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
출 1-2장: 400년과 40년(상)
400년과 40년의 여백이 출애굽기의 처음 두 장을 앞뒤의 본문들로부터 갈라 놓는다. 창세기 50장의 요셉의 마지막 유언과 출애굽기 1장의 이스라엘 민족의 등장 사이에는 400년 정도의 시간의 틈이 놓여 있다. 또한 모세가 왕자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먼 땅으로 쫓겨가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에는 40년의 시간의 틈이 놓여 있다(참고: 행 7:23,30).
시간의 틈은 하나님의 틈일까?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하나님도 속절없이 지나치시는 걸까? 이 시간의 틈 속에서는 하나님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걸까? 그래서 성경은 이 부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 출애굽기의 본문은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 커다랗게 “아니오”라고 외친다. 시간의 틈도 하나님의 틈을 내지는 못한다. 무소부재하신 그 분에게는 시간의 틈마저도 틈이 아니다. 틈은 그 분의 충만으로 가득 찬 공간일 뿐이다. 틈은 우리에게 있어서 틈일 뿐 그 분에게는 여전히 활동의 장일 뿐이다. 단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방식이 다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400년과 40년의 시간적 여백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가장 마음에 뜨악하게 느껴지는 시간적 공간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당신께서 활동하시는 또 하나의 시간적 공간일 뿐이다. 시간의 틈은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자에게는 탄식의 시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심을 보게 되는 기간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시간의 틈 없이 항상 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라면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순간에도 그를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1,2장의 내용이 한 번에 다루기에는 녹록치 않는 분량이므로 두 개로 나누어서 다루기로 한다. 이번 호에서는 출 1장의 내용만을 다루고 다음 호에 가서 2장의 내용을 다룰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1장과 2장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글이며, 그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이 글들 역시 하나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I. 너무나 먼 약속
창세기의 끝에서 요셉은 죽으면서 이렇게 부탁한다.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창 50:25). 창세기는 이렇게 열린 채로 끝이 난다. 그 이름 그대로 시작만 있을 뿐 창세기에는 12:1-3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들 중 제대로 성취된 것이 거의 없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먼 이방의 땅인 애굽에서 우거하고 있다. 그 땅은 가뭄에 쫓겨간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삶을 부지하고자 했던 그런 땅이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70여명의 야곱의 자손들에게는 오직 믿음으로 보아야만 겨우 보일 것 같이 희미한 환영 같은 것이다. 아직은 애굽 사막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아른거리는 신기루 마냥 가물거릴 뿐이다.
II. 400년의 여백: 한 가족에서 한 민족으로(1:1-7)
요셉의 마지막 유언과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의 마지막 장과 출애굽기의 사건들 사이에는 사백 년이란 시간상의 여백이 존재한다. 출애굽기 1:1-7의 짧은 문단은 이 사백 년의 여백을 단숨에 뛰어넘는다. 이 간격 속에 일어난 사건들 중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은 요셉 “시대의 사람은 모두 다 죽었”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사실 두 가지 뿐이다. 이 두 사건 중 앞의 사건인 요셉 세대 사람들의 죽음은 창세기의 마지막 장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사건은 그로부터 사백 년 후의 상황이다.
염상섭의 “삼대”를 연상시키듯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까지 이어지던 4대의 가족의 역사를 파노라마식으로 유려하면서도 잔잔한 문체로 세세하게 펼쳐 보이던 저자는 이 짧은 일곱 절을 통해서 400년의 역사를 일필휘지로 휙 건너뛰어버린다. 이 짧은 일곱 절을 통해서 하나의 가족은 사백년의 여백을 뛰어넘어 하나의 민족으로 다시 태어난다.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우화(羽化)가 경이적이듯 이 짧은 문단 속에서 이스라엘이 하나의 가족에서 민족으로 변화하는 것도 역시 경이적이다.
개역 한글판 성경은 “the sons of Israel”(larfy ynb, 1,7절)이라는 어구를 1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7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르고 번역하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두 구절에서 이 어구는 원어상으로는 완전하게 동일하다. “The sons of …”(ynb)란 표현은 문맥에 따라서 진짜 직접적인 아들들을 의미할 수도 있고, 넓은 의미에서 “… 민족”이란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 저자는 이 “the sons of…”가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의미를 활용하여 가족으로서의 야곱의 아들들과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연결성과 차별성을 솜씨있게 표현해 주고 있다. 동일한 표현을 통해 그는 가족에서 민족으로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애벌레든 성충이든 다 나비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벌레와 성충의 차이는 극적이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직접적인 아들들로서의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야곱의 먼 후손인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자손”이 다 야곱의 후손임은 분명하지만 양자간의 변화는 뽕나무 밭이 파란 바다가 되는 것(桑田碧海) 마냥 크다.
날카로운 독자는 필자가 위에서 굳이 사백년의 “틈”이나 “공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여백”이란 표현을 쓴 것에 대해 의아한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백”이 정말 든 것이 없어서 무의미한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여백”은 있는 것과의 관련 속에서 의미가 있는, 열린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 특히 동양화의 붓질의 빈 자리를 “공백”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백”이라고 부른다. “여백”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전체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때로는 그럼의 나머지 부분을 압도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우리의 출애굽기 1:1-7의 이 짧은 본문에서 저자가 생략하고 있는 사백 년의 “여백”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저자는 1절에 “야곱과 함께…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 즉 70여명 밖에 되지 않는 한 가족이 7절에서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된 하나의 거대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자손”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서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생략은 “공백”이 아니라 “여백”인 것이다. 이 생략된 기간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끊임없는 “창성”(7절)을 통해 우리가 보듯이 지면(地面, “온 땅”, 7절)을 가득하게 채우고, 그 결과 우리의 지면(紙面)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략된 사백 년은 무의미한 “공백”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여백”이다.
성경은 이 여백의 시간을 생략하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도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이 생략은 하나님의 쉼이나 잠드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기간 동안 야곱의 자손들에게 특별한 섭리를 베푸셔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지게 역사하고 계셨다(행 7: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이 가장 안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이 부분에서 아이러니칼하게도 하나님의 가장 큰 손길을 본다. 이 침묵의 기간인 400년 동안 하나님은 70명으로 이루어진 한 가족을 200만명으로 이루어진 한 민족으로 우화시키셨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속에서 공백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이 때로는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역사하시고 계시는 순간일 수 있다. 그 여백의 시간에 하나님은 당신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우화시키고 계실 수 있다. 하나님의 손길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사실은 하나님의 손길이 가장 강력한 시간일 수 있다.
-> 인구 70명이 200만으로 가능한가?
이것을 연구한 수학학자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이는 이러한 번성은 불가능하다!
또 고대에는 유아 사망률도 컸다.
그러므로 인구수가 증가한 것에는 인간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
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행하셨다.
-> 이것을 잘 해석한 사람이 스데반! ex) 행 7:17. 그는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성취의 때가 가까운 것으로 생각한, 구속사적으로 해석
-> 하나님이 이 공백기간(400년)에 산파로서 기능을 하고 계셨다. 유아 사망률을 다 막고
힘써 낳도록...
-> 그러니까, 1장 후반부에 나오는 산파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다!
-> 그러니까, 하나님은 400년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엄청
많은 일을 하고 계신 것.
‘하나님은 애굽을 이스라엘의 인큐베이터로 사용하셨다’(박철현)
가나안땅에서 하실 수도 있지 않았나? 가나안 땅의 지정학적인 불완전한 상황.(3세력의 충돌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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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창조의 완성(1:7)
우리는 7절을 특별히 좀 더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 7절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한 가족에서 한 민족으로 우화되었다는 것을 단순하게 언급해 주는 정도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팽창을 나타내는 이러한 표현들은 창세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독자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 일차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세기 1:28과 9:1의 지상명령을 떠올릴 것이다.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아쉽게도 두 본문의 히브리어 단어를 각기 다른 한국어 어휘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혼동스럽다. 아래의 도표를 통해서 상응하는 단어들 사이의 연관성을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출 1:7 | 창 1:28; 9:1 |
생육이 중다하다(hrp) | 생육하라(hrp) |
번식하다(#rv) | |
창성하다(hbr) | 번성하라(hbr) (9:1, “번성하라”) |
강대하다(~c[) | |
온 땅에 가득하다(#rah alm) | 땅에 충만하라(#rah-ta alm) |
출 1:7에서 “창성하다”라고 번역된 단어(hbr)와 창 1:28와 9:1에는 “번성하다”로 번역되어 있다는 점을 유념하라. 또한 “번식하다” (#rv)와 “강대하다” (~c[)란 단어는 창 1:28와 9:1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유념하라.
창 1:28; 9:1의 지상명령의 처음 두 단어인 hrp와 hbr는 사실은 창 1-11장의 원역사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까지의 족장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사용된다(hrp, 창 1:22,28; 8:17; 9:1,7; 17:6,20; 26:22; 28:3; 35:11; 41:52; 47:27; 48:4; 49:22; hbr, 창 1:22,28; 8:17; 9:1,17; 16:10; 17:2,20; 22:17; 26:4,22; 28:3; 35:11; 47:27; 48:4; hbr, 창 1:22,28; 8:17; 9:1,17). 이 구절들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두 단어는 서로 쌍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쌍으로 사용되지 않은 경우에도 문맥상으로 서로 밀접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출 1:7은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지상명령 혹은 족장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반영하고 있다. 출 1:7은 창세기의 지상명령 혹은 족장들에게 주신 축복이 이스라엘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1:7에 나오는 단어들 중 위의 도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창 1:28; 9:1의 지상명령에 나타나지 않은 단어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먼저 출 1:7의 “번식하다”(#rv)란 단어는 창 9:7에서 “편만하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이단어는 창1:22에서 보통은 개구리나 물고기 등의 동물에게 사용되며, 인간에게 사용된 경우는 출 1:7과 창 9:7뿐이다. 의도적으로 출애굽기의 저자는 창세기 1:28과 9:1의 인간에게 주신 지상명령 뿐만 아니라 9:7의 다른 피조물들에게 주신 지상명령까지 전부 통합해서 이스라엘의 기하급수적인 수의 팽창을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출애굽기 저자는 이런 단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번성이 창세기의 창조 명령의 풍성한 성취라는 신학적인 차원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1:7의 “온 땅”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구절의 해석자들은 이 “온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에 거주하고 있던 고센을 가리킨다든지(참고, 47:27) (Sarna 1996: 15), 아니면 애굽 전체를 가리킨다든지(Houtman 1993: 231) 하는 등의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저자의 의도와 상치된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실제 역사 및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의 어느 지역에서 얼마나 퍼지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이스라엘의 팽창을 창조 신학적 측면에서 조명하는 것이다.
위 도표에서 보듯이 출 1:7에 나오는 단어 중 창 1:28이나 9:1에는 빠져있는 다른 한 단어는 “강대하다”란 표현이다. 이 표현은 창 26:16에서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자기 땅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면서 사용한 말이다.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c[) 우리를 떠나거라”. 그러므로 이 표현은 족장들 중 이삭이 세력이 강해진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단어로 창세기에 단 한 번 나온다. 출 1:7의 이 단어는 출애굽기 1:9,20에도 ~c[과 hbr의 조합으로 사용되어서 이스라엘의 팽창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출 1:12에는 hbr와 #rp란 단어의 조합이 나타나는데, 이 후자의 단어는 여호와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주신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rp)…”란 약속의 말씀 속에서 나타난다(창 28:14). ~c[이 이삭에게만 사용된 단어라면 이 #rp란 단어는 야곱의 주제어라 할 만하다. 이 단어는 그에게만 국한되어 그의 번성을 나타날 때 사용되는 것이다(30:30,43).
이처럼 hrp, hbr, #rah-ta alm, #rv, ~c[,#rp란 단어들은 창조시의 지상명령과 족장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말씀이나 묘사를 아우르는 언어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출 1장에는 창조, 재창조(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사용된 단어들이 망라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네트워크의 조명 속에서 볼 때 저자는 출 1:7의 간략한 구절을 통해 현재 민족으로 성장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잠정적으로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족장들에게 주어진 축복도 잠정적으로 완성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번성을 창세기의 창조 신학 및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연관시키는 것의 의의는 무엇일까? 첫째, 창조 신학적인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이 사건을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문제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 혹은 전 창조 세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보게 만든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단순히 한 민족의 흥망성쇠의 문제가 아니라 전 피조계의 운명과 관련되는 문제인 것이다.
둘 째, 더럼(Durham)에 따르면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들 중 많은 후손과 큰 민족에 대한 약속의 이러한 놀라운 성취는 땅에 대한 약속 역시 성취될 시기가 멀지 않았음을 암시해 준다(1987: 5).
※1-7절의 결론: 공백이 아니라 여백이다.
IV. 위기와 불가항력적 은혜(1:8-2:25)
1:8이후의 본문은 1:1-7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우선 시간적으로 1:1-7은 400년이란 긴 기간을 축약적으로 다루었다. 1:8 이후부터는 사건의 진행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지면서 통상적인 형태의 내러티브 형태를 띤다. 둘 째, 1:1-7은 그 서술방식에 있어서 큰 붓을 휘갈기듯 역사의 큰 윤곽을 그려주고 있기 때문에 시원시원한 느낌이 든다. 대신에 역사의 큰 틀 속에서 세세한 문제들은 시야를 벗어나 있다. 1:8 이하에서 저자는 다시 섬세한 붓으로 바꾸어든다. 세세한 사건들과 미묘한 반전 등이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한다.
1:8-2:25는 하나의 큰 단원을 이루고 있다. 전반부인 1:8-22는 새로운 바로의 등장과 더불어 이스라엘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후반부인 2:1-25는 이 억압받는 백성들을 구원할 지도자 모세의 위태로운 탄생과 역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장에서 모세가 탄생시에 겪는 절체절명의 위기는 1장에서 이스라엘이 겪는 인종말살의 위기와 연결되어 있다. 백성이 겪은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래의 지도자도 같은 위험을 겪으면서 탄생한다. 이 지도자는 은 숫가락을 잡고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곧 은 숫가락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고난받는 자기 백성의 힘들고 위태로운 삶으로부터 자신만은 도피할 수 있는 길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몸 속에 새겨진 유전자처럼 자기 백성에게 향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결국 그는 자기 백성 중의 한 사람을 도와주다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맞게 된다(2:11-15). 진정한 지도자의 운명은 백성의 운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훗날 이스라엘이 외부의 원수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멸절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모세는 만약 이스라엘을 진멸하시려거든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32:32). 이 백성이 누구인가?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불평을 하던 그 백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예전에 우리 나라의 어느 정치지도자가 한 명언처럼 “농부가 그 밭을 탓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이 백성이 죽을 위기를 당한 순간에 그들의 운명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이 죽게 되면 자신도 같이 죽고자 한다. 모세의 이러한 헌신 때문에 하나님은 가장 크게 진노하신 중에도 그 마음을 돌이키셨다. 모세가 이처럼 자기희생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백성과 같은 운명을 겪고 자기 백성의 운명에 자발적으로 동참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모름지기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의 몸을 던져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하고, 자기의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백성의 삶에 동화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그가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자기 백성의 운명으로부터 등을 돌릴 인간인지 어찌 알겠는가?
흔히 새 단락은 새로운 등장인물과 함께 시작된다. 1:8에 나오는 새 등장인물인 바로는 정말 새롭게도 “새 왕”이라고 표시된다. 더구나 그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왕”이라고 명시된다. 창세기를 잘 아는 독자들은 이 새 왕에 대한 심상치 않은 묘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운명에 먹구름이 끼여들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 왕이 요셉이란 인물의 공헌에 대해 역사적인 부담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고마운 요셉의 후손들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애굽의 위협요소로 파악한다.
이 바로가 역사적으로 정확히 누구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학적으로는 중요할 수 있지만 그 것을 밝히는 것이 본문의 의도는 아니라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Janzen 2000 : 36-37). 출 1:7이 이스라엘의 숫적인 증가를 단순히 역사적이고 통계학적인 측면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신학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1:8도 역시 바로를 역사상의 어떤 특정한 바로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바로가 이스라엘의 팽창을 저지하려고 하는 행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실행을 방해하려고 하는 행위는 반창조적 행위인 것이다(프레다임 2001: 61-63). 바로는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항하는 원수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가 역사상 어느 특정한 인물이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항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출애굽기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그를 막연히 바로라고 지칭하면서 그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히려 들지 않는다. 여기에서 “바로”는 우리말로 하면 “왕” 정도에 해당하는 말일 뿐이며, 구체적으로 특정한 “누구” 혹은 “무슨” 왕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1:8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알다”(to know)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출애굽기 1-15장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단어(keyword)들 중의 하나이다.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애굽 왕이 요셉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난은 2:25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알아보심”을 통해 해소된다. 이 후자의 구절을 개역한글판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드문 한자어는 한국인에게는 느낌이 다가오지 않는다. 이 단어는 “알다, 알아보다”란 뜻을 가진 [dy이다. 그러므로 원문을 쉬운 말로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손을 보시고, 아셨더라” 정도가 된다. 새 왕의 “알지 못함”과 하나님의 “알아보심”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꾸어주는 것이다.
이 새 왕은 이스라엘이 수가 많음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자신들보다 수가 많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표시한다. 여기에서 정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들보다 숫자가 많았을까 하고 묻는 것은 본문의 흐름을 놓치는 것이다(참고: Houtman 1993: 236). 바로의 두려움은 통계에 근거한 두려움이 아니라 심리적인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민수기22장 의 발락과 유비관계(참고: 두란노 HOW 주석 시리즈, 민수기, )
발락이 하나님을 두려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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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에서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취하는데, 그 첫 번째 방법은 은밀한 방법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지혜로운”(10절) 우회적 방법인 것이다. 그 것은 이스라엘을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짓는 데 동원함으로써, 고된 노역으로 인해 그들의 생식능력을 제한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것은 역효과를 가져 온다(12절). 이스라엘은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애굽 왕” 바로는 이 은밀하고 우회적인 방법에서 조금 벗어나서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동원한다(15절). 바로가 소위 “지혜로운” 방법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히브리 산파”를 활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히브리 인들의 출산을 억압하는 일에 히브리 산파들을 투입함으로써 여전히 교활하고 은근하게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애굽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려해서(참고: 창 43:32) 애굽인 산파 대신에 히브리 산파를 활용했다는 주장도 있다(장석정 1999: 24) 그러나 바로가 히브리 산파를 활용한 정말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간교한 통치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가능하면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히브리인들을 말살하는 일에 히브리인을 사용하는 것은 얼마나 은밀하면서도 통렬한 일인가? 이런 점에서 출애굽기 저자는 이 구절에서 바로를 굳이 “바로”라 하지 않고 “애굽 왕”이라고 부름으로써 “애굽 왕”과 “히브리 산파”의 대비를 강조해 주고 있다.
애굽 왕 바로는 산파들에게 조산 중에 남자 아이가 나면 죽이고 여자 아이가 나면 살려 두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핏줄을 끊어 놓으려고 획책한다. 그러나 문제는 “히브리 산파”들이 그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하는 것이었다. 산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남자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의 문책에 대해서는 히브리 여인들이 애굽 여인들과 달리 “건장”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조산을 도와주러 가기 전에 이미 해산을 해버린다고 지혜롭게 대답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약화시키려고 히브리 산파들을 고용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너무 강건하다는 보고를 그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첫 번째 시도 때와 마찬가지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만 했다(20절).
20-21절은 출애굽기 1-2장에서 마지막의 2:23-25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하나님이 언급된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셨다.
한 가지 유념할 점은 이 것이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시는 것은 2:23-25에서 이스라엘을 “권념”하신 다음부터이다. 현재의 1:20-21에서는 하나님은 단지 산파들의 지혜로운 행동과 경외하는 마음에 수동적으로 보답을 하실 뿐이다.
어찌 됐든 산파들의 지혜로운 행동과 언행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계획이 좌절된 것을 본 바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지혜로운”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전면에 나선다. 그는 애굽의 신민들에게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한다. 이 계획이 시행되고 나면 히브리 산파들이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여인들의 강건함을 핑계를 댈 수가 없다. 또한 간신히 탄생 순간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계속 생명을 부지할 수도 없다.
모세의 탄생은 바로 이러한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배경으로 한다. 모세는 도저히 생존할 가능성이 없는 그런 상황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2장은 이러한 모세의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드에게 원용한다(참고: Childs 1974: 20-26). 이에 따르면 헤롯은 바로처럼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의 사내아이들을 전부 죽인다. 우리의 메시야께서는 이처럼 위기 상황 속에서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사자의 도움으로 위기를 피하셨다(마 2:13), 그러면 모세는 과연 어떤 식으로 이 위험을 벗어나서 민족의 해방자로 활동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서 다루기로 하자.
각주-참고문헌
장석정
1999 출애굽기의 출애굽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프레다임, 테렌스 E.
2001 출애굽기 (현대성서주석,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Anderson, B.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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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TheBookofExodus;ACritical,TheologicalCommentary(OTL,Louisville:TheWestminster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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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tman, C.
1993 Exodus,vol.1(HCOT,Kampen:KokPublishingHouse).
Wenham, G. J.
1978 “The Coherence of the Flood Narrative”, VT28:336-48.
출애굽기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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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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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400년과 40년(하)
출애굽기 1장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운명의 변화를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1:1-7에서 이스라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명령대로 엄청난 번성을 누렸다. 그러나 1:8-22에서 재창조의 원수인 바로를 만나면서 멸절의 위기를 맞는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영웅이 이제 2장에 들어서면서 등장한다.
1:1-7에 비해서 1:8-22는 섬세한 붓으로 그려진 그림 같다고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2장에 들어서면서 붓은 더욱 섬세해진다. 1:1-7이 인공위성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같다면 1:8-22은 전반적으로는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같다. 물론 산파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자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2장으로 들어서면서 이제 사건의 서술은 지면과 같은 높이에 맞추어진다. 등장인물의 얼굴의 윤곽이 보이고, 그들의 숨결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본 장의 이야기는 고통의 시기에 이루어진 한 남녀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내레이터는 막연하게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막연한 서술에 근거해서, 이 내레이터가 모세의 부모가 될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출 6:14-25나 민 26:59-60 이하는 내레이터가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지 그는 글의 흐름상 이 대목에서 두 사람에 대해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 부적절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 뿐이다. 캠코더를 가지고 비유하자면 내레이터는 지금 줌인을 통해 클로즈업(close-up)을 하고 있는 중이다. 1장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비춰주다가 이 두 사람에 이르러서 서서히 그들을 클로즈업해가는 중이다. 이런 대목에서 이제야 겨우 카메라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상세한 신상명세가 제공된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는가? 내레이터는 단지 이 두 사람이 레위인이라는 것 정도만 언급함으로써 글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
고난 속에서 핀 이 사랑의 열매로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 내레이터는 “준수”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의 어머니인 레위 여자는 그 “준수함으로 보고” 아이를 물에 던지는 대신 가능한 한 데리고 있고 싶었던 듯 하다. “준수함을 보다”라는 원문을 직역하면 “보기에 좋았다”가 된다. 이 문구는 창세기 1 장에 7번 나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문구를 연상시킨다(창 1:4,10,12,18,21,25,31) (Sarna 1986: 28).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니 만드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 이 아이 역시 “보기에 좋았다”. 앞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번성(출 1:7)이 창조 명령의 성취이며, 바로의 억압정책은 반창조 행위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보기에 좋은” 아이의 탄생은 바로를 저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다. 이 점을 표시하기 위해 출애굽기의 내레이터는 일부러 창조 모티프를 이끌어 온다.
그러나 이 창조의 회복을 가져 올 아기 영웅은 아직 너무나도 연약하고, 상황은 너무도 암울하다. 영웅은 아직 어머니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아기 일뿐이다. 1-2장의 모든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고상한 어머니는 “보기에 좋은” 이 아이의 운명을 최대한 연장시키려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머니의 능력은 어둔 밤의 등불 심지처럼 후딱 타버린다. 아이를 숨기는 어머니의 능력은 삼 개월만에 한계에 부딪힌다.
어머니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아이의 운명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 띄워 보내기로 한다. 이 험악한 상황 속에서는 어머니의 품보다도 갈대상자 속이 더 생존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어쩌면 이 어머니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는 길이라고 신앙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일부 구약의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수 24:14; 겔 20:7-8) (Greenberg: 52). 단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서 아이가 담길 갈대상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역청과 나무 진을 발라서 아이를 조심스럽게 그 속에 넣는다. 이런 어머니의 조심스러운 마음은 “두다”라는 단어로 표시된다(2:3). 이 단어는 남자아이를 하수에 “던지라”는 바로의 명령과 대비된다(1:22).
이 어머니가 만든 갈대상자는 히브리어로는 창세기 6-9장의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방주와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hbt). 이 단어가 오직 이 두 본문에만 나온다는 점은 둘 사이의 연결을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우선 홍수 이야기에 창조 모티프가 가득하다는 점(Wenham: 191-96)은 다시 한 번 이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창조와 연결시킨다. 바로의 인종말살정책이 반창조적이라면 모세의 탄생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 반격이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방주는 항해에 필요한 키나 키잡이가 없었다고 한다(Sarna 1986: 28). 따라서 방주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하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갈대 상자와 아이의 운명 역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독자가 그 누이처럼 이 아이의 운명에 대해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아이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다른 여인이 등장한다. 바로의 딸이 아이가 있는 바로 그 강가로 목욕하러 온 것이다. 본문의 정밀함과 세밀함은 이 바로의 딸의 “시녀들”(tr[n)과 “몸종”(hma)을 구분하는 데 있다. 개역한글판 성경은 양자를 구분하고 있지 않지만 원문은 공주와 친밀도가 덜할 것으로 여겨지는 “시녀들”과 친밀도가 높으리라고 여겨지는 “몸종”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시녀들”은 그냥 “하숫가를 거닐고”, 오직 “몸종”만 바로의 딸을 몸소 시중하기 위해 하수로 들어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그 때문에 바로의 딸이 이 “몸종”으로 하여금 아이를 건져올리게 한 것이리라. 그리고 이 점은 아이의 목숨을 위하여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와 관계가 더 깊은 “몸종”과 달리 “시녀들”은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모두 하수에 던져 죽이라는 바로의 추상 같은 명령을 어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Greenberg: 40).
아이를 보는 순간 바로의 딸은 아이가 히브리 아이임을 한 눈에 알아 본다(2:6). 이와 동시에 아이의 누이가 “히브리 유모”를 데려다 주길 원하느냐고 묻는다. 내레이터는 바로의 딸이 아이가 히브리인의 아이인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광경을 보고 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멀리 있던 누이가 어떻게 이 순간 바로의 딸 앞에 와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히브리인인 그녀가 어떻게 시녀들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바로의 딸이 말하고, 바로 이어서 누이가 말한다. 확실한 것은 바로의 딸이 아이의 운명과 관련하여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거나 고민할 틈 자체를 주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바로의 딸이 조금 더 고민해보고 자기 아버지의 명령대로 했을지 안 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의 흐름을 볼 때 바로의 딸이 자비로움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아이의 누이가 제시한 “히브리 유모”에 대한 안을 받아들인다. 창 43:32-34를 볼 때 애굽인들은 히브리인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히브리 남자 아이들에 대하여 자기 아버지가 내린 칙령도 있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 아기를 애굽인 유모에게 맡기는 것은 여러가지 위험 요소들이 많았다. 바로의 딸은 히브리 아이를 히브리 유모에게 맡김으로써 이러한 위험성들을 피해 갔다.
이러한 그녀의 결정을 통해서 아이의 친모는 아이를 돌려 받았다.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갈대상자에 고이 넣어 떠나보낸 아이가 품으로 돌아왔다. 이 것은 무척 극적이다.
그러나 아이를 친어머니에게 맡기면서 하는 바로의 딸의 말은 더욱 극적이다. 그녀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서 바로의 악한 책략은 통렬하게 무너진다. 히브리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물에 던져 죽이라고 했던 명령이 오히려 이 히브리 남자 아이가 살아남는 통로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바로는 자기 재산으로 그 아이를 키우기까지 한다.
전문용어로 이 것을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쳐 놓은 올무에 스스로 걸려 드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바로는 자기 가슴에 꽂힐 비수를 스스로 갈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성경에서 극적 아이러니의 대표적인 예로 꼽는 경우가 하만이다(에 5:9-7:10). 그는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기 위해서 나무 기둥을 세우지만 오히려 자기가 그 나무 기둥에 달리고 말았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점 때문에 에스더서의 정경성은 성경해석사에서 항상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 에스더서는 드러난 왕(아하수에로)과 숨어 있는 왕(하나님) 중 누가 진정한 역사의 주관자인가 하는 것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숨은 왕이 하만의 악한 의도를 깨뜨리기 위해 하셔야 했던 일은 드러난 왕이 하룻밤 잠이 오지 않게 하시는 것이었다. 왕은 잠을 이루지 못하자 역대 일기를 읽는다(6:1). 그 간단한 조치만으로 모든 것은 숨은 왕의 의도대로 흘러 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문에서도 출애굽기 1-2장의 숨은 왕이 드러난 왕 바로의 책략을 깨뜨리기 위해 하신 일은 모세가 버려진 그 시각에 바로의 딸이 나일 강가로 목욕하러 나오게 만든 것 뿐이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는 우연의 일치로 보이는 그 간단한 일을 조율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바로의 책략을 무너뜨리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만홀히 여길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한 작은 우연이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일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또한 가장 어려운 순간, 절망의 무게가 어깨를 무겁게 짖누르는 순간에 이를 지라도 우리는 이 본문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의 하나인 구소련의 붕괴는 1990년대 초입에 모든 사람들에게 갑자기 찾아 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1931년 3월 2일 미하일 고르바쵸프를 이 땅에 내시던 그 때, 소련의 강철제국이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이던 바로 그 때 이미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을까(Janzen: 53)? 모든 것의 주관자이신 우리의 왕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역사에 대한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절망의 순간에 우리 마음의 희망의 등불을 끄지 않는 것이리라. 그 분은 신실하셔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놓치 않으시고, 슬픔 대신 희락을 주시며, 재 대신 화관을 씌우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리라.
아이가 친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된 것을 언급한 대목에서 내레이터는 비디오플레이어의 죠그셔틀 기능을 사용하듯이 세월을 건너 뛴다. 마침내 아이가 자라서 바로의 딸에게 갔을 때, 바로의 딸은 아이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준다. 내레이터는 모세의 뜻이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고 한다. 해석가들은 이러한 뜻 풀이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Greenberg: 43). 이 이름이 히브리어 동사에서 왔다고 할 경우, 이 단어는 분사 능동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 아이는 건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분사수동형이 되어 “마수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상당수의 해석자들은 모세란 이름이 원래는 “…의 아들”을 의미하는 이집트어에서 왔다고 본다. 실제로 이집트 사람들의 이름은 프타모세(Ptahmose, “프타의 아들”), 투트모시스(Tuthmosis)등의 이름이 많다. 또한 모세란 이름이 단독적으로 언급된 경우도 있다. 바로의 딸이 히브리어를 알았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느고가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느부갓네살이 맛다니야를 시드기야로 개명시킨 경우(왕하 23:34; 24:17)가 있기 때문에 바로의 딸이 히브리인들에게 자문을 구해서 아이에게 히브리 이름을 지어주지 말란 법은 없다.
만약 모세란 이름이 히브리어가 맞다고 할 경우 바로의 딸이 부지불식간에 수동형을 능동형으로 잘못 씀으로써 모세의 운명을 예견하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현대의 학자들이 선호하는 견해대로 이 이름이 이집트어에서 기원했을 경우 우리는 내레이터가 이집트식 이름을 의도적으로 히브리식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바로의 딸이 모세에게 준 애굽식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이 아이의 운명을 예견하는 이름이 되고 말았다는 통렬한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Sarna: 33). 그러므로 어떤 식의 해석을 따르던 모세란 이름이 구원자로서의 아이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 이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한 번 내레이터는 죠그셔틀을 돌려 모세는 성장한 사람으로 본문 속에 등장한다. 행 7:23에 따르면 이 때의 그의 나이는 40세이다. 출 7:7과 신 34:7을 종합할 때 그의 인생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는 제 1기 유청년 시대를 지나 제 2 기 40세의 장년의 모습으로 본문에 다시 돌아온다.
모세는 친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동족 히브리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출 2:11절은 “한 번은 자기 형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보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는 “b har”라고 되어 있다. 그냥 “har”만 쓰면 그냥 “보다”라는 의미가 되지만 “b”라는 전치사가 따라 오면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본다는 의미가 된다. 모세는 디즈니 영화 “이집트 왕자”에서처럼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역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동족 이스라엘의 고난을 속으로 체휼하면서 보고 있는 것이다. 무릇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자가 갖추어야 할 성품은 이런 것이리라. 자기가 이끌고 나갈 자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자는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느끼지 않는 자는 이끌 수 없는 것이 지도력의 법칙이다.
모세가 이렇게 동족의 아픔을 체휼하면서 그들을 지켜 보고 있는 중에 한 애굽 사람이 히브리인을 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모세는 그 애굽인을 쳐 죽인다.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동일하게 “치다”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애굽인은 히브리인을 죽도록 치고 있는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Greenberg: 45). 그레스만(Gressmann)은 이 것이 모세의 공의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세는 결코 평범한 구타 사건을 가지고 끔직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Gressmann, 18 n. 3).또한 이 본문에서 우리는 모세가 애굽인을 쳐죽이기 전에 좌우를 살피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것은 그의 신중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난 다음 날에도 모세는 다시 자기 백성들을 보러 나간다. 아마 모세는 자신이 충분히 조심했기 때문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한 듯 하다.
다시 한 번 그는 구타 사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번에는 히브리인들간의 싸움이다. 모세는 “그 그른 자”에게 왜 동포를 치느냐고 묻는다. 본문이 “그른” 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볼 때 모세는 이미 그 싸움에 대해서 나름 대로의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그른 자에게 잘못을 지적한 것은 다시 한 번 그의 정의감을 보여준다.
그 그른 자는 반성은 하지 않고 모세에게 누가 너를 재판관을 삼았느냐고 따지면서, 오히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을 누설하겠다고 협박을 한다. 아마 그는 협박에서 그치지 않고 정말 발설을 한 것 같다. 왜냐하면 바로가 모세를 죽이고자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2:15).
도와 주고자 한 일에 대해서 모세는 감사받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비난을 당하고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이 점 역시 이후의 생애 동안 모세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하게 될 경험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모세의 어설픈 구원자 행세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에게 자기 백성을 향한 연민도 있었고, 그들을 도와 주고 싶은 의욕도 있었지만 그는 2:1-10의 어린 아이처럼 여전히 운명의 나일강에 놓여진 취약한 자일 뿐이었다.
많은 수의 설교는 모세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함으로써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 이 때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모세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한 가지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자가 “하나님의 때”에 근거해서 행동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족을 위하여 일하고자 했다는 점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그 의욕을 중요시 여기시는 분이시지, 당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자가 당신의 때를 기다리지 않은 것에 연연하시는 분은 아니시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본문은 모세가 정의감이나 신중성, 희생정신에 있어서 지도자의 자질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좌절을 하나님의 좌절, 구속사의 좌절로 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모세의 좌절을 넘어서도 흘러간다. 인간이 낙심으로 인해 시계가 멈춘 때에도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성경에서 우물가는 결혼의 장소이다(Alter: 47-62). 창 24장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나고, 창 29장에서 야곱은 아내 라헬을 만난다.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다. 물론 이 마지막의 결혼은 육체적 결혼이 아니라 영적인 결혼으로 읽어야 한다.
모세 역시 1-2장의 마지막 여인인 아내 십보라를 우물에서 만난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딸들을 목자들에게 보호하고 물을 길러 줌으로써 인연의 발판을 마련한다. 딸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모세에 대하여 한 말중 모세가 자신들을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모세의 운명을 예견하는 역할을 한다(출 2:19; 3:22; 5:23; 6:6; 12:27,36; 18:4,8-10; 33:6). 앞의 모세란 이름이나 물에서의 구원받음이 부지중에 모세의 장래와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말을 들은 르우엘은 모세를 초청해 음식을 먹인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르우엘의 딸들이 모세를 “한 애굽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것은 바로의 딸이 아기 모세를 보고 즉시로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고 한 것과 대비된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연민을 가졌지만 겉모습은 어느새 애굽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애굽인이 다시 히브리인의 구원자로 환골탈퇴하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더 걸린다.
결국 모세는 르우엘과 머무르기로 작정하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는다. 이 때의 모세의 심정은 그가 아이에게 준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게르솜이란 이름에 대해서 내레이터는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란 뜻이라고 해석한다. 자기 동족에 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모세에게는 애굽이 모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족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그에게는 “객”이라는 회한의 모습만 남았다. 미디안의 양 떼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그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흩어진 양 떼의 발자국 속으로 묻히듯 그의 삶도 그렇게 회한 속에서 묻혀가고, 덧없이 40년의 세월의 흐른다. 과거의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기적적으로 부지해 온 목숨이 부질없다.
앞에서도 누차 언급한 것처럼 언뜻 보면 출 1-2장에서 하나님의 모습은 완전히 숨겨져 있다. 그리고 2:22의 게르솜이란 이름 속에 담긴 한숨 속으로 인간 영웅 모세마저도 꺼져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40년이 그의 한숨처럼 덧없기만 한 것일까? 이 짧은 세 절은 이에 대해 웅변적으로 아니오를 외치고 있다.
앞에서 우리는 사실 하나님은 숨어 있으시되 결코 없으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아왔다. 숨어 있는 중에도 그 분은 정작 필요한 것은 모두 다 하셨다. 그 분은 역사의 경로가 그 분의 의지 밖으로 이탈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셨다.
인간 영웅의 입장에서 볼 때는 게르솜이란 아들의 이름처럼 허무한 40년의 세월의 틈으로 진정한 역사의 영웅께서 베일을 벗고 전면에 등장하신다. 모세가 한숨을 쉬는 40년 속에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기 시작하신다.
내레이터는 출애굽기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이 짧은 세 구절의 서두를 “애굽 왕은 죽었고”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삼상 16:1-3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불필요한 죽음을 당치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Greenberg: 51). 이 해석이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출 4:19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고 하심으로써 그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인 다음이다. 그러므로 바로의 죽음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작정만 하셨더라면 애굽 왕의 죽음은 별 문제가 아니었으리란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마 그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중요한 것은 옛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 같은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이 왕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고 있지만 이미 시대가 바뀌었다. 새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의 깊이는 여명 전의 어둠이 깊은 것과 같은 것이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그 어둠은 사라질 것이다.
24-25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보고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것을 네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원문을 살리기 위해 사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보셨고
하나님이 아셨다.
이 네 문장 모두에 “하나님”이란 주어가 꼬박꼬박 명시되어 있다. 통상적인 히브리어 문장 속에서는 이처럼 주어가 동일한 경우 주어는 한 번만 표시한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시고, 아셨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에서는 매 동사마다 “하나님”이란 단어를 반복한다. 이러한 독특한 표현양식을 통해서 내레이터는 “하나님”이 이제 “정말로”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을 히브리어 문장을 살려서 읽으면 “하나님”이 “벌떡” 일어나서 역사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오시는 느낌이 확 살아나지 않는가? 앞으로 한글 성경이 새롭게 번역될 때 이러한 수사법적인 요소에 대한 면밀한 고려가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본문에서 다른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앞의 세 문장에는 다 목적어가 있는데, 마지막 문장에는 목적어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사실 마지막 문장은 타동사에 목적어가 빠져 있기 때문에 완전한 문장이라고 할 수가 없다. 개역한글판 성경은 이러한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25절을 하나의 문장으로 처리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처리하고 있다. 또한 탈굼 옹켈로스는 마지막 문장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더라”고 부연해서 번역하고 있으며(Greenberg: 54), 칠십인경은 동사를 수동태로 처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려졌더라”고 번역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표준새번역은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고 의역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파격적인 문장은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이 글을 원문으로 읽는 독자는 목적어 없이 그저 “하나님이 아셨더라”고 되어 있는 문장을 보고 당연히 질문을 던질 것이다. 뭘? 도대체 뭘 아셨다는 말인가?
이 대목에서 내레이터는 자신의 이야기를 일단 접는다. 3:1은 히브리어 구문론상으로 볼 때 전혀 새로운 단원이 시작하고 있다. 내레이터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탁월한 이야기꾼인 셰헤라자데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이야기를 멈추어버린다. 마치 “하나님이 뭘 아셨는지는 다음에 알려줄게”하는 식으로. 성경이 여기에서 멈추었으므로 우리도 여기에서 멈추어야겠다.
V. 400년과 40년
이제 이번 강해를 마무리해야겠다. 출애굽기 1-2장은 성경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하나님이 숨겨져 있는 본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숨겨지심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하나님은 숨겨지신 중에도 여전히 임재하고 계시며, 역사의 방향타를 쥐고 계신다. 이 점은 이스라엘이 기적적인 번성을 이루는 것에서, 산파의 하나님 경외에서, 바로의 딸이 마침 모세가 버려지는 순간에 목욕하러 나온 것에서 나타나 있다.
이런 점에서 특히 400년과 40년의 틈은 중요하다. 출 1:1-7은 400년이란 시간의 틈을 한꺼번에 뛰어넘어버린다. 그러나 그 틈은 빈 공간이 아니다. 그 시간의 여백 속에서 하나님은 가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로 성장시키시는 엄청난 일을 하셨다. 또한 모세가 미디안에 들어간 이후로 부름받기까지의 40년이란 세월 역시 부질없는 시간의 빈 틈이 아니다. 모세가 게르솜하며 한숨을 쉬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역사의 장 속으로 뛰어드셨다. 인간에게는 절망의 밤이 하나님에게는 신앙의 새벽이었던 것이다. 진실로 시간의 여백은 하나님의 구속사란 거대한 그림의 가장 위대한 부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장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숨겨지심에 안타까와 하는 불신의 목소리나,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불평하는 입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응시하는 믿음의 눈이다. 이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출애굽기 1-2장은 구약성경에서도 가장 멋있는 장들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소리없는 활약의 장들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은밀하고 섬세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열왕기상 17-18장에서 하나님이 가뭄과 불이라는 강력한 방법으로 역사하신다면 19장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마음을 읽는 섬세함으로, 얇은 유리처럼 부서져버릴 것 같은 엘리야의 몸을 소중한 보물처럼 감싸안으시는 섬세함으로, 미세한 음성으로 다가오는 부드러움으로 역사할 때도 있으신 분이시다. 그 분은 “산의 하나님”이기도 하시고, 때로는 “들의 하나님”이기도 하신 분이신 것이다(왕상 20:23,28).
섬세한 하나님에는 섬세한 신자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섬세하게 역사하시는 순간에는 섬세한 살핌과 귀기울임으로 응답할 줄 아는 신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혀 역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속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신자가 되는 것이 소중하다. 하나님이 우리가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 우리가 외롭다고 한다면, 함께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로 인해 하나님은 더 외로우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헤아리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를.
각주-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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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Genesis1-15(WBC,1;Waco:Word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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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berg: 45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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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물 이야기들은 동일한 패턴을 따라간다. 젊은 남자가 자기 배우자를 찾아 이방인의 땅으로 여행한다. 우물에 도착한다. 배우자가 될 여자가 등장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물을 길어 주는데, 이 것은 남녀의 혼인의 예표가 된다. 젊은 남자가 자신의 정체를 알린다. 그 만남의 결과로 여자가 집으로 뛰어가 그 젊은 남자의 도착 소식을 알린다. 집에서 그 젊은 남자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마지막으로 혼인이 맺어진다. 물론 모든 에피소드가 다 이 정형적인 틀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이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그 에피소드 해석의 핵심이 된다.
출애굽기 강해
출애굽기 3:1-4:17
박철현
평범한 날의 비범한 사건
우리의 절망이 하나님의 절망은 아니다. 우리에게 낙심과 절망의 순간이 하나님에게는 변화와 능력의 순간일 수 있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하나님에게는 시작의 순간일 수 있다. 꽃샘추위가 따스한 봄의 전령임을 안다면 누가 스러지는 겨울의 마지막 시샘을 두려워 하랴? 여명의 깊은 어둠이 밝아오는 아침의 빙거임을 안다면 누가 지나가는 밤의 마지막 질투를 두려워 하랴?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은 모세가 “게르솜”이라고 탄식할 때(2:22), 이스라엘이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을 때 찾아온다(2:22-25).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두운 때가 하나님에게는 시작의 시간이다.
1. 평범한 날의 비범한 사건(3:1-6)
바로의 압제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시도는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한다. 친구의 툭 건드리는 작은 몸짓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된다. 광야의 하찮은 떨기 나무의 작은 불꽃이 이제 곧 애굽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큰 불이 되려고 한다. 전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엄청난 불길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그 불길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2:23-25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드디어 두꺼운 커튼을 들추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로 하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하는 본문은 의외로 무덤덤하다. 3:1은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치더니”라는 동사의 히브리어는 반복적인 동작을 나타낸다. 본문은 모세가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는 일이 그저 어쩌다 한 번 해 본 일이 아니라 항상 하고 있는 직업이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뉘앙스를 잘 살리기 위해 하우트만(Houtman)이란 주석가는 이 구절을 “모세가 자기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고 번역하고 있다(Houtman 1993: 332).
사도행전 7:23,30과 출애굽기 7:7에 근거해 볼 때 모세는 40세에 애굽에서 도망하였고, 3:1에 등장할 때에는 80세가 되었다. 그는 아마 40년 가까이 양치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3:1의 짧은 문장 하나 속에는 40년이란 세월의 허무함과 회한이 진하게 묻어 있다. 애굽의 왕자로서 인류 역사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 광야의 한갓 이름 모를 목동으로 삭아버린 세월의 한이 이 짧은 구절 속에는 배어 있다.
“모세의 기도”란 표제가 붙은 시편 90:10은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구절 속에서 우리는 모세가 건너 뛰어버린 40년의 비애(pathos)를 진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그에게 있어 처음의 40년이 원색의 계절이었다면 두 번째 40년은 무채색의 계절이었다.
그렇게 훌쩍 40년의 시간의 공백을 넘어, 혈기방장한 장년 모세는 늙은 목자 모세로 양무리 가운데 서 있다. 게르솜이라는 탄식마저도 꿈인냥 흐릿해지고, 자신이 히브리인이었는지, 애굽인이었는지, 미디안인이었는지도 모호하기만 한 세월이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40년 전에 애굽의 일터와 미디안의 우물가에서 보여 주었던 무용담은 옛 전설 속의 다른 영웅 이야기 마냥 자신에게서 멀기만 하다. 이제는 자신이 꿈 안에 있는지 꿈 밖에 있는 지도 궁금하다. 가끔씩 양의 울음소리만이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할 뿐…. 이처럼 모세의 반복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치더니”란 동사에는 모세의 지난 40년의 세월에 담긴 허무가 양치기 지팡이에 낀 손때처럼 잔뜩 묻어 있다.
모세의 이런 처연한 처지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현은 모세가 “그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쳤다는 문구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 문구에 주목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이 문구야말로 모세의 처지에 대한 가장 강렬한 묘사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창 30:25-31:42에 보면 야곱과 라반 사이에는 양 떼와 가축이 누구의 것이냐 하는 것이 첨예한 문제로 나타난다. 이 창세기의 본문을 살펴 볼 때 양 떼의 소유권 문제는 단순히 “그 가계의 가축들은 그 가계의 자산”(Durham 2000: 90)이었다는 공유재산적 개념과는 결코 같지 않다. 야곱이 몇 십 년을 양 떼를 쳐도 그 양 떼는 여전히 라반의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도 40년을 양치기 생활을 해도 여전히 그 양 떼의 소유주는 장인 이드로였던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허망하게 새어나간 물과 같은 세월처럼 모세의 지난 40년의 삶의 모든 노력 역시 하나도 그의 손아귀에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일 뿐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모세가 버릇처럼 40년 동안 살아 온 모든 평범한 날 중의 하나에 불쑥 시작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꼭 초자연적인 현상이 난무하고, 번개와 천둥이 치고, 신비로운 기운이 휩싸인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는 경우(참고, 출 19:9)도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평범이란 너울을 쓰고 이루어지고 한다. 이제 막 모세에게 일어나려는 경우가 그러하다.
모세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려는 하나님의 비범한 일을 3장의 처음 두 절은 이런 면에서 무척 흥미롭다. 3:1-2에는 인식적인 측면에서 두 개의 차원이 존재한다. 하나는 모세가 인식하는 차원이다. 모세의 인식 차원에서 보면, 그는 지난 40년 동안 해 왔던 것처럼 오늘도 꼴을 찾아 양무리를 인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전지적 인식을 가진 내레이터와 하나님의 인식의 차원에서 보면 오늘은 다르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간 곳이 하필이면 “하나님의 산” 호렙인 것이다.
예전의 역사비평학자들은 모세가 간 산이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 근거해서 이 산이 원래 성지(聖地)였다는 주장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 구절에 두 개의 상이한 인식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 생긴 잘못된 해석이다. 모세가 양 떼를 몰고 간 이 산이 “하나님의 산”이라는 것은 내레이터와 하나님의 인식의 차원의 일이지 모세가 그렇게 인식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2절 이하에서 모세가 성지순례자로서 경배 의식이나 제사를 드리거나 하는 태도를 전혀 취하지 않으며, 아예 하나님을 거기서 만나게 되리라는 예상조차도 못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모세가 가게 된 이 산이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선험적(a prior)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후험적인(a posteriori)인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 때문인 것이다(Sarna 1996: 38-39). 우리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산”이란 호렙산의 별칭은 이 산이 가진 이전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산”이란 문구는 3:1에 어떤 파장을 일으킨다. 2:23-25에서 이스라엘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을 듣고 드디어 하나님이 활동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본 독자들은 1절 전반절이 생뚱하게 모세의 양치는 일을 언급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커튼 속으로 사라지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산”이란 단어는 뭔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역사의 경로를 영원히 바꾸어 놓을 무엇인가의 꿈틀거림이 “하나님의 산”이란 표현에서는 느껴진다.
이처럼 “하나님의 산”이란 표현은 모세라는 인간의 시각과 그 인간을 만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나누어 놓는다. 모세라는 인간의 시각 속에서 그는 전혀 색다를 것이 없는 또 하나의 하루를 양치기로 살기 위해 호렙이란 산에 이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 날은 무척이나 다른 날이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처지를 권념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몸을 떨쳐 일으키신 날인 것이다. 인간 대리자를 불러 세우시는 날인 것이다. 역사가 완전히 달라지는 날인 것이다.
모세와 내레이터의 이중적인 시점(視點)은 3:2에도 계속된다. 3:1에서 모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떨기 나무 불꽃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모세는 이 것을 보지 못한다. 모세가 보는 것은 단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 하는 현상 뿐이다. 이 신기한 현상, “큰 광경” 때문에 모세는 왜 떨기 나무가 불타 없어지지 않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3:3). 아직 모세는 이 “큰 광경” 뒤에 하나님이 숨어 계심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호기심만으로도 하나님의 사역은 성공을 향해 가고 있다. 무의식적이나마 그가 하나님 존전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를 계시의 수단으로 택하셨느냐 하는 문제는 전통적으로 유대교 주석가들에게는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었다. 많은 해석자들이 불에 타나 사라지지 않는 떨기 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즉 하나님은 애굽이 아무리 박해해도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모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상징을 택하셨다는 것이다(Leibowitz 1976: 54). 또한 미드라쉬 라바(MidrashRabba)2:5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떨기 나무 불꽃 속에서 나타나신 것은 당신이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Larsson 1999: 28).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있는 것처럼 나도 고난 중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너에게 말하고 있는 이 장소, 즉 떨기 나무를 통해서 내가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이 것이 정말 이 상징의 의도된 의미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본문은 불타는 떨기나무와 이스라엘을 연결시키는데 전혀 관심이 없으며, 그 어떤 단서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해석은 반셈족주의(anti-Semitism)로 항상 고난을 겪어온 유대교 주석가들의 독자반응비평적 해석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또한 떨기나무가 히브리어로 “쓰네”()라고 하는데, 이 것이 “시내”산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에 근거해서 출애굽기 19장 이하의 시내산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인기있는 해석(Sarna 1986: 39) 역시 근거가 없다(Houtman 1993: 339). 최소한 우리의 본문은 시내산과의 언어적 연결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굳이 “시내산” 대신에 “호렙산”이라는 이름을 택했겠는가?
이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떨기나무보다는 불에 있는 듯 하다. 불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중 가장 두드러진 것들 중의 하나이다. 창 15:17에서 하나님은 “타는 횃불”로 나타나셨다. 출애굽기와 광야 사건들에서 하나님은 “불기둥” 혹은 “불”로 나타나신다(출 13:21-22; 40:36-38; 19; 민 9:15-16; 14:14; 신 1:33; 4:24; 9:3; 시 78:14). 에스겔은 하늘 전차를 타신 하나님의 이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불의 형상으로 묘사한다(겔 1:4,13,27). 신명기 4:11-12에서 하나님은 불 가운데서 말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이 불의 이미지로 나타나신 것은 불이 하나님의 속성을 잘 나타내주기 때문이라고 고금의 해석자들은 생각해 왔다. 그린버그는 다음의 몇 가지로 불이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Greenberg 1969: 71). 스스로 “질투라 이름”(34:14; 참고 20:5)할 정도로 불처럼 강렬한 성격을 가진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의 감정을 자주 불로 표현한다(렘 4:4; 시 79:5; 습 3:8). 불의 파괴적 힘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위험한 거룩성(dangerous holiness)의 유비(類比)가 된다(신 4:24; 9:31)).
특히 하나님의 이 “위험한 거룩성”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은 두리뭉실한 성격을 가지신 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성격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거룩성을 가지신 분, 거룩성의 정화이신 분이시다. 이 거룩함은 함께 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10:1-2)나 웃사(삼하 6:6-8)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침범을 당할 때 하나님의 임재는 위험한 임재가 된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 위험한 거룩성 사이의 미묘한 긴장은 나중에 성막 이야기와 황금 송아지 이야기의 연결을 통하여 표현된다(박철현 1999a; 1999b). 성막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출 25:8)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죄가 있을 때 그 성막을 통해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는 위험한 분이 된다(출 32-34장).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산”에서 불 가운데 임하신 점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 째, 이 사건은 출애굽기 3장과 출 19-24장간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우리는 앞에서 지금까지의 모세의 삶에 일어날 사건들은 뒷 날 이스라엘이 경험할 사건들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모세가 아기 때 물에서 구원받은 것은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구원받게 될 것을 반영하고 있다. 모세가 40세에 애굽인 감독에게서 자기 동포를 구원하려고 한 것은 그의 나중의 지도자 생활의 전조이다. 우물가 사건 역시 모세의 구원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산에서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은 출 19-2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의 그림자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9장처럼 장엄하고 큰 불길 가운데서 임하지 않으시고 하찮은 떨기나무에 붙은 불을 임재의 장소로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를 나타낸다(Greenberg 1969: 70-71). 아직 모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없다. 모세의 신지식은 전무하거나 보잘 것 없다. 이런 모세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은 모세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에서 첫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신다. 자기 종의 처지를 고려하셔서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자비롭지 않은가?
다시 본문의 흐름으로 돌아가자. 모세는 금방 사그라져 버릴 것 같은 불꽃이 계속 타오르면서도 떨기나무가 불타 없어지지 않는 현상에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서며, 하나님은 급히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다. 아마 이 긴박성은 모세가 하나님이 임하신 거룩한 장소를 아무 것도 모르고 침범하려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신발은 온갖 먼지가 들러붙게 마련인데, 고대 근동에서는 이러한 신발을 신고 성스러운 장소를 들어가는 것이 불경한 일로 여겨졌다. 애굽에서는 왕에게 나아갈 때 신발을 벗었다. 사르나는 제사장의 옷에 대한 규례 속에 신발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이와 연결시켜서 본다(Sarna 1986: 39-40). 마찬가지로 모세 역시 신발을 벗을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은 당신의 정체를 밝히신다(3:6). 먼저 하나님은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조상”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압”(), 즉 “아버지”란 단어이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직역하면 “네 조상의 하나님”은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 된다.
이 표현은 3:15의 “너희 조상의 하나님”과 차이가 난다. 3:15에서는 단수 “압” 대신에 그 복수인 “아보트”를 쓴다. 그러므로 “네 아버지들, 즉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3:15과 3:6은 “아버지”란 단어를 복수로 쓰느냐, 단수로 쓰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물론 3:6의 “압”은 대체적으로 집합적인 의미(a collective sense)로 이해되고 있다(Cohen 1947: 329). 이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동격 관계에 있으므로 이 해석은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3:6과 3:15의 단수와 복수의 대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에 근거해서 그린버그는 조심스럽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미드라쉬의 해석들에 근거해서 한 가지 재미있는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3:6에서 하나님은 “네 조상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네 아비 아므람의 하나님”이란 취지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신과 접촉한 경험이 없는 모세의 수준에 맞추어서 일부러 작은 불 속에서 나타나셨다고 했는데, 이러한 모세에 대한 배려의 연장선 상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와의 접촉점을 만들기 위해 그의 아버지 아므람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Greenberg 1969: 72-73).
이에 대한 근거로 그는 삼상 3:4이하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엘리 제사장의 목소리로 착각하는 것을 든다. 사무엘이 이처럼 착각하게 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사무엘에게 처음 임하실 때 하나님이 일부러 엘리의 목소리를 흉내내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모세에게 처음 다가가실 때 하나님은 모세가 너무 놀라지 않도록 그의 친아버지 아므람의 목소리를 흉내내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해석은 3장에서 하나님이 출애굽기 19장과 같은 장엄하고 압도적인 형태로 임재하지 않으시고, 대신 모세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추어서 일부러 떨기나무의 불을 통해 임재하신 점과 잘 상응하는 듯 하다.
이 해석을 받아 들일 경우 하나님은 히브리어상으로 단수, 복수가 가진 유동성을 활용해서 중의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하나님은 최초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는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고 나서, 일단 접촉점이 마련된 다음에는 곧 “아버지”란 히브리어 단어가 가진 중의법적인 의미를 사용해서 “네 조상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밝히시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수, 복수에 대한 해석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 조상의 하나님…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이다(3:6). 여기에서 하나님이 “네 조상의 하나님”을 부연설명 하시면서 각 족장의 이름과 더불어 “하나님”을 세 번에 걸쳐서 반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세대를 통한 일관성과 통일성을 강조해주는 것이다(프레다임 2001: 105). 즉 지금 모세 앞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모세의 가족의 하나님은 곧 몇 백 년 전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말씀하셨던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분은 몇 백 년 전에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이제 모세와 그 세대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에야 비로소 모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을 하고 급히 얼굴을 가린다. 이 장의 1절부터 계속 되어 온 하나님과 모세의 인식상의 수준 차이는 여기에서 드디어 일치된다. 이제 모세 자신에게도 이 날은 더 이상 평범한 날이 아니라 비범한 날이 되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하게 반복되던 그 수많은 나날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날의 시작을 경험하게 되었다(사 43:19).
이 비범한 새 날은 양치기 모세를 완전히 새로운 자로 바꾸어 버린다. 그는 이제 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된 지도자가 된다. 이러한 변신이 무척이나 극적이긴 하지만, 사실 고대 근동의 문헌들과 성경에서 양치는 자와 지도자는 관계가 깊다. 특히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 다윗을 노래한 시중에서 이런 구절이 있다.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더라”(78:70-72). 여기에서 “기르다”는 표현은 “목자로서 양을 치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양치는 일을 백성을 다스리는 일 사이에는 “시적인 상응성”(poetic fitness)가 존재한다. 이 때문에 미드라쉬는 모세가 양치기 시절 양을 잘 돌봄으로써 미래의 지도자가 될 자질을 보여주었다는 주장을 한다(Greenberg 1969: 67-68). 이런 시각에서 보면 모세의 양치기 생활도 너무 비관적으로 볼 것만은 아닌 듯 하다. 이 것도 그의 지도자 수업의 일환이었으니까.
결국 비범은 평범을 배경으로 한다. 모세가 부름받은 날이 그랬듯이 우리 삶에 일어난 작은 사건이 때때로 역사를 뒤바꾸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항상 만나는 사람, 우리가 항상 하고 있는 일, 우리가 가는 곳이 어느 날 “하나님”이란 명패를 달고 있을 수가 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의 “시간의 집착”이란 그림 속의 시계 마냥 축 늘어져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평범이 때로는 하나님의 비범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늘의 창”(왕하 7:2,19)을 통해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쏘이는 듯한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2. 하나님의 출사표(3:7-10)
이 문단은 하나님의 출사표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고, 이제 내려와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고자 하신다.
이 하나님의 출사표는 크게 7-8절과 9-10절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 두 부분은 그 내용이 거의 같다. 7,9절은 이스라엘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을 담고 있고, 8,10절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를 담고 있다.
우선 7,9절의 말씀은 2:23-25를 연상시킨다. 차이점이 있다면 2:23-25는 내레이터의 객관적인 서술인 반면에 3:7절은 하나님의 주관적인 반응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 느끼시는 반응은 “정녕히”라는 표현에 반영된다(히브리어로는 “보다”라는 동사의 부정사 절대형). “정녕히 보았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고통을 목도하고 눈이 부릅뜨여지게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통을 제 3 자의 입장에서 보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휼하듯이 보신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마음판에 새기듯이 생생하게 목격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관적인 반응을 반영하는 또 한 가지 표현은 “내 백성”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것이 처음인데, 이 “내 백성”이란 용어는 출애굽기 전체를 통하여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5:1; 7:4,16; 8:1,20-23; 9:1,13,17; 10:3). 이스라엘과 애굽의 운명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은 단순히 인식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을 촉발한다. 8절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1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 반면 10절에서는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사역의 대리인으로 모세를 보내실 것을 선언하신다. 비평학자들(Hyatt, 1971: 73-74; Noth 1962: 40-42)은 여기에서 모순을 보지만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이란 것이 대개 이러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구원 사역을 위해 인간 대리자를 세우신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한 이중적인 신뢰의 문제이다(출 14:31; 19:9).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듯이 그 종 모세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출사표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8절에 들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것으로부터(from)의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향한(to) 것이기도 하다”(프레다임 2001: 108). 구원은 빈 공간을 향한 단순한 해방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구원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투기”나 다름 없을 것이며, 해방은 “불안”(Angst)의 토대가 될 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런 막연한 열린 공간이 아닌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가시고자 한다. 이 아름답고 좋은 땅으로의 인도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창 15:18-19)의 완성일 뿐만 아니라 새 창조를 위한 토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주의 동산”(창 13:10)과 같은 이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쓸 사명을 갖게 될 것이다.
모세가 어느 하루 경험한 사건은 그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는다. 애굽 왕자에서 어느 광야 미디안 부족의 양치기가 되었던 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양치기이자 지도자로 거듭나게 된다. 광야의 보잘 것 없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아무리 평범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는 모든 것을 뒤흔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평범한 떨기나무 하나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모세의 삶을 바꾸듯이, 평범한 모세 역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인류의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기는 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성도는 평범 속의 비범을 볼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을 믿는 맘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 일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믿는 맘으로 우리는 우리의 평범을 사랑해야 한다. 그 것이 우리에게 “하늘의 창”일 수도 있으므로.
각주-참고문헌
박철현
1999a “성막의 의미와 그 현대적 의의”, 그말씀 (9월호): 70-77.
1999b “황금송아지 이야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출 32-34장)”, 그말씀 (10월호): 58-67.
프레다임, 테렌스 E.
2001 출애굽기 (현대성서주석,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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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Exodus:ACommentary(Philadelphia:TheWestminsterPress).
Sarna, Nahum M.
1986 ExploringExodus:TheOriginsofBiblicalIsrael(NewYork:Shoc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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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이 구절의 개역한글판 성경의 번역은 “맹렬한 불”이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4:4과 동일한 표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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