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이론>>>/ - 산상수훈 강해

살인하지 말라 (마 5:21-26)

에반젤(복음) 2021. 6. 13. 06:52

살인하지 말라 (마 5:21-26)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여섯 번째 계명 즉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바로 알려 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사람을 꼭 죽여야만 살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들은 계명을 범한 일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도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나는 법 없이 살 사람이라며 자기 의로움을 말하는데 마음의 범죄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인가요? 마음의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 얼마나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의입니까?


신앙이란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마음이 어떻든 상관이 없다는 것은 이미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바리새적인 의로는 천국 백성으로서 합당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의 참뜻과 계명을 주신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1. 그들의 유전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21절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즉 지금까지 너희가 이렇게 들어왔지만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옛 사람"은 성경을 기록한 모세나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유전을 전해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유전이란 "구두로 건너 받은" 이런 뜻입니다. 유전이란 유대인들이 조상들로부터 입으로 전달받은 것입니다. 유전에는 해설이나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하라 적용시켜 만들어놓은 율법인데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주실 때의 원뜻이 와전되거나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일부는 율법에 기록하고 나머지는 구두로 여호수아에게 전했다. 여호수아는 구두로 모세에게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장로들에게 전했다. 장로들은 선지자들에게 전하고 또 선지자들은 회당에서 가르치는 자들에게 전했다. 이것이 유전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유전이 잘못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지니라"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유전에는 그 계명 뒤에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원문에 의하면 세상 법정의 재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세상 법으로 전락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막7:7-8에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유전의 교훈이 세상 계명이다 보니 마음의 문제 같은 것은 상관이 없는 율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6계명에 대한 유전은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십계명의 의도를 벗어나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국한시켜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2.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행위는 물론 마음의 문제까지를 가리킵니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 공회는 세상 법정입니다. 그리고 지옥 불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마음의 미움도 살인이며 마음의 미움은 세상 법정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문제가 된다는 교훈이십니다. 살인이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3:15)라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미워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또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된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라가’라는 말은 "등신", "바보" “천치” 이런 말로 인격을 모멸하고 혐오하는 말입니다. 형제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도 인격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랍비가 집으로 돌아오는 중 어떤 아이가 인사를 하는데 너무 못 생겼습니다. 잔치를 다녀오던 길이라 뱃속의 음식물이 넘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랍비는 "라가야" 하고서 묻기를 "너 왜 그렇게 못 생겼느냐? 너희 집 사람들도 다 그렇게 못 생겼니?" 이건 인격을 혐오하는 말입니다.


그때 그 어린이가 이렇게 대꾸합니다. "글쎄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추하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시고 싶으시면 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가서 왜 저를 이렇게 추하게 만드셨는지 물어봐 주세요." 랍비가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아이에게 크게 혼나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고 무시해도 모독죄로 공회에 잡혀가는데 하나님의 법정에서야 어찌 죄가 안 되겠습니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미련이란 아이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을 가리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명예훼손죄입니다. 명예살인죄입니다. 이 역시 사람의 법정은 물론 하나님의 법정에서도 심판 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형제를 미워할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미워했습니다. 또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또 그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미워했습니다.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는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죄와 상관이 없으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살인하지 않았고 계명을 잘 지키는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본문과 상관은 없지만 잠시 생각해 볼 주제가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면 전쟁에 나가서도 안 되며 치안 공무원으로서 많은 부분의 행위가 제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개인적 살인과 하나님의 공의적 실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간단히 답하고자 합니다.


3. 그럼 살인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다면 다 되는 것일까요?

 

이 정도로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서로 화목하고 돕고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의 부족을 덮어주며 사랑하며 사는 것을 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6계명의 본래적인 의도입니다.


그래서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여기 “그러므로”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서로 화목하며 살라는 것이 근본 취지라는 것입니다.


25-26절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는 시험에 들지 않고 평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잠시 잠깐의 실수로 살인하게 될 때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살인자의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요즘 같으면 종신형이나 장기수가 될 것이고 당시 같으면 처형이 될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만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로 막힐 때 아주 작은 문제로도 막힙니다. 여기 호리라는 말은 자나 저울의 가장 작은 눈금이 호리입니다. 그만큼이라도 사사로운 감정이라도 있으면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로 막혔는지 하나님께 서운하게 한 것은 없는지, 사람에게 서운하게 한 것은 없는지 살펴서 풀어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나 서운함을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내 영이 막힙니다. 사업이 막히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살인이나 미워하지않는다고 다 한 것은 아닙니다. 행위의 살인 뿐 아니라 마음의 미움이나 멸시, 입술의 악함은 물론 진실로 화목하고 사랑하지 못했음을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