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지 말라 (마 5:31-32)
이 시간 “이혼하지 말라”는 제목입니다. 성경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일생 후회 없는 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합니다. 이혼하지 말라. 2008년도의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혼인건수는 32만 8천 건이고 이혼건수는 11만 7천 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세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합니다. 그리고 재혼하고서 다시 이혼한 경우가 약 70%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한 번 이혼하기 시작하면 또 다시 이혼하기가 쉽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혼한 수효는 아직 세계 제일은 아니지만 이혼율은 세계 제일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혼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그런데 서기 1세기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던 시대 유대인들은 이혼을 많이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가정의 복을 체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혼이 너무나 쉬웠기 때문입니다. 양편합의도 아닌 한 편에서 이혼증서만 주면 가능했을 정도이니 이혼이 아주 쉬웠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심이 악할 뿐 아니라 성경을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잘못 해석한데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이혼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혼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신24:1-2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여기 수치 되는 일은 음행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음행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혼사유는 딱 이것 한 가지 뿐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음행한다면 이혼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언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건은 음행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음행했다고 해서 꼭 이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이 어디 있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이란 말씀 속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비록 아내에게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될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얼마든지 관용함으로 그 허물을 덮어준다면 함께 살 수 있음이 암시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 못마땅하여 부득이 내보내야 할 경우에는 이렇게 하라. 그것은 바로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자에게 경제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혼 당하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이혼증서를 주라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경제력도 없고 시집도 못 가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남자가 일단 아내를 내어보낼 경우 율법은 두 번 다시 그 여자를 자기 집으로 들여오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가급적이면 이혼하지 말도록 막고자 하는 것이 율법의 본래 취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혼율을 낮추어 보고자 숙려기간을 두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혼율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도 가라앉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말2:16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원래의 혼인 관계는 이혼 당했다 할지라도 음행한 연고가 아니라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이혼으로 기록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혼된 것이 아닙니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당히 이혼하여 다른 여자와 재혼한다면 남의 여자와 동침한 것이 되고, 그렇게 이혼 당한 여인과 결혼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남의 아내와 간음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성경을 가감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사욕 때문이었습니다. 요즘도 사람들이 악해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찾고 그런 종교를 찾습니다. 적당히 술도 마시고 우상숭배도 하면서 믿을 수 있는 종교는 없나 기웃거립니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음행한 연고 외에도 이러이러한 것까지 이유를 첨가하여 점차 확대해석하더니 나중에는 이것조차도 아예 빼버렸습니다. 그래서 그저 살기 싫으면 아내를 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에 쓰여진 이혼증서를 보면 이혼사유를 기록하는 난이 없습니다. 단지 이혼 당사자들의 이름과 두 증인의 이름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결혼해도 좋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게 어찌 정상입니까?
오늘날 사람들도 사랑 없다면 이혼하라. 성격이 맞지 않다면 이혼하라 등등 온갖 이혼조항을 쏟아냅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격차이가 32%로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시댁과의 관계로서 18%, 세 번째가 배우자의 외도로 1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경제적인 이유라든지 기타 의견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요즘 와서는 여자가 남자들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이런 생각은 신앙 없음을 증명해 줍니다.
구약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얼마나 음란한 여인이었습니까? 고멜은 남편과 아이들까지 내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데려다 놓아도 또 달아나버립니다. 이런 경우 이혼해도 호세아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아내일지라도 용서하고 데리고 와서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볼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가르침으로서 많은 백성들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혼증서를 주었으니 율법대로 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외식적인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이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의는 바로 덮어주시는 의요 변화시켜 주시는 의입니다. 예수님의 의로 용서 받고 예수님의 의로 변화 받고 예수님의 공로로 아버지 보좌 앞에까지 나아가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깨끗하게 씻음 받아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의를 모르고 양심적으로 살고 선한 일하며 사는 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는 가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욕망을 위해 말씀을 편리한대로 해석하는 죄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본래적인 의도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아무리 의로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수의 공로가 아니면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더욱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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