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애 굽 기의 중심사상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함으로서 시작되는 출애굽기는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어떤 평가와 처벌을 받는가를 보여주며 이스라엘 민족의 건짐이 결코 이스라엘 자신의 의로움의 대가가 아니라 선조에게 하신 언약의 실현과정의 일부임을 나타내어 줍니다.하나님의 건짐 또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들이나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들의 현 관점에서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는 출애굽기 전체에서 큰 주제거리로 부각됩니다.
언약에 대한 몰이해는 애굽사람 뿐아니라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심지어 레위 지파인 모세와 아론까지도 말입니다.이런 점에서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12아들들에게 행한 예언은 의미심장한데 좋은 운명을 예고 받았든 나쁜 운명을 부여받았든 간에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온당치 못한 존재들이며 다만 거기와 대조적으로 언약의 하나님만이 한없이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예언인 것입니다.
이제 이점을 실제로 역사 안에서 검증을 하게 됩니다.동시에 언약이 과연 무엇인가를 역사 안에 있는 나라들에게 알려 주게 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으로 인해 종노릇하게 된 히브리 민족은 종이라는 신분이 언약 안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언약의 민족이 꼭 종된 자들의 집합으로 규정될 타당성이 무엇인가민족의 정체성을 꼭 그것으로 고정시켜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그런 삶의 정황에서의 해방과 구원이란 역사안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게 되는가라는 점들이 파악되어야 합니다.언약의 민족이란 단순히 그들이 언약을 가지고 있다가 아니라 언약이 그들을 지니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언약이 역사 안에서 표현하고 싶은 바를 그들의 실존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이라는 신분은, 또는 종처럼 대우받는다는 것은 이미 앞선 언약의 내용 가운데 그런 비운(悲運)의 처지에서 비로소 언약이 구현된 사실이 있음을 말해주며 그것이 이제는 개인단위가 아니라 민족단위로 이루어진다는데 차이를 두고 있을 뿐입니다.요셉을 제대로 알던 바로왕은 종의 위치에 있는 요셉의 지지자의 위치까지 상승시켰습니다 마는 요셉의 가치를 모르는 왕이라면 당연히 그 전의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여기서 문제는 풀리는데 노예와 죄인의 위치에서 통치자와 主의 위치로 옮겨질 때 옮길 수 있는 언약적 근거와 정당성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있어 구원의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이점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이것만큼 중요하면서도 무시당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요셉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요셉을 내세운 하나님이 그를 主의 자리에 앉혔다면 왜 그를 主가 되게 했는지는 이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의 체험 속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5:13-21 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애굽의 430년 간의 체류는 가나안 땅에 죄악이 관영할 때 까지의 기간인 동시에 그들을 징벌할 적절한 구실이 있는 민족의 팽창도 아울러 고려한 기간입니다.죄를 징벌할 만큼 의로운 민족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권이지만 하나님은 죄라는 규정을 하나님 자신에 대한 도전과 공략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에
(창세기 3:4, 14)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고 내세운 언약의 민족에 대한 학대와 무시가 곧 저주를 내릴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요셉은 야곱의 12지파가 꼭 하나님의 언약의 민족임을 자기 시체의 이동을 걸고 확신했습니다. (창세기 50:25 여호수아4:32)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오해하여 나선 자가 있으니 바로 레위지파의 모세입니다.그의 구원관은 억압받는 자가 억압하는 자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항거의식의 발로에 불과합니다.이러한 해방의식은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사건의 재판으로서 무력에 의한 해방은 언약 자체가 무력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창세기 32장의 얍복강 사건)이입장과 충돌됩니다.폭력으로부터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구출이 구원이라는 언약의 성격과 일치되지 않을 때는 설사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손치더라도 야곱의 공동체이지 이스라엘은 아닌 것입니다.동시에 여호와와 상관없는 단체가 되고 복의 근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과 분리시켜 놓습니다.본인도 언약과 상관없는 생활을 40년간 광야에서 보내게 됩니다.(4:25)
이제 버려진 자를 여호와는 찾아옵니다.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음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이스라엘 자체의 근거가 있지 않음을 보입니다.물론 이스라엘 민족은 그에게 반발할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4:1)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상케 합니다.나는 여호와라 나는 내가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어 내는 속성을 지닌 神이라는 것입니다.(3:14-15)즉 너의 고통을 해소하는 차원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내가 이미 던진 언약에 대한 자기 충실의 차원에서 구원해 내겠다는 것입니다.이점은 이스라엘 내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원의 요소가 되는데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언약 순종의 차원에서 순종해야 될 필요성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가졌다는 그 자체만으로가 아니라 언약에 대한 동참이 공동체 의식을 낳는 것입니다.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의 실체를 옛날 에덴 동산에서의 뱀과 같음을 보여주며 인간에게 있어 문둥병 같은 저주가 바로 그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라고 합니다.실제로는 이 모든 것이 심판을 통해서 진행될 것입니다.심판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그 자체로서 이미 가능합니다.모세 가족이 애굽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가는 길에 그들은 여호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아들을 (장자를) 죽이려 하자 사태의 다급함을 안 모세의 아내가 황급히 장자에게 할례를 행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들의 심판을 면할 수 가 있었습니다.언약 계통에서는 이미 인간의 장자는 장자로 인정받지 못하며 할례 언약에서만 장자로 간주됩니(창세기 17:13-14)지금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서 행하려고 하는 일이 바로 이
언약으로 오는 심판을 나타나는데 있습니다.즉 진정한 장자란 애굽의 장자가 아니라 언약 안에서만이 장자라는 것을 말입니다.(4:23)애굽 왕 바로와 모세의 대결은 이미 요셉 때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애굽이 은혜를 입은 바가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에 대하여 애굽이 배반한 것에 대한 고발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그 증거로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갈 때는 도리어 애굽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됩니다.(3:21/12:35-36)
그 사이에 일어나는 애굽 땅에서의 10가지 재앙은 바로왕이 여호와를 모른다는 대가입니다.(5:2)그들에게 이해되는 여호와는 바로 자기들과 싸우시는 神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 여호와의 군대로 인정됩니다.(7:4)이처럼 애굽 왕 바로의 강팍함은 언약의 진정한 원수가 누구인가를 정하는 定形으로 삼고자함인데 10가지 재앙에서 피해 보는 것은 모두 애굽의 우상들이며(12:12) 그 우상의 기반이 되는 우상은 바로 인간 자체임을 마지막 10번째 재앙에서 드러납니다.결국 여호와의 원수는 인간이라는 神입니다.그 누구도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 될 수 없지만 언약 안에서 여호와를 섬기는(3:12) 자들만이 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술객들이 여호와의 능력을 흉내내어 보지만 자기들 술객들도 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남을 보고 바로 왕은 이 일이 단순히 여호와라는 神을 숭상하는 또다른 무당의 능력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그때부터 재앙은 애굽인이 거하는 곳과 이스라엘이 거하는 장소에 확연히 구별되게 주어집니다.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밤은 그야말로 죽음과 저주와 통곡의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것이 있었습니다.그것은 바로 1년된 어린 양입니다.이 어린 양이 그 집을 덮어주었습니다.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동안에 집 안에 있는 식구들은 양고기를 먹고 있어야 했습니다.이것은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입니다.어린 양의 표상에는 無罪思想이 담겨있습니다.(12:5 의 흠없는 어린 양으로 되어있다.)무죄한 것의 죽음을 유죄한 자의 죽음으로 대신 수납하시고 넘어 간 것이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탈출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와 심판으로부터의 탈출이며 단순히 애굽으로 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심판 아래있던 옛 시절로부터의 벗어남이기에 이 때부터 이스라엘은 새 날이 되는 것입니다.(12:2)
그러나 결코 어린 양의 영향권 밖으로의 벗어남은 아닌 것인데 이는 앞으로도 계속 이 유월절을 기념하여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이스라엘에게 있어 새 날이란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에 동참되어 있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지 어린양과 결별을 선언하는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애굽에서 함께 죽은 그 상태를 계속 지속시켜야 합니다.이제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모든 맏배는 대표로 거룩하게 따라 성별 되어야 하고 나머지 모든 것도 그것을 맏배로 여기고 종속되어야 합니다.(13:1-2)여호와의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 소속된 여호와 군대입니다.(12:17,41/14:13-14)적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공격하겠지만 사실은 여호와에 대한 도전입니다.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친히 싸우실 것입니다.(14:25 시편121:1-8)
언제까지냐 하면은 전세상을 여호와께서 친히 싸워 승리하시고 이 땅에 거룩한 성소로 자기 백성을 삼을 때까지입니다.(15:13, 16-18)홍해를 건너오고 난 뒤부터 이스라엘에게는 한없이 배워야하고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홍해를 가르게된 그 능력과 그 능력을 야기시킨 하나님의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홍해가 갈라질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입니다. (14:13-14)애굽 군사가 접근 했을 때 갑자기 나타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했습니다.(14:24) 이런 일들을 통해 도대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그들의 무수한 원망과 원망을 연속적으로 들으시면서 또 거기에 대한 적절한 징계를 내리시면서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철수하시지 않고 만나를 중지하지 아니하시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은 체득해야만 합니다.여기에 대한 해답을 하나로 요약하면 언약 밖에서는 너희들도 (이스라엘) 바로 애굽인과 동일하다는 의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혈통적 선민으로 이해하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혈통적 이스라엘이 언약적 이스라엘로 전환될 수 있는가요
15:22 에서부터 시작하여 1차 가나안 땅 정탐까지 (민수기 14:22) 10번의 원망 속에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것이 무엇이냐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즉 애굽인이 하나님의 이적을 10번이나 시험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러하니 또 하나의 애굽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15:26 에서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변신을 "하나님의 치료" 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이러한 하나님의 치유가 어떤 정신에 의해 주어지고 있느냐를 알아보는 것이 출애굽의 주제라고 보고 싶습니다.이스라엘의 원망을 치유하는데는 홍해를 가른 여호와 이름의 능력과 같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구출의 차원에서의 능력입니다.그 능력은 바로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능력입니다.죽음이란 단순한 소멸이나 무존재가 아니라 심판과 저주를 두고 말합니다.따라서 역으로 생명이란 단순한 생존이나 구사일생이
아니라 생명 세계를 두고 말합니다.그들은 홍해를 건너오면서 잃었던 생명을 도로 가진 게 아니라 옛세계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계의 영향력을 받는 범주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이 생명을 가진 게 아니라 그들이 생명의 손길 안에 잡혀 들어온 것입니다.그 생명은 곧 여호와 자신입니다.이제 자신의 소멸과 죽음과 생존 같은 것들은 생명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생존되지 않더라도 생명은 그들 안에서 역사 합니다.그러나 그들은 생존을 요구했고 생존문제로 생명에 대항했습니다.예를들면 물이 쓰다느니, 먹을 것이 없다느니, 먹을 물이 없는 이곳으로 우리를 왜 데리고 왔냐느니 하는 원망들이었습니다.그럴 적 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쓴 물을 달게 했고 만나를 내렸고 또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내었습니다.이 모든 것이 틘뻔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여호와 전쟁에서 얻어진 부산물로 이스라엘이 주어진 것입니다.여호와께서 용사로서 친히 싸우신전투는 비거룩에 대한 거룩의 승리입니다. (15:3,13,17)
따라서 출애굽기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관된 사상은 여호와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그들도 거룩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계시게 하는데 있습니다.모세가 알고 이와같은 사상이 전 공통체 내에 확산되어야 합니다.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영향을 받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같은 이방정치를 모방 도입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제도행정 계열보다 전 백성이 공히 계열에 따라서 다 거룩하고 제사장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19:4-6, 22, 24)여기서 말하는 거룩이란 언약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19:5) 그 언약이라는 것이 십계명과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 강령들을 말합니다.쉽게 말해서 이제 이스라엘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합니다.그들의 삶의 원리는 前과는 달라져야 합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20:2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생활을 통해 나타내는데 있습니다.즉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종의 위치에 서 있으면서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하나님에게는 종으로서, 사람들 끼리는 다 같이 종된 형제로서 삶의 양식을 갖추기를 십계명은 요구합
니다.우리 모두 꼭 같은 처지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이 위치에 오기까지 베풀어주신 여호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나가는 것입니다.그 예로 약자 보호법이 있습니다.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에 대한여호와의 관심은 자비로 나타나는데 (22:27) 그 이유는 너희도 전에 같은 처지가 아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22:21/23:8-9)
오직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만이 공동체 지탱의 원리로 개입되는 것입니다.이 은혜정신이 상실하여 도적질하거나 탐내거나 이방 풍습을 흉내내는 자는 가차없이 언약에서 제거됩니다.모세는 소를 제물로 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난 뒤에 그 피를 양푼이에 담아 언약을 적어 놓은 책과 백성들을 향해 양 쪽으로 분리하여 뿌리면서 이 모든 말씀으로 인해 언약이 이스라엘과 세워졌다고 합니다. (24:5-8)이는 무엇이 거룩한 나라며 제사장 나라며 또한 하나님의 소유된 민족인지를 보이는 약속의 언약입니다.누구든지 이 언약 안에 들어서는 사람은 혈통과 상관없이 언약의 민족이 됩니다.십계명과 약자 보호법은 구원의 은혜를 묘사하는 표현방식입니다.이 언약 안에 있는 자가 드리는 제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과 안식은 유지됩니다.
언약의 피란 헌신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양쪽을 화목케 한 소의 피를 두고 말한다면 그 소 피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은 돌판을 만들어 주겠다고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릅니다.(24:12)거기서 40일동안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을 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할 수 있는 처소를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십니다.(25:8)
이는 산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들 가운데 기거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입니다.하나님은 앞으로 주어지게 될 증거판을 담을 속죄소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 장막을 만들게 됩니다.장막은 그 속죄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입니다.거기에다가 제사를 담당할 제사장에 대한 복장이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식일을 강조함으로 이 성막이 안식과 연관 있음을 보이고 모세에게 증거판을 제공합니다.즉 다른 것은 다 산 밑에서 인간에 의해 제조 되지만 증거판 만큼은 산 위에서 하나님이 직접 만들므로 말미암아 산 위의 거룩과 산 밑의 비거룩과의 화합을 시도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갑니다.그런데 그 증거판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깨뜨려집니다.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 거룩한 돌판과의 부조화로 말미암아 멸망당하지 않기 위한 최선책이었습니다.거룩을 깨뜨려서 비거룩을 보호한 것입니다.하나님은 곧 자신의 언약 속에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거룩이 그들 속에 들어갈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언약이 하나
님과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서 성립되기 때문에 그들은 언약 밖의 존재가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이 점을 염려한 모세가 자신의 백성의 죄를 대신 하겠다고 나섭니다.(32:30)하나님은 너희들끼리 가고 나 여호와는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그러자 모세는 단독으로 장막 안에서 여호와 와의 은총을 근거로 하여 베풀 것을 요구합니다.(33:12-14)
하나님은 모세에 대한 은총과 자비를 확산시켜 모세처럼 은혜 베풀자와 자비를 베풀자를 위하여 모세로 통해 돌판을 친히 제조토록 해서 산으로 올라오게 합니다.거기서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기록해 주셨습니다.(34:28)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언약의 위반이 곧 죽음인 것을 말해주고(35:2) 성막 만드는 작업에 들어갑니다.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했는데(40:35) 이는 모세에 대한 은총과 자비가 현실화된 것입니다.즉 은총과 자비의 하나님이 모세에 대한 자비와 은혜를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 속에 계시는 것입니다.그것은 모세만이 본 영광을 다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38:18)현 상태의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이것이 모세의 실패 후에는 모세의 실패를 딛고 나타나는 새로운 모세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은 규정됩니다. (신명기 5;1-6)모세는 하나님이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서 자신을 중간에 내세웠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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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장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게 된 것은 그들의 소원에 의해서 되어진 일이 아니다. 따라서 왜 그들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고생하는가 라고 원망할 문제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민족 단위로 약속의 의미를 제공하기 위하여 그들은 거기서 대기하고 있게 되었다.
갇힘→고통→투쟁(전쟁)→승리→약속된 복을 상속받음. 이와 같은 약속의 틀을 조성시킬 목적이 주어진 대단위의 민족이 바로 그들이다. 따라서 약속의 완성점을 복의 제공에 있다면 그 주어진 복이 공격을 받고 와해될 위기에서 새로운 차원의 약속이 주입되어 일을 원만하게 마무리하게 된다.
모세언약과 아브라함언약과의 관련성이 여기에 비추어진다.
각 씨족별로 엄청나게 불어나게 되는 기간이 애굽에 기거할 때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의 결과이다. 그런데 그 복이 직접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 복의 민족에 도전하는 집단은 자기들 나름대로 힘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유지되는 체제가 있다. 이 둘의 힘의 쟁투에서 약속의 본질이 그 정체를 드러나게 된다.
한쪽은 자기들의 힘의 논리에서 이 쪽을 점검하고 평가한다. 그 결과, 이들 이방민족(이스라엘민족)은 자기들 힘 안에서 아무런 후원자도 없이 그냥 방치되어 있는 민족으로 보였다.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네들 국가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이나 제공할 수 있는 노예로 부려먹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러한 바로 왕의 편견을 성경은 간단히[요셉을 모르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 왕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하나님 덕분에 애굽나라가 강대국이 되었다는 과거사를 무시하고 하나님도 빼버릴 때 남는 것이라고는 그들을 이용하면 나라가 부강하게 되겠다는 그들의 정치 원리로 해석한 잘못된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출애굽 기록에서 독자들이 신경을 곤두세워 찾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왜 빠져 나와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아무 탈없이 400년간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쫓겨나가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이[요셉을 모르는 왕]의 등장이라면 결국 출애굽이란 요셉을 모르는 세계와는 영원한 투쟁관계 내지는 결별선언 같은 의의가 담겨 있을 것이다.
고대에서 전쟁에서의 승리는 진 편의 것을 아울러 가진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출애굽사건의 경우에는 애굽의 것을 가진다는 의미는 극히 미미하고(애굽에서 가져온 단장품이 성막 건립에사용된 예 같은 것) 오히려 꼴보기 싫은 양 그 곳에 미련없이 떠나 딴 곳에 가서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영구정착지로 잡은 땅이 애굽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가나안 땅이 애굽과 마찬가지로 함의 자손의 땅이라는 사실 빼놓고) 바로왕이 그곳까지 통치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왕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아브라함 언약까지 거슬러 확인해야될 필요성을 여기서 갖는다.
이스라엘 고통을 들으신 분도 아브람의 하나님이요 찾아 오셔서 건져내어 주신 분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오셔서 딴 일은 못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언약하신 그 범주 안에서만 구원사역을 하신다.
4대만에 다시 아브라함 자손을 불러내겠다는 그 약속을 이제 지킬 때가 된 것이다(창 5:13, 16)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해야될 일이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악한 바로 왕이 붙잡아 방해할 것은 못되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가두어 두려고 했다는데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들나름대로의 힘의 논리에 의하여 이스라엘은 도저히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들은 언약의 힘의 강대함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이 한번 약속한 일은 어떠한 장애와 힘에 의해서 중도에 소멸되는 일이 없음을 보여준다. 출애굽, 그것은 새로운 힘의 위을 국가적인 위치에서 시행됨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단순히 정복의 의미가 아니라 거룩한 심판을 행사하는 대행자의 출현을 알리는 전쟁의 시작이다.
출애굽기 2장-4장
복에 대한 공격은 복의 성격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도 동시에 보여 주는 계기가 된다. 고된 노동과 육체적인 피곤도 자녀생산에 차질을 가져다주지 않자 태아선별을 통해 노골적으로 남아(男兒) 살해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이는 종족 자체를 지상에서 말살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변신한다. 즉 하나님께로부터[불쌍히 ㈀窩받는 상대로서의 이스라엘]이다. 이 일에 레위지파가 동원된다. 레위지파 중의 한 남자 아기가 애굽의 공주로부터[불쌍히 여김]을 받게 된다. 그래서 죽음의 자리로부터 회생된다. 이스라엘 운명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관심은 이 한 남자아기의 운명 안에 집약된다. 물에서 건져내었기에 비로소 존재하는 아기의 운명은 만약 그 아기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경우가 생긴다면 분명 그가 경험한 것에 이스라엘 전체가 모아질 가능성이 있는 운명이 된다. 그러나 그가 성장하면서 꿈꾸어 왔던 이상은 그의 충동적인 행위 때문에 실패로 돌아선다. 동족의식은 있었으나 동족에 대한 逞ㅐ자신의 잘못 사용한 폭력 때문에 빛을 잃어 버렸다. 히브리인들은 모세에서 또 하나의 애굽기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자는 히브리인의 지도자나 재판관에 부적합하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모세는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민족의 해방과 아무런 상관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양을 치는 평범한 목동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목동앞에 우뚝 서서 그의 일을 민족의 해방에 동원시키시는 분이 계셨다. 하나님이시다!
모세 앞에서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붙은 불의 모습이었다. 차단된 거룩한 세계가 자진해서 이 땅을 방문한 것이다.(창 3:24) 더럽던 그 장소가 졸지에 거룩한 자리가 되었다. 모세는 신발을 벗게 되었다.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종으로서 복종만 해야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해방문제는 모세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였다. 그들은 조상의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제 모세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도망쳐 온 이 자리를 하나님이 건져내어 새로운 국가를 형성시키시는 자리로 일방적으로 작정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모세로서는 자신으로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여겨져서 이번 일에서 빠져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그런 의사를 받아주지 않으신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불신할 것이 분명하므로 자기를 애굽에 보내시는 신(神)의 이름을 알기를 원했다. 그 때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제공함으로 선조들에게 영원한 약속을 한 바로 그 하나님임을 강조하신다. 그리고 모세를 보낸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아울러 말씀하였다.
모세로서는 대단히 입장이 난처해졌다. 왜냐하면 사적인 일로 그들에게 다가서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을 잡는 시늉과 문둥이 환자를 고치는 시늉과 그리고 강물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처참한 심판의 전쟁을 나타내는 시늉을 하게 하셨다. 이와같은 기적들은 애굽의 지도자와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전쟁(뱀 잡음)을 통한 이스라엘 구출(문둥이 환자의 회복)을 암시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비천한 목부와 지팡이, 그러나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 배후에 어떤 낯선 신이 함께 있었다. 마치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듯이 말이다. 형과 단촐한 가족들을 데리고 모세는 여호와의 사명을 위하여 길을 떠난다. 그러나 길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죽을 뻔했다. 아마 문제는 모세보다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남편의 사명이 아브라함의 언약인 할례언약과 연관되었음을 소홀히 보고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을 시행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인가 피를 거치지 아니하면 누구라도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이 십보라 사건은 앞으로 전개되는 애굽에서의 모든 사건의 기초가 된다.
출애굽기 5장 - 10장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섰을 때 그들은 그들의 神의 이름으로 섰다. 이는 모세가 여호와 신과 바로와 바로 맞부딪치게 하고 자신을 관망자로 사태를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또한 神에게 있어 인간의 필요는 오직 그 神에게 예배를 드리는 일밖에 없음을 나타내는데 바로는 인간의 효용성을 노동생산성에 두고 있어 모세가 요구한 것과 매우 대조가 된다. 바로는 여호와 신에 대한 모멸을 생산성의 극대화로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그것은 적은 재료의 투자로서도 전과 같은 양을 생산할 것을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요구한다. 이 노골적인 학대는 고대 여호와 신에 대한 학대를 선언한 셈이 된다. 모세 일행은 그들의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졌는데 바로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점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그 대상으로부터 오히려 배반을 당해 스스로 낙심에 이르기를 바랬다. 그 낙심의 배후에는 바로 왕은 흔들릴 수 없는 권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해서 나온 결과로 돌려지기를 기대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또 여호와라는 신보다도 위대한 바로왕의 이미지를 조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세일행은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다시 여호와께 항변한다. 여호와 때문에 우리 백성이 더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고 그럴 때 하나님은 애굽과의 전쟁을 선포하신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애굽의 군대와 싸움을 전개하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의 현재 입장이 너무나 애굽의 힘에 예속된 상태이기 때문에 설득해도 소용없다고 걱정을 늘어놓는다. 이는 이번 전쟁에 있어 인간의 힘은 전적으로 소용없음을 모세가 스스로 자인하고 들어간다. 하나님은 내가 큰 권능과 재앙을 내려 그들 손아귀에서 내 군대를 빼내겠다는 것이다. 다만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다.
이 전岾자기 백성을 원하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백성을 주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싸움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지만 직접 참전할 성질의 군대가 아니라 어느편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는가를 보여주는 노획된 전리품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만약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에게 돌아간다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여호와의 소유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전쟁형식은 앞으로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여호와 신이 개입된 전쟁에서
비쳐지는 전형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세상에 매여있어 세상의 종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들 중에 누가 진정 여호와 군대라 불리어 질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의해 얻어진 노획물로 신분이 바뀐 그들이 바로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동시에 무엇이 여호와라는 신에게 징벌의 대상이 되는가도 아울러 이번 전쟁에서 밝혀진다. 그것은 바로 강팍이었다. 목이 곧은 상태이다. 그 강팍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바로[여호와가 누구관대]이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 망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구원의 의미는[여호와 이름]이 안고 있는 비밀에 있다. 여호와 이름은 여호와께서 이 지상에 하는 일과 관련있다. 하나님은 일개의 목동의 지팡이를 통해서라도 일하실 수 있다. 양에게나 위협이 되는 지팡이를 가지고서도 전 애굽을 떨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이 그 비천한 목동의 지팡이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더욱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10가지 재앙 중에서 애굽의 술객들도 흉내낼 수 있는 기적까지는 모세가 직접 나서지 않고 그일을 아론에게 맡긴다. 그러다가 바로왕으로 하여금 자기네 술객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역사임을 알게 되자 그때부터 모세가 바로의 神입장에서(출 7:11-12) 직접 징계자의 모습으로 나서고 또한 이스라엘이 사는 지역과 애굽사람이 사는 지역으로 구별되어 징벌이 내려진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이번 사역은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지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11장 - 12장
애굽에게 내리고 있는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한 전쟁이라는 방편을 통해 역사속으로 뛰어드는 한 면을 보여준다. 이것이 심판의 형식이다.
모세라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라도 이 정도라면 아마 직접 현현(顯現) 하실 때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을 때릴 때가 되었다. 동시에 이스라엘을 구출시킬 순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구출하러 오신 여호와라는 神의 특성과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 분이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을 적으로 간주하여 싸웠는지는 이스라엘의 장래의 운명과 직결되는 일이 된다.
마지막 밤. 여호와께서는 애굽 전역에 장자를 죽게 하는 재앙을 내리면서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히 표적을 내린다. 그 표적은 집에서 1년동안 같이 지낸 어린 양의 피,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 집안의 맏이를 대신하여 죽어야 하는 그 흠없는 어린 양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모두 담겨있다.
도대체 여호와의 구원이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만약 단순히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죽음의 천사가 아예 오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천사로 하여금 이 집에는 들리지 않도록 하는 번거러움이 요구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은 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어린 양의 희생 없이는 성사되지 않을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왕 같이 강팍하지도 않았고 애굽의 술객들 모양 하나님의 이적을 모독하지도 刻年 그런데 왜 그들에게도 피가 요구된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단지 애굽이라는 특정 공간에서만의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의 구원이 적용된 민족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한 죽음의 경험안에서 그 죽음마저 극복할 수 있었던 여호와의 능력을 알게하는 이동을 뜻한다. 여기에는 자국인이든 타국인이든 구별이 없다. 유월절 희생의 예와 고난의 떡을 먹기로 작정한 자들은 이제 모두가 여호와의 약속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다. 그들 사이에는 모두 한 공통점으로 묶여져 있는데 그것은 죽음 속에서의 회생경험이다. 그 사건에 개입된 것이 어린양의 희생의 흔적을 자신들의 기억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아야 한다. 만약 잊을 경우에는 이스라엘에서 제거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밤은 여호와께서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개입했던 밤이다. 그 밤중에서 새로 탄생된 것은 유월절을 새로운 기반으로 한 새 민족이었다. 아무도 무사할 수 없었던 밤을 경험한 그들에게 어린양이 가지는 구원의 표징은 절대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 없이는 현재의 우리가 없게 되어있다는 의식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실체를 형성케 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그 어떠한 인간의 힘이나 노력이 들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인간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만들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가!
출애굽기 13장 - 15장
이스라엘에서의 제사 제도는 자기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지시에 행했던 행동을 다시 해보는데 있다. 그 사건을 항상 현재화시킴으로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지속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전쟁을 하셔서 획득한 노획물이 바로 이스라엘이며 지상에서 제거된 장자와 대조적으로 산 장자로 새로 태어난 것도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이나 가축의 맏이를 따로 거룩한 것으로 구별함으로써 이러한 여호와의 취지에 호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유월절 행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결코 인간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대대로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는데 요셉의 해골을 이스라엘이 이동시키면서 이점을 참작해야 하는 것이다(출 13:19)
이스라엘이 애굽의 땅을 나올 때 하나님이 앞장서서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 있다는 표시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인도가 없었다면 그들은 필시 바다 쪽으로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애굽나라와 맞부딪힌 이스라엘은 그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 민족임이 실감나지 않았다. 유월절의 어린양에 기초를 둔 민족이지만 그것이 어떤 자연의 능력마저 초월하는 神의 본질과 연관된 것인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 바로 뒤에는 그들을 죽이려고 바로가 막강한 군대를 몰고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홍해바다의 갈라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베푸는 특별한 신적인 능력의 주입으로 된 것이다. 왜 그들만이 그런 혜택을 받아야 하나 그것은 그들이 어린양에서 출발한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홍해에서 하나님은 애굽나라와 이스라엘을 철저히 구별하여 취급하고 있다.
모세가 인도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건너온 홍해바닷가에서 다음과 같은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안에 그들의 신앙고백에 다 들어있다.
"여호와는 용사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대로 현재 우리 세대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이와 같은 능력이 계속 우리를 보호하신다면 우리는 그 어떤 민족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약속대로 말입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여호와를 그곳에서 직접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어떤 목표점이 설정되었고 그 도달점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이루게 될 것이라는 신앙을 찬양에 담아 싣는다.
그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원수이며 그것이 곧 자신들의 원수인지를 알게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언약실현을 막아서고 방해하고 도전하는 것들은 모두가 여호와의 원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들이 곧 여호와의 원수인 것을 그들은 광야생활에 들어가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광야생활로 들어서기 전부터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여러번 원망하고 무시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타고난 본성은 결코 애굽사람들과 다를바 없다. 그들 앞에 서서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어디로 몰아넣고 있는 지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여호와를 알고 있는 지는 그들이 광야에 발길을 옮겨놓자 마자 들통나 버린다.
하나님은 그들을 쓴물로 인도했다. 그들은 대뜸 불평한다. 물이 쓰다고 그러자 하나님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막대기 하나를 모세보고 물속에 넣으라고 명령하고 모세가 실행에 옮기자 물은 곧 달게 되었다. 물은 정상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광야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원망은 새겨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과연 나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를 쓴물로 인도하여서 시험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홍해바닷가에서 몰살할 뻔 했으나 기적으로 도와준 그 하나님의 능력에 회의를 품지않는 마음가짐이 우선 자리잡아야 된다.
오늘날 교회가 먼저 해야할 것은 환경개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처음사랑을 유지하는 일이다.
출애굽기 16장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원망은 그들이 기대한 것과 여호와께서 새로 제시하는 세계는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그들은 지금 광야에서 계속 위기를 느끼고 있다. 여유있는 양식이 마련되지도 않고 평소에 즐기던 고기를 구하여 미각을 돋운다는 것도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일이다. 어떤 희망과 기대를 제공할 환경이 전혀 못된다. 그런데서 자기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도한 모세에게 원망의 소리를 높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지극히 정상적이다.
원망할 만해서 원망하는 것이 광야로 인도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데 핵심이 된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시험했다고 되어있다.(16:4) 시험하시는 이유는 이 백성들이 과연 이 여호와에 대하여 얼마나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지를 타진하기 위해서이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원망할 권리나 불평할 위치에 있지 않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건져내었다는 사실이 단지 장소를 달리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자신들에게 개입되었는가가 파악되어야 이해될 문제이다. 그들은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외쳤다.
그들은 애굽과 현재를 같은 위치에 두고 비교하고 있다. 어느 곳이 더 여유있게 살 수 있는 곳이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 자기들의 힘에 의존하여 살려고 한다. 자기의 생존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들은 홍해가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다. 엄청났다. 그러나 그 일과 자기들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계속 자기 주변의 상황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기존상식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애굽사람 못지 않게 그들도 불신앙적이다. 그들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그들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는데 그 결과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그 마음을 담아보려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목표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게된 그 심정을 이제 이스라엘 전체의 마음으로 확산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음식 대신에 만나를 준다. 이 만나는 그들이 양식이 없다고 하나님께 원망했다는 증거가 되는 음식으로서의 만나이다. 만나는 그들이 애굽에서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만나는 현 이스라엘을 양식을 가지고 고발한 것이요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그들의 현세적인 불신앙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것은 항상 완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사실로 인해 만나가 내리는 법칙을 만들게 되는데 안식일에는 주우려고 해도 찾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불완전하고 미완성을 철없이 요구하던 그들에게 완전하고 완성적인 것으로 대치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은혜를 내려주고서도 원망한다면 결코 나의 장자가 아니다"라는 선언이 되는 것이다. 이 만나는 약속의 땅에서는 도저히 구경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즉 원망거리를 고발할 필요가 거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나를 줌으로써 양식,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아 내려보내신다. 이렇게 해도 이 하나님을 무시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양식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뢰함에서 오는 영생이다. 생존문제는 자기네들이 걱정할 것이 아니라 생존마저 은혜로 극복해 주신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교회가 죽음을 염려할 때, 이미 스스로 교회되기를 마다한 것과 다름없다. 성도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자가 아니라 맡기는 자들이다.
출애굽기 17장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진행하는 노정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점을 고려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답게 변신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이동하게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그들은 평소에 쉽게 생각하고 있던 식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있으면 적어도 물이 떨어져 우리들이 목말라 죽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이 있고 없고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계시고 아니 계시고를 멋대로 결정하고 있다.
이러한 백성들의 불평에 대하여 하나님의 비천성을 다시 재현해 주신다.
목동 출신의 모세는 아직도 지팡이를 들고 있다. 양들이나 후리는 평범한 지팡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이는데는 더없이 적절하다. 마찬가지로 물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오직 돌만 산재해 있는 광야에서 비천한 것들을 통하여 더욱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여호와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그 바위에 지팡이를 대게한다. 바위를 내려치는 지팡이. 여기에 동원된 도구들은 둘다 물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바위를 내려치는 그 모세의 행위는 물과는 상관없지만 애굽의 강물을 내리친 행위와는 상관있다.(7:5)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온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있었어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이스라엘 앞에서 행하게 하므로 전에 애굽의 강팍함을 징벌하기 위하여 애굽의 강물을 치던 그 심정으로 이 광야에서는 돌을 쳐서 물을 내게했다. 따라서 그냥 물로서가 아니라 그 물이 반석을 침으로 말미암아 터져나온 물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현재 이스라엘을 애굽과 같은 차원에 놓고 고발 내지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그 뒤의 사건에서 드러나는데 갑자기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덤비게 된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맞이하여 싸우라고 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그 지팡이를 들고 산 위로 올라간다. 모든 백성들이 다 볼수 있게
자 여기서 왜 갑자기 아말렉이 등장했는가 아말렉은 이 지구상에서 철저히 최후의 하나라도 살아남아서는 아니될 민족으로 성경에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매우 특이한 민족이다. 그런데 그러한 멸종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만약 그들을 멸종시키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비이스라엘다운 것이 된다. 이들과의 첫번째 만남은 이스라엘에게 전쟁이란 단순히 전쟁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보이는데 여호와의 능력을 무시하는 자들은 결코 이 지상에서 존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실예로써 여호수아가 아무리 산 밑에서 열심히 전투를 수행해도 모세손에 들려있는 지팡이가 내려가면 그만이다. 전쟁의 승패는 산밑에서 인간의 손에 달려있는게 아니라 산꼭대기의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있다. 이점이 이스라엘을 앞장세워 전쟁을 벌리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의 특성이 된다.
지팡이라는 비천한 물건이지만 중요한 것이 그 물건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다. 그것을 사용하셨다는데 있다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고린도 전서 1:25에 나와 있다. 사람들이란 약해보이는 것이면 언제든지 무시하는 버릇이 있다. 이 무시로 인해 인간들의 마음은 한껏 강팍해지기 십상이다. 애굽에 내린 재앙의 특징중의 하나는 결국 바로왕이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그 神 여호와를 얕잡아 봤다는데 있다. 애굽군대의 홍해에서의 멸망사건을 하나님은 아말렉을 동원시켜 재현해 보이는 것이다.
즉 지금 너희들이 누구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줄을 다시 주지시키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동행이란 결코 애굽적인 발생과 일치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사고방식과 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는 것이 오늘날 교회가 우선적으로 신경쓸 일이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기 위해 똑같이 세상적인 것을 내어놓고 경쟁해서는 아니된다. 이런 불신앙적 현상은 그리스도가 더할나위없이 무능해 보일 때 반드시 일어난다. 말보다 행위의 열매가 그 증거가 된다.
출애굽기 18장 - 19장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와 모세의 만남은 이스라엘을 보다 체계있는 정치형태로 정착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이러한 정치형태는 이미 이방나라에서 시도해 왔던 것이었다.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이스라엘은 국가가 되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대하는 국가는 그런 형식으로 정해지지 아니한다. 언약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의(定義)이다. 창세기 12:1-3에서 언급된 그 복의 근원이 이제는 국가라는 형태로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조건은 단 하나이다. [언약 안]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먼저 복의 근원으로 선택한 자기 백성과 계약체제에 들어간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언약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있는데 왜 또 계약상태에 들어가는가 그것은 국가를 세울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국가 설립자로 인정하고 그분을 위한 그분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조치이다.
아직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가진 국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이제는 국가라는 형태로 영원히 지속시키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체결의 의도이다.(창세기 117:20) 이러한 국가가 생기는 과정에서 바로라는 부정적 역할을 한 한 이방왕이 등장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란 언약국가는 철저하게 비애굽적인 바탕을 하고 있어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출애굽의 탈출에서 보여준 어린양의 희생과 대속정신이 또한 이스라엘의 건국취지이어야 한다.
거룩이라는 양보 안되는 절대법 앞에서도 이스라엘은 모세언약에서 새롭게 도입된 거룩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생존되는 국가로 남는다. 그 새로운 거룩이란 이스라엘과 마주서는 거룩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백성안에서 함께 동행하는 거룩의 모습을 두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약 모세언약이다. 출애굽에서 보여진 어린양의 희생을 국가의 건국이념으로 삼고 그 정신으로 거룩한 분의 동행을 가능케한 언약이 바로 모세언약이다. 따라서 모세언약은 다음의 두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다. 하나는 거룩한 죽음의 말씀의 기초인 10계명이요 둘째는 그 무서운 말씀의 진노를 덮어주는 희생의 피를 생산하는 제사제도이다. 출애굽기 19장의 위치에서는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고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면서 이러한 취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한다면 거룩 그 자체로서의 거룩이 아니라 그 거룩을 희생의 거룩으로 승화시키는 그 자체를 거룩의 내용으로 하고 있는 언약이다. 따라서 무슨 계명을 준수할 때도 애굽에서 종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의 정신을 상실한 상태로 지키면 아무런 소용도 없고 거룩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 점을 알기까지는 광야에서 약 40년이라는 시간이 소모된다. 왜 10계명을 다시 언급해야 되는지는 그들의 실패한 입장에서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어쨌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자 하시는 분은 더할나위 없이 무섭고 두려운 분이다. 감히 그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분이다. 만약 접근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왜 여호와께서 그들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데서 불러낸 것인가를 알려줄 차례가 온 것이다. 전에 떨기나무로 말씀하실 때는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불러낸다고 되어 있다.(출 3:2)
그 섬기는 방식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지켜야 하는 백성들 양쪽에다 모두 희생의 피 안에서 화목시키는 것이다(24:5-8) 우리가 무엇에서 비거룩이며 우리의 어떤 행위 때문에 제물은 희생되어야 하는가 라는 점을 그들이 깊이 알고 제사를 드려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한 조치이다. 즉 애굽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애굽같은 비거룩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일은 언약을 준수함으로만 가능하다.
출애굽기 18장 - 19장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와 모세의 만남은 이스라엘을 보다 체계있는 정치형태로 정착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이러한 정치형태는 이미 이방나라에서 시도해 왔던 것이었다.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이스라엘은 국가가 되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대하는 국가는 그런 형식으로 정해지지 아니한다. 언약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의(定義)이다.
창세기 12:1-3에서 언급된 그 복의 근원이 이제는 국가라는 형태로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조건은 단 하나이다. [언약 안]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먼저 복의 근원으로 선택한 자기 백성과 계약체제에 들어간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언약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있는데 왜 또 계약상태에 들어가는가 그것은 국가를 세울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국가 설립자로 인정하고 그분을 위한 그분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조치이다.
아직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가진 국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이제는 국가라는 형태로 영원히 지속시키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체결의 의도이다.(창세기 117:20) 이러한 국가가 생기는 과정에서 바로라는 부정적 역할을 한 한 이방왕이 등장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란 언약국가는 철저하게 비애굽적인 바탕을 하고 있어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출애굽의 탈출에서 보여준 어린양의 희생과 대속정신이 또한 이스라엘의 건국취지이어야 한다.
거룩이라는 양보 안되는 절대법 앞에서도 이스라엘은 모세언약에서 새롭게 도입된 거룩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생존되는 국가로 남는다. 그 새로운 거룩이란 이스라엘과 마주서는 거룩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백성안에서 함께 동행하는 거룩의 모습을 두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약 모세언약이다. 출애굽에서 보여진 어린양의 희생을 국가의 건국이념으로 삼고 그 정신으로 거룩한 분의 동행을 가능케한 언약이 바로 모세언약이다. 따라서 모세언약은 다음의 두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다. 하나는 거룩한 죽음의 말씀의 기초인 10계명이요 둘째는 그 무서운 말씀의 진노를 덮어주는 희생의 피를 생산하는 제사제도이다. 출애굽기 19장의 위치에서는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고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면서 이러한 취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한다면 거룩 그 자체로서의 거룩이 아니라 그 거룩을 희생의 거룩으로 승화시키는 그 자체를 거룩의 내용으로 하고 있는 언약이다. 따라서 무슨 계명을 준수할 때도 애굽에서 종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의 정신을 상실한 상태로 지키면 아무런 소용도 없고 거룩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 점을 알기까지는 광야에서 약 40년이라는 시간이 소모된다. 왜 10계명을 다시 언급해야 되는지는 그들의 실패한 입장에서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어쨌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자 하시는 분은 더할나위 없이 무섭고 두려운 분이다. 감히 그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분이다. 만약 접근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왜 여호와께서 그들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데서 불러낸 것인가를 알려줄 차례가 온 것이다. 전에 떨기나무로 말씀하실 때는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불러낸다고 되어 있다.(출 3:2)
그 섬기는 방식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지켜야 하는 백성들 양쪽에다 모두 희생의 피 안에서 화목시키는 것이다(24:5-8) 우리가 무엇에서 비거룩이며 우리의 어떤 행위 때문에 제물은 희생되어야 하는가 라는 점을 그들이 깊이 알고 제사를 드려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한 조치이다. 즉 애굽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애굽같은 비거룩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일은 언약을 준수함으로만 가능하다.
출애굽기 20장 - 23장
제사의 요체는 법궤에서 벌어지는 일에 있다. 그것은 성막에서 가장 깊숙이 자리잡은 지성소 안에 모셔져 있다. 법궤안에 들어있는 내용물과 법궤의 뚜껑에 뿌려지는 제물의 피의 상관관계에서 모세언약의 핵심은 보여지는 것이다. 20장에서 시작되는 시내산계명의 나열은 새로운 질서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그 나라는 희생의 의미를 구현하는 나라이다. 즉 애굽에서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그 심사를 헤아려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급선무이다.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낼 수 밖에 없는 그 이유와 동기는 모세가 전하는 10계명에 낱낱이 다 들어있다.
1계명 : 애굽의 神들을 쳤던 여호와이기에(12:12) 그 기능은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최종공로가 누구에게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하는 논의에 대해 쐐기를 박는 언명이다.
2계명 : 여호와의 형상은 피조물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로도 유출되지 아니하며 유사점이 없다. 여호와는 철저히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피조물 그 어디에도 거룩의 의미를 줄 수 없다.
3계명 :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종교처럼 주술적인 도구로 이름이 남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여호와는 인간의 소원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4계명 : 여호와의 뜻은 창조의 완성에 있다. 그것은 영원한 안식이다. 오직 이스라엘은 이 목표점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한다. 애굽에서의 탈출을 안식을 향한 도약이라고 봐야한다. 안식일을 준수한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여호와의 의지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이다.
5계명 : 그 교육의 역할을 가정에서 부모가 담당하게 될 때 자녀에게 돌아갈 복은 그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경우뿐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 님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6계명 : 생명의 존엄성 파괴는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다. 살아 있다는 것이 오직 여호와의 배려로 된 것임을 애굽에서부터 나와 인도 받으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7계명 : 부부의 사이는 여호와에 의해 마련되었다. 여호와가 제공한 신성한 관계에 그 누구도 함부로 뛰어들어서는 아니된다.
8계명 : 재물의 공급도 그들이 애굽에서 빈털터리였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하나님의 맙翩玲だ한 측면으로 보여진다. 도적질은 하나님의 은혜를 다치게 한다.
9계명 : 이스라엘은 다같이 종되었던 데서 구출당한 민족이기에 운명을 같이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고유성을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거짓은 이웃 속에 또 하나의 적을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10계명: 이웃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기여의 대상이다. 탐욕이 이웃에게 다가서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다가서신 정신으로 이웃과 교제해야 한다.
이상의 10계명은 제단에서의 제사정신을 규정하게 하고 이스라엘 전 사회의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그 어느 한 구석에서도 모두 다 전에는 애굽에서 종살이했다는 겸비함을 표출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 종교심의 발로로 피조물 안에 있는 것에 굴복하여 예배하는 행위나 과거의 자기신세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법을 어기고 언약을 어겨 죄로 간주된다.
여기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사회법이 얼마나 우수하냐로 차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근본사고의 차이 때문이다. 즉 여호와의 은혜가 등장되지 않는 윤리, 여호와의 돌보심 덕택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이 없이 행하는 도덕은 윤리도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그 어떤 사회질서 차원에서 도덕이나 윤리관도 보이지 않는다. 소위 종교의 정치화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교회와 비교해보자. 무엇이 차이가 나는가 아무런 신학적인 근거나 배경없이 인간의 양심과 사회질서 차원에서 행정해도 여호와와 관계 있는 구원의 기관이라 자청하겠는가
출애굽기 24장 - 31장
모세언약에 있어 복의 강림은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단을 쌓고 그 위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데 있다(20:22-21)
모세가 이해하기에는 번제와 화목제의 시행, 그 자체만으로 복의 강림이 성사되지 못하고 그이전에 말씀에 대한 준행만이 결정적 요인이다.
번제와 화목제의 시행은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헌신의 표라고 봐야한다.(24:7) 만약 우리가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사실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된다. 즉 비록 우리가 계명대로 못살더라도 우리가 드리는 이 번제와 화목제를 받으시고 그냥 넘어가게 하소서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같은 의식은 바로 신상(神像)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복을 획득하던 이방종교의 의식과는 달리 그 신상의 자리에 계명과 율례를 갖다 놓는 것이 특색이다.(20:23) 복을 따내는데는 어떤 테크닉이 쓸데없다. 다만 자비로운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22:27) 약자를 보호하고 이웃을 환대하는 법을 준행할 뿐이다. 만약 이러한 율례를 지키지 않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 그것은 여호와를 모독하는 것이 되어서 복과는 상관이 없이 오직 죽음만이 찾아들 뿐이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모세언약이다.
모세는 그 희생의 제물의 피를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렸다. 그 전에 모세는 모든 말씀을 지상에서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말씀이 실효를 거두는 세상의 건설, 이것이 모세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보면 흔히 신학자들이 이해하듯이 모세언약은 조건언약이 되고 만다. 많은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언약과 다윗언약은 무조건언약인 것에 반해 모세언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신학자들의 이러한 결론의 도달 이유는 언약을 구약의 중심사상으로 인정치 않고 다만 그 중심사상 중의 하나로 보는 경향 때문이다. 즉 어떤 일관성 전개에 있어 원활치 못하다는 것이다.
모세언약도 은혜언약이며 무조건적이라는 것이 24:12 한절에 그 실마리가 보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는 구절이다.
이 본문에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일까 단순히 율법과 계명을 가르친다면 이것이 이미 그전에(24:4)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이미 기록된 것이 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다시 산에 올라가서 가르치기 위하여 가르침을 받을 부분이 무엇인가 또 왜 꼭 돌판에 친히 기록해야지만 가르침이 성립되는가 이점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도 모세를 따라 산에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세가 두번째 시내산에 올라가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율례와 계명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성막을 만들기 위한 구조를 지시받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할 일을 위하여 특수한 사명을 띤 사람의 복장이라든지 하는 일을 지시받는다(25:1-31:17) 그래놓고 정작 산에 올라간 원래의 목적돌판은 내려오기 직전에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돌판에 기록된 말씀은 성막구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10계명뿐이다(신명기 4:13) 왜 이미 알고 있는 10계명을 친히 돌판에 적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첫째로 시내산에서 친히 모세가 들고 온 원판이 어디서 깨어지는가를 보면 되고 둘째로 그 깨어진 돌판을 대신하여 만들어지는 두번째 돌판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며 세번째 모세가 산에서 말씀을 적어 가지고 온 그 둘째 돌판이 나중에 어디에 보관되는가를 아는데 있다. 즉 돌판 보관과 성막에서의 하는 일과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보면 밝혀진다.
교회가 목회를 할때 가장 주의해야 될 일은 교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주술적인 시각에서 거론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육신의 욕심은 성령을 거스린다.
출애굽기 32장 - 40장
앞에서 이야기한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해보면 모세는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산밑의 백성들이 다른 형상의 여호와를 섬기자 황급히 들고 있던 돌판을 깨어버린다.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이 놓일 자리에 피조물의 형상인 송아지의 형상을 놓고서는 모세언약식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여호와의 복을 기대했었다. 모세는 돌판이 바로 성막 가장 깊숙한 곳,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임재하는 장소에 놓여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기거하시는 형태이다. 그런데 막상 산을 내려와보니 그 자리를 송아지 神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모세언약에 의한 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언약의 깨어짐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이다. 모세는 그들 가운데서 여호와편에 설 사람을 추려 다시한번 여호와의 은혜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고대하면서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제시한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규정짓고 모세와의 대화만 추진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은혜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겠다고 나서신다. 하나님의 자의로운 뜻에 의해서만 무조전적으로 긍휼과 자비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이미 범죄에 가담한 언약파기자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깨어진 돌판과 똑같이 지상에서 만들라고 하신다. 이는 인간쪽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모세언약은 새로운 장을 연다. 성막이(법궤)없는 모세언약에서 성막이 있는 모세언약이 된다. 거기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하나님으로 나타나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도 살 수 있는 원인은 송아지의 형상이 놓인 그 자리에 자비로운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돌판은 그냥 방치되지 않고 법궤라는 고운 상자안에 놓여지게 된다. 그리고 일년에 한차례 대 속죄일에는 백성을 대표하여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그 위에 뿌림으로 모세언약은 계속 유효하게 되는데 그 피가 뿌려지는 뚜껑을 가지고 속죄소(죄가 용서되는 장소)라고도 하고 또는 시은좌(은혜가 내려않는 좌석)라고도 한다.
성막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사행위는 바로 죄용서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죄 용서함을 받은 그 정신상태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사회정신으로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계명과 율례와 법도의 정신은 시은좌, 또는 속죄소에서 나와야 한다. 결코 형식적 제사만이 능사가 아니다. 과연 여호와는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구나를 그들만큼은 실감해야 한다.(34:6)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모르고 함부로 법궤 뚜껑을 열어본다는 것은 거룩한 분을 직접 대하는 것이 되어 사정없는 진노가 쏟아져 죽게된다.
법궤 안에는 인간들의 범죄의 증거들이 들어있게 된다. 또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이 정도까지 원망했다는 증거물이 들어있게 된다(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와 증거판)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범죄를 극복했기에 구원이 성사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성막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무서움 깊이 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가 같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이스라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승리하는 복을 받는다.
여호수아가 법궤를 앞장세우고 요단강 도하에 들어갔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는 법도와 계명의 정신을 법궤를 신앙하는 신앙으로 보았던 것이다.(여호수아 1:7-8) 자, 아브라함 언약대로라면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점령하도록 되어있다. 무엇으로 그 땅을 차지할 것인가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할 때 여호와께서 승리케 하신다. 자비의 세계, 용서와 불쌍히 여김이 삶법칙이 되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약속의 세계이다.
목회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보다 많이 아는데 있다(에베소서 3:18-19) 이러한 사랑을 이해하는데는 그만큼 하나님이 무서운 분인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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