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7장

에반젤(복음) 2022. 9. 17. 07:17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7장

 

인침 받는 십사만 사천 (계 7:1-3)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144.000의 정체>

 

십사만 사천이 누구냐는 의문은 모두의 관심사입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의 12지파, 마지막 때 사명자로 부름 받을 유대인 전도자. 혹은 순교자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학설은 신구약의 모든 신실한 성도들이라는 견해입니다.

 

12지파가 아닌 것은 본문이 구약에서 열거되는 지파의 구성과 순서와 다르며, 계 14장에서 144,000이 재 언급 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르는 자들이라 하여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는 헌신된 성도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약적인 유대인 개념과도 부합합니다. 롬2:28-29에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성도들을 성령에 의해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4:11, 8장, 엡1:13이하).

 

그들 중에는 순교자도 있겠고 이방 혹은 이스라엘의 복음전도자도 있겠지만 그 한 가지로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144,000은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기초로 하는 신구약의 모든 신실한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됩니다(약1:1, 갈6:16, 요6:27, 고후1:22, 엡1:13).

 

이런 주장이 계시록을 복음으로 보는 우리들의 관점과도 부합합니다. 십사만 사천은 당시 종들에게 소유의 증표로 이마에 지워지지 않은 도장을 찍었던 그 배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소유라는 표시입니다(사43:1, 롬1:6, 벧전2:9). 하나님의 소유가 되려면 예수를 주로 삼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계14:4-5에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했습니다.

 

십사만 사천에 대한 계시가 주어진 시점만 봐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즉 두루마리의 봉인이 떼어져 성경이 열리자 구약성경의 비밀이 나타난 다음에 십사만 사천에 대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율법의 비밀은 인간은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알게 하는 것으로 그 결과 죄인이 두 손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게 되는 때입니다.

 

십사만 사천의 인침은 바로 이 때 이루어집니다. 즉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구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철저한 준비의 과정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대상으로 특정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든지 부르시는 모든 자들에게 다 해당된다는 점에서 십사만 사천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봉을 떼는 마지막에서 십사만 사천의 계시가 나오는 것은 내용적으로 볼 때 퍽 자연스럽습니다.

 

인침 받는 비밀은 무엇일까요?

 

1. 복음을 만나야 합니다.

 

1절 “이 일 후에” 여기 이 일은 앞에서 그동안 떼어진 여섯째 인까지를 말합니다. 이 표현은 흔히 본서에서 장면의 전환을 나타내주는 관용적 표현이지만, 때로는 앞의 장면 후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연계적 의미도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율법론 다음에 구원의 복음인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여 인침을 받는 것은 자연스런 구원의 서정입니다(갈3:23-24).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주이실 뿐 아니라 예수님 말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오직 예수의 분명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연단의 섭리 속에 이루어집니다.

 

1절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말씀의 본래적 배경은 땅의 바람이 사방에서 거세게 불어 닥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이 바람은 세속의 바람이요, 불신 이방종교 철학 미련 이방문화 이단 정사 권세 어둠 악령 안티기독교 혹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다원주의의 거짓된 바람입니다. 순수한 복음이어야지 이런 바람 제어하지 못하면 인치기 어렵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부리는 종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방에 선 네 천사이기 때문에 그 손을 빠져나갈 틈이 없습니다. 이것을 연단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7:14에도 나오듯 흰옷 입은 백성들이 큰 환난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3. 신봉하던 것에서 무너지게 하십니다.

 

1절 하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처럼 세상의 철학과 종교와 세상의 여러 이론의 바람이 불어오면 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에 철저한 실망을 갖게 합니다. 성령의 인침은 성령의 역사와 아울러 구원의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엡1:13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했습니다.

 

4. 인생을 숙고하게 하십니다.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여기 바람에서 보호하는 몇 대상이 나옵니다. 먼저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건조하여 바람이 불면 깜깜한 황사로 뒤덮입니다. 이처럼 어리석음에 덮여 복음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바다입니다. 이 바람은 흔히 사조라고 하듯이 세상의 이론과 풍조의 바람입니다. 세상 이론과 철학과 종교에 심취해 있으면 예수 앞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각종 나무는 사람을 상징하는데 바람이 불면 잎과 꽃과 열매들이 떨어지고 가지가 부러지듯 하나님께서 주신 정직한 심성과 지성이 보호되어야 합니다. 조금만 정직해도 진리를 만나기 쉽습니다.

 

5.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하십니다.

 

2절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여기서 하나님의 인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표현은 성령의 인을 맞으면 영적으로 살아남을 시사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이 연상됩니다(마16:16, 요20:31).

 

6. 성경의 복음을 믿게 하십니다.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해 돋는 데에 대한 설들이 다양하지만 성령의 인을 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지역이나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시84:11, 마4:15-16)을 상징하는데 해 돋는 곳은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요5:39에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단이 아닌 바른 진리여야 합니다(요이1:9).

 

7.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삿5:31에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했듯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때 성령의 역사로 구원의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말4:2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하신 것과 같습니다.

 

3종류의 인침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치심이 있습니다. 고후1:22에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다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칩니다. 요3:33에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아멘하면서 하나님의 참되심에 도장을 찍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인치는 인침이 있습니다. 고전9:2에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그러니까 인침이란 확증 확신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는 사람은 인침을 받았습니다.

 

8. 겸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 1절에서 네 천사는 바람을 붙잡는 보호적 의미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가진 천사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아니면 바람을 붙잡는 일이 보호가 아니라 해치는 일이었을까요? 확실한 것은 네 천사는 보호할 권세도 해할 권세도 있는 천사라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신의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권세자와 부자가 스스로 마음 문 열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병인과 죄인들에게 먼저 찾아가신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일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은 누구보다 구세주를 갈망합니다.

 

9. 강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다른 천사가 네 천사에게 크게 외쳤는데 성경에서 크다는 표현은 구속사와 관계가 많습니다(마2:6, 마5:35). 따라서 네 천사의 임무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임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큰 소리는 큰 능력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혼을 구원하는 성령의 인침은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다가올 때 가능합니다(살전1:4-5).

 

10.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할 뿐입니다.

 

3절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여기 인치시기 전에 이미 선택 받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택은 이미 만세전에 된 것입니다(엡1:4, 딤후1:9). 하나님께서 이들을 부르시기 위해 여러 환경을 준비하신 것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먼저 작용한 것입니다. 예정예지든 예지예정이든 영원 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십사만 사천은 누구일까요? (계 7:4-8)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10지파는 앗수르 포로생활에서 이미 혼혈되고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져 그 정체성을 상실했고, 나머지 두 지파도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 죽거나 흩어져 지파로서의 그 정체성은 거의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 12지파가 나온다는 것은 지파의 부활이 아니라 이 지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진리를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들입니다.

 

144,000 숫자에 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144,000은 12✕12✕1000을 곱해서 나온 수입니다. 12는 하늘의 수요 완전수인 3에, 땅의 수 4를 곱해서 나온 수입니다. 그래서 12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로 쓰입니다. 12지파, 12사도, 이스마엘 12방백 등 그러므로 144,000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가리킵니다.

 

2. 신구약 교회를 가리킵니다.

 

144,000에는 신구약의 교회가 들어있습니다. 12✕12가 바로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가리키는 신구약교회를 상징하는 수입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으며(엡2:20),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습니다(엡2:18-20). 사탄은 12수를 깨려고 수없이 도전합니다. 구약에는 단지파가 생겨나고, 신약에는 가룟 유다가 나타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12수를 채워 놓습니다. 교회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3. 부르신 구원의 충만한 수효입니다.

 

또 144,000 속에는 12✕12=144로 끝나지 않고 여기에 곱하기 1,000이 들어 있습니다. 1,000은 가득한 만수요 증식수인 10을 3번(완전수) 곱한 수로 셀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하는 충만수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롬11:25)라는 표현과도 같습니다. 행2:29에도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144,000은 어느 특정한 교파나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4. 신약의 성도도 포함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언약적 이름입니다. 신약시대는 이방인도 예수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시대입니다(롬9:25-26, 롬2:28-29, 갈3:29). 이스라엘이 언약의 백성이었듯 신약성도 역시 새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5.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인침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인침 받은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고(롬1:6), 그러므로 예수를 주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고전12:3, 요3:3-7).

 

6.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리고 "지파 중에"라 했습니다. “지파 중에” 뽑히고 뽑혔던 용사들과 같이, 그리고 믿음의 지파만 기록했다는 점에서 탁월한 믿음의 소유자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을 군대가 들어간 것으로 표현합니다(출12:41).

 

7. 믿음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룻이 약속의 땅을 떠났다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나봇처럼 생명 걸고 기업을 지키며 그 땅을 떠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 그리고 사명을 목숨 걸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8.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5절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유다는 육신의 장자가 아닌데 장자 르우벤을 제치고 맨 먼저 나옵니다(대상5:2). 그리고 장자 르우벤을 대신한 사람이 요셉인데 선두에 유다지파가 기록된 것은 영적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144.000은 성령을 따라 사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롬8:9). 인침 받은 결과는 불의에서 떠나며(딤후2:19),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골3:1-3, 갈5:24).

 

9. 예수 안에서 승리자입니다.

 

본문에 눈을 씻고 보아도 단지파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사기 18장이나, 열왕기상 11장 12장에도 나오듯이 단지파는 우상숭배와 배교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 안에서 이긴 자이지 진 자가 아닙니다. 이 승리의 믿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10.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입니다.

 

구약 지파 목록에 없는 요셉지파가 나옵니다. 두 아들 중 므낫새는 나오지만 에브라임 대신 요셉지파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요셉이 언약의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한 것처럼 이들이 세상의 영적 기근에서 살릴 복음의 일군임을 시사합니다.

 

11.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에브라임지파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로서 야곱의 우수의 축복을 받았으며, 가장 큰 기업을 받고, 다른 지파에 둘러싸여 외적의 침입에서 가장 많은 보호를 받았으며, 가장 강성해져 강한 지파가 되었고, 지도자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이런 지파가 빠진다는 것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114.000은 겸손한 자들입니다.

 

12. 신령한 제사장들입니다.

 

특이한 것은 레위지파가 나옵니다. 레위지파는 땅을 차지하지 않아 레위가 출생할 때만 열두 아들 중 하나였지 다른 열두 지파 속에 흡수되어버린 제사장 지파입니다. 이처럼 성도 역시 그러합니다(벧전2:9). 그런데 멜기세댁 다윗 솔로몬 등 몇 안 되는 사람에게만 붙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행26:7에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긴다고 했듯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셀 수 없는 큰 무리 (계 7:9-17)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누굴까요? 여기에 대한 학설을 보면 “이제까지 예수 믿어 구원 받은 모든 자들, 전 삼년 반 동안 전도 받아 올라온 사람들, 세례 받은 자로서 순교자들, 전 세계적인 영적 이스라엘, 온갖 언어를 사용하는 범세계적인 무리들.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뽑힌 의롭고 거룩한 구원 받는 자들. 마지막 때 144,000의 전도자들이 전도해서 이뤄낸 성과로 말세에 대거 구원을 받을 자들” 등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비슷한 답도 보이지만 정확히 꼬집어 설명한 답은 보이지 않네요. 창13:16에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결국 티끌을 셀 수 없듯이 셀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셀 수 없는 무리의 배경입니다. 여기 큰 무리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구원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시대의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입니다.

 

10절에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한 말씀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을 주로 믿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144,000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다릅니다. 144,000을 유대인 전도자로 본다면 이 큰 무리는 그 전도의 결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앞에서 말했듯 144,000이 신구약의 인침 받은 모든 성도라고 본다면,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는 동일한 무리들이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본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즉 십사만 사천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성령의 인침을 받은 면을 강조했다면, 이 무리들은 환난의 연단을 통해 변화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 증거로 “각 나라, 족속, 백성, 방언, 셀 수 없는 큰 무리 등”은 바벨탑의 결과를 연상시키는 용어로 세상에서의 구원을 암시하며, 다른 힌트인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1절) 역시 큰 환난이란 구속과 관련된 연단으로 죄인들이 연단 받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새 사람 되는 것을 시사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환난 속에서 부르짖다가 모세의 인도로 구원 받은 자들이 되고,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연단 받고 성숙한 믿음으로 귀환하여 모든 연단 받는 성도의 예표가 된 것처럼 환난은 모든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구원의 방식입니다(롬5:3-4). 그러므로 144,000과 셀 수 없는 무리는 강조하는 관점만 다를 뿐 결국 같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1. 패역한 세상에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9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와” 이 표현은 계시록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데 이 말씀의 배경은 창 11장의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흩으실 때 각 족속, 각 나라, 각 민족, 각 백성, 각 언어 등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을 세상으로 볼 때 각 족속은 옛 사람, 방언은 불신의 입술, 백성은 육신의 생각들, 나라는 자아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외쳤습니다. 이런 혼미하고 다양한 우리의 영적상태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2. 구속의 은총을 받은 자들입니다.

 

9절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하나님의 보좌 앞은 경배와 긍휼과 은혜와 사랑과 거룩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 앞은 특별히 구원의 자리임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흰옷”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입니다. 사61:10에 보면 속옷은 구원의 옷이요, 겉옷은 공의의 옷으로 칭의와 성화까지 포함하는 옷입니다.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종려나무는 그늘과 쉼(출15:27), 번성과 축복(시92:12), 승리와 기쁨(요12:13) 등을 상징하며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할 때 쓰였습니다. 이처럼 왕되신 예수를 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은 승리하신 예수 안에서 죄와 사망과 저주와 악과 원수에게서 승리자입니다.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성막에서 제사장들은 서서 봉사했습니다. 이처럼 항상 예배하는 자가 승리자가 됩니다. 그들이 대속주이신 어린 양 앞에 섰던 것처럼 구원의 진리에 진리에 견고히 서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흰옷 입은 그 은혜를 믿은 결과입니다.

 

3. 구속의 은총을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10절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일종의 간증 형식을 띠고 있는 구절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이라는 말씀에는 그 분의 주되심과 통치 그리고 구속의 은총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신인합일 때문에 고행하며 시간 보내지 마세요. 성도는 예수 믿어 중생하면서 이미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이룬 존재임을 알고 늘 감사하면 실재를 경험하게 됩니다(롬8:30).

 

4. 불같은 연단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13-14절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본문의 큰 환난은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환난에서 나왔고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희게 씻는 등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환난의 시각과도 같습니다(약1:2-4, 벧전1:5-6). 환난은 연단을 연단은 성도의 믿음을 훈련시켜 그 결과 온전하게 합니다. 큰 환난이라 한 것처럼 구속사와 관계가 있는 연단으로 환난 가운데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흰 옷 입은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계십니다.

 

 

모든 천사들의 화답과 경배 (계 7:11-12)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하더라

 

이 천사들은 누굴까요? 셀 수 없이 많은 흰옷 입은 무리들의 찬양에 화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보아 큰 환난 중에 있는 무리들의 구원을 위한 사역을 도왔던 천사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올린 이 영광은 그들이 구원의 사역을 도왔던 천사들이라는 점과 또한 그들이 돌린 7가지 이상의 조목처럼 그들이 받은 능력과 섬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자의 필수 구비사항이기도 합니다.

 

환난의 날 사역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1.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11절 “모든 천사가 - 경배하여 이르되” "모든 천사"라 한 것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하나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엎드림이나 찬양은 조금의 혼란이나 불협화음이 없는 한 모습 한 목소리였습니다. 이것은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이 수천 년 동안 다양한 환경과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 보세요. 그 일체성 통일성 복음성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충만과 권능은 환난 날의 사역자들에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2. 복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11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었습니다. 주위에 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섬김의 자세입니다. 먼저 보좌 주위에 섰듯이 무리들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전도를 했습니다(딤전2:4, 막16:15, 고전1:21).

 

천사들이 장로들 주위에도 섰듯이 천사들이 지상의 복음전도자들을 돕는 자들임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4복음의 상징인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었듯 온전한 예수의 복음을 전했음을 보여줍니다. 네 생물에 눈동자가 가득했는데 이는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일 뿐 아니라, 이 4복음의 눈으로 구약이나 계시록을 보면 풀립니다.

 

3. 나를 감추고 오직 하나님만 나타내야 합니다.

 

11절 중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천사들이 엎드렸는데 얼굴을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는 이사야가 본 환상에도 그랬듯(사6:2) 자기를 감추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려는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종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말씀을 전파할 때도 자기 사상이 아닌 오직 성경의 진리를 전파해야 합니다(고전2:1-2, 13)

 

 

환난의 날 복음사역자가 갖춰야 할 것은?

 

1. 절대 믿음입니다.

 

12절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여기서 천사들이 "아멘"으로 시작하여 아멘으로 마칩니다. 처음 아멘은 성도들의 찬양에 대한 화답이요, 두 번째 아멘은 자신들의 찬양에 대한 아멘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알파와 오메가는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후1:18-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전여행 시키며 절대 믿음을 훈련시키셨듯(막6:7-10) 하나님과 함께 동역한다는 온전한 믿음 가지시기 바랍니다.

 

2. 절대 찬송해야 합니다.

 

그 다음 낱말이 “찬송”입니다. 이 역시 구속의 은총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의 은혜를 찬양한 것처럼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되 영원한 영광과 함께 구원하신 그 은혜를 날마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엡1:3-7). 복음에 서되 그것이 노래가 되고 삶이 되고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면서 전도할 수는 없습니다.

 

3. 절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세 번째 “영광”을 드렸습니다. 잠시라도 내가 영광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쓰실 수 없습니니다. 칭찬을 듣고 1분 1초라도 가슴이 뛴다면 더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되 큰일을 하실 텐데 기본적인 관계가 잘못되면 쓰실 수 없고 쓰셔도 버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 16장에 점치는 귀신이 바울을 높일 때 바울은 심히 괴로워했습니다(16-18절, 행14장, 계22:8-9).

 

4. 절대 지혜로워야 합니다.

 

네 번째가 “지혜”입니다. 욥4:18에 "하나님은 -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신다 했는데 하나님께 세세토록 지혜를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지혜를 주심을 전제한 말씀입니다(마10:19-20).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강조하신 것이 지혜와 순결입니다(마10:16).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약1:5).

 

5. 절대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와”, 하나님과 동역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감사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옳고 위대하고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고후12:9, 롬8:28). 밧모섬의 극한 환경 가운데 요한으로 계시록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서 필자에게도 이런 강해에 매달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6. 절대 귀히 쓰임 받아야 합니다.

 

존귀와” 하나님께 존귀를 돌렸음은 존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한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는 사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귀히 쓰임 받아야지 불필요한 일에 힘 쓰거나 사탄에게 쓰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예수님께서 지극히 높아지신 결과입니다(행2:33, 엡4:8에). 그러므로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찬양하며 살면 우리에게 놀라운 성령의 은사로 부어주십니다.

 

7. 절대 능력 받아야 합니다.

 

또 천사들은 “권능”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시103:20에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했습니다. 더 큰 힘을 가진 천사들도 있습니다(벧후2:11). 권능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 표적이 따르고(막16:17-18), 우리 몸과 마음을 드린 만큼 은혜와 능력이 나타납니다(롬6:16).

 

8. 절대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여기 ""은 위로 받거나 꿈과 비전이 주어질 때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할 때 해방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힘을 잃었습니다. 비전을 상실했지만(사40:27-31) 주를 앙망하면 힘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꿈이 생깁니다(행2:17).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알곡의 꿈, 성령과 발 맞추어 일하는 동역의 꿈,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는 꿈을 비전 삼으시기 바랍니다.

 

9. 영원히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여기 “세세토록 있을지어다.”의 뜻은 “영원토록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영광을 돌리려면 그와 같은 은사를 예수 안에서 주셨음을 믿고 돌리고 그 다음은 현실에서 나타날 때 또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 안에서 일할 수 있는 온갖 은혜와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같은 절대 믿음은 성령에 사로잡힐 때 가능합니다.

 

 

큰 환난과 큰 위로 (계 7:13-14)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여기 “큰 환난”은 한문으로는 대환난입니다. 마 24장에 예수님의 예언을 참고할 때(마24:21) 마지막 때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본문의 환난이 재림 직전의 환난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환난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부정적이지 않고 크게 긍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성도의 환난의 시각과도 같습니다(약1:2-4, 벧전1:5-6).

 

학자들의 유력한 견해로는 “일방적으로 소위 말세의 대환난을 거쳐 나온 자들로만 국한 시킬 수 없다. 그들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시대의 모든 환난을 겪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알포드, 렌스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즉 크다는 것은 구속사와 관련이 되면서 에덴동산 이후부터 마지막까지 광범위하며, 숭고하다. 의미 있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 큰 환난은 어떤 것입니까?

 

1. 모든 성도들에게 존재합니다.

 

13절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이 무리들의 정체를 묻는 자는 다름 아닌 장로 중 하나였습니다. 천사도 만물도 네 생물도 아니고 구원 받은 자의 대표인 장로였습니다. 장로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계1:9) 체험을 대표할 만한 자이며 환난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적임자입니다. 히12:8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지상의 모든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벧전5:8-10). 그것은 더 복종하고 더 거룩하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라고 훈련시키심입니다.

 

2. 우리가 환난의 당사자입니다.

 

13절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물을 때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장로 중 하나가 왜 요한에서 물었을까요? 여기에는 주위를 집중시키는 관심화법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장로도 그렇고 요한도 누구보다 그 답을 잘 알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요한,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바로 그 답의 체험자요 그것을 말할 적임자입니다.” 그런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은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이유로 극심한 핍박을 당했습니다(계1:9-10). 바로 그 환난의 당사자였기에 더욱 주님만 의지하게 되었고 하늘이 열리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환난에서 나왔거나 나온 당사자들입니다(욥23:10, 시66:10-12).

 

3. 체험자만이 잘 알 수 있습니다.

 

1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장로의 질문을 받은 요한이 당신이 아시리이다 하고 바톤을 다시 장로에게 넘깁니다. 여기에 대해서라면 요한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환난 중인 사람과 환난을 통과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는 환난이 달갑게 보이지 않습니다(히12:11-13). 전승에 의하면 요한도 불신앙은 아니지만 '이 늙은 몸 순교보다 못한 어려운 유배를 왜 허락하십니까?' 질문했다고 합니다. 환난을 온전히 통과한 사람이 더 깊이 압니다.

 

4. 환난은 믿음의 좋은 환경입니다.

 

14절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환난이 큰 한 몫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수효로는 그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질적으로는 옷을 희게 하여 거룩하게 했고, 모두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는 온전한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욥23:10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환난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입니다(벧전1:7, 약1:12).

 

5. 환난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게 합니다.

 

15절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 앞은 은혜의 장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입니다. 이처럼 환난의 연단은 우리를 하나님 섬기는 자로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천국은 성전도 없고 밤과 낮도 없는데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을까요? 이는 결국 구약의 배경으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6. 환난은 온전한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15-17절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이 말씀에서 그동안 얼마나 영적으로 주렸고 목말랐고 고통과 두려움과 눈물 가운데 살았는지 알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혼의 만족과(욜2:26), 성령의 생수로 넘치게 하시고(요7:37-39), 목자 예수님의 돌보심을 실감하게 됩니다. 전에는 사망이 나의 목자였지만(시49:14) 이제는 좋으신 주님이 목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당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고후1:3-7, 습3:14-17, 시121:7). 히12:11에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한 것과 같습니다. 살후1:6에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보좌 앞에 나가시기 바랍니다(15절). 아버지의 사랑과 보혈의 속죄 공로 믿고 나가시기 바랍니다(히4:16, 롬4:3-8). 보혈은 담대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내 양심과 사탄의 참소가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러나 관계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 진실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좌 앞이란 경배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란 표현이 독특합니다. 이 보좌는 천국의 보좌도 되지만 우리 마음의 중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날마다 경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