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스크랩] 강해 이사야 강해 4

에반젤(복음) 2023. 4. 2. 01:06

이사야 강해 4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우리를 인하여 (사 53:4-6)
예수님의 기도 (사 53:7-12)
노래하라 (사 54:1-8)
긍 휼 (사 54:9-10)
영원한 언약 (사 55:1-5)
찾으라 부르라 (사 55:6-13)
안식일 (사 56:1-8)
벙어리 개 (사 56:9-12)
누구를 믿는가? (사 57:1-13)
성공자 (사 57:14-21)
참된 금식 (사 58:1-9)
안 식 (사 58:9-14)
 (사 59:1-8)
구속자 (사 59:9-21)
빛을 발하라 (사 60:1-3)
여호와의 신 (사 61:1-3)
봉사자 (사 61:4-11)
하나님의 성공 (사 62:1-12)
큰 은총 (사 63:1-14)
유린 당하는 성소 (사 63:15-19)
주의 이름 (사 64:1-7)
은혜의 관계 (사 64:8-12)
패역한 백성 (사 65:1-7)
택한 자 (사 65:8-16)
새 하늘과 새 땅 (사 65:17-25)
신앙이란 (사 66:1-4)
하나님의 자녀 (사 66:5-14)
심 판 (사 66:15-17)
이스라엘에서 열방으로 (사 66:18-21)
구원과 멸망 (사 66:22-24)

 

 

 

 

 

 

 

우리를 인하여 (사 53:4-6)

9809023591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특히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신의 도움으로 모든 일이 만사 형통할 것이라는 기대 아래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려고 힘쓰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행동인가?' 이런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에게서 하나님 마음을 흡족케 할만한 행동이 나올 수만 있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야 할 필요성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교인들이 이러한 착각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 이 삼자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뚜렷한 선이 그어져 있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그저 입에서 나온 대로 하나님을 찾다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다가 하나님을 찾는 실정입니다. 그저 아무나 한 분만 찾으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도 연결되어 있고 예수님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그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성소의 휘장이 찢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신 것으로 할 일을 다한 것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드셨으면 이제부터 예수님은 필요 없이 우리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가면 되는 것입니까? 이런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께 나가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생명은 예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복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할 자는 예수님밖에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만한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인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항상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 17: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영생, 곧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자체가 영생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신자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 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오직 성경을 통해서 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뭘 해야 교회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뭘 부지런히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이 증거 되고 예수님이 증거 되는 가운데 서로 아멘 하면서 마음이 하나될 때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아십니까? 아마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는 생각 가운데 교회를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에서 나오는 하나님은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머리로 발견하고 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세상에 계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압니까?'가 되어야 합니다. 역시 여러분은 '나는 예수님을 잘 안다'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분이다'는 것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는 요셉이고 어머니는 마리아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에는 30세부터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런 예수는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조금만 가르쳐주면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은 과연 내가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점검하고 돌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 신가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가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할 일들이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계시되고 있습니다. 찔림 받고 매맞고 상함을 입고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사람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인간에게 내 던져져서 그런 처참한 꼴을 당해야 했습니까?

 

 

 

본문에 보면 '우리'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졌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했고,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했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당하신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당해야 할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버림받음이 곧 우리들이 버림받아야 할 모습이고,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이 곧 우리들이 당해야 할 처참한 모습입니다. 즉 우리에게 부어야 할 진노를 예수님에게 부으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이 뭣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는 의도 자체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전혀 보지 않고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 믿음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참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참된 믿음은 주님이 당하신 모습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매맞고 질고를 당하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내 죄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가 찔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가 상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즉 주님이 창에 찔리시고 죽으신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치고 이런 얘기를 안 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몰라서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까? 그러나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앎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음을 몰라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몰라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자는 필연코 자기 죄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내 죄 때문에 죽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죄를 모른다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죄라고 하니까 나쁜 행동이나 해야 할 것은 하지 못한 것들을 죄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자기를 모르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 제가 욕을 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자신이 욕을 안 할 수도 있었는데 욕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자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욕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욕을 하지 말자'라는 결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을 모르는 가운데 나오는 죄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모르는 죄는 착한 행동을 할수록 죄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자기를 알면 그 어떤 선한 행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예수 앞에서 더럽고 악한 인간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고, 내 죄 때문에 십자가 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수없이 말하면서도 진짜 예수님을 아는 자가 희박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란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 됨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알게 된 신자에게서만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신자는 자연스럽게 삶도 행동도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신자로 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내가 죄인이고 나는 악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다 는 것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랑도 없을 것이고, 남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바로 더럽고 추한 자이고 약한 자이고 무시 받을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감히 누구를 무시하겠습니까? 이런 신자가 진짜 예수님을 아는 자이고 그 사람이 바로 영생 안에 있는 신자입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그래도 내가 괜찮은 인간이고 저 사람보다는 낫고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주님을 알고 난 순간, 그리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주님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어지는 그 사람이 제대로 예수님을 알게된 사람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죽으신 것이 귀할 수밖에 없고,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귀함을 알았으니만큼 이제부터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는다고 해도 주님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기뻐할 수 있는 삶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자랑하지 못합니다. 직분을 가지고 목에 힘주지 못합니다. 목사들이 목사를 성직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목사를 섬겨라, 목사에게 순종해라, 목사를 도우라는 말을 하면서 신자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인격을 내세우면서 겸손한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고 자기가 죄인 됨을 아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인간이 죄인임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모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못난 인간인가?'를 고백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살아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영생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당하신 모습이 바로 내가 당해야 할 모습임을 알 때 지금 주어진 우리의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 자격도 없는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할 수 있고,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내가 밥 먹고사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사는 신자야말로 세상 것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행복한 삶을 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아는 가운데 이런 행복한 삶을 사는 신자이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 (사 53:7-12)

9809163692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

 

 


성경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상식 같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이 상식에서 벗어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부 예수를 모르는 몰지각한 교인들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제쳐두고라도, 소위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보면 예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면, 오늘 우리들은 성경에서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정직하게 성경을 대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대할 때는 철저하게 자기 입장은 배제하고 예수님의 입장에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자기 입장에 서서 성경을 대하게 되면 자기 생각이 앞서 버리게 됩니다. 성경의 내용을 제멋대로 상상하게 되고 모든 말씀을 자기 상식선에서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인간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말고 철저하게 예수님의 입장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죄를 용납하지 않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오히려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천국가게 되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심판 받아야 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인된 우리가 천국을 가게 된 것은 우리들이 훌륭해서도 아니고 믿음이 좋아서도 아니라 오직 한가지 이유,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로는 전혀 포함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우리들이 도와드린 것도 아닙니다. 우린 다만 죄만 지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모른 가운데서도 죄를 짓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알았으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면 죄에서만큼은 벗어나야 마땅한데 여전히 죄가운데 살아갑니다. 다만 달라진 점은 전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모르던 우리들이 이제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붙들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예수님을 마음에 떠올리게 되고 결국 이런 내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가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들의 노력도 아니고 성품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며 오직 주님이 쉬지 않고 나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이며, 그 주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우리에게서 보여질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범죄자를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범죄는 인간에 대한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잘못을 범죄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에게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범죄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주인이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대로 세상 사람은 범죄하고 살면서 죄인 줄을 모르고 있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면서 '나는 주님의 기도 때문에 산다'는 고백을 하며 나오는 사람에게서는 한가지 특징이 보여집니다. 그것은 '내가 했다'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게 한 것이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여서 말씀을 듣고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의 기도 덕분이고, 돈을 사랑하는 내가 그래도 교회에 헌금을 할 수 있고, 내 몸을 아끼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이 교회에서 기쁨으로 봉사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주님의 기도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범죄자인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순간도 믿음으로 살 수 있고 주님의 마음을 드러내며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아는 신자의 마음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내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기도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기도, 즉 내 기도는 내 중심일 뿐입니다. 내 중심에서 나온 기도가 나를 위한 기도가 되는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고 복음을 위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 중심을 떠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과연 내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내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주님의 마음으로 하고 있는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잘해 보겠다거나,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추구하는 것들은 모두가 종교인의 작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도 기도할 때도 언제나 주님의 입장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 오늘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높이는 신자로 살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누가 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집사님은 기도도 열심히 하시고 믿음이 참 좋으십니다'라고 칭찬한다고 할 때 '제가 믿음이 좋아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게 하셔서 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바로 주님만 높이고 주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내 기도가 응답되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신자들이 주님만 높이며 십자가를 따르는 신자되기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만 좋아하는 것이 본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주님을 좋아하고 있다면, 그것은 범죄자인 나를 위해서 주님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를 따져볼 때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잘해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모두가 범죄자인 나를 위해서 주님이 쉬지 않고 기도하신 덕분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주님이 기도하시면 우리가 천국을 가게되는 것입니까?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셨고, 그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되셨다는 말이나 그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셔서 우리가 죄사함을 입었다는 말은 누구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앎이 삶을 통해서 보여지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물 되심과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신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드려질 만한 제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약 세상에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깨끗하고 흠없는 제물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고 그것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제물 되게 하시고 그 제물을 받으시겠다고 하신 것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제물될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께 소위 제물이란 것을 들고나옵니다. 십일조를 제물이라고 바치고, 예배당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면서 헌당식이라는 것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에 있는 것 중 그 어느 하나도 제물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 소나 양을 제물로 드릴 때도 고기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지만 먹어서는 안되고 태워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름입니다. 기름은 그 누구도 먹지 못합니다. 그러면 기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기름과 연관된 분은 예수님입니다. 구약에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메시아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직 메시아 되신 그리스도만이 제물의 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던 왕이나 선지자는 다만 메시아의 기능이 어떤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목사를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목사도 역시 범죄자입니다. 따라서 목사 역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즉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를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뭔가를 바쳐서 복을 얻어내려는 발상은 결국 마귀의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을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제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우리들이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범죄자인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감사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은 그 마음에서 제물 되신 예수님의 피의 흔적을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된 신자입니다.

 

 

 

우리는 내게 있는 것을 바쳐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발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발상 자체가 마귀에게 붙들려 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만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범죄자인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범죄자의 모습으로 범죄자같이 형벌을 받드시고 자기를 버려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시고 예수님이 기도하는 대상을 천국에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10절에 보면 씨라는 말이 나옵니다. 씨는 후손 또는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자기를 버리시고 스스로 제물 되심으로서 예수님의 씨가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씨냐 아니냐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씨는 예수님을 닮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의 입장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씨들의 모임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필연코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범죄자는 오직 예수님만 높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해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에 도움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예수님만 높이는 사람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씨의 모습이 보이는지 살펴봅시다.

 

 

 

 

노래하라 (사 54:1-8)

9809233793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길 고대합니다. 그 이유는 은혜만 주어지면 자신의 모든 걱정거리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를 '만병 통치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앙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은혜만 받으면 신앙적으로도 세상적으로도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을 얻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병통치약인 은혜를 받으려고 기도원을 찾아가서 목이 터져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오늘날 신자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절대로 어려운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은혜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는데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서 그것을 해결함으로서 은혜를 받으려는 신념으로 가득한 채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은혜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끌어가는 힘을 말합니다. 은혜란 세상을 사는데 힘을 내게 하는 영양제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고 핍박받는 길로 끌어가는 힘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만 말하고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만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듯이 누군가가 은혜를 받았노라고 하면서 은혜 받는 자기를 자랑하고 세상적으로 잘된 것을 은혜 받은 증거로 제시하고 은혜 받은 방법을 가르치면서 은혜를 세상과 연결시킨다면 그 사람은 단언하건대 은혜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오히려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사람들은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에 쓰여지고 있는 사단의 도구일 뿐입니다.

 

 

 

은혜란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분을 믿고 따라갈 수 없는 분을 따라가도록 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신자는 은혜 받지 않은 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예수님을 말하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자기의 힘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그 사람에게서 왕노릇하며 끌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은혜가 임한 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내 믿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고 있는 것뿐인데, 내 믿음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음을 자랑할 수가 있습니까? 결국 믿음을 자랑하는 자도 은혜와 상관이 없는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세상의 성공으로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로 끌고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항상 사모해야 합니다. 결국 믿음이란 자기를 부인하는 길, 좁은 길을 가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은혜를 사모한다는 자체가 이미 은혜가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은혜가 왕노릇하는 자는 세상의 환경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의 소망과 힘은 돈에 있기 때문에 돈이 사라지면 당장 웃음도 함께 사라집니다. 만약 목사의 웃음이 교회의 부흥에 있었다면 교회의 사람 숫자가 줄어지면 그 목사의 웃음도 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목사에게 주님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힘도 없어지고 기쁨도 없어진다면 결국 주님이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그것 하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은혜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말합니다. 1절에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한 여인에게 '노래하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상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노래한다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과연 여인에게 있어서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하는 형편이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환경입니까? 오히려 수치와 업신여김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도 '칠거지악'중에 하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걱정거리요 슬픔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노래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는 말입니다. 홀로된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 없는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여인의 자식보다 더 많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약속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까 너희들은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하는 가운데서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어떤 환경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슬픔의 자리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힘으로 신자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해서 수치와 멸시를 당한다고 해도 약속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즉 보이는 현실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약속이란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현실로 생각하는 보이는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보이지 않은 것이 실상으로서 약속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현재 눈에 보이는 허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상을 믿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믿음의 증거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내세우는 것은 모두가 엉터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하게 잘했더니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더라' '아침에 기도를 하고 하루를 시작하니까 손이 많이 오더라' '아침에 큐티를 하니까 복이 오더라'는 이런 모든 것이 믿음의 증거를 보이는 것을 통해서 찾는 믿음 아닌 모습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니까 보이는 것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사라져 버릴 때 웃음도 기쁨도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보이는 것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기쁨과 평안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평생토록 슬퍼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도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슬퍼하기도 하고 낙심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가 왕노릇하면서 주님께로 이끌림 받으며 사는 신자라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슬퍼하고 낙심하고 있는가?'를 살피게 됩니다. 은혜로 살지 못한 자는 낙심되고 슬픔이 되는 일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게 되지만, 은혜로 사는 신자는 도대체 자기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낙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가지고 낙심하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믿음 없음을 한탄하면서 다시금 주님께 자신을 부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노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수가 있습니다. 즉 주님이 영원한 생수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생수를 얻어보려고 합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과 같습니다. 주님이 생수인줄을 몰랐을 때는 주님에게 생수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생수임을 알았을 때는 물동이도 내버려두고 주님을 증거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서 하는 짓거리가 무엇입니까? 주님에게 생수를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돈이라는 생수, 좋은 직장이라는 생수, 좋은 대학이라는 생수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우물입니다. 예배당이 전세일 때는 조그만 해도 좋으니까 우리 예배당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우리 예배당만 있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이 하지만 예배당을 짓고 나면 좀 더 큰 예배당을 짓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연 채워지지 않는 우리들의 욕망이란 우물을 채우기 위해서 일하시겠습니까?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한 여인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노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이, 주님이 생수이심을 아는 자만이 세상 것과 상관없이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눈에 보이는 허상을 실상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 주어질 세상의 결말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의 말씀도 세상의 마지막 결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세상에서는 남편 있는 여자가 자식을 많이 낳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여인의 자식을 굴복시킵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때 한가지 이상한 점은 홀로 된 여인이 자식을 낳을 수가 있느냐는 점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말씀이 4,5절입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홀로된 여인의 남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결국 만군의 여호와에게서 난 자식이 세상 마지막 때 인간에게서 난 자식들을 굴복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즉 그냥 인간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서 어떤 권세와 부귀 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마지막 때가 되면 별 가치 없는 존재로 끝나 버리고 말 인생이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은 비록 세상에서는 수치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며 살았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때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을 믿는 자는 세상 것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당당하고 두려움 없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하나님이 남편 되어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식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새롭게 태어날 수도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남편 되어서 태어난 자식이고 구원받은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신자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겠습니까? 오직 약속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약속에 의해서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임을 깨닫기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고 노래하는 신자로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때 이 약속의 자손만 모으십니다. 6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다면 세상에서 우러러 보이는 자리에 세우실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6절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버림받은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버림받은 모습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참 아들임을 세상에 증거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만 참아라고 하십니다.

 

 

 

7절에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이 우리가 비록 때때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진노하시는 듯한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노가 아니고 버림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멸망을 보여주고 참아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서 잠시 버림과 진노의 자리로 밀어 넣으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일 뿐, 하나님은 큰 긍휼과 영원한 자비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날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산다면, 비록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자리에 처한다고 해도 노래하는 신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오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고 그 약속을 바라보고 사십시오.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낙심이 될 때 과연 그것이 낙심할 만한 문제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약속대로 일하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약속대로 긍휼과 자비로서 하나님이 남편 되어서 태어난 자식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흘린 눈물을 씻겨주시면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약속을 바라보면서 두려움 없이 걱정 없이 노래하며 살아갈 때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약속의 자손임이 확인될 것입니다.

 

 

 

 

긍 휼 (사 54:9-10)

9810073994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극히 조심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재 대부분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잘못된 모습을 드러내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러한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위해서 뭘 했느냐?'고 다그치면서 오히려 신앙에 해가 되는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뭘 했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해가 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뭘 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자기 행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행위에서 예수님을 위한 것과 예수님을 위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됩니다. 구분의 기준은 교회 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에게서 예수님을 위한 행동이 보여질 때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일단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안심을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행동이 보여지기 때문에 그것으로 '나는 신자다'라는 표를 삼게 되고, 신자라는 표가 있으니까 천국에 대해서 안심을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큰 문제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주어지는 것인데 은혜와 긍휼을 구원의 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표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행동이 보여지지 않았을 때에는 자기 신앙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신자인가?'라는 불안에 빠지게 되고, 생활에 문제만 발생해도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벌주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까지 의심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이 사람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라는 기독교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는 결과가 되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반문하기를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얻었으면 은혜와 긍휼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은혜와 긍휼로 사는 신자라면 분명히 은혜와 긍휼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와 긍휼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느냐가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은혜와 긍휼의 모습을 자기 멋대로 상상한 채 자기 힘으로 드러내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소위 착한 행동이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이제부터 사랑을 드러내며 살자'라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신자다운 생각인 것 같지만 전혀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을 보여야지, 은혜와 긍휼을 드러내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사에서도 '내가 무엇을 해야 사랑을 드러낼 수 있을까?'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러운 사무실을 청소하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를 함으로서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게 됩니다. 내가 뭔가 보여주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자기 만족' 입니다. 오늘도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흐뭇해하는 것만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은혜와 사랑을 우리의 힘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스스로 그 모습을 나타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린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지 내가 은혜와 긍휼 자체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은혜와 긍휼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모든 자를 자신과 똑같은 자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까이 하셨던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무시 받고 천대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무시 받고 천대받는 자의 편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편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무시 받고 천대받는 계층, 즉 창녀 세리 병든 자의 모습으로 전락해야 하다는 이상한 논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시 받고 천대받는 자들의 편에서 일하셨던 것은 세상을 향해서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 기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기준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자 했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긍휼'입니다.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가는 나라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무시 받고 천대받는 자들을 가까이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긍휼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보다 못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뭘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 결국 나보다 못한 사람이 보여질 수밖에 없고, 나보다 못한 자가 보여진다는 그 자체가 이미 차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가?'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홍수로서 세상을 멸망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노아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그 마음에 계획한 바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선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노할 사람에게는 노하시고, 상줄 사람은 상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멸망당해 마땅할 죄인이지만 노하지 않고 책망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노와 책망은 예수님이 다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노와 책망을 예수님이 다 짊어지셨으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보지 말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지신 그분만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심판의 기준입니다.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긍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치 않은 것, 이것이 세상의 심판 기준이 됩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오직 긍휼로서 일하실 뿐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행위를 보면서 스스로 만족해하고 안심하며 살아갑니다. 행위가 있기 때문에 구원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고 있는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긍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행위를 보면서 손뼉 치고 기뻐하고 있다면 그 순간 하나님의 긍휼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신자는 자신의 행위를 내어놓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긍휼만 그대로 내어놓으면 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사람들은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해서 긍휼과 자비를 내어놓으려고 합니다. 평소에 교회도 잘 다니고 신앙생활에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런 갈등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산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잘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나는 신앙 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산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이 엉터리인데도 날 사랑하실까?'라는 의심과 불안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10절에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이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산들은 옮기실지언정 하나님의 인자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언약도 옮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변의 하나님이십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사랑하셨으면 행위가 나빠졌을 때 사랑도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위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잘못한다고 해서 은혜를 거두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지옥 가는 이유는 나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가 지옥 간 이유는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판 자기 행위를 보고 마음에 뉘우침이 있고 고통스러워했지만 그런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자신의 행위를 보게 되면 스스로 이런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신자다운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신자다운 태도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긍휼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행동을 보지 않는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끝까지 행동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의도를 그대로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긍휼로 천국에 가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라고 말씀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행동을 보지 않으니까 착한 일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뭘해도 자기 행동을 보지 말아라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착한 일 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 앞으로는 착한 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착한 일을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되, 내가 한 착한 일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착한 행동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보게 되면 내 옆에 착한 일을 하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는 불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역시 옮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자신의 행동에 신경을 쓰다보니까 수시로 변하는 내 행동에 의해서 마음도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교회에 안나온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못나가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고 긍휼을 의심해 버리면, 결국 그것이 믿음이 없는 모습이고 그 불신 때문에 지옥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또 '신목사는 교회에 안나와도 된다고 했다'라고 곡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교회에 안나와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안나온다고 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변화하지 않습니다. 행위를 보시고 덜 사랑하고 더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불변의 사랑과 긍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이고 소망인 것입니다. 나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이 오늘도 우리를 살립니다.

 

 

 

 

영원한 언약 (사 55:1-5)

9810144095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스스로 복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함정은 '나는 잘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주어질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잘 아는 문제에서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쉽게 넘어가 버리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중심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도하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이고 계시입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삭제해 버린다면 한낱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현대의 신자들의 관심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의 피에 모든 관심을 집중한 채 성경을 들여다보고 설교를 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사실 목사의 입장에서부터 곤란하기 짝이 없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광대한 범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은 범위가 넓습니다. 어느 한 분야를 공부할 때도 한가지만 알아서는 안되고 그 분야의 모든 것을 다 배워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렇게 넓은 범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목사들이 무엇을 설교할까 고민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넓은 범위를 평생토록 하나하나 가르쳐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많은 것을 다 배워야 십자가를 알게 되고 천국간다는 결론이 됩니다.

 

 

 

사실 목사들이 '무엇을 설교할까?'라고 고민을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교인들이 잘 아는 문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문제를 설교하기가 이제는 난처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문제를 설교하려니 설교하는 당사자도 힘이 없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흥미가 사라지고 하품만 합니다. 그것을 보는 목사는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 소위 설교거리를 찾느라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환경 운동, 선교, 도덕, 교회 건축, 정치, 이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교인들이 관심을 둘만한 것을 제공해서 교회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평생을 두고 배워야 할만큼 범위가 넓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저주받고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해 버리는데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내가 죄인인 것도 알고, 예수의 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도 믿는다'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믿고 있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결국 십자가를 믿고 있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음을 알고 있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는데, 설교할 때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을 한다면, 과연 그 말에 관심을 가지고 마음 깊이 새겨들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왜 인간이 스스로 예수를 믿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 낱낱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는 온 세상의 학문과 지식 등을 총동원을 해도 알 수 없는 비밀이며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범위한 세상의 학문도 초월해버린 것이 십자가입니다. 광범위한 학문을 가지고도 알 수 없는 십자가라면 십자가는 학문의 범위를 초월한 채 존재하는 하늘의 비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를 교회에 와서 듣고 내 입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나는 다 안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잘 알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잘 안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려고 하지 말고 '잘 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시작해야 합니다.

 

 

 

소위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목사의 위험성도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복음만 설교하고, 교회 부흥에도 욕심을 두지 않고, 오직 주님만 가르친다'고 해서 '나는 믿음이 있는 목사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고서도 '내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교회 부흥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나는 교회 부흥에 관심 안둔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나는 과연 주님만 사랑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마음에 두고 '내가 주님만 사랑하는가?'를 점검하면 자신이 복음만 전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답을 쉽게 내려버릴 깃입니다. 모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는 주님만 사랑하는가?'를 생각할 때, 결국 주님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그런 가운데 '역시 나는 주님의 피로 천국 가는 무능하고 못난 인간이다'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고,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는 분입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말한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다 받는 분입니다. 이분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우리의 신랑이 되는 분이 바로 이런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신랑의 진짜 신부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오직 신랑 하나만 바라보고, 저분과 함께라면 평생을 같이 침뱉음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고 멸시와 천대를 받고 뺨을 맞아도 괜찮다는 사람이 진짜 예수님의 신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놀라운 것은 신부의 자격도 없는 우리를 신랑 되신 예수님은 신부로 인정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용서해 주심을 알고 용서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주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믿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 주시는 사랑에 이끌려 나오는 것입니다. 용서를 믿어버리면 '용서해 주니까'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란 주님의 사랑에 이끌려서 나오는 자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분문 1절에서도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합니다. 물은 목마른 자가 찾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찾지 않는 이유는 목이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시면서 돈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즉 공짜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포도주와 젖을 사지 않는다면 포도주와 젖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고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포도주와 젖은 가나안 땅의 산물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는 맛도 보지 못했던 것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야 먹게 되었습니다. 즉 포도주와 젖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주와 젖을 좋아하고 그것을 사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자일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주와 젖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켜줄 애굽의 것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예수님을 알고 복음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의 관심은 단지 평생토록 육신의 목마름이 없이 물 길러 오는 수고를 하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 관심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수를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육신의 탐욕을 해결해 줄 생수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 죄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생수를 알았을 때 물동이도 던져 버린 채 마을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목마름이 없다는 것은 죄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무서움, 죄의 결과를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다만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지셨다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지만 여전히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죄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에 목말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목말라 하면서 그러한 내가 예수님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온통 세상 것에 목이 말라 있고, 그 목마름을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서 해결하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아오겠습니까? 십자가에 대한 목마름이 없기 때문에 돈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양식 아닌 것, 배부르게 못하는 것을 위해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즐거움을 얻을 기름진 것, 좋은 것은 주님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들은 주님으로 인한 즐거움보다는 내 배를 위해서 엉뚱한 것을 얻기 위해 힘쓰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마치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오히려 주님이 우리들의 그런 소원을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죄의 심각성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데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대해서 목말라하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아무리 말을 해도 시큰둥하게 대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죄인임을 안다고 하면서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결되었다고 하면서 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죄의 해결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죄의 심각성을 안고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아갈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나아오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도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말씀합니다. 귀를 기울이고 나아와 들으면 영혼이 산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나와라' '들어라'라고 한다고 해서 스스로 나오고 들을 인간이 아닙니다. 오직 죄를 앎으로 예수님의 피에 목마른 자들만이 나오게 되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언약입니다.

 

 

 

영원한 언약이 무엇인가는 다윗에게 허락하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면 됩니다. 삼하 7:27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인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이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는 것 때문입니다. 집은 곧 성전이고 성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미리 내다보고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그 집으로, 즉 예수님으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에게 허락한 은혜, 즉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영원한 언약에 의해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몸이 되고 영생이라는 영원한 복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간되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포도주와 젖보다 애굽의 산물에 더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새로운 인간으로서 영원한 언약으로 오신 예수님께 목말라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죄를 용서하시고 돈없이 값없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신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를 안다면 그 사람은 그 은혜와 사랑에 이끌려서 주님께 가까이 하려고 할 것입니다.

 

 

 

 

찾으라 부르라 (사 55:6-13)

981021419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믿음은 믿는 것인가 믿어지는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믿음이 가능하다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분명 믿음은 믿어지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를 향해서 '믿어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믿음의 주체를 인간으로 내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믿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믿어진다'라고 할 때 믿음을 위해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동원해야 할 방법도 없으며 대책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며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음'이라는 것도 자신의 종교 행위를 근거로 해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즉 남들보다 뭔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뭔가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을 위대한 행위를 이끌어 내는 힘으로 여깁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면서도 구제를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십일조도 철저히 하고, 주일은 예배에 빠지는 적이 없으며, 예배시간 30분전에 나와서 기도와 찬송으로 준비하고, 바쁜 대도 불구하고 교회 일에는 빠지는 적이 없고, 성가대 교사 등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서 남보다 배는 더 수고하는 그런 모습을 믿음이 있는 행동으로 여깁니다. 믿음이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성경 말씀이 무색해 질 정도로, 인간들이 감탄할 만한 믿음을 얼마든지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영웅적인 행동을 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가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마음 뺏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만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믿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행위라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행동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합니다. 불안해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봐야 안심하고 편안해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도 자신의 행동에서 발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앞에 놓여진 걸림돌입니다. 교회는 행위를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행위는 십자가 앞에 놓여진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고 그 행위를 믿음의 증거로 삼으면서 살아왔던 사람에게 행위를 치워 버린다면 혼란스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하던 것이 사라져 버릴 때 그 당황함은 무척 큰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십자가만 믿음의 증거로 삼으면서 살았던 사람은 행위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무엇을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 덕분에 복을 얻을 수 있을까? 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엇을 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겠다는 발상이 엄청난 잘못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설교하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를 새벽기도회가 아니면 철야기도회 등으로 인용을 해버립니다. 즉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와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철야기도회도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이니까 빠지지 말고 열심히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목사들이 교인들을 교회에 끌어다 놓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다'는 것을 외부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열심이 있고 활동적인 모습을 통해서 목사의 능력을 과시하고 그것을 내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와 숨바꼭질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딘가에 숨어 계시고 우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린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우리가 가까이 할 수도 없는 분으로 말씀합니다. 실제로 여호와를 가까이 하거나 본 자는 다 죽습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를 만날 때가 있고 가까이 할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만날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여호와를 우리가 가까이 하고 만날 수 있을 때가 언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만날만한 때, 가까이 할 수 있는 때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 때가 주어질 때 여호와를 찾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입니까? 3절에 보면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확실한 은혜, 영원한 언약이란 '그'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누구십니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장치는 성막이었고 제사였습니다. 피가 뿌려지는 성막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전이고 성전은 곧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보내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으시면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구원이란, 죄인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인간 된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장치로서 성막과 제사를 세웠고, 그것이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요 1: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 1: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별개의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분은 하나님이고, 땅에 오셨던 분은 예수님이라고 구분 지어서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을 굳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요한복음의 시각에서 보면 땅에 오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가까이 할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만날 수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육신으로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지 않으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그렇다면 6절에서 말하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 가까이 계실 때'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 그때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를 이미 700년전인 이사야 시대에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를 찾고 부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를 찾고 부를 때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영원히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언약이며 확실한 은혜입니다.

 

 

 

그러면 '찾으라 부르라'고 말씀하는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찾는 것이고 부르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찾으라 부르라고 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기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찾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하는 것만이 찾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7절에 보면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여호와께로 돌아가고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악인의 길과 불의한 생각을 버린 자입니다. 악인의 길과 불의한 자의 생각이란 곧 인간의 길과 인간의 생각을 말합니다. 즉 자기의 길과 자기의 생각을 버린 자가 여호와께로 돌아가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길과 자기의 생각을 버리라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길로 가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라는 뜻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돌아온 자이고 하나님께 나아온 자입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오기 위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온 자로서, 하나님을 만난 자로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자기 길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주님이 사셨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는 이미 하나님께 나온 자입니다. 이것을 산제사라고 말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다시 산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내 길과 내 생각이 버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산다면 내가 곧 그리스도로 다시 산 것이 아닙니까?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예수님을 길을 가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서 스스로를 이 땅에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증인된 신자는 세상에서 주님이 당했던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길에는 핍박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피하면서 주님의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길과 내 생각이 버려지지 않고서는 주님의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8,9절에서 말씀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합니다. 즉 이 세상은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핍박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면 그 속에 틀림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헛되이 끝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그냥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땅을 적시고 싹이 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고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주는 일을 이루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냥 헛되이 하늘로 가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세상에 오셔서 그 결과로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내 길보다는 주님의 길을 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말씀이 일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말씀이 일하고 있음을 안다면 내 뜻보다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맡겨서 인도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나아온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충돌되는 것은 우리의 계획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내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맞지 않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걱정 고민도 모두 내 계획대로 안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면 말씀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말씀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고 부르며 나아와야 할 것은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가 따로 이루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우린 다만 완전히 이루어진 말씀의 완성체인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의 길과 자기 생각이 버려진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서 스스로 뭔가 이루어 보려고 애쓰지 말고 주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가 내 인생이 되도록 해달라고 찾고 불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서 말씀한 대로 기쁨으로 나아가고 평안히 인도함 받는 길입니다.

 

 

 

 

안식일 (사 56:1-8)

9810284197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만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그들만 구원하신다는 의미의 용어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만이 참된 여호와고 그 외의 하나님은 다 가짜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종교가 있고, 종교마다 나름대로의 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른 종교의 신이 다릅니다. 모든 종교의 신은 보편적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보호하고 지켜주며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선택과 약속으로 등장하십니다. 세상에 그 어느 신도 선택과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오직 자기들만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기들만 구원받는다는 약속을 의지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연히 발생한 국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애굽이라는 국가를 친 결과로 생겨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는 필히 애굽을 치고 건져낸 국가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이라는 시각이 아니라 그냥 '이스라엘'만 생각하게 되면 결국 이름만 이스라엘뿐 애굽적인 요소는 그대로 간직한 이스라엘이 될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적인 요소와 결별한 이스라엘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애굽적인 것과 결별된 상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애굽적인 요소를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새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교회들은 오히려 애굽적인 것을 도와주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애굽을 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애굽적인 것을 도와주는 하나님은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냐?'는 것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가지고 멋대로 추론해서는 곤란합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구약의 참된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이냐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탄생된 나라입니다. 애굽과 같이 이스라엘도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할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생존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집단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윤리와 도덕적으로 남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실체, 즉 어린양의 피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어린양의 피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고, 이것을 가리켜서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참된 교회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어린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된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국가들은 각기 자기들 나름대로의 시각이 있습니다. 음식이나 문화 등에 있어서 모든 나라가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개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국가 안에서도 개개인이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때문에 자기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보게 되면 나는 맞고 저 사람은 틀리다는 결론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에는 특정 시각을 가지고 '이것이 옳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의 시각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러나 오직 신에 대한 시각만큼은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 그분만이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라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애굽에서 건짐 받은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불변의 원칙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의 시각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그 하나님은 분명 가짜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자기 시각 버리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안식일'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주일 성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주일'은 이스라엘의 시각이 아닙니다. 현 교회에서 말하는 주일 성수는 날에 그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주일인가?'라고 물으면 새벽 0시부터 저녁 11시 59분 59초까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은 시간에 중요성을 두고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이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애굽의 종으로 있을 때 구출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음을 믿는 믿음의 표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표현의 방법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안식일이 포함된 것은, 모두가 창조주이시고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노동을 안하는 것도, 단지 안식일이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노동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표시로 노동을 그쳤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왜 하나님이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되새기는 가운데 노동을 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 교회들이 말하는 주일성수는 어떤 것입니까?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묵살해 버린 채 다만 주일이라는 한 날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안하고,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물건을 사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주일이라는 한 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버린 것입니다.

 

 

 

주일성수를 강조하면서 그 법을 따로 정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일성수에 소극적 방법과 적극적 방법을 구분해서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안식일을 범해도 정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말합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 발전소에서 당직하는 사람, 시민의 교통을 위해서 일하는 운전사들, 군인들과 경찰관,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주일을 범해도 정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교회 편한 대로 면죄부를 남발하는 것이 아닙니까?

 

 

 

2절에 보면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거룩한 주일을 더럽히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주일이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주일이 더러워진다면 주일의 어디가 더러워진다는 것입니까? 결국 주일이라는 날, 즉 시간이 더러워진다는 뜻인데 과연 시간이라는 것이 더렵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시간이란 다만 해가 뜨고 지는 과정 속에서 변화하는 자연을 통해서 세월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느낌을 하루 24시간으로 정리하여 구분하여 놓은 것이 지금의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이 과연 어디가 어떻게 더러워진다는 것입니까?

 

 

 

따라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날을 더럽히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안식일에 담겨 있는 천지창조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더럽히는 것은 안식일이란 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란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 연합했다는 것은 2절에 나온 대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고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한 사람을 말합니다. 즉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안식일을 지킨다면 하나님이 그를 영생이 있는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4-7절까지가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6,7을 보겠습니다.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는 말씀에 보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도 하신 말씀으로서 중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만민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즉 누구라도 안식일을 지킬 경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집,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데, 무엇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안식일을 날이라는 의미에서 날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날에 대해서 구분을 둬야 합니다. 즉 일곱째 날이 뭔가 다르다면 날에 있어서 차이점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날에는 서로 다른 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때문에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못한 시간으로 구분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일이건 주일이 아니건 날은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주일이라고 하니까 마치 날이 뭔가 다른 것처럼 느낄 뿐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기념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날이 되면 다른 날보다는 뭔가 다른 특별한 날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한 날이 다른 날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인간의 느낌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안드리면 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도 모두가 느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무엇이고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안식일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날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날입니다. 그럴 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믿음을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보여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다는 것이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노동을 하지 않은 이유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구만 지킬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만 안식일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민족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시각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안식일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오직 주시는 은혜대로 살아갈 뿐이다는 믿음은 팽개친 채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으면서도 주일에 예배드리고, 일을 안하고 물건을 사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그런 안식일은 성경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는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하나님이 도우셔야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노동을 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안식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는 참된 이스라엘은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지 결코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옛날 이스라엘의 시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서 '새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날이 아니라 '과연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날입니다. 안식일에 '이것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은 아직 날에 매어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일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피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날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날이 주일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면 그것이 곧 주일이고 주일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지킨다 못지킨다는 차원에서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로 족한 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항상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주일을 사는 것이고 참된 이스라엘 모습입니다.

 

 

 

 

벙어리 개 (사 56:9-12)

9811114398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신자의 인생이란 자신의 목적과 탐욕을 이루어 가기 위한 시간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본받아 걸어가기 위해서 허락된 시간들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감으로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주어진 시간들이 우리의 인생인데, 우리는 그 귀한 시간들을 나 자신의 성공과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허비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도구로 부르시고 인생이라는 시간을 맡겨주셨는데 우리는 숨쉬는 순간마다 나를 생각하고 나의 이득을 위해서 발버둥치고 동분서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고 시간을 아끼면서 성실하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하는 것이라면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들이 아닙니다. 이 땅에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빛되신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빛으로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내라고 살려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것도 아닌 인생을 내것으로 간주하고 나를 위한 시간으로 도둑질하고 있습니다. 밥을 먹게 하신 것도 건강을 주신 것도 직장을 다니게 하시고 돈을 벌 수 있도록 하신 것도 나를 잘살도록 하시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우시기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데는 전혀 관심 두지 않고 오직 내 한몸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증인 되어라고 맡기신 일터이고 환경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업을 하든, 학교 교사를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외판원을 하든 그 자리는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일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증인되라고 맡기신 그 자리와 환경에 매어버린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증인으로서의 인생보다는 나 개인의 인생에 더 큰 관심과 의미와 목적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말씀의 묵상을 쉬어서는 안됩니다. 매일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록 하루에 단 한 장의 말씀도 보지 못한다고 해도, 하루에 비록 십분의 기도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 단 한 조각의 말씀이라도 살아있어서 그 말씀을 되새기고 염두에 두면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줄 아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마음이 이렇지 못하고 오로지 나를 생각하고 나의 인생을 멋있게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면 감히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예배시간이 되면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십일조도 철저하게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라고 자신하고 있다면 저는 분명히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착각일 뿐이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그것을 믿음이라고도, 하나님의 일이라고도 말씀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여러분의 마음에서 주님이 피흘리신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가를 찾으실 뿐입니다. 그 십자가의 흔적은 교회 잘나오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입장보다도 말씀만을 생각하셨던 그 모습대로 인생에서 자기 입장보다도 말씀을 먼저 앞세우려고 하는 그 마음이 곧 십자가의 흔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나와도 자기 입장을 생각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생각하고 나와야 하고, 십일조를 해도 자기 입장이 아닌 말씀을 생각하는 십일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교회를 빠지지 않았다고 해도,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다고 해도,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의가 되지 않고 다만 말씀이 자신을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에 감사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교회 생활을 보면서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서 안심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열심을 믿음의 흔적으로 착각하게 해서 자기 신앙에 안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자신이 교회에서 뭔가 잘하고 있다고 해서 결코 자신에게 안심하면 안됩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여러분을 자기 중심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행위를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과연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내 딴에는 믿음생활 잘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돈만 바라보고 살았고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놀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눈이 뜨인다면 여러분은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분명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증인은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새하늘과 새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없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세상을 알고 있고 그 세상이 내 마음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좀 부족하게 살고 힘들게 산다고 해도 '나는 좋은 것 때문에 힘을 얻어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사람이 증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칭 증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9,10절을 보면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짐승들로부터 양을 지키는 파수꾼을 가리켜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고 말합니다. 양들을 삼키는 짐승이 와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경고하지 못하는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는 것입니다. 양을 지키기 위해서 개를 세워놓았다면 그 이유는 분명 짐승들이 올 때 짖어서 양들을 보호하고 지키라고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짖지를 못한다면 그 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양에게 해가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세워놓은 개를 믿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벙어리 개가 되었습니까? 11절에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라고 말씀하는 것 같이 개들이 관심을 양에게 두지 않고 오직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고 자기 탐욕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교인이 자기 교회에 잘 나와주면 그것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그리고 헌금 잘하고 봉사 잘하면 믿음에는 나무랄 것이 없는 교인으로 칭찬해 버립니다. 그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는 관심이 없이 다만 내 교회에 도움이 되고 있으면 그것으로 대만족입니다. 그런 교인이 돈을 잘버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사랑이라고 떠버립니다. 결국 목사가 사단과 한편이 되어서 교인들을 천국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의 관심이 천국이 아니라 자기 성공에만 쏠려있고, 주님의 십자가 대신에 교회 부흥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런 사람이 꿈꾸는 사람이고 누운 자고 잠자기 좋아하고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는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 할 사람입니다. 이 세상보다는 하늘나라가 더 좋다는 것을 가르치라고 세움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양들에게 하늘 나라가 더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목사인 자신부터 세상 것을 하나하나 털어가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양들로 하여금 더 좋은 세계를 바라보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목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하늘나라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짐승들이 양들을 삼키기 위해서 다가와도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세상보다 천국이 더 좋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아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세상이 심판 당한다는 것을 경고하지 못하고 무엇이 구원의 길인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세상과 똑같이 합류해서 탐욕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다고 합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내 한몸 밥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양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목사는 누구이겠습니까? 그 사람은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보다는 양들을 푸른 초장인 하늘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 기를 쓰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목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목사는 절대로 '내 교회'가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구원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생명이 되지 못하는 이상, 양의 마음이 교회에 집착되고 교회에 매이는 것을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구원에 하등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에게 매이고 붙들리는 것을 경고하면서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그리스도만 목적 삼고 그리스도에게만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자가 참된 목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부터 내 교회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교회에 관심 두지 말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교회에 관심을 두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입니다. 자기의 삶을 위해서 교회에 붙어있는 자는 거짓목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복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공격이 들어올 수 있는 말에는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복음을 알고 성경을 안다고 해서 참 목자가 아닙니다. 알면 뭐합니까? 알면 그대로 말을 해야 하고 아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배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 때문에 자신의 삶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두려워 할 때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고 자신의 삶에 연연하지 않는 목사는 말 한마디하고 쫓겨난다고 해도 그 입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이미 성령이 그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설사 그를 죽인다고 해도 복음은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을 바리새인들이 감당하지 못했던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 목자를 세상에 남겨 놓으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거짓 목자가 있음으로서 우리가 과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만을 따르고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목사가 아닌데도 목사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뒤만 따라간다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결국 거짓 목사인줄 알면서 혹 자신에게 교회적으로 어떤 불이익이 올 것을 두려워해서 그를 따라간다면 과연 그 마음에 주님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점검하라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주위에 거짓 목자를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저 역시도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제가 이시간에 순순한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이 저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지 저의 본성으로 이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저의 본성도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어하고 교회가 커지기를 바라고 돈 많은 교인이 교회에 오는 것을 기대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나를 주장하시고 제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만 향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이 시간 여러분에게 아무 두려움이 없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지 제가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저 역시 수시로 나를 생각하게 되고 내 살길을 염려도 하는 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이 시간 여러분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오직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만 두려워하고 예수님만 따라가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두려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두렵지가 않고 힘있는 자가 두렵지가 않습니다. 내가 가난한 것이 두렵지가 않고 비천한 자리에 있는 것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오직 있는 그 자리에서 주님만 나타내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아니라 주님을 외치는 증인입니다.

 

 

 

오늘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만 푯대로 삼고 십자가의 길로 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은 관심 없고 오로지 내 인생에 모든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그럴 때 자신의 믿음 없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내 멋대로 실컷 살아가다가 교회 다녔다는 공로 때문에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천국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천국은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흘린 눈물이 있고 고통이 있고 핍박이 있었던 사람들이 위로 받는 곳임을 생각하고 살아가십시오.

 

 

 

 

누구를 믿는가? (사 57:1-13)

9811184499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 너희는 가까이 오라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궤휼의 종류가 아니냐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죽이는도다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 중에 너희 소득이 있으니 그것이 곧 너희가 제비뽑아 얻은 것이라 너희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이를 용인하겠느냐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그리로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배반하고 다른 자를 위하여 몸을 드러내고 올라가며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처소를 예비하였으며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욱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원방에 보내고 음부까지 스스로 낮추었으며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아니함은 네 힘이 소성되었으므로 쇠약하여 가지 아니함이니라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하여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치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함을 인함이 아니냐 너의 의를 내가 보이리라 너의 소위가 네게 무익하니라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 가겠고 기운에 불려 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길을 다니다 보면 수 없이 많은 예배당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들은 하나같이 높은 종탑 위에 십자가를 내 걸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배당 위에 십자가를 세워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신자들은 십자가를 다만 기독교라는 표시로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신자들도 종탑 위의 십자가를 단지 교회니까, 예배당이니까 당연히 세워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아예 종탑 위의 십자가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예배당 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위에 십자가가 있든 없든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십자가의 정신과는 전혀 무관하게 모이고 흩어지고 있으면서 예배당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고 해서 교회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십자가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당 위에 십자가를 세워 놓은 것은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 복종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며, 주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은혜만으로 감사하며 살고자 모입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만 존재한다'는 마음으로 예배당 위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십자가가 무색할 정도로 자기 멋대로 입니다. 예배당에 와서는 '예수, 십자가'를 열광적으로 외치면서, 마치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전부인양 말하면서 예배당을 나서면 자신이 중심이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십자가의 정신도 팽개쳐 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불교의 조계종이 '총무원장'이라는 자리를 놓고 또 다시 예전처럼 폭력이 난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불교란 세속의 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가르친 도를 따라서 자신을 수행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필히 버려야 하는 것이 '세속'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부처의 도만 있으면 된다는 종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여준 불교의 모습은 한마디로 총무원장이라는 자리를 얻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불교를 바라보면서 '과연 저들에게서 절을 빼앗아 버리고, 불공을 드리지 못하게 하고, 부처 상을 다 없애버렸다고 할 때 과연 그들은 무엇을 힘으로 삼고 살아갈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신앙 대상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소망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피흘리신 예수님만 계시면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간다고 큰 소리쳐야 할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신앙은 보이는 것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이며, 따라서 보이는 것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보이는 것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신앙은 아무 변동 없이 마치 바람 한점 없는 바다가 잔잔하듯 조용한 신앙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까? 이것을 알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면 압니다. '내일 당장 집이 불에 타서 사라지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기를 당해서 있는 돈을 몽땅 날려 버렸다'고 할 때, 그때도 과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변함없는 신앙이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면 '너무 극단적으로 비유한다'고 할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반발을 합니까? 분명히 성경적으로는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반발을 하는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드러낼 때 반발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추구하는 바와 전혀 다른 말을 할 때 반발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위의 질문에 반발을 한다는 것은, 그 질문이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탐욕이 강력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말에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신앙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갈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저도 역시 신앙은 보이지 않는 분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것임을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이는 것에서 떠난 자는 아닙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에 대한 탐욕을 벗어버릴 수 없고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제가 보이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 교회들이 스스로의 신앙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보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탐욕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신앙이 있다고 큰소리 치고 있는 것이 너무 역겨워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직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만 의지하고 사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들은 '신앙이 없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야 합니다. 신앙에 대한 자신감에서 떠나고, '나 정도면 분명 구원받을 수 있을거야'라는 교만에서 떠나서 찬송가 가사대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는 고백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역동적인 행동을 들고 하나님께 나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은, 세상 종교는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고, 인간이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착하게 살 것을 요구하고, 도덕과 윤리적으로 잘 다듬어진 인격적인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혀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뭘 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는 것은 모두가 죄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일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셨던 것이지 인간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이것을 오해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전도하고 구제하는 것 등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부르셔서 믿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여질 때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인간의 믿음이나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고 '나는 믿음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만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하나님은 우리 행동을 보고 축복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해도 반발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인간을 치지 않습니다. 다만 '너희들의 정성을 보여라 그러면 그만한 보답을 해 줄 것이다'는 것이 세상 종교, 즉 우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을 칩니다. 인간의 힘을 믿고, 할 수 있다는 교만에 빠진 인간을 치면서 무능력하고 가능성이 없는 자신에 대해서 발견하기를 촉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한 기독교가 세상 종교와 똑같이 보이는 것을 통해서 신을 찾아가고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고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5절에 보면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틈에서 자녀를 죽이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는 변질될 대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수리나무 사이에서 귀한 자식을 잡아 바치는 정성을 보임으로서 하늘의 복을 얻고 구원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무당들과 함께 했다고 말합니다. 또 7절부터 보면 음행을 하고 쾌락을 즐기면서 종교생활을 했던 것이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믿는 것을 정성만 보이면 세상의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고,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재미있고 기분 좋은 종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신앙이 즐기기 위한 도구로 전락된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이사야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너의 의를 내가 보이리라 너의 소위가 네게 무익하니라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 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12,13절)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희가 너희들의 정성을 가지고 복을 얻고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너희들에게 의가 되고 복이 되나 보자'는 것입니다. 종교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자신의 열성으로 신에게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우상을 좇는 것이고 바람에 떠가는 것들이고 날아가 버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분명 13절에서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자신의 종교적인 열성이나 행동은 전혀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만 의뢰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열성과 행위에 대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뢰하는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할 만한 의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비록 돈이 있으면 세상을 살아갈 때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해 줄 것 같지만 세상의 모든 돈을 다 끌어 모아도 의는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돈에 머물러 버린다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뢰하겠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종교는 돈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돈을 약속하고 돈을 복으로서 내려주겠다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 땅을 약속하셨고 거룩한 산을 약속하셨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이스라엘만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아는 자만 존재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 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뢰하는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또 거룩한 산은 시온산을 말합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성이 있는 산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장차 주어질 새하늘과 새땅을 약속하신 것이지 돈이나 세상의 것을 복으로 약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약속만 소망하고 하나님만 의뢰하고 살아가지 않고 마음이 이미 세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 믿음은 말뿐이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돈이다는 태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11절에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하여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치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함을 인함이 아니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느냐?'고 묻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두려움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자신을 발견한 자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에게서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세상이 전부인 듯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만 보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을 자신의 인생에 득이 되는 길로 삼고,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우상을 끼고 있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바라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을 이루고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돈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는 것도 아니고 갖고 싶은 것을 갖게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결국 '역시 세상은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고, 그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굳게 설려고 하지 말고 장차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하늘과 새땅에 굳게 설 그 날을 기대하면서 그 소망에 마음 부풀어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되 종교인들이 신을 믿듯 내 즐거움과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여러분의 전부가 되어서 그것 하나 바라보고 오늘의 고생도 어려움도 참고 견뎌지는 신자이기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즐기는 것이 재미있다고 할지라도 역시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하는 땅에서 영원토록 거하는 기쁨과 즐거움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는 마음으로 하나님만 의뢰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영생이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을 다 빼앗아 버려도 무너지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든든히 서가는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는 신자일 것입니다.

 

 

 

 

성공자 (사 57:14-21)

98112545100


"장차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채 오직 기독교라는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교회를 벗삼아 지내면서 버젓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겉모습이 종교적인 틀에 의해서 멋있게 치장된 사람이 아니라 그 속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말씀에 붙들려서 말씀에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에 붙들렸다'는 말의 의미를 종교적인 틀을 열심히 붙들고 있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붙들렸다는 것은, 말씀이 지니고 있는 사상과 의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은, 말씀이 인간의 의지와 생각을 강제적으로 억누른 다음 그 인간을 말씀이 조종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을 로보트로 취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말씀대로 살아갈 의도가 전혀 없는데 말씀이 인간의 의지를 지배해서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붙들려 산다는 것은 옛날 인간의 사고방식과 생각들이 뒤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던 인생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고 허무한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말씀이 의도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이 뒤바뀐 것이 말씀에 붙들려 살게 된 신자의 삶입니다. 즉 예전에 자기만을 생각하던 사고방식과 고집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과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세상을 사셨던 그 삶을 추구하게 되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거듭났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 선지자 사도들이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말씀이 강제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전혀 후회함이 없고 오히려 기쁨으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곧 선지자들의 마음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곧 사도들의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령 받기 전의 사도들은 예수님보다는 자기 목숨을 더 아까워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 사도들은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복음을 증거하는데만 모든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죽더라도 예수님이 높여지고 복음이 증거 되어지는 것, 이것이 성령 받은 신자의 관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는 쇠하여도 오직 예수님이 존귀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삶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된 신자라면 자연스럽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내 한 몸이 부해지고 발전되는 것을 기대하지 말고, 나는 쇠하여도 오직 예수님만 존귀하게 되고 높여지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바로 말씀이 지배하고 있는 마음이고,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서의 문제점은 예수님의 마음이 없이 오로지 인간의 마음 그대로, 예수님보다는 내가 더 부해지고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로 모이며 하나님을 부르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는 하나님은 분명 가짜 하나님이고 우상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부르고 있다면, 내가 존귀히 되기보다는 오직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지배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 싶어하고, 예수님의 인생을 따라가고 싶어한다면 하나님을 불러서 과연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분명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로서 주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기도이고, 따라서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기도에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자기 자신은 무너지고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살아 계실 뿐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심판을 아는 사람은 '내가 구원받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다 무너져 버립니다. 이것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사고방식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예수님께 매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고방식입니다.

 

 

 

우상 섬김은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에 절할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 더 관심 두는 모든 것이 이미 우상입니다. 사 56:1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라고 말씀합니다. 공평을 지키고 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공평과 의는 오직 예수님이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드러내신 예수님만을 메시야로 알고 섬기지 않는 사람은 다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여호와로부터 거룩하심을 입은 자가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는 분이 함께 거하는 자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목사도 아니고, 교회 건축할 때 전 재산을 헌납한 장로도 아니고, 철야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입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자에게 지존무상하신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거하시겠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성공을 원합니다.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자식을 통해서라도 성공이 이루어지기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적 시각에서의 성공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시대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성공의 시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이란 돈, 명예, 권력, 이 세 가지가 포함된 의미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것 하나라도 차지하면 그 사람은 성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어느 쪽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주어지느냐에 따라서 '누가 성공한 사람이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는 성공자는 불변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성공자는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신자에게만 지존무상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재벌이 되었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고,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마다 연초가 되면 '국가를 위한 조찬기도회'라는 것을 열어서 목사들이 '하나님, 이 나라와 함께 하시고 대통령과 함께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없이 다만 목사라는 가면을 쓰고 신앙의 위장극을 펼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는 목사라면 아마 '하나님, 대통령의 마음이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비록 돈 없이 가난하게 살면서 무시 받고 고통받으며 산다고 해도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라면 하나님은 그가 살인자라 할지라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원토록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은 자기를 무너뜨린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자기 자존심이 살아있는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자존심이 다 무너지고 '나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믿고 의지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사람에게서는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 자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회한다는 것은 나는 죄인임을 안다는 것이고, 내가 죄인임을 안다면 결국 나는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런 신자는 돈이 있다고 해서 돈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고, 자식이 성공했다고 해서 자식의 성공을 자랑하고 내세우지 않을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축복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15절에 하나님께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함께 하셔서 하시는 일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서 그 마음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에 함께 하셔서 끊임없이 그를 인도하시고 고쳐주실 것입니다. 자기가 무너진 겸손한 마음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가르치심에 복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리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고 해도 결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이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원하는 자의 마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자신에게 유익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분명 자기에게 닥쳐올 재앙이나 어려움을 막아주실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다고 해도 십자가의 복음은 거부하고 자기 육신에 복음이 되는 것만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교만한 마음의 소유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불평하고 원망을 하지만,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는 신자는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고치시고 인도하시기 위해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6절에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면 징계하기 위해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고 노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풍랑 속에서도 고요함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밖에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독수리의 날개 속에 있는 새끼는 평화롭고 고요한 것과 같이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다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고 예수님에게만 모든 관심을 두게 될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자기 한 몸이 최고의 관심거리인 사람은 안정치를 못하고 평강도 없을 것입니다. 20,21절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면 그것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근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세상것 때문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고 결국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무가치한 자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함께 하시고 고치시고 위로하시면서 결국 영원한 축복의 나라에 도달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최고의 성공자임을 잊지 말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참된 금식 (사 58:1-9)

9812024610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본문은 참된 금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직접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이란 어떤 것인가를 계시하신 것인 만큼 본문에서 말씀하신 금식이 아니면 그 어떤 금식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금식을 강조합니다. 무슨 일만 발생하면 금식기도를 하자고 외쳐댑니다. 집안에 화가 닥쳤거나, 교회에 시끄러운 일이 발생했을 때, 또는 무슨 중대한 일이 있을 때에도 금식기도를 하자고 합니다. 금식이 기도의 효능을 더욱 극대화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도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더 빨리, 그리고 틀림없이 응답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금식을 할 정도로 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니까 하나님께서도 금식을 하는 내 심정을 아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 교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 없이 오직 내 기도에 대해서 응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금식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금식에 대해서 전혀 감동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40일을 금식하든 100일을 금식하든 하나님은 우리가 금식하는 것으로 마음에 감동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 58:2절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김에 대해서 아주 열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식기도에도 열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교회들이 철야기도회를 하고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애를 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스라엘이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애를 쓰지만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런 응답을 안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부르짖습니다.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3절)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원망이었습니다. '왜 금식을 해도 보지 않고 마음을 괴롭게 해도 알아주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금식할 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기 때문에 듣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금식할 때는 오락을 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싸우지 말라는 등의 금지 규례를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금식을 하면서 오락을 하고 다투고 싸움이 나오는 것은 결국 금식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보다는 자기들의 신앙을 과시하고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삼일 금식한 사람은 일주일 금식한 사람 앞에서 큰소리를 치지 못합니다. 또 일주일 금식한 사람은 40일 금식한 사람 앞에서는 큰소리를 치지 못합니다. 이렇게 금식을 이용해서 경쟁하고 다투고, 금식한 것을 신앙의 훈장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단지 밥을 먹지 않았을 뿐이지 참된 금식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금식은 단지 밥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밥만 먹지 않으면 금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6,7절을 보면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밥을 먹지 않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밥을 먹지 않으면서까지 기도를 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6,7절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마음을 참된 금식으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고,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고, 벗은 자를 보면 입히고, 가난한 형제나 친척을 보면 피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것을 참된 금식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린 '아니요'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으로 살아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방해한 방해꾼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만 알고,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고, 나만 잘살면 그것으로 만족이니까 남이야 굶든 말든 벗든 말든 형제가 고생을 하건 말건 나만 챙기면 그만이다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기쁨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속성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를 위해서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시대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그런데도 소위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쉽게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나서 많이 변했다' 는 것입니다. 전에는 십일조도 하지 않고 구제 헌금도 안했는데 지금은 하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위장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남을 해친 일도 없고 구제 헌금을 함으로서 남을 돕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나만 알고 나만 챙기는 인간이냐?'는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은 신앙까지도 자기를 위해서 이용하는 존재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에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1절에 보면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야곱 집, 이스라엘을 향해서 크게 외치고 말을 아끼지 말고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서 그들의 허물과 죄를 고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들, 소위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십일조 잘하고, 예배 잘드리고, 구제 헌금 잘하고 있고, 특별히 나쁜 일을 한적이 없다는 것을 내세워서 오늘 이 말씀이 나와 상관이 없는 말씀인 줄로 알면 안됩니다.

 

 

 

혹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에게 책망을 들을만한 일을 한적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6,7절을 다시 읽어보면서 과연 내가 압제를 하지 않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고 유리하는 빈민을 들이고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삶을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방해하고 있는 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목사가 교회에서 북한에 쌀을 보내고 소말리아나 아프리카 등지에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적으로 구제하는 일에 아주 열심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목사를 보면서 '우리 목사님은 남을 도우는 일에 열심인 사랑이 많은 분이다'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사가 교회에서 부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자신의 부하 정도로 여기고 무시하고 압제하면서 명령하고 다스리고 있다면 과연 그러한 사람이 북한에 쌀을 보내는 일에 열심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분명히 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목사가 '나는 당회장이다'고 하면서 부목사나 전도사를 압제하고 멍에를 씌운다면 과연 그 구제가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나온 구제이겠습니까? 사람은 속을지언정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만약 목사가 자기 자신을 목사로 보지 않고 '내가 바로 하나님의 기쁨을 방해하고 있는 방해물'로 보는 마음이 있다면 먼저 자기를 치고 자기를 포기하는 그 마음에서 전도사도 자신과 똑같은 위치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압제하고 멍에를 씌우는 것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밥을 굶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 방해꾼임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탄식하고 계심을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나만 위하고 나만 챙기는 그런 마음이 내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을 기뻐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마 3장에 보면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했을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6,7절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 챙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내 속에 들어오는 것을 극구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기쁨을 방해하는 방해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금식이란 세상의 식물을 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단순히 밥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방해만 하고 있는 나는 밥먹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의 죄악 됨을 깊이 통회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금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양식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는 것을 알고 밥이 먹기 싫어서 안먹어지면 안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억지로 밥을 안먹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세상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는 것을 아는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금식인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마음껏 먹으면서도 힘없는 자를 압제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것이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나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에게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금식이라는 것은, 고난 당하는 자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도와주는 것이 곧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을 도와주는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자들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사가 전도사를 대할 때도 그리스도 안에서 대하면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대할 때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대하면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은혜 안에서 만나고 살아가는 것이 곧 금식의 삶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 포기란 예전의 내가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의 나는 밥을 의지하고 세상의 돈을 의지하고 그것들을 힘으로 삼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힘없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압제하는 것이었고, 없는 자들을 동정으로 대하는 그런 자세였지만, 주님을 알게 됨으로서 예전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된 나는 오직 은혜로 살고 은혜만 의지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은혜만 들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인 것입니다. 내 속에 주님의 말씀이 있고 주님의 은혜가 있어서 내가 가는 곳곳마다 주님의 은혜가 나눠지는 것, 이것이 금식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신자된 여러분이 밥을 먹고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은혜를 나누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주린 자를 찾아가서 먹이려고 애쓰고, 벗은 자를 찾아서 입히기를 힘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항상 하나님의 일에 방해꾼이라는 것을 죄송하게 여기면서, 이런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 은혜에 깊이 빠져들면, 그때 여러분의 마음은 주님의 사랑에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나누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마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 사랑이 남을 도와주게 하고 입히게 하고 먹이도록 할 것입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나만 생각하고 나만 챙기려고 하는 나의 악함으로 나보다 못한 자를 무시했고 압제하고 업신여기고 형제를 피하며 살아왔음을 통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작 나는 나를 무시하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고, 피하시지 않고, 도우시고 먹여 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주님의 은혜를 나누지 못하며 살았음을 통회하며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그 마음에서 약자에 대한 주님의 모습이 보여지게 될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게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9절)는 말씀을 시행하실 것입니다.

 

 

 

 

안 식 (사 58:9-14)

98120947102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 대해서만큼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가면 죄수는 많은데 죄지은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죄의 원인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저 사람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죄는 인정한다 해도 죄의 책임을 자기에게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IMF로 인해서 경제가 어려워진 관계로 도둑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는 '나도 예전에는 회사 잘 다니는 직장인이었는데 정치가가 나라를 이꼴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회사가 부도나고 먹고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이 짓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도둑질을 한 사람은 자신이지만 도둑질을 하게 한 책임은 정치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가 문제였다는 시각입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교회 안에서도 팽배해져 있습니다. '나는 별 문제가 없는데 저 사람이 문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 속에서 성경을 보고 듣기 때문에 말씀이 자기를 치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대개의 신자들은 '나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치고 '당신은 입술로만 주님을 부릅니까?'라고 묻는다면 과연 그것을 인정할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모두가 '아니요! 나는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결국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교회를 향해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교회 안에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없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나는 문제가 없다'는 시각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혹 '나는 교회에서 문제가 없는 신자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문제가 없다'는 시각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문제가 없는 자로 보기 때문에 결국 남의 문제만 보게 되고 그것을 비판하고 판단하게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문제투성이 신자는 바로 나다'는 의식으로 살아가시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어 보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서로 나누는 모습이 없어서 불만이시라면 '내가 사랑이 없어서 그렇다'는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둘러 볼 때 내가 문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로 여기시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문제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없는 인간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문제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나오는 자를 찾습니다. 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하면, '나는 별 문제가 없는 인간이다'는 이 생각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예배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죽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그저 우리가 하는 일들을 지켜만 보시다가 잘 안될 때 도와주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계십니다. 지금도 살아 일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게 하고, 형제와 나누도록 하고,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렸던 금식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밥을 굶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금식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금식이란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단지 밥을 안먹었다고 해서 금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참된 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의지하기 때문에 세상 것을 사랑할 수 없고 세상 것이 의지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밥을 먹되 주님을 위해서 먹고 일을 하되 주님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이것이 금식입니다. 주리고 헐벗은 자를 대할 때도 그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대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들과 나누게 하고 도와주게 하는 것입니다.

 

 

 

사 58:9-11에 보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린다는 것은, 힘없는 자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 즉 강자로서 약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는 말입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한다는 것은 주린 자를 대할 때 배부른 자로서의 여유와 동정이 아니라 내가 주림 받고 있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하라는 것, 즉 주린 자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한다는 것도 역시 타인의 괴로움을 내 괴로움으로 여기는 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며 어두움이 낯과 같이 될 것이고 여호와가 항상 인도할 것이고 물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같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그래 이제부터 주린 자를 볼 때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형제의 괴로움을 내 괴로움으로 여기자'라는 생각을 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자신의 실체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잘 아는 자가 이 말씀을 본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이미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관계가 아닙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관계 속에서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착해지고 싶어하고 선을 쌓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이 남을 도와주도록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인간이 비록 남을 도운다고 해도 주린 자와 같은 심정이 될 수는 없고 괴로움을 당한 자와 같은 마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은 실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서 약자가 무시당하고 주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모두가 내 자신이 문제이기 때문이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약자를 무시하지 않고 주린 자에게 심정을 동하고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약자를 무시하지 않고 멍에를 메우지 않는 것은, 강자로서의 아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약자가 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약자로서 약자를 바라볼 때 그에게 멍에를 메우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약자인 우리들에게 약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주린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주린 자의 심정을 동하셨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믿는다는 말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모습과 마음을 이해할 때 비로소 믿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코 믿음에 있어서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고,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에게 내가 약자가 되어서 대하지 못하고 있고, 주린 자의 심정과 동하지 못하고 있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모든 것의 문제점을 자기에게 두고 시작하는 사람된 것이 바로 주님을 아는 자이고 주님이 하신 일을 알고 그 일을 기뻐하는 신자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처지였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살 수 없는 참담한 처지였습니다. 약자였고 주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도우심으로 천국 가는 자가 되었다면 신자는 분명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사랑해야 하고 약자에게 약자가 되어서 다가오신 주님의 마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자가 되었을 때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애통해 하면서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제를 알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 자는 안식을 얻게 됩니다. 안식은 육신이 살아가는 세상 환경이 좋아지고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13,14절을 보면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 역시 단순히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오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한다는 것도 자기를 위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네 길로 행치 말라는 것도 너를 위한 행동이 되지 말라는 것인데, 과연 안식일을 이같이 지킬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안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하나 하나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었으며, 예수님 자신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명령하신 것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요 12:49).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안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안식이지 우리가 어떤 규례를 지킨다고 해서 안식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식을 세상 것을 통해서 찾으려고 합니다. 돈을 벌어서 안식을 누리려고 하고, 자식을 성공 시켜서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걱정과 염려거리로 되돌아 올 뿐입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안식이 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속에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나의 본질을 아는 것이고, 이런 나를 위해서 약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짐을 지고 죽으신 주님의 일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나는 문제투성이 인간이고 죽어야 할 악한 자인데 주리고 목마르고 괴로움을 당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세상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돈이 최고고 돈이 힘이고 성공해야 큰소리 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해서 이웃을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만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그 모습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리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이고 참된 안식입니다.

 

 

 

우리가 안식에서 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주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지 못하고 '주여 주여'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일생 일대에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시간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약속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하나님이 뜻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안식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안식은 여러분을 영원한 안식에 있게 할 것입니다.

 

 

 

 

죄 (사 59:1-8)

9812064810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 의식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됩니다. 쉬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세월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세월 속에서 지나간 것과 현재의 것 그리고 미래의 것에 대한 후회와 불만족과 기대와 불안이라는 것이 교차되는 삶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지나간 것, 즉 과거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은 현재에 대한 불만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에 대한 불만족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와 환상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는 모두가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현재에 대해서 불만족이 있고 뭔가 채워지지 아니한 욕망이 잠재해 있을 때 인간은 그 원인을 과거를 통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이렇게 이렇게 했으면 지금 같이는 안되었을 것인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과거에 대해서 통한의 후회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흘러가 버린 세월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아직 오직 않은 세월, 즉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불만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낳기도 합니다. 가령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할 때 이것은 현재입니다. 그럴 때 부모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를 두고 '저게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나'라는 불안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미래, 즉 앞으로 닥쳐올 운명이라는 것에 사람은 무력하기만 합니다. 결국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인간으로부터 안식이라는 것을 빼앗아 버리게 되고,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은 스스로 평안을 찾기 위해서 뭔가 믿을 대상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신 의식'입니다.

 

 

 

그래서 '나는 신을 믿지도 않고 신에게 기도하지도 않는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신이 되어서 자신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넌 할 수 있어'라는 것 아닙니까? 흔히 말하는 마인드 컨트롤, 즉 자기 정신을 스스로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에 속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종교자는 있다 할지라도 무신론자는 없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 인간도 없는 것입니다. '넌 할 수 있어'라는 것도 결국에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환상과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가 됐든, 설사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기도하는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은 생각, 말, 감정, 이런 것이 아니라 기도에 있다고 봅니다. 다른 동물도 생각은 합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언어도 있고, 감정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 특정적인 행동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배설물을 남겨 놓음으로서 영역을 표시하는 것은 내 영역에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라는 글로써 그 의사는 분명히 같은 종족인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동물에게는 현재에 대한 불만이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후회하지도 않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함을 가지지도 않을뿐더러 환상도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과 환상이 없다면 자연히 기도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오로지 탐욕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에는 욕구 충족이라는 것이 목적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 이것이 세상 기도의 목적입니다. 비록 신의 이름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기도의 목적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이 내 기도에 응답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현 기독교의 기도라는 것도 거의 모두가 이러한 범주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기도라는 것이 그런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 58:9절에 보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여호와를 부를 때 응답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성경구절은 참으로 기도에 대해서 희망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사실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고 어리석고 탐욕으로 일관하고 있는 목사 아닌 목사들은 성경의 그럴듯한 구절을 인용해서 '하나님은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엉터리 말을 유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인간의 정성을 보태야 한다고 하면서 지극한 정성이 깃들인 기도를 위해서 금식 기도, 철야 기도 또는 특별 새벽기도 등을 강조하고 나아가서 헌금까지 강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정성을 보고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 58:9절에서 부를 때에 응답하시고 여기 있다라고 하신다는 것도 6,7절에 해당하는 인간 되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금식을 이야기할 때 봤던 구절이지만 다시 보겠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 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은 약자를 보호하는 인간되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인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는 인간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었지만 이것을 간단하게 다시 설명을 하면, 약자에게서 약자로 오신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주님은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이 능력이나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분이기에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약자의 모습으로 오셔야 했던 그분의 인생 전체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이란 세상에서 떠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비록 몸은 세상에 두고 계셨지만 그 마음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에게 두고 사셨던 분이 예수님인 것이고 바로 그분을 우리가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몸은 세상에 살지만 마음은 세상에서 떠난 나그네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같이 약자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음에 떠났다는 것은, 세상의 힘에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의 힘에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힘있는 강자에게 굴복하고 힘없는 약자는 압제하고 멍에를 씌우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고 빈민을 집에 들이고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모습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세상을 떠난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의 기도는 분명히 응답하시고 여기 있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를 듣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벌어지게 했고, 우리의 죄가 그 얼굴을 가리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결론은 '죄있는 자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죄있는 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죄있는 자에게서 나올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북돋아 주고 조장하는 결과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 58:6.7절에 반대된 모습은 모두가 죄가 됩니다. 세상의 힘을 사랑하는 자는 자연히 힘으로서 힘없는 자를 누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약자로 오신 예수님을 누르는 것이고 힘에 죽어 가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결국 죄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라고 소리친다고 해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금방 들통이 나고 맙니다. 나에게 돈이 없을 때, 자식이 못나 보일 때, 일이 실패했을 때, 그 마음이 불만과 불안과 염려로 채워지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불어닥친 경제 한파는 그동안 주님만을 사랑한다고 큰 소리치던 교회들, 신자들의 거짓된 모습을 드러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돈이 있고 일이 잘되어 갈 때는 넉넉함 가운데서 얼마든지 주님에게 마음을 두는 척 했었지만, 경제가 어려워짐으로 인해서 결국 사랑했던 것은 돈이었고 세상의 넉넉함이었다는 것이 발각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타인이 해를 입고 피를 흘리게 되는 것도 관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기도할 때 과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게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죄인 것입니다.

 

 

 

3-8절까지의 모든 말씀이 죄악에 찌들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손에 손가락에 입술에 혀에 발에 그 움직이는 하나하나가 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부정하신다면,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엇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보면 결국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것이 죄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철칙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하셔서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고 도와줄 능력이 없어서 도와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들의 사이를 죄가 가리고 있는 이상 네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동조자가 아닙니다. 만약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면 세상은 그 기도 때문에 피를 흘리고 해를 입을 자가 속출할 것인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가령 우산을 파는 사람이 비오기를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응답되면 비가 오면 피해를 입는 양산 장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3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우리의 손에 피가 있고,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지고, 입술이 거짓을 말하고 혀가 악독을 발하는 모든 것도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자기 뜻은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여호와를 기뻐하는 금식의 삶이라면, 우리 역시 그 삶에 순종되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곧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게 해서 인간의 본성과 반대된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롬 8:26절의 말씀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이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의 기도가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뜻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되어지도록 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기도를 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이 그 신자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자기 뜻이 포기된 신자의 기도는 현재 처한 형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현 상황을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하신 일로 생각하고 그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금식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기도일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이미 자기가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져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 기도는 주님의 기도와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리고 있는 것은 죄입니다. 죄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욕심을 조장하는 기도에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단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은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쪽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여지는 도구로 살아가기 위해서 내 뜻이 포기되어지기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신 그리스도안에서 기도하는 것이고, 이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리고 있는 죄가 없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게 될 때 여러분은 안식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구속자 (사 59:9-21)

98122349104


신자는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거나 많이 듣는 말에 대해서 스스로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주 듣고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한 말이냐'이기 때문에 신자는 항상 자신의 한 말을 되새기면서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고, 또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했는지에 대해서 살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않으면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고 허공만 울리는 공허한 말로 그쳐버릴 것입니다.

 

 

 

그 한 예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자'라는 말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고 또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의 진실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던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그 의미를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만약 대답할 말이 궁색하시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동행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동행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와 함께 하면서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호신이지 결코 동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비록 살아 계시지만 보이지도 아니하시고 우리와 직접 함께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함께 하시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동행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인물이 나오면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인물처럼 하는 것이 곧 동행하는 것이 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둘입니다. 하나는 에녹이고 하나는 노아입니다. 물론 이 두 사람만 하나님과 동행했고 나머지는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에녹과 노아에게만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을 쓴 것인데, 그 이유는 에녹과 노아같이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에녹은 홍수전의 사람이고 노아는 홍수 후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은 홍수 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동행을 가르치고 있고 노아는 홍수후의 사람들에게 동행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녹과 노아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유다서 1:14-15를 보면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에녹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계시 받고 사람들에게 심판에 대해서 예언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 역시 심판을 계시 받고 방주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심판에 대해서 예언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심판을 계시 받고 심판에 대해서 예언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세상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나 노아가 심판에 대해서 예언을 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았다는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자신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을 향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동행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나 사도들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예언을 했던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동행하는 여행을 한다고 할 때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해야 즐겁지 마음이 맞지 않은 사람끼리는 즐거움은 커녕 괴로운 법입니다. 속히 갈라지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동행이란 다만 몸과 몸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세상을 향한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 때문에 더러워진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신자가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죄가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가리고 있다는 것은 내가 죄를 좇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죄를 좇아간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한가지 정리를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원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미워하며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죄를 미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는 그 마음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자신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회개라고 하고, 이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먼저 9-1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죄에 빠져 사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로 오시는데 그 모습은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고, 구원을 투구로 삼으시고,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고,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신 모습입니다. 호심경이란 갑옷을 의미하고 보수라는 것은 복수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세상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18절에서도 그들의 행위를 갚으시고, 대적에게 분노하시고, 원수에게 보응 하시고,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죄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공평이 멀리 있고 의가 없습니다. 온통 어둠과 캄캄한데서 행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팽개쳐지고 공평이 물리쳐집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의로운 중재자, 즉 구속자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구속자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군대의 모습으로 옵니다. 그리고 오셔서 하는 일은 행위대로 갚으시는 것이고 대적에게 분노하시고 보응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죄에 대해서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어야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싫어하신다면 나도 세상이 싫어져야 하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면 나도 역시 죄가 미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반대로 오히려 세상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가까이 하는 것이 더 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친해지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과 친해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공격하셨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 굴복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미워하시는 예수님 앞에 굴복한다는 것은 나도 역시 세상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러분에게 과연 그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세상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돈을 의지하고 사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고, 힘으로 약자를 누르고 무시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고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고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그런 의도가 있습니다. 있다면 여러분은 죄를 미워하는 자이고 죄를 미워한다면 죄에서 떠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죄를 지었다' '안 지었다'와 상관없이 죄를 떠난 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구속자가 임한다고 말합니다. 20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구속자는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시온과 죄과를 떠난 자를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시온이란 죄과에서 떠난 사람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 구속자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맨 먼저 전파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모든 것은 죄라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고, 그 죄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자기 백성'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과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과연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없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고 물론 사랑한다거나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했다고 해도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속자는 죄과에서 떠난 자에게 임한다고 하셨는데 죄에서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죄를 옹호하고 죄의 길을 쫓아가고 죄를 좋아하면서 믿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에 방해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구속자로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시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 되기를 소원하면서 죄를 미워하고 죄에 동조하지 않고 죄에서 떠난 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시온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고 구속자가 임한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빛을 발하라 (사 60:1-3)

99010301105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죄짓고 난 인간의 정신 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복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다는 의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의식에서 나오는 구호들이 '하면 된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시련은 있되 실패는 없다'라는 소위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구호들은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의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함으로서 나약한 인간이 아닌 강한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강한 자를 필요로 합니다. 나약한 자는 국력에 손상을 줄뿐입니다. 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강인한 의식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식으로 두려움이 없이 어떤 일에든 뛰어들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가 요구하는 인간상입니다. 이러한 요구 앞에 '하나님만 의지하자'는 것은 약해빠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스스로 하고자 하는 자를 돕는 분이시지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고 반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까지 이런 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 힘으로 실현하고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이 말이 더 믿음이 있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할 수 있다. 믿음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자'라는 말과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사는 것이 사는 길이다'라는 말과 어느 것이 더 여러분에게 힘이 되는 말입니까? 전자의 말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린 할 수 있다 실천하자'는 말 자체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부추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다'는 말은 스스로의 힘을 포기하도록 하는 말이기 때문에 불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만에서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면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하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이게 하는 것이 곧 사단이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인간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둠으로서 상대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는 것을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빌어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실현한다는 것은 '나는 내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만 앞세운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자기 뜻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조그만 문제가 하나 생겨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입장을 더 생각하고 내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겠다는 것입니까? 결국 인간이 실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란 자기의 뜻에 부합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할 수 있다'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경을 보기 때문에 모든 말씀들이 내가 실천해야 할 말들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도 그런 사고방식에 많이 인용된 구절의 하나일 것입니다. 특히 청년회 헌신예배나 행사시에 많이 사용되는 표어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청년들이여 왜 나태에 빠져 있는가? 왜 할 일을 못하고 있는가? 세상을 보라 세상이 이렇게 부패하고 어두운 것은 청년들이 일어나서 빛을 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들이여 일어나라 그리고 어둔 세상에 빛을 발하라' 이런 말을 외칠 때 '아멘' 안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래 이제부터 내가 빛을 발하는 생활을 해야지'라고 결심을 안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행사는 행사로 그쳐버리고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이 소위 교회 행사가 아닙니까? 본문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빠져 나와서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 실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은 하나님이 일어나라고 한다고 해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판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선악과를 먹은 후의 인간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징벌하실 때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때문에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면서 세상을 다스립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인간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 탈바꿈해버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버린 인간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없고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파괴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이 단절은 곧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인간' 이것을 다른 말로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벗어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미 죽어 있는 인간에게 '일어나라'고 외친다고 해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또 빛을 발하라고 하는데,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내가 곧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빛으로 살아라'고 하지만 교회에서 말하는 빛의 수준은 단지 이웃을 돕고 착한 일을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준의 빛은 교회가 아닌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정도 수준의 빛으로서 세상이 변화된다면 이 세상은 이미 예전에 변화가 되었어야 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어서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59장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59장에서는 말하기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가려져 있는 것은 죄때문이라고 합니다(2절). 그리고 이 세상은 온통 죄로 가득찬 어둠의 세상임을 말합니다(9,10절). 그러한 세상에 구속자가 오시는데, 구속자의 할 일은 행위대로 갚으시고 대적에게 분노하시고 원수에게 보응 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18절). 그러나 그 속에서도 구속자가 임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은 시온이고 야곱의 죄과에서 떠난 자라고 합니다(20절). 즉 자기의 죄를 알고 회개하고 죄를 미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구속자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뜻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드러난 죄가 무엇입니까? 사59장에 나온 대로 손에 피를 묻히고, 공의가 없고, 진리가 없고, 허망한 것을 의뢰하고, 거짓을 말하고, 악독을 발하고, 죄악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하시고, 강자가 아닌 약자의 편에 서시고, 죄인을 가까이 하심으로서 세상의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요 1:4,5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빛이 어둠의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을 빛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둠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빛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은 빛으로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드러내기 위해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때문에 1절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는 것도, 장차 예수님이 빛으로 오셔서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시고 여호와의 영광을 높이실 것을 미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라고 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세상에 빛이 옴으로서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빛이 온다고 해서 어둠이 자신의 어둠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빛이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느냐 입니다.

 

 

 

우리가 곧 어둠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십니까? 내가 곧 어둠이라는 자신의 실체를 아는 자가 신자이고 예수님을 만난 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체험하고 싶어하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신비한 현상을 기대하는 욕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분을 만난다는 것도 역시 신비한 기적 같은 체험을 통해서 만나질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결국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기보다는 신비한 이적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탐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탐욕으로 살기 때문에 꿈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나는 꿈에서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단정하고, 있는 말 없는 말 보태서 간증이라는 것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눈에 넘어진 자국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봤다고 하면서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온 세계에 배포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심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난 자는 어떤 신비한 현상을 체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내가 곧 어둠이고 내가 곧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달은 자입니다. 이것이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자의 특징입니다. 빛을 만났기 때문에 어둠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들이 빛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저 좋은 일하면 그것을 빛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빛은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그 어둠의 세상을 심판하시고야 말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빛을 모르기 때문에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어둠에 지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싸우지 않습니까? 빛을 모르기 때문에 어둠의 것을 가지고 아옹다옹하는 것입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고 야곱의 죄과 중에 떠난 자에게 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모든 사람에게 빛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엡 5: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빛이 임한 자는 내가 바로 죽은 자였고 잠자는 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자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동안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교회에서도 신앙적인 행위를 많이 한 것 때문에 '나는 깨어있는 자고 살아있는 자다'고 생각했었는데, 빛이 내게 임하고 보니까 '내가 바로 죽은 자였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빛이 임한 자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오직 자기 백성에게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나는 죽은 자다' 는 것을 무시하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에서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칭찬을 받고,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고 사람 좋고 인격도 있고 착하다는 높임을 받을 때 내가 죽은 자임을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성경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이미 빛으로 산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빛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에게 예수님은 나의 어둠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다만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훌륭하신 분으로만 인식할 뿐입니다.

 

 

 

빛이 임한 자가 빛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빛이 임한 자는 과거에 내가 붙들고 있었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그 모든 것은 다 어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빛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빛을 알았기 때문에 어둠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19,20절에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빛을 아는 자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빛이 되셔서, 내가 만들어 낸 영광 말고 하나님이 나의 영광이 되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둠의 세상에 이러한 사람이 적습니다.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모두가 어둠을 붙들고 살면서 빛을 빛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속에서 빛이 임한 자는 내가 죽은 자임을 알고 그리스도로 깨어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세상의 모든 것은 어둠입니다. 우리를 빛의 세계로 인도하실 분은 오직 빛으로 오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을 여러분의 빛으로 삼고 살아갑니까? 빛을 아는 자로 살면 그것이 복입니다. 그 외의 것은 모두가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빛을 아는 신자는 어둠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알고 그 빛에 가까이 하고자 하는 삶을 살뿐입니다. 3절에서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는 말씀처럼 빛이 임한 자는 빛을 가까이 하고 빛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 (사 61:1-3)

99011002106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 시간에는 '빛을 발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면서 이 말씀을 우리의 결단과 행동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하지 말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신자에게 빛이 될 것을 요구하고, 신자 편에서 빛과 같은 삶을 보여줌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아름답게 만들라는 하나님의 지시사항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 자체를 크게 오해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빛을 발하라는 것은 구속자가 장차 세상에 와서 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데, 빛이 세상에 와서 하실 일을 세상에 대한 변화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을 비춘다는 것을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춰준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빛이 되는 삶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보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는 말씀을 세상에 맛을 내고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빛을 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이 빛을 발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까? 변화는 커녕 세상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실패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는데 세상의 힘에 밀려서 죽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메시야도 아니고 구세주도 아니고 다만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까불다가 죽음을 당한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어도 변화되지 않은 세상인데 인간이 변화시켜 보겠다는 것은 인간을 예수님보다 한 수 위에 두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세상에 빛을 발할 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약자 편에 서계시는 것이었습니다. 힘이 있어도 힘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스스로 약자 되신 그것이 바로 빛입니다. 빛이 할 일은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어둠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오되 어둠이 어두움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60:3절에 보면 빛을 알아보고 빛으로 나아온 자들이 발생합니다. 4절에서도 무리가 모여 네게로 온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빛으로 나아오지 않은 자들에 대한 운명을 얘기합니다. 파멸과 진멸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은 쉽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빛으로 오신 자를 섬기고 빛으로 나아가면 되겠네' 이것은 마치 '예수 안믿으면 지옥 간다'고 하니까 '그래 그럼 믿어주지 뭐'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을 만나지 못하고 빛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진멸당하고 파멸 당할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빛을 만난 자는 '내가 바로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영영한 빛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는 것이 모두가 인간의 소관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런 말을 왜 해야 합니까? 혹 '내가 어둠이었구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자기 공로로 삼지 말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닌데 그렇게 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분명 나말고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 분이 있습니다. 60:22절을 보면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말씀합니다. 때가 되면 여호와께서 이루십니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입니까?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임한 그 분이 등장할 때입니다. 1절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 성신, 여호와의 신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모두가 성령을 의미합니다. 한국교회는 성령에 대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을 자신이 외부로부터 어떤 영적이고 신비한 힘을 부여받아서 자기 자신이 신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행하는 사람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충만도 영적인 신비의 힘을 강하게 아주 많이 부여받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 받으신 예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왜 성령을 받으셔야 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 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령 받지 않으면 할 일을 못하시는 무능하신 분입니까?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신 것은 장차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가셨을 때 무엇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을 받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성령과 함께 일하신 것은, 앞으로 성령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미리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성령을 보내신 것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절대로 받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열심히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은 주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면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턱대고 교회에 연관된 것에 열심을 내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님이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과 성령이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1절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내게'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를 놓여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일하신 결과로 이 세상에 생겨난 결과는 가난 때문에 낙심하고 힘을 잃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마음에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상했는데 고침 받은 사람들이 생겨나고, 죄에 포로 되고 갇힌 자였는데 자유를 얻은 자가 생겨나는 것이 주님이 일하신 결과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임을 가지고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하늘로 가신 지금 성령에 의해서 발생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성령에 의해서 발생한 교회의 분위기는 '나는 가난 때문에 괴로워하고 실망하고 살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돈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게 되고 기쁨을 얻게 되었다. 나는 마음이 상한 자였는데 예수님으로 기쁨을 얻었다. 나는 죄에 갇힌 자고 포로된 자였는데 예수님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만들어낸 교회는 크다 작다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성령에 의해서 발생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란 성령에 의해서 부름 받은 자들이 모이는 모임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고정적이 아니라 항상 유동적입니다. 교적부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교인이 아닙니다. 그때그때 교회로 모여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령이 만들어 낸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숫자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교회로 부르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불러내는 것은 단지 의자를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긴 인간의 욕심이 빈 의자를 채우는 것에 있으니까 당연하다 하겠지만,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는 빈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는 내가 가난한 자였고 마음이 상한 자였고 포로된 자였고 갇힌 자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나 자신이 돈에 매어 사는 자였고 사단에게 갇히고 포로 되어 살아가는 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내가 바로 망하는 자이고, 내가 바로 어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무엇이 생명인가를 알게 되었고 자연히 주님을 향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우리가 포기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영생이 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것을 붙들다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은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버려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땅의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내가 사는 길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죽는 길에까지 마다하지 않도록 밀어붙이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에서 놓여나고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합니다. 은혜의 해는 구원해 주겠다는 것이고, 신원의 날은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심판이 오기 전에 주님에 의해서 주님만 찾고 원하는 자들을 불러모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모여진 자들이 심판 날에 살아남을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지금 성령이 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에 의해서 모여진 자들의 특징은 오직 주님만 따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희락으로 슬픔을 대신하고 찬송으로 근심을 대신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그냥 교회로 나올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만들어진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빛을 바라보고 모여든 교회는 어떤 모습인지 생각하시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과연 나는 성령으로 만들어지고 빛을 만난 자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봉사자 (사 61:4-11)

99011703107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그 자손을 열방 중에, 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 자기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고 책망을 해야 그 책망에 대해서 반발을 하지 못하고 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인정하는 책망을 통해서 자신을 반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잘못이라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하고 책망을 한다면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책망에 대해서 반발을 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책망하는 상대방을 향하여 공격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지적과 책망에 대해서 거의 인정을 하지 않고 반발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은 서로의 시각차이 때문입니다. 젊은 청소년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문화일 뿐인데,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잘못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서로가 충돌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과 인간과의 시각차이가 엄청납니다. 성경은 죄라고 하는 것을 인간 편에서는 전혀 죄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과 인간은 전혀 동화될 수 없는 첨예하게 대립된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생각하는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을 인간의 인격 수양을 위한 좋은 말로 가득차 있는 경전으로 여깁니다. 실제로 모든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경전이라는 것이 이런 범주에 속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인격 수양을 위한 좋은 말로 가득차있는 경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편에서는 전혀 죄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죄로 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성경과 인간의 첨예한 대립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대립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에 서서 성경을 성경대로 말하는 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성경을 성경대로 전하는 자에게서 참된 성경의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그 반응을 철저한 대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한 대로 인간 편에서 도저히 죄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죄로 지적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생각해 봅시다. 만약 성경에서 지적하는 죄가 진실된 것이라면,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은 인간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생각해 본다면, 성경이 지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자기 백성 찾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죄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는데,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고자 해도 일단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에서 건짐 받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예수님 편에서 아무리 죄에서 건져놔도 또 다시 죄의 악한 자리로 스스로 즐거워하면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무엇에서부터 건지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는지 조차도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무엇인가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경전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을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겠다고 나서는지, 바로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사야서를 생각하면 이사야서가 왜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책망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심한 책망을 받습니다.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말씀한 대로 짐승들도 자기 주인은 아는데, 이스라엘은 주인을 모른다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순순히 인정을 하겠습니까? 물론 당시 이스라엘이 드리라는 제사도 안드리고 제물도 바치지 않고 계명도 전혀 지키지 않으면서 자기들 멋대로 살고 있었다면 이러한 책망에 양심이 찔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철저하게 절기를 지키고 제사도 드리고 제물도 바치면서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자기들이 생각할 때는 이만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고, 하나님도 역시 자기들의 그러한 행위를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너희는 주인을 모른다'고 한다면 순순히 '예 맞습니다. 우리는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다'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나설 인간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이사야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시비를 거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그 시비도 이스라엘이 인정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문제 삼고 시비를 걸고 있으니 여기에서 대립이 발생할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시비를 걸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도구로서 이사야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사야 자신부터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죄를 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가 성전에 있을 때 보좌에 앉으신 영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깨닫게 된 자신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시자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청하고 나서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가 이스라엘을 향할 때 그 마음의 자세는 '세상에는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고 나자 이사야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 어떤 행위도 의가 되지 못하며 망하게 된 인간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없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난 이사야가 과연 이스라엘에게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부지런한 종교행위를 칭찬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서 하나님 편에 서서 그들이 인정하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신랄한 공격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부지런한 자기들의 종교행위를 보고 신앙에 대해서는 안심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안심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자신의 종교행위입니다. 종교 행위에 부지런할 때 누구든지 신앙에 대해서 안심을 하고 게으를 때 불안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결국 종교생활에 게을러서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부지런한 종교생활을 바라보면서 신앙에 안심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이 역시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러한 죄에 대한 개념을 자신의 종교생활에 심취해있는 이스라엘이 이해할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의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가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하면 왕, 즉 고난을 받는 여호와의 종이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고 하늘로 갔을 때, 거기서 여호와의 신이 와서 그 의를 남은 자에게 주시고, 여호와의 신이 임한 남은 자는 이 세상에서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봉사자로 살아가면서 어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여호와의 종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인데 이 계획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너희란 '남은 자'를 가리킵니다. 남은 자가 제사장으로 봉사자로 일컬음을 받는 것이지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 되었다고 제사장이 아니고, 장로로 안수 받았다고 봉사자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여호와의 신이 와서 의를 주시는 자는 남은 자입니다. 오직 남은 자에게만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의 의를 주시고 그 사람을 가리켜서 제사장, 봉사자라고 일컫는다는 것이 이사야의 말이고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인간이 산에 틀어 박혀서 성령 달라고 금식기도 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이 임하시고 의가 주어진다면 의를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남은자에게 성령이 임한다고 했는데, 문제는 남은 자가 과연 누구냐는 것입니다. 아무나 남은 자라고 할 수 없고, 교회 일에 부지런하다고 남은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을 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인정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죄로 지적을 하면서 친다는 것은 애당초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한다면 이스라엘이 죄에 대한 책망을 들었을 때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반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돌아오라고 죄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책망 받자 회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사야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손에 죽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사야처럼 선지자의 길을 간 분이 예수님입니다.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유대인에 의해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 기대하시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주여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입니다'라고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무릎 꿇고 나서는 자를 찾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결국 이사야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 죄를 드러냄으로서 그속에서 자기 죄를 발견하고 하늘에서 의로 오실 여호와의 종을 기다리는 그 자가 바로 남은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은 자의 특징은, 세상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가지고 보람으로 삼고 자랑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을 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반면에, 남은 자들은 '내가 바로 주님을 창으로 찔러 죽인 죄인의 괴수인데 죄인의 괴수가 뭘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의가 될 수 있는가? 나는 뭘해도 여전히 죄인일 뿐이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뭘 하든 안하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의 종으로서 하늘의 의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들이 남은자이고, 남은 자들이 제사장으로 봉사자로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황폐하고 무너진 곳이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황폐해졌다는 것은 성전이 황폐해지고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무너짐은 결국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철저해보고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의해서 그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힘으로도 의에 대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즘 큰 예배당을 지어바치고 많은 수의 교인을 끌어 모으는 것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지막때에 영생에 들어가는데 그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발버둥을 쳐도 의에 대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고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키신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하나님 편에서 성공으로 바꾸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봐야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만 섬기기를 힘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희생하시고 피흘리신 결과로 주어진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희생하시고 피흘리시고 일하신 결과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영광 돌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고, 봉사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봉사자는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만 드러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회 일을 한다고 해서 봉사자가 되는 것이 아님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만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기 부정입니다. 따라서 '주여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입니다'라고 자기를 부정하게 된 사람이 남은 자이고, 이 남은 자가 바로 하나님의 봉사자이며, 이 남은 자가 곧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남은 자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무너진 성전을 하나님 편에서 다시 세우시겠다는 계획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을 안다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보겠다는 발상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봉사자로 어둠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는 것은 고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에게는 약속이 있습니다. 8절에 보면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언약은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10절)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한몸입니다. 깨어지지 않는 관계입니다. 영원토록 깨어지지 않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남은 자들의 장래 모습입니다.

 

 

 

신부는 오직 신랑만 의지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신랑이 있기에 세상이 어렵다고 낙심하지 않고 기뻐할 줄 아는 것이 참된 신부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남은 자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봉사자로 일컬음 받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과연 오늘을 남은 자로서,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깊이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공 (사 62:1-12)

99013105108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쀼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너의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으로 마시지 않게 할 것인즉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의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불안과 초조를 벗어버리고 평안을 찾고 싶어하는 것이 현대인의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기' '선' '단학' 이러한 모든 것이 현대의 스트레스를 벗어난 마음의 평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곧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수단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곧 현실에서의 구원으로 인식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종교라는 것은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통로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 종교는 너나 할 것 없이 평안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도 예외 없이 '예수를 믿으면 평안이 온다'는 말을 외치면서 기독교란 종교를 선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이 말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믿음에는 평안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평안이라는 것이 어떤 평안이냐는 것은 전혀 인식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평안의 반대는 불안과 초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안을 말하기 전에 불안과 초조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불안과 초조가 있는 평안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평안해졌다는 것은 분명 불안과 초조를 일으키는 요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평안을 말하기 위해서는 불안과 초조가 올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안함과 초조감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성공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은 그러한 포부를 이루는데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그럴 때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자기 말고 바라보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결국 불안과 초조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에 평안이 있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증거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믿음이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지 못하고 수시로 변하고 흔들리고 불안한 이유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다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인으로서 성공하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에 대해서 성공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직업에 대해서나 취미에 대해서나 자신이 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성공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러한 마음이고, 신자가 기도를 잘하고 싶고 성경을 많이 알고 싶은 것도 바로 이러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공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할 때도 틀림없이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일은 잘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안됩니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실패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었는데 이것은 마음뿐이고, 신앙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마음이 쏠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낙심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되고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신앙생활을 잘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분명히 '내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없는 것이고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잘하고 싶다고 해서 잘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나 사도들과 같은 인물들을 생각할 때 우리 생각에는 그들이 신앙생활에 성공했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그들은 신앙에 있어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공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은 인간이 실패 없이 일을 잘한 것을 성공이라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은 인간은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하나님이 성공으로 바꾸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와 수고와 희생의 대가로서 우리에게 공짜로 성공이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인간은 누구라 할지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야 마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즉 성경은 인간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보여주고 동시에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시고야 마는 분임을 보여주면서, 실패가운데서도 낙심하지 말고 성공하시고야 마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하고 이런 믿음에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성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곧 평안이고 이것이 신앙생활의 성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일을 잘해서 하나님께 잘 보여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게 되고 평안이 사라지고 불안감만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봐도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에 부지런했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피를 흘리게 하시고 희생하게 하셔서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이사야 전체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실패해서 황폐화된 이스라엘 위에,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 분이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1-3절을 다시 보면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해서 잠잠하지도 않고 예루살렘을 위해서 쉬지도 않는 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잠잠하지 않으시고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서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잘해서 그렇게 여겨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자신의 실패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성공하시는 능력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비록 자신은 실패 안에 있지만 성공하시는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신다는 것으로 성공의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평안입니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해보려고 하는 것이나, 목사가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을 잘하라고 가르치는 모든 것들이 잠잠하지도 쉬지도 않으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쀼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고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는 너에게 실패가 없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왜 실패가 없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그 능력으로 실패 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희생하시고 피흘리시면서까지 잠시도 쉬지 않으시면서 인간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데 인간에게 실패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우리가 잘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든든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실패하는 인간을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고 불안하고 초조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그래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성공자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고 굳건한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헵시바' '쀼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너에게 있다'는 뜻이고, 쀼라는 '결혼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혼 관계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5절에서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신부는 그 자체로서 신랑에게 기쁨입니다. 신부가 뭘 잘해서 신랑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신자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뭘 잘해서 그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부라는 존재 자체로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신부 되는 신자 쪽에서 내쪽에서 뭔가 잘한게 있어야 신랑이 받아줄 것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뭔가 못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보여질 때 자연히 낙심하게 되고 불안함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부는 신랑을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신랑이 잘되면 곧 신부도 잘되는 관계이기 때문에 신부인 내가 잘하려고 할 필요 없이 신랑이신 예수님이 잘한 그 행동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의지하면 됩니다. 이것이 신랑이신 예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기독교라고 부릅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 자기 본 모습 그대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본 모습은 실패하고 넘어지는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위장하려고 합니다.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게 된 후 무화과 잎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린 것처럼 인간은 항상 자신의 약점과 부끄러움을 가린 채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합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서 항상 자신을 가리고 있다 보니까 실패하고 넘어지고 주님의 사랑이 있어야 살 수 있는 불쌍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서도 깨닫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겠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자신을 더욱 철저하게 가리고 위장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일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믿음을 외친다고 해도 믿음으로 굳건히 살아가지 못합니다. 세상 환경에 따라서 이리저리 변하고 흔들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우리 모습을 그대로 들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실패하고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오직 주님의 사랑만이 희망이고 힘이고 빛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찾으시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백성을 향해서 '딸'이라고 부릅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시온을 딸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부르는 것입니다. 딸이란 잘하나 못하나 딸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런 부족함이 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나를 딸로 여겨줄까?'라는 생각에 불안해한다면 그것은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이러한 관계를 잊어버리고 내가 잘한게 있으면 백성으로 여김 받고 잘한게 없으면 백성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성공하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공이 우리를 신자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님의 딸로 여기신다면, 못한 것이 있으면 못한 것을 그대로 들고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하나님은 잘하고 성공한 인간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모습을 그대로 들고 성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오는 인간을 기다립니다. 그 사람들이 참된 이스라엘이고 시온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성공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큰 은총 (사 63:1-14)

99020706109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무지할 때 나타나는 행동은 형식입니다. 인간의 상식선에서 사랑을 생각할 때 그 기준은 조건입니다. 즉 사랑을 받을만해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말하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무조건' 즉 조건이 없는 사랑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알고 있지만 삶에서는 그래도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형식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키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죄를 지었을 때 유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자신이 생각하기에 나쁜 짓이고, 신앙이 없는 행동을 했을 때 하나님의 분노가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오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나쁜 짓을 했을 때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신을 의식합니다. 혹시 악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했는데도 신으로부터 그 어떤 반응도 없을 때 불안감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쁜 짓에 대한 대담성을 가지게 됩니다.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짓을 했을 때 또는 교회에서 죄라고 떠드는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내리지나 않을까?'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헌금을 한다던가 성경을 본다던가 기도를 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즉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함으로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이 분노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보자는 의도입니다. 회개를 하는 것도 이러한 의도일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악한 모습이 하나님에게 누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다만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즉 벌을 받지 않음으로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자는 의도에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러한 의도들이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킨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자신의 조건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러한 나를 하나님이 사랑할리가 만무하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조건을 들고 하나님께 나오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 49:15절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자식을 잉태한 어머니의 심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잉태했을 때, 뱃속에 있는 자식의 조건을 바라보며 기뻐하지 않습니다. 잉태된 자식을 향한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인간의 선행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낼 만한 선행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저버리고 자신의 조건을 들고 나오려고 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 대한 원칙입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대해서 대적을 하고 나타날 때 하나님은 그를 원수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오직 자기의 모든 조건을 팽개치고 하나님의 사랑에 무릎 꿇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를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은 처음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참된 백성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모든 인간은 조건의 법칙에 매어 삽니다. 자기의 조건에 맞을 때 사랑하게 되고, 자기의 조건에 맞지 않을 때 미워하게 됩니다. 결혼도 자신의 조건에 맞추어서 생각하게 되고, 자식과 부모 역시 자신의 조건을 내세워서 대하게 됩니다. 조건 없는 사랑, 즉 자기를 포기한 사랑이란 인간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서 이해할리가 만무합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총을 깨닫게 된 새로운 이스라엘을 탄생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이사야서에서는 남은자라고 부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무시하는 민족이나 나라는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것을 입으로 언어학적으로 욕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연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 가운데 심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체이신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 무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때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하면서 즐거워하고 비난 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이 사랑과 긍휼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이스라엘을 비난했던 이방민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합니다. 홍의를 입고 에돔에서 오는 자의 모습은 2,3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판주가 에돔에서부터 온다는 것은 에돔과 같은 모습은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돔은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그 기회를 타서 유다 남부를 공격해서 차지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타서 유다를 공격했다는 것은 결국 사랑과 긍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철저한 무시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신자가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일인데, 이것을 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일을 당하다니, 당신의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라고 비난하고 무시할 때 그것은 곧 어려움을 당한 신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일을 겪으면서 무시를 받고 조롱을 받을 때 마음 상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복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원수를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같은 신자들 관계에서도 우리는 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신자가 어려움을 당할 때 섣불리 '평소에 믿음이 없이 살더니 하나님께 벌받았다'라는 조롱의 말을 했을 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어려움을 당하든 그것을 바라보면서 어려움을 당한 자의 믿음에 대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형제 한 사람을 도구로 삼아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계신다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사 63:4-5를 보면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원수 갚음, 즉 심판에 대해서 도와주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도와주는 자가 없다는 것은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심판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가진 자가 없음을 말해줍니다.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믿음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이나 심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멸시하고 무시하며 살았던 자들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조건을 따지며 신을 대했던 자가 바로 우리들이었지 않습니까? 조건을 따지며 형제의 믿음을 판단했고 비판했으며, 조건을 가지고 구원을 논했던 우리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대해서 눈이 뜨이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조건을 앞세우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우리의 기존의 사고방식,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원수된 사탄의 사고방식이 누구에 의해서 무너졌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함으로 되어진 일입니까? 금식했기 때문에 되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치시고 우리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긍휼입니다.

 

 

 

여러분이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거나, 내것을 자랑하는 삶을 살다가 징계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무너짐을 경험하고 나에게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은 여러분을 치셨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무너짐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 눈이 뜨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 담겨 있는 사랑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한 자들이, 믿는 자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조롱을 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7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집에 많은 긍휼과 자비와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고 일컬으셨습니다(8절).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며 사랑과 긍휼로 구속하셨습니다(9절). 그런데 그들이 반역을 해서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합니다(10절). 그래서 구원자였던 하나님이 그들의 대적이 되어서 그들을 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11-13절의 말씀입니다. 홍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는데 이스라엘이 이를 배반했고,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원수가 되어서 그들을 치심으로 이스라엘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조건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조건을 무시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이요 긍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긍휼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무시하기 때문에 사실 우리들은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면서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습니까? 하루 세끼 밥먹고 살아갈 자격이 있는 자들입니까? 평소 우리들의 악한 마음이나 행동을 따진다면 우리는 벌써 멸망에 떨어져 있어야 할 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조건 없는 놀라운 긍휼과 사랑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들이 현재의 삶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토로할 수 있겠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총에 대해서 반역을 할 때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루하루 살았던 삶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었던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하나님이 우리의 대적이 되셔서 우리를 치심으로서 알려고 하십니까? 앞서 이미 이러한 경험을 했던 이스라엘을 우리 앞에 내세우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할 때 하나님이 대적이 되어서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예수님을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사랑인가를 마음 깊이 느끼시고 그 사랑으로 항상 풍성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린당하는 성소 (사63:15-1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세상 그 어느 인간도 자신을 자신이 지배하지 못합니다. 혹 이 말에 대해서 반발할 분이 계신다면 지금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한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대로 실행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누군가로부터 기분 나쁜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 말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기분 나쁜 말이 내 머리 속에 남아있을 때 결국 마음 상하고 괴로움을 겪는 쪽은 자신이기 때문에 기분 나쁜 말을 잊어버림으로서 마음 상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쓰게 됩니다. 이것도 일종의 자기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들렸던 말이 내가 잊고 싶다고 해서 잊어지는 것입니까? 자신의 귀에 들린 말을, ‘이것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니까 잊어버리자’라고 한다고 해서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이럴 수만 있다면, 즉 자신이 자신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분 나쁜 말, 마음 상하게 한 말, 자존심을 상하게 한 말,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욕, 이러한 말이 들려오면 즉시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칭찬과 들어서 기분 좋은 말만 기억하고 산다면 그 누구와도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는 말 가운데 말도 안되는 말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누군가를 향해서 실컷 말을 해놓고는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중에서 기분 나쁘게 한 말이 있거든 잊어버리고 유익된 말만 기억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을 우리가 흔히들 사용하지만, 사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잊고 싶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존재는 따로 있습니다. 그 존재는 ‘사탄’입니다. 즉 세상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앞서 예로 들었던 것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인간은 자신에게 기분 나쁜 말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까? 기분 나쁘다는 감정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무시 받기 싫어하는 본성에서 ‘기분 나쁨’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기분 나쁨’은 가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데서 무시당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무시당함에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본래의 인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사탄에 의해서 죄에 빠진 인간에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선악에 대한 규정을 자신을 중심으로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되고 자신이 무시당하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를 악으로 규정하고 분노하게 되고 기분 나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자제하고 조절해 보려고 해도 한번 마음 상함은 풀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 사랑에 빠진 인간이 자신을 기준으로 선악을 규정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복음도 자신의 선악기준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복음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복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연히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님이고, 복음 역시 자신을 축복하기 위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더러움을 고발하는 복음의 참된 역할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고발하는 위치에 있는 복음을 복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그것은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변화되었다’ ‘거듭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변화나 거듭남은 도덕이나 윤리적, 또는 인격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도덕과 윤리 인격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자기 중심에서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는 자기가 기준 되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선악 개념에 의해서 행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세대 계층에 따라 도덕과 윤리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자신을 기준으로 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소가 유린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데, 그 내용은 대적에 의해서 주의 성소가 유린당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성소가 유린당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굽어 살펴달라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에 보면 “주여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굽어 살펴달라’는 말은 흔히 생각하기를 하늘에 있는 신이 나의 처지를 돌아봐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에게 굽어 살펴달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내가 지금 어렵고 힘든 처지에 빠졌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지 말고 이 어려운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미가 ‘굽어 살펴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굽어 살펴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도 아니고 자기 가정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성소가 대적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굽어 살펴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계속해서 보면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주의 열성과 능하신 행동도 주의 성소를 향한 열성과 행동이지 우리 개인의 삶을 향한 열성도 행동도 아닌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만 열성을 보이시고 행동을 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자기를 기준으로 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인간을 향한 열성과 행동으로 뒤바꿔 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하나님은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성과 행동을 인간을 향한 것으로 생각해 버리니까, 결국 ‘우리하기 나름이다’ 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은 그 열심을 보시고 우리에게 열성으로 다가오시고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게을리 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성도 행동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가 교회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하나님의 일로 간주하고 하나님은 교회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호응하시고 열성과 행동으로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무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무지함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생각은, 우리 교회가 일을 많이 하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축복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다만 인간들이 만들어낸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가 인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인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는 말을 한 것이지 인간의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일을 하나님이 일로 바꾸어 버린다면, 그 일에 동참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구실을 씌워서 믿음이 적은 자로 치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가 하고 있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거나, 공동체 의식이 없다거나, 사랑이 없다는 등의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의 일에 불려 나와 쓰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우린 다만 거기에 도구로서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일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쓰여지는 도구라는 것은 내 스스로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결정을 내리고 그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이것이 내 일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우리를 불러서 그 일을 해나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일입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일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일해오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교회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할 때 그 일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야 합니다. 가령 교회 건축을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할 때 그 일이 구약 때부터 등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지은 것을 가지고 교회 건축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무너지고 예수님이라는 완벽한 성전이 새롭게 등장을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건축물로서의 성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진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건축은 하나님의 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중요시하는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무너뜨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세워진 예배당을 무너뜨리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주의 성소가 유린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말하고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신자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하나님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구에게는 자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핑계 대고 자기 일을 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성경에 없는 것을 말하는 억지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선지자가 기도하고 있는 것은,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주여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며 주의 거룩하시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15절)입니다.

 

 

 

선지자가 굽어 살펴 달라고 하는 것은 주의 성소가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것입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가 기대하는 주의 열성과 능하신 행동도 유린당하는 주의 성소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주의 성소’를 지키는 것입니다. 성소는 성막입니다. 성막에서는 흠없는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어감으로서 부정한 자의 죄 사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성막을 세우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서 일어나는 피의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성소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성소에 계셨고 이스라엘은 성소로 나옴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소가 무너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피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피의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삶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하나님에게 성소가 유린당하고 있음을 호소하면서 주의 열성과 능하신 행동이 있기를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인 성전을 지켜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금 피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지가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성소는 누구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예수님이 성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곧 성소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는 성소인 우리가 대적에 의해서 유린당하는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소가 유린됨은 성소에서 벌어지는 제사의 정신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것도 성전 건물이 더러워지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성전에서 행해지는 피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인 우리가 유린당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님의 거룩하신 피로 인해서 생명을 얻은 바된 자로서 피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소를 유린하는 것입니다.

 

 

 

‘나는 흠없는 어린양의 피 때문에 공짜로 영생을 얻은 자다’는 이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성소를 지키는 것인데, 여전히 자기 사랑과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진 못한 인간으로서 주님의 피의 은혜를 내세우기보다는 못난 존재에 지나지 않은 자기 자신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자신을 내세운다면 그것이야말로 주님의 피로 이루어진 성소를 내 스스로 유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몸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피흘려 사신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성소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소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이 성소로서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거룩한 처소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항상 우리 속에는 세상에 대한 욕망에서 끊어지지 못한 옛사람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옛사람인 내가 성소의 대적이 되어서 성소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로서 옳은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의 피로 사신 성소가 옛사람인 나에 의해서 유린당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이사야의 기도는 이스라엘이 주의 길에서 떠나고 주를 경외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가만히 계시지 말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소가 굳게 세워지고 지켜지는 것, 이것이 이사야의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심정에 서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일에 쓰여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의 피로 사신 성소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에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성소를 유린하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주의 피로 사신 몸이 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를 내세워 그리스도의 피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는 이러한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사야 심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그 열성과 능하신 행동으로 우리를 치셔서라도 성소를 곧게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한몸의 편함보다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총이 더 귀함을 알기 때문에 나를 쳐서라도 성소를 굳게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쓰인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중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기 사랑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밀어 넣으면서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신으로 인해서 가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성전을 지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의 이름 (사 64:1-7)

99022108111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근심과 걱정거리가 많은 세상살이입니다. 한숨 쉴 일이 끊이지 않고 가슴을 치며 슬퍼할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인생입니다. 기뻐하고 춤출 수 있는 일들보다는 눈물 흘리며 애타할 일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면서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 발버둥 쳐보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세상의 굴레 속에 빠져 들어가면서 근심과 염려에 둘러싸인 인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묶이고 세상에 대한 한을 가슴에 쌓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니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에 더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부르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마음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한 집착에서 부를 뿐입니다. 내 인생만 도와준다면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노라는 거짓 맹세까지 해가면서 하나님을 불러 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고, 하나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탄식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교회부터 하나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소위 신자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모인다고 하는 교회라는 집단들이 하나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여러분이 믿는다고 하고 있고 창조주라고 부르고 있는 하나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허수아비 신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자기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여러분이 생각하고 마음먹고 행동하게 한 그 중심에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입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말하고 살아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돈 되는 것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말하는 삶을 살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즉 여러분을 움직이게 하는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향한 여러분의 탐욕이 숨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신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진심으로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크신 여호와로 자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싫고 좋은 것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이 기준이 되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나도 거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하게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말로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시고, 위대하시고, 크신 여호와라는 미사어구만 갖다 붙이면 뭐합니까? 하나님은 인간들이 내뱉고 있는 침발린 말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누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가를 보실 뿐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인생이 기준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사랑을 자기 인생을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복을 내려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을 세워놓고 보면, 인간은 결코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먼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고 흙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뭐 그리 귀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흙을 재료로 해서 만든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을 하겠습니까? 물론 흙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아끼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귀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가치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 피조물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을 때는 분명 인간은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 자체가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로 여김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가 죄를 지음으로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단지 흙일뿐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창조주에 비하면 먼지 같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지고 안개며 풀의 꽃과 같은 존재가 다만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간이란 존재를 크게 보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도 크게 바라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근심, 걱정이 함께 커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이게 큰 병이면 어떻하나'라는 걱정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병 걸리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병에 대한 근심 걱정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죽는 것이 당연하고 병 걸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병이 걸리면 '하나님, 죄인인 제가 병에 걸리지 않고 지금껏 건강하게 지내온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병을 죄인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분명 걱정 근심도 함께 작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을 '병 걸리는 것이 당연한 존재'라는 시각으로 보지 않고 '건강해야 해'라는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히 병에 대한 걱정근심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크게 보는 것과 작게 보는 것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작게 보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시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먼지 같은 존재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만약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놀라운 말씀으로 대하게 됩니다. 믿는 자에게는 결코 말씀에 대한 소홀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결코 말씀에 빠져 들어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생각과 자기 인생과 자기 탐욕에 빠진 채 살아갈 뿐입니다. 마치 7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라는 말씀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붙잡기 위한 삶에 치우칠 뿐입니다. 하나님 역시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을 부르고 붙잡으려고 할뿐이지 결코 말씀으로 나타난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현재 여러분은 여러분이 부르고 있고 붙잡고자 하는 하나님은 분명 성경에 계시된 참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찾는 하나님은 절대로 엉터리 신도 아니고 우상도 아니다. 나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을 부르고 있고 그분을 의지하고 있다'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의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섣불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하려고 하지 말고 다시금 말씀을 통해서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참된 여호와를 부르고 있는가?'라는 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주의 이름'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라고 말하고, 7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고' 이렇게 두 번 나오는데,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의 이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주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를 안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다'는 말이나 '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단지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의 모두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만약 그렇게되면 사도행전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예수'라는 이름을 부름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이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에는 특정 단어나 특정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얻는 길이 없습니다. 설령 40일 동안 금식기도하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불렀다고 해도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와 주의 이름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현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란 하나님입니다. 우린 보통 '주'라고 하면 예수님을 연상하지만 구약 때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는 것과, 주를 부르는 자가 없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분명히 그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제사 드리면서 여호와를 불렀고, 제물을 바치고 십일조를 하면서도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바라본 현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사야는 '여호와'를 불렀다고 해도 그것을 주의 이름을 부른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도 이미 구약 때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 하나님'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주를 부르는 것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다릅니다. 주의 이름이란 단지 이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 주의 모든 뜻과 의도가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즉 주가 있고 주의 이름이 있다면 주의 이름에는 주의 뜻과 모든 의도가 다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의 뜻과 주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아는 가운데서 부르는 부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제사하면서도 제물이 흘리는 피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외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여호와'를 불렀다고 해도 제사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율법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를 외면해 버린 이상, 그것은 주를 부른 것이지 주의 이름을 부른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이 땅에 와서 오직 주의 뜻과 주의 일이 무엇인가만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와 주의 이름이 어떻게 다른가라고 할 때, 주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이 땅에 시행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분명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에서 자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만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다'라고 합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일인 것으로 여겨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 그대로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그리고 '하나님' '예수'라는 이름을 수없이 불려지고 있지만, '주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습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일로 여겨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역시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자기 자신을 저주의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십자가'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입니다. 5,6절에 보면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 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이스라엘의 현실은, 주는 의를 행하는 자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는데 그러한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진노 아래 있고 도무지 구원 얻을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은 부정하고 인간이 내세우는 의도 다 더러운 것이며 잎사귀 같은 존재이고 항상 죄속에 살아가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국 죄로 인하여 소멸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죄, 즉 주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주를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사야가 인간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동일한 시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부정한자로 더러운 자로 잎사귀 같은 존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의 피를 보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작 제물을 잡고 피는 흘려지고 있지만, 그 피가 자신에게 필요하며, 자신은 흠없는 제물의 피로 인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치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저주의 자리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주님의 피의 은혜 때문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가장 귀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인간을 바라본 것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부정한 자로, 나의 모든 의는 다 더러운 것으로, 나는 쇠패한 잎사귀에 지나지 않은 존재로, 나는 죄악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도 없고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저주의 자리에서 피흘리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전부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를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구원을 얻는 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자신을 높게 보지 마시고 크게 보지 마시고 부정한 자 더러운 자로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 자연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온갖 죄로 가득한 더러움의 온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 자신을 작은 자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마음에서 저주의 자리에서 피흘리신 주의 이름이 불려지게 될 것입니다.

 

 

 

 

은혜의 관계 (사 64:8-12)

99022809112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생각할 때 범하는 실수는 '자기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세상이 창조되고 인간이 창조되어진 것은 인간의 요청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독단적인 생각이고 계획이었습니다. 즉 모든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형성되어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어떻게 지어졌든, 또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지어졌든,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답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처음의 상태만 그대로 유지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자신의 환경과 처지에 대해서 자기 요구를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인간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현재 나의 처지와 환경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고 있는가에만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자기 입장을 내세우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기에 자연히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살펴주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인도해주는 하나님을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자식과 아버지, 진흙과 토기장이,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말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보기를 좋아합니다. 진흙과 토기장이, 피조물과 창조주, 또는 9절에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라는 말과 같이 백성과 왕으로 보기보다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보기를 즐겨합니다. 그 이유는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살펴주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따뜻하고 사랑이 있는 관계로 연상되기 때문에 신자를 도와주고 힘을 주고 편한 길로 인도해주는 아버지 상으로서의 하나님을 상상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장이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결코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의미하는 4가지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보면 자식에 의해서 아버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서 자식이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진흙을 선택해서 자신이 의도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고, 창조주에 의해서 피조물이 만들어지고, 왕에 의해서 백성들이 유지됩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져서 하나님의 일에 초대되어진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해서 자기들의 일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관계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선택되고 부름 받은 자라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닥치면 자신의 일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잘 이해함으로서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참 신자의 모습을 찾아야 할 줄로 압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등장하는 한 사건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구약에 요나서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흔히 요나서를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에 말씀을 전해서 회개하게 하는 성경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니느웨에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을 어기고 도망을 치다가 물고기 뱃속에 삼키는 벌을 받은 것같이 하나님이 선교사로 가라고 할 때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역시 전혀 성경과 상관없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요나서에 대해서 차근차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방나라인 니느웨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요나는 명령을 어기고 배를 타고 다시스라는 먼 곳으로 도망을 치려고 합니다. 멀리 도망을 쳐버리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끊어지고 하나님의 명령과도 상관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성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닐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믿는 것이 귀찮고 하나님도 싫고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와 단절되면 하나님과도 단절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요나의 관계는 요나가 도망친다고 해서 끊어지고 멀어지는 관계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나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나를 선택하셨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 역시 우리가 신자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에 의해서 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 쪽에서 단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나오지 않고 도망을 친다고 해서도 하나님 편에서 만드신 관계는 결코 포기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된 우리에게는 놀라운 사랑이고 은총입니다.

 

 

 

요나가 배를 타고 도망을 치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하자 선장은 신에게 죄지은 자가 있으면 나오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요나가 바다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삼키우게 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자신이 아무리 도망을 쳐도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끊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끊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셨으니만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그들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이스라엘 내에 선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내에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이지 결코 이스라엘이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것을 요나가 알았다면 이방인인 니느웨에 말씀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된 것이지 이방 민족에게 구원은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을 치게 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면서 '하나님'이란 이름을 불렀을지언정 제사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전혀 몰랐습니다. 제물이 흘리는 피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그냥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만 부르면 다 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은 예배를 드리면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자신을 진심으로 부정한 자로 바라보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자신을 부정한 자로 보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깨끗한 자요 마땅히 구원받을 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로서 제사 드리고 제물만 바치면 다 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오해였고, 이러한 오해는 지금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면서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이름만 부르면 신자로서 할 일을 다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 그대로이고, 또 요나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라는 관계는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라는 의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해서 끊어지는 관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에는 피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단절될 것으로 여기고 불안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에게 두 번째 명령이 주어집니다. 욘3:1-5를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외치라고 명령한 것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 말을 외치면서 이제는 40일만 지나면 니느웨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할 결과가 일어납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것을 본 요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욘 4:1을 보면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요나는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햇빛이 비칠 때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을 요나가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벌레를 보내서 박넝쿨을 시들어 버리게 했을 때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성명을 냅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수고도 아니하고 기르지도 아니하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박넝쿨을 그렇게 아끼는데 하물며 큰 성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2만 여명이고 육축도 많이 있는데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는 말씀으로 요나서가 끝납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아끼시고 생각하시는 나라는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에 두고 회개하는 나라라는 것을 요나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사랑과 은혜의 차원에서 생각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끼시고 생각하시는 나라는 항상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나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한 자, 더러운 옷, 쇠패한 잎사귀로 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나라를 아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니느웨를 도구로 삼아서 요나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은혜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은혜란 버림받고 무너져야 마땅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이지 결코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죄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항상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을 인식할 수밖에 없고 언제나 죄에 대한 회개로서 하나님 앞에 나올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것을 알았기에 9절에서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12절에서도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한 성이 광야가 되고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고 성전이 다 불에 타버린 그 지경을 당했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는 관계이지 이스라엘이 잘하고 못하고를 가지고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식이고 진흙이고 피조물이며 백성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지금'입니다. '어제 잘 믿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조금 잘한 것 같은 행동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진심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토기장이로, 창조주로, 왕으로 바라보는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과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날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늘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패역한 백성 (사 65:1-7)

99030710113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지라 너희의 죄악과 너희 열조의 죄악을 함께 하리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먼저 그 행위를 헤아리고 그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누가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들이 추측하고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천국은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들 멋대로 '이렇게 하면 천국 가겠지' '이런 사람이 천국 가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코다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인간이 세운 기준에 의해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에 의해서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세운 기준을 따라가는 것은 오히려 천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모든 판단과 기준을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진실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거룩하고 깨끗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을 한다는 것은 결국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인간이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습성 때문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속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께 강조했던 말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에게 잘 속고 살아갑니다. 속으면서도 속고 있는 줄을 모릅니다. 자기를 자기가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 나오는 사람 치고 '하나님을 모른다' '예수를 안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믿음이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 '없다'를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평가합니까? 백이면 백 모두가 '자기 행위'입니다. 기도든 성경 읽기든 헌금을 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기독교라는 종교와 연관된 행위를 많이 할 때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행위가 소극적이거나 없을 때는 '믿음이 없다'고 평가합니다. 이것이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우린 보통 내 마음은 내가 잘 안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고 나서도 '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형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기도를 진실된 것으로 평가합니다. 헌금을 하고 나서도 '나는 헌금한 것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헌금을 진실 되고 믿음이 있는 헌금으로 평가합니다. 그 누구도 '나는 더러운 마음으로 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자기를 자기가 믿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결국 '내 마음 + 행위 = 믿음'이라는 공식아래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된 마음으로 했다'는 이 생각이 자신의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된 마음이란 자기가 부인된 마음입니다. 자기가 부인된 마음이 자기 행위를 바라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자는 천국 역시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생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마지막때에 모든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따라서 나 스스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고 확신했는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상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우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고 해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항상 긴장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내가 한 행위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 하나님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성경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과 부딪히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신앙생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다는 열의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신앙생활에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성경을 대하게 되면, 성경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인가?'라는 것을 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하나님이 노를 일으키시고 보응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대하면서 자기 신앙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노를 일으키신다. 이것은 노를 받을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노를 받을만한 행동을 한 것이 뭔가? 기도를 적게 한 것인가? 성경 보는 것을 게을리한 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노를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대책을 마련하게 되고, 그 대책은 노를 받을만한 행동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노와 보응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생각을 좇아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 65:2-3을 보면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사람을 패역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 패역한 백성이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따르면 되는데, 성경을 꼭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한분에게만 관심을 둘 때 이해되어집니다. 자기 신앙에도 관심 두지 않고, 교회에도 관심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관심 둘 때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교회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뭘 해도 교회를 위해서 하게 되어있고, 자기 신앙생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신앙생활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즉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자연히 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생활을 위해서 하려고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를 안하는 것 자체를 신앙생활의 퇴보로 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만 관심 둘 때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백성은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하나님과 신자는 은혜의 관계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요나를 예로 들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다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요나는 자기편에서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요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멀리 도망을 칩니다. 흔히 자기 신앙생활에 의해서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쪽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잘못하면 멀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의 신앙생활, 다시 말해서 교회생활에 의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생활하면 하나님과 가깝게 있는 것이고, 기도생활에 게으르면 멀어지는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낙심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생각이고,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로 행하는 패역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보여준 것은 '은혜의 관계'입니다. 인간편에서 아무리 도망을 치고 죄가운데 있다고 해도,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놓지 않고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붙들려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1절에서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1절의 말씀은 애당초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없고 또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했던 자들이 하나님께 관심을 두게 되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르지도 아니했는데,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스스로 찾아오신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날 때부터 하나님을 알아서 지금 하나님을 부르고 찾는 자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고, 그 결과는 지옥 가는 것이었는데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부르고 찾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을 부르고 찾고 구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결과이고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은혜 때문이지, 우리들이 기도한 결과도 아니고 성경을 읽었기 때문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기도를 안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안보면 믿음이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결국 '패역한 백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들이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고 내 멋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유지된다면 은혜만 붙들면 되는데, 왜 '내가 기도하는가? 성경을 부지런히 보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까? 은혜를 안다면 자연히 은혜에 감사해서 기도가 나오게 되고, 은혜를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성경을 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롬 8장에 보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하고, 또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성령님이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그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우리들의 교회생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내가 기도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믿음이 떨어져서 그렇다느니, 신앙이 게을러지고 나태해졌다느니'라는 생각에 빠져서 낙심을 한다면, 우리의 믿음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기도하시는 성령님과 예수님의 은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기도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들이 좋은 교회를 만들도록 하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요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중에 15절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일을 안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악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도는 이 세상에 남겨놓은 성도들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나왔다면 그것은 누구 덕분입니까? 분명히 예수님의 기도 덕분이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오직 내 생각만 하면서 내 멋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언젠가 부터 하나님을 찾아 나오면서 나를 생각하기 보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로 나오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나를 붙드시고 지켜주시는 은혜의 결과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잊고 산다면 그 자는 단연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불선한 길을 행하던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보응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이 예수님의 피 덕분에 보응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그 피를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기도하십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깨달으셨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교회 일도 아니고 내 신앙생활도 아니고 오직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는 신앙고백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을 때, 여러분이 가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고 하면서 자기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입니다. 즉 자연히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산다면, 나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고 낙심하거나 기뻐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내 생각대로만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패역한 백성이고 노를 일으키는 자에 지나지 않는 나를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 되지 않습니까? '날마다 감사만 하고 살아가란 말이냐?'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자신을 예수님을 믿는 자로 바라보기 때문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식상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내 생각을 앞세우고 내 멋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을 하신다면 날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내가 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동을 보게 되면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거룩과 비거룩으로 구분하는 습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5절에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고 말씀한대로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는 구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을 보면 구분이 나오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행동을 보기 때문에 '이 교회가 저 교회보다 낫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낫다'는 구분을 하게 되고, 5절에서는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으로 구분합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자기 행동을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택한 자 (사 65:8-16)

990314111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혹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 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이러므로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또 너희의 끼친 이름은 나의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용서란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입니다. 피해를 입은 자가 피해를 입힌 자를 향해서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그 어떤 문제도 삼지 않겠다는 것이 곧 용서입니다. 따라서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를 대신해서 용서해주겠다고 나설 수는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면 그 자격은 오로지 피해를 입은 자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다면, 그것은 곧 신자인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가해자이고 하나님은 피해자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서 피해를 입으신 것이 있으시기 때문에 용서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우리로 인한 피해가 전혀 없으시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용서한단 말입니까? 신자인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로 살아가고 있다면, 용서받은 자로서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단지 '용서해달라'는 말만 남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용서 전문가'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잊고 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용서를 말하면서도 우리들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피해를 입으신 것이 뭐냐?'라고 반문을 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입으로는 용서를 말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미안한 마음도 없고 부끄러운 마음도 없이 당당함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형식적으로만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들이 대부분 어떤 것들입니까? '하나님 새벽기도를 못나옵니다' '하나님 지난 주일에 예배를 빼먹었습니다' '하나님 십일조 생활을 못합니다' '하나님 제가 아무개에게 화를 냈습니다' 이런 종류의 내용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질문을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은,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고 그 피해 입은 것에 대해서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새벽기도 못나오는 것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새벽기도를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이 피해를 입은 것이 뭔가?'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용서를 구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십일조를 안낸 것 때문에 하나님이 피해를 입은 것이 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새벽 기도를 안하거나 십일조를 안한 것 등의 내용을 가지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내용으로 회개를 하시려거든 얼마든지 하십시오. 그러나 '과연 내가 하나님에게 어떤 피해를 입혔느냐?'를 알고서 회개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신자들의 회개라고 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 죄를 알고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모습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부분이 회개하기 위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회개를 위한 회개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징계를 피해보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기도 안하고, 성경 안보고, 십일조 안하고, 주일 안지킨 것 때문에 하나님이 벌주는 것은 아닌가?'하는 조바심과 불안감에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벌을 피하기 위해서 미리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도로 용서를 구하고 회개를 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가 담겨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주님의 피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아는 자에게만 은혜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자기 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회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둔 회개는 이미 회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패역한 백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패역한 백성을 '자기 생각을 좇아서 불선한 길로 행한 자'(2절)로 말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서 하나님께로 인도해 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서 하나님과 가까이 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기 생각을 좇아서 불선한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불선한 길로 행한다는 것은, 내 편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을 열심히 함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들이 자기 생각을 좇아서 불선한 길로 행할 때, 하나님은 어떤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시를 받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도 나를 잘 봐주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세계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패역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시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심판하시고 보응 하십니다. 누구도 심판과 보응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피할 수 없는 심판과 보응 속에서 살아남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너진 은혜 속에서 새롭게 꽃피우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혹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포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열매를 거둘 때 썩은 포도는 버리지만 썩지 않고 즙을 간직하고 있는 포도는 잘 보관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썩어버린 이스라엘 속에서 즙을 그대로 간직한 열매를 찾을 때 그 열매는 소중히 보존을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과 보응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존재가 남아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서에서는 남은자라고 말합니다.

 

 

 

9절에 보면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씨를 내며'라고 말하고,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낸다'고 하고, '나의 택한 자가 그 기업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씨, 기업을 얻을 자, 하나님의 택한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9절 마지막에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고 한 말씀을 보면 9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택한 자가 하나님의 기업을 얻었는데, 하나님의 종들이 그 기업에 거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에서 살아남을 자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는자 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습니까? 그것은 심판과 보응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이 택한 자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보응에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택한 자를 의지하는 것임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택한 자 안에서 생명을 얻을 하나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택한자이신 예수님을 앞세우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택한 자를 바라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따로 택한 자를 만들어서 그것을 앞세우고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열심히만 섬겨주면 좋아하실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열심을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예수를 만들어 세워놓고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해서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게 전혀 기쁨이 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 하나님이 기뻐하신 아들을 기뻐하고 그 아들만 의지하고 나오는 신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불러도 대답지를 않고, 하나님이 말씀해도 듣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하나님이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음성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듣지도 않고 하나님의 음성도 아닌 것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우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보응을 피할 수 없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때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처럼 생각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착한 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세워지는 것입니까? 우리가 교회 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은혜의 세계가 세워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알고 은혜로 사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가장 기쁨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했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모이는 그 무리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내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행동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흐뭇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행동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도 기뻐하시겠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 1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져온 수송아지와 수염소를 기뻐하지 않고 그들이 바친 제물, 제사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예배, 내가 드린 헌금, 내가 한 착한 행동을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12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즐겨하지 아니한 일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예배나 기도나 성경 읽는 것 착한 일 하는 것들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즐겨하시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때문에 '그렇다면 예배도 드리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말고 착한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라는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 것을 기뻐하시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려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우기는 것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이도 기도할 수 있고, 예수 없이도 헌금하고 착한 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님만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 속에 예수님만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오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고 피를 말하면서도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갈수록 자신에게 매이게 되고 결국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티를 선한 행동을 하고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오직 그 마음이 예수님의 은혜로만 채워진 사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향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나도 다 떠나서 오직 은혜만 내미는 사람이 마지막 때 살아남는 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사 65:17-25)

99032112115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이 생각하는 복의 기준은 '커지는 것' '많아지는 것'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보다 낮아지고 적어지는 것은 저주나 재앙으로 생각합니다. 복과 저주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종교, 인종, 환경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 안에서도 비록 믿는 신은 다르고 교리도 다르고 종교 의식도 다르지만 복에 대한 개념만큼은 일치합니다. 그 이유는 비록 종교, 인종,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모든 인간의 출발점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 출발점은 '죄'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로부터 출발합니다. 종교가 다르고 인종, 성격, 국가가 다르다고 해도 죄는 똑같습니다. 죄가 똑같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고 목표하는 것도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현재보다 더 발전되고 번성하고 나아진 환경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자기 목표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신 환경 속에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자기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고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같이 되는 것', 즉 현재 자신보다 좀 더 능력 있고 힘있는 인간 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였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항상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욕구에서 나오는 인간의 행동은 자연히 자기 발전과 번성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보다 더 많은 것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복'이라는 이름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이 천국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싶어하고 이루고 싶어하는 것들이 풍족하게 주어질 때 그것을 복으로 여긴다면, 그러한 복으로 충만한 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한 곳이 천국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결코 천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 불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만족이 있겠습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부족한 것이 없고 좋은 것으로 가득찬 곳이 천국이라고 해도 만족이 없다면 기쁨과 감사가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곳을 천국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천국은 인간이 변화되어서 가는 곳이기 때문에 욕심이 없는 인간으로 들어간다. 그러기 때문에 불만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인간이 욕심을 가진 채 천국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모순이 발생합니다. 욕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바라보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더 가지고 싶어하거나 더 높아지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에게 무엇이 얼마가 주어져 있든지 부족을 느끼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심이 없는 천국에 '무엇이 있다 없다'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흔히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고 할 때 그 상을 남보다 더 많고 귀한 것을 받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데, 욕심이 없는 곳이고 있다 없다라는 개념도 없는 천국에서 남보다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 사람들이 천국을 '살기 좋은 나라' '부족한 것이 없고 내가 원하는 것들로 가득찬 나라'로 이해하는 것은, 죄에서 출발된 세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항상 세상을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에서 마음껏 누려보지 못하는 불만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가득찬 천국'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나쁜 습성은 복을 기대할 줄만 알았지 주어진 복에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지고 채워진 것에 대해서는 복으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기쁨과 감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불만이고 불평입니다. 세상을 잊고 살려고 해야하는데 오히려 세상에 깊이 빠져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을 물리쳐 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천국이 어떤 곳이냐?'에 대해서 '천국은 세상을 다 잊어버린 곳이다'라는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17절에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데 그 때가 되면 이전 것, 즉 지금의 세상은 기억하지도 않고 마음에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가졌던 마음 상함과 상처들, 염려와 근심거리였던 것들, 미워하고 시기했던 모든 것들, 그런 세상에 대한 기억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용서라는 것이 없습니다. 용서란 가해자에 의해서 피해를 입은 자가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그냥 덮어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천국에 용서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 되고, 자신이 피해를 입은 사실에 대해서 기억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세상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나라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기억을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만으로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채워진 천국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20절에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는 말씀을 보면 장수를 말합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백세에 죽는 것을 아이가 죽은 것으로 여기고 백세가 못되서 죽은 것은 저주 받았기 때문에 일찍 죽은 것처럼 여길 정도로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21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자기 손으로 지은 집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살 것이고, 자기 손으로 농사 지은 것은 자기 입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25절에 보면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고 뱀은 흙을 먹고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천국도 별 것 아니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오래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아도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한 채 오래 사는 것을 원합니다. 또 지금은 자기 손으로 번 것은 자기 것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고, 이리가 양과 함께 먹든지 말든지 사자가 짚을 먹고 살든 말든 그것이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히 8:5절에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 즉 세상의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모형이고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18,19절에서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씀하는 예루살렘도 하늘의 예루살렘의 모형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모형은 실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땅에 있는 것을 실제로 여기면 안됩니다. 땅에 있는 것은 장차 하늘에서 살아갈 삶의 정신과 원리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말하는 복에 대한 이야기를 실제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오신 후의 복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원리를 그대로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구약에서 말하는 복과는 수준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애통하는 것이고, 온유한 것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고, 마음이 청결한 것이고, 화평케 하는 것이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약속한 복은 재물이 채워지는 것이고 높임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되고 높임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같이 빛나는 존재로 변화되고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을, 세상에서 영광을 얻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통해서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에서는 세상에서 높임 받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통해서 장차 메시야가 오심으로서 이루어질 새 나라에서의 영광과 영화를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지 그것이 실제 우리가 누릴 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복의 수준이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인간이 행하는 일에 복을 주고 잘되게 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신 뒤로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복은 우리가 하는 일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일을 잘해서 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이 하신 행동이 우리에게 복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얻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이러한 말들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되거나 소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복으로 다가온다'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다가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머리와 마음에 세상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말씀을 듣는 자리에 나왔다고 해도 세상을 잊어버리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근심 걱정거리가 있으면 그것을 고스란히 마음에 안고 나옵니다. 돈 걱정, 자식 걱정, 이런 저런 여러 가지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말씀을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당장 내 마음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우리 하는 일에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지 '천국으로 인도한다'거나 '예수님이 하신 일이 복으로 다가온다'는 말씀은 현재 자신의 형편과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천국 이야기는 자기 마음에 멀어질 수밖에 없고 현실적인 문제에만 귀가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세상을 잊지 못하고 항상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진 채 살아가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근심과 걱정거리를 하나님이 덜어주기만을 원하고만 있는 것입니다. 요즘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날 염려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합니까? 직장에 계속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기도할 것입니다. 남들은 다 쫓겨나도 나만큼은 쫓겨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남을 누르고서라도 나는 살아야 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예루살렘의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은 강자가 살아남는 원리와 원칙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누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은 강자와 약자가 없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25절의 말씀입니다. 내 손으로 지은 집에서 내가 살고 내가 농사 지은 것이 내 입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당시 이방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많이 받았던 이스라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힘에 의해서 눌림 받고 살았던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원리는 강자와 약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세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이루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이루어질 천국이라면,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에게서 바로 이러한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누리려고 하는데, 천국은 그리스도의 피를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도 천국 같은 교회를 누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로 교회로 모임으로서 다른 형제들에게 천국을 보여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심령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피의 정신을 담고서 모이는 교회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란 (사 66:1-4)

990328131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신자는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항상 긴장감과 심각함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아주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어 버릴 만큼 중대한 문제가 있다면 과연 그것을 소홀히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앙, 즉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문제는 하나의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가 아닙니까? 신앙생활이란 단지 내 마음에 드는 종교를 하나 선택해서 그것을 옳은 것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단지 교회를 다니는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임을 아셔야 합니다. 사실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교회를 다니는 정도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서 소홀히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즉 신앙생활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하나님께 덜미를 붙잡힌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친구에게 붙들려서 다닐 수도 있고, 부모님 때문에 다닐 수도 있습니다. 또 내 스스로 좋아서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하나님께 덜미를 붙들린 상태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그 마음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신앙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중요한 인생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중대한 인생 문제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취직을 하고, 돈을 벌고,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들을 중요한 자기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단지 자기 문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인생문제 때문이 아니라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인 저는 바로 그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이 마지막때의 운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인생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분명 제가 드리는 말씀에는 흥미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께 붙들려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이고, 신앙이란 세상의 인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는 생각으로 나오셨다면 분명 제 말은 중대한 말로 들려질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다시 한번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긴장감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과연 바른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다시 점검을 하시고, 만약 내가 가는 이 길이 바른 신앙의 길이고 생명이 주어지는 길이라면 어떤 힘든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결코 신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3절에 보면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라고 말씀합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난처한 점은 기존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고 알고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른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오늘 본문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목사에게 상당히 난처한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정성을 완전히 묵살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간의 정성을 전혀 받아주시지 않고 인정하시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의 방법은 제사이며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스스로 자각했고 또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임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주일이면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 신자임을 자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의식에 온갖 정성과 열심을 포함시키기에 몰두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관심을 두고 몰두했던 부분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배 의식에다가 자기들의 신앙과 정성을 집어넣어서 예배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즉 의식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고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거나 영광 돌릴 수 없음을 모른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도 제사하고 제물을 잡으면서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 것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소를 잡아서 바치는 것은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어린 양으로 제사하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은 것과 같고, 예물은 돼지의 피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자신들과의 의식에 차이를 두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와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죄를 짓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아실 것입니다. 분명히 골 3:5절에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탐심이 없는 인간이 있습니까? 그리고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이 있습니까? 모두가 우상을 섬기고 있고 죄가운데 살아가는 인간들인데 그런 우리를 이스라엘과 구별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제사나 오늘 우리들의 예배에는 전혀 차별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과 연관지어서 말하기도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복을 기대하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에 치우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온통 복을 외치다 보니까 노골적으로 복을 외치는 교회에 대해서 반발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구하는 것은 유치한 신앙으로, 복을 구하지 않는 것은 차원 높은 신앙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복을 기대하고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할뿐이다'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헌금과 예배 행위에 대해서 정당성과 의로움을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말이 듣기에 따라서는 옳은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행위를 복과 연결 지어서 말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외칠 때 '나는 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신은 옳은 신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정당성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복을 기대하지 않고 한다고 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그가 복을 기대하지 않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까? 그리고 이사야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제사와 절기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이유가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제사와 절기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1:17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선행을 배우는 것이고, 공의를 구하는 것이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약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제사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하나님께 붙들려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약한 자들과 자신을 동등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나 제사라는 것은 물질이나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를 예배라고 하고 자신이 제물 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따라서 복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실 사람이 복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복을 기대할 필요가 없을 만큼 생활에 여유가 있고 별 문제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별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특별히 아쉬울 것도 없을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복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고살기 힘들고 병들어 고생할 때 그러한 고생에서 벗어나기를 고대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복을 기대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는 생각의 잘못된 점은 나의 예배가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복을 기대하지 않는 그 자체를 의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약자로 바라보는 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약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약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뺏긴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재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믿음, 정성, 사랑, 이런 모든 것까지 하나님께 뺏겨 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내것인 줄 알았는데 믿음 역시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결국 내 믿음 가지고 예배하고 내 믿음 가지고 헌금하고 내 믿음 가지고 봉사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로 하여금 예배하게 했고 헌금하게 했고 봉사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믿음을 하나님께 뺏겨 버린 상태입니다. 믿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내 믿음'이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를 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을 자랑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약자입니다. 사랑 역시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사랑이 나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려야 합니다.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약자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빼앗겨 버린 상태의 사람이 약자이고, 그 마음을 가리켜서 가난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런 신자를 하나님이 권고하신다고 합니다. 권고하신다는 것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면서 끝까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2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상태이고 이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 심령에 통회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려워 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것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마치 바람이 가득찬 풍선에 바람이 모두 빠져 나가버리는 것 같이,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빨려 나가버리는 경험을 한 사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일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더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힘을 빼앗아 가버리는 일을 합니다. 그것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말씀에 두려워 떠는 삶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자기들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지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고 합니다. 세상 모두가 다 하나님 아래 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집을 짓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하나님 아래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그런데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의식과, 특정한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것으로, 자기 힘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이고 멸망의 모습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소위 우리가 지금껏 옳다고 생각했던 신앙생활이란 것들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찾지 못하고 단지 우리 식으로 예배드리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화나시게 할뿐입니다. 저는 지금 예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어떤 식으로 바꾸든 상관없이 우리들의 마음이 약자의 마음이 아니라면 그 예배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예배가 되버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인 모습에 속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빼앗긴 자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서 말씀에 떨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바른 삶이며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고 마지막 때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흔적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 (사 66:5-14)

99041114117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거나 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하거나 영광 돌리고 싶어하는 그 말에는 시비 걸 이유가 없지만,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 돌리겠다는 분들에게 분명하게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쏟고 있는 수많은 노력과 정성들이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참된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교인으로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하고 싶겠지만, '하나님'이라는 이름 석자를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면 얼마든지 그런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느냐?'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시되어진 참된 하나님인가?'를 점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옳은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되는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교회를 다닌 것과 다니지 않은 것, 봉사를 많이 한 것과 많이 하지 않은 것, 이런 것으로 진짜와 가짜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진짜와 가짜의 여부가 판명됩니다. 그렇게 되면 평생을 교회를 위해서 살고 교회를 다녀 놓고도 지옥 가는 불상사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을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엄포를 놓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들이 수많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쌓았던 교회의 연륜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의지할 것이 염려될 뿐입니다. 수십년 세월을 교회를 다녔고 기도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일했던 자기의 연륜을 믿고 의지할 것이 걱정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연륜을 믿어버리면 절대로 자신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기준은 십자가인데, 정작 자신은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믿은 기준을 자신의 신앙연륜에 둬버린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결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오래 다녔을수록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을 수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목사인데, 장로인데, 교회를 수십년 다녔는데, 십일조 잘하는데, 봉사 열심히 하는데, 기도 많이 하는데, 성경 100번 통독했는데, 이러한 수식어들이 여러분의 믿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져오게 할 수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자기 몸에 치렁치렁 장식품을 달고 나오려고 하면 안됩니다. 자기를 멋있게 보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자기 몸에 달려 있는 여러 가지 장식품들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은 다 떼어 내버리고 오직 한가지, '하나님, 나는 더러운 자입니다'라는 그것 하나 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목사 장로라는 것까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아무 것으로도 자기 자신을 가리지 않고 투명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발견되어지는 것은 자신의 더러움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 교회들의 모습은 이러한 과정은 속성으로 마쳐버리거나 기본적인 사항으로 인식하고 건너 뛰어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보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으로 그쳐버립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이 정도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여겨버립니다. 진심으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것까지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앎입니다. 자기 자신을 피조물로 인식한다면 분명히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현재 자기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불평을 하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좋은 성전을 지어 바치고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물론 제사 제물 등이 섬김이 되겠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사나 제물 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겠다는 발상은 애초에 갖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묵살해 버린 채,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신다' '십일조 하면 하나님이 복주신다'는 말로서 교인들을 미혹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종교 장사꾼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의 종교 상식을 통해서 답을 내리려고 하지 말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금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7-9절을 보면 "시온은 구로 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자식을 낳았다는 말입니다. '시온은 구로 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세상 상식과는 전혀 다르게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 중에 아이를 낳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남자는 노동을 하고 땀을 흘려야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고통 속에서 아이를 잉태하고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세상 그 어떤 인간도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시온은 구로 하기 전에 생산하였다고 합니다. 구로라는 말은 고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또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즉 시온이 고통과 상관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을 겪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9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이 잉태케 하셨고 하나님이 해산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낳은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낳은 자식은 고통 속에서 나온 자식이고,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잉태하게 해서 해산하게 한 자식이 있는데, 이들은 고통과 상관없이 낳은 자식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고통과 상관없이 낳았다는 것은 죄와 상관없는 자식이라는 말이 됩니다. 결국 세상의 인간은 둘로 구분이 되는데, 하나는 인간의 자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할 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바로 나를 낳으신 분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자녀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단지 자녀로서 받을 혜택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자녀로서 받아 누릴 것에만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자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녀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아버지께 기쁨이 되는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아버지께 기쁨이 되어 드리려는 마음도 없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도 없이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 노리고 있다면 그것을 과연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 이전에 자녀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순종했는가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생각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내 멋대로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젖으로서 우리를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젖을 먹이시고 키우시고 지키십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낳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이를 정성껏 먹이고 입히면서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낳아서 기를 때 부모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자식이 부모가 바라는 대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우리를 젖으로 먹이시고 키우실 때 그 기쁨은 자녀가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존재할 때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광 돌린다고 말합니다.

 

 

 

자식이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자기 하고싶은 대로하면서 살아가고 싶지만, 나를 낳아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면서 키워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을 자제하고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자식의 옳은 태도라면,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도 역시 내 마음대로 하면서 세상을 살고 싶고 내 기쁨과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싶지만 그것이 나를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반대된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쫓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 이것이 진짜 신자,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를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의지하는 자녀된 자의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10절에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이,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려면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은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항상 나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힘쓰십시오. 나를 먼저 생각해 버리면 나를 우선으로 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게 되면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가 안되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잘못을 알게 되는 것이고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 즉 하나님의 자녀에게 나타나는 손은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위로하는 손이고 사랑의 손이며 동시에 잘못됨을 징계하는 징계의 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에게는 오직 진노의 손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지는 자녀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산다는 것이 무척 부담되는 일이고 고통이 되는 것임을 인정합니다. 내 기쁨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 기쁨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조건이 달라져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세상의 것을 통해서 기쁨을 누렸고 또 그러한 기쁨을 원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이 자녀 되게 하신 자라면 분명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여길 수 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 아님을 아셨습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멸망의 세계에서 나를 자녀로 낳아주셔서 하늘을 소망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와 사랑을 아신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기쁨으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하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심 판 (사 66:15-17)

99041815118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당할 자가 많으리니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것과 믿는 자로 산다는 문제를 굳이 구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로 사는 것이 곧 참된 믿음의 본질이기 때문에 사실 믿는 자로 살아가는 '행함'이라는 면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믿는 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없이 믿음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과 믿는 자로 사는 것을 구별하여 말씀 드리는 것은, 현대 교인들이 믿는 것과 믿는 자로 사는 것에 대해서 많은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던가,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계시임을 믿는다던가,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리신 분이다는 것을 믿는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가면 그것을 곧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에는 분명 믿는 자는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일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자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로 산다면 믿음의 모습이 삶에서 그대로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이 삶에서 보여져야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은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마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굳게 의지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하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삶에서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모습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믿음 없이 살아가는 연약한 우리 자신들뿐입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평소에는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다가도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금방 마음이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 모두의 실체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연약한 인간이 자기의 연약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관심은 항상 내 몸에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빨리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만 가득차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지를 못합니다. '평소에는 믿음으로 산다고 자부했고 말씀에 굳게 서 있다고 자신했는데 막상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내가 얼마나 믿음이 없고 연약한가가 드러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날마다 염려하고 걱정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나의 연약함까지 강하신 예수님께 맡겨 버릴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산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있으며, 세상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힘든 상황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한 믿음을 소유해서 스스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강한 힘이 있다고 생각이 되면 필연코 그 힘을 의지하게 되고 힘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강한 믿음을 소유한 신자를 원하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강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자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강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없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 필요에 의해서 믿음 없음이 드러나는 상황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약함을 보이는 것을 아주 자존심 상해합니다. 항상 남들에게 강한 자로 보여지기를 원하고 힘있는 자로 남아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믿음이 강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하지 믿음이 약하다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간은 연약하다'거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라'는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그 말을 이해한다고 해도 아마 부족을 고백하면 하나님이 강함으로 채우신다는 식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한 힘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강한 믿음'인 것입니다. 강한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강한 척할 뿐입니다. 따라서 가장 신자다운 모습은 강한 힘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힘없음과 약함을 솔직히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약함을 드러내고 강하신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내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의 선악 논리가 기준이 아닙니다. 인간의 선악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선악 기준이 있습니다. 인간의 선악 기준으로 본다면 약한 믿음보다는 강한 믿음을 가진 자를 더 칭찬하시고 상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가 자신의 약함을 알고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는가를 보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당할 자가 많으리니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66:15-17)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심판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가를 명백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돼지고기를 먹는 자, 가증한 것을 먹는 자, 쥐를 먹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을 하늘에서 불을 타고 내려와서 심판해 버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물론 여러분 가운데 쥐를 먹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북한과 같이 먹을 것이 없어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풀뿌리로 죽을 끓여 먹는 상황이라면 쥐를 먹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쥐를 먹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먹습니다. 그렇다면 돼지고기를 먹고사는 우리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왜 먹는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음식에 대한 법이 있습니다.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될 것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먹어도 되는 것은 정결한 것이라고 하고 먹어서는 안되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음식을 구별하십니까?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이 나오는데, 네발 달린 짐승을 구분할 때는 되새김하는 것과 굽이 갈라진 것은 정결한 것이고, 이 둘 중에 하나라도 위배된 것은 부정한 것으로 구분합니다. 되새김하는 것은 한번 들어갔다고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즉 거듭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새김입니다.

 

 

 

그리고 굽이 갈라졌다는 것은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의로운 자로서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되새김을 하고 굽이 갈라진 짐승입니다. 그런데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짐승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돼지고기를 먹는 자, 가증한 것을 먹는 자, 쥐를 먹는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실제로 돼지고기를 먹고 구약에 더러운 짐승으로 구분한 것을 먹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돼지라는 짐승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더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증하고 더럽다는 것은 세상과 밀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곤충도 먹을 수 있는 것은 땅에서 뛰어 오르는 곤충입니다. 그러나 땅에 기어다니는 것은 가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도 역시 땅에 있는 죽은 시체를 먹고 살아가는 것은 가증한 것으로 여깁니다. 물고기도 진흙에 묻혀 살아가는 것, 즉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밀착되어 살아가는 것은 가증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 모두가 세상에 밀착되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으로 구분하신 율법 속에 장차 오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차 오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건져내시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례입니다. 세상과 밀착되고 세상의 사고방식에 혼합되어 살아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문제에 대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교회에서만 적당히 하면 된다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자는 심판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과연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심판의 기준을 세우셨지만 신약에 와서는 고전 16:22의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대로 주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가 심판의 기준으로 드러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세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을 존재입니까 아니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 모두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선악 기준을 자신의 착한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착한 행위를 의로 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착한 행위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세상 사고방식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심판 받을 모습입니다. 자기 행동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세상 법칙은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누가 주를 사랑하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를 사랑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한 대로 주를 사랑한다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이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은 누구를 바라보게 됩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도둑질하고, 교회도 잘 안나오고, 기도 안하고, 성경 안보는 그런 사람들 때문인 줄 알았는데, 자기 자신의 본질을 알고 나니까 바로 나 때문에 주님이 못박히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주님이 못박히신 것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이 마음 깊이 우러날 때 그것이 주와 함께 못박히는 것이고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와 함께 사는 자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가 나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의는 철저히 사라져야 하고, 내 의가 죽어버린 그 상태가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세상과 구별된 사고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의 약함과 더러움을 모르고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 사고방식을 향하여 떨어집니다. 그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피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용납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연약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를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누가 세상 사고방식을 교회로 끌고 들어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온 힘을 다해서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고 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지를 잊지 말고, 이것을 삶을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에서 열방으로 (사 66:18-21)

99042516119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교인들이 기도할 때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 저희 교회와 함께 해주시고'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마치 '함께 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기도가 아닌 것으로 여기기라도 하듯이 입을 모아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목사가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가도 '하나님 이 가정에 함께 하시고'라는 기도를 빼놓지 않고 합니다. 개인이 기도할 때도 '하나님 저희 가정에 함께 하시고'라는 말을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기도할 때는 사업에 함께 해달라고 하고, 길을 떠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오고가는 발걸음을 지켜주시고'라고 하고, 차를 타면 '운전사에게 함께 하시고'라는 기도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과연 어떤 의미로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하는 기도의 문제점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상투적으로 내뱉는 식의 기도를 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를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기도 잘함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기도 하고, 다른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틀림없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할 때가 많습니다. 은석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은석교회가 부흥되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사업에 함께 하시면 사업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정에 함께 하시면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에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 신자라고 자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우리들이 추측해서 마음대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린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실제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민족을 통해서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민족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함께 하셨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무한한 복을 누리고 부강하고 강대한 나라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심판과 멸망으로 끝납니다. 더군다나 그 심판과 멸망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가 여러 나라도 아니고 오직 유일하게 하나인데, 그 하나를 심판하시고 멸망해 버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심판과 멸망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되지 아니한 다른 나라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전세계에 '이스라엘처럼 하면 너희도 심판과 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조차 가차없이 버리시고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이라면 선택하지 아니했던 민족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융통성 없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인데도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면 좋은 일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함께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도와주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셨는데 그들이 이방인으로부터 수없이 침략을 받으면서 고생을 하고 이방인의 종이 되는 결과를 맞이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함께 하셨다는 것 때문에 세상을 복을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이라도 말씀에서 어긋나고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난 길을 가게 되면 가차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으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역시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날 때 우리를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이 믿고 있었던 하나님을 우리가 수입해서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 보이신 바로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는 뜻입니다. 고려대에서 철학을 강의했던 김용옥이라는 분은 '우리나라에 신이 없어서 외국에서 신을 수입해다가 믿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에서 수입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그분만을 참된 하나님으로 믿을 뿐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해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칙과 말씀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길을 걸어간다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처럼 우리를 심판하시고 징계해서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달라는 의미에서의 '함께 하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았다면 '아하 이것이 바로 심판 받는 자의 모습이구나'를 알아야 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면 '이것이 바로 버림받는 자의 모습이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이러한 얘기를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데, 21절에 보면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 중에서 택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 중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이방인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뭔가 고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리 이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생각하기를 제사장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레위인만이 담당할 수 있는 고정적인 직책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레위 지파 외에 다른 지파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이 제사장이라는 직책인데, 그것이 이방인에게 옮겨진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레위인만이 제사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법으로 말씀하셨을 때, 혈통으로서의 레위인을 지칭하고 그 레위인에게 제사장을 고정시켰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신 법을 무너뜨리고 무시하는 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레위인에게 제사장을 맡김으로서 제사장이 무엇이고 진정한 레위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그러한 의도에서 벗어나자 레위인과 제사장을 이방인에게서 삼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레위인과 제사장에서 버림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를 알아야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인가?'를 우리가 알고 우리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고자 하신 것은 그들의 잘못된 사상과 소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주일 예배에 빠지고, 봉사 안하고, 십일조 안하고, 기도 안하고, 성경보지 않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큰 죄로 여기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스라엘은 그런 의식과 행함에는 철저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 빠져도 괜찮고 봉사 안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예배를 빠졌으면 빠졌다는 행위를 보지 말고 왜 빠졌는지 그 사상을 보자는 것입니다. 봉사를 안했으면 왜 안했는지 그 사상을 봐야 합니다. 기도를 안했으면 왜 안했는지 그 사상을 봐야 합니다. 반대로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해도 결국 그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을 보신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 어떤 생각으로 했느냐는 보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돼지고기를 먹고 가증한 물건을 먹고 쥐를 먹는 자를 망하게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 말씀을 18절과 연결시켜 보면 결국 부정한 것을 먹는 것은 사상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상입니까?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상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보인 사상, 즉 세상 사고방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으로서 사람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고방식이고 악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웃을 세상의 것으로 판단하고 구별하는 악한 사상에서 떠난 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구제도 금식도 모두가 약한 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약자가 있게 하신 것도 역시 이스라엘이 과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악한 사상에서 벗어났느냐를 확인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며 이사야 지적했던 이스라엘의 악한 사상,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던 죄는 무엇입니까? 사 1:16,17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또 23절에서는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악한 사상은 세상과 똑같이 외모를 기준으로 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굴 예쁘고 돈있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힘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힘에 의해서 약자들이 무시 받고 고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시고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은 철저하게 외면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심판 받고 버림받을 이스라엘의 소위와 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이방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역할은 단지 제사 드리는 의식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같이 죄인이고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고 하면서 어떤 일을 맡은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두었던 것입니다. 즉 레위인과 제사장직이라는 것이 '죄인'임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삼는 자리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레위인으로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우리는 죄인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부정하고 더러운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레위인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날의 사람들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자랑하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자기 힘으로 삼고 과시해 버린다면, 옛날 이스라엘이 가졌던 악한 사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고 그렇다면 역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줄 자를 찾습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버리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만 드러내며 살아갈 자를 찾으십니다. 20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깨끗한 그릇에 예물을 담아서 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특권인 줄 알았던 제사, 예물 드리는 것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하나님께 드리게 된 예물은 재물이나 짐승이 아니라 사람 자체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예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은 하나님은 참된 예물로서 사람 자체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음은 다른데 있고 단지 예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림으로서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물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즉 죄인 됨을 보여주는 인간 자체를 예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을 원하시거나 우리들의 시간이나 노력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구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자연히 내가 행하는 행동들이 나의 죄를 덮을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만을 의지하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참된 신자의 모습이며, 우리를 이러한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징계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대로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스라엘의 자리에 집어넣으시고 레위인, 제사장으로 삼으셨는데 만약 우리가 옛날 이스라엘 같이 악한 사상으로서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심판은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될 것입니다. 제사장 레위인이 왜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으로 옮겨졌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옛날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볼 때 목사를 '성직'이라는 미명 아래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사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돼지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도 역시 죄인이고 망해야 할 악한자라는 것을 보여주라고 있는 것인데 오히려 목사를 일반 성도와 다른 거룩한 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 목사를 의지하고 섬기도록 유도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똑같은 악한 사상에 빠져 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버리십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 못했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과연 어떤 사고방식으로 교회를 찾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졌던 사상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행위를 자랑하며 교회에 나온 것은 아닌지, 교회에 와서 내 신앙생활을 나타내고 과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나와야 합니다.

 

 

 

레위인 제사장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로 넘어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복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이스라엘처럼 살아간다면 버리시고 심판하시고야 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을 잊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지금 이 시간에 나에게 있는지 살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자로 살아가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과 멸망 (사 66:22-24)

990502171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의 뜻에 따라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신자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일속에 스며 들어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자는 세상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은 잊어버린 채, 자기의 실력을 믿게 되거나 '재수가 없어서 그랬다'는 식으로 나쁜 일은 우연으로 돌려버리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배당에만 살아 계시고, 일주일에 한번 예배당에서 그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고 살아간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되어지는 일 하나하나를 우연으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루도 숨을 쉬면서 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일하셨기 때문이고, 직장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역시 하나님이 일하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교회가 존재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일하시고 있기 때문임을 잊지 않는다면, 아마 그러한 신자는 날마다 하나님을 체험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로서 마지막 시간인 이사야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라면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이사야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선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이사야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가서 담대하게 그들의 죄악을 외칠 수 있도록 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사야가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이사야가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때 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에게 외쳐졌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외쳐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를 통해서 일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일하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 하나가 선포되어지는 것까지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고 일하시고 계신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눈이 뜨인 자가 바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이며, 그러한 신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주변을 돌아볼 때, 또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그리고 세상을 둘러 볼 때 하나님은 잠자고 계신 것이 아니며, 두 손 놓고 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향해서 일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고 체험하고 가슴 깊이 받아들일 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씀 하나하나가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외치고 있는 말입니다. 22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기존의 세상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들 앞에 있게 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 즉 천국의 문제는 재미있는 영화 한편 보는 것보다도 못할 정도로 인기 없는 얘기로 전락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이야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지 않고 진행될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옛날에는 이사야가 선택되고 말씀을 전파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자기 아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보이는 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 마음을 두는 자들이 발생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것도 틀림없이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이 구원과 멸망의 얘기로 마쳐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지적한 이스라엘의 죄는 멸망 받을 죄이고, 행여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죄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들이 멸망당할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존재라는 것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시대에 일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이 시대에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 한번 이사야서를 통해서 멸망 받을 모습이 어떤 것이고, 과연 우리들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22절에서 말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항상 있을 자는 누구이며, 24절에서 말한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불이 꺼지지 않을 곳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살아가야 할 패역한 자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이사야 전체를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2절에 보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였고, 이러한 이스라엘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2절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양육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자신을 양육하신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왔으면서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쪽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3절에서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육을 받았으면서도 자신들이 누구의 힘으로 살아가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며 수많은 이방인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게 하시며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돈이 있어서 돈 때문에 살아온 것이 아니며, 공부를 잘해서 똑똑해서 그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그들의 군사력과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아야 합니다. 돈이 있고 세상의 여러 가지의 것들이 그들의 수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스라엘은 오직 은혜만 노래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자신들을 양육하신 주인을 아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그들이 '은혜로 산다'는 생각에서 벗어납니다. 풍족함에 빠져서 더 많은 풍족과 배부름을 얻기 위해서 돈을 구하고 세상 것을 구하게 됩니다. 그 마음속에는 은혜가 아닌 돈이 자리하고 세상의 좋은 것들이 자리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의 제사나 제물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제사와 제물이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를 고백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러내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마음은 중요시하게 여기지 않고 의식을 지켰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 것은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마음인가? 는 전혀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예배 드렸습니다' '하나님 헌금했습니다'고 하면서 자기의 행위를 의식하고,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의식이 있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의식과 바치는 것을 모두 거부해 버립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2:7절에 보면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것에서 풍요해지고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에서 벗어나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배가 불러지니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세상이 더 좋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사치와 방탕과 호화로움에 대해서 지적하기 위해 이사야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를 이스라엘에게로 보내시기에 앞서 먼저 이사야로 하여금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사야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게 됩니다. 6: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그것을 자랑을 하고 다니는데, 그 모두가 가짜라는 것은,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 자로서 자기의 체험을 자랑하는 자가 없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 자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됩니다. 이사야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게 되고 내가 곧 망할 존재임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사야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사야가 이스라엘로 가서 할 일이 뭐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더러움과 부정함을 알게 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로 더러움과 부정함으로 가득한 민족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할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가서 말씀을 외친다고 해도 그 말을 들을 사람은 없습니다(6:9,10).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르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그 그루터기를 위해서 이사야를 보내시는 것입니다(6:13).

 

 

 

이사야는 가장 먼저 '남은 자는 돌아온다'는 뜻을 가진 스알야숩이라는 아들을 데리고 아하스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하스에게 임마누엘의 징조를 말합니다. 즉 세상의 힘을 믿고 있던 아하스에게 세상은 망하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가 장차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장차 주어질 이 나라에 포함될 백성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 자'가 될 것임을 말합니다(9:1,2). 그리고 9:6,7을 보면 장차 세상은 임마누엘로 오신 한 아기가 중심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 결국 남은 자란 임마누엘로 나신 아기를 왕으로 복종하는 자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로 오신 분에 의해서 통치되어집니다. 힘으로 유지하는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힘을 의지하지 말고 배부름에 빠지지 말고 임마누엘로 오신 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경고를 한 뒤에 이어서 이방 나라에 대한 경고를 하십니다. 그 내용이 40장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심판의 경고는 결국 세상에 남아있을 민족은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포함될 자가 발생하는 데, 그가 바로 남은 자입니다. 이 남은 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새이스라엘입니다.

 

 

 

43: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고, 또 44:1절에서도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야곱아,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라는 말이 곧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신 새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이스라엘로 모집되는 백성이 곧 남은 자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은 임마누엘로 오신 메시야에 의해서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고, 이 나라만 남기고 나머지 세상은 모두 심판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나라에 포함될 남은 자는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남은 자가 누구냐라고 할 때 '너냐?' '나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남은 자의 모습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남은 자가 누구인가는 알 수 없지만, 남은 자의 모습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가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에 포함된 남은 자라면 분명히 자신을 다스리는 목자를 알아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를 제대로 알아보고 그 목자를 구세주로 삼고 목자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남은 자의 모습입니다.

 

 

 

53:2절에 보면 목자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절에서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합니다.

 

 

 

즉 힘있고 흠모할 만한 모습을 가진 자를 목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연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고 누르면 눌리는 그런 모습의 목자를 목자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남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목자를 외모로 보지 않고 세상의 힘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그것으로 목자를 나의 목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신부로 간주해서 새로운 예루살렘에 넣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61:10).

 

 

 

연한 순같고 흠모할 만한 아무 것도 없이 오신 목자를 목자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시각에서 떠난 자입니다. 이러한 눈이 뜨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더러움과 부정함에 대해서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를 찾을 때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창에 찔림 받고 수치를 당하고 죽으신 목자가 눈에 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는 세상을 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심판 받을 자와 남은 자입니다. 심판을 피할 자들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속에서 새 예루살렘에 포함될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미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 것 같은 세상만 눈에 들어오지만, 목자를 제대로 만난 자는 세상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에 두고 살뿐입니다.

 

 

 

이사야서를 마치면서 우리는 자신의 부정함과 더러움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임마누엘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목자가 제대로 보일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돈 때문에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으로 뒤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때문에 세상은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멸망할 세상을 보지 마시고 그 세상 위에 존재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출처: 심플 라이프 원문보기 글쓴이: 심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