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3장

에반젤(복음) 2022. 9. 17. 07:28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3장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계 13:1-10)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계시록 해석자들 다수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역사상에 나타난 교회를 박해하는 세상의 권세나 사단과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만 그 주제로 본문에 접근했을 때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1-10절 안에 약 30가지 이상의 상징적 설명이 나타나 있는데 그 주제와 모두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경우 육체론으로 접근할 때 신기하게 다 해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로 앞의 12장에서 용이 육신 혹은 육신적 안일의 상징인 바다 모래 위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계12:17)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했던 것처럼, 이어서 13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통해서 사탄이 노리는 육신적 약점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즉 말씀의 기초가 없거나(마7:26 육신의 안일의 상징인 바다 모래 위에(행27:17) 용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 시험에 빠지는 등 실수하기를 기다려 그들이 정해 주신 한계를 넘어 올라오는 대로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는 하늘에 속한 승리적 존재이지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서 보듯이 아직 덜 죽은 자아와 육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 육체란 짐승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훈련시키면 좋은 믿음의 도구가 되지만 방치하면 인간의 부패한 자아를 따라 세상적이고 마귀적이고 정욕적인(약3:15) 짐승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자아와 육신의 이런 경향을 육신적이라는 낱말로 표현해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계12:17)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시119:6-11, 롬8:12-14).


육신적인 문제점은 어떤 것일까요?


1. 정한 영역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바다에 있어야 할 한 짐승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물의 경계를 넘어 육지로 올라 나옵니다(잠8:29).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에 게으르면 시험이 찾아와 짐승의 수준을 넘어 괴물로 변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물들의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는데 그 경계를 넘어 서면 그것이 죽음이요 죄입니다(시104:9). 이처럼 하나님을 멀리하면 육신 중심의 육에 속한 자가 됩니다(고전2:14-3:3).


2. 은혜의 바다에서 살아야 합니다.


한 짐승이 나오는데 인간의 육체는 짐승 같이 같은 날 같은 재료로 만드셨습니다(창1:7, 19). 몸의 재료를 비천한 흙으로 취하심은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흙에서 취했어도 하나님의 형상이지 짐승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여 시험이 다가오면 여지 없이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바다에서 살아야지 거길 벗어나면 안 됩니다(계12:17, 시119:9, 요일3:23, 계1:1-2, 계19:10). 우리가 은혜 가운데 살고 또 잘 길들이면 좋은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3. 육신적 모습은 흉악한 괴물입니다.


뿔이 열이요” 뿔은 권세와 능력의 상징이며 10은 전체 모두 혹은 시험의 수입니다. 한 뿔도 두려운데 열 뿔이니 완전히 악하고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시험이 들면 인간의 모습은 열 뿔과 같은 괴물로 변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뿔난다는 교훈으로 경계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4. 육신적인 면은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머리가 일곱이라” 여기 머리는 지식의 거점이요, 일곱은 사역의 완전수입니다. 마치 스스로 알아서 행하는 본능의 능동성과 같이, 혹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고 좋은 열매를 맺는 성령의 기름부음의 속성과 같이(요일2:27) 사탄의 시험에 들면 육신적인 걸 교육 받지 않아도 자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5. 육신에 속하면 자기 주관에 빠집니다.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머리에 써야 할 왕관이 뿔에 있습니다. 뿔은 권세와 능력의 상징이요, 왕관 역시 통치의 개념이요, 10은 가득찬 만수로 완벽한 제왕임을 시사합니다. 입법 사법 행정만 거머쥐어도 제왕적 권세인데 모든 제반권세를 다 가졌으니 제 맘대로입니다. 자아를 가리키는데 이 모습은 육신의 지배를 받는 육에 속한 자 혹은 육신에 속한 자의 모습입니다. 자아와 새 자아에 대해서 17:12-17에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6. 하나님의 자리까지 침범하려고 합니다.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이름은 곧 실체를 가리키듯(시113:1), 머리들에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음은 육신적인 삶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신성모독죄에 해당합니다(빌3:19, 롬16:18). 육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이지만 사탄의 시험과 자아에 이끌리면 세상적이고 마귀적이고 정욕적으로 변하는데 이는 사탄의 모습입니다(요일2:15-17, 약3:15, 창3:6).


7. 육신적이 되면 육신의 본능이 주장합니다.


2절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표범은 빠르고 무자비하고 이기적이고 야행성이며 유독 욕심이 많은 동물입니다. 육신의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시험 들면 본능 중심의 짐승이 되고 짐승이 왕국이 됩니다(롬3:13-18). 요즘 여러 자유를 빙자한 법들이 제정되면서 인간의 본능에 대한 제제가 풀리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신앙도 윤리도 도덕도 양심도 없는 짐승의 왕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8. 육신적 특징은 큰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곰은 보통 네 발로 행동하지만 공격 시에 일어나면 2m~3m에 가까운 거구인데다, 곰의 발은 크고 힘에 세고 두꺼운 발톱이 있어 엄청난 파괴력이 있습니다. 이처럼 본능에 이끌려 육신적인 사람이 되면 마음으로든 행동으로든 죄의 능력이 커집니다. 수많은 전쟁도 탐욕과 감정이 만들어낸 그 결과물입니다(약4:1-2).


9. 육신적 특징은 포식성을 가졌습니다.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사자는 주리면 사냥을 하는데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습니다. 여기 사자의 입은 본능의 포식성을 의미합니다(시22:21, 딤후4:17). 그럴지라도 그 본능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전6:7).


10. 육신적 특징은 사단의 짓을 합니다.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여기 용이 자기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다는 것은 시험이 들면 그 사탄의 짓을 우리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죄의 소질과 능력이 생기고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살후2:4, 벧후2:10, 롬8:13).


11. 하나님을 멀리하면 육신적인 면이 살아납니다.


3절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일곱 머리 중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됐지만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낫게 됨으로부터 살아나 비로소 괴물 역할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완전수 7에서 1이 문제가 생긴 것으로 육신에 속한 삶의 파괴를 시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여 시험에 들면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육신적인 모습이 살아납니다. 육신적인 마음을 죽이는 것은 십자가 공로와 성령의 은혜입니다. 양심의 법, 국가의 법, 도덕 체면 징계와 같은 것들이 육체의 일탈을 어느 정도 막아주지만(고후12:7) 시험 들어 육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막아주지 못합니다.


12. 통제가 느슨해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괴물 같은 짐승이 낫는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신앙에 게으름이 있거나 잘못된 지식으로 양심이 무뎌지거나 믿음이 떨어져 통제가 느슨해지면 육신적인 사람이 되어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게 되는데 이건 우리 심령에 재앙이요, 넓은 의미에서는 메시아에 대한 대적입니다(시2:3).


13. 육신적이란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온 땅이 따랐다 했는데 온 땅은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마음입니다. 이처럼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육신적인 것이니다. 믿음 생활이 약화되거나 양심이 무디어지거나 억제의 수단이 사라지면 뿔의 권세가 회복되어 가책도 받지 않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으로 살게 됩니다(시119:67).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사8:12-13).


14. 육신적 생각은 사탄과 흡사합니다.


4절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앞에서 설명했듯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욕망대로 살게 하는 권세입니다. 사탄에게는 어둠의 권세, 타락의 권세, 죽이는 권세,,, 그런 권세 말고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영을 받으면 더욱 세상적이요 육신적이요 마귀적이 됩니다(약3:15). 그래서 육신을 따라 살면 필경은 죽습니다.


15. 육신적인 월권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경배란 하나님께만 드리는 용어인데 사탄의 시험에 빠지면 사탄숭배와 육체숭배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약4:11-12, 눅12:10, 롬8:13, 고전9:27).


16. 육신적 삶이란 육신중심을 가리킵니다.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이처럼 사탄의 시험에 들면 짐승제일주의 즉 육신제일주의로 나갑니다(빌3:19).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4절) 이와 상응하는 말씀이 미가엘입니다. 미가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라는 의미입니다. 교만하여 내 중심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으십니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롬8:7).


17. 육신적인 특징은 천하무적입니다.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은혜를 받아도 육신의 본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경건한 절제력이 이러한 욕망을 적절히 통제합니다(갈5:16). 세상에 대한 육신적 욕망은 천국의 소망까지도 배척합니다. 더 강한 천국의 소망만이 이를 이길 수 있습니다(빌1:22-23, 고후4:17-18).


18. 본능적인 호소력은 대단합니다.


5절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여기 과장된 입은 본능의 호소력을 가리킵니다. 입의 말이 잘못되었다면 그 근원인 마음 역시 그러합니다. 이 입이 제자교육을 상징하는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할 입이니 신앙이 성숙해지면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에덴동산의 뱀처럼 본능에 호소한다든지(창3:6),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붙들고 인정에 호소한다든지(막8:31-33) 그 영향력이 아주 큽니다.


19. 그 패역함도 대단합니다.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이처럼 예수님에게 얼마나 많은 원수들이 신성을 모독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었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신 증거와 표적과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렸다고까지 말하는 성령훼방죄를 범했습니다(막3:28-29). 이처럼 육에 속한 마음에 신성 모독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탐심을 하나님 삼고 자기 안위와 영광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20. 육적인 생활이 그칠 날이 옵니다.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여기 마흔 두 달은 예수님의 제자교육 기간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양육을 받아 마음에 온전한 신앙이 들어서면 이방인과 같은 육신적 삶은 그칩니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롬8:9).


21. 육신적인 생각은 어리석습니다.


6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마12:34) 육체의 본능적으로 하는 말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시14:1, 잠18:6-7, 마12:36, 잠12:14, 잠18:21). 입을 벌린다는 용어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였고(사9:12, 신11:6), 예수님의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비하형입니다.


22. 육신적인 소욕은 하나님을 방해합니다.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비방을 훼방으로 번역했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속성은 성령을 거슬러 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갈5:17). 그러므로 육의 소욕보다 더 성령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23. 육신적인 소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의 장막 곧 하늘의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가 있는데 하나님의 장막이니 더욱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계7:15, 시118:15). 이처럼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적으로는 정반대입니다(롬7:22-23).


24. 육신적인 마음은 늘 시험에 빠뜨리는 존재입니다.


7절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혹자는 이 구절을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의 권력이 교회를 이길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문자적 해석이요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은 박해를 당하거나 순교를 결코 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본에서는 이 본문을 의도적으로 삭제했습니다. 그러나 삭제할 이유가 없고 거룩한 성도들도 이 짐승 같은 육신으로 인해 자주 시험에 넘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롬8:12-13, 고전10:12, 벧전1:17, 벧전2:11).


25. 육에 속한 사람은 갈등도 없습니다.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이 말씀은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분열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표현은 죄악된 속성을 가리킵니다. 갈등이란 두 세력이 충돌할 때 생기는데 이렇게 수백 가지로 분열된 속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같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26. 육신적인 마음을 이기는 길은 예수의 공로입니다.


8-9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여기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으라.”는 말씀으로 주의를 환기시켜 줍니다.


그 힌트는 먼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공로입니다.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복음을 믿는 자는 이길 수 있습니다(갈5:24). 다음은 생명책에 녹명 된 사람은 짐승을 경배하지 않는다 했듯 거듭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요일5:4, 18).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이기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더욱 자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하늘에 속한 자는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는 힌트입니다(골3:2-3). 즉 영에 속하면 경배하지 않게 됩니다(고전3:1-3). “창세 이후”라는 언급에서도 그 힌트가 나타납니다. 즉 창세 이전이면 되겠지요. 성도는 창세 전에 택함 받은 자입니다. 즉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택함 받은 자는 그 마음에 진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계17:14).


27. 육체의 본능을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10절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자기도 칼에 죽을 것이니” 이 말씀을 문자대로만 해석했을 때는 공포스런 말입니다.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긴다는 말도 그러한데 대항하면 대항한 만큼 당한다고 하니 대항할 수도 없고 가만히 앉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힌트가 있는데 사로잡지도 말고 저항하지도 않으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육신의 본능과 싸우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육신의 요구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범위 안에서 적당히 충족시켜 주어야지 지나치게 억제하면 시험이 옵니다. 사로잡는다는 것은 지나친 통제를 말합니다. 그리고 칼로 죽인다는 것 역시 단식이나 은둔과 같이 강력한 통제를 의미합니다.


육체의 기본적인 본능은 창조 시 사람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육신의 요구를 죄로 안다면 그 때 당하는 시험은 끝이 없습니다. 드시고 싶은 것 있으시면 감사함으로 먹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성욕도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시기 바랍니다(고전7:9). 혼인과 음식을 강제로 금하는 것은 사탄의 가르침입니다(딤전4:1-5). 몸은 사로잡을 성질이 아니고 한계선 안에서 적절히 관리할 대상입니다.


28. 믿음과 절제의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10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거룩한 백성임을 강조하는 성도라는 낱말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줍니다(고전1:2, 엡5:3). 세상의 법도 어느 정도 육신을 통제하지만 마음까지는 통제하지 못합니다. 우리 육신적인 것들에 대한 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인내와 믿음은 어디서 올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마음과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믿음의 은사와 절제의 은사입니다.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 (계 13:11-18)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또 다른 짐승"이라 한 것처럼 앞에 나온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다르면서도 어떤 연관성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얼마나 부추기는지 그 관계는 불나비와 불의 관계와 같습니다. 여러 관계와 상징을 미루어 볼 때 땅에서 올라온 다른 짐승은 세상 혹은 세상정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세겜생활에 맛이 들어 하나님께 서원한 벧엘의 여정이 길어지면서 터진 창 34장의 디나 사건과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세겜은 세상이요, 디나는 세상에 호기심을 갖는 육신의 정욕이요, 벧엘은 하나님 앞의 예배생활입니다. 이처럼 영적 생활에 소홀할 때 우리 마음은 세상에 강간당해 더럽혀지고 온갖 두려운 일로 마음이 쑥대밭이 되고 맙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처럼 세상에서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핵심입니다. 세상이라는 주제는 요한계시록에서 마땅히 다룰 중요한 주제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한 베드로의 외침과 같습니다. 계시록에서 세상(세속)이라는 주제가 여러 각도에서 조명이 되는데 본문은 세상의 정체를 다르고 있습니다.


세속 혹은 세상정욕이란 무엇일까요?


1. 세속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11절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땅은 하늘과 상반된 개념으로 여기서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지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간의 악한 심성이나 그들이 만든 모든 세속적인 문화를 일컫습니다. 땅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 즉 사탄에게서 났다는 것입니다(약3:14-15, 마7:15-16, 요일2:15-16).


2. 세상은 끊임없이 거짓된 행복을 약속합니다.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어린 양은 예수님인데 어린 양 같다고 했으니 예수님을 모방한 것입니다. 즉 어린 양은 구원자 예수님이요, 두 뿔의 2는 증거의 수요, 권세의 상징이요, 양각나팔의 재료라는 점에서 복음나팔을 연상시킵니다. 이처럼 세상은 온갖 그럴 듯한 미혹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이 거짓에 속아 행복의 파랑새를 잡으려고 뛰어들다가 멸망에 이릅니다(잠5:3-9).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미혹하던 사탄의 수작과 같습니다. 세상은 구세주처럼 행복을 약속하지만 거기엔 진정한 만족도 없고 내 영혼을 죽이는 쓴물일 뿐입니다(전2:1-11).


3. 세상의 미혹력은 커져만 갑니다.


용처럼 말을 하더라.” 용은 뱀이 완전히 자란 모습으로 에덴동산의 뱀도 미혹력이 대단한데 다 성장한 용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사탄의 힘은 세상에서 나온다고 할 만큼 온갖 세속적인 것으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다윗과 같은 믿음의 용사도 사탄에게 넘어가 인구조사하다 얼마나 혼났습니까? 마음에 작은 나쁜 동기가 생각나면 멈추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까지 세상의 필요와 명예와 부귀와 영광 등을 제시하고 성경까지 인용하면서 그럴듯하게 접근했습니다. 이 세상이 마음속에 붙어서 속삭입니다. 마음의 상상 속에 온갖 환상을 보여주면서 속삭입니다. 세상이라는 지남철에 끌려들기 시작하면 천하의 장사도 막지 못합니다.


4. 세상은 인간의 죄악성을 깨웁니다.


12절“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먼저 나온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땅에서 나온 짐승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행합니다. 즉 육신이 추구하는 것들을 이 세상이 다 펼쳐 보여며 줍니다. 뿌리칠 수 없을 만큼 그 인력이 세어서 권세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이 불야성을 이룹니다. 사탄이 건설한 타락한 문화로 가득합니다. 세상이 인간의 죄악성을 깨워 타락의 길로 이끌어냅니다. 세상에 눈을 뜨면 파멸입니다.


5. 세상은 육신을 위해서 살게 합니다.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여기 땅은 넓게는 세상, 좁게는 육신에 속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처음 짐승이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니 육신을 가리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크게 높이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육신적 쾌락을 위해서 살게 합니다. 소돔을 택했던 롯이 한 번 잘못 선택으로 기족 모두 세상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벧후2:6-8). 이렇게 세상은 우리를 부추겨 육신을 섬기고 육신을 위해서 살라고 미혹합니다(빌3:19). 하늘에 가치를 두고 사는 하늘 사람이 아니고는 모두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됩니다.


6. 세상은 말씀 떠나 무디어진 양심을 환영합니다.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여기 처음 짐승을 일컬어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라고 말합니다. 즉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죽게 될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가 나았습니다. 14절에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칼은 말씀이나 신앙양심입니다(히4:12-13). 칼에 상했을 때는 세상이 미혹하지 못했는데 이제 나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미혹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여 우리의 양심이 무뎌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시119:9-11, 딤후3:15-17). 양심 버리면 우리 믿음은 파선되고 맙니다(딤전1:19).


7. 세상은 불꽃과 같이 열정적입니다.


13절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성경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대하7:1, 왕하1:10, 12, 왕상18:38). 이처럼 세상도 하나님을 흉내 냅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상상할 수 없는 열심과 헌신이 생기듯 세상의 불꽃도 정열적이며 관란에 휩싸여 자기를 바치게 만듭니다. 이처럼 세상정욕은 열정적이고 지배적이어서 한 번 사로잡히면 자신을 불태우고 재산을 불태우고 신앙까지도 불태워 버리고 맙니다. 다른 사람까지 그 불에 휩싸이게 합니다.


세상 가수 초청하다든지 나답과 아비후처럼 다른 불을 드리다가는 이상한 불이 붙어 교인들 심령 다 죽이고 맙니다. 그래서 그냥 이적이 아니고 큰 이적입니다. 성경에서 큰 이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열기에 빠지면 정상적인 신자들도 속화되고 맙니다. 사울이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두다 귀한 왕권을 빼앗깁니다. 아각은 불이라는 뜻입니다.


8. 세상은 인간의 정보를 기초로 만들어진 미혹합체물입니다.


14절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 더라. “짐승 앞에서 받은바”란 이미 12절에서 설명한바 있듯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소욕의 정보를 다 알아서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육신이 추구하는 것을 다 알고 만들어진 복합체물로 매력적인 모습입니다. 불가능하면 대리만족이라도 하도록 각종 매체 등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세상만큼 어필(appeal)하는 것이 있을까요?


이적이란 본래 어떤 것을 홍보하거나 보증하는 보조적인 수단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이적도 그러합니다. 세상도 그대로 본을 받아서 이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 이적이란 우리 마음에 만들어내는 온갖 탐욕의 보랏빛 상상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룻밤에도 수십 번 바벨탑을 높이 쌓았다가 쓸었다가를 반복합니다(눅12:16-19). 그러나 세상이 주는 것은 보랏빛 상상력이지 실재와 다르며 살모사의 독과 같은 것입니다.


9. 땅에 거하는 자는 누구든 그 미혹을 피하지 못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속한 자는 다 미혹을 당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2:2-3). 여기서 복음의 힌트도 줍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만이 피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요15:19). 세상이 매혹적이거든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았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고전2:14).


10. 신앙양심이 무뎌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여기서 칼은 말씀인데 이처럼 말씀을 멀리하거나 말씀의 칼이 무디어질 때 그래서 신앙양심이 무뎌질 때 그 마음에 탐욕의 우상이 들어서게 됩니다(시119:11, 시1:1-2).


11. 세상은 악의 사람을 만들어냅니다.


15절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세상이 권세를 받아 강해졌는데 칼이 무뎌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고 심지어 소돔과 고모라의 관리들처럼 성경을 금서로 정하고 죄악을 용인 내지 권장하는 악법을 만들어 죄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합니다. 인권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 아래 근친상간 동성애 소아성애 수간 등도 풀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세력이 강해지면 육신적인 탐욕은 물 만난 듯 생기가 넘칩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했는데, 말은 인격의 표현이요, 마음의 가득한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전에는 마음으로만 그랬는데 이제는 밖으로 표현되는 것을 가리킵니다.(눅6:45). 그래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12:34, )하셨습니다.


12. 세상은 선한 생각을 죽입니다.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이처럼 세속과 탐욕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몇이든지라 한 걸 보면 여러 가지입니다. 가령 체면이나 도덕이나 윤리 등이 저항세력입니다. 조금 더 강한 세력은 세상의 형법입니다. 그러나 세상 법도 기준이 타락하거나 마음의 죄까지는 관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적으로는 무력한 법입니다. 더 강한 것은 신앙양심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악이 성해지면 이러한 저항세력은 몇이든 화인 맞은 양심처럼 약해지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 나중에는 세상을 더 즐기게 되고 더 나아가면 쓴뿌리가 나서 선한 것에 대해 악감을 가지고 대항하게 됩니다. 그래서 히틀러와 같은 사람도 나오게 됩니다. 짐승보다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유1:10).


13. 세상은 사람을 죄의 종으로 만듭니다.


16-17절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당시 종의 표시로 이마에 화인을 맞게 했는데 여기서는 해당되지 않는 모든 자들이 인을 맞습니다.


과연 오른손과 이마에 받은 표는 무엇이며 그들 외에는 매매를 하지 못하게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계시록 기자 요한은 힌트를 주는데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말합니다. 갈수록 알록달록 궁금증을 더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삼손이 히브리적 관점에서 낸 수수께끼를(삿14:14) 블레셋 사람들이 풀 수 없었던 것처럼 성경적 사고로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을 가리키듯 짐승의 이름이란 곧 짐승입니다. 짐승의 이름이 쓰인 도장을 찍었다는 건 ‘넌 짐승이라.’고 인친 것입니다. 타락하면 본능을 따라 살기 때문에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를 “너는 내 것이라.” 하시면서 인치시듯이 세상도 자기 추종자들에게 “너는 내 것이라. 너는 육의 본능으로 사는 짐승이라.” 이렇게 인증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벧후2:10-14). 이마에 인침은 이마는 인격의 대표요, 오른손은 행위의 대표입니다. 즉 짐승 같은 인격과 그 행위입니다. 만약 이것이 바코드 칩이라면 반드시 오른손이나 이마여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14. 세상은 짐승 같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16-18절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여기 “그 이름의 수” 즉 짐승의 수가 무엇인지 모를 계시록 독자들을 위해 18절에 힌트에 힌트를 줍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그렇다면 짐승의 수가 666마리? 사람의 수이기도 하다고 했으니 사람이 666명? 그러나 그런 접근은 블레셋 사고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수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6은 세상이나 육신 짐승 등을 가리키는 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6일 동안에 창조하시고, 그 날 짐승도 사람도 모두 만드셨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6을 짐승이나 사람의 수라 했습니다. 짐승과 사람의 공통점은 흙으로 만든 본능적인 육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666은 6을 3번 거듭한 수으로 완전한 6을 가리킵니다. 본래 6은 완전수가 아닙니다. 일곱째 날 모든 일을 마치시고 쉬셨기 때문에 7이 완전수인데 6은 1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을 3번 써서 하나님의 완전을 모방하려고 한 수가 바로 666입니다. 즉 “넌 완전한 육신적인 사람, 넌 완전히 짐승과 같은 사람, 넌 진짜 사탄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욕적이고 세상적이고 마귀적이며(약3:15),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사람입니다(요일2:16).


짐승의 수나 사람의 수도 평행법 문장으로 보면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인간을 완전히 타락시키는 악의 권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옛날의 황제숭배나 오늘의 공산주의도 이 부류에 속한다 볼 수 있습니다. 죄 혹은 세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다 포함됩니다.


그래서 666에 대한 지배적 견해는 모든 악의 총체입니다. 그 증거로 계15:2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2절)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 즉 죄에서 구원 받은 노래를 불렀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세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바코드나 컴퓨터칩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문명이 발달하고 악인이 정권을 잡아 정보기술로 사람을 통제하려고 할 때 그걸 거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구원의 여부가 결정이라도 되는듯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구원으로 받고 성령의 인을 맞은 사람은 666표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계9:4).


그럼 666표를 받지 않으면 왜 매매를 못하게 합니까? 그 매매하는 상품이 다름 아닌 계 18장에 나오는 바벨론 상품입니다. 바벨론 상품이란 죄인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쾌락 허영 안일 교만 영광 미움 음란 술 마약 불신 더러움 거짓 등,,, 이런 것들은 육신의 생필품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666표가 암시하는 육에 속한 짐승 같은 인간들만이 매매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매하지 못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녀의 필요를 책임지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온갖 세속적인 문화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세속을 사고팔러 다니는데 그 세속의 풍조를 마음으로 사는 순간 나는 짐승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증하는 것입니다. 나는 육적인 사람, 세속적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66은 성령의 인 맞은 사람은 죄를 이기는 사람이니 666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어야지 본능으로 사는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