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3~28)
* 본문요약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인 지상에 있는 성전은 짐승의 피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참 성전은 더 좋은 제물로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늘의 참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 오셨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두 번째로 다시 오십니다.
찬 양 : 543장 (새 491)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37장 (새 251)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 본문해설
1. 자신을 단번에 드리신 예수님(23~26절)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참된) 것들을 (모방한) 이 땅의 모형은 이런 의식(동물의 피를
통한 의식)으로 정결하게 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나은 희생 제물로 정결하게 돼야 합니다.
24) 그리스께서 참된 성소의 그림자인(모형들인) 사람이 손으로 만든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있는 그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25) 대제사장들은 해마다 다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으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번번이 자신의 몸을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26) 만일 그래야한다면(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만 한다면), 그는 세상이
창조된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 하늘에 있는 것들을 모방한 이 땅의 모형(23절) :
옛 언약의 성소인 구약의 성전은 하늘에 있는 참된 성전을 모방한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 세상 끝(26절) :
‘세상 끝’은 ‘모든 시대의 끝’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말세’라고 표현했습니다(고전 10:11).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때로, 신약시대의 시작점이며 종말의 때의 시작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부터 종말의 때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 후로 언제든지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 만민을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에 종말의 때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언제든지 예수께서 오실 수 있는 매우 긴장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모든 시간은 ‘모든 시대의 끝’이요 ‘종말의 때’인 것입니다.
2.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예수님(27~28절)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죄와 상관없이(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기다리는(자기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28절) :
예수께서 전에 오셨을 때에는 죄 있는 자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오셨으나, 다시 오실 때에는 죄 있는 자를 구원하시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갈망하며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시려고 다시 오십니다.
* 묵상 point
1. 자신을 단번에 드리신 예수님(23~26절)
구약의 성소인 장막이나 제사장들은 모형일 뿐입니다. 실재는 하늘에 있습니다(히 8:5). 이 땅에 있는 장막이나 제사장들은 죄와 부정함에 오염되어 있으므로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있는 참 성전은 이 땅에 있는 모형보다 더 좋은 제물이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참 성전이 죄가 있어서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더 좋은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기 위하여 지상의 모형물인 지상의 장막에 들어갈 때보다 더 좋은 제물이 드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들이 땅의 장막보다 더 좋은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더 좋은 제물로 단번에 드려졌습니다. 이 땅의 제사장들은 성전의 모형물에 들어가지만,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은 하늘의 참 성소에 이미 들어가 계십니다. 이 땅의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모형물인 하나님의 법궤 앞에 나아갈 뿐이지만,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은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심으로 인하여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 하늘의 참 성소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장차 우리도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세상 끝에 이 세상에 오셔서 더 좋은 희생 제물이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2.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예수님(28절)
새 언약의 특징은 무엇을 하는 자에게 구원의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구원의 상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사랑하는 자를 바라보며 사는 연인들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지 벌써 20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다보니 종말의 때의 긴장감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매 순간 종말이 될 수 있는 매우 긴장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그리스도인의 생각 속에서 많이 흐려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갑자기 임하게 될 것이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베드로후서 3:1~10).
● 묵상 :
주께서 전에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으나, 다시 오실 때에는 죄인을 구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간절히 찾고 구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십니다. 이 땅에서 살되 땅의 것을 찾지 않고 하늘의 것을 찾으며 산 자들을 찾으러 오십니다. 그들을 불러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십니다.
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이 땅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다 겪게 될 일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행한 모든 말과 행동이 우리의 머릿속에 다 입력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을지라도 우리 안에 입력된 것은 지워지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가 우리가 죽어 심판을 받을 때 우리 입으로 스스로 자신이 행하였던 죄와 허물들을 모두 낱낱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심판을 받은 이후에는 다시는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신분의 상승을 위한 그 어떤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 순간의 결정이 영원토록 유지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 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 묵상 : 그러나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심판 이후에는 영원히 변화될 가능성이 없지만,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갖고 있는 이 땅에서는 기회가 있습니다.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옥 백성에서 천국의 백성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당신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시간이 많이 있으려니 하며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하고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 기도제목
1. 종말의 때를 항상 준비하고 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2. 항상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3. 중보기도 : 아직 주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도록
출처 :가애교회 글쓴이 : 송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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