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1장

에반젤(복음) 2022. 9. 17. 07:23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1장

두 증인 (계 11:1-14)

 

두 증인은 여섯째 천사의 나팔에 나오는 세 번째 삽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증인에 대해서 모세와 엘리야다, 모세와 엘리야의 정신을 이어 받은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종이다, 에녹과 엘리야다, 신구약 성경이다, 베드로와 바울이다 등의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2가 증인의 수요, 성령 권능 받은 자를 예수 증인이라 한 것 같이(행1:8) 모든 시대의 성령 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앞 계10:11에 “그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서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셨듯 사도 요한과 같은 권능 받은 복음전도자를 지칭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대로 계11:3에 두 증인이 “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계11:8에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한 말씀처럼 주님의 은혜를 입은 지상의 일군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증거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하는 신령한 사역자들입니다.

 

두 증인의 사역은 양육으로 사역으로 약 3가지로 구별이 되는데 먼저 3-8절에 율법과 선지자를 의미하는 모세와 엘리야적인 회개의 사역에 이어, 8-12절에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의미하듯 그리스도적인 복음사역, 그리고 13절에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으로 말미암는 이루어지는 변화의 사역으로 구별됩니다. 이런 3가지 사역이 두 증인이라는 인물로 연계성 있게 진행되는 스토리다 보니 혼란스럽게 느껴지지만 양육의 사역자는 회중의 수준이 각각 달라서 회개의 사역, 복음의 사역, 성령의 사역 이 3가지를 모두 감당해야 합니다. 양육 받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마치 엘리야의 심령과 모세 율법적인 성격을 가진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 인계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들이 오순절의 성령을 받아 변화되어 큰 역사를 이루는 사도가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두 증인이 나타난 것은 앞의 두 삽경에서 보듯 복음의 나팔과 성령의 부흥을 경험하고도 아직도 무지와 미련함과 완악함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타락한 심성을 암시하는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14:6)에게 다시 예언해야 하는 계속적인 사역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계10:11). 즉 이루신 그리스도의 복음과 오순절의 강한 은혜로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하고서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된 줄로 알지만 그들은 아직도 교회를 통해서 말씀과 성령으로 지속적으로 양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점검하라 (계 11:1-2)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두 증인의 사역이 나타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목자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양떼들의 신앙을 측량하라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해 듣고 성령으로 큰 변화를 경험했다고 해도 아직도 너희들은 말씀과 성령 안에서 양육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신앙을 점검할까요?

 

1. 말씀으로 점검합니다.

 

1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요한에게 측량하라고 하신 대상은 성전의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측량도구로는 지팡이 같은 갈대입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길이를 재는 잣대가 합해진 개념입니다. 옛날 목자들이 양들을 지팡이 아래로 통과시켜 수효를 세었는데(레27:32),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양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하나하나 점검하라는 말씀입니다. 양적 부흥도 좋지만 질적인 부흥도 병행해야 합니다.

 

2. 성전으로 점검합니다.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얼핏 보면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라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씀입니다. 성전과 제단은 구속의 진리를 표현해 놓은 곳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준비되는 곳으로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머물렀느냐에 따라 그 영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속죄의 번제단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님이 나의 구주되심과 나의 죄를 담당하심을 믿는 과정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이 기초조차 닦지 못하고 사탄의 참소로 양심의 고통 속에서 산다면 이 과정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전 입구에 있는 놋바다 즉 물두멍은 말씀 안에서 회개하며 죄를 씻는 과정입니다(요15:3). 보혈의 공로를 알아도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면 그 영적 수준이 번제단과 물두멍 중간 쯤 위치해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롬12:2).

 

그리고 성전 안에는 떡상과 분향단과 등대가 있습니다. 이처럼 떡상을 통해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은 얼마나 하고 있는지, 분향단을 통해서는 기도의 생활은 어떠한지, 등대를 통해서는 얼마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또 세상에 빛이 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면서 더 완전함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히6:1-2).

 

3. 경배함으로 점검합니다.

 

그리고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씀에서도 신앙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안의 은혜를 진정 아는 사람만이 온전한 경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르는 것을 예배했지만 신약성도는 아는 것을 예배함과 같습니다(요4:22). 찬송과 기도소리만 들어도 그의 영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감사와 찬양의 분량이 더 많을 것이고 소리 높여 더욱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4. 삶으로서 측량합니다.

 

2절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성전 담장 밖의 바깥마당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곳은 교회를 출석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아직 믿음이 없어 이방인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곁으로 가까이 와 교회의 양육을 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고 있는 예비후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5. 신앙고백으로 측량합니다.

 

2절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역사상 예루살렘이 42달의 기간 동안 짓밟힌 적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마흔 두 달이 지나면 짓밟힘이 끝날 것이라는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마흔 두 달은 3년 반으로 제자양육의 기간의 상징입니다. 이 양육 기간이 다하던 어느 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신앙고백을 했듯(마16:16-17) 이제는 이방인의 신분이 끝나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성이란 하나님을 모신 성이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거처라는 점에서 거룩한 성을 짓밟는다란 그동안 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믿음이 없어 이방인처럼 살았음을 시사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바로 양육이라는 점에서 그 필요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딛2:11-13, 딤전4:6-8).

 

 

두 증인의 사역 (계 11:3-6)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두 증인에 대한 환상은 목회자의 양육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앞의 2절에 말씀했듯 마흔두 달 동안에 불신자를 신자 만드는 일을 두 증인이 담당합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두 증인이 천이박육십일을 예언하리라 한 것입니다. 양육사역이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듯(갈4:19)) 믿음의 말씀으로 양들을 기르는 것인데(딤전4:6), 성령의 도우심으로 양육의 은혜가 나타나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고 나아가 세속을 버리고 의롭고 경건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딛2:11-13, 딤전4:5).

 

구체적으로 양육의 은혜는 무엇일까요?

 

1. 내가 먼저 양육을 받는 것입니다.

 

3절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율법에서 둘이나 셋은 증인의 수입니다(신17:6, 마18:16, 눅10:1). 증인은 법정적 용어로 사실을 증거해야 하는 중대한 임무가 있습니다. “나의”라는 소유격을 붙인 것은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의 자격과 같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보고 듣고 몸에 배도록 경건훈을 받고(행1:21-22), 다음은 성령의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행1:8).

 

2. 양떼를 맡아 다스리는 은혜입니다.

 

권세를 주리니”, 이 권세는 먼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하신 것처럼 목자로 세워 교회와 양들을 맡겨주심을 가리킵니다(요21:15-17). 벧전5:2에 “너희 중에 있는 양무리를 치되” 하셨습니다. 양무리를 친다는 것은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목회적 권세, 지도적 위치를 허락해 주지 않고 어떻게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순복하라고 권면합니다(벧전5:5).

 

3. 양육의 은혜는 눈물과 기도입니다.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굵은 베옷은 슬픔과 회개를 상징합니다(렘4:8, 욘3:5 왕상21:27, 사22:12, 마11:21). 목자로서 죄인들의 구원과 변화를 위해 마음을 찢고 부르짖음을 가리킵니다(히13:17).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말씀과 모본과 삶까지 터치하는 섬세한 지도를 의미합니다. 같은 기간인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3년 반, 마흔 두 달, 천이백육십 일 등 표현이 각각 다른 것은 용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중 1,260일은 양육을 강조한 표현으로 양들을 향한 섬세하고 자상한 돌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히3:12-13). 예수님께서 3년 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제자들을 양육해 주셨듯이 먼저 양들로 예수를 주로 믿어 구원 받게 하고 나아가 그들이 또 다른 두 증인이 되게하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남기신 십자가요 양육사역입니다.

 

4. 양육의 은혜는 기름부음의 은혜입니다.

 

4절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슥 14장을 배경으로 한 말씀으로 이 땅의 주란 제국을 거느린 왕에게 돌려진 표현인데, 슥4:14에서는 “온 세상의 주”라 하여 지상의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재건하실 하나님께 돌려진 명칭입니다. 본문의 “이 땅의 주”는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땅이라 암시하듯 육에 속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요14:16)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 표현입니다(마24:18).

 

그래서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에 비유합니다. 감람나무는 성령의 기름을, 촛대는 교회를, 둘은 증거의 수요, 그리고 주 앞에 서 있다는 것은 성전에서 서서 섬기는 제자장들을 연상시킵니다. 마치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영적부흥을 일으키던 스룹바벨 총독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순금 등잔대 위의 일곱 등잔과 감람나무의 두 가지로 비유한 것처럼(슥4:2-3), 기름부음 받아 신앙을 일으키고 교회를 일으킬 두 증인을 가리킵니다.

 

5. 양육의 은혜는 회개를 외치는 사역입니다.

 

5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이 말씀은 악과 싸우다 아하시야 왕의 보복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불을 내려 엘리야를 도와 보호하신 사건인 왕하 1장이 그 배경입니다. 악과 타협하지 않는 담대한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양육사역은 악과 맞서는 사역입니다. 청중과 타협하여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역이 아닙니다(갈1:10). 달리 말해서 능력 받아 회개를 외치는 사역입니다. 회개를 외치는 세례요한의 입에서 물리적 불은 보이지 않앗지만 아무도 저항 할 수 없는 불 같은 메시지를 봅니다.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에서도 느끼는 바입니다. 진리를 가차 없이 증거하여 회개케 해야 합니다.

 

6. 예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사역입니다.

 

6절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이 엘리야적 사역의 모범자는 세례요한입니다(마11:14). 여기 하늘의 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개의 말씀을 전하니 죄인들이 정죄감에 은혜가 그칩니다. 그러나 일단은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깨달아야 그리스도 앞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가 된 것입니다. 엘리야의 3년 반은 예수님의 3년 반을 예표한 사건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이적도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한 메시야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요20:30-31).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온전히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7. 죄인들을 세속에서 구해내는 사역입니다.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 역사는 모세의 사역을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바울의 구속사적인 해석과 같이(고전10:1-4) 모세를 통한 애굽의 10재앙 역시 우리가 세상 미련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심경 변화의 과정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 목적이 출애굽이었듯이 전도자의 말씀은 죄인들로 하여금 세속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오게 하는 메시지여야 합니다.

 

8. 양육의 은혜는 복음적 신앙에 세우는 사역입니다.

 

7절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이 짐승은 계 9장에서 탐욕의 황충을 가리킵니다(계9:1-11). 그 승리적인 사역을 한 두 증인이 그것도 다름 아닌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게 왜 죽다니, 그러나 세례요한이 그랬습니다. 그의 사역이 마쳐지자 동생의 여자를 탐한 짐승만도 못한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회개와 믿음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율법의 과정을 이수하게 했다면 이제는 양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앙에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9. 예수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세우는 사역입니다.

 

8절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여기 큰 성 길은 세상길을 말합니다. 요나가 사흘 길을 걸어갔던 니느웨성을 큰 성읍이라 했고, 세상의 상징인 바벨론도 큰 성입니다. 그만큼 거대한 배교가 있었습니다(마7:13-14).

 

그런데 두 증인의 시체가 그 큰 성 길에 있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순교지만 성도는 예수와 함께 세상에 대해서도 죽은 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갈6:14, 벧전2:24, 롬6:11). 그러므로 죄와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처럼 상관하지 말고 의로서만 반응하고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8절에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세상을 이렇게 오묘하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까? 큰 성(바벨론) = 소돔 = 애굽 =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그렇다면 이 큰 성은 바로 타락하고 죄의 종살이하고(롬6:17-18)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 가에 시체가 있었던 것럼 우리들도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요 세상도 우리에게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죄와 관련하여서는 시체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롬6:11).

 

10.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시키는 사역입니다.

 

9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체를 장사하지 못하게 한 기간이 바로 사흘 반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 제 9시 즉 오후 3시에 운명하셨고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으니까 무덤에 있던 시간이 40시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시간적으로는 사흘입니다. 여기는 사흘을 가득 채우고도 더하기 반날입니다. 그것은 사흘이니까 3은 완전수요 예수님의 고난의 상징이 되면서 또 반은 보충수라는 점에서 온전한 죽음을 상징합니다.

 

9절의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 사람들은 바벨탑 이후의 사람들처럼 다각도로 타락한 우리 인간의 악한 속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장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두 증인에게 증오를 품었다는 의미이지만, 이 모습을 신앙에 적용하면 예수와 함께 옛사람이 죽은 복음을 알면서도 완악함 때문에 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의식적 세례가 아니라 어떤 시험이 와도 온전히 나를 죽은 자로 인정하는 장사 지냄, 즉 이제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산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골2:12, 갈2:20).

 

11. 율법에 대해서도 죽은 자로 세우는 사역입니다.

 

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모세가 열 재앙으로 땅의 사람 바로 왕과 그 나라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도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함으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땅의 사람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왕상18:17).

 

이처럼 "땅에 거하는 자"란 아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신에 속한 마음을 가리킵니다(계14:6). 그런데 여기서 두 선지자로 호칭이 바뀝니다. 그들이 왜 괴로워했는지 모세와 엘리야처럼 죄를 책망하고 정죄하는 면 때문입니다. 땅에 사는 자들이 괴로움을 느꼈듯 율법 아래에서 정죄와 저주와 진노의 고통은 큽니다. 그럼에도 잠시 허락하신 것은 복음의 은혜를 누리기 전에 이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고통과 저주를 아는 자는 10절처럼 이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낼 정도로 감사한 일입니다. 부림절에서 보듯 예물을 보냄은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율법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롬7:4).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나셔서 대신 죽어 주셨기에 이제는 율법이 나를 정죄할 수 없고 무거운 짐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그런 질문을 예상하여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롬6:2) 했고, 롬6:15에서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은혜 아래 살면 성령의 은혜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롬8:1-4, 고후3:18). 그러므로 율법의 정죄를 알게 함과 아울러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건져내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12.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세우는 사역입니다.

 

11절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3일 반이란 완전수 3에 반은 보충수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죽어야 살아납니다(롬6:3-5).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믿음을 견지함함과 성령의 은혜로 온전히 죽어지면 그만큼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13. 양육사역은 경건한 자로 만드는 사역입니다.

 

11절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발은 행함의 상징이요(히12:13), 강함의 상징이요(계1:15), 승리의 상징입니다(수10:24). 이처럼 예수 안에서 부활한 자임을 믿고 그 진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두 선지자가 살아나 일어서자 구경꾼들이 두려워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두려워한 자는 예수님을 못 박은 자들입니다. 달리 적용해 보면 오순절에 그랬듯 성령이 임하면 못 박던 자나 구경꾼이 변하여 경건한 자가 됩니다. 두 증인과 구경꾼들을 포함한 이 모든 사건이 결국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는 우리를 의롭고 경건한 자로 만들어줍니다(고후5:17, 빌3:10-12).

 

14. 양육사역은 하늘에 속한 자로 만드는 사역입니다.

 

12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이 큰 음성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크게 외치신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드디어 해냈다 하시는 축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구름을 타고 올라감은 예수님의 승천을 연상시킵니다(행1:9). 성도는 복음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자들입니다(엡2:6, 빌3:20, 골3:2-3). 이 사실을 믿는 자를 성령께서 누리게 하심으로 이제 땅에 속한 나는 사라지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원수들이 구경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아직도 이 복음을 믿음으로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는 구경꾼의 속성이 남아 있다면 온전히 십자가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15. 양육사역은 성령부흥을 일으키는 사역입니다.

 

13절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우리 마음에도 지진이 일어나야 합니다. 흙은 인간의 근본이듯이(창3:19)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 즉 회개의 역사입니다(행2:37). 마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기다리라 분부하셨고 승천 후에 성령강림으로 각인의 심령에 대변혁이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행2:33). 이처럼 예수님의 분부대로 열심히 기도하면며 경외생활하면 이런 변혁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16. 양육사역은 온전히 주님의 사람을 만듭니다.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큰 지진이었다면서 절반도 아닌 10분의 1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단순 접근은 지양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은 우리 마음을 비유하는데 쓰였습니다(잠16:32). 성은 내 주장 내 감정 내 뜻대로 하려는 완고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10분이 1이 무너졌다는 것은 10 숫자의 의미가 파괴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10은 구비수나 만수이듯 내 생각 내 감정 내 주장으로 가득했는데 내가 주가 되어 살던 완악함이 무너지고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는 자로 바뀝니다(딛2:14, 롬14:7-8, 고후5:13-15).

 

17. 양육사역은 남은 자로 만드는 사역입니다.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대 지진인데 죽은 사람이 7.000이었습니다. 7.000에 대한 성경의 용례를 찾아보면 왕상19:18에 이스라엘 가운데에 남기신 칠천이 나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칼날에 무릎을 꿇지 않고 숨겨진 남은 자입니다(사1:9). 7이 사역의 완전수요, 1.000이 충만수라는 점에서 부흥의 불씨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쓰일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에는 7000을 살려주셨는데 계시록에서는 반대로 죽은 사람이 7000입니다. 반대인 것 같지만 진정 죽어야 살기 때문에 문제점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롬11:5에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한 것처럼 먼저 은혜를 깊이 받아 남은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18. 양육사역은 감화 감동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사역입니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이들은 지진에 살아남은 자들이기도 하지만, 두 증인을 미워하고 박해하던 자들입니다. 나팔재앙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던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영광을 돌림과 같이 양육사역이 계속됨에 따라 성령의 감화 감동의 은혜로 우리에게 잔존해 있던 완악한 마음들도 자발적으로 순복하기 시작합니다(히12:28-29).

 

19. 양육의 은혜는 영원한 소망의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하늘의 하나님이라 했는데 이는 앞의 11:4의 "이 땅의 주"와 상반된 개념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 부르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지상의 예루살렘과 성전이 훼파되어 땅의 것을 상실했을 때입니다(느2:4, 단2:44). 그들의 범죄로 하나님이 임하신 땅의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동안 우리 신앙이 땅에 것만 구하는 즉 하나님을 땅의 하나님으로 삼았다면 이제는 하늘 위에 있는 영원한 것을 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상을 받으려는 자는 더 깊은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나님 나라에 있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양육사역의 높은 목표입니다. 양육사역은 구원 안에서 자라가게 하는 사역입니다(딛2:11-14, 딛3:5-6).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계 11:14-19)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6.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여기서부터 셋째 화에 대한 것입니다. 셋째 화의 목적은 15절과 18절에도 나오듯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다루었듯 “화”는 문자 그대로의 화가 아니고 구약 예언서의 여호와의 날처럼 궁국적으로는 악이 심판을 받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가리킵니다(말4:1, 욜2:30-31). 

 

주님의 재림으로 세상 나라가 무너지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온전한 나라가 오듯 우리 각인의 마음에도 성령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세상 나라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을 보면 겨자씨와 같은 믿음의 초기가 아닌 누룩이 가루 서 말을 온전히 부풀게 하듯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주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직 내가 살아있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배의 삶이 부족했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이 미흡했습니다(눅6:46). 그러나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면서 그 감화력에 의해 온전히 변하게 되어(롬12:2), 하나님께서 온전히 통치하시는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눅17:20-21).

 

하나님의 나라 임하심에는 그 특징이 있습니다.

 

1. 회개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14절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둘째 화가 무엇이기에 셋째 화가 이토록 속히 이를까요? 15절을 볼 때 셋째 화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임을 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르는 방법은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 4:17)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째와 둘째의 기초가 잘 닦이고 분량도 차야 합니다. 즉 황충에서 세속정욕을 내 영혼의 원수처럼 여기고 멀리하고, 유브라데 네 천사에서 기도 분량이 차고, 작은 책을 가진 힘센 천사에서 말씀의 분량이 차고, 그리고 두 증인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양육을 받아 예수의 죽으심과 사심을 믿어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고 마음의 의식까지도 변화를 받아 성화적으로 변화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강하게 임합니다.

 

2. 온전한 복음의 나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15절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하늘에 큰 음성들이 복수형으로서 여러 천사들의 음성들일 가능성이 크지만, 큰 음성의 복수형은 어떤 하늘의 감화력을 시사합니다(계10:4). 일곱 번째 나팔의 7 역시 온전한 나팔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요1:1:14, 살전1:5, 막16:20) 복음의 나팔이 되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릅니다(요10:3-5).

 

우리의 메시지가 하늘의 큰 음성과 같이(계11:15), 힘센 천사의 외치는 소리와 같이(계10:1-4), 혹은 보김에 온 여호와의 사자와 같이(삿2:1-5), 재림 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같이 능력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하늘의 소리와 같은(살전4:16) 소리를 발할 수 있다면 제 2의 오순절을 우리의 현실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늘 성경을 묵상함으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시1:2-3).

 

3.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실 때 임합니다.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여기 세상은 '코스모스(κοσμοs)'로 '세상, 천하, 창세, 우주, 세계, 세속, 단장'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지구이지만 성경의 용례로는 사탄의 영향력이거나 사탄이 지배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세상 나라의 대적질은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극치를 이룹니다(시2:1-3).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신 승천으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선물로 부어주심과 같이(행2:33) 똑 같은 원리로 우리가 하나님을 주와 왕으로 높이고 순종하고 사랑할 때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행5:32). 반면 성령으로 시작했을지라도 내가 주장하고 왕 노릇하고 교만하면 사탄의 영이 임합니다.

 

4.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한 자에게 충만하게 임합니다.

 

15-16절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구원 받은 자들의 대표인 24장로들의 모습에서 겸손을 봅니다. 보좌는 높은 위치이고 땅은 가장 낮은 위치로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한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빌2:5-11, 빌1:20-21). 내 주장, 내 영광, 내 자랑, 내 감정, 내 이름이 나타나지 않게 근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약4:6).

 

5. 하나님의 나라는 경배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16-17절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여기 “경배”라는 용어는 천국적인 용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되 천국과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하나님을 높이는 경배자들로 인해 유지되고 확장되고 위대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며 해와 같이 밝은 얼굴로 날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마13:43). 천국보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렇게 섬긴다면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눅15:7).

 

6. 온전히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17절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하시도다” 과거와 현재를 언급함을 보아 감사의 범위가 넓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적에도 계신 하나님을 언급함은 만세전에 선택하신 은혜와 아울러 옛적 선한 길에서(렘6:16) 하나님과 동행했던 거룩한 선지자들이 연상됩니다(겔28:13, 렘애5:21, 시78:12-13, 히1:1).

 

그리고 지금도 계신 하나님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후6:2)했듯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신 하나님을, 또 전능하신 이라 했듯 천지를 창조하시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을, 그리고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하시는 하나님에서 우리에게 능력으로 임재하신 성령 하나님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과거나 현재나,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체험되거나 체험되지 않거나, 큰 문제이거나 작은 문제이거나 상관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 말씀의 약속을 믿고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빌4:6, 시50:23). 천국은 믿는 대로 되는 나라이기에 불신의 입술과 행위로는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없고 온전한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7. 기도와 찬송에 힘쓸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18절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암행어사 출두를 연상시키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방의 만행에 더 이상 침묵하시지 않고 드디어 나타나셨음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진노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시고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이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날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강림과 재림을 가리키는데 즉 초림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녀가 되었고, 성령 충만함을 입음으로 삶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산 자아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영육 간에 영원히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도 자세히 보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나타납니다. “죽은 자”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와 같은 부류로서 불신자 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대적하거나 성도를 시험에 빠뜨리는 자들이고, 산 자에 대해서는 구체적 표현은 없지만 대비적 표현으로 볼 때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 산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했듯이 초대교회처럼 기도와(행1:14) 찬송에(눅24:53) 힘쓰되 상 주실 만큼 하시기 바랍니다. 일상을 넘어 더 열심히 경외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비밀이요, 그 때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셔서 모든 악을 척결해 주시고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계층의 다양함처럼 자신이 받은 여러 은혜를 기억하며, 혹은 그 계층이 암시하는 바대로 받을 은혜를 온전히 감사하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약1:9-10). 그리고 재림 혹은 성령이 임하시는 날을 암시하는 "멸망시키실 때”는 주님의 때로서 일반의 때와는 다릅니다(요2:4, 7). 그러므로 믿음의 분량, 기도의 분량, 예배의 분량, 감사의 분량, 사랑의 분량, 겸손의 분량 등이 차기를 기다리십니다(시50:22-23). 예루살렘 교회의 10일간의 기도 역시 10은 다 차는 만수입니다.

 

8.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누리고 유지하는 법도 알아야 합니다.

 

19절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24장로들의 찬양이 끝나자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그 안의 모습과 현상들이 보입니다. 이 말씀은 24장로들의 찬양에 대한 결과이거나 화답이기도 한데 참으로 특이한 모습입니다.

 

먼저 천국에는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이 성전이시기에 성전이 없는데(계21:22) 무슨 하늘 성전일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이 갈라졌는데 왜 이제 열릴까요? 더구나 구약 성전의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이것 역시 문자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고 이 모습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볼 때 마음의 지성소가 열리는 것과 같은 믿음의 현상을 가리킵니다. 지성소가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양심의 거리낌이 사라졌습니다. 이젠 보혈의 공로를 굳게 믿음으로 의로움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화목한 마음으로 정죄감 없이 양심의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믿음이 생겼습니다(롬5:1)

 

다음은 죄가 가로막았는데(사59:1) 예수의 육체의 죽으심으로 휘장이 사라졌듯(히10:20) 예수 공로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물인 우리 옛사람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평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사랑 받는 자녀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마음 가지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섬기며 의롭다 함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주신 신분의 그 영광의 소망을 누리는 데까지 나아가시기 바랍니다(롬5:1-2, 딤후2:10).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한 언약문인 십계명 돌판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은 자녀의 언약이요 신부의 언약이요 백성의 언약입니다. 즉 이 계명대로 살면 내 백성이지만 범하면 아니라는 것입니다(고후6:16-18). 신약에서 언약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보였듯 예수 믿었으니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요 신부라라는 당당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수준에서 이런 믿음도 있습니다.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보였는데 이는 율법을 수여하실 때 시내산의 두려운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사실 천국은 그런 두려운 곳이 아닙니다(히12:22). 다만 이 현상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의 성전에서 형성되어야 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인 경건함과 두려움이 존재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 은혜는 어쩌면 사람이 누리기에는 너무나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체험했지만 자만하여 유지하지 못하거나 교만하여 잘못된 길로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을 알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죄 짓지 말고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뒤돌아 보지 말고(빌3:13-16), 믿음 지키며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히12:28-29). 이 마음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복되고 안전하며 우리에게 능력으로 임한 천국은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