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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해야 하는가? (마5:38∼42)

에반젤(복음) 2021. 6. 13. 06:56

복수 해야 하는가? (마5:38∼42)


복수해야 하는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악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악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죄의 때를 또 묻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율법은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구약에는 동해보상법(해를 준 자에게 동일하게 벌을 가하는 것)이 세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21:24, 레24:20, 신19:21입니다. 출21:22∼25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이 말씀 보니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 말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39절에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이 분명 이는 이로, 눈은 눈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율법의 정신과 앞뒤 문맥 다 떼어버린 자의적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보상법은 출21:22에 있는 대로 본래 재판장의 판결의 원리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사사로이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시켜 악한 자를 가만 두지 말고 사사로이 대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율법의 정신에 위배됩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보상법도 사랑의 정신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그 말이 조금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만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오히려 잔인할 뻔하셨다."

 

이처럼 사회의 공의는 공의대로 흐르되 우리는 진정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원뜻입니다. 사랑한다 해서 사회의 정의까지 사라지면 죽도 밥도 안 되겠죠. 사랑한다고 형법을 없애면 세상은 극악무도해지겠죠. 북한을 사랑한다고 해서 우리 군대나 반공법까지 없애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나라가 적화통일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 아십니까? 정의는 정의대로 흘러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나라에 맡기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라면 기도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개인적인 복수는 금해야 합니다.

 

그런데 창 4장의 라멕 같은 악인은 칠십 칠 배로 보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엉덩이에 뿔 날 사람입니다. 복수는 악인이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수심을 허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재판장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서만 보상이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 죄 무서운 줄 배웠고, 남을 존중하는 것이 나를 존중함이며 남을 해함이 곧 나를 해함이라는 내 몸 원리를 배웠습니다. 신약 롬12:19에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는 잘못 가르침으로 원수 맺고 원수 갚는 일이 성행했습니다. 원수는 또 다른 원수를 낳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에 열심당과 같은 폭력조직도 있었고 예루살렘의 멸망도 이 잘못된 가르침이 직접적 원인이었습니다. 지금 이슬람도 악한 것도 마호메트의 잘못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를 갚으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32:3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수는 내 것이라." 레19:18에도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잠25:21에도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성경 몇 군데만 봐도 그렇게 가르칠 수 없을 텐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해석이란 참으로 한심했습니다. 자기들의 욕망을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의 글을 읽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 어느 해 몹시도 가물 때 물 때문에 수고가 많은데 어느 농부가 자기 논에 물을 대놓으면 아래 논임자가 몰래 논둑을 터서 말도 없이 물을 빼내갑니다. 몹시도 화가 났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모른 척하고 참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논에 나가보았더니 또 물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웃 논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물론 이웃 논임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농부의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 없고 그만하면 참았고 정당한데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에 기쁨과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속에 기쁨과 평강이 없습니까?" 그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먼저 이웃 논에 물을 가득히 대줘라.”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논으로 가서 물을 퍼 올려서 이웃 논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마음이 기쁘고 평안한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웃 논임자는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예수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39∼4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여기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이 말씀은 꼭 돌려대라는 의미보다 매 맞았다고 화내지 말고 그만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40절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가 값나가지 않는 속옷을 빼앗고자 하면 그것 때문에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말고 더 값나가는 겉옷까지 주어라는 것입니다. 역시 관대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41절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당시에 로마군들이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강제 부역시켰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가게하면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말고 기쁨으로 십 리까지라도 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다 주고 내 가족은 굶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너그러울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6·25 동란때였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퇴각하던 인민군에게 붙잡혔습니다. 인민군은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앞장 세워 걷게 했습니다. 날은 더운지라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지고서 걸어갔습니다. 짐을 지고 가던 집사님의 마음속에 불현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들랑 그 사람과 십 리까지라도 가주어라."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지만 죽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 앞에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십 리까지 가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한 오 리쯤 갔을 때입니다. 인민군이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동무! 수고했소. 이제 짐을 내려놓으시오." 그때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좀 더 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인민군은 표정을 바꾸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무, 빨리 가시오! 사실은 내가 여기 와서 동무를 쏴 죽이려고 했는데 동무가 친절하게 하니까 그럴 수가 없구려. 그러니 어서 빨리 가시오!" 그렇게 해서 그는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인적인 복수는 안 됩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심판과 법의 처리에 맡겨야 합니다. 악은 오직 선으로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그 너그러우심을 본받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용납하고 사랑하고 베풀어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