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문제와 상담자의 자세 한승호교수 (국제대학교) 상담이란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상담이라고 하는 격식을 통해 도와주고자 하는 정신 치료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심리구조를 다루는 감정세계가 얼마나 복잡한가를 이해하기 전에는 상담을 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 들면서 상담의 배경과 방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즈음은 문제아, 문제 청소년이란 얘기를 흔히 합니다. 그러나 문제아, 문제 청소년이 있기 전에 문제 부모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모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자녀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나는 세상에 나가서 깡패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오는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생활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깡패가 되어 못된 짓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이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흑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어떤 씨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또 어떤 씨는 열매를 백 배나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씨 자체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나 옥토에 떨어진 씨나 씨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에 떨어졌느냐에 따라 열매를 거두기도 하고 못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도 옥토에 떨어지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문제아는 책임이 없고 문제아의 부모 즉 그 지도자와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겨울이 되면 추워서 떱니다. 어떤 사람이 떠는 사람을 보고 [당신은 점잖은 체면에 왜 떱니까? 보기 흉하니 의젓하게 앉아 계십시오]라고 했더니 [누가 떨고 싶어서 떠는 줄 아십니까? 떨리니까 떠는 거니]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추우면 떨게 되고 필요한 체온보다 밑으로 떨어지면 죽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적당한 체온이 필요하기 때문에 추우면 외투를 입고 더우면 벗게되는 것입니다. 추워서 떤다는 것은 바깥 공기가 차가와 몸이 자꾸 식어가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근육을 움직여 열이 생기게 하여 기본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는 사람보다 떨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죽으라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정신적인 조건, 심리적인 배경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야만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이 땅에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추운 것입니다. 떤다는 것은 비정상이고 깡패가 되는 것이며 도둑질을 하는 것입니다. 본인도 비정상임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추우면 떠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추운데 안 떠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고든 울포트의 저서 [개인과 그의 종교](The individual and his religion)에서 말하길 [인간은 그 누구를 사랑해야 살고 그 누구한테 사랑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 만일 이 세상의 많은 사람 중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또 내가 사랑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상황 속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2개월 이내에 스카이조프레니아라는 정신분열증에 걸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으면 사는 동물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사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휘청거리고 방황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워서 살기 위해 떠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옥토에 떨어진 씨가 아니고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가 되어서 그런 것이지 그 아이 즉 씨 자체가 나빠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깡패가 왔을 때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무조건 꾸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담이란 그 사람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을 인정하고 그를 불쌍하게 여기며 하나의 피해자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한 건장한 청년이 내 사무실을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 상담 받으러 왔습니다] [예, 앉으십시오.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네, 저는 깡패입니다] [아니, 깡패가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깡 자에 힘을 주셔서 말합니까?] [아닙니다. 저는 깡패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깡패라고 하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데 어째서 깡패가 된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내가 집에 있을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 구실을 못할 바에는 일찌감치 나가서 죽으라며 쌀이나 축내는 것이 살아서 뭐하겠느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어머니께서도 나를 보기만 하면 너 같은 게 어떻게 생겨나서 나를 이렇게 속 썩이느냐, 창피해서 살수가 없다고 밤낮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 구실을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으려고 했는데 이왕 죽을 바에는 못된 짓이나 실컷 하고 죽자고 생각하고 깡패가 된 것입니다. 그러고는 몇 달을 지냈는데 하루는 어떤 동네 뒷골목을 지나가다 그 동네의 깡패한테 공연히 두들겨 맞았습니다. 나는 깡패 선배인 형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그 형은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때린 깡패를 붙들어다 앞에 앉혀놓고 내가 당한 만큼 때려주었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람 취급을 받아보았다고 생각하고 그 순간 그 형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 결심했습니다. 만일 내가 집에 있을 때 딴 아이한테 얻어맞고 들어왔다면 아버지께서는 "아이구! 지지리도 못난 놈. 죽지도 않고 얻어맞고 다녀?"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어머니 같아도 '그렇지 않아도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는데 또 얻어맞고 다녀?' 하고 얼굴을 붉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만큼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너 맞았어!'하더니 나를 때린 사람을 데려다 놓고 내 앞에서 때려 줄 때,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 대우를 받았으며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형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형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으며 깡패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깡패가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원래 그 사람 자체가 나빠서입니까? 아닙니다. 원인은 부모님에게 있으며 청년은 추워서 떠는 것뿐입니다. 긍게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그리웠으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기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으니까 죽으려고 결심을 한 것이고, 죽기 전에 나쁜 짓이나 실컷 하고 죽으려고 생각하다가 깡패소굴에서 형이 자기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왜 깡패가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청년에게는 깡패가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부모보다 그 형이란 사람이 낫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깡패란 나쁜 것인 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라도 해야 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떨면 보기 흉한 것을 다 알면서도 떠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상담을 할 때, 살인강도나 깡패가 오더라도 이 사람이 왜 살인강도냐 혹은 왜 깡패냐 하는 마음가짐과 생각으로 상담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살인강도이든 깡패든 간에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따뜻하게 대해줘야 비로소 상담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담자는 경찰이 아닙니다. 경찰은 잘하고 못하는 것을 따져서 판단대로 상벌을 주지만 상담자는 상을 주고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추워서 떠는 사람에게 따뜻한 난로를 놓아주는 것이 상담자의 임무입니다. 여러분들이나 나도 추우면 떨게 되고 어머니,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키워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깡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우리는 옥토에 떨어졌기 때문에 순복음 교회에 와서 성령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길 가에 떨어졌다면 새가 쪼아먹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감사할 조건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관계라는 매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유태교 신학자인 마르틴 부버는 그의 저서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삶이란 만남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만나야지 혼자서는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인간은 타인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만남 그것이 곧 삶입니다. 그 사람과 내가 참으로 만나면 참 인생이 되는 것이고 어설프게 만나면 내 인생이 어설프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참 만남은 참 인생, 참 삶을 산다는 뜻이고, 되는 대로 적당히 만나면 내 인생도 적당히 살다 죽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남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만원버스를 탔을 때, 처음 보는 사람과 공간적으로 아무리 밀착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만남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만남이란 연대 관심을 주고받는 그 관계를 말합니다. 내가 걱정하고 아끼고 기도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과의 만남, 이러한 인간 관계를 마르틴 부버는 너와 나와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만남이 있을 때 우리는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7년 전에 세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하루는 중학교 때 영어 교과서에 나오는 하이드 파크라는 공원이 떠올랐습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하이드 파크라는 공원이니까 얼마나 훌륭한 공원인가 궁금해서 구경하러 갔습니다. 잔디를 잘 손질해 놓은 것 하며 울창한 나무숲, 예쁜 오솔길 그리고 가운데 큰 호수가 있는데 영국의 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삶을 만끽하고 있는 즐거움에 가득 찬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런 반면 옆 벤취에는 할머니가 한 분 앉아 계셨는데 어깨가 축 쳐져서 죽지 못해 사는 듯한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허리를 꾸부정하니 걸어가시는데 그 표정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은 지겹고 권태로운데 왜 젊은 남녀에게는 삶이 신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인에게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관계가 있지만 이 노인들에겐 삶의 기본조건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할머니의 무릎에는 개가 한 마리 앉아 있었습니다. 개를 얼마나 목욕을 자주 시켰는지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개를 쓰다듬어 주고 귀여워하고 사랑함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할 수 있는 개라도 없었다면 할머니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사랑할 대상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 수 있으나 반대로 사랑은 받지만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들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되 보통 사랑아 아니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 이웃이 굶어 죽는 것 아니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면 미워해야 할 사람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심리학적으로 볼 때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여대생이 저한테 찾아 왔습니다. 그 여학생은 8년 동안이나 교제해 온 남성이 있는데 언짢은 일이 있어 다투고는 헤어지겠다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그 남자 욕을 하였습니다. 그럴 때, 상담에 서툰 사람은 그 남자와 당장에 절교해 버리라고, 잊으라고 쉽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담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학생은 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냥 헤어지지 왜 핏대를 올려가면서 욕을 하겠습니까? 상대방을 미워하며 미워하는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행동과 그 행동을 유발시키는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理性)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매일 자고 깨고 활동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이성과 감정의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동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성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주는 작용을 하며 감정 즉 정서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어 이 두 개의 감정이 건전하게 공존되어 있는 경우에 이성적으로 판단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과 정서가 같이 움직이면 여러분의 상담 대상이 되는 문제아가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이성의 기능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될 때, 사람이 감정에 우선적으로 지배를 받게될 때, 문제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기존 질서의 파괴는 감정이 안정되지 않은 때문이며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감정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이 원하는 가장 큰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또 누군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고 싶은 가장 큰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청소년의 가장 큰 문제는 性문제입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가운데 [한국 고등학생들의 성생활]이란 논문의 작성자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7개 학교를 선택해서 3학년 학생들에게 앙케트를 실시했습니다. 학생중 성 경험이 있는 사람은 무기명으로 표시하라고 하였는데 4명중 1명은 성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상대가 애인이라기 보다 매춘부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부모, 형제, 목사 어느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또한 서울에 있는 7개의 여자 고등학교를 선정해서 여학생들에게도 앙케트를 실시하였더니 성 경험이 있는 학생이 11%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놀랍고 가슴 아픈 일은 여학생에게 있어 그 상대는 교사라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중에 여고 교사가 한 사람이 있는데 이분에게 조사 결과의 사실성 여부를 물어 보았더니 그 선생님의 대답은 여고생들이 남자 선생님에 대하여 갖는 지나친 호기심이 사실상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월간 잡지 신동아 1월호에 보면 '단상 단하'라는 논픽션으로 쓴 여자 중고등학교 여교사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자 고등학교에 남자 선생하고 여학생들과의 관계를 쓴 글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발랄하고 똑똑한 아이들이지만 선생님과 이런 관계에 있는 줄 누가 알겠습니까? 조선일보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에 의하면 한국 여성 가운데 결혼 전에 임신경험이 있는 사람이 25%정도 된다는 통계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근거로 하여 통계를 내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정말 신빙성이 있을까 하여 당국에다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그 숫자에는 임신하고 결혼으로 연결된 숫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다소 마음이 놓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청소년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혼란과 갈등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결국 쓰러지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악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들의 타락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보스톤 근교의 바닷가에 종종 갔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자유스럽게 뛰어 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미국 젊은이들의 개방적인 이성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성에 대한 관념은 우리와 매우 다릅니다. 그들은 상대방의 매력을 중요하게 생각할 뿐 성 경험은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결혼 전에 어떤 남자를 어떻게 사귀었든지 간에 결혼 후에는 전혀 문제꺼리로 삼는 법이 없습니다. 한국에 있어서 성은 특히 여성들에게는 절대화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잘한 것 같이 큰소리 칠 수 있어도 여자는 남자한테 성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수가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정신력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똑같은 환경 속에서 굶기면 남자가 먼저 죽는데 그 원인은 정신력에 있습니다. 남자는 겉으로는 힘이 세게 보이지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한두 번 부딪쳐보고는 포기하지만, 여자는 마음먹은 대로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앓아 누워 있으면 아내 되는 사람은 일 년이든 이년이든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보필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아내가 오래 누워 있으면 있을 수록 속상해 합니다. 처음 한, 두 달은 열심히 보살피지만 한 일년쯤 지나면 소홀해지는 것이 남편입니다. 세 번째는 깊은 신앙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늘 주님의 뜻을 받들어 진실하게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강합니다. 남자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지만 여자는 얼마든지 혼자 살아갑니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상담시 아내 되는 사람은 이러한 남편의 심리구조를 잘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단 부부간에 피치 못할 다툼이 있을 때에는 그 다툼의 범위를 부부 외에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들과 결부시키는 비약은 삼가 해야 하며 또한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서 반복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대개가 자기 약점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으므로 약점을 잔인하게 찌르면 그 사람은 쓰러져 버리고 맙니다. 될 수 있으면 상처 있는 곳은 다치지 말아야 합니다. 상담에 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상대방을 생각하는 측은 한 마음과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임하는 정신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일반적 기준에 의한 성급한 윤리적 판단은 삼가 해야만 됩니다. 이상과 같은 것을 마음에 새기고 상담에 임하신다면 더욱 더 훌륭한 상담 자로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을 확신합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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