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3장

에반젤(복음) 2022. 9. 17. 07:12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3장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 (계 3: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데 교회의 사회적 배경>

사데는 두아디라 남동 약 48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현재 터키로 한 때 리디아 왕국(b.c 700-b.c546)의 수도였다. 사데는 상업적으로 번창한 도시로 염직공업과 양털 염색, 금모래가 유명하여 사치와 부의 도시로 전략하였고 무역의 요충지였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성채가 남쪽만을 제외하고 모두 암벽으로 되어 있어 난공불락의 성을 이루고 있었기에 상당히 안일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종교적으로 사데는 시벧리(Cybele) 여신을 섬겼고 황제 숭배가 극심하였다. 사데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요한의 전도로 세워졌고 2세기에 이르러 변증가이며 주석가로 유명했던 멜리토(Melito)가 이 교회의 감독이 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안정과 국가적 평안으로 말미암아 안일과 부도덕의 모습이 교회에까지 침투하였다.

1. 사데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온전케 하시는 성령을 가리키며(1:4,16,20),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다(1:20).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만큼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제로는 죽은 사데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예수님께 붙들림 받지 못한 주의 종들의 무능함을 시사하며 사데교회가 온전케 되기를 바라시는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망이 잘 나타나 있다.

2. 사데 교회의 책망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는 어원상으로는 ‘사르밧’과 같은 이름으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엘리야의 기도로 죽었다가 살았듯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다. 사데 교회가 일곱 교회 중 이단의 특별한 위협이나 외부의 핍박이 가장 적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교적 문화나 주변 환경과 타협함으로 생명력을 잃어 버린 것은 앞에서 말씀한 것처럼 그들의 안일함 때문이었다.

3. 회복의 길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여기 “일깨어”의 헬라어 '기누 그레고논'은 현재 미완료 시상과 현재 능동태 분사가 결합되어 계속적인 경성을 시사한다.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에서 안일에 빠져 두 번씩이나 외세에 점령을 당했던 것처럼 신앙의 안일함은 영적으로도 사탄에게 정복당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온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메나'는 '충만함'을 나타내는 헬라어 '플레로오'의 완료수동태분사로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함이라기 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의 온전함을 말한다. 사데 교회가 외적으로 그럴듯하게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시기에 허망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죽게 된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에메론 아포다네인'은 미완료 능동태 시상으로 사데 교회가 부분적으로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4절에 희 옷을 입은 거룩한 몇 명의 참된 성도가 그것이다. 그들마저 죽어서는 안 되므로 일깨어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성령 충만한 사도들과 복음전파자들에게서 복음을 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회개하여 돌이키는 것이 사는 길이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마24:34과 살전5:2을 반영한 말씀이다. 이토록 회개할 것을 권면했음에도 계속적으로 안일함 가운데 죄 속에 머문다면 마치 도적이 밤에 들이닥치는 것과 같이 예고 없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다.

한국교회가 안보적 위기 속에 있을 때 모두가 경성하며 기도함으로 부흥을 이루었지만 경제 성장으로 살만해지고 위기를 당하나 안보불감증에 빠져 기도하지 않음으로 사데교회와 같은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지만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는다. 사는 길은 선조들의 경건한 믿음을 기억하며 그 믿음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4. 사데 교회의 남은 자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어." 대부분의 사데 교인들이 영적으로 죽었으나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즉 사회적인 풍조에 휘말리지 않은 성결한 성도들이 있었다. 양모 산업이 발달한 사데에 고급 양모를 입은 사람은 많았지만 행실의 거룩한 옷을 입은 성도는 많지 않았다. 한편 “몇 명”의 헬라어는 '올리가 오노마타'로 문자적으로 '몇 이름들'이다(행1:15; 계11:13).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님께 기억된 바 됨을 시사한다.

5.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사데 교회의 경우 다른 소아시아의 교회와는 달리 외적 핍박이나 특별한 이단 등이 언급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문맥과 사데 교회가 처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안일함에서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일함에서 회개할 때 첫 번째 약속은 흰 옷을 입는 것이다. 여기 흰옷이란 칭의는 물론 특별히 성결의 흰 옷을 가리킨다.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로워진 자들이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13:8, 17:8, 20:12, 15, 21:27, 눅10:20, 빌4:3).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서 그만큼 영적 위기에 처했음을 알 수 있고 안일한 믿음이 하나님을 부정하는데까지 이를 만큼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알려 주시고 계신다.


[강해1] 실상은 죽은 자 (계 3:1-6)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였습니다. 사데는 어원상으로는 ‘사르밧’과 같은 이름으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엘리야의 기도로 죽었다가 살았듯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교회 이름이 초대교회이면서 초대교회 신앙과 멀거나, 선교교회라고 지었으나 선교하지 않는 교회와 같습니다.

사데 교회가 죽은 이유는

1. 성령에 무관심했습니다.

사데 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중 하나는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신 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7은 완전수로서 완전하신 성령 혹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사데 교회에 대한 희망사항으로 현재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2절에 “일깨워” 그랬듯 현실에 안주하며 안일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자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 받은 것과 성령 충만은 다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성령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설프게 안 교리 때문에 중대한 실수 저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데는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고원지대에 세워져 있는 도시로서 예루살렘처럼 3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군사적으로 천연요새였습니다. 그 결과 안일과 방심 때문에 적국에게 2번이나 정복 당했듯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 군대가 유능한 등산가의 도움을 받아 한 명씩 한 명씩 절벽을 기어 올라가 사데를 점령했듯이 세월이 흘러 경건한 종들이 하나씩 하나씩 부름 받고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는 동안 사데 교회는 초대교회의 믿음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핍박이 복입니다. 성도는 고난 속에서 온전한 믿음을 갖기 때문입니다.

2. 부흥의 일군들이 사라졌습니다.

1절의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별은 교회의 사자입니다. 일곱별은 아시아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의미하지만 7이 완전수인 것처럼 하나님이 붙드시는 신령한 종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데에는 부흥의 일군들이 없었습니다. 학자들도 많고 외치는 자도 많지만 생명력이 결여되었다면 영적으로 죽은 교회입니다.

부흥의 일군이 사라진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 시대의 신학사조나 교회의 전통이 그렇게 흘러가 부흥의 일군들을 만들어내지 못했거나 도리어 배척했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신비주의로 몰아버리거나, 말씀이 최고라면서 어이없게 성령을 약화시키는 일도 있습니다. 신비주의를 배척한다고 성령까지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부흥사도 있어야 하고 필요합니다. 교회가 부흥회에 관심이 없는 것은 교회의 문제도 있겠지만 부흥사의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림을 받은 부흥의 일군이 적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부흥회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부흥회를 혐오하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사기 2장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에 이르러 말하는데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듣고는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했는데 '보김'이란 “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완악한 백성들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니까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여기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 학자들은 제2위이신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이면에는 부흥사들의 놀라운 활동이 있었습니다. 또 다시 성령의 불이 타올라야 합니다.

3.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교회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재림을 연상시키는 말씀인데(살전5:1-3) 이처럼 사데 교회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의 통계에도 나오지만 재림 신앙은 믿음을 경건하고 온전하게 각성시킵니다.

어떤 감언이설에도 넘어가지 말고 깨어 근신하여 신앙생활하면 현재 성령 충만으로 임하시는 주님을 맞이하게 될 뿐 아니라, 장차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는 가장 복된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 믿어 성령 받았다면 안일하지 말고 근신함으로 더욱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강해2] 흰 옷을 입은 성도의 복 (계 3:1-6)

딤전5:6에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사데 교회가 세속과 타협하고 타락한 것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된 것은 안일하고 게으른 신앙생활 때문에 생명력을 잃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성결의 흰 옷을 입은 성도는 소수였습니다. 사데교회가 사는 길은 죄에서 회개하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흰옷을 입은 성도에게 어떤 복이 있을까요?

1. 진노가 없습니다.

3절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주님이 오심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오래 참으시다 채찍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심판자의 모습입니다. 히13:4에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혈의 공로로 양심을 지키고 진실로 회개함으로 성결의 흰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4절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그것이 평안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약하지 않습니다. 두렵지도 않습니다. 지도하심이 있습니다. 에녹처럼 우리 역시 매일 천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31:18에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결하시기 바랍니다. 사57:15에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하셨습니다. 심령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나는 길입니다.

3. 생명책에 이름이 빛납니다.

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여기 생명책은 우리 편에서 보면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데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거룩한 흰옷을 입어 보세요.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는 신령한 예복과 같습니다.

그래서 벧후1:10-1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했습니다. 사랑으로 변화된 성도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십니다.

4.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됩니다.

5절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의의 세마포를 입은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시인하십니다. 그러므로 속옷과 겉옷 모두 입어야 합니다. 사 61:10에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 믿고 보혈로 의롭다 함을 믿는 사람은 속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보혈의 공로를 믿고 양심의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속옷만 입고 다닌다면 부끄럽습니다. 성결 혹은 성화의 겉옷까지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별한 관계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 (계 3:7-13)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회적 배경>


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포도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그곳은 서머나와 리디아 왕국으로부터 동방으로 가기 위해 제일 먼저 들러야 하는 도시로 동방의 관문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누렸으나 지진의 피해가 많았다. 또한 많은 신전과 종교적 행사가 있어 A.D.5세기에는 작은 아테네로 불렸다. 그러나 빌라델비아는 이교 신전과 종교 행사가 많고 2,3장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위치한 지역 중 가장 짧은 역사를 기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B. C. 159-138) 아시아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짓밟힐 때 유일한 기독교의 보루(堡壘)로서 신앙적인 면에서 가장 칭찬을 받은 지역이다.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단지 암미아(Ammia)라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면서(A.D. 100-160) 큰 부흥을 이룬 듯하다. 이 교회의 성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개종하는 역사도 있었으나 반면에 교회를 가장 반대하는 자들 역시 유대인들이었다.

1. 빌라델비아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

1)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

“거룩한 자, 진실한 자”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으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그의 신성과 메시야성을 나타내고 있다(막1:24, 요6:39, 행2:27, 13:35, 히7:26)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온전하며 충성된 자’ 그리고 ‘진실한 자’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복을 받았듯 거룩하고 진실하시기에 심는 대로 거두게 하셨던 것이다.

2)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22:15-25을 반영한다. 국고를 맡은 교만한 셉나 대신 엘리야김이 다윗의 집 열쇠를 맡아 막강한 권세를 행했듯, 그리고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라고 하셨듯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주심은 불가항력이다. “열린 문”은 하늘문이다. 하늘문이 열리면 선교의 문, 형통의 문 등 온갖 문이 열린다. 박해하던 유대인들까지 회개하며 돌아오는 기적의 문인 것이다.

2. 빌라델비아 교회의 칭찬

(1)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작은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크란 에케이스 뒤나민'은 '능력이 거의 없다'는 의미로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신분이나 지위 등의 외적 능력이 변변치 못함을 나타낸다.

한편 “지키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에테레사스'는 반의적인 강조 표현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켰다.'를 의미한다. 이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유대인들이 가하는 시련과 온갖 유혹 가운데서도(9절) 진리의 편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았음을 시사한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한 문제는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부정하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사탄의 회당”인 유대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본래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 찾아와 굴복한다고 믿고 있지만(사45:14; 60:14)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로 유대인들이 내면적인 유대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와 굴복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 사건으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심을 나타내 실 것이다.

2)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 말씀은 눅8:15을 연상시킨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사실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강제적인 징계의 연단은 불필요하다.

시험의 때의 설명구인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는 말씀과 연계하여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킨다. 이는 현재의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약속이라고 볼 때 시대를 뛰어넘는 상당한 비약이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이 그렇듯 현재의 교훈과 아울러 미래적 사건까지 계시하는 다중적인 특징을 고려할 때 빌라델비아 교회의 당면한 문제 역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은 당연하다.

3.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1)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은 승리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하고 요동치 않는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렘1:18; 딤전3:15).

2)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시사한다(민6:27).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이 부여됨을 시사한다. 예수님의 새 이름은 새 이름에 걸맞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실 것을 시사한다.


[강해] 인내의 말씀 (계 3:7-13)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여기 "인내"가 나오는데 말씀에 인내를 더하면 100배 결실을 맺는 옥토밭 믿음이 됩니다(눅8:15).

빌리델비아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형제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이름도 아름답지만 믿음도 아름답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도 큰 교회였습니다.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는 불과 70-80명의 작은 교세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교회가 위치한 카타케카우메네는 ‘태운다’는 의미로 지진이 많았던 활화산지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해서 모두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하고 미약한 사람들만 남았는데 그들이 곧 빌라델비아 교인들입니다. 더구나 조직적인 사탄의 회가 있어서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낙심하지 않고 신앙을 비전 삼고 인내로서 주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인내로서 말씀을 지킬 때 주시는 은혜는

1. 큰 기회를 주십니다.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여기 열린 문은 하늘문입니다. 하늘문이 열리면 온갖 부흥과 전도와 선교와 형통의 문까지도 열립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는 것은 그들 역시 열린 믿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안 된다 못한다가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탓하지 않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인내로서 지키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면 일군을 보내 주시고 힘과 지혜도 물질도 주십니다.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하는 교회가 부흥되지 못한 교회가 없더라는 말도 있습니다. 선교하는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세계의 중심국가로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2.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집니다.

9절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초대교회를 가장 핍박했던 집단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만 실상은 사단의 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몇 사람이 교회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끝까지 말씀에 서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나가면 꿈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말씀에 굳게 서면 그것이 믿음의 은사가 됩니다. 이것은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에 더욱 값집니다.

말씀에 기초한 불도저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막11:22-23에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3. 시험을 면제하여 주십니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여기 ‘시험의 때’란 로마의 10대 박해나 종말에 임할 환란 외에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고통을 의미합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나가면 믿음대로 되는 특별한 도움과 보호가 따릅니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여 주십니다(대상4:10).

A.D.70년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 당할 때도 택하신 자들 위해 그 날을 감해 주셨고(마24:22), 예루살렘을 포위한 로마군이 잠시 로마로 돌아간 사이 사도들의 인도 아래 성을 빠져 나와 심판을 면하게 하셨음을 볼 때 면제의 미래성과 아울러 현재성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4. 큰 영광을 주십니다.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속히 오신다는 것은 재림을 암시하는 단어지만 현재적으로도 버려두지 않고 속히 임하여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가진 것”이란 다름 아닌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우직한 믿음입니다. 그들에게 그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끝까지 붙드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면류관은 승리자에게 주시는 은혜 혹은 고난 자체가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고난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예수 안에서 영화롭게 하신 그 복음을 믿고(딤후2:10-12),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진리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이 땅에서부터 하늘의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5. 크고 귀히 써주십니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말씀에 굳게 서서 살면 기둥처럼 귀한 믿음이 됩니다. 솔로몬 성전의 야긴과 보아스처럼, 초대교회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처럼(갈2:9) 귀히 쓰임을 받습니다.

6. 하나님께 인정받게 됩니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라는 것은 앞 절의 굳게 잡아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계속 이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싸인해 주시는데 3은 완전한 은혜를, 그리고 이름과 새 이름은 그 이름에 걸 맞는 새로운 은혜를 암시합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싸인은 너는 내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의미요, 새예루살렘의 이름은 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부라, 그리고 예수님의 새 이름은 그동안 맛볼 수 없었던 구속의 새 은혜를 시사합니다.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이렇게 귀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계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회적 배경>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라이커스(Lycus) 계곡에 있는 여러 도시들 중 하나이다. 맞은편으로 10km 지점에는 히에라볼리가, 약 14km 지점에는 골로새가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브루기아 가루'라고 알려진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다. 또한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이곳은 물 사정이 좋지 않아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항상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아야 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하였으며(골4:12,13) 골로새 교회와 함께 바울이 지도하였다.

1. 라오디게아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

1)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

“아멘이시요”는 문자적으로 '아멘인 자'를 의미하며 70인역에서 '톤 데온 톤 알레디논'으로 “진실한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이 칭호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신실하길 바라는 그리스도의 갈망이 내포되어 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역시 “아멘이시요”와 같은 사상을 내포하는 칭호로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온전한 순종과 충성으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시사한다(1:5,9;2:13;고후1:20).

2)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이 모습은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물의 근원이심을 나타낸다. 이 모습은 영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배금주의적이고 진실하지 못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뒤엎으시고 라오디게아 교회가 새롭게 창조되기를 바라시는 모습이시다.

2. 라오디게아 교회의 책망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이 책망은 당시 히에라볼리로부터 끌어온 온천수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가져온 냉수를 공급받는 과정에서 물이 미지근하게 됨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즉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열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이는 차든지 덥든지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라기보다 중간 상태를 택하는 그들의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신랄한 책망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요했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빈곤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서머나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 즉 육신적으로 편안했지만 마치 전쟁으로 약탈되거나 파괴당함 같이(시137:8; 롬7:24) 곤고하고 가련했으며, 금융업이 발달할 정도로 부를 축적한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는 상태로 알지 못했으며, 그곳에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는 시각장애로 분별력을 잃고 있었으며, 라오디게아의 검정색 양모가 유명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이 영적 모습은 벌거벗은 상태였다. 한 마디로 영적 무관심이었다.

3. 회복의 길

1) 권면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 즉 시련을 통한 믿음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해지고(사55:1),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흰 옷을 입고 죄악의 수치를 가리며, 분별의 말씀을 받아들여 영적 시각장애를 치유하라고 권면하신다.

2) 책망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여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파오'가 아니라 '필로'로 되어있다. 신약성경에서 ‘필로’는 '아가파오'와 자주 같은 뜻으로 사용될 때가 많지만(요5:20; 16:27), 부모나 형제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히12:7-9 “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3) 명령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열심을 내라'의 헬라어 '젤류에'는 현재 명령형이며, '회개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손'은 부정과거 시상이다. 종합하면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하고 지속적으로 열심을 내라'는 의미를 갖는다.

4) 두드리심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두드리노니”의 헬라어 '크루오'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마음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열심의 결여는 그리스도를 밖에 모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볼 수 있다.

5) 초대 “먹고”의 헬라어 '데이프네소'는 교제를 나누며 즐기는 식사를 가리킨다. 즉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열심으로 교제 나누기를 희망하신다. 그 때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육신의 양식으로는 불가능하던 심령의 갈급함을 만족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은 그의 왕적 지위를 시사한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왕적 권세를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1:6,9, 2:26,27, 5:10, 20:4-6, 눅22:28-30, 롬8:17, 딤후2:12).

그 증거로 “보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드로노'에는 '안에'를 의미하는 '엔'이 사용되어 그 이상의 명예와 권세를 주시며 참여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시사한다. 열심히 섬겨 예수님과 함께 하는 복이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있게 한다.


[강해1] 열심을 내라 (계 3:14-22)

우리는 본문에서 아세아 일곱 교회 중 최악의 교회를 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1. 열심이 없었습니다.

15-16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오디게아는 뜨거운 광천수가 곳곳에서 솟아나는 히에라폴리스와 차가운 물이 나오는 샘들이 있는 골로새 중 한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는데, 문제는 어느 곳의 물이든 라오디게아까지 오는 사이에 특유의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특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영적상태는 토하여 버릴 만큼 주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를 넘어 그들의 자만과 오만은 주님을 내쫒고 그 자리까지 차지했으니 버림 받아 마땅한 교회였습니다. 얼마나 한심스러웠으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나타나셔야 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거기다 자만했습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점은 자정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 문제가 없고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로서 의과대학이 있었고, 특산물로는 유명한 안약과 검은색의 모직이 있었습니다. 또 그곳은 금융업이 발달할 만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부요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대지가 400,000평 이상 되고, 본관 이외에 다양한 부속건물들이 즐비했고 야외 원형극장도 1,500평, 야외 원형운동장도 2,000평 이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유적을 보면 현대 대형교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외형이 이렇다고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너무 치중하거나 또 그 일이 잘되므로 모든 것이 잘되고 있는 증거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좋은 일을 위해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했다면 더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잘 살면서도 사역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예배당은 불편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3. 인간중심이었습니다.

19-20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주님은 그들의 밖에 서 계십니다. 즉 그들이 주인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안티오쿠스 2세가 자기 부인인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라오디게아의 뜻은 “옳은 백성”입니다. 민주주의의 냄새가 풍기는 이름으로 아내에게 관용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순순히 정권에 순복하기를 바라는 황제의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한 편으로 반역 가능성을 감안한 불안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정치제도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 분을 따르는 신정입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정치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셔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사2:4, 사11:6-8).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책망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 떨어지고 자만하면 라오디게아 교회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강해2] 열심을 회복하자 (계 3:14-22)

세계에 나타난 위인들의 모든 위대한 업적은 그 일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열심 했던 결과입니다. 세계적인 석학 아인슈타인도, 천재 음악가 베토벤도,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도, 만화가 월트 디즈니도, 영국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윈스턴 처칠도, 세계적인 기업가 울워드도 모두 처음에는 가능성이 없는 무능한 인물들이었지만 열정과 끈기로 자신의 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주님은 뜨거움이 사라져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를 극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절) 즉 영적 권세와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세상에 밟히지 않고 리드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심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령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14절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에 생명 걸지 않았습니다. “참된 증인”으로 나타나신 것을 보면 그들은 믿는다고 하나 불신앙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나타나신 것을 보면 역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일2:13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했듯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다면 그는 깊이 안 사람입니다. 또 창조를 믿는다면 그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시121:1-2). 그러므로 성령의 깊은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2. 미지근함을 이겨야 합니다.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영적 권세와 능력은 열심에서 나왔습니다. 기도와 찬송에 전무했습니다. 성령의 불이 임해야 열심하지만 한 편으로는 우리가 열심을 내야 성령의 불도 임합니다.

대하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그랬습니다. 초대교회가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날마다 기도에 전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건 부흥회와 같이 어느 기간 일시적 현상입니다. 이처럼 재충전할 부흥회가 필요합니다. 불은 옮겨 붙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미지근하고 의식적인 틀을 깨야 합니다. 뜨거운 불덩이라도 폐쇄된 공간이라면 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약간 서민적인 분위기가 좋습니다. 아멘 소리도 많고 두 손 들고 통성기도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귀족적이면 성령의 불이 붙기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이기는 자는”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한 번 좋은 습관이 들여지면 쉽습니다. 전통으로 좋은 습관이 굳어지면 그것이 쉽고 안전하고 큰 힘을 발휘합니다.

3. 자만을 이겨야 합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그들은 육신적인 부요를 영적인 형통으로 착각했습니다. 자만은 착각과 동급입니다. 자만은 기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만은 교만의 시작입니다.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보다 부족해서 하나님을 불신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잠30:7-9). 그러므로 자고하지 않도록 늘 자신을 치며 근신하시기 바랍니다.

4.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주님을 삭개오처럼 기쁨으로 모시면 우리와 더불어 먹으며 천국의 잔치가 시작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천국잔치가 없다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동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밝은 마음으로 찬양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수준이 체험의 수준입니다.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가 한 방으로 들어가니 벽난로가 뜨겁게 타올라 열기로 후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남자가 주전자를 들고 난로 가까이 서서 장작에 계속 물을 부어 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기독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해설자는 "저를 따라 벽 뒤쪽으로 오십시요." 그곳에 가보니 어떤 사람이 난로 뒤에 서서 화염 속에 은밀히 기름을 붓고 있었습니다. “물을 붓고 있는 남자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열심의 불, 은혜의 역사를 끄기 위하여 애씁니다. 반면 벽난로 뒤에 계신 그리스도는 사람들 마음 안에서 이미 시작된 은혜의 역사를 더욱 촉진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복음으로 보면 예수 안에서 우리들도 함께 아버지 우편 보좌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풍성한 누림은 그 진리를 믿음과 사랑의 열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사라지는 순간 예수 안에서 누리는 그 권세와 능력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에 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으로 보면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힘을 받았습니다(엡2:6). 그러나 그 풍성한 누림은 그 진리를 믿음과 사랑의 열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에 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성화의 7대 원리 (계 2:1-3:22)

아시아 일곱 교회의 7은 히브리적 관점에서 볼 때 우연이 아닙니다. 6교회도 아니요 8교회도 아닌 완전 숫자 7교회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교회를 원하시고 또 우리 각인이 온전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예상대로 아시아 일곱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과 교훈은 한 마디로 교회를 온전케 하시고 성도를 온전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신학적 용어로 성화 혹은 성결이라고 합니다.

성화에 이르는 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1. 사랑의 원리입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처럼 사랑이 없는 성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관이 확실하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지식에 머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때 사망에 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결혼하면 집안일하고 해야 할 일도 많지만 그것보다 사랑함이 중요하듯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요5:42에 나타납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잘못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재물을 더 사랑했습니다(요5:44, 요12:43). 그래서 엡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하였습니다.

2. 연단의 원리입니다.

계2:10에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은 연단입니다. 연단 없는 신앙은 아무도 없습니다. 연단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완악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1:4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고, 단12:10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이 있든 없든 훈련소에 입소한 사람처럼 경성하여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3. 말씀의 원리입니다.

계2:14에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가 나올 만큼 믿음에 목숨을 건 교회였으나 어이없게도 다른 교훈을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날선 검을 가지고 나타나셨는데 날선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열심히 있어도 말씀이 없다면 이단에 넘어지고 사탄에게 속게 됩니다.

벧전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했고, 벧전2:2에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말씀 떠나서는 구원도 장성도 무엇도 없습니다.

4. 신앙의 원리입니다.

계2:20에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두아디라 교회는 에베소 교회가 가진 모든 장점과 아울러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사랑까지도 겸비한 모범적인 교회였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그 막강한 믿음의 저력을 육신이 잘되자는 육성운동에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이세벨의 바알 우상은 부자 되고 성공하는데 목적을 둔 현세적인 육성운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면 육신도 잘되게 해주시지만 육성운동에 치중하면 바알을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6:32-33에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계2:20에 “내 종들을 꾀어” 라고 한 대로 주의 종들이 가장 실수를 많이 범하는 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호소력이 큰 기복적 메시지나 물량주의적인 교회부흥보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참 성도 참 일군 만들어내는 것이 목회 성공입니다.

그 막강한 저력으로 진실로 참된 신앙운동이 일어났다면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약속대로 한국교회는 철장 권세처럼 세상을 이기고 나아가 새벽별처럼 세상에 희망을 주며 초대교회처럼 세계를 복음으로 덮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원리를 떠나지 않는 믿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5. 성령의 원리입니다.

계3:1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했습니다. 사데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신 대로 성령의 역사 없이는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에 생명책과 흰옷을 약속하셨는데 사데 교회는 중생자와 성화자가 극소수에 불과한 이유는 성령을 부인하거나 무관심하고 신령한 종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신비주의 운동 때문에 건전한 성령운동까지 부정한다면 그만큼 말씀이 부족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전12:7에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고, 엡4:11-12에는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활발한 성령 운동 없이 어떻게 변화 성숙 된다는 말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은혜로 변화 성숙되었지 달리된 것 아닙니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된 자가 있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자도 많다 하셨듯 이를 판가름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데 교회에 극소수의 참 신자를 남겨 두시고, 중세암흑기에도 이런 소수의 참 신자들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시대마다 남은 자를 두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성화의 원리 중 중요한 것은 성령의 원리입니다.

6. 인내의 원리입니다.

계3:10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난하고 수효도 능력도 적고 고난도 많았지만 가장 큰 칭찬과 복을 약속 받은 이유는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3:8)한 대로 말씀을 믿고 준수함에 생명을 건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약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여기 "인내"가 나오는데 말씀에 인내를 더하면 100배 결실을 맺는 위대한 옥토 밭 심령이 됩니다.

복음을 아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임재가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즉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이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복음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소교리문답 제 30문에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또 효력있는 부르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는 것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서서 그 은혜를 굳게 붙들고 끝까지 나가시기 바랍니다.

7. 열심의 원리입니다.

계3:19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라오디게의 교회의 문제점은 열심을 잃음에 있었습니다. 뜨거움이 결여된 신앙생활이란 제 역할을 못합니다. 거기다 자만까지 하고 있었으니 회복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다 갖추어졌어도 열심 하나만 빠져도 시동 꺼진 자동차나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믿음에 열심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우리의 몸은 더욱 편하려고 함이 그 속성입니다. 종교적 모양내기로는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고 교훈합니다.

잠6:9-11에서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성화의 7대 원리로서 교회와 자신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