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장별강해 (송석산 목사)
네 생물이 주는 교훈
겔 1:4-28
조그마한 참새라 할지라도 창공을 힘차게 날아다닐 수 있으나 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물고기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것은 강하게 흘러 내리는 물살을 거슬러 나아갈 수 있으나 죽은 것은 물길을 따라 떠내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살아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성숙한 신앙인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의 얼굴 에스겔이 환상을 통해 본 생물의 모습에 대해 가장 먼저 '사람의 얼굴'을 묘사한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합니다. 인간은 마땅히 만물의 주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성도는 자신을 만물의 주인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세를 늘 갖고 있어야 합니다.
2. 사자의 얼굴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불리워집니다. 이 말은 어떤 짐승도 사자와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자는 승리를 상징합니다(창49:8,9) 성도가 죄와 싸우는 것은 받은 구원을 든든히 붙잡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개 때문에 성도는 사자와 같이 항상 승리하는 생활을 하도록 신앙의 무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3. 소의 얼굴 소는 구약 시대에 속죄제의 제물로 사용된 짐승입니다. 속되제는 인간이 하나님과 사람앞에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를 위해 소가 염소나 양과 함께 제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다른 짐승들 보다 정결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자신을 ㅇ하나님께 온전한 희생 제물로 바칠 때 온전 삶을 살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4. 독수리의 얼굴 독수리는 날짐승의 왕으로서 창공을 힘차게 높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독수리가 날로 새롭게 되는 신앙과 관련해서 언급됩니다(시103:5) 성도는 하나님의 생명 곧 부활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피조물입니다(고후5:17) 우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어린아이와 같던 제자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갔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중 어느 하나가 결핍되어도 결코 성숙한 신앙인, 승리하는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권능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할 때 만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날마다 승리하며 새로워지는 신앙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는 일에 전심 전력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사명
겔 2:1-7
기독교가 무엇인지 정의를 한다는 것은 어머니가 무엇인지 정의를 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부르심을 받은 자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영어에서 '듣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경청하다' 이며 다른 하나는 '(막연히)듣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을 의미없이 막연히 들을 것이 아니라 경청해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은혜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체험한 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그런 상태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패역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패역한 백성'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일차적 사명이 이방인에 대한 저도가 아니라 이전에 하나님을 믿었으나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들을 돌이키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보다 최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에게 관심을 나타내셨습니다(마10:6).
3. 패역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큰 오점 중 하나는 일제 치하에서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총회기간 중 일본 순사들이 총회장 안팎에서 총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두려워서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고 하니 너무도 수치스럽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성도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패역한 자들을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 곧 성령을 받았습니다(롬8:15).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성도여러분 !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현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하심을 믿었기에 객관적인 전려에서는 월등히 강한 가나안 족속들을 상대로 담대히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런 확신가운데서 끊임없이 닥쳐오는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이기도 엄청난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것 이전에 자신 속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체험을 갖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파수꾼의 사명
겔 3:16-21
우리 국민들은 김신조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김신조와 그의 일당이 북한에서 남파되어 서울 중심가를 활보할 동안 검문 검색 한 번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체포된 후 고백한 사실 중 충격적인 것은 파수를 보았던 군인들이 한결같이 그들의 임무를 태만히 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파수꾼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한눈을 팔지 않아야 합니다. 옛날 소를 가지고 밭갈이 할 때는 소가 밭을 가는 동안 주위의 풀을 뜯지 못하도록 망을 씌웠습니다. 만일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으면 소가 풀을 뜯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 다니게 되어 고랑이 비뚤어지게 됩니다. 파수를 보는 군인이 자기에게 부여된 경계 지역에서 눈을 떼고 엉뚱한 짓을 하게 되면 적군의 공격을 알 수 없어 그를 믿고 편히 쉬는 자들에게까지 피해를 줍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볼 때 대적이 공격해 와도 능히 대처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2. 발생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옛날 성을 지키던 파수꾼은 성벽 위에서 가시 거리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발생한 일들이 성에 위협을 주는 것인지 아닌지를 파악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사탄의 궤게를 잘 판단하기 위해서 신앙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훈련을 받은 성도는 유능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3. 위험이 올 때 모든 백성에게 그 사실을 반드시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양치기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소년은 양을 치다가 너무도 심심하여 거짓으로 늑대들이 양떼를 공격한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서둘러양떼가 있는 곳으로 왔으나 늑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실을 그대로 알였지만 사람들은 믿지를 않았고 큰 피해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위험이 닥치는 줄 알면서서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만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20절). 우리가 이사실을 명심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 파수꾼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도록 힘서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지금까지 파수꾼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해 왔습니까? 우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파수꾼의 직무를 게을리 한다면 우리의 교회는 병들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 한사람 나쁜 짓을 한다고 해서 다른 성도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기진 성도로 인해 교회는 서서히 병이 들어 마침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으며 권면하는 일은 교회 지도자나 몇몇 열심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의 파수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성실히 신앙훈련을 받는 그리스도의 파수꾼이 될 때 우리 자신뿐 아니라 교회도 살고 가정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겔 4:1-17
불교의 중요한 교리 중에 인과응보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주어지며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범죄한 유다 백성을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하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 심판의 징조가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때를 언급하시면서 심판의 징조가 먼저 있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향한 징조를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때는 그 전에 반드시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불교는 인과 응보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치나 기독교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사유하심을 받을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징조가 보이면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2. 그 심판의 때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시점에 대해 ' 그날 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심판의 때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이 그때를 이미 결정해 놓고 계시고 있으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도 오묘한 경륜 가운데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악에 대해 필이 징계를 받기 마련임을 믿고 범죄한 자리에서 하나님게 회개함으로써 그 심판과 징계를 면해아 할 것입니다.
3. 심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발동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징계를 하심은 그런 사람에 대해 끝까지 참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따른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이스라엘 족속의 좌악의 날 수를 말씀하시면서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그 날 수대로 상징적인 행동을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의 날 수를 정확히 아시며 또한 그에 상응하는 징계를 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그들의 일시적 악행에 대해 용납해 두셨으나 그 악행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공의를 방동시켜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후 선지자 나단의 질책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위대한 신앙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비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악을 행했을 때 하나님앞에 회개할 수 있으나 거만한 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무시하고 계속 죄에 머물러 있기에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지옥을 만드시지 않으셨다고 꾀는 자들 역시 하나님이 길이 참으심을 모르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공의가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해 짐을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아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심판 중에서도 남겨진 긍휼
겔 5:1-4
"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도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6:5). 이는 구약에서 특별히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인 나실인에 대한 규정입니다(민6:6)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에스겔로 하여금 그의 머리털과 수염을 깍도록 명하고 계십니다. 유다의 멸망이 임박한 와중에서 주어진 상징적인 이 행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유다가 당할 치욕스런 패배입니다. 고대 전사에 보면 승자는 패장을 무릎 꿇리고 그이 수염과 머리털을 깎아버리곤 했습니다. 자신을 거역한 자에게 극도의 수치심과 좌절을 안겨주기 위한 목적에서입니다. 그러나 작금 그들은 이방인들보다 더한 좌악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주어질 것은 심판이며, 이 심판은 기왕 그들이 받은바 특권과 영광에 견주어 볼 때 이방인들로부터 수치와 조롱을 받기에 족했던 것입니다. 성도가 그릇된 길로 나가면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어 큰 손가락질을, 하나님으로부터는 더 맹렬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 더 큰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심판 중에서도 예비된 긍휼입니다. 본문 3절을 주목해 봅시다.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가져 네 옷자락에 싸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잘라진 머리털과 수염이 전부 화염에 소지된 것이 아닙니다. 일부는 에스겔의 옷자락에 고이 싸여져 보관되었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이 불에 타서 없어진다는 것은 유다가 이방군대의 무력앞에 멸망당한다는 의미입니다.그렇다면 이제 본문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멸망이라는 심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소수의 백성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들은 창검과 마병의 위협속에서 안전을 보장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가 읊었던 것처럼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23)라고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 하나님이 심판과 긍휼은 흡사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심판 중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만사가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유념하여 그 같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골2:3) !
그때에야 여호와인줄 알리
겔 6:1-7
철학을 위시한 일반 학문의 영역에서의 '앎'이란 단순히 '인식' 자체를 의미하기 십상입니다. 즉 인간의 이성이 사물(또는 원리)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전체적인 맥락솔에서 이 말이 의미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속에 내포된 교훈이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킵니다. '너희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7절). 이 말씀 이전에 보면 이스라엘이 당할 치욕적 패배와 심판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1-6절). 즉 뒤집어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파멸적인 결과를 당하고나서야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이 같은 고질적인 병이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바로를 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소위 ' 갈 데 까지 가고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취할 바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구원의 진리를 알아가며 또 깨달은 바를 확고히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지노의 매를 피하는 길입니다.
2. 죄악의 끝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 줍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하나님 알기를 고의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한 인간의 본성을 방치해 두지 아니하십니다. 죄악에 빠져 하나님 알기를 등한히 할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에 상응하는 심판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십니다.
3.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 줍니다. 인류 역사의 다양한 사건 속에서 한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주권입니다. 당신의 백성은 물로이거니와 믿지 않는 불신자까지도 다신의 장우에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애굽 바로왕의 멸망에서 이 같은 사실이 잘 확인됩니다.
성도여러분 ! 하나님을 알되, 얼마만큼 체험적으로, 그리고 올바로 알고 았습니까? 율법을 받았으되 끝내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패망에 이른 유대인들을 기억하십시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
종말에 일어날 현상
겔 7:23-27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종말에 일어날 일련의 일들을 자세하게 강화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계시록은 그 책이름이 시사하듯, 인류 역사의 끝에 일어날 일들과 신천 신지의 일들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종말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며,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종교마저도 타락합니다. 먼저 본문 24절을 주목해 봅시다. ' 그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 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시의 정황에 견주어 볼 때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이 그 첫째 해석입니다. 두 번째는 이방 군대에 의해 당시 유다에 관영했던 우상 숭배의 처소가 파괴를 당항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해석을 하든간에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즉 당시의 종교가 극도로 타락 했다는 것입니다.
2. 마음의 평강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주신 첫 말씀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영혼의 평온을 소유한 자입니다(요14:27).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평강이 없었습니다(25절). 작금, 우리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전세계적인 문제 중 하나는 인간의 심성이 날로 포악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늘 내게 주신 분복에 자족하며 선한 일에 매진함으로써 불안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3. 진리의 말씀이 없어집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패망 직전에 당할 이스라엘의 곤고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극한 재앙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탈출구를 마련하려 하나 이것마저도 실패할 것입니다. 여기에 묘사된 묵시 율법 모략 등의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종말의 때에는 범죄와 부패 그리고 죄악이 최고조에 달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아니할 것입니다. 암8:11절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기갈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곧 참된 하늘의 양식과 생수의 결핍에 직면할 사람들이 늘어 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종말의 현상과 성도의 마땅히 취할 자세에 대해 충분히 교훈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자 처럼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날마다 주를 신뢰하며 그의 약속을 대망하는 자에게는 종말이야 말로 복된 날 중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더렵혀진 성전
겔 8:5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거하시는 성전에 들어가는 자도 거룩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토록 여러 가지의 성결 규례를 준수하고 난 연후에야 성전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연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도리어 악의 소굴로 변모되었다는 것입니다.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교회와, 또 성전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1. 성전에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아무리 흉악하고 만 가지 죄악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성전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며 참회의 눈물을 떨구기 마련입니다.요컨데 성전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사유의 은총을 얻는 곳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유다인들은 도리어 성전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우상을 제하고 성결한 뭇 심령이 돌아와야 할 성전이 도리어 우상의 소굴로 우상 숭배의 진원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두 마음을 품고 있거나(약1:8) 단지 저급한 복만을 간구하기 위해 성전을 찾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전락시켜 섬기는 격이라 하겠습니다.
2. 성전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모름지기 성전을 찾는 자는 자신의 죄과를 고백하고 용서받기 위한 심령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지금까지주어진 구원의 은총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기 위해 성전 문을 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올바른 목적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성전에서 조차 하나님을 원망하는 입술을 가졌습니다(12절) 작금 유다인들은 그입술마저도 하나님을 욕하기에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행여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의 소리를 늘어놓기 위해 성전을 찾지는 않습니까?
3. 실생활에서 강포를 행했습니다. 본문 17절에 이르기를 '그들의 강포로 이 땅을 채우고' 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당시 백성들이 사회생활에서 약자를 괴롭히고 가난한 자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 생활에서 불법과 불의를 자행하면서도 성전을 찾기만 하면 그 죄가 용서받는 줄로 생각 했습니다. 이 같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멸시하시고 역겨워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성전 안에서의 가르침과 성전 밖에서의 행위가 일치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합시다. 바르게 예배드리고 주의 온전하심처럼 우리도 오전해집시다. 잃어버린 교회의 참기능과 성도의 참자아상을 회복할 때입니다.
탄식하며 우는 자
겔 9:1-8
흔히 현대를 가리켜 '불감증의 시대'라고 합니다. 나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일에는 가급적 관심을 두려하지 않는 혀대인들입니다. 웬만한 일에는 감동을 받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심성입니다. 그야말로 눈물이 메마른 세대라 할 만합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우리들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 기쁨으로 그 단들 거두는'(시126:5)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자기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진실하게 자신을 들여다 보는 자는 탄식하며 눈물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적이 부패성을 직시합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은 있으나 그것을 실행할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롬7:22,23)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시각각 죄악의 기로 미끄러져 가는 자기 신앙의 나약성과 부조리를 목도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것 때문에 진실한 성도는 하나님앞에서 회개의 눈물과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눈물을 뿌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순간의 욕정을 주체치 못해 범죄했던 다윗, 그 단 한번의 실수로 인해 뼈를 녹이는 통회와 회개의 눈물을 주야로 쏟았던 그였습니다(시51:17) 진실로 자신을 위해 애통하는 자의 눈물을 주께서 닦아 주시거니와 이들은 심판의 화염 가운데에서도 보전함을 입을 것입니다.(4,6절)
2. 공동체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바,우는 자들은 자기의 동족인 유다인들의 죄악 때문에 울었을 것입니다. 전장(8장)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당시 유다인들은 우상 숭배의 죄악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 안에서까지 우상을 섬기는 괴악스런 범죄를 서습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나만을 위하거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국한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사랑은 실천하는 길이 곧 죄악으로 달음질하는 이웃과 형제의 구원을 위해 눈물 흘리며 간구하는 일일 것입니다.
3. 민족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은 지금까지 상징적으로 제시되었던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멸망당할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선택함을 입은 의인(4,6절)은 이러한 조국의 참담한 형편 앞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하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곧 자기와 이웃, 나아가 민족을 위해 철저히 회개하며 간구하는 자에게 회복의 은총을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룹의 바퀴
겔 10:9-19
그룹은 성경에서 여러 현상으로 나타나고 그 역하도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그것을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니므이 뜻과 명형을 수행하는 천사의 한 계층으로 보면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충성된 종으로서의 성도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본문에 나타난 그룹의 바퀴를 살펴봄으로써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룹의 바퀴는 그 모양이 한결같았습니다. 본문 10절을 주목해 봅시다. 네 생물 각각의 바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바퀴는 모두 한결 같은 모양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수종을 드는 천사들이 모두 동일한 현상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문이 나타내는 핵심은 그룹, 즉 하나님의 천사들간에 우열이나 차등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모두 동일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의 신앙 생활과 교회에서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 이 같은 각성일 것입니다. 서로의 직분과 은사를 두고 그 우월성을 논하거나 심지어 그것들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는 실정입니다. 주가하나요 세례가 하나이듯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한 지체일 뿐, 내가 남보다 나을수도 없고, 또 남의 머리 위에 앉아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고전12장)
2. 그룹의 바퀴는 한 곳으로 일사 분란하게 행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그룹들이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목적한 방향을 향해 똑바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즉 주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만을 받고, 또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전심전력했던 것입니다. 요컨데 그들의 모든 움직임은 하나님의 명령 수행이라는 단일 목표를 향해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이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3. 그룹의 바퀴는 가고 서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그룹과 바퀴들이 동일한 보조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룹이 나아가면 바퀴도 나아가고, 서면 바퀴도 멈추었습니다. 즉 바퀴는 그룹의 통제를 받고 그 그룹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제를 받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주의 법도에 합당하지 않을 때 즉시 중단하는 것 역시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기의 성공에 도취되어 마땅히 자기 걸음을 멈추어야 할 때와 발 디디지 말아야 할 곳을 망각합니다. 사울과 웃시야의 실패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종으로 자처하는 입술은 많으나 실제 종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은 흔치 않은 오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으로 동일하게 부름받았고, 천국건설이라는 단일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고 명령받았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가는 것과 서는 것이 분명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오사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자기를 굴복시킨 참된 종이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하십시오(히12:2)
절망중의 위로
겔 11:14-21
덴마아크의 사상가인 키에르케르고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명저에서 절망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지적하였습니다. 한 개인이나 민족을 막론하고 크고 작은 희망이 있기에 하루 하루를 어려움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보다 나은 장례를 설계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제시하는 위로의 메시지는 무엇 일까요?
1.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흩은 열방에서 잠간 그들의 성소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소란 곧 하나님의 임재을 상징하는 처소입니다. 이스라엘이 지사의 어느 나라보다도 축복된 나라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택하시고 그들 가운데 계셨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그 은혜의 절정을 보여주셨습니다(마1:23) 우리를 어느 정도나 사랑하셨으면, 하나님이 죄악된 인생의 자리로 까지 낮아지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성소로 삼으시고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주님과 지금 이 순간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동행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 본토 회복의 약속입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가운데서 모아내고 본토로 귀환시킬 것이라고 말씀햐셨습니다. 나라를 잃고 이국 땅에서 학대 받는 민족에게 국권과 영토의 회복은 간절한 염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갖은 모욕과 아픔을 경험했던 우리 민족이 실제로 체험한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영원한 본향을 확신하는 믿음만 지니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맞게 되는 어떤한 고난과 시련도 소망 가운데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새 신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9절에서는 회복된 이스라엘에게 새 신(神)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언급됩니다. 그리하여 우상 숭배에 빠졌던 심령이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죄악과 방탕의 길을 좇던 자들이 하나님의 율례를 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근본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죄악되고 연약한 인생으로서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강권적인 은총으로 가능케 됨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 진정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절망을 소망으로 바꿀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자신과 주변의 세상 풍조를 보면 가히 절망적이지만, 믿음의 눈을 뜨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앞에는 소망뿐임을 기억합시다.
참된 묵시와 허탄한 묵시
겔 12:21-28
예수께서는 말세의 여러 징조 중에 거짓 선지자들의 창권함에 대하여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마24:11). 오늘날 이러한 징조들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며 심지어는 기독교 교회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서도실상은 뭇사람들을 비 진리에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들도 허다합니다. 주님은 이들을 가리켜 양의 탈을 쓴 이리(마7:15)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제 참된 묵시와 거짓 묵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일고 해보고자 합니다.
1. 인기 위주와 진실 위주의 차이 24절에 보면 '아첨하는 복술'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백성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진정한 묵시는 진실을 그 기반으로 합니다. 뜻있는 성도들은 오늘날 목회 강단에서 회개의 메시지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를 표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자태를 유지하려면,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오직 진실된 메시지를 선포하며 또 거기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냉철한 분별력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2. 결과에 있어서의 차이 참된 묵시와 거짓 묵시의 두 번째 차이는, 과연 그것이 성취되느냐의 여부와 또 그것이 어떤 결말에로 인도하느냐의 차이에서 드러납니다. 먼저 25-28절에 보면 여호와의 묵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기만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당신의 묵시가 반드시 그리고 조만간에 성취될 것이라고 확언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 오늘날처럼 세족주의 물결이 거센 때도 없었습니다. 각박한 생존 경쟁, 돈이면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믿는 황금만능주의의 만연, 그리고 가치관의 상실과 굴절! 이 모든 세속주의의 물결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 참된 묵시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우매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진리는 결국 승리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읍시다. 그리할 때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해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는 사탄의 위협과 유혹을 결연히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벧전5:8)
거짓 선지자의 특징
겔 13:1-16
이스라엘이 패망에 이르게 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으나, 그 중에 거짓 선지자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몰아간 거짓 선지자들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이를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말세지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 매무새를 가다듬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1. 비진리를 진리인양 조작합니다. 통일교, 전도관,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등 우리 주변에서 창궐하고 있는 이단 종파 혹은 사이비 종교만 보더라도 그들이 표방하는 진리는 나름대로 철저한 논리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그 논리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늪으로 점점 함몰되어 갑니다. 그들 중 다수는 성경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려 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논리에 부합될 만한 성경 구절만을 임의로 취하거나 성경에 불완전하 요소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온전케 하는 것이 그들의 사상 체계라고 교묘히 설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사설은 물론이고 심지어 교회의 강단에서 나오는 메시지라 할지라도 성경의 조명과 말씀의 올바른 해석 원리에 입각하여 지혜롭게 분별함으로써, 거짓 선지자들의 참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추종 세력을 모읍니다. 6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으로 그의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출현목적 자체가 ㅏ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이용하여 영화와 권세의 자리에 오르기 위함이기 때문에,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된 지체로서 모이기를 항상 힘쓰되 특정한 인간 지도자를 숭배하는 폐단에 빠지지 않고 오직 주의 말씀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여야 할 것입니다.
3. 달콤한 유혹을 제시합니다. 10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여기서 드러나듯이 거짓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현세적이고 정용적인 말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유혹은 현실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고통이나 역경 자체를 좋아할 사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순진한 교인들이나 신앙의 깊이가 얕은 자들은 꼬임에 미혹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의 시민권을 지닌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확고하게 믿는다면 거짓된 복음으로 미혹하는 이들의 세상적이고 저욕적인 감언 이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자신의 삶이 이생뿐이라면 자신이 가장 불행할 것이지만 영원한 소망과 상급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도 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빌3:8). 미혹하는 영이 날로 기승을 더해 가는 말세지말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아무쪼록 말씀 중심, 기도 중심의 생활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마6:23)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있을지라도
겔 14:12-20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하사 수많은 반역과 불순종으로 저지른 죄악을 인내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내 죄악된 길에서 돌이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오히려 멸시하는 지경에까지 치달았으며(롬2:4)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후렴구와도 같이 거듭 반복되는 노아 다니엘 욥 이세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이름을 거듭하여 거론하면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선포하셨던 이유가 과연 무엇있까요?
1. 타락의 심각성을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서 유다의 타락상은 '불법하여 내게 범죄하므로'(13절)라는 간단한 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말 속에는 유다의 끈질기고도 뿌리깊은 패역함과 타락성이 함축하여 있습니다. 정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우상 숭배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 지적처럼(렘17:9). 어쩌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지향점 자체가 극단적 타락과 멸망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이시대야 말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 환경을 보며 신앙을 맞추려해서는 안됩니다. 부단히 주위세계를 복음로 변화시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성도들의 임무일 뿐 세상을 보고 거기에 맞추어가려고 하다가는 너 나 할 것없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직면하고 말 것입니다.
2. 각 개인의 책임성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옛말에 ' 잘되면 제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란 격언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 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얄팍한 근성을 빗댄 말입니다. 이러한 회피 내지는 팽계대기는 첫 사람인 하와와 아담에게서부터 비롯된 고질적인 병폐입니다.(창3장)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일이며(요일1:9) 타인의 허물 까지도 '내 탓이오' 하고 부둥켜안는 일입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헛된 욕심과 얄팍한 자존심은 우리를 파멸로 몰고갈 뿐입니다.
3. 심판의 불가피성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말씀의 으뜸되는 주안점은 완악한 백성들에게 심판의 필연적 도래를 깨우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유다 사람들은 선민 이니 성민이니 하는 특권 의식에만 사로잡혀 있었을 뿐, 그 특권에 상응하는 거룩한 자태를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여호와는 사람의 심장을 살피며 시험하고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그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그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야생 포도나무
겔 15:1-8
본서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다양한 환상과 비유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에스겔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 비유르르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생포도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존재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으며 그속에 담긴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스라엘의 버림받은 과거 모습입니다. 본문에 보면 야생 포도나무의 무익성이 여러 모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나무는 가구나 그릇을 만들기에는 너무 작고 여립니다. 특히 이 포도나무가 삼림중의 여러 잡목과 함께 자생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2절) 영적으로 볼 때 포도나무는 과거 이스라엘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타락했고 우상 숭배 했었습니다. 과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연 이전의 우리들은 그 재질이나 외양 그리고 열매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내세울 수 없는 무익한 존재였습니다(롬3:10-18)
2. 이스라엘의 현재 당할 심판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삼림과 수풀 가운데서 자라는 야생 포도나무라해도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어야 마땅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무익한 자기 존재를 그나마 유용하게 만드는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 비유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그리하지 못했습니다.위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옆으로는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실과 신체적인 손상을 입히기에 바빴습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께 등을 돌린다면 그 결과는 자신들의 영육이 황폐화되는 것일 뿐입니다. '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3. 이스라엘의 갱생의 필요성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야생 포도나무가 결국 심판의 불앞에 완전 소진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새로운 갱생을 모색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즉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새로 회복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하심에 기인해서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사람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재물과 명예를 얻으면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것이 인간입니다. 실로 이러한 자에게는 넘어지며 깨어지는 심판만이 예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녕 자신을 하찮고 무익한 존재로 파악한 자에게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만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열매 밎는 포도나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갈5:22-23)
하나님의 전적 은혜
겔 16:1-15
윌리암 골딩의 소설 ' 파리대왕'은 인간의 내면속에 잠재된 원초적 죄악을 섬뜩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아름다운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이것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뜨거움이 어떠한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버려진 존재를 돌보아준 사랑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의 초기 형편이 '버림받은 어린아이' 의 그것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이 말이 내포하는 뜻과 동일한 생활을 역사적으로 경험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민족을 조건없이 돌보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역시 주를 만나기 이전에는 세상의 무관심과 고독 속에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죄인의 괴수(딤전1:15)인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얼굴을 돌리셨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출발입니다.
2. 양육하고 치장해 주신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무 공로없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극진한 정성과 관심으로 양육시킨 것이 하나님의 두 번째 사랑입니다.본문에 보면 이 같은 사실이 다양한 비유를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몸의 청결을 유지해 주셨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의복으로 그 몸을 감싸게 해주셨습니다. 나아가 값진 장신구로 치장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우리들도 아름답고 유익한 존재로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깨어진 그릇같고 쭉정이 같았던 우리들이 성도라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시민이 된 것이 그 증거입니다.
3. 계약을 맺으사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은혜입니다. 본문 8절을 주목해 봅시다. ' 내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니므이 백성으로 인정된 사실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거룩한 하나님께서 죄악된 존재인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 것, 그것도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신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정점을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신민됨이 그들의 외모나 선행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긍휼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철두 철미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이는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지도,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지도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사람들이 갖지 못한 새 생명과 하늘의 축복을 소유한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일진대 항상 감사하며 빛과 소금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교만과 타락으로 욕되게 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기억하며 경성하는 삶의 발걸음이 요청됩니다.
새 가지 끝에서 난 연한 가지
겔 17:22-24
과수의 묘목을 이식하는 방법 중에 '꺼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원 묘목에서 충실한 한 가지를 취하여 새 땅에 옮겨 심는 방법을 말합니다. 옮겨 심겨진 가지 밑에는 새로운 뿌리가 내려서 하나의 새로운 묘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도 이와 똑 같은 사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상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새로운 구원자이십니다. 먼저, 본문 22절을 주목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새 땅에 이식할 백향목 가지의 상태가 ' 새 가지 끝에서'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머저 여기서 백향목은 당시의 유다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새 가지'는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종합해 보면 예수께서 유다 족속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나타낸다 하겠습니다. 실제 이 약속에 따라 예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로 탄생하셨습니다. 그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 이셨습니다. 이전의 어느 선지자와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실로 에덴 동산에서부터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구원 이 비로소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현시되었던 것입니다.
2. 겸손한 구원자이십니다 다시 본문 22절을 보겠습니다. 백향목에서 새로 취한 가지가 '연한 가지' 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성품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본체 이셨지만 그분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의 겸손하심은 성육신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절정을 맞았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섬겨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보배롭고 으뜸되는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딤후2:21)
3. 왕국을 완성시키는 구원자이십니다. 본문 23절을 주목해 봅시다. 새 토양에 심기운 백향목 가지가 왕성한 성장력을 보여줍니다. 나무의 충실도와 모양새 및 열매맺음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백향목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에는 어긋남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 배반과 죄악의 토양 위에 홀로 '새 가지'를 심고 가꾸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새 가지는 곤 그리스도시며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껏 우리가 경험했던 그 어떤 자와도 다른 성품과 인격과 사역으로 다가오십니다. 이토록 지존하신, 그러나 도리어 자신을 낮추시는 그리스도 앞에 우리의 취할 바는 그의 구원에 감사하며 주의 성역의 동반자로 나서는 것 뿐입니다. ' 새노래로 주의 구원을 찬양하라'(시96:1)'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구원(주의 왕국)을 이루어 가라(빌2:12)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면 자식의 이가 시린가?
겔 18:1-4
인간은 주체적 의지와 자유를 지닌 존재입니다. 이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특별히 '생 철학' 이나 '실존 철학'에서 인간은 신 또는 현실 앞에 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로 규정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종종 자신의 의지와 책임의 문제를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로 돌리려고 시도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속담(2절)이 바로 이러한 인간이 속성을 잘 꼬집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인간 속성의 그릇됨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각인을 향하사 그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벧전1:17), 요컨데 인간은 책임적 자아로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개별적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인간의 책임이 어떤 곳에서 드러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1. 죄와 그 형벌에서입니다. 먼저 이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본문 2절에 나타나는 '아비가 신 포도주를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시다' 라는 속담의 배경부터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속담은 십계명 가운데 나타나는 ' 너의 하나님은...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라는 말씀 속에 그 기원을 둡니다. 또한 이 속담은 이스라엘의 현재의 고난은 전대로부터 쌍하 온 죄악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 예언자들의 가르침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참뜻은 죄의 결과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당시 백성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이 아들에게까지 미친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요컨데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위해 이 같은 속담을 지어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현재 나의 고난의 문제를 환경이나 타인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해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구원과 그 은혜에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해 개별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도 책임적 존재입니다. 물로 이 말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죄에서 돌이키느냐 않느냐 하는 책임과 의지가 인간에게 주어져 있고 그것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입을 수도 아니면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컨데 인간은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해 타인을 핑계 할 수도 의존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비밀이 풍성하게 계시된 오늘날, 인류가 그 구원에 참예하지 못한다면 이제 더 이상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3. 책임지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본문의 궁극적 의의는 인간이 각기 자기의 삶에 정직한 책임을 져야 함을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각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정, 사회, 그리고 특정 공동체는 각기 자기의 현재 모습에 책임지는 자세를 견지해야 마땅합니다. 정녕 시대의 아픔까지도 내 탓으로 여기며 여호와께 절규하는 한 사람의 의인이 필요한 때인 듯 싶습니다(31절)
성도 여러분 !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이것으로써 그는 생명과 사망의 길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각인은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마18:23)고난과 환난에 직면하여 그 책임과 불평의 화살을 타인이나 환경에 돌리는 것은 결코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애가
겔 19:1-9
'... 허무하다 궁궐터, 이름없는 절만 섰구나, 로래된 사당 솔나무 잣나무엔 백로만 깃들었고 설날 복날엔 촌 늙은이만 찾는구나.' 한때 촉의 제왕 이었던 유비가 죽자 훗날 두보가 그 슬픔을 기려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이같은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애가 속에는 당시의 죄악상이 들어 있는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통치자의 폭정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에스겔이 목놓아 슬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백성의 지도자였던 당시 왕들이 연신 폭압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유다 왕국은 '암 사자'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사자가 백수의 왕이듯 우다가 열국 중에서 가장 탁월한 존재 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6절에 보면 이 암사자가 낳아 기른 '젊은 사자'가 나옵니다. 이 둘은 공히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는'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먼저 3절에 나타나는 사자는 오시야의 아들인 여호아하스(왕하23:31-33)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5,6절에 나타나는 새끼사자는 유다의 19대 왕이었던 여호야긴(왕하24:8,9)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동족을 살해하고 강포와 약탈을 자행하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오늘날 공동체나 가정, 특히 교회 내에서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는 특별한 경계와 자성이 요구됩니다. 지도자의 그릇된 행위 하나는 자신에 딸린 뭇 심령들의 애곡과 동동체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회개를 거부하는 완악입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첫 번째 젊은 사자가 애굽 땅으로 끌려간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여호 아하스가 반 애굽정책을 실시하다가 애굽의 바로느고 왕에 의해 폐위되고 애굽으로 끌려간 사실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로서 '암사자' 곧 유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를 본문 5절은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5,6절을 보면 또다시 유다가 악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요컨데 대를 이어 유다 왕들은 악의 모습을 답습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듯 인간이 죄의 길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위로함이 없는 심판의 소리뿐일 것입니다(요3:18)
3. 조국이 멸망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이 애가를 지어 슬픔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국 유다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이방인의 공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바벨론이 여호야긴을 공격하러 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9절은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것을 나타냅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겪은 후에 결국 유다는 시드기야 왕을 마지막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예언을 무시하고 자기의 악한 고집을 따라 행동한 자(유다)의 결국은 허무한 파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조국의 파멸 앞에 에스겔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슬픔의 경험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의 파멸을 미리 내다본 예수님이 느꼈던 '거룩한 슬픔'과 흡사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에스겔은 통치자의 폭정과 그들의 잘못된 신앙 때문에 애통해야 했습니다. 종내에는 조국의 멸망에 애간장을 끊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 그가 지어 부른 '애가'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행여 우리는 선택받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요모조모로 악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 옛날 죽었던 에스겔이 다시 살아나 우리의 신앙을 탓하며 '신애가'를 짓는다 한들, 누가 감히 항변의 말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의 애가'는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성호
겔 20:1-17
사람의 이름에는 그것을 지은 자의 바램이 깃들어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 사회에서 이름은 영혼과 인격의 일부로서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줍니다(창32:28) 그러므로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이며,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교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구속 역사에있어서 하나님의 칭호가 어떤 의미로 현시되었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자입십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구원자로 선포하기를 주저 하지 않으셨습니다(삼하22:3)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이 구원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속성, 품성)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분명해 계시된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임마누엘 특히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한마디로 집약시켜 줍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자'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성품이며 그분이 이름인 것입니다, 그 외에 인자 주 하나님의 아들 등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이름 역시 그의 구속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2. 긍휼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속성은 '긍휼''인자' 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 자체가 선이시며 모든 피조물들을 선으로 대하십니다. 피조물 일반에 대한 공평한 은총 과 죄인에게 공로없이 베푸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긍휼의 속성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본문에서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이 이스라엘의 구원사에서 분명히 나타났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도 마땅히 진멸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래 참으사 긍휼로 인해 영생을 소유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긍휼하심을 인하여 찬양할 지어다'(시25:6)라고 고백한 시인의 찬양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3.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되어 무한한 위엄과 거룩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믿고 고백하는 백성들은 죄와 불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우상금지 명령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명령을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배치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길에 서서 개인의 저급한 욕망이나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부르짓는 다면 이는 필경 '망령되고' 헛되게' 주를 부르는 사악한 행위와 진배없습니다.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이름을 구원과 긍휼을 통해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구원을 통해서 이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침 받았습니다. 우리의 받은 바 구원과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의와 경건과 거룩한 행실로 여호와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합시다.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지어다'(시150:6)
점(占)
겔 21: 28-32
본문에 보면 암몬 족속의 거짓 점술가들이 '거짓 신탁'을 내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본장 21절에서도 바벨론 왕이 점을 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과연 점술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본문을 중심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점술은 배후에 사악한 영이 있습니다. 본래 점술가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점괘를 얻어냅니다. 책을 보거나 막대기를 통해서 앞일을 점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점술가들이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거나 여러 가증한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점괘를 얻어내려 하는바, 이는 그들이 직. 간접적으로 '미혹의 더러운 영과 연관을 맺고 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 점술은 구체적인 해답을 주는 것처럼 가장합니다. 인간 모두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구체적인 대답을 갈망합니다. 점술가는 이러한 인간의 질문에 명쾌히 대답해 주는 것처럼 행세합니다.그의 점괘는 인간의 미래 운명을 예언할 것이며 그가 그려주는 부적은 어떻게 재앙을 피하며 볼을 불러들일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점술가의 교묘한 기만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실제 성경은 점술가가 하나님의 일을 알 수 도 없다고 분명히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단2:27-28) 실로 성도는 성경에 자신의 운명이 분명히 계시된 것으로 믿고,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복종하며 순간순간을 충직히 살아갈 따름입니다(신27:10; 빌 2:12)
3. 점술은 파괴적인 결과를 동반합니다. 점술가는 물론이요, 그에게서 점괘를 얻은 자는 결국 미혹하는 영의 희생물이 될 뿐입니다. 이스라엘 왕국 초기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신탁을 내어 아람과의 전쟁에 아합 왕을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의 선지자는 패배를 예언하며 참전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아합왕은 거짓 선지자의 말에 청종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비참한 종국을 맞았습니다. 성도여러분 ! 우리의 보이지 않는 미래를 지배하는 것은 점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는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시며 문제 해결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여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그릇된 점술에 의지하거나 이용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거짓 예언을 하는 점술가에게 우리의 삶을 의논하거나 의탁하는 것은 기름을 끼얹고 아궁이 속으로 달려드는 것과 같으며 연자 맺돌을 매고 물 속에 뛰어드는 것과 동일합니다.
신앙의 삼중주
겔 22:6-13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 있어서 어느 한 악기가 빠진다면 조화로운 음율이 흘러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이라고 할 때 하나님을 믿는 것을 단순히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과 등식 관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균형잡힌 신앙을 갖춘 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1. 종교적 계명의 준수입니다. 물론, 종교적 계명속에는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뿐아니라 사회와 이웃에 대한 의무 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좁혀서 전자의 의미만을 가리킵니다. 즉 십계명의 1-3항목에 분명히 지적된 바, 인간의 대신적 의무를 가리킵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요체요 핵심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먼저 다른 어떤 것보다 주의 계명과 그에 대한 우리의 순복을 강조하며 실천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 되지 않는 교회생활, 사회봉사 등 그 어떤 기독교적인 활동도 결국은 '미끄러지는 발거음질'이며 소리나는 구리와 우리는 괭과리가 될 뿐입니다.
2. 개인의 경건 생활입니다. 대신적 의무가 동전의 앞면이라면 개인의 경건한 종교 생활은 그 뒷면입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의 눈은 또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응시하며 경건과 절제로 채찍질합니다. 참으로 믿음의 위대한 열조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계명을 좇고자 하는 열심과 자신을 돌아보고 애통하며 고백하는 인간이었던 것입니다(롬7:24) 성도 여러분 ! 자신을 돌아봅시다. 사회와 공동체를 손가락질하며 힐난하기 보다는 먼저 나의 내면적 신앙을 순전하게 성숙시켜야 합니다. ' 먼저 내 눈의 들보를 깨끗이 하고 난 다음에야 ...(마7:3)
3. 사회적, 윤리적 의무입니다. 이 의무는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지만, 본문에서는 특히 두가지를 꼽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성윤리입니다. 본문 10, 11절에 보면 당시 유다인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타락한 성윤리 속에서 생활했음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무절제한 성행위와 근친 상간이 죄책감 없이 시행되었습니다. 또한 돈을 꿔주면서 높은 이자를 챙기는 고리 대금업자도 나타납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계명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지금까지 살펴 본 세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갖춰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절름발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상처 부위를 방치하면 온 몸이 병들 듯 , 우리의 잘못된 신앙 하나는 영혼전체를 곪아 썩게 만듭니다. 시급히 오도된 신앙 요소를 바로잡아 온전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이보다 못한 아우
겔 23:11-21
본문에 보면 두 자매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오홀라'이며, 다른 하나는 '오홀리바'로 불리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거역한 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곧 그들은 죄악의 동류였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오홀리바의 죄악이 무엇이며 그가 어떤 측면에서 '오홀라'보다 못한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눈으로 보고도 고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의미는 인간이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를 조명하는 데 있습니다. 쉽게 얘기 하자면 과거의 잘못을 피하고, 그 잘된 것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에 역사를 배우는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홀리바, 즉 유다는 훌륭한 역사적 모델을 두었다 할 만했습니다. 오홀리바는 자기의 누이 사마리아가 자행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우상 숭배를 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가 앗수르와 연합했듯이 유다는 애굽과 동맹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과거를 통해 배웁시다. 우리에게는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 안에서의 실패와 실수가 있습니다. 특히 성경 안에는 인간의 죄악상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의 사건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일들을 교훈삼아 오늘날의 지표와 경계로 삼지 못한다면 금수와 버러지에 비해 나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날 너희가 그이 음성을 듣거든 ...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3:7)
2. 더 나쁜 길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와 유다는 공히 좌악의 한 길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죄악의 정도 문제에 있어서 유다는 오히려 사마리아를 능가했습니다. 이를 본문은 '더하며''더 심하므로' '더하였음은' '더하여' 등으로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요컨데 유다는 사마리아의 죄악을 그대로 동조, 답습했을 뿐 아니라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더욱 부패한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성격적 진리의 하나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유다는 사마리아보다 더 악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헛된 과거로 돌아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본장에 나타나는 두 여인은 본시 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은 공히 그 옛날 애굽에서 행했던 우상 숭배의 전철을 밟았습니다. 특히 유다는 그 같은 잘못된 역사를 회상하면서 과거로 되돌아 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신앙의 선조와 이웃의 실패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시다. 그들의 죄악에 동조하거나 답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실족을 예방하기 위해서 그리합시다. 과거의 잘못된 습성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유혹을 떨쳐버립시다. 구원의 날이 날로 가까운 고로,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은 자로서 오늘 우리의 삶은 어제의 선조들보다, 과거의 역사보다 더 승 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스겔 처의 죽음
겔 24:15-24 임금이 죽는 것을 '붕어'라고 합니다. 여기서 '붕'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말입니다. 그만큼 임금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모든 죽음이 극도의 슬픔과 당혹감을 동반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은 여느 죽음에 못지 않은 고통을 수반한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이제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참선지자상입니다. 에스겔의 아내는 ' 네 눈에 기뻐하는 것' 으로 비유되어 이습니다. 여기서 '기뻐하는 것' ㅡ에 해당하는 원어는 매우 이착이 가는 대상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에스겔은 자기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고 아꼇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돌연한 죽음은 에스겔에게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오직 침묵으로써만 자신의 끝없는 비애를 나타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의 뜻은 개인적인 슬픔보다는 받은 바 사명을 우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머지 않아 멸망당할 것이며 따라서 에스겔은 경고와 회개의 선포를 감당해야 마땅했습니다. 만에 하나 그가 눈물을 흘린다면 자기 처의 죽음에서가 아니라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 갈 동족 때문이어야 했습니다. 우선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이 참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2. 심판의 엄정성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에스겔의 처는 유다백성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처를 아끼지 않고 죽음에 몰아넣었듯이 이제 유다 백성들도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요컨데 에스겔이 자기 아내를 잃은 것은 장차 유다에게 임할 심판의 예표였다는 것입니다. 실로 자기 아들을 죽음에 처하게까지 하시면서 인류의 죄를 심판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우리 역시 죄를 멀리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종말의 필연성입니다. 에스겔의 처의 죽음이 시사하는 중요한 교훈중의 마지막 하나는 개인이든 국가든 아니면 더 넓게 보아 우주든 모두 종말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어진 아내의 돌연한 죽음은 에스겔로 하여금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부름앞에 어느 때고 설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죽음의 순간을 피해 가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목도해 왔고 우리의 육신 역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되새깁시다. 나 역시 한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합시다. 나아가 이웃, 심지어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도 개인의 감정에 지배당하기보다는 그 슬픔을 침묵 속에서 인내하며 주의 일에 헌신합시다. '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에돔의 멸망이유
겔 25:12-14
본문에 보면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서에 나타나는 여느 열방의 멸망 기사와 비교해 볼 때 에돔의 멸망은 극히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멸망의 형국은 다른 나라에 못지않게 비참하고 철저합니다. 일찍이 이스라엘과 형제국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돔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본문을 중심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유다의 멸망을 조롱했기 때문입니다. 에돔은 유다의 형제국이었습니다. 고로 유다가 곤경에 처했을 때 위로와 도움을 주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가 진정 낭패에 빠져 도움을 손길이 필요할 때는 팔짱을 끼고 '방관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 도리어 조롱과 비웃음으로 형제의 간담을 낙심하게 만들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 형제나 원수의 실패를 보고 기뻐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가장 저열한 죄악중의 하나입니다. 도리러 원수의 곤고까지도 동참하며 그 상처를 싸매며 위로해야 할 사람만이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2. 유다를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에돔이 이방인과 한 패가 되어 유다와 사마리아를 멸망시키기 위해 앗수르와 연합하여 침공하였습니다. 이방인과 연합하여 유다를 친 그들의 행위는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오랜 숙적이라 해도 원수 갚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손에 의탁해야 했습니다. 특히 유다는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하나님의 선택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에돔의 침공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지배되어 원수의 칼날을 휘두르게 되면 결구 그 칼날이 도리어 자신의 목을 겨눔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영적 배교지 였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에돔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배교의 중심지 였습니다. 이는 에돔을 세운 조상 에서가 태중에서 야곱과 다툰 사실이나 야곱의 후손과 에서의 후손이 서로 다툴 것이라는 예언을 통해서 이미 시사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민 이스라엘의 특권을 시기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훼방과 경멸의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요컨데 영적으로 볼 때 간음한 바벨론과 동일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곡'과 같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타인의 실패와 멸망은 우리에게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것을 통해 나의 신앙을 점검하는 계기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웃, 심지어 원수의 멸망까지도 조롱하거나 기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욱이 악한 세력과 연합하여 약한 이웃을 궁지에 몰아넣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잃어 버린 도크마를 찾지 않겠으며'(눅15:8,9)' 구덩이에 빠진 양을 꺼내지 않겠는가' (마18:12)
세속 국가의 특징
겔 26:7-14
중세의 위대한 교부 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시(왕국) 와 대조되는 것으로 '세속도시'를 말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세속국가는 인간의 범죄로 악에 물들어 하나님의 새롭게 하심을 입어야 할 세상이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두로가 바로 이 같은 세속국가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이제 두로의 모습을 통해서 세속국가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왕국에 대적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군사력에 의지합니다. 본문 9, 10절에 보면 두로가 갖추었던 군사적 방비 체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곧 견고한 '성'과 '망대' 그리고 성곽 등입니다. 국제 무역을 통해 쌓은 풍부한 재력을 동원하여 두로는 외국의 침입을 방비할 수 있는 군사 대비 태세를 완비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첨단 무기와 핵은 어떤 면에서 이제 더 이상 인간의 통제권 아래 있지 않다고까지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곁을 떠난 총과 칼은 필경 피조 세계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해하는 괴물로 변할 수 밖에 없음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헛된 군비 증강을 그만두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신17:16)
2. 경제력에 의지합니다. 세속국가의 두 번째 특징은 경제에 사활을 건다는 데 있습니다. 군사력과 마찬가지로 물질 그 자체가 인간에게 해악된 존재는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물질 세계를 지배 활용하라고 적극적으로 명령까지 하셨습니다(창1:28). 다만 인간이 물질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그것에 그의 생활과 영혼이 지배당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속국가는 바로 이 같은 잘못에 빠져들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자신의 무역량이 증대되어 경제적 이익이 극대화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세속 국가는 물질에 최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불의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윤 추구에 혈안이 되어 인간마저도 상품으로 전락시키며 날로 물질의 권세에 종속되어 가는 우리 세계의 모습은 세속국가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3. 우상전을 건축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견고한 석상'이 나옵니다. 이는 두로의 국력과 번성을 기념하는 기념비 또는 기념관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우상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권세와 영광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 두로는 자기 국가의 우상인 멜카스의 신전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국가든 막론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는 반드시 대규모의 우상전을 건립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보이는 것으로 변화시켜 숭배하는 것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성도 여러분 ! 눈을 즐겁게 하고 육신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의지하지 맙시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이것이 세속 국가에 살지만 한편으로는 '신의 도성' 시민증을 갖고 살아가는 비결인 것입니다.
나르시시즘
겔 27:1-11
나르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입니다. 그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결국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두로의 나르시시즘이 과연 어떠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행여 우리가 그 같은 과오에 빠지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1. 외적 방어벽을 사랑(자랑)한 것입니다. 두로는 지리적으로 볼 때 시돈 남방 약 40Km, 레바논과 이스라엘 국경에서 약 24키로 북방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 최대 항구 도시였으며 사면의 바다로 인해 자연스런 방어막이 형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섬 주변에 흩어져 있는 암벽과 단애는 외부인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로는 완벽한 외적 방어벽을 구축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같은 조건 때문에 두로는 자신을 신뢰하고 종국에는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상황과 환경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 듯할지라도 종내에는 '모래서'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2. 지식을 사랑한 것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두로인들은 세상적인 지혜와 기술이 탁월한 부류에 속했습니다. 먼저 본문 4-7절에 보면 두로인들이 수입 제목을 이용하여 무역선을 건조한 사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업 과정이 매우 세밀하고 공교 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선박 제조는 전문적이고 발전된 기술이 요구됩니다. 이로 보건데 당시 두로는 매우 발달된 기술을 추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에 대한 맹목적인 목적이 될 때 그것은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시도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성의 한계를 직시하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은 영역의 것은 알 수도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겸손함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에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고전1:27)
3. 쾌락을 사랑한 것입니다. 두로인들의 마지막 집착은 쾌락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에서 수입한 값비싼 자재로 호화 찬란한 배를 만들었습니다. 가옥은 질 좋은 재목으로 만들었고 그 내부는 아름다운 가구로 치장되었습니다. 넘쳐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하며 부르는 쾌락의 소리가 연일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해안에 위치한 무역항이었던 까닭에 두로는 환란의 불야성을 방불케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빈번하고 강도 높은 쾌락을 위해 낯부끄러운 일조차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마약, 성욕, 변태, 폭력... 이 모두는 불의한 방법으로 금지된 쾌락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일 뿐입니다. 꿀을 빨아먹는 개미가 자기 발이 서서히 굴속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죽어가듯, 불의한 쾌락에 대한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영육을 갉아먹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 누구나 자기애를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과 정도에 있습니다. 일신의 유익만을 도모하기 위한 쾌락이나 지식, 그리고 아전만을 사랑한다면 이는 진정한 자기 사랑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 삶을 파탄시키는 해독이 될 뿐입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나를 부인하고 이웃을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 그것에서 벗어나면 날수록 우리는 더욱 참답게 자기 자아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과 같이 되려는 어리석음
겔 28:1-19
인간의 마음속에는 타인보다 우월해지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중심이 되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권력이든 지식이든 아니면 의(義)로움이든 인간이 그것에 대해 지나친 자부심을 갖는 것은 필경 교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교만이 어떻게 싹이 터서 진행 발전되다가 그 종국을 맞이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교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과신에서 시작됩니다. 모름지기 인간은 자기 본분을 알고 지켜야 합니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이 주인답고 종이 종다우면 그만입니다. 인간은 피조 세계의 소유주가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위탁받아 지키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가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반드시 교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본문 3절에 보면 두로가 지혜로 인해서 교만해진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운 자로까지 취급합니다.
2. 교만은 자신의 완전성을 내세움으로 발전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성공을 과신하는 자는 필경 자신을 '완전한자' 로 생각하게 됩니다. 재물에 있어서 그는 이제 더 가질 것이 없으며(계3:17), 권력에 있어서는 더 오를곳이 없다고 소리칠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두로를 완전한 인 으로 ,15절은 '모든길에 완전한자'로 각각 묘사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 말은 두로의 무호함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두로가 토기에는 비교적 행동거지가 깨끗하고 정치 이념도 순순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두로는 나중에 아주 멀리있는 상태임에도 스스로 완전한 자로 자처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3. 교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두로가 참으로 가증스러운 말을 뱉습니다. ' 나는 신이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또 9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교만의 전형이요 절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처음에는 자기 과신과 과대 심리에서 발원하지만 그 종점은 스스로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이들의 결국은 한결같이 비참한 파국뿐이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교만은 엄정한 심판을 받는다는 증거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 교만의 시작은 조그마한 우월성 내지는 자긍심에서 싹틉니다. 그러나 점점 자신의 능력과 의를 과도하게 자랑하고 종국에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리에 옮겨놓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의 싹부터 자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세 가지 그릇된 욕망
겔 29:8-16
인간은 무엇을 하거나 갖거나 채우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본능적 욕구의 충족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부단히 새롭고 나은 현실 세계를 추구하며살아갑니다. 인간의 그릇된 욕망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이강은 내것이라' 고 공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강은 애굽의 지류인 나일 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넓게는 애굽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애굽 나아가 나일강의 지류가 흐르는 인근 주변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애굽왕의 욕망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실로 부패한 인생은 순전히 가지려고만 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집니다. 인간이 쓸어 모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과도한 소유욕은 불 같은 파괴력으로 생명까지 해치게 될 것입니다.
2.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지배욕이 있습니다. 실상 인류 역사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 과정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애굽 역시 이 같은 지배욕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는바 이스라엘을 그의 정치적, 군사적 속국으로 만들고자 한 시도를 그 증거로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질서 내에서 지배 까지 악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허 하나님께서는 권세를 행사하는자 에게 순복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기 위해 불의의 수단까지 동원해서 그것도 힘없는 약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시도는 반드시 배격되어야 할 악한 것입니다.
3.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본문 9절을 봅시다. 여기에서 애굽(왕)은 자기의 권위와 능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이 강은 ... 내가 만들었도다'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는 작금의 애굽의 권세와 영광이 순전히 자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과시욕의 범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기 선전의 시대 자기 극대화의 논리속에 몰두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줄 압니다.
성도 여러분 ! 소금물을 들이킨 후에는 더욱 갈증이 나는 법입니다. 그릇된 욕망은 우리를 더욱더 목마르게 하며 참안식에서 멀어지게 하며 결국 악한 시험과 올무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식자가 목에 칼을 두고 음식을 절제하듯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여 그릇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10:23)
여호와의 날
겔 30: 1-19
암 5:18-20에 따르면 '여호와의 날'은 재앙과 어둠의 날이 될 것입니다. 스바냐는 이러한 주의 날이 전세계적 차원에서 속히 임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구약적 개념이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계 16:14은 이날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역사의 종말에 성취될 여호와의 날이 어떤 성격을 띨 것인지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악의 주력이 멸망받는 때입니다. 본문에 보면 애굽의 멸망의 날을 여호와의 날과 직접 연관시키고 있습니다(3절). 구약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부터 애굽은 근동의 강재국으로 군림하여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당시에도 애굽은 바벨론과 싸움을 겨루는 나라였습니다.
2. 사탄의 연합 세력도 멸절당합니다. 본문에 보면 애굽의 동맹국들도 남김없이 파멸을 당하고 있습니다(5절) 이전에 이들 국가는 애굽과 정치적 결속을 맺음으로써 애굽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는 결국 악의 세력에 동참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것과 동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조장하는 주도자 뿐 아니라 그것에 연합하는 공범자까지도 엄정하게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악과 결별하여 신중히 행해야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악의 세력과 연합한 자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악은 보지도 만지지도 말 것이며 그것의 모양까지도 버리라 고 훈계 하십니다.
3. 특별히 사악한 종교 행위가 심판당합니다. 본문에 보면 애굽의 종교 중심지가 차례로 훼파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것들이 멸망당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가장 가증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십계명 중 제일 첫 부분이 우상 숭배를 금지하고 있음이 이를 입증해 줍니다.
성도 여러분 ! 악인에게는 여호와의 날이 두렵고 떨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기쁨과 회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고통과 억울함이 모두 신원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 (계22:20) !
앗수르의 종말이 주는 교훈
겔 31:1--18
'옛것을 되살려 오늘을 새롭게 한다. 여기서 옛 것을 되살린다는 뜻은 우리가 마땅히 계승 발전시켜야 할 전통이나 미덕을 이룹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오늘을 부단히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을 고쳐 바른 길로 나아가는 데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앗수르의 멸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1. 교만은 결국 멸망을 가져옵니다. 먼저, 본문 10절을 주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앗수르를 레바논 백향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3절 참조). 성경에 나타는 여러 수목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자태로 각광받은 것으로는 백향목에 비길 것이 없습니다. 특히 레바논의 백향목은 그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혔습니다. 이같은 백향목과 앗수르를 비교한 것은 그의 영광과 권세가 실로 뛰어났다는 뜻입니다. 거듭 밝히고 있거니와 교만은 만악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타락으로 나아가는 첩경이 교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징계하십니다. 앗수르의 이토록 허망한 패망, 이는 현대 물질 문명, 권세와 명예 등에 도취되어 일탈의 길로 들어서기를 서슴지 않는 자들에게 주는 가슴 서늘한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2. 악에서 떠나 정직히 행해야 합니다. 물질이나 권력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기실, 피조 세계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나온 것으로서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거듭 확인되는 성경적 진리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에 흡족한줄 알고 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분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많이 받고도 족한 줄을 모르고 악을 쌓는 자에게는 그 있는 것까지도 취해 가시는 분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3. 악인의 멸망은 비참합니다. 본장 전반부에 나타난(1-9절) 앗수르의 영광스러운 옛 모습과 비교해 볼 때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의 현재 모습은 가히 하늘과 따의 차이가 난다 하겠습니다. 먼저, 수 많은 가지로 무성했던 백향목은 이제 찍히고 잘려질 것입니다(12절) 악인의 멸망은 다른 사람에게 도리어 조소가 기쁨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앗수르의 멸망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파멸이요, 누구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없으며, 자기를 따르던 추종 세력과 더불어 멸망한다는점에서 종말에 멸절될 사탄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 주변에는 앗수르처럼 더없이 좋은 여건과 환경을 부여받았으나 결국 멸망의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처음은 가히 흥왕했으나 그 결국이 쇠잔한 자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악인의 결말을 통해서 현재 나의 삶을 되돌아 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웃집의 매질 소리에 나의 행동거지를 돌아보아 악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매맞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흐르는 맑은 물
겔 32:11-16
생물의 생존에 있어서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의 하나로 물을 꼽을 수 있습니다. 대략 성경에서 650여회에 걸쳐 물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물이 인간 생활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애굽의 멸망이 물 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즉 혼탁해진 강물을 맑게 하여 다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물이 다시 맑아졌겠으며, 그속에 담긴 영적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1. 물을 혼탁케 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사람의 발'과 '짐승의 굽'이 나옵니다. 하반절을 계속해서 보면 결국 이것들 때문에 강물이 흐려지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 '큰물'은 공히 애굽의 나일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 또는 짐승은 나일강, 곧 애굽을 더럽히는 종교 지도자들 및 불의한 권력자들을 가리킴니다. 그는 곧 하나님나라와 그 질서에 대적하는 사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할뿐더러 인류를 자기의 포박으로 묶어 지배하고자 하는 것의 그이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생수의 강은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탄의 이 같은 흭책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하겠습니다.
2. 그 존재를 파멸시키는 분이 계십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물을 흐리던 짐승들이 큰 물가에서 완전히 멸망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멸한 자는 '무서운 자' 곧 바벨론 왕'입니다. 이는 결국 애굽이 바벨론군대에 의해 멸망당하게 될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멸망을 통해서 혼탁해진 강물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는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착취했던 지도자들이 제걸될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적으로 볼 때 이사실은 더욱 명확합니다. 강물을 더럽게 만든악의 세력을 진멸하시되 영원한 불 못 에 던져넣을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3. 맑은 물을 흐르게 하십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더러워진 흙탕물을 맑게 하여 다시 흐르게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애굽의 완전한 멸망으로 인하여 그땅이 더 이상 인간의 죄악으로 오염되지 아니할 것을 가리킵니다. 즉 자신의 성공과 변영에 도취되어 자기 백성과 주변 열국을 괴롭혔던 애굽의 지도자들이 제거된 이후에 그 땅은 원래의 평강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흐려진 물이 다시 맑은 강물이 되어 흐르는 전 과정은 순전히 하나님의 단독 사역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죄악과 사망으로 썩어간 강물을 생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물가에 뿌리를 박으며 때를 좇아 열매를 맺을 뿐입니다(시1:3)
성도 여러분 !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면서까지 흙탕물을 맑은 물로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로부터 발원하여 만국을 적시는 평화의 강. 그속에 깊이 젖어보지 않으시렵니까?
파수꾼의 책임과 상급
겔 33:1-9
흔히 잘 쓰는 군사 용어 중에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영적 파수꾼의 책임과 그 상급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영적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파수꾼은 전쟁에 있어서 최선봉에 배치된 자입니다. 평상시에도 그느 영이 외곽 지역의 경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배치됩니다. 그런데 그가 행여 눈이 멀고 소리를 잘못 듣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는 적의 동태는 물론이거니와 적의 내습을 포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측면에서 파수꾼의 눈과 귀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 곧 영적 분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이상 기후는 포착하면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파수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바로의 두 관원장이나 바로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기이한 꿈을 꾸고서도 그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번민했습니다. 그들에게 영분별력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까지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채비를 항항 갖추었으며 오늘날에도 이 같은 자를 하나님께서는 들어 쓰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즉시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의 두 번째 자신이 발견한 상황을 즉시 보고하는 것입니다. 신속한 보고를 통해 아군은 차후의 군사 행동을 결행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급박한 상황일수록 지체치 않고 경고의 나팔을 불어주어야 합니다. 또 한가지 파수꾼의 임무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누락됨 없이 전해야 합니다. 은혜이든 심판이든 아니면 그 외에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여 신속 정확히 선포하는 것이 파수꾼의 할 바입니다.
3. 생명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파수꾼의 책임이 중차대한 고로 그가 받을 상급 또한 가히 적지않다 하겠습니다. 만약 신실한 파수 업무를 수행함으로 인해 공동체를 악과 파멸에서 구해낸다면 파수꾼은 생명의 축복을 약속 받을 것입니다. 그 반대로 파수꾼의 사명을 등한히 했을 경우 돌아올 심판은 매우 혹독합니다. 만약 그의 직무 태만으로 인해서 공동체가 파멸하거나 백성이 생명을 잃었을 경우 그 피값을 치르는 엄정한 책임 추궁이 있을 것입니다. 때를 따라 옳고 그름을 분별 지적하지 못함으로 해서 한 생명이 구원에서 멀어질 경우 우리가 연자 맷돌을 매고 수침당하는 형벌과 소경된 인도자라는 오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 양떼를 지키기 위해 목자는 사위를 살핍니다. 적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파수꾼은 뜬 눈으로 밤을 세웁니다. 오늘날의 영적 지도자는 어두운 역사를 밝히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 무감각과 도덕 불감증에 걸린 이 사회야 말로 참된 파수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참 목자
겔 34:11-16
가나안 정착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유목민이었습니다. 양이며 약대의 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것이 그들의 주 생활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참목자 되신 하나님의 성품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잃어버린 양을 찾으십니다. 목자의 첫째 임무는 양을 보전하여 일어버리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사람을 경계하며 조그마한 상황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만약 무리중 한 마리의 양이라도 잃어버림을 당했을 경우, 목자는 즉시 잃어버린 양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속히 이 같은 조치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길을 잃은 양은 구덩이에 빠지거나 그물에 걸리거나 종국에는 야수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는 '아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자' 와 '죄인'을 찾아 부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9:17)
2. 양을 보육하십니다. 목자의 두 번째 임무는 양을 보호하고 기름지게 양육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 같은 목자의 임무가 여러 형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목자가 상해 입은 양의 상처를 보살펴 치료하듯 하나님께서 인류의 병든 심령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치유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본문 14절에 보면 이제 이스라엘 의 무리가 '이스라엘으리 높은 산 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평안하고 영원한 처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이제 외부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고 평안과 안녕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품어주는 날개요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보호자 요 치료자이며 공급자 되시는 분, 바로 참목자이신 하나님뿐입니다.
3. 양을 분별하십니다. 목양 사역의 마지막은 양들을 살펴 가리는 것입니다. 병든 양은 결리시켜야 합니다. 살찐 양은 적게 주고 야위고 파리한 양에게는 꼴의 양을 더 늘려야 할 것입니다. 특히 강하고 난폭한 양이 있을 시에는 이를 적절히 징치하고 분리시켜야 합니다. 만약 이 같은 분별력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초장과 물가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양떼는 조마간 흩어져서 짐승의 밥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목자는 양떼의 형편을 부지러힌 살펴서 그 옳고 그름에 따라 다스려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 그리스도께 완전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현재 어떠한 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뿔로 다른 병든 양을 밀치며 함께 먹어야 할 꼴과 물을 밟아 더럽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기 계시는 여호와
겔 35:10-15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아담 스미스는 경제가 '보이지 않는 손' , 즉 수요자의 구매력에 으해 운용된다고 했습니다. 역사의 뒷편에 서 계시는 듯하나 실제로 그 거대한 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곧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곤고할 때에 함께하십니다. 거시 계시는 하나님은 성도의 곤고함에 동참하시는 분입니다. 먼저 본문 10절을 주목해봅시다. 에돔의 죄악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영토 확장의 야욕에 사로잡혀 유다와 이스라엘을 자국 영토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그 연합군에 의해 멸망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선민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멸망의 순간, 아니 멸망의 와중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모든 일을 감찰하십니다. ' 거기 계시는 하나님' 께서는 인간의 모든 소위를 감찰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심중의 계획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시인은 주의 낯을 피하여서는 천지 사방 어느 곳으로도 숨을 수 없노라 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이 자기의 행적을 숨기려 할지라도 주 앞에서는 모든 것이 백주의 일처럼 명백히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인생 여정의 처음과 끝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이 같은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3:22,23)는 말씀을 명심하여 실천하고자 할 것입니다.
3. 억울함을 풀어주십니다. 종종 인생의 억울함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서 계시는 듯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과 고통을 반드시 신원해 주십니다. 본장에서 에돔이 결국 멸망을 당하는 것도 그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피에 대해서는 피로써 응징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 세속의 탁류 에 휩쓸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그분이 우리의 현실과 역사에 전혀 상관이 없는 초월계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 하나님께서는 항상 인생여정의 동반자가 되어 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할렐루야!
황무한 땅이 기경되리라
겔 36:32-36
오래 묵힌 땅에는 곧장 파종을 하지 못합니다. 보습으로 땅을 갈아 엎고난 연 후에야 씨앗을 뿌립니다. 그래야만 땅속의 지력이 배가되며 토양이 부드러워져서 씨앗을 움틔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황폐한 땅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있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본문의 약속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생활 터전이 회복된다는 약속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기실은 암석과 잡초가 무성했다 하지만, 출애굽의 기나긴 여정 후에 더구나 정착할 곳 없어 이방의 객으로 떠돌던 생활 후에 얻은 땅이었던고로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낙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사 영영히 거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으로 포로 됨으로 인해 이러한 땅이 무자비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 됩니다. 즉 70년이 경과한 이후에 이스라엘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게 될 것입니다. 예전 처럼 논밭을 일구어 곡식을 낼 것입니다. 땅은 인간 생존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땅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본적인 생활이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설령 죄악에 빠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징계하신 후에 우리의 삶의 기쁨을 회복해 주십니다.
2. 하나님 백성으로 다시 인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31, 32절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됨이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지속적인 우상 숭배의 결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짐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백성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성도가 죄악의 길로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릅니다. 설령 죄악 중에 있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그를 당신 백성으로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3. 성도들은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입은 자들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일차적으로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신약적인 견지에서 보면 본문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백성으로 인정된 성도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사실 성도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본토에서 쫓겨났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경작자가 없어서 황무한 곳으로 버림받았던 땅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령의 기경함을 입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지금까지 우리는 이스라엘의 묵은 땅을 기경하사 백화가 만발하는 기름진 땅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서도 드러났듯 이 모든 일련의 작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이 땅에서 호흡을 유지하고 더구나 새 생명의 존재로 살아감이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와 긍휼이 크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라는 찬양이 우리 입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자각하고 성령의 보습으로 심령의 밭을 부지런히 일굴 뿐입니다.
이 뼈들이 능이 살겠느냐
겔 37: 1-14
본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본문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가 생기를 얻어가는 과정을 회화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상징적 비유인 만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마른 뼈들이 환상이 교훈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현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B.C. 586 년 바벨론이 침공으로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당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입하여 성전 안에서까지 이스라엘들을 목베어 죽였다고 대하 36:17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다왕 여호야긴은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 역시도 포로로 바벨론 땅에 잡혀 갔습니다. 행여 고국에 남았던 사람들도 죽임을 당하거나 애굽 등지로 피난해야 했습니다. 본문에서 마른 뼈는 바로 이 같은 절망적인 상태를 비유한 것입니다. 2절 하반 부에 보면 이 뼈들이 '아주 말랐더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절망, 회복 불가능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지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2.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소성함을 입습니다. 본문 4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명령하시길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마른 뼈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탈골 되었던 뼈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파하자 이 뼈들이 서로 연결됩니다. 뿐만 아니라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게 됩니다. 이는 회복 불가능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됨을 의미합니다. 좁게는 포로기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희개하여 옛적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3. 심령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말씀을 접한 뼈들에게 아직까지 생기가 없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에스겔이 생기를 불어넣자 뼈들이 생기를 회복하여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생기에 해당하는 원어는 신약에서 '성령'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령을 통해서만 인간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면 더 이상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아니하며 영의 일 곧 생명과 평안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성령의 조명과 도우심 속에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 본문의 환상에서 보듯, 이전에 우리는 쓸모없이 길거리에 버리워 밟히는 마른 풀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같은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보혈을 통해 절망의 상태에서 건짐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이제 무가치한 존재도 생명없는 자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역동적인 활력 속에서 창조적인 일을 도모하며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리를 부단히 묵상하는 일과 성령과 동행하는 일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가능합니다.
곡과의 전쟁
겔 38:1-16
빌리 그레함이 쓴 '아마겟돈' 이라는 책에 보면 인류의 종말에 벌어질 하나님과 사탄과의 전쟁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본문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종말에 치르어질 사탄과 하나님과의 전투가 과연 어떠한 성격을 띨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전면전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나 유다의 멸망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악의 세력이 연합한다는 사실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점령하기 위해 에돔을 우시한 근동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침공하였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에스겔은 종말에도 동일한 양상이 전개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면밀히 분별해 보면, 이 같은 전면전이 벌써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문명과 문화는 거의 대부분 복음의 진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퇴폐적 세속 풍조는 이미 노골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성도와 교회, 그리고 타락한 세상은 각각 반대편이 되어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 바로 오늘의 영적 실상이라 하겠습니다. 깨어 경성하며 시대를 분별해야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2. 최후의 일전입니다. 전도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주님께 보고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주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탄과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전쟁이 종말론적 최후의 전쟁이며, 그 후에는 하나님 왕국이 온전히 건립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승리는 하나님께 예비되어 있습니다. 신구약을 일관해서 흐르고 있는 사상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전쟁의 신이시며, 그분이 임하는 전쟁에는 반드시 승리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면면히 증거된 사실이거니와, 종말에 있을 사탄과의 대결투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패퇴할 수 밖에 없습니다. 39:9절에 보면 곡의 군대의 병기를 태우는 기간이 7년 동안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7은 완전 충족수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멸망하되 완전히 멸망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 여러분 ! 악의 세력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왕국과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궤계를 동원합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그들은 마치 피와 먹이에 굼주린 야수처럼 날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여기에 동요되거나 또 그 싸움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친히 그들을 대적하사 우리에게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로서 의와 진리의 무기로 단장함이 요구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열심
겔 39:25-29
사 9:7에 보면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열심' 또는 '정렬'로서 축약되는 이같은 시적 표현 속에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가 생생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열심히 본문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 있는지를 찾아봄으로써 우리 역시 거룩한 목표를 향해 열심을 내는 삶을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1. 긍휼을 베풀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본문 25절을 봅시다.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 곧 이스라엘의 본토 귀향이나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 족속으로 인정받게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열심에 기인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게서 먼저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열심히 결국은 동생자를 이 땅에 보내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게까지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록하길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죄인을 향한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요일4:7-10)고 하였습니다.
2. 죄인의 회개를 이루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나 잃어버린 양 그리고 그라크마 비유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정이 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게서는 한 사람의 죄인이라고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열심을 내시는 분입니다. 죄인의 희개를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바울 역시 동족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특심한 열정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열심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대한 해답을 계3:19는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희개하라".
3. 성신을 주시고자 한 열심입니다. 본문 29절을 봅시다.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니라". 본토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즉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보혜사 성령이 선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뜨거운 구속 열정이 있었기에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바른 길로 이끌고 불신자를 구원의 문으로 인도하기 위해 열심을 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우리들의 심령이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 처럼 순전히 타올라야 할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성전이 완성되기 까지는
겔 40:1-16
본서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징계와 회복의 예언을 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장에서 부터는 새 성전에 관한 환상이 묘사되어있습니다. 이는 본서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본문은 새성전의 구조를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교회, 그리고 성도의 삶이 어떻게 발전 완성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하나의 온전한 성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어떠한 원리가 있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저 성전 모형을 보면 어느 것 하나 무질서하게 배열된 것이 없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성전 각 요소들을 측량자로 그 치수를 재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일일이 그 치수를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전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정교하게 완성되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즉 모든 양식이나 규모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한 분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그 가장을 그 머리 로 주셨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그 밑에 직분을 맏은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정부의 권세자들에게 순복함이 마땅하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무조건 적인 맹종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공의의 차원에서 합당한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권위와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항과 그것의 해체를 주장하는 세대에 깊은 교훈을 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2.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저 성전 모형을 보면 성전 각각의 부분들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조화는 오늘날 성도의 생활과 교회 안에 무엇보다 시급히 요청됩니다. 흔히 현대를 가리켜 개인주의 시대니 모래알 시대니 말들을 합니다. 개개인의 개성이 강하고 자기 주장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체를 위한 희생이 없습니다. 이 같은 풍조가 성도의 교제와 교회 생활에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지체들과 합심하고 연합될 때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3. 우선 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저 성전 모형을 보면 일의 우선 순위가 있음을 암시받게 됩니다. 에스겔은 성전을 측량할 때에 성소와 지성소, 재단등 이른바 성전의 핵심 처소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뜰이나 문 층계 등 부대 시설부터 먼저 측량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온전한 성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같은 시설들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제일 나중에 해야 할 일들이 주님 보시기에는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일 수 있습니다. 하잘 것 없지만 주님 나라를 위해 그 일을 먼저 실행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 성도 각자는 작은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가 규모있고 조화있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성전의 가 부분들처럼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대업을 위해 마음을 일치할 때 성도의 삶은 성화될 것입니다. " 어떻게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어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살후3:7)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
겔 41:1-11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나뉘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나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그러나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살펴본다면, 오늘날에도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정한 내적 기준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구속 은혜를 덧입고서야만 비로소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는 성전에 나아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요건은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본문은 에스겔과 천사가 성소를 측량하는 장면입니다. 이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요건을 갖춘 자가 성전에 들어 갈 수 있는지를 교훈받게 됩니다.
1. 거룩한 자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소에까지는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전 곧 지성소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주의 천사가 들어가서 벽과 내전을 측량하였습니다. 이는 구약 성전 규례와 제사법에 따른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 따르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그것도 일 년에 단 한 차례씩만 출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인간이 거룩해지지 않고는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력으로는 거룩한 존재로 변화받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진실히 고백하지 않으면서 교회 문턱을 부지런히 넘나드는 자는 값싼 은혜를 구하러 다니는 교회의자를 데우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하겠습니다.
2. 구별 의식을 갖는 자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에스겔은 성소까지만 들어갔고 주의 천사는 지성소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시는 지성소를 다른 부분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대 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씩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도 궁극적으로 거룩 자체이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본질적인 구별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라 하겠습니다. 만찬가지로 인간이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세속과 분리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작금의 교회와 성도가 그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바 이는 세속과 자신을 구별짓는 분명한 경계점을 갖지 못한 연고입니다. 알량한 특권 의식, 그리고 남을 업신여기는 우월의식에서 발로하지 않는 한 성도의 차별의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안정을 희구하는 자입니다. 본문 3,4절을 주목해 봅시다. 지성소의 크기는 7자 정도의 정방형이었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나는 새 예루살렘 역시도 크기는 다르나 정방형입니다. 정방형은 균형을 의미하며 이는 곧 안정성과 직결됩니다. 즉 성전은 결코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터이며 안전한 곳이 된다는 뜻입니다. 풍랑이 몰아치고 불시험이 닥칠 때에도 성소를 찾는 자에게는 주께서 굳건한 반석이 되어 주십니다.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집을 얻고'(시84:3). 이 고백은 언제든지 진솔한 마음으로 삶의 안정과 화평을 희구하며 성전을 오르는 발길에서 응해지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 누구에게나 성전의 문은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와 결단없이 그곳에 나아가도 된다는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교훈받았습니다. 만인에게 허락된 은혜이기에 그것을 값없이 선물로 받았기에 더욱 두렵고 떨리는 심령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처럼 번거로운 정결 의식을 거행할 필요는 물론 없을 것이나 그 속에 담긴 근본 취지만은 마음에 새기고 성소를 향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자 하는 심령만이 성전을 성전답게 자신을 성도답게 가꾸는 자일 것입니다.
거룩한 방
겔 42:13-14
전통 한옥 구조를 보면 각 방들의 용도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내전이라 불리우는 안채는 잡인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식속까지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내외간의 공간이었습니다. 반면 사랑체 또는 별체는 외인이나 객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이와 흡사하게 성전에도 다양한 용도를 가진 방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어떤 곳은 예배 기구를 보관하기도 하고 성물을 일시 저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성전의 방은 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소위 제사장 전용의 이곳은 거룩한 곳 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이 방의 용도를 살펴봄으로써 그 속에 담긴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제사장이 지성물을 먹는 곳이었습니다. 본문 13절을 유의해 봅시다.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뤼기에 나타나는 제사 규례를 참고해야 합니다. 레10:13에 보면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네 응식과 네 아들의 응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여기서 '응식'은 제사 제물을 가리킵니다. 즉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바쳐졌던 제물을 성소에서 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위하여 별도의 방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제물을 먹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거룩한 것이며, 그것이 비록 제사장이 취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구별하여 거룩히 취급 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까지도 성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도 타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먹는 것까지도 조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성도는 자신의 사소한 행위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된다면 삼가고 절제하는 자일 것입니다.
2. 성물을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 문 13절 후반부를 주목해 봅시다.' 지성물 곧 소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이는 거룩한 곳이라'. 즉 이방은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을 보관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 봉헌될 제물은 두말할 나위없이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특별한 곳에 구별되어 보관해야 마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이면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거룩히 구별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흠이 없는 제물 또는 곡식이 처음익은 것을 드리라는 명령도 이같은 맥락에서 주어진 것입니다.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 자체가 거리낌없는 깨끗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은 성결하게 보관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교회는 반성할 것이 많은 줄 압니다. 부정과 불법으로 얻은 제물이라도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바알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3. 제사장이 의복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거룩한 방에서 제사장이 의복을 갈아입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예배시의 의복과 평상복을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제사장은 평상복을 입고 예배를 집전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사 예복을 입고서 세속적인 활동을 해서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필하고 난 후에 제사장들은 거룩한 방에서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난 다음에 성전 밖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거룩한 방' 운 구별의 장소이며 성별의 공간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세상간에 분명한 경계가 있고 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줍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이 연합할 수 없으며(고후6:15), 선과 악이 동반하여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얼마만큼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며 죄악을 회개할 '거룩한 방'을 지금 나는 소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제사가 드려지기 까지는
겔 43:18-27
본서 40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에스겔은 성전의 구조를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이으러서는 성전 제사 규정을 언급합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장막의 양식과 규례를 먼저 제시한 다음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 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고찰해 봄으로써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사(예배)를 드리는 삶을 영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흠없는 제물이 갖춰져야 합니다. 먼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제물의 조건을 '흠없는 수송아지' 또는 흠없는 수양 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정결한 동물 중에서 취하여 드리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전에 나아올 때 빈손으로 나아오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실로 아무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담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2. 피뿌림이 있어야 합니다. 제물이 준비되면, 그것을 죽여 피를 뿌려야 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피를 뿌린다는 것은 생명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안에서 모든 인류는 범죄했으므로 그 생명이 취해져야 했습니다.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빼앗기는 대신 제물의 피를 흘렷던 것입니다. 피흘림이 동반되지 않으면 죄 사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도 동일하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사 물과 피를 한점없이 쏟아야 했습니다. 그 피는 죄악된 인류가 하나님의 정죄 앞에서 쏟아야 할 몫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 제사드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
3.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대)제사장이 집전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단지 제물을 바치고 제사장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뿐입니다. 제물을 잡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온전히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대표해서 성소와 지성소에 나가서 제물을 진설함으로써 죄사함을 간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모습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즉 사독 가문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제사장들의 모습을 통해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단번에 속죄 제사를 드리신 분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없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대속물로 드린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죄악을 실제적으로 도말시키셨습니다. 이로써 당신을 믿는 모든 자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출 19:6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성취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온전한 제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갖춰져야 함을 보았습니다. 흠없고 정결한 제물 피흘림, 대제사장, 이 세가지 요건이 그리스도에 의해 단번에 성취되었습니다. 결국 제사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토대 위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종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 예배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상주심을 간구해야 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롬14:18)'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6,17)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은자
겔 44:28-31
흔히 이르기를 사람은 제마다 각기 분복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아도 비록 그 액수의 많고 적음은 있지만 각자가 일정한 몫을 지불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 들로서 하나님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삼은 자들입니다. 과연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문을 통해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배만을 전담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종교의 전반을 책임져야 했으며 신앙교육을 전담해야 했습니다. 다른 여타의 일에 관여할 수도 또 관여해도 안되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제사와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의 종교 제도를 유지하는 일에만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지고한 가치에만 진력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속적인 기업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이 다른 백성들처럼 전답을 소유 했다면 생산을 위해 일정한 노동을 해야 했을 것이고, 따라서 자연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해졌을 것은 불문 가지입니다.이같은 연고로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제사장의기업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섬기고 수종드는 데 헌신된 자가 제사장들입니다.
2. 자신의 생계에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비유로 들면서 '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니라'(마6:25,3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제자들을 파송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 이상의 돈이나 의복을 갖지 말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의식주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군사로 모집된 자는 자기 몸을 돌보거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에 주력하지 않습니다. 물론 목회자가 자기 생계에 전혀 무관심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한의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이 같은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이일에 전적으로 매달린다든지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이나 교인을 돌보는 일이 뒷전으로 팽개쳐져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현실의 생계를 무시하지는 말되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3.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은 자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제사장들은 제사 제물을 분깃으로 할당받아 생활하였습니다. 이 제물은 하나님앞에 신성히 봉헌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제사장들은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서 삶ㅇ르 영위하는 것입니다. 신약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당신만의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나의 희생과 포기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주의 부르심의 상과 푯대를 향해 달음질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할 수 있으며 그 고백만이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치리자의 덕목
겔 45:9-12
'너그러우면서도 엄정하게', 신중하고 명쾌한 판결을', 이는 이조 말엽의 실학자였던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날 치리자가 어떻게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지침이라 할 만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치리자(왕)가 갖춰야 할 덕목 몇가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이것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가정이나 교회, 나아가 사회 공동체에서 바르고 칭찬받는 지도자의 삶을 구현하여야 할 것입니다.
1. 자신의 분복에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본문9절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과 나와 있습니다. 즉 자시에게 주어진 권세와 부에 대해서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목회자와 일반 성도는 각자 자기 위치에서 감사하며 만족하는 마음이 없기에 그리고 상호 족한 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파생됩니다. 특히 정치적으로 볼 때 우리의 지난 역사는 권세자들의 권력욕 때문에 굴절과 어둠이 연속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절대 권력을 추구한 헤롯 때문에 수많은 무죄한 어린 영혼이 빼앗김을 당해야 했습니다. 웃시야는 자기의 정치 권력을 종교적영역에 까지 확대하려다가 비참한 형국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이든 지도자된 이는 '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전3:22)라는 말씀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사회 정의를 실현하여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보면 '너희는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지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정당한 법 운용을 통해서 억울함이 없게 하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정치 권력이나 직위를 이용해서 선량한 백성을 착취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측면이 바로 이 같은 사회 정의입니다. 인생은 하나님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엄한 존재입니다.그러므로 만인지상의 권력자라도 생명과 존엄성을 해쳐서는 안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사람은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현대 사회는 사회 정의라는 측면에서 위기를 노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겉으로는 평등과 기회 균등 자유 등이 철저히 보장되어 있는 것 같으나 금권과 권력 등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며 정의가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치리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살피어 공의를 세우기에 남다른 열의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3. 경제 정의를 실현하여야 합니다. 본문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치리자가 경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저울 에바 밧은 상거래에 사용된 도량형의 일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공평하게 사용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공평한 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의로운 상태까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해서는 경제질서의 정의가 시급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가진자보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기충민중의 복리를 위한 경제 제도의 개선과 운용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성도 여러분 ! 치리자는 다대한 특권을 소유한 만큼 그 책임도 큽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당하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키면서 공동체 구석구석을 공의로 다스리는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목자의 그릇됨은 그 자신의 불행에서 그치지 않고 그를 따르는 양의 불행에 직결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니라
겔 46:16-18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절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집안 아이들이 밥상에서 다툼하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와 타인의 몫(소유)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만 공동체의 발전과 평화가 유지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본문을 통해 차례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타인의 몫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본문 17절을 봅시다. '왕이 만일 그 기업으로 한 종에게 선물로 준즉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종에게 양도된 기업(토지)을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일단 종에게 불하된 토지는 비록 그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을지라도 일정 기간 그 종에게 속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토지는 생업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해 주라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2. 자기 소유에 만족하여야 합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왕이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니라' 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왕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자손에게 토지를 물려줄 경에는 반드시 자기의 소유로 된 것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왕의 경우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여 자손에게 물려주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지파의 기업 분배를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의 인구수에 비례하여 가나안 지경을 공평하게 배분해 주셨습니다. 이는 소유를 둘러싼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각자가 자기의 받은 바 기업(몫)에 자족하는 방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종종 악인의 소유가 의인의 그것보다 승할 경우를 목도합니다. 그러나 결국 소유의 많고 적음이 인간 영혼의 문제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지금의 것'에 자족하며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는 태도가 요청될 뿐입니다.(빌4:11).
3. 궁극적인 소유주가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 히브리인들에게는 매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는 종들이 해방될 뿐 아니라 원래의 땅 소유까지도 반환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희년 제도를 두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즉 선민 사회에서의 부의 편중을 방지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층더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귀속된다는 것입니다. 희년에 이르러 모든 토지가 휴경하는 것은 그 원 소유주 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상징적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토지 제도에 있어서 토지의 매매가 금지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오늘의 나는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합니다. 야곱은 인생의 우여 곡절을 경험한 후에 주께서 여기까지 자신을 도왔다고 술회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오직 주의 은혜덕분에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서는 인간 각자가 감당해야 할 분량만큼의 소유와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주의 베푸심에는 편벽됨이 없습니다. 단지 각자의 능력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 몫(소유)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받은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받은 자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몫에 불평함은 어리석은 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다만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부지런히 그것을 남기는 작업을 해야 할 뿐입니다. ' 내것이 다 주의 것이니이다' 라는 고백이 성도의 모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성케 하는 강
겔 47:1-12
본문의 사건은 37장에 나타나는 '마른 뼈'환상과 더불어 본서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상황이 급변하여 성전에서 발원한 물이 성전 주위를 채우면서 흘러가는 장면이 여기에 회화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강물은 주위의 모든 것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생명수', 곧 소성케 하는 강입니다. 에스겔이 여기서 교훈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소성케 하는 강은 하나님 또는 성령님이라 할 수 있고 그강의 변화시키는 능력은 구속주의 구원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어가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본문 1절을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수가 성전 '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장면이 슥 14:8과 욜 3:18에도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장면이 슥14:8과 욜 3:18에도 기록되어있습니다. 전자에는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후자에는 '여호와의 전'에서 각각 생명수가 흘러내릴 것 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전과 예루살렘은 공히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본문은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 이외에 달리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본문은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본국으로 회복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인간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생수의 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성도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이외에 다른 것으로도 구원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기독교계 내에서조차 심심찮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선행이나 금욕, 명상, 수련등을 통해 인간이 구원의 문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과 맥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본문에 보면 '생명수'가 다다르는 곳마다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9절). 사해가 소성 함을 입습니다. 그래서 많은 어족이 희귀합니다. 강변의 수목들도 잎과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복음은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시절에 순응하여 열매를 내듯 구원입은 성도는 유익한 존재로 열매맺는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종에서 자유함을 입은 자로 주의 친구로 까지 칭함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정죄와 심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진펄'과 '개펄' 같이 척박한 땅으로 계속 남을 것입니다. 도리어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금 구덩이'로 전락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창조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본문에 보면 생명의 강이 주변 세계를 생명력 넘치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효과가 창조 세계 전반에까지 파급됨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창조 질서가 파괴되었음을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이후로 혼돈과 적대가 피조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피조 세계와의 적대감을 해소하시고 화해를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영육간의 상처와 질병을 치유받은 우리들입니다. 비유하자면 물에 올려졌던 고기가 다시 물을 받아 새 생명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변화된 존재로 살고자 하는 결단이 여기에서 필요합니다. 죽어도 주를 위해,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삼마
겔 48:30-35
성경에는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주는 짤막한 어구가 자주 등장합니다. 잘 알려진 것들로는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닛시'등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호와 삼마'라는 말도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합니다. 여호와 삼마 이 말속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를 고찰해 봅시다.
1.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토를 떠나 이국 땅에서 고역을 치르어야 했습니다. 일시적으로나마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징계와 버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이 본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가는 것으로 표현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경과한 후에 이스라엘은 다시금 회복될 것입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잃어버렸던 선민의 위치를 다시금 뒤찾을 것입니다. 본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도리어 이전보다 더 큰 영광과 축복을 향유하는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적 타락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간주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여호와 삼마'입니다.
2.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삼마' 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회복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선택 때부터 이스라엘과 동행하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역을 감당하고 있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고통을 '알고' 있다로 하셨습니다. 즉 고통중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끝까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양자의 은총'을 유지 합니다. 교회 역시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지만 그리스도의 붙드심에 의해 끝까지 견뎌서 종국적인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 삼마'는 '임마누엘'과 일맥 상통한다 하겠습니다.
3. 종말에 다시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계신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현재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종말에 성취될 신천 신지에도 함께 계실 것입니다. 에스,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여호와 삼마' 그들의 고통스런 현실에서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즉 모든 인류의 궁극적 소망이 실현될 이상향이 도래하는 바, 곧 예수께서 그 나라를 가지고 이 땅에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 사건을 통해서 이 같은 인류의 최후의 정황을 미리 내다보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것을 확신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고통스런 사건들로 인해서 성도의 시야는 종종 이 땅의 것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면 참 믿음이 아니듯 성도는 이 땅에 발 디디고 서 있되 종말에 도래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행할 때에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바울 역시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광스런 육체로 부활될 왕국을 소망하노라고 했습니다. 메시야 왕국을 대망하는 신앙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이미 절반의 실패를 맛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여호와 삼마',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항상 은혜와 사랑의 자리에 계셔서 성도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역사의 종말에 의와 공평의 심판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창28:15; 출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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