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출애굽기 강해

출애굽기 13강 (1장~18장)

에반젤(복음) 2019. 7. 9. 09:38



이스라엘과 애굽(1:8-14)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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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신앙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모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무시하고, 때로는 핍박을 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은 신자들을 이해해주지 않다.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린다는 것 자체까지도 아무 쓸데없는 일로 여겨버린다. 오히려 조롱하고,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일들이 허다한다. 그런 세상에서 신앙으로 사는 것은 그들과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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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과 결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세상을 사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해 버린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문제이고, 세상을 사는 것은 자신의 사생활 정도로 여겨버리는 것이다. 기껏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편은 좋은 일에 나서고, 주일이면 예배당 가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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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세상으로부터 결별을 의미한다. 세상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이다.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 것을 얻고 지키기 위해서는 신앙의 양보와 타협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모습은 결코 신앙이 라고 할 수 없다. 단지 신앙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기뻐하고 원하는 모든 것이 그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부터 우리는 출애굽기를 통해서 세상에서 벗어나는 신자의 모습을 배워보고자 합니다. 애굽에서 구출되는 이스라엘의 모습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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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란 여러분이 잘아시는 대로 애굽에서 빠져나온 일에 대한 기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이라는 남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서 다시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십니다. 그때 있었던 일이 출애굽기입니다. 신앙은 옛사람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그때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 같은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옛사람의 자리로부터 벗어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들의 신앙과 능력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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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과연 기존의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기존의 자리는 좋은 것을 제공하고, 세상의 기쁨을 제공해주는데, 정작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자리는 오히려 고달프고, 번거롭고,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새사람의 자리를 소원하며 기존의 삶의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시겠습니까? 그런 간절한 소원이 있는 신자는 출애굽기가 매우 유익하고, 힘을 주는 말씀이 될 수 있지만, 어려움을 회피하고 싶고 세상의 좋은 것을 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출애굽기는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같이 새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의 자리에 서 있는 내가 되기를 소원하면서 출애굽기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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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까지 보면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번성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으로서 살아야 했던 것은 이미 창 15:13절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때문에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가게 된 것, 그리고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으로 살게 된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계획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서 인도된 삶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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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른 자들이 복을 받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존재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의 근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을 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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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근원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과 다르다는 것은 생활풍습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외모에서 신자의 티를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면서 뭔가 세상의 것이 목적이 아니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땅의 것이 자기들이 힘이고 소망이기 때문에 모든 근심과 걱정이 땅의 것으로부터 발생되지만 복의 근원된 신자는 세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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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라는 것은 열광과 열성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광적이고 열성적인 신앙은 자기의 믿음을 자기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열광과 열성을 통해서 스스로 확신하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열광적이고 열성적인 신앙 생활들이 식어지고 사라질 때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보이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여지는 신앙의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종교적인 열성을 증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으로 사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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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말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한 왕'이라는 것은 요셉 때에 요셉에 의해서, 즉 요셉의 하나님으로 인해서 애굽이 강대국이 된 은혜를 모르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일어 나느냐면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수 있는데 하나님이 왜 있어야 하고, 교회가 왜 필요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재주로, 자기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능력있는 지도자를 더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이 보존되고 있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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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들에게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신자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함께 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요셉을 모르는 왕과 같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 힘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야만 복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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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가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것이 없으니까 세상에 미련이 없습니다. 미련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이 여유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무슨 열광적이고 열성적인 종교적 모습이 필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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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는데 왜 보이지도 않는 신을 믿는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애굽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믿어냐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느냐?, 내가 인도하는 대로 나를 따라 나올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출애굽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믿음에 의한 자기 소신이 없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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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을 보면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 한 히브리 산파들은 애굽 왕의 명령을 어깁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세상의 힘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힘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는 이유는 세상에서 사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살아있으면서 목숨을 포기한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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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들의 힘을 구축하려는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지금 신자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출애굽을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오해한 모세와 이스라엘을 통해서 현재 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출애굽을 공부하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양보하고, 타협하고, 뒤로 물러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믿음으로 살 때 여러분을 통해서 많은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열매로서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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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방식(2:11-15)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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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은 누구를 인해서 기뻐하시느냐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바가 없는 99마리 양보다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더 기뻐하십니다. 15:3-7절에서는 99마리의 양을 회개할 것이 없는 스스로 의인된 자로 말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회개한 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종교 행위를 믿고, 자기의 의를 믿고 있는 자보다도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더 기뻐하신다는 애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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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자기가 무엇을 함으로서 그것을 의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가 극히 조심할 것은 이것입니다. 남들이 안하는 구제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의로 여깁니다. 그래서 나는 남보다 낫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남들은 소홀히 여기는 성경공부나 예배시간에 열심히 참석할 때 그것이 나의 의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큰소리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양의 모습이아닙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목자가 아니라 자기가 목자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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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을 목자로 삼는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만이 나올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을 때 자신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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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 받은 모세가 어릴 때 어떻게 생명을 건졌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의 명령에 의해서 남자아이를 다 죽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가 그 명령을 어기고 모세를 갈 상자에 넣어서 하숫가에 버리게 됩니다. 여기서 모세는 버림받은 아이로 등장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버림받은 모세가 어떻게 살아나게 됩니까? 5,6절에 보면 바로의 딸이 버려진 모세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그를 살렸다고 말합니다. 즉 버림받은 자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방식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인 것을 모세를 통하여 보이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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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모세를 통하여 그러한 구원의 방식을 보이십니까? 그것은 모세를 구원하신 방식이 곧 이스라엘을 향하신 구원의 방식이고, 오늘 우리들을 구원하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입니다. 자기의 힘을 지키기 위해서 남자아이를 죽이라는 명령 때문에 버림받게 된 모세와 같이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의해서 버림받은 사람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당신은 세상에 의해서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는 말로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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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당한 일이 전부의 일이 되어야 하고, 한 사람의 고통이 전부의 고통이 되어야 하고,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전부에게 일어난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물에서 건짐 받은 것 같이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도 모세의 운명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으로 물에 빠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사건은 신약의 우리들에게 구속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똑같은 실제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재연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물에서 건짐 받은 것이나 홍해에서 건짐 받은 사건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다같이 물에 빠져 죽을 자리에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오늘 우리에게 존재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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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우리가 살아났다는 그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기까지는 수많은 실패가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모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신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를 포기한 자가 성공한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신앙적이든 세상적이든 자기의 힘을 기르는 것을 성공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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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믿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병들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은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든지 내 믿음과, 내 양심과, 내 노력으로 신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여러분에게서 밀려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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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힘이 없다고 여겨질 때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이 잘 사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어하고, 초라하게 못사는 모습은 수치로 여기고 감추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부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람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무 거리낌없이 남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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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힘으로 사는 자의 모습이 본문에 나옵니다. 모세는 장성한 후에 어느 날 자기 민족이 애굽 사람에게 맞는 것을 보고는 그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게 됩니다. 그때 모세는 자기의 힘으로 자기 민족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튿날 모세가 자기 민족이 서로 싸우는 것을 말릴 때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같이 나도 죽이려느냐"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모세에 대한 반감입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왜 그것에 반감을 가집니까? 그것은 모세가 가진 힘에 대한 반감이었습니다. 항상 약한 자는 힘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때문에 모세가 자기들을 구원한다고 해도 자기들이 힘이 없는 이상 또 다시 모세의 힘에 지배를 받게 된다는 생각 아래 모세에게 반감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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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으로 건짐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40년간 애굽의 모든 학문을 다 배웠으면서 자기가 건짐 받은 하나님의 자비를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자비보다는 힘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힘을 내세웠기 때문에 모세는 비록 이스라엘 편으로서 다가갔지만 이스라엘은 모세에게서 애굽의 힘을 보았기 때문에 그 힘을 거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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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았으면서도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자비입니다. 신자들이 세상의 힘에 눌리지 않기 위해서 힘을 얻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욕심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복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지를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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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여야 할 것은 사랑과 자비이지 힘이 아닙니다. 힘을 나타낼 때 힘없는 약한 자들로부터는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부자가 빈민촌에 들어가 그들을 전도한다고 할 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은 할 수 있지만 그들과 하나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없는 자는 있는 자의 힘에 반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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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할 일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만족하고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신자는 사랑과 자비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것이 없어도 사랑과 자비로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 사랑과 자비의 자리가 만들어 질 때입니다. 아무쪼록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는 신자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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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벗으라(3:1-12)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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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 제시하고 믿으라고 하지 않고 불확실한 것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확실하다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고 하는 인간의 시각에서 볼 때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인간자신의 신념이나 판단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불확실한 것을 믿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판단과 신념이 개입되는 것은 스스로 확인하고 틀림없다고 느껴질 때 믿겠다는 발상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세상 사람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하지 않는 것을 믿겠다고 나서는 것이 어리석은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라는 것은 참으로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과는 전혀 달라야 하는 특이한 것이 곧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분을 믿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문제에 있어 신자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말하면서도 믿음의 증거는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행동은 믿음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보이지 않는 분을 믿고 있는 증거를 보이는 것으로 통해서 드러내려고 할 때 많은 잘못된 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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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믿음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인간의 행위입니다. 기도를 해야 믿음이 있는 것이고, 봉사를 열심히 해야 믿음이 있는 것이고, 성경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읽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강조를 하다 보니까 어떤 잘못이 발생하느냐면 남의 믿음을 흉내내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남의 믿음을 흉내낸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믿음이 좋은 것으로 추앙을 받을 때 자신도 그 사람이 한 대로 행동함으로 믿음의 성장을 이루겠다는 잘못된 유혹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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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성도 여러분께 자주 말한 것 중에 하나가 믿음 생활을 남의 흉내를 내서 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에게 깨달아진 대로 자연스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에게는 이 말이 참으로 곤혹스럽게 들리나 봅니다. 뭔가 부지런히 해도 믿음 생활에는 부족하다고 생각되는데 하고 싶을 때 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라고 할 때, '그럼 아무것도 안해도 천국 가는가?' 라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천국 갑니다. 그런데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무시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주님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기도를 많이 했다거나, 봉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자신에게 행위가 없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가 신자됨을 증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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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라는 것은 주님을 믿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그 깨달은 분량만큼, 믿음만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나서는 것입니다. 때문에 남의 행동을 흉내를 내게 되고 이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믿음을 위선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의 흉내를 냈을 뿐인데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믿음으로 보여지고 칭찬을 듣게 되었다면 결국 거짓이고 위선이 아닙니까? 이런 믿음은 오히려 자기를 해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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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그들 부부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나바라는 별명을 가진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당시 교회가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떡을 떼며 교제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재산을 바쳤고 그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부가 그 요셉을 흉내내어서 자신의 재산을 바치고자 했는데 결국 자기의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지경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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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마다 믿음의 깊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깊이가 다르면 그 행위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약한 믿음을 어떤 행위를 통해서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고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의 신자들의 믿음이 각기 다른 이유는 서로의 보완과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신자 모두가 약한 자이면 누가 그 약한 자들을 끌어가고 가르칠 것입니까? 또한 모두가 강한 자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누구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강한 자는 자기의 믿음을 자랑하지 않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며,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의 신앙을 보면서 가르침 받고 깨달으면서 자연스럽게 자라 가는 것이 바로 교회의 바른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가지고 비판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정도 밖에 안돼'라는 말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깨달음이 있고,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게으름과 세상을 향한 욕심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을 무시해 버리고 산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책망을 들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로 잡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고 살아갈 때 비로소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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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생활을 순간적인 기분이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신앙의 욕심을 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이 분위기에 휩쓸리고, 기분에 좌우되고, 욕심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면 신앙 생활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크나큰 부담거리로 다가오게 됩니다. 신앙 생활은 부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 생활이 부담이고 짐이 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남 눈치 전혀 보지 마시고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부담이 되어있는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분명히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들고 주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언젠가는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옆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 분명히 계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일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믿으면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때 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기쁨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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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이 길었지만 오늘 본문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했던 구원의 방식은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갓난 아이의 처지에서 물에 버려진 모세는 그야말로 남의 손이 아니면 살아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불쌍히 여겨서 건져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공주의 손을 통해서 모세를 건지심으로 말미암아 장차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그 근거가 뭐냐는 것을 미리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에 죄의 자리에서 건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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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세는 자기 민족을 도울 때 힘을 내세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쫓아내셔서 40년을 지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모세에게 있는 힘과 재주에 대해서 포기하도록 하십니다. 이제 모세의 나이는 80이 되었습니다. 모세 스스로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단지 가정을 이끌면서 양을 치고 사는 것이 자신의 모든 인생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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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때 모세는 40년간 나타나지 않던 하나님께서 나이 들어 힘이 없는 이때에 나타나셔서 자기를 부르신다는 것이 크나큰 부담으로 왔을 것입니다. 자신은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깊이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심정은 본문 11절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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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가지 가르치시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명령을 내리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신자인 우리는 그 명령서를 받아 들고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 가면서 명령을 성공시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젊을 때의 모세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하나님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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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보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나무는 타지 않습니다. 원래 불이라는 것은 태워지는 것이 있어야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힘을 빌어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일하십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인간은 아무 쓸모 없는 하찮은 인간입니다. 떨기나무는 가치 없고 하찮은 나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 하나님이 불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찮은 나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하나님께 쓰여지는 도구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도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 결코 우리의 재주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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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합니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종이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종은 신을 신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스스로 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원하시는 것은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은 자기의 의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제 자기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지시대로만 움직이고 살아가야 할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말한 대로 참으로 특이한 세계입니다. 세상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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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의 행위를 열심히 하면 좋아하시고 게을리 하면 싫어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싹 무시해 버리고 전도나 헌금이나 봉사 등의 행위에만 치우쳐 있는 것이 지금 대부분의 신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종 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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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나님의 종으로 삽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입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갈 때는 하나님께 묻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내가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일에 예배 참석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은 내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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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통해서 복을 전하십니다. 복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이 복을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다른 것은 염려하지 않고 말씀대로만 움직이려고 애쓰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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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된 신앙은 자연히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각기 맡겨진 일속에서 하나님의 지시대로만 살뿐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신을 벗은 자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사명이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 바랍니다. 내 부족만 바라보며 걱정하고 염려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신앙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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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이적(4:1-9)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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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세상보다는 주님의 십자가를 더 사모하고, 관심을 두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보다 나 자신의 육신에 더 관심이 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회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이 단지 말로만 들려지지 않고 요한의 외침으로 선지자들의 외침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열매가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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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세상에 보내진 것은 단지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모세만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보낸바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용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죄인된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순종하는 인간과, 하나님의 일에 거부하는 인간으로 구분되어서 보내어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다 똑같은 인간인데 단지 하나님이 누군가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 편에서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극복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이 자리하시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누구도 동일하고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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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도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어졌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을 증거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면서 일의 가능성을 판단하며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일에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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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쉽사리 벗어버리지 못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바라보면서 일의 가능성을 판단하고 거부할 것과 받아들일 것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믿음을 앞세우고는 있지만 결국 믿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의 여건과 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인간의 힘이고 능력이지, 절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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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세는 아직까지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모세나 성경의 인물들만이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해서 세상에 보낸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야 할 신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이든 어디든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보고 살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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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자들이 어떤 일속에서 먼저 걱정과 염려를 앞세운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지를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어려운 일을 해결 받는 가운데 보여지는 것보다는 어떤 여건 속에서도 걱정하기보다는 기도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든 그 일에 동의하겠다는 그 모습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신자가 세상에 보여지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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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모세가 자기의 가능성이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오직 하나님만 믿고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신다면 먼저 모세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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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타지 않는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심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은 자신의 힘이나 가능성을 보며 주인이 시키는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러한 종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시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철저하게 잘 드리고 봉사에 열심이 있는 그런 백성으로 만드시려고 모세를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보냄 받은 애굽에 갇혀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거기서 벗어나게 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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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모세 이후에 이스라엘로 보냄 받는 선지자들이 할 일과도 동일합니다. 선지자들도 이스라엘로 보냄 받았을 때 그들이 처하고 있는 애굽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보냄 받은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열심은 전혀 강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종교적인 열심만을 보이고 있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전혀 행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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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날 교회에는 선지자의 역할을 하면서 세상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보이기가 힘들고 대부분이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 자신의 소망하는 것을 이루어 보고자 힘쓰는 사람들만이 보여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내 생명이라고 말하기를 꺼려하는 세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모세로서 서는 것은 거부하고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으로 서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고 살아가는 세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세상에서 자리잡고 잘 살기를 바라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으로 나가자는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에서 나가는 것보다는 그냥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자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는데 굳이 세상에서 나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내가 나가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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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이런 어려움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일의 가능성을 핑계삼아 그 일을 거부하고자 했습니다. 1절을 보면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고 합니다. 옛날에 젊고 힘이 있을 때에도 자신을 믿지 않았는데 지금 나이 들고 힘없는 그런 자기를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세가지 이적을 보이시게 된 것입니다. 세가지 이적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시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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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첫 번째 이적은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2)고 묻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니이다"(2)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했을 때 땅에 던지자 지팡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모세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의 차이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팡이가 땅에서 뱀이 된 것은 지금 세상은 뱀, 즉 사탄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는 것은 단지 종의 신분에서 풀어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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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신자에게 세상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이 땅은 사탄에게 붙잡혀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결국 심판 받을 땅으로 보시는데 정작 우리는 세상을 내 꿈을 이루고 성공하고 출세해서 재미있게 살 장소로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부터 세상을 뱀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야 할 이유를 확실히 알아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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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세상은 뱀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탄에게 붙들려 있는 심판의 자리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 나올 것을 외쳐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난처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무엇을 외쳐야 할 것인가를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대한 소망을 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뜻을 따라가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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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아라고 하십니다. 뱀은 머리를 잡을 때 꼼짝을 못합니다. 그런데 머리가 아닌 꼬리를 잡아라는 것은 머리를 잡아서 뱀을 정복할 분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창 3:15의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입니다. 즉 그리스도입니다. 머리를 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보면서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모세에게 '너는 네가 머리를 칠 힘을 보고 있는데 너는 꼬리만 잡으면 된다. 머리를 치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너는 다만 내가 하는 일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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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이스라엘을 설득해서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도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감화시켜서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고 알게 할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문제입니다. 이것만큼은 신자가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꼬리를 잡을 뿐입니다. 내가 이것을 해가지고 어떤 효과를 가져오겠다는 발상은 이미 내가 머리를 잡겠다는 잘못된 의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단지 꼬리를 잡을 뿐입니다. 이 말은 내가 원하는 어떤 결과를 원하고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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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적은 손이 문둥병이 걸렸다가 다시 낫는 이적입니다(6,7). 문둥병은 더러움의 표시이고, 저주받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세의 손이 문둥병이 걸렸다는 것은 모세, 즉 이스라엘도 문둥병자와 같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과 뭔가 달라서 애굽에서 인도하려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애굽과 똑같은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이적은 하나님께서 애굽을 침과 동시에 애굽과 똑같이 저주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시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두 번째 이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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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이 땅의 사람과 뭔가 달라서가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동일한 사람입니다. 저주 아래 있고 멸망 받아야 할인간입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 받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표는 하나님이 뱀으로 보시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미련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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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적은 하수를 떠다가 땅에 붓자 하수가 피가 된 것입니다(9). 물이 땅에서 피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은 심판 받을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 받을 땅으로만 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세상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 자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노아 홍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선한 문화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문화까지 멸망시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저주받을 땅으로 보신다면 우리 또한 저주받을 땅으로 보고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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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할말은 하나님이 정하셨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가르쳐준대로 말할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의 반응은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는 세가지 이적을 보고 나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또 다시 자기의 힘을 걱정하고 결과에 대해서 걱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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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자신은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요, 벙어리, 귀머거리, 눈 밝은 자, 소경이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10,11). 이 말은 내가 어떤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니까 자기의 모습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시킨 대로만 살아가면 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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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주받을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건짐받은 것을 감사하며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떤 말을 해야 할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걱정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 주어질 결과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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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4:18-26)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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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아무 종교도 가지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서 무신론자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즉 무종교자는 있어도 무신론자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안다니고, 절에도 안다니고, 성당에도 안 다니는 사람에게 가서 '당신이 믿는 것이 뭐요'라고 물을 때 그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안믿는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돈도 사랑도 아무것도 안믿는다고 큰소리쳐도 결국 자기 자신은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믿든지 다 자기가 믿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믿는 것이 자기에게는 신이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무신론자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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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신앙이라고 고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신앙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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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신앙의 중심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자기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사람이 죄인된 것은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자기 중심의 삶으로 나아갔기 때문인데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인 삶을 보이게 되는 것이고 때문에 자신의 죄인 됨을 날마다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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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한마디로 자리바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 중심으로 살던 자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리로 옮긴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세상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보여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듯이 세상을 내 소망을 이룰 장소로 보지 않고 심판 받을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내 자신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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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자신이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나는 신앙이 있을 것이다'라고 쉽게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없어도, 가짜 신앙을 가지고도 그러한 모습은 얼마든지 보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일치하느냐 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내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어지는 듯하다가도 여러 자기 문제에 걸리고, 사는 것이 힘들면 다시 내 생각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시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열심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바꾸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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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서 뭔가 그들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갖지 말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일을 했든 그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었고 모두가 하나님의 힘이었습니다. 우린 생각하기를 그들이 그런 하나님의 힘을 받게 된 것도 뭔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를 많이 했다거나, 믿음이 좋았으니까 하나님이 힘을 주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던 자가 누가 있습니까? 모두가 죄인에 불과했던 사람들이고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방식대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간섭하시는 사건을 봐도 쉽사리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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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세가지 이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가능성만을 바라보며 쉽사리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애굽으로 가지 못하는 모세에게 세가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세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갈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계속해서 자신의 가능성 여부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기 때문에 도저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는 이적을 보고서도 자기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모세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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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기의 고집을 꺾지 못하는 모세에게 아론을 붙이십니다. 아론은 단지 말을 잘 못하는 모세 대신 말을 능수능란하게 잘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하라고 모세에게 붙이신 것이 아닙니다. 아론은 모세의 불신앙의 결과로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외치는 아론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던 자신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웃음이라고 이름지은 이삭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웃어버렸던 불신앙을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닭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신이 잘못했던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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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잘 안되거나, 무슨 일이 발생하면 먼저 근심 걱정부터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도 계속 염려와 불안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신자는 일이 해결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모세가 아론을 바라보는 것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라보는 것 같이, 베드로가 닭울음 소기를 듣는 것 같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걱정하고 근심했던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마음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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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세는 애굽을 향해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 앞에서 전할 말을 가르치시는데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4:22,23)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만을 가리켜서 아들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아들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자 십보라가 얼른 차돌을 취해서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모세의 발앞에 던집니다. 즉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고자 한 이유는 할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모세가 십보라에게 아들에 대한 할례를 말했을 때 이방여인이었던 십보라가 할례를 하찮게 여기고 거절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모세가 어떤 이유로든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할례의 의미를 소홀하게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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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란 인간의 방식과 인간의 생각으로 유지되는 혈통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유지되어지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방식은 다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살겠다는 약속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아들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하지 않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심으로 모세에게 아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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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우리의 종교 방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에 매어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고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음'이라는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다는 철저한 깨달음이 있는 자,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자. 그 자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십자가로 인해서 건짐 받은 흔적이 있는 자가 아들입니다. 그 흔적은 나는 죽어 마땅한 자라는 회개입니다. 이 흔적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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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요한 것은 과연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아느냐 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신앙의 어떤 어려움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어떤 곤란한 지경에서도 하나님만을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만이 아들이며, 아들된 자들이 모이는 것이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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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것에서까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참 아들된 모습을 알려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과연 무엇입니까? 정직하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죽음에서 나를 건지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이 세상을 사는 힘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사랑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을 이 자리에 나오게 하셔서 하나님을 부르게 하시고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 찬송을 부르면서 부끄러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 없는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사랑하셔서 여전히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사랑의 증거를 여러분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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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누구관대(5:1-9)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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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직장을 다닌다면 왜 직장을 다녀야 하는지, 공부를 한다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결혼을 한다면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종교적인 행위로서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모든 행위에 왜? 라는 물음을 하고 거기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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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러분들에게 왜 이 모임에 오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무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단지 예배드리는 날이어서 왔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성경을 배우고 싶어서 왔다고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내가 왜 이 자리에 와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주일 오후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나오신 분도 있을 것으로 압니다. 만약 주일이니까,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주일을 안지키면 죄가 되니까 나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그 생각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요구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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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인들은 뭔가를 지키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주일을 지키니까, 십일조를 하니까, 봉사를 잘하니까 '나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깊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사실 그것이 자신의 신앙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의 행위를 앞세우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하는 것이므로 결국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으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증거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구제도하고, 금식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내세웠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철저하게 아주 철저하게 부정하시고 무시하셨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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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물음에 '신자니까 해야 한다'는 답을 많이 내릴 것입니까? 예배? 신자니까 드려야 한다. 십일조? 신자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 봉사? 신자니까 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공부는 왜 하는 것입니까? 직장은 왜 다니는 것입니까? 그것도 '신자니까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단지 '신자니까 한다'라고 한다면 결국 그런 행위가 있는 사람은 모두 행위 때문에 신자가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경에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자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무엇을 하고 안하는 문제가 우리를 신자되게 하고 신자 안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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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십일조를 하는 것이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헌금의 행위를 금지시키는 말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한다고 해서 그것이 또 신자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그 전통과 정서가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나 주일 성수라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할 때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반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자의 표, 교회의 표를 십일조와 주일성수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듭 말씀드리건대 십일조, 주일 성수 그 자체는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의미도 아니고, 안식일도 주일 성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이 신자됨의 증거를 성경에 대한 자세한 고찰도 없이 앞서 말한 대로 전통과 종교 정서에 따라서 규정하고 그것을 지키자고 노력해 왔을 뿐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노력과 열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사실 바리새인들의 열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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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할 때 꼭 반발하는 말은 '그러면 십일조도 하지 말고 주일에 예배당에 나오지도 말라는 얘기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반발을 하나님을 사랑해서, 진심으로 예수님이 피 흘리셔서 세우신 교회를 사랑해서 하는 말로 들려지지 않고 자신의 종교를 지키고, 자기의 고집을 지키고, 자신의 전통을 지키고, 교회라는 인간 조직체를 지키기 위한 반발로만 들려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발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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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십일조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책망은 하고 있지만 헌금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단 하나님이 제물(헌금)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특정한 날(주일)을 지키는 것은 금지하셨지만(4:10,11)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을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하건 나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렇게 하니까 신자다'는 생각은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헌금을 해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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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앙 생활은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이 되면 안됩니다. 그런 신앙생활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고자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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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절기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때는 아직 유월절, 맥추절, 추수절, 나팔절 등 여러 가지 절기가 제정되지 아니한 때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제외한 모든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는 지키지 못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야 지킬 수가 있었던 절기입니다. 때문에 이때의 절기는 3:18절의 말씀이나 5:3절의 말씀대로 희생이 있는 제사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희생 제사의 의미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제정된 유월절로 인해서 자세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절기가 오늘날 예배를 가리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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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의할 것은 지금 우리들이 드리고 있는 것 같이 순서가 짜여져 있는 형식으로서의 예배를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희생이란 결국 어린양의 희생을 말하는 것이고, 어린양의 희생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예배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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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을 제사로 드리는 것, 즉 내가 제물되는 것이 예배다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제물 되신 것같이 나의 삶이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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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세상은 예배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자로 구별됩니다. 이 또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가지고 구별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일 성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를 물을 뿐입니다. 직장도 누구를 위해서 나가느냐. 공부도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의 생계를 위해서 직장에 다니고, 나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공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위한 삶을 버리지를 못하고 하나님께 나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제사와 제물을 거부하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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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는 주님 때문에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주님 때문에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 모습이 바로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을 내 보내달라고 했을 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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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여호와란 칭호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거나 여호와란 신이 있다는 것도 들어보지 못한 상태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라도 여호와란 신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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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1:8절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즉 애굽이 하나님의 은혜로 강성하게 되었음을 모르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을 압니다. 예수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사람에게 가서 '당신이 성공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누군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렇게 성공했지 하나님이 누군대 하나님이 나를 성공하게 했느냐?'라는 반응을 보일 것은 뻔합니다. 바로가 바로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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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목사가 자신의 교회가 커질 때 그것을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 때문이라고 교만해지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모르는 모습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했다고 말은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은 교회가 망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겠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가 부흥한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호와를 아는 목사는 눈에 보이는 조직체인 교회가 관심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만 관심을 두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 가르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호와를 아는 자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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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가지 의문되는 것은 하나님은 왜 굳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벗어나게 해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인가? 입니다. 애굽에서 예배를 드리면 안된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즉 애굽의 사고 방식 안에서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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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사고방식은 이 땅에서 될 수 있으면 성공해서 편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목표입니다. 이러한 삶의 목표를 가진 자가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떤 식으로 찾을 것 같습니까? 모두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장해 가면서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부름에 속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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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고방식 안에서는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은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죄악된 문화와 문명으로 가득차 있는 이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때 가인의 문화와 문명을 모두 수장시켰고, 또 지금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이 땅을 불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해놓고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모순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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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죄로 보고 심판의 대상으로 보시는 것 같이 우리 또한 세상을 심판의 자리로 보고 그 자리에서 떠나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벗어나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다른 영원한 세상을 기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어지는 것을 미리 이 땅에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하고, 모여서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고 다시금 우리는 천국백성이지 이 땅의 사람이 아닌 것을 확인하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이 예배를 애굽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드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로는 천국을 사모하고 소망하며 산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살아가는 모습이 천국을 위해서 세상을 포기하는 모습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절대로 천국을 소망하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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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고, 편하게 살아보는 것이 소망인 사람에게는 여호와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이 쓸데없는 소리로만 들려지게 마련입니다. 마치 바로와 같습니다. 바로는 불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세상에서의 나의 성공과 번영을 방해하고, 부정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바로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사고방식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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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왜 신약에는 십일조가 없다는 말이나, 주일성수가 성경에 없다는 말이나, 건물로서의 예배당을 부정하고, 목사에 대한 권위를 부정하는 말에 그토록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런 것이 자기를 지키고, 자기 교회를 유지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교회가 안된다는 두려움이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바로의 신을 하나님이라 이름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무시해 버리고 자기의 힘을 가지고 그들을 핍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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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 애굽의 특징은 '여호와가 누구냐'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모릅니다. 이 세상도 여호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세상은 어떤 모습입니까? 돈버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애굽 밖으로 나가겠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는 예배를 노동력의 손실로 보고 있고, 노동력의 손실은 곧 자신에게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이 누리자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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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혹시 신앙생활 열심히 해서 복을 누리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자는 자기의 편안함과 손익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의 사랑에 이끌려서 나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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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회는 모든 것이 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제력이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가족 관계도 돈으로 인해서 깨어지고, 친구 관계도 돈으로 인해서 원수가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교회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돈에다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는 이유가 뭐냐면 여호와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돈이 있기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만 바라고 살아야 할 피조물이 돈을 바라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돈을 제공하는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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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을 더 심하게 받게 되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을 합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벗어난다는 문제보다는 바로에게 잘보이고 아부를 해서라도 어쨌든 편한 삶만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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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 사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어떤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천국과는 상관없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애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하나님의 노동을 아는 자들로 모여서 하나님의 일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하나님이 하신 일을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삶이 곧 영적예배입니다. 그것을 함께 찬양하고 확인하며 천국의 삶을 서로를 통해서 나타내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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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지 않음(6:2-9)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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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는 세상을 고발하고 있는 책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면 나는 어떻게 사느냐는 걱정부터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립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세상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오히려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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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보다는 자신이 더 소중하고, 신앙으로 사는 것보다는 우선 돈버는 것이 더 바쁘고,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기보다는 내 이름이 나타나기를 더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상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살고자 애쓰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우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에게 돈을 주고, 힘을 주는 권력자를 무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교회 목사가 무섭고, 직장 사장이 더 무서운 존재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을 못하고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냐며 어물쩍 넘어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강한 자의 비위를 거슬려서 자기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신앙을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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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끄집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특징은 나를 끄집어내신 분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만 듣고 삽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삽니다. 바로와 같이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하면서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무시해 버립니다. 성경에서 노아언약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힘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양심도 적당히 팔아가면서, 강한 자에게는 머리를 숙이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자로 사는 것을 지혜로 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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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자는 뭡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신자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것이 신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우리들부터 성경을 말씀으로 믿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는다면 세상은 심판 받을 장소임을 알아야 하며,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후에 사라져버릴 안개요, 풀의 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힘이라면 세상 것은 없어도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며 기뻐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심판의 장소인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에 집착해 있고, 사라져 버릴 것에 지나지 않은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법은 하나님이 끄집어내신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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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모르는 애굽에 모세와 아론을 보내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자기의 힘과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느냐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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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구약에서는 그것을 성전으로서 보여주셨습니다. 희생 제사가 있고 그 희생의 피가 뿌려지는 지성소가 있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만나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전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예수님이 오신 이상 이 땅에는 형태화된 성전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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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며 피를 흘리시므로 이 땅에 교회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예배도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세상에서 건짐 받은 존재로서 이 땅을 의지하지 않고 장차 주어질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겠습니다'라는 고백과 뜻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예배며, 그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만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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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우리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면서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인다고 말하면서도 교회의 모임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겨버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세상에 보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배라고 하는 것은 장차 주어지는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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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드리는 자는 세상 것을 붙드는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오직 생명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의 나라가 주어지고 세상이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세상 것에는 관심을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이런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자들이나 자기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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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돈이 없으면 세상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혹 돈이 없어 세상을 못살고 그 자리에서 죽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예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세상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과 타협해서 세상의 좋은 것을 나도 누려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는 신자는 세상과 싸우게 되어 있고, 언제나 갈등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할 관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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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걱정되는 것은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보다는 애굽의 미움을 받아서 고역이 가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이라면 절대로 자기들을 이렇게 고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땅에 그들을 들여보내시겠다고 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와 아론 때문에 현재 자기들의 삶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졌다는 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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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고통과 어려움이 더 가중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심판이라는 말보다는 고통과 어려움이라는 말을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왜 꼭 고통이어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을 살짝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바꾸어 가지고 구약의 복을 언급합니다. 구약에는 물질적인 복도 나오는데 왜 물질적인 복은 말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굳이 고난과 어려움을 강조하면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겠느냐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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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구약의 복은 장차 참된 복으로 오실 분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할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거하는 땅의 소산물을 통해서 보여줘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잘살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장차 올 하늘의 복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에 와서 구약의 눈에 보였던 약속의 땅의 의미가 그리스도안으로 완성된 것 같이, 복이라는 것도 세상 물질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것입니다. 때문에 구약의 복을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복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은 예수 그리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곧 최고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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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상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고 망해도 괜찮다는 것이 진짜 복을 누리고 있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을 깨닫기 위해서는 좁을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단지 자기들의 일이 더 가중되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끄집어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편안함이 더 관심의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할 때는 하나님을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편안함을 건들지 않을 때 얼마든지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등을 돌리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삶의 목적을 영생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천국을 소망하신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주님의 백성으로 여호와를 알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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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퍅(7:14-19)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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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할 때 무엇 때문에 심판하시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심판 당하는 죄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 또한 그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교회 다니는 것으로 심판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열심히 기도하는 생활, 십일조 꼬박꼬박 잘하고 주일 잘 지키는 삶이 곧 심판을 피할 수 있게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그 원인은 그런 것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거나,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거나 기도를 하지 않아서 심판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의 원인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그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영광은 자기 자신의 영광일 뿐입니다. 결국 죄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수많은 죄의 열매가 세상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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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은 그 어떤 윤리 도덕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윤리 도덕이 죄를 막을 수 있다면 세상은 아무런 범죄도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윤리, 도덕도 인간 사회에서 이웃에게 해를 주지 않기 위한 규범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더욱 강할 때 윤리나 도덕도 그것을 방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이나, 오늘날 사람들이 우려하는 성범죄라는 것도 자기의 유익과 쾌락을 앞세우는 죄에 대한 열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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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죄는 이웃에게 해를 끼쳤을 때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법은 이웃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했을 때 죄로 규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웃에게 해를 주지 않았다고 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을 행하십니다. 오늘 본문부터 시작해서 12장까지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렸던 10가지 재앙이 등장합니다. 애굽이 10재앙을 받아야 할 이유는 이스라엘을 내보내지 않았거나 그들이 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애굽이 악해서 재앙을 받는다면 오늘날 세상은 벌써 심판을 받았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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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이 10재앙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과 같으며 그것이 심판의 이유가 된 것입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말에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말로 무시를 해버립니다. 마음에 여호와를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에는 여호와 대신에 나라가 부강해지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욕심이 여호와의 은혜라는 것을 무시하게 되고, 자기의 힘을 앞세우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강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게 되고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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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애굽의 심판을 보면서 그 심판이 오늘 우리에게도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의 말을 듣지 않은 강퍅으로 인해서 재앙을 받았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보내신 자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심판은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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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역할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곧 강퍅이 되고 강퍅한 그 마음으로 인해서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자신이 꿈꾸고 있는 세상 인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대한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결혼을 앞둔 처녀 총각이 결혼에 대한 꿈을 가지고서 자신의 배우자를 찾고 있는데 결혼은 별 것 아니니까 너무 고르지 말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결혼에 대한 꿈을 가지고 예수를 찾는 자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원하는 좋은 배우자를 원하게 될 것이고, 또한 자기 마음에 드는 배우자가 나타나야 그것이 곧 예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자체가 곧 마음이 강퍅한 상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내가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관심두기보다는 하나님이 누구를 만나게 하시든지 그 사람과 함께 살면서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고 감사하며 사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있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굽의 심판을 보면서 그들의 모습이 오늘 나에게서 보여지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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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분명히 바로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낸 자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보낸 자라면 그에게서는 모세와 아론의 모습이 보여져야 하고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의 강퍅의 모습이 증거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자에게서조차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강퍅한 모습만 보여진다면 심판은 오히려 여러분 자신에게 내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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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낸 사람은 자기의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그 뜻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강퍅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10재앙은 바로가 하나님이 보낸 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입니다. 한 번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한가지 재앙이 내렸는데 결국 10재앙은 바로가 10번을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처음에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지팡이로 하수를 쳐서 그 물이 피가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바로 왕이 애굽의 술객들을 데려다가 모세와 같은 일을 행하도록 했을 때 애굽의 술객들도 모세와 같이 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하는데 그때 바로의 마음은 우리의 힘으로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강퍅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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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는 그 강퍅한 마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결과에도 감사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미리 내려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포기되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녀가 어떤 학교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강퍅하고 교만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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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한 일을 가지고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고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세상을 살 수 없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는 것을 아는 신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이 재앙을 받을 때 이스라엘은 박수를 치면서 고소해하고 있을 입장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 재앙을 받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재앙을 받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경계하는 도구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달라서 재앙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나 애굽은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애굽이 자기들에게 고역을 더 가중시켰다고 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던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 이스라엘더러 애굽이 무엇 때문에 재앙을 받는지를 보면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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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다고 하셨는데 강퍅하지 않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것은 유월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0재앙의 마지막은 장자의 죽음입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모두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마음이 강퍅하지 않은 사람들만 살아난 것입니다. 10번째 재앙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12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어린양의 피를 흘려서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랐던 사람들입니다. 애굽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상관없이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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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이시지 않는 것입니까? 12:13에 보면 피가 표적이 된다고 합니다. 피가 표적이 된다는 것은 피를 바른 집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으로 여겨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를 바른 그 마음을 강퍅하지 않은 마음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피를 발랐기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은 생명의 근거가 자기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나 대신 죽은 양 때문에 내가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퍅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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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나도 심판 받을 자인데 주님의 피로 인해서 심판에서 건짐 받은 자가 되었음을 알고 나를 위해서 살고자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바로가 10재앙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재앙 하나 하나를 우연히 그렇게 된 것으로 여기거나, 그 순간만 지나면 괜찮아 질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우연으로 돌려버리거나 재수 없어서 일어난 일로 여겨버리지 우리를 십자가 쪽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로는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강퍅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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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유월절의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마음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신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신자가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곧 강퍅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없이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천당 가겠다는 강퍅한 마음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마음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보낸 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보냄받은 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내기 위해서 살겠다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여러분은 심판을 넘어가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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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14:21-25)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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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직장을 다니면 직장에서의 목표가 있을 것이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학교를 다녀도 목표를 가지고 다니고 주부들에게도 집을 사기 위해서 저축을 한다든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며 살아갑니다. 물론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보면 목표가 있습니다. 교회마다 표어라든가, 생활 목표라는 것을 세우고 전도나 교육이나 구제 또는 봉사 등등 여러 가지를 삶의 목표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이 목표와 계획을 세우면 자연적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능력과 수단을 최대한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의 경영만이 눈에 보일 뿐이지 도대체 하나님이 경영하신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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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님께 '내 가정을 지켜주옵소서' '이 교회를 경영하여 주옵소서' '이 사업을 도우소서'라는 식의 기도를 많이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것이나, 경영하신다는 것이나, 도우신다는 의미를 너무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고 할 때는 세상의 재난으로부터가 아닙니다. 재난으로부터 지켜주는 신은 이방신이며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단으로부터 지키십니다. 따라서 사단이 우리를 세상의 것으로 유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세상의 것을 자르심으로 우리를 지키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일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경영하신다는 것도 번창을 위한 경영이 아니십니다. 이것도 역시 세상의 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망하게 하든 흥하게 하든 우리의 신앙에 유익한 방향으로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문제는 전혀 생각지 않고 무조건 커지는 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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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신자가 가져야 할 목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순종하겠다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떤 고통의 길로 끌고가셔도 거기에 순종하겠다는 것이 신앙입니다. 만약 이 말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뭔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 안에 뭔가 불신앙적인 요소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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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무절제로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성실하게 살아가시되 성공을 목표로 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삶이 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그 일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시되 그것을 목표로 삼고 발버둥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먹은 대로 일이 안되었을 때 자연히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흐르게 되고 좌절과 낙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시면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세상과 다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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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몸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벗어난 사상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세상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점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 현재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모습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항상 멀어져 있는 자신을 보고 부끄러움과 회개함으로 나올 때 그것이 곧 겸손이고 진짜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유월절 피를 아는 마음인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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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면 당연히 좋은 곳으로 인도하셨을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립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당연히 형통하고 성공적인 길로만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로 인도하셨습니까? 홍해가 막혀 있는 곳입니다. 애굽에서 고생하다가 유월절 피를 발라서 애굽에서 나왔으니까 이제 약속하신 땅으로 곧바로 들어가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인간의 꿈이고 소망이지만 하나님은 단지 편안한 삶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사상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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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나의 삶은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면 성공적인 길로 가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앞에 두고 있을 때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오자 당장 드러난 것이 불신앙이었습니다. 여기서 죽을 바에야 차라리 애굽의 종이 되어서 애굽을 섬기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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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다는 것보다는 자기의 인생을 더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살아야 하다는 인생에 대한 애착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애착심을 가지고 있을 때 드러나는 것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모습이 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믿음이 방해될 때는 적당히 감추기도 합니다. 그순간 하나님은 아무런 힘도 없는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여겨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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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에만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세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이 좇아오는 순간 자신들의 심판자를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 군대로 알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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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의 눈에 들려고 할 때는 필연코 사람에게 매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들기 위해서는 잘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신자는 남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보여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목사도 아닙니다. '목사가 나를 어떻게 볼까?'이런 문제에도 전혀 마음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가 여러분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도 여러분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평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가되는 것은 말씀 앞에서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제대로 증거됐을 때 그 말씀이 나를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볼 것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라고 하니까 한다는 것은 그 속에 뭔가 모르게 목사라는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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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13)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갈라진 바다 속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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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바다밖에 있게 하고 애굽만 바다로 들어가게 해서 애굽을 몰살시킨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갈라진 홍해로 들어갔습니다. 그 홍해 속에서 애굽인들이 죽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달라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대신에 죽은 다른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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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는 애굽과 가나안의 사이에 있습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입니다.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는 유월절 피를 아는 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과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애굽 군대 앞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들을 대신하여 흘린 피가 있었습니다. 그 피를 아는 것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새사람과 옛사람의 차이입니다. 피로 인해서 새로 지음 받은 새사람과 피를 알지 못하고 옛사람 그대로인 사람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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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피를 바른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을 장자의 죽음에서 살려냈고, 홍해에서는 애굽은 죽고 이스라엘은 살아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할 일은 다만 피를 바라보고 믿을 뿐입니다. 그외 다른 행동은 전혀 요구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내 정성이나 내 열심을 보태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일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찬양하고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어야 우린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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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 군대가 자기들 눈앞에서 바다에 빠져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은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지 못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구원을 찬양을 했습니다. 그것이 15장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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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나님의 구원만 바라보고 삽시다. 구원을 바라보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이 두려운 존재로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모으지 못할까 두려워지고, 남들보다 출세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집니다. 자꾸 믿음도 좋지만 세상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세상과 절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것 없다고 한탄해하고, 애통해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까? 홍해에서 빠져가는 애굽을 보면서 세상의 마지막이 어떠한가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옥 가더라도 오늘 하루 멋있게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생각이 아니라면 구원을 바라보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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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망(15:22-26)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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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홍해 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홍해라고 하는 것은 심판의 자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속이라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세상은 물 속에서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오직 노아만이 물 속에서 살아났을 뿐입니다. 홍해 사건에서 마찬가지로 홍해가 갈라진 물 속에 이스라엘과 애굽이 있었지만 이스라엘만 빠져나오고 애굽 군대는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살고 애굽은 죽었습니까? 그것은 옛사람과 새사람의 차이였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구분점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말합니다. 즉 피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그것으로 새롭게 지음을 입은 자, 곧 새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피를 믿음으로서 심판 속에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피를 믿었다는 것으로 모든 신앙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피를 믿는자로서 이스라엘이 넘어야 할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15장에서부터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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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쪽은 여호와라고 하는 신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삽니다. 먹고사는 문제라면 자기들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굳이 여호와라는 신의 힘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한쪽의 사람들은 여호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나에게는 하나님이 없으면 안된다'라고 하는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여호와를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내 힘으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데 하나님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는 것을 아는 자가 여호와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부류의 세상 사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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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식하시며 삽니까? 세상 먹고사는 일에 바쁘게 사시다 보니까 구원에 대한 관심은 멀어져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또 우선 구원보다는 세상 먹고사는 일에 하나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즘 신자들의 생각과 관심은 모두 하나님 쪽이 아니라 세상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세상 사는데 바쁘다는 것 때문에 신자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관심에서는 멀어지고 오로지 자기 살아가는 데에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생활, 좀 더 편안한 생활만을 원하고 있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구원의 일에 대해서는 점차 시큰둥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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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은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으로 베푸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우리는 그 놀라우신 은혜에 대한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시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이 신자의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것을 발견하신다면 주저하지 말고 신자로서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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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아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에 붙들린 삶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런 사람은 나중에 이런 변명을 합니다. '마음은 원했는데 육신이 약해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내 마음은 아시겠죠'라고 하게 됩니다. 이것은 육신의 약함을 핑계대서 죄의 자리에 안주하려는 의도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반역하고 원망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마지막까지 반역과 원망의 자리에서 살다가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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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사건을 겪고, 또한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애굽 군대가 물 속에 빠져 죽는 것을 목격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찬양은 사흘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홍해에서 나온 후 사흘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다가 겨우 물을 발견했는데 그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목이 마른데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사흘 전의 구원의 감격과 찬양은 다 잊어버리고 모세를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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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면서 '나 같으면 그렇게 안한다. 홍해가 갈라지는 그런 엄청난 기적을 경험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라는 생각이 나겠지만 사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나 지금 이 자리에 나나 여러분들이나 다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욕한다면 그 욕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해서 하는 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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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을 생각해 보면 불평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흘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다면 못견딜 정도로 목이 마르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다가 겨우 물을 얻었는데 그 물이 마시지 못할 정도의 물이라면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왜 물을 안주시는 것입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무엇 때문에 좋고 편안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꼭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길로 그들을 인도하셔야 했습니까? 원망이 나오도록 해놓고 원망을 하면 그들을 책망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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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일부러 물이 없는 곳으로 또는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하는 사랑을 베푸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잘먹고 잘살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것은 물도 양식도 아니라 생명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사는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영원히 사는 생명을 바라보고 살아가라고 일부러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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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원하는 생명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은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 즉 먹을 것 마실 것이 풍부한 것을 자기들의 생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라고 해서 다르지가 않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서도 사람들이 원하는 생명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두 생명을 모두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풍족함이고, 죽어서도 영생을 원하는 것입니다. 단 한부분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 신자들의 고집입니다. 사흘동안을 물이 없는 곳으로 다니게 한 후 마실 수 없는 쓴 물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 시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심술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원망을 의도적으로 이끌어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을 골탕먹이려는 의도도 아니고 원망하게 해서 책망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심으로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은 생명은 생존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대치되어 이 둘이 만났을 때는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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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안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는 초월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물을 철저하게 끊어버리셔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을 있게 하시는가?' 그 마음을 아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존의 문제를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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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 눈을 뜨지 아니하고 오로지 이 땅에서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만 행동할 때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생명을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백성들이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물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말씀대로 하자 쓴 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쓴 물도 단물로 변하게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즉 단물은 이미 여호와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쓴 물로 인해서 원망할 필요없이 단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생명만을 바라보고 말씀에 순종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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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 우리는 그 문제의 해결에만 급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나에게 던지신 이유가 무엇일까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하루 빨리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이미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생존의 문제를 초월하고 영생을 바라보라고 나에게 그런 상황을 주셨는데 정작 우리는 문제 해결에만 급급해 하면서 영생보다는 생존에 관심을 두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탄식을 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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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지 우리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쓴 물을 단물 되게 하신 것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쓴 물이 없도록 하셨어야 마땅합니다. 단물 즉 문제 해결은 하나님 손안에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하시든 그것은 하나님 마음대로 입니다. 자기 문제 해결에만 매달려 있으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지 그 뜻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관심 속에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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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에 보면 하나님은 스스로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나 애굽은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쓴 물이라는 시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인간 됨을 드러내시고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극복하시면서 이스라엘만큼은 애굽같이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조차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생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백성이 되도록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치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 열심이 우리를 천국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열심은 없습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쓴 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원망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마시고 쓴 물 앞에서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십시오. 그들이 어떤 면에서 부족 되었던가를 바로 찾으시고 쓴 물의 상황 앞에서 생존보다는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는 훈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치료하시는 여호와께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생명 안에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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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나(16:4-12)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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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항상 눈앞의 일에 대한 걱정거리를 잔뜩 안고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걱정 근심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신세 한탄의 이유는 자기의 환경이 좋지 않아서, 즉 돈이 없거나 출세하지 못해서 근심 걱정이 발생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이 어느 수준을 넘어설 때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하게 됩니다. 신을 믿었든 안믿었든 하늘을 찾는 것입니다.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누구나 신을 찾고자 하는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이란 신의 노여움만 사지 않으면 인간을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어떤 어려움이 발생할 때 자연히 신에 대한 원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뭐 잘못한게 있어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느냐'는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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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서 원망하는 내용을 배웠습니다. 우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보통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상상이 여지없이 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의적으로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물을 발견했는데 그 물도 마실 수 없는 물입니다. 즉 고의적으로 원망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감춰져 있던 원망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삼일을 물이 없이 다니면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도우셔서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실거야'라는 생각에서 목이 마른 것을 참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발견한 물이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마실 수 없는 물이라면 차라리 물을 보지나 말게 하시지 왜 물을 주시면서 마실 수 없는 물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원망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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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행복하게 하시거나 편안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신의 모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생명에 방해되는 것은 잘라 버리시고 오직 생명 되는 것만을 우리에게 제공하십니다. 물은 우리의 목을 잠시 축일수는 있지만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생명수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생존에 급급해서 생명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끊임없이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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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내용도 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목마름의 문제가 끝나고 나자 이제는 배고픔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광야는 사막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사막으로 그들을 인도하셔서 배고플 수밖에 없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서는 배가 부르고 평안하면 안됩니다. 사람은 배가 부르고 평안하면 생존의 즐거움에 빠지게 되고 생존의 즐거움에 빠져 있으면 그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비춰지는 하나님은 단지 그들의 생존을 보호해주고 더욱 즐겁게 해주는 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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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물이 없으면 못산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생존에 매여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을 우선 배가 부른 후로 미루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일은 자신의 생존 문제가 해결된 후에 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 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믿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틀린 말이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보다 생명에 대한 문제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장 굶어 죽는다고 해도 생명에 대한 문제만큼은 포기하지 말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생존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생명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애굽적인 사고방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시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주시고자 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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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구나"라고 원망을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애굽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서 간다는 것보다는 우선의 고통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여호와의 손에 죽어도 애굽에서 먹을 것을 실컷 먹던 그때가 더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 아닙니까? 지난주에 이야기 한대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생존의 문제 때문에 생명과 연관된 일들을 소홀히 해 버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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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런 길로 인도하신 것은 한마디로 애굽에 대한 그리움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자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은 오늘 여러분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네가 과연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벗어버리고 생명을 그리워하고 있느냐?'를 물으시기 위하여 우리가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땅의 것을 우리의 손에서 빼앗아 가시기도 하고, 또는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곳으로만 인도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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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세상에 의지하는 것이 있고, 재미 붙인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되는 것이 있고, 하나님 믿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관심을 두겠습니까? 오히려 때로는 믿음이 자기의 세상살이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후회할 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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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만나를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먹던 것을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애굽에서, 즉 세상에서 전혀 보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했던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것은 일단 이스라엘 백성의 배를 부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배를 부르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스라엘이 원하는 음식을 주셔야 합니다. 또 처음부터 아예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셔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시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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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란 세상의 음식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입니다. 배불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을 좋아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음식은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것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배부르거나, 세상의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4절을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하십니다. '배가 고파서 나를 원망했으니까 배가 부르면 나를 순종하는지 두고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이 해결되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치 않아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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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나의 지금 이 일만 해결되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모든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불평과 원망이라는 것도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고 생존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죄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어떤 일을 당하든 그 일이 여러분의 생명에 지장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생존의 문제에서 불편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영생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불편을 불편으로 여기지 않는 신자가 곧 하나님을 아는 구원받은 신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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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만나를 거둘 양을 정하셨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어기고 남겨 두었던 사람들은 만나가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긴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칠일 째는 만나를 거두어서는 안되었습니다. 6일에 미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규례는 하나님은 만나를 음식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배부름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배부름을 위해서 만나를 모으거나 하면 썩어버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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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배부르기 위해서 음식을 구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음식을 위해서 살게 되면 음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 원망을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즉 성경입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영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해하려고 하지 마시고 세상에 없는 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땀흘려서 일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물이 없는 곳으로 먹을 것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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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배부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배부름을 위해서 일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하십시오. 그럴 때 생존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음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하늘의 양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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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 음(17:1-7)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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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가장 먼저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은 '지금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고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어느 한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되어져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이 일에 대한 자기 노력이 없을 때 사람은 대단한 착각에 빠져 살아가게 됩니다. 그 착각이란 자신 스스로를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정도로만 하고 살아가면 신자로서는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봐도 자신에 대한 말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누구에 대한 말씀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배워가는 작업이 그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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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성경을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자는 그렇지 못한 자와 차이점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날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점검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절실히 깨달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자신은 재능이 있으며 실력이 있는 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신앙 좋은 자기를 높여줘야 하고 칭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는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간섭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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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고 있느냐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훈련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훈련을 시키십니다. 우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 없고 양식 없는 광야로 인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기 위해서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은혜와 사랑을 아는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에 대한 소망에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이 없고, 양식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물과 양식을 바라보고 살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물과 양식은 잠시동안 우리의 목을 축일 수 있고 배를 부르게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생명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원망과 불평이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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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도 15장과 동일하게 마실 물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15장에서 물이 써서 못마시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마시게 된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것을 안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을 마시게 된 것을 체험했다면 그 능력을 믿으면 되는데 왜 또 불평을 하는가? 어리석은 사람들' 이런 마음을 가지기 쉽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도 그들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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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을 마시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다시 물이 없다고 해서 원망을 한 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결국 육신을 만족스럽게 해주는 세상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요구대로 세상 것을 주실 때 그것이 신앙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물을 얻는 체험을 하고서도 또 다시 원망을 하는 것입니까? 육신의 것은 육신의 것이 있을 때만 감사와 은혜를 말하게 될 뿐이지 그것이 없다면 불평이 나오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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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요구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그 경험으로 평생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물을 바라보지 않고 물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다면 어떤 모습을 보였겠습니까? 물이 없다고 해서 또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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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신자가 어떻게 세상을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항상 육신의 문제만을 바라보고 삽니다. 육신의 것이 주어지면 그것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육신의 것이 주어졌다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관심을 나에게 주어진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보여야 할 바른 모습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육신의 것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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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또 다시 물이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 다시금 물이 있던 애굽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믿음의 증거를 세상의 것에 두게 되면 세상 것이 없을 때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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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노정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곳은 육신의 괴로움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 때 주어지는 것은 축복이 되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괴로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열심히 봉사하면 모든 일이 형통해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렇게 하시지만 우리에게는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보다 잘난 것이 뭐가 있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대우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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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때 그 결과는 사정이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하시면서 이런 경우를 많이 당하지 않습니까? 평생토록 신앙생활 했는데도 '왜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나를 수월한 길로 인도하지 않고 하는 일마다 꼬이게 하시는가?'는 의심을 가져보신 적이 없습니까? '네가 하나님을 그렇게 열심히 믿는데 네 하나님은 왜 너에게 그렇게 하느냐?'는 말을 이웃으로부터 들어보신 적이 없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마음이 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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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이 없자 다시금 모세를 원망합니다(3).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4).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5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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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느냐면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있는 지팡이는 애굽의 하수를 쳐서 물이 피가 되게 했던 지팡이고, 홍해를 갈라지게 해서 이스라엘을 살린 지팡이입니다. 지팡이가 신비한 마술 지팡이 같은 힘이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지팡이가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아야 했습니다. 홍해를 갈라지게 한 그 지팡이가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물의 문제 정도야 해결하지 못하겠느냐는 믿음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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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같이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셔서 나에게 안 계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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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증표를 자신의 일이 잘됨으로서 확인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지 않은 것으로 여겨버리게 됩니다. 이런 믿음은 보이지 않으신 분을 보는 것같이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확신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란 자기의 일이 잘되든 잘못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은 세상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배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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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을 쳤더니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믿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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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여러분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해 오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내가 망하는 자리에도, 깨어지고, 무시당하고, 욕먹는 그 자리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고 계셨음을 믿습니까? 믿음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신 분을 믿는 것입니다. 또 보이지 않으신 분을 보이는 것을 가지고 증명하고자 하는 것도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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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을 보면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시험하였다는 것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마실 수 있다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것으로 알고, 만약 물을 마시지 못하면 안 계신 것으로 알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시험한 것이고 여호와와 다툰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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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런 모습을 보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건 속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일을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이 해결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계신 것으로 인정하겠고, 해결이 안되면 안 계신 것으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일을 해결해 줌으로서 보여달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고 여호와와 다투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믿음으로 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서 자기 생각대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과 다투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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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 이스라엘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분을 의지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갑자기 아말렉 군사를 등장을 시키십니다. 8절부터 보면 갑자기 아말렉 군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게 됩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손을 들고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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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결과는 여호수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모세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지팡이를 든 손이 올라가면 이기고 내려가면 지는 것입니다. 결국 아말렉을 등장시켜서 싸움이 있게 하신 것은 아말렉을 물리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눈으로 승리가 누구에게 달려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밑에서 여호수아가 군사들과 아무리 힘써 싸워도 모세의 손이 내려가 있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손을 올리기만 하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청각 교육을 시키십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힘과 재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모든 것, 죽고 사는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고통에 처했다고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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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울다가 웃다가 기뻐하다가 슬퍼하는 삶의 연속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신앙임을 기억하십시오. 이 불신앙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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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가 아무리 잘해도 결과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행위 때문에 잘됐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열심히 해서 잘됐고, 일군이 많아서 잘됐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신앙이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믿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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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움 받은 자(18:17-26)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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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삶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을 보면 보통 관심이 둘로 나눠지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의 관심과 교회에서의 관심입니다. 세상에서 살 때는 자신의 육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와서는 교회 일에 관심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통 교회에서도 신자가 교회에만 관심을 가져주면 세상에서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든 그것은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자라는 사람들이 교회의 일에만 조금 관심을 가져주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끝내 버리려고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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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합니다. 일단 신자가 세상에서 사는 것과 교회에 나오는 것을 다르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나 교회, 즉 성도의 모임이나 예배당 그 어디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모든 곳은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살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 어디에서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가져야 할 관심은 세상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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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일정한 순서를 정해놓고 정해진 시간 되면 그 순서에 의해서 묵상기도하고 사도신경하고 시작하는 이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란 시간에 매여있지 않습니다. 어떤 순서에 매여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일에 모여서 사도신경하는 것이 예배 시작이라면 사도신경 전에는 예배가 없는 것입니까?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위해서 나 개인의 욕심과 목표가 버려지는 것 자체가 예배입니다. 처음에는 내것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 지음 받았기 때문에 내것이란 없는 존재인데 내 것을 주장하고 살았던 삶에 대해서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는 그 자체가 이미 자기를 제물 삼는 예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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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은 이와 같이 이미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함께 모여서 한마음과 한뜻으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얘기하고 나누는 것이지 예배가 없었다가 주일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의 삶에 예배가 없었다면 그 사람은 주일에 나와서 아무리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예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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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떻게 다르냐면 생명이 있는 새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이 없고 죽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한다는 것은 자기의 죄인 됨을 알고 동시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생명이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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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절대로 나 개인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 개인에 관심을 두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 자연적으로 교회가 자신에게 유익이 안되고 재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는 교회를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백화점에서 산 물건이 마음에 안든다고 바꾸듯이 쉽게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개인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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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 자로서 교회로 모인다면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남이 나에게 뭐라고 하든지, 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든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은혜와 평강으로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실로 출애굽한 신자입니다. 세상을 벗어나고 세상을 초월해서 살아가는 삶, 참으로 멋있는 삶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런 삶을 이 땅에 보여줘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비로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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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명, 영생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그 생명 때문에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갑니까? 만약 생명에 대한 은혜와 사랑보다는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이 여러분에게 더 큰 관심이고 중요한 일로 되어있다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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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꼭 이스라엘을 어렵게 만드시고 나서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왕 주실거면 왜 그렇게 고생을 시키시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관심이 먹고 마시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내가 먹고 마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의 사고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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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러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약속의 장소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둔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알고 싶어하는 갈망과 목마름이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이 땅에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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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런 얘기입니다. 홍해라고 하는 죽음과 심판의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모세가 인도를 합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기고 모세만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나거나, 이웃간에 문제가 발생할 때 그들은 모세에게로 달려와서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곤 했습니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200만쯤 되는 수였기 때문에 자연히 모세는 바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본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혼자서 일을 다 처리하지 말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라는 책임자를 정해서 작은 일은 그들이 해결하도록 하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장인의 말대로 책임자를 세워서 일을 분담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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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일은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은 분담하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을 분담 맡은 사람은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일을 맡길 자의 자격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라고 말씀합니다. 일을 맡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자'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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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당시 일을 맡은 사람들은 모세가 일해온 것과 달라서는 안되었습니다. 모세의 생각과 맞아야 하고, 모세의 방식과 맞아야 했습니다. 즉 자기 생각대로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일을 처리하던 방식대로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일을 분담한 목적입니다. 즉 모세가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아도 모세가 한 것과 다를 바가 없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일을 분담시킨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자를 세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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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는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지난주일 오전에 말씀드린 대로 교회에는 지도자, 상전이 없습니다. 지도자, 상전은 오직 예수님 한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일을 분담 받은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목사, 장로, 집사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목사로서 할 일이 있고 장로로서 할 일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일반 신자는 나는 아무런 일도 맡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모든 신자는 일을 맡은 자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그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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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최고 지도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일을 분담 맡은 우리로서는 예수님의 방식과 예수님의 생각대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생각이 아니라면 우리는 일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의 뜻을 따라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따라서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고 싶습니까? 성경이 곧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 지신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고 섬기고 사랑하신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일은 바로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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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는 일을 맡길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느냐를 따집니다. 군인을 뽑으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회사 직원을 뽑으려면 실력이 있고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커지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만 있는 세상에 참생명된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교회를 원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자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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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는 이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길 때 그 사람의 실력이나 돈이나 재능을 보면 안됩니다. 볼 것은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님의 사고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느냐. 과연 그에게서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이 나오느냐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는 틀림없이 자기 생각과 자기 욕심대로 일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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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진심으로 모든 관심을 주님께 두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면 이런 모습은 결코 내보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은석교회는 어떤 자를 원합니까? 교회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까? 아니면 불의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원합니까? 교회에서 자기 실력을 내세우고 세상 지위를 자랑하고 돈을 힘으로 삼는 그런 사람은 교회 밖으로 쫓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습을 방해하는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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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한가지 주의 할 것은 누군가가 불의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존경하거나 그 사람에게 가치를 두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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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자기 생각이 옳은 것 같고 자기 방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면 말씀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바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옳다고 주장해도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식에 맞추어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상식을 따라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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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끌어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모세가 한 일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도 모두가 생명을 알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해야 했던 것도 그들에게 세상에 대한 관심을 벗고, 애굽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서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진 생명이 있는 자의 모습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발견한 신자라면, 그런 신자가 모이는 교회라면 오직 생명을 알리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힘을 다할 것입니다. 교회는 진실무망하며 불의를 미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성장을 도와주는데 목표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석교회가 할 일은 바로 이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게을리 할 때 은석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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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여러분 각자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일을 하는 자로 세움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그냥 진실하게 불의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있는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삶입니다. 죽음만 있는 세상에 생명의 흔적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은석교회는 이런 삶에 목표를 두고 이것을 위해서 목숨걸고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