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스크랩]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21장

에반젤(복음) 2021. 12. 27. 05:51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8)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사단과 그의 세력이 멸망 당하고 현 우주와 역사가 붕괴된 후 대 심판 이후에 조성되는 천국과 지옥을 포함한 새로운 세계입니다(그랜드종합주석). 일반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둘은 동격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그 범위를 좁혀서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면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됨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고후5:17).

 

새 하늘과 새 땅의 신령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1. 감격스런 모습입니다.

 

1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여기서 “내가 - 보니”는 새로운 사건을 소개하는 단순한 관용구를 넘어 고후5:17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한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모습일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수고하시고 우리 역시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안에서의 잠재적 새 피조물이 아니라(고후5:16-17, 엡2:10) 성령으로 변화된 그 실체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1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백보좌 심판 때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없어졌는데(계20:11), 바다 역시 죽은 자들을 내주고는(계20:13) 사라졌습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표현은 전에 자꾸 다가왔던 그 무엇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땅과 하늘의 부정적 의미가 육신적이고 사탄적인 생각들이라면 바다는 파도처럼 다가오는 시험입니다. 그 증거로 바다는 사탄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던 곳이고(12장), 괴물이 출현한 곳이었고(13장), 바벨론 상인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하고(계18:17,19), 죽은 자들을 품고 있었던 처소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20장, 사27:1). 그런데 이젠 어떤 바람이 불어도 시험에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3. 거룩한 모습입니다.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이 모습은 새 하늘과 새 땅 위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안착하는 모습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그랬던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문맥으로 볼 때 이 둘을 크게 구별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여러 특징 중 거룩한 성이라 하여 거룩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거룩이 이 성의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요일3:3).새 예루살렘은 음녀 바벨론과 서로 대비되는 것으로 속됨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4. 거듭난 새 사람입니다.

 

2절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 거듭남이요(요3:2,5), 신학적으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나다. 하늘로부터 나다. 하나님께로부터 나다. 성령으로 나다. 다시 나다.’ 등의 의미입니다. 현대신학계는 중생의 시점이 어디인지에만 매달려 있는데 넓은 의미에서 중생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성화나 영화까지도 포함된 구원의 전반적인 것입니다.

 

5. 창조물이요 특별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2절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은 이 성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복락은 위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입혀지기 때문입니다(롬13:14, 골3:12, 엡4:24, 엡5:26-27). 그리고 옛날에 왕들이 왕후를 기념하기 위해서 수도를 새로 만들고 왕후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6. 주를 위한 삶입니다.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처럼 주님의 기쁨이 되도록 자기를 단장해야 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로서 묘사되었습니다(사62:4-5). “헵시바”라 불렀는데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는 뜻이요, “쁄라”라 했는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이라, 혹은 결혼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십계명이 그 언약서라는 점에서 부부의 계명 차원에서 읽어보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자녀는 생명으로 된 것이기에 영원하지만, 부부는 언약으로 된 것이기에 그 약속을 깨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체험으로 본다면 아주 버리진 않지만 밀월의 관계는 깨질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과 성취감을 위한 화장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단장의 기본은 성결과(요일3:3) 순복함과 유순함입니다(골3:18, 엡5:22, 벧전3:5-6). 나아가 예수의 고난까지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건 최고의 화장일 것입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했듯 성화를 위해서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가려고 12달 동안 준비했는데 다른 여자들과 같이 하지 아니하고 왕궁에서 정한 향품 만을 사용했듯 인간의 의가 아닌 오직 예수의 복음과 교훈 그리고 성령충만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복은 무엇입니까?

 

1. 항구적인 임재가 있습니다.

 

3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이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보라."는 말씀은 주위를 환기시키는 감탄사를 넘어 새 시대를 선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항구적인 임재를 시사합니다. 부부는 함께 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하나님의 내주 내재는 믿을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항구적인 임재 경험은 우리의 준비가 끝날 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표현은 성경에서 거룩함을 유지할 때 주신 약속입니다(고후6:14-18). 그동안 독수공방처럼 얼마나 임재를 모르는 나날이었습니까? 그러나 새롭게 된 이제는 달라졌습니다(시133:1-3). 진정한 관계회복은 새 하늘과 새 땅처럼 새롭게 되는데 비밀이 있습니다.

 

2. 슬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면 슬픔과 고통은 사라지고 진정한 행복과 만족만이 있습니다. 미움도 두려움도 갈등도 없습니다(마24:10-13).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처음 것이란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입니다.

 

3.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5절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3절에도 본문에도 보좌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당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의미합니다. 이 통치가 바로 구원이요, 하나님 나라요, 영생이요, 능력이요, 은혜요, 사랑이요, 구속사의 완성입니다(사35:10). 우리를 직접 다스리시는 성령의 은혜가 충만합니다(사11:9). 진정한 어린양이 혼인잔치는 세마포의 거룩에서 이루어집니다(계20:6-8).

 

4. 육체까지도 새롭게 됩니다.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장차 피조물의 회복을 말씀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다른 피조물들도 함께 고통에 빠졌지만(창3:17, 전1:8, 롬8:21)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회복이옵니다. 만물의 회복이 있다면 우리 몸의 구속은 더욱 앞섭니다. 바울은 만물의 회복을 말씀하다가 몸의 구속을 말씀했습니다(롬8:23). 우리 몸의 구속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5. 성경 약속의 성취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여기 “신실하다.”는 원문에 ‘피스토스’ 그 의미는 ‘신뢰할 만하다.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되다.”는 ‘거짓이 없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기록하라"는 것은 원래 성경을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그동안 하신 말씀이 성경적 권위를 갖는다는 의미이지만 한 편 성경의 통일성을 참고해 볼 때 이제 성경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히6:17-18, 벧전5:10, 빌3:20-21).

 

이 온전하게 하시는 원리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입니다.

 

6절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요19:30)하신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아버지께서 예정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를 성령으로 우리에게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엡1:4-5). 계1:1의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 "반드시"는 원문에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리킵니다. 이 정도로 큰 비중을 가진 사건은 구속사 말고는 없습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중심인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 즉 구원의 완성입니다(고전15:2).

 

2. 성령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알파와 오메가란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뜻인데 동의어를 나란히 놓으신 것은 강조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냅니다. 빌1:6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하나님을 늘 경외하면 성령이 임하시는데 그 충만하신 만큼 완성으로 다가옵니다(행10:44-46).

 

3. 성도의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이기는 자"란 시험을 이겨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큼 사탄의 방해가 있습니다(행14:22). 무엇을 이겨야 할지 7절에 힌트가 있습니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7절). 이 말씀은 구약에서 거룩을 조건으로 한 언약체결문의 결론인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죄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하겠다는 것입니다(출19:5-6, 고후6:17-18).

 

그런데 8절에도 이겨야 할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것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마음에서 사라집니다(마12:20-21).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천국민과 똑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길 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1. 생명수 샘물을 주십니다.

 

6절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 생명수 샘물은 성령의 은혜입니다(요7:37-39). 이 말씀은 한 편으로 영적 기갈이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려는 매마른 건기임을 시사합니다(욜2:23, 약5:7-8).

 

2. 하늘나라를 상속 받습니다.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이것들은 생명수를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은혜를 가리킵니다. 핍박을 이겨내야 이런 큰 은혜를 주십니다(마5:10-12, 약1:12).

 

3. 완전한 관계회복을 이룹니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 말씀은 친밀한 관계 회복와 하늘나라 상속을 가리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누리며 누립니다.

 

4. 영원한 보장이 있습니다.

 

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이러지 말고 회개하여 예수 믿고 근신하여 신앙생활 잘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면 둘째 사망에 처해지지 않고 영원한 보장을 누리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 (계 21:9-22:5)

 

새 예루살렘이란 넓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요 좁게는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 성도 개인을 가리킵니다. 이 성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그러하듯 천국의 수도요, 하나님이 임재하신 중심 처소이며, 하나님의 온갖 은총이 베풀어진 복된 장소요, 구원받은 성도들의 복된 삶을 누릴 터전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것은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는 말씀 가운데 놀라운 구속의 진리가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진리와 성령의 충만하심이 새 예루살렘의 설계도이기도 합니다.

 

 

어린양의 신부 (계 21:9-11)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이 말씀은 새 예루살렘을 보이기 위한 하나의 서술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어떻게 준비되고 탄생되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힌트들이 많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1. 특별한 과정을 거쳐 준비되었습니다.

 

9절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먼저 소개자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 즉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소개하는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대접재앙을 가졌던 천사라는 점입니다. 대접재앙은 계 16장에서 끝났습니다. 그 뒤로 바벨론의 멸망, 어린양의 혼인잔치,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이제 새 예루살렘이 나타나는데 왜 대접재앙을 가졌던 천사가 어린양의 신부를 소개할까요?

 

그것은 대접재앙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대접재앙이 그리스도의 신부를 만드는데 그만큼 큰 기여를 했기 때문입니다. 대접재앙의 대접은 예수님의 고난의 상징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고난의 그 높은 사랑에 동참시키려는 연단의 과정입니다(히3:1). 신부란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배우자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는 수준을 넘어 그리스도의 고난적 사랑을 묵상함으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어떤 일이나 박해나 고난도 기뻐하며 충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행5:41). 이 수준 높은 연단의 과정이 대접재앙이었기에 최종단계인 마지막 재앙입니다(계15:1).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준 자 역시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계17:1) 신부의 요건인 세상 사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함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2.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로 준비되었습니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천사가 새 예루살렘을 소개하면서 먼저 신부라고 부릅니다. 신부(新婦)란 남편과 언약관계를 강조한 명사입니다. 부부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순결입니다(마5:32, 마19:9).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신5:1) 하신 1계명부터가 이스라엘을 신부로 보신 십계명입니다. 부부언약은 그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지만 딱 한 가지 간음함으로 그 언약을 어길 때 갈라질 수 있습니다. 원리상 그렇다는 것이지 반드시 갈라서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신부에 합당하게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신실한 언약관계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고난에도 동참하길 원합니다.

 

어린 양의 아내” 새 예루살렘을 어린 양의 아내라고 한 것은 어린 양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피 흘린 대표적인 희생제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강조한 명칭을 쓴 것은 이 어린 양의 배필로서 합당한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자의 일생은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달렸듯 어린 양의 아내가 되기로 선택했으니 희생적 사랑으로 같이 죽을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벧전2:21, 빌1:29, 엡5:2). 대속의 십자가는 오직 주님만이 지실 수 있지만 예수님이 남기신 복음전파를 위한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합니다. 이 땅에 성령의 불을 지피는 사명 역시 우리가 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4. 특별한 은혜로 준비 된 자입니다.

 

10절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17:3에 대접 가진 천사가 음녀 바벨론을 보여줄 때도 광야로 데리고 가는 등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그러합니다. 이 크고 높은 산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높은 산입니다. 그런데 요한을 이 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주셨을까요? 그것도 성령님의 인도로 말입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은 갚을 수 없는 크신 높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5. 온전히 거듭난 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완성적인 모습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옴은 그 기원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란 성령으로 거듭 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을 ‘팔링게네시아’라 하는데 이 용어는 파린(다시)+게네시스(태어남)의 합성어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요3:3,5). ‘중생의 시점이 어디냐? 그러므로 나는 예수 믿었으니 중생한 자다.’ 식의 논리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온전히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벧전2:2). 이것이 완성적인 새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6. 하늘의 은혜로 입혀진 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이런 이중수식은 강조형인데 이처럼 어린양의 신부가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세상이나 육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입니다(고후5:2,4-5, 갈3:26-27). 그러므로 겉옷만이 아닌 속옷도 능력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눅24:49).

 

7. 어린양의 신부는 정조를 가졌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거룩한 성이란 속된 것이 출입할 수 없는 거룩한 성임을 가리킨 것입니다. 도시를 둘러치는 거대한 방벽처럼 세속의 침투를 막고 물리치는 완전한 마음의 방벽이 있어야 합니다(아8:10, 5:12, 요일3:3). 마음에 세속에 출입한다면 그리스도의 신부 수준에 미달입니다.

 

8.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11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하나님의 영광은 지성소에 임하던 하나님의 그 영광(쉐키나)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여기 빛 ‘포스’는 반사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계21:23). 계 12장의 해 입은 여자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는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요1:14, 요14:20). 그러므로 내 안의 인간의 속성은 사라지고 예수로 가득 찰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보석과 같이 귀한 존재입니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보석처럼 빛났습니다. 빛이 없다면 빛나지 않겠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를 지극히 귀하게 보십니다(출28:21-22).

 

10. 성결한 존재입니다.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이번에는 성도를 벽옥과 수정에 비유합니다. 앞에서 “귀한 보석”이라 하여 보석의 의미가 귀함이라는 힌트를 주었듯,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벽옥은 희고 즉 성결을(계4:3), 수정은 맑음 즉 씻음을 강조한 것입니다(계4:6). 이처럼 어린양의 아내는 성결을 경험하고 세상의 때 묻지 않게 늘 씻는 사람입니다(요13:10, 계14:4-5, 롬8:30).

 

 

새 예루살렘의 성곽 (계 21:12-14)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성곽이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방벽으로 높고 튼튼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런 방벽이 필요합니다. 악을 배타하는 마음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새 예루살렘의 성곽에 대한 계시인데 성곽은 크고 높고 견고함을 자랑합니다. 이 성 사방에 열두 문이 있는데 세상의 잡된 그런 것이 통과할 수 없는 거룩한 성입니다. 계시록에서 맨 먼저 그리고 비중 있게 성곽 소개를 하고 있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벽이 튼튼한 것처럼(시125:2) 새 예루살렘도 튼튼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의 성곽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어떤 악도 침투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12절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새 예루살렘 성곽의 높이가 144규빗으로 약 65.6미터입니다. 지상의 바벨론성도 높이가 100미터였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본 건물인 새 예루살렘은 가로 세로 높이가 같은 정방형의 도시인데 한 변의 높이가 일만 이천 스다디온 약 2,200km 그러니까 1,500마일인데 그것을 보호하는 성곽이 65.6미터라니 몇 반분지 1도 안 되는 높이입니다.

 

성곽의 높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144규빗은 완전수 12를 두 번 곱한 것으로 실제의 수치라기보다 성곽의 완전성을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길이라’ 했습니다. 본문의 의도에 맞게 바르게 해석하려면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17절)으로 나온 수라는 점입니다. 그 의미는 이제 사람의 뜻이 주의 뜻과 같을 만큼 되었다는 의미입니다(사55:8, 요15:7, 고전2:16). 그러니까 이 숫자는 문자적인 측량이 아니라 신령한 관점에서 말씀한 숫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에서 12가 쓰인 대로 12사도와 12지파를 곱한 수가 144입니다. 12사도는 진리의 초석을 놓은 자들이요,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입니다. 성경진리에 선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입니다. 진리와 언약이 아니면 통과시키지 않는 정통신앙의 상징입니다. 이런 성곽이라면 이단이 절대 틈탈 수 없는 구조입니다.

 

다른 방향인 경건의 관점에서 본다면 12사도는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라고 한다면, 12지파는 행26:7에 나오듯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경외의 신앙을 가리킵니다. 이 모습 역시 사탄이 틈탈 수 없는 은혜운동의 자세입니다(행20:32, 히13:9, 히12:28). 흔히 은사운동하다가 악령이 틈타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도행전에 기본이 잘된 사도들이 성령운동하다가 악령 받은 일 보았습니까? 아8:10에 “나는 성벽이요” 한 말씀처럼 사랑으로 성숙하여 어떤 시험도 틈탈 수 없는 마음의 성곽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여러 방향에서 은혜에 동참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예수님은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시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가 무너지면 그건 잡탕교입니다. 그런데 왜 열두 문일까요? 이것은 은혜의 방법을 의미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안의 새 예루살렘이니까 이미 예수로 구원 받은 자의 은혜 받는 다양한 길을 계시한 것입니다.

 

먼저 이 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는 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주로 삼는 그리스도인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처럼 십자가 지고 믿음으로 준비된 자만이 충만한 은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계22:14). 그런데 문마다 한 천사씩 있는 이유는 천사는 복음전도나 은혜 운동의 상징으로 우리 신앙고백이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성은 장로교인이어서 감리교인이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는 자만이 들어갑니다.

 

문마다 12지파의 이름이 하나씩 기록된 이유는 각 지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26:7에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긴다 했듯이 그 믿음의 특징을 살려 하나님을 열심히 경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령 유다는 형제들의 찬송이니까 늘 찬송하며 살면 은혜의 문이 크게 열립니다(시100:4). 혹은 루우벤은 기력의 시작이요 물의 끓음 같았는데 나쁜데 이 힘쓰지 않고 기도하는데 이 열정을 드린다면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12지파에 대해서 각자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입의 기본은 거룩입니다(계22:14). 거룩할 때 은혜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다양한 은혜의 방편을 열심히 활용할 때 들어가고 나가며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신28:6, 요10:9). 그러나 12수는 상징수라는 점에서 온전한 은혜와 신앙의 훈련을 강조한 것이지 성화의 방법이 12가지라고 못 박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을 주셨고, 나아가 그런 방법으로 이스라엘 12지파와 같이 밤낮으로 열심히 섬길 때 초대교회가 그랬듯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3. 믿음 가지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3절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새 예루살렘 성곽의 문은 동서남북으로 세 문씩 나 있습니다. 동서남북은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어디서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막16:15, 사49:18, 마8:11). 도리어 미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더 큰 은혜에 동참하기도 합니다(약2:5, 고전1:28-29 요3:16, 롬3:22). 은혜생활에 낙심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4. 선한 싸움 없이 은혜의 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사방에 문이 있다는 것은 사방에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방의 대적을 파하여 평화로웠던 다윗시대가 그 예표입니다(삼하7:1-2). 천국에는 전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는 것은(마11:12) 지상의 성도들의 사모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만큼 지상에서는 방해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엡6:10-11). 그러므로 이 땅에 살면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고 살려면 그만큼 몸과 마음을 드려 열심히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5. 이 복락을 누리려면 진리의 기초가 견고해야 합니다.

 

14절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2문에는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었지만, 여기 12 기초석에는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문이 들어가고 나가면서 꼴을 얻고 은혜 받는 신앙 활동이라면, 12기초석은 사도들이 전한 진리의 견고한 초석을 가리킵니다. 성곽에서 설명했듯 12지파의 신앙 X 12사도의 진리라는 공식을 여기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12기초석은 사도들이 예수님께 배워 기독교 진리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이지 교회의 기초가 사도라는 말은 아닙니다(고전10:4). 성경과 다르면 기독교가 아니고 은혜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이1:9). 그런데 “어린양의 12사도”라고 했습니다. 어린양은 구속을 강조한 표현으로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십자가 피의 복음이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새 예루살렘의 측량 (계 21:15-17)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본문은 천사가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의 크기를 가르쳐 주는 장면입니다. 척량의 대상은 그 성과 문들과 성곽이고, 척량의 기구는 금 갈대자인데, 척량하여 보니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과 광과 고가 같았고 한 변의 길이는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었고, 성곽은 일백 사십 사 규빗이었습니다. 이토록 세밀하게 알려주신 이유는 천성의 치수라기보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합당한 신부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1.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15절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측량도구가 금 갈대 자였습니다. 갈대 자는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을 케논이라고 하는데 잣대를 뜻합니다. 우리 믿음이 성경에 입각해야 합니다.

 

2. 신령한 믿음입니다.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갈대여도 되는데 금 갈대인 것은, 금은 신성과 믿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도들의 믿음이 얼마나 참되고 신령한지 보신다는 것입니다(고전2:13-14). 육신에 속한 믿음으로는 신부의 자격이 될 수 없습니다.

 

3.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천사가 여러 부분을 척량했듯이 신앙생활도 한 가지만 평가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잘하는데 생활이 엉망이라면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혹은 신령한 지식은 풍성한데 실천하는 삶이 없다면 역시 그렇습니다. 교회생활은 잘하는데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거나, 보통 때는 잘하는데 봉사할 일이 생기면 숨거나, 시험이 오면 쉽게 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났고 영에 속한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4. 균형 잡힌 믿음입니다.

 

16절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새 예루살렘 성의 모양이 네모반듯한 주사위 모양입니다. 장과 광과 고가 같다는 것은 치우침 없는 균형 잡힌 믿음임을 보여줍니다. 지식도 감정도 의지도 풍부한 균형 잡힌 믿음의 모습입니다. 한 편으로 치우치다가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5. 큰 믿음입니다.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그렇다면 성이 얼마나 클까요? 여기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1스다디온이 185m니까 약 2,200km 그러니까 가로 세로 높이 모두 1,500마일에 해당합니다. 이 거대한 빌딩은 지상의 건축 재료나 건축 공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건물 바닥의 넓이만 해도 한반도의 22배에 해당합니다. 이 빌딩이 수십만 층이라면 우리나라 면적의 1,000만 배도 더 될 것입니다. 이건 문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그렇다고 이 빌딩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일만 12,000 스다디온이 갖는 의미입니다. 12,000은 선택수 12에 충만수 1,000을 곱한 수로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충만함을 가리킵니다(롬11:25). 구원 받은 모든 수효가 다 들어와도 부족함이 없는 빌딩입니다. 또 이 크기는 사랑의 크기입니다(엡3:18-19).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한(엡1:23, 엡3:18-19), 크기입니다. 이것은 물리적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요 믿음의 크기요 사랑의 크기입니다.

 

6. 견고한 믿음입니다.

 

17절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성곽은 적에게서 보호의 기능과 거주자에 대해서는 성 안팎의 것을 누리도록 하는 통과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 같은 진리가 성곽의 치수인 144규빗에 나타납니다. 성곽의 높이 144규빗은 선택의 완전수 12를 두 번 곱한 것으로 성곽의 완전성을 시사합니다. 144는 12사도 12지파로 된 수로 문마다 그리고 문의 기초석마다 12지파와 12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진리의 초석 위에 서서 하나님을 열심히 경배하는 언약의 백성들의 상징입니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견고한 믿음을 상징합니다.

 

7. 하나님의 뜻과 같은 믿음입니다.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여기에 대해서도 앞에서 설명했는데 사람의 측량이 천사의 측량과 같을 만큼 이제 사람의 뜻이 주의 뜻과 같을 만큼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본래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보다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사55:8).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같을 만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령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요15:7, 고전2:16).

 

 

새 예루살렘의 재료 (계 21:18-21)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도의 아름다운 믿음과 봉사가 천국의 집을 짓는 귀한 재료가 된다는 말씀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본문을 참고할 때 그 말씀이 성경적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부된 새 예루살렘의 재료란 어떤 것이기에 그토록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답게 빛나는 걸까요?

 

새 예루살렘은 어떤 재료로 꾸몄을까요?

 

1. 정절로 꾸몄습니다.

 

18절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벽옥은 계4:3에 나타나듯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결하신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거룩한 벽옥으로 쌓은 성이기 때문에 세속이 틈탈 수가 없습니다. 성곽이 마음의 견고성을 가리는데 벽으로까지 쌓였으니 신부의 거룩하고 견고한 믿음의 정절을 보여줍니다(계21:11). 그런데 쌓였다는 것은 첩첩이 쌓인 것을 가리킵니다. 원수들이 기웃거릴 정도가 아니라 하늘까지 닿도록 쌓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절로 단장하는 것입니다(딤전2:9-10, 아8:9).

 

2. 믿음으로 꾸몄습니다.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정금은 그 순수성을 강조한 것으로 우리 믿음의 순수성을 가리킵니다.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면 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쳤음을 시사합니다(욥23:10, 히12:11-13). 이 연단의 기간은 순종 여부에 따라서 기간이 짧을 수도 길 수도 있습니다.

 

3. 사랑으로 꾸며졌습니다.

 

19-20절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성곽의 기초석은 12가지의 귀한 보석들로 되어 있었습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데 12보석이란 제사장의 가슴 흉패 안에 있었듯 12지파 12사도 즉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출28:21, 롬8:35). 그런데 새 예루살렘이 신부라는 점에서 성도 역시 하나님의 그 사랑 닮아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했음을 시사합니다.

 

4. 진리로 꾸몄습니다.

 

계21: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이 기초석에는 어린양의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계21:14), 19-20절 본문에 12가지 보석으로까지 꾸며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보석 같은 기초인 진리로 꾸며진 것입니다.

 

5. 순종으로 단장되었습니다.

 

21절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천성의 열두 문이 진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천성의 문만큼은 어떤 것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철광석이어야 하는데 약한 진주라니, 그러나 여기에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진주는 조개가 온갖 고통을 받으며 키워낸 보석입니다. 그런데 큰 진주 문이 되도록 자랐다는 것은 무수한 연단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고난의 연단을 통하여 비로소 세상에 함부로 문 열어 주지 않고 주님에게만 열어줍니다(히5:8-9, 벧전3:5-6).

 

6. 보혈로서 꾸며졌습니다.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유리 같이 맑은 정금이라 했는데, 맑은 유리 같다는 것은 물두멍에서 씻었다는 것이고, 정금이란 연단을 거쳤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길은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는 거룩한 길이라 했듯(사35:8), 특히 양심이 깨끗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벧전3:21). 그러기 위해서는 보혈의 공로를 굳게 믿고 속죄의 확신으로 나가되(히4:16), 악한 행실을 회개함으로 더욱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히10:22, 시16:11).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3:12-13)

 

 

새 예루살렘의 은혜 (계 21:22-27)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왕국을 방문하고 크게 놀라 소문을 들었던 것은 사실보다 절반도 못 된다 했듯(왕상10:6-8),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우리가 듣고 상상했던 것보다 억만 배나 더 영광스럽고 복된 삶을 누릴 때의 감격을 상상해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사11:9, 합2:14),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은혜가 수천 미터 수심보다 더 압도적으로 다가올 때 영원히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새 예루살렘의 은혜는 어떤 것일까요?

 

1. 온전한 임재하심이 있게 됩니다.

 

22절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경은 천국에 성전의 원형이 있음을 말씀합니다(히8:5, 히6:20). 그러나 구약의 성전과 같은 형태는 볼 수 없었는데 그 원형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은 모두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을 모셨으니 새 예루살렘 전체가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행복이란 입술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말씀하면서 성부 하나님을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 하고, 예수님을 “어린양”이라 표현한 것은 그러기에 “주 하나님”에서 보듯 주인의 온전한 사랑과 배려, “전능하신 이”라 했듯 온전한 도우심과 은혜, 그리고 어린양 예수님이 보장하는 온전한 자유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그 온전하고 풍성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온전한 광명한 삶이 있습니다.

 

23절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새 예루살렘에 없는 것 또 한 가지는 해와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빛이시고(요일1:5, 사60:19) 그 영광이 비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숨기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는 빛의 세계로 어떤 슬픔도 어둠도 다 몰아내는 밝은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불사름을 말씀하시고 그 때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말씀하신 것은(마13:43),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마음속의 온갖 죄악 상처 불신 염려 근심 미움 등의 가라지를 성령으로 불살라 버려야 천국을 누리며 산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또 천국이 밝은 것은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은 대속의 은총을 강조한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슬픔과 고통과 저주를 다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밝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불이라 함은 성경의 별명으로(시119:105) 이 대속이 은총이 성경에 똑똑히 기록되었으므로 말씀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으라는 교훈입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24절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여기 만국이라 했는데 천국은 세상 나라가 출입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26절을 참고하면 만국과 땅의 왕들은 사람 즉 성도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국”과 “땅의 왕들”은 서로 보완적인 평행법 문장입니다. 본래 “만국”과 “땅의 왕들”은 나라를 지키고 또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배타적인 존재입니다. 두 가지가 겹쳤으니 더욱 배타적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 빛 가운데로 다니듯 내 뜻이 아닌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살고, 자기 영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듯이 전에는 나를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의 왕은 육신을 강조한 표현이지만 이제는 은혜를 받아 육체를 가지고도 육체의 욕망대로 살지 않고 몸을 드려 주를 위해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롬8:12-14).

 

4. 온전히 믿음과 사랑으로 삽니다.

 

25절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구약 예루살렘의 성문은 밤이 오면 닫았지만(느13:19), 천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문을 닫지 않습니다. 꿈에 예수 피 공로를 말하니까 천국 문을 열어주더라는 등의 말은 교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체험이고, 실재 천국은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믿고 누구든지 들어오도록 항상 열려 있는 곳입니다. 교훈적 체험을 감안하지 않고 잘못 보고 왔느니 가짜라느니 너무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이 신부된 우리라는 점에서 우리 마음의 문도 예수님을 위해(계3:20), 그리고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고전6:11-13). 은혜 받은 심령은 밤이 아니라 낮이기 때문에 밝은 마음과 얼굴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전도 여부는 결국 우리 마음의 문제였습니다(롬13:12-14).

 

5.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26절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본 절은 24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으로 보이지만 24절의 만국과 땅의 왕들이 사람을 가리킨다는 힌트를 주고, 또 다른 메시지를 위함입니다. 만국의 영광과 존귀라면 썩어질 것인데 왜 천성에 들여올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 사탄에게서 만국의 모든 것을 빼앗아(눅4:5-8) 아버지에게 드렸던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춘과 젊음을 내가 쓰지 않고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쓰는 독신자들의 경우 자기 몸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은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곳입니다. 그만큼 큰 은혜를 받았음을 시사합니다.

 

6. 온전히 생명적인 삶을 삽니다.

 

27절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이 말씀은 자주 듣던 성경의 중심적 말씀으로 이대로 믿습니다(요3:19-21). 한 편 새 예루살렘이 우리들 자신이라는 점에서 우리 마음이 어떤 악도 불신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도 됩니다. 여기에 열거된 것들은 우리가 전에 헛되게 살았던 생명적이지 못한 무가치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양이라 했으니 구원적이고, 생명책이라 했으니 생명적인 것만 마음을 통과시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기쁘신 뜻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아 배고파하시는 예수님의 삶과 같습니다(요4:34).

 

7. 성령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이제는 삶의 선택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내 가치와 내 감정 기준이었지만 이제는 생명의 성령의 인도와 감동이 더 중요합니다. 성령의 감동인지 내 감정인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성적 판단에서 나온 옳으냐도 좋지만 하나님의 듯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그 흐름을 명백히 느끼기 때문에 인도하심을 받지만 내 생각이 너무 강하거나 성령으로 크게 충만하지 못하면 잘 포착하지 못합니다(행16:6-9, 갈5:16).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는 열린 마음과 아울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넘치면 온전히 성령을 따라 살게 됩니다. 천국은 온전히 성령께서 주장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이 되고 생각만 해도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8. 생명수의 강이 넘쳐흐릅니다.

 

22장 1-2절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이 생명수의 강은 성령의 강입니다(요7:37-39). 소성강은 나아갈수록 더 깊었습니다(겔47:3-5). 아버지 보좌에서 시작되었듯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이 많아지면 은혜가 넘쳐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왔듯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 공로를 믿으면 성령이 은혜가 흐릅니다. 경배의 삶이 부족하거나 보혈을 믿지 못해 양심의 가책으로 답답하면 흐르던 은혜도 그칩니다.

 

그래서 소성강도 성전문에서 발원한 물이 방향을 돌려 제단을 감싸고 흐른 다음 다시 바깥문으로 흘러갔습니다(겔47:1, 슥13:1-2). 이 은혜의 비밀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새 예루살렘인 신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보혈의 공로를 온전히 믿고 자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8:2). 그런데 생명강수가 길 가운데로 흐릅니다. 길은 황금 길이니까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믿음으로 살면 우리 심령에 생명강수가 터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9. 생명나무의 열매가 있습니다.

 

2절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에덴동산 중앙에 있던 나무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요6:35). 생명과는 선악과를 먹은 후 금지되었지만 계2:7에 이기는 자에게 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에베소 교회가 사랑을 회복한다면 생명과일을 먹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로 열려진 눈이 하나님처럼 심판자가 되는 정죄의 율법적인 눈이라면, 생명과는 덮고 덮어 보지 않는 사랑과 용서의 복음의 눈입니다.

 

생명과가 달마다 열두 가지의 열매를 맺는데 달이 작은 월삭과 월망은 밤이 어두워 집 나갔던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입니다. 반가움과 사랑과 기쁨의 날이요 잔치의 날이요,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 같던 가족도 용서로 품고 받아주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달마다 한 번씩은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날입니다. 이는 천국에서 우리 아버지 앞에서 사랑 받는 그 복된 모습의 예표입니다.

 

그 열매가 12가지인데 12지파, 12사도가 의미하듯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과 진리의 열매가 열리듯 온전하게 되는 은혜를 가리킵니다(골3:14). 그러니까 12가지 생명과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영생하는 것도 행복한데 사랑하고 사랑 받고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지금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고 그 임재로 생명과 행복이 넘쳐납니다(요일3:14,23, 요일4:7,12-13,16,17-8). 그 복됨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0. 저주가 없습니다.

 

3절 “다시 저주가 없으며” "다시"라는 낱말에 전에는 저주로 많은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면 저주가 사라집니다. 아버지 사랑을 믿고 자기 비하하던 자조의 습관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양심의 자유를 얻으세요. 정죄의식으로 우리 심령이 결박을 당하면 사탄이 활개 쳐 온갖 저주와 시험의 원인이 됩니다. 복음을 모르거나 적용할 정도로까지는 몰라 율법의 저주 아래 살아갑니다. 회개 후에야 보혈을 믿겠다는 마음이 그 은혜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회개 전에도 보혈, 하면서도 보혈, 후에도 보혈 온전히 보혈을 믿고 사랑 받는 자녀의 자세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11.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새 예루살렘의 가장 높은 중앙에는 아버지와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보좌가 위치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진중에 여호와의 성막이 위치함과 같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중심, 그리고 어린양이라 했으니 복음과 진리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을 “그의 종들”이라고 호칭합니다. 그렇게 극진히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교만하면 마귀의 자식입니다(유1:6).

 

12. 화평 중에 살아갑니다.

 

4절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그것은 죄인으로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어 죽기 때문입니다(출10:2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케 된 자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마5:8). 그런데 얼굴을 볼 것이라는 말씀은 전에는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실 때는 얼굴을 감추시거나 돌리십니다(신31:18). 그러므로 얼굴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를 푸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민6:24-26). 우리 편에서는 그만큼 성령 받아 예수의 마음을 가져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고(고전2:16) 또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고전13:12). 성령 안에서 완전한 화평의 삶을 살아갑니다.

 

13. 온전히 예수 닮은 자로 살아갑니다.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여기서 이마는 인격의 표현입니다. 이름은 실체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이마에 예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가리킵니다. 얼굴만 봐도 하나님의 자녀, 목소리만 들어도 은혜 받은 성도인 것을 알게 됩니다. 계 13장에서 설명했듯 이마와 손의 666은 아직도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죄의 인격과 행위를 가리킵니다. 성령의 은혜를 크게 받고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이 아무리 보배로워도 성령 받은 사람만이 그 마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고, 그 때 애굽의 질병의 하나라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14.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5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여기 “다시 밤이 없겠고”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슬픔 죄악 고통 시련 미움 등 우리의 삶에 얼마나 밤이 많았습니까?(시30:5).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다고 한 것입니다(시97:11-12).

 

15. 권세와 권능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성령 충만하면 영적 권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세세토록”은 시간적인 용어지만 질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한 말씀입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 사랑을 믿고,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고, 늘 감사해서 찬양하고 살면 성령이 임해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와 은혜와 은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