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
ll. 중기 청동기 시대(B.C. 2200-1550)
이때는 바로 고대 근동의 재건기(再建期)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강력한 통치 체제가 무너지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인구가 대거 이동하는 혼란의 시대가 도래 했다. 수메르 문화의 빛은 점차 사라지고 셈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보면 이때에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저지대 계곡으로부터 하란 지역을 거쳐 계속 가나안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1. 바벨로니아인(the Babylonians)
창세기에는 니므롯이 에렉(Ereck, 현대의 War◎)과 아카드를 건설하기 이전에 바벨론(개역 성경에는 '바벨')을 건설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창10 : 10; 11'2, 9). 그리고 바벨론의 위치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시날(창10 : 10; 11 : 2), 흑은 갈대아(창11 : 28,31 ; 15 : 7)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최근에 발굴된 유적 에 따르면 B. C. 2350년경 아카드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것이 바벨루니 아의 모체가 된 것이다.
그 후 셈족의 아모리 족속이 침입해 와 명실 공히 왕정 국가로서 바벨로니아의 제 1왕조를 열었다. 이를 고대 바벨로니아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의 유적들은 흥수의 범람으로 거의 유실되었으나 함무라비 왕의 법전 사문에는 그의 통치시대 이전까지 말둑 신전 에사길라姬SRg쵸) 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식의 통치를 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최초로 바벨론 제국이 형성된 것은 고대 바벨로니아의 6대왕이었던 함무라비(B.C. 1728년경)때이며 이때에 만들어진 점토판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이 점토판들은 주로 행정과 상업에 관한 것이지만, 아브라함이 이주하기 직전 갈대아 주변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가장 중요한 함무라비 법전은 시민문제 ?가정문제 ?농업문제 등에 관한 282개 조문의 판례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는 모세오경에 기록된 시민법의 내용과 유사한 부분도 많다.
2. 아모리인(the Amorites)
'아모리'라는 말은 아카드어의 '아무루'에서 나왔는데, 이는 '서부인'이라는 뜻이다. 1933년에서 1960년까지에 걸쳐 폐허 도시 마리에서 약 B.C. 1800년경의 토판이 2만여개 발굴되면서 그들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토판들에 따르면 그들은 유프라테스강 중류 서쪽인 시리아의 스텝 지대에서 살다가 팔레스틴으로 들어온 셈족이었다. 그들은 '마리'(Mari)를 중심으로 크게 번성하였는데 성경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아모리 사람의 땅'(창48 : 22 :수24 . 15, 18)이라고 할 만큼 그들의 세력은 컸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가나안인 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모리는 B.C. 20세기경 함무라비 왕에 의해 바벨론에 통폐합된 것으로 보인다. 마리 토판은 대개 B.C. 19-18세기경의 것들로서 마리 북쪽 지방에 거주했던 히브리 선조들의 문화적 환경을 설명하는데 좋은 자료로 쓰이고 있다. 특히 그 토판에는 아브라함, 야곱, 하란, 나흘, 데라, 스룩과 같은 히브리 선조들의 명단 뿐만 아니라 하비루(히브리 ?)라고 불리우는 반(半)유목민 집단과 벤-야미니(베냐민) 지파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도 이미 이들에게 알려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히브리 조상들의 풍속 가운데, 죽은 부인의 자매와 결흔하는 제도, 남자 상속인의 권리를 확보하는 대리처제(代理妻制), 생득권의 양도, 자식 없는 부부들의 양자 입양 제도 등이 이미 마리 점토판에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또 히브리인들의 언약서 들은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마리 문자로 된 몇 몇 약정들과 매우 흡사하며, 누지 서판에도 유사한 풍숱이 설명되어 있다.
3. 가나안인(the Canaanites)
아모리인들이 레반트 지역(동부 지중해의 여러 섬과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틴 지역)을 장악하기 이전 B.C. 3000년대부터 가나안 원주민들이 있었는데, 창10. 15-19에 소개되어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B. C. 2000년 경에 아모리인들의 유입으로 가나안 지역은 거의 대부분 아모리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가나안이란 명칭은 '자주색 천'이란 어원적인 뜻이 있으나, 제한된 뜻으로는 '상인', '장사꾼'이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가나안인 들이 주로 무역에 종사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스라엘 족장들도 이러한 가나안 지역을 통해 장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때에 가나안인 들은 대부분 애굽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애굽인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가나안인 들의 종교는 다신론이었으며 바알 종교는 애굽에서 들여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족장들도 가나안 종교를 많이 접하긴 했으나 그들의 다신론적인 것을 거부한 사실이 성경에도 나온다(창 35:4; 수24:2;14-20장). 가나안인 들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알파벳 표기의 발명이다. 이스라엘 족장들도 이 알파벳을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후손들은 그것을 틀림없이 배웠을 것이다.
4. 애굽인(the Egy◎arts)
중기 청동기 시대에 애굽은 강력한 제 12왕조(B.C. 1991-1786년)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때에 남 '북으로 갈려져 있던 애굽이 통일 국가를 형성했다. 또한 애굽은 크게 번영하여 주변의 약소국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군사적 ?상업적 영향력이 가나안 내부와 지중해 남쪽 해안선까지 이르렀다.
한편 이스라엘 족장들도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간 적이 있으나 관계가 그렇게 원만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당했던 불쾌한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요셉의 힘을 입어 애굽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인과의 혼인을 피하기 위해 나일강의 삼각주인 고센 땅에 격리되어 살았다. 어쨌든 애굽인과 히브리인은 긴장 관계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애굽인들은 히브리인들의 양치기적 풍습을 경멸했고 히브리인들은 한결같이 애굽의 다신론적 우상 숭배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III. 후기 청동기 시대(B.C. 1550-1200)
1. 애굽인(the Egyptians)
후기 청동기 시대가 막 시작될 무렬 애 굽에서는 셈 계통의 왕조인 힉소스(Hyksos)왕조(B.C. 1700- 1567)가 무너지고 역대 왕조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제 18왕조가 들어섰다. 이전까지 셈족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던 애굽은 이때부터 셈족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고 마침내 그들을 노예화시켜 강제 노동에 동원하였다.
일찍이 애굽의 다신론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은 이때부터 애굽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이런 민족적 ?정치적 갈등의 발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거의 400여년동안 애굽에 거주하면서 히브리인들이 받은 영향도 크다. 특히 모세는 애굽의 왕립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언어, 문학, 정치, 전쟁술, 사제직에 대한 것 등 많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그 외에도 농업 기술, 직조술, 야금술, 건축술 등 다방면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악기나 음악의 영향도 컸다. 그러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히브리인들은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믿는 유일신 사상 때문에 애굽 종교와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형적인 측면에서도 많이 달랐다. 예를 들면 애굽인은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도덕적으로도 그리 엄격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애굽 종교와 이스라엘 종교는 본질적으로 서로 적대적이었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 힛타이트인(the Hittites)
힛타이트인(개 역 성 경에는 헷 족속)은 본래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들이 다(창 10 : 15). 그들은 족장 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까지 가나안에 거주한 종족 중 가장 큰 민족 중의 하나였다. 성경에서는 그들의 영토가 '광야와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수1 : 4), 것으로 말하고 있다. 힛타이트인은 남부 러시아로부터 이주하여 온 듯하며 그들의 중심부는 현재의 터어키이다. 히브리인들은 힛타이트인들과 많은 교류를 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랫
족속에게 땅을 사서 그의 아내 사라를 묻었고(창23 : 3,4), 에서는 렷 족속 중에퍼 두 아내를 취했다
(창26 :製). 그리고 겔 16 : 3,45에 보면 예루살렘을 가리켜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헛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는 예루살렘 거민이 헷 족속과 통혼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윗 때의 장수 우리야도 햇 사람이었다(삼하23 : 39). 그러나 히브리인과 어느 정도로 문화 교류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힛타이트의 유적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의 조약 형식이 성경의 언약 형식과 때우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조약 형식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郵 약정의 주체에 대한 선언 ② 약정자 상호간에 있었던 역사적 개요 ③ 규떼와 약정 ④ 낭독시 규정 ⑤ 저주와 축복에 대한 조항. 그러나 성경의 언약들의 근본정신은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며, 그것의 규례와 도덕적 성격은 월등히 우수한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구약 기자들을 인도하여 기본적으로는 세속적인 조약 형식을 취하게 하셨지만 세속적인 다신론을 일소하고 대신 당신의 말씀으로 채우셨던 것이다.
3. 가나안인(the Canaanites)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요단강을 건너 고 가나안 본토로 들어 갈 때 가나안에는 많은 종족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가나안인이라고 한다. 이때에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그 종족들과 접촉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는 군사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의 문화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는 유적으로는 '라스 샤마라 토판'이 있는데, 이는 우가릿어로 기록된 것이다. 이 점토판에는 특히 가나안 우상들의 신명(神名)이 많이 나오는데 바알, 아세라, 아낫, 다곤, 레쉬프, 엘 등이 있다. 특히 엘(El)은 히브리의 신 엘로힘(Elohim) 과 같은 이름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높은 고지의 숲속에 산당을 짓고 우상을 숭배했는데, 이는 후에 이스라엘의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가나안인 들이 쓰는 우가릿어의 문법, 구문, 운문의 병렬체는 히브리 문학과 깊은 관계가 있어 난해한 구약을 이해하는데 아주 용이하다. 이로 인해 모세 오경 속의 시(誇)나 시편의 몇몇 시들이 실제로 고대의 작품들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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