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시편 강해

시편1편 복있는 사람

에반젤(복음) 2019. 9. 8. 19:38




시편 1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의인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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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성경에서 가장 방대한 종교적 사상과 생각을 기록한 책이다. 때문에 시편은 구약 성격의 모든 신학을 포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편에서 독자적이거나 독특한 신학 사상을 꼬집어 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시편은 시종일관 두드러지게 하나의 강조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여호와께서 백성 가운데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해 공정한 통치를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악인이나 육체적 곤경으로 인해 난국에 직면하면 그들은 온 땅의 재판장께서 해명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공정한 통치가 실현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승리하게 되면 그 승리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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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능하신 하나님과 의인들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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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들이 예배에 참여하고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그들이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때로는 자신들의 경험을 뛰어 넘어 종말론적인 여호와의 통치를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시편 기자들은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충성을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에 의를 수호하기 위한 열정으로 그들은 자주 악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팔을 꺾으실 것이며(10:15) 그들의 이를 박살내실 것이며(58:6)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실 것(69:22-28)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통치를 간절히 염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악에 대한 심판의 표현들은 개인적인 복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악을 깨뜨리고 진정한 평화가 구현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시편 기자들의 열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편 기자들은 그들을 배반하는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109:4-5).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악이 심판을 받음으로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신 일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의지가 그만큼 고상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의인은 악인과 언제나 구별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처럼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1:6)는 선언과 같이 의인과 악인은 현저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순수하게 의인들에 의해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것을 바랬던 것이다. 이것은 시편 기자들이 바랬던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완벽하게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야말로 가장 복된 존재였다. 이런 점에서 의인은 복 있는 사람’(1)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불완전한 세계이며 동시에 한시적인 세계이다. 즉 현실의 세계는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며 종말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궁극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신뢰와 소망에 따른 귀결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 역사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의 전능성이 아니고서는 결코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길을 인정하실 것과 악인의 길이 마침내 그를 멸망으로 인도할 것에 대한 신뢰는 오로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다. 그리고 악인을 망하게 하시는 분은 오로지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만 행하실 심판이었다. 상대적으로 의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12:1-3)을 통해서도 이미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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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언약의 성취와 의인이 누리는 복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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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다(12;1-3). 여기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밝혀진 것처럼 결코 세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복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11:8-10).

아브라함의 복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며, 아브라함은 그 나라에 속하는 모든 백성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었던 아브라함이 누리는 복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의당히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 주어질 것이었다. 이 언약은 마침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기업은 아브라함이 참여한 영원한 나라에 속하게 될 것을 보증하는 증표(sign)로서 의미를 가진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 있는 사람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삶과 구별된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1:2)이다. 이것은 복 있는 사람이 언약의 성취 과정에서 주어진 시내산 율법에 참여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심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셨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율법을 순종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그가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언약의 성취로 약속의 기업을 누리고 있을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동시에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1:3) 같이 그의 삶이 여호와의 통치 아래에서 형통하게 될 것을 보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거짓이나 오류가 없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형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 최종 열매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직접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5)는 사실을 확고히 한다. 처음부터 의인이 누리는 복된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자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의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의한 직접적인 결과로서 복된 자리에 이르렀음을 확인하였고 증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리에 초청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인은 그것을 복으로 여겼던 것이다. 반면에 악인은 처음부터 의인의 길을 싫어한다. 이것은 악인들이 적극적으로 의인의 길을 거부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그들의 결국은 멸망으로 귀착되고 마는 것이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이 세상을 이분법으로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누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과응보의 상선벌악(賞善罰惡)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상급과 심판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인간적인 판단이나 참여로 변경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편 기자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다르며 그 두 길은 나무가 열매를 맺음같이 명확하게 그 결실로서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길을 제시하는 것에는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보여주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편 1편은 인간의 행위와 관련하여 의인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악을 피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사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바로 의인의 지혜인 것이다. 동시에 지혜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삶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악인들의 파멸 역시 현재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13:24)는 주님의 경고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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