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스크랩]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22장

에반젤(복음) 2021. 12. 27. 05:52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22장

계시록의 결론 (계 22:6-21)

 

계시록의 인증 (계 22:6)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여기서부터 요한계시록의 결론 부분입니다. 계시록을 마감하면서 본서가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증합니다. 즉 계시록의 정경성에 대한 인증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성경에 속하는 책을 정경(Canon)이라고 부르는데, 이 정경이라는 말은 원래 ‘기준, 표준, 척도, 모델’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다른 책과 같이 정경성의 기준에 부합하고 예수님의 수제자 요한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정경에 대한 확신은 변치 않았습니다.

 

본문이 인증하는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요?

 

1.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6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여기 "이 말은" 계1:1-3의 반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계시록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 “신실하다”란 피스토스, 즉 ‘신뢰할만하다, 믿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참되다.”는 알레디노스, 즉 거짓이 없음을 의미하는 낱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고,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하신 인증과 같다는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계시록은 성경의 통일성에 준하여 그 내용이 복음이요, 그 복음을 성경의 다양한 배경에서 힌트를 얻어 다각도로 표현한 비유와 상징으로 쓰인 말씀입니다. 부분적으로 미래 역사의 힌트가 있을지는 모르나 말세에 전개될 세속사의 흐름으로 간주하는 것은 계시록을 모르는 주장입니다.

 

2. 계시록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입니다.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계시록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을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시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선지자들이란 성령의 영감 받아 성경을 기록한 성경기자들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계시록을 받아쓰게 하셨다는 것은 계시록이 동일한 영감으로 주어진 책임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5:40에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하신 것처럼 계시록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석 역시 다른 성경과 같이 복음에 입각하여 해야 하며 그래야 풀립니다(고후3:14-16). 계시록의 곳곳에 깔린 성경의 힌트들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조금만 생각해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3. 계시록은 각인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계1:1에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 했는데 여기서 다시 강조됩니다. 여기 "반드시"는 원문에 "데이"로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속히"는 새번역에서 "곧 일어나야 할 일들"로 번역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여기 온다는 원문이 ‘에르코마이’인데 그 시제는 놀랍게도 현재형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지금도 영적으로 임하시고 그리고 장차 온전히 오실 것이라는 것이 그 바른 해석입니다. 구약에도 갈망하는 자에게 사람이나 천사의 형상을 입어 나타나시기도 했는데 지금도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갈망하는 자에게 영적으로 임하시고 계십니다.

 

4. 계시록은 천국복음입니다.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이 역시 계1:1에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하신 말씀의 반복입니다. 계시록을 전해준 "천사"는 다른 성경처럼 천국복음을 전해주던 천사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전파해야 할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마24:14, 마28:19-20). 예수님께서 천국을 여러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신 것과 같습니다(마13:34-35).

 

 

계시록의 칠복 (계 22:7)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번의 복에 대한 약속이 나타납니다. 가상칠언 일곱등불 아세아7교회 일곱인 일곱나팔 인곱대접 등 7에 맞춘 교훈들이 많은데 이처럼 일곱 번은 그 의미가 7가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7이 완전수라는 점에서 이 복이 신령하고 완전하다. 혹은 완전하게 해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시19:7-11, 딤후3:15-17).

 

칠복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1. 복음을 깨닫고 지키는 자의 복입니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28) 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넓게는 성경이지만, 좁게는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가리킵니다(눅10:23-24). 이런 점에서 계1:3은 계시록이 바로 성경과 동일한 복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고 듣는 것 말고도 "기록한 것"이 추가되었는데 기록한 것이란 역시 성경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지킬 수도 있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즉 일반 성경과 같다는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지상에 전개될 미래역사책으로 보는 관점을 떠나 다른 성경과 같은 구원과 관련된 책으로 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만 계시록은 복음의서의 비유가 그렇듯 감춰진 비밀을 캐도록 비유와 상징으로 포장이 됐을 뿐 우리에게 다양한 복음진리가 담긴 성경인 것입니다.

 

2.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안에서 죽은 자에 대해서 개역성경에서는 지금을 ‘자금’ 즉 스스로 지금 죽는 자라고 했듯 특수한 죽음입니다. 복된 죽음의 요건 3가지가 나타나는데 그 요건은 스스로 죽어야 하고, 지금 이후로 죽어야 하며, 주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나팔 재앙이 한창 진행될 때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즉 나를 못 박는 죽음입니다(갈2:20). 이 죽음이 무엇인지 성령께서 힌트를 또 주시는데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셨습니다. 즉 죽음의 결과로서 참된 안식을 얻게 될 뿐 아니라, 이 안식은 어떤 행한 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죽는 그 죽음은 가리킵니다. 그런데 내가 살아나려고 하기 때문에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3. 거룩함을 입은 자가 복 있습니다.

 

계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 옷의 특징은 지켜야 할 옷입니다. 그 이미는 이 의는 하나님께서 수여하셨다는 의미도 있고, 방심하면 세상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옷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의의 행실의 옷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의롭게 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죄 없다 하셨을 뿐 아니라 죄악까지 처리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누리고 성령으로 누립니다(롬3:21-24). 주님이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그 때를 모른다는 것이고, 또 언제든지 오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단장만 되면 아직 재림이 아닐지라도 그 심령에 주의 영으로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4.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는 자의 복입니다.

 

계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기록하라”라는 것은 성경을 암시하는 용어로 그만큼 이 말씀에 권위가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초청의 말씀에 자신을 걸어도 됩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일차적 의미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친교와 연합을 표현하는 다른 용어입니다. 이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아울러 있을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누리는 완전한 연합과 기쁨입니다(호2:19-20). 청함을 받는 자들이 복된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는 복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마22: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할 일은 빨리 세상이라는 고향과 죄라는 친척과 친구들을 벗어나(시45:10-11)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5. 예수 믿고 부활 생명 안에 사는 자가 복 있습니다.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이미 20장 강해에서 설명했는데 첫째 부활이 무엇인지 계20:6에 그 힌트가 나와 있듯 복이 있고 거룩하고 제사장이 되고 왕노릇하는 부활입니다. 이런 복이라면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영적으로 누리는 복들입니다. 사실 제사장이나 왕적 권세는 우리가 사는 지상에서 필요하지 천국 가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현재적이고 영적인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요5:25, 엡2:1, 빌3:10-12). 이 신령한 부활을 입은 자들이 장차 재림 시 육체의 부활을 입게 될 것입니다.

 

6. 말씀을 가감 없이 지키는 자가 복 있습니다.

 

계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하셨고, 22:18-19에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습니다.

 

먼저, 성경은 가감해서는 안 될 책입니다(마5:19). 이 가감하지 말라는 경고는 계시록 해석의 중요한 지침사항입니다. 한 구절 한 단어라도 소홀히 여기면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즉 비유와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한 주제가 그 내용과 하나라도 다르다면 답일 수가 없습니다. 가령 99가지가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 같았어도 코가 짧은 동물이더라 했다면 그건 코끼리가 아닙니다. 성경해석은 성경을 100% 가감 없이 믿을 때 비로소 열립니다. 그런 관점에서 계시록을 볼 때 거기서 구원의 비밀, 거룩의 비밀, 은혜의 비밀, 승리의 비밀 등 복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은혜에 참여하게 되지만 가감하여 몇 단어와 문장만 보고 핵전쟁처럼 보인다 식으로 접근한다면 그 은혜가 있는 것조차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7. 날마다 자기 행실을 씻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여기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행실의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신 외침처럼 우리의 옛사람을 처리하는데 힘쓸 때 더욱 생명적인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고전6:9-11, 딛2:11-14). 이 거룩의 흰옷으로 준비할 때 주님이 현재적으로도 임하시고 장차에도 온전히 임하시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 대한 자세 (계 22:6-10)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성경 66권이 모두 귀한 말씀이지만 계시록만큼 결론이 잘 되어 있는 책은 없을 것입니다. 결론에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성령과 천상의 성도와 천사와 교회가 등장하여 이 책의 권위와 내용과 그 강조점을 거듭 거듭 부각시키신 예는 계시록 말고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계 22장은 계시록의 결론임과 동시에 신구약 성경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계시록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1. 계시록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6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앞에서 이미 다루었던 것처럼 이 말씀은 계시록에 대한 정경성을 여러 방향에서 입증합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았던 선지자들과 동일한 계시를 받아 쓴 참되고 신실한 책이라고 말씀합니다(히1:1-2). 그러므로 계시록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경론에서 양보하면 다 무너지고 맙니다.

 

2. 진리를 지키는 자세입니다.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여기 “오리니” (에르코마이)는 원문상 현재형입니다. 미래적으로 이해한다면 잘 대비하고 있으라는 의미가 되겠지만, 이 순간에도 임하시고 계신다는 현재형이니 계시록이 어떤 말씀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현재형으로 속히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책이니까 예수 믿어 구원 받는 복음의 책이요, 지금도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부흥의 책입니다(사59:19). 이와 같은 기름준비가 장차 임하실 주님을 대비하는 가장 합당한 모습일 것입니다.

 

3. 계시록에 대한 감격을 가져야 합니다.

 

8-9절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이 계19:10에서 사람에게 경배하는 실수를 여기서 천사에게 또 다시 반복합니다. 그만큼 계시록이 감격스러운 진리임을 역설적으로 시사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천사가 두루마리를 지켜서 이 영광에 이른 형제였다는 점입니다. 그 형제는 계시록을 지키는 자의 모델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을 일고 듣고 지킬 때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너희들도 이 두루마리의 말씀을 지키면 이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힌트입니다. 계시록을 간단히 요약하면 예수 믿고 성령 받으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함으로 더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4. 계시록에 대한 자세는 인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0절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여기 때는 궁극적으로는 재림의 때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구원의 때입니다. 오늘을 사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막1:15). 갈4:4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라고 했듯 계시록으로 영성을 준비하여 하나님이 쓰시는 성령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그토록 강조하셨건만 많은 사람들은 재림만 막연하게 생각하며 경성하지 않습니다. 지금 은혜 받은 사람이 재림의 주님도 맞이할 수 있다는 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슬픈 일은 말로는 계시록이 인봉된 책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의 태도는 인봉한 책을 다루듯 합니다. 성경을 주석하면서도 계시록 주석을 빼기도 합니다. 겸손의 의도는 이해하나 인봉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혹자는 핵무기 등이 등장함에 따라 이제야 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럼 그동안 2,000년간은 인봉된 건거요? 계시록은 쓰여질 때 개봉되었고 해석까지 개봉되었기에 개봉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이 풀리지 않았다면 문자적 육신적으로 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다른 성경과 같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해석하되,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신약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성경해석법 그대로 다가가면 풀리는 책입니다.

 

5. 이 진리를 가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8-19절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성경을 가감한다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계시록은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한 마디만 가감해도 해석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결과 계시록에 기록된 겉모양인 재앙들만 보고 겁먹을 수밖에 없고 생명의 은혜에 동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겉모양은 온갖 흉악한 전쟁과 질병과 고통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책이라. 무슨 큰 일이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는 등 많은 사람들의 계시록에 대한 인상이 그러합니다. 한 마디도 가감하지 말고 종이 한 장에 본문이 제공하는 그 설명을 늘어 뜨려놓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계시록은 직답은 아니지만 여러 힌트를 주고 있기 때문에 그 힌트도 참고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보면 어느 날엔가 샛별이 떠오르듯 그 답이 보일 것입니다(벧전1:19-21).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 22:11-13)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우리의 생애가 다하기까지,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기본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해야 할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성경대로 살면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1. 은혜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1절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죄인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우리들에게 그대로 두라니, 문장의 서술로만 본다면 난해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문법의 용례를 보면 아주 변경 없이 심판을 작정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시6:12, 창15:16). 그런데 전후 문맥에서 두루마기를 빤다든지 성령과 신부가 오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 즉 악을 처리하고 의롭고 신령한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원리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옛사람과 새사람이 아직 공존할지라도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은혜에 의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죄와 싸우고 내가 의로우려는 순간 더욱 크게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시37:1-10). 가장 현명한 것은 예수 공로에 맡기는 것입니다(롬6:11, 갈5:16).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입니다. 즉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은혜생활 잘하라는 교훈입니다.

 

2. 자기 십자가 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 말씀의 일반적인 의미는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사명에 충성하고 봉사하라는 교훈입니다. 이렇게 충성하고 있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큰상을 주십니다(마24:45-47). 그런데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상을 약속한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십자가 지고 나를 잘 죽이고 있으라는 교훈에서 많이 발견됩니다.(계14:13, 마16:24-27, 딤후2:11-12). 내가 살아나면 비극입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빌3:10-14). 예수님이 남기신 사명의 십자가도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것이요, 영원히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자기완성을 위하여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이 말씀은 1장과 21장에서 성부에게 돌려졌던 칭호인데, 여기서는 성자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점에서 이상할 것은 없지만, 특이한 것은 한 번만 언급해도 될 것을 3번이나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2나 3은 증거의 수인데 3은 더욱 확실한 증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호칭은 뭔가 시작하셨고 이름을 걸고 그것을 반드시 완성시키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이가 완성까지 책임지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자기완성을 위해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교훈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 (계 22:14-15)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세상의 때가 묻은 우리 행실을 빠는 것으로 회개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생명나무에 나아가고 천성 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교훈은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죄를 붙들고 있다면 은혜의 잔치에 들어갈 수 없음으로 회개하고 은혜에 동참하라는 교훈입니다.

 

몇 가지 의문사항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면

 

1.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란 누구일까요?

 

14절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이들은 아직 성 밖에 있고, 자기 행실을 빨아야 할 것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이런 자각도 없으니 회개하지 않는 성도라고 봐야 자연스럽습니다. 이 성 밖에 있는 악인들은 씻기 전에는 성 안의 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처럼 두루마기를 빨아야 할 자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믿으면 들어갈 수 있지만 성전의 물두멍이 그러하듯 깨끗하게 씻은 후에야 들어갑니다(행2:38-40).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 안과 성 밖의 사람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도성은 외적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성 안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과 예루살렘을 지키고자 하는 생명 바친 신앙의 투사들이 아니고는 살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새 예루살렘의 잔치에 들어가려면 기본적으로 거친 세파를 이기고 자기 두루마기를 씻는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갈망이 없이는 신부의 수준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성 밖으로 격리했듯이 우리의 마음 역시 죄에 오염이 되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없습니다(계21:26-27, 계3:5). 마음을 씻는데 힘쓰지 않고 잔치에만 몰두하는 신비운동을 하다가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2. 성 밖은 어디일까요?

 

15절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여기 머물 자들은 열거된 대로 흉악한 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신자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앞의 계21:8에는 이 죄를 가진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졌지만, 22장 본문에는 지옥에 던져지지 아니하고 두루마기를 빨며 문들을 통해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고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악인이지만 믿음 여부의 차이입니다. 그들이 불신자라면 성 밖은 고사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격리됐을 텐데 새 하늘과 새 땅에 안착한 새 예루살렘의 문밖에 있다니 아직 그 안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입니다. 혹자는 성 밖이 지옥이라고 주장하지만 지옥에서 씻음 받아 천성에 들어간다는 이론은 성경에 없습니다(눅16:25-26).

 

더구나 문이 단수가 아니라 문들이라 해서 복수입니다. 천국에 가는 길은 오직 예수, 문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천성문은 열둘입니다. 은혜 받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문에 들어가는 가장 큰 조건은 거룩입니다(계21:27). 새 예루살렘이 내려와 새 하늘과 새 땅에 안착하여 천국의 수도가 됐다면 천성 밖도 천국의 영역입니다(계21:1-2). 이처럼 예수 믿어 천국의 영역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세속에 물든 채로 살아가는 은혜 받지 못한 심령을 이렇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그 신부의 모습을 갖추어 그 은혜의 잔치에 들어가는 자가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은 행실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입니다.

 

 

계시록과 예수님 (계 22:16)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장에서 계시록이 예수님의 계시요 교회에 주시려는 말씀이라는 것을 서두에서 밝혔는데 계시록이 끝나려는 본문에서 다시 언급하심으로 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 번 확증하십니다.

 

1. 예수님은 계시록의 수여자이십니다.

 

나 예수는” 계시록의 수여자가 예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미 1장에서 하셨는데(계1:1-2) 계시록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록’이라고 해야 더 정확합니다. 요한은 다만 기록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시록 외의 모든 성경도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2. 교회들을 위해 계시록을 주셨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계시록의 수신자가 교회임을 1장에서 보았습니다(계1:4,11). 여기 교회들은 당시의 일곱 교회는 물론 7이라는 완전수가 의미하듯 모든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모든 교회에서 외쳐져야 하며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한 말씀입니다.

 

3. 사자들을 보내 계시록을 증언하셨습니다.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예수님의 사자는 천사들, 요한, 주의 종들입니다. 이 말씀을 주의 사자들에게 먼저 주신 것은 그들은 성경과 교리적 기초가 있어 해석할 수 있으며 또 교회에서 가르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말2:7). 주의 종들 끼리 해석의 차이는 보일지라도 성경과 정통신앙은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기본조차도 갖추어지지 않은 일반들이 계시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다가 얼마나 잘못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이단이 계시록 오해에서 나왔습니다.

 

4. 예수님은 기다리던 메시야십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이미 계5:5에 나온 말씀인데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메시야라는 것입니다(히7:14, 삼하7:16, 마2:5-6). 계시록에서 자신을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신 것은 계시록의 첫째 목적이 예수님을 주로 믿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만이 메시야이심을 알리심으로 아무나 메시야라 선언할 수 없도록 그 정통성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자칭 메시야가 많지만 그들은 다윗의 자손과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다 메시야가 되는 것 아닙니다. 성경의 수십 수백 가지의 예언에 부합하고 입증되되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5.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입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예수님은 족보상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본질 면으로는 다윗의 뿌리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했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습니까?(마22:41-46) 그러므로 다윗이 있게 된 것도 예수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같은 능력과 권세를 사모한다면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을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요14:12).

 

6. 예수님은 죄에 빠진 인류의 소망이십니다.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여기 새벽 별은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국기에는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민족입니다. 그들이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새벽 별은 소망입니다. 이 새벽 별이 떠야 인류의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기업을 키우는 것보다 선심성 복지정책으로 나라가 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도하지 않아서 나라가 시험에 든 것입니다.

 

 

성령과 신부의 초청 (계 22:17)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본문은 성령과 신부가 나란히 서서 우리를 은혜의 잔치에 초청하는 모습입니다. 가장 귀히 쓰이는 일군은 성령님과 동거 동행 동역하는 종입니다. 에녹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 엘리사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자 하는데 함께 할 합당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믿는 자가 다 신부지만,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신부의 수준에 이른 자를 가리킵니다.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비밀은 무엇일까요?

 

1.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이 초청을 예수님께서 하시지 않고 성령과 신부의 합창으로 하게 하실까요?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은혜의 자리에 올 수 없고, 주님만 사랑하는 신부가 될 때 풍성한 잔치를 누릴 수 있고, 성령님과 동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후6:1, 고전3:9). 즉 신부가 은혜 누릴 자의 모델입니다. 초청 대상이 불신자일수도 있지만 그 메시지를 볼 때 아직 은혜에 이르지 못한 성도들이 주 대상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 영적 잔치의 비밀입니다(요4:14, 행2:33, 요1:33-34).

 

기본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성전이기 때문에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고전3:16). 그런데 그 마음의 성전이 얼마나 청결하며, 또 얼마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는 각각 다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걸 어렵게 생각하는데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며 경배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몸과 마음을 드려 좀 더 열심히 기도하고 경배해 보세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적이어야지 은혜 받을 목적이라면 내가 우상이 되므로 반대의 결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2. 잔치에 초청해야 합니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계심을 듣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행19:1-2). 이제 성령의 은혜에 대해서 들었다면 지금 아는 자입니다. 먼저 자신부터 초청에 응하여 성령의 은혜 받는데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나라의 회복보다 하나님의 일보다 성령이 먼저입니다(행1:4). 예수가 믿어지지 않는 목회자도 있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잔치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성령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는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자나 원하는 자만이 올 수 있습니다(시107:9, 시107:9). 교회에서 모두를 대상으로 하면 따라오지 않으려는 부류가 있어 반발에 부딪힙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사역과 대중사역을 분리하셨듯 함께 따라갈 수 있는 성도들을 통해 은혜운동이 일어나면 나중에는 모두 합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이 5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여서 끝까지 기다린 사람은 120명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18-21)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경에서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라는 용어는 고전16:22에 한번 쓰였습니다.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에서도 발견되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혹은 "우리 주여 오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모하는 자에게 지금도 임하시고 계시고 또 재림으로 영원히 임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임하시든 주님이 임하시면 시험도 끝나고 갈등도 끝나고 슬픔도 끝납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라나타의 신앙입니다. 은혜를 갈망하십시다. 우리가 계시록을 아는 것도 좋지만 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복은 지키는 자의 것입니다.

 

먼저 계시록 자체에 대한 두 가지 경고가 나옵니다.

 

1. 이 예언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지 말라.

 

18절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약 더하면 이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더하시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을 보거나 들으면서 복의 책으로 느껴지지 않고 견딜 수 없는 두려움으로만 느껴진다면 그는 이미 그 재앙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계시록의 겉 부분만 보고 자기 생각을 더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계시록에 자기 생각을 더해 자칭 메시야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2. 이 예언의 말씀에서 하나라도 빼지 말라.

 

19절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말씀은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계시록은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하게 하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즉 계시록은 핵전쟁 스토리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참예하게 하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은 대부분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어 하나라도 빼거나 틀리면 해석이 안 되므로 아무리 좋은 메시지가 계시록에 담겨 있어도 결과적으로 그 은혜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계시록 해석 시 좋은 참고가 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의 최종 메시지 역시 두 가지입니다.

 

1.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20절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본 장에서 7절과 12절에 이어 20절에서 재림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 번의 약속은 3이 완전수라는 점에서 더 할 수 없는 강조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얼마나 멀기에 2.000년이 지나가도록 오시지 않는지 반문합니다. 이미 알려드렸듯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원문상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입니다. 많은 오해는 속히 오리라는 현재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온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순절에 성령으로 임하셨고, 또 계속하여 자기를 씻으며 사모하는 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임하고 계시며, 그리고 장차 온전히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가깝게 말씀드리면 성령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령 받아 세상의 빛이 되고 온 세계를 능력으로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죄와 절망에 빠진 자들이 소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2. 두 번째는 주님의 오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20절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초대 교회에서 아람어로 “마라나-타" 즉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가 성찬예식 때 드리는 공식기도문이었습니다. 그 만큼 그들은 금방이라도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죄악과 고통이 끝나고 성도들은 영원한 복락과 영생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풍성한 은혜와 은사를 가지고 오십니다(벧전1:13).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재림공포증에 빠져 주님 빨리 오지 마시기 갈망하는 이상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방황합니까? 소망과 기쁨이 없습니까? 응답과 영적 부흥이 필요합니까? 성령으로든 재림으로든 주님이 임하셔야 답이 나옵니다. 이 정답을 얻었다면 계시록을 제대로 공부한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보다 주님을 갈망하십시오. 이처럼 요한과 같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계시록은 요한의 축도로 마쳐집니다.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 축도에서 주님의 임하심으로 다가오는 은혜로 충만하기를 소원하는 요한의 갈망을 봅니다. 더 이상 주님을 멀리 하지 말고 주님을 사모함으로 그의 충만하신 임재 속에서 예수님과 동역하는 사명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불러주신 아버지의 사랑과 속죄의 어린양으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묵상하고 감사하면서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날마다 기도와 경배와 찬양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눅24:53, 행1:14). 그때 주님께서 더욱 충만하게 임하시고 우리를 신부 삼고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