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구원 원리와 그리스도인의 믿음
- 송영찬 목사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출 19:5-6) 그들에게 거룩한 언약에 참여한 증표로 할례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시되었고 그 말씀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로마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통해 과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처럼 새 언약 역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복음을 거역하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옛 언약을 거역한 것과 같은 정죄를 받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오직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 아래에서 주어지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역사성을 증거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원칙임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이에 로마서 4장을 중심으로 율법의 완성과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원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시대의 교회가 마땅히 취해야 할 구원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이스라엘 역사에 의해 증명되는 하나님의 의
성령을 따라 사는 의롭게 된 신자들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룬다는 것을 주장해 온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는 주장에 근거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는 사실의 입증을 위해 로마서 4장에 들어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어 논리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성경이 아브라함과 다윗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에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주장하는 이신칭의의 복음이 전혀 낯선 것이 아니며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이 원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즉 구약에서는 사람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원은 믿음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함이다.
1) 믿음과 행위 사이의 상관 관계에 대한 오해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구약적 체계의 근본으로 여겨진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창시자였고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받았던 인물이다(사 51:1-2; 창 12:1-3; 15:1; 17:1). 또한 아브라함은 '의'의 전형이자 하나님의 벗(대하 20:7; 사 41:8; 약 2:23)으로서 유대인 랍비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의의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여호와와의 모든 관계에서 완전했으며 그의 일생에 걸친 의로써 은총을 얻었다'(Jubilees 23:10)고 주장하고 있었다.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창 22:1ff; 26:2ff). 그러나 이 구절들은 사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이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순종의 삶을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랍비들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구절까지도 아브라함의 충성됨 혹은 신실함이 뒤따르는 공로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 전통은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구원받았다는 야고보서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약 2:21ff). 이러한 유대적 전통은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는 주장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주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약 2:17, 21).
아브라함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선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에 대한 신실한 순종을 보인 인물이다. 아브라함은 아직 율법이 기록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 율법을 준수했다(창 26:5). 특별히 이삭 번제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의 신실한 순종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었다(창 22:12). 야고보서는 이 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믿음과 행위간의 연관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의 의와 아브라함의 믿음과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 11:17)는 히브리서 기자의 관심과 일치한다. 즉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는 사실에 근거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한 순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2) 아브라함이 받은 의의 성격
바울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는 서로 동시적이며 공유적이지만 믿음과 의의 관계를 분리해 나눌 경우 의는 행함의 문제 이전에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고 주장한다. Karl Barth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 사이를 갈라놓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의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고 명확하게 증거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다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의가 있어서 의로워진 것이라면 자랑할 수 있지만 반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모든 민족들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위치에 대하여 스스로 자랑하지만 그들이 부여받은 특권이라는 것이 율법의 행함에 국한된 것이라면 결국 로마서 1:21-22에서 요약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3) 율법의 성취로서 믿음과 하나님의 의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은 일에 대한 품삯은 은혜로 계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롬 4:4). 빚( )이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으로 이것은 유대인의 구원관, 즉 율법과 관련된 구원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다.
일을 해서 그 대가로 의와 영생을 얻겠다는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의 성격은 그를 의인으로 세울 만한 행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불경건한 자, 죄인을 의롭다고 해주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받은 것이었다(롬 4:5).
그렇다고 믿음이 인간의 의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의를 받아 누리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믿음은 은혜를 받을 만한 어떤 조건이 되지 못한다. 오로지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정당한 태도로써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이미 죄인이며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해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로운 '의'이다.
이 의는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다윗 역시 아브라함과 같은 의를 가졌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면 그 다음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은 다윗이라 할 수 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추적인 두 인물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이 은혜를 그들이 받아 누렸으며 하나님에 의해 그들이 받아들여졌다(롬 4:6).
바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죄 있는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언약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의 구원이 곧 여호와의 의로우신 행위에 속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을 여호와에 대한 믿음으로 여기고 있는 시편 32편을 인용함으로써 '믿음의 의'를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의의 성질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인정되어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의'는 어느 날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되었으며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고 있다.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두 인물을 실례로 등장시키고 있다.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한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라면 결코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다.
2. 보편적인 구원의 원리로 주어진 믿음의 의
지금까지 바울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원리가 이스라엘의 존재 및 그 역사와 무관한 이질적인 원리가 아니며 오히려 이스라엘의 존재 및 역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이 원리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온 땅의 모든 믿는 백성들을 위한 보편적인 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롬 4:9-17).
1) 믿음의 증표로 주어진 할례
이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바울은 할례 제도의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표징이다. 즉 할례는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기 위해 주어졌다. 이 사실은 할례에 참여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할례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때문에 바울은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롬 4:9)고 함으로써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창 17장)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었다(창 15:6)는 역사적인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롬 4:10).
이것은 할례 제도가 무할례 상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확증이며 할례가 전제가 됨으로써 죄사함을 받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무할례 상태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누구든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원리를 들춰내고 있다(롬 4:11).
아브라함이 무할례 상태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의롭다함을 받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의롭다함을 받는 원리이며 역사는 아브라함이 이 원리의 전형임을 증거한다. 따라서 할례가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원리의 증표이기 때문에 할례자 역시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를 때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무할례자들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른다면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롬 4:12).
여기에서 바울은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보편성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이 얻었던 의로움에 참여하는 것은 육적 할례를 받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지 않고 아브라함과 동질의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결정적인 조건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은혜를 받는 것은 육적 할례, 즉 외부적인 조건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차원으로 영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고 함으로써 육적 혈통이 아닌 언약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2)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요구되는 믿음의 동질성
바울은 아브라함의 상속자를 아브라함의 씨( )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이 성취 될 것을 믿었으며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라함의 언약은 동시에 아브라함의 씨에게도 주어졌다. 이 사실은 창세기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창 12:7; 13:15-16; 15:5, 18; 17:7-8, 19; 22:17-18).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를 '믿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롬 3:11)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율법이 아닌 믿음의 의로 성취된다고 강조하고 있다(창 15:6).
아브라함의 후사, 즉 기업(inheritance)으로 약속된 가나안 땅은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씨)들에게 주어졌고 이후 이스라엘에게 집중된 구원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상징되어졌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된 언약의 성취와 그들이 받은 기업은 청지기로 세움 받은 인간이 본연의 위치(창 1:26)를 회복하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후에 바울은 이 개념을 종말론적인 구조 속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선 이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롬 8:16-17; 갈 3:14).
그러므로 율법에 속한 자, 즉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는 것이 순종에 좌우된다면 믿음의 타당성은 사라지고 만다(롬 4:14). 왜냐하면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8)는 바울의 논증과 같이 율법과 약속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율법의 순종으로 나타나는 행위가 아닌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보이셨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라 할지라도 다윗이나 아브라함과 같은 동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며 약속된 기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롬 4:16).
4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자'라고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라고 말한다(롬 4:1). 하지만 바울은 아브라함은 할례자이건 무할례자이건 믿는 모든 자의 조상(롬 4:12)으로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조상(롬 4:16)이라고 발전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됨으로써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롬 4:17). 여기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동질의 믿음,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만이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어 약속된 기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3. 하나님의 약속(창 15:5)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창 15:6)과 그 성격
1) 아브라함의 무능력과 하나님의 능력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런 조건 없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창 15:6). 그리고 하나님은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 15:7)고 말씀하신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기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음으로써 의로워진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할례는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몸에 새겨진 하나의 증표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장차 태어날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창 17:9-14).
바울은 할례의 기본 이념에서 할례 의식을 어떻게 행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오히려 할례와 관련하여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6)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에 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들을 낳을 수 없으며 사라 역시 임신할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을 알고 있었다(롬 4:19).
바울은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인간적 조건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능력은 그의 육체나 또는 사라의 육체에 달려 있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러한 이중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주 단순하다. 곧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이루시고 그의 능력을 성취하실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약속의 성취가 자기 안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없는 것에서 있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능력이다. 아브라함은 무조건적이고 순전한 신뢰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의뢰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사람들과 달리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롬 4:20).
2)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의 내용
이미 바울은 로마서 초두에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의존을 인식함으로써 되는 것이라고 밝히 말한 바 있다(롬 1:21). 여기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경건한 유대인의 전형으로부터 피조된 인간의 전형이 되는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곧 생명을 주시는 분에 대한 전적인 의존 속에서 온전한 생명을 얻게 된 믿음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들의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창 15:5)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창 17:19)에 따라 태어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창 22:2)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기꺼이 하나님께 드렸다(히 11:17).
이 사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8-19)고 주석하고 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무능력간의 완벽한 조화를 가져왔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입은 것처럼 동질의 믿음을 가지는 모든 믿는 자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시는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원리를 재조명하고 있다(롬 4:22-23).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으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롬 4:24).
마치는 말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후손을 주시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헛것이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역시 헛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역사하신 동일하게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 새로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여전히 역사하신다는 증거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는 바울의 말처럼 우리의 부활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사람들과 달리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오로지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해서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여신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구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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