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로마서 강해

그리스도의 중재와 새 창조 질서의 세계

에반젤(복음) 2019. 12. 19. 11:16


                 

그리스도의 중재와 새 창조 질서의 세계

 - 송영찬 목사 -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원리는 구약에 근거한 역사적인 원칙이며, 이때 믿음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된 것으로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어 설명된다.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은혜를 받는 것은 육적 할례, 즉 외부적인 조건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믿음의 차원으로써 영적인 영역에 포함된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동질의 믿음,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만이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어 약속된 기업을 얻게 된다는 것이 이신칭의의 원리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육적 혈통이 아닌 언약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되는 이신칭의의 원리가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보편적인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강조한다(롬 4장).


이 원칙에 따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아들 이삭을 바침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심을 믿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
이럼 점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의미에 대하여 로마서 5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지난 인류의 역사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을 얽매고 있던 죄의 권세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성도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삶의 상태를 다시 정립하고자 한다.

 

1. 하나님과의 화평과 그리스도의 중재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누리는 능력은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화평은 하나님의 진노 상태가 해소됨으로써 얻어진다. 바울은 여기에서 인간의 타락 상태(롬 1:18-32)가 반전되어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상태에서 누리는 평안을 화평의 상태로 제시한다.

 

1) '평화의 언약'과 그 성취
특별히 유대인들의 사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평강은 언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민 6:22-27; 시 55:18-19; 사 48:17-22; 렘 14:19-21). 이스라엘에게 있어 '평강의 언약'은 제사장 직분과 비느하스의 축복과 연결되어 있다(민 25:12-13).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1-13)는 하나님의 약속은 바알브올 사건과 관련되어 주어졌으며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으로 일컬어졌다(말 2:4-5).

 

이 직분의 역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라고 한 말 역시 비느하스에게 약속된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연결선상에서 이해된다. 말라기 선지자의 경고에 따르면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이스라엘이 파기했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언약이 성취됨으로써 평강의 언약이 갱신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평화의 개념은 다분히 의의 개념과 중복되거나 상호 보완적인 개념들을 수반한다(시 35:27; 72:3; 85:10; 사 9:7; 32:17; 48:18; 60:17). 샬롬(    , 평화)의 성취된 상태의 규범으로 제시된 개념이 바로 체다카(    , 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과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을 동일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2) 화평의 언약에 담긴 종말론적 의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화평(    )이 완전하게 꽃피우는 시대를 미래의 '새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예언했다(사 9:6-7; 54:10; 겔 34:25-31; 37:26; 미 5:4; 학 2:9; 스 8:12). 이 예언적 약속에 근거하여 바울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소망이 이제 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이어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롬 5:2). 이것은 믿음만으로 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 말은 '믿음으로'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둘 다 함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딛 2:13)을 기다리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소망을 가지고 우리에게 약속된 부활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상태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망에 근거하여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환난이 인내를 통해 연단을 가져오고 이 과정을 통해 소망이 확실해짐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세상의 성도가 당하는 환난이 결국 연단을 위한 것이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더 굳게 세워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롬 5:4).


여기에서 바울은 성도가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닌'(not yet)의 사이에 있는 긴장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된 믿음의 의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화평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우주적인 화해 개념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즐거움으로 환난을 극복한다. 후에 바울은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기꺼이 고난에 참여해야 할 것에 대하여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말하고 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성령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된다는 것은 소망이 실현되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앞서 바울이 논증한 것처럼 우리가 죄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부어졌기 때문에 재림의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이 헛된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 자체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는 것으로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적으로 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의 부어주심은 새 시대의 표지였다(사 32:15; 34:16; 44:3; 겔 11:19; 36:26-27; 37:4-14; 욜 2:28-32). 이런 점에서 성령의 부어주심은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보증의 의미를 가진다(고후 1:22; 5:5; 엡 1:14). 후에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이다(롬 5:6; 롬 3:25-26). 그리스도의 죽음은 타락한 피조물(롬 1:18-32)의 구속을 위함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라는 말은 특별히 인간의 연약함을 증명하는 말세의 고통(롬 5:3)과 관련되는 종말론적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목적이 운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행하시는 하나님 행위였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객관적인 보증이 된다(롬 5:8).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내세에 대한 주관적인 확신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세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우리 마음 속에서 증거하시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의 소망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으며 이제 성령께서 친히 증거하신다. 성령님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함으로써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닫게 된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10)고 못박고 있다.

 

4) 그리스도의 중재와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화목 제물의 피, 즉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적 관계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 단번에 모든 것을 위한 효과를 가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의 모든 희생적 제사를 완성케 하며 더 이상의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든다.


이것은 지금까지 바울이 전개해 왔던 논증의 새로운 전환점이다. 바울은 인간의 믿기 전의 상태로부터 시작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이 율법의 의, 즉 자기의 의를 성취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새로운 은혜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내세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근본적인 변화의 상태를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   )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의해 더 이상 제한되거나 위협 당하지 않는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의심치 않는다(롬 5:10).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반목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충만하신 목적은 인간이 참된 생명(   )을 가지게 함에 있다. 부활이 성도들에게는 여전히 미래적인 사건이지만(롬 6:5, 8; 8:11; 고전 15:20-22; 고후 4:14; 빌 3:10-11) 부활은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고 새 시대의 소망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제'(   )란 단어는 이미(already) 성취되어 있는 종말론적 소망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며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지만(not yet) 구원의 결정적인 행위가 이미 발생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중재자가 되신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그의 죽음과 부활하신 생명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중재로써 성취될 것이다.

 

2.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새 창조의 시대

 

지금까지 전개한 바울의 논증 과정은 먼저 복음의 본질(롬 1:1-18)을 제시한 후 복음의 필요성과 더불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롬 1:18-3:20)와 죄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은혜의 상태(롬 3:21-5:11)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은 5장에 들어와 은혜의 상태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1-11절에서 이미/아직(already/not yet)의 긴장을 보여주며 아담 안에서 범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반전되었다는 내용을 역사적인 관점을 가지고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다시 조명하고 있다.


바울은 이미 5장 1-2절에서 제시한 칭의와 은혜의 관계를 인류 역사의 전반적인 범주에서 다루며 율법과 함께 구 시대를 지배하는 거짓 세력, 즉 죄와 사망(이 주제는 6-8장의 주된 관심사이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었음을 5장 12-21절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5장 12-21절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기본적인 주제 속에서 로마서 전체 서신을 위한 표제적인 본문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아담의 죄로 인한 타락과 그 결과 그리고 생명 얻음의 관계를 칭의의 은혜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아담의 타락과 함께 인류에게 미친 죄와 죽음을 볼 때 율법은 계속적으로 돕지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은혜만이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흙으로부터 창조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고 인자(하늘로부터 온 둘째 아담. 고전 15:47)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담과 동일하게 여겨선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1) 아담의 범죄 성격과 연합의 원리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는 바울의 갑작스런 화제의 변화는 앞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어 은혜로 주어진 새로운 '의'에 어떻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좀더 깊은 대답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이미 ① 범죄와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 ②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③ 의롭게 된 자로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 ④ 내세의 소망을 소유하게 된 것에 대해 각각의 특성을 제시한 바 있다(롬 1-4장). 바울은 이 사실을 역사적 관점에서 재 언급하기 위해 인류의 전 역사 과정을 아담과 모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포괄적인 안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역사의 시발점으로 거론되는 아담으로부터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다는 사실을 제기한다. 바울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모든 악의 결과가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 왔음을 지적하고 있다(창 3:19). 바울은 여기에서 사망이라는 상태가 어떻게 초래되었는지 그 역사적 근원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로마서 1장 18-32절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의 영적 상태가 곧 사망의 상태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나아가 바울은 죄의 결과로 사망이 임하게 된 이 원리가 아담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 동일한 원리를 따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결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조건 아래에서 사망이 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모세의 율법이 제시될 때까지도 동일하게 작용했다(롬 5:13). 이 시대에는 아직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양심에 심어준 규범의 법에 의해 사망이 사람들의 왕 노릇을 해왔었다.


심지어 아담과 같은 죄,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어기는 죄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망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망은 반드시 죄의 결과로 온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사망 아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잉태될 때부터 죄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롬 5:14).

 

이 논리에 대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라는 말로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즉 아담이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태어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비록 아담의 범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람은 생득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게 된다(시 51:5). 이것은 아담과 그 후손 사이에 연관된 연합의 원리로써 설명된다. 즉 한 사람의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들 사이에 연합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칼빈(John Calvin)은 기독교강요 제2권에서 "아담이 지으신 분과 연합하여 있고 또한 그에게 매여 있는 것이 그의 영적 생명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곧 그의 영혼의 죽임이었다. 그가 하늘과 땅의 자연 질서 전체를 부패시켰으니, 자신의 반역으로 자기의 모든 후손을 멸망에 몰아 넣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Inst II. 1. 5)라고 하였다.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스스로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2)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의의 시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 있던 인류 역사는 모세의 율법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절되지 않았다. 그러나 죄와 저주와 심판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반전되었다. 바울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고 한 말은 아담이 그리스도의 첫 번째 모형임을 의미한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각각 한 시대를 시작하며 그 행위에 의해 각 기원의 특징이 형성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첫 번째 아담의 종말론적 상대자이시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는 바울의 주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와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아담이 이 세상에 사망을 가져다 준 첫 번째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 준 첫 번째 사람이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오신 두 번째 아담으로 소개하고 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는 바울의 논증은 아담과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강조한다. 단지 아담 안에서 인류가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연합의 원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연합의 원리라는 점에서만 서로 비교될 수 있을 뿐이다(롬 5:16).


흙에서 태어난 아담과는 달리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가 연합되었다는 것은 본질적인 신분의 변화가 발생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4)는 사실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즉 다윗의 혈통을 따라 육신으로 태어나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신분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받은 선물로 말미암아 우리는 흙으로 지음 받은 아담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신분이 되었다.


바울은 이 점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 5:17)는 말처럼 옛 질서(옛 언약)의 사람은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계에 속하지만 새 질서(새 언약)의 사람은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사람으로 그 신분이 본질적으로 바뀌었다.

 

3) 새로운 창조의 질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새(언약)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아담으로부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우리들의 신분의 변화가 혈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신분이 된다는 것은 아담이나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창조되는 새 인류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는 바울의 말처럼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서 바울은 앞서 로마서 5장 13-14절에서 유보했던 모세의 율법 시대를 다시 언급하고 있다. 이 시대를 가리켜 바울은 "율법이 가입한 시대"(롬 5:20)라고 말한다. 이것은 구약적 체계가 주어진 모세 이후의 시대를 의미한다. 앞서 바울은 인류의 역사를 크게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죽음과 죄 그리고 심판의 역사와 구별하여 그리스도로 시작되는 새 인류의 역사, 즉 의와 생명의 역사로 나누었다.


바울은 이 두 시대의 사이에 존재하는 구약 시대가 존재하게 된 것은 율법 체계를 통해 죄의 실상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밝힌다. 그리고 율법을 통해 죄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의와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롬 5:21). 이런 점에서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일컫는다(갈 3:24-25). 구약 시대는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되는 새 창조의 시대를 도입하는 예비적인 역사였다.

 

마치는 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는 대제사장의 축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 그 결과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화평(    )에는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 상태를 가리켜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신칭의가 구현된 상태를 가리켜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의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죽음과 죄 그리고 심판의 역사와 구별하여 그리스도로 시작되는 새 인류의 역사, 즉 의와 생명의 역사로 나누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의와 영생에 이르게 하는 몽학선생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로써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의 질서가 열렸다는 점에서 새 시대의 신자들은 아담이나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창조되는 새 인류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신자들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신분으로 재 탄생되었다.


하지만 이 땅의 신자들은 여전히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지만(not yet) 구원의 결정적인 행위가 이미 발생했기(already)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   )에 연합되어 있다. 이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평화(    )이며 그 안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의와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