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스크랩] 이사야 강해 2

에반젤(복음) 2023. 4. 2. 00:55
이사야 강해 2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1999. 6. 30. - 2001. 6. 6.)








目    次

26.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지 말 것 
27. 바벨론, 두마,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 
28.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29. 셉나에 대한 경고 
30. 두로에 대한 경고 
31. 그날이 오면 
32. 심판과 잔치 
33. 구원의 성곽 
34. 포도원의 노래 
35. 면류관 
36. 시험한 돌 
37. 사람의 계명 
38. 잠잠하라 
39. 돌아오라 
40. 의의 왕 
41. 우리의 보배 
42. 시온의 영광 
43. 자세히 읽어보라 
44. 시온의 대로 
45. 무엇을 의뢰하느냐? 
46. 히스기야의 기도 
47. 기도 
48.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 
49. 히스기야의 자랑 
50.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20:1-6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지 말 것  1999. 12. 22.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누가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홀로 살수 없기에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서로 서로 도와가면서, 물물교환을 하여 경제적인 욕구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욕구도 사람끼리 어울려 살면서 해결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홀로 숲에 버려졌을 경우에 짐승처럼 살게 된 경우가 있었지요. 이러한 세상에 살다보니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 생각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람의 일과, 사람의 솜씨만 보이는 것이니 다른 것을 의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논의에서 진리다, 과학이다 하는 것은 일단 보이는 것에 한하여서 말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아니합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과학의 발달로 보이게 된 것이 많습니다.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달로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사람들에게 종교라는 것도 하나의 사회적 필요에 의한 문화현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래는 신이란 게 없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하도 복잡하고 다양하니, 그러한 심리를 만족시키는 하나의 기능이나 역할로 종교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생물학자들은 사람들이 생존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는 것이 D.N.A의 복제명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나와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만 아직 이렇다 할 해결은 없습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면 사람이 세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포는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우리는 배고프니 밥 먹는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누가 명령하는가 연구를 해보니 세포 안에 유전자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D.N.A라고 합니다.
 
 
 
 
이 유전자가 자기를 복제하여 세포를 만들어 내기에 이 유전자가 이미 자기가 살아남기 위하여 프로그램을 진행시킨다는 것입니다. 지금 거대한 프로젝트가 연구되고 있는데 이 유전자의 고리를 다 풀어헤치는 것입니다. 2003년이 되면 이 유전자의 비밀을 다 풀어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유전자 콩으로 만든 두부가 얼마 전에 논란이 되었지 않습니까? 유전자를 조작하면 콩이 벌레가 먹지 않고, 더 크고 많은 수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유전자도 다 풀어내게 되면 복제인간은 물론이고 사람의 질병도 유전자를 조작하면 병들지도 늙지도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여, 유전자의 명령에 의하여 사람이 문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하자 한쪽에서는 아니다, 그러한 유전자의 명령이 아니라 사람의 인격이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라고 논쟁을 버린 것입니다. 구약을 이야기하면서 왜 첨단 과학을 이야기하는가 하시겠지요? 그러나 다 연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유전자가 아주 이기적이라서 자기가 살아남기 위하여 굶게 되면 사람까지 잡아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어떻게 동료의 시신을 먹을 수가 있습니까? 차라리 굶어 죽어야지요. 그러나 이 유전자의 강력한 자기복제의 요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자녀까지 잡아먹는 예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싸움에서 어느 편을 드시겠습니까? 유전자의 이기적인 자기복제 욕구로 인하여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문화도 이루어 간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사람의 마음이나 인격이나 이러한 것이 문화를 이루어 간다고 보십니까?
 
 
 
 
이 둘 다 사람의 기술과 방법에 의한 연구입니다. 세상이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니 우리보다 우리의 자녀의 시대에는 더욱 사람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쪽으로 가는 것이 이 세상의 흐름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그 흐름을 거부하고 아니야,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해,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거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이나 옛날이나 모양만 다를 뿐이지 그 내용은 꼭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싸움이 늘 이 싸움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주어지는데, 그 약속을 믿자니 믿음이 없고 그러니 자연히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죄만 가득한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높아진 인간들의 세계에서 어느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원래 가던 길을 더 잘 가게 하기 위하여 예수 믿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못 만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모든 삶의 방향과 가치가 전도되어 집니다. 그러니 이제는 거꾸로 사는 삶이 시작됩니다. 얼마나 주변에서 반대가 많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이 이사야 시대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짧은 본문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도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기에 그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에 보내어 아스돗을 취하던 해라는 역사적 배경이 나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주어집니다. 사르곤이라는 왕이 금세기 중엽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고대 앗수르의 폐허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서 사르곤은 앗수르의 왕 중에서 영웅적인 왕으로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살만에셀의 후계자이고 예루살렘을 공격한 산헤립의 아버지로서 여러 나라를 정복한 왕이라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왕의 때에 아스돗이 침공을 받습니다. 첫 침공과 마지막 침공까지 삼년이 걸리는데 이 기간동안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옷도 벗고 신도 벗고 삼년동안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역이란 이러한 낯선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른이 옷을 벗고, 속옷을 입었다고 하는 자도 있고 속옷도 벗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벗은 상태가 고대 전쟁에서 포로가 끌려가는 모습으로 본다면 옷도 벗기운 채 겨우 속옷을 가리우고 때로는 엉덩이를 다 드러낸 채 신발도 없이 끌려가는 그런 모습으로 삼년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삶이 거꾸로 사는 삶을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모를 받을까요?
 
 
 
 
그러나 그것이 메시지가 되고 예언이 되고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모든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수모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세상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의 남진에 대비하여 애굽과 구스와의 동맹을 맺고 살아남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데 오히려 애굽과 구스가 망한다고, 그래서 포로로 끌려간다고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처럼 대조할 수는 없습니다만 예를 들자면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고 곧 전쟁을 일으키는데 미군철수 하라면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잡혀 가겠지요. 그러나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라면 미군철수 하라는 것이 선지자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런 선지자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오히려 많은 목사들이 반대를 하겠지요? 그처럼 이스라엘이 적군의 침략 앞에서 강대국을 의지하지 말라고 외친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존의 세력을 유지하는 차원의 선지자들은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도 이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는 주의 백성들이 있다면 세상에서보다도 예수 믿는다는 교인에게서 먼저 배척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대접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시대의 대세를 따라 그냥 흘러가고 있기에 고난과 핍박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2절에서 4절을 봅시다. 허리에서 베를 끌리고 두루마기 같은 옷을 벗어버리고 신도 벗고 삼년을 다닙니다. 이러한 예표가 애굽과 구스에 대한 예표가 됩니다. 이사야의 그 모습처럼 애굽과 구스의 사람들이 앗수르 왕에게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끌려가는 그들의 모습을 이사야는 미리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왜 미리 보여주었습니까?
 
 
 
 
5절입니다. ‘그들이’라는 글자 위에 작은 글자가 있습니다. 4)라고 있지요. 그 표시는 난하주와 같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밑에 ‘그들이’를 무엇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러지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이 어떤 꼴입니까? 젊은 자나 늙은 자나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엉덩이까지 드러내고 포로로 끌려가니 애굽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구스를 의지하고 애굽을 자랑하던 이스라엘로 하여금 놀라고 부끄럽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6절을 봅시다. 그 날에 해변거민 즉 애굽을 의지하고 구스를 의지하던 지중해 연안의 거민들이, 여기에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함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뭐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믿던 나라,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 위하여 도와 달라고, 바라고 달려간 그 나라가 이 꼴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람을 의지하고 강대국을 의지하고 그 시대의 흐름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하던 애굽과 구스 대신에 무엇을 넣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기에 대입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들이 주님의 심판의 날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얼마나 놀라고 부끄러운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지와 피할 곳이 어디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점검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의 부유함을 인하여 이제는 편히 먹고 즐기자고 하였을 때 주님께서 오늘 밤에 네 영혼은?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새 천년을 준비하기 보다는 우리는 오늘밤에 내 영혼을 점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읽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복입니다.
 
 
 
 
종말을 당한 이 시대에 참된 복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의 조문이나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증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제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에는 목숨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선지서를 통하여 좀더 고발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붙들고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참으로 붙들고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지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니까 애굽과 구스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과 구스는 이스라엘의 의지의 대상이 되었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29장을 보겠습니다. 1-7절. “봉독” 애굽을 하나님이 왜 망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6-7절, 16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의지하였기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의지하는 것이 부러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은혜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라면 지금까지 우리의 의지하던 바가 부러지는 것을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의지하는 것들을 견고히 해 달라고 떼를 쓸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 우리의 의지하는 것을 부러뜨리고 제거하심으로 주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 복임을 아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높아진 것과 자고한 것을 전부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는 자는 함께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그러한 것들을 미리 잘라내고 주님만 의지하는 자는 그날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서 9:33절.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 21:1-17  바벨론, 두마,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  1999. 12. 29.

계속되는 경고 속에서 바벨론과 두마,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입니다. 먼저 바벨론에 대한 경고는 이미 13장과 14장에서 나왔습니다. 13장과 14장에서의 바벨론의 경고는 상당히 많은 분량으로 그 당시만의 예언이 아니라 장래일과 최후 종말의 일까지를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반면에 오늘 본문의 바벨론의 멸망은 단순히 바벨론의 멸망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예언은 그 당시의 현재적인 일과 가까운 장래와 먼 장래를 함께 중첩적으로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서를 통하여 그 시대가 무엇으로 책망 받고 경고를 받고 심판을 당하는가를 통하여 가까운 장래뿐만 아니라 먼 장래인 오늘 우리에게까지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절에서 해변 광야에 대한 경고라, 하는 작은 글자를 밑에서 보시면 바벨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벨론도 큰 강 사이에 위치하기에 강을 바다라 부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해변거민이라고 20:6절에서 말하는데 바벨론은 해변광야라고 합니다. 유프라테스 강 서편이 광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바벨론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적병이 몰려오기를 남방의 회오리 바람처럼 몰려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계시인지 혹독한 묵시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적병이 와서 치는데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는 것입니다. 옛날 바벨론이 세계를 속이고 약탈한 것이 이제는 바벨론이 적에 의하여 속임을 당하고 약탈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탈하는 자들이 엘람과 메데입니다. 메데라는 나라는 이사야 13장에 나왔는데 엘람은 바벨론 동방에 거하던 그 당시의 강대국입니다. 이러한 나라들이 바벨론을 향하여 쳐들어오는데 얼마나 무서운 환상인지 이사야 자신에게 그것을 보는 것이 고통인 것입니다. 선지자가 그 환상을 보면서 예언을 하는데 얼마나 혹독한지 자기에게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요통으로 임산하는 여인의 고통처럼 고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심판을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환상으로 보는 것이 여인의 해산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따르는 것이라면 직접 심판을 받을 때에야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예언을 알고 있다면 이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것을 미리 보는 고로 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당할 세상을 보면서 우리가 이 시대의 예표의 사람이요, 선지자의 역할을 하고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고통하기는커녕 이 세상에서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만을 바란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의 장래를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어미 닭이 새끼를 품듯이 품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예루살렘에 보냈건만 거절한 그 성읍, 그래서 심판이 기다리는 그 성읍을 향하여 우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냄과 같이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이러한 선지자의 기능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2:9절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 왕 같은 제사장의 기능을 하는 것이 어떤 일입니까? 이 세상에서 어두움에서 빛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하신 그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세상이 즐기는 것들을 보고서 우는 것입니다. 고통 하는 것입니다. 아니야, 그것은 어두움의 일이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세상을 향한 자세뿐만 아니라 성도라고, 거룩한 무리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교회를 보고서도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큰 고통으로 와 닿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쌓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고통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어두움의 일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과 눈물이 보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도 아닌 이방 바벨론의 심판의 환상을 보면서 여인의 해산의 고통 같은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가 안다면 자신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이 교회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여자들이 울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장차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과 심판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울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판받을 세상의 것을 더 가지지 못한 울음을 울고 있지는 아니 합니까? 주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내용이 과연 무엇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 무서운 심판을 먼저 알기에 그 심판의 소식을 모르고 아직도 어둠의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을 위한 울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고통이며 예수님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라면 이러한 고통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3-4절에서 그 고통과 놀라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봉독” 이러한 고통을 환상의 내용 보다는 계시를 받는 것, 즉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충격의 고통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 같은 선지자도 하나님의 임하심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힘을 다니엘 10장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러한 고통이 계시를 받을 때마다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고통이란 그 계시의 내용으로 인한 고통으로 보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8:11절에 보면 엘리사가 하사엘을 보고 웁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병이 들어 엘리사에게 하사엘을 보내어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인지를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그때에 엘리사가 하사엘을 보면서 우는 이유는 하사엘이 장차 아람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하사엘이 장차 예루살렘성에 불을 지르고 장정을 칼로 죽이고 어린 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는 내용을 인하여 우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보고서 울고 지금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인하여 고통이 임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바벨론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식탁을 베풀고 먹고 마시고 있는 가운데 적군이 쳐들어 온 것입니다. 마병대와 나귀떼와 약대떼가 쌍쌍이 진격을 가하여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지자가 보는 것입니다. 환상 가운데 보는 것입니다.
 
 
 
 
선지자 자신이 파수꾼처럼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서져서 땅에 떨어졌도다.” 선지자의 이러한 예언의 내용대로 역사상의 바벨론은 메대와 엘람과 바사의 진군으로 인하여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12절은 두마에 대한 경고입니다. 두마란 세일지역의 에돔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그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묻습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 대답하되 아침이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밤인데 어떻게 되겠느냐 하니까 아침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밤도 오리라는 것입니다. 아침은 희망의 때이고 밤은 절망의 때를 말하는데 하나님이 열국을 심판하는 과정에서 작은 나라들은 함께 휩싸여 밤과 아침을 맞이하고 또 밤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흥망성쇠가 자기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에 그런 것에 관심하지 말고 너희는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에, 일본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 나라의 경제와 환율에 따라 우리의 경제가 아침이 되었다가 밤이 되었다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들은 주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17절은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입니다. 드단의 대상이여, 라고 합니다. 드단의 대상, 거대한 상인들의 그룹이지요. 이들 아라비아인들도 전쟁으로 ?기고 있으니 데마 땅의 사람들이 그 ?기는 자들에게 물과 떡을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대한 무역상인인 아라비아인들이 망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들도 일년 안에 게달의 영광이 쇠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게달이란 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베두인족을 광범위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영광도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끝이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예언의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정을 짓는 말씀입니다. 도장을 찍듯이 확정적입니다. 이러한 세 나라에 대한 경고를 하면서 결국은 세상의 흥망성쇠를 따라 이리 저리 도움을 구하러 다니고 서로 살아남기 위하여 연합전선을 펴기도 하는 자들에게 오직 살길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길임을 말함과 동시에 역시 이러한 예언의 궁극점은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을 보이심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보이심과 동시에 이방에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지만 구약의 일차적인 초점은 언제나 이스라엘입니다.2절을 봅니다. 엘람과 메데가 바벨론을 에워쌈으로 바벨론으로 인하여 탄식을 하던 자들의 탄식을 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돔이나 아라비아는 자기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밤이 왔다가 아침이 오고 아침이 왔다가 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을 받던 이스라엘도 역시 그 고통과 탄식이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1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고하노라” 이 말씀을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타작당한 것, 하나님의 마당의 곡식이 바벨론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바벨론을 심판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포로에서 자기 백성들을 고토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기에 타작한 것, 타작마당의 곡식을 이스라엘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예레미야 51:33절과 미가서 4:12절에서 나옵니다. 예레미야 51:33절. “봉독” 딸 바벨론은 이른 타작마당 같아서 오래지 않아서 추수 때가 이르리라는 것입니다. 미가서 4:12절에서는 바벨론을 타작마당에 모으듯이 모으고서 딸 시온이여, 칠 지어다, 합니다. 딸 시온이 지금 포로로 잡혀 있는데 어떻게 바벨론을 치겠습니까? 그래서 미가서 4:1절에 보면 말일에, 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 위에 뛰어나리라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환난 받고 심판당한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바벨론이 타작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기의 백성을 골라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고 말일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이 타작을 당하고 심판을 당하여 그 가운데서 추수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36-43절입니다. “봉독” 씨 뿌리는 비유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석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끝이 추수 때의 상황, 타작마당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추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끝에 이러하리라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초림이 이미 추수 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4:35-38절입니다. 이미 추수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기가 타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대한 경고가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문제임을 아시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22:1-14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2000. 1. 5.

이상 골짜기는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습니다. 8절과 9절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열방에 대한 경고가 나타났는데 이제 드디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로 초점이 모아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훤화하며, 떠들며 즐거워하던 고을이라고 합니다.

 
 
 
 
훤화(喧譁)란 왁자지껄하고 요란한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읍에 죽음이 닥친 것입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자가 전쟁하다가 칼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도망가다가 잡혀 죽은 것입니다. 관원도 백성도 도망하다 죽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를 전하고 있는 선지자는 요란스럽게 잔치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4절에서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잔치가 아니라 슬피 통곡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딸 내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는 통곡하니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라고 합니다.
 
 
 
 
12절과 13절을 봅시다.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지금은 통곡하고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입고서 울어야 할 때에 오히려 먹고 마시며 뭐라고 합니까? 어차피 죽을 것 잔치나 열자는 것입니다. 지금 전쟁의 경고를 하는 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인데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것이 이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반응을 할까요? 심판의 경고는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라는 것인데 오히려 반응은 내일 죽을 것, 먹고 마시자는 쪽으로 나가는 것은 왜 그럴까요? 복음을 듣게 되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상의 일어나는 일들을 아름답게 볼 것도 많은데 모조리 죄로 보고서 불살라 없어질 세상이라고 하니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청년중의 한명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허무합니다, 빨리 허무해져야 합니다.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 수고하는 것이 모두 헛되도다, 라는 그 헛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헛됨을 알기에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젊으니까 아직도 꿈이 많기에 헛됨을 인정하기가 너무나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할 힘을 빼버리니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대략적인 감은 잡히는데 아직 방황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래, 망하는 세상, 먹고 마시자는 쪽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그것도 자기는 복음을 좀 알고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좀 안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어느 교회 이야기)
 
 
 
 
지금도 염려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그렇게 하시면 헌금을 많이 안 할 텐데요? 그러나 헌금에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곳이라도 돈의 힘이 안 통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만은 돈이 힘을 잃어버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이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것을 준비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는가 하는 책망입니다.
 
 
 
 
그러니 1절에서 4절 말씀에 절대 다수가 훤화하며 떠들며 잔치하는 것입니다. 소를 잡고 양을 잡아먹고 마시자, 하는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는 홀로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 기도회 때도 시편 119편 136절에서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이러한 통곡이 얼마나 많은 눈물이었으면 시냇물같이 흐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신세타령하면서 우는 눈물이 아닙니다. 감정에 겨워 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달려가는 교회들을 보고 나 자신을 보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사야 22장에서 무엇 때문에 통곡하여야 합니까?
 
 
 
 
5절입니다. 잔치의 요란함이 전쟁의 요란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이르는 분요와 밟힘과 혼란의 날이 닥친 것입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산악에 사무치는 부르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엘람이 화살통을 메고서 병거를 타고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입니다. 기르 사람들이 방패를 들고 옵니다. 이들 나라는 앗수르의 속국으로 이들이 전쟁의 최전선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합니다. 요새들이 무너지고 이제 예루살렘 성 앞에 적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적군의 모습이 6-7절이고 예루살렘의 모습이 8-11절입니다. 적군이 코앞에 닥쳐 있는데 예루살렘 성 안에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무기고를 열고 무기를 정비하는 것입니다. 수풀 곳간의 무기고는 솔로몬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열왕기상 10:16-17절. “솔로몬 왕이,,,,금방패들을,,,,이것들을 레바논 나무 궁에 두었더라.”
 
 
 
 
솔로몬이 레바논에서 수입한 나무로 궁궐을 13년에 걸쳐서 지을 때 무기고도 이 나무로 지었기에 레바논의 수풀궁이라고 이름 하는 것입니다. 적이 쳐들어 왔으니 무기를 점검하고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벽을 보수합니다. 10절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고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의 무너진 곳을 견고케 합니다. 가옥을 헐어서까지 성벽을 쌓는 것은 국가를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 것입니다.
 
 
 
 
나라 없이 개인 없다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그러한 의미로 진행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이 그 땅에 시행되고 있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수지를 만듭니다. 옛날 전쟁은 성문을 닫아두면 성을 포위하고서 굶주릴 때까지 포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식과 물의 저장은 필수적입니다.
 
 
 
 
예루살렘도 전쟁을 대비하여 무장을 하고 성벽을 재건하고 저수지를 만듭니다. 양식은 평소에 확보하여 두었겠지요. 이제 준비가 다 된 것입니다. 적과 대치를 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준비가 당연한데 하나님은 이러한 준비를 하는 것을 보시고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11절 중간에 봅니다. 그러나,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무장하고 성벽을 쌓고 저수지를 파고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적이 왜 침략하였고 성벽이 왜 무너졌는지 이렇게 되도록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마음에 없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닥친 적을 물리칠 방법만 생각하고 무기를 갖추고 가옥을 헐어서까지 성벽을 재건하고 저수지를 팠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칭찬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옛적부터 일하신 하나님을 앙망하지 아니하고 존경하지 아니함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의 주민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적의 침략이니 이것을 막아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가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양식과 물도 없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적용하여 그러면 어떻게 그런 것 없이 사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의 특징을 알면 그러한 의문이 사라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에 있어서 백성들의 무기의 훌륭함이나 성의 튼튼함이나 군량미의 넉넉함으로 이기는 것이 아님을 늘 훈련받아 왔지만 또 다시 적의 침략 앞에서 이런 것만 준비하는 것입니다.(Y2K 준비한 사람들-인터넷 자료 보고)
 
 
 
 
그러므로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이 책망을 받는 것은 무엇을 책망 받고 있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무기도 아니고 성벽도 아니고 저수지를 파서 물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 한 가지만 보고자 합니다. 물입니다. 성 안에 물이 없다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 때 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밖의 물 근원을 막아서 지하 수로를 만들어 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대공사를 합니다. 이러한 공사로 만들어진 저수지가 윗못, 아랫못, 하면서 나타납니다. 성 안에 저수지를 마련하고 물을 저장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이런 곳으로 정하셨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신명기 11:10-11절입니다. “봉독” 애굽 땅과 같지 않다는 것은 애굽 땅은 파종하고 물을 대려면 발로 물 대는 것입니다. 강물은 늘 있으니 발로 수차를 돌리듯이 퍼 올리면 되는 것이고 또 물이 언제나 넉넉한 곳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비를 흡수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어느 곳이 살기가 좋습니까? 관개수리를 하여 언제나 물을 댈 수 있는 것이 좋습니까? 늘 하늘만 쳐다보는 천수답 같은 곳이 좋습니까? 농토의 가치는 물을 얼마나 잘 끌어들일 수 있는 곳인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왜 비가 오면 땅이 흡수해 버리는 그런 곳을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정하신 것입니까? 언제나 너희의 실력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도움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만 잘 듣고 순종하면 13-14절을 봅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놋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이 저수지를 만들어 자기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이 일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데 저수지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기와 성벽과 저수지가 아니라 주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돈이 아니고 성곽 같은 건물이 아니고 스스로 살아남을 저수지가 아니라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만하면 이제 망하지 않을 거야. 무엇을 보고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없이 스스로 만들어 낸 부동산이나 조직의 방대함으로 든든히 여긴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을 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 하나님의 책망하는 이 두 가지 죄악이 예루살렘에 대한 책망만이 아니라 우리의 책망이어야 합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주님을 버리고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 만들어 낸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 의지하지 말고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12절에서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입으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 이들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의 장래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엇도,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살라 내어 줄지라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회개하며 주님의 그 완전한 약속 안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22:15-25  셉나에 대한 경고  2000. 1. 12.

지난주에 적의 침략을 당한 예루살렘 전체에 대한 경고를 보았습니다. 적이 쳐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로 회개하고 돌아가야 할 텐데,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자구책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무기를 갖추고 집을 헐어서까지 성벽을 재건하고 저수지를 만든 것입니다. 무기도 그들을 구할 수가 없고 성벽도 아무리 파수꾼이 경성하여 지켜도 여호와께서 지키시지 아니하시면 허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시편 127:1) 그들의 관심사는 자기들의 생존에만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는 쪽으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돌아오라고 그렇게 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한 그들의 죄를 사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예루살렘 전체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신 후에 이제 개인적인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이러한 지경에 처하였으면 고위 관리들이 더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하나 살리고 살찌우는 일에 바쁘더라는 것입니다.
 
 
 
 
경고의 대상이 되는 셉나는 히스기야 왕 때 엘리아김과 요아와 함께 아람의 군대 앞에 나라를 대표한 사절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 15절에 보면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 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셉나의 권세가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됩니다. 이 셉나가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16절입니다.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이 말씀을 보면 셉나는 이방인이라는 주석을 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셉나의 잘못은 자기의 무덤을 높은 곳에 마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바위굴에 만들기에 높은 곳의 바위를 쪼아내어 무덤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왜 책망이 됩니까? 지금 때가 어느 때 입니까?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라는 사인으로 적이 침략하였는데 회개는커녕 자기의 부귀영화가 극에 달하여 꾸밀 곳이 없을 만큼 꾸몄으니 이제는 무덤까지 호화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호화 분묘가 한번씩 문제가 되곤 하지만 지금 먹고 살기도 바쁜 사람에게 무덤은 나중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셉나는 자기의 권세와 재력을 사용하여 자기의 무덤까지 높은 바위를 쪼아 만든 것은 얼마나 권력을 남용하고 자기의 지위를 가지고 자기의 배를 불렸느냐 하는 것입니다.(구소련과 중국의 지도자들의 무덤 비교) 세상의 여러 나라에서 정부의 고위관리가 되면 백성을 위하여 봉사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이 되거나 관리가 되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백성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절대로 자기의 권세로 백성을 다스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의 포도원과 바꾸자고 하였을 때 나봇이 거절합니다. 자기의 조상으로 받은 유업이기에 바꿀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사거나 팔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워 경작권을 팔더라도 언제나 무를 수가 있고 그것도 안 되면, 희년이 되면 원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지 못하자 근심하고 있을 때 그 아내 이세벨이 나봇을 모함하고 그 포도원을 왕에게 돌립니다. 이것을 선지자 엘리야가 뭐라고 경고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네 피도 핥으리라고 합니다. 이세벨도 개들이 먹게 되고 그 집안이 다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왕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인데 셉나가 감히 국고를 가지고 자기를 위하여 높은 곳에 무덤을 마련할 만큼 악을 행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무덤은 왕의 묘실과 평민의 묘실이 다릅니다. 그리고 묻히지 못하는 것을 아주 큰 재앙과 수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라도 그 왕이 선정을 베풀었느냐, 악정을 베풀었느냐에 따라ㅡ이 기준도 역시 말씀에 비추어 기준을 정하는 것입니다ㅡ왕의 무덤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역대하 21:20절. “봉독” 여호람이 다윗성에 장사되기는 하나 열왕의 묘실에는 못 들어감.
역대하 24:16절. “봉독” 여호야다는 열왕의 묘실에 묻힘-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한 선.
역대하 28:27절. “봉독” 아하스는 열왕의 묘실에 들이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 장사함-악한 왕.
역대하 32:33절. “봉독” 히스기야는 다윗왕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됨-저의 죽음에 존경을 표함.

 
 
 
 
그런데 감히 셉나가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무덤의 높은 곳을 미리 준비하여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교만과 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휴지를 둘둘 말아 공처럼 하여, 던져버리듯이 셉나를 광막한 지경에 던져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친 것입니다. 이 때의 왕이 히스기야입니다. 그러니 히스기야에게 수치를 끼친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 수치를 끼친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셉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셉나에게 붙어있던 자들까지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봅니다. “봉독”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아 지리니 그 못이 부러져서 거기에 걸린 물건이 다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기둥에 못을 박고서는 그 못에다 물건을 걸어두는데 그 못이 삭아 버리니 걸린 물건이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셉나가 고위 관리가 되었느니 자기의 친인척을 등용한 것입니다. 그에게 붙어서 함께 얻어먹은 자들이 모두 함께 부수어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하시고 그 지위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것입니다.
셉나 대신 엘리아김에게 지위를 넘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적용을 한 번 하고서 넘어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셉나 이야기를 하면 그 나쁜 놈, 이라고 말하고 자신은 엘리아김 정도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셉나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 심중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학생부군신위’-영화. 장례식을 하면서 온갖 인간의 탐욕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풍 산부인과’-미달이 아빠. 친척의 장례식 빈소에서 자기에게 남겨진 땅이 있다는 소식에 웃는 모습.

 
 
 
 
가정에 어려움이 닥치거나 자기의 단체에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납니까? 자기의 손익을 계산해 보는 것입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언제나 자기의 손익을 먼저 계산하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목사도, 성도도. 그러므로 셉나는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셉나를 직위해제시키고 엘리아김을 대신 그 자리에 세웁니다.
 
 
 
 
20-21절입니다. “봉독” 옷을 입히고 띠를 띠고 그 정권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집의 아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아김을 22절에서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신 답니다. 그래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열쇠가 커서 어깨에 두를 정도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제사장들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열쇠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고도 합니다. 어떻든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은 권세가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엘리아김을 잘 박힌 못과 같이 견고케 하여 그 아비집의 영광이 되게 하고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에게 걸리는 것입니다.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 그에게 걸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세워짐으로 그에게 달려 살게 되는 자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25절에서 역시 그 날에 그 못이 삭아 부러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셉나에 대한 것입니까? 엘리아김에 대한 것입니까? 셉나에 대한 것이라면 엘리아김에 대한 부분은 괄호로 묶은 것으로 보면 셉나에 대한 것만 됩니다. 그래서 셉나에 대한 경고만이라고 보는 자도 있고 둘 다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둘 다라고 봅니다. 엘리아김이 영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기에 그렇게 봅니다.
 
 
 
 
다윗의 궁이 망한 것입니다. 그러니 열쇠를 가지고 열고 닫고 할 궁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단히 박힌 못이 삭아서 부러지는 것처럼 거기에 걸린 그릇들이, 곧 사람들이 다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말씀을 신약에서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문을 열고 닫는다는 표현이 마태복음 16:19절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을 가지고 가톨릭과 개신교가 아직도 싸우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베드로가 천국열쇠를 가진 초대 교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교황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황이 있는 교회 안에 들어와야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황의 말을 듣지 않으면 파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을 엘리아김에게 다윗의 열쇠를 준다는 말씀으로 보면 베드로는 아무 것도 아닌 종입니다. 열쇠를 들고서 열고 닫고 할 수 있어도 그 주인의 말을 듣고서 열고 닫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매고 푼다는 것은 지금 베드로가 주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의도대로 매고 풀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신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천국의 열쇠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쇠를 맡은 베드로가 엘리아김처럼 종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엘리아김이 열쇠를 가지고 열고 닫고 하지만 왕의 명령에 의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으로는 어떤 누구도 영원한 열쇠를 가지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입니까? 구약의 이러한 부분을 가지고 신약은 어떻게 그리스도로 접목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7-13절을 봅니다. “봉독”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을 열어 두신다고 합니다. 어떠한 성도들입니까?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배반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킨 것입니까? 사단의 회, 곧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 자기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는 자들, 이들의 핍박으로부터 주님의 약속을, 그 주신 믿음을 인내로 지킨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망이 그에게 걸려 있는 것입니다. 셉나도 아니요, 엘리아김도 아닙니다. 그들은 다 삭아지는 못과 같습니다. 영원히 견고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는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천국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 매달려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달려 있지 않은 모든 것은 그 날에 삭은 못처럼 부러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를 못하고 다 부수어 지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나 공적이나 그 무엇으로도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믿던 그 모든 것이 삭은 못처럼 부러지는데 무엇을 의지하고 매달리겠습니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분만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23:1-18  두로에 관한 경고  2000. 1. 19.

이사야 13장에서 시작된 경고가 23장의 두로의 경고로 일단락됩니다. 그동안 경고를 받은 나라는 바벨론으로부터 앗수르, 모압, 다메섹, 구스, 애굽 등의 경고에 이어 오늘 두로에 관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한 단락을 마무리하면서 왜 이러한 경고를 계속하는가를 이사야 전체적인 흐름을 통하여 한번씩 점검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숲을 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나라의 경고와 심판을 통하여 나무를 본다면 전체의 흐름은 숲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숲 안에서 나무를 보아야 방향을 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전체 아니 성경 전체에서 경고와 심판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 범죄한 세상이기에 심판을 통하여 악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흐름이 언약을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주일 저녁에 창세기를 보면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심으로 경고와 거울로 삼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고와 심판의 과정에서 누구와의 언약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까?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심판을 알리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사야서는 누구 언약을 중심으로 경고와 심판을 하고 있을까요?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이후의 왕들의 역사에서 계속되는 심판의 경고는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지서에서 경고와 심판을 통하여 다윗 언약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5절입니다. “봉독”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와서 공의로 심판하는 자가 나올 것을 말하심으로 기존의 이스라엘을 심판하면서 동시에 모든 세계에 대한 심판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까지 여러 나라를 개별적으로 언급하여 경고하고 심판하시는 것은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다윗의 언약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 언약이란 왕 한 사람을 잘 만남으로 그 백성이 복되게 살아감을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붙어 있으면 복을 받듯이 다윗에게 붙어 있으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을 버리고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들의 무기와 성벽과 저수지를 파는 것으로 자기의 구원의 힘을 삼고자 하는 자들과 나라에 대하여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하여 결국은 이사야 끝에서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사야 66:22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경고와 심판을 통하여 옛 하늘아래 옛 땅위에 사는 모든 것들을 정화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작업이 선지서의 경고 안에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성경 전체에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제일이라고 살아가고 있기에 끊임없이 경고를 받고 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먹고 마시며 내일 죽을 테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느냐구요? 헛된 것을 의지하지 말고 주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두로에 관한 경고인데 두로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늘 함께 말하여지는 도시입니다. 이 레바논 지역의 옛 이름이 페니키아입니다. 페니키아의 모성이 시돈이고 무역중심의 도시가 두로입니다. 이 두로에서 전 지중해 연안의 무역이 성행하였습니다. 바벨론이 육지의 제국이라면 두로와 시돈은 바다의 제국이라고 할 만큼 무역이 번성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 두로가 망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두로의 배들이 다시스를 돌아서 무역을 하고 돌아오다가 깃딤, 지금의 키프로스 섬에 있을 때에 두로의 멸망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돌아가야 할 집이 없어진 것입니다. 열심히 무역을 하고 기다리던 가족과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는 중에 돌아갈 곳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허망할까요? 평생을 일하고서 그 일한 것이 모두 허무한 일임을 발견한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그러한 것에 눈뜨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두로를 향하여 슬피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2-3절에서는, 이 두로와 거래를 하던 해변 거민들아,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역을 하던 나라 중에 애굽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곡물을 나일강을 통하여 다른 곳으로 무역을 할 때 그것을 두로가 주로 담당하였는데 이러한 두로의 멸망은 여러 주변 국가들까지 놀라운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시돈이여 부끄러워하라는 것입니다. 시돈이 서울이라면 두로는 인천쯤 되는 것입니다. 이 무역항이 망하였으니 시돈아, 부끄러워하라는 것입니다. 바다를 통하여 수입이 들어 왔는데 두로가 망하였으니 시돈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유명하고 세상에서 존귀한 이 도시가 망한 것이 누구의 계획입니까?
 
 
 
 
8-12절입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여호와께서 두로를 망하게 하십니까? 그들의 교만입니다. 그들이 무역으로 인하여 부가 축적되자 교만하여 진 것입니다. 9절에서 “모든 영광의 교만을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생의 영광이라는 그 교만을 하나님이 욕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는 영광과 부귀와 존귀를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그것을 향하여만 달려갑니다. 겸손히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복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러한 열방까지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 도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다위에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흔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흔들어 버리시니 두로의 멸망이 마치 앗수르가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였던 것처럼 망한 것입니다. 그러니 세계의 흥망성쇠가 여호와의 손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15-16절에서, 두로가 심판을 받아서 잊어버림이 되었다가 70년이 되어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한 회복으로 다시 무역으로 이익을 가지게 되나 그것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지 아니하고 주의 백성들이 먹고 입을 자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성취 되었는지는 성경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슷하게 성취되는 것은 볼 수가 있습니다. 
 
 
 
 
에스라 1:1-4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배경입니다. 이스라엘이 70년 만에 회복되어 오는데 두로도 70년 만에 망하였다가 다시 회복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소생을 시키는지를 에스라 3:6-7절에서 보겠습니다. “봉독”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는 때입니다. 이때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수운하게 하였더라.
 
 
 
 
한 도시가 사치와 부귀로 망하였다가 다시 회복되어 무역을 하게 되는데 그 회복이 자기 나라를 위한 무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일에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기 위한 회복입니다.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수운하여 이스라엘의 성전을 지은 것은 솔로몬 때 이미 있었던 일입니다. 열왕기상 5:1,8,9절에서 두로 왕 히람에게 나무를 달라고 합니다. 그 대신에 곡물을 주지요.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전이 지어집니다. 그러나 성전이 파괴되고 나서 다시 성전이 지어지는 때에 역시 필요한 목재를 레바논에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인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이 이사야 60:13절에 한곳 더 있습니다. “봉독” 그런데 이사야 60장 이하에 나타나는 말씀은 장차 메시아의 도래로 인한 온 세계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택한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로의 망함과 흥함이 주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도구의 역할을 두 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만하여 망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역을 통하여 이익을 남기고 그리하여 부가 축적되고 사람들과 나라들에게서 존귀를 받던 나라가 망하는 것을 통하여 장차 인류가 어떤 모양으로 망하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4-20절에 보면 바벨론이 전 세계의 무역의 중심입니다. 그 무역으로 인하여 온갖 사치와 음행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바벨론이 일시간에 망하게 되자 그 바벨론과 거래를 하던 온 세계의 상고들이 울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20절에 보면 그러한 과정에서 성도들은 그 망하는 것을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의 무역으로 인한 경제를 믿고서 사는 사람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활동을 안 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정당한 경제활동을 하지만 그것에만 목숨을 달고 있지 않기에 세상의 경제력을 가진 자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경제가 무너질 날이 이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이것이 우리를 영생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모든 역사를 다 주께서 자신의 언약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두로를 누가 망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그러면 회복은 누가 시키십니까? 하나님이. 왜 회복을 시키십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도구로 성전 재건하는 일에 나무 나르는 도시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살아가는 목표가 언제나 주님의 언약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경도 공부하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계속하여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때로 허탈하게 만드는 면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이루어 질 줄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기에 이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한 함께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이 말씀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늘 만물이 주님께로부터 말미암고 주님에 의하여 유지되고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로마서 11:36절의 말씀을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 것이라고는 원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것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사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사야 24:1-23  그날이 오면  2000. 1. 26.

선지자를 다른 말로 무엇이라 합니까? 예언자라고 하지요. 성령의 은사 가운데도 예언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기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받으려고 기도한다는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결국은 자기의 운명에 매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선지자 즉 예언자가 예언하는 것은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가를 계시로 받았기에 그 내용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개인이나 국가의 흥망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 언약 안에 있는 자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궁극적인 목적이 한 개인의 흥망이나 단체의 흥망을 점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인생의 장래 일을 미리 점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가려 두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전도서 3장에서 때가 있다는 말씀에 그 때를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있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인생이 자기의 계산을 갖고 미리 점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외하며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 말라는 것은 생활의 염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개인의 운명에 너무 집착을 하다 보면 자신이 피조물임을 잊어버리고 모든 언약의 중심을 자기에게 두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구원파라는 이단이 나오기도 하고 자기들에게만 와야 구원이 있다는 이단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얻을 자격도, 비결도 없음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단지 주님의 긍휼이 베풀어 진 자만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긍휼로 믿음을 받은 사람은 이제 관심사가 자기 개인의 흥망이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일하실까에 대한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계획과 섭리를 옳습니다,  하고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그 예언의 성취를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더욱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주님의 백성의 일인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24장에서는 온 세계에 미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1절에서 15절까지와 16절에서 23절까지가 전체적이 내용으로 보면 중복적입니다. 어떤 점에서 중복적인가 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남은 자와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 중복적입니다. 그러므로 1절에서 23절 전체에서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신 모습과 그 이유 그리고 그 심판에서 남은 자의 모습과 그들이 하는 일을 보겠습니다.
 
 
 
 
1) 심판을 당한 황무한 모습을 봅니다. 1절에서 13절까지, 16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황무하게 뒤집어엎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노하셨으면 땅을 뒤집어엎어 버리실까요?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2절에서 빈부귀천 남녀노소 아무런 구별이 없이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뒤집어엎어지는 것입니다. 백성과 제사장, 종과 주인, 사는 자와 파는 자, 빚을 얻는 자와 주는 자, 이자를 내는 자와 받는 자, 이러한 구별이 쓸 데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이런 것들입니다. 누가 부자냐 가난하냐? 누가 주인이냐 종이냐? 건강하냐 병들었느냐? 학력의 유무, 집안 배경, 이러한 것들로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에 의하여 성공이니 실패니,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러한 기준이 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이 생긴 것이 이미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부자가 무슨 소용이며 집안 좋은 것이 무슨 소용이며 얼굴 예쁘고 건강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결과. 3, 4, 6, 7, 8, 9, 10, 11, 12, 13, 16, 17, 18, 19, 20절.  결국 사람들이 자기의 분신과 같은 땅이 흔들리고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기초한 모든 것이 모두 흔들리고 깨어집니다. 18절에서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는 노아홍수 때의 하늘 문이 열려서 홍수가 쏟아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하늘이 열려져 불이 쏟아지면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땅의 가치들이 다 심판받는 것입니다. 2절에 나타난, 그러한 구별로 살아가는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하나님이 다스리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사람의 차별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긍휼만 넘치는 곳이기에 한 분 주님만 영광을 받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라면 이러한 세상의 구별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하여 나온 자들이 모인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진 세상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곳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모두 엎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5절과 20절입니다.
 
 
 
 
2) 심판의 이유. 5절과 20절에 보면 사람의 죄악입니다. 5절에 보면 그 거민으로 땅이 더럽혀 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가 땅을 더럽힌 것입니다. 그 죄란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한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기들의 죄의 욕구를 따라 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20절에서는 그 죄악이 중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죄악으로 인하여 온 땅이 황무하고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가 진단을 받는다면, 죄로 인하여 망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죄로 인하여 망하는 곳에서 점치듯이 자기의 생존의 보장을 위하여 쫓아다니는 것이 이미 심판아래 있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의 택한 자만 남기시는 것입니다.
 
 
 
 
3) 남은 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을 하시는 것은 결국 자기의 백성만 남기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남아진 자들은 자기들의 의로운 행위로 남아진 자들이 아닙니다. 동일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긍휼로, 하나님의 선택으로 남겨진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심판가운데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13절입니다. 세계 민족이 다 심판을 당하는데 그 중에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감람나무를 흔들어 거두고 나서 꼭대기에 몇 개 남은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포도를 수확하고 나면 포도 잎사귀 뒤에 가려서 잘 안 보이는 몇 송이가 남듯이 그렇게 남겨진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심판을 통하여 남겨진 자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세상의 것에 대하여 심판을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의 빈부귀천이라는 구분이, 세상의 여러 가지 성공과 실패라는 사고방식이 이미 심판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남은 자들은 다시는 세상의 어떠한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심판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의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4) 심판의 결과. 주님이 그 날에 심판을 하시는데 그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봅니다. 요한복음 16:7-11절입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판장은 세상의 왕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심판은 이 세상의 임금들뿐만 아니라 모든 공중권세 잡은 자까지 모두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24:21-22절을 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심판을 행하시는데 높은 군대를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군왕들도 벌하시는 것입니다. 높은 군대란 천사들을 말합니다. 타락한 천사들, 즉 사탄의 군대들과 그들의 조종을 받고 있는 땅의 모든 왕들까지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2편에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하는 말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그 맨 것을 끊어 버리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며 이것을 세상의 권세자와 임금들을 동원하여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전면적인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이 이사야 24:21절의 ‘그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 날’이란 벌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높은 군대와 땅의 왕들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의 밀접한 관계를 다니엘서에 보면 잘 나타납니다. 다니엘에게 계시하던 천사가 바사군의 군대에 막혀 있었는데 미가엘이 와서 도와주었다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높은 군대라는 이들이 땅의 왕들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 심판을 받은 것입니까? 십자가와 부활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사망의 왕노릇 하고 있던 그 권세를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한계가 노출되고 죄수가 유죄 판결을 받고 그 처분을 기다리듯이 형벌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전에는 아무도 사망의 왕노릇 하는데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십자가의 권세가 사망의 왕노릇 하는 자들을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최종적인 지옥의 형벌을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4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유다서 6절.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요한계시록 20장에도 용이 결박되니 이는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고 합니다. 일천년 동안 결박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이 세상의 임금, 이 세상의 기준, 가치관에 의한 판단이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주님의 그 일하심의 결과를 이 예언을 통하여 미리 알기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5) 남은 자의 할 일. 14절에서 16절 중반입니다. ‘바다와 동방에서’를 새번역에서는 서쪽, 동쪽으로 번역을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는가 하면 이단들이 ‘동방에서’ 하면서, 그 동방이 한국이라고 말하며 어떤 특정인물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에서 동으로 또 땅 끝에서 즉 온 세상에서 심판을 받고서 나온 남은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무엇을 합니까?
 
 
 
 
노래합니다.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신 그 모든 일은 의로우십니다, 하면서 영광의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광이 23절에서 보면 하늘의 달과 해가 무색해지는 그런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3절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2절에서 어린양이 성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것이 성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성된 하늘의 모형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장로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영광을 돌립니다. 요한계시록 4:10-11절. “봉독”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모든 영광을 돌리는 날이 그 날이며, 지금 그 영광을 찬양하는 자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25:1-12  심판과 잔치  2000. 2. 2.

25장 1절에서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24장에서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고 남은 자를 구원하셔서 시온에 왕으로 좌정하시니 장로들이 찬양을 하는 내용에 연결된 찬양인 것입니다. 25:1절의 찬양하는 내용은 “주의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고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계획하신 바를 성실과 진실로 이루어 내심을 인하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성실과 진실을 말하면, 언제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내용에 있어서 성실과 진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실과 진실하심으로 이루어 내신 일의 내용을 보면 심판을 행하신 것도 주의 성실과 진실하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실과 진실은 심판받을 자에게는 반드시 심판을 하시는 것도 주님의 성실과 진실하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금도 성실히 진실 되게 심판받을 자를 심판하시고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받아 마땅한 우리가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는 것도 결국 주님의 성실과 진실로 일하심의 결과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도 동일하게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실과 진실하심으로 심판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2절에서 5절입니다. 주께서 성읍으로 무더기를 이루시고 견고한 성읍을 황무케 하시며 외인의 궁성으로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영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견고하고 화려하던 궁성들이 영영히 서지 못하도록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은 그 강함으로 약한 자들에게 포학을 행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기세가 폭풍처럼 몰아닥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주님께서 빈궁한 자의 보장이 되어 주시고 환난 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 되어 주시고 폭풍을 피하는 피난처와 폭양을 가리는 그늘이 되어 주심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마른 땅에 쏟아지는 폭양을 제거하듯이 주께서 외인의 훤화를 그치게 하시고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포학한 자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승리의 노래를 부른 것을 낮추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강하고 힘 있고 능력 있는 것들을 다 파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들의 스스로 이루어 낸 힘과 높아짐과 능력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란 주님의 뜻대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주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힘을 축적하여 자기가 주가 되고자 하는 시도가 인간에게 나타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죄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약하고 무능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면 오히려 그것이 저주인양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크게 높게 빠르게’를 외치며 강함과 부를 축적하여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더 죽여 버리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지금 세계화를 반대하는 단체들이 강대국의 정상들이 회의를 하는 곳에 와서 데모하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기에 약한 나라가 죽는다는 데모입니다. 그러자 강대국들이 선심을 쓰느라고 약소국에도 공정한 이익을 나누자는 말을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실무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세계가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치열한 싸움에 휩쓸려 하루하루 전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고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있는 것이 인류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강대국이 있었고 언제나 강대국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모습이 바로 죄된 모습인 것입니다. 동일하게 피조물로서 한 주님의 다스림을 받지 아니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스스로가 다 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왜 이 땅을 심판하시는지를 알게 되고 우리가 심판아래 있음을 알아야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심판을 모르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계속 쌓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더 큰 업적들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여, 힘을 더하여 주소서, 힘을 더하여 주소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을 더욱 축적하는 일에 부르고 있는 것은 더욱 심판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를 쌓고 있고 심판을 축적하고 있으면서 축복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은 우리에게 삶을 주시는 창조주에 대한 배반인 것입니다. 스스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 이러한 배반인 동시에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의지하고 집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 세상적인 것을 향유함으로써 인간 자신의 능력과 행함을 통해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자기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8: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주일 낮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복음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우리를 신뢰하고 살리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결국 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노력들이 세상에서 부자 되고 강하게 되고 출세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아주 종교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단지 그들이 외식을 했다는 의미보다 더 깊은 차원의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꼭 외식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으로 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 같은 경우도 바리새인입니다. 그러한 열심의 결국은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들의 의를 믿게 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가 얼마나 심층깊이, 사람이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이 들어 차 있는지를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죄가 아니라 스스로 힘을 축적하는 것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나라가 힘을 비축하여 약한 나라를 괴롭히는 그런 나라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한 나라를 택하여 자기들의 지도자도 의지하지 말고 자기들의 힘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라고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물기를 원하기 보다는 계속하여 이웃나라의 강대국을 본받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역시 하나님을 버리는 죄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이 보이기 시작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는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정성으로 섬길 테니 무엇을 달라고 합니까?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국가가 망한 그 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윤리 도덕적으로 숨어 있는 죄와 종교적인 모습으로 위장하고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는 그러한 죄들은 아직 알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를 통하여 인간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무엇을 심판하시는지를 모르면 성경의 절반의 내용을 버리는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세상의 강대국들을 심판하시고 그러한 나라에서도 몇몇 남은 자들과 또 주께서 약하여 당하기만 하는 나라 가운데서도 주의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셔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 잔치의 내용이 6절에서 9절입니다. 아주 풍성하고 기름진 잔치입니다. 여기에 참석하는 자들은 만방에서 오는데 그들의 면박을 가리운 것을 벗기시는 것입니다. 새번역에서 보면 그들의 수의를 벗긴다고 합니다. 죄수의 복장을, 슬픔의 복장을 벗기시고 새로운 옷을 주시는 것이지요. 의의 옷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잔치를 여는 것입니다. 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의 복이 무엇입니까? 잔치에 참여한 것이 복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멸하여 주십니까?
 
  1) 사망을 멸하여 주십니다. (고후15:54, 딤후1:10, 계21:4)
  2) 눈물을 씻겨주십니다. (계21:4)
  3) 수치를 제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보혈)

 
 
 
 
이 영광스러운 잔치에, 이 놀라운 잔치에 누가 참여할 수 있습니까? 9절입니다.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우리의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이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기다린 자들입니다. 어떠한 세상의 힘이나 세력을 의지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목사도 아니고 자기의 집안의 기독교 전통도 아니고 자기 교회의 힘도 아니고 오직 주님만 기다린 사람, 주님만 의지한 사람이 이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려면 자꾸만 그런 것들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걸려 넘어지고 깨어져야만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습이란 구약이나 신약이나 자기의 힘을 스스로 축적하여,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년에 자기의 군대 수를 헤아리면서 자기의 힘을 알아보려다가 혼난 사건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수를 통한 힘을 나타내고자 하였을 때 칠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의 진정한 성도의 모습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를 시편에서 아주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을 때, 핍박받을 때입니다. 한곳만 보겠습니다.
 
 
 
 
시편 142:4절.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없는 것만 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도움도 없어 보이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5절에서 여호와만이 자기의 피난처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너희의 도움이 어디에 있느냐고 놀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더라도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고서 기다리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다시 이사야 25장 4절을 봅니다. 강대국의 포학 앞에서 무력한 사람들의 피난처는 결국 여호와입니다. 그러나 이 분을 신뢰하는 것은 외적으로는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신뢰치 아니하고 세상의 힘과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외롭습니다. 세상에 기댈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오직 주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것이지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나의 야망이나 꿈을 이루지 못하여 우는 한의 눈물이 아닙니다. 구약이 이미 이러한데 신약에서는 더욱 분명하겠지요? 누가 심판을 받고 누가 잔치에 참여합니까?
 
 
 
 
고린도후서 1:8-9절을 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힘 있는 자였습니다. 당당한 권세를 가지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어떤 곤란을 당합니까? 너무나 많은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더 이상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에게 시련과 환란이 닥치는 것은 다른 것 의지 말고 주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그 잔치에 참여 못하면 이사야 25:10-12절에 모압이 거름물 속의 초개같이 밟히는 것입니다. 거름물이란 똥입니다. 이처럼 비참한 밟힘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믿음으로 오는 시련과 환난과 눈물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잔치에 참여시켜 다시는 사망이 없고 눈물이나 수치가 없는 그 나라에서 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이 선물입니다.
 
 
 
 
고린도후서 6:8-10절입니다. “봉독” “근심하는 것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러한 자가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설날에 무엇으로 사람들을 부요케 하시겠습니까? 없어질 세상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는 말할 수 없는 영생의 복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시는 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사야 26:1-27:1  구원의 성곽  2000. 2. 9.

어제 책을 한권 읽었는데 제목이 ‘자기 중심이냐 예수 중심이냐’ 라는 책입니다. 책 내용 중에 믿음이 사람마다 수백 가지라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중심으로 자기 편리한 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에 이르는 믿음은 오직 한 가지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내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지 말고 성경을 통하여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등록하는 것으로 천국가는 줄 알고 있고 교회가 시키는 일 몇 가지하면 또는 목사가 시키는 일을 하면 구원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과연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자녀가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 교육청에까지 쫓아다니면서 진정을 하면서 왜 자기가 영생을 얻는 일에는 그렇게 소홀히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서를 통하여 지금 우리의 신앙이 바른가, 아닌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틀린 것은 고치는 것이고 바른 길이라면 확신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더 많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자기중심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거야, 하는 착각을 성경을 통하여 교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구원의 성곽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성곽 안에 있는 자는 어떠한 자들이며 구원의 성곽에 들지 못한 자는 또한 어떤 자임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자를 구원하시는지, 또 어떤 자를 심판하시는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배우고 바른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 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25장 10-12절에서 모압이 심판을 당합니다. 마치 거름더미의 초개처럼 짓밟히는 심판을 당하는데 유대는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노래가 1절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경고한 성읍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으로, 여호와의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흙이나 돌이나 벽돌로 세운 성곽이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이 성곽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곽(城郭)은 보이지 않는 성곽입니다. 세상에 보이지 않는 성곽을 믿고 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성곽은 믿음의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어느 전도사 이야기-문을 닫고 다니지 않는다. 가져가면 가져가는 것이지, 하는 것이지요. 그런 말이 와전이 되어 주일 학생들이 문 닫고 다니지 말라고 부모에게 이야기해서 문제가 되기도 한 적이 있습니다-그러나 이 전도사의 중심은 여호와가 성곽이 된다는 그런 믿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기의 성곽을 믿고 살지 않고 여호와가 성곽임을 믿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5:1절에서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와께서 성곽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가 방패도 되어 주시고 성곽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곽, 구원의 성곽에 누가 들어옵니까?
 
 
 
 
1) 2절입니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구원의 성곽으로 들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2) 3절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자들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실하게 의뢰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형편이 좋을 때는 내 힘으로 사는 양 그렇게 살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제서야 주여!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심지가 견고한 사람입니다.
 
 
 
 
결국 구원의 성곽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들어온 이들이 해야 할 일 역시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서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라고 합니다.그러면 구원의 성곽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은 어떠한 자들이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5-6절입니다. 여호와를 구원의 성곽으로 삼지 않고 스스로의 높은 성곽을 삼은 자들입니다. 크고 견고한 성과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진토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로 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곧 빈궁한 자와 곤핍한 자의 걸음이 그것을 밟아버리는 그런 심판인 것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와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의 구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심판 가운데서도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길을 평탄케 하시는 것입니다(7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서 구원받는 자와 심판받는 자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의 성곽으로 삼고 그 약속을 신뢰하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만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거나 정략적인 제휴를 하게 되면 오히려 심판을 받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흐름이 최후의 심판에까지 이르게 됨을 선지서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통하여 악인의 자세와 구원받은 자의 자세가 나타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이 영원한 구원과 심판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과연 지금 구원의 길로 가고 있는가, 심판의 길로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계속하여 대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구원의 성곽으로 삼은 자는 심판을 보면서 더욱 주님을 기다리고 또한 주님의 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8-9절을 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더욱 주를 기다리며 주의 이름을 사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함으로 재앙을 받을 때에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주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이렇게 되었나이다, 하면서 주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며 간절히 주를 구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31-40절. “봉독” 재앙이 범죄임을 알고 돌이킴, 그러므로 의인은 심판을 보면서 주님의 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심판을 보면서 주님의 의를 배우는 자를 룻을 통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룻기 1:13절을 봅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돌아가고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룻이 어떻게 고백하고 따라옵니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니 죽음이 나를 떼어 놓기 전에는 내가 어머니를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할 때 예수 믿는 사람이 잘되어야 전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주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물론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은 것입니다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서 다른 복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자가 잘되어야 예수를 전하는데 쉽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롯에게서 증명이 됩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서 모압으로 이민 간 나오미의 가정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에 가서 며느리 둘을 봅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죽고 자기 남편 죽고 자기 시동생 죽고 과부만 세 명 남은 가정입니다. 무엇을 보고서 룻이 따라 나서는 것입니까? 부자 되어 금의환향하는 것도 아니고 졸딱 망한 집안에 고생할 것을 알면서 왜 따라 나섭니까? 심판받은 가정에 무엇이 있다고 따라 나선 것입니까?
 
 
 
 
그러한 심판을 통하여 롯이 무엇을 배웠습니까? 주님의 의를 배운 것입니다. 이것이 물론 주님의 은혜입니다. 롯을 통하여 예수님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그러니 이러한 롯이 바로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을 통하여 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고백하는 말이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는 것을 듣고서 이런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다시 26:9절 하반절을 봅니다.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보면서 지금 의를 배우는 자는 구원에 이르지만 그러나 의를 배우지 않는 악인에게는 최후의 심판을 통하여 의를 보게 될 것이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절을 봅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황폐화 되는 것은 여호와의 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손이 높이 들리심은 심판을 행하시는 것인데도 악인을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아니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악인을 심판하시고, 심판을 통하여 의를 배우고 주께 나온 자들을 구하시는 주님의 열성을 보고서 그들이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지금은 주를 의지하는 자들보다 자기들의 높은 성을 의지하는 자들이 힘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눈에 보이는 성이 없으니 악인들이 우습게 여깁니다. 그러나 결국 의인을 구하시는 주님의 열심을 보면 악인들이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인은 은총을 입을 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합니다.
 
 
 
 
지금 의로우신 주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입고도 의를 배우지 아니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역사를 보고서도 의를 배우지 아니합니다.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심판 가운데서 의인은 오직 주님만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주님 외에 다른 주들이 관할하였으나 그러나 우리는 주님만 의뢰하였나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심판을 받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그들의 주를 섬기자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이미 자기들의 주가 따로 있기에 이방의 신상에 절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비록 사자굴과 풀무불이 기다린다고 하여도, 그런 곳에서 구하여 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주를 섬기는 일에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모아서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는 것입니다(15절). 그러므로 이러한 나라에 들어오지 않은 세상의 나라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와 대비하여 사람의 수고로 만든 나라는 헛수고 입니다(17-18절). 잉태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였지만 바람을 낳은 것이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비의 결과는 최후의 심판으로 연결됩니다.
 
 
 
 
19절에서 27:1절까지 보면 최후의 심판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19절), 억울하게 살해당한 자들의 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21절), 이러한 와중에서 성도는 잠깐 피하라는 것입니다(20절). 그리고 최후로 뱀이며 용을 죽이시는 것입니다(27:1절). 이러한 최후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미리 예시하는 것입니다. 누가 최후의 심판에 이를 지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의 성곽에 들어가는 자를 대비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을 봅니다. 1절, 용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입니다. 이것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내어 놓는 것은 13절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이사야에서 이미 예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에 일어날 일을 성경을 통하여 이미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있는 자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속하여 사는가를 날마다 점검하는 것이 말씀을 통하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이 세상의 삶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영생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걸음이 제대로 영생의 길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심판의 길로 가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더욱 주를 의지하고 영원토록 의지하여 여호와가 우리의 성곽이 되어 주시기를 소원하며 사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27:1-13  포도원의 노래  2000. 2. 16.

이사야서에서 계속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교차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때로 복잡하여 보이기도 하는데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간략하게 정리가 됩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투쟁이라는 창세기 3:15절의 그 언약의 내용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왕되심을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고 주가 되려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가운데서 언제나 심판을 받을 때는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자체적인 힘을 축적할 때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서려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에 의존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서 만물을 다스리는 뛰어난 능력을 받았지만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이 능력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혹의 내용이지요.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
 
 
 
 
그러므로 인간이 피조물임을 알고 주님께 복종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이고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러니 죄란 끊임없이 사람의 자기 가능성을 챙기면서 스스로의 안정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 말라는 것은 신앙의 첫 걸음이자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한다는 자체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기에 이러한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를 안 한다는 것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기에 주께서 살려 주시고 허락하시면 이것도 저것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일 일이 염려가 되시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며 또한 죄임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나는 나를 믿지 못합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죄의 원리를 알고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를 알고 나면 이스라엘이 심판받고 회복되고 하는 복잡한 과정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그렇게 많이 심판과 회복이 교차되는 중심을 보아도 교만하고 하나님을 의지 안하면 심판입니다. 그래서 심판 가운데서 자기들이 의지한 이방의 힘이 우상임을 깨닫고 회개하면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포도원의 노래가 이사야 5장에서도 나타납니다. 5장의 포도원의 노래와 지금 27장의 포도원의 노래가 대조적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표상하는 것은 동일한데 5장에서는 심판 받는 포도원이고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포도원입니다. 그러면 동일한 하나님의 포도원인 이스라엘이 왜 한 곳에서는 심판을 받고 한 곳에서는 보호를 입고 있습니까? 이 비교를 통하여 오늘 성도의 자세와 교회의 자세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 오늘 신약시대의 성도와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면서 또 다시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 나라의 완성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심판 받는 포도원을 봅니다.
 
 
 
 
이사야 5:1-7절. “봉독” 이러한 심판의 대표적인 죄악을 8절에서 홀로 이 땅 가운데서 거하려하는 것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자기의 부를 축적하여 홀로 이 땅 가운에 남으려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실력으로 재력으로 남아 보겠다는 것이 원초적인 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잘 먹고 잘 살자,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생각 안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생각 안하고 자기가 주인으로 사는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삶도 돌아보면 얼마나 이러한 염려와 걱정이 많습니까? 자기 가정을 생각하여도 염려와 걱정,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안전한 가정이 되게 하려고 얼마나 많은 애를 쓰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마음껏 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마땅히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것이기에 당연히 열심히 일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염려가 늘 있으니 우리가 교회에 대한 염려도 동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염려 입니까? 우리 교회가 잘 되어야 할 텐데, 이러한 염려가 성도에게 다 있습니다. 그 교회가 자기를 구원해 주는 것처럼 생각하기에 교회가 번창하고 잘되는 것을 그 기준도 세상의 기준과 동일하게 적용하면서 마구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제일 염려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목사이겠지요. 월급 받으니까. 그러니 이러한 염려를 하는 것이 우리는 주님을 잘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꼭 이런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교회로 모이지도 않고 헌금도 안하면 교회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생각이 교회를 망치는 것입니다. 종이란 죽도록 충성해야 마땅한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죽도록 충성하고 종은 무익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종의 자세인데 자기가 어떻게 하고, 안하고를 가늠하여 교회가 되고, 안 되고를 염려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죄입니다.
 
 
 
 
27:2-6절을 한 번 더 봉독합니다. 노래니까 천천히 노래처럼 한번 읽어 봅시다. 포도원지기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 포도원을 만드신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니 주인입니다. 주인이 무얼 합니까? 물을 주고 밤낮으로 돌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지금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계속하여 종교적인 이벤트를 시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 위쪽의 어느 교회 목사가 안식년이라고 성도들이 안식년 휴가를 주었답니다. 이것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공부를 더 깊이 하도록 그런 기회도 필요하지요. 그런데 그 안식년을 누리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를 두고서 멀리 가서 일년 동안 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쉬지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자기의 포도원을 돌보시는데 주님의 솜씨를 자기의 목회 실력보다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년에 한달씩만 쉬는 안식월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자기의 포도원을 어떻게 지키시는지를 봅시다. 3절에서 물을 주고 밤낮으로 돌보시고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적이 오면 어떻게 합니까? 대적을 모아서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완벽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이스라엘이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이방과 결탁하고 우상을 숭배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러한 헛된 것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7-8절입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치시는지를 보면 적당히 견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치는 자들을 치시는 것처럼 하지 않으시고 적당히 견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견책은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 가는 것입니다.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옮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견책을 하시는 이유는 9절입니다.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고 그 죄를 없이함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견책으로 인하여 이들이 포로로 잡혀 가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로 인하여 포로로 잡혀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섬긴 결과로 포로로 잡혀 갔기에 그 우상의 무용성을 알고 그 우상들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상이 다시는 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의 포도원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상을 숭배하던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는 것입니다.
 
 
 
 
10-11절입니다. 견고하던 성읍이 적막하고 황무하게 되어 송아지가 그 가지를 먹어 버리고 여인들이 그 마른 가지를 불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지각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를 몰라보고 우상을 숭배하였으니 완전히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지으신 자가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대로 보느냐, 북이스라엘로 보느냐 이방의 대적으로 보느냐의 견해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남유다 보다는 우상숭배를 더 많이 하였기에 북으로 보기도 하고 또 이방 대적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공통점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자기들의 힘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유대도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의 힘으로 서려면 언제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이 구약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 최후의 종말의 모습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적용을 하자면 교회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심판도 보게 됩니다. 우선 종말의 모습을 보고 오늘날 교회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12-13절입니다. 그날에 창일하는 하수 즉 유프라테스강에서부터 나일강에 이르기까지 과실을 떠는 것처럼 일일이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는 이미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허락하신 경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나라에서 주의 택한 백성을 모으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미 26:15절에서 그 경계를 확장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온 열국에서 주의 백성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날에 앗수르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 예루살렘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을 아직도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적으로 보아서 전 세계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주의 나라 새 예루살렘에서 노래 부를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오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방도 함께 나아와 전 우주적인 찬양으로 마무리가 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종말을 염두에 두고서 오늘의 교회 모습을 보면서 적용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 받은 것은 주님의 은혜의 선택으로 인하여 성령이 임하심으로 우리가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삶은 철저한 우상숭배였습니다. 자기가 우상이기도 하고 또는 종교와 신을 선택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자기의 영원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세상이 말하는 복과는 전혀 다른 은혜입니다. 지금까지의 믿고 의지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거부하게 하는 신앙입니다. 지금까지 영원하리라고 믿어 온 것이 너무나 덧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현재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가를 날마다 말씀으로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는 지금 스스로의 힘이나, 자기의 종교적인 업적을 의지하고 있다가는 심판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에스겔 9:3-6절을 봅니다. “봉독” 예루살렘의 성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고 그런 표가 없는 자는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다 죽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말고 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시작이 됩니까? 성전에서 늙은이로부터, 장로로부터입니다. 구약에서 이러하듯이 신약에서도 동일한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합니다.
 
 
 
 
베드로전서 4:17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교회라고 안전한 곳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주님의 피만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대신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교회란 주의 피로 값 주고 사셨기에 다른 사람의 땀이나 피가 섞이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행20:28). 그러므로 교회의 감독이나 목사란 이러한 그리스도의 피가 교회 안에 제대로 흐르고 있는지를 감독하여야 하며, 사람의 어떠한 힘이 아니라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는 일이 목사의 할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왜 중요합니까?
 
 
 
 
그러한 자들만을 남겨서 주님의 포도원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인도와 보호하심만을 믿고 사는 자들이 그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거할 것입니다.(이러한 포도원의 돌보심이 롬 8:31-39, 요 15:1-5) 포도원의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과실을 맺는 것입니다.








이사야 28:1-13  면류관  2000. 2. 23.

이사야 28장에서 35장까지 크게 한 단락이 됩니다. 그 중심은 시온이며 시온에 모퉁이 돌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열국을 경고하며 심판하는 것이 점점 포위망을 좁히듯이 좁혀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그 이루시는 방법과 장래의 영광스러운 모습까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더 믿고 의지하는 교인, 조용히 ‘하나님의 뜻과 행동’을 기다리기 보다는 처세술이나 인간적인 판단에 입각하여 ‘자신의 행동’을 서두르는 교인에게 아주 적절한 경고의 말씀이다”(김경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제 오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1절에서 6절까지 면류관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 즉 북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누어질 때 북쪽이 열 지파입니다. 그중에 가장 세력이 강한 지파가 에브라임입니다. 그러므로 에브라임 하면 북쪽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브라임의 죄를 지적하면서 교만한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교만한 면류관을 부수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만을 면류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면류관은 최종적인 것을 말합니다. 경기를 하고서 최후의 승자에게 면류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만의 면류관이란 교만의 극치입니다. 이러한 교만을 하나님이 부수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적군을 보내어서 밞아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이 에브라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에도 있는 것이며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에 어떠한 교만이 있는지를 사사기에서 살펴봅니다.
 
 
 
 
사사기 7:24-8:4절. “봉독” 기드온이 여호와의 전쟁을 함으로 300명으로 적들을 이기고 쫓겨 가는 적들을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막아서 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겸손히 말함으로 무마가 됩니다만 나중에 또 이러한 일이 있습니다.
 
 
 
 
사사기 12:1-7절 “봉독” 여기서는 사사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는데 에브라임이 또 트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고. 그러니 너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입다가 무슨 소리냐며 에브라임을 치는 것입니다. 발음을 하게 하여 4만 2천이나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브라임의 교만입니다. 자기들이 힘이 세다고, 큰 지파라고 무슨 공로라도 자기들이 차지해야 하고 또 자기들 중심으로 일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의 면류관입니다. 이러한 죄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어떠한 때에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납니까? 매사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을 때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구별 없이 모두가 자기의 뜻대로 세상이 움직여 주어야만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자기의 힘이 약하기에 그렇게 할 뿐이지 그것이 좋아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교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날씨 하나라도 자기의 기분을 맞추어 주지 못하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소풍가려는데 날씨가 굳으면 뭐라고 합니까? 그리고 실연을 하거나 시험에 떨어지거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면 방에 들어가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계속 캄캄한 밤이 되었으면, 전쟁이나 나 버렸으면, 전기 전화가 다 끊어져 버렸으면, 이런 생각으로 밤을 뒤척이다가 아침에 어김없이 해가 뜨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가를 경험하여 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므로 요즈음 히트하는 대중가요가 ‘바꿔’입니다. 바꿔, 세상을 다 바꾸라는 노래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그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바꾸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노래는 실연한 여인이 자기의 환경을 바꾸어 새롭게 하자는 그런 뜻으로 지은 것인데 정치와 묘하게 맛물려 가지고는 각 정당에서 서로 바꾸어 보자는 선전 노래로 쓰려는 것입니다. 낙천낙선 운동은 자기들이 사용하려고 하고 야당은 야당대로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60년 말 선거 포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 ‘배고파서 못 살겠다, 이번에는 바꾸어 보자’하는 구호입니다. 흑백 포스트인데 바꾸어 보아도 그 나물에 그 밥이지만 이러한 모습들이 결국 세상만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교만의 극치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나타나서, 아니야 세상의 중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는 예수님을 세상이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버림 받은 돌이 새롭게 모퉁이 돌이 됩니다.
 
 
 
 
그리고 면류관이란 교만을 면류관이라고 하였으니 어떤 금이나 은의 형체를 가진 면류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하늘나라에 가면 금 면류관, 은 면류관, 차등적인 면류관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는데 그러나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이란 어떠한 금이나 은이나 동으로 만든 면류관이 아님을 아시겠습니까? 생명이 면류관이고 의가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의 교만의 면류관을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부수어 버리시는 모습이 28:1-5절입니다. 에브라임이 취하여 비틀거리는 것입니다. 기름진 골짜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이 영화로운 관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쇠잔하여지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쇠잔해지는 꽃과 같으니 적들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우박과 광풍입니다. 떨어져 가는 꽃에 우박과 광풍이 몰아닥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에브라임을 던져버리고 밟아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일찍 익은 무화과처럼 얼른 따 먹혀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에브라임의 심판이며 오늘 이 시대에 교만한 인간들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천하를 자기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고 하나님마저도 자기중심으로 움직이려 하는 이러한 세상의 그 교만의 면류관을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마치 거대한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교만을 심판하시고 남기시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실 것이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면류관이란 어떠한 물질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면류관으로 쓸 수 있습니까? 그러니 교만을 심판하시고 나서 남기신 주의 백성들은 교만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영광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란 모두가 사람을 교만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교만이 하나도 없이 나는 불쌍한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무리에게 무슨 세상적인 영광에 눈이 멀겠습니까? 이들에게 하나님이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재판하는 자에게나 전쟁하는 자에게나 하나님이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만이 아니라 7절에 보니 유다도 동일한 범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로 비틀거리는데 제사장과 선지자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상을 그릇 풀이하는 것입니다-지도자들의 죄악. 잘못 인도함. 심판 받을 일을 옳은 일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을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의 가르침을 듣고서 사람들이 조롱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들이 하는 말이란 도대체 누가 우리를 가르친다는 말인가?
 
 
 
 
9-10절입니다. 젖을 뗀 어린 아이에게 가르치려는가, 경계와 교훈을 더하고 있는가 하면서 조롱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에게 당신 예수를 믿습니까, 하면 아니 내가 지금 어린 아이인줄 아느냐고, 예수 믿은 지 30년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복음을 전하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 앞에서 이미 안다는 식으로 내가 뭐 어린 아이인 줄 아는가, 그 정도도 모르게 이런 자세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만한 자들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생소한 입술,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로 쳐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로 심판을 행하게 하심으로 전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하여 교훈하고 경계하고 책망한 것을 우습게 여긴 자들에게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거든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하겠습니까?
 
 
 
 
히브리서 3:7-14절입니다. “봉독” 13절입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과거는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이력, 경력, 체험, 전통으로 마음이 굳어지면 안 됩니다. 오늘 오직, 오늘 서로 권면하고 주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는 것이 우리의 살길이며 우리의 영원한 면류관인 것입니다.








이사야 28:14-29  시험한 돌  2000. 3. 1.

에브라임의 교만에 대한 반응-한 청년의 고백, 버스 기다림.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져야 한다는 생각이 교만임을 알고 버스 기다림 속에서 또다시 화가 남.

그러므로 우리의 진리의 기준이란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가 기준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남은 손해가 가도 상관없다는 태도, 이것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나와 가정과 단체와 국가와 인류의 행복을 위하는 일이라면 희생도 하고 목숨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 적이다, 이 무시무시한 말씀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자식도 아내도 부모도 가정도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이 예수님을 어찌 자기만 아는 세상의 사람들이 가만히 둘 수 있겠습니까? 지난주에 에브라임의 교만을 책망,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의 교만을 책망합니다.
 
 
 
 
14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경만한 자들이여, 라고 책망합니다. 경만한 자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조소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의 경고를 조롱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는 사망과 음부와 맹약하였기에 어떠한 재난이 와도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앗수르의 침입 앞에 애굽과 맹약하여 스스로의 안전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의 지도자들의 자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세상의 힘을 가지고 교회를 지키려고 하고 또한 교회의 수를 가지고 세력화 하려고 하는 것이 이미 심판을 받을 내용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애굽의 힘을 의지하고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엇으로 심판을 하시는가 하면 시온에 한 돌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돌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귀한 기초석이 됩니다. 그런데 이 돌을 세움으로 이 돌이 하는 역할이 나타나는데 이 돌을 믿는 자는 급절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돌을 신뢰하는 자는 망하지 아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돌의 기능이 무엇인가 하면 걸림돌의 역할을 하는 시험하는 돌이라는 것입니다. 심판 받을 자는 철저히 믿을 수 없는 걸림돌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구원 얻을 자에게는 믿음의 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8:12-14절. “봉독” 전에 보았던 내용입니다. 너희가 맹약한 자가 있다고 하여도 피난처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믿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 함정,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돌이 왜 이런 역할을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한 모든 인류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 사랑하는 죄인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의 이익만 챙기고 있는데 심지어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도 자기의 영광을 챙기는 인간들의 모습을 예수님이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입술로만 사랑하고 속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본심을 들켜버린 자들이 어찌 예수님을 가만히 둘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진짜 하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하는 돌의 기능이며 다른 말로는 모퉁이의 돌입니다.
 
 
 
 
시편 118:22-23절. "봉독" 건축자들이 버린 돌입니다. 왜 건축자들이 돌을 버릴까요? 쓸모가 없으니 버리는 것이지요. 우리가 돌로 담을 쌓을 때 쓸모없는 돌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멀리 하는 것이 좋지요. 도대체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버림받는 돌이 누구란 말입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는 겁니까? 안되는 겁니까? 세상사는 일에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됩니다.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 너희는 이 세상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데 어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세상의 것을 구하겠습니까? 그러니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관이나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아관이나 한 통속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와 내 가정과 나의 국가를 잘되게 할  것인가? 김용옥씨가 인기 있었던 이유도 결국 대한민국의 영광과 세계 인류의 복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하나님이 이기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기 말을 들으라는 신이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의 도는 모든 것이 도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주장하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장하지 않음으로 다스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얼마나 이기적이고 질투하는 하나님입니까?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밉게 보였고 쓸모가 없었으면 버렸을까요? 그래서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로서 모퉁이 돌로 삼아 새롭게 건축물을 짓는 것입니다. 이 일이 우리 눈에 기이한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기이한 일을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여 말씀하시는 곳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다 나오는데 한 곳만 찾아봅니다.

 
 
 
 
누가복음 20:9-18절.(마:21,막:12) “봉독” 선지자들을 보냈으나 모든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아들을 보냈으나 죽이려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버림 받는 돌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알아듣고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9절에 보면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죄의 모습이고 마귀에게 붙들려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리고서는 결국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보시겠습니까? 진멸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제대로 알아지고 믿어진다면 우리가 도대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는 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뭐라고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가 내가 무엇을 할께요, 라는 말이 나옵니까? 그저 죽여 주옵소서, 긍휼이 여겨 주옵소서, 할 말 외에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이러한 피해를 당하신 주님을 알게 되어야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에게 용서를 해 주신다면 그야말로 천하를 얻은 것 보다 더한 기쁨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시시하고 재미없게 여겨지는 것은 자기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말만 하고서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금방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해 놓고서 집사님, 이것 좀 하시겠어요? 그러면 내가 왜 그것을 해, 내가 그것 할 군번인가? 이러한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방금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님 죽으셨나, 찬송해 놓고는 조그마한 자존심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로마서 9:30-33절. “봉독” 이방인의 의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행위에 의지하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는지 조금이라도 아시겠습니까? 얼마나 심각한 죄가 들어 있는지 또한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8절. “봉독”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어떤 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들만이 말씀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자하심을 무엇으로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람에게 버림받은 돌입니다. 쓸모없어서 버려진 돌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버린 돌입니다. 그런데 그 돌에 우리가 나아와 산돌이 되신 예수님께 붙어서 하나님이 집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버림받은 돌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돌을 믿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 이 돌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온의 돌을 의지하는 자는 급절하지 않지만 시온의 돌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급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걸림돌이 되는 시온의 돌을 누가 의지하겠습니까? 그러니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린 자에 대하여는 무서운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서 29절까지입니다. 그렇게 안전하리라 여긴 곳을 하나님이 일일이 찾아내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은 곳에 넘칠 것이며 그 모든 언약이 쓸데없이 될 것입니다. 마치 침상이 좁아 몸을 펴지 못하고 이불이 좁아 몸을 싸지 못하는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브라심 골짜기와 기브온은 다윗이 블렛셋 군대를 물리친 곳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적을 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적이 되어 버렸기에 예루살렘을 쳐서 흩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시온의 돌을 의지하지 않는 자의 결국입니다.
 
 
 
 
2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시온의 기초석을 의지하라고 하는 이 말씀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재앙이 더욱 심할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땅을 멸망하실 것입니다. 그 비유로 23절에서 29절까지 농사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자가 밭을 갈면 갈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수를 하는 것처럼 반드시 심판을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곡식의 종류마다 파종 방법과 추수하는 방법이 다르듯이 하나님도 심판을 행하시는데 각 나라마다 다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 세계를 하나님이 농사짓는 농부가 하는 일처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를 할 때 도리깨로 추수하는 것이 있고 작대기로 하는 것이 있고 수레바퀴나 말굽으로 탈곡을 할지라도 알곡을 부수지는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판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남기시고 구원하시는데 이런 자가 누구입니까?
 
 
 
 
시온에 세운 돌, 시험한 돌, 건축자의 버린 돌, 이 돌이 바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지만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서 자기 안전을 추구하는 자는 급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돌이 되고 있습니까? 버려버릴 돌입니까? 아니면 의지해야 할 돌입니까? 의지하는 자에게 모든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시는 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 인하여 기쁨과 감사가 범사에 넘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29:1-24  사람의 계명  2000. 3. 8.

복음을 전하다 보면 누가 가장 어려워하는가? 열심과 전통이 있는 사람입니다. 초신자나 불신자는 오히려 나은 편입니다. 물론 다는 아닙니다.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의 특징은 성경의 앞뒤를 읽어 주어도 관심이 없이, 하는 말이 우리 목사님은 안 그러시는데, 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의 가르침이 성경보다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제자훈련, 전도훈련이 그 단체의 제자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교단도 자기의 특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우리 목사가 그러던데요, 하려면 아직 전도를 하기에 이릅니다. 말씀을 확인해 보시고 과연 그러하다면 말씀이 이러합니다, 하는 증인이 되어야지 우리 목사님이 그러던데요, 하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누구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서로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별합니까? 설교자란 증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은 것을 말씀이 이렇습니다, 라고 증거하는 것과 자기의 주장을 위하여 성경을 앞뒤 자르고 필요한 부분만 끌어와서 말하는 것은 잘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을 받은 자는 한 성령이기에 서로가 그 증거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 자기의 특정한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의 제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중매쟁이라고 고린도후서 11:2절에서 말씀합니다. 중매쟁이란 중매하고 나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매쟁이가 계속하여 가로채고 있다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가르침인지 아닌지를 말씀을 통하여 점검하여야 합니다. 기독신문의 여러 가지 광고- 한주간의 내용을 소개함. 전도, 세미나, 실물을 보이며,,,,,부분적인 비판. 왜 이런 내용을 비판하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29:1-4절. 아리엘에 대한 심판선고. 아리엘은 하나님의 암사자란 뜻과 에스겔서의 성전의 번제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암사자라는 말과 번제단이라는 말이 같은 발음인데, 예루살렘이 아리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2절의 각주 참고. 예루살렘이 번제단처럼 불타는 심판을 받는 것은 절기를 안 지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1절에서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절기마다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도 왜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까? 사면이 적이 에워싸고 침략을 받아서 낮아지는데 땅의 티끌처럼 낮아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3-14절입니다. “봉독”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율법을 물론 사람이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게 된 결과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마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잘 깨닫게 하셔서 돌아오게 하시지 않고 왜 일부러 사람을 소경되게 하시는가 하는 면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구원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냥 버려두시는지 우리가 압니까?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공평하느니, 못하느니 말을 많이 합니다. 이러한 입들을 뭐라고 하면서 막아 버립니까?
 
 
 
 
15-16절입니다. “봉독” 진흙과 토기장이로 말씀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명철이 있느니, 없느니 말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땅의 티끌임을 알진데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더스트 오브 그라운드’라고 합니다. 땅의 티끌입니다. 그러니 입 닫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9-13절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소경이 되고 술에 취함같이 비틀거리는데 포도주나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보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나 선견자가 하나님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유식한 자는 밀봉되어 모르겠다, 무식한 자는 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가르침을 따르라 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2:1-28절까지입니다. “봉독”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설교입니다. 북은 아합 왕, 남은 여호사밧 왕입니다. 길르앗 라못을 아람에게 빼앗겼는데 연합으로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여출일구 이기리라, 그러나 미가야는 죽는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선지자로 하여금 동일한 거짓말을 하게 하여 아합을 죽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미가야는 뺨을 맞고, 갇히고 아합은 변장하고 나갔다가 적군이 우연히 쏜 화살이 갑옷 솔기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그 피를 개가 핥지요.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 “봉독” 유혹이 임하게 하는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고 모든 인류의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진리다, 내 말을 들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다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망하게 하고 나서야 하나님이 자기의 남은 백성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사야 29:5-8절. 적군이 물러가고. 꿈에 본 것처럼 물러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29:17-24절. 오래지 않아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소경이 보게 되고 빈핍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것은 사람의 ‘태신자’ 전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외우며 손과 이마에 기둥에 붙이고 다녀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지 못한 것이 바로 인생의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사람의 가르침을 받고, 전통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다듬어내고 윤리, 도덕적으로 무장하고 거기다가 종교적인 의식까지 다 갖추어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이러한 자를 주님께서 친히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5절을 봅니다. “봉독”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것이 단지 육신의 장애가 치료 받는 정도가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머거리가 듣고 소경이 보게 되는 이때가 바로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고 있는 때이며 동시에 구원이 베풀어지고 있는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오래지 않아서’ 라는 때가 바로 이때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을 본다고 하는 자들, 듣는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걸림돌과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5절입니다. 지혜로운 자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어린아이란 여기서 어리석은 자를 말합니다. 지혜있다는 자와 대비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이 눈뜬 사건으로 소경은 보게 되고, 본다고 하는 자는 소경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 곳을 더 봅니다.
 
 
 
 
마태복음 15:1-20절입니다. “봉독” 장로들의 유전, 사람의 가르침의 무서움이 이러합니다. 사람의 가르침이 가득하여 있기에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자신이 사람의 그러한 가르침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0:9-11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말을 하라고 합니다. 심판의 말과 죄를 책망하는 말은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들 앞에서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제사는 지내주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르치는 자들이 사람을 좋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르치는 자도 백성도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나를 좋게 하여 주는 사람이 좋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사야의 경고를 듣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를 좋게 하고, 나를 이 세상에서 살리는 것을 좋아 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를 죽이는 말씀이라도 그것을 아멘 하는 자는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가르침에 주의하시고 공교한 꾸민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시고 과연 우리가 말씀의 증거를 받는 것이 사람의 가르침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증거 되는지를 여러분이 확인하시면서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아노?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우리가 누구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받은 말씀을 증거하고 그 증거가 옳은 것이라면 성령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한곳의 말씀을 더 봅니다.
 
 
 
 
요한일서 2:18-29절입니다. 27절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진위 여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입니다.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이단은 구분이 쉽습니다. 그러나 교묘하게 부인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일하심과 십자가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입니다. 수많은 광고 속에서 과연 예수님이 죽으시고 살아나신 분이 오늘도 일하고 계심이 보이는가 하는 점에서 살펴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말세인 지금 더욱 사람의 가르침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30:1-26  잠잠하라  2000. 3. 15.

오늘날처럼 바쁜 세상에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말은 동화속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잠잠이’라는 우화책).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해 가니까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보다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뭔가 좀 된다 하는 사업들은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런 사업에 참여하면 이미 막차를 탄 것입니다. 그러니 벤처 기업이니 하는 것들이 잠을 안자고 신기술을 개발하여야 살아남고, 인기 있는 증권회사는 잠도 안자고 증권분석을 하여서 수익을 남길 수 있는 세상에 잠잠하라는 말은 꿈처럼 헛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자리 잡은 교회도 예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공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면 가서 배워 와서 적용하기에 바쁜 것입니다. 이것이 될 것 같아서 ?아 다니다가 안 되니 또 다른 것을 찾고 심지어 외국에까지 가서 현장 학습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미국의 교회들에서 한국목회자를 위하여 한국말로 교회 성장비결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도 잠잠하면 도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잠잠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안연히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인데 잠잠하라는 것입니까? 강대국인 앗수르의 침략 앞에서 애굽의 원조를 요청하려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지도자들에게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잠잠하라는 것입니까? 나라의 위기에서 어떻게 하든지 나라를 구하여야 하는데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과연 나라를 위하는 일입니까? 다른 나라는 몰라도 이스라엘은 그렇습니다.
 
 
 
 
다른 세상의 단체는 몰라도 교회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잠잠함으로 하나님의 잠잠치 아니하심이 드러나는 곳이 이스라엘이어야 하고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고 자기들이 더 부산을 떤 이스라엘이 망한 것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며 이미 망한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1절입니다. 화 있을찐저, 누구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화 있을찐저’의 말씀을 듣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화 있을찐저의 선포가 28장에서 33장까지 6번 나옵니다. 화와 함께 복도 나옵니다. 그래서 ‘화와 복의 노래’라고도 합니다. 우선 왜 화 있을찐저, 라고 하는지 한 번 더 보고자 합니다.
 
 
 
 
28:1절. 에브라임의 교만, 29:1절.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는 예루살렘, 29:15절. 사람의 도모를 여호와께 숨기는 것, 30:1절. 오늘 본문의 말씀, 31:1절.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 33:1절. 학대를 당하지 않으면서 학대하는 자. 이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화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오호라, 하는 탄식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탄식하시며 화를 선포하는지를 봅시다.
 
 
 
 
1-2절입니다. 사람들이 계교를 베풉니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굽에 내려가서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애굽의 동맹은 하나님 안에서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 안에서 피하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죄에 죄를 더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지혜로 살아남으려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들이 애굽을 의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6-7절입니다. 온갖 재물을 가지고 위험한 사막을 지나서 애굽의 원조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말 타고 도망가리라, 빠른 말을 타고 도망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라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죄에 죄를 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너희가 의지하는 그런 것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수치만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수치를 당하고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를 받아들입니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서판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이들이 망한 증거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성경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은 이 말씀을 받으면 회개하고 주를 의지하는 것이요 회개하지 않으면 이 말씀이 심판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서판에 기록하여 후대에 증거로 삼을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잠잠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도 않는 애굽을 의지하러 가는 자들을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9절에서, 패역한 백성, 거짓말 하는 자식,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요구하는 선지자상은 어떻습니까? 선견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괴롭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부드러운 말, 좋은 말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직한 말씀을 전하지 말고 거짓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으로 자기에게 좋은 말만 듣기를 원하는 자의 중심은 이미 이러한 심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배를 섬기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죄가 종교 지도자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얼마든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말씀을 통하여 점검을 해보면 단번에 드러납니다.
 
 
 
 
정말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좋아할 자가 얼마나 있는지 성경을 제대로 보면 좋아할 말씀이 우리의 본성적으로는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이 말씀을 정말 좋아 하십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의 살아남는 방법을 따라 나서는 자들의 최후가 어떻게 됩니까?
 
 
 
 
13-14절에서 높은 담이 불룩 나와 있는 것처럼, 깨어진 토기 그릇처럼 넘어지고 부수어 지는 것입니다. 높은 담이 배가 불룩 나오면 곧 무너지는 것입니다. 토기가 깨어지는데 불 담을 쪼가리도 남지 않을 만큼, 물웅덩이에서 물을 떨 조각도 없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멸망이 오는 것입니까? 잠잠히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15-17절입니다.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히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라는데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을 당하고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이 영 위의 기호같이 남는 것입니다. 돌이키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이 세상의 원리에 젖어 살다 보니 교회 와서도 잠잠히 주님의 말씀을 받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빨리 빨리 전도하고 빨리 빨리 성장하여 더 크고 더 멋있는 하나님의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도 빨리 빨리 하니 우리교회가 더 큰 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더 빨리 더 빨리를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달란트 비유의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주님이 지금 이곳에 계심을 믿지 못한 자에 대한 책망입니다. 주인이 멀리 갔으니 내 마음대로 하자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게으른 자나, 지금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시고 계시는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이 마치 무덤에 계시는 것처럼 빨리 빨리 하는 자나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하는 말씀도 인용을 잘하는데 그 말씀은 예레미야 48장에서 보면 모압을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맹렬한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심판을 행하는 자가 태만히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이렇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잠히 안연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것은 열심히 빨리 하라는 말보다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을 빨리 달려가는 그런 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시니 남은 자는 겨우 소수만 남게 됩니다. 이들을 하나님은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향하여 바쁘게 살길을 찾아 나선 자들은 오히려 심판을 받아 죽게 되고 그러한 능력도 없어서 그저 남겨진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위기는 앗수르에 의한 위기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도망을 가고 원조를 요청하는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침략에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지 않고 애굽으로 도망간 자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나중에 남은 자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떤 자세여야 합니까? 모두가 정신없이 달려만 가는 세상과 교회 속에서 잠잠히 기다린다는 것은 무력하고 패배한 사람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시대에 뒤처진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러한 세상과 교회에 대하여 주님께서 심판을 하시면 얼마나 남을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살아 계심과 그분의 일하심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는 자들은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30:17절을 한 번 더 봅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애굽을 의지하려던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고 남은 자는 아주 희소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회복이 있습니다.
18절에서 26절입니다. 18절. “봉독”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언제까지? 세상의 힘을 의지하든 자들이 심판받아 망하기까지. 그리고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데 어떤 자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십니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주님의 약속만을 믿고 기다리시겠습니까?
 
 
 
 
이러한 자는 환난과 고생의 물을 주시지만 그러나 스승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생의 물을 마실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기다린 자에게 스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구약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이 인도자가 되시고 그 말씀을 선지자를 통하여 들려  주십니다. 정로로, 바른 길로 행하라고 귀에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도를 받을 때 우상을 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않고 애굽 안에서 자기의 피난처를 삼으려 한 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우상도 하나님의 약속보다 세상의 가치관이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우상입니다.
 
 
 
 
이러한 인도가 신약으로 말하자면 성령이 스승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말씀을 통하여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조명하여 주심으로 말씀을 깨달아 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도를 받는 자는 어떤 자세가 나타납니까? 애굽을 향하여 달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돌이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잠잠히 안연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23-26절입니다. 그림언어라고 합니다. 구원을 그림처럼 묘사합니다. 달빛이 햇빛 같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리라. 온전한 구원, 만물의 새롭게 됨을 말합니다(계21:5). 잠잠히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30:27-31:9  돌아오라  2000. 3. 22.

31:6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돌아오라는 것은 지금 잘못된 길로 가 있기에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완전히 잘못된 길에 들어 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원리는 사람이 잘못된 길에 있으니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나은 것을 향하여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지만 더 전진하고 발전하지 못하여 문제이지 더 나아지면 좋아질 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말하기도 하고 과학적인 진보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발전되도록 하고 오늘보다 내일은 더더욱 발전되도록 하자고 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인류가 나아진 것입니까? 아무리 보아도 더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기술이 발달한다고 더 나은 사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그래도 무언가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회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문제는 더욱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점점 꼬이기만 하는 것입니다.
 
 
 
 
헌집을 수리하거나 중고차를 수리하려고 열어보았을 때 하나를 고치려다보면 다 고쳐야 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기의 암환자를 개복을 하였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덮어 버리지요. 저는 이 세상이 그렇다고 봅니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헌옷에 새 베 조각으로 기울수가 없다고 하신 것으로 봅니다. 헌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면 헌옷이 더욱 찢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돌아가는 길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잘못되어 있는가를 말씀을 통하여 점검하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였는데 애굽의 도움을 구하러 가지 아니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 미련하고 바보스러워 보이더라도 그것이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이요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오라는 말씀은 이미 얼마나 심히 패역한 길로 가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떠난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눈에 보이는 애굽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하여 얼마나 많이 맞고 얻어 터졌는지 이사야 1장을 봅니다.
 
 
 
 
이사야 1:4-5절. “봉독”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떠나 멀리 물러간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 없이 맞아터진 상처투성이 인데도 돌아오지 않으니 얼마나 더 맞으려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돌아오면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앗수르를 하나님이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것은 애굽을 의지하러 가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면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이 진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0장의 내용을 31장에서 한 번 더 간단히 요약하는 것처럼 반복적입니다. 1-3절은 애굽과의 동맹을 하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여 구원하시리라는 것이 4-7절입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멸망이 8-9절입니다.
1,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 애굽을 왜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출애굽 하여 나온 것입니다. 애굽이란 그 당시에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니 세상의 힘, 가치관이 애굽에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통치란 힘에 의한 통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의 통치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통치입니다. 언약의 바탕은 자비와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다스림을 받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오고 나서는 애굽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말라고 하시고 애굽과 거래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17:16절. 애굽에 말을 구하러 가지 말라. 그 길로 다시는 가지 말라. 그러나 솔로몬은 어떻게 합니까? 애굽에서 말을 수입하여 무역도 하고 자기가 말과 병거를 많이 둡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결국 이스라엘이 망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왕상 10:28). 사람들마다 이런 것을 좋아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온 것이 무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기에 그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터 위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무시하고 말과 병거를 의지하니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패역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시 20:7절. 병거 말: 하나님의 이름
  시 33:16-17절. 많은 군대 용사. 말과 큰 힘이 헛것.
  시 146:3-4절. 방백. 도울 힘이 없는 인생.

 
 
 
 
말과 마병뿐만 아니라 재물, 방백, 우상, 세상의 모든 의지의 대상이 모두가 헛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하자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월요일 개척 설립예배 참석을 함-목사들이 모인 곳에서 나오는 말들. 주님을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목회를 잘할까라는 생각, 그래서 누가 잘한다더라, 가보았다, 경영이론,,,)
 
 
 
 
2. 애굽을 의지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27-33절까지와 31:8-9절이 심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 오는데 어떤 모습과 어떤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진노가 불  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 그 입술에는 분노, 그 혀는 맹렬한 불같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분노이길래 이렇게 표현하고 있겠습니까? 물이 차고 넘쳐서 목에까지 미치며, 키로 까불 듯이,자갈을 입에 먹이시듯이, 장엄한 목소리와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는데 화염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를 치기 위하여 도벳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도벳이란 힌놈의 골짜기로서 사람들이 자기의 아들을 몰렉에게 바치려고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 그런 골짜기입니다. 힌놈의 골짜기가 신약에서 ‘게헨나’라는 지옥의 이름이 나오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니 앗수르를 심판하시는데 앗수르를 피하기 위하여 애굽을 의지하는 자도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때에 대표적인 심판이 불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3절에 유황 개천같이 흐르리라고 하십니다. 지옥이 유황불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함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1:1-3절을 봅니다. “봉독” 애굽에 도움을 청하고 말을 의뢰하고 병거와 마병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앙모하지 아니하고 구하지 아니하는 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애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우는 자나 도움을 받으려는 자가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뢰하고 잠잠히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이 돌이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를 주님이 먹이를 앞에 둔 사자가 빼앗기지 않는 것처럼, 새가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 것처럼 확실하고 분명히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여호와를 대적하고 멀리 떠난 자들아,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8-9절에 앗수르의 멸망이 사람의 칼이 아닌 칼로 망하는 것입니다. 칼에 엎드려 지는데 사람의 칼이 아니라면 천사의 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자의 심판인 것입니다.
 
 
 
 
3. 돌이킨 자에 대한 구원. 이스라엘 전체 역사는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다가 망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이나마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적군이 사람의 손과 무기로 하지 아니하고 물러 간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이사야 37:36절입니다. “봉독” 185,000명이 사람의 칼이 아닌 칼로 모두 시체가 된 것입니다. 산헤립 혼자 도망가서 반역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군의 편지를 받고서 성전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보옵소서, 그러자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를 통하여 응답을 하시는데 기도의 응답이 히스기야의 기도만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응답이 되는가 하면 35절입니다.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의뢰하면 구원하시리라는 자기 언약을 따라 구원하시기에 자기를 위하여 적군을 물리치시며 또한 다윗의 언약을 인하여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히스기야 왕이 하는 일은 말과 병거를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32절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한 곳을 더 봅니다.
 
 
 
 
역대하 20장입니다. 20:1-24절. “봉독” 여호사밧 왕이 적의 침략 앞에 무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금식하니 들어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밥 먹고 힘을 내어야 싸울 텐데 오히려 주님의 도우심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전쟁’에서 자기의 공력을 드러내려고 금식을 쓸데없이 선포하여 백성들이 피 채 고기를 먹고 요나단이 위경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만 지금 여호사밧 왕은 그러한 금식이 아닙니다. 그러니 금식도 여러 가지입니다 보아라, 나 금식하였어, 하는 금식이 있고, 오, 주여 우리는 오직 주님의 도우심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는 금식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금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사밧 왕은 금식을 선포하는 것이 오직 여호와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우리를 치러오는 저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그리고 난 후 찬양대로 찬양을 합니다. 그러자 적군은 서로 서로 치게 됨으로 시체뿐이었더라.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지금도 여호와의 전쟁은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의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그것들을 의지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로 오는지를 알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어린 아이 같고 무능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힘은 세상에 있는 힘이 아니라 다른 구별된 힘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돌아오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31:6-7절을 한 번 더 봅니다. 지금까지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러 달려가던 모든 것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너무나 주님 외의 것을 많이 의지하여 왔기에,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어렵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 세대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주의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시는 것들을 바라는 역사가 나타나도록 간구합시다. 우리는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없사와, 그저 주님만 바라봅니다.








이사야 32:1-20  의의 왕  2000. 3. 29.

(1-8절 메시아의 통치, 9-14절 안일한 부녀자에 대한 경고, 15-20절 메시아 왕국)

1절.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라고 합니다. 왕이 의로 통치하면 자연히 방백들도 공평으로 정사를 볼 것입니다. 이 한 왕이 누구입니까? 우선적으로는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을 가까운 장래로 말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온전한 의로 통치할 분은 메시아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의로 다스릴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언서는 한 의의 왕을 기다리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의 한계를 말하면서 장차 온전한 왕이 와서 의로 통치할 것을 예언함으로 그런 왕을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의의 왕이 오셔서 다스리면 어떻게 다스리는 것입니까?
 
 
 
 
첫째, 2절.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마른 땅에 냇물,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의의 왕이 통치하면 안전하고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18절에서는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침략 앞에서 안전한 장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의의 왕이 오시면 안전한 처소를 마련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안전한 곳이 어디입니까? 나의 집입니까? 나의 직장입니까?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은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땅 속에는 액체입니다. 물위에 널빤지 띄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뿐 아니라 얼마나 빠른 속도로 자전하고 공전하고 있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안전한 처소는 결국 15절에서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을 받음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가 안전한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동될 이 세상의 안전한 처소가 아니라 우리의 거할 처소는 주님품인 것입니다. 이곳만이 안전하고 화평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3-4절. 바르게 보고, 듣고, 깨닫고, 말하게 됩니다. 의의 왕이 다스리면 그동안 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말도 잘 못한 것이 제대로 보고 듣고 깨달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8-12절을 봅니다. “봉독”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 땅이 황폐하게 되기까지입니다. 앗수르의 침략과 바벨론 포로 때를 말하지만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어도 의의 완전한 통치는 안 되었습니다. 부분적인 것만 맛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도 그리스도의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일어날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11:2-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하시는 일 중에 소경이 보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하는 내용은 단지 병자를 치료하시는 차원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즉 의의 왕이 통치하시면 일어날 일을 성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실족치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제, 정치, 종교적인 메시아상을 기대하는 자들은 실족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10-17절입니다.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본다는 자, 있다는 자로 보지 못하고, 없는 자로 만드시고, 보지 못하는 자, 없는 자로 보게 하시고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의 왕이 와서 다스리기까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상한 하나님이지요. 돌아오려는 자를 돌아오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일부러 장님, 귀머거리가 되게 하여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모든 자를 죄 아래 가두시고 오직 긍휼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한 것입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이 이미 갇혀 있는 것입니다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죄 아래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힌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무엇이 생명인지 영생인지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장님처럼 귀머거리처럼 몰랐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까? 의의 왕이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다스림은 지금 주님께서 성령으로 다스리고 계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15절에서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필경은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결국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의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 인도함을 받고 있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우리의 죄를 알고 얼마나 죄가 교묘하고 거대한 세력인지를 알게 됨으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영생의 길이 없음을 아는 것이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린 것입니다.
 
 
 
 
셋째, 5-8절입니다. 질서가 바로 세워지고 분리가 일어납니다. 의의 왕이 통치하기 전에는 어리석은 자를 존귀하다 하고 궤휼한 자를 정대하다고 말하였으나 의의 왕이 통치를 하게 되면 성령을 보내셔서 알게 하시기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요동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잠언서 14:15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모든 말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간다고 합니다. 어리석어 아무 말이나 믿고 따르던 자가 이제 바르게 진리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리가 분명하게 일어나는데 악한 자는 계속 악한 일을 도모하게 되고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계획하고 그 뜻을 펼치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의 왕이 통치하면 악인은 더욱 악인으로 드러내고 의인은 더욱 의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의의 통치가 있기 전에 항상 무엇이 따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선행됩니다. 그러니 이사야 6장에서 눈과 귀를 감아서 스스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을 언제까지 그렇게 하도록 하십니까? 심판하여 황무하게 될 때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왕이 통치하는 것도 결국 심판과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상의 전후로 보기보다는 동시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통치를 받지 못할 심판받는 대상은 어떠한 자들입니까?
 
 
 
 
9-14절입니다. 안일한 부녀들아, 라고 고발합니다. 안일한 부녀들이란 염려 없는 자들입니다. 안일하고 염려가 없는 정도의 부녀들이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고관의 부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은 자기들의 안전은 염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든든한 빽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올지라도 자기들의 재산이 자기들을 지켜주리라고, 그것들이 자기들의 든든한 보장이라고 믿고 사는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종교지도자가 더 책망을 받습니다.
 
 
 
 
아모스 4:1절을 봅니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오라 우리에게 마시우라 하라 하는도다” 이것이 안일하고 염려 없이 거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안일하고 염려가 없다는 것은 다른 이들은 환난을 당하고 고생을 하는데 자기들은 안일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안일이며 거짓 평안인 것입니다. 이것들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안전인 것입니다. 무엇이 참된 것인가는 심판을 통과하여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환난의 불이 닥쳐와야 무엇이 참된 것으로 남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부녀들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동일한 것입니다. 단지 경제적인 든든함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도 무엇으로 든든함을 부여잡고 있는지를 점검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언제 안전하게 여깁니까? 언제 불안하게 여깁니까? 나의 행위가 빵빵하게 있을 때 불안합니까? 안전합니까? 안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재앙이 닥치거나 손해를 보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지 돌아보고 알겠습니다. 이제 더 열심히 잘 할 테니 나에게서 이러한 어려움을 물리쳐 주세요, 그러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이것은 거짓된 피난처입니다.
 
 
 
 
인간이란 늘 변동됩니다. 늘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지를 안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위를 결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도 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봄을 아무리 좋아는 사람이라도 꽃가루 알레르기가 일어나면 봄이 싫습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으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의 확신도 분위기와 나의 감정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왕이 다스리는 때가 되면 거짓된 안전, 거짓된 평안은 모두가 사라집니다. 심판으로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11-14절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안일하다, 염려 없다는 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당황하게 됩니다. 자기들의 소유물이 없어지고 안전하다는 곳이 황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영적인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앞에서 무엇을 준비하며 사시겠습니까?
 
 
 
 
주님의 심판을 견지지 못하는 헛된 것으로 자기의 안전을 누리고 염려 없다, 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헌금 많이 했다, 전도 구제 봉사 많이 했다, 라는 것으로 자기의 안전을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사는 나는 다른 목사들과 달리 욕심을 버리고 바르게 목회하였다는 것으로 자기의 안전지대를 삼으려고 한다면 심판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이 지금 우리는 말씀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신을 부어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그토록 열심이던 유대인들의 거짓된 율법 행함의 안정 속에, 제사와 날과 달과 절기 지킴의 안정 속에 성전이 있다는 그 안정을 고발하시고 그것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니 나를 믿고 나를 따르는 길이 의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고 하심으로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을 지금도 주의 성령으로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왕이 통치를 하게 되는 것은 필경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 통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통치하고 있습니까?
 
 
 
 
15-20절입니다. “봉독” 새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 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 비록 삼림이 우박에 쓰러지고 성읍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도 씨를 뿌리는 곳마다 댈 물이 넉넉하고 어디에서나 안심하고 소와 나귀를 놓아 키울 수 있으니 너희는 복이 있다”
 
 
 
 
구원을 ‘그림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가 요동하여도 의의 왕이 다스리는 곳은 안전하고 영원한 평화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의의 왕의 일하신 결과요 열매입니다. 이곳을 사모하는 자는 자기의 의의 결과가 아님을 아는 사람들, 즉 성령이 임한 자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사야 33:1-16 우리의 보배  2000. 4. 5.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보배는 무엇입니까? 오늘 6절 말씀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너의 보배니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보배라고 하는데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경외란 말 그대로 여호와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보배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커다란 업적을 남기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평소의 생각이 속담으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담 가운데서 우리의 가치관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것이 우리의 본성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복음을 가리고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업적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속담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효도도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야 하는 것이구요.
 
 
 
 
이러한 가치체계 속에 살고 있다가 보니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도 자기의 힘과 능력을 다 동원하여 큰 업적을 이루어 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더 크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자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정리하고 있다면 아직까지 세상의 가치관이 바뀌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사람이 죄인임을 모르는데서 나오는 생각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었기에 이제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니 큰일을 이루어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살려 주시는 분만 바라보고 살려주시는 분을 증거하면서 따를 뿐이지 죽은 자가 무엇을 퍼더덕 거리며 이루어내겠습니까? 그럴수록 냄새만 더 날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떠한 선한 것을 이루어 낸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오늘 본문 말씀의 개략을 보면서 우리의 보배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자 합니다.
 
 
 
 
1절은 앗수르에 대한 경고입니다. 화 있을찐저, 라는 경고의 여섯 번째입니다. 이는 앗수르를 경고하면서 시작합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는 아닙니다. 2절은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구원하소서 합니다. 3-6절에서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적군이 쫓겨나고 주의 백성들은 탈취물을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높으신데 거하시고 공평과 의로 통치하시니 너의 시대에 평안함가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이들의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갑자기 분위기가 급변하여 참담한 현실로 돌아옵니다. 7-9절입니다. 앗수르의 침략에 대비하여 사신을 보냈지만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신이 슬피 울고 조약을 파기하고 성읍을 멸시하고 사람을 생각지 아니하고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8:13-17절을 봅니다. “봉독” 앗수르의 침략에 성전과 왕궁의 은을 다주고 금은 이미 거덜난 것입니다. 그러니 은을 주고서 또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금과 은의 보물을 받고서도 물러가지 않고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함이 이들의 보배라고 하였지요? 금과 은을 다 긁어서 앗수르 왕에게 주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앗수르 군대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애굽을 의지하느냐, 그것은 오히려 손에 찔려 들어갈 뿐이라.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공격하여 왔는데 우리를 이긴 신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이 전 백성에게 함구령을 내리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지요. 그러자 그 다음날 18만 5천명이 시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금이나 은으로 물러가지 않았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니, 의지하니 적군이 물러간 것입니다. 적군이 물러가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는 것입니다.
 
 
 
 
10-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일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높이시는 것입니다. 누가 높여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스스로 높이시는데 어떻게 스스로 높이시는 것입니까? 소멸하는 불로서 심판을 행하심으로 자신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앗수르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먼데 있든지 가까운데 있든지 여호와의 호흡이 불이 되어 그들을 사를 것입니다. 이때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4절입니다.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이제야 죄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영영히 타는 불과 함께 거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4:24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금과 은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앗수르의 왕에게도 통하지 않는 금과 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삭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께 죄인들이 무엇을 들고 나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미가서 6:6-9절입니다. “봉독” 천천의 수양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내 허물을 인하여 나의 맏아들을 드린들, 내 몸의 열매를 드린들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구체적인 회개는 10-12절입니다. 속이고 사기치고 부자들이 강포하여 빈익빈 부익부가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되었으니 이방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적용을 하자면 어떻게 하는지 아시겠지요? 세상의 가치기준에 따라 커다란 업적을 이루어 놓는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놓고서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입니까?
 
 
 
 
자녀가 부모에게 거짓말을 해놓고서 그 거짓말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자녀가 재롱떤다고 학교 성적 잘 받아 왔다고 기쁩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손해를 볼지언정 공의로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시겠지요.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자녀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자기 아들을 죽인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을 만들어 낸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심판을 행하시는데 그 앞에서 무엇으로 심판을 면하시겠습니까?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봉독” 어린양의 진노 앞에 누가 감히 서리요? 우리의 전도로, 선교로, 다른 교회 도운 것으로, 나의 목숨을 바친 것으로 안 됩니다. 이미 미가야 선지지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의 업적이 아니라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업적과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 앞에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사야 33:15절입니다. “봉독” 1.의롭게 행하는 자, 의롭게 행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나의 이익을 따라 행하기를 좋아하십니까? 2.정직히 말하는 자, 상황에 따라 얼마나 많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3.토색(討索)한 재물을 가증이 여기는 자, 토색이란 돈이나 물품을 억지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이 늘어난 것을 우리는 좋아합니까? 가증이 여깁니까? 4.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않는 자, 회사나 관공서에 보직이 좋은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것을 싫어합니까? 5.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나는 살아야 한다는 것. 6.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않는 것, 이러려면 아예 장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악 아닌 것이 없으니.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자격자입니다.
 
 
 
 
시편 15:1-5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장막에 거할 자가 누구입니까? 이사야 말씀에 의하면 두렵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경건한 자가 누구입니까?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일삼는 자,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 참소(讒訴)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하지 않고 훼방치 아니하는 자,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는 자-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대통령이든, 사장이든, 목사이든 그런 자를 멸시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자,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는 자,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 이런 자가 영원히 요동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시편 24:3-5절입니다. “봉독” 손이 깨끗한 자, 마음이 청결하여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는 자,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 이러한 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흠이 없는 자가 있습니까? 나는 이러한 말씀에 걸림이 없다고 하시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인데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무엇으로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합니까? 금이나 은으로 세상의 없어질 보배로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보배입니다. 이렇게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장막이 되어 주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보배는 무엇입니까? 내 안의 보배를 무엇으로 삼고 살아갑니까? 만약에 우리 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보배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무엇입니까? 소멸하는 불만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회개할 것 외에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100% 순종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이러한 모든 요구를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우리의 보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깨어지고 더럽고 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담긴 보배로 인하여 그릇을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된 이것보다 더 크고 귀한 보배는 없습니다. 이제 무엇이 진짜 보배인지를 알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절. “봉독” 보배를 질그릇에 가짐-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 베드로전서 2:6-8절. “봉독” 보배로운 돌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정하여 둠. 이 보배를 믿고 사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 보배로 인하여 천하에 그 어떤 부자보다 더 부요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33:17-24  시온의 영광  2000. 4. 12.

17-24절은 장차 회복될 시온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통치가 물러가고 히스기야 왕의 통치를 내다보면서 동시에 메시아 왕국의 영광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광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7절, 너의 눈이 목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목도하게 될 내용은 시온의 영광을 목도하는 것입니다. 시온의 영광은 이제는 외부의 침략이 없이 안전하고 완전한 처소와 영광 중의 왕을 보는 것입니다.

 
 
 
 
18절, 옛날에 두려웠던 기억들은 이제 겨우 생각을 해내어야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전에 고생하던 것들이 꿈에 본 듯 잊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온전한 회복이 되었으면 이러한 상태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계산하던 자, 칭량하던 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영광이 회복되면 이러한 것들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새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는 지난날 무서웠던 일들을 돌이켜보며,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서슬이 시퍼렇던 이방인 총독, 가혹하게 세금을 물리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던 이방인 세금 징수관들, 늘 너의 뒤를 밟으며 감시하던 정보원들, 모두 옛날이야기가 될 것이다.”
 
 
 
 
19절, 그때에 강포한 자를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외국에서 왔기에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방언에 대하여 잠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최초의 언어가 갈라짐은 바벨탑 사건입니다. 이후에 여러 언어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언어별로 흩어져 살고 있는데 다른 나라 사람이 침략을 하여올 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쳐들어오는 것은 심판인 것입니다. 성경 몇 곳을 찾아봅니다.
 
 
 
 
신명기 28:49절. “봉독”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 언어를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침략할 것. 이사야 28:11절. “봉독”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하심. 예레미야 5:15절. “봉독” 그 방언을 알지 못함.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하면 언어가 다른 민족이 쳐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언이 사용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의하여 심판을 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심판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기의 남은 자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게 방언이 심판의 기능이 되는데 그 심판 후에는 다른 방언을 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오순절 성령의 오심으로 방언이 나오게 되는 것을 통하여 각 사람들이 자기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에 대하여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의 중간쯤에 이사야서의 말씀이 있으니 방언하는 자가 쳐들어 온 것은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 후에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나라는 방언하는 자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방언이 없어지고 하나의 언어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만이 사용하는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언어가 사용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8-19절. “봉독” 여러 나라들이 은혜에 참여됨. 이러한 성취가 오순절에 일어남. 이것이 시온의 영광이 회복된 모습입니다. 그러니 지금 유대인들만이 모여서 ‘시오니즘’을 외치는 것은 자기들의 자민족 중심의 정치적인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본다면 잘못된 시오니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이러한 시온의 영광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나라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요한복음 18:36절에서 말씀하셨기에 아직도 영토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사상의 시오니즘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러한 나라를 염두에 두셨다면 싸워서 무력으로 쟁취하셨을 것입니다.
20절, 예루살렘이란 것을 무엇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안정한 처소,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하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장막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외세에서 회복되어도 거듭 거듭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시온은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것입니다.
 
 
 
 
아모스 9:11절에서는 그 날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장막을 요한계시록 21:1-4절을 봅니다. “봉독” 이것이 시온의 영광입니다. 시온성 예루살렘의 완성의 모습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친히 거하시는 곳이 시온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때에는 다시는 눈물, 사망, 애통, 아픔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눈물과 사망의 고통과 애통과 아픔이 없는 자는 이런 나라가 시큰둥할 것입니다. 지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은 이런 나라가 너무나 좋아서 빨리 가고 싶어 하지만 믿음의 싸움이 없이 거짓 평안에 속아서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좋게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지금도 자기의 능력으로 눈물과 애통과 아픈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 그리 좋아 보이겠습니까?
 
 
 
 
21절, 여호와께서 함께 거하시는 장막에는 강들이 둘러 쳐있는 것 같아서 적들이 들어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곳에 위엄 중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감히 넘볼 수가 있겠습니까? 22절, 여호와가 함께 거하시면 여호와가 재판장이 되시고 율법을 세우시는 자이시고 우리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재판장, 입법자, 왕을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입니다. 독재이지요. 온전하고 완전한 독재입니다. 우리가 늘 민주화를 말하면 삼권분립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삼권분립이 아니라 오히려 삼권을 다 쥐고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 세계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독재 중에 독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하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이것이 가장 완전한 통치입니다. 이것을 사단이 싫어하여 반역을 한 것이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인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나는 언제나 나의 재판장과 입법자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 어떤 문제를 두고서 판단을 할 때 언제나 나에게 후한 재판을 하고 나를 중심으로 법을 세우고 해석하고 나를 왕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오직 여호와께서 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은 사람은 예수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싫다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죄가 무언지를 깊이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3절, 너의 돛대줄이 풀리고 돛대의 밑을 튼튼히 못하고 그래서 돛을 달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가 예루살렘을 말하는지 앗수르를 말하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으나 그들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예루살렘이 힘이 없는 모습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저는 후자로 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적군의 침략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것입니다. 배가 돛을 올리지 못하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배는 돛과 노를 저어서 가는 배인데 요즈음 말로는 엔진이 고장 난 배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형편입니다.
 
 
 
 
곧 우리의 형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제대로 하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죄인이라서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온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이것을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완전하게는 안 되지만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것을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는 쪽으로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은 복음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으로 마땅히 최선을 다하고서도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죄인임을 무익한 종임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부족합니다만 그러나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라는 말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어떤 것입니까? 온전하여 흠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여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돛을 올릴 수도 없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 23절에서 못하였으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저는 자도 탈취물을 나누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돛을 올릴 수도 없는 배를 가지고 무슨 전쟁을 하겠습니까? 그런 배를 가진 상태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무슨 실력으로 저는 자까지 전리품을 얻게 되는가 하는 말입니다.
 
 
 
 
2차대전 중에 일본이 패하게 된 근본 원인이 기술력의 부족이었다고 합니다. 장군들의 회의에서 전쟁의 승산이 없다고 본 군대는 해군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육군의 세력이 더 강하여 결국 전쟁을 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바다의 싸움은 거함, 거포이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일어나고 보니 적은 보이지도 않는데 포탄이 날아오는 것입니다.
이미 레이더를 사용하여 공격을 하는데 일본은 큰 배, 큰 포로 무장하여도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은 전쟁의 도구로 배를 비유로 한다면 돛도 올리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탈취물을 얻기는커녕 적에게 꼼짝없이 붙들려 죽게 된 지경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전리품을 얻게 되고 저는 자까지 그 탈취물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때가 차매 이루어진 여호와의 전쟁의 결과입니다.
 
 
 
 
시편 68:7-18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싸워서 이기신 결과로 집에 앉아있는 여자까지 그 탈취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12절). 이러한 결과는 여호와께서 전쟁에 승리하셔서 전리품을 거두어 와서는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7-8절입니다. 시편 68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지는 선물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지금 돛을 올릴 수도 없는데 어떻게 저는 자까지 전리품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전쟁으로 주어지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성경 한곳을 더 보고자 합니다.
 
 
 
 
사무엘상 30:21-25절입니다. “봉독” 다윗이 시글락에 살 때 일어난 일입니다. 적군이 와서 성을 불사르고 모든 것을 탈취하여 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추격하여 ?을 때 200명이 지쳐서 못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브솔 시냇가에 머무르게 하고서 적군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어 엄청난 전리품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때 악한 자와 비류들이 저놈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았으니 처자식만 주어서 내어 ?자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악한 자라, 비류라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이 부당합니까? 성과급이란 것이 부당하지는 않지요. 일한 만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디에서는 부당하게 되는가 하면 여호와의 전쟁에서는 부당한 것입니다.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신 것을 그렇게 못하리라, 동일하게 나누어라. 이것이 시온의 영광입니다. 세상과 얼마나 다릅니까? 그런데도 교회가 성과급으로 말하게 된다면 이것은 악한 자와 비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아가서 전쟁할 만한 그런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돛을 올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저는 자와 같습니다. 전쟁에서 저는 자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런 저는 자가 탈취물을 얻게 된 것은 누가 대신 싸우셔서 승리하여 그 전리품을 은혜로 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악한 자와 비류인가 아니면 저는 자인가를 돌아봅시다. 저는 자가 받은 그 은혜는 말 그대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도 한몫을 했다고 하는 자는 악한 자와 비류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풍성한 나라입니다. 이러한 것을 맛보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능력과 실력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을 은혜로 불러 보아서 새로운 나라로 만들어 내시는 나라가 시온의 영광입니다. 이곳에는 병들었노라 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의 거하는 자들이 24절 하반절에 사죄함을 받으리라. 사죄함을 받은 자만 가는 나라입니다. 이 영광의 날을 소망하여 살아갑시다.








이사야 34:1-17  자세히 읽어 보라  2000. 4. 19.

일주일에 설교를 몇 번씩 듣습니까? 부지런히 나오시는 분은 10번은 듣습니다. 새벽기도는 뺀다고 하여도 세 번입니다. 그런데 그 세 번의 설교를 듣고 나서 단 한번이라도 설교의 본문을 한번 읽어 봅니까? 과연 그러한가 하고 한번 자세히 읽어 보시는 경우가 있습니까?

 
 
 
 
오늘 16절 말씀에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고 하십니다. 자세히 읽어 보면 다 짝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무슨 짝을 말하고 있습니까? 말씀의 짝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말씀을 말씀으로 푼다고 하면서 이상한 숫자로 푼다든가 색깔로 푼다든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붉은 색만 나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시키는 것도 그런 예 가운데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에돔의 뜻은 붉다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시키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라, 그러면 다 짝이 있다고 하시는데 그 짝이 무슨 짝이냐 하면 짐승의 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돔을 심판하고 나면 그곳에 짐승이 거하는 처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서 15절까지의 짐승들이 에돔에 거하게 되기에 심판으로 황폐한 곳이 되어서 사람이 살지 못하고 짐승들이나 거하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을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대충 보니까 그래 말씀의 짝이 있구나, 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말씀으로 풀고 짝이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짐승들의 짝이 빠진 것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5절의 끝이 솔개들도 그 짝과 함께 거기 모이리라, 한 것처럼 심판받은 땅이 황무하여 짐승들이 짝을 이루어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는 그런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예언을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다.
 
 
 
 
새번역에는 아예 짐승의 짝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16-17절. “주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짐승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이 없을 것이다. 주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의 영이 친히 그 짐승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친히 그 짐승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시고 손수 줄을 그어서 그렇게 나누어 주실 것이니 그 짐승들이 영원히 그 땅을 차지할 것이며 세세토록 거기에 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틀림없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고 배우고 순종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가 다른 데 관심을 가질 틈이 없습니다. 우리 평생에 성경전체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보고 가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보기 위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보기 위하여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셨기에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도 읽은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고자 합니다.
 
 
 
 
1절, 온 세계를 향하여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열국, 민족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을 향하여 들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땅히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불행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구원하시고 무엇을 심판하실 지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만국을 향하여 들으라고 하시는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2절, 만국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아는 하나님은 그저 사랑의 하나님만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단지 화를 내시는 것은 주일성수 안하고 십일조 안하면 화내시는 줄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니 주일성수와 십일조만 잘하면, 교회생활만 잘하면 그저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잘못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진노하고 계신 것입니까? 안식일을 제대로 안 지킨 것입니까? 제사를 제대로 안 지낸 것입니까?
 
 
 
 
이사야 1:10-17절. “봉독”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책망을 하시는 것은 그런 것 하면서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 악이 하나님의 공의가 그 땅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죄악 속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노하신 하나님은 만국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려는 것입니다. 진멸이란 싹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헤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인데 군인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까지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전쟁이 가나안 정복 전쟁입니다. 두 가지만 보고자 합니다.
 
 
 
 
여리고성, 여호수아 6:21절. “봉독” 진멸하라, 그리고 물건은 금, 은, 동, 철은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게 합니다. 개인이 취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아간이 여호와께 바친 물건을 훔쳐서 숨겼다가 그 가족과 함께 돌 맞아 죽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붙여주시는 싸움에 자기 공로를 주장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남녀노소 짐승까지 다 죽이는 것입니다. 물론 기생 라합과 그 가족은 약속대로 살려 줍니다만 나머지는 진멸입니다.
사울 왕, 사무엘상 15:3절. “봉독” 아말렉을 진멸하라, 남녀노소 짐승까지... 그런데 왕을 살려주고 짐승 중 좋은 것은 취하여 온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울이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 점잖아 보이던 사무엘이 칼로 아각을 찍어 쪼개어 버립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진멸전쟁의 무서운 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분노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에돔으로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모든 세계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별명입니다. 그러니 야곱과 에서를 말하면 선택과 비선택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나라도 에돔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와 진멸의 전쟁이 어떻게 시행되는지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다.
 
 
 
 
3-7절입니다. “봉독” 이와 비슷한 심판의 말씀을 찾아봅니다. 예레미야 46:10절. “봉독” 에스겔 39:17-20절. “봉독” 요한계시록 19:11-18절. “봉독” 이렇게 무서운 심판을 행하시는 것은 시온의 송사를 위함입니다. 시온의 송사란 시온의 억울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인 세대를 향한 고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한 선지자치고 핍박받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는가, 라고 예수님께서 고발하고 계시는 곳을 봅니다.
 
 
 
 
마태복음 23:27-39절. “봉독” 구약의 심판의 말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구체적인 면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인 것, 곧 그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하나님의 분노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향하여 진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에서 살아남는 자는 누구입니까? 기생입니다. 잘나고 멋진 사람이 아닙니다. 잘나고 멋진 사람은 여리고성을 지키기 위하여 정탐꾼을 찾기 바빴지만 기생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이미 알고 정탐꾼을 숨겨준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진멸하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기생 라합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배신하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배신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공로를 부정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환란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들키게 되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의 하소연이 바로 시온의 송사입니다. 이러한 시온의 송사를 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6:33절. “봉독” 사도행전 14:22절. “봉독” 요한계시록 6:9-11절. “봉독” 이런 말씀들을 예사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진멸이 예고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입은 이 복음을 세상은, 마귀는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인 이 세상이 그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자들 또한 가만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주의하여 읽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 더욱 우선적인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서운 진멸전쟁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까? 심판의 불이 임할 때에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사야 34:8-10절입니다. “봉독” 시온의 송사를 갚으시고 나면 나머지는 어떻게 됩니까? 시냇물은 역청이 되고 티끌은 유황이 되고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는 것입니다. 역청과 유황에 불이 붙으면 꺼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끊임없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7-10절. “봉독” 불과 유황못에서 밤낮 괴로움을 당하리라. 오늘날 이런 지옥과 심판의 말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저 위로와 치유를 하고 상담을 잘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옥불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너무나 선명하고 분명하지 않습니까? 목사님, 지금 제가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라고 대답할 때 이것이 위로가 됩니까? 천국이 있습니다, 지옥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위로와 힘이 됩니까? 당장 현실적인 문제만 크게 보이고 주님의 십자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심각한 지경에 빠져있다고 자기를 진단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역청과 유황이 타는 불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것으로 인생의 가장 큰 성공이요 축복이 아닙니까? 이보다 더 큰 세상의 행복이 있습니까? 영원한 유황불이 타고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의 삶의 자세는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타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3:8-14절입니다. “봉독”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사야 35:1-10  시온의 대로  2000. 4. 26.

34장에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분노하셔서 진멸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진멸을 하고 나자 사람이 사는 궁궐과 성읍에 짐승들만 짝하여 사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까? 시온의 송사를 인한 것입니다. 시온의 송사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받는 고통으로 인한 송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송사로 인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고 또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시는데 그 길이 바로 시온의 대로입니다. 오늘은 이 시온의 대로가 무엇이며 이 길로 갈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시온의 대로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점검하고 시온의 대로로 바르게 가고 있다면 격려를 받고서 더 잘 가게 될 것이고, 혹시 시온의 대로 보다는 세상의 대로를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빨리 회개하고 시온의 대로로 유턴해 와야 할 것입니다.
1-2절, 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그날에 여호와의 영광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온의 대로가 열리기까지 주의 백성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란 서로 격려하는 일입니다.
 
 
 
 
3-4절, 왜 이러한 격려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성도에게 핍박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주의 택한 자들을 이 세상이 미워하기에 오는 당연한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예수님께 속하여 있으면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제대로 살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기에 핍박이 안 올 수도 있습니다만 제대로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는 당연히 핍박을 받고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과 핍박이 아니라 자기의 야망을 위하여 고생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위로해달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책망이 될 것입니다. 목사도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주님의 택함을 입은 자로서의 고난이 있는 자라면 위로하고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을 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고 낙심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격려를 하는 근거는 하나님이 복수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수하신다는 말씀이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워낙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많다 보니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시면 분명히 보수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보수하시는 분이 오셔서 구원하실 것이기에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격려가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금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이런 말씀이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보이는 것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에 그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약속을 확인하면서 서로 격려하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3-26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를 굳게 잡도록 그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일성수가 아니라는 것은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아니라는 것은 이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32-39절을 봅니다. “봉독” 이것이 성도의 격려입니다. 우리가 연약하니 날마다 모여서 이러한 격려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격려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의 신앙이 든든합니까? 그렇지 않는데도 왜 모이기를 힘쓰지 않습니까? 믿음의 싸움을 하지 않기에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기다리던 시온의 대로가 열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5-10절입니다. “봉독” 이것이 시온의 대로가 열린 모습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됩니다.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뛰게 될 것입니다.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길은 거룩한 길입니다. 깨끗지 못한 자는 가지 못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런 길에 누가 가고 있는 것입니까? 소경, 귀머거리, 저는 자, 벙어리가 갑니다. 이들은 정결하지 못한 자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자기의 죄인가, 자기의 부모의 죄인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처럼 이런 장애는 죄로 인하여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에서 이러한 자는 레위인이라도 성막을 위한 일을 못하게 합니다. 신체가 온전한 자만이 감당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가 어떻게 거룩한 길로 가게 됩니까?
 
 
 
 
9절과 10절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 속량함을 얻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대로로 걸어갈 수 있는 자는 구속함을 받고 속량함을 받으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아무리 죄인이고 불구자라도 구속함을 입은 자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니 이 시온의 대로가 어떤 행렬입니까? 볼품이 없는 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갈수가 없는 길입니다. 나는 구속이 필요한 죄인입니다, 나는 속량을 받아야만 하는 죄인입니다, 나의 힘으로는 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소경과, 저는 자, 귀머거리, 벙어리란 한가지의 장애만이 아니라 귀머거리가 되었기에 벙어리가 되듯이 온전치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이 시온의 대로입니다. 그러면 이 시온의 대로가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40:1-5절입니다. “봉독” 시온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 인용하여 사용합니까? 세례 요한이지요. 그리고 그 시온의 대로를 평탄케 함으로 오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께서는 시온의 대로를 준비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시온의 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길이 아닙니다. 길을 소개하고 준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대로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요한복음 14:6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40장에서는 시온의 대로를 만들라고 하시지만 이사야 49장에서는 주님이 친히 길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9:8-13절입니다. “봉독” 11절에 내가 나의 산을 길로 삼고 모든 대로를 돋우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로를 통하여 주의 택하신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21절을 봅니다. “봉독” 시온의 대로를 향하여 길표를 세우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나중에 주님의 초림으로 인하여 주님의 택하신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모습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7-9절을 봅니다. “봉독”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이들을 땅끝에서 모으시는데 그 오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이 돌아오는 길이 시온의 대로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양이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시온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무리를 왜 이런 자들로 표상으로 세우는 것입니까? 온전하고 씩씩하고 건강한 자들을 표상으로 내세우지 아니하고 병신 쪼다 같은 머저리들을 표상으로 세우는 것입니까?
 
 
 
 
이것은 기존의 세상에 대한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존의 세상의 질서는 무엇입니까? 자기들은 본다는 자, 잘 걷는다는 자,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자들의 세상입니다. 자기들이 온전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도우심과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라, 자기들의 능력으로 자기들의 의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자들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세우심으로 잘났다고 폼 잡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바보소리 안 듣고 살려면 죽어라고 공부해라, 내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네 공부는 시킬 테니 하면서 자녀를 닦달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 세상에는 약한 자가 설 자리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 부모일수록 더욱 성공과 출세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모든 기회를 자신의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어도 어떤 친구를 사귀라고 합니까? 자기가 덕을 볼만한 그런 사람을 사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쭙잖게 정의감을 발휘하려면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바보처럼 그렇게 살아가지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러니, 그렇게 말하지 아니합니까?
 
 
 
 
그러다 보니 온통 학교교육이란 게 경쟁력을 키우는 일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국가의 교육자체가 세계의 경쟁에서 밀리면 죽는 것이니 살아남기 위하여 더욱 고급인력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속을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대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처럼 제동도 없이 달려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그러니 소경과 저는 자와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의 대로로 가는 자들의 표상이 무엇입니까? 소경, 저는 자, 귀머거리, 눈먼 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시온의 대로로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이 없는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와서 보고서는 에게, 뭐  이런 곳이냐, 하고서 가버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볼품없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길을 가겠습니까? 구상이라는 사람의 시를 한편 소개합니다.
 
 
 
 
  그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히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없는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볼꼴없는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걷는 주님의 고난의 길이 우리의 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길을 걷는 자의 모습이 볼꼴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좀 가난하여도, 병이 들어도, 소경이요 저는 자요 귀머거리요 벙어리일지라도 주께 구속받은 그 감사와 감격으로 절뚝거리며 기뻐 뛰며 가는 걸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교회가 스스로 싫어하고 있지는 아니 합니까? 스스로 세상에서 멋있게 보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치장하고 겉을 꾸미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칠한 무덤으로 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온갖 고상을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속히 회개하고 시온의 대로로 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비록 볼품없는 행렬이라도, 구속받고 속량 받은 그 기쁨으로 달려갑시다. 시편 126편. “봉독”








이사야 36:1-37:4  무엇을 의뢰하느냐?  2000. 5. 3.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입니다. 죽었던 것 같은 나무가 싹이 나고 꽃이 피어납니다. 무릇 살아 있다는 것들은 봄이 옴으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나무에는 봄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따뜻한 날씨와 비가 오더라도 죽은 나무에는 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살아있는 나무입니까? 죽은 나무입니까?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의 자극이 있다면 말씀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말씀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회개하거나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미지근하여 별 반응이 없는 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저의 영적인 능력이 문제이기도 하고 여러분의 굳은 심령도 문제입니다. 누가 누구를 탓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말씀 앞에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회개란 주님 외의 것을 의지하고 사랑하던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무엇을 의뢰하느냐’입니다. 이 말은 선지자가 전한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온 앗수르의 군대장관 랍사게가 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할 때는 이방인에 의하여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의뢰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도 돈을 의지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 아니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갑니까?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으로 화가 났습니까? 한주간의 삶, 한달의 삶을 돌아봅시다. 정말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였습니까? 아니면 단지 나에게 손해가 오고 세상의 힘이 없어서 오는 원망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러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왕이라면 예외 없이 부국강병을 원할 것입니다. 나라가 부강하고 군사가 강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는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왕을 원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왕을 원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른 나라를 보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전쟁을 행하여도 잘하는 것처럼 보이니 그들도 왕을 요구한 것입니다.
 
 
 
 
사사 시대를 지나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왕되심 보다 사람 왕을 더 원한 것입니다. 그후로 이스라엘의 왕조는 크게 두 가지의 흐름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과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왕이라는 두 갈래입니다. 어느 왕이 많았습니까?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왕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북 왕국은 더 많이 세상을 의지하고 우상을 섬겼기에 더 빨리 망한 것입니다. 남 왕국은 하나님이 다윗과 세우신 언약으로 인하여 북 왕국보다는 나았지만 그러나 많은 왕들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왕을 요구할 것을 이미 아시고 가나안땅에 들어오기 전에 모세를 통하여 왕의 자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17:14-20절을 봅니다. “봉독” 왕으로서 말을 많이 두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왕과는 거꾸로 된 왕의 규례입니다. 적어도 왕이란 말이 많아야 합니다. 무기가 많아야 하고 아내를 많이 거느리는 것은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 정략결혼으로 아내를 많이 두는 것이고 은금이 많아야 왕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이 세상의 왕과는 전혀 다른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왕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까?
 
 
 
 
18-20절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을 지켜 행하면 그 마음이 교만하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여 그 날이 장구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왕의 규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조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되면 나라가 회복됩니다. 그러나 왕이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성전은 황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흥망은 군대의 힘이나 왕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히스기야 왕에 대하여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은 우리가 아는 대로 선한 왕입니다.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25세에 왕으로 등극하고서는 종교개혁을 먼저 합니다. 성전을 수리하고 정화합니다. 그리고 속죄 제사를 지내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신앙이 회복되자 돌아가는 길에 유다 여러 성읍에서 우상을 부수고 산당을 제거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섬기고 있던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도 부수어 버립니다. 이런 것까지 우상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제사와 제사장과 레위인 조직까지 정비를 합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을 하였지만 그 당시의 강대국인 앗수르가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은 열왕기하 18장과 19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국가의 위기입니다. 전에 앗수르 군대에 성전의 보물과 심지어 성전의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바쳤지만 또 다시 쳐들어 온 것입니다. 라기스에 진을 치고서 군대장관 랍사게를 보내어 산헤립의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말로서 말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의뢰하느냐? 애굽을 의지하느냐,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아서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오히려 손에 찔려 들어 갈 것이라는 것과 여호와를 의지하느냐,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온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일말의 사실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고 또 앗수르를 하나님의 몽둥이로 사용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몽둥이가 스스로 교만하여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것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앗수르를 어떻게 처리하시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7절입니다. 애굽이란 상한 갈대와 같으니 너희가 여호와를 의뢰하리라 하느냐?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산당과 제단을 없애버린 그 신이 아니냐? 10절입니다. 내가 이곳에 올라와서 너희를 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는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몽둥이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말은 자기들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13-20절을 보면 앗수르의 교만이 극에 달합니다. 너희의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께서 이 성을 지켜주시므로 앗수르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사절단이 랍사게에게 유다방언으로 말하지 말고 아람방언으로 말하라고 하여도 일부러 큰소리로 히스기야 왕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말은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한다마는 그러나 앗수르의 군대 앞에서 이겨낸 신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대의 전쟁은 자기들의 신의 승리로 보기에 앗수르가 지금까지 승리하여 왔고 유대보다 훨씬 강한 나라들도 다 이겼는데 하물며 너희 나라야 이기지 못하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히스기야의 꾀임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유혹이 일어날 때가 없습니까? 하나님 믿어서 뭐 하냐, 그것이 당신에게 무슨 보탬이 되는가? 당신의 소원을 들어 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우리에게 오라, 우리는 힘도 있고, 능력도 있다, 기적도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로 와라, 하는 곳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우리의 소원을 성취시켜준다는 것입니다. 절에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상한 종교단체들이 그렇게 많이 일어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으로도 이런 말을 합니다. 오히려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면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항복하면 빵도 명예도 종교적인 능력도 보장하여 주겠다는 것이 예수님을 유혹한 사탄의 조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성에 갇혀 있다면 누구의 말을 듣겠습니까? 히스기야 왕의 말을 듣겠습니까? 랍사게의 말을 듣겠습니까? 
 
 
 
 
랍사게의 교만의 절정이 18-20절입니다. 여호와가 능히 건지겠느냐? 여러분, 이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히스기야 왕이 뭐라고 합니까? 함구령을 내립니다. 어떤 말로도 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무엇을 합니까? 기도하러 갑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남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부탁하고서 자기도 기도하러 성전에 나아갑니다. 그 기도하는 심정이 어떠한가 하면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히스기야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어떠한 자기의 공로를 가지고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37:4절입니다.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이 그 말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러 성전에 나아갑니다. 성전에서 랍사게가 가지고 온 편지를 펼쳐놓고 기도하고 나니 그 다음날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죽여 버립니다. 일어나 보니 시체뿐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여야 할지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우습게 여기는 것이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를 우습게 여기고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말을 듣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연합하여 한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톨릭처럼 한 교회이면 힘이 있을 텐데 개신교는 너무 많이 나누어져서 힘이 없다고 요즘에 더욱 연합운동을 많이 하자고 합니다. 그런 것으로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순수하게 우리가 교파는 달라도 한 주님을 섬기기에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고 연합활동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합예배에 참석을 해보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축하하는 자리에 예수도 믿지 않는 시장이나 구청장이나 국회의원이 와서는 한마디 인사하고 나자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예배입니까? 자 보아라, 우리의 힘이 이 정도다, 시장도 우리가 오라고 하면 와야 된다, 그런 식의 힘을 보이기 위한 집회가 되어 버린다면 이것은 새로운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망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힘을 부러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세 가지 유혹-정치적, 종교적 유혹을 물리치셨는데 오히려 우리는 그런 것을 원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오늘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의지하시렵니까?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란 신랑만 사모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신랑 외의 것이 자꾸만 커 보이면, 그것을 사모하면 간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그렇다고 하여도 이제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면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신부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것 아무것도 없어도 됩니다. 신부의 정조를 지키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제 2복음서’라는 소설의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소설화 한 것인데 마리아가 창녀로 나오는데 예수님이 발을 다쳐서 그 여인에게 치료를 받고서 그냥 나옵니다. 나중에 다시 그 일을 하는지 가서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하는 말이 여인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다시는 다른 사람을 받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소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기는 하였습니까? 그렇다면 날마다 주님만 의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의지하여 온 것이 주님 외의 것이라면 지금 이 시간에 버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나아가는 자세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는 심령으로 나아갑시다. 아이를 낳으려고 하여도 해산할 힘이 없는 우리의 처지가 아닙니까? 주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주님만 의지합니다.








이사야 37:1-7  히스기야의 기도  2000. 5. 10.

에스겔서 3:2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가 전할 때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자가 있고 싫어하는 자가 반드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도 듣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좋다, 라고 한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을 거슬리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설교의 기술을 사용하여 모든 자로 하여금 좋게 하는 것은 매춘행위와 같다고 로이드 존스 목사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년에 ‘목사와 설교’라는 제목으로 신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첫째 반응이 기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대로 본다면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의 기도 내용 중에 욕심 아닌 게 얼마나 됩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그동안 99% 이상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간구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할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제대로 보게 되면 기도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오늘 말씀이고 또 하나는 38장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이 국가적인 위기에서 구하는 기도라면 38장은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가장 주의하여야 할 것은 그저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분문을 상고하기 전에 우리에게 이미 들어 있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서 이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욕심이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를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를 구분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대상: 모든 대상이 다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의 내용: 자기 마음의 소원입니다. 기도의 방법: 지성이면 감천이다. 둘째, 종교인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대상: 아무데나 비는 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특정한 종교 특정한 신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을 바로 정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무나 돌에 비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빌어야 하고 하나님께 빌어야 한다고 합니다. 절에 가는 사람은 부처에게 빌어야 한다고 하고 교회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 자기 마음의 소원입니다. 미신적인 사람들을 비판하여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감추기 위하여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신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자기의 영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잘되어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왜 자기 아들이 잘되고 자기 가정, 자기 교회가 잘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 온전한 영광을 돌리신 예수님의 삶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제자들처럼 순교하고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고 바울처럼 고생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영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것이 이미 종교인들의 영광관입니다.
 
 
 
 
기도의 방법: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조금 변개합니다. 성경적인 용어로 바꾸는 것입니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산상기도, 합심기도, 중보기도, 고개를 무릎사이에 넣고 하는 기도, 기도의 순서까지 말합니다. 그리하여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라는 책도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의 소원을 비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용은 그대로인데 종교적인 색깔만 입힌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하면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종이기에 자기의 소원은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소원이 종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임의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고서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그러면 기도할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선명합니다.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히스기야를 통하여 보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다스리는 지금 이스라엘은 국가적인 위기입니다. 왜 이런 위기가 왔을까요? 히스기야 왕은 왕으로 등극하고서 그래도 성전을 청결히 하고 제사를 바르게 지내고 우상을 척결하였는데도 적군이 쳐들어 와서 함락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 다른 나라를 몽둥이로 사용하셔서 쳐들어오게 하실 수는 있는데 히스기야 왕은 그런대로 잘하는데도 이러한 침략이 있었다는 것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 기도에 대하여 보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처음에 앗수르의 침략 앞에 금과 은을 성전의 기둥에 있는 것까지 갖다 바쳐도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자기의 공로나 자격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이 혹시 불쌍히 여겨주시면,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내가 기도하였더니 이러한 응답을 받았다고 하면 기도 그 자체가 새로운 자기의 공로와 의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너는 그것을 못하니 내가 이루어 낸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로 하셨을 지라도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기도함이란 자기의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도 실력이 아님을 알라고 기도하는 것인데 오히려 기도하고서 나 기도 이렇게 하였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더라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기도가 무언지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종교인들이야 기도의 응답이 자기들의 정성을 바친 정도에 따라 기도하여 응답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자기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열심히 부르짖고 정성을 바쳤는지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기도를 봅니다.
 
 
 
 
37:3-4절입니다. 아이를 낳으려하나 해산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앗수르 왕이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니 하나님이 이를 들으시고 혹시 그 말에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러니 기도하여 주십시오, 라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부탁하고 자기도 성전에 나아갑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욕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으니 혹시 그 소리를 인하여 견책하시면 들어 주옵소서. 나 자신, 우리 가정, 우리 나라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이름입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모독을 그냥 보고 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데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4:1-11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 중에 패합니다. 4천명 가량 죽고 나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와서 적을 이기도록 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막에서 법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기가 올라서 고함을 지르고 전쟁을 하는데 법궤를 빼앗기고 3만명이나 죽는 대패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모독을 받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의 심판인데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의 악한 행동을 심판하시고, 엘리 가문이 망하게 되고, 이스라엘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는 것은 모독을 받을지라도 그 나라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법궤 홀로 싸워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도움을 필요로 안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면 이런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하여 간구하오나 혹시 적들이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이 일로 인하여 심판하여 주신다면, 하는 간구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참으로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욕을 얻어먹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체적인 입장에서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 모인 곳에서 교회와 성도, 목사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욕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욕하고 있는 정도라면 세상이 볼 때에 어떻게 보겠습니까? 교회가 세상과 달라 보이는 것은 단지 윤리 도덕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윤리 도덕적인 관점이 아니라 전혀 다를 질서와 세계를 보여주는 구별됨입니다. 윤리 도덕적이라면 다른 종교가 훨씬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땅 하면 하늘, 하는 것이고, 부자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것, 그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하면 보이지 않는 것, 이러한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들자,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니 떠날 준비를 하자, 그러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결코 섞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됨이 없으니 오히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적입니다. 경쟁이 세상보다 더하고, 은혜보다는 행위와 공로가 더 득세를 하는 교회를 보고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모독을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느냐, 잘한다, 나는 하나님 안 믿어도 너희보다 낮다, 나는 너보다 욕심 부리지 않는다, 그렇게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세상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잠잠하시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교회를 버린 것이 아닙니까? 마치 엘리 제사장 시대에 법궤가 적의 손에 넘어가도 하나님이 가만히 계심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상적인데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교회를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히스기야가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지만, 사사시대를 알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훼방을 받으시고도 가만히 계시면 자기들의 심판인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저도 한국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 이런 기도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십자가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이라도 하고 있는데 주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만 오늘 이 말씀을 보니 그러한 모독을 받고 있으시면서도 여전히 교회는 번창되고 있다면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겠는가 하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가 잘못되어도, 그래도 목사가 이렇게 많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고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설마 하나님이 이 모두를 심판하시겠는가 라는 그런 안심 속에 있다면 미지근한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10:20-23절을 봉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는 것입니다.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 중에서 하나님이 끝까지 그 약속을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잘못된 안정감에 만족하고 있지 마시고 오직 주님만 의뢰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목사가 이렇게 많은데 하지 마시고 북한 성도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놀고 있는 것이고, 장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릎서고 들판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데 기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몸을 뒤틀어 기도하고 가사를 말하지 못하여 김일성 찬양하는 곡에 가사를 바꾸어 부르며 성경 외운 것을 서로 비밀히 나누어 외우는 그들이 들키기만 하면 수용소생활을 15년 동안 하여야 하는데 수용소에서 먹을 것을 주지 않기에 바퀴벌레와 쥐와 뱀을 잡아서 먹다가 길어도 3-4개월 안에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와 우리를 비교해보면 교회 많다고 안심할 일이 못됩니다. 하나님이 교회가 바다의 모래보다 많고 교인이 바다의 모래보다 많다고 할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자주 들어보신 내용의 예화일 것입니다. ‘산 개구리 삼기’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나라가 망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구하소서, 그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교회가 망하면 하나님 손해입니다, 라는 그런 건방진 기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인들이 이렇게 많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영광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멀리 가지 않고 이사야 40:17절 말씀에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죄인 아닙니까? 심판 받는 것이 구원받는 것보다 지극히 당연한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하나님인양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소로운 짓들입니까? 어쭙잖은 몇 가지 일 해놓고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였으니 복 주실 걸, 구원 하실 걸... 꿈도 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사사 시대에 미가의 가정에서 사사로이 에봇을 만들고 우상을 만들고 레위 지파 소년을 제사장으로 세웠으니 하나님이 복 주실걸, 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히스기야의 이러한 기도의 자세는 우리가 참으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간구하는가, 주님께서 혹시라도 저들의 모독을 인하여 견책하여 주시면 우리가 구원을 얻겠지만 그냥 그대로 두시면 우리는 죽어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자세입니다. 여기에 무슨 자기의 정성과 공로와 행위가 개입될 여지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하나님이 이미 들으시고 응답을 하시는데 그 내용이 6-7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신을 보내어 물러가게 하겠고 그 왕은 돌아가서 죽으리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어떠한지를 또한 무엇을 구하는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기다리는 이 세상입니다. 어떤 자세로 기도하고 사시겠습니까? 주여, 혹시라도 긍휼히 여겨 주신다면..








이사야 37:8-38  기도  2000. 5. 17.

지난주에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보면서 우리의 일반적인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자기의 소원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하고 기도의 형식을 갖춘다고 하여도 우상에게 기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마음의 소원을 주시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자기의 소원과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별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합니다. 일리는 있는 말입니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우리의 생각은 나의 영광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영광의 지혜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본인에게는 수치와 고통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서도 영광이라고 하는 그런 영광인가를 구별하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영광이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의 내용을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좋아합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혀있기에 그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화가 날 일입니까? 그러므로 기도란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긴 하지만 세상의 영광이나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영광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됩니까?
 
 
 
 
빌립보서 4:4-7절입니다. “봉독” 6절에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육신의 열매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위하여 심는 것은 육신으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간구하되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그러면 무엇이든지 주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신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결국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면 기도가 응답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안의 기도입니다. 질병이 고쳐질 수도, 아닐 수도 있고, 무슨 문제가 해결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키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기도란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기도의 내용이 어떻게 진행되며 또한 응답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8-13절은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다가 구스 왕 디르하가와 싸우려고 다른 곳으로 가면서 다시 히스기야 왕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지금 잠시 급한 전쟁 때문에 바로 공격은 못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포기하고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느 왕이, 어느 나라의 신이 나와 나의 열조에게서 건짐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받고서 히스기야가 성전으로 나아갑니다.
 
 
 
 
지금 앗수르 왕은 하나님의 응답에 의하면 어떻게 됩니까? 7절입니다. 풍문을 듣고 고토로 돌아가 칼에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보낸 협박편지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도에게 적용을 하자면 이 세상의 위협이 전부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전쟁은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과거와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면 그것은 아무리 우리가 보기에는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여도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 왕의 결론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고토로 돌아가서 자기의 신에게 절하는 중에 자기 아들들의 손에 의하여 죽게 되는 것입니다(36-38). 그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왕의 위협적인 편지를 받고서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러 성전에 가지만 이미 하나님 편에서는 끝난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아는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란 하나님의 언약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개인의 신수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내 개인의 문제가 어떻고 하는 그런 예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흘러가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자기의 백성을 건지시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만 모든 것을 바치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입장만 생각하니 그런 것입니다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 중에 한 가지가 우리의 구원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구원만을 위한 하나님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최종 목표가 단지 한 개인의 구원차원에만 머물러 버린다면 구원을 확신하는 순간 더 이상 하나님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자기 개인의 구원의 관점으로만 보게 되면 자꾸만 성경이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에 자기 백성으로 건짐을 받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일로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히스기야 왕이 두려워하며 그 협박의 편지를 들고 성전에 가서 기도합니다만 이미 전쟁은 끝난 전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세상의 위협이나 공갈이 우리를 협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혹이 우리를 세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이미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나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신 그 주님의 약속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여도 몸을 죽이는 정도밖에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던질 수 있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절을 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약속을 받은 자라면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두려워 마시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주님의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14-20절은 히스기야의 성전에서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형편을 들으시고 보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이미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서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 중에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27-30절입니다. “봉독” 어찌 하나님을 사람이 지은 집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단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이곳에서 기도하거나 이곳을 향하여 빌 때에 들으시고 보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가 성전에서 주님, 들으시고 보시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간구하고 심지어 이방인이라도 기도하면 응답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41-43절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간구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이 이긴 그런 나라의 신은 우상이고 우리의 하나님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응답이 옵니다.
 
 
 
 
21절에서 35절입니다. 앗수르 왕의 모든 교만함을 하나님이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앗수르 왕이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큰소리 치고 떠들어도 하나님이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녀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의 교만, 목소리를 높이고 눈을 높이 들어 행한 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백향목을 가지고 무기를 만들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애굽의 하수를 말리리라 하는 그런 말들을 다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승리가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26절에서 태초에 상고에 이미 정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거민들이 무서워하고 그들이 망하고 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앗수르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니 그 코에 갈고리를 꿰고 그 입에 자갈을 물려,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징조로 금년과 내년에는 땅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고 제 3년에는 파종하여 먹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적이 쳐들어 와 있으면 성밖에 나가서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군이 물러가니 자기 땅에 난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징조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잘난 것이 아닙니다. 적군이 쳐들어 왔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이 범죄한 증거입니다. 그러함에도 적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단지 나의 개인과 가정과 나의 속한 단체와 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 즉 앗수르 왕을 물리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첫째, 유다 백성을 남기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게서 홀이 나오리라고 하신 야곱과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이미 멸절하여도 당연한 죄악을 지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징계는 하실지언정 완전히 버리시지 아니하시는 것은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31-32절에서 유다의 뿌리가 남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하시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열심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유다의 씨를 남기시고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시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남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씨를 남기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완전히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남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이기에 자기의 언약을 자기의 열심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둘째, 다윗과의 언약입니다(35절). 사무엘하 7:11-17절입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는 하겠지만 그 위를 끊어 버리지는 않겠다는 언약입니다.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가 물러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기도함으로 받은 응답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됨으로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셋째, 이러한 상황과 응답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35절). 결국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하나님의 자신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나 기도의 응답이나 간에 하나님의 자기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을 위한 일이며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아멘, 할 수 있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거나 억울하게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차원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 하시는 것입니다(33-34절). 그러므로 이미 우리는 주님의 승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나 우리의 생명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환난과 시련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인되고 감사가 일어나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38:1-22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  2000. 5. 24.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하여 세 번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침략 앞에서 어떻게 기도하였는가를 보았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앗수르 왕의 편지를 펼쳐놓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응답이 다윗을 기억하여 또 여호와 자신을 위하여 응답하여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이 첫 번째 기도의 제목입니다. 두 번째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세 번째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왜 일용할 양식인지는 말이 많습니다만 내일 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주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오늘 하루 주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내일은 눈뜨게 하시면 주님 안에서 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인 것입니다. 하루 단위로 사는 것, 오늘 죽어도 삶의 정리가 되도록 사는 것이 일용할 양식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으로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이제 너의 집안 모든 일을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생명이 연장되면 내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전형인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기도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 외에는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아니합니다. 하나님이 기계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언약 중심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피도 눈물도 없이 자기의 기계적인 법칙에 꼼짝없이 매이신 분으로 생각될 때가 혹시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을 보거나 하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시는지, 소돔과 고모라에 불로 심판하시는지, 또 가나안 정복시에 진멸하라고 하시는지 이해하기가 힘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때로 자기의 뜻을 돌이키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다 이루어 내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자기의 뜻을 돌이키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앗수르 왕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히스기야 자신의 개인적인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38:1절입니다. 병이 들어서 죽게 된 지경입니다. 이때 이사야가 와서 하나님께서 당신은 죽고 살지 못할 것이니 너의 집에 유언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너의 집안을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히스기야의 나이가 40이 채 되지 못한 나이입니다.
 
 
 
 
열왕기하 18:1-2절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왕위에 나아갈 때 25세이며 예루살렘에서 29년을 치리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히스기야가 오늘 말씀에서 15년을 더 살게 되는데 25세 왕이 되어 29년을 왕으로 있었다면 54세에 죽습니다. 그러니 죽을 병이 걸렸다가 다시 15년을 연장 받은 것이 39세입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하면 꼭 제 나이입니다. 설교준비를 하다가 얼른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 이제 죽는다, 집안을 정리하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목사가 하늘나라를 소망하자고 하였으니 아이고 살려 주세요, 그럴 수도 없고, 나 하나는 죽어도 되지만 처자식은 어떻게 하는가, 생명보험 하나 들어 놓은 것도 없는데 대부분 목사들이 죽고 나면 당장 사택부터 비워야 된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나, 라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목사님 참 믿음 없다 그러시겠지요? 공중의 새도 들의 풀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무얼 그리 걱정하시나요, 그러시는 분이 계십니까?
 
 
 
 
몇 년 전에 병원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부인은 교회에 잘나오는데 남편은 헌금이야기로 틀어져서 잘나오지 않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병이 걸려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가서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권유하자 영접을 하시겠다고 하여서 영접을 하였습니다. 이제 죽어도 천국 갑니다, 그렇게 말하였지요. 그러면서 담대하시라고 지금 죽어도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분이 환갑이 넘은 나이인데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맞는 말이지요.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히스기야의 입장이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제 국가적인 위기가 지나고 나자 자기가 죽게 된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히스기야가 이때 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이 므낫세인데 므낫세가 12세에 왕위에 오릅니다(왕하21:1). 그러면 히스기야가 병이 낫고 나서 3년에 얻은 아이입니다. 만약 므낫세 이전에 아들이 없었다면 요세푸스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위를 이를 왕자가 없이 39세에 죽는다는 것, 여러분이 히스기야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은 너는 죽으니 삶을 정리하라고 하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그래요, 죽지요, 그러시겠습니까? 히스기야가 어떻게 합니까?
 
 
 
 
38:2-3절입니다. 벽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이것을 기도 방법론으로 면벽기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면서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자신이 주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이런 간구에 주님께서 벌써 응답이 떨어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에게 이 말을 전하고 성밖으로 채 나가기도 전에 응답이 온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와 그 눈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15년을 더 연장하며, 앗수르 왕의 손에서도 이 성을 보호하여 주시겠다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를 취하여 그 병이 난 곳에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일 만에 성전에 나아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증거로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가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 것입니다. 좀더 상세한 본문을 봅니다.
 
 
 
 
열왕기하 20:8-11절입니다. “봉독” 부산에 있는 부전교회의 장로가 미국에서 신문보도를 보고서 편지를 보낸 것인데 벌써 십년 정도 된 이야기입니다. 전에 한번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만 인디아나주의 ‘이브닝 월드’라는 신문에 나온 내용입니다. 우주 과학자들이 우주선을 발사하기 위하여 과거 십만 년의 우주궤도를 조사하고 있는 중에 컴퓨터가 정지하여 버린 것입니다. 기계고장이 아닌데 멈추어 버린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니 컴퓨터에서 하루가 없어진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날짜가 하루 없어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지요. 그런데 그중의 어느 한사람이 옛날에 주일학교 다닐 때 태양이 거의 하루 종일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성경을 찾아보니 여호수아서에 있는 내용이지요. 그래서 B.C 1,490년에 맞추어 조사를 해보니 23시간 20분 동안 우주 궤도가 정지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40분은 어디 있는가? 또 기억나지요. 히스기야 왕 때 해 그림자가 10도를 뒤로 물러간 사실. 그래서 B.C 712년에 돌려서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태양 그림자의 십도가 시간으로는 40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오늘날 젊은이에게 솔깃한 이야기입니다. 노아 방주의 발견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고학적 사실이 발견된다고 하여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지는 않는 것이 이 세상의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지 않고서도 믿는 것이 기적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믿는다는 사실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과 표적으로 히스기야 왕이 병고침을 받고 15년을 더 연장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는가를 좀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히스기야 왕이 낫고 나서 시로써 나타낸 내용을 봅니다.
 
 
 
 
그 내용이 9-20절입니다. 단지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은 감사의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과 무능을 말하면서 자신의 중보가 되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17절을 봅니다. 내게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나에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그 평안이란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시고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평생토록 여호와를 찬송하겠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뜻을 돌이키심이 하나님의 자기 말씀에 일관성이 없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뜻을 돌이키심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대로 갚으신다면 이미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돌이키심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기의 선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섬긴 것을 추억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다른 차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이미 살펴본 대로 히스기야의 기도의 응답이 다윗을 생각하여, 또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응답하신 것입니다. 오늘 기도의 응답도 어떤 차원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열왕기하 20:5-6절입니다. “봉독”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와 눈물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히스기야의 기도와 눈물보다 더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하나님입니다. 이 언급을 먼저 하시고서 네 기도와 눈물을 보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하는 기도와 눈물, 탄식, 하소연이 아닙니다. 다윗과의 언약 안에서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 종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너를 살리고 이 성을 보호하리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한다고 하여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살리시고 성을 지키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바른 행실로 인하여 내가 응답 하마,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과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을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리라 하던 자가 그 죄의 용서를 받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히스기야는 15년 후에 다시 죽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는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용서 받는 것 그리하여 다시 살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악하여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용서하시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하기만 하면 어떠한 죄라도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 이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요 뜻을 돌이키신 결과입니다.
 
 
 
 
열왕기상 21:27-29절입니다. “봉독” 아합 왕 보다 더 악한 왕이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서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눕고 그 걸음도 천천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합의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러므로 내가 저의 시대에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저의 아들의 시대에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나 아합 왕이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무엇을 보십니까? 히스기야 왕의 선행이나 아합 왕의 악함보다도 그들의 낮아짐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겸비함을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도 히스기야의 모양이든, 아합 왕의 모양이든 이미 사망선고를 다 받은 사람입니다. 조금 빠르고 느린 정도의 차이이지 모두가 사망의 선고를 받은 자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선행으로도 스스로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다윗과 언약하신 그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모스 7:1-6절입니다. “봉독” 거듭되는 징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고집하여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려고 아모스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3절과 5,6절에서 아모스의 간구가 무엇입니까?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하였으며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약하여질 때로 약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선행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신 것이 아니라 히스기야의 말할 수 없이 낮아짐 때문입니다. 아합 왕의 악함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그 낮아짐 속에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동정심이, 긍휼이 정의보다 더 크시기에 오늘 우리에게 긍휼이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 긍휼의 희생은 대신 저주를 받으신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돌이키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우리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뜻을 돌이켜서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39:1-8  히스기야의 자랑  2000. 5. 31.

히스기야 왕이 국가적인 위기와 개인적인 위기 앞에서 겸손하게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겸손하게 기도하였기에 기도 응답이 되었다는 방법론 차원이 아님을 이미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인하여 다윗을 생각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응답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국가적인 위기와 개인적인 위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세는 겸손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세는 겸손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든 싸움인지, 아니 불가능한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히스기야 왕이 병이 들었다가 나았다는 소식에 바벨론의 왕이 사절단을 보냅니다. 왕의 친서와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히스기야 왕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것도 아주 강대한 나라에서 왕의 사절단이 왔으니 기분이 좋았을 것이고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궁중의 보물과 무기와 모든 좋은 것을 다 보여준 것입니다. 전 국내의 소유를 보여주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히스기야의 자랑이며 교만인 것입니다.
국가적인 위기와 개인적인 위기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 참으로 자기의 실력이었다면 자랑할 만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을 가지고 자기가 잘난 것처럼 외국의 사절단에게 자랑하였습니다. 위기 속에서 겸손히 엎드리던 왕이 이제는 자기의 영광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하여도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환난이 있을 때는 겸손하다가 그것이 벗어지면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듯이 교만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간곳없고 자기 잘난 것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지 않습니까? 아주 조그마한 공적만 있어도 내 이름이 드러나야 기분 좋아하는 우리의 죄성입니다. 선악과 이후로 우리는 계속하여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마땅한 죄라고 하는 목록 속에 자랑이라는 목록이 있습니다. 자랑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이 무슨 죄냐 라는 생각이 드시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문제 대부분이 자랑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자랑할 거리가 있으면 기분이 좋고 자랑할 거리가 없으면 기가 팍 죽어지내는 것이 우리의 인생살이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자랑하기 시합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 하는 경쟁을 통하여 결국은 누구의 자랑이 더 뛰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인데 이런 모습이 동일하게 교회 안에도 누가 누가 잘하나, 하는 경연장이 되어 버린다면 이것이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의 자랑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스기야 왕의 부귀영화가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봅시다.
 
 
 
 
역대하 32:20-23절을 봉독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어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하룻밤 사이에 시체를 만들어 버리시고 그 왕 산헤립은 얼굴이 뜨뜻하여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고국에서 자기 아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자 여러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고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히스기야가 열국 중에서 존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어느 정도의 부귀가 주어지는지를 역대하 32:27-31절을 봅니다. 부와 영광이 극하게 됩니다. 보배로 인하여 나라의 창고를 새롭게 세우고, 곡식을 위하여도 새롭게 창고를 지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짐승들을 위하여 외양간을 더 짓고 성읍을 더 지어야 하는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재산을 심히 많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테스트하여 보는 것입니다. 이런 부귀영화 중에서 과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적군의 침략 앞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서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던 그 심정이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31절을 봅니다.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와서 그 땅에 일어난 기적들을 묻습니다. 그 기적이란 바로 앗수르 군대가 하루아침에 다 죽은 사건이며 히스기야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말할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셨다는 것은 히스기야의 심중이 어떠한지를 시험하여 보시기 위하여 히스기야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어버려두신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와 함께 하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정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를 확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잠시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지없이 인간의 죄된 본성이 그대로 쏟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간섭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이 정도라도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버리신다면 우리의 형편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러한 약함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부귀영화로 극하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합니까? 부귀영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교만과 자랑으로 나가게 됨을 성경은 늘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은혜에 늘 머물러 있게 하시기 위하여 항상 여러 가지로 간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을 우리 마음먹은 대로 하도록 두시고 그런 일들이 잘되도록 두신다면 우리도 주님보다는 나를 자랑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하여 세상의 물질에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재물도 허락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려움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니 사랑하신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면 되지 않아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란 언제나 하나님의 간섭을 벗어나서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어린애가 자기 좋아하는 것만 주면 어떻게 됩니까? 매일 사탕이나 아이스크림만 달라고 하면 부모가 줍니까? 너 먹고 죽으라는 식이라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를 겸손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스기야 왕이 자랑하고 교만하여 진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역대하 32:24-25절을 봅니다. 히스기야가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금요일 성경공부하면서 갚을 수 있는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만약 갚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삯이요 대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재산을 많이 주셨는데 히스기야가 교만하여 그 은혜에 보답을 안했기에 하나님이 그 모든 보물이 바벨론에 빼앗길 거라고 하셨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 그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여 은혜를 빼앗아 가신다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 아니라 삯으로 주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한 부분이 조금 이상할 때는 성경 전체적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답이라는 말을 새번역에서는 감사로 번역하였습니다. 보답보다는 감사라는 단어가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의 은혜됨을 더 잘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으면 그 은혜를 거두어 가버리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꼬, 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에 나의 목숨을 다 바친다한들 그것이 보답이 되지 않습니다, 하는 감사의 고백이요 찬송인 것입니다. 시편 116편 12절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내용이 그런 것입니다. 오직 그의 이름에 감사의 찬송을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무언가 좋은 것이 생겼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다고 하여서 그것을 다 빼앗아 가버리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서 그러면 감사헌금 안 해도 되겠네, 하시는 분은 안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헌금 몇 푼에 갚아질 은혜라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0:15-17절을 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통 안의 한 방울의 물 같습니다. 먼지 같습니다. 레바논의 거대한 삼림속의 짐승들이 번의 소용에도 보족하고 그 나무들이 화목에도 부족한데, 세상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데 무엇으로 감사를 드리며 무엇으로 보답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을 보면 우리의 헌금이나 감사의 자세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지는지 아십니까? 얼마 되지 아니하는 것을 드려놓고 나는 할 만큼 하였다는 식의 자세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금 자세를 보시면 아이들 생일잔치에 사용하는 돈과 성탄절 헌금하는 것 한번 비교하여 보십시오. 아니면 자신들의 생일잔치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래놓고는 주님을 사랑한다고요?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드리지 않으면 나에게 손해가 오는 것 아닌가 하면서 자기 손해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하는 헌금이라면 그만 두시는 것이 하나님을 덜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아서 망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더 좋은 복을 받아내자, 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돈 주고 사려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시몬이 성령의 은사를 돈 주고 사려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든가 감사라든가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국가적인 위기와 개인적인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앞의 자세가 어떠하였습니까?
 
 
 
 
저는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라가 망하여도 마땅하고 저가 죽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혹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것도 주님의 언약을 위하여 다윗을 기억하여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하는 것이 위기속의 자세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자세,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악한 아합 왕이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회개하고 겸손히 걸음조차 조심하여 걸으니 아합 당대에 그 진노를 멈추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적이다, 라고 보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하여 매일 분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7편에서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오늘 당장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셔도 아무 할말이 없는 죄인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당대에 하나님의 진노를 연기하심으로 그 죄가 다음 대에 쏟아지면 억울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자기 선행을 인정하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감사치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자기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잊고서 사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자기의 부귀영화가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때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간곳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자 히스기야가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치 아니한 것이 바로 교만하였음을 알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면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고 사십니까? 감사하고 사십니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는데 감사하고 사십니까? 아니면 범사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범사에 불평과 원망으로 사십니까? 조금 감사하고 많이 불평하시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쳐야 됩니까?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고, 포로로 잡혀가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멀쩡하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야 버린 자식이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 믿는다는 우리가 자기 자랑하고 살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교만하여 사는데 왜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혹시 버려두신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계속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데도 세상 사랑하는 일이 막히지 않고 잘 나간다면 심각한 지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려움과 연단이 있음으로 우리의 자랑거리를 없애시는 것을 감사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나의 나된 것이 주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극심한 환난과 고통, 육체의 가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 라고 증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는 오히려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을 자랑하려 마시고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시고 이 세상의 자랑과 교만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0:1-11  내 백성을 위로하라  2000. 6. 7.

성경을 볼 때 흐름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는 부분적인 말씀을 상고하고 또 적용합니다만 그러나 늘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본문의 전체적이 흐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을 찾아 갈 때 처음 가는 길이라도 중간 중간의 이정표를 보면서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볼 때도 전체적인 이정표를 점검하면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 전에 나누어 드린 유인물을 가지고 참고로 이사야서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내용 중에 3페이지를 봅니다. 이 내용은 김경래 교수의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책에서 일부분 복사를 한 것입니다.

 
 
 
 
“1-39장이 강처럼 흘러 40-66장이라는 바다로 흐른다. 1-39장의 메시아 예언, 전쟁이 없는 메시아 왕국(2:1-4), 여호와의 싹과 그의 백성(4:2-6),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임마누엘(7:14), 다윗의 왕위를 이어갈 한 아기(9:6-7), 이새의 뿌리에서 나올 왕과 그가 가져올 평화(11:1-10), 의의 왕(32:1-8), 그리고 이사야 40장에서 66장은 첫 단락이 40-48장,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 이스라엘과 열방이라는 대립관계, 둘째 단락은 49-57장,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아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 세 번째로 58-66장에서 메시아 왕국에 합당한 자”
이렇게 흐름을 파악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다르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정도로 정리를 하고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1-2절입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정다이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 벌을 배나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복역의 때 또는 전쟁의 때를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이 차면 돌아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는 이사야 선지자가 가장 앞서는데 그 복역의 때가 끝났으니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아직 포로로 다 잡혀가지도 않은 때에 이러한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사야보다 시간적으로 더 나중 선지자가 예레미야인데, 예레미야 25:11절에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을 하고 나서 약 7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70년의 때가 찼습니다.
 
 
 
 
스가랴 1:12-1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봉독”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을 향하여 노하신지 70년이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여호와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선한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위로하는 말씀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회복을 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의 대에 포로에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그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상으로 과거 현재 미래라고 구분을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말씀하시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에 역사현실에 나타나지 않아도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의 말로 한다면 어떻게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 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입에서 나왔다면 그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을 하자면 어떻게 됩니까? 이미 예수님이 승리하셨다, 이미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므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그 시점은 웃시야 왕이 죽고서 요담과 아하스의 악한 왕과 히스기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4대 왕의 통치기간 동안 예언한 선지자로 봅니다. 마지막 왕이 히스기야인데 히스기야가 자랑하다가 그 보물들이 바벨론에 다 빼앗길 것이고 그 아들들도 포로로 잡혀가서 환관이 되리라는 예언을 하는데 그런데 이미 복역의 기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가지도 않았는데 포로로 잡혀있는 기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앞으로 어떠한 환난과 시련이 올지 모릅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더 완악하여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때는 항상 악이 관영하였던 것입니다. 이럴수록 성도의 삶의 고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도의 고난에 대하여 뭐라고 위로하는 것입니까? 끝났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 아직 고난이 시작도 안 되었는데도 이렇게 말하므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승리하셨다, 끝났다, 이미 너는 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이것이 정다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죄가 과연 우리의 벌 받음으로 해결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의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다, 다른 말로 충분히 받았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러한 벌을 다 받아야 회복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의 죄값을 어떻게 우리가 다 받을 수 있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이미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하나님의 자기 언약이기에 70년이 차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70년입니까?
 
 
 
 
역대하 36:21절을 봅니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바벨론 70년 동안 땅이 안식년을 누린 것처럼 쉬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만 아니라 안식년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상 안식년을 잘 지켰다는 내용이 성경에도, 다른 기록에도 나타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강제로 포로로 잡아가서라도 땅을 안식케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에 충실하시는 것입니다. 70년을 안식하였다면 7년에 한번씩 땅을 쉬게 하여야 하는데 70번을 쉬어야하는 기간이라면 몇 년 동안 안식년을 계산하는 것입니까? 490년입니다. 그러면 70년을 포로로 잡혀 있었다고 그들의 죄가 다 갚아진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또 같은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복역의 때가 끝이 나는 것은 하나님이 70년 동안이라고 그들의 벌을 받는 기간을 정하셨기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70년이 아니라 700년을 포로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죄를 다 갚아 낼 수 있는 길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7이란 성경에서 완전함을 나타내고 있는 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우리의 죄의 용서를 받는 길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분의 완전하신 속죄사역 때문에 죄의 노예에서 의의 종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1:11절에서 언제까지 주님의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시겠습니까, 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역의 기간이 끝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긍휼하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가 어떻게 선포되어집니까? 
 
 
 
 
3절에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마치 임금의 행차 앞에 물렀거라고 외치는 소리꾼처럼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첫째, 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복역의 기간이 끝나고 포로에서 돌아오는 길이기에 돌아오는 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산은 깎아내리고 평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광야에 고속도로를 만들라는 말이 아니지요. 무엇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주님이 회복하시기 위하여 오시기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3-17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세례 요한이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무슨 길입니까?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회개의 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죄사함을 받게 하려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0:3절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보니 요한복음 1:14절에서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외형은 분명히 보통사람보다 못하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셨습니다. 특별히 누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유대인들이 어려서 받는 회당교육 정도입니다. 그러니 세상적인 영광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 분을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마음을 우리에게 비추어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6절을 봅니다. “봉독” 그러므로 이러한 영광을 지금 알아보는 자는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택함을 입은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은혜와 영광을 모르면 다른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6-8절을 봅니다. 외치라는 내용의 두 번째는 육체는 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모르면 반드시 찾는 영광이 육체의 영광입니다. 이런 영광이 바로 육체의 자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자랑하는 것처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가 뭐라고 외쳐야 합니까?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이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붐이라. 여호와의 기운이란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한번 불어 버리면 모두 말라 떨어져 버리는 것처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눈가에 주름진다고 웃을 때도 눈가에 주름지지 않도록 붙들고 웃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주름이 가지 않게 바르는 화장품이 아주 적은데 상당히 비싼 가격으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꾸밈을 꾸미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장을 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껍데기를 꾸며도 속이 준비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9-11절입니다. “봉독” 가난한 자는 자기의 높아짐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부자입니까? 가난합니까? 다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꽃이 떨어져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을 봅니다. “봉독”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육체를 꾸미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없어질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사모’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 사랑을 알고 반응을 보여서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는 세상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그 영광은 지금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외치라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9-11절입니다. 선한 목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힘써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너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강하신 자로 임하실 것이며 친히 그 팔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급이 그에게, 보응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헛된 것으로 바꾼 자들에 대하여는 보응을 하실 것이고 주님의 영광을 사모한 자들에게는 영생의 영광의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어떤 일을 하시길래 하나님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11절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지난 주일 낮에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의 하는 일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라 하시고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로 오신 분을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자들에게 나를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하신 이유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르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4-6절입니다. “봉독” 지금 고난 중에 계십니까? 이미 끝났습니다. 그 죄의 값을 충분히 담당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늘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는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산들이 예수님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태산 같은 문제가, 깊은 골짜기 같은 어려움이 주님을 보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가려지지 않도록 세상의 염려와 걱정이 주님을 가리지 않도록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영광이란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들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관심사는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 곧 복음에 착념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팔을 의지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출처: 심플 라이프 원문보기 글쓴이: 심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