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이론>>>/ - 산상수훈 강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마5:43∼48)

에반젤(복음) 2021. 6. 13. 06:58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마5:43∼48)


이 시간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 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중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잠시 영국에 귀국하여 선교에 함께 할 동역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지원자들이 사명감이 있는지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하십니까?" 여러 답변들이 있었습니다. 중국인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 되려고 등등의 대답이 있었습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테일러는 이들의 객관에 머문 대답에 미흡한 표정이었습니다. 그 때 지원자 가운데 한 사람이 테일러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님은 왜 중국에 선교사로 가셨습니까?"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객관과 아울러 주관 즉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사랑해야 할 때 사랑의 대상, 사랑의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저런 사람도 사랑해야 하는가? 저 사람은 예외야,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면서도 사랑할 수 없다고 여겨지면 자기 생각을 적당히 타서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가령 “하나님은 모르신다냐?” 하면서 딴 짓을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성경을 자기 편리할 때로 변조시켜서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럼 이웃 사랑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할까요?


구약 성경 레19:18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분명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도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신 말씀은 여러 번 인용되었습니다. 레19:18의 이웃 사랑의 말씀에는 약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대상에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은 물론 우리를 미워하고 해한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방금 읽은 레19:18 뿐만 아니라 출23:4∼5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사사로이 원수를 갚을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고, 동포를 원망할 권리도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사랑할 책임만 주어졌습니다.


다음은 사랑은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사상이나 감정이나 느낌이나 구호가 아닙니다. 사랑은 말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레19:18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몸을 돌보듯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주리고 목말라 할 때는 먹이고 마시우고, 우리 몸이 추울 때 옷을 입히고, 우리 몸이 피곤할 때 재우고 쉬듯, 이웃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구체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25:21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사랑이란 이웃이 필요한 것을 주는 실천입니다. 이런 실천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구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 사랑의 원리를 모두 무시해 버렸습니다. 레19:18을 자기들이 편리한대로 왜곡했습니다. 어떻게 가르쳤나요? 43절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몇 %쯤 틀렸나요? 얼른 보면 앞의 절반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뒤 모두 틀렸습니다.


첫째, 그들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시켰습니다.


그들은 원수는 미워하고 이웃만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방인 로마인 혼혈의 사마리아인 세리 창기 등 미워해야 할 대상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성경을 자기 편리에 맞게 해석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이 자리 잡고 심히 강퍅해졌습니다.


둘째, 그들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했습니다. 레19:18에 분명히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빼버리고 그저 단순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은 그렇게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라 해서 성경 말씀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지 못하고 다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자녀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우리는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6∼47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오늘 본문에 이웃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 세 가지가 나옵니다. 기도, 선행, 문안, 이 세 가지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기도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 목사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Prayer is the forerunner of mercy(기도는 긍휼의 선봉이다)." 이처럼 이웃사랑의 첫걸음은 기도부터 시작합니다. 기도하다 보면 성령께서 어떻게 할 것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선행할 뿐 아니라 문안하라. 이웃에게 반가운 얼굴로 내가 먼저 인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화해의 악수를 청하고 밝은 얼굴로 인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를 미워한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못 본 척하면 하나님 자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기도와 선행과 문안 이 세 가지로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한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의롭지 못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원수보다 더 악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용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주셨습니다. 그 사랑 본받아 우리들도 사랑하십시다. 유대인들처럼 자기욕심 자기감정 버리지 못하고 성경을 적당히 자기 욕망에 맞게 해석에서 피해가려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하나님 잘 경외하여 성령 충만 받아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기도하며 선행하며 문안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