼리 서로 서로 잘 살아보자는 것이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것이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동산 투기나 하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심판이 9-11절입니다. 허다한 가옥이 황폐화됩니다. 크고 아름다울 지라도 거하는 자가 없게 됩니다. 농사도 망하게 됩니다. 소로 열흘을 가는 밭에서 나오는 소출이 겨우 1바트입니다. 평년작은 이 정도의 밭에서는 500바트가 나온답니다. 그러니 소출이 1/500입니다. 한 호멜지기를 거두는 곳에는 겨우 한 에바가 나옵니다, 이것은 십분의 일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고와 고발에도 아랑 곳 없이 아침 일찍부터 밤이 깊도록 먹고 마시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잔치를 위하여 구색을 다 갖추었습니다. 수금, 비파, 소고, 저, 포도주를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공평과 의로움을 버리고 이방나라와 꼭 같이 세상의 원리에 따라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고 온갖 세상의 부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니 보호를 받아야 할 가난한 자들은 그 포학으로 인하여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한 그들은 그들의 부로 인하여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재미에 취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뿐입니다.
 

 
 

우리는 예언서의 이런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정의사회 구현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세상의 원리로 살아갑니다. 누구를 위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의로움의 열매가 나타나야 할 교회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교회에 끌어와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이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행사라고 하는 것을 보십시오. 큰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행하는 일을 보십시오. 연합회라고 하는 연합적인 사업들도 보십시오. 이 땅에서 홀로 거하려는 노력들입니다. 각 교단들이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싸움이 성경번역이나, 찬송가 출판이나, 기독교 방송국 같은 곳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공평과 의로움은 뒤로 하고 자기만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 욕망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이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을까요?
 
 
 
 
12절입니다. 그들의 연회에 다 갖추었습니다. 그들을 기쁘게 할 일들은 다 갖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행사들을 조금만 유심히 보십시오. 말이야 주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이것은 그냥 요식 행위일 뿐이고 모든 공로와 공로패는 결국 사람에게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들을 기쁘게 하는 악기들이며 포도주입니다. 자신들의 솜씨에 자신들이 감탄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에 자신들이 환호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임직을 하든가 은퇴를 하든가 헌당식을 하든가 간에 무슨 일이든 자신들의 기쁨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정작 잊어버린 게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도 자신의 전도에만 관심 있지 하나님의 전도는 관심이 없습니다. 헌신과 봉사를 해도 자신의 헌신에 관심이 있지 주님의 헌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을 말해도 자신의 자랑이 나오는 것이지 주님의 행하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여도 내가 설교 잘했나 잘 못 했나의 자기 관심이지 주님의 행하심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주님 행하신 일에 관심 없으면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니기에 오직 하나님의 심판만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오직 주님의 행하신 일과 주님의 손으로 하신 일만 오롯이 담겨지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 5:13-30  무지함  1999. 8. 18.

13절 말씀에 ‘이러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볼 때에 이러한 말들을 잘 보시면 앞뒤의 연결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랍니다. 이러므로 백성들이 무지하여진 이유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이유가 12절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 이유입니다.

 
 
 
 
좀더 넓게 보면 ‘포도원의 노래’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어떤 열매 맺기를 원하셨습니까? 공평과 의리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맺은 열매는 포학과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러한 포학과 부르짖음의 열매가 나온 것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는 관심 없었기에 자기들의 잘남이 자기들의 힘인 줄 알고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이들의 무지함이란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대한 무지함입니다.
 
 
 
 
호세아 4:1-6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봉독”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자들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래도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라면 할말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향하여 선지자의 말을 들어 보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교회라는 구색은 다 갖추어도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잊어버리면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11절을 봅시다. “봉독” 2절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지어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아는 것이 은혜와 평강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자는 마땅히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도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게 되었기에 날마다 주님을 알아 감으로 열매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없으면 소경입니다. 그 이유는 멀리 보지 못한 것입니다.

 
 
 
 
9절에서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즉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바로 주님의 행하신 일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이 임한 신약의 성도에게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관심 없이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일에만 관심을 가질 경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들마다 내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이루어 놓고, 자 보라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은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에서 빼내시는 일을 누가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임을 잊어버리면 그 때부터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이사야 5장 13절을 봅시다. ‘이러므로’의 뜻이 드러납니다. 이러므로 백성들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랍니다. 이러한 심판이 행하여지는 것을 음부가 삼키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구약에서 음부란 의로운 자나 악인이나 함께 가는 죽음의 장소 또는 무덤을 음부로 표현합니다만 이것이 점점 구별되어 신약에서는 낙원과 음부가 반대되는 의미로 쓰입니다. 어떻든 지금 이스라엘의 심판은 큰 음부의 권세가 집어삼키는 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랍니다. 그 음부가 입을 크게 벌려서 무엇을 삼키는 것입니까? 그들의 호화로움, 그들의 떠드는 것, 연락하는 것이 음부에 빠질 것입니다.
 
 

 
천한 자도 귀한 자도 다 낮아질 것입니다. 여호와만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하시다 함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심판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고 보니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결과 그 호화롭고 사치스럽던 곳이 폐허가 되었기에 이방인들이 양떼를 몰고 와서 풀을 뜯어 먹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 안에 그 심판의 이유가 또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 5장 안에 ‘화 있을진저’ 하는 말씀이 6번이나 나옵니다. 성경을 가지고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의 기분이 좋아지게 하려면 되도록 이런 책망의 말씀은 빼버리고 축복의 말씀만 전하면, 전하는 자도 한결 쉽고 듣는 자도 좋아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에서 사람이 뭔가 잘한 것이 없습니다. 혹시 좀 잘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된 일이기에 사람의 공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여 복 받았다고, 우리도 그렇게 복 받자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낮에 어떤 유명한 사람의 설교를 조금 들어 보았는데 다윗이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주께 마음의 결단을 하고, 기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문제 남편 자식 경제문제도 마음을 정하여 기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마음을 정하였다는 말씀을 하면서 마음을 정하여 기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위하여 마음을 정하여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십자가 지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데 우리의 어떠한 소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마음을 정하고 굳게 결심하고 기도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내 뜻은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싫든 좋든 화 있을 진저, 라는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를 신약에서 누가 많이 사용하셨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오늘 우리가 예수님 보시기에 ‘화 있을진저’의 대상은 아닙니까? 사람으로 안 된다는 것을 구약이 말하는데도 왜 구약을 가지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 라는 식으로 설교하는가?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은혜를 입고도 우리의 죄의 속성이란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기에 은혜는 잊어버리고 구약적인 자세로 돌아가는 것을 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0장 5절에서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0장 11-12절에서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와 원망과 불평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와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만하여 자신이 섰다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는지 아니 하는지를 구약의 이러한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아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화 있을진저’의 사람이 아닌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화 있을진저, 하는 6가지의 화를 찾아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1. 8절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이 땅 가운데 홀로 거하려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사람이 ‘화 있을진저’의 대상입니다. 이렇지 아니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화가 있을 것입니다. 삼성생명에서 교역자를 위한 보험이 나왔는데 한 달에 삼만원 정도면 사고시에 8억까지 나온다는 보험 안내서가 나왔습니다.
 
 
 
 
목사들이 노후를 걱정하는 것을 알고서 보험 상품으로 만들어 보내었습니다. 나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가족을 위하여 들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그러나 가족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자들인데, 라는 생각에 포기하였습니다. 까마귀도 먹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보험 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하여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2. 11절입니다. 술 취하는 자입니다. 술에만 취하는 것은 아니지요. 모든 취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3. 18절입니다. 거짓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속임과 거짓으로 살기에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일을 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여 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알게 아니냐, 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년 걸릴 것 같으면 너희는 하나님 믿으니 한 달 만에 이루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몇 년 걸려서 해야 할 일을 나는 몇 달 만에 이루어 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속히 나타내 봐라 하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것 같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가장 빨리 그리고 많이 알고 있는 우리나라 말이 무엇입니까? ‘빨리 빨리’ 이것이 얼마나 큰 병인지 그 서두름의 쓴 열매를 우리가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빨리 빨리 부흥하여 멋진 예배당도 빨리 빨리 짓고자 하여, 자기들은 예배드린다고 쉬면서도 일요일도 예배당 짓는데 인부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전을 건축한다면서 시키는 것입니다.
 
 
 
 
주일성수의 개념이 아니라 전도한다면서 그들이 일요일 날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교회 나옵니까? 이유빈 권사라고 ‘예수전도협회’의 대표인데 이 분은 오직 전도입니다. 이 분이 일요일 물건을 사면서 전도하니까 일요일 바빠서 교회 못나간다는 말을 듣고 일요일 물건 사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라도 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일요일 문 열어 놓아도 장사가 전혀 안되면 문 닫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일은 종교적인 열광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4. 선악을 바꾸는 자가 화가 있습니다.
5. 스스로 지혜롭다 명철하다 하는 자가 화 있습니다.
6. 술 마시기에 용감한 자가 화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24-25절입니다.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같이 마른 풀이 불속에 떨어지는 것 같이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산이 진동하고, 그들의 시체가 거리 가운데서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손이 오히려 펴 있다는 것은 아직 심판이 다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도 역시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이웃 나라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쳐들어오는 모습이 26-3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완전 무장한 자들이 먼 길을 오는데도 낙오병도 하나 없이 쳐들어 와서 물건을 빼앗아가도 누구 하나 건질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실제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심판도 어디에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잘못 아는 무지함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만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더 알아 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은 자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당연히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일하심이 어떠한지를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3절에서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함께하는 기도의 제목이 주님을 바로 알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겠습니다.








이사야 6:1-7  화로다  1999. 8. 25.

세상의 교육방법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를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믿음이란 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들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로마서 10:17절에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세계가 봄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24-25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뭔가를 보기를 원하고 또 전도할 때 하나님을 척 보여주면 좋겠고 사람들도 하나님 한번 보여주면 믿겠다는데 왜 안 보여주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마귀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자꾸만 이상한 것 보았다 들었다 하는 쪽으로 몰려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냥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너무 밋밋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웃시야 왕은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우상을 철폐하고 나라를 부강케 하는 등의 치적이 있지만 그의 지나친 열심으로 자신이 제사장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려 하다가 문둥병이 걸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높이 들리운 보좌에 주님이 좌정하여 계시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고 스랍들이 그 보좌를 모셔 섰는데 여섯 날개로 두 날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는 날면서 창화합니다. 거룩하다 3창을 합니다(비교, 계4:8).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영광을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뭔가 할말도 있을 것이고 전도하기도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사야가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화가 되고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공통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 것입니다.
 
 
 
 
창 30:30절.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라. 출 33:20절.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 삿 6:22-24절. ‘여호와 살롬’이라는 말이 여호와를 만나고서도 죽지 아니한 것을 기드온이 말한 것입니다. 삿 13:22절.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왜 이들에게 나타나셨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하기 위하여 나타나시면 다 죽어버리기에 계시를 사람이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도 계시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탁월하기에 계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의 뜻을 전달한다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틀림없이 자기의 특별한 수련 과정이나 특별한 방법을 통하여 신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산에서 몇 년간, 누구 밑에서 몇 년간 어느 기도굴에서 얼마나 금식하다가 신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어제 T.V에서, 미국의 어떤 사람이 호주인가에서 신의 영감을 얻기 위해 배낭을 지고 40일을 광야를 헤매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었는데 살이 20Kg이나 빠진 상태였습니다. 구조되면서 다시는 그런 짓 안하겠다고 합디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신이 내린 자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말해주는 자들이 무당들만이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을 걸고 얼마나 많이 무당짓을 하는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만난 자신들의 영웅적이고 초인적인 간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 지금까지 자신은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였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도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의 자세입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우리의 온갖 더럽고 추한 것이 입으로 나오기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고백에 천사가 불젓가락으로 제단의 불을 갖다가 입술에 대며 이제 네 죄가 제하여졌고 사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4:4절에서 보았듯이 백성의 더러움이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씻어진다는 말씀을 볼 때 우리의 죄가 제하여지고 사하여지는 것은 주님께서 제거하여 주셔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을 만나도 죽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영광을 버리시고 낮아진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아지신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2천년 전이 이미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은 죄인들에게 크나큰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죄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발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차 버립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다운 능력을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시대나 오늘이나 죄인된 인간이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죽는데도 죽을 줄도 모르고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을 만난 자입니까?
 
 
 
 
누가복음 5: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것이 주님을 만난 자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어찌할꼬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죽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이 많은데 심지어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하는 자들까지 얼마나 많은지, 외국에서도 이단들이 많지만 한국에는 더 많습니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아서인지 어찌 그리 이단도 많고 그들을 추종하는 자도 많은지 그런데 그들이 착각하는 것은 지금도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그런 분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본 흰옷 입고 머리 길고 서양 청년 같은 그런 예수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누웠던 그 사랑받던 제자 요한이,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어떻게 하였는지 아십니까? ‘예수님 반갑습니다’ 하고서 기대어 누웠습니까?
 
 
 
 
요한계시록 1:9-17절을 봅시다. “봉독”-예수님의 모습, 요한의 자세-역시 죽은 자 같이 됨.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됩니까?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가 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알게 된 죄란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하실 일 세 가지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지 아니한 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종교생활 잘하는 것이 죄를 안 짓는 일인 줄 압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종교적으로 생활하게 되면 자신의 종교적인 몇 가지의 행위들을 목사가 만들어 주기도 하고, 또 스스로 만들기도 합니다. 내가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기준을 정하여 그 기준에 부합하면 죄가 아니고, 미달하면 죄고 그래서 그 기준이 미달되면 조금만 열심을 내면 다시 죄인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 종교적인 모습이며, 선악체계를 스스로 정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수록 옛날에는 죄라고 생각도 아니 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죄로 여겨지지 아니합니까? 이러한 죄인임을 깊게 알수록 무엇만 바라보는 것입니까? 네 죄가 제하여졌고 사하여졌느니라, 라는 말씀만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죄사함이 십자가이기에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가 성령으로 자신의 죄인됨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을 통하여 날마다 자신의 죄인됨과 주님의 크신 능력을 그 은혜를 용서를 알아감으로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이사야 6:8-13  나를 보내소서  1999. 9. 1.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난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기에 교회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을 만남으로 죽어 마땅한 자임을 알아야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이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전에 어느 집사가 교사 월례회 중에 학생을 모으기 위하여 이벤트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길래 이벤트로 사람을 모으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러 가지 말씀을 인용하며 사람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하든지 해야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듯이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다리가 가려운데 팔을 긁어준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가려운 곳을 알고 가려운 데를 긁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유대인 사회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등의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킨다 하고 율법의 선생이라는 자들에 의하여 많은 짐들을 지고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러한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주님께 오면 이제 그런 짐이 아니라 새로운 짐을 짐으로 가벼워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만난 자라면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아니합니다. 참으로 자신이 죄와 악함이 가득한 자임을 아는 자라면 1년 365일 계속 십자가만 증거하여도 아멘하며 시원해 할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함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자꾸만 성경의 본질적인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외적인 일에 관심이 많아진 것은 기독교를 문화현상으로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김경래 교수의 글에서 잠시 인용합니다.
 
 
 
 
‘기독교가 대중화되면서 그리고 다채로운 성격을 띠면서 기독교의 문화화 라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신앙이 아닌 하나의 종교 내지는 정신문화로서 탈바꿈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현상으로 기독교가 사회의 문화운동을 한다고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고 있다. 사회참여, 문화개조 등을 구호로 외치고 있다. 이럴 뿐 아니라 한 주간에 예배당에 몇 번 다니고, 헌금은 어떻게 하고, 성가대 운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문제는 문화적인 요소일 뿐이다. 신학교 운용을 통한 성직자 양성, 장로 집사 등 제직분에 대한 규정, 심지어 예배의 형태 등도 신앙의 본질이 아닌 문화적이 요소이다. 이런 것은 얼마든지 변하는 것이다. 예배당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도 예배시에 정장을 해야 하는 것도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문화적인 요소들이다. 신앙의 본질은 놓치고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신앙 외적인 부분에 치우치다 보니 정작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간 곳 없어진 것이다.’
 
 
 
 
이 글을 요약적으로 인용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껍데기에 초점을 맞추어 왔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되어버린 것은 결국 말씀에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그렇게 흘러가게 하심으로 귀를 막고 눈을 막아 버리는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면이 과연 오늘 우리의 일반적인 생활과, 사고와, 가치관과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지 아니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봅시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의 부정함이 제단 숯불로 제하여 지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말씀에 이사야가 응답을 합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우리는 이 말씀을 한두 번 들어본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중고등부 수련회로부터 청년회에 이르기까지 ‘주여 나를 보내소서’ 라는 표어로 많은 행사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수련회나 집회의 모든 초점은 내가 가서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여야지, 그런 결심과 다짐을 하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냐를 보시면 이 말씀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나를 보내소서’의 응답에 하나님께서 이사야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는 내용이 9-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빨리 많은 사람을 깨우쳐 나에게로 돌아오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깨우쳐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까? 깨우쳐 돌아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막고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기독교의 문화관에 의하면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자는 식이였는데, 성경은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전도지와 전도교재 수십 종을 보았지만 이사야의 이 말씀을 기록한 전도에 관한 책자는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이고 신약은 그렇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보겠습니다.
 
 
 
 
  마 13:13-15절. “봉독”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이사야의 예언의 성취
  막  4:10-12절. “봉독”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심
  눅  8:9-10절.  “봉독”  이사야의 예언
  요 12:37-40절. “봉독”  주를 가리켜 예언함

 
 
 
 
결국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믿는 자들이 나오는 것은 이들이 어떤 상태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센스가 있거나 머리가 좋아서 알아들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이사야 6:11절을 봅시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 즉 눈 감기고 귀 막게 하여서 스스로 고침을 받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는 때가 언제까지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성읍이 황폐하고, 가옥이 없어지고, 토지가 전폐되고, 사람들이 멀리 옮겨지고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망하기까지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하여 그 가운데 십분의 일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십분의 일마저 망하고 난 후에 그루터기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씨로 다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고 심판받아 포로로 잡혀가고 망하게 된 후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씨를 통하여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단절입니다. 과거는 흘러 간 것입니다. 과거의 경력과 이력으로 무엇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이사야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자기의 전 존재의 부정함을 고백하듯이 이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아래 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싫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저 나의 공적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인데 그것을 몰라주고,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지는 돈 안 버니까 쉽게 말하지만 그런 피 같은 돈을 바친 것도 별거 아니라고 하니 돈 낼 기분도 안 나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깨달아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심판하여 망하게 되는데까지 입니다. 심판으로 망한 후에 남은 자가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들입니다. 그래서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처럼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러면 과연 어떤 자들이 그루터기이며 남은 자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에서 돌아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심판의 흔적을 지니고 오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실력으로 남아 있는 자가 아니라 주께서 은혜로 남겨두신 남은 자입니다. 이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예레미야 31:7-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포로된 자를 돌이키시는데 그들의 모습이 소경, 절뚝발이, 잉태한 여인,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큰 무리 중에 씩씩하고 건장한 자를 대표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왜 이런 자가 남은 자의 이름으로 돌아옵니까? 자기 능력이 아닙니다.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오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면 좋겠습니까? 만약 사파동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면 좋아하겠습니까? 결사반대 할 것입니다. 님비 현상이지요. 그런 시설을 싫어하는 것은 그런 인간은 인간 취급도 안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 그런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에서 돌아왔으니 그 심판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여 온갖 세상의 문화로 포장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힘을 추구합니다. 아론의 금송아지를 오늘날의 교회가 섬기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사야의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는 곳을 한곳 더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퀴즈를 하였지만 처음에는 3,000명 5,000명 전도되니까 나중에는 엄청난 숫자로 기독교인이 늘어나리라 생각되시지요. 그러나 사도행전의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역시 이사야의 이 말씀을 결론으로 맺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23-28절. “봉독” 성령이 충만한 바울이 전도합니다. 그런데 믿는 자도 있고 안 믿는 자도 있습니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 바울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스스로의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차단합니까?
 
 
 
 
로마서 11장 32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순종치 않게 하셨는데 누가 스스로 순종하여 나올 수 있습니까? 만약 스스로 순종하여 나온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순종함을 바라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 우리의 그 어떠한 잘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지가 어떨 때 동냥을 얻습니까? 불쌍해 보여야 합니다. 자기 자존심 지키는 거지는 거지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심판을 받고서 하나님 앞에 나온 자라면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것이 심판입니다. 이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런 십자가를 전해 보십시오. 이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사람 꼬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도는 틀림없이 사람들의 눈과 귀가 막히는 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4절을 봅시다. “봉독” 전도는 미련한 것입니다. 얼마나 세련된 전도방법들이 많이 나왔는지, 현대인의 가슴을 촉촉이 젖혀 주는 ‘이슬비 전도편지’랍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당신의 필요를 채워드리겠습니다. 무슨 장사하는 집입니까? 장사하는 집을 둘러엎으신 주님의 모습을 요한복음에서 보았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입니다. 이 거리끼고 미련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 역시 미련하고 거리끼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으로 눈멀게 하고 귀 막아 버리게 하는 전도입니다. 이런 전도에 아멘 하여 응답하는 자가 얼마나 적은지 여러분의 주변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7:1-25  스알야숩과 임마누엘  1999. 9. 8.

이사야 선지자가 6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자신이 부정당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것이 하나님을 만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때 불로서 정화를 받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부정당함과 불로서 정결함을 입는 것이 이제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부정당하고 정화를 받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는 말씀이 스알야숩과 임마누엘입니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뜻이고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지요. 이 정도만 기억하고 오늘 말씀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남쪽 유다의 왕은 아하스입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에 이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스만 잠시 살펴보자면, 아하스는 악한 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국제 사회의 흐름 속에서 강대국을 의지하여 자기 왕권을 지키려고 한 왕입니다. 전적으로 여호와만 의지하라는 이사야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의 원조를 요청하였고 앗수르 왕이 다메섹을 점령하였을 때 그곳에 가서 우상의 단과 구조와 제도를 보고 와서는 이것을 예루살렘에도 세운 왕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이방인의 신이 더 힘이 있어 보이니 그들의 섬기는 제단을 본받아 세운 그런 왕입니다.
 
 
 
 
이러한 아하스 왕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나라가 연합하여 남쪽 유다를 침공하는 것입니다. 침공의 이유는 앗수르가 신흥 강대국으로 등장하자 여기에 위협을 느끼게 된 아람 왕과 북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남쪽 유다를 공격하여 친 앗수르 정책을 펴고 있는 아하스 왕을 폐위 시키고, 반 앗수르 정책을 펼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으로 삼기 위하여 공격하여 왔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은 베가이고, 아람 왕은 르신입니다. 이들이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니 유다의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나뭇잎이 바르르 떨리듯이 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왕을 만나게 합니다. 왕을 만나는데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서 만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도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이름입니다. 즉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아들을 데리고 감으로 하나님의 남은 자만이 돌아오게 될 것을 보이시면서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바르르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가만히 좀 있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었기에 이렇게 떨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윗의 왕가를 이어간다면 다윗이 의지한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입니다. 벌벌 떨고 있는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연합하여도 그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나무로 불을 때어 밥을 하거나 소죽을 끓여 본 사람은 잘 아시겠지만 부지깽이를 가지고 불에 넣다보면 부지깽이 끝에 불이 붙지요.
 
 
 
 
그러나 이 불은 너무나 약하여 약간만 흔들어도 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연합한 세력이 부지깽이 끝의 불도 아니요, 꺼져서 연기만 나는 가만히 두어도 그대로 소멸하는 그런 세력이기에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이들의 권세는 별 것 아니다, 65년 안에 이 나라들이 망하리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약속을 믿지 못하겠거든 믿을 만한 표적을 구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표적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면서 거절합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모습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아하스가 믿지 못하니 표적을 구하여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하려고 하였으나 아하스가 거절한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구원을 준단 말인가 라고 아하스는 생각한 것입니다. 적군이 이미 쳐들어 왔는데 하나님의 약속만 믿으면 된다는 그 말을 못 믿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르신과 베가의 연합침공에 대비하여 자기 나름대로 준비해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 나라보다 더 강한 앗수르에 원병을 청하여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아하스 왕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군대를 보내 주든지 탱크와 미사일과 비행기를 보내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믿으라는 것을 믿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집념으로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아하스에게는 앗수르를 청빙하는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의 정치력과 사람들의 집념으로 이루어 내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불신의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징조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약한 여자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처녀에게서 나온 아이가 태어남으로 적을 물리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의 일차적인 성취는 두 나라가 망한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더 궁극적인 목표는 마태복음 1장 23절의 말씀입니다. 결국 메시아의 탄생으로 임마누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임마누엘의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임마누엘 그러면 우리는 좋게만 생각하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심판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심판을 통하여 스알야숩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아하스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앗수르의 군대 원조를 믿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믿었던 앗수르가 오히려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역대하 28:1-8, 16-27절을 봅시다. 아람 왕과 북 이스라엘에 의하여 엄청난 전쟁의 참화를 겪고도 또 다시 앗수르에 원조를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성전문은 닫아 버리고 아람의 신들이 도와서 강하여 졌으니 여호와를 버리고 그들의 신을 섬겨서 힘을 얻어 보겠다는 이 발상이 바로 하나님의 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라를 벌하기 위하여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몽둥이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임마누엘의 약속과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앗수르를 통한 심판이 어떤 모습입니까?
 
 
 
 
이사야 7:17절에 앗수르 왕이 와서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유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의지한 앗수르가 벌이 되고 삭도가 되어 너희를 괴롭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다 땅은 황무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황무하여 지는가 하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통하여 연명하는 것이면 그 땅의 남은 자는 겨우 먹고 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포도원이 질려와 형극, 가시밭이 되어서 들짐승이 거하고 사냥꾼이 사냥하는 곳으로 폐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불신앙의 유다를 심판하시고 그 심판의 기능을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행하시는데 그 심판 후에 스알야숩을 하시는 것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10:20-23절입니다. 그 날에 심판 후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야곱의 남은 자가 돌아오는데 어떤 특징을 안고 돌아옵니까?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전에는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이 구원인줄 알았는데 이제 그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였으니 이제야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고 주께로 돌아오는데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오직 남은 자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것을 땅끝까지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에서 주께서 임마누엘의 사건을 통하여 심판하시고 그 심판에서 남겨진 자만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께 심판을 받은 자로서 주님께 돌아왔습니까? 이 세상의 그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참으로 의지할 것이 못됨을 알았습니까? 이제는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는 것이 심판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는 오직 주님만 신실히 의지하는 자가 남은 자입니다. 이들만이 남은 자입니다. 이 세상의 모래같이 수다한 사람 중에서 임마누엘의 심판과 스알야숩의 과정을 통과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임을 아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8:1-15  마헬살랄하스바스  1999. 9. 15.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말은 ‘노략이 속히 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사람들이 다 알아볼 수 있는 문자로 큰 서판에 쓰라는 주님의 지시를 이사야 선지자가 받습니다. 노략이, 침략이 속히 온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는 것입니다. 이 노략이 온다는 사실을 제사장 우리야와 예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서 증인으로 세웁니다.

 
 
 
 
노략이 속히 오리라는 말을, 사람들이 잘 알아보는 글자로 크게 써 붙이고, 증인까지 세우는 것은 반드시 노략이 속히 임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을 통하여 스알야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유다 백성들이 심판받아 마땅하기에 임마누엘 하심으로 심판하셔서 남은 자를 남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헬살랄하스바스의 계시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자기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이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짓게 하십니다.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 하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를 침공한 온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수도가 다메섹과 사마리아입니다. 이 두 나라가 앗수르에 침략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략이 속히 오리라는 것은 앗수르가 북쪽으로부터 점령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점령이 다메섹과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유다까지도 덮쳐오는 것입니다.
 
 
 
 
5-8절. 유다 백성의 죄가 고발됩니다. 그 죄란 유다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였다는 것은 자신들의 힘보다 두 나라의 연합한 그 힘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버리는 것입니다. 실로아는 예루살렘에 조그맣게 흐르는 식수원입니다. 이 물을 히스기야 왕 때는 지하 수로를 파서 예루살렘 성안으로 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긴 연못이 실로암 연못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로아 물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은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유다의 힘을, 실로아 물을 상징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상태가 이런 것입니다. 자기들을 도와준다는 하나님의 능력은 간 곳 없고 연합군과 주변 강대국들의 힘은 강해져 가니 자기들도 힘을 원하는 것입니다. 조그맣게 천천히 흐르는 그런 정도의 힘이 아니라 거대한 강물 같은 힘을 원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하수 앗수르를 불러 오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세력을 유프라테스 강으로 비유합니다. 실로아와 유프라테스를 비교하자면 우리 뒷동네 개울물과 중국의 황화강과의 비교처럼 큰 차이입니다. 
 
 
 
 
앗수르가 유프라테스 강가에 발흥한 국가이기에 이들을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세력을 하나님께서 끌어 들이시는데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조그마한 실로아 보다 다른 것을 좋아하니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하여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에 원조를 요청하였으니 앗수르 왕이 구원을 베풀 줄 알았는데 구원은 커녕 오히려 유다를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의 세력이 유다 온 땅을 덮고 그 물이 유다의 목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유다의 멸망 가운데 그의 펴는 날개가 유다 땅에 편만한 것입니다. 심판 가운데 그 심판의 힘은 목에까지 차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편만하심은 온 땅을 다 덮고 있는데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만 남기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인 우리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합니까?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합니까?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싫어하고, 거대하게 몰려가는 세상의 강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대로, 세상의 판단에 좌우하지 말고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모습, 세상이 성공 지향적으로 갈지라도 교회는 미련하고 거리끼는 모습으로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왜 세워 놓았습니까? 그것이 기독교의 심볼이라고 세웠겠지요.
 
 
 
 
그러면 십자가는 죽음의 표지입니다. 그것도 비참한 저주의 죽음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형 방법은 교수형과 총살입니다. 민간인은 사형시킬 때 교수형이지요. 그런데 교수형을 공개적으로 행한다면 교수형 시키는 기구와 동그란 줄을 보기만 하여도 고개를 흔들며 지나쳐 가려고 할 것입니다. 십자가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세운 곳에 모여든다는 것은 나도 그렇게 죽는 사람입니다 하고 오는 것이지요. 이것 아니면 우리는 십자가를 내리고 황금송아지를 꼭대기에 걸고 모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늘 실로아 물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크고 넓은 힘 있는 유프라테스 강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실로아 물을 버리고 그것을 좋아하자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 큰 강물이 유대 땅을 덮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이 땅도 십자가를 걸어 놓기는 하였는데 그 십자가를 이용하여 함께 십자가에 죽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구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마다 보이느니 큰 예배당 건물이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1등에서 몇 등까지 한국에 있다고 자랑하고, 밤하늘에 술집 네온사인만큼이나 많은 게 붉은 십자가 네온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 없는 부흥을 이루었다고 자랑하였지만 그러나 유프라테스의 강물이 유다 땅의 목에까지 차듯이 이 땅의 교회가 모양만 십자가를 달고 있었지 속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프라테스의 강물이, 그들이 좋아하는 세상의 세력과 힘이, 한국교회의 목에까지 찼다고 보는 것이 무리한 것입니까?
 
 
 
 
이제 선지자의 멸망 선포가 이어집니다. 9-10절입니다. 너희들이 군대를 모으고 함성을 지르고 군비를 갖추고 작전계획을 세워 보아라, 그러나 결국 패망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적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유다의 적들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임하는 패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4절과 15절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 함정과 올무가 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이나 이스라엘이나 동일하게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러나 임마누엘 안에 있는 자는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11-1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이사야에게 알게 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라. 사람들은 다수 속에서 안전을 누리고자 합니다. 한번씩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해서 천국 가겠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없습니까? 그 때는 불안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다가도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니 뭐 별다른 사람 없는 것입니다. 천만 명이 넘게 교회 다니고 있는데 그들 안에서 내가 중간 정도는 되겠지, 내가 그렇게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고급 옷 받은 것도 아니고, 집사 권사가, 장로 목사도 그러는데 나 정도는 괜찮을 거야, 하면서 안전을 누리는 것입니다.
 
 
 
 
마치 숙제 안 해 갔을 때 동료가 많을수록 안심이 되듯이. 그러나 이런 거짓된 안심이 거짓된 확신과 함께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라는 것입니다. 천만 명이 다 옳다 하여도 예수님이 아니다 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비교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가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맹약한 자가 있다 하여도 그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맹약한 자가 있기에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라는 그들의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군사 동맹을 맺었기에 한국의 안보는 걱정 없다, 라는 그런 약속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자기들의 힘으로 스스로 보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는 것으로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두려워하고 놀라는 것으로 함께 두려워하고 함께 놀라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두려워하고 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쟁의 위협과 자기 보존의 두려움, 그러나 그런 것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놀라워합니까?
 
 
 
 
1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께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할살랄하스바스’ 침략이 속히 임하리라는 경고 속에서 세상의 두려워하는 것으로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놀라는 것으로 놀라지 아니하는 그런 자가 임마누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14-15절입니다.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됩니다.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걸림돌이 됩니다. 비록 교회에 나왔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 것 구하고 찾는 자로 부르게 되는 자는 결국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를 때에 주님이 나의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나의 꿈을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날마다 나의 의를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걸림돌의 의미를 찾아봅시다.

 
 
 
 
시편 118:22-23절.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것이로다.” 건축자가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새로이 모퉁이 돌이 되어 새롭게 집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로 된 것이기에 기이한 것입니다. 버림받지 않는 멋진 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버리는 돌입니다.
 
 
 
 
마태복음 21:33-46절을 봅시다. “봉독”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유대 백성들-그것도 다수의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배척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걸림돌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걸림이 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살려고 하면 죽으라고 하십니다.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이 죄라는 것입니다.
 
 
 
 
좀더 돈을 모으고 싶은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개인이 돈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교회가 헌금 많이 해서 부자교회가 되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까? 나는 자꾸만 땅의 것을 생각하고 싶은데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이래도 걸림이 되지 않습니까?
 
 
 
 
‘개코도 아니다’라고 하는 말이 기분 나쁘지 아니 합니까? 죽도록 충성하여도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일 뿐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기분 좋은 일입니까? 성경을 조금만 제대로 보면 아무도 예수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도 많은 사람이 예수 믿고자 몰려온 것은 전도자들이 일부러 걸림돌을 제거해 버린 것이 아닙니까? 처음부터 십자가 이야기 하면 잘 모르니 처음에는 족구 하러 오라고 해서 친하고 나면 그때 십자가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왜 우리 스스로 걸림돌을 제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걸림돌입니다. 이런 버림받은 걸림돌을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못 믿는 것입니다. 걸림돌이 되도록 해야 정말 믿는 자가 나올 텐데 걸림돌을 제거하고 예수를 디딤돌로 제공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걸림돌을 놓읍시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구별하는 것입니다. 미련하게 보이거나 구원의 능력으로 보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누가 걸림돌을 믿고 나옵니까?
 
 
 
 
이사야 28:16절을 봅시다. 시험한 돌이 시온에 세워지는데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합니다. 그런데 걸림돌이 된 버려진 돌을 누가 믿겠습니까? 로마서 9:30-33절. “봉독” 부딪히는 돌에 부딪히는 것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함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 당시는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디딤돌인 나의 의와 행함이 다 무너지고, 버려진 모퉁이 돌로 새롭게 세워 지기를 기도합시다.








이사야 8:16-22  아침빛을 기다림  1999. 9. 21.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방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방나라의 특징은 신은 오직 인간을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신을 섬기고 예물을 드리는 모든 행위가 오직 인간의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이방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는 자기들을 위한 신을 섬기게 되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1계명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말씀합니다.
2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를 위한, 즉 나를 위한 신을 섬기는 것이 곳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하여도 나를 위한 하나님 예수님 부르는 것은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 편이야,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야 하는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 함정,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봉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외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집을 향하여 낯을 가리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또 이미 기록된 율법을 통하여 말씀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싸매고 봉하신다는 것은 심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듣고 순종해야 할 주의 백성들이 말씀을 거부한 결과입니다. 이들이 말씀을 거부함으로 율법을 봉하게 하여 더욱 어두움 가운데 빠지는 것이며 봉하여 둠으로 나중에 이들이 심판받은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29:9-12절을 봅시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어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결국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모두가 눈이 감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는 신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미가야 선지자 때에는 400명의 궁중 선지자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여도 봉하여진 책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하나님의 심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만큼 성경이 많고 성경에 대한 주석도 수도 없이 쏟아지고 참고 서적이 여러 수만 종류가 있습니다만 과연 성경을 통하여  죄를 심각하게 고발하며 오직 주님의 긍휼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증거하는 책이 얼마나 되는지......
 
 
 
 
그저 이렇게 하면 교회가 부흥하고 저렇게 하면 복 받고 하는 그런 책은 인기가 있고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우리는 죄인이니 날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주를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자세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말씀에서 확인하며 살아갑시다, 하는 책이 귀합니다.
 
 
 
 
그런 종류의 책을 갈릴리 서점에 가서 찾았더니 겨우 두세 권 있길래 이 출판사 책이 왜 많이 없느냐고 물으니 책이 하도 안 나가 탈색도 되고 하여 반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가운데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거의 대부분이 성공의 비결을 담은 내용입니다. 쓸쓸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홍수 때에 마실 물이 귀하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때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17절에서 ‘야곱 집을 향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여호와를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이기에 오직 하나님을 기다리며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을 기다리며 바라보겠다는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받았지만 이사야만 아는 사실이 아니라 큰 통용문자로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알게 하였고 자기 자녀의 이름으로 계시된 내용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스알야숩과 마할살랄하스바스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것과 노략이 속히 임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노략이 속히 오지만 그러나 그 심판을 통하여 남은 자를, 은혜로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음으로 자신은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면하고 계실지라도. 이것이 오늘 우리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시류에, 세상의 대세에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하는 믿음이 말일을 당한 우리의 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한 상태, 그리하여 말씀이 싸매어지고 봉하여진 상태에 나타나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19절입니다. 다른 곳에 물어보러 가자는 것입니다.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어 보자는 것이지요. 이들이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것은 그들의 주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못 알아듣도록 웅얼거리며 주술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성경은 얼마나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는지 신명기 18:9-14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가나안 원주민을 하나님이 쫓아내신 이유가 이들의 가증한 일들을 인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스라엘 내부에는 온갖 접신자들, 초혼자들이 가득합니다. 입신 하였다 하고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낸다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에게 사람들이 물어보려고 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죽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지자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자에게 찾아가서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한 것처럼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인하여 신접자와 마술사를 찾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흉한 소문이 나고 전쟁의 위협이 가중되면 더욱 점치는 집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어려울수록 미신이 성행하는 것입니다. 잡지에 손명순 여사가 심진송을 만났다는 타이틀을 보았습니다. 권사가 무엇이 답답하여 점쟁이 무당을 만나는 것입니까? 심진송은 대학을 나왔고 용모도 무당 중에는 준수하여 세간에 인기가 많았고 ‘신이 선택한 여자’라는 책이 나오기도 한 무당입니다. 무슨 이유로 만났는지 그 내용은 보지 않았습니다만 무당에게 권사가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미국이 대통령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서약하지요. 그런데 많은 대통령들이 무당의 자문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무당을 찾는 것이야 이해는 되지요. 그러나 교회 나온다는 사람이 무당을 많이 찾는다는 것을 무당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야 아직 교회는 다녀도 예수는 안 믿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더 심각한 문제는 예수 이름으로 무당짓을 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예언기도 해준다고, 기도 받는다고, 신학교 들어오는 데도 어디에 가서 기도 받아 보고 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기는 살아야 한다는 그 우상적인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을 찾아가서 복채를 내고서 받아내는 말은 평안과 성공입니다. 때로 불길한 말을 하더라도 좋은 처방만 내리면 액땜을 하게 되니까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무당은 큰 굿 한번 하라는 것이고 예수 이름으로 하는 무당은 자기 기도원에 헌금 크게 한번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거짓 평안입니다.
 
 
 
 
예레미야 5:30-31절을 봅시다. “봉독” 선지자는 거짓을 예언합니다. 제사장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립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것을 좋아합니다. 거짓 선지자를 좋아하는 것은 평안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6:12-15절을 봅시다. “봉독”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탐람하며 모두가 거짓을 행하면서 서로 평안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지금 큰일이다, 심판이다 외쳐야 하는데 반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싸매고 봉하여 둔 결과입니다.
 
 
 
 
이사야 8:19-20절을 다시 봅시다.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시면서 마땅히 구할 바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율법의 말씀과 맞는지 아닌지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눈으로 보니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 이 백성은 완전히 망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무당들의 말이 하나님의 율법과 증거의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침빛을 보지 못하리라. 아침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평안을 빌어주는 신접한 자를 찾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말한다는 선지자와 제사장들까지도 거짓 평안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니 빛이 없는 것입니다. 온통 캄캄합니다.

 
 
 
 
21-22절을 봅시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지니 헤매며 곤고하며 주리게 됩니다. 그들이 주리게 되는 것은 그들의 범죄로 인한 당연한 결과인데 오히려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자신의 죄는 모르고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세상이 이 모양이냐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온통 흑암입니다. 캄캄합니다. 위를 보아도 땅을 보아도 캄캄합니다. 흑암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캄캄함 중에 한 빛이 비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다음번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오늘은 본문만 읽어 봅시다.
 
 
 
 
이사야 9:1-3절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자들이, 사망의 그늘에 있던 자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남겨진 자들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봉하여 짐으로 캄캄함에 사로잡힙니다. 이들은 말씀의 증거보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신접자와 무당을 찾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결국은 흑암 안에서 아침빛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와 그의 추종자는 아주 극소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흑암 속에서 자기들의 이익을 따라 달려가고 있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아침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하게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큰 빛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빛을 받은 자는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온통 흑암입니다. 캄캄함입니다. 그러므로 흑암 중에 빛을 보게 되니 다른 것은 시시한 것입니다.
 
 
 
 
어제 부산에 갔다가 창원터널을 들어오는데 터널 안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청소하기 전에는 그런대로 깨끗해 보였는데 한 쪽은 청소가 되었고 한쪽은 청소를 하고 있는 곳을 보니까 밤인데도 너무나 뚜렷한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검은색 한쪽은 흰색으로 보일 만큼 차이가 났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빛을 보았기에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빛을 보지 못한 자는 빛 가운데로 나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빛을 보아야 합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이 율법에 맞는가, 아닌가? 이제는 사람들의 말하는 바가 이 복음에 맞는가, 아닌가를 생각하며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무엇보다 더 확실한 예언인 기록된 이 말씀을 더욱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9절을 봅시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온갖 세상의 많은 성경적이라는 말들이 참으로 그러한가 하여 그 말씀이 밝은 아침빛처럼 떠오를 때까지 더욱 말씀에 주의를 더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9:1-7  여호와의 열심  1999. 9. 29.

밝은 낮에는 불빛이 잘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에는 적은 빛이라도 아주 밝은 것입니다. 선지서 전체의 분위기는 어둡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기 때문에 어둡지만 그러나 그 심판의 어두움 가운데서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도 캄캄함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종교들이 제각기 진리라고 외치고 그 중에서도 기독교는 더욱 독특하게 자기들만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들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가 기독교를 보면 역시 기독교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상’ 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데 동아일보 1977.1.1에 발표한 시의 일부입니다. 제목이 [내가 모세의 선지와 진노를 빌어서]라는 제목입니다.
  

 
 

  내가 모세의 선지와 진노를 빌어서 말하노니
  새해 너희가 사람다운 삶을 되찾으려면
  너희가 지금 우러러 섬기고 있는 황금송아지를 먼저 몰아내야 한다.
  너희가 너희 식탁에서 유해식품을 사라지게 하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너희가 너희 고장에서 매연을 없애려면
  너희는 먼저 그 황금송아지를 몰아내야 하고...

 
 
 
 
이러한 내용으로 집안에서 단란, 이웃과 화목, 아내의 정조, 살인 강도, 비정과 소외,,,이러한 문제들이 황금송아지라는 우상숭배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온통 황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캄캄하고 어두운 시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추구하는 바는 좀더 큰 황금송아지를 가지지 못하여 안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황금송아지를 참으로 배척해야 할 교회 안에서까지 황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으니 어찌 캄캄하고 어둡지 아니합니까?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의 일이라고 교회의 일이라고 탐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전체가 캄캄한 어두움입니다. 제사가 있고 제사장이 있지만 그들은 그들의 탐심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 캄캄함 가운데서도 더 캄캄한 곳은 갈릴리 지역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가장 변두리 지역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 지역이 흑암과 고통과 멸시를 받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눕니다.

 
 
 
 
북쪽은 갈릴리, 중간은 사마리아, 남쪽은 유대, 이렇게 세 지역으로 구분하는데 갈릴리 지역은 남쪽 유다에서 보면 가장 북쪽의 변방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의 갈릴리여, 라고 하는 것은 이곳이 영토분쟁이 많은 곳이었기에 이방인이 섞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쪽의 강대국이 쳐들어오면 가장 먼저 공격을 받는 곳이 갈릴리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인 예루살렘보다 이들은 유린을 먼저 당하고 멸시와 흑암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흑암의 땅이 이제는 흑암이 없으리라는 말씀이 9:1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비천한 곳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있었기에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낼 수도 없었고, 빛을 찾아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7절 끝에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시기라고도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열심, 여호와의 질투가 이런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 빛이 비취는 때에는 3-4절의 일이 일어납니다. 그 나라가 창성하고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 같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무거운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어지는 것입니다. 그날은 마치 미디안의 날과 같을 것이라는 합니다. 미디안의 날이 어떤 날입니까? 기드온이 300명으로 미디안의 수많은 군대를 물리친 사건입니다.
 
 
 
 
사사기 7:1-8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어둠의 땅에 빛을 비추어 구원하시는 전쟁은 미디안의 날과 같다는 것입니다. 미디안을 치는 전쟁의 모습이 사사기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도 몇 번이나 시험을 해보지요(양털) 그리고 나서 군대를 소집하니 3만2천명이 모였습니다. 적군은 몇 명입니까?
 
 
 
 
사사기 7:12절에 보면 메뚜기 떼같이 온 들에 가득하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 모래 같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숫자는 죽은 자만 8:10-12절에 보면 13만 5천명입니다. 3만2천:13만5천입니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은 계속된 침략으로 무기를 갖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기구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까지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기도 없고, 평소에 훈련된 군인도 없는데 ‘수’라도 많아야 적을 물리칠 텐데 겨우 3만2천을 하나님이 많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들이 이기면 내 손이 나를 이겼다고 자긍할까봐서 수를 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사람, 집에 가라고 하니 2만2천 돌아가고 1만이 남았습니다. 그것도 많다고 하셔서 냇가에 물을 마시게 하여 또 숫자를 추려내는 것입니다. 엎드려 개처럼 먹은 자는 추려내고 손으로 물을 떠서 먹은 자는 3백 명입니다.
 
 
 
 
3백 명으로 전쟁을 하라는 것입니다. 적군은 13만5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드온과 3백 용사’라고 합니다. 3백 명은 두려워하는 자도 아니고, 물을 떠먹을 때 사주경계를 잘하는 용사라고 그래서 일당백의 사람들이기에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사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적은 숫자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3백 명은 무기도 하나 없이 횃불과 항아리로 고함 한번 지르니 적들이 서로 찔러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망간 1만5천도 다 죽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전쟁입니다. 기드온과 3백 명이 돌아올 때 백성들이 환영하면 이들이 뭐라고 하였을까요? 우리가 아닌데, 하나님이 하셨는데... 이 말이 겸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3백 명을 보낸 것은 증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수가 많아야 이긴다 하든가, 아니면 적어도 일당백의 용사여야 한다는 식으로 이 성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전쟁을 이해 못하니 오늘날 사람들이 힘을 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힘을 모을수록 더욱 주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전쟁을 하십니까?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 손으로 구원을 얻었다 하지 못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어떤 빛을 비추어 주시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4:13-1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는 베들레헴입니다. 자라나시기는 나사렛입니다. 공생애의 주 활동지역은 갈릴리, 스불론, 납달리,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는 백성이 영화롭게 되고 빛을 보게 되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이사야서는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떤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까? 미디안의 날과 같은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대를 동원하지 아니하십니다. 힘 있는 자를 부르지 아니합니다. 어부들을 부르시고 세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르는 제자들의 생각은 미디안의 날과 같은 전쟁이 아닙니다.
 
 
 
 
물론 결과는 적을 무찌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적은 수, 보잘 것 없는 군대의 모습이 아니라 천하를 호령하는 그런 영웅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아이들은 대업을 이루어야 하는 일에 한갖 방해나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 간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착하거나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닙니다. 어린이는 약한 자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은 영웅이 아니라 비참하게 실패하여 죽어가는 한 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모두가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전쟁을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는 내가 세상에서 잘되고, 예수 믿는 우리집이 세상에서 잘되고, 우리나라가 잘되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잘 전해질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그런 길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은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날과 같이 구원을 베푸시는데 어떤 자를 보냅니까?
 
 
 
 
6절에 보니까 한 아기가 나옵니다. 영웅이 아닙니다. 슈퍼맨이 아닙니다. 한 아기입니다. 아기가 무슨 전쟁을 합니까? 그러나 그 아기가 한 아들입니다. 이 아기로 온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모든 권세가 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입니다. 이 분이 다윗의 위에 앉아서 영원무궁토록 그 나라를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아기로 온 분이 이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시편 8편을 봅시다. 1-2절입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데 주의 대적을 누가 물리칩니까?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는 것입니다. 전쟁에 아이는 걸리적거리는 존재입니다. 젖먹이는 더하지요. 그런데 주님의 대적을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셔서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음만 기다리는 자들에게 한 아기를 보내셔서 빛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아기는 대적을 물리친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권세로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였고 비참하고 저주 받은 죽음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의 전쟁은 이러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사람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열심은 힘을 쌓는 일에 열심이지만 힘을 빼는 것은 죽음으로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열심은 인간의 기대와는 반대로 한 아기를 보내셔서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었던 자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러면 이러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한 아기로 오셔서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 지신 주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를 따릅니까?
 
 
 
 
고린도후서 12장 9절입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니라” 약함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습니까? 자기의 약함을 숨기기 위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추석에 집안 식구와 친척을 만날 때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자를 보았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는 세상에서 제대로 대우를 못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하여 집시다, 하는 교회를 다니겠습니까? 힘을 축적하지 맙시다. 힘을 뺍시다. 그런 것이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열심만이 이런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 교회라면 힘을 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이 하나님의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3: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세상에서 약하여도, 망하여도, 실패하여도 상관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만들어 진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사야 9:8-10:4  여호와의 진노  1999. 10. 6.

시편 7편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많이 나셨으면 매일 분노하실까요? 우리는 하나님, 그러면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 생각하듯이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 주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에 분노하시며 진노하시는지를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알고 또한 죄의 심각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4번이나 꼭 같은 후렴구가 나옵니다. 그것은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라는 말씀입니다. 12절,17절,21절,10:4절입니다. 이 네 단락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왜 쉬지 않고 계속되는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분노하시고 계시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8-12절입니다. 교만과 완악의 죄를 고발합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합니다. 지금 지칭되는 이스라엘은 북왕국입니다. 9절에 보면 에브라임과 사마리아라고 합니다. 에브라임은 북왕국 열지파 중에 가장 세력이 큰 지파로서 대표적인 지파입니다. 그리고 북왕국의 수도가 사마리아이니 북왕국을 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도 이 죄의 지적에서 예외는 아닌 것입니다. 이들의 범죄는 교만하고 완악한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벽돌이 무너지고 뽕나무가 찍혔으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데 회개하고 돌아오기는커녕 무얼 하고 있습니까?
 
 
 
 
벽돌은 무너졌으나 다듬은 돌로 대신하고 뽕나무는 찍혔으나 백향목으로 대신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아주 우습게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고 자기들의 힘으로 더 든든히 서보겠다고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교만하고 완악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르신의 대적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르신은 아람 왕인데 이스라엘과 동맹을 하였지요. 그런 르신 보다 강한 나라를 일으켜서 르신을 대적하게 하고 동맹국이였던 아람까지 이스라엘을 치고 블레셋까지 이스라엘을 삼키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하시고도 하나님의 손이 계속 펴져 있으리라는 것은 이들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적용을 해보아야 합니다. 국군은 말할 것도 없고 향토예비군이나 민방위의 노래에 들어가는 가사가 대부분 내 나라는 내 손으로 지킨다는 것입니다. 내 마을, 내 직장을 내가 지킨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지켜주신다고 언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택한 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려고 하니 하나님이 대적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파괴가 일어나면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래야 하는데 오히려 내 나라는 내 손으로 든든히 지키자는 것이 하나님 앞에 완악이고 교만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말씀을 대한민국 전체에 적용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적용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고 유지시키고 교회를 사수한다고 합니다. 주님은 지금 놀고 계십니까? 아니지요.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을 믿는 일인데, 믿는다는 것은 나는 능력이 없으니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는 것이지요. 자신에게는 어떠한 믿을만한 요소가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나의 의지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사람의 집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출석하고 헌금하는 교회를 사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는 완전한 교회를 사모하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자들의 총회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고 하셨는데, 아니야, 다듬은 벽돌로 다시 세워야 해. 백향목으로 새로 심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진노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둘째, 13-17절입니다. 지도자들의 부패입니다. 13절에 보시면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때리면 자녀가 부모의 품으로 파고들면 더 이상 때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반항한다고 버티면 더 때리지요.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치시는데 돌아오기는커녕 더 어긋나게 나가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아니하는 이들의 머리와 꼬리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머리와 꼬리를 종려나무와 갈대로 말하면서 이들은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이들은 다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백성을 인도해야 하는데 인도가 아니라 미혹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듯이 장로와 존귀한 자들과 선지자들이 거짓 것을 가르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이 더 많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도자만 벌하면 되는데 왜 백성까지 함께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까?
 
 
 
 
16절에 인도를 하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도를 받는 자도 동일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이 백성이 각기 하나님을 모독하며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정만 아니라 고아와 과부까지 다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에게 호의적이신데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크시면 이들까지 다 심판을 하시고 그런데도 분이 다 풀리지 않아서 여전히 진노의 손을 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도자 뿐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도 다 한통속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부산에서 파이낸스 사건이 터져서 난리가 났지요. 물론 높은 이자로 유혹하여 돈을 끌어들여 자기 배를 채운 놈들이 나쁜 놈이지만 정상적인 은행의 금리보다 두 배, 세 배 이자를 많이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자기 욕심에 끌린 자들도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백성들도 좋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5:30-31절을 봅시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거짓으로 예언하고 제사장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이것을 백성들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잘못은 목사들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성도들의 책임도 큽니다. 그러한 목사의 말을 듣고 좋아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핑계가 통할 것 같습니까? 저는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는데요, 이런 말이 통하겠습니까? 성경은 괜히 주어졌는가, 왜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 상고하지 않았는가,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를 왜 무시하였는가, 그렇게 책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도 성령의 인도도 다 싫은 것입니다. 그저 내 귀에 좋은 소리 해주니 좋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잘하면 천국도 가고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산다니 그런 말에 우리가 혹하여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가르친 자도, 그것을 좋다고 따라 다닌 자도 다 함께 망하는 것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세를 당한 때에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앞뒤를 보아가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더욱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가장 간단한 구분은 그 말씀이 나를 죽이는 쪽으로 몰고 가는가, 아닌가를 살펴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세상에서 예수 믿는 자들이 땅의 소망과 땅에 비전을 둔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기에 본능적으로 땅의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몸이 땅에 속하여 있어도 위로부터 난 자는 위의 것을 찾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5절입니다. “봉독” 땅에 있는 것을 찾지 말고 위엣 것을 찾는 사람, 땅의 지체를 죽이는 사람, 이런 자가 위로부터 난 자입니다. 이런 말씀이 불쾌합니까? 그러면 교회 나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위로부터 난 자라면 이런 말씀이 크나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9:18-21절.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자기의 자식을 삶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북왕국의 대표적인 두 지파가 서로 전쟁을 하고 또 연합하여 유다를 치기도 하는 무법천지의 세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입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손이 펴져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10:1-4절. 이러한 혼란의 연속이 계속되면 결국 가진 자와 쥔 자들이 가난하고 약한 자를 더욱 학대하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단지 밥 먹기 위하여, 굶어 죽지 않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탈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부들은 잘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약자가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법은 이미 하나님께서 율법과 규례로 주셨습니다. 종교적인 면만 아니라 생활의 구체적인 경우까지 다 법으로 정하여 놓았습니다. 예를 들면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인 경우와 소가 소를 받아 죽인 경우를 다 말하며 그 소가 들이받는 습관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 다르도록 세세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법을 버려두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하여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며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사라지고 힘 있는 자들의 강포만 가득한 이 땅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닥치는 환난과 심판의 날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로 되어 엎드려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모습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이 큰소리치는 곳이 되어 버리면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심판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회개할 때입니다. 헛된 꿈을 ?아 갈 때가 아닙니다. 며칠 전에 김남준 목사님의 설교를 방송에서 듣다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 자랑할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갑작스런 부흥을 자랑하는 것이 틀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계교회가 한국교회에서 배워가는 것은 사람 모으는 기술을 배워 간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기독교 신문에서 이런 광고가 나왔습니다. 쟁쟁한 목사들 얼굴과 함께 ‘2000년 한국교회성장 국제박람회’라는 광고입니다. 박람회란 상품을 전시하여 팔려고 하는 곳이지요. 그런데 한국교회를 상품으로 포장하여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방법을 도입하는 다른 나라들조차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사야서를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읽어 보고서 하는 말인지 이사야 6장의 이사야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눈을 감기고 귀를 막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사람들을 모으는 비결을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잘하고, 가정 세미나를 잘하고, 새신자를 잘 관리하고, 제자훈련을 잘하면 교회가 부흥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고생고생 하여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네가 나에게 무슨 보탬이 되느냐, 너는 죽은 자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진노가 그렇게 쏟아지고도 여전히 손이 펴져 있다는 이 하나님의 진노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내용을 한 번 더 정리하면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을 삼기 원합니다. 교만하고 완악함.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범죄-거짓 것을 가르치고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도 백성들이 좋아함. 자신과 교회와 이 땅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의 긍휼을 통하여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도록, 허상을 보지 말고 실상을 보도록 하나님의 분노를 우리의 마음에 깨닫도록,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을 둘러엎으신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사야 10:5-34  앗수르의 심판과 남은 자의 돌아옴  1999. 10. 13.

이사야 9:8-10:4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인하여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여기고 우리는 더 든든히 우리를 세우리라는 교만에 대하여 계속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거두어지지 않고 펴져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한 심판이 초래된 것은 교만과 지도자와 백성들이 함께 미혹이 된 것이고 학대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은 매를 드시는데 그 매와 몽둥이가 바로 앗수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몽둥이로 들어 쓰인 앗수르가 자기들이 잘나서 열국을 무너뜨린 것처럼 교만하여지자 하나님께서 이 앗수르도 심판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나 앗수르나 간에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10:5-11절입니다. 5절에서 ‘화 있을진저 앗수르여’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표적이 이제는 앗수르로 돌려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와 분한의 몽둥이로 앗수르를 사용하시는데 이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된 줄 아는 것입니다. 5-6절은 하나님의 의도하심(도구)인데 이들의 의도(자기 능력)는 7-8절입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무찔러 왔는데 앗수르가 북쪽에 있으니 북쪽에서부터 유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 갈로, 갈그미스, 하맛, 아르밧, 사마리아를 무찔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상을 부순 것처럼 유대의 신상도 부수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고대의 전쟁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신이 힘이 더 세기에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정복한 것은 그들의 신들 보다 앗수르의 신의 힘이 더 세기에 유대의 신도 부수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앗수르의 교만입니다. 지금 유대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잠시 몽둥이로 앗수르를 사용하시는데 이들이 교만하여져서 자기들의 힘으로 된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 앗수르를 통하여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징계하셔야 하는 것이고 하나는 앗수르의 교만도 심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선입니까? 먼저 이스라엘의 범죄를 징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12절에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치시기 위하여 몽둥이를 들으셨으니 먼저 예루살렘을 치시고서 앗수르도 치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매를 맞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다른 것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을 막아내기 위하여 앗수르를 원군으로 불렀기에 하나님보다 세상의 큰 나라의 힘을 원한 유다를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유다의 내부에 있는 죄악도 앗수르를 벌하시면서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고 또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무엇에 대하여 분노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앗수르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분노하십니까?
 
 
 
 
12절에서 14절입니다. 앗수르의 범죄는 완악한 마음과 높은 눈의 자랑인데 이것은 결국 자기들의 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데 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들이 잘나고 강해서 많은 나라를 정복한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의 자랑이란 13절에서 14절에서 보면 자기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다, 나는 총명한 자다, 그래서 열국을 옮기고 그 재물을 약탈하였다, 나는 용감하다, 그래서 여러 나라를 낮추고 나의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을 때에 열국은 마치 새의 보금자리에서 어미 새가 도망가고 알만 가져오는 것처럼 정복하여도 어느 누구 하나 꼼짝하는 자 없었다, 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범죄도 이런 모습입니다. 나의 나된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고 자신의 실력과 능력인줄 아고 자신의 지혜인 줄 아는 것은 앗수르의 죄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착각 속에 교만해진 앗수르를 비유로 설명하는데 15절과 16절입니다. 그 비유는 도끼와 톱과 막대기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도구들입니다. 주인이 알아서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주인을 움직이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가 하는 것입니다. 도끼가 찍는 자에게 자랑하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큰 체 하겠으며, 막대기가 막대기를 드는 사람을 좌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앗수르가 이러한 꼴이라는 것입니다. 도구가 도구를 만든 자를 우습게 여기면 그 도구를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도구란 언제나 주인의 손에서 주인의 뜻대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도구의 본분입니다. 어떤 그릇은 천하게, 어떤 그릇은 귀하게 사용하는 것이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도구가 뭐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도구의 신분을 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도구란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면 됩니다. 그런데 도구들이 데모를 합니다. 나를 왜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았는가 하는 반항입니다. 더 나아가 도구 스스로 자기 힘을 발휘하려는 것입니다. 주인이 도구를 사용하여 작품을 만들어 놓았으면 주인만 영광을 받는 것이지 도구가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도구들이 더 설치는 바람에 주인이 사라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도구들의 잔치’입니다. 나를 쓰신 분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쓰일 수 있는 도구에게 초점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도구가 주인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것이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도구란 주인이 나를 사용하심에 대한 감격과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수많은 도구 중에 나를 사용하셨으니 오직 당신의 도구로 삼으셔서 당신의 뜻만 드러나게 하소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잠시 도구로 사용하시니까 자기가 뭐나 된 것처럼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 할 때 여러 가지 일을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은사를 주신 분의 뜻을 따라 성도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은사를 자신의 특권인양 자랑하는 것은 모두가 앗수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부수어 버리고 다른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16절에서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하나님이 빛이시오 불로서 하루사이에 그 가시와 질려를 불살라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적은 수만 남게 되어 아이라도 능히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심판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던 앗수르를 심판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의 하실 일은 앗수르가 유다를 쳐들어오는 일입니다.
 
 
 
 
그 모습을 28절에서 3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북쪽에서 유다 쪽으로 내려오면서 다 정복을 하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얏, 미그론, 믹마스, 게바, 기브아, 갈림, 라이사, 아나돗, 맛메나, 게빔을 정복하고서는 이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공격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들의 교만을 인하여 유다를 일부 포위하고 치기는 하지만 33절과 34절에서 보시면 앗수르를 레바논에 비유하니까 이 레바논의 세력이 더 강하신 분 하나님께 작벌을 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벌 심판의 한 예로 열왕기하 19:20-28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앗수르가 히스기야 왕 때 유다를 침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35절에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룻밤 사이에 18만 5천명이 다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 산헤립이 겨우 도망하여 자기 신에게 절할 때 자기 부하에 의하여 죽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복한 그 나라의 신들이 자기의 신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큰소리치며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던 그 앗수르 왕이 자기 신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앗수르를 사용하시지만 앗수르가 교만하여지자 앗수르까지 심판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쪽만 일방적으로 보호하시면 되실 텐데 하나님은 양쪽을 다 치시는 것입니다. 이런 면이 우리에게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면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 주어야 하시는데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배신하면 어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언약을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그 무엇도 의지할 수 없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를 가려내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0장 20절에서 23절을 한 번 더 봉독합니다. “봉독” 이렇게 심판을 하신 후에 하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 남기신 자만 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아들 이름이 스알야숩, 즉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남은 자는 어떤 자입니까? 남은 자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앗수르 같은 힘을 의지하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다가 심판을 받았기에 다시는 그런 것을 의지하지 않는 자가 남겨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만 진실히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는 다수입니까? 소수입니까? 소수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을 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2절, 23절에서 하나님이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일-공의의 심판을 땅 끝까지 시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는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유다와 앗수르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남은 자입니까? 참으로 세상의 헛된 것을 의지하지 않고 진실히 주님만 의지하고 계십니까? 참으로 자신의 어떠한 능력과 실력과 가능성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 60억의 인구가 다 진리라고 추구하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긍휼만 의지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이 남은 자의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자신이 힘이라고 믿었던 세상의 힘이 오히려 자기를 심판하는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러한 세상 것을 의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9:27-33절입니다. “봉독”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남은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남겨주심으로 남은 자입니다. 자기의 의로 남은 자들이 아닙니다. 심판하시면 다 끊어지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다윗과 약속하신 그 언약을 기억하고 조금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남겨진 자들은 심판에서 남겨졌기에 자신들이 심판을 이길 만한 능력이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을 따라 남겨 두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래알처럼 많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자신의 의로 남아진 자는 오직 한 분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주님의 약속을 따라 긍휼을 입고서 겨우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자기의 의로 남은 분이 되셔서 그 의를 이제는 전가해 주심으로 이방인도 남은 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 끊어진 이유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행함에 의지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앗수르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행함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남은 자는 심판가운데서 나왔기에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을 베풀어주신 분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남은 자의 자세로 오직 남겨주신 그 분의 은혜만 찬양하는 것이 남겨진 자의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이사야 11:1-16  메시아 예언과 그의 다스림  1999. 10. 20.


이사야서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아주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메시아의 예언을 잘 보면 초림과 재림이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이 되는 것을 ‘선지자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멀리 산봉우리를 바라보면 산들이 중첩되어 보이듯이 선지자의 예언이 나중의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도 그처럼 초림과 재림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 예언에서 초림과 재림의 내용을 구별하여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만 오면 전 세계를 통치하는 그런 메시아, 그리하여 현세적이고 물리적인 그런 메시아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재림 예수님을 초림 예수님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수많은 재림 예수가 있습니다. 이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뭐라고 공통적으로 말하는가 하면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에게 배척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재림 예수님이 어떻게 오시는지를 모르기에 하는 말들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아무도 예수님을 증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추종하는 그런 자를 메시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를 통하여 메시아가 어떻게 오시며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더욱 풍성하게 알아 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1절을 봅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옵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타나는데 왜 이곳은 이새, 다윗의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초림 때의 요셉과 마리아의 가문이 화려한 왕가의 위치가 아니라 평범한 오히려 가난한 가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소의 메시아적인 상(像)으로 생각하는 영웅적인 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위인들의 전기들을 보면, 그들의 태어남도 영웅적인 배경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은 믿는 자만 믿는 것이고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연약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싹도 여린 것의 연약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러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결실이 있게 되면 어떠한 속성이 나타납니까? 
 
 
 
 
2-5절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분은 어떻게 활동하십니까? 여호와를 경외함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 싹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였는데, 바로 이분이 우리는 예수님임을 잘 알고 또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무르시고, 성령으로 인도를 받으시며, 성령으로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셨으며(히9:14), 성령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롬 8:11). 이처럼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 메시아의 기능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이 지혜와 총명이며 모략과 재능이며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메시아를 좋아할까요? 사람들의 기대하는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메시아는 세상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야 믿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알게 되고 그 삶의 모습이 반복되어 지는 것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자면 3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것이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즐겁습니까? 아니면 짐이 됩니까? 적당히 종교생활 하려면 사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즐거운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피곤하고 힘들고 귀찮게 여겨진다면 우리는 심각한 질병에 들어 있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종교인이 아니었는지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기쁨이 되는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즐거움인가? 다른 것 다 없어도 예수님만 계시면 기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아가 임하시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6-9절입니다. 적대관계가 사라집니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고 어린 아이의 손에 이끌리며, 암소와 곰이 그 새끼들이 함께 어울리며 사자는 소처럼 풀을 먹고 독사 굴에 어린이가 장난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언어’라고 합니다. 마치 한편의 그림처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아의 다스림이 있는 곳에는 다시는 적대감이나, 힘이 있다고 약한 자를 괴롭히거나, 상함이나, 해함이 다시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 시에 모든 피조물도 새롭게 되는 것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만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신음하며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8-22절. “봉독” 이러한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 질 때는 이사야 11:9절에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는 이러한 것을 이미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야 당연한 것입니다. 힘 있다고 큰소리치거나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자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형제자매라도 그가 참으로 주님의 은혜로 구속 받은 백성이라면 우리는 모두가 꼭 같이 대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이 통하지 않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세상의 잘남이 교회에서조차 잘남으로 통한다는 것은 주님의 다스림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교회갱신협회’라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한 내용 중에 우리는 가난한 자보다 부자를 더 사랑한 것을 회개합니다, 라는 문구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가 교회 아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는 다시는 해됨도 상함도 없는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라면 당연하게 서로 귀하게 여기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를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은혜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다스림,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의 다스림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은 주의 재림으로 완전하고 온전하여 질 것입니다만, 지금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그 나라를 맛보아야 합니다. 이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 안에서 맛보아야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더욱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주님을 알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하는 분에 대한 당연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격, 취미, 생활습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계획까지 다 알고 싶어 하듯이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면 주님의 그 사랑을 알아 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 날’입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타나서 만민의 기호로 서게 되면 열방에서 주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열방이 어떤 기호를 보고 나오는 것입니다. 기호란 표식입니다. 청군, 백군 나눌 때 청군의 기호는 청색이고 백군의 기호는 백색이듯이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 열방의 기호로 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기호로 삼아 이스라엘의 ?긴 자를 모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 그 날에 앗수르, 애굽, 바드로스, 구스, 엘람, 시날, 하맛,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와 에브라임이 서로 시기하지 아니하고 다른 대적들을 물리치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민 중에 흩어진 주의 백성들을 모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이러한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구하려 오셨지 이방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를 구원의 반열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5-6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복음 15: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노라 하신데”
 
 
 
 
예수님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님께 나아갈 길이 열린 것은 이스라엘 사람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바로 가나안 여인의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 즉 이방인이 구원받는 문제에 대하여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겠습니다.
 
 
 
 
로마서 11:13-24절입니다. “봉독” 이방인에게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일부가 잘려 나간 대신에 우리가 접붙여졌고 우리의 구원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시기케 하여 그들도 구원케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나타나는 기호가 무엇입니까? 이방인도 십자가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차별이 없이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1-22절입니다. “봉독” 유대인과 이방인의 넘을 수 없는 이 벽을 무엇으로 무너뜨리고 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제 만국의 기호로 높이 세워진 기호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보고 주의 긍휼을 입은 백성이 만국에서 주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세상에서 감추어진 것입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십자가는 하나의 사형 형틀입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그런 십자가입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의 기호가 됩니까?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자랑이며 구원의 능력이 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자격 없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오게 하신 이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섬김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라는 고백이 언제나 나오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사야 12:1-6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함  1999. 10. 27.

이사야 12장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곳이 136편이나 된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한 곳만 말씀을 보자면 출애굽기 15장입니다. 지금 포로에서 해방되어 나와서, 적군을 자기들이 손도 대지 않았는데 홍해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노래로 감사하는 내용이 출애굽기 15장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노래를 부른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풍성하고 좋은지를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 조건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야 감사를 합니다. 승진을 한다든지 취업을 한다든지, 병에서 건강 얻음, 결혼, 생일 등의 감사를 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대로 알게 되어야 제대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조건적인 감사만 하다가 보면 나에게 손해가 닥치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어디에 갔는지 없는 것입니다. 승진 못해도 감사, 취업 못해도 감사, 병이 들어도 감사, 손해를 보아도 감사,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구원의 은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이런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여러 가지 감사의 제목을 뒤집어 보면 그러한 조건을 허락하지 않으면 감사 안하겠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한편의 압력행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나 이렇게 감사하는데 더 좋은 일 안 일어나면 감사 안 할 테니 알아서 하시오, 이런 식의 감사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상관에게 뇌물을 바치는 이유는 나중에 한자리 부탁해, 하는 압력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살다보니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십일조 하는데 이번 달 손해 안 나게 해주셔야 됩니다, 하는 식입니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조 집사님이 아는 어떤 집사님이 차를 후진하다가 아이를 조금 다치게 하여 십만 원을 물어 주었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지난달에 십일조를 안했더니 이렇게 손해 보게 되었다고 그러더랍니다. 이런 자세가 우리의 자세 아닙니까? 그래서 집사님이 속으로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벌써 다 벼락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의 감사라는 수준이 이 정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대로 알아야 범사에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숨쉬고 있는 것도 주님의 구원의 은혜요, 나의 사는 모든 것이 구원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2장 1절입니다. 그 날이 어떤 그 날입니까? 이사야 11장에 나타난 ‘그 날’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그 때입니다. 이 때를 지난주에 확인하였습니다. 일차적인 것은 앗수르나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지만 궁극적인 것은 사탄의 포로였던 자들을 예수님이 전쟁하심으로 구하여 내시는 그 날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예수님이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 사람이라 불리워집니까?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구약에서 장소가 명시된 곳이 많습니다. 베들레헴, 갈릴리 등의 이름이 있는데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없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이사야 11:1절의 가지라는 말에서 ‘나사렛’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봅니다. 가지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내체르’ 라는 말이기에 여기서 ‘나사렛’이라는 음이 나왔다고 봅니다. 어쨌든 우리는 주님의 구원이 얼마나 큰지 구약에서 부분적인 구원을 맛보고도 이처럼 구원의 은혜를 감사한 사실을 보면서 우리의 감사의 찬양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2장 1절에서 감사하는 이유는 전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노하셨으나 이제는 그 노를 쉬시고 안위를 주심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시면 모두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분노를 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분노를 쉬시고 그치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제 친구 전도사님이 이사를 가덕도로 하였습니다. 왜 가게 되었는가 하면 함께 복음으로 교제하는 사람인데 담임 목사님하고 가르침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담임 목사님의 귀에 들어가고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약 다섯 시간이나 전도사가 담임 목사님에게 직접 성경을 찾아가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복음, 복음 하면서 자신의 교회를 크게 키우려는 야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왜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까? 장유의 종교부지가 180여평과 400여평이 나왔는데 교인들은 자기들 형편에 맞게 하자, 하고 목사는 큰 것 하자고 하고 그러는 중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니 전도사가 목사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덕도 섬에 들어가는데, 너무나 감사하며 가는 것입니다.
 
 
 
 
이 전도사님이 목사님에게 전한 내용이 마태복음 21장의 악한 농부들의 비유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버린 세상에서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예배당 크게 짓는 일이 아니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라고 하여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이 매일 분노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분노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잠시 그치시고 안위를 주시는 그 구원이 얼마나 크신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니 자꾸만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 간 것입니다. 자기들이 잡혀가도 마땅한 죄인임을 알았을 때 거기에서 구원받아 나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아시겠습니까?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서 사형 집행날을 기다리는 자가 사면을 받고 나온 그 감격의 기쁨보다 더한 기쁨과 감사가 예수 믿고 죄사함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 감사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감격이 없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말 살아갈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알면 주님의 구원으로 만족할 텐데 자기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이러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이 나의 구원, 힘, 노래이기에 주님께 감사의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니 두려워 아니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친구 전도사가 담임 목사에게 그렇게 전하니 나중에 강도사 인허 받을 때 문제가 안 되겠느냐고 하더랍니다. 그런 것 무서우면 전하지도 않습니다, 하였다고 합니다.
 
 
 
 
어떠한 세상의 힘과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손가락질 받는 죄인인 여자가 사람들 한 가운데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정죄할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겁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감사의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지옥에 가는 자의 목록 중에 ‘두려워하는 자’라는 목록이 있습니다. 이제 세상의 실패와 나의 죽음이 두렵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우리에게 날마다 넘친다면 세상의 유혹이 시시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실되면 자꾸만 세상은 더 아름다워 보이고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보다 세상 사람들의 눈을 훨씬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기도하고 회개해야할 제목이 늘었지요. 주여, 주님의 구원을 우습게 여기고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한 죄를 용서하소서.
 
 
 
 
3절입니다. 그러므로 2절의 하나님이 구원이며, 힘이며, 노래이기에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막이 있는 곳에서는 우물이 있는 오아시스가 생명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물로 표현한 성경이 많이 있습니다. 몇 곳만 보자면 이사야 55:1절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처럼 구원을 물 또는 생수로 표현한 곳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물에 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원의 샘물을 마시는 것이 감사와 찬양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생수가 되시는 주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든지 다른 생수를 찾는 것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물을 길으리로다, 라는 이 은총이 노래의 제목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주님의 구원의 샘물을 길어 마시는 것이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4절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행하신 일을 만국에 선포하고 그 이름을 높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높이고 그의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의 할 일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일하심과 그 행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주의 백성이라면 오직 주님의 일하심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주님의 일하심보다는 나의 일한 것을 훨씬 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 아들 군에 간 것은 안타까워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은 덤덤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의 교회다움이란 하나님의 이름만 높아지고 하나님의 일하심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계속하여 여호와를 찬송해야할 이유는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에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극히 아름다운 일이 무엇입니까? 역시 여호와의 구원을 인하여 찬송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네. 구세주의 사랑이야기’ 이런 복음 성가가 있지요. 나와 같은 죄인 구하러 오신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온 세계에 알릴찌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6절입니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크신 일을 행하신 것만 아니라 너희 가운데서 크시다, 하는 것은 주님보다 더 크고 높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참으로 이러한 주님의 크심이 있습니까? 그 아름다운 일을 행하신 일에 대한 찬양이 있습니까? 감사가 있습니까?
 
 
 
 
12장 전체에서 무엇으로 감사하고 찬양하고 그의 이름만 높이는 것입니까? 주님의 구원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에서 구속받은 이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평생 주님을 찬양하고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이 감격이 회복되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짐스러워 집니다. 같은 일을 하여도 기쁨으로 하는 것과 억지로 하는 것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납니까? 똑같이 예배시간에 나오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말씀 듣는데 어떤 사람은 마지못하여 의무감으로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감사와 찬양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우리의 관심과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풍성하며 아름답고 좋은 것인지 더욱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큰 복을 어찌 나 같은 죄인이 받게 되었느냐고 노래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감사와 감격이 없는 자들, 구원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지 아십니까? 13장부터 27장까지 계속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한두 나라가 아니라 온 세계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전개됩니다.
 
 
 
 
13:5-10절까지만 봅시다. 하나님의 진노의 병기로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멸하시는 것입니다.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구원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구원으로 기뻐하시며 찬송하며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3:1-22  바벨론에 대한 경고  1999. 10. 27.

이사야 12장이 구원에 대한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13장에서부터 23장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복이라든지, 위로라든지, 평안이라는 내용보다도 범죄와 징계와 심판이 차지하는 분량이 훨씬 많습니다. 물론 그 심판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오지만 심판을 전제한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성경을 보는 중심을 나를 중심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까, 라는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청중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어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이 모이니까 자꾸만 심판의 말씀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도 부담 없고 듣는 자도 듣기에 좋은 말만 골라서 하다가 보니 죄의 심각성이라든지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하시는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죄를 생각하여도 내가 뭘 잘못하여 하나님께 복을 못 받고 벌을 받는 것은 아니가 하는 이런 쪽에서의 죄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선지자는 전면적인 심판을 선포하고 나서니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좋은 말만 해주면 인기가 있을 텐데 입만 열면 죄를 말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도 너희 중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지 않은 선지자가 하나라도 있느냐고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선지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왜 선지자를 보내시어 경고를 하시고 심판을 행하시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13장 1절에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고 합니다. 이사야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받은 말씀을 전하는데 그 내용이 바벨론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계의 통치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만의 주가 아니라 만군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시작으로 열국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23장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가장 중요한 죄의 지적은 한때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임을 받았으나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징계를 위한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하셨는데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줄 알고 교만하여 졌기에 하나님이 다른 나라를 불러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메대와 바사 제국입니다.
 
 
 
 
13장에서는 메데를 말하고 있습니다만 결국은 메데와 바사제국에 의하여 바벨론이 멸망하고 역사 속에서 완전한 폐허로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내용을 구분하자면 2-5절까지는 바벨론을 멸할 군대의 모습입니다. 6-16절은 심판의 날 즉 여호와의 날에 바벨론이 멸망하는 모습입니다. 17-22절은 하나님의 도구인 메대 사람들이 바벨론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군대를 소집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시는 것입니다. 군대 사령관이 사열을 받는 것처럼 군대를 모으시는 것입니다. 이들 군대는 하나님의 진노의 병기라는 것입니다. 온 땅을 멸하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모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노를 풀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3절). 하나님의 노가 얼마나 가득하였으면 군대를 모아 심판을 행하실까요?
 
 
 
 
그리고 그 전쟁에 도구로 쓰이는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의 나라 메대라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군대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은 지금 그 자격을 상실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도구로 메대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대의 군대가 쳐 들어오는 날을 6절과 9절에서 여호와의 날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6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너희는 애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기에 애곡하라고 먼저 말씀하시겠습니까? 그 이유는 여호와의 날 곧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전능자에게서 구원이 아니라 멸망이 나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입니까? 이러한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하니 그 당시 세계 최대의 강대국인 바벨론이 힘없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이 피곤하고 마음이 녹고 놀라고 괴로워하고, 아이 낳는 여자 같은 고통이 임하고, 서로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9절에서 여화와의 날 곧 잔혹하게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는 것은 죄인을 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멸하여지는 죄인은 어떤 자들입니까?
 
 
 
 
11절입니다.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죄목은 교만, 오만, 강포한 자의 거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라고 하시길래 흉칙한 죄악인줄 알았는데 무엇에 대하여 하나님이 이처럼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가 원초적인 죄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가 아담의 후손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범사에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손길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얼마나 큰 분노를 하시는지 하늘의 별과 해와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하며(10절), 하늘과 땅을 진동시켜 흔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13절).
 
 
 
 
이러한 심판이 단지 바벨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늘의 별과 해와 달의 변동과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것은 종말의 심판을 말할 때 언제나 등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심판을 말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최후 종말도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 역사적인 심판이 이루어지는데 14절에서 15절입니다. 바벨론에 있던 외국인들은 도망가고 적군에게 만나지는 자는 다 죽는 것입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용사들만 죽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여인까지 함께 멸망을 받습니다. 멸망당한 모습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것입니다.
 
 
 
 
19-22절입니다. 이 내용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세상의 역사를 통하여도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일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디(1837-1899)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지요. 이 사람의 일화에 이런 내용이 있답니다. 어느날 전도를 하는데 여러 나라에 여행을 하는 여행가에게 전도를 하였답니다. 그러자 이 여행가가 하는 말이 성경이 진실하다는 증거를 입증해 주면 예수를 믿겠다고 하길래 무디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서 최근에 어디를 여행하였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여행가가 ‘이라크지방 바벨론의 옛터’였다고 하자 무디가 그 곳의 상황을 말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여행가가 ‘그 화려하였던 바벨론은 완전 폐허가 되어 전혀 주민이 없었고, 어느 밤에 옛 궁전터 부근을 잠시 산책하였는데 들짐승들이 와서 그 터에 울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하자 무디가 이사야 13:20-22절을 펴 보였지요. 그러자 이 사람이 깜짝 놀라며 이것은 내가 본 광경 그대로입니다,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활동시기가 주전 약 700년 전이니까 지금도 그곳이 폐허로 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 후에 바벨론 지역은 메대와 바사의 점령으로 망하고 그후에 더욱 망하여 이제는 들짐승이나 거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몇 년에 어느 정도 망하고 어떻게 망하였는지가 성경 외의 기록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그 기록들을 언급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 선지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 시대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심판받는 죄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교만이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면 언제 더 심하였을까요? 옛날보다 지금이 더 교만합니다. 옛날에는 미신적인 두려움과 자연의 재해를 두려워하였습니다만 요즈음은 과학이 발달하여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큰 소리 칠만큼 인간이 오만방자하여졌습니다. 더욱 노골적인 교만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겸손의 모습이란 찾아보기 힘듭니다. 거대한 바벨탑의 문명들만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사람의 위력과 사람의 능력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의 능력을 더 높이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높이 멀리, 이러한 경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발전이라고, 인류의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교만이라는 죄가 무엇인지 가만히 앉아서 생각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이라는 죄는 우리의 모든 생각 속에 아주 깊숙이 박혀있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하여서만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교만이 하나님 앞에 죄악이고 심판받고 멸망당하여 소돔과 고모라처럼 철저히 망하게 되는 것이 단지 바벨론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심판에서 남을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교만하지 않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11-12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고 나니까 사람들이 정금보다, 오빌의 순금보다 더 희소하다는 것입니다.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심판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들, 교만해지는 대부분의 모습은 재물의 많음입니다. 바벨론은 강대국입니다. 여러 나라의 금은보화를 가져와서는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강하고 부한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큰 소리 친 것입니다.
 
 
 
 
다니엘 5:1-5절을 봅시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다음의 왕인 벨사살이 귀인 일천 명을 불러서 잔치를 열만큼 부자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금은 그릇으로 술 따라 마시다가 죽는 내용입니다. 다니엘 5:30-31절을 봅시다. 벨사살 왕이 죽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됩니다.
 
 
 
 
이사야 13:17절을 봅시다. 메대 사람들이 바벨론을 쳐들어오는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을 돌아보지 아니합니까? 은과 금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나라들이 전쟁을 왜 합니까? 이익을 위하여 합니다. 그러면 전쟁하여 당연히 재물을 빼앗아 가야 합니다. 금과 은을 내 놓으면 목숨을 살려줍니다. 그런데 메대는 지금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로 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그 수많은 금은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교만과 타락이 재물의 넘침인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금과 은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에서 놀라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꼭 바벨론 같은 세상입니다. 돈을 모으고 돈이 있음으로 더욱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의지하던 그 재물이 아무 소용없는 한 날이 오는데 그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 날이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날에는 재물이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께 뇌물 바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재물로 사람을 죄에서 구하여 내겠습니까? 바벨론이 교만하여 지금은 황폐화되어 들짐승만 거하는 곳이 된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앞으로도 교만한 자를 심판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22절을 봅시다. 그 화려한 궁성에는 시랑과 들개가 울고 있을 것임을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였고, 그대로 되리라는 것을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처럼 바벨론이 망하였습니다. 이제는 마지막 바벨론 국가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의 바벨론 같은 원리로 교만한 자들을 주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오래지 아니함을 믿으신다면 우리의 삶의 자세는 달라져야 마땅합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세상의 높다는 것, 좋다는 것, 출세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시고 오히려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14:1-23  바벨론의 멸망  1999. 11. 10.

(설교자의 미안함-세상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줄 수 없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사람으로는 불가능함을 말씀을 볼수록 더욱 분명하여 집니다. 성령이 임하신 것이 사람의 어떠한 소원이나 간구에 의하여 되어진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원하여 성령이 임하였다면 아마 그런 성령은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는 성령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성령은 없습니다만,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하시고 그러므로 오직 주 예수 외에는 관심이 없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의 욕구와 늘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구와 성령의 욕구가 싸우는 것입니다. 육체란 하나님의 성령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의 뜻대로 세상의 풍습이 옳다고 살아가던 체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 사람이 성령이 임하심으로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이러한 충돌과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뜻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속성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 보혜사,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 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종말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6-21절. “봉독” 여기에 보면 ‘말세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종말론적인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믿는 모든 자에게 부어주시는 것은 종말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종말론적인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종말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제일 끝에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2:20-21절.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찌어다 아멘” 이처럼 성령이 임한 자는 종말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나아가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의 현상을 구약에서 이미 당겨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말씀하시면서 장차 최후의 종말을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보았던 이사야 13장에서 바벨론의 경고에 이어 바벨론의 멸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에서 우리는 장차 온 세상의 멸망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그 당시에 가장 힘 있는 나라입니다. 군사력이나 영토나 재력에서 바벨론을 당할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힘입니다. 인간들의 힘과 재물의 힘과 발달된 병기들로 된 군사력들입니다. 이런 것을 다 좋아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받지 못하고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도록 악마로부터 독려 받은 그런 힘이라는 것입니다.
 
 
 
 
‘국희’라는 드라마에서 상훈이는 돈이 힘이라는 것입니다. 국희는 사람이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둘 다 틀린 것입니다. 돈을 택하든 사람을 택하든 스스로의 힘을 축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힘의 체계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상의 힘의 체계를 무너뜨리시는 것이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거대한 힘의 체계를 무너뜨리셔야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자연히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13:17절에서 메대 사람은 은이나 금을 돌아보지 않고서 바벨론을 치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 부자된 나라의 그 은과 금이 아무 소용없게 되는 날이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편의 몇 곳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시편 20: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리로다.” 시편 33:16절.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편 33:17절.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편 49:6-8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여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시편 44:6절.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시편 52:7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편 60:11절.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이 정도만 보아도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축적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가 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끝없이 자기의 힘, 자기의 의,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인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구원하여 내시는 장면이 14:1-4절까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고토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그네도 함께 연합됩니다. 이들의 회복의 조건은 하나님의 긍휼과 선택입니다.
 
 
 
 
이들이 포로로 잡혀 가게 된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잡혀 가서는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포로된 상황에서 성전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사도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자신들이 의지한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힘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바벨론의 멸망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너의 슬픔과 곤고와 수고와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그 날에 바벨론은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제대로 알게 되는 시점이 우리에게도 세상의 줄이 끊어질 때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의지하던 것이 끊어질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욥의 아내 같은 경우입니다. 아니, 당신이 그토록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는데 이러한 재앙을 받다니 그런 하나님 욕이나 하고 죽으라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는 세상의 믿던 것들이 끊어질 때 아하, 내가 세상의 것을 의지하였구나, 그러니 이제는 주님만 바라보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의지하던 종교적인 형식들도 아니고, 또한 세상의 힘들도 아님을 바벨론의 멸망 속에서 실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은 바벨론의 포로와 또 바벨론의 멸망과 회복을 통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의 세상의 전면적인 심판도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4:4절을 봅시다. 누구입니까? 바벨론의 왕입니다. 바벨론의 거대한 세력의 정점은 왕입니다. 이 왕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요란케 하던 왕입니다. 그가 전쟁을 하면 그 앞에 막아설 나라가 없던 그런 왕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 있고 세상을 호령하던 왕이 음부에 떨어지고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리고 지렁이가 너를 덮었다는 것입니다. 이 바벨론 왕이 얼마나 교만하였던지 계명성처럼 빛나던 화려함이 자기의 힘과 능력인줄 알고 하나님과 비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13-14절입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 본문을 사탄의 타락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바벨론 왕의 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자가 바벨론의 왕뿐만 아니라 모든 죄인의 공통된 욕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나님과 비겨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과 정신은 사탄의 사주를 받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세상은 찬양합니다. 바벨론의 영광을 자랑합니다. 그 사치와 부귀를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전혀 무용지물인 것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게 하여서 종말을 생각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상을 그냥 두고 계시겠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자기는 일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행할 수 없는 자이기에 오직 주님의 의를 사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만 의지합니다, 하는 이것이 종말론적인 성령이 임한 증거요, 기적인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망하게 되는데 바벨론 왕처럼 망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이 어떻게 망합니까?
 
 
 
 
11절에 보면, 그 영화가 비파소리까지 음부의 구더기와 지렁이에 뒤덮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9장 48-49절에서, 지옥에는 구더기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 소금 치듯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영화와 부귀가 지옥에서 구더기로 뒤덮이는 것을 그래도 좋아하시겠습니까?
 
 
 
 
19절에 보면, 자기 무덤에서도 내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가증한 나무 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 구덩이에 빠진 주검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20절에서는 일반 사람같이 묻히지도 못하고 그 후손의 이름이 영영히 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21-23절을 함께 봉독합니다. 21절에서 너희(메대인)는 그들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죄를 고발하고 그 자손 도륙하기를 예비하고 그들로 일어나 땅을 취하여 세상의 성읍을 충만케 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에게 맡겨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청소하시는 것입니다.
 
 
 
 
22-2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 번이나 하나님의 자기의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멸망의 빗자루로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역적인 바벨론의 멸망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된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어떤 바벨론의 멸망입니까?
 
 
 
 
이 바벨론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인간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은 전면전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을 이사야 선지자가 역사적인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것처럼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읽기만 하였는데 오늘은 몇 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8:1-5절을 보겠습니다. 바벨론의 그 영화와 부귀와 사치와 무역이 모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을 의지하고 살던 자들은 통곡합니다(9,11,15,19절). 그러나 바벨론의 핍박을 받던 사람들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20절). 이러한 종말의 상황에서 무엇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벨론의 영광을 사모하다가 함께 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사시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8-14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적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불 타 없어진다는 사실을 성령이 임한 자가 아니면 어찌 믿으리요? 혹시 세상을 비관한 자가 세상이 망하기를 바란다 하여도 어찌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미 주어진 이 영생의 기업을 알게 되도록 더욱 말씀과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4:24-32  여호와의 세계 경영  1999. 11. 17.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세계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거대한 세력의 지배아래 있다는 사실을-영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많은 사람들이 밝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늘 접하고 있는 신문, 텔레비전, 잡지, 여러 가지 정보의 채널들을 통하여 우리도 모르게 그러한 대중문화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콜라를 마시고, 피자 헛에서 피자를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무언가 시대에 뒤쳐진 것 같고 그래서 젊은이들은 민감하게 세계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거대한 대중문화라는 흐름입니다. 

 
 
 
 
고대 사회도 그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이 약한 국가를 지배함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힘에 대한 동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는 부국강병이 언제나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 잡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이 오늘날에는 경제력에 있다고 보기에 사람들은 세계를 경영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도 국제무역기구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계의 경제는 거대한 중국이 큰 변수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의 흐름을 미리 내다본 국내의 모 기업의 총수는 벌써 몇 년 전에 세계경영을 말하고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면서 잠도 비행기나 이동하는 차안에서 자면서까지 세계경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어떤 사람은 아주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경영을 하여도 사람으로서는 세계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장에서 퇴출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세계를 경영하신다는 것입니다. 24절에서, 나의 생각한 것, 나의 경영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26절에서, 온 세계를 향한 정한 경영이며 27절에서는 이 경영을 하나님이 하셨기에 누가 그것을 폐하고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대로 자기들의 경영 질서가 있다고 사람들이 거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세계경영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미 지금의 우리나라 정부도 세계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세계경영의 흐름입니다.
 
 
 
 
여기에 반대하면 그대로 부도나는 것이고, 여기에 따르면 세계경제에 종속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금 설교 시간에 경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으며 무슨 가치를 위하여 살고 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망망대해에 들어서면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의 한복판에 있기에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세상의 조류에 흘러가기에 이 세상의 흐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 내가 삶의 목표와 가치가 어디에 속하여 있는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에도 여전히 세상의 흐름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을 누가 경영하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하나님의 경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경영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영을 믿는 자만을 남기시는 것입니다. 세계경영이 사람의 손에 있는 줄 알고 사람의 손길만 보는 자들은 결국 그 세계와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세계경영인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강대국인 바벨론과 앗수르가 한갓 하나님의 막대기로만 쓰여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영을 바라보고 믿는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계를 경영하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24절에서 하나님의 자기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이 반드시 이루리라. 하나님은 맹세하지 않으셔도 자기의 말씀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단호한 결정입니까? 하나님의 경영이 25절에서 보니 앗수르 사람을 하나님이 파하며 밟아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멍에를 벗겨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죄는 이미 10장에서 나왔습니다만 한 번 더 보겠습니다. 10:5-11절입니다. “봉독” 이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데 어느 정도로 심판하여 버립니까? 이사야 37:36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명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가 침공하였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 경영인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앗수르가 하루 저녁에 군사 18만 5천명이 천사의 손에 의하여 죽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의 온 군대가 중무장을 하여도 하나님의 천사 한명만으로 끝나는 전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경영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14:27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페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라고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경영을 막고 나설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경영을 미리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세계경영을 따라 정신없이 살다가는 하나님의 경영에는 관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영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면 모든 관심사가 세상경영의 관심뿐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예레미야애가 1:12절입니다.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찌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에 관심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탄식을 합니다. 예루살렘이 황폐화되어 있는 이러한 때에 나와 같은 근심이 없는가 하는 탄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떠한 탄식이 있습니까? 어떠한 염려가 있습니까? 세계경영에 뒤쳐지는 자신을 보면서 한탄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경영을 알지 못하여 더 알기를 소원하십니까?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범죄를 인하여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이 많은 근심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심이 회개에 이르는 근심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이르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근심입니다.
 
 
 
 
고린도후서 7:8-11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경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과 염려가 우리에게 있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과 염려가 없이 세상의 경영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미리 하나님의 경영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보고서 확인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세계경영이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바다에서 좌표를 잃어버린 것처럼 정신없이 살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는 놓치지 말고 나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신이 지금 어느 경영체계에서 살아가는지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영이 앗수르만이 아니라 블레셋에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힌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블레셋이 아하스 왕 때 앗수르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29절에서 블레셋을 치던 막대기 즉 앗수르의 왕이 죽은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너를 치는 자들이 일어나서 너희를 죽이고 살육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의 장자와 빈핍한 자는 평안히 누울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택한 백성, 하나님의 경영을 바라보기에 오히려 가난하고 빈핍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도 망하기에 블레셋아, 너희는 울어라는 것입니다. 북방에서 다른 세력이 오면 너희는 다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신들이 와서 유다에게 제안을 합니다. 함께 동맹을 맺어서 북쪽에서 오는 적을 물리치자는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는 것입니다.
 
 
 
 
32절입니다. 그 대답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 이것이 대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제안이 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좋지만 세상의 부자 되는 것도 좋지 않느냐는 제안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가난하고 빈핍하고 곤고한 자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온을 세우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경영을 바라본다고 말하고서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경영과 하나님의 경영은 충돌이 일어납니다. 세상 경영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경영을 바라보지 못하게 할 사단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영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안식입니다. 이러한 안식이 없다면 죽도록 세계경영을 위하여 뛰어다녔지만 부실 경영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살립니까?
 
 
 
 
멀쩡한 냉장고 두고 신제품을 만들어 내어야 살아남는 세계경영에서 사람들을 더욱 소비하는 쪽으로 몰고 갑니다. 더 나은 소비생활을 위하여 사람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경영의 현실입니다. 소나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소나타 1,2,3, 그것도 아니어서 E.F 소나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텔레비전은 안 됩니까? 와이드 비전이어야 하고 이제는 평면에 벽걸이용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경영을 ?아가는 것은 결국 욕망의 끝이 없는 것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영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함께 망하여 가는 것입니다.
 
 
 
 
전도서 1:8절입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얼마나 피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러한 피곤한 시대 속에서 무엇이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해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이미 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 만물의 피곤함이 가득한 세상에서 새로운 약속에 관심을 가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세상이야 아직 눈에 보이는 것을 ?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과 하나님의 경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수험생들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수능생들에게 하는 말은 이미 너는 승리하고 합격한 자다, 그러니 시험이나 무엇이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실패와 좌절이 어찌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담대히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있으면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작은 행복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 주일저녁에 찬양한 것처럼, 기도응답에도 감사, 거절에도 감사인 것입니다. 슬픔도 아픔도 감사가 나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하나님이 경영하실 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9-10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믿음의 조상은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 본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14장 32절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경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영을 의지함으로 피곤한 자들이 곤고한 자들이 하나님의 안식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열심히 세계를 경영하다가 세상과 함께 부도가 나는 것입니다. ‘미우라 아야꼬’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얼마나 축적하였나가 아니라 얼마나 나누었는가에 그 사람의 평가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제부터 좀더 넉넉하게 여유있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집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15:1-16:14  모압에 대한 경고  1999. 11. 24.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지요? 하늘이 무너지는 엄청난 재앙에도 살길이 있다는 희망적인 속담이긴 합니다만 그러면 땅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땅이 무너지면 어디에 발을 딛고 서시겠습니까? 지금 이사야서를 보면서 하나님이 열국을 경고하시고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는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어떤 사고가 나더라도 나는 살아 남았을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속담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우리의 일반적이 가치관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보면 ‘교통사고 당신도 예외가 아닙니다.’하는 경고문을 보고서도 나는 안전할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를 통하여 계속되는 하나님의 경고를 보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당시만 경고하기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그 크고 강한 부귀영화의 나라를 하나님이 빗자루로 쓸 듯이 청소해 버리시고, 앗수르가 세계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를 경영하시는데 누가 하나님의 경영을 막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블레셋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와 심판의 연속으로서 오늘은 모압의 경고와 심판입니다.
 
 
 
 
모압 족속은 롯의 두 딸 중 큰 딸과 롯의 사이에서 나온 민족입니다. 요단강 동편 사해 가까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올 때에 하나님이 모압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롯 자손에게 그 지역을 기업으로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 때에는 모압이 유다의 속국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압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고가 주어집니다.
 
 
 
 
15:1절에 보시면 하룻밤 사이에 ‘알’과 ‘길’이 망합니다. 알은 모압의 수도요, 길은 모압의 요새인데 수도와 요새가 다 망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룻밤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산당에 올라가서 모압을 위하여 통곡을 합니다.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고 굵은 베를 입고 통곡을 하는데 온 나라가 통곡의 바다가 됩니다. 이것이 심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통곡이 일순간에 닥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의 쌓아놓은 재물이 소용이 없습니다.
 
 
 
 
7절에서, 그들이 재물을 들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이는 곡성이 사방에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때 쌓아놓은 재물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방에서 슬피 부르짖는 통곡소리만 가득한 것입니다. 디몬의 물에는 피가 가득합니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의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이러한 심판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16:1절입니다. 이 땅의 치리자에게 어린양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치리자는 유다의 왕입니다. 그 이유는 시온산으로 보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시온산으로 어린양을 보내라는 것은 공물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공물을 바친다는 것은 굴복을 뜻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하는 것이 공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모압은 다윗의 통치하에서도 공물을 바친 적이 있고, 아합의 아들 여호람에게는 매년 어린양 십만과 수양 십만을 공물로 바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망하게 된 지경에서 살길이 무엇입니까? 유다 왕에게 공물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물은 단지 나라의 운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유일한 살길이 무엇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절에서 모압의 형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압의 여자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역시 모압의 교만입니다.
 
 
 
 
6절입니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장이 헛되도다.” 이들의 교만이 심판의 이유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유다 왕에게 공물인 어린양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입니까? 그것이 자신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인데 어찌 ‘우리가 항복합니다.’ ‘살려 주세요’ 하고 공물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자구책을 구합니다.
 
 
 
 
그것이 12절입니다. “모압 사람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 할지라도 무효하리로다.” 모압 사람들의 자구책이 자기들의 산당에 나아가서 열심히 자기 신에게 봉사하여 피곤할 지경입니다.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였겠습니까? 그러한 일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하여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압 보다도 더 이방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유다의 왕에게 엎드려 빌겠습니까? 유다의 왕이 누구관대,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면으로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은 우리는 아무런 능력이나 공적을 세울 사람이 아니기에 공물을 바치는 자세로 항복합니다, 하고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이 있어서 내가 다른 것은 못해도 봉사는 잘한다고 하면서 피곤하도록 봉사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압은 다른 신에게 기도하였지만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나의 봉사나 기도에 근거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봉사와 기도가 자기의 의를 축적하는 것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봉사와 기도가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오히려 화를 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하도록 봉사하고 기도하여도 그것이 주님과 관계없는 무효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유다 왕에게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16:5절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유다 왕에게 어린양으로 공물을 바치라는 것이 유다의 한 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왕의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왕위가 인자함으로 서는 왕위는 오직 유다의 왕위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왕위는 자기들의 힘으로 서는 것입니다. 힘없으면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왕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위에 앉을 분은 충실함으로 판결하는 것입니다.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는 왕입니다. 이러한 왕이 바로 메시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교만으로 경고와 심판을 받는 모압 족속이 살길은 자기들의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자기들의 신에게 피곤하도록 봉사하거나 기도하지 말고 오직 유다의 왕에게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압의 유일한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압도 메시아의 통치아래 들어오는 것이 구원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압 보다도 더 이방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살길은 유다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통치아래 들어가야 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훌륭한 왕이 많은데요,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 인자와 충실과 공평과 의로 다스리시는 메시아의 통치를 받는 것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아모스 9:11-12절을 봅시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세우고 새롭게 하실 때에 열방을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그 열방 가운데 우리도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하여 들어온 것, 오직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것, 주여 당신만이 우리의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할 수 있는 이것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습니다.
 
 
 
 
이사야 16:13-14절입니다. “유다 왕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품꾼이 정한 기간을 정한 것처럼 삼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찌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소용이 없이 되리라.” 그 당시의 품꾼의 계약기간은 3년이랍니다. 이것이 엄격하게 지켜진 것처럼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품꾼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농산물을 짓는 것이 목축과 포도농사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10절까지 포도원이 황폐화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의 산업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회사이지요. 공장이지요.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농사이고. 그러나 이러한 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오직 유다의 왕이신 메시아에게 항복하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거듭되는 심판의 말씀 가운데서 간간히 흘러나오는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이미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믿지 아니함이 이미 정죄 아래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정죄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도 주님의 말씀과 약속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은 관심과 가치관으로 살아간다면 함께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열매로 안다고 하는데 우리의 열매가 세상 사람들의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참으로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십니까? 기뻐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주어졌고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시행된 것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이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5:1-10절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받으려 함이라.”
 
 
 
 
하늘의 처소 덧입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바벨론도, 앗수르도, 블레셋도, 모압도, 한국도, 우리도,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 심판을 견딜 수 있습니까. 심판 때에 울고 통곡하는 것은 때가 늦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께 두 손 들고 그 다스림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증거는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못함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탄식할 일임을 아시고 우리가 몸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고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되지 않은 것을 놓고 회개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제대로 임한 바울은 이러한 소원이 당연하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이러한 소원이 낯설게 여겨집니까? 우리가 성령을 받지 못하였든지 아니면 성경을 제대로 보지 않았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말씀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늘 관심 있게 보시면서 주님의 뜻을 분멸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온통 새로운 천년을 맞이한다는 이때에 우리의 관심은 오늘밤에 나의 영혼은? 하고 물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7:1-14  다메섹과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  1999. 12. 1.

어제 설교준비를 하면서 날짜를 11월로 했다가 보니 이미 12월 1일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이 때쯤이면 불면증이 걸릴 만큼 날짜에 민감하였는데 요즈음은 한달이 바뀌어도, 일년이 바뀌어도, 천년이 바뀌어도 그러한 것에 별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 저의 요즈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저는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원대한 계획과 꿈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참된 쉼이 없이 날마다 시간과 날짜에 쫓겨 다닐 것입니다. 무슨 세미나다, 부흥비결이다 등을 배우러 다니면 여러분도 함께 피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들 마다 이때쯤이면 연말이라 하여 새롭게 하자는 의미로 특별새벽 기도회를 열고 특별 행사들을 많이 합니다. 특히나 올해는 1999년이라서 더하지요. 날짜의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아래 무엇이 새것이 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날짜와 상관없이 날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관심사는 주님의 약속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야망에 성경의 언어를 빌려와서 도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경고를 귀담아 듣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오늘 본문은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 관한 경고입니다. 다메섹은 바울이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던 곳입니다. 그러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난 곳입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러지요. 그 다메섹이 아람의 수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우리가 잘 알듯이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 지고 나서 북쪽을 말할 때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다른 말로 에브라임이라고도 합니다. 그 이유는 에브라임이 열 지파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과 이스라엘을 함께 경고하고 있는 것은 다메섹과 이스라엘이 동맹관계에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과 다메섹이 동맹하여 북쪽의 앗수르를 대항하고자 하였기에 두 나라를 한꺼번에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는 다메섹에 대한 경고, 4-11절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12-14절은 두 나라를 심판한 앗수르의 멸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멸망은 전에 말씀을 보았지요. 하나님의 심판의 막대기로 사용된 나라가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속에서 그 이유와 그 심판의 결과와 목적을 나누어서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먼저 심판의 이유입니다. 첫째 이유가 우상숭배입니다. 8절에 보시면 자기 손으로 만든 단과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와 태양상입니다. 이러한 우상의 제단과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 다메섹과 이스라엘입니다. 다메섹이야 우상이 그들의 신이기에 숭배가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면 안 되는데 이스라엘 안에도 온갖 우상이 들어찬 것입니다. 그토록 우상숭배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데도 왜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은 그런 것에 절을 하고 섬길까 하겠지만 그러나 그 우상섬기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오늘 우리가 우상을 얼마나 좋아하고 섬기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섬기는 아세라나 태양상은 무엇을 위하는 신입니까? 풍요와 다산을 준다는 신입니다. 그런 신에게 잘 보이면 농사도 잘되고, 자식도 잘되고, 집안도 잘 되고, 나라도 잘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겨왔는데도 자기들의 모습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아세라나 태양신을 섬기는 사람들보다 어렵게 사니까 이게 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런 신을 섬겨서 ‘잘살아 보세’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욕구와 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에게는 문화다, 환경이다, 라는 것으로 와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전혀 우상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람들의 선이라 여기는 것들이 바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숭배 아닌 게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상숭배 아닌 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당이 이 정도이니까 그렇지 정말 멋있는 모습이라면 얼마나 자랑하고 좋아하겠습니까? 마치 제자들이 참된 성전인 예수님 앞에서 건물 성전을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사가 성경으로 늘 지적받지 않으면 자기가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그것이 우상숭배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서 우상을 잘 섬기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월요일 날 석화 유치원 옆에서 아이들과 잠시 있을 때 어떤 젊은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가면서 우리 아이도 뽑히도록 기도해야 되겠다, 그러면서 오늘 꿈 잘 꾸어야 되겠다, 그러더라구요. 유치원에 들어가는 것도 제비를 뽑기에 거기에 걸리도록 기도한다고 그래요. 하나님이 그런 일도 하십니까? 도대체가 기독교가 무언지 완전히 아세라와 바알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순풍 산부인과’에서는 미달이 아빠가 길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목사라서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는 자기 처제 취직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고 아멘, 하는데 이런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말은 하나님, 예수님 하는데 속에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그 아세라와 바알신과 태양신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옆집 아이는 좋은 부속 유치원에 들어가고 자기 아이는 못 들어가니까 그 질투로 아이를 죽여 버린 사건이 지난주 일본에서 있었지요. 떠들썩하였는데 이것이 우상숭배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우상숭배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0절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아이들이 예수 잘 믿는 것이 좋습니까? 공부 잘하는 것이 좋습니까? 둘 다 잘하면 좋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들이 공부 잘하도록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안 되지요. 그러니 이제는 기도만으로 안 되는 것을 아니까 기도도 하고 과외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이 하는 일과 자기들이 할 일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이나 하시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께요, 십일조나 받아먹고 가만히 계시기나 하세요, 그러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아주 큰 어려움을 헤쳐 나오는 영화의 주인공이 마지막 어려운 관문에서 하나님, 이제는 방해나 하지 마십시오, 하고 말하는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구원 그것 정도는 죽기 직전에나 챙겨보는 것이고 죽기직전 임종 예배나 드리고 예수 믿고 아멘, 하는 그 정도로 여기고 그 나머지는 내 식대로 살겠으니 간섭하지 마시오, 하는 이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 성도님은 순수해서 그렇게 안하시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이미 교회 역사 속에서 검증된 것입니다. 교회가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있을 때 교회가 지구가 평평하다면 평평한 것입니다. 이 때는 교회가 진리다, 그러면 진리입니다. 이것이 중세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교회의 말이 모두 진리라는 것을 믿지 않지요. 그러므로 교회란 단지 천당이나 보내주는 곳으로 알고 성경은 천당 가는 비결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할 일은 다른 진리의 기초 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 낸 진리란 이것 한가지입니다.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 이것이 세상의 진리관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익이 되면 선, 손해가 되면 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라도 나에게 손해가 되면 나에게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한 말을 한다구요? 아닙니다. 정작 큰 손해를 보거나 어려움을 닥쳐보십시오.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뭘 그리 잘못하였다고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벌을 주십니까? 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계산을 해보고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천당, 지옥 그것 생명보험들 듯이 하나 들어두면 괜찮겠구먼, 한번씩 취미삼아 예배당에 가서 신선한 교제도 해보고, 이런 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진리에 맞추어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하나님이 마구 양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 다메섹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심판하신다면 얼마나 남겠습니까? 우상숭배 안하는 교회가 없으니, 안하는 교인이 없으니 전멸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없습니다. 방금 우상숭배가 무엇인지 보셨지요. 그러니 하박국 선지자가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이며 그 심판 가운데서 주의 긍휼을 잊지 말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말 한마디가 있다면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진노 중에라도 심판 중에라도 주의 긍휼을 잊지 마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데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더 자초하고 있는 부르짖음이 이 땅의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면 어떻게 됩니까? 4-6절을 봅시다.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 살찐 몸이 파리하고 추수가 끝나고 이삭마저 주워버린 그런 빈 들판이 되어 버린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전에 아이들 설교 예화를 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찾으려고 가을 들판에 갔는데 얼마나 알뜰하게 추수하고 이삭까지 주워 가버렸는지 겨우 몇 줄기 주워서 왔습니다. 그러니 심판에서 남을게 별 없다는 것입니다. 감나무 흔들어 따고 나면 제일 꼭대기에 서너 개 남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시행되면 남는 자가 이렇게 적은 것입니다.
 
 
 
 
이 땅에 예수 믿는 자에 대한 핍박이 불어 닥치면 얼마나 남을까요? 생각해보면 아찔합니다. 얼마나 적은 수입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한국교회를 하나님이 심판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이미 심판이라고 하였기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를 부르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인데도 얼마나 열심히 철야로 금식으로 아세라와 바알을 부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 뒤를 따라가는 자가 얼마나 됩니까?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힌 자입니다, 그렇게 여기고 따라 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상태, 그저 예수라는 커다란 이름을 업고서, 그 세력을 업고서 세상에서 행세나 해보려는 그런 상태입니까? 후자라면 이런 모습이 하나님이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럴수록 주님의 십자가는 외면을 당하고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이 아니라 지금 심판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사실 고달픕니다. 주님께서 우리 힘으로 끊어낼 수 없는 우상을 끊어 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란 고달픈 삶인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우상을 좋아하면 성령께서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우리를 심판하심으로 우리가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심판을 받지 않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심판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택하신 성도는 지금 심판을 행하심으로 우상을 끊어 내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는지를 그 심판의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 그 수많은 자들이 심판으로 다 소멸되고 겨우 남은 자들이 무엇을 합니까?
 
 
 
 
7-8절을 봅니다.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단을 쳐다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다시는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쳐다보지 아니하고 자기를 지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쳐다 볼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은 우상이 됩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만이 우상이 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이 말씀으로 심판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 손으로 지은 것, 사람의 손,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가치관이나 진리를 따르는 걸음이 심판을 받고 우리를 지으신 주님께 우리의 눈과 마음이 향하여져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18:1-7  구스에 대한 교훈  1999. 12. 8.

계속된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전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구스입니다. 구스란 에디오피아입니다. 그런데 이 구스에 대하여는 다른 나라보다는 심판이나 경고가 부드러운 것을 봅니다. 우선 배경을 살펴보면 그 당시 구스가 애굽까지 지배하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애굽의 왕조가 여러 번 바뀌는데 가장 오랜 기간은 함의 후손이고 요셉 때는 셈 계열이 왕위를 가진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등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애굽의 왕조를 바꾸시면서도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란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당시의 애굽을 지배한 왕이 에디오피아의 솨바코인데 주전 714년경에 애굽의 왕위에 오르면서 애굽의 25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전 633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때에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구스의 사신이 유다에 와서 반앗수르 동맹을 펴자는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가 구스와 만민에 대한 교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구스의 사신을 나일강에 갈대배를 타고 유다로 보내는데 3절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거하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호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찌니라. 산위에 기가 세워지고 나팔소리가 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 들으라는 내용이 무엇인지 한절씩 살펴봅시다.
 
 
 
 
4절입니다. 먼저 세상의 전쟁과 난리의 소문 가운데서 여호와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앗수르는 공격하기 위하여 분주하고 구스는 방어하기 위하여 분주하기에 유다까지 동맹을 맺고자 사신을 보내는 것입니다. 국제 관계가 숨 막힐 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2절에서 사신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경첩한 자들입니다. 날랜 자들, 동작이 빠른 자들입니다. 평화의 사절단이라면 천천히 가도 되지만 전쟁의 위기 속에서 바삐 움직이고 요동을 하는 때에 하나님은 그 처소에서 종용히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햇빛과 가을 더위에 안개 같다는 것입니다. 햇볕이 요란하게 옵니까? 조용합니까? 조용하게 온 누리를 비추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조용하게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 더위를 식히는 안개처럼 차분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일하심을 알 때 우리도 종용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목회성공병에 들린 목사들과 교회성장병에 들린 교인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무시하면서 자기들끼리 열을 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빨리 빨리’하면 교회는 잠잠하라, 천천히 하라, 그래야 되는데 교회에서 세상보다 더 ‘빨리 빨리’를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잠잠히 기다려라,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분요하게 설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일하심과 은혜는 간 곳 없고 바쁘디 바쁜 새벽시장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햇빛처럼 조용하게, 안개처럼 식히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하신다고 하여 무능하거나 일을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시면 포도나무를 앗수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꽃이 떨어져 열매가 맺혀서 있을 때쯤 그 퍼진 가지를 찍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순이 나거나 꽃이 필 때 미리 잘라 버리면 다시 순이 나거나 꽃을 피울 수 있지만 열매가 익어갈 때 잘라 버리면 다시는 회생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세상의 분요함에 함께 휩쓸리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면 세상의 분요함에 함께 놀아나지 말아야 합니다. 연말이라 크리스마스라고 더욱 분요해지고 장사꾼들이 바쁘게 설치는 이런 때에 참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기다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조용히 일하시면서 결정적인 심판을 행하심으로 그 포도나무의 열매로 인하여 산의 독수리가 그것으로 여름을 나고 들짐승이 그것으로 겨울을 난다는 것입니다. 독수리와 들짐승이 포도를 먹지 않지요. 이것은 앗수르의 시체를 독수리와 들짐승이 먹는다는 은유적이 표현입니다. 전쟁의 위협 속에서 동맹을 요청하러온 구스의 사신뿐만 아니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스가 강대국이니 유다 편에서는 동맹을 맺으면 좋지요. 군사 원조를 받을 수가 있으니까요. 우리가 지금 미국의 군대가 주둔하기에 든든해하고 있습니다. 미군 철수, 한다면 안 됩니다, 하고 매달리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구스가 동맹을 맺자는 것은 원조를 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맹을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다 알아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목사는 부자 교인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실력 있다는 목사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조용히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7절을 봅니다. 앗수르가 망하게 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구스인들이 예물을 가지고 시온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구스인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장대하고 준수하고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라고 합니다. ‘헤로도투스’라는 역사가는 구스인을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장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인은 못생긴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흑인 중에도 그렇게 검지 않고 정말 멋있는 구리빛의 흑인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조그마한 나라 유다 그 예루살렘의 작은 시온산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크고 강한 나라가 작은 나라에 예물을 들고 오리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온에 여호와의 이름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으로 그 강하고 장대한 백성이 예물을 들고 나오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생각하기를 크고 강한 나라에 작은 나라가 예물을 갖다 바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교회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크고 웅장하고 사람이 많아야 세상이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어저께 어느 목사님이 전화가 와서 창원시 기독교 연합회에 회원으로 가입하라고 하였습니다. 일단은 미루어 두었습니다. 그러자 하시는 말씀이 어떤 목사가 가입하려고 하다가 취소  되었는데 그 사람을 다시 가입시키려고 한다면서 저도 이번에 가입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은 저를 생각하여 창원에서 입지를 굳게 하라는 좋은 의미에서 그렇게 하신 것임을 압니다. 그런데 그런 연합회가 추구하는 바가 반드시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의 단체들이나 관공서에 압력도 행사할 수 있고 또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보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이라면 아무리 작아도 그 곳으로 예물을 들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선거철에 국회의원이 이름 내려고 감사헌금 봉투 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 주소서, 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그들이 더 잘 아니까 교회를 우습게봅니다.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 없는데 세상의 시시한 기관들이 교회를 우습게 보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십니까? 어디에 예물을 들고 가시겠습니까? 자기의 힘을 키워주는 곳입니까? 아니면 힘 빼라고 말씀하시는 십자가에 나아가시겠습니까? 세상의 힘을 추구한 사람들의 한 일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은 구스의 그 강대한 힘을 버리고 시온으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이스라엘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에서 일어난 사건, 바로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구스인에 대한 것 중에 두 가지만 예를 들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먼저 민수기 12:1-16절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합니다. 이것을 보고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비방의 이유는 자기들의 혈통을 의식한 것이겠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레위 지파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론과 미리암도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모세 너, 뭐가 대단하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지요. 이 본문을 가지고 목사들이 목사를 대적하면 이렇게 된다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대원 때 김희보 교수님이 구스인도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 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차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혈통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아론과 미리암이 이것을 원망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무시한 것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살아남은 근거는 혈통이 아니라 이방 잡족이라도 어린양의 피가 있으면 살아남은 것인데도 자기들만의 특권을 가졌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모세의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뜻을 모른 미리암이 원망한 것이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니 이 말씀을 가지고 목사의 직업을 신성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목사 욕하여 저주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 저주받는 길입니다.
 
 
 
 
끝으로 사도행전 8:26-40절까지 봅니다. “봉독” 에디오피아, 즉 구스의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내려가는 중입니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자니까 많은 예물을 가지고 시온으로 향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구하였는데 그 당시로는 모두 손으로 직접 기록하는 것이죠. 그리고 필사를 할 때의 세부 규칙이 아주 까다롭습니다. 몇 글자 이상 틀리면 전체를 파기하기에 아주 귀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소장할 수는 없고 회당에서 성경을 보관하고 사람들이 회당에 모였을 때 읽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하게 구한 성경을 읽고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 성령께서 빌립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전도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시에게 가까이 가보니 성경을 읽고 있는데 이사야 53장입니다. 내시가 이사야 53장의 이 예언이 선지자 자신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대단한 관찰입니다. 그러나 그 핵심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주인공을 빌립이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하자 내시가 믿고서 세례를 받습니다.
 
 
 
 
에디오피아의 재무부 장관이 조그마한 식민지 땅 유다에 예물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누구를 만났습니까? 그 성경의 증거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초라한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세상 모두가 화려하고 힘 있는 곳으로 달려갈지라도 우리는 시온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시온에서 구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시온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몇 곳만 찾아보겠습니다. 왜 시온으로 향하여야 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온에서 무엇이 있기에 시온으로, 시온으로 하는 것인지도 보고자 합니다.
 
 
 
 
  사 2:2-3절.     여호와의 말씀이 시온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 4:4절.       시온에 남아 있는 자가 거룩함을 얻습니다.

 
 
 
그 외에 수십 곳에서 시온에 돌아옴과 그 곳에 남은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며 구속 받은 자가 시온으로 돌아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온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한 곳만 찾아보고자 합니다. 더 상세한 것은 이사야 28장에서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28:16절입니다. 한 돌을 시온산에 세우시는데 이는 시험받은 돌입니다. 그런데 이 돌을 믿는 자는 급절하지 아니합니다. 이 돌이 시편 118:22-23절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1:42절에서 예수님 자신이 버림받은 돌이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자에게는 버림받지만 어떤 자에게는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으로 향하는 것은 결국 버림받은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누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시온으로 가겠습니까? 우직 주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물질문명이 발달된 세상에서 누가 버림받은 모퉁이 돌에 붙겠습니까? 주님께서 살리신 자들만 붙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기적이요 은혜임을 아시고 시온을 향한 순례를 계속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19:1-25  애굽에 대한 경고  1999. 12. 15.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몇 번을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심판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아래 있지 아니 하다면 구원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연 그대로 그냥 두는 것이 좋습니다. 비틀즈가 20세기 최고의 음악가라고 뉴욕타임즈가 정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김용옥은 노자의 사상을 노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Let it be’ 그것을 그대로 두라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간섭을 하지 말고 그대로 두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60년대의 암울한 시대를 자연의 흐름에 맡겨두면 다시 희망이 오리라는 그런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이라고 합니다.

 
 
 
 
왜 자주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러한 내용이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부인하고, 인간 자율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서양 물질문명의 발달이 한계점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의 정신에 따라서 새로운 인류의 희망을 말하기 위하여 동양의 정신을 함께 배워서 새로운 천년은 희망을 가지고 맞이하자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여러 가지를 비판하는 이유는 잘못을 고쳐서 더 나은 우리 인간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순종이 없이 인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떠난 인간을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 두심이 심판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알게 되면 오늘날 인류가 꿈꾸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역하는 쪽으로 나가는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잘못된 것들을 지적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마저 버리는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세상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애굽에 대한 경고를 합니다. 애굽에 대한 경고를 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이 있으리라는 예감을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경고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고치시고 구원하실 백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장처럼 버려두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짐승과 벌레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25절입니다. “봉독”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은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우상 중에 사람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희망이다, 라고 말하고 사람만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하는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니 사람들이 자기 마음의 정욕대로 합니다. 이것이 윤리 도덕적인 나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점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간섭 없이 내 몸 하나 편안하고 잘 지내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을 가만히 두면 그것이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곳입니다.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정신세계가 잘 융합하고 그래서 참으로 살기 좋은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그곳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실감이 나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고와 간섭을 지금 받고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버림받은 자에게는 간섭이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렛 잇 비, 렛 잇 비, 워낙 부르짖으니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이미 버려진 상태인데 뭘 더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까? 그러면 오늘 19장에서 하나님이 애굽을 어떻게 간섭하십니까?
 
 
 
 
첫째, 1-4절에 보면 내란과 폭정으로 애굽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나라 안에 내란이 일어나고 서로 치고 침을 당하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혼란이 가중되는데 여기에다 폭군이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나라의 안정이 없습니다. 3절에서 애굽인의 정신이 쇠약하여 지는 것입니다. 강하고 큰 나라의 정신이 쇠약하여 지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지혜와 정신세계가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 5-10절입니다. 나일강이 마르게 됩니다.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에 있어서까지 혼란이 옵니다. 애굽의 생명줄이 나일강에 있습니다. 나일강이 잦아들고 말라 버리니 이 강물로 살아가던 모든 자들이 슬퍼하고 피곤한 것입니다. 강물의 범람으로 비옥한 토지가 형성되고 농사를 짓게 되는데 농사가 안 되고, 강물에서 고기를 잡는 자들도 안 되고, 강가의 풀을 취하여 베를 만드는 것도 안 되지요. 그러니 온통 경제적인 혼란이 온 것입니다. 이것이 재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된 풍년과 좋은 환경이 주어지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셋째, 11-15절에서 애굽인의 지혜가 무너집니다. 세계의 강대국인 애굽이니 얼마나 뛰어난 학술과 지혜가 있었겠습니까? 사도행전 7장 22절에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말을 잘 못합니다, 라는 것은 핑계이지요. 그러니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동이 다 능하다고 하는 것처럼 애굽의 학문과 지혜와 지식은 뛰어난 것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들의 지혜와 지식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혜와 지식을 하나님이 폐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고 이랬다저랬다 비틀거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애굽의 종려나무나 갈대나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의지하는 모습의 최후는 그 지식과 지혜가 아무 소용없이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3:18-20절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10:5절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지혜가 세상의 것이라면 그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세상에서 미련한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세상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이론과 생각과 지혜들을 다 파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지혜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그 지혜를 파하여 버리심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 16-17절은 유다가 애굽의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나라 유다가 어떻게 거대한 애굽에 공포의 대상이 됩니까?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을 향한 계획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이 유다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애굽을 향한 간섭으로 인하여 애굽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란과 폭정과 나일강의 마름과 애굽의 지혜를 붕괴시키시고 유다가 애굽의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시므로 자기들의 힘을 의지할 수조차 없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이로 인하여 애굽이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로 돌아오는 것도 이러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냥 좋게 해서 말 듣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19절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과 기둥이 있을 것이고 애굽에서 압박자를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호와께서 한 구원자를 애굽에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지시는 것입니다. 21절에서 애굽에서 여호와를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2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서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 주시리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시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치시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애굽은 이방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치심을 받은 자 중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하게 이방인입니다. 애굽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를 치시는 것입니다. 치심을 통하여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치심을 통하여 주께 부르짖고 그 부르짖음을 통하여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고난신학’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 김이곤 교수는 이러한 고난을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한 구원이 구약의 커다란 패턴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말씀의 치심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사생자입니다. 버려둔 상태, 간섭하지 않는 상태가 심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치심을 받고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3절에서 25절을 봅시다. 치심을 받은 백성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입은 자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가 모두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 찌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한 자들은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기 손으로 치시고 부수어 버리시고 자기 손으로 지으시고 건설하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자기의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교회도 내어 놓고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하나님이 치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러한 치심을 받지 않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까?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꿈꾸고, 좋은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라고, 가뭄이 들지 않고 풍년이 들고, 지식과 지혜를 쌓아서 뛰어난 민족이 되고, 하는 이런 것이 결코 구원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치심을 받고 경고를 받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사도행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방에게 복음이 전하여 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름으로 온 세계에서 주님의 택한 자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주님의 치심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의 치심을 받은 자는 세상의 경제나 지혜나 도덕이나 왕이나 그 어떠한 것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강대국 미국을 믿으시겠습니까? 대통령을? 검찰을? 판사를? 교수를? 지혜자를? 목사를?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임을 아는 자들이 모여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앞에서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의지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것임을 알기에 어찌할꼬, 하는 자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는 복음을 듣고 모인 무리가 교회여야 합니다.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25절입니다. “복이 있을 찌어다”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으로 만들었기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으로 감사하고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심플 라이프 원문보기 글쓴이: 심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