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9장

에반젤(복음) 2022. 9. 17. 07:21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9장

복음신앙을 위한 훈련 (계 9:1-3)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그동안 복음의 나팔이 울려 퍼지다가 갑자기 다섯째 나팔에 황충재앙이 나타나는 이유가 뭘까요? 말씀만 듣고 흘려버리는 즉 복음의 지식만으로는 온전함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많은 힘이 필요하듯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하늘에 속한 삶을 살려면 독수리 날개 치며 상승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사40:31, 빌3:10-12).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바로 다섯째 천사의 나팔입니다.

 

그 힌트가 바로 앞의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라고(계8:13) 예고였습니다. 그토록 복음 나팔을 불었는데도 아직도 땅에 사는 자가 있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고도 적당한 열심으로 살려는 모습이라면 하나님께서 가만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주를 위해 열심하시기 바랍니다(고후5:15). 그래서 온전한 복음신앙으로 유도하기 위한 3가지 강력한 성화의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황충재앙입니다.

 

강하고 열심 있는 복음신앙이 필요한 이유는?

 

1. 아직도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떨어진 별은 사탄입니다(사14:12-15). 사탄이 무저갱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는 자가 사탄임을 보여줍니다. 사탄이 성도를 지옥 보낼 권세는 없지만 삶을 지옥처럼 만들 권세가 있습니다. 복음을 받았다면서도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경외함에 부족하면 땅에 속한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2. 아직도 탐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절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무저갱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의 ‘깊음’이라는 의미의 ‘테홈’에서 나왔습니다. 무저갱에 대하여 학자들은 악한 영들이 영원한 불못으로 떨어지기 이전에 잠시 있는 장소로 보고 있는데(계19:20) 끝없이 깊은 지옥입니다. 그런데 무저갱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잠30:15-16). 이 욕망의 문을 열리면 인간은 무슨 짓이든 하고 맙니다(엡2:3).

 

그리고 “그 구멍”이란 삿6:2을 보면 전쟁이 날 때 피하여 숨는 곳을 연상시킵니다. 이 무저갱의 구멍에서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연기처럼 큰 화덕과 같은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오는데(창19:28),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욕망을 잘 묘사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은 숨어있지만 얼마나 뜨겁든지 그 욕망들이 터져 나올지 모릅니다. 우리 마음이 소돔 고모라입니다. 복음을 받았어도 아직 지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아직도 탐심이 존재한 것입니다.

 

3. 아직도 세상의 빛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먼저 해가 구멍의 연기로 어두워졌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습니까? 그것은 너도 나도 사탄의 시험에 들어 온갖 욕망이 분출됨으로 세상이 이렇게 어두워진 것입니다. 해가 어두워지면 일상화가 되어 소돔 사람들처럼 부끄러운 것도 모릅니다(전12:2, 고후4:4, 사3:9). 예수님 달리실 때 해가 빛을 잃었는데 하나님의 슬픔의 표시였습니다. 이처럼 아직도 하나님의 슬픔이 되고 있습니다.

 

4. 아직도 혼탁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기도 어두워졌습니다. 공기 즉 호흡은 원문에 ‘루아흐’ 곧 성령입니다. 오염된 공기니까 악의 영입니다. 이처럼 아직도 죄에서 떠나지 못해 악령의 지배 아래 혼탁한 심령으로(엡4:18-19) 살아간다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 들었지 진정한 그 믿음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나팔로 영이 더 혼탁해졌다기보다 그것을 깨닫게 하신다가 더 바른 해석입니다.

 

5. 아직도 쏘는 고통 때문입니다.

 

3절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어두운 연기 가운데서 황충이 나오는데 황충은 메뚜기 종류 중에서도 최후의 뿌리까지도 먹어 치우는 가장 무서운 식탐을 가진 메뚜기입니다(욜1:4). 이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왔음은 끝없는 욕망을 상징하고, 연기 가운데로부터 나왔으니 새카만 녀석입니다.

 

이 탐욕의 황충이 전갈의 권세를 가가지고 우리 마음을 쏘아댑니다. 심령을 쏘는 것은 율법과(고전15:56) 물질인데(딤전6:10, 약5:1-5) 여기서는 후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지식에만 머물지 말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죄과와 죄성에게까지도 구원하셨다는 그 진리에 서서 천국에서 사는 백성들과 똑같이 날마다 하나님께 더 적극적인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황충이 쏘지 않는 사람들 (계 9:4)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본문의 황충은 자신의 먹이인 초목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자만 쏘는 이상한 황충입니다. 여기 인은 성령의 인이지만 우리 편에서 보면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갈5:24). 이 복음을 믿는 확신의 믿음을 통해서 탐심의 황충이 쏘는 데서 피할 수 있습니다. 딤전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습니다.

 

그런데 황충이 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1. 아직 즐거움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먼저 “땅의 풀” 인생은 풀과 같습니다(벧전1:24).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장차 뜨거운 동품이 불면(창41:23) 마를 날이 옵니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풀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푸른 풀입니다. 그래서 시련의 고통을 모릅니다. 그리고 풀은 풀인데 땅의 풀이니 자연인이나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양심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양심은 신앙양심도 아니며 세상 것으로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전9:9, 전11:9). 그러나 그들도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오게 됩니다(롬14:10, 눅9:48-49).

 

2. 연단의 징계를 모를 때 고통이 없습니다.

 

“푸른 것이나” 성경에서 이런 표현은 아직 덜 익은 상태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푸른 열매는 대개 무화과에게 돌려진 명칭으로(아2:13) 푸른 무화과는 진액이 독해서 황충이 먹지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푸른 무화과는 웬만한 대풍에도 떨어지지 않는 꼭지를 가졌습니다. 무화과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푸른 무화과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택한 백성이지만 아직 초신자로서 연단의 고통을 모르며 신앙적 양심 형성이 형성되었을 리 만무합니다(롬1:21-23). 아직도 자연인처럼 세상 것으로 즐거움을 삼거나 그걸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합니다.

 

3. 종교적 형식만 갖춘 사람도 고통을 모릅니다.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수목은 살아있는 나무로 성경에서 사람을 가리킨 곳이 많습니다(눅23:30-31, 막8:24). 위대한 사람은 백향목 잣나무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런데 각종 수목이니 가시나무가 포함된 것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형식적 외식적인 사람은 양심의 고통이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 영광과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합니다.

 

4. 구원의 복음에 선 사람도 고통이 없습니다.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침이란 우리 편에서는 확신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로 믿어지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믿어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로로 내 죄과 뿐 아니라 나의 옛사람까지도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찌르는 율법과 죄와 탐욕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진리에 굳게 설 때 구원을 누립니다(고전15:1-2).

 

5. 고통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 이상의 사람들 다 빼면 남은 사람은 누굽니까? 자연인도 초신자도 외식자도 참신자도 아니라면 누가 황충의 대상입니까? 여기에 대한 열쇠가 4절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5절에도 진행자에 대한 존칭이 나타나는데 이런 존경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집니다. 그리고 문맥으로 볼 때 이 고통은 하나님의 어떤 섭리적인 목적에서 시행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연단하시는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계7:14의 큰 환난에서 나온 흰옷 입은 자들처럼 정금 같이 나올 수 있도록 분초마다 연단 중에 있는 하나님의 특별은총의 대상이 바로 그들입니다(욥7:18, 갈3:22). 인을 맞아야 함에도 아직 인 맞지 않는 자에게 대한 것입니다. 다섯 째 나팔로 인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말씀을 듣는 일부 무리 즉 예수를 믿는다 하나 아직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과 복음의 자유를 알지 못한 그 부류에 대한 연단의 교훈입니다. 성도는 율법 뿐 아니라 역시 우리를 찌르는 탐욕에서도 구원하신 예수의 복음에 굳게 서서 완전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롬5:1-2)..

 

 

양심의 쏘는 고통 (계 9:4-6)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천국 가는 길에 가장 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하나님을 알되 완전주의나 율법적이거나 복음을 알지 못할 때의 위기입니다. 양심이 무디어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예민하여도 문제입니다. 세상 일에 열중할 때는 못 느끼다가도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할 때나 사역을 수행하려고 할 때나 지나치게 결벽하게 살려고 할 때 더욱 양심이 예민해져 정죄감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율법적 양심이 겪게 되는 환난은 상상할 수 없는 불같은 환난입니다.

 

양심의 쏘는 고통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완전히 죽이지는 못합니다.

 

5절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전갈에 쏘이면 고통이 극심한데 2시간 이내에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이지는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죽이기는 죽이되 완전히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말라는 의미가 전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롬6:23, 겔18:20). 그러나 율법의 정죄로 죽은 심령이지만 나무의 그루터기와 같이 생명이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이 때 심령은 만신창이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상태가 그랬습니다(사1:8-9). 그래서 회개하면 다시 영적 교제가 회복되고 소생하다가 다시 무슨 일에 가책을 받으면 죽었다가 또 다시 소생하기를 반복합니다. 그 결과 불 속에서도 죽지 않는 구더기와 같이 마음의 지옥을 느낍니다(막9:48-49).

 

2. 율법 아래 있을 때 옵니다.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여기 5달 동안의 5는 고통의 수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날도 금요일, 예수님의 상처도 크게 다섯 곳, 연단의 수 10의 중심부요, 혹은 손가락이 다섯이듯이 책임의 수, 모세 오경이 율법이듯 율법의 수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적 아래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복음은 완성이지만 그것을 믿는 믿음이 미완성입니다. 성경을 보되 복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율법적 양심만 커지면 영적 환난에 빠집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는 그 짐을 지지 않으면서 교인들에게 지워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행15:10에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하면서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갈3:19). 회개 후에야 보혈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보혈공로를 누리지 못합니다. 회개 전에도 보혈이요 중에도 후에도 보혈입니다. 범죄했을 때 뉘우치고 슬퍼하고 회개하는 것은 맞지만(약4:9) 성도는 보혈로서 용서 받은 자이기에 사탄의 참소에는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고통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입니다.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통증이란 대개 처음에는 크지만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면 뇌가 그 통증을 인식하고 모르핀을 보내서 곧 경감시킵니다. 그러나 전갈에 쏘이면 근육이 마비되면서 호흡곤란과 여러 시간 동안 그 통증이 지속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고통이 그와 같습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린 듯 영적인 은혜도 사라지고 지은 죄를 자각하면 할수록 언제든지 계속하여 고통이 옵니다. 영원히 형벌이 반복되는 지옥과 흡사합니다. 이 고통을 피할 완전한 방법은 속죄의 복음에 서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4. 죽음이 피하는 고통입니다.

 

6절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욥이 당한 고통과 같습니다. 욥3:21에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고 말씀합니다. 지옥이 없으면 죽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 정죄를 피하려고 죄짓지 않으려고 내가 죽기를 갈망하지만 그렇게 거룩을 추구할수록 심령은 그만큼 더 예민해져서 더욱 사망이 왕노릇합니다(롬7:5).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찾으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악의 영은 떠나고 성령께서 주장하셔서 죄 역시 죽어지게 됩니다(롬6:10-11). 그러므로 보혈의 기초를 잘 세우시기 바랍니다(히9:14, 롬6:14). 해처럼 빛나고 밝게 살아야 할 신자들이 율법의 정죄에 빠져 얼굴 한 번 펴지 못하고 답답한 가슴을 치면서 사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황충으로 본 세상욕망의 정체 (계 9:7-12)

 

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11.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12.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스무고개 놀이처럼 여러 비유와 상징을 종합하여 연구할수록 차츰 명확해져서 정답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묘사된 어느 한 부분도 제외되거나 통일성을 잃으면 해석에 실패한 것입니다(계22:18-19).

 

만일 화가가 세상욕망을 주제로 추상화를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도 표정은 불만족하며, 크기는 작지 않을 것이고, 색깔은 검을 것이고, 그 힘은 강하고, 모습은 흉측한 괴물이고, 속도는 빠르고, 많은 사람들이 미쳐 달려가며, 결과는 불행이 따르는 그런 이미지로 결코 아름다운 그림이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의 황충이라는 괴물이 그렇습니다. 메뚜기와 전갈이 합해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처럼 세상 욕망은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고 고통스럽게 하는 괴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황충은 최후의 뿌리까지도 먹어 치우는 무서운 식탐을 가진 메뚜기입니다(욜1:4). 이런 지독한 식탐을 가진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왔는데 여기서 무저갱은 끝없는 욕망의 상징입니다. 그것도 연기 가운데로부터 나왔으니 우리 눈과 심령을 어둡게 할 것이고, 전갈의 권세까지 가졌으니 여기에 걸려들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욕망은 어떤 것입니까?

 

1. 건장하고 일사불란합니다.

 

7절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여기서 모양은 그 특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오랫동안 훈련시킨 기병대나 전차부대와 같이 수효와 기동력 공력력 돌파력 등 위력적이고 명령에 움직이는 일사불란한 모습입니다.

 

이처럼 세상욕망처럼 강력하고 일사불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욕망의 힘은 어떤 훈련받은 군대보다 투철하고 진지할 수는 없습니다. 피로감도 없고 이유도 문제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수한 사람들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바치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2. 마음에서 왕 노릇합니다.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금관은 개역성경에 면류관으로 번역된 것으로 통치권을 상징하는데 금관이 아니라고 금 같은 관이요, 면류관과 비슷할 뿐 참 면류관이 아닙니다. 이처럼 욕망이 하나님 위치를 차지하고 인격의 주도권을 쥐고 흔듭니다.

 

욕망은 왕의 수준을 넘어 신의 위치까지도 넘봅니다. 그래서 빌3:19에 “그들의 신은 배요” 그랬습니다. 인격의 중심은 하나님 자리인데 욕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왕 노릇을 하려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육에 속한 사람 혹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3. 가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7절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즉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욕망의 철저한 가면성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말쑥하고 교양 있는 신사 숙녀들이지만 마음에는 온갖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4. 세상 욕망을 위해 헌신합니다.

 

8절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여자의 머리털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 포인트입니다(아7:5). 성경에서 머리털은 몸과 마음과 힘과 정성까지도 드리는 온전한 헌신의 상징입니다(눅7:39). 그만큼 사람들이 세상욕망에 매이고 헌신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존심과 물질과 심지어 가족과 신앙까지도 버립니다. 에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히12:16-17).

 

5. 세상욕망은 무서운 탐욕성이 있습니다.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사자의 이는 무엇이든지 공격하여 씹어 삼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자의 공격력은 굶주렸을 때 나오는데 그 때는 뼈까지도 부숩니다(단6:24, 욥38:9). 세상욕망의 탐욕성도 그렇게 무섭습니다. 천사의 타락이나 아담의 타락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탐욕의 이빨만큼 강한 이빨은 없습니다.

 

6. 목적을 위해서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9절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호심경은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을 말하는데 철 호심경 같았습니다. 철은 강함의 상징으로 철을 이길 자가 없습니다(단7:7). 이스라엘이 가나안인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철병거를 이길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심에 철 흉갑을 했으니 목적으로 위해서라면 도덕도 법도 체면도 양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철판 깔면 하나님께서도 철판을 까십니다(신28:23-24, 사59:1-2).

 

7. 온 세상이 미친 듯 추구합니다.

 

9절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황충이 한 번 앉으면 비오는 소리가 납니다. 작물을 갉아 먹는 소리만도 이러한데 날아가는 소리는 얼마나 요란하겠습니까? 이것을 병거와 마병대가 전쟁터로 달려가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이기려고 도를 닦는 사람들도 있지만 탐심을 이긴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그 날개에 비유함은 인간의 욕망의 신속성 각축성을 시사합니다. 뱀이 자기만큼 큰 뱀을 한 입에 삼키는데 이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7. 그러나 그 길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전쟁터로 달려가는 병거와 말의 운명은 죽는 길입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탐욕에 사로잡혀 그것이 죽는 길인 줄도 모르고 사력을 다해 달려갑니다(약1:15, 잠7:21-23). 온 세상이 목적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이 행렬은 아담 이래 한 번도 멈춰본 적이 없고 온 세상이 가담된 그 어떤 경기와도 비길 수 없는 거대한 것입니다. 마음의 갈등 마음의 전쟁터를 만듭니다. 그리고 세상 욕심 가지고는 재림의 주님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히9:28), 요일3:3).

 

8. 세상욕망의 결과는 고통스럽습니다.

 

10절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전갈의 앞쪽에는 가위를 가진 우람한 팔이 있고 뒤의 치켜든 꼬리는 무서운 독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힘 있는 앞 팔로 붙잡고 뒤꼬리로 쏩니다. 이처럼 세상욕망에 빨려들면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습관성 약물인 마약과 같습니다. 사단이 하와를 그렇게 꾀었습니다.

 

9. 세상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입니다.

 

10절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여기 다섯 달 동안이라고 시한을 못 박았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다섯 달 후에는 고통이 끝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 다섯 달은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세상정욕의 끝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섯 달, 즉 5에 대한 의미가 환난수 중간의 최대 고통수(5절)라 했는데 이처럼 택한 백성이라면 환난의 연단을 통해서 흰옷 입은 무리가 됩니다(계7:14, 벧전4:1).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역시 예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에 죄과만이 아니라 죄의 욕망까지도 못 박혔음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갈5:24).

 

10. 세상욕망의 배후에 사탄이 있습니다.

 

11절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여기 황충들의 임금이 나옵니다. 잠30:27에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라고 했는데 황충은 어쩐 일인지 임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진리를 묘사하기 위한 묵시문학적인 기법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은 세상욕망이 사탄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요일2:16). 악한 일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사탄이 넣어주는 온갖 욕심으로 타락합니다(벧전5:8-9).

 

11. 세상욕망은 복음 안에서 그칠 수 있습니다.

 

11절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황충들의 임금인 사탄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이름은 그 본질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그 이름을 알려줍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바돈”인데 그 뜻은 ‘파괴, 멸망’입니다. “헬라어로는 아볼루온”인데 역시 ‘파괴자, 살인자’라는 의미입니다.

 

왜 신구약적인 두 언어로 이름을 알려줄까요? 그것은 사탄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변함없이 우리 인간에게 파괴자의 역할을 하며, 그 방법 역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을 이기셨지만 지금도 동일하게 사탄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실 때 사탄도 함께 못 박힌바 되었고, 사탄의 무기인 우리의 정과 욕심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그것은 신약시대여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우리가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죄도 그치고 저주도 그치고 사탄도 물러갑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모르기에 제사하며 구약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복음을 몰라 승리와 해방과 자유의 확신이 없다면 그는 여전히 아직도 옛 것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12. 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2절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이 말씀대로 앞으로도 2개의 화가 남았습니다. 우리가 더 자라가야 할 것이 둘째 셋째에 있습니다. 그러나 낙실하지 마십시요. 계9:5에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라 존칭했듯 이 첫째 화 역시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함이 고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렘2:19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통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잊으면 또 다시 반복하기 때문입니다(벧후2:20-22). 그리고 거룩함을 입었다고 자만해서도 안 됩니다(빌3:15-16). 그래서 12절에 “보라 아직도” 이처럼 복음의 시제는 “이미”와 “아직”입니다. 주님이 이미 이루셨지만 또한 우리가 믿음 안에서 계속 자라나가야 합니다.

 

 

유브라데 네 천사 (계 9:13-21)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여섯째 천사의 나팔은 2번째 화에 해당되고, 그것은 유브라데 네 천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유브라데 네 천사는 오순절과 같은 성령의 대부흥운동을 말씀한 것입니다. 즉 앞의 황충을 통해서는 강한 연단으로, 유브라데 네 천사를 통해서는 강력한 성령의 은혜로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적 부흥은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날까요?

 

1. 영적 부흥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13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 금 제단은 기도의 분향단입니다. 이 단의 뿔은 예수 이름의 권세를 상징하고, 네 뿔이니까 천지를 움직이는 강한 힘입니다. 이처럼 예수 이름으로 그리고 강하게 기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 금 제단”입니다. 하나님 앞이니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금 제단은 신성의 상징으로 내 육정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유1:20, 약4:3). 중심을 다한 기도 깊은 기도여야 합니다.

 

그런데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13절) 그냥 음성이 아닌 한 음성입니다. 한 음성이란 각 뿔마다 음성이 있었음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합심하여 기도해야 성령의 부흥이 임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의 분부대로 날마다 합심하여 기도에 매달렸습니다(행1:14).

 

2. 영적 부흥은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13절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이 일은 나팔을 불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앞에서 말씀했듯 나팔은 복음의 상징입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회개의 역사는 베드로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마다 불일듯 일어났습니다(행1:44).

 

예수의 복음을 모르면 안 됩니다. 아볼로는 웅변적인 설교자였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았지 그리스도의 복음도 성령도 몰랐습니다(행18:24-28). 그는 예수에 관한 메시지만 알고 있었지 복음의 자세한 내용은 몰랐습니다. 복음의 나팔을 불 때 온 세상이 성령의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성령 권능의 사람이 이토록 귀중합니다.

 

3. 대 부흥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14절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유브라데를 큰 강이라고 한 것은 구속사와 관계가 있는 강이기 때문입니다. 이 강을 아브라함이 건너 가나안에 왔지만, 그보다 유브라테스 강이 본문에서 상징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브라데란 '잘 흘러가는, 좋고 비옥한'의 의미처럼 대 홍수가 나서 거대한 강물을 몰고 오는 큰 강이 바로 유브라데입니다.

 

이처럼 유브라데는 성령의 대홍수를 상징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에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호소력 있는 주장은 오순절 성령은 이미 임해 우리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지금도 사모하는 자에게 충만히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였지만 행4:31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했습니다.

 

4. 영적 부흥은 결박을 풀어야 합니다.

 

14절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는 것은 그동안 묶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활동이 제한 받고 있다면 지상의 일군들이 지금 무엇인가에 묶여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지상의 성도와 사역자들을 돕기 위해 내려와 있는데 일군들이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천사들이 활동도 개시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베드로가 갇힌 옥의 삼엄한 다중의 장치와 철문과도 같습니다. 거기다 베드로가 자고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무지 고정관념 무능 연약함 허물 게으름도 있겠고, 밖으로는 잘못된 교리나 전통이나 비협조적인 조직이나 박해의 세력이나 열악한 환경 등으로 활동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을 힘들게 여기고 따라주지 않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다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셨고(마20:17), 세 제자만 데리고 가시기도 했고(막9:2), 500문도 중에 120명이 참여했습니다. 이 말씀이 힌트하는 바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운동의 활발한 사역 없이는 영적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5. 열심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5절 “네 천사가 놓였으니” 여기 놓였다는 말씀은 말4:2에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성령의 부흥은 이런 열심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성령의 역사는 비례합니다. 불을 드려야 불이 임하듯 그만큼 열심의 불을 드려야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임합니다.

 

그런데 한 천사만 아니라 네 천사가 다 놓여야 합니다. 여기서 4는 새 예루살렘성이 장과 장과 고가 같듯이 균형 잡힘을 상징합니다. 가령 기도 말씀 찬송 감사 사랑 등 어떤 하나라도 부족하지 않아야 합니다(마5:19). 기도 한 가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6. 기도 분량이 차야 합니다.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그런데 그 날과 그 시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여기 년 월 일 시란 영적부흥이 극적으로 일어나는 때를 시사합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때는 기도자의 자세가 간절함과 겸손함으로 타오르고, 또 부르짖는 기도자들이 많아지고, 그래서 많은 기도가 올라가고 또 올라가 모아지고 모아져서 하나님께서 들으신 바가 되는 상달되는 때입니다(행10:4). 오순절에 10일 간 모여 부르짖고 기도했는데 꼭 10일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10은 가득 찬 만수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분량이 차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수년 혹은 수십 년 성도의 기도가 있기도 합니다.

 

7. 영적부흥은 회개시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여기 사람 3분의 1을 죽인다는 말은 수학적 의미보다 완전수 3이 깨어지는 의미로 회개와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부흥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과 회개운동이며 악한 문화에 대한 도전입니다(고전15:31, 고후4:11). 그 증거가 20, 21절입니다. 거기 보면 회개한 자도 있지만 아직도 회개치 않는 자도 있더라는 그 말씀에 부흥운동의 힌트가 있습니다. 회개를 위해서 주신 특별한 기회였다는 말입니다.

 

8. 이 날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주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3년 반이나 훈련시키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9. 이 부흥의 역사는 불가항력적입니다.

 

16절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마병대의 수효가 이만만이면 2억입니다. 그런데 이만 만이라 표현한 것은 2는 증인 및 증거의 수요, 만 만은 무한충만수로 헤아릴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한 말씀처럼, 다윗이 승전하고 돌아올 때도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삼상18:7). 사울도 들었습니다. 다윗이 만 만을 죽였다고 일억을 죽인 건 아닙니다. 그만큼 많다는 묘사입니다. 노도광풍과 같은 마병대의 세력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부흥의 능력은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갈5:23, 요15:26).

 

10. 부흥의 역사는 이기는 능력입니다.

 

17절 “이 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호심경은 소중한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입니다. 그런데 호심경이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들은 전쟁의 색이요, 이 색깔이 가슴에서 빛나고 있었다는 것은 무수한 전쟁을 치렀고 이기어 냈음을 시사합니다. 즉 불빛은 무수한 불화살을 이겼고, 자줏빛은 피의 색이듯 수많은 적군들의 창칼을 이겼으며, 그리고 유황빛이 있음은 전쟁의 화약을 경험했고 이겼습니다. 이처럼 부흥 운동이 임하면 세상도 죄도 원수도 마귀도 시험 연약함도 박해도 이깁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슴에 흉갑이 있듯이 담대합니다.

 

11. 부흥의 역사는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말들도 호심경을 입었으니 불 속이든 물 속이든 거침이 없습니다. 말은 능력인데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니 복음사역에 거침이 없습니다(막16:20, 행2:43-47).

 

12. 성령의 부흥은 담대한 믿음을 일으킵니다.

 

17절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말의 약점은 잘 놀라 기수가 말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 담대한 사자의 머리를 하고 있으니 이젠 창칼이 두렵지 않고 불속이든 물속이든 뛰어듭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전도에 열심일 뿐 아니라 두려움이 없습니다(행5:41-42, 딤후1:7).

 

13. 성령의 부흥이 임하면 메시지가 강해집니다.

 

17절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입은 말씀 증거를, 불과 연기와 유황은 전쟁의 상징이요 강한 화력을 암시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부흥이 임하면 말씀의 화력이 강해집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의 말씀에 모두 놀란 것과 같고(마7:28-29), 베드로의 증거 역시 회개를 불러오는 강력한 감화력이 있었습니다(행4:13).

 

14. 성령의 부흥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만들어줍니다.

 

18절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처럼 복음 전도자들의 입에서 불을 토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연상시키는 불과 연기와 유황 즉 세 가지 재앙은 악을 척결하는 말씀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3분의 1이 죽듯이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주인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부흥의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 증거로 서로 필요를 나누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행2:44-47). 그리고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됩니다(고후5:15).

 

15. 부흥이 임하면 말씀과 언어의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19절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여기 입은 말씀을, 꼬리는 이적을 각각 상징합니다. 먼저 입은 말씀의 권세입니다. 오순절에 말씀의 권세가 얼마나 컸던지 모두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입을 열면 그대로 되는 각종 기적이 나타났습니다(행3:6-8, 행5:3-4). 이것이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입술의 기적입니다(막11:23-24, 요14:12, 요11:43, 요14:10).

 

16. 성령의 부흥이 임하면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19절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여기 꼬리는 모세의 기적에서 보듯 기사와 이적의 상징입니다(출 4장). 그런데 그냥 꼬리가 아닙니다. 꼬리에 머리가 있었는데 머리는 지능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기적이 아니라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기적은 결실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결실을 위해서 주십니다(막16:20, 요20:30-31). 기적 없는 말씀 역시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완악한 자들일수록 표적이 필요합니다(행5:12-14).

 

17. 부흥운동은 회개의 운동입니다.

 

20절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여기 재앙에 죽지 않고 남았다는 것은 죽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나팔 재앙이니까 말씀 안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믿고 순종하고 그대로 지키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있듯 더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고라신과 벳새다가 그랬습니다(마11:21-22). 유대인들은 혹시라도 말씀 듣고 마음이 고침 받을까 두려워했습니다(마13:15). 훌륭한 사람이 될까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이처럼 회개하지 않은 자가 있었다는 것은 이 부흥운동이 회개의 운동이었음을 시사합니다.

 

18. 부흥운동은 하나님 경외하는 운동입니다.

 

20절 “오히려 여러 귀신과” 이 말씀은 죽지 않고 남은 자들이 귀신을 더 섬기더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는 '더욱'인데 문자대로라면 더욱 귀신숭배를 했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부흥운동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여 신비를 추구하다가 귀신운동으로 빠져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웃사랑에 최선을 다해야지 탐욕이 발동하여 능력과 은사추구에 몰두하면 알지 못하는 순간에 악령이 주장하고 맙니다. 말씀 따라가야 성령을 만나지 신비 따라가면 귀신을 만나게 됩니다.

 

19. 부흥 운동은 하나님의 비전을 품는 운동입니다.

 

20절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이처럼 부흥운동이 있었지만 아직도 우상숭배자가 있다는 것은 이방종교는 물론 아직도 탐심을 버리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골3:5). 강력한 기적에 편승하여 자기 이름을 내거나 물질을 모으거나 뭐나 된 양 교회의 질서를 흔드는 교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끝까지 거룩한 영을 유지할 리 없습니다.

 

성령의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내 꿈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는 사람들도 많지만(잠16:9) 반면 아직도 덜 죽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의 꿈을 성취하려고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각각 다르건만 맘모스 교회가 공통비전이 되고 말았는데 성공주의에다 하나님의 뜻을 걸고 나가다 보니 온갖 문제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일부 성공했다는 자들은 그 이권의 덩치가 너무 커서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빠져나올 수도 없는 상황에 봉착하여 그 바벨탑과 함께 주저앉아 멸망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고 모든 교회에까지 치명타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20. 부흥 운동은 관계 회복의 운동입니다.

 

21절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여기 열거된 목록들은 십계명에서 인간에게 관한 계명입니다. 복술도 속여 돈벌이를 했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웃을 해하려는 악행을 회개하지 않았는데 이 역시 부흥운동이 이웃 사랑을 강조한 운동임을 전제했음을 보여줍니다. 성령과 말씀 안에서 내가 죽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가 덜 죽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해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웃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면 더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갑니다. 우리의 모델인 초대교회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 뿐 아니라 이웃과 관계 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행2:44).

 

21.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1절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이 열거된 목록 중에 물질적 탐욕과도 관계된 죄가 있는데 발람처럼 능력 팔아 자기의 이득을 위해 사는 자들이 있더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흥 운동의 틈바구니에서 사리사욕의 이득을 취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가난은 저주요 부요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1차방정식만 외우고 있지 말고,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의 그 모본대로 바울이 구제운동을 일으켰듯(고후8:1-15), 사랑 안에서 서로 돕고 키워주는 것이 연보의 정신이요, 우리가 취해야 할 물질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