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3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1999. 6. 30. - 2001. 6. 6.)
目 次
51.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52. 두려워 말라
53. 주의 종
54. 새 일, 새 노래
55. 그러나
56. 증인
57. 우상과 이스라엘
58. 창조와 구원
59. 우상과 하나님
60. 바벨론의 심판
61. 새 일
62. 이방의 빛
63. 어디서 생겼는가?
64. 부끄러움
65. 생각하여 보라
66. 분노의 잔
67. 좋은 소식
68. 놀람
69. 누가 믿었느뇨?
70. 고난 받는 종
71. 잠시와 영원
72. 값없이
73. 돌아오라
74. 안식일과 안식
75. 파수군
이사야 40:12-31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2000. 6. 14.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영생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로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다고 하는데 결국은 우상을 섬기고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착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18-20절을 봅니다. 하나님을 비교하는데 무엇으로 비교합니까? 우상으로 하나님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은사슬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금이나 은으로 만들지 못하니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여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만들고서는 흔들리지 않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는 이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이르렀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시내산에서 받고 있는 40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하였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서 그 금송아지를 보고서 뭐라고 합니까? 출애굽기 32:4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그러한 형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절에 가는 사람이나 성당에 가는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나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 3:5절에서는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탐심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부르면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특히 십계명에서 자기를 위하여 신을 만드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살리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게 정립이 안 되어 있기에 우리는 늘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과 불평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 있기에 부모형제라도 나의 유익과 행복에 도움이 되어야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웃과 북한마저도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만나는 것입니다.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것을 감동이라고 울먹이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분단된 채 있다가 왜 이제야 만나는 것입니까? 남북의 실리를 챙기기 위한 것입니다. 남한은 북한의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다른 나라와의 교역보다는 남한과의 교역이 더 실리가 있다는 판단이기 때문에 만나는 것으로 봅니다.
한민족이 만나는 역사적인 사건을 그렇게 보느냐고 말씀하실지 몰라도 한민족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던 때가 언제입니까? 그러니 서로 만나는 것도 속으로 다 계산을 하는 것이지요. 만나는 것이 만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을 것 같으면 만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고상하거나 선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은 자기의 자녀를 살해하고, 자기의 부모를 버려온 것입니다. 경제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이웃 나라와의 전쟁으로 수백만 명을 학살하여 온 것이 인간입니다. 무엇이 고귀하고 무엇이 숭고합니까? 이러한 죄인들이기에 하나님도 자기에게 이익을 주면 좋은 하나님이고 손해를 끼치면 나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40:27절입니다. “봉독” 새번역으로 한번 읽겠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야곱의 불평과 원망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어찌하여 나의 사정을 모르는가, 어찌 가만히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지 않으시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불만, 이스라엘의 불만입니다.
왜 야곱과 이스라엘을 다르게 사용하였을까를 잠시 묵상하여 보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깨어지기 전의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깨어지고 난 후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깨어지기 전에도 자기를 중심으로 불평 원망하는 사람인데 깨어졌다고 하여도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불평과 원망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깨어지기 전에는 자기가 잘못하고서도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기 보다는 핑계대고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듭났다고, 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원망과 불평이 없습니까? 범사에 감사만 나옵니까? 신랑이 실수로 커다란 손해를 끼쳤는데도 그냥 웃고 감사하겠습니까? 아내가 무얼 잘못하여서 큰 손해가 나도 남편이 감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고 니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우짜다가 저런 원수를 만나 가지고!’ 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정당한데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할 때에 원망과 불평이 없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다는 것입니까? 그래도 내가 하나님 섬긴다고 섬겼는데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내가 잘못하여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덜 억울한데 내가 분명히 정당하고 상대방이 잘못하였는데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니 말이나 됩니까? 하나님이 공의롭다면 이렇게 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왜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습니까, 하는 때가 없습니까?
성경에서도 이러한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17편, 37편, 73편, 하박국서, 욥기서 등이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왜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가의 질문들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2절부터 제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헤아려 보셨습니까? 뺨으로 하늘을 재어 보았습니까? 온 땅의 티끌을 되로 되어 보았습니까? 산들을 어깨저울로 달아 보았습니까? 언덕들을 손저울로 달아 보았습니까? 주의 신을 헤아려 보았습니까? 누가 주님을 가르쳐 보았습니까? 땅의 기초가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누가 모든 별들을 만들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시원하십니까? 더 깝깝하십니까? 더 깝깝하시지요. 이게 무슨 대답이냐, 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닌데, 그리고 어떤 문제는 내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도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데 빨리 해결하여 주마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런 질문을 하시니 하나님도 참 내 사정을 모르시고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너는 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되십니까? 예수님 빼고 욥이라고 생각이 안 드십니까? 욥기서 1:1-12절입니다. 욥의 의로움을 사단에게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단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해답이 없는 고난입니다. 하루아침에 망하고서 몸에 병까지 들게 되자 아내가 하나님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서는 위로한다고 하는 게 네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 이런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욥이 대답합니다. 이러한 싸움이 욥기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인과율적인 적용을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하여도 어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겠느냐, 그러니 너의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은밀한 죄가 있을 것이니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욥은 자기는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정당하여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어찌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욥이 하나님 앞에 나의 억울함을 호소라도 하였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 정도라면 하나님이 욥에게 척 나타나셔서 해결해 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드디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욥기서 38:1-18절까지 함께 봉독합니다. “봉독” 계속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41장까지 계속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이사야서의 질문과 비슷합니다. 자기는 정당한데 왜 이리 고난을 당하는가, 라고 질문하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은 오히려 갑갑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갑갑한 대답에 욥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욥기서 40:1-4절, 42:1-6절입니다. 드디어 욥이 회개합니다. 자기의 정당성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너 뭐냐는 것입니다. 나의 뜻을 너희가 헤아리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무엇으로 비교하시겠습니까?
타락 후부터 가지고 있는 종교성으로 그릴 수가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을 말하기 위하여 신학자들이 ‘부정의 신학’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다. 형상이 아니다. 피조물이 아니다. 악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밖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그거는 그거고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이 불을 꺼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의 대답이 이사야서나 욥기서에서처럼 하시고서는 뭐라고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레바논의 짐승들이 제물에도 부족하고 그 나무가 번제를 드리는 화목에도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 같은데 그는 열방을 없는 것처럼, 텅 빈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도대체 무엇으로 비교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2절에는 땅의 거민이 메뚜기 같다고 하십니다. 귀하다는 사람들, 재판관이라는 자들도 마른 풀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5-26절을 봅니다. “봉독”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까? 그 권세가 크고 능력이 강하신 주님 앞에 어떤 자세여야 합니까? 27-31절입니다. “봉독” 왜 나는 정당한데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느냐고 원망하지 말고 나를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은 피곤하지 않으며 곤비치 않으며 명철이 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새 힘을 얻으리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무엇에 비교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 한이 없는 명철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이 무능하거나 몰라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것입니다. 아시면서 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아니하고 나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명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갑갑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가덕도에서 친구 강도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복음을 전하니 기존의 열심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잘못하던 사람들은 맞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열심히 하던 사람도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그러나 지금까지 목사님들이 가르친 것이 강도사 당신이 가르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 성경으로 대답을 하여도 성경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증거하니 그들이 생소한 것입니다.
이미 그들의 사고방식에 종교적인 하나님이 각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할 거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이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볼수록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모르고 오해하고 있는가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뭐냐, 이런 질문입니다. 네가 뭐라고 큰소리치느냐, 네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주여, 아무것도 모르고 주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제가 회개합니다, 이런 자세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앙망(仰望)이란 우러러 보고 바라는 것입니다.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 나의 뜻대로 해결하여 주지 않고 하나님이 왜 이러시느냐고 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종교적인 하나님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 이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어쭙잖은 자기의 정당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드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바로 바로 상대하시면 우리가 무엇으로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의로우신 분의 죽음을 세상이 볼 때 참으로 부당한 죽음을 당한 자를 믿는 자라면 아우성치지 마시고 여호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히브리서 12:1-3절. “봉독”
이사야 41:1-29 두려워 말라 2000. 6. 21.
오늘 본문 말씀 중에 특히 10절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정말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주어지기까지의 배경 없이 이 한 구절만 외우다 보면 그저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앞뒤를 차근차근히 보면서 이 말씀이 어떤 상태에서 힘이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욕심과 야망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에게 힘과 도움이 되어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우상을 의지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 지렁이 같이 약할 대로 약하여진 주의 택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선포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1-7절. 하나님께서 열방을 소환하시는 것입니다. 섬들아 민족들아 잠잠하라, 나와 한번 변론하여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동방에서 한 사람을 불러서 열국을 그 앞에 굴복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왕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티끌처럼 여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누가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태초로부터 명정하였다는 것입니다(미래를 완료형으로 말함). 누가 감히 뭐라고 하느냐, 나와 한번 변론하여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 동방의 한 사람을 일으켜 열국을 정복하게 한다는 말씀이 25-26절에서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북방에서 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동방에서, 25절에서는 북방에서,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해 돋는데서, 라고 합니다. 두 곳의 지명을 성경주석가들이 이렇게 봅니다. 고레스가 바벨론을 칠 때는 메대에서 왔으니 북방이고 그의 고향은 바사이니 동방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사는 페르시아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가지고 이단들이 어떻게 이용하는가 하면, 동방에서 나온다고 하니 한국이 동방이다, 그러니 한국에서 의인이 나온다, 그렇게 말하여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갔다가 한 왕이 일어나서 포로에서 돌아가게 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왕이 바로 ‘고레스’라는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을 지냅니다. 그리고 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등장하는 메대와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시키는 것입니다.
에스라 1:1-4절. “봉독” 바사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돌아가게 합니다. 고레스 왕의 권세와 능력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그런 왕을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방의 왕이라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자기의 일을 이루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두려운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4:28-45:7절까지 봉독합니다. “봉독” 여기서는 고레스를 주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를 들어서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즉 무장해제 시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문을 열어버리는 것입니다. 다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놋문, 쇠빗장을 꺾어버리는 고레스 왕을 이렇게 사용하시는 것은 4절입니다.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여도 내가 너를 불러 사용한 것이니 누가 나와 같은 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우신 주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늘 두려워합니다. 마치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것과 같이 두려워합니다.
41:5-7절입니다. 땅끝이 두려워 떨면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 하면서 서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세우면서 우리 두려워 말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우상을 붙들고 있으면서 우리 서로 두려워 말자, 라고 하는 것이 이방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2-24절을 봅니다. 우상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익한 우상을 의지하는데 그런 우상이 장래 일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이든 화든 내려보라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이처럼 아무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인데 우상에게 메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주님 외의 것을 의지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의지합니까? 주님 외의 것을 의지하는 것 모두가 우상입니다. 부모가 우상이 되기도 하고 남편이, 자녀가, 돈이 우상이 됩니다. 심지어 교회가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성전 건물을 고수하기 위하여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듯이 자기들이 헌신 봉사하였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땀과 노력이 들어갔다고 하는 조직과 보이는 것들을 예수님 보다 더 귀하에 여기면 이것도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우상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도 우상이 됩니다. 이런 우상을 의지하는 것은 결국 참으로 두려워하여야 하고 의지하여야 할 주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변론하여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상이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가 팽배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은 붙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숭배자들이 큰소리치고 자기들이 스스로 격려하면서 우상을 더욱 견고히 하고자 하는 그런 틈바구니에서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붙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을 붙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은 오히려 고레스 같은 왕을 통하여 심판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에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당대에, 이사야 선지자 당대에 하나님의 남은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이며, 궁극적으로는 메시아가 와서 이루어내실 일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에 이러한 관점이 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당대에 우상숭배가 팽배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남겨진 자들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니 두려워 말라, 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 우상숭배를 하는 자에게 이런 말씀은 위로가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우상숭배를 더욱 잘되도록 지켜달라는 말씀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를 어떻게 대우합니까?
11-12절을 보면 노하고 다투고 싸우던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이 원수 갚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식으로 하면 고레스 왕을 불러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택한 자들은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멸망시켜 버리고 너는 붙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택한 야곱은 어떤 모습입니까?
14절입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이 약한 가운데서, 가장 약한 것이 지렁이 아닙니까? 뼈대도 하나 없는 밟으면 찍소리도 한번 못하고 겨우 꿈틀거리는 정도의 약하고 미천한 것을 지렁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자는 주님만 의지하고 우상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지렁이 같이 약하여진 자들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함께하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이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만을 의지함으로 지렁이 같이 연약합니까?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이 드디어 위로가 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너에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에게는 목자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는 것인데 양보다 더 약한 지렁이 같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14절을 한 번 더 봅니다. “봉독” 너를 돕는 자는 너의 구속자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구속하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더라도 구속하여 내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 고레스를 세워서라도 너희를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속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고엘’입니다. 이러한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을 이사야서에서만 몇 곳을 찾아봅니다.
43:14절. 바벨론에서 구속하여냄, 44:6절. 처음이요 마지막인 구속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라는 구속자, 48:17절. 자기 백성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구속자, 49:7절. 멸시 미움. 종이 된 자를 열왕이 경배하게 하시는 구속자, 49:26절. 심판하시는 구속자, 54:5절. 네 남편 만군의 여호와 온 세상의 하나님, 54:9절. 잠시의 진노와 영원한 자비의 구속자, 59:20절.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심, 63:16절.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은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주는 우리 아버지입니다.
더 많지만 여기까지만 봅니다. 특히 ‘고엘’ 사건하면, 룻의 남편이 되어준 보아스가 고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아 주는 것이 고엘, 구속자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속자 고엘이 있으니 염려 말라,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구속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구속자가 오면 너희가 그 핍박하던 자들을 부수어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운데서 이러한 적을 쳐부수어 버린 적이 없습니다. 다윗시대 만큼 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을 가지고 문자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세상의 세력, 공중권세 잡은 자의 세력을 꺾어버리시고 자기의 택한 자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때인 것입니다.
물론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때는 지금의 이런 말씀이 온 세상에 확정적으로 공포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세상의 우상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함으로 핍박과 약함에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구속자가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빚을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받은 자들이 무엇을 받게 됩니까?
17-20절입니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들이 물을 구할 때에, 물이 없어 허덕일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산에 강을 내시고 골자기에 샘이 나게 하시고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강입니까? 은혜의 생수의 강인 것입니다. 무리가 이것을 보고서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창조한 바인 줄 알며 헤아리며 깨달으리라. 이것이 단지 마지막 최후의 심판 이후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주님이 우리의 구속자가 되어 주셨기에 우리 안에 목마름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염려가 없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구속주가 임하심으로 우리에게서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날 때 이런 것을 보고서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임을 헤아리며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가, 성도가 참으로 구속주를 믿는다면 두려움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합니다.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흥 안 된다고 신경질이 나서 백 군데나 넘게 불을 지르고 다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날 주님의 택한 지렁이 같고 가련하고 약하여 보일지라도 우상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요 위로의 말씀이요 복된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사야 41:10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2:1-9 주의 종 2000. 6. 28.
오늘 제목이 ‘주의 종’입니다. 우리는 주의 종, 하면 누가 생각이 됩니까? 목사이지요. 워낙 주의 종이라고 하였으니 주의 종 그러면 목사,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목사만 주의 종이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그러자 어떤 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럽디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주의 종이 섬겨야 한다고 말합디다.
주의 종이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 주의 종입니다.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 주의 종인데 우리식으로 말하면 목사이기에 주의 종이고 평신도이기에 주의 종이 아니다,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목사라도 주님의 종이 아닐 수 있고 평신도라도 주님의 종이 맞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선지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 전통적인 제사장의 가문에서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양이나 치고 뽕나무나 가꾸던 아모스 같은 선지자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거짓 선지자로 책망을 받는 것을 선지서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그러면 진짜 주의 종이 누구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후반부에 주의 종에 대한 말씀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 주의 종이 이루어 내실 일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주의 종이 누구인가를 바르게 알고서, 우리는 그 주의 종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주의 종을 거부하면 곧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저주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이 말하는 주의 종과 성경이 증거하는 주의 종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 족장들, 모세, 다윗 등을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국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들이 온전한 종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실수하고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들의 모습에서 장차 나타날 완전한 종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통하여 주님의 종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올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의 종의 자격과 그의 일하심의 모습과 그의 사명에 대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주의 종의 자격입니다. 주님께서 붙드시고, 주님의 마음에 기뻐하시고, 주의 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종의 자격입니다. 이 말씀이 누구에게 성취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주님께서 붙드시고 기뻐하시고 주의 신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궁극적인 하나님의 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17절과 17:5절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하늘에서 음성이 납니다. 3장에서는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는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그리고 17장에서는 변화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들려온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설교를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목사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신을 주셨다는 것은 요한의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예수님의 잉태로부터 공생애 기간 동안 늘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것입니다.
2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주의 종의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요란스럽게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늘 들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커다란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세계의 역사 속에서는 로마의 한 식민지에서 로마를 반대하다가 죽은 한 반역자로 이름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보이는 주의 종에 대한 모습입니다. 조용합니다. 그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15-21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면서도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을 ‘메시아 은닉’이라고 하는데 왜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메시아로 왔다면 자신을 더욱 드러내고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메시아를 믿도록 하여야 하는데 왜 조용조용하게 다니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의 종의 자세입니다. 주님께서 주의 종의 자세를 이미 예언하고 있기에 주의 종의 자세란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만천하에 광고하고 메시아가 왔다, 라고 고함을 지르며 알려야 할 텐데 왜 이렇게 조용히 일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알기에는 더욱 널리 광고도 하고 알려야 할 텐데 왜 이렇게 일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우리 교회 앞의 교회의 부흥회에 잠시 참석을 하였습니다. 요즈음 뜨는 부흥사라 하여 가보았더니 미리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여름 집회를 광고하는 내용을 몇 가지 보면 무엇이든 해결 안 될게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전문 찬양단과 스텝들을 동원하여 다니는 것입니다. 주의 종의 일하는 모습과 무엇인가 다르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계속하여 예수님이 자기의 일하시는 모습을 숨기려하고 있습니다. 몇 곳을 더 보고자 합니다. 마 9:30절. 소경이 눈뜸, 막 5:43절. 죽은 자가 살아남, 요 5:13절. 38년된 병자 고치시고 피하심. 이러한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이사야서의 말씀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조용히 일하시는가? 그 이유는 3절과 4절에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약하고 연약한 자를 보호하신다는 말씀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꺾지 않고 끄지 않고 그냥두시는 것은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로 공의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조용히 이루어 나가시는데 쇠하지 아니하고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까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12:18-21절을 봅니다. 주의 종이 이방에 무엇을 알게 하는 것입니까?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는 것입니다(18절). 그런데 심판을 알게 하는데 조용히 하시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이미 심판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저절로 꺾어지는 것이고 꺼져가는 것입니다. 살리려면 상한 갈대를 꺾어버려야 새 갈대가 나오는 것입니다. 등불은 기름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꺼져가는 심지를, 이라는 말을 난하주에서 보면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한다는 말을 연기 나는 삼대를, 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꺼져가는 심지가 아니라 꺼져가는 삼대라면, 이것을 가만히 두면 어떻게 됩니까? 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만히 두는 것이 심판임을 로마서 1장에서 ‘내어버려 두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까지 그대로 둡니까?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방이 그 이름을 바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 적용을 하자면 우리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라면 그대로 두어 버리면 심판입니다. 조용히 내버려두시면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가는 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조용히 계시지 않고 우리를 간섭하고 다스리심이 복인 것입니다.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종이 조용하게 일하시지만 그러나 반드시 주의 뜻을 땅끝까지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5절에 보시면 천지를 창조하신 그 능력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고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고, 신을 주시는 하나님이 주의 종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 주의 종을 통하여 이루어 내실 일이 무엇입니까? 6절입니다. 여호와의 의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으로 주의 종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의로 불렀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주의 종을 부르시고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1:17절을 봅니다. “봉독”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바로 복음 안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바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 3:23-26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종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한곳을 더 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를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무엇을 삼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로 하나님의 의를 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란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 자기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이 의롭다 하심은 결국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란 자기의 희생으로 죄인을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분이 주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주의 종이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의 의가 되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증거하는 자는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분과 상관없이 주의 종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주의 종이지 다른 것을 증거하는 것이 주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함과 자기 의와 이력과 업적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의 의를 증거하는 것이 주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지 못한 이유가 로마서 10:3-4절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님의 의를 위하여 주의 종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종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내심으로 이스라엘의 언약이 되실 뿐만 아니라 이방의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지만 이스라엘이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을 갱신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새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 새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도 구원하시면서 동시에 이방인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9:6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돌아오는 일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었던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님을 알게 된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주님의 종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진짜 주의 종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종의 말씀은 뒷전으로 하고 눈에 보이는 자칭 주의 종이라는 자들의 말만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보십시오. 그러면 말씀을 보고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목사님이 그러던데요, 하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 전도를 하실 때 우리 목사님이 그러시던데요, 하려면 아직 전도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합니다, 라고 전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여러분의 믿음의 기초가 말씀위에 세워지지 않고 목사의 말에 세워져 있으니 이단들이 말씀 몇 구절만 들고 와도 감당을 못하고서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상홍 하나님의 증인이나, 안식교가 성경을 들고서 도전하면 성경으로 물리칠 수가 있습니까? 이런 이단만이 아니라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하는 자에 대하여서도 반박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칭 주의 종이라는 자들의 말만 듣다보니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까? 진짜 주의 종이라는 성경의 증거를 보지 않으니 주의 종 그러면 목사,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가 주의 종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여러분도 마땅히 주의 종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신분적으로 주의 종이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주의 종은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주의 종’을 증거하면 주의 종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를 전하지 않고 교회를 전하지 않고 주님을 증거하시면 주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주의 종이란 주님을 증거하라고 보낸 자들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을 증거하는 자들도 영광을 받도록 하시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흥회 참석하니 이런 말을 합디다. 우리가 주님께 쓰이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 출세, 부자 됨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 도덕적으로 손가락질 받고 멸시 천대를 받는다, 이 말씀은 맞지요. 그러면서 다말, 라합, 룻, 마리아 이야기 다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의 쓰임을 받는 내가 주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 보다는 쓰임 받는 자를 더욱 드러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결코 사람에게 주지 아니 하십니다.
이사야 42:8절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사람에게,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십니다.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의 종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시편 115:1절에서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종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7절을 봅니다.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말씀은 더 이상 설명이 없어도 아시는 말씀입니다. 신약의 증거를 찾지 않아도 이미 아는 내용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던 자들을, 사망의 권세에 붙들려 있던 자들을 풀어내시는 것이 주의 종의 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을 주의 종을 통하여서만 이루어 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사람에게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앞에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 드리는 자가 주의 종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종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두 곳만 더 말씀을 찾아봅니다. 이사야 52:13절. 여호와의 종이 지극히 높이 들릴 것이지만 그러나 14절 이하의 모습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종이란 조용하게 일하십니다. 53:7절. 잠잠한 양같이 끌려가시는 종입니다. 53:11절.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면 또 그들의 죄를 담당하리라.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종의 할 일인 것입니다. 이 종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이 주의 종을 믿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허다한 주의 종이란 이 대신 고난당하신 한 분, 참된 종을 증거하기 위한 종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종이라면 여호와의 의를 이루신 주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면서 그 주님을 통하여 모든 영광이 주님께 돌아가는 삶이 우리의 지극히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렇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죄된 모습임을 아시고 범사에 주를 인정하시고 그 종의 공로로 살고 있음을 인하여 감사하며 그 은혜가 더욱 풍성히 드러나는 삶, 이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나의 그 어떤 것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의 은혜가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이사야 42:9-13 새 일, 새 노래 2000. 7. 5.
9절과 10절에서 ‘새 일’과 ‘새 노래’라는 말이 나옵니다. 새 일을 행하시니 새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새 일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새 일을 알아야 새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은 새 일이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 1:9-10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느니라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해 아래에 새것이 없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그 형태와 모양만 다를 뿐 옛날에 다 있었던 일입니다. 요즈음 신세대를 쉰세대가 이해 못하는 것은 오늘날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요즈음은 변화의 속도만 빠를 뿐이지 옛날에도 여전히 늙은이가 보는 젊은이는 영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남자가 귀고리를 하고 머리를 노랗게, 파랗게 물들이는 것이 상투 틀고 다닐 때 신문물이라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다니는 자를 못마땅하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문화적인 것이라서 남자가 귀고리를 하고 남자가 치마를 입는 것이 당연한 나라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새롭다고 하는 것도 이미 옛날에 있었기에 새로워 보여도 금방 실정이 나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아도 늘 같은 것의 반복입니다. 신문이란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몇 년간의 신문을 비교분석해 보면 꼭 같은 것입니다.
말과 사건의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선거철에는 부정선거 시비, 데모하는 것, 집단 이기주의, 사건 사고, 부정부패, 이런 것이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문을 전혀 보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권태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권태를 참지 못하여, 무엇이 새로운 것이 없는가 하고서 새로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놀 것 등을 끝없이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국내에서 안 되면 해외에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세상에서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 있었던 것이 후에 다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행이라는 것도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새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 일이 무엇입니까? 9절 말씀에서, 전에 예언한 일이 이루어졌고 이제는 앞으로 될 새로운 일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새 일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 새 일을 누가 이루어 내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일을 대비하게 하고, 새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을 누가 이루어 내었는지를 알게 함으로 주를 찬송케 하는 것입니다. 즉 새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새 일이란 무엇입니까? 14-17절입니다. 오랫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히 참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해산하는 여인처럼 부르짖겠다는 것입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것처럼 이루어 내실 것이랍니다. 도저히 더 이상 참지 못하여 새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새 일이 무엇입니까? 심판과 구원입니다.
15절과 17절을 보면 심판입니다. 산들이 황무하게 되고 강과 바다가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자들이 크게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니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을 행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친히 이끌어 내시는 것이 새 일입니다. 이것만이 새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일을 모형적으로 먼저 보이시는데 먼저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구출하여 내시는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통하여 자기의 백성을 구출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제2의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구출이란 결국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전에 있었던 일은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과 가나안에 들어온 것과 또 다른 주님의 말씀하신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또 다시 새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그 새 일이 무엇인지 우선 이사야서에서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43:14-21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에서 구출하여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는데 미리 포로에서 구출하여 내시겠다는 것이 새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구출하여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 일에 대하여 21절에 보면 그 새 일을 행하신 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찬양이 새 노래이지요.
이사야 48:1-11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에서 구원하신다는 말보다 죄악에서 구하여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죄악입니까? 야곱 집 이스라엘이라 부름을 받고 택함을 입었는데도 성실치 못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완악하며, 목의 힘줄은 무쇠요, 이마는 놋이라,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것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에서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고난의 풀무로 시련하고 그곳에서 택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택하심이, 구원하심이 무엇 때문인지를 9절과 11절에서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기의 영예를 위하여 멸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노하셔도, 멸절하셔도 당연하지만 그러나 자기의 이름과 영예를 인하여 얼마를 구하여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절되지 않고서 구출 받은 자가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주의 분노의 대상이고 멸절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심은 11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라고 두 번이나 반복하시면서 자기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 일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만이 아니라 더 궁극적인 새 일은 새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란 하나님의 신을 택한 모든 자에게 부어주시는 언약입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봉독” 새 언약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돌판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죽으심의 피가 새 언약입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호와를 알라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되고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죄를 온전히 없애지 못하기에 반복적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단번에 완전히 영원토록 온전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새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2:20절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곳만 새 언약에 관하여 더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8:13절. “봉독” 새 언약이라 함은 처음 것(율법)은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짐. 히브리서 9:15절. “봉독” 첫 언약의 범죄에서 구속하시고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받게 하심. 이러한 엄청난 일이 새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이라고 고린도후서 3:6절에서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실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 중에서라도 몇몇을 구원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심으로,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구하여 내시듯이, 바벨론에서 구하여 내시듯이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구원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루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구출되는 것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언약하신 것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주님의 주님되심을 이방인 중에서도 드러내시기 위하여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새 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당연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2:10-13절입니다. “봉독” 모든 만물이 여호와를 노래하고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새 일을 행하신 것을 인하여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불러내신 자들은 마땅히 새 노래로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새 노래의 내용은 새 일을 행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새 언약으로, 즉 주님의 피로서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옛것이 지나가고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었기에 우리의 노래가 새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새 노래의 내용이 무엇이며, 누가 부릅니까? 요한계시록 5:9-14절입니다. “봉독” 새 노래의 내용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과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새 노래로 노래합니다. 요한계시록 14:1-4절입니다. “봉독” 어린 양만 따라다니는 자들입니다. 구속함을 입은 처음 열매입니다. 14만4천명이란 주께 택함을 입은 자들의 수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린 양의 피로써 깨끗함을 입고서 어린 양만 따라다니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새 일을 인하여 구속받은 자들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새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기 피로 사서 드리신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그 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새 일로 인하여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노래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42:18-43:7 그러나 2000. 7. 12.
이사야 42:18-25절을 보시면 절망입니다. 모두가 귀머거리이고 소경입니다. 귀머거리이고 소경이기에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을 주님께서 불러내시고 구속하신다는 말씀이 43:1절 이하에 계속하여 나옵니다. 그러므로 42:18절과 43절 사이에 접속사가 하나 들어갑니다.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러나”입니다. ‘그러나’ 라는 접속사는 앞의 상황과 내용이 어떠하다고 할지라도 ‘그러나’를 붙이면 뒤에 나오는 상황과 내용이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라는 말이 성경에서 몇 번이나 나오는지 컴퓨터에서 성구사전으로 찾아보니 469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이 숫자는 개역성경에서만 그렇고 다른 번역을 보면 더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본문 43:1절에도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은 접속사든 주어든 생략하여도 뜻이 통합니다. 그래서 넣지 않았지만 그러나 더욱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려면 ‘그러나’가 들어가는 것이 더 좋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새번역이나 공동번역 등은 ‘그러나’를 넣고 있습니다.
이제 ‘그러나’를 넣어서 42:25절과 43:1절을 한번 읽어봅니다. “봉독” 느낌이 다를 것입니다. 이 ‘그러나’ 라는 접속사 하나가 얼마나 큰 은혜로운 말씀인지 성경 전체에서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아마 평생을 ‘그러나’ 라는 말로 설교를 하여도 다 못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6:5-8절입니다. “봉독” 죄악의 관영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다 쓸어버리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까? 노아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나’ 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법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대로 한다면, 우리가 다 멸망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생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주의 구원의 은혜를 알고 기뻐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그러나’의 은혜를 모르면 자꾸만 세상의 인과율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하면 하나님이 이만큼 해 주실거야,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를 잘 모르고, 또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모를 때 그렇게 하는 것이지,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공의를 알아간다면 결코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나는 죄인으로 멸망 받아 마땅한데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용서받았으니 감사합니다, 이 고백 외에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봅니다. 42:18절에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소경들아 밝히 보라고 합니다. 귀머거리와 소경이 누구입니까? 19절에 보니 주님의 종, 주님이 보낸 사자, 주님과 친한 자, 여호와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전체 백성을 다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지도자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데도 이들이 모두 귀머거리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외쳐도 듣지 못하고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소경이고 귀머거리인데 자기들의 생각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잘 듣고 잘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주의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외치면 저놈을 잡아 죽여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경되고 귀머거리된 현실입니다. 자기들이 소경이고 귀머거리임을 알면 고쳐질 기회라도 있겠지만 자기들이 본다고 하고 듣는다고 하니 더욱 고치기가 힘든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치고 자기가 알코올 중독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정신병자치고 자기가 정신병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은 신앙생활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착각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본다는 자는 소경되게 하시고 소경은 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어저께 총신대학원에서 홍보물이 하나 왔는데 거기에 ‘교수단상’이라는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글을 비추어 보면서 우리를 점검하고자 합니다.(최홍석 교수의 글 인용) 야고보서 1:26절에 보시면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는 말씀으로 짧은 글이 있었습니다. 여기의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긴다는 말이 스스로 신앙생활 한다고 여기면서,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전혀 헛된 일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헛되다는 것을 알지도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과 헛된 경건의 기준이 혀를 통제하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인데 혀를 통제한다는 것은 생각을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혀를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고 남을 판단하고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칭찬보다 폄론을 더 잘하고 설령 칭찬한다고 하여도 자기에게 유리할 경우만 칭찬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혀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입히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사실 여러분이 들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제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아마 이 글을 부분적으로 인용할 때에 여러분이 자기나 잘하지, 그런 생각이 드신 분이 계셨다면 저를 잘 보신 것입니다. 자기의 혀는 통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경건하다,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저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제 임시노회를 폐회할 때 노회장이 성경 한 구절 읽고 기도하고 마치는데 그 구절이 고린도전서 9:27절이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좀 안다고 할 때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모습이고 또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서 자신이 신앙생활 한다고 여기고 있다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누가 귀머거리이고 누가 소경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란 것입니다.
다시 이사야 42:20절부터 봅니다.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고 귀가 밝을 찌라도 듣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소경과 귀머거리란 신체적인 소경과 귀머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본다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치 아니하는 것이 소경이요 귀머거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이 들려지고 있습니까? 보고 있습니까? 그러나 누가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목사는 자기 교회를 위한 관심보다 주님께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가정보다 주님께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유의치 않는다, 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교훈을, 율법을, 말씀을 존귀하게 하여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자 하여도 이 백성이 도적맞고 탈취를 당하고 굴속에 잡히고 옥에 갇히고 노략을 당하여도 구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스라엘이 이렇게 노략을 당하는데 누구 한사람 주께로 돌이키게 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범죄함으로 이렇게 되었는데, 그러므로 살 길이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들을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매 그 사방이 불붙듯 하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도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주께 돌아가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전쟁과 시련을 주어서 심지어 자기의 몸이 불타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깨닫지도 않고 마음에 두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반응을 합니까? 그러나 발등만이 아니라 몸에 불이 붙고 있는데도 마음에 두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신경이 죽어있는 것입니까? 문둥병은 고통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려나가도 고통이 없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불속으로 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유의치 않는 이것이 소경이고 귀머거리인 현실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의 가족들이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진다고 하는데도 자꾸만 지체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천사에게는 보이는데 롯의 가족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둡니까? 여기서도 ‘그러나’라는 단어가 안 들어갈 뿐이지 ‘그러나’의 상황입니다. 이미 심판을 말하고 탈출하라고 하는데도 미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두어버리면 불심판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끌려 나오면서도 또다시 뒤를 돌아봐서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는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의 경계를 위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말은 하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행동이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말씀에 찔림을 받는다면 소망이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소경과 귀머거리인 채로 두시지 않으시고, 그러나 끄집어내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제 본문에서 ‘그러나’를 보고자 합니다.
43:1-7절입니다. “봉독” 이제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말씀인지 조금 더 실감이 나실 것입니다. 소경이고 귀머거리이고 자기 몸이 불에 타고 있는데도 깨닫지도 못하고 마음에 두지도 않고 있는 백성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그러나, 너를 창조하신 이가 말하노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를 지명하여 불렀기에 내가 너를 구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 가운데, 물 가운데에서 너를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홍해의, 요단강의 물 가운데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가운데 보호를 받은 것처럼 이 세상의 어떠한 환난에서도 내가 너를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역시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시는 것이고 그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심을 인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소경과 귀머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자를 주님께서 지명하시고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우리에게 어떠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경됨과 귀머거리됨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진 자를 주님께서 불러오시는 것입니다. 이방의 포로된 자들을 땅끝까지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의 확대가 오늘 우리에게도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위하여 속량물이 필요하였습니다. 출애굽때의 희생물이 있었던 것처럼 속량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동일하게 죽어 마땅하지만 속량물로 인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다. 속량물을 지불한다는 것은 이집트가 속량물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의 장자의 죽음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값을 치르고 구속하여 내신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속량은 어린양의 희생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9절에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희생물로 인하여 자기 백성을 속량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선택과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받았기에 우리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에 감격할 뿐입니다. ‘그러나’의 사랑에 대하여 한 곳을 더 찾아보고서 신약에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에스겔 16:58-60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버려진 계집아이의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버려져서 죽음만이 기다리는 그런 자를 불쌍히 여겨서 살리고 먹이고 입히고 공주로, 황후로 대접하여 놓았더니 그것으로 오히려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60절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이 없으면 그대로 심판과 저주입니다. ‘그러나’로 시작하여 구원의 소식이 나타나는데 그러나, 구원하심은 너와 세운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내게 네게 언약을 세워 나로 여호와인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이는 하나님이 우리가 행한 일을 모두 용서하신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나’의 구원을 입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할 말들이 많습니까? 누가 옳고 그르냐, 누가누가 잘하냐, 이런 일들이 어디에서 감히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그러나’의 은총을 입었다면 입을 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나 은혜를 베푸신 주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당연하고 지극히 마땅한 자세입니다.
로마서 3:19-27절입니다. “봉독” 21절에 ‘그러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결코 자기의 자랑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찬송할 뿐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마땅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이 은혜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3:8-44:8 증인 2000. 7. 19.
지난주 수요일 저녁 설교제목이 무엇입니까? “그러나”이지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심판을 받아 마땅한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택하셨기에 자기의 이름을 인하여 그리고 사랑함을 인하여 속죄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구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43:8-9절.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이스라엘을 재판정에 소환하듯이 불러내심.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열방도 불러내심. 그리고서 누가 하나님의 구원을 예고하겠느냐고 하십니다. 구원을 보일 수 있는 증인이 있다면 나와서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43:10-13절,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을 증인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만이 참되신 신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전에도 나의 후에도 신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태초로부터 나만이 참된 구원자이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란 무엇을 증거하는 것이 증인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어 내시고야 마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만이 참되신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증인이 되자, 라고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참된 증인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의 일하심 보다는 자기가 속한 단체를 증거할 때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여호와만을 증거하는 사람들 같지만 결국은 자기들의 단체를 위한 증인들입니다. 이런 모습이 어떠한 선교단체들이나 교회들도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증거하라는 내용을 증거하지 않고 자기의 교회를 자랑하고 담임목사를 자랑하고 단체의 장을 자랑하는 것은 바른 증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수많은 전도의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정말 자기가 속한 단체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를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증인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인이 되기 전에 먼저 증인이 무엇을 증거해야 하는지를 알고서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증거하여야 합니까?
43:14-21절. 장차 갈대아 사람들을 ?아버리고 너희를 구원하여 내겠다고 하십니다. 갈대아란 바벨론입니다. 이 바벨론을 ?아버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을 옛날의 구원하시던 것을 말씀하시면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어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이 이미 하나님이 구원을 말씀하셨고 그 일을 이루어내신 것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까?
15절에 거룩하신 자, 창조자, 왕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과거의 일을 기억치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9절에 새 일을 행하시는 것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어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니 이전의 홍해를 가르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는 것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일을 이루어내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음란하며 반역하였으나 그러나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올 때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가 하면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바벨론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라 할 것이 새 일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23:7-8절을 봅니다. “봉독” 그러면 더 궁극적인 새 일이란 감이 잡히시지요. 이제는 어떤 하나님을 부르게 될 것입니까? 만방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새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2주전에 ‘새 일, 새 노래’라는 제목의 말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증거하여야 할 증거의 내용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리라, 하는 것을 믿고 알라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믿고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열방에 대하여서도 증인이 되는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 일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는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알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면서 증인이 되라고 하니 무리가 오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증거할 내용의 삶을 자신이 살면 자연스럽게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믿지도 않는 내용을 증거하려고 하니 전도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인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으로 되어진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믿지 못하였으면 훈련으로 증인이 되겠습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성경의 예언이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다 이루어질 줄 믿으십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이 언약하신 내용이 그대로 다 이루어진 것을 믿으십니까? 출애굽,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새 일, 그리고 더 궁극적인 새 일은 메시아의 초림으로 성령을 보내신 일까지 다 이루어진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면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성도의 삶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주의 재림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재림을 믿는다면,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고 있다면 구태여 전도의 특별 프로그램과 수많은 전도 방법론을 개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전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자신도 믿지 못하는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모습이 무엇을 향한 삶인지 돌아보면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를 받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자기들이 말하는 천국이 좋다고 하면서 천국을 좋아하기 보다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좋아하면서 무슨 천국을 전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란 어떤 증인의 삶을 사는가?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절. “봉독” 앞뒤의 내용을 보면 인생의 중대사라고 할 수 있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때가 단축하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건을 다 쓰지 못하는 자처럼 쓰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라면 열방을 향하여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인위적인 프로그램에 의하여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찾는 것이 증인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증인으로 부름을 받고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증인이 하나님을 찾지 않음을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 22-2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나의 증인으로 부르고 택하였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과 분향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거나 짐이 되는 정도가 아닌데도 이들은 하나님을 괴로워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악으로 하나님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향을 피우는 것을 귀찮고 괴로운 것으로 보았으니 어찌 증인이 될 수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증인이 되는 것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관계가 회복되어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제대로 믿는다면 증인이 되지 말라고 말려도 증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약속이 생생하게 믿어지는데 증인의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에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실패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인들을 어떻게 하셔서 다시 증인으로 세우시는지를 43:25-44:8절까지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증인이 하나님을 찾지 않지만 그러나 그 죄를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도말하시고 기억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25절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서 변론을 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저주를 입고 비방거리가 된 것은 너희의 시조로부터 범죄하고 너희의 교사들이 나를 배역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방거리가 되게 하였지만 그러나 그러한 비방거리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또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읍이 황폐하게 되는 것을 열방이 보고서 자기 하나님을 거역하여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이 무조건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아니라 심판할 자를 틀림없이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이스라엘이 받았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따라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하게 되실 것을 44:1-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새 일을 하시면 다른 사람들이 야곱의 이름으로 칭함을 입고자 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고자 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일어납니다. 바벨론이 메데 바사에 정복이 되고 바사 제국 때의 일입니다. 에스더가 왕후로 뽑힌 것과 하만과 모르드개의 일을 알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는 날 유대인들이 무장을 하고 보복을 할 수 있도록 왕의 조서가 내리고 모르드개가 득세를 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에스더 8:15-17절입니다. 본토인들이 유대교로 개종을 하는 자가 많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3-47절을 봅니다. 이제 하나님의 새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성도들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성령이 임하니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를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또 백성들에게서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얻는 백성을 날마다 더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을 만큼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주에 구제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우선적인 것은 성도의 서로 나눔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백성들의 칭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새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그대로 전달되어 증거됩니까? 아니라고 봅니다. 그저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면서 전도한다고 증인되라고 하니, 자기가 믿지도 않는 것을 증거하려니 무리가 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44:6-8절에서 증인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다 이루신다고 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의 증거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때에는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이스라엘이 부름을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증거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살아나셨고 지금도 자기의 일을 이루고 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주님에게서 나오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서고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어떻고, 러시아가 어떻고, 중국이 세계의 새로운 축으로 서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북이 통일되는 것을 증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0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증거할 내용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로 통일됩니다. 그리스도로 구조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구원이고 그렇지 않으면 심판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러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4:9-28 우상과 이스라엘 2000. 7. 26.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우상이라면 어떤 한 형상만을 우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나무나 돌이나 무엇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면 우상이라고 합니다. 물론 1차적인 우상들은 그런 것을 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철이나 나무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의지하고 절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보아야 우상이 제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고나서부터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우상들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꼭 어떠한 형태만의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힘과 실력으로만 살려고 하는 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가인의 경우를 보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을 쌓아서 자기들의 직계가족으로 구성된 사회를 이루어 자기들의 가족중심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4:16-24절을 봅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라멕의 노래 중에 아다와 씰라여, 라고 합니다. 그 아다는 목축업의 조상이고 씰라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의 조상입니다. 이들에게 위협을 하는 것을 봅니다.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벌이 칠십칠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는 상처를 입는 정도인데 사람을 죽여버리고서 하는 말이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가만히 안두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인류가 도시를 만들고 성읍을 만들고 하면서 모두가 자기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인간이 가득하게 되니 세상에 죄악도 관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이웃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살려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에 또 인류들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역시 인간의 하는 일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기들의 보호를 위하여 성과 대를 쌓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탑만 쌓는 것이 아닙니다. 성과 대를 쌓는 것입니다.
창세기 11:4절입니다. “봉독” 성과 대를 쌓으면서 하는 말이 자,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바로 우상숭배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빛내고 자기의 이름을 보존하기 위한 성읍과 대를 쌓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벨탑을 이루지 못하게 언어를 혼잡하게 해버립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가 흩어져서 살아가는 중에 하나님이 한 사람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지요. 하나님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입니까? 셈 족속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던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4:2-3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이방신을 섬겼다는 것은 우상숭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떨까요?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 이미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아브라함은 데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이방신을 섬기는 자의 집안에서 이끌어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모두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집안이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라면 다른 것은 안보아도 어떤 형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야곱을 부르셔서 우상숭배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명령이 주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서 주어집니다.
출애굽기 20:1-6절입니다. “봉독” 십계명의 서론의 중요성-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됨.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이 어디에 달려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면 살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겨도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계속되는 흥망성쇠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고생을 훨씬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거합니까?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고, 또 자기들도 속고 있는 것은 우상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하나님만을 섬기는가 아니면 하나님과 세상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가? 우리는 적어도 양다리 걸치고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심각하는 것은 자신이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한 신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기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욕심과 나의 죄된 자기중심성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으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섬기지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데도 바로 산 아래에서는 나를 위한 신을, 나를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 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이것을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낸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저 나와 연관된 것들만 소중하지 다른 것은 다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가장 좋으신 분으로 믿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중고등부 수련회를 하면서 베드로전?후서를 다 보았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베드로후서 3장 등 총 8장인데 한 장을 한 시간 이상씩 한 절 한 절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보니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님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쳐버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피로 속죄를 받고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어도 계속하여 주님을 알아감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기에 날마다 그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까? 우상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우상을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44:12-13절에서 보면 철공과 목공이 만들어내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로 만들고 나무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15절에서 19절까지 잘 말하여지고 있습니다. 나무를 가지고 불을 피워 고기도 구워먹고 몸을 따뜻하게 하기도 하면서 꼭 같은 그 나무토막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절하고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무로 연료를 삼지 않으니 가스나 기름을 두고서 절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도청 앞에 보면 종종 차에 대고 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이들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노골적인 우상숭배를 하는 것 같으면 우리는 어떤 식의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까? 형태를 만들어 절하는 것이 아니라 탐심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5절입니다. 우상에 관하여 말씀을 드릴 때마다 이 말씀을 드렸으니 이제 구절을 외울 것입니다. 탐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면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별다를 바 없이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44:18-20절입니다. “봉독”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 깨닫지 못하고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무로 불을 피우는데 사용하면서 어떻게 내가 여기에 굴복하겠는가 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자기를 구원하지도 못하는 것을 붙들고 나를 구원하겠지, 하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의지하면 결국 허무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헛것이라는 겁니다.
44:9-11절입니다. “봉독” 우상숭배자는 허무하게 됩니다.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돈을 의지하면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면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우상이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정신을 잊어버리면 어떠한 종교적인 행사라도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 빠져버리면 어떠한 종교적인 일이라도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헌신과 봉사와 수고라도 그 기초와 그 근거가 주님의 희생이 바탕과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상숭배가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더라도 주님 앞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이러한 일을 감당케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교사로 허락하셨사오니 여름성경학교에서 땀을 흘리게 하여 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런 자세여야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수련회 때 밤 11시쯤에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길에서 밤중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꽃인데 아이들에게 그 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꽃이 밤중에 누가 보아준다고 이렇게 피어있겠는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향기를 맡아보니 향기 또한 얼마나 좋은지 누가 그 산속에 그 꽃향기를 맡아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함에도 향기를 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보아주지 않고, 향기를 맡아주지 않더라도 자기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모습과 향기를 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아닌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들꽃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면 그런 사람이 있는 곳은 향기가 가득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며, 자기의 탐심을 따르지 않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반응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이 누구의 실력으로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도 많은 우상숭배를 하였기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합니까? 어떻게 보면 도저히 구제불능처럼 보이던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44:21-23절입니다. “봉독”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는 이것을 기억하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상숭배를 할지라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잊어버려도 내가 너희를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자기들의 눈에 좋은 것이 있다고 하나님을 나 몰라라 하고 달려간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는데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를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같이, 안개가 사라짐같이 도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24절 이하에서 나는 너의 구속자요 너를 모태에서 조성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폐한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의 말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종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우상숭배에서 빠져나와서 주님을 섬기게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더욱 주님을 바르게 알고 주님을 찬송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23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과 땅과 만물이 주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속받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허망하고 없어질 것들, 그래서 그것을 섬기는 자는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되어 있는 우상을 멀리하고 우리로 살아계신 주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사야 45:1-25 창조와 구원 2000. 8. 16.
광복절에 남북 이산가족들이 만난다고 온 나라가 야단입니다. 혈육이 헤어졌다가 만나는 것이 그렇게 눈물나는 감동이 되는데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주님을 알고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큰 감동과 감격으로 와 닿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보고 싶어서 눈물지며 그리워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두 번쯤은 그런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혈육이 헤어지고도 만나지 못한 것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강렬하여 지는데 오늘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간절하십니까?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주님을 만나는 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보십니까? 말씀을 들으십니까?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니까? 이러한 자들만이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사모하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청동거울로 보듯이 희미하지만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동아일보 만화에 화성에서 아빠가 화상전화를 하는데 달나라에 있는 부인과 아들에게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휴대폰에서 직접 얼굴을 보고서 통화하는 전화가 곧 상용화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디지털 시대라도 사람의 만남은 아날로그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며 만나보기를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이런 자세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단지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들을 위하여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3주 전에 이사야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여 왔는지를 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을 불러내시는데도 경건하여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집안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하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모두가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자기의 존재의 소중함과 가치를 인정받는 재미가 있어야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이 불러내시는데 그 불러내시는 능력이 창조의 능력으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혼돈하고 캄캄함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범죄 이후에 인간들이 우상숭배로 인하여 온통 혼동되고 캄캄함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몰라보고 피조물을 창조주를 섬기고 있는 혼동된 세상에서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나의 어려운 현실을 더 나은 현실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자기를 섬기고 있던 자가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원을 이루어 내시는 것을 재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창조의 능력으로 우상숭배자를 구원하여 내시는 것을 44:21-28절에서 잠시 더 보고자 합니다. 지난번에 시간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21절입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야곱을 부르심은 제일 먼저 기억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야곱아, 그러면 선택,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야곱을 통하여 열두 아들이 나왔고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입니다.
범죄 이후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참되신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까? 너는 내 종이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내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시고 지으신 것입니다.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내 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기억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우리됨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모든 인간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들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의 것이 자기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는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아멘, 하는 것이 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아 이스라엘아 오늘날 주님의 택한 자들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주님이 잊어버리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9:14-15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고난을 당하다보니 여호와께서 우리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어버리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들이 혹시 잊어버려도 나는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완악함이란 자기의 자녀를 버리는 일이 허다하고 이혼하면 자녀를 서로 맡지 아니하려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자녀를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창조의 능력으로 다시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난감과 과자에 팔려서 주님을 잊어버려도 주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으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16절에 주님은 자기의 백성을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손바닥에 기록한 정도가 아니라 문신을 새기듯이 새겨버렸다는 것입니다.
44:22-25절. 자기 백성의 죄를 도말하시고 허물을 사하심. 24절 이하에서 창조의 능력으로 구원하심. 이러한 능력이 고레스를 부르시고 사용하심. 열국이 주님의 손에 있음. 그러나 이러한 것이 감추어져 있음. 계시를 받은 자만 알게 됨. 그러므로 숨어계시는 하나님. 그러나 자기의 일을 분명히 이루어내심. 45장에서 고레스를 부르심. 토기장이와 진흙을 비유로 말씀하심. 이방인도 돌아옴. 만민이 무릎 꿇음(빌2:9-11).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심.
이런 일에 우리를 끼워주심. 이산가족의 명단에 들지 못한 자들. 당첨으로 하는 것 얼마나 기다리겠는가? 단지 혈육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요 우리를 지으신 분을 만나는 일에 끼워주었다는 감격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혈육을 만나기 위하여 55년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도 한 50년만 기다립시다.
이사야 46:1-13 우상과 하나님 2000. 8. 23.
이사야 44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우상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오늘 46장에서는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시면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고 하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상과 하나님이 비교가 안 되는데 사람들이 자꾸만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는 이유는 나와 우상이 하나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우상이 어떻게 묶여있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회복의 신앙’이라는 이재철 목사의 설교집에서 신앙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내용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을 여행하였을 때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갔었는데 간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다 기도문을 적어서 그 담 사이에 넣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기도까지 가지고 와서 그곳에 끼워 넣더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기도제목을 적어 넣으면 이루어진다고 그러는 것이지요.
이러하다보니 이것이 장사가 된다 싶으니 이스라엘 체신부에서 그 통곡의 벽 옆에 팩스를 설치하고서는 그 번호를 선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기도의 제목을 팩스로 보내면 이스라엘까지 가지 않더라도 팩스로 자기의 소원을 아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절에 나가는 사람이 이스라엘에 팩스 보낼 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허용이 되지만 신약은 안 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많은 예수님의 생애를 추적하도록 관광지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일본의 절이나 신사에서 나무에 자기들의 소원을 적어서 묶어둔다는 이야기를 보았는데 이제는 요코하마의 중앙사원에서 로봇스님이 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스님은 모자라고 그래서 로봇스님이 신도들의 이름과 그들의 소원을 입력받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과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 기도쪽지를 꽂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단지 이름만 다릅니다. 하나님, 부처님만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예를 더 들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딸을 하나 둔 여신도의 기도가 남편감을 구하는데 신학교 교수로서 자식 없는 홀아비를 달라고 기도하더랍니다. 그러면 신학교 교수가 결혼을 하고서 자식도 없이 아내가 죽어야 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이 좋지 않아서 이식을 받아야 하는 청년이 간을 이식받아야 된다는 말을 듣고 간을 달라고 기도하더랍니다. 그러면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사고를 당하여 뇌사상태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기도라고 하고 있다면 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기도만 예를 들었지 우리의 예배도 전도도 구제도 선교도, 모두가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잘하면 자신이 복을 받고 교회가 부흥되고 하늘의 상을 많이 받고 식으로 나가면 이것이 얼마든지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탐심을 이루기 위한 일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성경의 용어를 차용한다고 하여도 가증스러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자신이 정성을 바치면 반드시 응답을 하여야 하는 그런 신입니다. 자신이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성경을 보다 보니 야곱을 보면서 야곱이 야망이 있었다, 꿈이 있었다, 그런데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야망을 이루어내었다, 성도도 그렇게 살아서 꿈을 이루어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런 설교를 들었다고 하는 어느 집사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의 야곱을 보면서 야곱이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고 가려다가 고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야곱의 허리를 치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야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에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들의 꿈과 비전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계획과 꿈, 즉 자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의 능력을 동원하고 남의 힘도 적절하게 빌리고 최후에는 신의 힘까지도 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들의 꿈과 야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경우에도 자기가 꿈을 꾼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계시대로 되게 하신 것이지 요셉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참고 인내하였다,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만약 성경이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는 계시의 책이 아니라 세상의 위인전기들이 말하는 고진감래, 대기만성, 사필귀정, 권선징악, 성공시대 이런 내용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46:1-2절을 봅니다. 벨과 느보는 바벨론의 우상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구부러지는데 짐승들에게 실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만 될 뿐입니다. 그 우상들이 일제히 엎드려졌으나 구원하여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고레스가 바벨론을 공격하여 하나님의 남은 자를 구하여 내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46:6-7절입니다. 우상을 어떻게 만들고 있습니까? 자기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상과 생각과 사람의 능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형태만 우상이 아닙니다. 사회의 가치관 문화관까지 다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모아서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는 거기에다가 절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사람들의 우상이 무엇인가 하면 정치가 우상이 됩니다. 아무리 정치를 잘하여도 그것이 사람을 구하여 냅니까? 사람을 바꾸어 냅니까? 경제? 경제가 좋아지면 구원됩니까? 교육이 잘되면 구원이 됩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에서의 구원은 말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인류가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사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까? 사람들마다 주장들은 다 있습니다. 무엇을 바르게 해야 한다, 이것을 이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수천 년을 발전하여 온 인류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결론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어떻게 사람을 구하여 내겠습니까?
성경적인 용어를 빌려오더라도 사람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들은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무엘상에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는 것입니다. 4,000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생각하여 낸 것이 자기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졌다고 생각하고서는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언약궤를 가지고 오게 합니다. 언약궤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요단강에서 물이 멈추고 여리고성에서 앞장세워 돌 때에 성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언약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호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지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언약궤 앞에서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있는 언약궤가 적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적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언약의 내용에는 상관없이 언약궤만 있으면 초능력이 나타나서 적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들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언약궤 스스로 적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상을 부수어 버리고 돌아옵니다. 이것이 우상과 다른 점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고 세우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빌고 구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이 그러하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 사랑하고 다 구원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범죄함으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아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떠한 업적을 이루어 내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의인이 없는데, 죄인인데,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어찌 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자신이 친히 이루어 내시는 것만을 의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무용성을 말씀하시고 나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어떻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까?
3-4절입니다. 야곱이여 이스라엘이여, 이사야의 특징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을 함께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부름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자기의 고집과 자기의 야망의 삶이 깨어지고 이스라엘이 되는 그런 내용까지 포함한 이름입니다. 야곱의 꿈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이름이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태에서 나면서부터 하나님에게 안겼다는 것입니다. 품으셨다는 것입니다. 품으시는데 언제까지입니까? 젖을 땔 때까지만 안으시는 것이 아니라 노년이 이르기까지, 백발이 되기까지 너희를 품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맺으셨기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백발이 되도록 안고 기르셔야 하시는 것입니까? 늘 어린아이 같기 때문이지요.
제대로 가지 못하기에 야곱이 백발이 되도록 하나님이 안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누구와 비교하느냐는 것입니다. 우상과 비교하는가? 우상이란 사람이 자기의 힘과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 내고 그것을 경배하고 의지하는데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시고 지으신 자를 태에서부터 백발이 되도록 안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기존의 생각을 확대시키는 그런 내용이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낯설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너무나 다름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지런히 말씀을 상고하여야 하는 이유는 주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것은 너희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8-11절입니다. 너희 패역한 자들아, 하나님의 구원을 입고도 우상 숭배하는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옛적 일이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크신 하나님이 너희에게 시내산에서 강림하시고 불과 연기 속에서 이야기하신 그런 신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출애굽과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그런 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다른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다, 나 같은 이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였고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란 자기의 기뻐하시는 일을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의 뜻을 실현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상을 섬긴 것이 우상이 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들의 뜻을 이루고자 부른 것도 우상숭배였습니다. 언약궤를 그렇게 하였고 성전을 그렇게 하였고 제사를 그렇게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내어 ?으시면서 왜 도적의 굴혈로 만드느냐고 소리치시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나 도적의 굴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란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는데 빈틈이 없이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정녕 이루시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들이 바벨론을 망하게 하고 고레스를 세워서 자기의 남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결론적으로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12-13절입니다. 하나님의 의에서 떠난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의를 새번역에서 ‘하나님의 승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의와 승리를 믿지 않는 완악한 자들이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떠나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이 하실 일에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이번 주의 성경묵상이 무엇입니까?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살라, 있는 것 같으나 없어지는 것이 있고 없는 것 같으나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있는 것 같은데 없어질 것이 우상입니다. 헛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돌아서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7:1-15 바벨론의 심판 2000. 8. 29.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의 심판에 대하여 이사야 13장과 21장 등에서 몇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바벨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바벨론이 왜 심판을 받는지를 통하여 우리가 바벨론의 정신으로 살고 있음을 확인하고서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1.바벨론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역사책을 통하여 아는 것으로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고대문명 발상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바벨론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에서 바벨은 혼잡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아 홍수이후 하나님이 땅에 흩어져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우리의 이름을 내고, 우리의 흩어짐을 면하자고 성과 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케 하여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바벨이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바벨과 바벨론이라는 말이 268번이나 나오는데 이 모든 바벨이 결국은 창세기의 이러한 바벨의 모습으로 전락을 하게 되어 요한계시록에서 영원히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벨론과 이스라엘의 역사가 많은 곳에서 서로 맞물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47:6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하심으로 바벨론에 붙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자기 백성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나라가 강대국이 되고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면서 유다도 점령하고 많은 유다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전의 기구들과 수많은 보물들을 바벨론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역대기에서, 예레미야서에서, 다니엘서에서 상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바벨론이 왜 심판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2.왜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징계하기 위한 몽둥이로 사용하셨는데 이 몽둥이가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알고 마구 설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교만입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교만을 다니엘서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다니엘 4:25-27절. “봉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는데 누구도 해석을 못합니다. 다니엘이 해석을 하고서 그 뜻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당신이 천하에 가장 높은 왕이지만 이렇게 된 것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의와 긍휼을 행하면 혹시 당신의 나라가 오래 가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의 해석대로 되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5:1-4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느부갓네살 왕 때 예루살렘에서 빼앗아온 성전의 그릇들을 가지고 자기들의 술판에 사용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한 것이 자기들의 힘이 강한 것인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던 그릇들을 가지고 자기들의 술판에 사용하고 있으니 왕의 맞은편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자 벨사살 왕이 그것을 보고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 글을 해석할 자를 찾는데 다니엘이 나오는 것입니다.
5:17-28절입니다. 느부갓네살 왕 때 되어진 일을 당신이 그의 아들이면서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교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22절처럼 마음을 낮추지 아니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 이것이 망하는 이유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도 주님의 저울 앞에서 한번 달려 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교만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심판이 다른 사람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교만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최고로 무거운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가벼운 사람이 된다면 이것이 심판입니다. 이러한 교만을 오늘 본문에서 봅니다.
이사야 47:1절에서 바벨론이 보좌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8절에서 그러므로 사치와 평안을 누리면서 말하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않겠고 자녀를 잃어버리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을 여인으로 비유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교만들이 어디서 나오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나라의 강성함 그리고 수많은 의지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지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12-13절입니다. 젊어서부터 힘쓰던 진언과 많은 사술입니다. 젊어서부터 힘쓰던 주문 외우는 것, 많은 사술, 많은 모략, 하늘을 살피고 별을 살피고 월삭을 예고함, 즉 달을 살피는 것, 이런 것들이 이들이 의지하는 대상입니다. 자기를 구원할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벨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벨론은 꼭 한 특정한 국가가 아니라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사람, 모든 단체 국가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벨론에도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13절입니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여기서 보면 바벨론에 교회,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느 지역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은 전도하라는 말씀이 되지만 그러나 복음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구원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는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하여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절대로 인종이나 지역을 구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망한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가지 말고 어디 다른 안전한 장소로 가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한참 종말론이 득세하였을 때에 어느 지역에 가야만 종말에 보호를 받는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났고 지금도 ‘증거장막’이라는 곳에는 그곳에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망한다는 것은 바벨론의 그 정신 그 사상이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세상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벨론이 망한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18장에 보시면 바벨론이 망하는데 바벨론이 온갖 세계경제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바벨론을 의지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바벨론과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막대기로 사용하셨는데 이들이 교만하여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데 1-3절에서 네 보좌에서 내려앉으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잠잠히 앉으라는 것입니다. 열국의 주모라 칭함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면서 종말을 생각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교만하고 사치하여 재앙을 받게 되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재앙을 네가 그렇게 의지하는 것들로 한번 막아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바벨론의 종말을 보고자 합니다.
12-15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엇으로 막아설 수가 있습니까? 네가 어려서부터 힘써왔던 것으로 한번 너를 구원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마른 풀같이 불살라 지리라는 것입니다. 이 불은 사람의 추위를 녹이는 그런 불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불이 임할 때에 너의 근로하던 것들이-이들은 바벨론과 함께 거래하고 의지하고 무역하던 자들- 함께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14-24절을 봅니다. “봉독” 18장 전체가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바벨론을 의지하고 함께 무역하던 자들이 바벨론의 멸망 앞에 무서워하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멸망 앞에 우는 자와 기뻐하는 자의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결코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끝입니다. 바벨론이 특정 지역이 아니라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정신, 가치관, 세력들입니다. 이것들을 의지하고 사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세상의 멸시를 받았던 자들은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사십니까? 종말을 생각하고 사십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사십니까? 바벨론이 왜 심판을 받습니까?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이란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한다는 사상입니다. 어려서부터 힘써오던 것들로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어느 부자 관원이 나와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하길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부자가 자신의 재산이 많음을 인하여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킨다고 하면서도 결국 무엇을 믿고 산 것입니까? 자기의 돈을 믿고 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인 것입니다. 바벨론이란 이처럼 주님외의 것을 주님처럼 믿고 사는 것이 바벨론입니다. 이것은 결국 마지막 날에 영원히 망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서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의 심판이후에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가 예수보다 심판받을 바벨론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줄을 모르면, 어떻게 살게 되는가 하면 자기가 무언가 잘되면 바벨론처럼 강대국이 되고 힘이 있어지면 그것이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무언가 일이 잘 안되고 어려워지면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정신, 이 세상의 정신, 바로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바벨론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어제께 가덕도의 강도사님이 방문을 하였는데 교인들 중에 어부가 많지요. 그런데 그들이 왜 같이 그물을 쳐두었는데 고기가 들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을 보고서 우리의 모습은 욥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몸까지 병들어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도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나와야지 내 그물에 고기가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위치가 어떠함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 저는 이렇게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죄의 삯으로 인한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으시는 예수님의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저주를 우리가 받지 않고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모두 주님의 대신 받으신 저주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저주가 아닙니다. 성공과 실패가 없는 것입니다. 제발 우리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희비가 춤을 추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의 힘과 부귀를 믿고 사는 것은 전부 바벨론의 세력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심판을 받지 못하여 안달하는 그런 사람이 부럽습니까? 아니면 대신 저주 받으신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일에 매이지 아니하고 나그네로 살면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이, 이들이 비록 아무것도 없어 보일지라도 이들이 부럽습니까?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8:1-22 새 일 2000. 9. 6.
이사야 42장에서 ‘새 일과 새 노래’라는 제목으로 ‘새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다른 각도로 ‘새 일’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지금 새벽기도회 때 전도서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인 12장을 보았는데 그 시작과 결론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에서 행하는 일이 모두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헛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끝없이 찾아서 추구하지만 그러나 이미 헛된 것이 되어 버렸고 옛것이 되어 버린 상태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헛된 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임을 전도서는 너무나 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인생의 헛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헛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과 똑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세상의 일들이 헛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해 아래 일어나는 일들이 헛된 이유는 우리가 모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처음 아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 아래서 행하는 어떤 일도 사망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서 12:1-8절을 봅니다. “봉독” 늙고 병들어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늙음의 모습과 죽음이 비유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으로 한 번 더 읽어 보겠습니다.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 그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도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래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는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 조객들이 오간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부서지고 샘에서 물 뜨는 물동이가 깨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부서지기 전에 네 창조를 기억하여라.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젊을 때에 무엇이나 다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늙게 되니 자기의 몸 하나 움직이는 것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늙게 되면 자신이 몸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자신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음입니다. 이것이 헛된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헛된 인생을 헛된 것으로 새롭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마치 60대 할머니가 성형수술을 하여 30대가 되어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몸이 이미 구부정한 60대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생임을 알면서도 그 헛된 인생을 향하여 목숨을 걸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 안에 하나님의 새 일이 들어 있지 않으니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새 일이 일어난 주의 백성들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다른 삶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출발이 죽음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입니다. 죽음으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받을 때 어디서 모였습니까? 카타콤이라는 지하무덤입니다.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니 날마다 죽음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이 되는 것은 그들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핍박과 죽음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이미 출발이 죽음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죽을 세상, 썩어질 세상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이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행복에로의 초대가 아니라 죽음으로의 초대입니다. 십자가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일입니다. 이렇게 된 자는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적적인 일이란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해 아래, 옛 아담 아래 있던 것들이 뽑히고 파괴되고 파멸되고 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새 일을 통하여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새 일을 하셔야만 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48:1-2절입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유다야, 삼중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습 전체를 보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고서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주를 섬긴다고 하고, 주를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너희는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성실치 못하며 의롭지 못한가 하면 4절에서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완악하고 고집이 세었으면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새 일이 아니고서는 새롭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완악함이 어느 정도인지 8절에서는 듣지도 알지도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고 궤휼하고 궤휼하여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과 이스라엘 유다의 모습이며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한 절만 더 봅니다. 17-18절입니다. 친히 유익하도록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보내셨지만 이들이 주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것이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북쪽이 먼저 망하고 남은 유다까지도 이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목의 힘줄이 무쇠요 이마가 놋이며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이들이 주께로 돌아오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새 일을 이루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새 일을 이루어 내시겠다고 미리 말씀을 하시고 이루어 내시는 것은 새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섬기던 우상을 인하여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착각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시고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3절, 5절. 그러므로 이제 새 일을 이루어 내실 텐데 그 새 일은 옛적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여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새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새 일이 무엇인가 하면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을 부르셔서 자기의 백성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인 새 일은 아닌 것입니다. 궁극적인 새 일이란 49장 이하에서 계속하여 나오는 메시아의 출현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여 내시는 것이 새 일인 것입니다. 몇 절만 찾아봅니다. 49:8-10절, 하나님이 회복하심. 51:1-3절,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처럼 회복하심. 결국은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주의 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새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 일은 누구를 위하여 하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서도 패역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여 전멸하여도 누구도 항의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심으로 구원하여 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봉독” 주님의 자기 이름과 자기 영예를 위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범죄한 그들을 버려두시면 하나님의 약속하심이 헛되어지기에 자기의 이름과 영예를 위하여 다시 새 일을 행하셔서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연단하시는데 은 같이 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여 내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을 은처럼 연단하여 버리면 멸절이라는 것입니다. 은을 연단할 때는 은이 들어 있는 원석을 용광로에 넣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 은만 남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면 누가 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심판 가운데서도 그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죄인을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봉독” 주님이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 새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시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자기의 택한 백성을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어떤 능력으로 행하시는 것입니까? 창조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전에 창조와 구원에 대하여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능력으로 자신의 새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할 말이 무엇입니까? 땅끝까지 할 말이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사막을 통과케 하신 것처럼 바위를 쪼개어 물이 솟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제2의 출애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궁극적인 새 일이란 주의 성령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주님의 새 일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4-36절입니다. “봉독” 성령이 임하시자 사람들은 술 취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아니라, 우리가 요엘서의 예언대로 성령이 임한 것이다’ 하면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되셨다, 그러므로 36절에서 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일의 완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내가 잘나서 예수를 믿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 일을 행하심으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새 일을 인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면 무슨 일을 하면서 살면 됩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면 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무슨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살리셨다는 것을 알고 범사에 감사하며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 자랑할 뿐입니다.
초두에 전도서를 보았던 것처럼 해 아래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이 실로 헛됨을 아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일을 하여도 헛된 것이라는 것은, 사람의 어떠한 일로도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새 일을 인하여서만 죽은 자를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일 안에 들어온 자들이 어떻게 됩니까?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바울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이러한 모습들이 새 일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맛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일 안에 거하게 되고 그 일을 맛보게 되면 이것이 너무나 좋아서 세상의 일들이 갑자기 시시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숨처럼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스스로 놓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과거는 흘러간 것입니다. 잘한 것도 흘러갔고 잘못한 것도 흘러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48:12-13절입니다. “봉독” 이 능력으로 우리를 새 일 안에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말할 틈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의 새로운 삶의 세계를 맛보기도 바쁜데 옛날이야기 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 잘난 이력들 그만두시고, 또 실패한 것들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새 일에 붙잡혀 들어왔기에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안개를 붙잡지 마시고 영원을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소유를 위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나누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살리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살고 이웃을 위하여 사는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일의 풍성함이 얼마나 놀라운지 성경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맛보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그리스도 안의 새로움을 날마다 깊이 체험하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이사야 49:1-13 이방의 빛 2000. 9. 13.
명절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만났을 것입니다. 헤어져 있던 가족, 친지, 친구들, 때로는 동창들까지 추석연휴를 이용하여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만남들 가운데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셨습니까? 빛으로 오신 주님을 자랑하셨습니까? 아마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어려움의 이유는 첫째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이 빛이신 주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자신의 이름에 더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빛이 또는 진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예수님이 진리라고 믿고 사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더 똑똑한 진리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단들이 자신들의 교리로 무장을 하고 나오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할 말이 없어서 대충 얼버무리는 것처럼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진리관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모처럼 만나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는 썰렁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부각되어야 기분 좋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모든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고 오직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말한다면 누가 과연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나를 좋게 하든 아니든 간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1절 말씀에 섬들아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들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과 귀하다는 것들을 다 버리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나의 말을 하기는 쉬워도 남의 말을 제대로 경청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하여 비 오는 추석연휴의 수요일에 예배당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 한절 한절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라는 말씀이 여호와의 종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종이 어떻게 부름을 받으며 무슨 일을 할지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이 어떻게 부름을 받습니까?
1-2절에 보시면, 태에서 나옴으로,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종이 누구입니까? 1차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자신을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5절입니다. “봉독” 그러나 이사야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종은 이사야 자신을 말하기보다 메시아를 더 가깝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르심은 누가복음 1:30-33절입니다. “봉독” 그리고 이사야 49:6절에서 이방의 빛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2:27-32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위로요 또한 이방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종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부르시고 이방의 택한 자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나 이방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언약을 어길 때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더라도 그 언약을 지킬 수 없어서 원수가 되었거나 처음부터 언약을 받지도 못한 이방인이나 모두 빛이 없는 어두움에 갇혀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호와의 종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여호와의 종이 하는 일. 2절에서 보시면 날카로운 칼이며 마광한 살이라고 합니다. 날카로운 칼과 화살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무력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주님의 모습 가운데서 그 입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좌우에 날이 선 검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에 칼을 물고 오시는 것이 아니지요. 그 입의 말씀이 칼 같은 것입니다. 아주 예리하여 나누고 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살입니다. 마광한 화살입니다. 시편 7:11-12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칼과 활로서 준비된 분이 바로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보내시는데 어떤 모습으로 보내시는 것입니까? 날카로운 칼과 활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종을 보내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칼과 활이 무력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종의 역할이 헛된 것처럼, 무익한 것처럼, 공연히 애를 쓴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신비로움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한번 칼을 휘둘러 버리시고 화살을 쏘아 버리시면 되실 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종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접을 합니까?
7절입니다.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왜 이런 모습으로 오셔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한번 척 나타나셔서 칼을 한번 휘두르시고 화살을 몇 방 날리시면 사람들이 정신이 번쩍 들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명절에 예수도 안 믿는 자들이 돈 벌었다고 큰소리치는 자들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까? 나는 예수 안 믿어도 너보다 훨씬 낫다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한번 능력을 나타내셔서 돈벼락이나 한번 맞아 큰소리 한번 쳐보았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될 텐데, 하지는 않았습니까?
지금 여호와의 종이 어떤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까? 헛수고 같고 쓸모없는 것 같고 허무한 일 같아 보입니다. 멸시 받고 미움 받고 종살이 하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이 이런 모습으로 오신 것이 구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의 일을 보고자 합니다.
5-6절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들의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의 빛을 삼아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어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잠시 보류되어 있습니다. 우선 낮아지심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낮아지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인 줄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모두가 자기들이 옳다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의 옳다는 것이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이 빛으로 오셔서 어떻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자 보아라, 내가 빛이다,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하여 따르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얼마나 헛된 일처럼 보였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돌이키시는 것은 결국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여호와와 그 보내신 종의 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도와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증거하는 시므온 같은 자가 나오고 세례요한이 나오지만 그러나 이러한 자들이 자신의 실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성령의 임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란, 보고서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친히 죄인 가운데 들어와서 살려내어야만 빛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8-12절에서 보고자 합니다.
8절입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때에 여호와의 종을 무엇으로 삼으시는 것입니까? 백성의 언약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차원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죄인들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잘났고 자기가 빛이고 자기가 절대 진리로 살아가는 그러한 자들에 남은 것은 날카로운 칼과 마광한 화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남은 자를 살려내시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의로움이나 언약을 지켜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이 그들의 언약이 되심으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서 나라를 일으키시고 기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잡혀있는 자, 흑암에 잡혀있는 자에게,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12-16절입니다. “봉독”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려고 하십니다. 여기에 거명된 곳들은 어두움에 있는 곳으로 보았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의 변방이며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이 있기에 아주 무시하는 그런 장소입니다. 이곳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자신이 여호와의 종으로서 어두움에 빛을 주는 자로 이방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9:1-7절입니다. “봉독” 이 일을 한 아기로 오신 여호와의 종이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왜 이런 식으로만 구원을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악하였으면, 얼마나 어두움에 있었으면 이런 식으로만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아 그렇구나, 인간이란 이다지도 참 빛에 대하여 무지하구나, 죄란 것이 이렇게도 심각하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적당히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 내가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뢸 수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상하나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하고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고 이러게 나쁜 죄인을 구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멸시를 받고 미움을 받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모르니 우리가 조금만 멸시 받고 미움을 받으면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행위입니까?
계속하여 9절 하반절부터 봅니다. 흑암에서 끌어내실 뿐만 아니라 길에서 먹이시고 붉은 산을 풀밭으로 만드시고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더위와 볕에 상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입니다. 친히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그래도 주님을 믿노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산을 길로 만드시고 대로를 돋우셔서 사방에서 주님께로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에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하늘과 땅과 산을 부르고 있습니다. 즐거이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신 것입니다.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와 감격의 찬송이 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사야 49:14-26 어디서 생겼는가? 2000. 9. 20.
21절에 보시면 이 무리가 어디서 생겼는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상황과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았을 때 생길 수가 없는데 생긴 것을 말할 때 이런 말을 쓰는 것입니다. 어찌 이럴 수가, 하는 표현이지요? 호박을 심었는데 거름이 없어서 잎이나 따먹어야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의외로 몇 개가 열리고 그중에 하나가 제법 누렇게 익었을 때 이게 도대체 어디서 생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오늘 어디서 이 무리가 생겼는가, 하는 이 놀라운 일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지난주 수요일에 1-13절까지 이방인의 빛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일은 가벼운 일이고 이방인들까지 주님께로 돌아온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현재의 모습은 여전히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이 고생을 하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버리시고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소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탄에 대하여 주님의 대답은 뭐라고 하십니까? 여인이 어찌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성애란 본능적인 것입니다. 얼마나 강한지 짐승들도, 평소에는 아주 순한 짐승들도 자기의 새끼를 가지고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젖을 먹는 어린아이를 둔 어미가 그 아이를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잊는 일이 있다고 하여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기고 너의 성벽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여 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청을 하였지만 그 사람이 복직이 되고서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는 잊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요셉에게 두고 계시기에 그를 잊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황폐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잊어버리신다고 하셔도 아무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가 지금의 현실을 초래하였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렸나 하는 것입니다.
50:1절을 봅니다. 너희의 죄악과 너희의 허물로 인하여 팔렸고 내어보냄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혼 증서를 내어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채주에게 파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하여 팔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이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게 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면 늘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어 버리셨는가, 아니면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나 별 다를 바 없이 나타나는 인간의 자기 정당화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마음대로 행하다가 벌을 받아 놓고서는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셨는가, 왜 이리 고생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생은 누구 때문입니까? 자기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질병과 가뭄과 적의 침략으로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봅니다. 복과 저주의 장인데 복의 내용은 잘 인용하지만 저주의 내용은 설교 시간에 잘 읽지도 않는 말씀입니다. 복과 저주가 어떻게 주어집니까? 1절과 14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다 지켜 행하면 복이 오고 다 지켜 행하지 못하면 저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았습니까? 저주를 받았습니까?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의 내용을 잠시만 보시면 이스라엘 역사를 미리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요약판으로 미리 보게 되는 것이 신명기 28장의 내용입니다. 너무 길어서 다 읽을 수는 없고 몇 곳만 읽으면서 보겠습니다.
28:20절입니다.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여내신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실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나타나는 저주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저주와 공구 즉 심한 두려움과 견책을 내리심으로 망하고 속히 파멸케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21-22절, 여러 가지 질병이 임합니다. 23-24절, 자연 재해입니다. 하늘이 놋이 되고 땅이 철이 될 지경의 기근입니다. 25-26절, 적군에게 패하게 됩니다. 33절, 농사를 지어 놓아도 빼앗깁니다. 사사시대에 얼마나 이런 일이 많았습니까? 36-37절, 백성만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아니라 임금까지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열왕기에서 보시면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여호야긴 다음에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는데 이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반역하다가 시드기야의 아들은 자기 보는 눈앞에서 죽고 자기의 눈은 뽑혀서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왕이 이 정도라면 백성들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47-51절,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풍족히 주셨음에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면 자신들의 알지도 못하는 나라가 쳐들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심지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삶아 먹는 일까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52-57절, 읽기도 섬뜩한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열왕기하 6:24-29절입니다. 엘리사 시대 때 적군의 포위로 인하여 아이를 삶아먹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명기에 기록되지 않은 재앙과 질병까지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만 하여도 너무나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것들인데 기록되지 않은 재앙과 질병까지 내리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란 이 신명기의 말씀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책망하는 것도 결국은 이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이러한 재앙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이 백 개라도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죄의 길로 달려간 것이기에 신명기의 이러한 모든 저주가 쏟아져도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그러한 저주로 인하여 완전히 망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휼이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고 자신의 이름을 위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너희는 나를 잊어버렸지만 그러나 내가 너희를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시온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복을 하시되 어떻게 하시고 회복을 하시는 것입니까? 심판을 행하시고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어느 누구도 설수 없음을 제대로 알게 하시고서 살려내심을 통하여 어떤 반응이 나오게 됩니까?
우선 하나님이 잊어버리시지 않고 살려내시는 장면이 17-20절입니다. 네 자녀들을 속히 돌아오게 하겠고 너를 황폐하게 하던 적들은 떠나가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하나님보다 높으신 분이 없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돌아오게 하시는데 신부의 장식처럼 몸에 차고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이 거민이 많아져서 장소가 좁으니 이곳을 넓혀 달라고 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1절입니다. 누가 이 무리를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와졌으며 사로잡혔으며 유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리가 생겨날 수가 없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고,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의 그러한 저주보다 더한 저주를 받아 마땅한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고, 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감격인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양육하였는고,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는 홀로 되었거늘 이 무리는 어디서 생겼는고?
이것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면서 성취가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지경이 좁을 정도가 아니라 한산하도록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의 성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방인까지 주님께로 돌아오는 그날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교회로 모이게 된 이것을 보고서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여야 합니까? 이 무리를 누가 낳았는고?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되었거늘 홀로 된 자가 어찌 자녀를 생산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무리는 어디서 생겼는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이렇게 모인 것이 예사로 된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엄청난 기적으로 된 것입니다. 이 무리가 어디서 생겼는고?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이 제대로 살아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형제들을 보면서 이러한 놀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보면서도 놀라야 합니다. 우리의 행실대로 하신다면 신명기 28장의 저주보다 더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데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위로부터 낳으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얼마나 기적의 현장입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낳으신 무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선전을 하고 있는 광고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이라는 책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가를 놓치면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겠습니까?
이러면 반드시 나오는 말이 이렇습니다. 그러면 전도도 하지 말고 봉사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겠군요,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시는 분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반응이란 어떻게 나타납니까?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희생이 이렇게도 크고 놀라운 것이었군요, 이제부터 나의 생명, 재산, 시간, 몸,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드린다고 할지라도 저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는 자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의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하여 나오지 않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힘써 주님의 그 놀라운 일들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무리들이 어떻게 생겨났는고, 우리의 실력이 아닌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무리들이 나오게 됩니까?
22-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열방 중에서 기호를 세우시고 품에 안고 어깨에 메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 기호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 열국이 그 앞에서 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24절입니다. 그러나 용사에게 빼앗긴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아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승리자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를 어떻게 빼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뭐라고 하십니까?
25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용사의 포로도 빼앗아올 것이요 강포자가 빼앗아가도 건져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그들을 쳐서 빼앗아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서 여호와는 용사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보다 더 큰 용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강한 적에게 빼앗겼더라도 주님이 더 강하시기에 빼앗아 오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29절을 봅니다. “봉독” 이렇게 강하신 분이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를 빼앗아 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구원자요 구속자는 오직 주님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감격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찌 이 무리가 생겼는고, 어찌 내가 여기에 속하였는고?
이사야 50:1-11 부끄러움 2000. 9. 27.
성경에서 최초의 부끄러운 사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로 인하여 부끄러워 하였습니다. 범죄 이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창세기 2:2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다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자 어떻게 합니까?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까지 인간들의 삶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노출시키기를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의 일이나 집안의 일이나 부끄러운 이야기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위장하는 것입니다. 없으면서도 있는 체, 있으면서도 없는 체 하는 위선과 외식들이 우리의 삶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찾아보시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내면의 부끄러움, 자아의 벌거벗음을 노출시키기 싫어하기에 사람들은 온갖 것들로 치장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학력, 재력, 실력, 기술, 배경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새들의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를 뽑기로 한 날입니다.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 정도가 되겠지요. 모두들 물가에서 예쁘게 치장을 하는데 그러나 아예 치장을 할 생각도 하지 않은 새가 한 마리 있었으니 이름 하여 까마귀라. 모두들 치장을 하고서 떠난 자리를 혼자 둘러보다가 갑자기 번쩍하는 생각이 난 것입니다. 여러 새들의 깃털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깃털을 자기 몸에 예쁘게 붙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록달록 아주 완벽하게 풀로 붙여서 아름다운 새 경연장에 나갔습니다. 단연 돋보였습니다. 그래서 일등을 차지하였는데 마침 그때 비가 온 것입니다. 아름다움이 부끄러움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까마귀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온갖 것으로 치장을 하는데 과연 그것이 우리의 속의 더러움과 수치됨과 부끄러운 생각과 계획, 행위들을 가릴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기만 하여도 우리의 죄로 인하여 얼마나 부끄러운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 제자들의 생각,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과연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7절 말씀에 보니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누구에게 일어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지금 남쪽 유다가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절에 보시면 네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에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 이스라엘이 이혼당한 여인처럼, 빚에 팔려간 자식처럼 부끄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특히 이스라엘에서 이혼당한 여인은 가장 비참한 형편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빚에 팔린 자들도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부끄러움과 수치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혼서를 주었고 채주에게 팔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자문자답식으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전적으로 너희의 죄악과 허물로 인하여 팔렸다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러 왔어도 너희가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 없어서 구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홍해를 갈라버리는 그 능력으로 구원하여 내었는데 내가 손이 짧거나 능력이 없어서 구원하지 못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도 너희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고 굵은 베로 덮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부끄러운 자가 되어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부끄러운 유다의 현실을 말하고 나서 이사야 선지자 자신이 여호와의 종의 역할을 하면서 메시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고 학자의 혀를 주시사 곤핍한 자들을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의 말씀을 선지자가 알아듣게 되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고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어떤 고난들이 오는지를 봅니다. 선지자들이 모두 다 이러한 고난을 받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특히 이사야서의 고난은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자신이 말씀으로 인한 고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인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봉독” 때리는 자에게 자신의 등을 맡깁니다. 자신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자신의 뺨을 맡기십니다.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기 위하여 얼굴을 돌리지 아니합니다. 마태복음 26:67-68절입니다. “봉독” 27:27-31절입니다. “봉독” 채찍질 당하시고 수욕과 침뱉음을 당하십니다. 수염을 뽑힌다는 말씀은 없지만 27:31절에서 그 모든 수치와 모독을 다 말하지 않고 희롱을 다한 후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롱할만한 것을 다 한 것입니다. 이러한 희롱 안에 수염을 뽑는 것도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벌거벗기우고 못 박히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수치와 부끄러운 형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온갖 희롱을 다하는데 그것으로 예수님을 부끄럽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7절에서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끄러운 일을 당하는 순간에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8절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있는데 부끄러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러한 수치와 모독을 받으시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워하신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당당하게 그러한 모든 수치를 받아들이고 계시는지를 고난의 장면을 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죄인들은 형벌을 받을 때 부끄러워합니다. 양심이 아예 마비되어 버린 자는 뻔뻔한 얼굴을 들겠지만 죄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은 모두가 숨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가 부끄럽기에 숨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수치와 모독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의롭다 하시는 분이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러한 일들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종의 이러한 부끄러움은 왜 받게 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2:5-18절입니다. “봉독” 주님의 낮아지심과 고난 받으심이 죄인을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자들입니까? 죄에 팔려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부끄러운 자가 되었는데 자신이 부끄러움을 대신 받으심으로 오늘 우리를 자신의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절입니다. “봉독”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 채찍질과 수염 뽑힘과 수욕과 침뱉음을 당하시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을 대신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의 부끄러움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45:16-17절입니다. “봉독”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함께 수욕 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자는 영세에 부끄러움이나 욕을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2:2절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생명을 얻는 자와 수욕을 받아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영생에 이르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무궁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0:10절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주를 의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1절에서 자신들의 불과 횃불을 들고 있는 자는 자신들의 부끄러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잠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바로 영생을 받지 못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까? 나의 잘난 것 없음이 부끄럽습니까? 아니면 대신 온갖 수욕과 부끄러움을 다 당하신 주님이 부끄러운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9:30-33절입니다. “봉독”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즉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으로 부딪힐 돌에 부딪힌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어떤 자에게 부딪히는 돌, 걸림돌이 됩니까?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의를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거치는 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딪히는 돌과 같고 거치는 반석 같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1절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온갖 부끄러움을 다 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도들의 삶은 어떠하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과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끄러워합니다. 세상의 실패와 좌절을 부끄러워합니다.
교회의 목사가 몇 십 년이 되어도 교회 부흥을 못시키면 부끄러워합니다. 장로가 되어서 세상에서 가난하면 부끄럽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정말로 부끄러운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믿음 없음이 부끄러운 일이지 일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력서와 업적이 초라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내가 예수를 10년이나 믿어 왔는데 세상에 무언가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라는 한탄이 나오십니까? 그러한 것으로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는 삶의 방향이 분명한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는 자랑도 없고 부끄러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두 곳만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 2:1-10절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입고서 부끄러움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육체대로 알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까? 그러나 이 일을 행하는 모습은 여전히 세상에서 만물의 찌끼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이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음으로 오는 고난들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세상의 있고 없음을 따라서 부끄럽고 아니고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모퉁이돌 선교회’ 이삭 목사의 편지 한 줄을 소개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욕하고 비방하고 밟고 괴롭혀도 이 세상은 70년에서 80년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영원한 땅에서의 기쁨에 관심이 있습니다. 70년 밟히고 영원한 천국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저는 영원을 택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저로 영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어진 이 70년을 지저분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 퍼주고 희생하며 나누며 주의 뜻만 세우며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사야 51:1-16 생각하여 보라 2000. 10. 4.
이사야 39장까지는 책망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40장부터는 구원의 내용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위로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하시고 구원을 말씀하시면서도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늘 고발하면서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약에 어떤 사람을 위로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무슨 일을 하다가 큰 실패와 좌절을 한 사람에게 뭐라고 위로합니까? 아니 그것도 못해 바보같이, 이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삶보다 더 어렵게 되었고 더 좌절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위로를 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보아도 악을 행하는 자들이 큰소리를 치고 있고 말씀대로 사는 자는 극히 소수이고 그들은 핍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국제적인 정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대국들이 약소국가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위로하시는데 이사야 50:4절에서 나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곤핍한 자를 어떻게 말로 도와줄 줄 알게 하시고,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위로라는 것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최현주 집사님이 지난주에 목사님들이 어렵겠다는 말을 합디다. 왜 그런가 하니 2주간 입원하고 있으면서 많은 목사님들이 병원 심방을 와서는 빨리 낫게 해주시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주의 일에 충성하게 하시고, 이제 그만 얻어맞고 돌아오라는 말도 하고, 여러 가지 말을 하는데 막상 앞에 암 선고를 받은 환자에게 무엇으로 말하여야 할지 어렵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참 감사하였는데 사실 죽을 줄 뻔히 아는 사람에게 가서 뭐라고 하여야 합니까? 낫게 됩니다. 소망을 가지세요, 라고 하지만 본인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은 죽습니다. 믿음 준비하시고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이런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되 위로란 그런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제대로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생에 소망을 가지게 함으로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나서는 그런 모습이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성도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병원심방을 가서 그렇게 말하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소, 라는 말을 듣고서 위로도 잘하여야 하고 받을 만한 사람에게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 위로 속에는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못하였는가를 책망하면서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1.먼저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의를 좇고 여호와를 구하는 남은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들으라고 하십니다. 들으라고 하시는 그 내용은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까? 2절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녀가 없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여 보라는 말씀은 그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많은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기억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과 하나님이 그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어떻게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셨는가를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구역공부 때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훼방자요 포행자요 핍박자요 죄인중의 괴수인 자신을 긍휼히 여겨서 구원하심으로 이런 자도 구원하시는데 하나님이 하물며 앞으로 구원받을 자가 어떠한 지경에 있든지 간에 구원하시지 못하시겠는가 하는 본으로 자신을 사도로 삼으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고 기억하여 보게 하는 장치로서 유월절을 생각하여 봅시다.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2:21-28절을 봅니다. “봉독”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기도회 때 여호수아서를 보았는데 요단강 강물 속의 돌을 메어다가 길갈에 세워 두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그 사건을 모르는 자녀들이 이게 무슨 돌인가를 물을 때 요단강을 건넌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 이런 구원의 사건을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사건만이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을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13절과 16절을 봅니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는 것입니다. 구속하신 사건을 잊어버린 것만이 아니라 창조하신 주님을 잊어버린 것이 지금 이스라엘의 황폐화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펴시고 땅의 기초를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여 보라는 것은 지금 너희가 무엇을 잊어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분 그리고 구속하신 분을 잊어버렸으니 생각하여 보고 주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썩어질 것, 망할 것, 없어질 것만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으니 이런 말씀이 들어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를 좇고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세상의 의지할 것들을 버리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다음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2.세상과 사람을 두려워 말라. 우리가 하늘아래, 땅위에서 발을 딛고 사는 한 이 땅의 것들을 무시하면서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흔적은 지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6절을 봅니다.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헤어진다고 하십니다. 거기에 거하는 사람들은 하루살이 같이 죽어갑니다. 인생을 70, 80이라고 하여도 하루로 압축하면 하루살이인 것입니다. 지금 저는 인생을 80으로 보면 점심때입니다. 60으로 보면 벌써 오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인생입니다. 하루살이 주제에 무엇이 대단합니까? 무엇을 내가 이루었다 보아라, 할 것이 있습니까?
7-8절을 봅니다. 사람을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를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훼방과 비방에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주의 의를 구하고 주님의 종이 되려는 사람을 훼방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고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라는 것입니다. 양털이 벌레에 먹히는 것은 잘 모르지만 옷이 좀에게 먹히는 것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만지면 퍼석하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이고 세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권력이고 명예고 재물을 가진 자의 모습인데 왜 이들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비록 소수라도 그런 것에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어느 강도사 이야기.)
고신 신학이냐? 그리스도의 종이냐? 성경적으로 틀리지 않는다 하면서도 고신신학의 가르침을 다 수용할 수 없으니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부한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하지만 신학을 학부에서 4년, 필리핀에서 선교하면서 신대원 3년, 한국에서 신대원 2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냥 일하면서 가정에서 예배드린다는 생각을 하고서 집을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강도사란 설교할 수 있다는 교단적인 인정인데 그리고 1년 안에 목사고시를 하고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무얼 두려워하시겠습니까? 하루살이를? 좀에게 먹혀 없어지는 옷 같은 인생을 두려워하시겠습니까?
12절입니다.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여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연결하여 한곳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봉독”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여 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창조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을 너희가 잊어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잊어버렸기에 안개같이 사라질 하늘과 옷처럼 헤어질 땅을 의지하고 좀이 먹어 없어질 인생, 하루살이 같은 사람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3.그러므로 이제 제대로 생각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구원할 능력이 있는 자를 제대로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시온을 위로하여 황폐한 곳을 에덴같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황폐하게 된 것은 주님의 구원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복된 상태는 어떠하겠습니까?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지요. 그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것이지요.
4-5절을 봅니다. 내 백성이여 내 나라여 내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율법과 공의를 완성적 차원에서 복음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만민의 빛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한 구원을 만민에게 빛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과 구원의 동시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민을 심판하는데 섬들이 여호와를 앙망하여 그의 팔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9-11절입니다. 역시 심판과 구원입니다. 라합이란 애굽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듯이 주의 백성을 구원하셔서 시온으로 돌아와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는 것입니다. 역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의 완성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12-16절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너를 지은 자가 나여늘 나여늘 어찌하여 너희가 여호와를 잊어버렸는가? 그러므로 너희에게 임한 학대들이 있다만 그러나 저들에게서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내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한번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다 잊어버리고 다시 세상의 원리 속에서 세상을 두려워하면서, 사람을 두려워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연기와 하루살이 풀과 같은 세상과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기대도 말고 의지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옛 하늘과 옛 땅을 없애 버리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그리고 그 자신의 희생으로 구속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삼아주신 주님을 잊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51:17-23 분노의 잔 2000. 10. 11.
성도에게는 고난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끝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만약 끝없는 고통만 주어진다면 우리가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때에도 그 환난의 날들을 감하여 주시기 때문에 구원이 이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환난의 날을 감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면 구원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 마태복음 24장에서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이사야서를 보면서 그 수많은 고통의 날들이 이제야 끝이 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17절에서 하나님의 분노의 잔이라고 합니다. 22절에서는 분노의 큰 잔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분노의 잔을 이제 자기의 백성에서 거두어 그 백성을 핍박하는 자에게 부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분노의 잔이 왜 이스라엘에 부어졌는지를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잔이 왜 거두어 지게 되었는지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왜 분노하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신명기 29:1-21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호렙산에서 세우신 언약 외에 광야 4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모압에서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을 언약의 갱신이라고 합니다. 아주 요약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의 큰 기적과 기사를 보이시고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제 그들을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두를 하나님의 언약 앞에 세운 것입니다(10-11절).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예하고 그 맹세에 참예시키기 위함입니다.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들의 백성을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관계를 떠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식에 참예하는 것은 그 당대만이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유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15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구하여 내신 그들이 다시금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떠나게 되면 20절에서 21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한 것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은 후에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의 정신을 배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모든 세상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가 제대로 알겠습니까?
시편 90:1-17절을 봅니다. “봉독”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방금 우리가 신명기 29장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서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이 이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어떠한지를 누가 알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 앞에서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아침에 돋는 풀과 같고 인생의 천년이 밤의 한 경점 같고 주의 노에 소멸하며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라고 합니다.
9절에서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이 주님 앞에서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생이 아니라 주님의 분노 중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주님의 분노를, 주님의 진노를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생을 제대로 아는 자라면 주님의 진노와 분노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70년과 80년을 산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지나가고 인생의 자랑이라는 것이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편이 모세의 시편이라고 하니 모세는 몇 살을 산 것입니까? 120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80평생이란 수고와 슬픔뿐이었습니다. 그러한 모세가 죽고서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제 하나님에 의하여 살리워진 삶만이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열정과 야망의 40대가 광야 40년 동안 완전히 꺾여지고 이제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시고 이제 주의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힘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이루어 내겠다는 것이 아주 우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노와 분노 가운데서 지나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주님의 진노 중에 날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안 모세가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날 계수함을 알게 하시고 주의 긍휼과 주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분노의 잔을 받아 마시고서 완전히 황폐하고 망한 것과 같은데 이제 그 분노의 잔을 거두어 주신다는 말씀과 주님의 진노와 분노를 거두시고 이제 주의 긍휼과 은총을 더하여 달라는 시편 90편의 내용과 맥락이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무엇에 대하여 분노하며 진노하고 계시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충성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주님의 진노와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 되지 않는지를 모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스라엘이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였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이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분노를 조금 더 봅시다.
시편 7:11-12절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예비하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분노와 진노가 성경에서 얼마나 많이 나타나겠습니까? 주님이 진노하시고 분노하신다는 표현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를 성경을 통하여 쭉 살펴보시면 우리가 아무런 말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의 분노를 제대로 알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질투를 제대로 알겠습니까?
요즈음 어떤 집사님이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너무 무섭다는 말을 합디다. 잘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신가를 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제대로 아는 자라야만이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주시는 마음씨 좋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되는 것입니다.
울지만 않으면 선물을 주신다는 산타 할아버지처럼 몇 가지의 종교적인 일들만 잘하면 복이란 그냥 호박이 덩굴 체 굴러오는 것처럼 복 받는 비결들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이 무서우신 분이심을 몇 가지 법을 지킨다고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법을 지키다가도 하나를 어기면 모두 범한 것이 된다는 말씀이 구약이 아니라 신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에서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라는 말씀을 우리가 알진데 우리가 행하는 몇 가지의 일로 천국도 가고 세상의 복도 받는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분노에 대하여 무지한 것입니까? 성경을 조금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어 보아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저 나의 유익을 구하고자 찾아보니 어떻게 하면 이것을 통하여 나를 복되게 하는가만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나 세상의 책들을 많이 보아서 성공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목사님이 내가 성경을 읽으면 교만하여 지지만 성경이 나를 읽으면 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읽어버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회개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닥치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어떠한지를 한 곳을 더 보고자 합니다.
예레미야 25:15-26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가서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망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노가 가장 먼저 어디에서 부어집니까? 예루살렘과 유다입니다. 그리고서 온 세상으로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37절과 38절을 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극렬한 분노로 인한 것입니다.
이사야 51:17-20절을 봅니다. “봉독”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알겠습니까? 누가 구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진노로 인하여 마치 술취한 자가 비틀거리면 아무 곳에나 처박혀 있는 것처럼 그물에 걸린 영양이 퍼드덕거리다가 지쳐 늘어진 것처럼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21절에서 그러므로 너 취하여 곤고한 자야,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진노가 끝나고 너희의 대적에게 옮겨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의 고난이 끝나는지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그 진노의 잔을 거두어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진노와 분노의 잔이 누구에게로 넘어갑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자들에게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를 거두어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다니엘 9:16-19절을 봅니다. “봉독” 이미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로 인하여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16절 앞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주의 분노를 거두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렇게 간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부으시던 그 분노의 잔을 거두어들이심은 주님의 긍휼이 근거가 됩니다. 그 긍휼로 인하여 그 분노의 잔을 대신 받아 마신 분으로 인하여 속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2장과 53장에서 대신 고난 받는 주의 종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긍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주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역시 주님의 긍휼 안에 피하여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구약에서도 심판이 예루살렘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에서는 주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하여 그 사랑하심과 언약을 인하여 구속하셨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원하는 우상숭배,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을 의지하다가 분노의 잔을 마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은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난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진노의 잔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을 봅니다. “봉독” 여섯째 인을 뗍니다. 누가 인을 뗍니까? 6:1절에서 어린양이 뗍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데 이 진노를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의 진노라고 합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진노가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진노에서 피할 수 있겠습니까? 땅의 임금입니까? 장군입니까? 부자들과 강한 자들입니까? 종이나 주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어린양의 진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어린양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까?
요한계시록 7:9-17절입니다. “봉독” 누구입니까?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에서 피할 길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재앙도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17:1-2절, 18:1-3절. 하나님의 심판이 포도주에 취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세상에 취하여 살게 하심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고 분노의 잔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은 18:4절입니다. 그곳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재앙을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은혜와 능력이 되시는지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가 곧 있을 것입니다. 지금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럴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북이 평안하다고요?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인위적인 평안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분노를 알겠습니까? 아신다면 어린양의 피의 능력 안에 숨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2:1-12 좋은 소식 2000. 10. 18.
7절에서 좋은 소식, 복된 좋은 소식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입니다. 복된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된 좋은 소식이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은 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기에 좋은 소식이 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종살이를 하는 것이 아주 많이 나타납니다. 첫째로는 애굽에서의 종살이가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430년을 지내는 동안 이들이 번성하자 애굽 사람들이 이들의 번성을 억제하기 위하여 종으로, 노예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출애굽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시대에는 종살이와 해방이 반복됩니다.
몇 십 년씩 종살이를 하다가 괴로워서 주님께 부르짖으면 구원자를 세우셔서 해방시키시곤 하는 것이 사사기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또다시 하나님께 범죄하고 적이 쳐들어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정시대에는 북 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포로로 잡혀가고 그 다음에 남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할 때 기쁜 소식이란 해방의 소식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 복된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단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자주 포로로 잡혀 간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너희는 내 말을 잘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인데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단히 생각하면 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지 않는 것이 죄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죄를 사람의 행위 중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이 하라는 것 다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안하면 죄가 안 되는 것처럼, 죄가 없는 것처럼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그렇게 보지 말고 권세의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라는 것 하지 않는 것이라는 정도는 아담에게는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원죄가 없으니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악과를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로는 이미 죄의 종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 이전에 이미 죄의 권세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죄가 너의 문에 엎드리고 있으니 너는 죄의 소원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만 누가 죄의 소원을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아벨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받으심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죄의 소원을 이길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가 하나씩 구체적으로 적용을 해보면 문자적으로 피상적으로 하지 말고 정말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그 깊이로 하나하나 적용을 해보면 우리가 어느 말씀인들 좋아하면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 대겠습니까?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시겠습니까?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시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제대로 보면 하라는 것은 죽어도 하기 싫고, 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나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하라는 말씀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고백이 나오는가 하면 물론 열심히 지키려고 애를 써본 자들이 더 잘 알겠지만 왜 이렇게도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는가 하는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탄식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직도 자신의 죄가 무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현실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할 때 아이들이 하지 말라는 것을 얼마나 하고 싶어 합니까? 그러므로 율법이 가입된 것은 우리가 무엇이 죄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떤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까?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은 흠이 없는 자로 알았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복음의 광채를 비추시니 바울이 얼마나 죄의 노예였으며 죄의 종이 되어있었던 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7:1-25절 전체를 봉독합니다. 해석은 하지 않고 봉독만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탄식이 없다면 주님의 구원이란 결코 기쁜 소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8:1-2절. “봉독”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이 복된 좋은 소식입니다.
이제 다시 이사야서를 봅니다. 이스라엘이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것은 지금 자신들의 형편이 포로 된 상황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소식이란 어떤 것입니까? 1절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종이 되었고 포로가 되었고 노예가 되었다면 아름다운 옷을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좋은 소식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누더기를 벗고서 주님의 의의 옷을 입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허물과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2절입니다. 보좌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라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가면 목에, 발에 쇠사슬이 감겨 잡혀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목의 줄을 스스로 풀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가 되어 있고 포로가 되어 있는데 누가 스스로 풀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이 말씀을 다른 번역에서는 줄이 풀렸도다, 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풀어 주었기에 풀린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죄의 사슬에서 놓임을 받은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죄와 사망의 몸에서 벗어난 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3-6절입니다. 값없이 속량됩니다. 이들이 팔린 이유는 이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죄로 팔려갔을지라도 이들을 가혹하게 대한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이들이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속량되어 나오는 자들은 주님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아름답다고 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자는 그 발마저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가 누구입니까? 물론 1차적으로 선지자와 사도들과 복음을 전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살펴보시면 그냥 소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니면 오늘 죄의 포로로 잡혀있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며, 평화가 되며, 구원을 공포하며, 그것이 실제적인 효과가 나타나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성령을 보내셔서 오늘도 이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1-15절을 봅니다. “봉독”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이사야 52:6절에서 구원받아 나오는 자들이 누구의 이름을 알게 됩니까? 주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알고 부르게 되기 위하여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으려면 들어야 합니다. 듣지도 못한 자를 어찌 믿을 수가 있습니까? 들으려면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으려면 보내심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로 소급하여 올라가는 것입니까? 결국 보내신 분에게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는 무엇을 전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무엇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력이나 목회 경력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생담이나 성공담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증거하는 것입니까? 보내신 분, 아름다운 소식을 주신 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것을 믿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6-21절입니다. “봉독” 이사야 53:1절을 인용하면서 주여 우리의 전한 바를 누가 믿었느뇨, 하는 것입니다. 전한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니랍니다. 이미 온 땅에 다 전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로 시기가 나도록 하기 위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하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이스라엘의 시기 나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진 것인데 이사야 65:1절에 있는 말씀처럼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하여 달라고 구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우리는 알지도 못하였기에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기에 어느 누구도 스스로 나는 죄인이기에 주님이 필요합니다, 하고 나오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여서 받은 것이라면 간절히 구한 것이라도 나의 행위가 되겠지만 그러나 구하지도 않았는데 죄에서 해방을 주셨고 평안을 주신 것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정말 성령이 임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기뻐합니다. 정말 감사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기독교를 선택하고 자신이 예수를 믿기로 선택한 자는 그런 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성취가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정말 복음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는 복음만으로 기뻐할 수 있다고 고백하시겠습니까?
누가복음 4:16-21절을 봉독합니다.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죄에서 해방의 소식을 가져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응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구속하여 내신 것이 바로 복된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이것을 좋은 소식으로 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을 다시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비밀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내신 그 엄청난 일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주님이 더욱 감사하고 귀하고 그리하여 더욱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비록 복음의 기쁜 소식을 받고서 자신의 환경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그런 것은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8-14절입니다. “봉독”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누가 들었습니까? 밤중에 양을 치는 목동들입니다.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듣고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자가 되었습니까? 세상에서 출세를 하였습니까? 그런 기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목동으로 산 것입니다. 목동의 삶은 고달프고 어려운 것입니다. 야곱이 양을 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습니까? 그러나 이들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주어진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원하지도, 구하지도 않는 이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받았다면 우리가 감사하지 않고 사는 것이 이상하며, 항상 기뻐하지 않고 사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큰 기쁨의 소식을 받았기에 당연히 나타나야 하는 그리스도를 인한 기쁨이 나오면 그러한 발들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52:13-15 놀람 2000. 10. 25.
지난주에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좋은 소식이 놀라운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이 좋게 들려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척하는 자가 있듯이 놀라운 소식도 기쁨의 놀라운 소식이 되는가 하면 두려움의 놀라운 소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과 놀라움, 두려움의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제대로 알 때에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의롭지 않으면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기에 진노를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고 인정이 되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자신의 어떠한 의로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고 자기의 의를 쌓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는 결과가 되는 것임을 역시 로마서 10:3절에서 말씀합니다.
로마서 3:19-22절을 한 번 봅니다. “봉독”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나타나는 의가 복음이라고 하였는데 그런데 이러한 의가 21절에 보시면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사야서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사야 선지서에서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마땅히 진노를 받아야 하는데 그 진노의 잔을 대신 받으신 분 때문에 의가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 사실보다 더 좋은 소식 더 놀랄만한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좋은 소식 놀랄만한 소식을 누가 믿었겠습니까? 믿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는 자가 나오는 것은 믿는 자의 실력이 아니라 믿음을 주신 분의 실력임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오늘 놀라운 말씀은 무엇입니까?
52:13-15절이 이사야 53장 전체의 서론과 같습니다. 이사야 53장이란 적어도 예수 믿은 지 몇 년 만 되었더라도 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메시아의 고난이 이보다 더 생생하게 증거된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론 시편 22편도 십자가의 고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이 이사야 53장은 이사야 선지자가 마치 십자가 아래에서 기록한 것과 같다고 ‘델리취’라는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내용을 아주 요약적으로 말하고 있는 이 13절을 먼저 살펴보시고 다음에 53장의 내용을 보고자 합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라는 말은 문맥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하여 기록되어 있고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상으로는 받을 수가 있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이 단어는 각주에 있는 것처럼 내 종이 지혜롭게 행하리니, 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형통의 단어를 지혜롭게 행한다는 단어와 같이 쓰이는 몇 곳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여호수아 1:7-8절입니다. “봉독”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면 형통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통이란 주님의 말씀대로 시행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8:12-15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시니 다윗이 지혜롭게 행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곧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혜가 백성들에게서는 사랑을 받는데 사울 왕은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지혜와 형통이 한쪽은 사랑으로 받고 한쪽은 두려운 것입니다. 놀람도 기쁨의 놀람과 두려움의 놀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3:5절입니다. “봉독” 때가 이르면 여호와께서 다윗의 가지에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하신다고 합니다. 이 지혜롭게, 라는 단어의 각주를 보시면 형통하며,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의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종이 지혜롭게 여호와의 뜻을 다 이루신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와 다윗과 예레미야 선지서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형통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요셉이 감옥에 갈지라도 그것이 형통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잘 진행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을 대조하여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김용옥씨가 공자를 강의하는데 그 내용 중에 번역에 대하여 한번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공자가 말한 2,500년 전에 말하는 자와 받는 자가 어떤 교감이 있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만의 번역으로는 번역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경도 언급하였는데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한편으로 맞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틀리기도 합니다. 맞다는 말은 성경의 복이라든가 형통이라든가 하는 단어들을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붙드셔서 이해를 시키시면 원래 성경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을 김용옥씨는 인정하지 않기에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는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서 보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축복의 혁명’이라는 책을 보시면 복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지난 월요일 저녁에 몇 분의 집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였는데 그것을 미리암이 책망하다가 문둥병이 걸린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목사가 무엇을 잘못 결정하여도 그대로 순종하라는 식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미리암이 왜 하필이면 검둥이 여인이냐, 그들은 우리의 종의 종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항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반포하실 때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3장에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긍휼을 나타내는 계시적 행위로 구스 여인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자 미리암이 자신의 혈통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자신의 정통과 혈통을 주장하던 자들은 예수님의 저주를 받은 반면 그러한 것이 없었던 세리와 창기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대비시켜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이 형통하리라는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14절입니다. 이왕에는, 이라는 단어는 전에는, 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존귀하게 되기 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형통이 이런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이것이 지혜롭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롭게 행하심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시는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혜롭게 행하시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얼굴과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다는 것은 보통 사람보다 나아 보이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리가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참람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너 같은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타인보다 상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로 보아서 집안이 좋았습니까? 물론 유다 지파이지만 그러나 조선시대에 양반이 있었더라도 몰락한 양반, 가난한 양반은 얼마나 비참하였습니까? 그러니 가난한 집안이지요.
그렇다고 배운 것이 많아서 유명한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니 누가 그를 귀히 여겼겠습니까? 출신도 수도 출신이 아니라 아주 천하게 여기는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짝하고 그를 따른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언제입니까? 병고치고 빵 줄 때입니다. 그러나 인생보다 더 상한 십자가의 저주받은 모습 앞에서 누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겠습니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얼굴과 모양이 상하였으면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다 행하였겠습니까? 그러니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상하신 그 여호와의 종이 열방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열왕은 그 입을 봉하게 됩니다.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 받고 인생보다 상한 모습으로, 종의 모습으로 저주받은 자가 하나님이라는 소식에 어떻게 놀라지 않을 것입니까? 13절에서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존칭입니다. 그러니 인생보다 상한 자가 하나님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니 어떻게 놀랄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소식은 전파되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못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요약적으로 계시한 성경이 빌립보서 2장입니다. 2:6-11절입니다. “봉독” 이사야 52:13-15절과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다른 것은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이 되고, 안되고 입니다. 이사야서는 그냥 여호와의 종이라고 되어 있는데 빌립보서는 예수 그리스도 주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놀라운 소식이 이미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며 그의 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하신 일은 여호와의 일을 지혜롭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형통입니다.
이러한 형통의 결과 어떻게 됩니까? 원래 영광의 주님이 고난의 자리, 종의 자리로, 인생보다 상한 자로 오셨다가 그 말씀을 지혜롭게 이루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승천하신 것입니다. 처음의 영광의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의 모든 왕들이 그 앞에 입을 닫고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놀라야 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높아지신 주님을 현재 나타내시는 기관은 교회입니다. 아직 온 세상에 나타내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재림 때에 온 세상에 알려질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에 알려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는 아직 비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왕 되심, 머리되심을 증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20-23절입니다. “봉독” 빌립보서와 비슷한 내용인데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3:1-12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그 비밀이 교회 안에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교회가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놀라운 비밀을 감추어 오셨는데 이제 교회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대속하시고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셔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된 소식이 되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게 놀라운 소식이 아닙니까?
이런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방언과 기적과 병고침의 능력이 놀라운 것입니까? 그런 것은 모든 종교에, 미신이라도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놀라운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된 바울 사도는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주 겁나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주님의 그 비밀, 복음의 비밀을 알고 나니 다른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왕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핍박이나 환난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 보여야 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 교회에 나타난 이 엄청나고 강력한 능력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라는 사람이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이 없고 그러니 이들이 모였다는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없는 곳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말씀으로 인한 놀람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위적인 놀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현대의 기술로 만들어 내든가 아니면 이방종교의 신비나 주술적인 것들을 이름만 바꾸어 사용하면서 그런 것들을 놀라운 것이라고 속이고 있고 또 속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하신 그 일에 지금 놀랍시다. 그리고 지금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두려운 놀람으로 그 앞에 무릎 꿇게 될 때는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53:1-6 누가 믿었느뇨? 2000. 11. 1.
몇 주 전에 옷을 대량으로 처분한다는 광고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 광고의 말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100원에 드립니다. 공짜로 준다는 말은 거짓말이지 않느냐, 공짜로 준다고 해놓고서는 다른 노림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100원을 받는다. 그런 의미도 되겠고 또 다른 말은 이미 우리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휴대폰 선전에서 할아버지가 나도 공짜가 좋아, 해서 인기를 얻었습니다만 그러나 세계에서 휴대폰 가입비가 가장 비싼 곳이 한국이랍니다. 그리고 기본료가 세계에서 6번째로 높답니다. 그런데 무엇이 공짜라는 말입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가 공짜는 없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차를 한잔 사면 그냥 있기 미안해서 밥을 사고 밥을 얻어먹으면 미안해서 술 한 잔 사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너무나 엄청난 선물이 공짜로 주어진다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공짜라는 말이 주님의 은혜의 선물을 너무 값없어 보이게 하는 단어 같아서 불경스러운 느낌이 있지만 그러나 공짜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공짜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쓰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거저 주어진다는 것을 사람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00원이라도 주고 와야 마음이 편하지, 그냥 순전히 공짜로 받아 오고나면 나중에 뒤로 슬슬 따라와서는 몇 배를 내라고 하지는 않는가,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를 버리고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한 원초적인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말은 하면서도 무언가 갚아 내려는 심리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를 잘 이용하면 사람들의 헌신을 끌어낼 수도 있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방편도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나쁜 짓을 하여 맞아야 마땅한데 때리지 않고 용서한다 그러면, 고맙습니다, 라고 합니까? 오히려 염려합니까? 염려가 되어서 정말인가, 라고 거듭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맞아야 되는데 맞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내 행동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니 불안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만 있는 것입니까? 어른에게도 다 있는 것입니다.
무슨 나쁜 짓을 해서 거짓 수입을 얻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막상 무슨 사고가 나서 돈을 물어주고 나면 오히려 개운해 하는 것입니다. 영 찝찝하였는데 개운하다는 것입니다. 액땜한 셈 치라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범인들이 도망 다니다가 잡히면 시원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종교 안에 들어오게 되면 어떤 모습이 됩니까? 내가 무슨 일을 잘하여서 신에게 좋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신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곳에서도 자신의 행위로 무엇을 갚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보속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보속이란 공로사상의 아종인데 자신의 선한 행실이 많아지면 은행에 저금하는 것처럼 보상의 공적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하면 그 공덕의 얼마가 깎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공적이 쌓여있지 않다면 고행을 하거나 선행을 명령받아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된 행위를 내가 벌 받았다는 안도감을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결국은 다른 성자의 공덕이 많으니 나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그렇게 하는 차원에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도 누가 보속만 많이 해주면 천국도 갈수 있다는 것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가 있습니까? 오직 주의 은혜가 임한 자만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행함의 능력을 믿고 있는 사람은 아주 기분 나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렇게 대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나 명령이라고 하여도 자 우리가 할 수 있다, 힘을 합하여 잘 이루어내어 보자고 하는 것이 훨씬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행하라는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감당하려고 하지만 믿으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전제가 되기에 믿음이란 선물로, 은사로 받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사야 53장의 이 말씀을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이 말씀에 비추어 보고서 과연 나는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점검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53:1절에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이 말씀은 믿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의 팔이 나타나신 분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하나님의 팔이란 권능의 팔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권능의 팔이 나타나면 어느 정도로 세상에서 위력을 발휘하겠습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벌벌 떠는 그런 모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팔이 나타나신 분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53:2-3절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별 볼 일 없더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더 상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니 누가 그를 흠모하고 사모하면서 따라나서겠습니까?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를 멸시하고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버린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환영하고 반길만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싫다고,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버린 것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합니다. 괴로움을 많이 당하시고 질병과 고통을 아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에서 문둥병자들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여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자신이 문둥병자 같은 대접을 사람들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마을 어귀에 오면 돌멩이를 들어서 내어 쫓아버리는 것처럼 예수님을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도, 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당시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오늘 이 세대에도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귀하게 한다고, 예수를 믿는다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고 이렇게 요란한데, 한국이 세계선교 역사상 가장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 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이 성경에 비추어보면 이상한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시는데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유독 한국에서 이렇게 폭발적인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까?
그러면 성경의 예언이 이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 땅에서 전하여진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조사를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예수님이 전하여졌는가?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런 예수님이신가?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수님이신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다는 것을 과연 성령의 역사로 보아야 하는가?
신학교 다닐 때 이런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특정 교회가 몇 년 만에 수천 명이 되고 예배당을 멋있게 짓고 하는 것이 신학생들에게 꿈이지요. 그러니 그러한 교회들이 거론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은 인기 연예인들이 있어도 많이 모인다, 그러니 그런 것 하고 교회에 사람이 모인 것 하고 같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사람들이 환영하는 예수님이십니까? 싫다고 배척하는 예수님이십니까? 후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분을 이렇게 많이 믿는다는 것은 무언가 예수님을 잘못 증거한 것이 아닐까요? 정말 이사야서의 이 예언의 모습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제대로 소개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런 모습이라고 하였다면 과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따라 나섰을까요?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몰려 온 것은 마치 예수님이 병고치고 먹을 것 해결하는 메시아인줄 알고 따라 나선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병은 병원에서 고치면 되고 빵은 수출 잘하여 먹고 살면 되는 때에 예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누가 좋아합니까? 그런데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까?
4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고난 받고 고생을 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고 무언가 세상적으로 잘되면 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께 벌 받아 마땅한 자들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5절입니다. “봉독” 그의 찔림, 그의 상함, 그의 징계, 그의 채찍 맞음이 바로 우리를 대신한 고난이었습니다.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을 누가 믿었으리요?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자신이 죄와 선을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 정도의 악을 행하여도 이 정도의 선으로 악을 누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이스카웃’ 인사가 엄지로 약지를 누르고 손가락 세 개로 인사하는 것입니다. 이 인사가 선이 악을 누른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악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악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육이나 환경이나 종교 활동을 통하여 악을 감소시키고 선을 확대하여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기에 사람이 스스로의 행함의 능력을 부정하고 오직 주님의 건져주심, 대속하심만을 기대하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 소식을 믿었느뇨,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식을 믿는 자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신약을 통하여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 이 이사야 53장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어지는가를, 그리고 누가 믿게 되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7-38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보이셨지만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서 믿는 자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53:1절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6절입니다.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누가 믿었느뇨? 믿은 자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믿은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하여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이제 이방인들에게서 복음이 증거되고 나타나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도 이미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8-21절에 보시면 그 복음이 아예 찾지도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인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32-33절을 봅니다. “봉독” 이디오피아 내시입니다. 이방인이 성경을 구하여 읽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이사야 53장의 내용입니다. 그러자 성령이 빌립을 이끌어 이 이방인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경을 읽어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신 행하심으로만이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사는지, 아니 반대로 사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오직 대신 담당하신 그분 때문에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끝으로 베드로전서 2:24-25절을 봅니다. “봉독”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이제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의가 되신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 잃은 양이었지만 이제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믿으리요? 이것을 믿으시겠습니까?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엄청난 복을 받은 이 한 가지만으로 평생 감사하며 살아도 부족한 것입니다.
이사야 53:7-12 고난 받는 종 2000. 11. 8.
세상에 공짜가 없는데 어떻게 나의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수가 있는 것입니까? 믿지 못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원의 소식을 누가 믿었는가, 하는 내용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우리가 믿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최고의 기적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표적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이 대신하신 죽으심임을 알고 믿게 되는 것이 참된 표적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왜 왔습니까? 세상의 복을 구하고자 와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함이 죄라고 책망을 받는 자리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자기의 유익이 있어야 움직이는데 그런데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듣고자 앉아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면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이제 무조건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일하자, 하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거저 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의 일하심은 간곳없고 나의 일함만이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하신 일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나의 일함이 세상 사람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만한 일을 하였더라도 자신의 일이 아무것도 아니요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며, 오직 이렇게 된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일을 아주 옛날에 한번쯤 있었던 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일하는 것만 생각을 하면 아무것도 아닌 아주 시시한 일하나 해놓고도 자기 생색을 내고 싶은 것입니다.
월요일 교회 봉고가 너무 더러워서 한번 물로 닦았습니다.-처음으로. 그런데 그날 저녁에 어느 집사님이 저희 집에 잠시 들렸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교회 봉고를 닦은 그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화제가 다른 것이 나와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미 마음속에서 그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미 나의 상을 받은 것입니다. 이게 저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도 나 이만큼 하니 알아주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힘든 일을 하고서도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분이 훨씬 많은 것을 감사합니다.
7-9절에서,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신약에서 일일이 대조를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잘 알고 있기에 대충 넘어가기가 쉽겠지만 그러나 잘 아는 말씀이라고 해서 쉽게 넘어갈 말씀은 한 말씀도 없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온갖 고난에 대하여 심문 받으심과 굴욕적인 일에 대하여 마치 어린 양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듯이 털을 깎는 자 앞에서 털을 깎이는 양처럼 잠잠하다는 것입니다. 양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도 잠잠하고 털을 깎기어도 잠잠한 것인가 봅니다. 어릴 때 앙고라 토끼의 털을 깎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위로 털을 깎는데 정말 잠잠한 것입니다. 엎드려 놓으면 그대로, 뒤집어 놓아도 그대로 잠잠한 것입니다. 양도 이런 모습의 털 깎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고 질문을 받으시되 전혀 대답을 하시지 않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7:13-14절에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람들이 너를 저렇게 고소하는 것을 듣지 못하느냐 하여도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사야 53장에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는 것이 문자적으로도 성취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자신이 가시는 그 길이 무슨 길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지 않습니다. 거부하지 않습니다. 모든 모독과 채찍과 수치를 그대로 받아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과 죽으심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대속적 고난으로 봅니까? 아니면 자기가 잘못하여 죽은 것으로 여깁니까? 자신이 잘못하여 하나님께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8절에서 누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가서 그 세대 중에 끊어짐을 보고서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누가 대속적 고난으로 이해하고 믿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민족적인 문제로, 로마의 정치범으로 죽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범으로 죽은 것이 아님을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가 이는 죽일만한 죄가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단지 민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는 여론에 밀려서 자기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사형에 넘겨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누가 예수님을 대속적인 죽음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믿으리요?
9절입니다. 예수님이 강포를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여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31-33절입니다. “봉독” 선한 일을 인함이 아니라 참람됨을 인하여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강포를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라고 하신 것도 역시 그대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강도 두 명과 함께 죽으심으로 강도같이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강포란 폭력입니다. 폭력이나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악인과 함께 헤아림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묘실은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라는 말씀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준비한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을 한 이사야는 예수님보다 약 700년 앞선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마치 비디오를 보듯이 그대로 고난과 죽으심과 장사지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죽으심으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10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과 죽으심을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로 상함과 질고를 받게 하심으로 그를 속건제물로 드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속건제물이란 레위기서에 보면 “불법행위나 범법행위”에 대하여 속건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이 이 제물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 범법한 자이기에 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 모두가 우리에게 해당하는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무언가 잘못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물을 사람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인 아닌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전체의 제사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며 신약의 십자가의 중심사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제물은 오직 흠 없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리게 되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씨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거듭나게 된 새로운 하늘나라의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자연인은 모두가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다고 하나 죽은 자들입니다. 예수밖에 사는 자들이 무슨 일을 하여도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림으로 인하여 새로운 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길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심이며 그 뜻은 아버지께서 정하여 주신 자를 속죄하는 제물이 되시사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는 방법은 오직 대속의 죽음 외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봉독”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만족히 여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그 일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만족은 곧 아들의 만족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만족이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취가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만족인 것입니다. 공의대로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그 죄의 삯을 담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택하신 자기의 긍휼의 그릇을 위하여 속죄를 이루시는 것이 바로 대신 고난 받으시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만족은 곧 하나님의 의로운 종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이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이 만족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봉독”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탈취물을 나눕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전쟁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전리품을 나누는 것은 바로 우리가 마귀에게 속하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주님의 전리품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의 죽으심이 범죄자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를 통하여 전리품을 취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단지 그 세대에 항거하다가 죽은 정치적인 죽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허상입니다. 세상이 보는 눈입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것도 배웠다고 안다고 하는 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 죽으심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믿으리요? 허상을 붙들고 있는 자는 결단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상을 붙들고 있는 자는 이것이 은혜로 되어집니다만, 이런 자만 대속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하여 대속하신 죽으심, 그리하여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신 일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이러한 실상을 받았습니다. 대속의 고난으로 인하여 새로운 씨, 썩지 않을 씨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은혜를 강조 하다보면 늘 하는 말이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자, 맺자 한다고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알아 가면 자연스럽게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 엄청난 은혜의 사건을 아주 옛날에 한번 일어났던 일로 밀쳐 두어 버리고 자기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시작을 하면 비슷한 열매를 나오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령의 열매 즉 은혜와 감사의 열매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11절입니다. “봉독” 지금까지의 설교를 이 말씀이 그대로 요약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절에서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아 가면 어떻게 됩니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어떤 신기한 능력입니까? 아무도 믿지 못하는 십자가의 대속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심은 부르신 분의 영광과 덕으로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된 자들은 썩어져 가는 세상의 것들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도에게 믿음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이 공급되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것이 흡족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흡족하기에 또 다른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고 하면서 다른 열매를 맺자, 맺자 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열매 없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가 없는 것은 열매맺기 운동과 시합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엇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까? 그의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굳게 하여야 합니까?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르심과 택하심을 늘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과 택하심이 부르시는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고난 받은 종으로서의 일을 잊지 말고 붙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명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슨 운동을 하든지 가장 중요한 운동이 무엇입니까? 달리기입니다. 이것은 체력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무슨 운동이라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은 늘 기본에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서 늘 감사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외롭고 고단하고 고난이 닥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얻을 것입니다.
이사야 54:1-7 잠시와 영원 2000. 11. 15.
8절 말씀에 보시면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진노는 잠시이지만 자비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30:5절.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그 진노는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런 면에서 살펴보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 왕과 백성, 남편과 아내 등으로 표현을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아내로, 하나님을 남편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취한 아내가 자꾸만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잠시 넘치는 진노로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을 고생합니다. 고생하면서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포로된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시 주님에게로 돌이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결과 어떻게 됩니까?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하여 쫓겨난 것입니다. 아이 못 낳는다고 소박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랑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으로 잠시 소박을 맞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이 못 낳으면 쫓겨나지만 그런데 많은 원인이 남편에게 있어도 여자가 쫓겨났습니다만 지금 이스라엘은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다는 것은 단지 자녀를 생산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꾸만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 우상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정말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한 것 같은데 돌아서보면 결국 나를 사랑하여 한 것이라는 겁니다. 주님을 위하자, 교회를 위하자 하면서도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다른 덕을 보려고 한 것이 없는가를 돌아보면 부정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가 지금 주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 진노가 비록 잠시라 할지라도 우리가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습니다만 저 자신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물을 때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잠시의 진노가 몇 년입니까? 바벨론 포로로 본다면 70년입니다. 그러면 제가 70년 동안 포로로 종살이로 노예로 살아도 아무런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노를 내리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비가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이 영원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입고 삽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 정도의 복을 받고 살지,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면서도 죽도록 고생한 바울은 뭐라고 하였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공로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청년 때의 수치를 애굽에서의 종살이로 보고 과부 때의 치욕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주석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수치와 치욕을 받았지만 그러나 너를 지으신 자가 너의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너의 남편이 어떤 능력의 남편인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5-6절에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3중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 만나기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내가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를 남편이 불쌍히 여겨서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이랍니다. 보통 남자라면 아내가 바람을 피워 나갔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7절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라고 합니다. 8절에서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잠시의 노여움이 왜 나타난 것입니까?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봉독” 새 언약의 약속입니다. 여기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는데 어떻게 인도하여 내십니까? 그들의 남편이 되어서 그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내었는데도 뿌리치고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광야에서 언제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였으며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정복하라는 것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남겨진 것들에 의하여 정복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이 잠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포로된 모습이 바로 소시에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버림받은 자리에서 그들이 이전의 남편이 좋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호세아의 아내가 호세아와 결혼하여서도 계속하여 바람을 피우다가 나중에는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도다, 라고 하기까지 고생을 하고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고생과 수치를 그들의 행한 대로 다 갚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지는 것은 오직 그 분의 긍휼과 자비로 인한 것입니다. 70년의 포로생활이 아주 잠시입니다. 영원하신 진노를 받지 않고서 다시 영원한 자비와 긍휼을 입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구속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네 구속자” 8절에서 “네 구속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자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구속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이사야 53장에서 본 대신 고난 받은 종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대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진노하시나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랑을 새 언약에서 분명히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남편이 되어서 손을 잡아끌어도 도망쳤는데 이제 아예 하나님의 법을 그 마음에 새겨버림으로 도망을 못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갈래야 갈수가 없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갈라디아서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 4:21-5:1절입니다. “봉독” 27절의 말씀이 어디에서 나오는 말씀입니까? 오늘 읽은 이사야 54:1절의 말씀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의 후손이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많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수 있고 그리고 남편이 있는 여인보다 자녀가 많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4장에서는 장막터를 넓히라는 것입니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니 예배당 건축하면서 인용하는 말씀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새 언약이 성취되는 차원에서의 장막터를 넓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해봅시다. 아이를 낳지 못하여 과부가 된 여인이 어떻게 자녀가 생기는 것입니까? 이것이 믿음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이미 경수가 끊어지고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자녀로 장막을 넓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까? 홀로된 여인, 과부된 여인에게서 자녀가 나오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의 원인이 없는데 그런 결과가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울 사도가 율법과 복음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 있는 자녀는 하갈의 자녀로 봅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자신들의 실력으로 낳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시내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시내산의 율법이요 바울 당시의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종을 낳은 것이랍니다. 이것이 비유니 두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는 종노릇 하는 것이랍니다.
그러나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 어머니라, 즉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자녀는 약속의 능력으로 만들어지는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들로 하나님의 장막을 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약속을 그대로 전하고 그대로 믿는 자들은 오늘날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29절의 말씀처럼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니라.
오늘 우리가 정말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살게 되면 틀림없이 핍박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핍박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은 역시 잠시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의 고난과 핍박은 잠시입니다. 장차 나타날 그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이사야 54:9-10절입니다. 마치 노아 때의 언약처럼 다시는 물로 이들을 멸하지 않으리라 하시는 것처럼 새 언약으로 부르신 자들은 산들이 옮겨지더라도 나의 언약을 옮겨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화평케 하는 언약을 옮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화평케 하는 언약, 평화의 복음을 옮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 하신 이 땅에서 주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서 그 언약을 옮기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예루살렘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4:11-12절입니다. 황금보석, 꾸민 집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곳에는 다른 자들이 침입을 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곳에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노는 주님의 의가 없는 곳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얻은 의가 있습니까? 그런 자만 주님의 나라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시내산의 의가 아니라 위로부터 자유자로부터 주어지는 의입니다. 이것은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이것으로 인하여 영원한 자비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잠시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우리의 영원한 의가 되시는 주님을 오늘도 바라보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사야 55:1-5 값없이 2000. 11. 19.
1절 말씀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을 보면 마태복음 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면 우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할 때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면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도 해결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라고 하면 세상의 여러 가지 고생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문제, 가정의 어려운 문제, 가난 질병 실직 입시 이러한 문제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부르신 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로 보자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보면 겉으로만 본 것이 됩니다. 그렇게 봄으로 일어난 신학이 해방신학이라든가 사회구원의 차원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의 삶으로 인하여 해방이나 사회적 차원의 혜택이 돌아가는 수는 있지만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라는 말씀은 그 당시 율법의 정죄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킨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종교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율법의 조항을 내세워서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죄인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하고 병들면 그것 자체의 괴로움보다 죄인이라는 취급이 더 괴로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오히려 이런 자들을 영접하시니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율법의 기준에 의하면 저주를 받은 자들이 예수님께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는 이 수고와 무거운 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죄의 짐입니다. 죄, 그것 안다고 하지 마시고 우리가 얼마나 죄 가운데 죄를 좋아하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발견하시고 주님 저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는 자는 주님 안에서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 사람들도 동일하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주님을 부르신다면 주님을 잘못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쉼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시는 평안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여도 평안할 수 있는 그런 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무엇을 사라고 합니까? 목마른 자들아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합니다. 포도주와 젖이란 광야에는 없던 것들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주어지는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러면 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는데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값없이 사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젖을 값을 주고 산다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살수 있는 포도주와 젖은 그냥 포도주와 젖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것은 은혜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포도주와 젖의 필요는 알지만 은혜의 필요성은 모르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돈만 있으면 되지, 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사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육체적인 필요만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을 보여주고서 구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좋아라고 하면서 구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낮에 감사하면 더 큰 감사거리를 주시고 그리하여 미국처럼 부자나라가 된다, 라고 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제공하는 유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가 받고 있는 유혹인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보인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유혹 안에 들어있는 자는 구하는 것이 이 세 가지 안에 들어있는 것만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을 구하고 삽니까?
첫째 먹음직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고픈데 무엇이 보입니까? 일단 배가 채워져야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구하는 것이 보암직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만 구하면 욕을 하여도 안목의 정욕을 따라 구하는 것을 욕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일하였다고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고 가문을 빛냈다고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고 좋아합니다. 이것이 이생의 자랑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영광과 영화가 사단에게 절하면 주어진다고 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유혹을 어느 인간이 이겨낼 수가 있습니까?
이러한 유혹 아래 있는 인간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면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데 힘이 든다, 그러니 이 힘든 일에 보탬이 되어주고 위로와 격려를 해줄 그런 사람, 그런 신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예수를 찾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러한 욕망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닥치는 유혹입니다. 목사를 예로 들자면 자신의 야망을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추구하여 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보암직한 업적들을 만들어 놓고서 하나님의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세상적인 업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바르게 목회하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보니 이런 말이 있습디다. 소위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목사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나는 복음만 설교하고 교회의 부흥에 욕심을 두지 않고 오직 주님만 전한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이 있는 목사다’ 이런 것으로 자기 위안의 근거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만 사랑하는가, 이것을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 방에 ‘주를 더 사랑하는가?’라고 적었습니다. 세상의 미련이나 욕심을 다 버린 것처럼 혹시 제가 비쳐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내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러한 발견이 날마다 되어야 하지만, 아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나만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고서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루터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보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루터가 이 말씀을 발견하기는 중세적인 상황에서 기적입니다. 모든 종교적인 윤리 기준이 보상과 공로사상으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오직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루터가 얼마나 경건한 수도사였는지 철저하게 교리를 지키며 자주 금식과 철야를 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쳐서 복종을 시켰지만 참된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교수가 되어서 성경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다가 로마서 1:17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서 눈이 뜨여진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에 목말라 합니까? 값없이 주어지는 포도주와 젖, 즉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를 갈망하십니까? 마치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처럼 다시는 물 길어 오지 않아도 되는 그런 물을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성가 가사에 이런 가사가 있지요? 우물가에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그러한 목마름처럼 우리가 주님 외의 것들에 목말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러한 것으로 갈증을 느끼지만 그러나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에 목말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이미 다 받은 것처럼, 다른 것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없어질 것들을 찾는 목마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2절 말씀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담배피지 말라고 하는 인용 구절로 보고 있습니다. 헛된 일에 왜 허비하느냐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게 적용해 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은 너희가 왜 생명이 되는 나를 찾지 않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좋은 것과 골수의 기름진 것이 무엇입니까? 진수성찬을 말합니까?
3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살리라고 합니까?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영혼이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주어지는 포도주와 젖은 바로 주님 자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시편 63:5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그런데 이러한 영혼의 생수를 버리게 되었다고 고발하고 있는 말씀을 한곳 봅니다.
예레미야 2:13절을 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생수의 근원이 주님이신데 주님을 버리고 스스로 물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스스로 찾아 나선 물이란 강대국들의 힘을 빌리러 간 것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자면 우리가 주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찾고 구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또는 주님을 찾기는 하는데 주님을 이용하여 다른 것을 채우고자 하는 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버리는 것과 다른 생수를 구하고자 하는 두 가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죄악의 모습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버리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만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당면한 필요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필요보다 정말 주님이 더 필요하다고 여기십니까?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수를 찾는 것이 결국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3절 하반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언약을 베푸시는데 어떤 언약입니까?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이미 허락한 그 영원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영원한 위를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조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면서 끝이 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원한 왕위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즉 다윗 언약으로 인하여 주어진 메시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면 그가, 즉 다윗에게 허락한 영원한 언약이 완성이 되면 그를 만민의 증거로 세우고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하고 확실한 은혜로 나타나신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인도자와 명령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인도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내 백성을 내놓아, 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내 놓아라, 라고 한 것처럼 명령자가 되시고 또한 그 백성을 인도하시는 인도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르고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까지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값없이 주어지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요한계시록 22:16-17절을 봅니다. “봉독” 16절에 다윗의 뿌리가 나옵니다. 다윗에게 허락하신 영원하고 확실한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갈수록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는 생명수에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까? 예수님을 원하는 것입니까? 이런 자는 값없이 주시는 생명수가 너무나 귀하고 좋음을 알기에 다른 것들이 시시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알기에 왜 값없이 주어져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결코 자기의 의로 살아갈 수 없음을 날마다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왜 일한 것이 없이 거저 주셔야만 되는 은혜인지를 더욱 깊이 체험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55:6-13 돌아오라 2000. 11. 29.
6-7절에 보시면 ‘찾으라’ ‘부르라’ ‘돌아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고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보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돌아오라, 그래 회개하라는 것이구나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일단 조사를 합니다. 그리하고서 회개할 목록을 만듭니다. 첫째 십일조 때먹은 것, 둘째 주일 성수 안한 것, 셋째 목사 흉본 것, 넷째 교회일에 열심히 하지 않은 것, 이런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 입니까?
워낙 이런 것들만 죄라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리 도덕적인 목록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잘못했습니다, 하고 울면서 기도하고나도 늘 마음에 앙금이 남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면 갚을 것 갚고 잘못한 것은 배나 충성하라 그럽니다. 그리고 혹시 부정한 방법으로 번 것이 있다면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돌려주어야 하는데 누구에게 돌려주어야 할지 모를 때는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을 해결하지 않아서 기도 응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라는 구름이 가리워 있어서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양심이 좀 여린 편이어서인지, 지금은 많이 뻔뻔합니다만, 잘못한 일에 대하여 회개를 하고서도 늘 마음에 부담이 되었는데 그 부담을 해결하는 방법까지 제시하여 주니 얼마나 좋았는지 그래서 부당한 수입이 생겼던 것을 구제함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양심의 가위눌림에서 좀 해방되는 그런 기분이 듭니다. 이러다 보니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나 전도사를 할 때에 아이들에게 죄의 목록을 쓰라 하고서 하나하나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리고서 나중에는 그 종이를 불태워 버리고서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을 대학생선교회에서도 하더라구요. 청년들을 모아 놓고서 그렇게 합디다. 이렇게 하여 눈물 콧물 흘렸다면 그것이 구원의 확신이나 되는 양 그리고 이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양 기분이 좋아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러한 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날만한 때에 찾고 부르라는 것입니까? 그리고 돌아오라는 것입니까? 구약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주님의 언약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좋아는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상을 부수어 버리고 주님의 약속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사사기를 보니 기드온이 이스라엘이 섬기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찍어서 불살라 버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기드온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죽을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오늘 우리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배척을 받고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보다 더 귀하에 여기는 모든 것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우상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안에 무엇이 우상으로 들어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명예를 사랑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 우상이라고 하면서 교회가 세상의 것들을 좋아하면 우상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힘을 좋아하고 세상의 명예를 좋아하고 종교적인 업적들을 가지고 자 보아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증거를 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인데 그런데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김영호 목사가 와서는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 아주 커다란 예배당을 짓는데 물론 그들은 성전을 짓는다고 합니다만 한 구좌에 300만원인데 5천 구좌인지 정하여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금을 하면서 얼마나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하는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러한 주님의 일에 참여 하게 되었는지요, 하는 감격이 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조금만 밖에서 보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언제나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이 우선입니다. 이것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만나서 조금만 이야기해보면 이 사람이 무엇을 증거하고 무엇을 자랑하는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길을 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찾고 부르는 것입니다. 찾고 부르라고 하니 또 생각나는 말씀이 없습니까?
마태복음 7:7절 이하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하시면서 악한 자라도 자기 자식에게 놓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1장에서 이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면서 무엇을 구하라는 것입니까? 성령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돈이지, 성령이 아닌 것입니다. 마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성령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합니까?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합니다.
왜 성령을 구합니까? 성령 받아서 능력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간절히 구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성령만 받으면 그래서 한번 기도만 하면 병자가 났고 기적이 일어나고 하는 식의 성령을 구하는 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님을 구하는 자가 얼마나 되겠으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는데도 돌 맞아 죽은 스데반이 임한 그런 성령을 누가 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찾고 부르고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그 모든 길들과 생각들을 버리고 주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것을 잘하니 이것은 하나님 앞에 보탬이 될거야, 하는 것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다 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충성을 다짐하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로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계명을 다 지켜라, 다 지켰습니다. 그러면 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룟 유다에게 주고서 나를 따르라 그랬습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다 주고서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까? 버리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동안 생각하고 그동안 행하여 왔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이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 때문에 포로로 끌려갔을지라도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시옵소서, 한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다가 바다에 빠뜨려집니다. 그때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데 어디를 향하여 기도합니까? 성전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성전이란 이스라엘의 구원의 접촉점이요 하늘로 열린 통로입니다. 그러니 이 성전을 위하여 제사장이 있고 제사가 있고 십일조가 있고 성전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하나님께로 이르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 성전을 헐라는 것입니다. 어찌 예수님이 죽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늘날도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는 것을 성전에서 기도한다, 제단에서 기도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용어는 쓰지 않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면 잘 들어 주신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지한 탓입니다. 도대체 성경을 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설교로 스데반이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도 못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사야 55:8-9절을 봅니다. “봉독” 내 생각과 내 길은 너희와 다르다. 너희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 높아서 인생이 결코 알 수 없는 길이요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내가 그동안 죽도록 붙들고 왔던 주님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들까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배설물로 여기는 것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믿음의 길이란 좁고 협착한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하는 일이 예수 믿는 사람이 노래방에 가면 안 되고, 가요는 불러서는 안 되고, 어떤 영화는 보아서는 안 되고, 이런 것으로 좁고 협착한 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러면 그런 것을 해도 됩니까, 라고 물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런 분은 지금 중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말을 할 때 그 중심이 무엇인지를 보시고 다른 예화들이나 말들이 어떻게 그 중심을 세우는 일로 쓰이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오직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을 발견한 것은 자신이 경건하지 않게 아무렇게나 살다가 나온 말이 아닙니다. 수도사라면 세속의 모든 쾌락을 끊고서 장가도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중에서도 더 경건하고 고행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좁고 협착한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의 뜻을 알고서는 수도사 서약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을 파기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데 역시 수녀로 있던 사람과 결혼을 하여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이를 낳으면 괴물이 나온다는 미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일입니까? 자신이 행하는 지금까지의 수도사의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자신이 행하던 일들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고 협착한 길이란 고행적인 길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살고자 하는 것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의를 기대하고 사는 것이 좁고 협착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란 자신의 길과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로 가는 것인데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하시는 것입니까? 사람의 길과 사람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길과 주님의 방법으로 이루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0-11절의 내용입니다. “봉독” ‘말씀의 성취력’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열매를 맺고서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주님의 일을 성취하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취가 12-13절에서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기쁨이요 궁극적으로는 죄인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18-21절. “봉독”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선지자로 말씀하시고 이루심. 그러므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면 유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란 무엇입니까? 자기의 길과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전, 안식일, 십일조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고린도후서 5:17-6:2절입니다. “봉독”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방법이 바로 주님의 길이요 주님의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을 만날만한 때입니다. 은혜 받을만한 때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56:1-8 안식일과 안식 2000. 12. 6.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쉼을 누리고 있습니까? 쉰다는 것은 쉬지 못함이 있을 때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의미는 구원이란 말과 바꾸어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의 집의 머슴살이를 하는 사람은 쉴 수가 없습니다. 머슴이 아니라 종이라면 더더구나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시간도 마음대로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호출에 언제라도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들이라도 계속 억압만 하면 불만이 생기기에 한번씩 쉬게 하는 날이 있습니다. 비록 일년에 몇 번 안 되는 날이지만 쉴 수 있는 날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종들에게는 정말 신나는 날입니다. 기쁨이요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는 무엇으로부터의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세 번이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2절에서는 복이 있으리라고 하시고, 3절에서는 영영한 이름을 주시고, 6절에서는 이방인이라도 안식일을 지키면 주의 성산으로 인도되고 주님의 집에서 기쁨을 얻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든지 이방인들이든지 간에 안식일을 잘 지키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잘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잘 지키면 복을 주고 영영한 이름을 주고 주의 성산에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보면 당장 무엇이 생각납니까? 주일성수하면 복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적용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어디에서라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한 성경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도 구약의 율법의 의미를 모르고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안식일이란 오늘날에 주일이 되었다고,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듯이 주일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너무나 어려서부터 주일성수라는 말에 세뇌(洗腦)되어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날을 믿고 날을 섬기는 지경까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일 먼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은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복주시고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 날을 쉬라고 하신 것입니까? 천지 창조는 하나님이 홀로 이루어내신 것이며 피조물은 거저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안식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을 우리가 거저 받았습니다, 하는 표시인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안에 어떻게 주어집니까?
출애굽기 20:8-11절입니다. “봉독”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의 인간은 어떤 인간이 되어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살아가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인간은 자신의 행함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쉼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쉬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은 지금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내가 이렇게 앉아 있을 수가 있는가?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이런 말들을 들었습니다. ‘내가 놀고 있는 시간에 친구의 책장은 넘어간다.’ 이것이 우리의 쉬지 못하는 삶의 전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쉬면 처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이고 실패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한가롭게 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미가 되어야지 베짱이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배우면서 자랍니다.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인데 배우기까지 하니 얼마나 우리가 쉼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쉬라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는 애굽에서 나온 이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안식일 지키는 것은 단지 창조의 은혜만을 받는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구원의 의미도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5:15절을 봅니다. “봉독” 출애굽기와 꼭 같은 말씀인데 신명기에서는 무엇이 추가가 됩니까? 구원이라는 말이 추가가 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데 이미 구약에서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안식 즉 쉬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단지 그 날에 일 안하는 날로서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안식일을 쉬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또 구원하신 것을 거저 일한 것이 없이 거저 받았습니다, 하는 신앙고백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이방인들은 다 안식일 없이 자기들이 더 잘살기 위하여 불철주야 애를 쓰고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일에 아들, 딸, 남종, 여종, 소, 나귀, 객이라도 쉬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 제일 실감나는 안식일입니까? 종들이지요. 이들에게는 정말 이 날이 구원의 날임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거저 받았습니다, 하는 신앙고백의 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일하면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왜 안식일에 일하면 죽여야 합니까? 날짜를 지키지 않아서입니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창조와 구원의 선물을 무시하였기 때문입니까? 후자이지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힘 내 노력으로만 사는 것이다, 하는 것이 안식일날 일하는 자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신을 잊어버리고 안식일을 단지 날짜 지키는 것으로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안식일 지키는 것이 우상숭배가 됩니다. 이미 구약에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1:13-1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 것입니까? 제물, 월삭, 안식일, 대회 이런 것들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질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면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단지 날 하루 지켜줌으로 액땜을 해놓고서는 다시 악을 행하려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창조와 구원의 선물을 쉼을 통하여 묵상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식일 때문에 장사도 못하고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빨리 이 안식일이 지나야 장사를 하여 이익을 많이 볼 텐데, 이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일을 안 지키면 장사하는데 손해가 올까봐 공부하는 사람은 성적이 떨어질까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면 헛된 일이며 오히려 우상숭배처럼 가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8:4-6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안식일을 왜 지키는 것입니까? 이러한 말씀을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이렇게 지키지 말고 정말 정성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일요일을 지키면서 안식일을 지킨다고 고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일성수라는 정신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키는 형식도 안식일과 같이 지키고 있고 이 날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준다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니 지킨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안식교가 있는 것입니다. 안식교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안식일을 지키고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요즈음 들어서 부쩍 설치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입니다.
여기에 전도지가 하나 있습니다. 표지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작은 글자로 기록하고서는 큰 글자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는가, 그러면 계명을 지켜라, 그 중에 제일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일요일은 로마 황제가 태양 숭배하는 날을 예배일로 하였기에 일요일 예배드린다는 것은 곧 태양을 숭배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구절과 교회사의 내용을 복사하여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미 넘어간 사람이나 이런 전도지를 보고서 넘어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주일성수를 생명처럼 날짜를 지켜 왔는데 그 날짜가 일요일이 아니고 안식일이란 토요일이라고 하니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온 것이 아니라 일요일이라는 날을 지키고 믿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바른 날짜가 있다고 하니 그 날짜를 섬기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사야 말씀에서 안식일을 지키면 복을 주신다 하시고 영영한 이름을 주신다 하시고 주님의 성산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이러한 안식일을 그 뜻과 의미를 버리고 단지 날짜지킴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유대인들도 날짜보다 더 중요한 그 뜻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더더구나 이방인들은 안식을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사야 56장을 봅니다.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고 지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2절과 3절과 6절을 보시면 한마디로 안식일을 지키면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됩니까? 7절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그 뜻과 의미에서까지 제대로 지키신 분이 나오면 하나님께 제대로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시고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제사를 드리신 분이 누구십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거늘 너희는 도적의 굴혈로 만들어 놓았다고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히 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고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이루어 놓은 것은 도적의 굴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성전을 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온전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도 예수님이 완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온전한 선물이 이제는 아들로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온전히 이루어내신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27-28절. “봉독” 안식일날 밀밭사이로 지날 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안식일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것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이라는 날짜가 있는 것은 사람을 안식하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이라는 날짜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뜻입니다. 창조와 구원의 선물을 거저 받았습니다, 하는 것이 안식일 쉼을 통하여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어버리고 날짜 지키는 것만 붙들고 있으니 주님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날짜를 지켜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참된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날과 달과 절기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갈4:10, 골2:16) 이 모든 것을 완성하신 예수님께 매여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의 복이 그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이방인이라도 하나님께서 갈라내시리라고 하지 말라,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의 안식일을 지키는, 즉 주의 언약을 굳게 잡는 자들에게 주님의 집에서 자녀보다 더 나은 기념물과 영영한 이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복이며 참된 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까? 고자 같습니까? 부도 명예도 없습니까? 그러나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사신다면 이 모든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영영한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을 믿으시고 참된 쉼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사야 56:9-12 파수꾼 2000. 12. 13.
오늘 말씀은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본문은 설교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저 자신이 이러한 말씀을 과연 증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서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제 자신이 저의 의로운 삶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기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은 1차적으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이기 보다는 저 자신에게 증거하는 것이 더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들어야 할 말씀이 따로 있고 성도가 들어야 할 말씀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 동일한 자로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9절입니다. 들의 짐승들아 산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는 것입니다. 들의 짐승들이란 이방의 군대들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양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 적들이 쳐들어 와서 백성들을 삼키는 지경인데 이 양떼들을 지키라고 세워 놓은 지도자들이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양떼로, 지도자를 그들을 지키는 개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수꾼의 역할을 하여야 할 지도자들이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 12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파수꾼들은 1.소경. 2.무지. 3.벙어리 개. 4.꿈꾸는 자, 누운 자,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 5.탐욕이 심하여 족함을 모르는 자. 7.몰각한 목자들. 8.자기 길로 돌이키는 자. 9.어디 있든지 자기 이익만 도모하는 자. 10.피차 서로 먹고 마시자 하는 자들. 열 가지의 목록으로 말하지만 한 가지로 볼 수도 있고 더 세목화 할 수도 있습니다.
첫째, 소경, 무지, 벙어리 개라는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소경이 파수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수꾼이라고 세워놓은 자가 소경이 되어버렸으니 어찌 적이 오는 것을 보고서 알릴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소경이란 어떤 소경입니까? 영적인 소경입니다. 세상의 이재에는 밝은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런지 분별이 서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빛인지 어두움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악하다, 악을 선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경과 벙어리가 된 상태가 어떠한지를 몇 곳의 말씀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예레미야 6:9-15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욕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미 남녀노소, 백성이나 지도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기의 욕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욕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귀머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에 자기를 이롭게 하여 주는 달콤한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자기를 책망하고 돌이키게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나 진리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듣는 자들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행전 7:51절에서 스데반이 설교하면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라고 책망을 합니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서 돌로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욕으로 들리고 괴롭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나 성경의 다른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만 하면 뺨을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생을 하게 되니 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강하시니 이기지 못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한곳의 말씀을 더 찾아봅시다.
디모데후서 4:3-4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귀가 가리워서 하나님의 바른 교훈은 버리고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워주는 그러한 달콤한 말들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심판이 닥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사야보다는 후대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이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더욱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3-14절을 봅니다.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탐람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인데도 뭐라고 합니까? 평강하다, 평강하다, 라는 것입니다. 평강이 없는데 거짓 평강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평강이 아니라 재앙이 쏟아져야 하는데 거짓 평강을 남발하고 있으니 소경이요 무지하고 벙어리 개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2:14절을 봅니다. “봉독” 새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예언자들은 네게 보여 준다고 하면서 거짓되고 헛된 환상을 보고, 네 죄를 분명히 밝혀 주지 않아서 너를 사로잡혀 가게 하였으며, 거짓되고 허황된 예언만을 네게 하였다” 예언자들이 거짓되고 헛된 환상을 보고서 사람들에게 거짓 평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도 못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은 늘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렇게 성전이 있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율법이 있고, 제사장과 선지자가 수백 명이 있으니 지금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하였습니다. 포로로 잡혀 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이 몇 개나 되고 선교사를 많이 보내고 성도가 많으니 하나님이 우리나라는 결코 망하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조금만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서면 다시 경제회복이 되고 온 세계에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책 제목을 보니 ‘망할 수 없는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이러한 것을 기뻐하실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안심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신다고 안심하고 계십니까?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도 잘하고 열심히 봉사도 하니 나는 이정도면 그래도 중간쯤에는 들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혹시 평안해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평안은 거짓 평안입니다. 나의 어떠한 행위로도 안심을 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하여 사람들의 행위로 안심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사는 뭐라고 하면서 안심을 합니까? 나는 그래도 말씀대로 전한다고, 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조그마한 욕심이든 큰 욕심이든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 뿌리는 거대한 빙산처럼 감추어져 있을 뿐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천원을 탐내는 것이나 어른이 천만원을 탐내는 것이나 본질상 탐심은 꼭 같은 것입니다. 큰 교회가 커다란 욕심을 낸다고 욕할 수 있는 작은 교회가 없을 것입니다. 작은 교회는 작다 보니 욕심을 너무 크게 안 부리는 정도이지 다른 욕심들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고발하는 것이 계속 이어지는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56:10절 후반절입니다. 이들은 꿈꾸는 자들이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나태함입니다. 게으름입니다. 게을러서 엉뚱한 꿈이나 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양떼들이 적의 먹이로 노출되어 있는데도 오직 관심사는 자신들의 탐욕뿐입니다.
11절입니다.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라고 합니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익만 도모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자들이 추구하는 바는 자기들의 탐욕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결국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며 자기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벙어리 개가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종이라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귀에 거슬린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파수꾼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목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3장과 34장에 보시면 파수꾼과 거짓 목자와 양떼들에 대하여 잘나와 있습니다. 본문이 너무 길어서 제가 간략히 오늘 말씀에 비추어서 간추립니다. 파수꾼이 적이 오는 것을 보고서 경계하라고 나팔을 불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는데도 대비를 하지 않아서 죽는다면 죽는 자의 책임이지만 나팔을 불지 않았다면 나팔소리를 듣지 못하여 죽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하여 죽겠지만 그러나 그 피값은 파수꾼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복음을 전하러 가서는 집사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랍니다, 라고 하니 그 집사가 하는 말이 그러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예수님 앞에서 따지지요. 그 사람이 잘못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감히 누구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아직도 자신의 죄가 무언지를 모르고 나는 이 정도라도 하니 되었지 뭐, 하는 안일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파수꾼이 아니었다고 핑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내 영혼이 누구에게 유린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목사가 하는 말이니 어련히 바른 말이겠지 하고서 따라가다 보니 모두가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실은 모두가 파수꾼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34장에서는 양떼를 잡아먹는 목자들의 받을 화를 말하면서 양떼들의 잘못도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양떼가 약한 양떼를 밀쳐버린 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이 말씀 앞에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파수꾼이 아니니 책임이 없다, 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점검을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하든지 내 하나 잘살아 남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직도 남겨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것들을 사모하고 추구하고 성공하라고 남겨진 것일까요? 목사라면 교회 키우고 보란 듯이 커다란 업적을 남기는 것일까요? 성도라면 예수 믿고서 저렇게 멋있게 살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보이라고 남기신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리 이 세상이 뭐라고 하여도 천하에 모든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 좋다고 달려가더라도 주님의 나라가 더 좋다고 말하면서 사는 파수꾼으로 남겨두신 것일까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서 과연 파수꾼으로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목사나 성도나 모두가 이 세상에 눈이 어두워져서 세상의 방식,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면 우리 모두가 소경이요 무지하며 벙어리 개입니다.
이 세상은 망합니다. 불탑니다. 우리가 준비하여야 하는 것은 21세기가 아니라 오늘 밤에 내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를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치기는커녕 내 자신마저 그러한 사실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목사나 성도나 간에 서로 서로 눈치나 보아가면서 타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도자나 가르치는 자가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선생 된 자가 더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도 자신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신약시대에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가 직접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대신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거짓 목자를 두시는 것입니까? 누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가시는지를 가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를 좋게 하는 자를 따를 것인가 주님을 좋게 하는 자를 따를 것인가를 가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있어서 파수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경이고 벙어리 개처럼 되어있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을 향하기 전에 바로 나 자신에게도 소리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서 소경이 되고 벙어리가 되어있는 주님의 말씀의 선포가 왕성하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이러하기 위하여 더욱 여러분이 저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비록 여러분의 귀에 거슬린다고 하여도 그것이 함께 사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을 좋게 하기 시작하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게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칭찬하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님의 일로 전환시키면 됩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을 날마다 무너뜨리면서 오직 주님의 일만, 그 십자가의 능력만 드러내는 그런 어리석은 자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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