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6:1-14)
중국의 고전 [장자](莊子)에 “물고기의 즐거움”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와 혜자가 다리 위에서 물속의 물고기들이 노니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장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물고기들 참 한가로이 노니는 구나.” 혜자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저 물고기들이 한가로이 노니는지 바쁘게 먹고 살려고 하는지 어찌 아는가?”
장자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어찌 아는가?” 혜자가 말하기를 “나는 자네가 아니니 실로 자네를 모르네. 자네도 실로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 맞지 않나”
장자가 말하기를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세, 자네가 말하길 네가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 라고 한 것은 이미 내가 그것을 안다고 여겨서 물은 것이네” “나는 다리 위에서 그것을 알게 됐다네”
혜자는 물 밖에서 물 속 일을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물고기가 아니기 때문에 물고기를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장자도 이 점은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혜자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물 밖에 있는 사람이 물속에 있는 물고기와 교감을 통해 하나가 된다면 비록 사람이 물 밖에 있고 물고기가 아니라도 사람이 물고기를 알 수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안다는 것”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안다고 할 때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만으로 알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대상에 관해서만 알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대상과 교감을 통해서 하나가 될 때 우리 입장만이 아니라 그 대상의 입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뛰어넘어 더 넓고 많은 정보를 추론하여 그 대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안다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표현합니다. 하나는 “I know you”입니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라는 뜻입니다. 당신과의 교감을 통해서 당신을 알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I know of you”입니다. “나는 당신에 관해서 압니다.”라는 뜻입니다. 그저 내 입장에서 당신에 관해서 들어서 알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에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게 됩니다. 이럴 때 “I know God”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럴 때 “I know of God”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을 예언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심판의 예언 중에 중요한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로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입니다. 7절, 10절, 13절, 그리고 14절에 네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반복해서 재삼재사 확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선민으로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사실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알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며 살면서도 사실 하나님을 모르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알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하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을 아는가? 그저 하나님에 관해서 알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본문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책망한 이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하신 구체적인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1. 산당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있는 산당 때문에 진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산당이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던 그들의 산신당을 말합니다. 가나안 땅 곳곳에 이런 산당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에 이런 산당들 가운데 몇몇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브온 산당에는 하나님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과 사울도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짓기 전에 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 산당에 가나안 족속들이 우상을 섬기던 풍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산당들에서는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있었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산당들에서도 우상을 섬기던 풍습이 은연중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혼합이 일어날 소지가 많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진 뒤에도 이스라엘 땅 곳곳에 산당들이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고, 또 우상도 더불어 섬기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이 하나님과 우상을 혼합해서 섬기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당을 철저하게 제거하지 못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뒤에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됐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에게 농사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농사법을 가르쳐 주면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강조했습니다. 농사를 주관하는 신은 바알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저들이 이점을 단호하게 배격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바알신을 배격하고 산당을 제거하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산당 제사도 그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 혼합주의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그 인생에 산당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지하철이나 백화점, 극장과 대학가, 그리고 길거리와 인터넷 등에서 역술과 점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무당과 달리 깔끔한 이미지로 까페 같은 분위기 속에서 마치 게임처럼 점을 보게 하고 있습니다. 점을 보는 것을 하나의 새로운 문화 트렌드처럼 만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술을 하나의 기업화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나라의 역술인들이 45만 명이 이르고, 점과 역술로 쓰는 돈이 무려 4조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점과 역술에 대한 영적 경각심이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장난삼아 점보는 대열에 참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 다니며 점을 본다든지, 조상에게 제사한다든지, 고사를 지낸다든지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인생에 산당을 그대로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인들 가운데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를 의식해서 절에 가서 예불도 드리고, 성당에 가서 미사도 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시 그 인생에 여전히 산당을 그대로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힘 있는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의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시 그 인생에 여전히 산당을 그대로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그 어디에도 어떤 형태의 산당도 남아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산당들을 철폐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서 살아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속상하게 해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그것이 여호와를 모른다고 책망을 받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양은 8살 때부터 미국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브람스 협주곡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20세가 되도록 한 번도 이곡을 연주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스승인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20세가 되어서 연주하도록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조건을 걸었습니다. 예전에 알고 있던 브람스를 완전히 잊고 브람스의 생애를 깊게 살펴보고, 브람스의 마음을 헤아린 후에 연주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브람스는 베토벤을 아주 존경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첫 번째 교향곡을 쓰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의 곡이 너무도 위대했기 때문입니다. 1860년대에 1악장을 썼다가 1876년에 가서야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했습니다. 브람스 안에는 베토벤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라 장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런 작곡가 브람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곡가의 마음을 연주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 작품을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었고, 명연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음악을 연주할 때도 단지 악보만 보고 연주하면 훌륭한 연주가 될 수 없습니다. 작곡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연주에 담을 때 훌륭한 연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 지킨다고 훌륭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는 것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상을 싫어하시는데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상하셨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철저하게 끊어야 하겠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그 일을 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잘 알며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그토록 여러 차례 경고하시고 말씀하셨지만 저들이 경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말씀을 두렵게 생각하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재앙을 당하게 됐다는 말씀입니다. 그제서야 그 말씀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이었던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은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삼성 그룹은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포춘지의 발표에 의하면 전세계 글로벌 기업 중 40위에 해당되고, 총매출을 국가와 비교해도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보다 높은 180개국 중 35위에 랭크될 정도입니다. 이 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선친인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그룹을 물려받은 뒤 무려 15배 이상 회사를 키웠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놀라운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얼마 전 출판된 [이건희]라는 책을 보면 그 비결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삼성에 첫 출근하던 날 아버지가 “경청(傾聽)”이라는 휘호를 하사했답니다. 그 휘호를 사무실 벽에 붙여놓고 늘 마음에 새기고 지켜갔답니다. 이 경청이라는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이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많이 듣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인 삼성 그룹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특히 삼성은 정보 수집력에서 국가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남의 말을 경청하는 훈련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청의 능력이 삼성을 이 정보화 시대에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경청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말하기 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잘 듣고, 그 의미를 깨닫고,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나아가 그 말씀을 잘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을 흘려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때늦은 후회를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알면서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면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안에 남아있는 산당들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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