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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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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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이 시는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시편 기자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데,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시편의 주제이며, 어떤 측면에서 시편 전체는 바로 이 내용을 신성한 교훈으로서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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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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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 경건한 자가 축복을 받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그의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여호와께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는지 등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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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절 불경건한 자의 상태와 특성을 대조해 보이며, 그 장래를 계시하고, 또한 그의 궁극적 운명을 강한 어투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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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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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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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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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복 있는.” 우리 주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처럼, 시편 역시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복 있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형용사인지 아니면 명사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질 축복의 다양성 및 그가 누릴 축복의 온전함과 위대함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읽고서 “오, 그 놀라운 축복들!”이라고 감탄하게 되며, 그것을 (에인즈워스가 그렇게 하듯이) 은혜받은 사람이 받을 놀라운 축복에 대한 즐거운 탄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동일한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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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은혜받은 사람에 대해 소극적인 표현(1절)과 적극적인 표현(2절)으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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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행한다. 그에게 있어 경건의 길이란 평안과 즐거움의 길이다.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으며, 육욕적인 사람들의 교활하고 악한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고 불경건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내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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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그는 예전에 비해, 더욱 선별된 사람들과 더불어 동행한다. 비록 그 자신이 죄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는 보혈로 씻음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에 의해 소생함을 받았고, 또한 그 심령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의인의 회중 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감히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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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는 금욕주의자들의 냉소 안에서 아무런 안식도 발견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죄와 영생,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등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철학을 배웠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오만한 자의 자리는 매우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옥의 문에 아주 가깝다. 거기로부터 달아나자. 왜냐하면 그곳은 이내 공허해질 것이며, 멸망이 거기 앉는 사람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1절에서 사용된 점층법에 유의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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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꾀를좇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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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길에서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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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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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갈 때 그들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부주의하고 악한 자, 곧 하나님을 망각한 자의 꾀를 ‘좇는다’-그 죄악이 상습적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이다. 하지만 후에 그들은 상습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죄인의 길에 ‘서게’ 된다. 또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스스로 유해한 선생 혹은 다른 이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되며, 그리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들은 죄악 가운데서 학위를 취득하고, 파멸 박사로 임명되며, 다른 이들에 의해 악마의 권위자로 높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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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복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소유한 사람은 그러한 인물들과 더불어 아무런 교제도 나눌 수 없다. 그는 이 문둥병자들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 그는 마치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자신에게서 악한 것들을 제거한다. 그는 악한 자들에게서 이탈하여 동지도 없이 홀로 걸어가며, 그리스도께 대한 비난을 스스로 짊어진다. 죄인들로부터 그처럼 격리된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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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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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는 저주와 정죄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그 안에 있기를 기뻐한다. 더욱이, 그는 ‘날마다’ 그것을 읽고 ‘밤마다’ 그것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는 성경 말씀을 취하여 하루 종일 지니고 다니며, 잠 못 이루는 밤에는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한다. 형통한 날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중 시편을 노래하며, 역경의 밤에는 성경의 약속들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진실한 신자에게 매일의 양식이다. 하지만 다윗 당시에는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이 모세 오경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우리 모두가 성경을 베뢰아인들처럼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 이 시에 제시된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도 우리 중에는, 악한 자의 길로 걷지 않고 있다는 식의 소극적 차원의 정결함을 주장할 수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자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든든한 오른손으로 삼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최고의 동반자로, 그리고 훌륭한 안내자로 삼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축복은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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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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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저는……심은 나무가.” 그는 야생 나무가 아니라 “심은 나무”와 같다. 그것은 선택된, 소유물로 간주된, 재배된, 그리고 마지막에 끔찍스럽게 뽑히는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나무이다. 왜냐하면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마 15:13)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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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시냇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역자 주). 만일 한 시내가 마르면, 다른 시내가 물을 공급한다. 용서의 시내와 은혜의 시내, 약속의 시내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시내 등이 결코 마르지 않고 물을 공급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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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과 같다. 제 맛을 내지 못하는 때 이른 무화과처럼 시기 적절하지 못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그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고난의 때에 인내하고, 시련의 날에 믿음을 굳게 잡으며, 또한 번영의 시기에 거룩한 기쁨을 나타낸다. 풍성함은 은혜로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본질적 특성이며, 그 풍성함은 시기 적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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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가장 나지막하게 한 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가 베푼 자그마한 사랑도 역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열매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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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와 같은 약속을 지닌 사람은 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의 시각으로 어떤 약속의 성취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감각으로 판단함으로써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대적한다”고 말한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약속에 대해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지치고 곤고하여 그 약속에 예고된 것과는 정반대의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야 확실해지며, 믿음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자신을 대적하는 듯하여도 자신의 일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바라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외적인 번영이 아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영혼의 번영이다. 우리는 종종 유다 왕 여호사밧처럼, 금을 구하러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만들지만, 그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선당하고 만다(대하 20:35-37). 하지만 파선당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난해지고, 사랑하는 이를 여의며, 또한 핍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형편이 곧 최선의 상황인 경우가 종종 있다. 악인의 행운 속에 저주가 들어 있듯이, 의인의 십자가와 상실과 슬픔 속에는 축복이 숨겨져 있다. 성도의 시련은 신성한 농사이며, 이를 통해 그는 성장하며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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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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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두번째 부분 첫머리에 이르렀다. 이 구절에서는 악인의 열악한 상태와의 대조를 통해 앞에 묘사된 아름답고 유쾌한 장면의 색조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불가타역과 70인역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렬한 어투로 번역되었다: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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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우리는, 의인에 대해 묘사된 모든 좋은 것이 악인의 경우에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약속들에 대해 이중의 부정을 가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악인의 상태일 뿐이다. “악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실에 유의하라. 시편 서두에 대한 주해에서 살펴보았듯이, 악인이란 악행을 시작하는 자로서 초보적인 범죄자를 가리킬 뿐이다. 조용히 나름대로의 덕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상태가 그토록 서글프다면,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죄인들과 수치를 모르는 불신자들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첫 문장은 악인에 대한 소극적인 묘사이며, 두번째 문장은 적극적인 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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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나는 겨.” 악인들의 특성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이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죽은, 쓸모 없는, 실체가 없는, 그리고 쉽게 옮기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운명도 역시 이와 같다. 죽음은 그들을 곧장 무서운 불 속으로 집어던질 것이며,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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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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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들이 심판대에 서는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징벌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거기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들은 땅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방어벽 안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치를 당하며 영원한 경멸을 뒤집어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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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인이 한 명도 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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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땅에서는 의인들의 회중에 죄인들이 뒤섞여 있다. 모든 교회에는 마귀의 자식들도 들어 있다. 같은 경작지 안에 독초가 밀과 함께 자란다. 잡초/가라지가 철저히 제거된 밭은 아직 없다. 불순물이 금과 섞여 있듯이, 죄인들이 성도들과 섞여 있다. 하나님의 귀중한 다이아몬드들은 아직 자갈과 더불어 같은 들판에 놓여 있다. 의로운 롯과 같은 자들이 하늘 이편에서 소돔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맏아들의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한 영혼이 단 한 명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자. 죄인들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 하늘은 그들의 분수에 맞지 않는 곳이다. 악인이 낙원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물고기가 나무 위에서 살 수 없는 것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다. 설령 회개하지 않은 자가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하늘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 될 것이다. 물론 계속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러한 특권 자체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늘 궁전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과 처소를 얻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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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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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고 계시나”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줄곧 보고 계시며, 비록 그것이 때로는 안개와 어둠 속에 싸여 있을지라도, 그분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설령 그것이 재난의 구름과 폭풍우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닥치는 어떠한 해악도 그대로 놓아 두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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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들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길 역시 망할 것이다. 의인은 자기 이름을 반석에 새기지만, 악인은 자신의 기억을 모래 위에다 쓴다. 의인은 땅의 경작지를 갈며 거기서 수확한 것을 씨로 뿌리고서 자신이 영원한 삶을 누리러 들어가기까지 그것을 줄곧 거두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바다에서 쟁기질을 한다. 그가 타고 지나간 배 뒤로 그 흔적이 반짝이는 듯하지만, 곧 물결이 그 흔적을 덮을 것이며, 그와 친숙했던 곳이 더 이상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길” 자체가 망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한 자의 기억 속에만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이름은 조롱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선한 자의 코에 악취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 부패성에 걸맞는 악인에게만 알려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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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과 길을 정결케 하사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시며, 또 의인에게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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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와 설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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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편 전체. 아가서가 히브리어 원문상 “노래 중의 노래,” 즉 가장 탁월한 노래로 불리는 것과 같이, 이 시는 “시 중의 시”라는 명칭에 부족함이 없다. 이 시 속에는 기독교의 진수와 본질이 포함되어 있다. 제롬이 바울 서신에 대해 언급했던 바가, 이 시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 구성은 짧지만, 다루는 주제의 범위와 설득력은 넓고 강하다.” 이 시는 축복을 서두에서 언급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결론이 되기를 바라는 부분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잡이로 지칭되어도 무방하다. 그것은 악인이 빠져들어 가는 파멸의 유사(流沙)와 성도들이 영광을 향해 걸어가는 굳건한 땅을 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Saints’ Spiritual Delight, 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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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편 전체. 이 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조적인 주제들로 요약된다: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비참해진다. 이는 선지자들에 의해 제시된 두 가지 도전들을 나타내는 듯하다. 하나는, 모든 이들 중 경건한 자를 존속시켜 축복의 금양털을 얻는 유일한 용사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경건한 자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과시하려 해도 그들은 모든 이들 중 가장 비참하다는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Sir Richard Baker,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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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편 전체. 나는 고대의 주경가들(어거스틴, 제롬 등) 중 어떤 이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을 들어 왔다. 그들에 의하면, 시 1편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이 받은 상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존 프라이(John Fry,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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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시편 기자는 이 짧은 시 속에서 참된 행복에 관해 그 어떤 철학자, 혹은 모든 철학자들보다 더욱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들은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치지만, 하나님은 우리 손에다 새를 쥐어 주신다. -존 트랩(John Trapp, 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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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복 있는.” 우리가 “복 있는”이라는 푯말이 매달려 있는 곳에 이르면, 그 안에서 경건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리처드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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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주정뱅이의 자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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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좇지 아니하며······서지 아니하며······앉지 아니하고.” 부정적인 표현의 권고들이 어떤 경우에는 긍정적인 표현보다 더욱 절대적이고 단호하다.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며”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 이유인즉, 그는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면서 또한 악인의 꾀를 좇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둘을 동시에 좇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둘을 번갈아 가며 좇는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그가 항상 정결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리처드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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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하이쉬”(vyah)는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그 사람’을 뜻한다. 즉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님에 의해 지으심을 받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를 가리킨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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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들의 서로 다른 성격과 행실을 보여주는 특정한 상황들에 주목해 보라. (1) 불경건한 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분별력을 갖고 있다. (2) 죄인은 자신의 길을 걷는다. (3) 오만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악인은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권고하고 조언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며, 기도나 말씀 공부, 회개 등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정직하게 살고, 종교 문제로 법석을 떨지 말라. 그리하면 마침내 잘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권고를 좇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그들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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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범죄에 빠지는 구체적인 방식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정뱅이이고, 어떤 사람은 부정직하며, 어떤 사람은 정결하지 못하다. 온갖 종류의 모든 죄악에 빠진 사람은 드물다.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주정뱅이를 혐오하는 자들이 많으며, 탐욕을 혐오하는 주정뱅이들도 많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쉽게 범하는 죄가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버리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의 길에 서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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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자는 모든 종교와 윤리를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불경건함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죄를 조롱한다. 그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그는 모든 불신에 대한 신봉자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아담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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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복 있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이라는 단어는 복수형 명사 “아쉬레이”(yrva)이다. 이는 모든 축복들이 탈선하지 않은 자의 몫임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는 사람은 범사에 형통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논쟁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공허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면,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는 길을 발견했다면, 모든 축복들이 그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가 이 보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축복들을 찾아 헤맬 것이지만 결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선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선한 법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비록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피조물의 상태에 맞추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사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대하시며, 거룩한 자에게는 거룩하게 대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에게는 선하거나 좋은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달콤하게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달콤하지 않다. 여기서 “꾀”라는 단어는, 법령과 법률에 의해 구성 및 존속되지 않고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 사회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법령과 교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윗은 이 용어를 통해 악인의 교만을 겨냥하며 그의 만용을 꾸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행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꾀를 좇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의 “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이 사리를 분별하는 방법이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보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가 멸망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그리고 자신의 사리 분별에 따라 옳은 길이라고 여기는 옷 속에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킨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토록 축복받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악인의 어리석음” 혹은 “악인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옳은 듯이 보이는 것에 조심하도록, 즉 광명의 천사로 변장한 마귀가 우리를 간교하게 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악인의 꾀를 여호와의 율법과 대조시켜 우리로 하여금 양의 옷을 입은 늑대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악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자격자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고 가르치며 도와주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서지”라는 단어는 그들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스스로 매정해지며, 적의를 품은 말로 변명하고, 또한 자신의 불경건함 가운데서 교정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성경의 상징적 표현 방식에 있어 ‘선다’는 것은 굳건히 고정됨을 나타낸다:“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 그러므로 ‘기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의하면 ‘서다’라는 동사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라틴어의 ‘상’(像)도 ‘서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지만 악인이 서는 것은 자기 변명이요, 스스로 완고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옳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일을 하여 영원토록 빛나는 듯이 보이고자 한다. “자리”라는 용어와 관련하여서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지도자와 선생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2)라는 말씀과 같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해악을 끼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며, 철학자들의 견해들과 사람들의 전승(傳承)들과 그들 자신의 두뇌에서 나온 권면들을 늘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억압한다. 반면에, 그들은 영혼을 살리고 살찌우며 보존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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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오만한 자.” 악인은 깊은 죄악 가운데 빠지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출 2:14)라고 모세를 경멸했다. 아합은, 미가야가 자신에게 유리한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핍박했다(왕상 22:18). 벧엘의 모든 아이들은 엘리사를 비웃으며 “대머리여” 하고 함부로 조롱했다(왕하 2:23). 조그만 독 한 방울이 증가되어 거대한 독의 바다를 이룬다. 독사의 독 한 방울이 손에 묻어 혈관 속으로 들어가서 온 몸에 퍼지고, 마침내 가장 중요한 부위인 영혼까지 질식시키고 만다. 하나님이 저희를 비웃으실 것이다(시 2:4). 왜냐하면 저가 그분을 비웃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을 경멸하는 자는 결국 경멸을 당할 것이다. 하늘을 향해 뱉은 침은 결국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고 만다. 당신이 영적 의사들을 경멸하면 당신은 재가 되어 파멸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영혼이 심판에 처하지 않도록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토머스 애덤즈(Thomas Adams,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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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KJV에는 “그러나 그의 소원은 여호와의 율법에 있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여기서 “소원”이란 율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이는 율법의 약속들을 바라면서 축복만을 원한다거나, 그 위협들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떨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사실만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율법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사랑하여 그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가리킨다. 번영이나 역경, 혹은 세상이나 세상 임금 등 그 무엇도 그러한 기쁨을 빼앗거나 멸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난과 비방,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온갖 역경들을 통해서 가장 밝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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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이란 무안하지도 사그러들지도 않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나중에 실망만 안겨 주는 일시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항상 지속되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또한 그것은 자기 부모를 등에 업고 불길을 빠져 나왔던 아에네아스 안키세스에게서 엿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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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이 구절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거룩하고 영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내용을 연구해 보면, 외관상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단 한 번 읽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거나 극히 적은 부분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엘리야의 사환이 한 번 갔을 때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과 같다. 그는 일곱 차례나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어떠했는가? 그는 손바닥만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점차로 하늘 전체가 구름으로 뒤덮였다(왕상 18:41-46). 이처럼 당신은 성경을 가볍게 여기고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라. 그리하면 거기서 당신은 태양빛과 같은 광채를 볼 것이다. -조셉 캐릴(Joseph Caryl,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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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의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주교들은 그럴 듯한 이론을 내세워 함께 누려야 할 말씀의 보고(寶庫)로부터 평신도들을 몰아낸다:“성경은 이해하기 힘든 책이다. 여러분은 성경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지 않는가? 우리가 여러분에게 그 의미를 일러 주겠다. 하늘이 복된 곳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길은 험난하다.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우리가 여러분을 거기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큰 시련의 날에, 성경을 통해 구원의 안내를 받아야 하는 때에, 아뿔싸! 그들에게는 자신을 구해 줄 책이 없다. 그들이 성경 대신 우상들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것들이 평신도들이 의지하는 것이 되고 만다. 마치 그들이 12사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각가와 화가들의 판결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속임수에 속지 말라. 복음을 상고하여 그 말씀을 통해 위로와 구원을 받으라.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얻기 원하는 자는 그 방법도 중요시한다. -토머스 애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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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묵상하는 자로다.” ‘묵상한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논의하고 토의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항상 말과 관련되어 있다:“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시 37:30).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를 ‘지저귀다’로 번역했다. 이는 아름다운 은유라 하겠다. 새가 지저귀듯이,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계속적인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왜냐하면 말이란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독특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의 은혜로운 의미를 적절하고도 온전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묵상”을 위해서는 먼저 율법의 말씀을 철저히 준수해야 하며, 그 다음에 여러 성경 말씀들을 비교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숲 속에서 신나게 사슴 사냥을 하는 것과 같다. 거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수사슴들을 보내 주시며, 그들이 은밀하게 숨은 곳을 밝혀 주신다. 또한 하나님은 이처럼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가르침을 잘 받은 사람을 보내셔서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게 하신다.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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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의인은 여호와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며, 사람들은 그의 선한 행실을 보고서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그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밤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낮에는 그가 빛을 두려워하는 자들 중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며, 밤에는 그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낮에는 일할 시간이므로 열심히 일을 한다. 그리고 밤에는 주인이 도적같이 들이닥쳐 그의 게으른 모습을 보는 일이 없도록 늘 깨어 준비한다. -리처드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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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나는 조용한 곳에서 쉬지 않고 말씀을 본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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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묵상하는.” 묵상은 우리에게 분별하는 힘을 키워 주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한다. 우리는 말씀의 묵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선한지 악한지 분별할 수 있다:“한 사람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그 마음의 생각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자신을 분별하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영적 색인이다. 색인이 책 속의 내용을 보여주듯이,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를 보게 된다. -토머스 왓슨, Saints’ Spiritual De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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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묵상하는.” 묵상은 말씀으로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며, 영양이 풍부하고 감미로운 말씀을 마음과 삶 속에 간직하게 한다. 경건한 자들은 묵상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바돌로뮤 애쉬우드(Bartholo- mew Ashwood, Heavenly Trade, 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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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묵상하는.” 자연주의자들은 육체적 생명을 지탱하고 조절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기능들이 작용한다고 말한다. 그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1) 음식을 골라 섭취하기 위한 미각을 돋우는 기능, (2) 음식을 받아들였을 때 그것을 저장하기 위한 보유 기능, (3) 자양분을 혼합시키기 위한 소화 기능, (4) 마무리를 위한 첨가 기능 등. 묵상은 이 모든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판단력과 지혜, 그리고 믿음 등에 도움을 줌으로써, 읽고 들은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분별하며 또한 받아들이게 한다. 그것은 신령한 진리의 보화들을 기억의 확실한 보고 속에 잘 보관하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소화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특정한 진리를 영적 자양분으로 전환시켜 준다. 또한 그것은 새로워진 마음이 자라가도록 도와주며,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우리가 받은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는 힘을 증진시켜 준다. -나다니엘 래뉴(Nathaniel Ranew)의 글을 요약한 것, 1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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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나무.” 한 나무가 있는데, 그것은 요단 계곡에서만 발견되며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화사한 꽃과 암록색 잎을 지닌 서양협죽도는 정원 어디에 심어도 그곳을 넉넉하게 해 준다. 그것은 드물게나마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시냇가에 심겨져 적절한 시기에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는” 나무일 것이다. -스탠리(A. P. Stanley, D.D., Sinai and Pale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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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시냇가에 심은 나무.” 이는 동양의 경작 방식을 넌지시 보여준다. 줄을 지어 선 나무들 사이로 작은 개울이 흐르게 하는 방법을 통해 나무에게 지속적인 수분을 공급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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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시절을 좇아 과실을.” 과수를 심어 놓고 정해진 시기에 풍성한 과실을 수확할 수 있다면 주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는가? 주인은 결코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기대하는 대로 열매가 맺히며, 또한 그 결실은 정해진 때에 이루어진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는 경건한 교육은 분명 의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진지하게 이루어지는 말씀 교육은 그 열매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또한 그는 말씀으로 교훈을 받아 의의 열매를 맺으며, 항상 그의 이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아담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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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시절을 좇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헤아리시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신다. 그러므로 그 시간을 잘 활용하자.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할 때 지체하지 말고 베데스다 연못가의 무기력한 사람들과 함께 걸어 들어가자. 교회가 시련을 당하고 있을 때는 기도하며 배울 시기이다. 교회가 부흥하고 확장될 때는 찬양할 시기이다. 설교 중에 나는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를 귀기울여 들을 것이다. 지식과 지혜를 갖춘 이와 동행하면서, 나는 그에게서 어떤 지혜와 권고를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시험을 당할 때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기에 적절한 때이다. 내가 위엄 있고 힘있는 위치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때이다. 그리하여 생명 나무가 달마다 열매를 맺듯이,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마치 지혜로운 농부처럼 달마다 해야 할 일들을 완수함으로써 적절한 때에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존 스펜서(John Spencer, Things Old and New,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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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시절을 좇아.” 아, 이 얼마나 귀중하며 감탄할 만한 말인가! 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확언해 주는 말이다. 악인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정해 둔 날, 정해 둔 시간, 특정한 일 그리고 특정한 장소가 있다. 그들은 거기에 너무 집착한다. 그래서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는 이웃을 보고도, 그들의 마음은 괴롭지 않다. 반면에 복 있는 사람은, 모든 시간과 장소에 대해, 또한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자유롭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언제든지 봉사할 수 있다. 자기 손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지간에 그는 그것을 시행한다. 그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헬라인이나 야만인, 혹은 다른 어떠한 사람도 구별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요청할 때마다 시기 적절하게 자신의 실과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그의 실과들과 그의 시간에는 아무런 이름도 붙어 있지 않다.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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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시인은 잎사귀를 묘사하기 전에 열매를 먼저 묘사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않고 그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교회의 모든 신실한 설교자들에게 항상 가르쳐 알게 하신다(고전 4:20). 예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의 능력을 통해 열매로 보여주셨다.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 1:1).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여늘”(눅 24:19). 따라서 말씀을 선포하는 자는, 그 열매가 시들지 않게 하려면, 먼저 생명의 실과들을 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레고리의 말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경멸을 받는 자는 그의 교훈 역시 비난을 받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는 설교를 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책망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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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여호와의 모든 나무들은 상록수이다. 겨울의 추위도 그 푸르름을 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상록수들과는 달리, 그것들은 모두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C. H. S.(Charles Haddon Spurgeon의 약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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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러한 “형통”을 겉으로 보이는 세상적인 번영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러한 형통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형통이다. 만일 당신이 믿음으로 이러한 형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자신이 가장 큰 역경 처해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마귀는 의인의 형통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싫어하듯이 그것을 가르치고 듣는 자들도 역시 싫어하며, 온갖 세상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핍박한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다는 사실은 모든 이적들 중 가장 큰 이적이라 하겠다.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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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어느 비평 잡지에 실린 글에 의하면, 이 구절을 “거기서 나는 모든 것이 성숙해지리로다”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번역은 본문의 비유를 흠이 없게 만들며, 일부 마소라 사본들과 고대 역본들의 인정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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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으로 인해 외적인 형통이 뒤따른다면, 그것은 매우 복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라비아 숫자 영(0)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다른 숫자 뒤에 올 경우에 그 수효를 십 단위씩 증가시켜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존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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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겨.” 우리는 악인들에게 자신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사실에 대해 감사할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누리는 모든 좋은 일들에 대해 의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들을 누리는 것은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인들 덕분이기 때문이다. 겨가 밀과 가까이 뒤섞여 있는 동안에는 밀 덕분에 같은 특권을 누리며 조심스럽게 창고에 보관된다. 하지만 밀과 분리되자마자 그것은 밖으로 내던져져 바람에 흩어지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인들도 의인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 가운데서 사는 동안에는 의인에게 약속된 축복을 어느 정도 공유하지만, 의인들이 그들과 분리되고 나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에 옛 세상이 대홍수에 잠겨 버렸듯이 대홍수가 갑자기 그들에게 덮칠 것이다. 또한 롯이 소돔을 떠나 거기서 벗어났을 때, 불이 소돔을 뒤덮어 버렸듯이 그들에게 화염이 들이닥칠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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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바람에 나는.” “나는”은 ‘까불리는’이란 뜻이다. 갈대아 역본에서는 “바람”을 “회오리바람”으로 번역했다. 이는 악인의 영혼을 쓸어 가는 죽음의 맹렬한 폭풍우를 암시한다. -헨리 에인즈워스(Henry Ainsworth,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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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우리는 죄인이 결코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다. 의인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로 가며, 악인은 하나님이 멸하시는 길로 간다. 이 길들이 결코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사실상 그 길들이 결코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곧 그분의 “인정”하심이라는 말로써 의인의 길을 표현했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곧 그분의 멸하심이라는 말로써 악인의 길을 묘사했다. 비록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가끔 서로 만나며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은 결코 서로 만날 수가 없다.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서 멸망이 임한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결코 서로 만날 수 없는 상태이다. -리처드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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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하늘이 죄인을 용납하기보다는, 차라리 두꺼비나 뱀이 아일랜드 기후에 적응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존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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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다윗은 외관상 형통해 보이는 길을 피하고, 여러 가지 시험과 역경들을 감수하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러한 의인의 “길”을 한결같이 배척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지혜를 가진 자만이 이 길을 걷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길을 인정하신다. 이 길은 감각이나 이성으로써 알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만 알 수 있는 길이며, 그분의 오른손이 그들을 놀라운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그 믿음은 어둠 속에서 보게 하며,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보게 한다.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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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의인.” 의인이란 자기 자신이 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토머스 윌콕스(Thomas Wilcocks, 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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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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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죄의 진전 과정”, “그리스도인의 순결함” 혹은 “의인의 축복” 등에 관한 탁월한 본문이 될 수 있다. “의인의 축복”에 대해서는, 신자를 가리켜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복 있는 자라고 말한다. (1) 하나님에 의해. (2) 그리스도 안에서. (3) 모든 축복들을 지님. (4) 모든 상황 안에서. (5) 영원히. (6) 최고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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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의인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자각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1) 죄인들의 견해들. (2) 죄인들의 실제적인 삶. (3) 죄인들의 모임과 교제. 또한 말씀 묵상이 어떻게 우리로 이 세 가지 죄악들을 멀리하도록 도와주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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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교묘하고 점진적인 특성. -존 모리슨(John Mo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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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의인과 악인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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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하나님의 말씀. (1) 그 속에서 누리는 신자의 기쁨. (2) 신자가 그것과 더불어 친숙해짐.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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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여호와의 율법.” (1) 그것이 의미하는 것. (2) 그 속에서 신자가 기뻐할 사항. (3) 신자가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고, 여호와의 율법에 대해 생각하고 읽고 말하고 순종하며, 또한 악을 기뻐하지 않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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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하반절. 묵상의 유익과 도움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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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결실이 풍성한 나무.” (1) 그것이 자라는 곳. (2) 거기 이르게 된 과정. (3) 맺는 열매. (4)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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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시냇가에 심은.” (1)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원-“심은.” (2)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시내. (3) 그것으로부터 기대되는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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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종교가 형통한 삶에 미치는 영향. -블레어(Bl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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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형통의 특성, 원인, 증표, 그리고 그 결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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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특정한 시절에 과실을 맺기 위한 덕목들-고난 중의 인내, 형통할 때의 감사, 기회를 놓치지 않는 열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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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신실한 신앙 고백을 간직하는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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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절. 죄는 모든 축복들을 부정적으로 보게 한다(No.280 of “Spur- geon’s Sermons.”-“The Chaff Driven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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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죄인의 이중적 운명. (1) 심판-법정에서 정죄당함. (2) 성도들로부터 분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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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러한 징벌이 당연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징벌을 피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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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회중.” 위로부터 처음 나신 분, 그리스도의 교회. 이것은 귀한 주제로 다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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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상반절.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감미로운 격려. 여기서 “인정”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그 특성-그것은 관찰 결과 알게 되는 것, 혹은 승인을 가리킨다. (2) 그 근원-그것은 전지성과 무한하신 사랑에 의해 비롯된다. (3) 그 결과-보호, 구원 그리고 마침내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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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하반절. 악인의 길은 쾌락, 교만, 불신, 불경스러움, 핍박, 머뭇거림 그리고 자기 기만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데, 이 모두는 종막을 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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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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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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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이 시는 “아들이신 메시아의 시”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에는 주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를 대적하고 분노하는 사람들, 아들을 높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 원수를 제압하는 아들의 궁극적인 통치에 대한 묘사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이기고 승리하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읽어야 한다. 로스(Lowth)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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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들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른 것이 이 시의 주제이다. 다윗에 대해 문자적으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실존했던 다윗을 염두에 두고 읽어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지고, 구약의 역사를 노래한 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이란 실존 인물에 대해서만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장엄하며, 과장된 표현들이 있어서 더 중요하고 숨겨진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따라서 영적 다윗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읽어 보면 일련의 고귀한 사건들을 묘사한 것임을 곧바로 알게 되고, 그 의미가 더 고상해질 뿐만 아니라 더 명백해진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에 대한 묘사로 보기에는 너무 장엄하고 대담한 표현들이, 그가 상징하는 영적 다윗을 묘사한 것으로 보게 되면, 합당한 표현이 된다. 이 시를 먼저 역사적 인물 다윗에 대한 묘사로, 다음에는 영적 다윗에 대한 묘사로 살펴본 후에, 종합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 매혹적인 시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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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독특한 내용이지만 구구 절절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어떤 의미가 우선한 것이며 또 어떤 의미가 뒤따르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이제 여러 가지 어법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시편의 장엄하고 고귀한 정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해 아래 속한 일에서 하늘에 속한 일에 대한 묘사로, 사람에 대한 묘사에서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이해하게 되고, 마침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 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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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네 장면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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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분노하는 열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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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절하늘에 계신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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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절아들이 명을 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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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절주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자에게 순종하라는, 군왕들에 대한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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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구분은 시편의 내용에 근거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3절씩 4연으로 구성되는 시의 형식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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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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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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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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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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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세 절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인간 본연의 증오심이 묘사되어 있다. 사도행전 4:27, 28에 나타난 사도들의 말이 이 구절에 적합한 해설이 된다:“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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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이 시는 분노에 가득 찬 질문으로 시작한다. 시편 기자는 피조물이 서로 힘을 합하여 그들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을 보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가 이렇게 분노로 가득 찬 질문을 던지며 시를 시작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열방은 하나님을 향해 분노했다. 마치 바다에 폭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노도처럼 일렁이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 마음속에 헛된 것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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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분노가 많은 곳에는 잘못된 것이 있게 마련이며, 여기서는 악의가 넘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소동은 단순히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자들이 반역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악의를 품고서 동맹을 맺었다. 그들이 평화의 아들을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나서는 것은 일시적인 분노에서가 아니며,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린 증오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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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어쩌다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행동이 아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집요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며 전쟁을 벌인다. 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들은 바로처럼 외쳐 댄다:“그들을 지혜롭게 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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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혜의 절반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할 수 있다면! 세상의 죄인들은 지혜롭지만, 성도들은 둔하다. 죄인들은 왜 이처럼 난동을 부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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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이제 어떤 가증한 일이라도 자유롭게 하자. 이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신이 되자. 우리를 속박하는 것을 모두 벗어 버리자.” 그들은 배반자의 오만함에 더하여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라고 외친다. 마치 그들이 정말 끊어 버릴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착각한다. 뭐라고! 너희 군왕들이 삼손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너희들이 지극히 높으신 자께서 정하신 것을 파괴하고 부셔 버릴 꿈을 꾼다는 말인가? 그렇다! 이렇게 오만했던 군주들이 있었고, 지금도 이런 권세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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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친 듯이 대적하려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창조된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나라들에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고 마침내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통치를 하실 것이다. 그분의 오심은 쇠를 연단하는 불이나, 옷을 깨끗하게 하는 비누와 같을 것이며, 그날은 용광로의 불처럼 불사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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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세상을 당연히 통치해야 할 왕을 사랑하지 않고 배반자를 따른다. 마지막 날은 죄를 사랑하는 세상에 대해 종막을 고하고, 여호와의 나라를 그의 외아들에게 주시는 능력이 나타나는 날이다. 잔혹한 자의 목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를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이 멍에는 구원받은 죄인에게는 가볍고 쉽다. 우리는 이것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멍에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이것을 벗어 버리기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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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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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이제 악한 자들의 은밀한 반역과 사람들의 분노에서 눈을 돌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자.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모든 만물의 후사가 되신 그분의 외아들을 반역하는 사람들에 대해 왕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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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자의 엄숙한 위엄, 세상의 관원들과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퍼붓는 그분의 경멸을 주의깊게 보라. 그분은 이런 사람들과 다투지 않으신다. 다만 경멸하실 뿐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이성적이며,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들을 향해 단지 웃으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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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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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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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절. 그가 웃으신 후에 말씀하실 때가 온다. 배반자들을 후려칠 필요도 없다. 단지 입술을 움직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충분하다. 왕들의 힘과 열방의 분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분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그분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분의 말씀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씀이다:“너희들이 내게 적의를 품어도, 열방이 모두 모여 나를 대적해도, 너희들이 모든 지혜를 다하고 무슨 꾀를 부려도,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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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말 놀랍고 장엄한 선포가 아닌가! 대적하는 자들이 막고자 하는 바로 그 일을 하나님은 이미 행하신 것이다. 그들이 꾀하는 동안, 그분은 이미 이루셨다. 사람들의 뜻은 헛된 것으로 돌아가고,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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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반역한 인류의 모든 역사를 돌이켜 보라.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했던 오만한 자들의 말, 땅의 파도 소리를 들어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보라:“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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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온전한 그의 나라는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분이 능력을 발하시고 땅 끝까지 통치하시는 날, 아무런 고통이 없는 그분의 나라는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도 그분은 시온에서 통치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즐거이 평화의 아들에게 찬송을 돌린다. 앞으로 더 큰 투쟁이 있을 것이나, 승리는 우리 주시요 왕이신 그분의 것이다. 영광스러운 승리가 곧 올 것이다. 오, 주여! 기도하옵나니 그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소서. 왕께서 시온에 거하시고, 모든 원수에게서 보호해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이 시온의 영광이요 기쁨이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교회 가운데서 영광과 능력의 보좌에 앉으셨다. 그분 안에 있으면 시온은 안전하다. 시온의 백성들은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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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성벽은 힘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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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문은 하늘 군대가 지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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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의 기초는 흔들리지 않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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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권고와 사랑 위에 세워진 까닭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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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원수가 헛된 꾀를 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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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좌에 분노를 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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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파도가 일어 해변을 덮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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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더 이상 나아오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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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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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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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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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7절에서 또 다른 화자가 나타나 극적인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악한 자들의 모임(1-3절)과 하나님의 보좌(4-6절)를 모두 바라보았다. 이제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께서 그분의 통치권을 선포하며, 반역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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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내가 영을 전하노라.”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꾀와 분노를 비웃으셨다. 이제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구속주로서 직접 말씀하신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은 반역을 일으킨 왕들의 분노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아직까지도 침묵하지 못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영을 전하리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사람들이 꾀하는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이 분노하며 무너뜨리기를 원하는 그런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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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아들이라.” 이 말씀은 임마누엘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증언하는 구절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히 1:5). 우리가 참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구세주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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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구절이 우리 구주의 신성을 말하고 있다면, 이것을 불경스럽게 분석하려고 하지 말고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만일 이 구절이 아들께서 인성을 입고 오신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또한 이 신비로운 사건을 즐거워할 것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비밀을 불경스럽게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헛된 생각으로 추측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정의를 내리고 거룩하신 분의 신성을 벗기려고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난파를 당했다. 망망대해에서 우리의 작은 배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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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내게 구하라.” 위대한 군주는 신뢰하는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는 관습이 있었다(참조. 에 5:6; 마 14:7). 예수께서는 무엇이나 구하는 것을 받으셨다. 8절에서 그는 열방이 그의 유업이라고 선포하셨다. 그분은 열방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영을 전하셨다.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분은 한때는 못박히신 손에 이제는 권능의 홀을 잡으시고 이렇게 외치신다:“하나님께서는 내게 왕의 지위만 주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정복할 권능도 주셨다.” 그렇다! 여호와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분께 철장을 주셔서 반역을 꾀하는 열방을 깨뜨리게 하신다. 그들이 비록 제국의 힘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손에 철장을 들고 일어서시는 날에는 토기장이의 그릇이 깨어지듯 열방이 깨어질 것이다. 굽히지 않는 자는 부러질 뿐이다. 토기장이의 그릇이 깨어진 후에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께서 죄인을 심판하신 후에는 아무런 소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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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죄인들은 그분의 은혜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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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진노를 감당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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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십자가 그늘에 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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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기서 구원을 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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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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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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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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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편의 장면이 바뀌어 마지막 연에서는 반역을 꾀하는 자들에게 권고하는 말씀이 주어진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들이 미워하던 아들께 입맞추고 충성과 애정을 맹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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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지혜를 얻으며.” 우리는 항상 교훈을 받을 태도를 가져야 하며, 이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특별히 영혼의 구원을 얻게 하는 교훈은 당연히 받아야 한다. 원수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이성을 따라 행해야 한다. 너희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나니, 헛된 꾀를 버리고 그분께 기꺼이 순종하라. 그분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네게 심판이 임할 것이다. 예수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 그분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두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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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너는 하나님을 섬길 때에 두려움과 겸손으로 하라.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고개 숙여 겸손히 그분께 경배를 드리고, 크신 하늘의 아버지께 두려움으로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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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에는 항상 거룩한 두려움이 함께 있어야 한다.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하는 제물은 향기로운 제물이며, 그분의 제단에 다른 제물을 드려서는 안 된다. 기쁨이 없는 두려움은 고통스러운 고문이다. 그리고 거룩한 두려움이 없는 기쁨은 주제 넘고 뻔뻔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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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과 화해하고 순종하라. 죄 가운데서, 그분께 반역하는 가운데서 멸망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분의 진노 아래 갑자기 멸망하지 않는가! 그분의 분노가 일곱 배나 더할 필요도 없다. 그저 조금만 분노하셔도 우리는 멸망당하기에 충분하다. 오, 죄인들아! 우리 주님을 두려워하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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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시는 축복의 말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여호와의 복을 받았는가? 그분을 신뢰하는가? 우리는 거미줄처럼 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우리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면 할수록, 이 복을 온전히 알아 갈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기도로 이 시편의 묵상을 끝낼 수 있다:“주여, 우리 믿음을 더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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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편에는 의로운 자와 죄인의 대조가 나타나 있다. 시 2편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건한 열방들이 불순종하는 것과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승리할 것이 대조되어 있다. 시1편에서, 우리는 악인이 겨처럼 바람에 날려 가는 것을 보았다. 시2편에서, 그들은 토기장이의 그릇이 깨어지듯 부서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1편에서, 우리는 의로운 자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도 같다는 것을 보았다. 시2편에서, 의로운 자들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보다 더 귀하신 분으로 묘사되었다. 그분은 모든 나라의 왕이 되시고, 그분을 대적하던 열방은 그분 앞에 엎드려 땅에 입을 맞추게 되고, 그분을 신뢰하던 자들은 축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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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편의 시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이것들은 시편 전체의 서론과도 같으며, 고대의 어느 누군가는 이 두 시들을 하나로 묶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들은 두 편의 시이다. 바울도 이 점에 대해 말했다(행 13:33). 시 1편은 의로운 자의 특성과 운명에 대해 말한다. 시 2편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땅끝까지 다스리실 아들에 대한 시이다. 이 두 편의 시는 앞날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는 이 깊은 뜻을 모두 다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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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와 설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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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이것은 폭동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분노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분노하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사람의 내적 감정이 아니라, 내적 감정을 나타내는 외적 소동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나 고전 문학에서 사람들의 소동을 상징하기 위해서 바다의 폭풍과 일렁이는 파도를 언급하기도 했다. -알렉산더(J. A. Alexander, D.D.,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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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분노하며.” 바울은 사도행전 4:25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기운차고 위세가 당당한 말이 콧김을 내뿜으며 씩씩거리거나 울음을 우는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말이 울음 소리를 내고 전쟁에 나갈 때의 분노나 오만함 그리고 난폭함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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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허사.”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은 메달을 만들었는데, 그 메달에 새겨진 글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사라지다.” 스페인에서는 기념비적 기둥이 두 개 세워졌는데, 거기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1) “디오클레티안 황제, 로마에 파멸을 가져온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사라지게 한 것을 기념하여.” (2) “디오클레티안 황제, 그리스도에 대한 미신을 폐하고 여러 신들을 널리 섬기게 한 것을 기념하여.” 한 현대 작가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이방인들은 그들의 원수를 죽이고 장사 지낸 후, 그 위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던 ‘헛된 것’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박해는 기독교가 최종적이고 영원한 승리를 취하는 전야가 되었고, 무덤을 지키던 돌문은 빈 무덤을 지킬 뿐이었다. 스페인이나 어디서도 기독교의 무덤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살아 있는 자에게는 무덤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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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 여우와 같은 헤롯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분의 사역을 방해하여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지 못하게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라고 기록되었다. 열방이 이것에 성공할 수 없고, 그들의 손으로 행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것은 허사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허사인 이유는 이것을 행할 어떤 올바른 근거도 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고하여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 존재인지 알고 계시며, 마침내 그들 자신들도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지자는 이 점에 대해 유창하게 묘사했다:“[그들은]······거미줄을 짜나니······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사 59:5, 6). 그가 말했듯이 그들은 파리를 잡고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거미가 배에서 거미줄을 짜 내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에서 실을 짜 내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짜 낸 옷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옷감을 자를 수도 없고, 옷을 만들 수도 없다. 그들은 힘들여 물레를 돌리며 머리에서 실을 짜 내어 음모를 꾸미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에는 벌거벗어 추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에 비질을 하게 되면 이 모든 거미들과 거미줄들을 모두 쓸어 버릴 것이고, 그들도 황급히 기어서 도망갈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와 세상의 재주를 헛된 것으로 돌리기를 기뻐하시며 사랑하신다. -조셉 캐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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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수많은 사람들이 할 일을 마친 후, 이제는 능하신 자께서 나타나신다. -존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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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들은 왜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힘을 합했는가?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고자 했는가? 그의 재물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소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그분보다 재물이 많고 더 부유했다. 그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이것으로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전에 그를 결박하기도 했었다.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도록 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이미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고, 제자들도 그를 떠나 버린 마당에 이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빼앗고자 했을까? 그의 피인가? 그렇다. 마태는 “그들은 그를 죽이려고 꾀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마귀의 마음을 가져서 그의 죽음으로만 만족할 사람들이었다. -헨리 스미스(Henry Smith, 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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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그들이 다윗을 여호와와 함께 취급하다니, 이는 다윗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증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의 죄가 더해지고 이성을 잃어버린 이방이 심판을 받는다면, 비록 그들이 지금은 교만하고 오만하게 행한다 할지라도 다윗의 마음은 평안과 기쁨을 누리리라······다윗이 이 시편을 쓰던 당시에 그는 태풍 한가운데 갇힌 자처럼 되었고, 노도처럼 부서지는 파도가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듯 주위를 덮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사람들이 허사를 경영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들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파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주의 기름 부음 받으신 자를 해할 수 없다. -데이비드 피트케른(David Pitcairn,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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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들은 법도 없고, 두려움도 없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작심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달콤한 법을 노예에게 지우는 결박으로 간주했다(참조. 렘 27:2, 6, 7). 그러나 우리의 구세주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날개가 새에게 짐이 되지 않듯이 이것은 거듭난 자에게는 아무런 짐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법은 결박이 아니라 허리띠와 같아서 허리를 동이고 달려갈 길을 빨리 달리게 한다. -존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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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하늘에 계신 자.” “하늘에 계신 자”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1) 하나님은 사람들이 악한 마음으로 훼방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2) 그분은 사람들의 음모를 내려다보시며 다 아신다. (3) 그분은 전능하시며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아서 잭슨(Arthur Jackson,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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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죄인들이 꾸미는 음모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혜와 능력에 견줄 수가 없다. 우리가 보기에 사탄의 왕국이 난공불락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비열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매튜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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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우리를 비웃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웃으신다. 그분의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다. 이 웃음은 조롱의 웃음이며, 심판의 웃음이다.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자를 물에 빠뜨려 죽이면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이 땅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물에 빠뜨리는 동안 그의 딸이, 그의 궁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자 모세에게 애굽의 왕자들이 받는 교육을 베풀지 않았던가?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웃고 계시지 않았겠는가? 악인의 기쁨은 잠깐뿐이다. 그들이 다곤 신을 섬긴다고?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고 다곤 신의 목과 손을 부러뜨리셔서 사람을 인도하고 보호할 지혜나 능력을 남겨 두지 않으신다······그분은 이방인들이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포위하고 약탈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바벨론 사람들은 성전의 기물을 바벨론 땅으로 가져가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웃으시며 벽에 글을 쓰시니 벨사살이 두려워 떨지 않았던가? 그분의 웃음이 이처럼 두려운 일일진대, 그분의 분노는 어떠하랴! -토머스 애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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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하늘에 계신 자”라는 구절을 읽으면 하나님은 땅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무한히 위에 계신 분, 높이 계신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높이 계신 그분은 웃으신다. 이 땅에 속한 왕들과 민족들, 그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그분의 백성들을 해하려 한다 할지라도, 그분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하찮은 것일 뿐이다. 그분은 당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서 두려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고 웃으시며, 무능한 모습을 비웃으신다. 그분이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고 부숴 버릴 수 있고, 한 순간에 입김으로 소멸해 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진리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 아, 이 땅의 질그릇 같은 존재들이 하늘에 계신 분, 영광스러운 지존자와 겨룬다는 것이 얼마나 “허사”일 뿐인가! -데이비드 피트케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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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이처럼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반복법은 성경에 흔히 나타나는 표현법이다. 이미 확정된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반복법을 쓴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서 이렇게 말했다:“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창 41:32). 하나님께서 “웃으심이여,” 그리고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반복해서 기록한 것은 이 일이 필연코 일어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이 일을 행하심은 우리로 위안과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며, 우리가 시험을 당해도 낙심치 않고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고개를 들게 하려 하심이다:“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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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진노하사.”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시든 전염병이 돌게 하시든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분의 백성을 박해한 자들에게 보응하신다. -존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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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수를 심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바로를 보라. 그의 모사들, 군대들, 전쟁에 쓰는 준마들이 갈대가 물에 휩싸이듯 홍해 바다에 빠져 들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이처럼 비참한 종말을 당할 뿐이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잔혹하게 박해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로마의 황제들, 총독들 그리고 다른 고위 관리들 중 30명을 뽑아 그들의 종말을 살펴보았다. 한 사람은 성도를 잔혹하게 고문하고서 곧 자신이 발광하고 말았다. 또 한 사람은 그의 자식에게 죽음을 당했고, 또 다른 사람은 눈알이 머리에서 튀어 나와 눈이 멀고 말았다. 물에 빠져 죽은 자, 목매어 죽은 자, 포로로 잡혀 가서 죽은 자, 차마 볼 수 없이 비참하게 넘어져 죽은 자, 더러운 병에 걸려 여러 의사들이 그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지 못해서 처형을 당할 만큼 지독한 냄새를 풍기다 죽은 자, 두 사람은 자살했고, 한 사람은 자살하려다가 실패해서 다른 사람이 죽여 주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다섯 사람이 그의 백성이나 종들에게 암살당했고, 또 다른 다섯 사람은 가장 처참한 병에 걸려 죽었고, 여덟 사람은 전쟁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혀 가서 죽었다. 마지막으로 배교자 줄리안은 어떠했는가? 그는 번영을 누리던 시대에 단도를 빼어 들고 하늘을 향해 휘두르며 하나님의 아들을 “갈릴리 사람”이라고 부르며 모독했다. 그가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았을 때, 피 묻은 자신의 옷을 하늘로 던지며 이렇게 외쳤다:“갈릴리 사람, 당신이 이겼습니다.” 프랑스 왕 샤를 9세(Charles IX)는 기독교인을 무참히 학대했는데, 볼테르(Voltaire)의 글에는 땀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어간 그의 극심한 고통이 나타나 있다. -윌리엄 플러머(William S. Plumer, D.D., LL.D.,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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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메시아에 대해 다음의 특성에 주의를 기울이라. (1) 영광스러운 구세주의 직위와 특성-그분은 왕이시다:“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6). (2) 통치하시는 그분의 권위-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나의 왕”이라 하신다:“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맡기셨다.” 세상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이 메시아를 왕으로 세우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3) 그분이 다스리는 왕국-“내 거룩한 산 시온”은 교회의 모형이 된다. 성전이 시온산 위에 세워졌기에 그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보좌는 교회에 있으며, 이 교회는 그분의 지휘소가 되고 그분이 거하시는 곳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확고하다:“내가 나의 왕을······세웠다.” 이 세상과 사탄의 세력이 메시아를 대적해도, 그분은 아버지의 세우심을 따라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스티븐 차녹(Stephen Charnock, 1628-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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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 가지 면에서 왕이시다. 첫째, 원수에 대한 왕이시며, 둘째, 성도들의 왕이시며, 셋째, 아버지의 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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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리스도는 원수들의 왕, 즉 원수들보다 위에 계신 왕이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왕들의 왕이시다. 이 세상에 속한 권세자들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그리스도를 필적할 수 없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이렇게 표현했다:“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사 40: 15). 그렇다면 세상의 왕들이 어떻게 메시아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왕들 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천사들 위에 계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들도 그분께 경배하라고 하지 않았는가(골 2:12; 히 1:6)······그분은 모든 왕국과 모든 나라들과 권세들과 백성들 위에 계신 왕이시다(단 7:14)······하나님은 열방을 그리스도께 주셨고, 땅 끝까지 모두가 그분의 소유이다(시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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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왕이시다. 그분은 악인과 선인, 모든 사람의 왕이시다. 악인에게는 능력과 권세를 보이며 통치하시나, 성도들에게는 은혜와 성령으로 다스리신다. 아!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이며, 그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스리신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도들의 양심과 의지를 다스리시며, 그들의 사랑도, 그들의 판단까지도 모두 다스리신다. 그리스도는 나라들 위에 군림하여 통치하시나, 성도들을 대하여는 그들 안에서 다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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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왕이시다. 아버지께서도 그를 왕이라고 부르셨다:“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그분이 아버지의 왕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왕도 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아버지의 왕이 되신단 말인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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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 두 가지의 왕국을 맡기셨다. 첫째, 영적 왕국인데 이는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서 다스리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성도들의 왕이시다. 둘째,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세상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주관하신다. 그분은 나라들의 왕이시다. -윌리엄 다이어(William Dyer, Christ’s Famous Titles에서 요약한 것, 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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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우리 주님께서 아들이 되셨다는 것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경외하는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제 넘은 호기심을 보일 뿐이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경배할 내용이다. 믿음과 경외심을 보이지 않는 신학자들의 논쟁은 아무런 유익도 없다. -C. H.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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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내게 구하라.”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심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한 구절은 없다. 그분은 왕이시며, 또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은 이 두 가지 직책을 모두 하나님에게서 받으셨다. 그분이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해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것처럼, 또한 같은 권위에 근거해서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이다.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구하신다. -스티븐 차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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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초상화를 그리는 자들은 사람을 보고서 가능한 한 그와 똑같은 모습을 그리려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원형으로 보시고, 성도들이 고난과 은총을 받고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닮아 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성도들보다 뛰어난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성도들도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고난과 같은 고난을 당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모든 성도들도 거룩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리스도처럼 거룩해질 수는 없다. 이는 진흙에 새겨진 것을 순금에 새겨진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았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도를 통해 실현하셨다. 이처럼 성도들도 약속으로 받은 것을 기도로 실현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내게 구하라 내가······주리니”라고 하셨듯이,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가 붙드는 나의 종”(사 42:1)이라고 하시며 모든 고난 가운데서 그분을 돕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의 그늘 아래 섰을 때에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그분은 성경에 약속된 “씨”이시며, 원수들을 이기고 승리하실 것이 약속된 분이시지만, 그분은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는 왕으로 통치하시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대제사장으로서 간구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와 간구로 말씀하신다.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정욕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원수들을 정복하는 정복자가 될 것을 약속받았다. 또한 위대한 약속이 실현되기를 겸손히 기도하며 간구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윌리엄 거놀(William Gurnall, 1617-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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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 너의 기업을, 그리고 너의 소유, 땅 끝을 주리니.” 히브리어 성경으로부터 8절을 이렇게 직역할 수 있다.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고 부르는 자를 위해서 열방과 땅 끝을 그에게 주기로 이미 예정해 놓으신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실 때는 아들이 받을 기업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기업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다. 이방은 이미 아들의 “기업”으로 예정된 것이며, 땅 끝도 그분의 소유로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셨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에 함축된 의미이며, 이 의미를 영적 다윗 곧 하나님의 진실된 아들, “만물의 후사로 정하신 분”에게 적용하게 되면 그 중요성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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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장”(杖)이란 성경에서 여러 의미로 쓰인다. 이것은 사용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물질로 만들 수 있다. 초기에는 왕권의 상징으로서 나무로 만들어진 장을 썼는데, “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홀은 그 중요성이 더함에 따라 제국이나 특정한 왕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금으로 만들어진 홀은 부와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시편 45:6에 나오는 “공평한 홀”은 정의, 진리, 평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러한 특성은 이 땅에 세워질 ‘메시아의 나라’의 특징이다. 요한계시록 19:13-15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는 이가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라는 표현이 나온다. “장”이 그분의 “홀”을 말한다면, 이것이 철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전능하신 “왕 중 왕”께서 엄한 심판을 하실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장”이 재림하실 하나님의 아들이 소유한 ‘왕의 홀’을 의미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날카로운 검”과 함께 나타나는데, 이로 보아 “철장”도 전쟁의 도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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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든지 시편에 나오는 “철장”은 주권자의 손에 쥐어진 것이지만 권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교정과 책망의 도구이다. “장”은 이런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책망의 도구로 쓰이는 “장”은 주로 지팡이를 썼는데, 시 2편에서는 “철장”으로 책망하신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은 책망이 얼마나 엄격하고 무서울 것인가를 말해 준다. 이 책망을 받는 자는 단순히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깨어지고 말 것이다:“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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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장”으로 깨뜨린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다음 구절에 그 결과가 나타나 있다:“질그릇같이 부수리라.” 깨는 도구가 “철장”이고, 깨어지는 것이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이며, 깨는 자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질그릇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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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에 나타난 이 예언과 약속은 구약 역사에 나타난 다윗을 통해서는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을 뿐이며, 온전한 실현은 영적 다윗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영적 다윗이 왕 중 왕으로서, 위엄과 영광 중에 그 손에는 철장을 쥐고 나타나시는 날이면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적그리스도의 세력들, 세상에 속한 왕들과 민족들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약속하신 것, 비싼 값을 치르고 사신 당신의 기업을 취하실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징조를 볼 때,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데이비드 피트케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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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예수께서 모든 왕들의 왕이신 것처럼, 복음은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교사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하여 그 교훈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실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여 그 가르침을 멸시한다면, 그들의 지혜로 말미암아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세상의 관원들도, 군왕들도 모두 복음을 들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왕들 앞에 섰을 때에도 담대하게 선포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권세 앞에서 아첨하는 자들은 마귀의 부엌에서 접시나 닦아야 할 것이다. -C. H.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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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진정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두려움이 없는 기쁨은 경망스럽고 무엄한 것이다. 또한 기쁨이 없는 두려움은 노예의 두려움이다. -윌리엄 베이츠(William Bates, D.D., 1625-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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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을 섬기고 즐거워하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안일하게 섬기면서도 어떤 두려움도 없이 기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을 위하는 위선자들이며, 자신이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주제 넘게 생각하는 자들이다. 이들에 대해 시편 기자는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시 10:5)라고 했으며, 또한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시 36:1)고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의롭게 보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심판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 중에서 그분 앞에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아무도 없다. 둘째, 두려움 가운데 섬기고 떨면서 기뻐하는 것이다. 의로운 자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이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심판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또한 그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음을 알고서 기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을 돌아보아 반성하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린다. 잠언은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잠 28:14)라고 했으며, 빌립보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고 했다. 이들은 이런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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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새벽별이 나타나면 곧 따스한 태양이 떠오르듯,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적 기쁨을 자아낸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행하고, 성령의 위로 가운데서 살아가라.” 하나님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주셔서, 우리로 노예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다. -토머스 왓슨(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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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입맞추라.” 입맞춤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표시로 나누는 것이다(창 33:4; 삼상 20:41; 롬 16:16; 고전 16:20). 입맞춤은 또한 열등한 자가 위에 있는 자에게 복종하는 순복의 표시로 하는 것이다(삼상 10:1). 또한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입맞춤을 할 수 있다(왕상 19:18; 욥 31:27). -존 리처드슨(John Richardson, 아르다의 감독,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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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이고 찬양하세! 이제 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행할 일이다. 구약에서는, 심지어 아가서에서도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1)라고 말하며 술람미 여인이 입맞춤받기를 원했는데, 이제 주님은 그리스도의 교회 중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로 그분께 “거룩한 입맞춤”으로 진실된 사랑을 보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 진실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경외함이 따르는 사랑’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이 아니면 주님은 “진노”하신다. 사랑의 주님은 또한 공의 가운데 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진노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된 사랑으로 사랑하며 입맞추면, 그분의 진노는 속히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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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1)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이 말씀은 당신이 인생길을 걷는 동안 그분을 당신의 친족으로, 당신의 주권자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이 나갈 때나 들어올 때,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일에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대할 때, 어느 때나 하나님의 아들을 당신의 주님으로 삼고 순복하라는 말이다. 그분께 입맞추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입맞춤은 사랑하는 자가 소망하는 것이다:“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아 8: 1).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받게 된다면 다윗을 생각하라. 그도 하나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추다가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받기도 했다. 당신이 주를 섬김으로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들이 당신을 비웃고 괴롭게 할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평강으로 채워 주시리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진노”로 인해 질서가 파괴되고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면, 이 진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원수와 친구를 분별하는 분노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가리는 것을 분별하는 진노라면, 이 진노는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힐러리(Hilary)는 “사람의 고난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것이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진노하실 때에 사람에게 벌을 주신다. 그러나 이 시편에 나오는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우리가 입맞추어야 하는 아들의 진노이다. 우리는 아들을 대하면서 마땅히 하나님을 대하듯 해야 할 터인데 사람을 대하듯 하며, 심지어 사람보다 못한 존재처럼 너무도 쉽게 대하지는 않는가? 이렇게 하면 그분은 진노하시고 우리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3)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리하면 아들은 진노를 멈추실 것이다. 그분이 진노하시면, 그분의 철장에 입맞추라. 그리하면 진노가 떠나리라. 그분이 진노하실 때에 그분을 두려워하라. 당신을 속히 회복시키시리라. 입맞춤의 향기를 통해 영적 양식을 채우고, 심판 중에 자비를 얻고, 파멸 가운데서 회복하게 되며, 참회의 기간 중에 축제를 벌이고, 진노 가운데서 기쁨을 얻게 된다. -존 던(John Donne, Dean of St. Paul’s, 1621-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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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아들에게 입맞추라.” 아버지와 화목하기를 원한다면 아들과 입맞추라.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아 1:2)라는 구절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였다. 이제 그분께 입맞추자.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비를 베푸사 먼저 우리에게 입맞추어 주시면, 우리는 경건함으로 그분께 입맞출 수 있다. 주여, 이러한 입맞춤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사 우리로 기름지고 풍성한 결혼 잔치에 참여케 하소서. 어린 양의 신부를 보며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결혼의 축가를 부를 때에 우리로 당신께 입맞추게 하소서. -토머스 애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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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분의 코(콧구멍)가 조금만 달아올라도”라고 표현되어 있다. 콧구멍은 진노가 나타나는 기관이므로, 이 기관을 들어 진노를 표현했다. 코가 창백해진다거나 콧김을 뿜는 것은 진노의 표현이다. 우리들의 표현으로도 코방귀를 뀐다는 것은 분노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조셉 캐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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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그 진노.” 그분이 조금만 진노하여도 파멸을 당하거늘, 진노가 극에 달한다면 그 참혹한 결과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존 뉴턴(John New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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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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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편 전체. 죄의 특성을 보여주고, 죄가 다스릴 경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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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비종교적인 것보다 더 비이성적인 것은 없다. 중요한 주제이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유들, 그에 대한 반박, 그들을 향한 애도, 회개, 중보자를 향한 증오에 나타난 인간의 죄악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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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복음에 대한 박해는 비이성적이고 비효과적이다. 존 뉴턴이 두 편의 설교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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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모두 헛된 것임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가 많은 것도, 그들의 열심도, 그들의 능력도, 그들의 지혜도 믿을 것이 못 된다. 이것들은 그리스도를 위한다기보다는, 대부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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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Spurgeon’s Sermons,” No. 495., “The Greatest Trial on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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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적하는 참된 이유-하나님께서 그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에 대한 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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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반역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비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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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진노의 소리.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여러 가지 소리에 대한 시리즈 설교에 포함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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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그리스도의 주권. (1) 주권에 대한 저항. (2) 주권의 확실성-“세웠다.” (3) 주권을 유지하는 능력-“내가.” (4) 주권이 나타나는 장소-“거룩한 산, 시온.” (5) 주권적인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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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그리스도에 대해 예정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영. 예수의 아들 되심.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사들과 부르심을 성실하게 선포하고, 겸손하게 구할 것을 가르친다. -토머스 윌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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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그리스도의 유업. -윌리엄 제이(William Jay). 기도는 필수적인 일이다. 예수께서도 기도하여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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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악인의 파멸. 악인의 파멸은 확실하고, 꼭 일어나고, 참혹한 것이고, 철저하며, 다시 회복할 수 없다. 이것은 토기장이의 그릇이 깨어지는 것과도 같다. 이 세상의 잘못된 체계에 심판이 임할 것이다. 복음(철장)은 인간이 만든 그릇을 깨뜨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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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왕과 관원들이 들어야 할 진정한 지혜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다. 다스리고 재판을 하는 왕과 관원들은 복음의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원리나 본보기 등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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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여러 가지 경험들. 무덤에서 돌아오는 여인들의 경우를 참조하라(마 28:8). 성령께서 설교자의 마음을 주관하시면 이 주제는 깊은 안식을 주는 설교가 될 것이다. 참된 종교에는 여러 가지 덕과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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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간곡한 초대. (1) 명령. (2) 이유. (3)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Spurgeon’s Sermons,” No.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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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하반절.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속성, 대상, 그리고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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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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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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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이다. 다윗이 그 아들의 추적을 피해 충성스러운 부하 몇 명만을 거느리고 밤중에 기드론 시내를 건너 피신한 슬픈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다윗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분도 역시 피신하셨다. 그분도 자신을 쫓는 무리들을 피해 소수의 연약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여러 주경가들이 이 시를 “아침의 찬양”이라고 이름붙였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 안에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입술로 그분을 향해 노래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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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이 시는 각각 2절씩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시편의 개요를 잘못 잡으면 시편을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 이 시의 네 부분은 한 가지 장면에 대한 연속적인 묘사가 아니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여러 장면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 몇 가지 관련 주제들을 다루게 되는데, 시 3편도 이와 마찬가지다. 시편에는 통일성이 있다. 그렇다고 한 가지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주제가 서로 연결되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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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원수들로 인해 하나님께 탄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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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절주님에 대한 신뢰를 선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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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절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안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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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절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해서 힘을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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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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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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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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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가련하고 마음이 찢어지듯 상처받은 아버지는 그의 대적이 많음을 탄식한다. 사무엘하 15:12을 보면 다윗의 군대는 날로 그 수가 감소하는데 “반역하는 일이 커 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고 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황망한 가운데 놀라 도망가는 아버지, 방랑자는 이렇게 외치며 탄식했다. 아! 날이 갈수록 내 고난이 더하니 내 비극의 끝을 볼 수 없노라! 내가 이미 비천한 자처럼 낮아졌거늘······아! 내 원수가 이렇게 많다니! 내 사랑하는 압살롬, 그가 내게 반역을 하다니······. 내 마음은 상할 대로 상하고 찢어졌거늘, 아! 아히도벨마저! 내 충성스러운 모사까지도 내게 등을 돌리다니. 보라! 나를 따르던 내 장군들과 군인들도 나를 떠났구나.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인생의 고난이란 함께 몰려오는 법, 슬픔은 대가족처럼 우리를 덮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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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그들의 군대는 내 군대보다 강합니다! 그 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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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세주께서도 수많은 대적으로 둘러싸였던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없이 많은 죄악들, 악마의 군대들, 육체적 고통, 영적 슬픔, 사망과 지옥의 세력들의 연합, 이들이 인자를 대적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 주님께서 진노 중에 그들을 밟으시고 대적의 무리를 파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주님은 우리를 괴롭히려던 그 무리들을 포로로 잡아 가셨으며, 우리를 대적하려던 자들을 낮추셨다. 용이 예수의 영혼을 향해 침을 쐈을 때 용은 그 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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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다윗은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서 원수들이 그를 공격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 그를 가장 절망케 하는 무기에 대해 털어놓았다:“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이전의 친구들, 그러나 이제는 멀어져 간 친구들은 슬픈 듯이 이렇게 말했고, 그를 대적하는 원수들은 기뻐 날뛰며 이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그가 온전히 멸망해 버리기를 바랐다. 그의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다는 말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말이었다. 다윗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양심은 그에게 무엇을 생각나게 했을까? 그는 밧세바와 동침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던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원수들은 그가 밧세바와 범죄한 것을 들추어 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네 손에 흐르는 피를 보라.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고 떠나셨다!” 시므이는 다윗의 면전에서 그를 저주했으니, 이는 뒤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는 사람을 믿고 담대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떠나갔다. 다윗은 자신을 비방하는 말들을 듣고서 믿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하늘에서 시작된 모든 시험들, 지옥에서 올라오는 모든 유혹들,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십자가를 한데 묶는다 해도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만큼 끔찍한 시험은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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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께서도 이와 같은 고통을 견디셨음을 기억하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빛이 없는 암흑 가운데 걸어가는 것과 같다. 저주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저주이다. 마치 쓴 쑥과 쓸개즙을 섞어 놓은 것처럼 쓴 고통이다.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우리를 위해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험을 겪으신 주님을 사랑하자. 이 시에 나타난 슬픔을 보면서 주님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교훈을 얻자. 이 시에서는 다른 시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윗보다는 다윗의 주님에 더 적합한 내용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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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한 뜻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음악의 휴지부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음을 더 크고 높게 하라. 더 높은 소리를 내라.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더 고상한 내용이니, 현악기의 소리를 다시 조정하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현악기는 줄이 쉽게 느슨해진다. 그래서 줄이 느슨하게 되면 다시 팽팽하게 해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기의 줄은 어떠한가? 우리는 마음의 줄을 다시 조이고 높은 소리로 노래해야 하지 않겠는가? “셀라”라는 구절을 대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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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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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우리도 마음의 줄을 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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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노래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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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셀라”를 대할 때마다 ‘더 잘 살펴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셀라” 앞에 나오는 말과 뒤에 나오는 말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성경에서 우리에게 잠깐 멈추어 묵상하라고 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즐겁게 노래하라고 할 때는 거기에 아름다운 교훈이 숨겨 있기 때문이다.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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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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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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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고백한다. 히브리어로 “방패”는 단순한 방패가 아니다. 이것은 “원형의 방호물”을 말한다. 그래서 이 원형의 방호물은 사람을 온전히 둘러싸서 위와 아래, 전후, 좌우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해 준다. 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온전한 방패가 아니신가! 그분은 사탄의 불화살도 막아 주시고, 외부에서 오는 시련의 폭풍에서도 감싸 주시고, 내면의 마음에 회오리 바람이 일 때에도 “평강!”을 말씀하시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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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광이시요.” 다윗은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그 자신의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이제 승리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시고 영광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 아! 현재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신 것은 그분의 은총이 아닌가! 또한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에도 영광이 있다. 이는 분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 가운데서 즐거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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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높이 들어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내 비록 슬픔 가운데 고개 숙이지만, 곧 기쁨과 감사로 내 머리를 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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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에는 하나님의 삼중의 자비가 나타나 있다. 그분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을 방어해 주시고, 멸시받는 자에게 영광을, 위로받지 못한 자에게 기쁨을 주신다!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은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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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왜 다윗은 “나의 목소리로”라고 했을까? 하나님은 물론 조용히 드리는 기도도 들으신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들은 은밀히 기도하는 중에도 소리 내지 않고 기도하는 것보다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어쩌면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내 잔혹한 원수들이 나를 둘러싸고 떠들어 대며 소리를 높여 외치지. 나도 내 목소리를 높여야지. 내 외침은 그들보다 높이 오를거야. 그들은 나를 비방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대지만, 나의 외침은 하늘 위까지 솟을거야. 그래서 이 모든 난리 소리보다 더 크고 강하게 하늘 보좌에 닿도록 해야지.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분은 나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 분이지 않는가.” 기도의 응답은 영혼의 음식과도 같다. 이는 감미로운 것이다. 우리가 험난한 세상에 산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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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 다시 한번 “셀라”가 나타난다. 아! 피곤한 성도들이 있는가? 잠깐 쉬고서, 마음의 줄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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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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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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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다윗은 믿음이 있었기에 누워 잘 수 있었다. 그가 불안했다면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원수들이 오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지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오만한 자의 주제넘는 잠도 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이런 잠에서 구원하소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잠을 잔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감겨 주신다. 그러나 다윗은 또한 잠에서 깨어났다. 어떤 사람은 자고 깨어나지 못하는 사망의 잠을 자기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수많은 원수들에게 노출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품안에 머리를 묻고 섭리자의 날개 아래서 기쁘게 잠을 잤고, 다시 안전하게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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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단잠을 자고 깨어난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셨음을 알았다. 누군가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 글을 들어 보라:“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평강은 남자다운 사람들의 용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평강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 외적인 상황과 무관하게 우리를 지키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이로 인해 영광을 얻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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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또 하루의 전투를 치르기 위해 말에 안장을 조이면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그는 원수들의 수나 그들의 지혜를 과소 평가하지 않았다. 원수들은 “천만인”이나 되었다. 그들은 또한 지혜가 있었다.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둘러치며” 추적하듯이, 원수들이 그를 잔혹하고 교묘하게 추적했다. 그러나 그는 떨지 않았다. 원수들을 바라보며 그는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피할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 사냥꾼들이 사슴을 둘러싸고 포위하듯 그를 포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포위망을 뚫으리라. 그가 원수들 중에 갇혀 있을지라도, 그들이 해치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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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윗은 기도 없이 전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무릎을 꿇고, 여호와 하나님께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하는 것이다(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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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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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것에 대한 믿음이 확실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일어나시기만 한다면, 그는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는 원수들을 맹수에 비교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턱을 부수셨다고 선언했다. 이제 원수들은 다윗을 해할 힘이 없다. “주께서······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뺨을 치셨다. 이제 그들이 입을 놀려 무슨 비방을 한다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빨 빠진 턱주가리로 누구를 해할 수 있겠는가? 오, 성도들이여, 기뻐하라! 우리가 싸우는 대적은 머리가 부서진 용이요, 턱에서 이빨이 빠져 버린 원수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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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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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 구절에는 칼빈의 교리가 농축되어 나타난다. 성경을 살펴보고 정직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원수들과 늘 다툰다. 원수들은 “구원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속한 것이야. 사람의 선행에 의한 것은 아니라 해도, 최소한 의지는 있어야 구원을 받는 거야”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구원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여기에는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 당신의 백성을 부르신다. 그분은 은혜로 부르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신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성도들이여, 이것을 체험으로 알기를 원한다. 우리의 교만한 혈과 육으로는 결코 배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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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 마지막 구절에는 구원의 특수성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구원은 애굽이나 두로나 니느웨에 내리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 피를 주고 사신 백성, 영원히 사랑하시는 백성에게 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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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 이제 마음의 머리를 들고 찬양하라. 잠시 멈추어서, 이 가르침을 묵상해 보라:“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하나님의 분별하시는 사랑, 영원하고 무한하고 변치 않는 사랑, 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항상 경배하자. 내 영혼아, 바쁜 걸음을 멈추고 쉬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해 보라. 주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았는가? 믿음의 눈으로 이것을 바라보았는가? 여러 가지 받은 축복이 많겠으나, 이것이 진정 가장 큰 축복이 아닌가? 이 축복을 받았으면 일어나 노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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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아! 찬양과 경배를 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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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날 사랑하시나요?”라고 물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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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가 지극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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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세주의 가족이 되었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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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께 영원한 감사를 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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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와 설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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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시편의 머리말에 대해서는 유명한 학자들이 상반된 주장을 제시하기 때문에 확신 있게 견해를 발표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시편의 머리말을 누가, 언제 시편 본문에 첨가시켰는지 알지 못하며, 또 머리말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하여, 가볍게 여기고 제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Augustine), 데오도레트(Theodoret) 등 초기의 많은 학자들은 이 머리말들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본문의 일부로 보았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시편을 낭송할 때 머리말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랍비들도 머리말에 대한 해석을 계속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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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머리말을 만들어 냈으며 현재 있는 자리에 첨가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고대로부터 머리말이 본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머리말들은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에도 나타나는데, 이 역본에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머리말들이 포함된 경우도 있다. 제롬 역본은 70인역을 따라서 머리말이 붙여졌다. 필자는 시편의 머리말이 주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머리말이 분명히 잘못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머리말과 시편의 내용이 맞지 않는 경우는 발견하지 못했다. 에스라가 정경을 편집할 때 이 머리말들을 많이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는 시편이 작성되던 시대와 거의 동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존 메이슨 굿(John Mason Good, M.D., F.R.S.,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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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여기에서 처음으로 "시"란 말이 나타난다. "시"를 히브리어로 "미즈모르"(rwmzm)라고 하는데, 이는 가지치기를 뜻하며 쓸데없는 단어들을 제해 버리고 짧은 문장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말한다. -헨리 에인즈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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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명에 대해 고대의 한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한다. 심한 고통 중에 빠졌을 때에 우리는 아름다운 수사학적 단어를 동원하여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단어들을 제해 버리고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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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편 전체. 성도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책망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는 등 갑작스런 변화를 겪게 될 때에 낙담하지 말라.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무고하게 공격하며, 루터파, 이교도, 청교도라고 부르며 괴롭힌다고 하나님께 고해야 한다. 악한 우상 숭배자들이 일어나 성도를 무너뜨리려 하며,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다.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에도 상관하지 말라. 그들로 압살롬의 부와 아히도벨의 지혜를 신뢰하게 버려 두라. 오직 다윗과 함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고백하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키는 자시며, 우리를 둘러 모든 면에서 보호하는 "방패"가 되심을 믿으라. 그분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영광과 존귀를 베풀어 주신다. 그분은 교만한 위선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하고 온유한 자를 높이신다. 그분이 원수들의 뺨을 치시고, 모든 이를 꺾으신다. 그분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긴 머리털로 나무에 매달리게 하시고, 아히도벨로 절망 가운데서 목매어 자살하게 하신다. 원수들의 군대는 파멸하고 성도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여호와는 그분의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복을 주셔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천성을 향한 여행을 계속하게 하신다. -토머스 타임(Thomas Tymme, Silver Watch Bell,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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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압살롬의 도당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반역을 일으켰다. 다윗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신세를 졌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를 배반했고, 그를 공격하는 데 동조하며, 바보 같은 젊은이 압살롬을 우두머리로 삼았다. 다수의 결정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일인가!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윗은 역대의 어느 왕보다도 신하들의 마음을 얻었던 자이지만, 그러나 돌연히 그들을 대부분 잃고 말았다! 사람들이 왕을 지나치게 신뢰해서도 안 되지만(시 146:3), 왕들 역시 사람을 전적으로 의지해서도 안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에게도 원수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를 붙잡았으며,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그를 치던 자가 어찌 그리 많았는지!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사는 사람들도 대중이 그에게 등을 돌릴 때에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선인을 대적하는 세력은 날마다 자라는 법이다. -매튜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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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될 때, 끊어진 동맥에서 피가 쏟아져 나가듯 기쁨이 사라지는 것이다. -윌리엄 거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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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하나님의 자녀는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가장 놀라게 된다.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를 괴롭히는 일은 없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와 그의 원수들이 그에게 했던 말을 토해 놓았다. 이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랍사게의 편지를 들고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과 같은 행동이다. 오 주여! 그들은 "너는 하나님께로서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난 아무런 희망도 없나이다. 그들은 내 영혼에게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로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내 영혼에 "나는 네 구원이라"(시 35:3)고 말씀하소서. 그리하면 내 영혼이 만족함을 얻고, 그들도 잠잠해지리이다. -매튜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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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셀라"(2, 4, 8절). "셀라"(hls)라는 단어에 대해 여러 가지 연구 자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아직도 온전히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아람어 번역본인 탈굼에는 "르알민"(@yml[l)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는 '영원토록'이란 뜻이다. 라틴어 번역본인 불가타 역본에는 이것이 삭제되어 있다.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는 "디아프시알마"(Diavyalma)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음정의 변화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 단어는 시편에서 73번 나타나고 하박국에 3번 나타난다(합 3:3, 9, 13). 이것은 시가 문학에서만 나타나는데, 이는 시를 암송하거나 노래하는 데 관계된 음악적인 용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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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이것은 음악 연주와 관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시 정지'를 뜻하기도 한다. 게제니우스(Gesenius)는 이 단어가 '침묵'이나 '일시 정지'를 뜻하며, 시편을 노래하는 동안 노래하는 자가 침묵하거나 잠깐 동안 정지하도록 지시하는 것이며 그 동안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간주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했다. 현재로서는 이렇게 보는 외에 다른 의미는 발견하지 못했으며, 이 의미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의 문맥을 살펴보면 노래하는 중에 일시 정지하는 것이 적합함이 일반적인 사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시의 내용과 음악적 연주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나타나는 곳에서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는 이 단어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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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발트(Ewald)는 다른 주장을 펼쳤는데, 이 단어가 나타나는 곳에서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 이 단어는 '위로', '높이', '크게'라는 뜻의 "살"(ls), '올라가다'라는 뜻의 "살랄"(lls)과 동의어라고 주장했다. -알버트 반스(Albert Barnes, 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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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셀라"(2, 4, 8절). 이 단어는 시편에서 73번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문장이나 단락의 끝에 나타난다. 그러나 절의 중간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시 55:19; 57:3).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단어가 음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많다. 현재로서는 다음의 두 가지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 어떤 학자들(헤르더, 데 베테, 에발트, 델리취)은 이 단어가 '올리다'라는 뜻의 "살랄"(lls)에서 파생한 것으로 음악이나 목소리를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며, 다른 학자들(게제니우스, 로젠뮐러, 헹스텐버그, 톨룩)은 '잠잠하다'라는 뜻의 "셀라흐"(jls)에서 파생한 것으로 노래하는 중에 '일시 정지'를 의미한다고 본다. 아마 "셀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이 간주곡이나 심포니를 연주하는 동안, 노래하는 자들이 침묵하거나 일시 정지하는 것을 지시하는 단어일 것이다. 시편 9:16에는 "힉가욘 셀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게제니우스는 "악기, 정지"라고 해석하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이 심포니를 연주하는 동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일시 정지하도록 지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톨룩(Tholuck)과 헹스텐버그(Hengstenberg)는 두 단어를 '묵상, 정지'라고 해석하면서 음악이 일시 정지하는 동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묵상하도록 한 것이라고 했다. -벤자민 데이비스(Benjamin Davis, Ph.D., LL.D., article "Psalms" in Kitto's Cyclopaedia of Biblical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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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 하나님은 슬픈 일이나 기쁜 일 등 모든 일에서 육체가 영혼에 동참하게 하신다. 길을 밝히는 등불도 그 안에 불이 있어야 길을 밝힐 수 있는 것과 같다.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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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하나님은 머리를 어떻게 드시는가? 바로의 술관원처럼 어느 지위에 오르도록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수치를 당하던 자가 영광을 얻고, 병들었던 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슬픔을 당했던 자가 기쁨을 얻고, 넘어졌던 자가 일어서고, 일시적으로 패배를 당했던 자가 승리를 얻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를 드는 자이시다. -C. H.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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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기도의 선두주자가 달리면, 조금 지나 후미에서는 구원이 뒤따른다. -토머스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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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하나님은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들으신다는 것과 응답하신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C. H.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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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다윗이 이처럼 단잠을 잤던 때가 언제인가? 머리말을 보면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웅장한 왕궁의 침소에 몸을 눕혔던 때가 아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의 추적을 피하여 도망가던 때이며, 어쩌면 하늘을 지붕 삼아 들판에서 누워 있을 때를 말할 것이다. 그를 배반한 군대가 뒤에서 추적하던 때에 이렇게 모든 위험을 잊고 잠을 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정 부드러운 베개를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이런 하나님의 평강은 그의 피조물로 하여금 무덤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침대에서 자듯 잠들게 한다. 어떤 성도들은 욥처럼 현재 당하는 고난을 참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진정한 평강을 얻고서 흙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워 흙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기도 했다. 시미언은 탄생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고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제는 종을 평강 가운데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하인이 배에 모든 짐을 싣고서 주인이 돛을 올리고 집으로 향하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이, 본향을 향하고자 했던 것이다. 본향을 향해 간다는 것을 아는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짐을 싣고 천국으로 향하기를 소망한다. 무엇을 바라고 나그네로 지내는 이 세상에 잠시 더 머물기를 소원하겠는가? 하나님의 평강을 확신하지 못한 자는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다. 성도의 영혼이 하나님의 평강과 사랑을 느끼면 어떤 어려움이나 시험이나 곤란도 이겨 나가게 된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어려운 사명을 주시기 전에 이런 평강과 사랑을 부어 주셔서 마음을 기쁘고 담대하게 하여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다. -윌리엄 거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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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거놀은 런던교 위에 집이 있던 시대에 글을 썼는데 이렇게 말했다:"런던교 위에 사는 사람들도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잠을 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결이 결코 그들을 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사망과 고통의 물결 위에서도 조용히 안식하며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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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는 그리스를 공격하고서 그곳에 있는 모든 신전들을 헐어 버렸다. 그러나 디아나 신전은 너무 아름다워 보존시켰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성전이 파괴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악한 시대에도 안연히 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수비대를 강화하라.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요새와도 같다. 다윗의 원수들은 그를 둘러쌌으나 그는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라고 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대포를 쏜다 할지라도 대포의 포신 앞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갑옷과 같아서 이것을 입은 자는 어떤 화살이나 탄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원수들이 은혜의 갑옷을 향해 활을 쏠 수는 있으나 뚫지는 못한다. 은혜는 우리의 영혼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한다. 그분 안에 있으면 벌집 안에 있는 벌처럼, 방주 안에 있는 비둘기처럼 안전하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토머스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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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여호와의 붙드시는 능력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을 생각하라. 우리의 혈관에 피가 흐르고, 폐로 숨을 쉰다는 것,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고, 정신적 기능이 지속된다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붙드시는 능력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C. H.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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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한다. 세상에서 천만인이 그를 치려고 둘러쌀지라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모습에서 '불구하고의 태도'를 배우자. 인간의 생각에 천만인이 그를 치려고 달려드는 것처럼 절망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파멸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원수가 그를 해하려 하는 듯하다. 한 사람이 천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종종 이런 환경에 처한다. 그들은 이런 환경에 처할 때면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대적하고 있습니다"라고 탄식한다. 그들은 놀라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을 헤아려 볼 수도 없다. 피할 길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암흑에 싸인 듯하다.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가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진정 큰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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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보름스를 향해 가던 길은 바로 이처럼 위험한 여행길이었다. 그 성 안에는 루터의 친구 스팔라틴(Spalatin)이 있었다. 그 친구는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루터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크게 놀랐다. 루터가 성에 가까이 올 때에 스팔라틴이 보낸 사신이 그에게 와서 경고했다. "보름스에 들어오지 마세요!" 루터는 가장 친한 친구가 이런 경고를 했는데도 놀라지 않고, 그 사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가서 주인에게 말하라. 이 성 안에 마귀가 지붕 위의 타일처럼 가득 찼다고 해도 나는 이 성에 들어갈 것이다." 사신은 보름스로 돌아가서 루터의 말을 전했다. 루터는 죽기 수일 전에 "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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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이 세상에서 합리적인 사람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무척 두려워할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다는 핑계를 대는 데 익숙해 있지는 않는가? 육체의 연약함을 딛고 일어서기보다는 이것으로 핑계를 대며 피난처를 삼지는 않는가? 이제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 있자. 상황이 좋을 때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순풍이 불 때만 항해를 한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며,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아! 이제 시편 기자의 본을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갖자. 그리고 그와 함께 이렇게 말하자:"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필립 베넷 파워(Philip Bennett Power, 'I Wills' of the Psalms, 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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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누가 우리의 원수가 되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대의 많음, 권세, 뱀의 미묘한 유혹, 용의 잔혹함,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주겠다는 특권, 더러운 영의 악한 계교······어떤 원수가 우리를 대적한다 해도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강하시다.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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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으시든지 은혜를 베푸시든지 나타나셔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실 것을 간구하며 부르는 말이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시는 듯한 여호와를 부르며 이제 일어나실 것을 간구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의인법을 사용한 것이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하지만, 다윗은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간구한다. 이런 확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뽑아 버리신 것은 원수들을 예외 없이 난폭하게 다루고 수치를 당하게 하신 것을 말한다.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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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이 표현은 원수를 야수에 비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뺨은 이빨이 있는 뼈를 말하고, 이 뼈를 부수는 것은 맹수의 무장 해제를 의미한다. -알버트 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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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뺨을 치시며." 하나님께서 악인을 분노 가운데 심판하실 때는, 뺨을 치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 하나에 전능하신 분의 능력을 느끼도록 후려치신다.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이 심판 중에 나타나며, 자비를 보이지 않으신다. 아! 오만하고 고집스런 죄인이 이것을 안다면! 전능하신 자와 다투려는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만 한다면! -스티븐 차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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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와 같은 구절이 요나서에도 나온다:"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 선원들은 그들의 배에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라고 새길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 말을 그들의 성문에 새길 것이다. 그리고 요나처럼 고집스런 마음을 품었으나 하나님의 강청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손바닥에 이렇게 새길 것이다:"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신약과 구약은 모두 이 말씀을 가르친다. 하늘과 땅이 그대로 운행되는 것은 구원이 여호와께로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공중의 새도 이것을 노래하고, 들의 짐승들도 다른 것을 노래하지 않는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나라와 성읍을 지키는 요새와 성벽들, 집의 대문이 굳건한 것도 구원이 여호와께로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구원은 우리의 머리에 쓰는 철판 헬멧보다 안전하고, 어떤 좋은 음식보다도 우리 몸을 보양하는 양약이 되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은 우리를 보존하고 붙드시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의 창고와 기름, 우리 안에 있는 양, 그리고 자궁에 있는 아기와 들의 곡식과 우리가 둘러앉는 식탁에 복을 주신다. 하늘의 별이 이러한 복을 내리는 것이 아니며, 자연 현상으로 이런 것들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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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는 만물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언한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많은 책을 쓴다 해도 책의 결론으로서, 노래의 끝으로서 우리는 요나의 말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길을 떠나면서 제단을 쌓고 돌을 세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후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진리를 날마다 가르쳐야 하리라. 길을 걸으면서도 이것을 노래하고, 우리의 문설주에 이것을 기록하고, 벽에는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우리의 마음판에 날카로운 칼로 새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늘 생각해야 하겠다. 사랑은 무엇보다 식기 쉽고, 기억은 어떤 것보다도 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존 킹(John King's Commentary on Jonah, 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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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성도들은 영광을 얻을 때에도 복을 받은 것이지만, 아직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복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영광을 얻기 전에 이미 복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말로 들릴 것이다. 사람들의 저주와 욕을 받으면서도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육신에 속한 눈으로 고난당하는 성도를 바라본다면, 파도에 휩쓸리려는 배를 바라본다면(마 8:24), 이런 자들이 복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울은 그가 당한 고난을 열거했다. 그는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았고,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도 맞았다. 또한 세 번이나 파선을 당했다(고후 11:24-26).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고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음도 당했다(히 11:36, 37). 뭐라고? 이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 순간에도 복을 받은 것이라고? 육신에 속한 자들은 이런 것이 복받는 삶이라면 하나님이 이런 복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바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이 무어라 말하든지,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은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슬퍼하며 탄식하고, 순교를 당해도 복을 받은 것이다. 시험받는 욥도 복을 받은 욥이었다. 성도들은 저주를 받을 때에 복을 받은 것이다.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했다(삼하 16:5). 그러나 그가 다윗을 저주했을 때에도, 다윗은 복을 받은 다윗이었다. 성도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도 복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미래에 복을 받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현재도 복을 받은 것이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119:1).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 3:8). -토머스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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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루터의 교리적 해설을 축약한 것이다. 흥미있는 해석의 예로서 이곳에 제시한다. -C. H.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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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편 전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편이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던 때에 기록한 것이 아니며, 이 시도 '역사적 시'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진다. 어거스틴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한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축복은 모든 교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 시를 세 가지 방법-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시,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에 대한 시, 상징적으로 각 그리스도인에 대한 시-으로 해석했다. 어떤 해석을 해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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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 시를 그리스도에 대한 시로 해석한다. 5절은 그 내용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며, 어거스틴도 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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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누워"와 "자고"는 자연적인 수면이 아니라 자연적인 죽음을 말한다. 자연적인 수면을 말했다면 왜 자연적인 다른 행동들, 즉 걷고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 또는 다른 육체적 행동들은 말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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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머리말에 나타난 것처럼 압살롬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이라면 육체적 수면을 취한 것을 이처럼 자랑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인다. 이런 절박한 상황이었다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내가 누워 자고"라는 표현은 조용히 누워서 자는 모습을 나타내 주며, 아들에게 쫓기면서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상심한 자의 잠자는 모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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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이 구절은 잠에 빠진 자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않고 그를 붙드셔서 다시 일으키신 분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일상적인 잠에서 깨어난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특별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붙드셨다는 것은 그가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가 일상적인 잠에 빠졌더라면 다른 군사들이 그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붙드셨다는 것은 그가 일상적인 잠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중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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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깨었으니"라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는 '내가 스스로 일어나도록 하였으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수면에서 깨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상적인 수면을 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깨워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또한 스스로 깨어났다 하더라도 이것은 크게 선전해야 할 만한 굉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이것을 말한 것은, 이 행동이 일상적인 수면에서 깨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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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그들은 내가 모든 피조물로부터 버림받고 박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어느 곳이나 계셔서 만물을 보존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우주 가운데서 유일하게 버림받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욥도 이런 고난을 맛보았다:"어찌하여 하나님은 나로 과녁을 삼으시나이까?"(욥 7:20). 이 세상이 모두 연합하고, 지옥의 권세가 모두 힘을 합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대적이 되셨다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예레미야도 이런 일이 없기를 기도했다:"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렘 17:17). 시편 기자도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 6:1). 이와 같은 기도는 시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 이런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지옥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시 6:5)라고 고백했다. 당신이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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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다윗은 세 가지를 대조하고 있다:고난 중에 도우시는 분, 배반 중에 승리의 영광을 얻게 하시는 분, 하나님을 모욕하고 훼방하는 중에 머리를 드시는 분. 그러므로 여기 나타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고 그 자신도 대적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외롭게 혼자 있는 것으로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여기에 나타난 말들은 사람이 자기의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며 굳건한 믿음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폭풍과 지옥의 어두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이 붙드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핍박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저주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이 구세주가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노새나 말처럼 눈에 보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 이해한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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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분이]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부르짖으니"와 "응답하시는도다"라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부르짖으리니"와 "응답하실 것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완료형으로 번역한 것보다 더 좋은 번역이다. 왜냐하면 이 말들은 3절에서 소망하던 대로 고난을 지나 미래에 승리를 얻은 후에, 그를 붙드시고 보존하시고 머리를 들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감사드릴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승리를 얻고 기뻐하는 자들은 그들이 당한 고난과 했던 일들을 말하고, 그들의 구원자요 도우시는 분께 찬양을 드린다:"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시 66:16).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시 81:1).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이 시에서도 그는 감사와 기쁨에 넘쳐서 자신이 죽었던 일과 잠을 자다 일어났던 일, 원수들이 뺨을 맞은 일, 악인의 이가 부러진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4절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3절까지는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불렀는데 4절에서는 갑자기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불렀다. 그래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으니"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고 했으며, "당신이 당신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하지 않고 "[그분이]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모든 사람이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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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그리스도는 이 구절로 그분의 죽음과 장사를 말하고 있다······이 구절이 단순한 휴식과 수면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처럼 중요하게 표현할 이유가 없다. 또한 문맥으로 살펴보아도 이 구절의 앞과 뒤는 원수와의 격렬한 투쟁과 영광스러운 승리를 대조하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묘사를 통해서 우리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게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하는 것이다. 격렬한 투쟁과 영광스러운 승리를 나타내는 예로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말하고 있다······또한 "내가 누워 자고"라고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여 우리에게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죽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라고 하지 않았다. 죽음과 무덤은 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며, 무덤은 무덤이 아니라 침실이며 쉬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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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소시키며 단잠으로 표현한 결과, 예언의 의미가 모호해지기까지 했다. 또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표현하여 죽음을 아름답게 묘사하기까지 했다. 단잠에 빠진 자가 깨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그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고 깨어났다고 했다. 수면이 몸의 힘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것처럼, 죽음도 더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것이다. 다윗도 이 점에 대해 말했다:"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이다"(시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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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죽음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과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그가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가 이것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가? 정말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니다! 부활을 소망하고 부활만을 바라보기에 죽음을 보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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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이"는 의로운 자를 해하는 사람들의 욕이나 비방이나 다른 압제를 상징한다고 했다. 잠언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잠 30:14). 그리스도도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당하실 때,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으며, 그분은 이런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에 삼키운 바 되신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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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 구절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가장 아름답게 요약하며 결론을 내리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주님만이 구원을 베푸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악한 존재들이 힘을 합하여 공격한다 해도, 오직 주님만이 구원을 베푸신다. 구원과 축복이 모두 그분의 손에 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할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나를 저주하고 멸하려 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수욕과 파멸을 당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을 축복하고 구원하려 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도 복을 받거나 구원을 얻지 못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 anzus)는 이렇게 말했다:"하나님께서 주시려 하는 것은 사람의 질투로 빼앗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주시려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노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이를 거꾸로 말해 보라:"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대적하면, 누가 그들을 위하리요?" 왜 그런가?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속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도움은 헛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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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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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하나님께 슬픔을 토해 내는 성도. (1)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 (2) 슬픔을 토하는 태도. (3) 주님께 고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결과. 어떠한 때에 이처럼 슬픔이 겹쳐서 일어나는가? 성도들에게 슬픈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행하는 것이 지혜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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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성도들에 대한 거짓과 하나님에 대한 명예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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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고난받는 성도에게 주시는 세 가지 축복-보호, 영광, 기쁨. 우리가 심한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믿음으로 이 축복들을 모두 누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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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1) 고난 중에 기도하라. (2)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들으신다. (3) 그분의 은혜로운 응답을 기록으로 남기라. (4)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위해 힘을 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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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1) 단잠에 대한 묘사. (2) 즐겁게 깨어남에 대한 묘사. (3) 어떻게 이 두 가지를 모두 즐길 수 있는가를 설명-“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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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원수에게 둘러싸였으나 승리할 수 있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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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1) 주께서 과거에 원수를 어떻게 대하셨는가?-“주께서······셨나이다.” (2) 항상 주께 문제를 고하라-“여호와여······나의 하나님이여.” (3) 주께서 행동하시도록 간구하라-“일어나소서.” (4) 주께서 과거에 도우사 승리하게 하신 것을 근거로 이제도 도와주실 것을 간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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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하반절. 우리의 대적들은 정복당한 원수들, 이빨 빠진 사자들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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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상반절.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하나님께로서 온다(본문 강해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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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하반절.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 그들이 받은 위로, 당하는 시련, 행하는 일, 함께 사는 가족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러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주어지고, 믿음으로 누리며, 맹세로 보증된 것이다.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s Portions, 1802-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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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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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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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이 시는 시 3편과 짝을 이루는 시이다. 시 3편을 "아침의 시"라고 한다면, 이 시는 "저녁의 시"라고 부를 수 있다. 저녁에 잠을 잘 때 8절이 성도들에게 안식을 주는 노래가 되기를 바란다:"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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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안한 마음으로 안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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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잠을 자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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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손이 나를 지키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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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잠을 주심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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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다. 영장이란 성전에서 음악을 인도하는 책임자를 말한다. 이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다음의 성경 구절을 참조하라:역대상 6: 31, 32; 15:16-22; 25:1, 7. 시편은 거룩한 노래이다. 시편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흥미를 느낄 것이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했는지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어떤 시편들은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들의 이름을 따라 머리말을 붙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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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이란 히브리어로 "네기노트"(twnygn)라고 하는데, 이는 하프나 심벌즈처럼 손으로만 연주하는 현악기나 손으로 다루는 악기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넘치는 기쁨을 표현하고,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악기를 사용했다. 영적 세대에 사는 우리들도 영혼의 기쁨이 더욱 충만하며, 이것을 더 영적으로 표현하기를 바란다. 손으로 다루는 악기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나로 주께서 다루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이제 성령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노래를 부르자. 우리 안에 믿음과 사랑이 충만해서 살아 있는 악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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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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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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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원수들에 대한 충고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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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절자신의 안전과 만족은 원수들의 가장 풍요로운 때보다도 더 좋다고 대조적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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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시 3편과 동일한 상황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며, 고난의 정원에서 꽃을 피운 아름다운 시이다. 다윗이 고난을 받았던 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가 고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처럼 아름다운 믿음의 노래를 들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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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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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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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자비로운 구원을 근거로 현재 당하는 어려움에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간구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에벤에셀'을 돌아보고, 거기서 위안을 찾는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여섯번씩이나 구원을 베푸셨다면, 이제 일곱번째 당하는 어려움에서 우리를 버리실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시작했다가 중단하시는 일은 없다. 그분은 우리가 고난에서 벗어날 때까지, 우리를 돕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요단을 건너기까지, 매일 아침 '만나'는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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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사람을 향해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해 말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늘 대화를 나눈다면, 사람들을 향해서도 더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감히 서는 자는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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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다윗은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이 구절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당신은 나로 하여금 의로운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나를 지켜보시고, 이 일을 하도록 도와주시고, 심판자가 되시고, 내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사람들이 나를 훼방하고 비방하오니 이 문제를 해결해 주소서"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성도들이 본받을 지혜가 있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문제를 인간 재판관이 있는 법정으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 더 권위 있는 법정, 하늘에 계신 왕의 법정으로 가져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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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이 표현은 군대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압박을 받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나님께서 대적들의 포위망을 깨뜨리시고 나를 높은 곳에 두셨다고 고백하는 말씀이다. 또한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내가 슬픔과 탄식의 포로로 사로잡혔을 때에 하나님은 기쁨과 안위로 내 마음을 넓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나의 위로자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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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긍휼히 여기사." 여호와여, 내가 죄를 범하였으므로 주께서 내 대적을 들어 나를 곤고케 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의 자비를 내 피난처로 삼았사오니, 내 기도를 들으시고 종을 모든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소서.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듯이, 또한 가장 선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야 한다. 죄인에 대한 용서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구원하심도 모두 하늘에 계신 분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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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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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서는 기도의 골방에 대한 묘사가 있었으나, 이제 2절부터는 야전의 전투장으로 장면이 바뀐다. 하나님의 사람의 용기 있는 모습에 주의하라. 그는 원수들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여기서 "인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벤아담"<mdanb>인데, 이는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고, '위대한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역자 주).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생각하고서 마치 어린아이를 책망하듯이 책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한다. 그들은 거짓말을 지껄이고, 공허한 꿈을 꾸며, 악한 마음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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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어느 때까지." 다윗은 원수들에게 "어느 때까지?"라고 묻는다. 어느 때까지 그의 영광을 조롱하며, 그의 명예로 웃음거리를 삼겠느냐는 말이다. 왜 이처럼 못된 짓을 계속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조롱하고 억울하게 하여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이처럼 못된 짓을 하다가 영혼이 지옥에 빠져 들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급한 심판으로 그들의 웃음이 슬픈 울음으로 변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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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 그들이 추구하는 거짓 되고 헛된 일들을 상고하다가, 시편 기자는 엄숙하게 "셀라"를 삽입한다. 이 말은 잠시 쉬라는 뜻이다. 우리도 역시 이곳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어야 하겠다. 그리고 악인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잘못된 생각, 계속되는 악행, 그들에게 임할 파멸을 묵상해 보아야겠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들과 다른 사람이 되게 하셨다. 우리로 진리를 사랑하게 하시고, 의를 추구하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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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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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알지어다." 바보들은 배우려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듣고 또 들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의인을 택하시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해 놓으셨다'는 영적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교리는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용납하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영광스러운 진리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이며, 고난받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온전한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며, 이것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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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정죄받지 않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 어린 기도를 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명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원수들이 우리의 영혼을 대항해 싸울 때,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원수들에게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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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귀한 보물처럼 특별히 구별된 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믿음의 기도를 더욱 열심히 드리라. 주야로 하나님께 울며 부르짖는 택하신 자를 하나님이 신원하여 주시지 않겠는가?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택하셨으니,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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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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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교훈을 뒤바꾸어 놓는지 모른다. 그들은 범죄하고도 떨지 않는다. 아! 사람들이 이 교훈을 받고서, 그들 자신의 심중에 대화를 나누었으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분의 자비를 무시하는 것은 그들의 사고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아! 그들이 한 번이라도 악한 정욕을 억누르고 잠잠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잠잠히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들이 당할 운명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기만 한다면!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죄악이 헛된 것이며 이 세상이 덧없음을 분명히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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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허둥대는 죄인들아, 그곳에 멈추어 서라. 마지막 발걸음을 움직이기 전에 그곳에 서라. 너의 침실로 들어가 너의 행한 길을 상고해 보라. 침대에 누워 교훈을 받고, 밤의 적막함 중에서 책망을 받으라! 네 영혼을 쓰레기처럼 버리지 말라. 네 이성의 소리를 들어 보라. 이 요란한 세상을 잠시 떠나, 네 불쌍한 영혼의 소리를 들어 보라. 네 운명이 영원한 파멸에 처하기 전에 너 자신의 운명을 생각해 보라. 셀라! 오, 죄인들아! 잠깐 멈추어서 내 시에 귀를 기울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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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아, 네 마음은 안식을 얻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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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슴에 두려움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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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에 괴로움도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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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양심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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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네게 복을 내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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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네 근심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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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거짓 되고 헛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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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임할 파멸을 생각하고 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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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죄인들아, 네 종말을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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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날이 이르고 있음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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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영혼은 그날 심판의 장소에 나타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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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의로운 심판을 듣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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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탄식과 고독에 빠진 영혼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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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의 피를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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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만이 너를 온전케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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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라 죄인들아, 예수께 날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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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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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반역자들이 구원받기를 원했다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5절에서는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을 보내 주셨다.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구세주이시다. 시편 기자는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그의 말에는 온전한 복음이 들어 있다. 오, 죄인들아! 갈보리 언덕에 있는 제물에게 피하라.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분을 의뢰하라. 사람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분은 여호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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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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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서 이 시의 세번째 부분이 시작된다. 시편 기자는 고난받는 자가 믿음으로 만족과 평안을 누리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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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여러 사람의 말이." 다윗을 따르던 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려 하기보다 보이는 것을 따라 살려고 했다. 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살지 않는가! 중생한 영혼들까지도 때로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지 않는가! 어두움이 그들에게 닥쳐서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가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면,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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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무엇에도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영혼들, 그들은 입을 벌리고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자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들은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자 사기꾼의 속임수도 마시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허사로 드러날 때, 그들은 절망하고 하늘에나 땅에나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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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그러나 진실된 성도는 이들과 매우 다르다. 그는 짐승처럼 땅을 바라보지 않고 천사처럼 위를 바라본다. 우상에 속한 더러운 우물에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샘에서 마신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의 빛으로 만족한다. 이것이 그의 부요함이요 영광이며, 그의 건강이고, 그가 바라는 바이며, 그의 평안이다. 그에게 이것을 줘 보라. 그는 다른 무엇을 더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며, 충만한 영광이다. 아!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이 더 충만히 임하셔서, 우리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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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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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회개하는 마음으로 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것이 평생 동안 이 세상이 주는 태양빛으로 만족하며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곡간의 곡식보다, 술통의 포도주보다 나은 분이시다. 곡식과 포도주는 이 땅에서 나는 열매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은 하늘의 익은 곡식과도 같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나이다"라는 고백이 "내 곡간이 가득 찼나이다"라는 말보다 훨씬 더 복된 말이다. 내 곡간이 모두 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미소를 보내신다면 내 복은 넘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분이 없다면 난 가련하고 가난한 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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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의로운 자의 고백이다. 이 고백은 세상 사람들의 말과는 대조적이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의 성품을 드러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어린아이에게 "네가 말을 해야 내가 알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종은 그 소리가 울릴 때에야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새들도 그들의 노래로 그들의 특성을 나타내 보인다. 올빼미는 종달새의 지저귀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또한 뻐꾸기는 올빼미처럼 부엉부엉 노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하는 말을 조심하자.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업에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것을 드러낸다면, 이는 슬픈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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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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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아름다운 저녁의 시! 나는 두려움으로 서 있지 않고 누우리라. 세상의 번잡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깨어 있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 누워 자리니, 이는 내게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는 자는 다른 커튼이 필요 없다. 여러 가지 건축 자재로 쌓은 벽보다도,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더 훌륭한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 솔로몬은 무장을 한 군인들이 지키는 침실에서 잤다. 그러나 다윗은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원수들의 추적을 받으면서 딱딱한 땅바닥에서 단잠을 잤다. 솔로몬이 다윗보다 더 깊은 잠을 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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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오직"이란 말에 유의하라. 하나님 그분만이 그를 지키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세상에서 아무도 그와 함께하지 않아도 안전한 것이다. 조용한 양심은 좋은 친구이다. 우리가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날들을 돌아보라. 이날들은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없던 때가 아닌가? 믿음을 가진 자는 단잠을 잔다. 하나님의 약속처럼 부드러운 베개는 없으며, 그리스도처럼 우리에게 따뜻한 이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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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우리로 당신을 의지하며 평안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다윗처럼 우리도 사는 날 동안 평안히 누워 잠자게 하소서.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로 기쁨 가운데 죽음의 잠을 자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안식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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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커(Hawker) 박사는 이 시를 읽고서 묵상의 글을 남겼다. 이 글을 따라 우리도 기도하며 기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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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이여! 이 시를 읽으면서 눈을 주님께 돌리자. 그분은 우리의 "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 예수는 우리의 의로우심"이라고 고백하며 속죄소로 나아가자.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재물을 추구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라져 가는 것들이다. 곡식과 포도주보다 무한히 더 나은 그분의 은총을 사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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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당신의 은총이 생명보다 낫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또한 물질로 축복하시고 그들의 곡간을 채워 주십니다. 오!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당신을 위해 한 분을 구별하셨나이다. 당신이 구분하신 그분은 진정 아름답고 순결하십니다. 당신은 그분을 백성과의 언약으로 주시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그분 안에서 기뻐하시지 않았습니까? 오, 여호와여! 그렇다면 내 영혼도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게 하소서.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여호와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아나이다. 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나이다. 예수는 내 소망이요 의가 되셨나니,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는 응답하시리이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예수의 사랑 가운데서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피곤한 자에게 쉼을 주시나니, 주께서 주시는 안식은 내 영혼을 새롭게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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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와 설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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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믿음이란 곤란한 지경에 빠진 자를 돕는 유창한 변사와도 같다. 믿음은 우리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 다음과 같이 우리를 교훈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곧 응답하신다는 것을 말한다:“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하시고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의를 말한다:“내 의의 하나님이여.”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위해 종의 의로움을 변호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공의를 말한다:“내 의의 하나님이여.” 믿음은 과거에, 그리고 현재 당하는 고난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자비를 말한다:“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믿음은, 사람이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데에 반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말한다:“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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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응답하소서.” 자연계와 세상 만물을 다 지으신 조물주는 헛된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도를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기도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신다. 기도는 천국의 창고를 열고 보화를 가져오기 위한 열쇠와 같다. 기도는 원수들의 추잡하고 기분 나쁜 무기를 제거하고,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가져오는 강력한 도구이다. 하늘과 땅도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하늘을 향해 들린 손을 수종든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 하시는 말씀도 기도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성경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이야기가 그 예를 보여준다. 야고보도 엘리야에 대해 말하면서 그도 우리처럼 연약한 존재로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졌으나 기도의 놀라운 힘을 보여주었다고 했다(약 5:17). 안토니우스(Antonius)가 이끈 크리스천 군대도 기도하는 군대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군대는 ‘천둥 군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로버트 레이턴(Robert Leighton, D.D., 글래스고의 감독, 1611-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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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기도는 사람들의 난폭함과 불경건함을 뚫고 하늘 보좌에 도달한다. 간절한 기도는 강하고 큰 날개를 가져서 어떤 새들보다도 높이 날아 하늘 보좌에 닿으며, 기도하는 사람은 이 낮은 세상의 쾌락과 위험을 모두 떠난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거룩한 사람은 그가 간구하는 모든 것을 얻은 듯, 왕궁에서도 원수들을 담대하게 꾸짖는다. -로버트 레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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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우리 주님은 성전을 떠나 쉬시기 위해 여느 때처럼 베다니로 돌아가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온 종일 훈계하셨으나 아무런 열매도 없었다. 이때 인용하신 이 시편의 말씀은 사람들을 보시며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분만의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분과 마음을 같이하는 성도들이 해야 할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다. 성도들은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슬픈 마음으로 이 시편을 묵상해야 한다. 또한 이 세대와 오는 세대에서 여호와만으로 만족하며 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인생의 황혼을 맞이할 때에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며 믿음과 소망의 확신으로 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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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림자가 사라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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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은혜 가운데 잠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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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보나(Andrew A. Bonar,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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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허사를 좋아하고.” 죄를 사랑하는 자는 헛된 것을 사랑한다. 그들은 거품을 추구하고, 갈대를 의지하며, 거미집에 소망을 둔다. “허사”란 고대 색슨계 말로서 거짓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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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이것을 알고서 둘째 아들을 아벨이라 불렀는데, 이는 ‘헛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솔로몬은 이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서 그것들이 모두 헛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설교를 두고 두고 반복했다:“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자와 같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선포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면서도, 이것들 외에는 다른 영광도 행복도 없는 것처럼 그들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도 팔아 버리고, 하늘이나 그들의 영혼까지도 그들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지극히 작은 것과 바꾸어 버린다. 그들은 입으로는 헛된 것이라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것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이것이 그들의 면류관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의 모든 영광이나 되는 것처럼 추구한다. 오! 해 아래 있는 이 모든 헛된 것들이 참으로 헛된 것임을 알라! 그래서 이것들을 밟아 버리고, 발등상으로 삼아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나라.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거룩한 승리를 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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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족(Vandals)의 왕 길레멕스(Gilemex)는 벨사리우스(Belsarius)에게 포로로 잡혀 가면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외쳤다. 우리가 노예처럼 집착하는 이 모든 피조물들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변덕스럽고 불성실한 것인가! 사람이 겪는 고통을 그가 받은 보상과 비교하고, 그가 겪은 슬픔을 기쁨과 비교해 본다면, 사람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렇게 말했다:“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커다란 산을 강대상으로 삼아 설교를 하며, 산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천사장의 소리만큼이나 큰 소리로 설교할 수 있다면, 나는 바로 이 시편의 말씀에서 이렇게 설교를 할 것이다:이제 죽어 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토머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8-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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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허사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원칙을 따라 좋아하는 것을 결정한다. 마음속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나 영적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헛된 것도 마찬가지다. 헛된 사람들은 헛된 것들을 좋아한다. 철없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애들에게나 맞는 것들을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토머스 호턴(Thomas Horton, 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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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실 때, 그분은 자신을 위해 택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의 친구처럼, 동료처럼 대화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사람으로 기쁨을 삼고자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 거룩함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히 12:14).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도 먼저 거룩해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신 목표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양자로 삼아 우리 기업의 후계자로 삼기 원한다면, 그는 먼저 사람이어야 하고, 이성과 영혼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의 첫번째 목표가 우리가 경건한 자가 되는 것이라면, 우리도 이것을 다른 무엇보다도 첫째 되는 목표로 삼아야겠다.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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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경건한 자들은 수가 많지 않다. 의로운 자들은 이웃보다 더 훌륭한 자들이다(잠 12:26). 의인은 레바논의 술과도 같다고 했는데, 이는 경건한 자를 칭찬하는 동양적인 표현이다. 경건한 자는 귀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분하셨다. 우리는 귀한 것들을 구분해 놓는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을 구분하시되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시 135:4), 그분이 기뻐하시는 정원으로(아 4:12), 그분의 면류관으로(사 43:3), 땅의 존귀한 자로(시 16:3), 정금으로(애 4:2), 연단된 은이나 금으로(슥 13:9) 구분하신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영광이다(사 46:13). 오리겐(Origen)은 성도를 사파이어나 수정과 비교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배라고 부르신다(말 3:17). -토머스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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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어떤 성도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체험하고 또한 주의 백성들에게 허락된 특권을 체험했다면, 다른 모든 성도들도 이와 같은 약속과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고, 고난에 처했을 때는 누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다. -데이비드 딕슨(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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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심중에 말하고.” 이 구절은 이성을 따라 판단해 보라는 뜻이다. -알버트 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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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경건을 연습하고 싶으면 너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자는 결코 게으를 수가 없다.” 이 말은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가 그가 배운 학문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답한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학문을 하면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혼자 하는 독백이 가장 좋은 토론이며,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는 가장 좋은 친구이다. 다윗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으면 자신과 대화하라:“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너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물어 보라. 네가 살아온 삶이 어떠한지 평가하고, 잃어버린 시간은 없는지 생각해 보라. 네가 악용한 사랑은 무엇인지, 마땅히 받았어야 할 심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너 자신에게 있는 달란트는 어떻게 개발했는지, 친구들에게 성실했는지, 죽음을 당할 준비는 되었는지,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을 만날 준비는 되었는지 생각해 보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자리에 누워”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은밀한 시간이 좋다. 조용한 날, 아무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는 시간을 택하라. 세상의 잡다한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 방해받지 않는 밤 시간에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이 좋다.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1627-1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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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우리가 세상에서 돌아서면 하나님과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수면을 줄이고 거룩한 생각으로 자신을 깨우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환상을 받을 것이다.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능력의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다윗은 우리가 휴식을 취할 때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침대는 잠만 자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잠잠히 있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마음과 대화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도 그 자리에 오셔서 우리와 대화를 나누시고, 성령께서도 사랑의 역사를 보이실 것이다. -조셉 캐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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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너희는 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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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로도, 생각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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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존귀하신 이름을 경외함으로 부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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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니덤(John Needham, 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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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조금만 계시해도 큰 만족이 있으나, 그리스도가 없으면 어떤 것이 있어도 공허할 뿐이다. -알렉산더 그로스(Alexander Grosse, on Enjoying Christ,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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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다윗은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와 쾌락을 바란다고 했다. 이런 것들이 정말 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건한 것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여러 사람”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그의 입술로 기도를 드릴 뿐이다:“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그의 기도를 보면, 마치 아무도 그와 함께 경건한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헨리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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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사람은 좋은 것, 선한 것을 원한다. 그들이 악한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이것을 통해 고통과 죽음이 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음으로부터 만족할 수 있고, 자신들을 악에서 구원할 가장 선한 것을 바란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오해한다. 그들은 자신의 욕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한 것을 바란다. 그들의 오감을 통하지 않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선한 것을 배척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사람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을 배척한다. -아담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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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이것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리는 축복이다. 이 축복은 화목, 확신, 영적 교제를 포함하며,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아! 이 축복으로 충만할 수 있다면! -C. H.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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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절. 물질과 부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것들을 때로는 의인에게도 주신다. 또한 이것들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을 악한 자에게도 주신다. 그러나 이것들은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원수들에게 주어진다. 아! 우리가 받아야 할 것들, 또 받지 않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세상의 축복을 추구하다 유황불로 목욕을 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로서 영원한 불행을 당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 세상은 떠다니는 섬과 같다. 그래서 그 위에 닻을 내리면 섬과 함께 표류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다 합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한 분보다 더 귀한 것은 아니다. 그분은 금광을 가진 사람의 지갑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피조물이 없어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피조물은 그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즐기다가 하나님을 잃는 것보다 아무것도 없이 그분을 즐기는 것이 더욱 복되다. 목선에 술이 가득한 것이 금으로 만든 배에 물만 있는 것보다 더 낫다. -윌리엄 세커(William Secker, 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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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은 자들이 축복을 조금 받은 자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에서 얻은 재물이 뼈다귀와 같다면, 영적인 축복은 골수와도 같다. 뼈다귀를 먹는 개를 사람이 부러워할 수 있겠는가? 성도들이 영적인 것을 즐기면서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먹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할 수 있겠는가? -토머스 브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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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위로다:“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롬 15:13);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하나님께서 하늘의 기쁨을 마음에 부어 주실 때는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4). 이 구절의 헬라어의 의미는 포도주의 잔이 차고 넘치듯이 기쁨이 넘친다는 뜻이다. 삼각형으로 원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세상에서 오는 위로로는 마음을 채울 수 없다. 영적 기쁨은 사람에게 만족을 준다:“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시 63:5). 세상의 즐거움은 얼굴에 기쁨을 나타내나 하나님의 영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슥 10: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7). 이러한 기쁨이 마음에 넘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했다. 포도주와 기름은 기쁘게는 하지만 마음을 만족케 하지는 못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에 공허함과 가난함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스가랴 10:2은 “그 위로함이 헛되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받는 위로는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싫증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보다는 피곤하게 한다. 아하수에로 왕은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내는 자에게는 커다란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성령의 위로만이 영혼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다:“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하늘의 기쁨과 땅의 기쁨의 차이는 풍성한 잔치에서 음식을 먹는 것과 종이 위에 그려진 음식을 보는 것의 차이와도 같다. -토머스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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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린 후, 밤낮으로 자고 깨는 가운데 씨가 싹이 트고 자라지만 그는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막 4:26, 27). 이처럼 의인은 믿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그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긴 후에는 밤낮으로 자고 깨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거룩하신 뜻을 따라 행하시도록 맡겨 버리면 된다. -매튜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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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저녁에는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첫째, 하루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잘못된 것은 고치도록 하라. 은혜 가운데 일을 잘했으면 기뻐하고, 잘못했으면 슬퍼하라. 둘째, 하나님은 당신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라(시 111:4, 5). 그분이 깨어 지키시지 않으면 당신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다(시 127:1). 당신이 잠을 자는 동안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키신다. 그런데 그분이 당신의 원수라면 당신은 안전하게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밤이 되면 믿음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과의 평화를 새롭게 하라. 침실로 가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를 통해 그분의 가르침을 받으라(시 3:4, 5; 92:2). 그리하면 안전히 자리에 누울 수 있으리라(시 4:8). 하루의 모든 일을 행하고서 의복을 벗기 전, 자리에 눕기 전이나 자리 위에서도 당신의 마음과 대화를 나누도록 하라(시 4:4). 주님을 생각하고 잠들 수만 있다면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잠 3:21, 24, 25). 당신은 더욱 안전하고(잠 6:21, 22), 꿈을 적게 꾸며 더욱 편안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당신은 더욱 좋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며(잠 6:22), 밤이든 아침이든 잠을 깰 때에 당신의 마음이 기쁠 것이다. -헨리 스커더(Henry Scudder, Daily Walk에서 요약한 것,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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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시편 기자는 원수들과 다투고 그들을 대적하던 행위에서 이제는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하나님께서 조용한 방에서 그를 친히 보살펴 주시는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밀하게 돌보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심은 더할 수 없이 감미로운 사랑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땅에 내려오셔서 굽어 살펴보시고, 큰 일뿐만 아니라 작고 사소한 일까지도 도와주신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을 큰 일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잠을 잘 때에도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연약하고 가련한 자들, 그들의 사랑과 감사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작은 일도 친히 도와주신다. 우리의 골방에서 그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한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우리가 아플 때나 피곤할 때에도, 또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분이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시며 함께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복된 사람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평안히 눕고”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감동적인 표현이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누우면서 그는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긴다.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잠을 잔다는 말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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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눕기는 하지만 잠을 자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기는 하겠지만, 모든 염려와 걱정이 침실에까지 들어와 그들이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지를 시험한다. 이런 염려는 그들을 위협하고, 놀라게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지속적이고 강력한 시험 앞에 신뢰를 잃고 만다. 그러나 많은 가련한 사람들이 “내가 눕기는 하겠지만 잠을 자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필자는 어느 나이 드신 사역자가 병이 들었을 때,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궁색한 가운데서 살고 계셨고, 가족은 큰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의사는 내게 잠을 자라고 한다네. 하지만 염려가 내 베개 곁에 있는데 어떻게 잠을 자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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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백성들은 크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잘 견디면서도, 정작 그 어려움이 지나고 난 후에 염려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혼자 있게 되면 의기소침해지고, 어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에 느끼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느끼지 못한다······적막함 가운데 시험이 있다. 우리는 인생 전투장보다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신뢰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 우리가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골방에서도 우리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아!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우리가 그분께 맡길 수 있다면!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정말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골방에서 지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과 영혼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밤은 내가 누워 자고,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리들리(Ridley)의 형제는 그가 순교 당하기 전날 그와 함께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리들리 감독은 예전처럼 잠을 자야 하겠으니 함께 지낼 수 없다고 하며 이를 거절했다. -필립 베넷 파워, ‘I Wills’ of the Psa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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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는 이 불안정하고 헛된 세상에서, 여러 가지 소란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정을 누릴 수 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여호와만이 나로 안전히 거하게 하신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해 죄스럽게 두려워함으로 내면의 평안을 잃거나, 그의 마음을 불안으로 괴롭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염려를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신실하신 아버지의 손에 모두 맡기는 자이다. 그는 저녁에 허락된 안식을 잃지 않고, 내일의 염려를 오늘로 가져오지 않기로 작정한 자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뜻을 포기한 자에게 허락된 감미로운 행복감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마음을 쏟을 때,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존 플라벨(John Flavel, 1627-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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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이 구절을 암송하고 마치 무덤에 자신을 맡기듯 침대에 자신을 맡기는 자는, 마침내 같은 구절을 암송하며 침대에 눕듯 무덤에 들어갈 것이다. 그는 때가 되면 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 부활의 자녀들과 함께 아침의 노래를 부를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조지 혼(George Horne, D.D.,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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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자기도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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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잠은 아름다운 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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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폭풍도 개의치 않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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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으신 주님은 깊이 잠드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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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일어나 파도를 잠재우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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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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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잠은 아름다운 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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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잠을 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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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곡하는 자들은 슬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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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의 가슴에 고개를 묻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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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끝없는 안식에 빠져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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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트리(Mrs. M’Car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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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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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과거에 베푸신 자비를 근거로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함’에 대한 설교 본문으로 쓸 수 있다. 상반절에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바라고 믿는 내용이 나타난다. ‘내 의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기에 적합하다. 하반절은 ‘하나님의 자비와 주권적 은총을 바라는 것이 성도들에게 최상의 일이다’라는 내용으로 설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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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사람의 타락은 세 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1)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멸시함. (2) 마음에 허사를 좋아함. (3) 일상 생활에서 거짓을 추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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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하나님과 사람과 원수들에 대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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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특별한 사람에게는 기도의 응답이 확실하다. 어떤 사람이 이런 특권을 누리는지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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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별해 놓으신 사람. 그는 누구인가? 누가 그를 구분했는가? 무슨 목적으로 구분했는가?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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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죄인은 자신을 돌아보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 1754-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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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잠잠할지어다.” 아름답고 실제적인 권고이지만 따르기는 어렵다. 밤이란 자신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잠잠히 있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잠잠히 지내는 자가 얻는 결과, 이런 충고를 꼭 들어야 할 사람, 이렇게 하는 본보기 등, 여기에는 정말 많은 설교 자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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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여호와의 백성이 드려야 할 의의 제사의 특징. -윌리엄 포드 밴스(William Ford Vance,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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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세상과 교회의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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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영혼의 만족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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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절. 구세주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은 최상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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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성도들의 기쁨. (1) 그 근원-하나님(“주께서······”). (2) 그 시기-현재(“주께서······두신······”). (3) 기쁨의 장소-내 마음(“내 마음에 두신 기쁨······”). (4) 그 뛰어남-최상(“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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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선한 사람의 평강과 안전. -조셉 래스롭(Joseph Lathrop, D.D.,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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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성도들의 침실, 그곳에서 부를 노래, 문을 지키시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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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성도들의 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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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방법. (1) 훈계(2절). (2) 교훈(3절). (3) 권고(4, 5절). (4)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따르는 축복에 대한 간증(6, 7절). (5) 믿는 자에게 따르는 평안에 대한 간증과 그 본을 보인 사람의 이야기(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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