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4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1999. 6. 30. - 2001. 6. 6.)
目 次
76. 나를 의뢰하는 자는
77. 주님이 함께 하는 자
78. 참된 금식
79. 안식
80. 죄악의 행위
81. 죄의 결과와 구원
82. 빛을 발하라
83. 아름다운 소식
84. 의의 겉옷
85. 새 이름
86. 원수 갚는 날
87. 주의 강림
88. 진흙과 토기장이
89.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90. 심판과 남은 자
91. 아멘의 하나님
92. 새 하늘과 새 땅
93. 말씀에 떠는 자
94. 참된 제물
95. 해산케 하는 자
96. 양육
97. 심판
98. 중심 이동
99. 천국과 지옥
이사야 57:1-13 나를 의뢰하는 자는 2000. 12. 20.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원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는 것은 오직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행위의 능력만을 의지합니다. 가끔씩 요행을 바라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사람의 행위 외에는 믿을 것이 없기에 결국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것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13절 말씀에서는 ‘나를 의뢰하는 자는’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의뢰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땅과 기업은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나를 믿을 것인가가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기 자신을 믿고 살기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행위를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사는가 하면 모든 나타나는 일의 결과가 자기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신에게 무언가를 잘 보이면 복을 받을 것이고 잘못 보이면 재앙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을 대한다는 자세도 결국은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신을 섬기는 것이지 신을 위하여 섬기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하고 정성을 바친다 하더라도 이러한 종교 행위로 내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아직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신의 행위가 믿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면 모두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23절.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 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이것은 단지 음식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으로 의다, 아니다 라고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믿음으로 좇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어떠한 기준을 세운다든가 율법의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 정죄하거나 남을 정죄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믿음으로 좇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믿을 것인가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믿어준 행위라도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믿어 주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선물을 받은 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인데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의 원리에 젖어서 살다보니까 자꾸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자신의 행위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즉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모습은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고서도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찾기 위하여 그런 구절들을 끌어들인다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말 성경을 제대로 우리에게 비추어 보면 반드시 이러한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은 자신을 말씀 앞에서 제대로 발견한 자의 공통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어떠한 기적 앞에서든지, 은혜 앞에서든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의 공통적인 고백이 자신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보다 의롭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타가 공인하더라고 예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부정이 있어야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점검 받고서 다시 주님을 의뢰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1-2절입니다. 의인이 죽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당하여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르게도 번역할 수가 있는데 의인이 망하고 경건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당하여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자들이 빨리 망하고, 죽게 되는 것을 보면서 왜 저럴까, 마음에 두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정도로 악한 세대라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세대라면 의인이, 경건한 자가 복을 받고 장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사야 당시에 얼마나 악하였는지 의인과 경건한 자가 빨리 망하고 죽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그 당시보다 나은 세대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 살수록 이 세상에서 빨리 망하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는 것이 화액 전에 취함을 입는 것입니다.
정말 큰 화들을 당하기 전에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서 망하거나 빨리 죽는 것이 결코 저주가 아니라 복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빨리 죽고 싶어 한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너무나 좋은 것임을, 사람의 말로는 가히 이를 수 없는 아름다운 나라를 보고 왔기에 빨리 죽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을 많이 취하고, 안하고로 성공이냐 아니냐를 말할 것이 못됩니다.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가 아닌가가 문제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무엇에 들어간 것입니까? 평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무릇 정로로 행한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쉰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11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이렇게 오래 믿으면서도 아직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바울처럼 할 일이 남아서라면 좋겠는데 아직 졸업학점을 못 받아서 졸업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써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에 들어가기를 애쓰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57장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57:3-10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결국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의 특징은 한마디로 자신의 정성을 바쳐서 복을 받아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까지 정성을 다한 행위가 나오겠습니까? 심지어 자기 자식을 불에 태워 바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하여 간음자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또한 무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무당의 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 상수리나무 밑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골짜기 바위틈에서 자녀를 죽이도다. 자기 자녀를 우상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매끄러운 돌을 세우고 그곳에 제사를 지내고 산위에서 우상을 섬기고 사신을 이방에 보내면서까지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상에 절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다른 나라의 세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힘들고 피곤한데도 헛되지 않다고 합니다(10절). 반드시 자기들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직 정성이 부족하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복을 받으리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식을 불에 바친다는 말씀을 볼 때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불에다가 갖다 바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습니까?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영악한 전사로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주님의 말씀을 따라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그런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오직 돈과 힘을 최고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이 세상에서 더욱 충성된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 어느 방송설교를 들으니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쳐서 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귀한 것을 바쳐서 복을 받고 출세하자고 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빨리 떠난 것입니까? 공생애 3년만에 다 이루어 내시고 하늘로 가신 것입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문명의 전환’이라는 책에서 이런 내용이 있어서 옮깁니다. ‘라잉’이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오늘날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학교 보다는 정신병원에 입원할 가능성이 10배나 더 크다. ...이것은 우리들이 우리의 아이들을 진실하게 교육시키기 보다는 미치게 만드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증거이다. 아마도 우리들의 교육 방법이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많이 다르겠지만 오늘날 우리의 아이들이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상숭배의 결과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가는 것입니까? 믿을 것이라고는 자신과 자신의 분신인 자식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대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나의 잡을만한 것들에 기대를 걸고 정성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 것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것이 취미생활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간에 그것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마음과 생각을 바치고 있습니까?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상을 섬기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아내로 부르셨는데 늘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의 세계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피곤할 텐데도 피곤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성경 보는 것은 10분만 보아도 잠이 오는데, 자기들이 하는 일은 10시간을 하여도 재미가 있고 아쉽고 더하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11절입니다.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않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렵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그렇게 놀랐는가, 그렇게도 우상을 섬겨야 되겠더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할 정도로 두려운 것인가, 라고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찾고 구하고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주님의 은혜만 있으면 궁궐이나 초막이나 상관이 없습니까? 과연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만 계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비록 나사로 같을지라도 기쁨으로 살수가 있겠습니까?
왜 주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생각지 아니하는가 하고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왜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가,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잠잠하고 있으니 너희가 그렇게 하는가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행한 대로 갚아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하시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으면 그 순간 끝입니다. 그런데 오래 참으시고 잠잠하시니 우상숭배 하는 일에 대담해진 것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께서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12절입니다. 너의 의를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행한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직접적인 우상숭배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라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그 정신이 이미 우상숭배의 정신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라면 우상숭배와 꼭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봉사와 충성을 하여도 얼마든지 우상숭배 하는 식으로 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너희의 의를 보이겠는데 그러한 것들이 너희에게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행위로 너희가 구하여, 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구원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사기 10:10-1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구원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이 부르짖으니 너희가 섬기던 우상에게 구원하여 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이러한 것들은 결국 13절입니다. 그것은 다 바람에 떠내려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라는 겁니다. 바람의 기운에 다 날려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자들의 최후입니다. 이것을 결국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행위를 의지한 것입니다. 내가 이만한 정성을 바치면 되겠지, 나의 행위가 이 정도이니 이제 구원받았을 것이야, 나는 그래도 할렐루야 기도원에도 안가고, 대형교회도 안가고 약하고 어려운 교회 출석하면서 봉사하니 그들보다 났겠지,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지금까지 고발당한 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나를 의지하는 자는,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자신의 어떠한 행위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주님을 의뢰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땅을 준비하시고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땅과 기업이란 이사야 66:22절입니다. “봉독” 주님만을 의뢰하는 자가 들어갈 것입니다.
이사야 57:14-21 주님이 함께 하는 자 2000. 12. 27.
예수님은 가장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려면 낮은 곳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보다 더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52:14절에서 “전에는 그의 얼굴이 남들보다 안 되어 보였고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상해서 그를 보는 사람마다 모두 놀랐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을 만난 사람, 또한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겸손하고 통회하는 사람입니다. 겸손하여 통회하는 사람이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을 드리고 시작을 합니다.
이제는 이 말씀의 배경을 봅니다. 14절에 보시면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길을 돋우어서 거치는 것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0:1-5절을 봅니다. “봉독” 바벨론 포로에서 복역의 기간이 끝나고 돌아올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까?
17절입니다. 그들의 탐심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가 생기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지 않은 죄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가나안 땅 바알의 신앙인 것입니다. 바알 종교란 빈익빈 부익부가 고착되도록 하는 이방종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죄라고 규정하여 거저 주시는 은혜의 땅을 받았기에 땅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규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탐심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당시의 사회현상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이사야 5:1-12절을 봅니다. “봉독” 지난 주일낮에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하는 요한복음 15장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원하여 가나안 땅에 심었더니 맺힌 열매는 포학과 부르짖음의 열매가 맺혔다는 것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의 삶의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하신 것입니다. 그 벌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다시 이사야 57:17절을 봅니다.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그들을 징계하시면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패역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매를 드시면 잘못하였다고 빌어야 하는데 더 벗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를 용서해 주고 싶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징계를 해서 단번에 겸손하게 회개하고 돌아왔기에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징계에 대하여 오히려 패역하여 돌아오지 않는 모습을 보시고서도 그들을 고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57:18에 보시면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더욱 패역하여 가는 길을 보았지만, 다 알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고치시고 위로하시고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면 당장 알아듣고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돌아서는 그런 자들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계속하여 패역의 길로 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로 걷게 하시며 주리시게 하시고 만나를 주신 것은 그들의 마음을 낮추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듭 거듭 반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 언약과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이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기들의 거듭된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용서하신 그 크신 일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어버리기에 계속 더 패역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이들로 하여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겸손하게 만드시고 통회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15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지존무상하신 분이십니다. 홍콩의 영화제목도 ‘지존무상’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깡패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자라서 더 이상 높은 자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인간이 함부로 지존무상이라고 쓰는 정도로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존무상이 합당한 정도가 아니라 더 붙일만한 호칭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지존무상(至尊無上), 가장 존귀하여 더 이상 높은 분이 없다는 호칭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분이시며 거룩하시며 높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 어떻게 사람들의 교만하여진 마음에 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홀로 높으신 분이신데 사람들의 마음이 다 교만하여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원초적인 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요즈음 ‘왕건’이라는 드라마입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 궁예가 어떻게 변하여 가는 것입니까? 점점 자신을 신격화합니다. 자신이 미륵이라는 것입니다. 미륵이란 현생한 부처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재림예수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재림예수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그 죄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몇몇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환경과 여건이 주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환경이 안 된 것이 오히려 감사할 일이지 그런 것을 부러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건 같은 사람은 좋은 왕이 될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그러나 그 깊은 속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는 더 큰 도둑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궁예는 노골적이지만 왕건 같은 자는 백성을 위한다면서 사실은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입니다. 마치 삼국지에서 유비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전에 한번 예로 든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 즉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든 아니면 감추인 채 드러나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높아져서 자기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는 2인자로서 만족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2인자라는 자리도 1인자를 잘 보필하였으니 오히려 1인자 보다 낫다, 라는 명예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아 자기가 왕이 되려고 반역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이 창조하시지 않으시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백성들과 영원히 다투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16절을 봅니다.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시고 장구히 노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하신 대로 갚으신다면 그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분노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살아남은 자들은 당연히 겸손하고 통회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서의 자세는 참으로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세로 서야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영을 소생시키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또다시 패역의 길로 가는지를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제 겸손하여집니까? 무언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좀 겸손하여집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좀 잘한다고 생각하면 교만하여집니다. 부모 자식간에, 부부간에, 직장에서도 자신의 공로가 있으면 교만하여지고 없으면 기죽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납니까? 나는 너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니 남의 눈에 티를 보고서 판단하도 정죄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네가 죽일 놈이다’라는 것입니다. 모든 싸움의 바탕에는 언제나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보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러한 교만의 모습이 우리 안에 여러 모양으로 교묘히 위장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러한 모습을 아주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지존무상하시고 거룩하고 높으신 분이십니까? 그런데 이런 높으신 분이 마구간까지 낮아지시고 그보다 더 낮아지셔서 죄인과 동류라 여김을 받기 위하여 물세례를 받으시고 온갖 고난과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까지 내려가시는 낮아지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분과 함께 하는 자는 결국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유를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주 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는 겸손하고 통회하는 자라고 한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14절입니다. “봉독”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과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세리의 자세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잘하고 있다는 그것 때문에 교만하여진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교만하여지는지를 봅시다. 토색하지 않는 것, 불의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세리와 같지 않는 것,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것, 십일조를 드리는 것, 이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인 교만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자칫하면 나는 너보다 낫다는 식으로 교만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떠합니까? 토색, 불의, 간음, 금식, 십일조, 다 걸리는 것입니다. 걸리지 않는 것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세리가 왜 간음에 걸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들으니, 이런 말을 합디다. 세금을 과부에게 과중하게 매기니 감당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점을 노리고 과부의 몸을 요구하여 간음에도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여긴 바리새인은 오히려 교만하여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4절입니다. “무릇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인지를 알겠습니까? 자신이 참으로 죄인인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이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은 무엇을 잘 하였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얼마나 잘 드렸습니까? 얼마나 모범적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교만한 올무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그렇게 기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 자신의 죄가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알기에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그 상한 마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는 겸손하고 마음에 통회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통회한다는 말은 “마음에 상처가 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마음이 죄를 회개함으로 부수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겸손히 통회하는 자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이사야 57:19절입니다. “봉독” 입술의 열매를 짓는 자란 하나님의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분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겸손히 통회하는 자에게 함께 하신다는 그 말씀을 지어서 성취하심으로 겸손히 통회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든지 먼데 있든지-유대에 있든지 바벨론에 있든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겸손하고 통회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역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는 겸손하고 통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 행함이나 자기 자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얼마나 패역한지를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더욱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말 외에 더 나올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모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만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으로 또 교만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더욱 발견할수록 주님 저는 주님이 없이는 정말 살수 없는 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은 악인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겸손히 통회할 때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평강을 맛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58:1-9 참된 금식 2001. 1. 3.
금식,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생각납니까? 간절한 기도,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보통으로 기도해서 안 되는 문제라도 금식하며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말을 우리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기를 어린이가 밥을 안 먹으면 부모가 걱정을 해서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금식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금식기도의 능력과 금식기도의 응답의 비결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안에 어려움이 있거나 아니면 교회에 무슨 일만 있으면 금식기도 한다고 합니다. 수련회를 하기 전에도 릴레이 기도만이 아니라 릴레이 금식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제목을 정하여 놓고 돌아가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흥회를 한다거나 예배당을 짓는다거나 할 때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나도 금식기도 해보아야겠다, 라고 하면서 금식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저 자신도 이런 식의 금식을 해 보았습니다. 수련회를 앞두고 금식을 해보기도 하였고 또 부흥회 기간 동안 금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전도사 때에 부흥회 중에 3일 금식을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회 기간에 신학교의 기말고사기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새벽과 저녁에는 부흥회 참석하고 낮에는 학교 가서 시험 치면서 3일 금식하면서 또 3일을 교회에서 철야는 아니지만 밤을 지내는 것입니다. 시험공부는 그 사이 사이에 조금씩 하고서 시험을 치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흥회 기간 중에 작정헌금도 백만원을 하였습니다. 전도사 월급이 15만원인데 겁도 없이 백만원을 작정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하면 그저 처음 전도사 하니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특별한 제목이나 소원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다음 학기 개강 때 최고의 점수가 나와서 장학금을 받았고 그 장학금도 금액이 많이 오른 장학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이 직장생활 할 때 저축이 되었던 연금인가 하는 것도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작정한지 몇 달 만에 백만원을 다 헌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결혼하여 처음 사례를 받아서는 첫 열매라고 하면서 나의 사례 15만원하고 집사람이 아르바이트 조금해서 번 25만원하고 40만원 전액을 헌금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지금까지 공부도 하고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역시 우리 목사님은 다르셔, 그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냐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금식과 철야와 헌금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냐를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금식과 철야와 헌금이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옆에 있던 전도사 사모가 결혼반지를 헌물하면서 자기 남편이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기도 하며 서로 경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금식이며 헌금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의 금식이 아직도 대세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참된 금식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1절에서 크게 외치라는 것입니다. 죄를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죄와 허물을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죄와 야곱집의 허물이 무엇입니까? 요즈음 방송설교의 대부분이 이런 설교내용입니다. 두세 번을 들어 보았는데 대부분이 열매가 없었다고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어서 저주를 받았다는 내용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이러한 책망의 대부분은 예배참석하지 않았고, 헌금하지 않았고, 전도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책망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새해에는 많은 열매를 맺자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허물이란 그러한 내용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성전에 나오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아서 죄라고 책망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죄와 허물이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2절을 보시면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날마다 찾으면서 하나님의 길을 찾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의로운 백성이 하나님의 길을 바르게 찾기를 원하는 자들처럼 열심히 성전에 나아와서 제사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제물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금식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다면 기도의 응답을 해 주시고 우리에게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야 하는데 왜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선지자는 뭐라고 하는 것입니까?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3-4절을 보시면 너희가 하는 금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다니고, 온갖 일을 시키고, 금식하면서 서로 다투고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금식이냐는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어떻게 금식하라는 명령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1년에 한번 대속죄일 날, 7월 10일에 몸을 괴롭게 하라는 말씀이 레위기 16:29, 31절에 있습니다. 몸을 괴롭게 하는 속죄일에는 그 지키는 규례가 안식일처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락이나 자기 집안의 종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금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오락을 행하고, 일을 시키고,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형적으로는 갈대처럼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숙이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앉아서 금식을 하는 모습이 얼마나 거룩해 보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런 금식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금식한다면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자면 금식기도를 한다면서 서로 다투며 시기하는 것입니다. 너는 며칠 금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1주일, 나는 40일, 나는 40일을 세 번,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규례처럼 자기들의 쉼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억압과 압제가 계속되고 있으면서 자기들의 종교적인 열심과 금식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려고 하는데 잘 안되니까 이렇게 열심히 금식까지 하는데 왜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금식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금식은 순전히 자기들을 위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소원과 자기들의 만족과 자기들의 기쁨을 따라 제목을 정하여 놓고서는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종교적인 열심의 최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금식까지 동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금식이 구약에서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아합 왕이 나봇에게 자기 왕궁 근처에 있는 포도밭을 팔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봇이 그 포도밭은 하나님이 자기 조상에게 주신 것이기에 팔수 없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사람이 마음대로 사거나 팔거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다가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팔게 되더라도 희년을 기준으로 계산하여 사고파는 것입니다. 희년 전에 누구든지 친척이라도 물러줄 수 있으면 물리게 하고 그것도 안 되면 희년이 되면 자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봇이 거절하자 왕도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있는데 그 아내 이세벨이 어떻게 합니까? 왕은 가만히 계십시오, 하고서는 나봇이 사는 동네에 깡패 두 명을 동원하여 나봇이 여호와와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증거하게 하고서는 돌로 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을 행할 때 무엇을 선포합니까? 금식을 선포하고서, 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선포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큰 죄를 범하였거나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왕이 금식을 선포하고 전 국민적인 회개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그러한 금식이라는 것을 선포하고서 나봇을 쳐 죽이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군사독재 정권 때에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식을 선포하고서는 자기들의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악한 모습이 사실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금식,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금식을 얼마든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해서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큰일을 해보고자 하는 것이, 자기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자기들의 욕심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스가랴 7:1-14절입니다. “봉독”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는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늘 하던 대로 5월에 금식을 할까요, 라고 스가랴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스가랴를 통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5-6절입니다. 너희의 금식이 70년 동안 5월과 7월에 금식하고 애통한 것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70년을 금식하고 애통한 것이 순전히 너희를 위한 금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이 무엇입니까?
스가랴 7:10절입니다. “봉독”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하고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헤하려고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음으로 너희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씀을 보고서 또 어떻게 인용을 하는가 하면 우리나라가 먹고 살만해지자 타락했다고 하면서 구제헌금을 많이 하자고 합니다. 그리하여 북한에도 보내고 가난한 이웃에게도 보내자고 열심히 ‘쌀모으기 운동’을 하는 목사님이 계신다고 합시다.
그런 분이 이러한 말씀으로 설교를 하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많은 쌀을 북한으로 모아서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 한국의 교회들이 부흥이 안 되고 손가락질 받으니, 이렇게 해서 다시 교회가 부흥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러한 교회 안에 가난한 전도사가 몇 십 만원으로 생활하는데 목사는 몇 백 만원을 받고 있다면 과연 그것이 잘하는 일입니까?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이사야서 본문을 보고자 합니다.
6-7절입니다. “봉독” 스가랴서와 비슷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주 구제헌금을 많이 하고 커다란 일들을 많이 하는, 그런 교회나 목사가 자기 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오는 것을 과연 환영할까요? 돈 많은 사람이 와서 구제사업을 더 크게 잘하는 것을 원할까요? 우리가 그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이지만 1년 예산의 10프로가 넘는 돈을 선교헌금을 하고,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 헌금을 전액 구제헌금 한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전에 ‘밀알선교단’이 와서 이렇게 작은 교회가 많은 금액을 헌금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할 때에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구제와 선교헌금은 누구를 위하여 한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입니까?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보람과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전부를 다 내어 주었다고 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으며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하는 것이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는 모습을 성경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안 해서 탈이지, 왜 그렇게 하는 것까지 까탈을 잡느냐고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압제당하는 자를 해방시켜 주기를 원하십니까? 가난한 자를 자기의 집에 들여 놓기를 좋아하십니까?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십니까? 벗은 자를 보면 입히십니까? 내 골육이, 내 가난한 친척이 오면 피하여 숨지 않습니까?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이렇게 살면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송구영신예배하면서 헌금 하였다고 복받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살면서 금요철야한다고 액뗌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살면서 금식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참된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하신 것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처음에 40일 금식기도 하신 것 외에는 금식하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히려 금식을 잘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왜 너희는 금식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잔칫집에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어떻게 금식하는가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 안에서는 금식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의 잔치가 열린 것입니다. 그 기쁨의 잔치가 무엇입니까?
다시 이사야 58:6절을 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서로의 착취와 억압이 없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이 아니라 잔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나니 그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만으로 감사하지 못하는 때라면 이것은 금식할 때입니다. 밥을 먹고 안 먹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를 위하여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 정말 금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자기를 위한 종교사업에 몰두하기 위하여 금식을 하고 있다면 그런 곳에서는 오히려 밥을 먹고 잔치를 해버리는 것이 참된 금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오해를 받으신 것입니다. 술을 즐기고 먹기를 탐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자주 금식을 하는데 너희가 세례 요한의 계열이라면 금식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그렇게 자주 먹고 마시며 잔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사람과의 잔치입니까? 세리와 창기, 죄인들, 병자들, 이런 자들과 먹고 마시는 것이 경건하게, 거룩하게 금식하는 자들의 눈에는 완전히 이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적어도 새해 벽두에 목사가 한 1주일간은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와야 권위가 세워지고 무게가 실리는 것을 사실 여러분이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금식이란 결국 자기를 위한, 자기 목회를 위한 금식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금식이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참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을 해방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이사야 58장이나 스가랴 7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금식을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스가랴 8:18-19절입니다. “봉독” 스가랴 7장에서 잘못된 그러한 금식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 때가 되면 금식의 날이 기쁨의 날이 되고 희락의 날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금식, 바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16-21절입니다. “봉독” 이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참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밥을 먹거나 안 먹거나 간에 참된 금식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형편이 지금 어떠하더라도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고 그 마귀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예수님이 계심으로 기뻐하는 자라면 참된 금식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정말 형제를 불쌍히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마음을 낮추며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이 우리 안에 없다면 정말 밥을 굶어서라도 예수님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금식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금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된 금식으로 인하여 주어진 기쁨이 있다면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서, 단지 생활의 욕심뿐만이 아니라 자기 교회를 위한 욕심을 가지고 늘 기도하고 철야하는 곳에서는 잔치를 열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밥을 먹거나 안 먹거나 간에 주님의 참된 금식으로 자유와 기쁨, 영생에 참여되었다면 예수님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인 것입니다.
이사야 58:9下-14 안식 2001. 1. 10.
이사야 56장에서 안식일과 안식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안식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에서 거룩한 공간과 시간과 거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결국 그림자요 모형이었으며 참된 안식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요? 그 이유는 안식을 내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식을 누리기 위하여 하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부자가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이제는 먹고 마시며 즐기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안식을 위하여, 좀더 나은 삶의 수준을 위하여, 노후의 쉼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노력이 참된 안식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좋은 침대를 구입해도 단잠은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집은 지을 수가 있어도 행복한 가정은 돈으로 살수가 없는 것임을 알지 않습니까? ‘가정생활 세미나’ 하러 다니는 유명한 여자 강사가 이혼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어제 들었습니다.
가정생활 세미나 하러 다닌다고 남편에게 소홀히 하였거나 아니면 그 강의의 이론대로 남편을 대하다가 이혼을 당하였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자기의 안식을 위하여 노력을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압니다. 마음대로 안 될 때 사람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자신이 잘못해서 그렇다고 합니까? 남이 잘못해서 그렇다고 합니까? 남이 잘못해서 그렇다고 하지요? 그러면서도 계속하여 사람들은 더 나은 안식을 위하여 계속하여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믿습니다. 다른 믿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혹시 도움을 청한다고 하면서 점집을 찾거나 점집을 찾는 마음으로 절을 찾거나 교회를 찾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결국은 자기들의 힘을 포기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상의 모습이라면 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별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삶의 방향과 가치관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에 베여있기에 성경을 보면서도 어떻게 보는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여러 가지 행함의 능력으로 행복한 삶이나 자신의 안식을 찾고자 하는 방법으로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하고,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 하니 사람이 적극적으로 복 받을 일을 하고 저주 받을 일을 하지 않는 쪽으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어떻게 말합니까? 이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보시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모두가 남의 탓입니다. 반대로 뭔가 좋은 일이 있으면 모두가 자기 탓입니다. 그러니 잘되면 자기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세상 사람이나 오늘 우리나 자신의 쉼에 방해가 되면 그 핑계를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볼 때도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데도 이것은 저 사람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착각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목사일 것입니다. 목사 자신에게 하는 말을 성도들에게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전하면 그래 맞아, 이 말씀은 바로 나에게 하는 말씀이야, 라고 하기보다는 목사 자신이나 잘하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문제가 생기면 성도는 목사 탓, 목사는 성도 탓인 것입니다. 이런 정신구조가 우리의 죄된 생각들입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로 성경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우이독경(牛耳讀經)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3:16-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보고 듣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 한절 한절이 얼마나 나를 책망하고 교훈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고 있는지를 절감해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서 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통하여 그 한 말씀 한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의가 없음을 알고서 의를 구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참된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쭙잖게 나는 이런 말씀은 지킬 수가 있어, 이 말씀도 다는 안 되지만 어느 정도는 지킬 수가 있어, 라고 생각하면 결코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교만이 나오지 결코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려 나는 의가 없는 자입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의를 원합니다,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는 말씀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는 이러한 말씀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끊임없이 자기 의와 자기 교만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이야기하고 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얼마나 교만하여 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복음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과 만나고자 합니다만 만나고 오면서 그 모임을 잠시 생각해보면 역시 그곳에서도 자기 자랑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겸손히 듣고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무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디 하고자 하고 그래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복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오늘도 말씀에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출발한 것은 애굽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었기에 그 은혜의 정신이 흘러야 하는데도 이스라엘은 오히려 애굽의 정신, 가나안의 바알의 정신으로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종교적인 금식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금식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자기 자신들을 위한 금식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도 결국은 이러한 죄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것이 고쳐져야 너희가 바른길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고, 영혼이 만족케 되고, 뼈가 견고케 되고, 물 댄 동산 같이 되고, 오래 황폐한 곳이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좋은 상태를 만들기 위하여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9절 하반절부터 10절을 봅니다. “멍에와 손가락질과 주린 자에게 네 마음을 동하며 괴로워 하는 자에게 마음을 만족케 하면” 이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도 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고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고 내가 너를 땅의 놓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 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망하였다, 그러니 예수 믿는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다 지킬 수가 있으며, 또한 지켜서 이러한 복을 받아보자고 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 지금 되어 있는지를 다시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멍에를 제하라고 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의 자기 집의 종의 멍에를 말할 수도 있고, 부자가 부당하게 대우하는 자들에게 메우는 멍에일 수도 있는데,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년과 희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종은 종으로, 부자는 부자로 고착화되어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알의 종교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고착화시키는 것이 바알의 종교인데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멍에를 제하여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에게 멍에를 메우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약자이니 나는 다른 사람에게 멍에를 지우고 있지 않아, 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에게 멍에를 지우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욕심에 따른 억압이 없습니까? 과연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시기를 기뻐하십니까? 호랑이 없는 굴에서는 토끼가 왕노릇 한다고 했습니까? 토끼가 늘 당하다가도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억압을 행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동화 같은 데 보면 토끼가 마음이 약하여 풀을 뜯어 먹지 못하고 이슬만 먹다가 죽는다는 그런 동화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남의 이야기입니까?
어제 경상노회 임시회를 하였습니다. 제가 노회를 옮긴 것이 이곳까지 세 번째인데 가장 약한 노회입니다. 전국의 노회 가운데 아마 가장 약한 노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노회 참여를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개척을 하느라고 이명을 하면서 이런 인사를 하였습니다. 자신이 노회의 일을 맡아보니 상처를 준 일도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라는 문제가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경남노회라는 곳이 전국적으로 정치적인 바람이 센 곳이라는데 이런 것이 싫어서 경상노회가 분립이 되었다면 정말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 되듯이-저는 토끼 보다 여우라고 하는데-역시나 또 다른 형태의 정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일로 로비력이 있는 자는 건재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말 교회 안에서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에게 조금이라도 멍에나 억압감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아니라고 하신다면 손가락질은 하지 않습니까? 꼭 눈에 보이는 곳에서 손가락질을 하지 않아도 뒤에서 누구는 어떻더라, 라고 하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그렇지 않나요? 왜 안 그러겠습니까? 누구는 왜 그렇게 하는가, 이렇게 하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는 말을 하면서 그러한 방향이 결국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도 아니라면 주린 자에게 마음을 동하십니까? 단지 구제헌금 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말 굶주리는 형제와 마음이 같아지십니까?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낮아져 있습니까? 요즈음 세상에 밥 못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실지 모르지만 정말 주린 자에게 마음이 동하여 집니까? 오히려 외면하지 않습니까?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합니까? 우는 자들로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로 함께 기뻐합니까? 슬픈 일 당한 자를 위로하기는 조금 쉽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같아집니까? 그 정도로 낮은 마음이 됩니까?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서면 잊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이 뭔가 잘되었을 때 함께 기뻐할 수가 있습니까? 오죽 했으면 사촌이 땅을 사는데 배가 다 아플까요?
이렇게 하는 자라야 그 빛이 흑암 중에 발하게 되고 물댄 동산 같고 무너진 기초를 쌓은 자라고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절입니다. “너희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면 멍에를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마음이 동(同)하고 괴로워하는 자를 만족케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역시 예수님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약하다고 하여도 나보다 더 약한 자에게는 억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멍에를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와 마음을 같이 합니까? 그보다 더 낮은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요.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하는 자를 왕이라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회복시키는 분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날짜 지킨다며 안식일을 지키면서 과연 누구를 위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발을 금하라. 나의 유익을 위한, 나의 기쁨을 위한, 나의 오락을 위한 행위를 금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를 사랑하여 지킵니까? 아니면 안식일 안 지키면 무언가 손해날까봐 지킵니까? 그렇게 지키는 것이라면 아무리 발을 금하고 오락을 금하고 텔레비전 보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주님을 위한 안식일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안식일인 것입니다.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존귀한 날이라고 합니까? 안식일이 괴롭고 귀찮다는 것입니다. 언제 이 안식일이 지나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길꼬,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날이 과연 기쁘고 즐거운 날이 되었습니까? 백성들도 괴롭고 하나님도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의 안식일지킴이 나는 괴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드림이 과연 기쁨입니까? 오늘도 죽을 날이다, 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안식일에 네 길로 행치 아니하고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으면 참된 안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안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구약이 증거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참되 안식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안식을 위하여 어리석은 부자처럼 행동합니다. 내가 이렇게 부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나를 위하여 남은 생을 즐기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취하리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나의 어쭙잖은 몇 가지 행함으로 안식을 누리려고 하십니까? 그래도 이만하여 나는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을 살펴보는 식으로 성경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나는 이만 하면 되었다, 나는 섰다, 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참으로 멍에를 제하여 버리시고 우리보다 더 낮아지셔서 가난한 자와 마음을 동하시고 괴로운 자를 만족케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안식이며 또 내가 말씀을 다른 사람보다 잘 지킨다는 그런 안식 없는 마음에서도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주는 짐은 가벼우니라. 세상의 짐을 벗기시고 주님이 지우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신다면 틀림없이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만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이사야 59:1-9 죄악의 행위 2001. 1. 17.
우리가 방금 찬송한 332장의 1절 가사가 “나 행한 것 죄뿐이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가사를 인정하십니까? 어떻게 우리가 행하는 행위 중에서 악한 것만이 나온다는 것입니까? 선한 것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찬송가사에서 왜 나 행한 것 죄뿐이니,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찬송가 가사이니까 그렇고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을거야, 라고 하시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성경은 이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정말 인류를 위하고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여도 예수 믿지 않으면 무엇입니까? 죄인이고 지옥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만약 이것을 인정한다면 틀림없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왜 세상에서 미움을 받았습니까?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는 악하고 어느 정도는 선하니 그러한 선을 잘 개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라고 하셨다면 미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미 창세기에서 보았지만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가끔씩 선한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악하다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이나 이후나 꼭 같은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죄악의 행위’입니다. 6절에 보시면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의 말씀만을 가지고 죄악의 행위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가 죄악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8:1절에서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밝혀서 크게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9장도 이러한 죄를 고발하는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뿐만이 아니라 성경전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알게 하는 책인 것입니다. 59장에만 보아도 1-9절은 죄악의 행위들을 말씀하고 있으며, 10-15절은 그 죄악의 행위의 결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21절은 여호와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1-9절을 중심으로 죄악의 행위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악한행위만을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 말씀을 보시면 당장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기도원 같은데서 ‘기도응답의 비결’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 거의 이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것이고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쓰려고 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도를 하실 때 부자 되게 기도하지 마시고 선교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전도와 구제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크게 쓰실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눈이 어두우신 분이십니까?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의 속마음을 모르십니까? 누구에게 사탕발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오늘도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신데 우리 인생의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면서 이 본문을 들어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함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함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가 가리워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의 목록과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 헌금 떼먹은 것,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것 갚으시오, 하면서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은근히 축복과 저주를 섞어 가면서 그동안 떼먹은 헌금을 한꺼번에 내려고 하니 망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알죠. 귀신같이 압니다. 그러한 마음을 모르겠어요? 그러니 적절한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어려워도 떼어먹은 헌금을 다시 함으로서 복을 받은 사건, 계속 고집부리며 안하다가 더 쫄딱 망한 사람의 이야기, 이러면 겁이 나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결국 하나님께 죄를 해결하고서 복 받은 이야기하면 어지간한 강심장 아니고서는 헌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와 기도라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하여도 기도는 합니다. 무신론자가 어떻게 기도합니까? 이미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있기에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어”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어 오직 나뿐이야” ‘여자 만세’라는 드라마에서 채시라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자기체면, 자기에게 말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모든 기도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나오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나오는 기도는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월요일에 어느 집사님 부부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이제 은퇴가 몇 년 안 남았으니 자기의 이력을 남기기 위하여, 즉 자기의 욕심을 남기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열심히 헌금하고 전도하기를 주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데도 그 집사님의 말은 자기 욕심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며 성도들까지 자기의 우상숭배에 내몰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철야, 금식, 일천번제라고 하면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이며 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합니까? 누가 이렇게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기도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힘을 가지고자 하는데, 이렇게 해버리면 오히려 힘을 빼버리는 결과가 되는데 누가 이렇게 합니까?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참된 금식을 하시고 참된 기도를 하시고 응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서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의 뜻을 철저히 포기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시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기도는 철저하게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하고나서 그 기도의 내용을 다시 종이에 쓰든지 하여서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 기도가 응답이 되면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이익인가 아니면 나에게는 비록 손해가 올지라도 하나님과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가 이러한 기도 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죄악이 숨어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기도만 이러하겠습니까? 예배를 잘 드리고 선교와 전도와 구제와 봉사를 하는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죄악의 사상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무엇을 기도하시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시기에 우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결국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인 죄악의 목록들을 보고자 합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리워진 죄악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죄가 완벽히 해결되면 하나님께 구하면 응답이 되겠지요? 대충 보시지 마시고, 한두 가지 해결하여 응답받자 하지 마시고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대충 어중간한 것이 없습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입니다. 예, 아니면 아니요, 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봅시다. 손에 피가 있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손이란 우리가 벌어먹고 사는 가장 중요한 도구 아닙니까? 과연 우리의 손에 피가 없습니까? 피란 남을 헤친 것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헤친 적이 조금이라도 없습니까? 스님들은 이도 안 죽이려고 놓아준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를 잡아서 밖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옷에 오히려 넣어두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어느 스님은 정말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 과연 우리의 손에 피가 없습니까? 죄가 없습니까? 지난주일 저녁에는 손가락질이라는 목록을 보았습니다. 손으로 행하는 죄악입니다.
이제는 입입니다.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말함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고서 부자의 편을 들어 주는 것입니다. 유전무죄요, 무전유죄의 현상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술의 죄악이 어디 입술만의 죄입니까? 손이 범죄하였다고 손만 감옥에 넣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의 마음이 부패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입술의 범죄가 야고보서에는 어떻게 나옵니까?
야고보서 3:1-12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에서 자유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혀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한입으로 찬송하고 한입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한입으로 주님 사랑합니다, 하면서 한입으로 형제를 미워하지 않습니까? 계속하여 봅니다. 허망한 것을 의지하고 거짓을 말하며.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까?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죄악을 생산하는 죄의 공장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인간이, 바로 우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로 옷을 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히면 터져서 독사의 새끼가 나오는 것입니다. 독사의 알을 품는다는 것은 그 마음에 죄악된 사상과 계획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악으로 나온 행위는 거미줄과 같은 것입니다. 남을 그물에 걸려들게 하여 자기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룩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서 자기들의 행실이 옳다고, 그러한 행실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만들어 입은 옷은 거미줄과 같이 옷을 이루지 못하는 죄악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옷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자기를 가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악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6절입니다.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서 있으며 공의가 없으니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죄악의 행위와 죄악의 사상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로도 자기의 죄악을 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강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서도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시겠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이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씀이 바로 나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3:9-18절을 봅니다. “봉독” 15-17절이 이사야 59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위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다른 한 의가 나온 것입니다. 3:2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는 율법의 행위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사상은 죄악의 행위와 사상이기에 이것을 스스로 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4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요한계시록 16:15절.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자기 행위와 사상으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을 입으심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시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59:9-21 죄의 결과와 구원 2001. 1. 24.
지난주 수요일에 죄악의 행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죄악의 행위란 죄를 지어서 죄악의 행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자동적으로 죄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인은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여, 무엇을 생각하고 계획하여 일하는 것이 마치 독사의 알을 품고 그 알이 부화되어 독사의 새끼가 나오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평가에 대하여 기를 쓰고 반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악한 짓도 하지만 늘 악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선을 행할 수도 있는데 왜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교육이나 환경을 개선하고 공평한 조세와 공정한 법집행을 통하여 악인은 벌 받게 만들고 선하게 사는 사람은 보호를 받게 하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죄로 몰아붙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 죄악의 현실로 보시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 때에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이 다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 홍수 속에 죽어간 사람 중에 부모에게 효도한 사람이 없었을까요? 불우한 이웃을 돕는 사람이 전혀 없었을까요? 그곳에도 사람 사는 곳이라 악한 자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보기에 선한 사람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방주에 타지 않는 모든 자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무엇이 죄악의 현실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말하는 강도나 살인이나 도적들이 많아서 죄악된 현실이 아니라 무엇이 죄악의 행위의 결과인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9절에 그러므로,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앞의 단락에서 죄악의 사상과 죄악의 행위의 결과로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를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에 이 세상 기준의 죄로 보면 이러한 말씀이 왜 죄된 현실로 고발 받고 있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나도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걸리적거리는 것도 없으니 더 부담도 없을 것입니다. 조상에게 절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며, 명절이라고 친지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자랑을 늘어놓은들 무슨 죄라고 여기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만이 성경을 통하여 이 세상이 얼마나 죄된 현실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눈이 뜨이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리 교회에 들락거린다고 하여도 여전히 세상의 관점에서 보는 죄와 악이라는 기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 받을만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과연 성경에서 무엇이 죄의 결과로 나타난 죄악된 현실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9절에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사회에서도 공평과 의가 사회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결코 그러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라고 하여도 결국은 힘의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어 지는 것이지 공평과 의로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공평과 의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평과 의라는 개념도 역시 세상의 공평과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공평과 의입니다. 이미 율법으로 주어진 공평과 의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공평과 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음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하여 어두움과 캄캄함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빛을 바라고 밝은 것을 바라나 어두움과 캄캄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캄캄함으로 보이는 것이 선지자가 보는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 이렇게 캄캄해 보입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의가 보이지 않는데도 하나도 캄캄해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는 죄의 현실 속에서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 살고 있다면 이 세상은 반드시 캄캄함 그 자체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늘 말씀을 듣고 보면서도, 보이는 것이 없어서 얼마나 낙심이 되고 가족이나 동창들 앞에서 기가 죽어지냅니까? 바울 사도는 복음이 자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하여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지옥 가는 것이 뻔한데도 그 지옥 가는 사람들이 가진, 눈에 보이는 것들에 기가 죽어지낸다면 아직도 우리는 소경입니다.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분별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의 죄악의 행위로 인하여 소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낮과 밤이 구분이 안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의가 없기에 이러한 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곰처럼 부르짖고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이 멀도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이러한 모습이라면 다른 세상은 더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세상이 이러함을, 우리가 말씀으로 세상을 볼 때 이렇게 보여야 합니다. 온통 세상의 원리가 가득한 것입니다. 힘의 논리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힘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진리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힘이 되는가 아닌가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하나님도, 나에게 무슨 힘이 되느냐 하고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이러한 모습이 왜 일어난 것입니까?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허물과 죄란 결국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잉태하여 발한 것입니다. 14절에서 보면 공평이 뒤로 물러가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성실이 없어졌기에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죄된 현실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안의 모습이 이러한 것입니다. 창원 극동방송에서 정직과 성실을 자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직과 성실을 행하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됩니까? 오히려 탈취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하시고 자기 백성은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셨을 때 믿는 자는 구원이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심판과 동시에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15-17절. “봉독” 이러한 죄된 세상을 기뻐 아니하시고 중재자도 없음을 이상히 여기시사 스스로 자신의 팔을 의지하고 자신의 의를 의지하여 전쟁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전쟁하는 무기가 하나님의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로 갑옷(호심경)을 삼고, 구원을 그 머리의 투구로 삼고, 보수로 속옷을 삼고-여기서 보수로 속옷을 삼는다는 것은 복수입니다. 그리고 열심을 겉옷으로 삼고 복수를 하시는 것입니다. 복수하시러 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복수를 하신다는 것을 놓쳐 버리면 반쪽복음입니다. 반쪽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순복음이 아닙니다. 순복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기에 반(反)복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7:11-12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이러한 말씀이 있는데 그저 사람들에게 좋은 말씀만 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 있음이 전제가 되어야 주님이 주시는 죄의 용서와 은혜가 얼마나 크고 좋은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모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만 다른 것들을 구하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이 세상의 법대로 살아간 모든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이 바로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하지 않는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을 구약의 전쟁에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가 정복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거룩한 군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을 때에라야 거룩한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떠나게 되면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8절에서 그들의 대적에게 분노하고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운이라는 말은 성령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이 임하심은 이러한 심판을 감행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행위가 나타날 때에 어떤 자가 심판에서 살아남게 됩니까?
20절입니다.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야곱의 죄과란 지금까지 보아온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죄과에서 떠난 자들이란 바로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들에게는 의가 없음을 알고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세운 언약이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새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인줄 아시고 우리가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보고서 떠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시고 계십니까? 주님의 의가 없는 세상을 복수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수하실 이러한 세상에 무엇을 아직도 기대하고 있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죄된 현실을 보고서 탄식하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허물을 떠나는 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0:1-22 빛을 발하라 2001. 1. 31.
1절에 보시면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학생회나 청년회 수련회 표어로 사용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일어나서 이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성경이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날 때부터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죄로 단절이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렇게 죽어 있는 자에게 아무리 일어나라고 하여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자와 같은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자는 무엇이 빛인지 어두움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온 세상이 캄캄한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이 여겨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인지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장님인데 아들도 장님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정상적인 아이처럼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슈퍼에 가서 심부름도 하고 놀이터에 가서 놀기도 하는 것입니다. 돌을 주고서 거스름돈을 받아 오고 슈퍼에서 물건을 집어 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마 반복에 의하여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 아이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느 정도 착하고 바르게 산다고 하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무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나 빛을 발하게 되실 분은 사실 따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시는 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모두가 어두움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빛의 비추임을 받은 자라면 자신이 온통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빛이 오기 전에는 어두움인줄 몰랐는데 빛이 오고 나니 어두움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59:9-10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캄캄한 가운데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는 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라면 나머지 이방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세상을 보는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고 하나 그 율법 받은 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자랑을 하였지만 그러나 그들도 역시 장님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드러난 것입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사실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죽었다는 고백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주일 저녁에 출애굽기를 통하여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움을 우리가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일어나 빛을 발하시는 분이 오시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제일 먼저 나타나는 반응이 2절입니다.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이렇게 되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우리는 빛이 오신다는 말씀을 가지고 좋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악이 물러가고 좋고 밝은 세상이 오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참빛이 오게 되면 이 세상 모두가 어두움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빛이 오시는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였습니다. 빛이 오는 날로 사모한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이방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자기들이 세계에서 영광의 빛을 발하게 되리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볼 때에 그러한 구절이 많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인지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곳을 한곳만 보고자 합니다.
아모스 5:18-20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날이 빛이라고 기다렸다가 오히려 어두움이요, 캄캄함이요, 심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의 말씀대로 참빛 곧 세상에 비치는 빛이 왔으나 사람들이 어두움에 속하였고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다는 것이 요한복음 1장의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1-5절을 봅니다. “봉독” 주일낮에 요한복음을 보고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이나 이사야나 다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것이 한가지로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죄악이 어떠한지를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저녁에는 출애굽기를 보지요. 출애굽기에서 아홉 번째 재앙이 무엇입니까? 어두움입니다. 캄캄함입니다. 그런데 어디에는 어두움이 없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은 어두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빛이 이 세상에 오시면 모두가 어두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두움가운데서 빛으로 나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빛이신 분이 그들을 비추어 불러내신 것입니다.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남은 자들과 이방인 가운데서 선택된 자들이 함께 빛으로 나와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이스라엘은 어떤 민족적 우월성이나 개인적 자질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들이 얼마나 어두움이었는지를 아는 자들이 들어와 있는 곳입니다.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고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아주 많은 곳에서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하던 때를 어두움의 때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빛이신 주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두움에서 빛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이제 빛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나는 빛이 아니요 빛이 따로 있음을 증거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나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라고 한 것처럼 빛을 증거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리 오직 빛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비추어 주심으로 우리가 어두움이었음을 알았고 그 빛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삽니다, 하는 그런 자들이 빛 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위한 새로운 예루살렘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이사야 60장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4-14절까지는 온 세계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로, 세계에서 보물을 가지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비록 십자가의 비참한 죽으심을 받았으나 지금 주님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는 자들이 그 빛의 비추임을 받고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빛의 비추임을 받고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리에서 증거하는 자리로 바뀌어 지듯이 지금까지는 어두움 안에서 무엇이 빛인지 어두움인지 모르고 살다가 이제 빛을 발견한 것입니다. 캄캄한 동굴가운데서 빛을 발견한 것처럼 참빛이신 주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이러한 놀라운 일이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 하는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전히 어두움 아래 있는 행위들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빛이 우리를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나는 너보다 더 빛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너보다 더 고상하게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삶은 자신이 더욱 추하고 더럽고, 죄인중의 괴수임을 아는 삶입니다.
그러니 빛 가운데로 더 가까이 나가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어떠한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추함과 더러움을 알고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돌아가셨나, 하는 그 감격만 있을 뿐입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그것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신앙생활 잘 한다, 모범이 된다, 라든가 아니면 너 그 정도냐, 하든가 간에 그러한 판단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의롭다고 하여 주신 주님의 그 은혜만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긍휼이 여겼은즉”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을 입은 자들이 새 예루살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새 예루살렘의 성벽의 이름과 그 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18절을 봅니다.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니라” 구원의 성벽, 찬송의 문으로 만들어진 새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종말론적인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22절 끝을 봅니다.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지금 여호와께서 이루어내신 것이 바로 빛을 세상에 보내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빛이 세상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도 다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그 빛을 보고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을 보고서 나오는 자들은 자신들의 실력이 아니기에 오직 빛 가운데로 불러주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뿐입니다.
에베소서 5:8-14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빛입니다. 빛 가운데 사는 것은 자꾸만 우리의 어두움들이 빛 가운데 노출되어지는 것입니다. 빛이 비쳐지니 우리가 지금까지 모르고 행한 것들이 다 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남으로, 즉 빛의 책망을 받음으로 빛으로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말씀의 빛에 비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빛이 우리의 어두운, 모든 속마음의 생각들까지 수술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자는 결코 자기의 의로움이나 자랑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갈수록 더 세밀하게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빛 가운데로 가까이 나아가는 자겠습니까?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임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맛볼 수 있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누가 누가 잘하나가 없는 곳입니다.
누가 선행을 잘하고 봉사를 잘하고 누가 전도를 잘하고 기도를 잘하는가가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하여 사는 것임을 고백하고 찬송하는 자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한 곳이 있습니다. 이 곳은 이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침범할 수 없는 참으로 빛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이사야 60:19-22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을 읽으니 어느 말씀이 기억됩니까? 요한계시록 21:22-22:5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나라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이 나라를 소망하면서 지금 더욱 말씀의 빛 가운데로 인도를 받아가기를 원합니다. 말씀의 빛 가운데로 나아갈수록 자신은 없어지고 나를 구속하신 주님만 크게, 크게 보일 것입니다.
이사야 61:1-3 아름다운 소식 2001. 2. 7.
지난주에 빛을 발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빛을 발하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빛을 발하여 세상을 환하게 하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자는 차원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만약 그러한 빛으로 이해한다면 ‘새마을운동’이나 ‘바르게살기운동’처럼 되는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집을 쓰레트로 바꾸고 호롱불을 전깃불로 바꾸었다면, 바르게살기운동이란 이제 먹고 살만하니 좀더 윤리적인 차원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운동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시니 사람들이 빛을 싫어하고 죽여버렸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빛이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세상을 환하게 밝혀 비추실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오히려 빛의 역할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두움에 속하여 있고 어두움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드러내시고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이 어두움임을 드러내시자 자신이 어두움임을 알고서 빛 가운데로 나아오는 자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60:4). 그러나 빛 가운데로 나오지 않는 자는 결국 파멸되고 진멸되는 것입니다(60:12). 이러한 말씀을 보시면 우리는 그래 나는 빛 가운데로 나아 왔으니 구원받았어, 라고 하기 이전에 우리가 어두움임을 알고 빛 가운데로 나아오게 하신 그분의 하신 일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틈만 나면 어두움의 일을 좋아합니다. 빛이신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길보다 세상을 향하는 마음이 훨씬 많은 사람들 아닙니까?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의 보물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약속된 것들이 우리의 진정한 보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헛된 것들이 우리의 보물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창고라고 생각하시면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바를 찾고 구하는 일에 우리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을 위하여 힘을 쏟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지금도 이러한 지경인데 우리가 스스로 어두움임을 알고 빛 가운데로 나아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식이란 이러한 죄인이요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주의 신이 임하신 분이 나타나셔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여 주셔서 우리를 그 안에 거하게 하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이요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61:1절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일 저녁에 여호와의 이름에 대하여 말씀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이신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언약하신 것을 이루어 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여호와의 일을 여호와의 신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신을 성신으로, 신약에서는 성령으로 나타나는데 같은 말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는 성신으로 말하다가 이제는 거의 성령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자가 구약에서 주의 종들에게 나타납니다.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에게 주의 신이 임하여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된 자를 누구로 봅니까?
사도행전에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보다가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의 내용에 대해서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빌립을 그 내시에게 보내셔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선지자 자신이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요? 빌립이 뭐라고 합니까? 이 말씀이 바로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자 당장 그 내시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1장의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분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신 것은 곧 기름을 부으신 것인데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메시아가 하실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심, 포로 된 자에게 자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포로 되고 갇힌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난하지 않고, 마음이 상하지 않고, 포로 되지 않고, 갇히지 않은 자에게는 아름다운 소식이 아니라 오히려 기분 나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포로 되고 갇힌 자들이 생긴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린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의 다스림이 없어지고 자기들의 이익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힘을 섬기기 시작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로 이러한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갇힌 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을 통하여 자유를 선포하게 하셨는데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레위기 25장을 봅니다. 8-22절입니다. “봉독” 희년을 선포하고 그대로 시행하면 18절에서, 그 땅에서 안전히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외국에 의하여서도 포로가 되고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참된 희년의 선포란 바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가난하여 땅이 팔렸고 집이 팔렸고 심지어 가족들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희년의 나팔이 울리면서 자유다, 라고 선포가 된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희년의 선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제대로 시행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가운데서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가 오셔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4:14-21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시고는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 나사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읽으신 것은 전에도 한번 말씀을 드렸지만 회당에서의 성경읽기는 회당장이 지목하여 읽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읽는 것도 회당장이 두루마리 성경을 들고 와서 펴놓고서 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들고 온 성경이 이사야 61장이 기록된 내용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시고는 이 말씀이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1장에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이 복음을 기쁘게 받은 자들이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포로 되고 갇힌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느냐하면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1:2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을 전파한다고 하십니다. 은혜의 날임과 동시에 신원의 날입니다. 신원이란 원수를 갚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힘이 있다고,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을 괴롭힌 자들의 하소연이 하늘에 상달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복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세상의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포로 된 자들을 구원하심으로 기존의 세상의 부자라고 큰소리 치고 힘 있다고 약한 자를 괴롭히고 마음대로 잡아 가두고 한 그들을 심판하시는 차원에서의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제 신약에서는 좀더 영적인 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단지 정치, 경제적인 문제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에 갇혀 있고 포로 되어 있는가를 예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그늘에 갇혀 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갇혀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이 아름다운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4-36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죄를 짓는 것은 이미 죄의 종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종에서 누가 자유를 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자유를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을 유대인들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이제 우리가 주님의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나왔다면 어떤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까? 나는 가난에 매여서 돈에 종노릇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그런 것에서 자유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가 치료를 받고, 죄와 세상에 포로 되어 살던 자가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주님의 공로입니다, 하고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헛된 것들을 성령님께서 포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시작이 바로 마태복음에서 팔복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12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내용을 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은 바로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자들은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이러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2절에 보시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이사야에서는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 즉 심판의 날을 동시에 말씀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4장과 고린도후서 6장에서는 아직 심판의 때에 대하여서는 보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최후의 심판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의 복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사야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6:3절입니다. “봉독”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재 대신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 대신 찬송의 옷을 주심, 이러한 자들을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마땅히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성령 안에서 이미 성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복을 지금 받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 심판과 진멸이 있을 뿐입니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요 은혜 받을 만한 때라.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1:4-11 의의 겉옷 2001. 2. 14.
오늘이 ‘발렌타이 데이’입니다.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코렛을 주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 유래는 전에 제가 본 글에서는 중세시대 때에 전쟁을 하기 위하여 어느 기간동안 결혼을 금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기를 원하는데 누가 감히 주례를 서겠습니까? 그런데 발렌타인이라는 신부가 주례를 선 것입니다. 이것이 발각이 되어서 신부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기념하여 ‘발렌타인 데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희미한 흔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는 초코렛 회사가 부풀리기를 한 것이지요.
그러면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날은 없습니까? 해서 만들어 낸 것이 ‘화이트 데이’입니다. 이런 날만이 아니라 그저 무슨 재미있는 날들이 없는가 하면서 온갖 날들을 만들어 냅니다. 권태로움을 이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권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말씀 안에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초코렛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피를 주신 주님의 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제대로 알기를 소원합니다.
지난주에 1-3절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오시면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을 전파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의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 1차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아니라 남은 자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남은 자는 심판을 통과한 자들입니다.
4-5절입니다. 시온의 회복입니다. 무너진 성전과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회복이 됩니다만 그러나 옛 모습보다는 훨씬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언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될, 나라의 영광을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될 이 나라에 이방인도 참여되는데 구약에서는 이방인이 종속적인 관계로 편입이 됩니다. 양떼를 치고 포도원을 치는 등 종의 역할을 합니다만 그러나 신약에서는 유대인이니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모두가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백성이 된 자들, 즉 메시아가 오셔서 회복시킨 자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6절에서 여호와의 제사장, 하나님의 봉사자라 불리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열국의 제사장의 나라로 부름을 받은 것처럼 오늘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제사장과 봉사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제사장과 봉사자란,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제사장과 봉사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베드로전서를 통하여 봅니다.
베드로전서 2:1-10절입니다. “봉독” 5절에 보시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라고 합니다. 이러한 제사장이란 사람에게 버린바 되셨으나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자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이 돌을 믿는 자는 믿는 자에게 보배가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즉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봉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제사장과 봉사자의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9절 하반절에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제사장으로, 봉사자로 세우신 것은 오직 주님의 일하신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덕이란 10절입니다.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의 공로입니다, 라고 하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이요 봉사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제사장과 봉사자란 주님의 행하신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가 제사장이요 봉사자인 것이지, 목사가 되었다고, 장로가 되었다고 하나님의 제사장과 봉사자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그동안의 종교적인 이력과 경력들을 내세우면서 이만한 능력의 사람이라고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자들이 제사장이나 봉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께 봉사한다고 무슨 커다란 업적들을 만들어 내는데 그러나 그러한 것이 제사장과 봉사자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교회 안에서 아무런 직분이 없더라고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시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라면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봉사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바로 주의 신이 임하여 자유케 하고 해방시켜 낸 자들의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포로 되고 갇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마귀가 끄는 대로 살아가야만 했던 자들을 해방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해방되어 나온 자는 해방시켜 주신 자만 자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온 자들은 수치와 능욕을 당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사모하고 사람의 일들을 의지하지 않으면 반드시 수치와 능욕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기쁨을 주시는지를 보겠습니다. 7-8절입니다. 영영한 기쁨과 영영한 언약입니다. 빼앗기지 아니하는 기쁨과 변개되지 아니하는 언약입니다. 이것이 제사장과 봉사자에게 주어지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영한 기쁨과 영영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10절입니다. “봉독”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고 의의 겉옷을 입히셔서 신랑,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단장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이러한 의의 겉옷을 입고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옷은 결코 사람으로는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59:6절. “그 짠 것으로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이사야 64:6절.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구약의 제사장도 제사장의 직분을 성전에서 행할 때에 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고서 성전에서 수종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제사장으로 서기 위하여 우리의 만든 옷, 우리의 행위로 짜낸 옷감으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옷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죄악의 행위인데, 죄악의 행위가 나오는 것은 이미 마음이 부패하여 죄악의 사상에 의하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가 정말 더러운 옷 같은 것임을 아는 자는 주님께서 입혀주시는 의의 겉옷을 입기를 반드시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서도 주님의 의의 기준에 들 수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될수록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주님의 피로 만들어 주신 의의 겉옷을 입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옷을 입은 자로서 우리는 제사장이며 봉사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제사장과 봉사자의 신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격이기도 합니다. 어리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주님이 입혀주신 의의 옷을 입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옷을 입고서 나가면 안 됩니다. 쫓겨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1-14절. “봉독” 천국비유, 청함을 받은 자 거절, 아무나 오시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세상의 기준이 쓸데없음. 누가복음 14장에는 저는 자, 병신들이라고 함, 이들이 잔치에 나아옴, 예복을 줌, 신랑만 돋보임, 자기 옷이 누더기인 자는 얼마나 감사하며 입을까, 그러나 자기 옷이 좋은 사람은 입지 않았을 것임.
오늘 우리의 옷은 무엇으로 입고 있습니까? 우리의 누더기를 벗어버리고 의의 옷을 입고서 제사장으로, 봉사자로, 신부로서 이 옷을 입혀주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감사하며 선전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62:1-12 새 이름 2001. 2. 21.
기독교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빼버리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어떤 인간의 행위에 의지한 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은 늘 그러하듯이 모든 것을 인과율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행위에 따라 그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진리로 통하는 것입니까? 유교도 불교도 다른 종교들도 결국 자기의 행위의 결과로 현세든 내세든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라고 하면서도 이러한 세상의 가치관, 종교들을 따라가기가 너무나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하심은 뒷전이고 어떻게 하든지 사람의 열심만 모아 보겠다는 것은 그것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든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든지, 복음이라 하든지 간에 세상의 종교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가 하시겠지만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용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글만 읽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방식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이 임한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귀가 없어서 못 듣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성경이란 어떻게 한사람이라도 더 쉽게 알아듣게 하여서 구원하여내자, 라는 것 보다는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만 골라내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만 골라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 아십니까? 아니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게 하셔야지, 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지 않으시는가 하면서 하나님이 독단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도 독단적이다, 예수 믿는 사람도 독단적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진리가 기독교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이러한 오류에 빠지는지를 성경을 통하여 다시 점검을 하시고 나를 바라보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3절을 봅니다.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공의와 영광이 열왕 앞에서 드러나고,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되고,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호칭들입니까?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날 구원받은 백성의 이름들이 이러한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이름으로 주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입은 자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들이 62장에서 계속됩니다. 헵시바, ?라, 딸, 거룩한 백성,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 찾은바 된 자, 버리지 아니한 성읍 등의 이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이 누구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까? 구원 얻은 자의 어떠한 열심과 노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잠잠하지 않으시며 쉬지도 아니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름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까지 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6-7절을 봅니다. 파수꾼이 여호와로 하여금 쉬시지 못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일들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도록 파수꾼이 하나님을 쉬시지 못하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찬송을 받기까지 쉬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쉬지 않으시고 일하심이 자기 백성들에게 새 이름의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이름에 대하여는 나중에 한 번 더 보기로 하고 다음을 봅니다.
4-5절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주시는데 다시는 버리운 자라, 황무지라 하지 않을 것이랍니다. 이미 버리워지고 황무지가 된 자들을 다시는 그렇게 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이름 안에 주어지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이들이 버림을 받고 이방에 포로로 잡혀 가고, 그 땅은 황무지가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내시고 새 이름을 주시면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1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다시 다른 강대국들에 의하여 지배를 받은 적이 많은 것임을 볼 때 결국 궁극적인 것은 새 언약 안에서 주의 백성들에 대한 이름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은 이스라엘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들이 버림을 받은 것 같고 황무지가 되었으니 그들을 회복시키면 헵시바와 ?라라고 부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헵시바란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것이고 ?라란 결혼한 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버림을 받지 않고 홀로된 여인이 아니라 결혼한 여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혼의 관계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의 몸된 교회를 신부로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부 관계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여인이란 누구와 결혼하느냐가 그의 신분을 결정합니다. 요즘은 하도 여성의 권위가 높아져서 남자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아직까지 어떤 여인들은 그 남편이 무엇을 하느냐로 그 여인의 신분이 결정이 됩니다. 남편이 사장이면 아내는 사장부인이 되는 것이고, 남편이 교수이면 사모님이 되는 것이고, 남편이 노동자면 노동자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신랑이면 신부는 무엇이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신부에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세상에서의 결혼이란 남편이 얼마나 잘났는가에 따라 여인의 지참금이 많아집니다. ‘사’자 달린 남편을 만나려면 열쇠를 몇 개씩 가져가야 된다는 말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늘나라의 왕자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오직 그 신랑 되신 분의 사랑만 받아서 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라는 자격지심(自激之心)이 드는 것은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이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그 사상과 행함이 모두가 더러워져 있는데 무엇으로 완전하신 주님 앞에 가지고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거저 주시는 그 은혜를 받아서 주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부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자녀란 잘못을 한다고 자녀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혼은 날찌라도 자녀임이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나가 탕진해 버리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죄를 지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지 못할 것이니 단지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하자면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로 맞이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된 자들을 가리켜 12절에서 거룩한 백성,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 찾은바 된 자,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들이 결국 하나님께서 쉬시지 않으시고 만들어 낸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새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름들이 바뀌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경우 처음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의 뜻은 높은 아비라는 뜻인데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래란 나의 공주라는 뜻인데 사라는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신다는 뜻으로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입니다. 이처럼 이름이란 자신이 지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불러주시는 분이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새 이름을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새 이름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신약에서는 성도라고 불리웁니다. 거룩한 무리입니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들이라는 것이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을 자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름으로 불리웁니까? 교회라고도 불리웁니다. 건물이 아니라 주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예수 믿는 사람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또 어떤 이름들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신부,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 등 여러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름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원하여서 받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새 이름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새 이름들과 전혀 상관없이 살고 있었고, 단지 우리 육신의 혈통의 이름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쉬시지 않으시고 일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이름을 받은 자로서 새 이름의 가치를 알고 사는 것이 복 있는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나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께서 주신 새 이름 하나 있다면 얼마나 복 있는 자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란 모두가 죽고 사라질 옛 이름들만을 붙들고 삽니다. 그 옛 이름이란 또 하나의 신의 이름이 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죽어서까지 자기의 이름 하나 남기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란 나의 이름을 기억하여 그 이름에 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지낼 때 그 신분과 성씨 밑에 신위(神位)라고 붙이지 않습니까? 신적인 위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누가 자기의 이름을 부정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사는 것은 결국 자기 이름 하나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옛 사람이 죽고서 새 이름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새 이름을 주신 분을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옛 이름은 죽은 이름입니다. 그러니 그 이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새 이름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새 이름을 주신 그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쉬지 않으시고 만들어 내신 이러한 새 이름의 위력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요한계시록 2:17절입니다. “봉독”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고 하십니다. 귀가 없어서 못 듣는 것이 아니라 새 이름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만나와 흰 돌을 준다고 합니다. 이 돌 위에 새 이름을 새겨 주시는데 받는 자만 아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흰 돌이란 고대 근동에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를 받았을 때 그 집 앞에 흰 돌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개인적인 복수에서 보호를 받기 위하여 흰 돌을 세우면 이 사람을 정죄하면 안 된다는 그런 표라고 합니다. 이러한 표상을 통하여 용서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흰 돌을 받은 자만 그 이름을 아는데, 즉 용서를 받은 사람만 아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아는 이름이 비밀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글자대로 모르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크리스마스를 안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새 이름이란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받은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3:12절을 봅니다. “봉독”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의 위에 기록하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자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사야에서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백성을 하나님의 손의 면류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원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쉬시지 아니하심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 위에 하나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이란 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은 죽은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의 이름이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공로가 개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새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인 것입니다. 이러한 새 이름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나의 실패와 좌절을 보지 맙시다. 우리에게 새 이름으로 불러주시기에 우리 위에 기록된 새 이름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이름을 받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자신의 이름만을 위하여 산 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이름이 심판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1-15절에 보면 심판주로 오시는 분의 모습에 이름이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분이십니다. 이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자는, 즉 새 이름이 없는 자는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새 이름, 즉 주님의 이름을 받았다면 이것으로 성공한 것 아닙니까?
이사야 63:1-14 원수 갚는 날 2001. 2. 28.
4절 말씀에 보시면 “원수 갚는 날”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원수를 갚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는다는 말이 생소합니다. 그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사야서를 지금까지 보아오면서 심판의 내용이 많았습니까? 용서와 사랑이 많았습니까? 심판의 내용이 훨씬 많았습니다.
금요일 성경공부의 예레미야서에도 심판의 내용이 압도적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나타납니다. 심판이 있기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더욱 귀하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분량 면으로 보면 심판의 내용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긍휼과 자비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에 분노하시고 원수를 갚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시는데 누구를 원수라고 하시는지, 그리고 그러한 원수를 얼마나 무섭게 갚으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 있지는 않은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시는 모습부터 보고자 합니다.
1절에서 보시면 홍의(붉은 옷)을 입고 오시는 분이 누구냐고 합니다. 그 홍의를 입었는데 화려하고 큰 능력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질문에 뭐라고 합니까?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라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을 말씀합니다. 의를 말하는 분,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를 말하고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분이 왜 포도즙 틀을 밟는 자가 포도를 밟은 것처럼 옷이 붉으냐고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도 수확은 큰 통에 담아 발로 밟아서 그 즙을 짜내는 것이기에 포도주 통에서 포도를 밟으면 포도가 터지면서 그 붉은 색이 옷을 다 물들이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모습으로 오는가 하니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서 노하시고 분하시어 홀로 포도주 틀을 밟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홀로 하셨습니까?
5절에 보니 아무도 도와주는 자나 붙들어주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포도주 틀을 밟을 때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도와주고 붙들어주면서 포도주 틀을 밟는데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는 것은 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심판에서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어야 하나님의 심판을 도와드릴 수가 있을 텐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하는 말씀처럼 누가 의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의 원수 갚는 것을 도와드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모두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은총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그동안 여러 성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시편 7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칼을 갈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활을 당기어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신약에서는 포도원의 악한 품꾼 비유에서 이미 그 임금이 진멸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들을 죽여 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모습을 요한계시록에서 보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 14:17-20절입니다. “봉독” 포도주 틀에 밟히는 심판, 포도즙이 아니라 피가 말굴레까지 닿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9:11-16절입니다. “봉독” 백마 타고 오시는 분의 모습입니다. 이 분이 포도주 틀을 밟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러한 예언의 모습이 결국 요한계시록까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한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어야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7-14절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총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러한 긍휼과 자비와 은총을 무시하지 않는 자가 바로 구원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사건을 출애굽을 들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출애굽한 것은 자기들이 의로워서 된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저녁에 출애굽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시려고 하시자 바로 왕이 여호와가 누구관데,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 경배하였으나 고통이 가중되자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고통이 덜어지기만을 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밑이라도 자기들은 고통이 덜한 곳이 더 낫다고 하는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백성들에게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10가지의 재앙을 통하여 증거하시고 마지막 재앙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서 살아난 민족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늘 무엇을 잊지 않아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총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리고 홍해 바다를 가르고 양무리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7-9절을 봅니다. “봉독”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총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10절입니다. “봉독”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총을 무시하고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대적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바벨론에 파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파신 것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바벨론 포로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자기들을 애굽에서 그 크신 긍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11-13절에 보시면 “어디 계시뇨”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홍해에서 건저 올리신 분이 지금 어디 계시뇨, 하면서 찾아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우습게 여기고 대적한 자들이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하나님께서 원수의 손에 파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하여 이들의 마음이 낮아지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그 자비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이 있는데 이것을 보고서 공격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돔 족속입니다. 1절에서 보시면 에돔에서 붉은 옷을 입고 오시는 것입니다. 에돔이 바벨론 침공 때 그 기회를 틈타서 유대의 남쪽지역을 유린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에 적용하자면 성도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가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이 신앙생활 잘못하여 저런 어려움을 당하지 하나, 하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성도가 지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알게 하시는 것인데 우리가 에돔처럼 그것을 빌미로 공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도 망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는데 이 바벨론이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교만하여 이스라엘을 학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무시한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이나 교회 안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원수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무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여야 하는지를 모르면 자연히 교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뭔가 잘되면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잘하여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인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에게도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일반은총 뿐만이 아니라 구속의 은총을 베푸신 것도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인데 이것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자기 행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얼마나 악한지를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함대로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면 날마다 욥이 당하는 그 고난의 상황 속에 살아도 우리는 할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욥보다 의롭습니까? 그런데도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사느니 죽느니 하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움이 닥쳐야 정신을 차리실 것입니까?
인도에 지진이 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들이 우리보다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감사치 아니하는 것이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무시하는 하나님의 원수임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버려두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입니다. 지금 몸이 아프시고 경제적으로 어려우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형제를 보면서 무슨 신앙생활을 잘못하여 저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자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는 그 어려움을 통하여 더욱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평안히 잘 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모르고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사는 줄 착각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2절을 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아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고 사는 것이 복 있는 자의 삶입니다. 우리 일상의 필요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아시고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의 교만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사는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리하여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며 살게 하시는 이 놀라운 주님의 긍휼을 생각하신다면 무엇이 그렇게 불안합니까? 무엇이 그렇게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까?
이러한 원망과 불평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치 않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게 하는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 때에 누구를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0:28-29절입니다. “봉독” 얼마나 무서운지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원망과 불평이 나올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를 스스로 자청하는 것임을 아시고 포도주 틀을 밟듯이 하나님의 원수 갚는 날이 곧 다가옴을 긴장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64:1-7 주의 강림(降臨) 2001. 3. 14.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인류역사상 계속되어 온 질문입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명확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나 명확하게 대답이 있습니다. 성경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 이것이 인간의 정의입니다. 인간이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인간을 바르게 알 수가 있는데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니 날마다 인간 안에서 무엇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고 정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서 영생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고 나서야 인간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그의 피조물임을 아는 것이 인간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으며, 죄의 권세가 인간을 쥐고 있기에 어느 누구도 그 죄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오직 영생이신 예수님께서 주셔야만 된다는 것을 믿는 자가 영생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미 죄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며 아무것도 아닌 자로 자처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가 있기에 누가 자기를 도와주어서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나 자기의 손에서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의 가능성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살고자 하는 것들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다보니 늘 자기를 스스로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이려 하여도 높아지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작은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작은 손해가 닥치게 되면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되로 받으면 말로 갚는 것입니다. 말 정도가 아니라 섬으로 갚아버리는 것이 우리의 악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는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 아시고 어떤 상해나 손해를 입었을 때 사람의 지나친 복수심을 막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정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죄인임을 알면 복수를 하지 않을 텐데 감히 네가 나를 그렇게 대접해, 두고 보자, 하는 심정이 복수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끼리 사는 세상에서는 모든 인간관계란 누가 누구를 이기느냐의 관계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섬긴다든지 진다든지 하는 것을 실패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친한 친구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쟁이 교회에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있을 뿐만 아니라 은근히, 아니 노골적으로 경쟁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러면 교회가 아니기를 원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러한 세상에 누가 오셔야 인간의 실상을 드러낼 수가 있겠습니까?
사무엘상에서 사울의 추격을 받는 다윗이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데 살려줍니다. 그러면서 직접 원수 갚지를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죽은 개와 같고 벼룩과 같다고 여기고 있기에 복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개를 발로 찬다고 짖습니까? 벼룩 한 마리 잡아 죽인다고 뭐라고 합니까? 자신이 죽은 개보다, 벼룩보다 낫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신이 원수를 갚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잘못하여 그러한 위협을 당하는 것이 아님에도 자신을 죽은 개와 같이, 벼룩같이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말을 다윗이 하였나요? 의심이 되십니까?
사무엘상 24:14절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다윗이 자기를 말하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올까요? 주의 신이 강림한 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백부장의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도 주의 신이 임한 자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봅니다.
64:1-4절입니다. 주는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인생들이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이 하나님인 양 살아가는 세상에 참되신 하나님께서 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야 인간의 입들을 막아버리시고 인간의 높아진 모든 것들을 치시는 것입니다. 치실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강림하시는 것으로 이미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강림하시면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강림이 이미 한번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산들이 진동하고,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하시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강림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강림으로 인하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주의 강림에 온 열방이 두려워 떨게 하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주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는 대적이 되고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그러한 강림인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주님의 강림이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진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림을 원하는 것이 이사야의 심정입니다. 인생이 높아지고 교만하여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당연히 높아져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마저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강림하옵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두려우신 분이 누구신지를 나타내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강림하시지 않으시니 이들이 건방지고 교만하여졌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강림이 언제 있었습니까? 출애굽 때에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9:7-25절입니다. “봉독”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결케 하고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한 자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데 아무나 나아갔다가는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서 돌에 맞아 죽거나 살에 쐬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강림시에 빽빽한 연기로 가리워지고, 불 가운데 임하시니 옹기점의 연기처럼 연기가 자욱한 것입니다. 그리고 산들이 진동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을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의 강림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백성들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친히 들으면 죽을 것이니 모세 당신이 듣고서 대신 전하여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림하심은 여호와 만이 참 신이시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지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림하심,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시면 산들이 불에 타고 진동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하나님 지금 제가 어려움이 좀 있는데요? 취직을 해야겠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좀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집이 전셋집인데 집하나 주세요, 자식 공부 잘하게 해주십시오, 목사 같으면 교회에 사람 많이 보내 주십시오, 멋진 예배당 하나 짓게 해주십시오, 이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아직도 세상의 보이는 것들을 구하고 있다면 주님을 제대로 못 만난 것이라고 보아도 무관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강림 앞에서 무슨 생각이 나겠습니까? 아이고 큰일 났다, 죽었다, 이 생각이 앞서지 그래도 내가 예배를 잘 드리는데, 십일조를 빼먹지 않았는데, 그런 것들로 버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 큰일 났다, 나 이제 죽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자의 자세이고 모습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모르니 자꾸만 다른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어떻게 이러한 주님의 강림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주님의 임재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1-5절입니다. “봉독”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보통 때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문지방이 흔들리고 연기가 가득한 것입니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얼굴과 발을 가리우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에 임하신 그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사야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 고백이 하나님의 두려움을 제대로 아는 자의 모습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가 이러해야 하고 그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무엇을 알게 하십니까?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심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걱정과 염려입니다. 그리고 조바심입니다. 도대체가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의 택한 자들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지키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신으로서 주를 부른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강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가 왜 기록되어 있으며, 왜 이사야서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서 이러한 하나님이심을 말씀을 통하여 알게 하시면 우리가 그 말씀을 믿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이고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한 하나님, 예수님을 아무리 그 이름을 부른다고 한들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를 아는 이사야 선지자가 주의 강림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의 강림하실 때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지금 우리의 형편이 주를 두려워하는 자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과연 주님의 두려움을 알고 있습니까? 주님의 강림을 믿고 있습니까? 주님이 강림하시면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64:5절입니다. 주님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십니다. 주님을 기억하는 자, 거룩하신 하나님, 강림하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날마다 주를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언제 강림하시더라도 이들을 선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현실을 돌아볼 때 아무도 주를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는 자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5절 하반절에 우리가 범죄함으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으리이까? 지금 현실을 보니 범죄하여, 이러한 범죄란 종교행위를 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이 제사도 드리고 안식일도 지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현실에서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그러니 6절에서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고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衰敗)함이 잎사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는 현실이 이스라엘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그래도 1주일에 세 번을 교회당에 오는데, 그래도 성경공부를 하는데, 선교를 하는데, 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말씀 앞에서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7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고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 부정한 자요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 같고 쇠약하고 부패함이 나무 잎사귀 같은 자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자임을 아는 자는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의지할 것입니다. 주님만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시에 강림하신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하신 주님의 강림하심을 믿으십니까? 이러한 주님의 강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내산에 오신 것처럼, 이사야 시대의 성전에 오신 것처럼 하시지 않으심은 아직도 은혜의 때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께서 온 천하가 다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강림하실 때가 반드시 곧 오게 될 것입니다.
이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나 분명하여지는 것 아닙니까? 그 심판의 불에 태워질 것들, 그 주님의 강림 앞에서 흔들려 무너질 것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8-29절입니다. “봉독” 이렇게 두려우신 주님이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다면 더욱 힘써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이사야 64:8-12 진흙과 토기장이 2001. 3. 21.
제주도 여행을 하면 ‘목석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무와 돌로 여러 가지를 형상화하여 만들어 놓은 곳인데 그곳을 구경하고 나오면 출구에 인상적인 성경구절이 커다란 나무에 새겨져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창세기 3:19절의 말씀입니다. 이 목석원을 보러 온 사람은 아마 그 성경구절을 다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말씀을 우리가 평소에 마음에 두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두가 다 압니다. 살아 있을 때 큰 소리 치지만 사실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왜 그리 아둥바둥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늘 자신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묵상하고 산다면 겸손하여 질 텐데,,, 그러나 범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이기에 진흙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죽고 나서 남는 것이 한줌의 흙입니다. 머리카락도 뼈도 손톱도 다 시간의 문제이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흙덩이들이 무엇이 그렇게 잘났는지 온 세상을 자기 것인 양 큰소리치면서 교만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것들로 먹고 바르고 입으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구더기가 덮힐 뿐이라고 욥기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란 자신이 한줌의 흙덩이임을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아는데서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8절에 보시면 하나님 아버지를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토기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흙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이 모두가 진흙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진흙임을 자신이 알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진흙을 빚듯이 새롭게 빚어 달라는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자세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흙임을 아는 자가 바른 자세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진흙이란 영어성경에서 ‘clay’라고 합니다. 찰흙이나 점토라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기 위하여 반죽하여 놓은 그러한 진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형태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무슨 모양이든지 빚으면 그대로 나오는 그런 흙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 달라고 하지 못합니다. 주인이 마음대로 만들기고 하고 부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상태를 아는 것이 바른 믿음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범죄하고서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있으니 자신이 진흙덩이임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 모양일까, 하면서 얼마나 많이 성형수술을 합니까? 그럴 형편이 안 되면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 생겼을까?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운 집안에 태어나서 고생을 할까? 나는 왜 이럴까? 하면서 원망과 한숨이 나오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진흙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흙덩어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2:9절입니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이 말씀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에게 입맞추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질그릇을 철장으로 부수듯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요한계시록 2:27절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도 흙덩이가 건방지고 교만하여져 있는 것을 깨뜨려버려서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주 금요일에 공부할 예레미야애가에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26-29절입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찌로다”라고 합니다. 사람이 멍에를 메고 있다면 잠잠히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메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리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는가 하고서 원망을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이 티끌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할 때 자신이 어디에 입을 대라는 것입니까? 티끌에 입을 대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티끌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티끌이라는 말은 ‘dust’인데 창세기에서 흙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땅의 티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는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 너는 티끌이니 티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티끌임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이 티끌임을 알지 못하면 끊임없이 교만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을 백성들과 함께 보고서 진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참으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고백을 한 사람이기에 자신을 티끌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보았던 64:6절에서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잎사귀가 쇠패하여지면 티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티끌이 자기 의지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바람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임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며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신을 찾아 나서는 것은 자신이 아직도 주와 신이 되어 있기에, 다른 신을 통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워 보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상태를 알기에 오직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오매, 비록 죄를 범하여 부수어 버려야 마땅한 흙덩이이지만 과히 분노하지 마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과연 이러한 자세로 나옵니까? 아니 일상생활을 이러한 자세로 살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주님 앞에서 마땅히 부수어져야할 하나의 진흙덩이라면 무엇이 부끄럽고 원망스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습니까?
진흙덩이가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화를 냅디까? 고함을 지릅디까? 그런데 같은 진흙덩이로 만들어진 우리 인간이라는 것들은 왜 이리 원망과 불평과 욕심과 교만이 끝이 없는 것입니까? 그러기에 이제는 그냥 진흙덩어리가 아니라 무슨 덩어리가 되었습니까? 죄악의 덩어리입니다. 시편 51편에서처럼 죄악 중에 잉태되었고 죄악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은 열린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쉴 새 없이 악취가 나오듯이 우리 속에서 악한 것들이 솟구쳐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도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몇 곳을 더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29:16절입니다.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지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 말씀은 인간들이 죄악을 행하면서 누가 우리를 보느냐, 우리를 알랴 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의 속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진흙덩이로 만들어진 것들이 바로 인간인데 이렇게 범죄하고 교만하여 졌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30:14절입니다.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 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이사야 45:9절.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예레미야 18:1-12절입니다. “봉독” 예레미야 선지자가 직접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현장학습을 합니다.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처럼 할 수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흙임을 알고 주님께 회개하는 자는 심판하시려다가도 뜻을 돌이키시지만, 그렇지 않으면 깨뜨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도 회개를 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로와 제사장 몇 사람을 데리고 가서는 질그릇을 깨뜨려 버리는 것으로 실물교육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9:10-11절입니다. “봉독”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회개치 않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망하였다는 것이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 속에서도 참으로 자신이 진흙임을 알고, 그것도 부정한 진흙임을 알고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한 자들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인 것입니다.
자신이 진흙임을 아는 자가 주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황폐화된 이 성과 성전을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심판을 당하여 마땅한 자들이지만 주님의 그 긍휼을 스스로 억제하려고 하십니까? 제발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하는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여전히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언제나 토기장이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20-21절에서는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질그릇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무슨 그릇이든지 자신을 깨끗이 하는 자가 귀히 쓰임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원망과 불평이 나와도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이 진흙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흙도 그냥 진흙이 아니라 진노 받아 마땅한 진흙덩이임을 알지 못하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진노 받아 마땅한 진흙덩어리였음을 안다면 그리고 깨어져서 버림받아 마땅한 것인 줄 안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든지 천하게 쓰시든지 간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간구가 무엇입니까? 나를 귀한 그릇으로 써달라고 합니다. 쓰시는 것은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자신이 그릇인줄 모르고 그릇의 주인인양 착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습관이고 죄의 영향력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자신이 참으로 진흙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뜻대로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빚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한 곳만 더 봅니다.
로마서 9:20-24절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서 부름을 받았다면 자긍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의 그 영광의 부요함과 긍휼의 풍성하심을 나타내시는 그릇으로 사용하시고자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처지나 환경에 메여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위치에 있더라고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멸망의 자리에 이르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는 것이 진흙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까지 낮아짐이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임을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5:1-7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2001. 3. 28.
‘죽은 나무에 봄은 없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금요일 성경공부 ‘신앙클리닉’할 때 나온 내용인데 지금 봄이 되니 온갖 나무들이 싹을 내고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봄이라는 조건이 주어진다고 하여도 죽은 나무에는 봄이 없는 것입니다. 날이 따뜻하고 봄비가 내려도 이미 죽은 나무는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 전에는 죽은 나무와 같았습니다. 죽어 있었기에 봄비가 오면 봄비가 오는 대로 썩어지고, 봄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썩어질 뿐이지 생명을 향한 반응은 나타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나무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생명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시면,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고 하십니다. 여기 1절의 말씀은 하나님을 구하지도, 찾지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아니하던 나라에 대하여 나 여기 있노라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이방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형식으로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였습니다. 비록 자기들의 뜻하는 대로 부르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아예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는 이방나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 여기 있노라,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한 죄악이 2-7절의 내용입니다. 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불선(不善)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향하여 종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종일 쉬지 않으시고 부르셨건만 이들은 끝내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무엇을 하느라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한 것입니까?
3절에서 보시면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며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지정된 장소와 지정된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산이나 벽돌로 된 제단에서 제사를 지낸 것은 바로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에서 정하신 방법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도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 싫어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세가 되지 않으면 그것이 가증한 것인데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형식이나마 바르게 드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뜻대로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이사야 66장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66:2-4절을 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마음이 가난하여 심령에 통회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함이 없이 드리는 소나 양이나 예물이란 살인이나 개의 목을 꺾음이나 돼지의 피를 드림과 다름없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65:4절에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면서도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65:5절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고 네 자리에 섰으라,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입니다. 자기들은 거룩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화가 나면 코로 호흡이 거칠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코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패역을 하나님께서 잠잠치 아니하시고 반드시 보응하시겠다는 말씀이 6-7절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직접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고 나라가 망하게 하시기도 하시지만 이방나라를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기존의 이스라엘을 질투 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판을 하시면서도 자기의 백성들을 질투 나게 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고자 하시는 그 크신 사랑을 보게 됩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하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자는 결혼을 하고서 처음에는 신랑 앞에서 꾸미고 하지만 조금 지나 아이 한둘 낳으면 어떻게 합니까? 남편에게 관심이 없지요. 자식에게만 관심이 있고 남편도 아내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니 아내는 기대할 바는 자기 분신인 자식밖에 없으니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좋은 남편이라고 한다면 어떤 식으로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게 합니까? 말로 해도 안 되고 설득해도 안 되면 일부러 바람을 피우는 것처럼 해서 아내를 자극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내의 질투심을 유발시켜 자기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구석기 시대의 방법이긴 합니다만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냥 심판하여 버리시면 되실 텐데 왜 이방인을 자기 백성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부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알기 위하여 로마서 10장부터 13장까지 다 보아야 합니다.
우선 로마서 10:20-21절을 봅니다.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이사야 65:1-2절을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은 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로마서 10:1-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으나 그들이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라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율법이 명하는바 제사를 잘 지내면 그것이 그들의 의가 되는 줄 알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율법과 제사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아직도 완악하여져서 복음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었고 지금도 복음을 믿는 유대인들이 있지만 그러나 아직도 복음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질투를 일으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9절입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로마서 11:11절과 14절도 역시 바울 자신의 골육을 시기나게 하여 아무쪼록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유대인 전부가 구원받는가 아니면 일부인가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부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온 것은 내가 찾고 구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잘려지는 그 틈새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단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7-22절을 봅니다. 높은 데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원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찍으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도 말 안 들으면 찍어버리겠다는 말씀보다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씀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유대인처럼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예수를 믿었고 구원을 얻었다고 자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너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아직 낮은 자이고 나는 높은 자라는 생각들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자꾸만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복음을 들었다, 너 복음 아니? 나는 이런 성경공부 했다, 너는 했니? 이런 식으로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다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은바가 되고 구하지 않던 자에게 나타내시며, 나 여기에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이방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니 유대인들은 시기, 질투를 하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그러한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시는 분의 긍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가 불순종아래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두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불순종의 갇힘에서 스스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두어 두신 것입니까?
로마서 11:32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긍휼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두가 주님의 긍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의 공로를 자랑치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 높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의 그 크신 긍휼을 높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로 다 못하니 뭐라고 합니까? 깊도다! 이러한 깊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어느새 교만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정죄하거나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에 관심을 가지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질투 나게 하시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시기 나고, 질투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말씀으로 기뻐하는 자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그 사람이 초신자이든, 약한 자이든, 가난하든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부르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유대인들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보면 어느새 우리가 마음이 높아져 있고, 굳어져 있고, 내가 이 정도면 그래도 제법 아는데, 하는 교만과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발견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 누구에게 찾아오시고 자신을 알리시는지 잘 보시고 그런 자를 통하여 우리가 도전을 받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질투가 나서 더욱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좋은 집을 샀다더라, 옷을 샀다더라, 이런 것에 시기와 질투를 가지지 마시고, 부러워도 마시고 오직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일에 대하여 부러워하시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도 우리 안에서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에 대하여 시기하시겠습니까?
야고보서 4:4-5절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지금도 주님께서는 자기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짐이 되셨기에 우리가 주님을 부르게 되었다면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요즈음 누가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시는지를 보면서 도전을 받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5:8-12 심판과 남은 자 2001. 4. 3.
8절을 보시면, 포도나무가 썩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을 때 베어 내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베어 나가다 보니 포도송이에 즙이 있는 포도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는 찍어 버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심판을 행하신다고 하십니까?
2-7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종일토록 부르셨건만 그들이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동산 위에서 제사를 지내고 벽돌 위에서 분향한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거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와 다르게 우리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인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나라이지만 그들의 행태는-종교적인 외형들은 달랐다고 하더라도-결국 자기 자신들을 신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만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는 다 망해도 우리나라는 영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면서 자기들은 거룩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가운데서 남기시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가 어떤 모습이고 또 남겨진 자가 어떤 자들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복을 받았다는 내용이 많습니까? 불순종하여 벌 받고 망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까? 거의 다 후자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였는지가 성경 전체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는 심판의 하나님보다는 그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하는 그러한 하나님으로만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안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란 단지 위협용으로만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잘 들으라고 겁주는 것이지 실제로 지옥이 있어서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결국은 인간중심의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셨고 또 앞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미 노아 홍수의 심판이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고 베드로후서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잊어버리려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빈틈없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심판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1-12절입니다. 우선 목록을 만들어 봅니다. 1)여호와를 버림, 2)성산을 잊음, 3)갓과 므니에게 제사지냄, 4)불러도 대답지 아니함, 5)말하여도 듣지 아니함, 6)하나님의 눈에 악을 행함, 7)하나님께서 즐겨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함. 이 중에서 몇 가지만 다시 보기로 합니다.
1)여호와를 버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린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자기들은 거룩한 나라라고 하면서 여호와를 섬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례도 행하고 안식일도 지키고 율법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호와를 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몇 가지를 보고자 합니다.
예레미야 2:13절을 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여호와를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과연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처럼 아무리 채우고 채우더라도 참된 만족이나 감사나 기쁨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늘 부족하고 원망스럽고 한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여호와를 버린 것입니다.
사무엘상 15:23 하반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였습니다. 남녀노소, 가축 할 것 없이 진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말렉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공격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어린이도 있고 상대적이나마 착한 사람도 있을 텐데, 왜 다 진멸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일에 방해한 자들이기 때문에 심판하려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짐승까지 다 진멸하라고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차등을 두어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가축 할 것 없이 모두가 진멸입니다. 이러한 진멸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계시하여야 할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변명을 하였지만 사실은 자신도 탐이 났겠지요. 아말렉의 왕을 살려 왔고 그리고 나쁜 짐승만 죽이고 살찌고 좋은 짐승은 다 끌고 온 것입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책망합니다.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사울이 하나님께 제사지내려고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뭐라고 합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 4)불러도 대답지 아니함, 5)말하여도 듣지 아니함, 6)하나님의 눈에 악을 행함, 7)하나님께서 즐겨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함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사울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은 오늘 식으로 말하자면 땅의 것을 취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잘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요,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지위와 권세와 돈을 가지고 하나님께 멋지게 제사를 드릴게요,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술의 죄와 같은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이러하다면 이미 하나님께서 버린 것입니다. 세상이야 이미 심판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할 교회가 세상의 금과 은을 붙든다면 이것을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성산을 잊음: 성산이란 예루살렘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이 성산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란 언제나 피흘림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피흘림의 공로로 살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이방나라의 제단을 수입하다가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은 여호와를 섬겨도 나라꼴이 이 모양인데 다른 나라는 강하고 부하니 그 나라의 신을 섬기면 우리도 크고 부자 되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산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희생을 잊어버리고 사는 죄의 모습입니다.
3)갓과 므니에게 제사를 지냄: 갓은 운수신이고 므니는 운명신입니다. 운수와 운명을 위하여 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수가 좋도록, 자신의 운명이 좋도록 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인데 그러나 갓과 므니라는 이름으로 빌지 않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운수나 운명을 점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역시 우상숭배입니다. 자신의 운수를 위하여, 자신의 행운을 위하여 섬기는 신은 그 이름이 하나님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우상인 것입니다.
서울에서 교회 다니는 집사들이 점치러 많이 간다고 합니다. 장난삼아 가본다고 하여도 자신이 생각한 운수의 때가 들어맞으면 기분이 좋은 것이고 만약에 다르면 하나님께 기도할 제목이 생겨서 좋아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자녀의 결혼문제 같은 경우에 궁합을 보러 갔다가 찰떡궁합이라면 좋은 것이고 좋지 않다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나 이러한 교회나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밖에 없습니까? 심판을 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구역공부시간에 에스겔서 5:6절에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내 규례를 거스려 이방인 보다 더 악을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 둘러 있는 열방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치 아니 하였음이니라” 이방인보다 더 악을 행하는 것이 유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 우리가 걸리지 아니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꼭 나무나 돌이나 형상에 절해야 우상숭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탐심이 있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 이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러한 심판의 과정 속에도 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를 갈아 엎어버리는 중에 살아있는 나무가 있어서 남기듯이 심판 중에 남은 자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남은 자는 어떤 모습으로 있는 자들입니까?
이사야 65:9-10절입니다.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심판 속에서 하나님께서 씨를 남겨두신다는 것입니다. 그 남겨진 씨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겨진 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남겨집니까?
이사야 1: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라” 여호와께서 조금이라도 남겨 두시지 않으셨다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타 없어졌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심판을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나를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습니까? 아닙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재물도 잘 바치고 절기도 잘 지키고 분향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들의 배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판은 사실 모두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판 가운데 하나님께서 남기시는 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남기시는 자들을 이사야 6:13절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의 공통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면 나는 죽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은 그렇지 않고 사랑으로 오신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을 들고 오십니까? 십자가를 들고 오시는 것입니다. 너 죽으라, 나 죽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광을 본 사도 요한이 죽은 것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 뵙고서 우리를 위하여 누가 갈꼬 할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서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가서 귀를 막고 눈을 감겨 버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아올 수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입니까? 심판하여 망할 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심판가운데서 남은 자가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은 남은 자의 실력이나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기셔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차원에서의 남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남은 자는 결코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남기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같았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기심을 통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겨진 주의 백성들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 삼아 남은 자들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남아진 자들의 모임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이렇게 남겨진 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로마서 11:4-6절입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지난주에 보았고 오늘은 은혜로 남겨진 자만 보고자 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은혜로 남기신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가 심판 가운데 남겨진 자들입니다.
이사야 65:13-16 아멘의 하나님 2001. 4. 11.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부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물을 치고서 거두어들일 때 그물 안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옵니다. 그러면 어부가 원하던 고기는 가려 담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끝에도 이렇게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어 풀무불에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분리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은 분리보다는 모두가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좋다는 것은 온 인류의 복지입니다. 인류가 재앙을 받는다 그러면, 자신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류가 서로 전쟁을 막고, 공해문제를 해결하고, 자연을 잘 보호하여 서로 행복하게 살면서 인류여, 영원하라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바램입니다. 그래서 노벨 평화상도 만들고 올림픽도 만들고 유엔도 만들고 하지만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아무리 그렇게 소원하여 세계적인 기구를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결국 이 세상은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말씀 16절에 ‘진리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진리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바로 ‘아멘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진리’로 바꾸어 쓸 수 있기에 진리의 하나님으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아멘의 하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멘의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신실하게 이루어내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끝내실 것인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13-14절에서 어떤 분리가 일어납니까? ‘나의 종’과 ‘너희’로 분리가 됩니다. 나의 종과 너희를 분리시키시고 그들이 당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나의 종’이라고 불리우는 자들과 ‘너희’라고 불리우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먹음과 주림, 마심과 갈함, 기뻐함과 수치, 노래함과 통곡입니다. 이렇게 극명한 분리가 일어나는데 그러면 ‘나의 종’은 누구이며 ‘너희’라고 불리우는 자는 누구입니까?
가까이에서 보면 ‘나의 종’이란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입니다. 65:8-9절에서 다 멸하지 않으시고 남기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란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성산을 잊어버리고, 갓과 므니에게 상을 차리고 술을 붓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운수와 운명을 위하여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입니다. 조금 더 앞에서 보면 65:2-4절에서 여호와께서 종일 불러도 돌아오지 아니한 패역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65:15절에서 ‘너희’라는 자들이 끼친 이름이란 택한 자들에 의하여 저주거리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들이 끼친 이름이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한 일들이지요. 우상에게 절하면서 기득권을 가졌다고 권세를 휘두르며 먹고 마시고 기뻐하고 노래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오히려 저주거리의 이름이 되고 그때에 핍박당하던 자들은 다른 이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새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결국 17절 이하에 나타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리가 일어날 뿐 아니라 역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는 울면서 갑니다. 이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에 잡혀가지 않고 미리 외국으로 망명을 하거나 자신들의 권세와 힘으로 용하게 피한 자가 볼 때는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이 실패하고 망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뭐라고 하신 것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자들이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과 반항하는 자들이 나누어짐을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29:21-23절입니다. “너희 바벨론에 있는 유다 모든 포로가 그들로 저주거리를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로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함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시드기야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뜻은 상식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 우리나라가 바벨론에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야 하는가 하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핍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지 아니한 내용을 거짓으로 말한 자들입니다. 이들과 이들의 말을 들은 자들이 결국 저주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순종하는 자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을 분리시키고 역전시켜버리는 것입니다. 현재 성도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편 73:1-28절입니다. “봉독” 악인의 형통으로 인하여 자신이 실족할 뻔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졸지에 망한다는 사실을 성소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성도가 고난을 당하나 후에는 주님께서 영광으로 영접하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지만 비록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나사로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였으나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부자는 세상에서 영광을 누렸으나 음부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으로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느니라”(눅16:25) 나사로가 그저 가난하고 거지여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입니다. 나사로와 부자의 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
여러분, 무엇 때문에 울고불고 합니까? 이 세상의 지나갈 형적으로 인하여 울고불고 합니까? 세상에서 지나가는 그림자 같고 안개 같은 것들로 인하여 울었다가 웃었다가 한다면 이들은 주님 오시는 그날에, 심판의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그 날에 참으로 울고 통곡하며 주리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애통하여야 합니까? 주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금식하고 애통하고 울고불고 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세상의 없어질 형적들 때문에 울고불고 애통해 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심판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역전이 일어나는 한곳만 더 보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 18:15-20절입니다.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의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세상을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아니하던 이렇게 분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의 날에 웃고 즐거워하고 노래하고 먹고 마실 자와 그날에 울고 통곡하고 주리고 갈하게 될 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누어지는 것이 확실함은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아멘’이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누구에게 복을 구하는가 하면 아멘의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멘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다는 것입니다. 아멘의 하나님을 부르고 그에게서 복을 구하는 것이 주의 종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갓이나 므니에게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아멘의 하나님께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멘의 하나님과 아멘의 하나님께 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부흥사가 말하면 무엇이나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는 것이기에 그것을 우리가 아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부터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언약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예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 성취가 됩니다. 그러면 아멘,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멘이 요한계시록 3장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3:14절에서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심판받을 자는 심판받는 것이고, 구원받을 자는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분의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아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말씀하신 바를 빈틈없이 확실하게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이 아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늘의 말씀을 요약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 전에 반드시 무엇이 일어납니까? 분리와 역전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주리고 갈하고 우는 자들은 그날에 배부르고 갈하지 않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지나가는 것들로 인하여 주리고 갈하고 우는 자들은 그날에 주리고 갈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 하신 말씀입니까? 아멘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시기에 반드시 그대로 진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멘.
이사야 65:17-25 새 하늘과 새 땅 2001. 4. 18.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교회로 모인다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떠나 천국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가시겠습니까, 하면 거절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주류적인 흐름이 예수 믿고서 이 세상에서 복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에는 여러 가지 핍박이 있었으니 내세지향적이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세상의 권세를 업고 들어 온 것입니다.
물론 극소수는 그러한 힘을 이용하지 않고 정말 낮은 모습으로 온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을 본국의 엄청난 지원을 받아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신문물을 들여와서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면서 들어온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개화적인 사람들이 기독교를 수용하면 우리나라가 빨리 근대화되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수용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교회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복인 양 소개가 되기 시작하면서 민중들에 인기를 얻게 되고, 폭발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땅에서 부자 되고, 천국도 가고 하는 참으로 민중들이 좋아하는 변질된 복음이 전하여 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 믿고서 전셋집에 살고 있다는 것은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지금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느 집사님께 들었습니다.
그래도 요즈음은 많이 나아져서 기복적인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모습으로 나가는가 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사업을 하고 구제를 하고 공명선거운동을 하고 윤리실천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여야 하고 이런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란 이 세상이 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이렇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이 세우신 영원한 나라와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에서 계시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면서 우리가 더욱 그 나라를 사모하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기 전에 무엇이 먼저 일어납니까? 분리가 일어납니다. 우상숭배자들, 즉 자신을 위하여 신을 섬기겠다는 자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섬기지 아니합니까?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의로워서 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남아진 것이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기에 남아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남겨진 자들은 심판가운데서 나오기 때문에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고 살다가 그것이 심판 당함을 통하여 오직 주님의 말씀과 그 약속만을 의지하고 나오게 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은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현재 눈에 보이는 하늘아래 땅위에서 자신이 더 잘 살아남으려고 하는 자들은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밤에 이렇게 나오신 여러분은 무엇을 사모하고서 나왔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고서 나오신 것입니까? 그러한 자들에게는 오늘 말씀이 참으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곳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누가 창조합니까?
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사람이 하늘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마치 태초의 천지를 창조하실 때처럼 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66:1-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 수가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아니다, 오히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도 하나님께서 홀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입니까?
1) 17절 하반절에서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자신의 과거의 수치와 부끄러움과 고난과 핍박들이 기억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이력이나 공력도 생각나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새 창조이기에 그러합니다. 과거에 세상에서 있었던 차별이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높고 낮으며, 누가 부자이고 가난하며, 누가 억압하고 억압을 받았고 하는 것들이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입니다.
25절을 봅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부의 강한 나라들에 의하여 착취와 압제를 받아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서도 지도자라는 자들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학대를 받아 왔는지 선지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고서 잘못된 재판을 합니다. 그러니 약하고 힘없는 자들이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외적인 핍박 속에서 당하는 자들은 마치 어린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것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11:6-9절에서 이미 한번 나온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 아닙니까? 동물세계에서 먹이사슬이 있듯이 사람관계도 이러한 먹고 먹히는 관계입니다. 동지란 단지 자신의 도움이 될 때 동지가 되는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민주화가 어떠니 하다가도 자신이 국회의원만 되어도 이미 기득권자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보스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언제나 당하는 자는 약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게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는 것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사자처럼 해치고 상하게 하는 자들은 결코 원하지 않는 나라이겠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하여 중심에 회개하는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2) 기쁨의 나라입니다. 18-20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창조하시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창조하시고 자기 백성을 기쁨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자기 백성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다시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날수가 차지 못하여 죽는 유아나 노인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가 저주받은 것이라고 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 부분을 가지고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에 죽음이 있는가, 그러니 천년왕국의 상태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참으로 만족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미 이사야 25:8절에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3) 말씀이 성취된 나라입니다. 21-23절입니다. 자신이 집을 짓고서 그곳에 살게 되고, 자신이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을 따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가 많이 범죄함으로 자신이 집을 짓고도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만들고도 먹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집을 짓고 농사를 지었어도 자신들이 먹지 못한 것입니다.
신명기 28:15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여호와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하나라도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 결과, 30절을 봅니다.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와서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데,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거하게 되고 자기의 포도원을 가꾸고 그것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여 이러한 복을 받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이들은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키지 못하였으니 저주를 받아 마땅한 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100% 지켜서 이러한 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가 창조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창조하시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13절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아래 있어야 구속받는 백성이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오직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도의 피로 인하여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3-14절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였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마지막으로 이 나라에서는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24절입니다. 온전한 교제의 회복입니다. 기도하기도 전에 아시는 것입니다. 아주 가까이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기쁨이 이러한 기쁨인 것입니다. 이 교제가 완전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맛을 보지만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온전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4절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그 날이 이르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1-13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노라”
이사야 66:1-4 말씀에 떠는 자 2001. 4. 25.
참된 인간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가 있습니까? 모두가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여 살고 있기에 늘 두렵고 떠는 것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잘 보존할 수 있는가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질병, 실연, 파산, 실직, 사별, 죽음 이러한 것들이 모두 두렵고 떨리는 일들인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의 말 한 마디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입니다. 청와대에 근무하는 사람이 누구의 말이 두렵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대통령의 말입니까? 물어보는 게 잘못이지요! 교회에서 목사가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데 두려워하고 있다면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떠는 것이 아닙니다. 쓸데없이 사람의 말에 두려워 떨기 때문에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혹시 주의 종(?)을 건드렸다가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인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심판하고 어떤 사람을 권고(眷顧)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께서 권고하는 사람이 되자, 라는 방법론 차원에서 말씀을 보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라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구원에 연연하여 이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받는데, 하는 두려움이라면 역시나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보지 않는 인간이 있습니까? 성경은 없습니다, 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고민을 가장 많이 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 랍비로서 아주 최근에까지 살아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인권운동도 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유대의 전통적인 가르침들, 율법은 물론이고 율법의 해석서들까지 연구하여 나온 책들이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신약은 인정하지 않지만 구약으로도 “인간의 불가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같은 경우에 자신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지만 그러나 다른 랍비(리젠스키의 엘리멜렉)는 자신이 나이 60세가 되기까지 ‘미츠바’를 제대로 행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미츠바란 계명이란 말인데 율법서인 토라 안에서 계명들의 수를 헤아린 것입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 무엇을 하라는 명령이 248개,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 365개, 합하여 613가지의 미츠바를 말하고 있습니다. 넓게 보면 유대인들의 모든 행위가 미츠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츠바를 60평생이 되도록 단 하나도 온전히 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미츠바를 행하는 것이 선인데 그러나 그러한 선을 행하는 순간에도 다른 생각들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착한 행실도, 기분 좋게 만들어 주기는커녕 반대로 불쾌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행실을 하는 것이 자신을 키우고 우쭐거리고자 또는 이웃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계명을 지키는 모습을 이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오직 율법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순간에도 낯선 생각들이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이 완전히 미츠바를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메시아를 기다리던 그들이 메시아를 죽였다는 사실은 인정치 아니합니다.
이러한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 중의 하나가 종교입니다. 인간의 정성과 힘으로 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하는 마음이 가난하고 중심에 통회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자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먼저 신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66:1-2절입니다. 무슨 집을 지을꼬, 하는 것입니다. 신전을 지어서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제물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신전을 만들고 그곳에서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자신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자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나를 위하여 집을 지어 달라고 하였느냐? 오히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시고 그리고 제물을 바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전과 제물의 뜻을 모르면 그러한 성전과 제물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란 성전을 짓지 않고 다른 신전을 짓고, 제물을 드리지 않고 다른 신에게 제물을 드린다고 우상숭배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우상숭배에 들어갑니다만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고 제물을 드린다고 하면서 자기부정이 되지 않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한 성전을 지어 바쳤는데, 내가 이만한 제물을 바쳤는데, 하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란 교만이고 탐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건물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열왕기상 8:27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직접 건물성전을 지은 솔로몬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사야 66:1-2절의 말씀과 같지 않습니까?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 발 받침대 밖에 되지 않는데 무엇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지으시고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 드릴 수 있다는 사람은 교만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신다니 감사하옵나이다, 그러한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라고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봅니다.
사도행전 7:46-53절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설교를 하고서 돌 맞아 죽습니다. 그때 곁에 있던 사울이 이런 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감히 성전을 공격한다는 말인가? 예수라는 자도 성전을 헐라고 하다가 고발당하여 죽었는데 이런 놈을 살려두면 안된다 하면서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자존심이란 율법과 성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건드렸으니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거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자신들의 성전을 고수하기 위하여 메시아를 죽이고 메시아를 증거하는 자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옳다고 하던 사울이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7:24-25절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친히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이것이 주님을 만난 자의 성전에 대한 시각입니다. 사람이 어찌 감히 하나님의 전을 지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이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크고 두려우신 주님이 어떻게 사람이 만든 건물에 계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알게 된 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신이 가난한 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중심으로 통회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번듯한 성전하나 지어 바쳐서 나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가, 빈손으로 나아가기가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공짜로 주셨는데, 지옥 갈 죄인을 천국으로 옮겨주셨는데-교회란 곳에서 이러한 말을 다 합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냥 빈손으로 천국 가는 것은 미안하니 선물을 챙겨서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존심이라는 죄입니다.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로서 출애굽하고 나서 율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율법이란 너희가 왜 은혜로만 구원받아야 하는가를 알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인데,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들의 의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율법을 지키기는 하였는데 이것이 자신들의 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자기의 의로 충만한 것입니다. 내가 613가지의 명령을 다 지킨다고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자부심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시는 분이 계셨으니 누가 그를 좋아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되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기만 하는 그러한 자임을 알고 중심으로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하나님께서 권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자가 됩니까? 우리가 마음을 낮춘다고 낮추어 집니까? 겉으로는 베옷을 입고, 머리를 풀고, 금식을 할 수 있지만 참으로 중심으로 통회를 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하고 떱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것보다 나의 생존과 나의 장래를 염려하며 두려워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두려움들을 없애 보려고 열심히 헌금하여 성전을 지어 바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있다면 이것은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고, 돌보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만드시고, 만나는 사건들마다 얼마나 내가 믿음이 없었는가를 확인시키시며 중심으로 통회하게 만드시고 참으로 두려워 할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말씀임을 믿게 하십니다. 그 말씀 앞에 떨게 하시는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참되신 성전이 되시고 이 성전이 우리를 덮쳐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6:1-4 참된 제물 2001. 5. 2.
지난주에 이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자는 마음이 가난하고 중심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지어 바치고 제물을 드리면서 오히려 그것으로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오늘은 제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명문화시켜 제물을 드리게 하신 것은 출애굽 이후입니다. 출애굽 이후에 율법을 통하여 제물을 바칠 것을 말씀하셨는데 감사의 제물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의 제사는 속죄의 제사입니다. 이러한 속죄의 원형은 유월절 밤입니다.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피는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그 희생의 피를 흘린 고기를 구워서 먹었습니다. 이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인하여 장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장자는 하나님께 구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가 살아난 것은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인하여 살아난 것임을 유월절 제사를 통하여 계속하여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제사와 제물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은 단지 짐승의 피를 흘려서 자기들이 살아남는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러한 짐승의 피를 흘리는 제사는 수많은 나라에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사를 통하여 신에게 잘 보여서 적절한 때에 비가 오도록 기원하는가 하면, 질병을 물리치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고, 사후의 세상에서도 잘 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와 제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제사와 제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함께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것을 제사와 제물을 통하여 원상회복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이 제사의 중심입니다.
레위기 4장을 봅니다. 레위기 4:1-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만일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스라엘 백성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범하면 제사를 드려서 속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속함을 받아야 할 자가 3절에서는 제사장, 13절에서는 온 회중, 22절에서는 족장, 27절에서는 평민 중 하나가 나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속죄의 규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누구라도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함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제사와 제물이란 이방인들의 제사와 제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새 차를 샀다고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드리는 일을 도청 앞에 가보면 종종 보게 됩니다. 왜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까? 자신들의 안전과 부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정신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거창하게 드린다고 하여도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떨지 않는 자세란, 그것이 성전을 지어 바치든지, 소와 양과 예물과 분향이 오히려 살인과, 개의 목을 꺾음과, 돼지의 피를 흘림과,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와 제물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스스로 기뻐하여 택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제사와 제물은 너희나 기쁘게 하는 것이지 그것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사와 제물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몇 곳만 말씀을 찾아서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
우선 이사야 1:10-17절에서 봅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이 단지 제사를 지내고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를 다한 것인 양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삶의 자세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손에 피가 가득하고, 악행을 일삼고,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못 본체하면서 제사 지내고 절기 지킨다고, 그것도 하나도 빠짐없이 구색을 다 갖추어, 온갖 제물과 절기를 다 지킨다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기도회가 이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정성을 바치니 하나님도 우리의 정성에 가만히 계시지 못하실거야, 라는 정신이 들어있다면 이미 이방인의 제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1-15절입니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이러한 말씀이 얼마나 선지서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입니까?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시51:16-17절.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식으로 하자면 무수한 제물과 절기지킴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중심으로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날짜와 시간을 지키거나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의 의가 없음을 알고 심령으로 통회하며 주님의 의를 구하는 자의 그 상한 심령을 주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사를 사람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인의 특징이란 자존심인데 죽어도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고자 하는 것이 죄인의 속성입니다. 이것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같습니다.
사람이 언제 기분이 가장 나쁜지, 갑자기 안색이 바뀌는지를 보면 자신의 자존심이 상하면 기분 나빠하고 표정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던데요, 하는 것은 표정관리로 감추고 있어서 잘 드러나지는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면서 애통하는 심령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성령이 오셔야만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의 말씀처럼 새 영을 보내셔서 새 마음을 주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돌 같은 마음이 살과 같이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영, 즉 하나님의 신을 주시는데 무턱대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는 자신의 죄와 비참을 십자가를 통하여 알게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떠한 공로도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어 바치는 것도 아니요, 날짜를 잘 지키는 것도 아니요, 제사를 잘 지내고 제물을 잘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장래일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18절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온전하고 완전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6:5-9 해산케 하는 자 2001. 5. 9.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권고하신다는 말씀이 3절에도 있습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여호와의 말씀에 떠는 자를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자들을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것입니까? 5절 말씀에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에 떠는 자를 그의 형제들이 미워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아내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영광을 나타내어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고 놀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은 세상이 볼 때에 형편없어 보이는 자들입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나라가 힘이 있어야 적군을 물리치고 지킬 수가 있는데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 앞에 아닙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는 말에 누가 만족하겠습니까? 교인입니까? 목사입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하며 살 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대접을 하였습니까? 5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의 형제들이 미워하고, 쫓아내며, 여호와의 영광을 한번 나타내어 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떨고 순종하는 자를 이처럼 세상이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백성들이 선지자를 이렇게 대접한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하고 말씀을 쫓아내며 여호와를 조롱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즐겁고 마음에 즐거울 것 같으면 그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떠는 자를 미워하고 쫓아내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죄악,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최고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하고 싫어 하였는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도 얼마나 사람들이 싫어하는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면서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됩니까? 왜 인간이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계시를 모르고서 성경을 이용하여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나, 성경을 이용하여 자기의 목회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인 것입니다. 성경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을 미워하고 쫓아내면서 그것이 도리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너희가 말하는 그러한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어 너희가 기뻐하는 것을 우리에게 한번 보여 보라고 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6절 이하입니다. 훤화하는 소리란 떠들썩한 소리입니다. 이러한 소리가 성읍에서 들리고 성전에서 들리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을 미워하고 쫓아내며 핍박한 자들을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보응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과 진노를 받는 자들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를 미워하고 쫓아낸 성읍이 어느 성읍입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입니다. 성전이 있는 성읍입니다. 시온산이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왜 우셨습니까?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성읍이기에 그들의 망함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어미닭이 새끼를 모으듯이 하나님의 품에 품으시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냈건만 그들이 거절하고 선지자들을 미워하고 쫓아내고 죽여 버린 성읍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성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읍과 성전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시온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온을 만들어 내시면서도 계속하여 예루살렘이라고 하시고 시온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대로 유지하시면서 그 내용물을 새롭게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해산케 하는 자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여자가 잉태하면 반드시 고통을 통하여 해산합니다. 그런데 해산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 순식간에 해산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범죄이후에 남자는 땀을 흘려야 먹고 살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주어져 있는데, 해산의 고통이 없이 만들어진 민족이라면 죄와 상관없이 나온 민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사람이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거룩하신 여호와만이 이루어 내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9절에서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내가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자신을 “해산케 하시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온이 태어나는 것은 해산의 고통을 하나님이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산케 하시고 하나님께서 해산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 보시면 젖을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만이 다 하셔야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해산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19:3절에 보시면 “저희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18만 5천명의 대군을 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나가 싸울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해산할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면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하여 달라고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들고 성전에 가서 펴놓고 기도합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밤에 적군 18만 5천명이 다 시체가 되었고 산헤립 왕만 겨우 도망가서 자기 아들에 의하여 죽임당합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구원의 능력이 없음을, 해산할 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적을 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사람이 인공적으로 임산케 하기도 하고 해산도 마음대로 합니다. 해산이 고통스러우니 무통분만술이 나오고, 조금만 고통이 주어지면 수술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이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임산케 하시고 해산케 하신다는 말씀이 시시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나님이 감당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받은 자들이 다른 복음에 끌려갈 때 자신이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다고 하였습니다만(갈4:19) 그것은 자신의 수고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죄인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해산케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알고 예수를 믿는 자가 나온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임산하시고 해산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49:14-23절을 봅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장식을 삼아 몸에 차며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대저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거민이 많으므로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고난 중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우리에게 좁으니 넓혀서 우리로 거처하게 하라 하리니 그 때에 네 심중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 무리를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와졌으며 사로잡혔으며 유리하였거늘 이 무리를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되었거늘 이 무리는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나 주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열방을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호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이 범죄로 인하여 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가 됩니다. 그러므로 황무하여진 성읍이 다시 회복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애씀과 노력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된 일에 놀라워하면서 21절에서 누가 이 무리를 낳았는고? 누가 양육하였는고? 어디서 생겼는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방 가운데서 주께로 돌아온 무리에 대한 표현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알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소망이 없는 자임을 알고서 주님께로 돌아온 자들이 있다면 이는 참으로 주님께서 임산케 하시고 해산한 자입니다.
그러나 단지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예수를 한번 믿어 보겠다는 사람은 자신들이 해산을 한다고 야단들입니다. ‘태신자 전도운동’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들이 태신자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열 달 동안 아이를 잉태하고 자라게 하여 낳을 때까지 잘 돌보아서 교회에 등록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임산부는 어느 사람을 지목하여 자기의 태신자 카드에 작성하고 자기가 하나 가지고 교회에 한부 내고 그리고 이것을 놓고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신자 전도법인데 서울에 어느 큰 교회에서 이 방법을 써서 많은 교인이 생겼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이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일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바울이 해산의 수고를 한다는 말도 어김없이 하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참으로 자신이 아니요,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태신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말로는 우리가 아니요, 하겠지만 그러나 누가 임산케 하고 누가 해산케 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임산케 하시고 해산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동원된 자들은 자신이 결코 이 일에 도움이 되어 드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러한 무리가 주님께로 돌아왔는가 하면서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 영혼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였는데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누가 해산의 고통을 감당한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자기의 형수를 위하여 28년간 기도하였더니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말을 합디다. 정말 그를 위하여 28년간 기도하였다면 그러한 기도를 하게 하신 분이 역시 주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28년을 기도하니 형수님이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감격하면서 실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만 고집부리고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형수가 아닌, 자신을 미워하고 또 자신이 미운 사람을 위하여서 28년을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여도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악한 자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죽어 마땅하고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알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주님께서 임산하시고 해산하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레헴’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자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 잉태하고 해산하는 고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해산의 고통을 아십니까? 어버이날이라고 부모님께 선물하셨습니까? 그러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하여 임산하시고 해산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십자가에 아들을 못 박은 고통으로 해산케 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6:10-14 양육 2001. 5. 16.
지난주에 해산케 하시는 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잉태케 하신 분이 해산케 하지 않으시겠느냐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잉태하시고 해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단어가 ‘자궁’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는 어느 신학자의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잉태와 하나님의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주의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잉태된 자들을 누가 양육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 출생, 즉 거듭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다, 라고 합니다. 적어도 교회 다닌다는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것까지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자들도 많습니다. 내가 믿어주어야지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믿는다는 말입니까? 죽은 나무에 봄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 있는 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살아나야지,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출생에 비교하여 거듭난다, 위로부터 나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출생이 자기 스스로 원하여 되어지는 자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대한민국의 창원에서, 어느 집안의 누구 아들로 태어나야겠다고 해서 태어난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태어나서 좀 자라고 보니 내가 어느 나라 어느 집안에 태어나게 되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도 자신이 되고 싶어서 되는 사람은 사실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거듭나게 되어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시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을 입은 자는 할말이 무엇입니까? 기적이다,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될 무슨 조건이나 이유가 있었는가 하고서 나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구원받았지요?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 공개상담에 누군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가 답을 하기도 전에 지워버려서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질문한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한두 번은 고민해보신 문제일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의 중심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과연 하나님께서 인간의 반응을 전적으로 무시할까, 하는 자기 긍정의 생각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론과 선택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이렇게 되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아무리 이렇게 열심히 예수 믿는다면서 교회를 나오고 봉사를 하여도 예정하시지 않으셨다면 지옥 갈 것이고, 반대로 내가 예정이 되었다면 아무리 농땡이를 치고 놀아도 구원하실 것 아닌가? 이런 반발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분에게는 나가서 놀아라,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가서 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놀려고 하니 무언가 뒤에서 당기는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 자체가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은 놀고 싶은데 하나님은 아니라 하시니, 싫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이 있다는 것이 적어도 감각이 살아났기에 그러한 고민이 있다고 봅니다. 자녀가 자기 부모가 자기를 낳아 주었을까 아닐까 하는 고민으로 평생을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한두 번 그런 고민이 있더라도 부모의 뜻이 무엇일까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가 바른 자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이것이 기적인줄 알고 주님의 뜻이 무언인지를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방황한다면 마치 자신이 태어난 나라와 집안을 원망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내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적어도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의 내용입니까? 결코 시시하거나 예수 믿는 기초적인 지식으로 여기고 한번 지나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신앙의 연륜이 오래될수록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만, 이러한 자는 거듭난 자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라야지요? 자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젖을 잘 빨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자신이 알아서 챙겨먹고 자라나요? 부모가 챙겨 먹여서 자라게 합니까? 너무 시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요? 그런데 이러한 시시한 상식적인 일들이 왜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잉태케 하신 분이 해산케 하셨다면, 양육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역시 해산케 하신 분이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하나님은 가만히 팔짱끼고 계시고 우리가 다 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면 누가 하랴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예비군 노래에는 그런 가사가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하여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다 보니 태신자 전도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년 동안 태신자로 관리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교회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무엇이 시작됩니까? 양육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신자반에 들어가게 하여서 양육을 받고 그 다음에는 교회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초급 중급 고급훈련을 받아가면서 양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양육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1차적으로 말씀하시면서, 그 상태를 젖을 빠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1-12절에서 젖을 빨아 먹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만족하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온 세상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그 영광의 풍성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도 가르침도 필요 없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또다시 예정하고 선택하신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되겠네요,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아직도 행위의 주체가 자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사단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권세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세 아래서 살게 되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나 물을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양육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내가 아니요, 하는 것을 언제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교사란 잘 가르치는 자보다 잘 가리키는 자가 좋은 교사인 것입니다. 잉태케 하시고 해산하시고 양육하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 교사의 역할입니다.
잉태케 하신 분이 해산케 하시고 이제는 양육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태어나지도 못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자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양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을 얻어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한번 말씀을 받고서 평생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면서 그 젖을 풍족하게 빨아먹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연한 풀이 무성하게 되듯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품에서 양육을 받고 자라는 자들은 여호와의 손이 돌보심의 손이 되지만 그렇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진노의 손이 되시는 것입니다(14절). 그러면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드린다고 하기 전에 우리가 주님의 품안에서 얻어먹어야 하는 자임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얻어먹어야 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날마다 어린아이처럼, 부모의 품속에서 쉼을 얻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양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어떤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은 어린아이는 순순하다, 착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부모에게서 받아야만 살아가는 자들로서의 어린아이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른은 힘이 듭니다. 어른의 사고방식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주는 것을 먹고 살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너의 힘으로 살아라, 이러한 원리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너는 이제 이만큼 자랐으니 다른 사람을 돌보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하라고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그렇게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그러나 어떤 식이 되는가 하면 자신도 돌아보기에 힘이 드는데 자꾸만 교역자들이 학생회나 청년회 임원들에게 처음 오는 자들과 새신자를 챙기라는 말을 많이 듣는 것입니다. 좀 챙겨라, 챙겨라. 제가 전에 어느 중고등부를 담당할 때 처음 임원들을 보았는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챙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이 양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고 있으니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였지요.
그러면 우리가 젖만 먹어야 하는가 하고 말씀하시지요? 젖만 먹는 것은 아니지만 젖을 뗐다고 밥을 먹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젖을 먹고 나서도 계속하여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자라듯이 성도란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10-14절을 봅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이는 저희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어린아이는 젖을 먹습니다. 그리고 자라서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주님의 의의 말씀들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자기 힘으로 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성경 몇 곳을 봅니다.
시편 8:2절.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전쟁을 하는데 어떻게 젖먹이와 어린아이로 하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 말씀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31편을 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여호와를 바라는데 어떤 자세입니까?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듯이 고요하고 평온한 자들입니다.
자녀가 가장 안전한 곳이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서도 어머니의 품이지 않습니까?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은 아이가 새로이 입양을 하고서 자꾸만 어머니의 배를 향하여 몸을 밀착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머니를 신뢰하게 되고서는 그렇게 하지 않더랍니다. 이제 그 아이는 어릴 때 버림받은 불안에서 해소가 되어 젖을 뗀 아이처럼 고요와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봅니다.
66:10-14절. “봉독” 이러한 어린아이의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양육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장성하여도 계속하여 주의 양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원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자라면 독립하는 것이지만 예수 믿는 자는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 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만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이사야 66:15-17 심판 2001. 5. 23.
오늘 오전에 기독교 서점에 들렀습니다. 원하는 책들은 장사가 안 된다고 아예 갔다 두지도 않았습디다. 여러 베스트셀러들의 목록을 보고서는 사야 될 만한 것은 한 권도 없었습니다. 다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욕심을 한 꺼풀 가려서 포장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어떤 책 제목이 보였는데 ‘천국 정말 있습니다’ ‘지옥 정말 있습니다’하는 제목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너무나 많이 듭니다. 얼마나 믿지 못하였으면 그냥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정말’이라는 말로 강조까지 하고 있겠습니까? 우리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다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도 반드시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말씀에 시큰둥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불이 번쩍 하듯이 그렇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몽롱한 상태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모두 육적인 일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이라고 하여 신비한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약속들이 영적인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성경에서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를 보고서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것들에 대하여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니 사는 게 피곤하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는 것이 힘이 들고 피곤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려고 하니 그런 것 아닙니까? 성도는 살려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죽으려고 사는 자들입니다. 날마다 나는 죽노라고 바울 사도가 왜 말했겠습니까? 자신이 자꾸만 살려고 하다보니 세상의 것이 보이고, 남과 비교가 되고, 나는 왜 이럴까 하는 것입니다.
게시판에 어떤 사람이 자신을 ‘망한 자’로 글을 올린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까? 자신이 정말 망한 자임을 알았다면 무엇이 걱정이 되고 두렵고 염려가 됩니까? 망하지 않으려니 불안하고 두렵고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망한 자로 이름하신 분이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망한 자라고 하였는지 모르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서 자신을 뭐라고 하였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이사야의 고백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나니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자인지를 알게 되고 이제 나는 죽었다,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이용하여 성공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이 망한 자임을 알게 되는데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무엇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의 것들이 마음에 떠오르겠습니까?
이사야만 그렇게 고백한 게 아니지요. 다니엘도 하나님을 만나자 죽은 자와 같이 되지 않습니까? 사도 요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자신이 죽은 자와 같이 된 것입니다. 한때는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던 요한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사야, 다니엘, 요한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은 부정한 자요 더러운 자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의 정결케 하심과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정결함을 받고 위로를 받는 것이 참된 복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믿음이란 것이 여전히 세상의 가치를 좇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까? 죽음, 심판, 천국, 지옥 그러한 것들을 생각할 틈도 없도록 온갖 세상의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들로 가득 늘려놓는 것입니다. 모든 광고가 그렇지 않습니까? 여성잡지를 한번 보시면 그 안에 있는 먹을 것, 입을 것, 집을 꾸미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얼마나 예쁘고 아름답게 선전이 되어 있는지 그런 것만 있으면 행복이 절로 오는 것처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러한 것들을 사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육체에 대하여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가꾸고 있는지 온갖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들이 자신들의 성공적인 수술사례를 사진을 비교하면서 실어 놓은 것입니다. 눈가의 주름살을 제거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고, 목의 주름살, 코의 높이, 가슴, 뱃살, 신체의 모든 부분을 다 고쳐내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은밀한 곳까지 다 수술하여 젊음을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수술뿐만 아니라 온갖 비싼 화장품과 건강보조 식품과 운동기구들을 선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잡지에 어느 교회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이러한 광고를 낸다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하여도 광고를 실어줄까요? 잡지사 망하게 할 일이 있습니까,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잡지뿐입니까? 라디오에서 인터넷에서 텔레비전에서 24시간 상품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통신판매회사들이 자기들의 제품을 광고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서 카탈로그를 만들어 보내고 있습니까?
이러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북한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이 드문 것입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한 것입니다. 예배당에 다니고, 말로서야 믿는다는 말을 왜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과 천국을 믿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든지 아니 믿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대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15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오십니다.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모든 부정한 것과 더러운 것들을 다 소멸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에 옹위되어 나타나시는 모습이 이미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나타나셨고 성경 도처에서 하나님께서 불로 임하시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불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7-9절입니다.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는 형제들에게 바울 사도가 위로하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불꽃 가운데서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만이 아니라 칼로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7:12절에서 하나님께서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칼을 갈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살육당할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까? 17절입니다.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을 합니다. 정결케 합니다. 그리고 동산으로 들어가서 돼지고기와 가증한 것과 쥐고기를 먹는 자들이 다 함께 망하리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 의하면 돼지고기와 쥐고기는 부정한 짐승이기에 먹지 못하게 합니다. 쥐는 잘 잡아먹지 않지만 돼지고기는 다 먹고 계시지요? 그러면 우리도 심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안식교 같은 경우에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부정하다고 하는 짐승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돼지고기 문제는 율법의 아주 작은 부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도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서는 저주와 심판 외에는 달리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먹고, 가증한 것을 먹고, 쥐고기를 먹었을까요? 먹을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니라는 것은 지금도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이사야 66:3절처럼 소를 바치는 것이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고, 예물이 돼지의 피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산에서 직접 돼지고기를 먹고, 가증한 것을 먹고, 쥐를 잡아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들이 소나 어린 양이나 예물이 살인이나 개나 돼지의 피와 같은 것이라면 그 제물을 먹는 것이 돼지고기를 먹고, 가증한 것을 먹고, 쥐를 먹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식을 구별하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레위기에서 먹을 수 있는 짐승은 어떤 것입니까? 족발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짐승은 먹어도 된다고 합니다. 돼지는 족발은 갈라져 있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족발이 갈라져야 한다는 것은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그리고 되새김이라는 것은 거듭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돼지라는 짐승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구별되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란 돼지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기준이 아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인 신약시대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후서 1:8절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요한복음 17: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의하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심판이요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국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요한일서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예배의 바른 뜻을 모르고 이방인들이 신에게 빌듯이 그러한 자세라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떨며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면 우리가 마음이 가난하여 질수밖에 없고,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떨 수밖에 없고, 그래서 중심으로 통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정결케 하시고, 위로하시고, 새로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떨고 중심으로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더 많이 가지지 못하여 염려하고 걱정을 하고 있다면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을 세상을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내가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기에 심판을 당연히 받아야 됨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 때문입니까? 세상을 더 사랑하는 나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정말 나옵니까? 나의 욕심이 나의 세상 사랑함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구나 하는 인정이 되십니까? 그렇지 않고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는데 이러한 고생이 오는가,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그런 생각이 되십니까? 후자라면 이러한 사고방식 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아직도 자기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길래 그러는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낫다, 저사람 보다는 낫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것이 죄를 짓고 나서 가지게 된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도 자신들의 행위로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임을 아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아래 숨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죄와 악함이 가득하오니 누가 감히 주님 앞에 서리이까?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우리가 날마다 말씀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 고백이 터져 나옴으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자임을 알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66:18-21 중심 이동 2001. 5. 30.
오늘 설교 제목이 ‘중심이동’입니다. 이상한 제목 같아 보입니다. 왜 중심이동인가 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의 중심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을 담지해내는 그릇은 유대인의 독점물이 아니라 이방인도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가나안 여인 다말, 모세의 장인 이드로, 모세의 후처 구스 여인, 갈렙,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 등의 사람들이 이방인으로서 유대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본격적으로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열방에서 주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심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로 옮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의 남은 자들과 함께 입니다만 신약에서의 중심은 이제 유대라는 특정민족을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중심이동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유대인들이 왜 실패하고 망하였는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 성숙이라는 것이 단지 교회에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것으로만 성숙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이 성숙하여 충성스럽게 봉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단지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양 여기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신앙의 기초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도 하고 직분도 잘 감당하면 자기 스스로 신앙이 있는 것 같게 여기지만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 실망에 붙들려서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심이 어떠한가를 말씀을 통하여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그 중심을 보아야 하듯이 우리의 중심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잘못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중심이 아니라 이방인 중심이 되듯이 오늘날도 주님의 교회의 촛대는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은 아직도 오직 자기의 구원중심으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왜 유대인을 버려두고 이방인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실패를 보면서 아 이런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하고서 아는 것입니다.
경제하는 사람들은 돈의 중심이 어디로 흐르는가를 잘 보는 것이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상권이 어디를 중심으로 형성되는지를 잘 보아야 하고 권력을 가지고 싶은 사람은 역시 권력의 중심이, 실세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중심에서는 변방에 있을지라도, 놓치지 말아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있다면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다면 비록 다윗이 쫓겨 다니는 신세라 할지라도 다윗을 축복하고 다윗의 편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참으로 언약의 완성인 새 언약이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잘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이나 그림자들을 붙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날과 달과 절기를 붙들고 건물 성전을 붙들고 있다면 지금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을 봅니다.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소위(所爲)란 이미 한 일이나 하고 있는 일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소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한 일과 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일이나 하고 있는 사람의 그 마음의 사상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행위를 하였거나, 하고 있는 일들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 어떤 사람이 하는 일은 볼 수가 있지만 그 마음의 사상은 모르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오직 먹고 살기 위하여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봉사하기 위하여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랑을 위하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 중심의 사상은 각기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벌 받지 않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복을 받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자기 과시를 위하여, 자기 자존심과 자랑을 위하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빚을 내어가면서 제사를 거창하게 지내는 것은 다 자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제사를 지내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여도 그 중심을 하나님께서 보시니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그 중심을 옮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열심을 낸다고 하여도 언제나 그 중심의 소위와 사상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몇 곳의 성경을 봅니다.
시편 10: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교만한 자는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 없다는 사고방식으로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도록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의 제일 밑에 숨는다고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시편 33:10절.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며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열방의 도모와 사상을 하나님께서 무효케 하십니다. 오직 여호와의 도모와 그 심사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에서 세상 나라는 망하나 인자의 나라는 영원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악한 소위와 사상이란 나의 가정, 나의 회사, 나의 교회, 나의 나라는 영원하리라는 사상들을 하나님께서 무효화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56:5절.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고난을 당하면서 노래한 것입니다. 메시아가 고난당하심이 메시아의 말을 곡해하였기 때문이며 주님께 대한 모든 사상이 사악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죽이려고 한 것은 그 모든 사상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9:7절.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쳤으며” 사람들의 행위와 사상이 어떠한지를 성경만이 제대로 밝혀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창세기에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위를 말씀을 통하여서만 얼마나 사악한지를 돌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였는데 무엇이 문제였기에 망한 것입니까? 그들의 소위와 사상이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거창한 제사를 지내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도 그 중심의 사상이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레위인과 제사장을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사야 66:18-21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열방을 하나님께서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지명, 그 당시의 지중해 연안을 두고서 유다와 이웃하지 않는 나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방인의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러 오게 될 것이고, 그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증거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레위인과 제사장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베드로전서에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방인인 우리가 주님을 알고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따라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나서거나 애를 써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의 중심을 살펴보면서 주님 앞에 참으로 감사와 떨림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구약의 유대인들처럼 레위지파와 제사장의 역할을 자신들의 권세를 부리는 것처럼 행사한다면 이것은 또다시 중심을 옮겨 버리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마치 구약의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이 된 것처럼 권세를 부리고 있다면 이는 참으로 그 소위와 사상이 악한 것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가 레위인과 제사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소위와 사상이 악하였기에 망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목사가 없거나 열심히 있는 성도가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소위와 사상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실력과 힘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공로로 살고 있습니다, 하는 것이 나와야 당연한데 우리의 삶에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담겨있는가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그 소위와 사상대로 심판하신다면 날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감사치도 아니하고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의 소위와 중심을 살펴서 과연 주의 은혜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7절을 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일곱 별은 일곱 사자이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이것은 물론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회 가운데서 촛대를 옮겨버리신다는 교회도 있는 것입니다. 촛대가 교회를 상징하는데 예수님께서 촛대를 옮겨버리신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촛대를 옮겨버리신 것입니까?
에베소 교회가 잘한 일도 있지만 무엇이 없었습니까?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돌아보고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처음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서 무엇을 하느라고 잊어버렸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행위가 좋았습니다. 수고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의 거짓을 잘 드러내었습니다. 참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까지 다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버렸습니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말씀을 공부하고 복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 종교적인 것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무엇을 회개하고 회복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그 처음 사랑, 그리하여 그 처음의 행위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 한다 그러면, 자꾸만 처음 사랑을 버리고 다른 자신의 업적이나 자랑거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이 제대로 있는지를 점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6:22-24 천국과 지옥 2001. 6. 6.
오늘이 이사야서의 마지막 설교가 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내용이 무엇으로 나누어집니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꺼지지 아니하는 불로 끝이 납니다. 참으로 비참한 결론입니다. 세상의 결국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심판가운데서 하나님의 남겨진 백성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여 놓으시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 세상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무섭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랍비들이 본문을 낭독할 때에 이 비참한 결론 부분을 생략하고 대신 23절을 반복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마음이 없습니까?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말씀하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꼭 지옥과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쯤 되는 곳도 한곳 마련하여 참으로 나쁜 짓을 많이 한 자들이라도 그곳에서 고생을 하고 훈련을 받고서 나중에 천국으로 다시 넣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 가톨릭의 연옥설입니다.
이러한 중간적인 위치를 만들어 놓으면 돈 받아 내기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중간이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진리 아니면 비진리, 생명 아니면 죽음, 이렇게 분명한 나눔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천국과 지옥을 코미디로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어느 방송국에서 ‘지옥의 묵시록’이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최양락이 나오는 것인데 지옥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작은 무엇으로 하는가 하면 지옥을 무시하고 사는 나쁜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 놓고서는 코미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과 지옥까지 코미디로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이라는 원색적인 설교의 제목을 삼는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게 보이는 세상입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는 한쪽으로 밀어놓아 버린 지 오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하든 아니하든 간에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빈틈없이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 인류가 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 하여도 하나님의 계획은 빈틈없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서는 이사야서 65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보고서 어떤 사람이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며 어떤 자들이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66:24절입니다. “그들이 나가서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새번역으로 한 번 더 봅니다. “그들이 나가서 나를 거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다. 그들을 먹는 벌레가 죽지 않으며 그들을 삼키는 불도 꺼지지 않을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들을 보고 소름이 끼칠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서의 결론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48-49절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 하리라” 이사야서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며 사람을 불로서 소금 치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불순물을 없애기 위하여 소금을 불로 굽지요.
이것이 몸에 좋다고 구운 소금 열풍이 불었지 않습니까? 지금도 죽염으로 된 건강식품들이 나오고 치약도 죽염치약이 나옵니다. 소금을 대나무 속에 넣고 1천도가 넘는 온도로 구워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을 불에 구워 내듯이 사람을 불에 굽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곳에는 범죄한 손을 자르고, 범죄한 눈을 뽑는 한이 있더라도 가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43절에서 47절을 다시 봅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에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러한 말씀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지옥에 들어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이지 않습니까? 비록 장애인이라도 천국에 들어가면 성공이요, 몸이 건강하여도 지옥에 가면 영원한 실패의 인생입니다. 가난하여도 천국에 들어가면 영원한 성공이요, 지옥에 들어가면 영원한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가치관이 말씀으로 정립이 되어 있지 않으면 늘 세상의 풍파에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러한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면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당연히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직도 영원히 불타버릴 안목의 정욕을 따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눈을 빼어 버리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과 지옥의 분기점이 이사야 전체를 통하여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요약하여 살펴보고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부터의 내용은 ‘구속사 연구원’의 신윤식 목사님 설교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이 구원과 멸망의 얘기로 마쳐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지적한 이스라엘의 죄는 멸망 받을 죄이고, 행여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죄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들이 멸망당할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존재라는 것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시대에 일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이 시대에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 한번 이사야서를 통해서 멸망 받을 모습이 어떤 것이고, 과연 우리들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22절에서 말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항상 있을 자는 누구이며, 24절에서 말한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불이 꺼지지 않을 곳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살아가야 할 패역한 자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이사야 전체를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2절에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였고, 이러한 이스라엘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2절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양육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자신을 양육하신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왔으면서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3절에서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육을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이 누구의 힘으로 살아가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며 수많은 이방인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게 하시며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돈이 있어서 돈 때문에 살아온 것이 아니며, 공부를 잘해서 똑똑해서 그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그들의 군사력과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아야 합니다. 돈이 있고 세상의 여러 가지의 것들이 그들의 수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스라엘은 오직 은혜만 노래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자신들을 양육하신 주인을 아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그들이 '은혜로 산다'는 생각에서 벗어납니다. 풍족함에 빠져서 더 많은 풍족과 배부름을 얻기 위해서 돈을 구하고 세상 것을 구하게 됩니다. 그 마음속에는 은혜가 아닌 돈이 자리하고 세상의 좋은 것들이 자리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의 제사나 제물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제사와 제물이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를 고백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러내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마음은 중요시하게 여기지 않고 의식을 지켰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 것은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마음인가, 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하나님 예배 드렸습니다' '하나님 헌금 했습니다'고 하면서 자기의 행위를 의식하고,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의식이 있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의식과 바치는 것을 모두 거부해 버립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2:7절에 보면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것에서 풍요해지고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에서 벗어나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배가 불러지니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세상이 더 좋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사치와 방탕과 호화로움(사 3:16-26절)에 대해서 지적하기 위해 이사야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를 이스라엘에게로 보내시기에 앞서 먼저 이사야로 하여금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게 됩니다. 6: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그것을 자랑을 하고 다니는데, 그 모두가 가짜라는 것은,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 자로서 자기의 체험을 자랑하는 자가 없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 자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됩니다. 이사야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게 되고 내가 곧 망할 존재임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사야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사야가 이스라엘로 가서 할 일이 뭐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더러움과 부정함을 알게 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로 더러움과 부정함으로 가득한 민족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할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가서 말씀을 외친다고 해도 그 말을 들을 사람은 없습니다(6:9,10).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르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그 그루터기를 위해서 이사야를 보내시는 것입니다(6:13).
이사야는 가장 먼저 '남은 자는 돌아온다'는 뜻을 가진 ‘스알야숩’이라는 아들을 데리고 아하스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하스에게 임마누엘의 징조를 말합니다. 즉 세상의 힘을 믿고 있던 아하스에게 세상은 망하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가 장차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장차 주어질 이 나라에 포함될 백성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 자'가 될 것임을 말합니다(9:1,2). 그리고 9:6,7을 보면 장차 세상은 임마누엘로 오신 한 아기가 중심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 결국 남은 자란 임마누엘로 나신 아기를 왕으로 복종하는 자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로 오신 분에 의해서 통치되어집니다. 힘으로 유지하는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힘을 의지하지 말고 배부름에 빠지지 말고 임마누엘로 오신 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경고를 한 뒤에 이어서 이방 나라에 대한 경고를 하십니다. 그 내용이 40장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결국 세상에 남아있을 민족은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포함될 자가 발생하는데, 그가 바로 남은 자입니다. 이 남은 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새 이스라엘입니다.
43: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하고, 또 44:1절에서도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야곱아,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라는 말이 곧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신 새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이스라엘로 모집되는 백성이 곧 남은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은 임마누엘로 오신 메시아에 의해서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고, 이 나라만 남기고 나머지 세상은 모두 심판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나라에 포함될 남은 자는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남은 자가 누구냐, 라고 할 때 '너냐?' '나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남은 자의 모습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남은 자가 누구인가는 알 수 없지만, 남은 자의 모습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가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에 포함된 남은 자라면 분명히 자신을 다스리는 목자를 알아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를 제대로 알아보고 그 목자를 구세주로 삼고 목자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남은 자의 모습입니다. 53:2절에 보면 목자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절에서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즉 힘 있고 흠모할 만한 모습을 가진 자를 목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연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고 누르면 눌리는 그런 모습의 목자를 목자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남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목자를 외모로 보지 않고 세상의 힘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그것으로 목자를 나의 목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신부로 간주해서 새로운 예루살렘에 넣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61:10).
연한 순같고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오신 목자를 목자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시각에서 떠난 자입니다. 이러한 눈이 뜨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더러움과 부정함에 대해서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를 찾을 때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창에 찔림 받고 수치를 당하고 죽으신 목자가 눈에 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는 세상을 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심판 받을 자와 남은 자입니다. 심판을 피할 자들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속에서 새 예루살렘에 포함될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미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 것 같은 세상만 눈에 들어오지만, 목자를 제대로 만난 자는 세상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에 두고 살뿐입니다.
이사야서를 마치면서 우리는 자신의 부정함과 더러움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임마누엘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목자가 제대로 보일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돈 때문에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으로 뒤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때문에 세상은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멸망할 세상을 보지 마시고 그 세상 위에 존재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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