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료/구약신학

[스크랩] 시가서 연구

에반젤(복음) 2021. 8. 27. 13:43


1편/ 의인과 악인

1. 전체 시편의 서론이며 결론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시편을 가리켜 성서 속에 작은 성서라고 하면서 시편의 내용을 강조한 바가 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소위 '교독문'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시편을 읽는다. 시편 중에서도 1편은 전체 시편의 서론이자 결론에 해당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시편 1편은 전체성서의 내용을 가장 잘 요약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통틀어 하나님을 경외했던 자와 하나님을 멀리했거나 배반했던 자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그 인생의 결과도 알 수 있다. 즉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볼 수 있다. 시편 1편에는 이처럼 의인과 악인의 길을 분명하게 대조시키면서 믿는 자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2.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1절)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되고 있다(3절). 이스라엘에서 물은 곧 생명과 같은 것이다. 1편의 시인은 물과 율법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늘 과실을 맺는 것 같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그 행사가 형통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을 의인과 연결시키고 있는데(5, 6절), 그 고리는 율법임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여호와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 인간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 실망, 분노 그리고 인간들의 여호와에 대한 순종과 거역, 그 결과에 따라 인간들의 고통과 행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율법의 가르침에 절대 순종하고 사모할 때 의인이 되며 곧 온전한 여호와 신앙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율법이란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성서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3. 복의 의미
히브리어로 '복'을 가리키는 말은 에쉐르인데, 시편에서 이 말은 여호와와 불가분한 관계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복 있는 자를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2:12; 40:4; 84:12), "여호와에게 피하는 자"(34:8), "주의 집에 거하는 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84:4, 5), "여호와께 소망을 두는"(146:5)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주로 시인의 주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기대되는 표현들이다. 즉 복이란 인간들의 여호와에 대한 신앙(의지, 소망 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악인은 꾀를 쫓는 자이며 죄인으로서 오만한 자이다(1절). 그의 행사는 바람에 나부끼는 겨와 같다(4절).
그는 여호와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자이다(6절). 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의인(복 있는 자)의 길을 인정한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적극적으로 복 있는 자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인정하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요데아'는 동사 '야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야다'는 '알다'(to know. 知)를 의미하는데,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사용된 말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창 18:19; 신 34:10)과 인간의 도리(사 48:8; 시 1:6; 37:18)에 대한 앎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나 동물의 지식을 가리키는 말로 나타나고 있다(사 1:3).
하나님이 의인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認知)의 차원을 넘어선 '保護' 내지는 '引導'를 전제하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의 인정하심은 곧 여호와의 적극적인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여호와가 인간의 복을 동의할 때만이 그 복이 완벽해짐을 뜻한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희로애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본받아 여호와를 의지하고 소망하고 행동할 때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묵 상
복 있는 자는 기쁨 중에서도 여호와를 의지할 뿐만 아니라 슬픔과 고난 중에서도(특별히 탄원시)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분을 소망하는 자이다. 이 때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여호와의 적극적인 보호나 인도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여호와가 만나는 곳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로부터 인정받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생수이기 때문이다.

2편/ 하나님의 아들

시편 2편은 1편처럼 표제어가 없다(1편에서 표제어가 없는 것은 시편 1편이 전체 시편의 서론이자 표제어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원래 2편이 1편과 함께 하나의 시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별히 2:12下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에서 1편의 내용이 2편에서도 계속 이어짐을 보여준다. 본 시는 고대 이스라엘 왕이 등극하는 소위 '대관식' 모습을 강하게 띠고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됨(7절)
고대 근동에서는 왕을 가리켜 '신(神)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마치 신이 왕을 낳은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신의 아들은 곧 왕의 신격화를 의미한다. 본문에서도 고대 근동의 표현 양식을 빌러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아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이해되고 있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표현에서 '오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다. 이 말은 원래 노예에게서 낳은 아들을 적자로 합법화시킬 때 쓰는 고대 근동의 표현이다. 이것은 과거 사탄의 권세에서 종노릇하던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같은 의미이다.

2. 아들의 특권(8절)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신다(8절). 아버지께 당당하게 간구할 수 있는 자는 아들밖에 없다. 이것은 아들의 특권이다.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땅'을 아들에게 유업으로 준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땅은 단순한 영토적 개념이나 지역적 경계를 넘어선 의미를 갖고 있다. 땅은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야곱, 모세 등과 맺은 언약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땅을 소유하기 위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땅의 소유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며, 땅의 손실은 그들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땅의 소유는 자신들의 여호와 신앙이 구체화되는 증표로 간주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땅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최고의 가치를 상징하는 실체이다.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본문과 평행구절로서 대상 28:6과 삼하 7:14(참조. 시 89:26-27)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특권뿐만 아니라 범죄할 경우 하나님의 징계가 뒤따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내 아들을 삼고 나는 그 아비가 될 것임이라. 저가 만일 나의 계명과 규례를 힘써 준행하기를 오늘과 같이 하면 내가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니"(대상 28:6).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

묵 상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 유업을 소망하는 것이 특권이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신앙적 모범이 따를 때 그 특권은 빛을 발할 것이다.

3편/ 아침 기도의 시

3편은 개인 탄원시이다(시인이 일인칭 "나"로 표현되며, 그 내용이 고통의 탄식과 하나님께 대한 청원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

1. 개인탄원시의 특징
개인 탄원시의 용어적 특징은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 "부르짖음"으로 말할 수 있다. 구조적 특징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부름," "간청," "하나님에 대한 탄식," "원수에 대한 탄식," "간청," "신뢰," "찬양," "확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물의 구조의 특징은 대개 "시인," "원수," "하나님"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이 대부분의 개인 탄원시에 일정하게 나타나며, 본 시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3편의 시인은 많은 원수들에 의하여 고난을 받고 있다. 그는 "여호와여(인물구조-하나님) 나의(인물구조-시인) 대적이(인물구조-원수) 어찌(용어적 특징) 그리 많은 지요"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1절). 시인은 많은 원수들에 둘러싸여(1절)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고 있다(2절). 시인은 원수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2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패시며 영광임을 말하고 있다(3절). 그러나 시인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6절).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원수가 무너짐을 목격하였고(7절),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구원이 실현되기를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다.

2. 시인의 정체와 저작 시기
시인은 왕이나 군사의 지도자인 것 같다. 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이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영광은 히브리어로 투구(kwb)를 가리키는 듯하다. 곧 전쟁과 밀접한 의미를 묘사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시인은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백성들에게 내리소서"하며 본문을 마치고 있다(8절). "주의 복을 백성에게 내리소서"라는 표현은 지도자나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축도이다. 따라서 시인은 전쟁 중의 왕이나 군사 지도자로 볼 수 있다.
본문의 저작시기는 남유다가 바벨론의 통치를 받기 전이다(주전 586년. 바벨론 포로기 이전). 4절에 의하면, 시인은 여호와께서 성산(聖山)에서 응답하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성산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솔로몬에 의하여 완공된 것이다. 예루살렘성전은 주전 586년 7-8월에 함락되어(왕하 25장; 렘 39장) 불타고 성벽은 무너져 길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저작 시기는 포로 이전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3. 아침 기도의 시
본 시는 유대교와 초대교회에서 "아침 기도"의 시로 애용되었다. 그 이유는 5절의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라는 고백 때문이다.

4. 셀라( )시
본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셀라"라는 표현이 세 번 나나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 시를 가리켜 셀라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셀라는 구약성서에서 총 74번 나타나고 있는데 시편에서 71번, 하박국에서 3번 나타나고 있다(3:3, 9, 13). 모빙켈은 셀라는 이스라엘의 제의행위 때 나타나는 것으로서 예배시 시편이 낭독되면 회중들이 순종의 표시로 땅에 부복하는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빙켈의 이러한 관점은 아마도 미쉬나의 언급에 기초한 것 같다. 미쉬나(Tamid ⅶ, 3)에 따르면, 제2성전 시대에 일상적인 시들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읊어졌으며, 각 부분의 마지막에는 쉬도록(pause) 구성되어 있었다. 쉴 때에 제사장들 중 두 명의 제사장이 나팔을 불었고 이 때 예배자들은 엎드려 기도를 하였다. 이와 같이 세 부분으로 구분된 요소가 시편에서 "셀라"라는 단어가 출현한 것과 관련지을 수도 있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셀라가 나타나는 시편(이하 "셀라-시편")이 일반적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참조. 86편). 그러나 때때로 시편에서 인용문으로 추정되는 내용 다음이나(가령, 44:9), 인용문 가운데 나타나기도 한다(시 68:8). 스나이드(Snaith)는 셀라-시편에서 셀라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7가지로 구분함으로써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다.
첫째, 각 세 연의 마지막에 모두 나타나는 경우-3, 24, 32, 46, 68, 77, 140편.
둘째, 첫 번째 연과 두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만 세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4, 39, 49, 50, 52, 55, 57, 59, 62, 66, 67, 75, 76, 84, 87, 88, 89편. 셋째, 첫 번째 연과 세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만 두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5편.
넷째, 두 번째 연과 세 번째 연의 마지막에는 나타나지만 첫 번째 연에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9편.
다섯째, 첫 번째 연의 마지막에서만 나타나는 경우-2, 7, 20, 21, 44, 47, 54, 60, 66, 74?, 81, 83, 89, 98, 143편.
여섯째, 두 번째 연의 마지막에서만 나타나는 경우-18, 22, 34, 48, 61, 68, 73, 80, 94, 118편.
일곱째, 세 번째 연의 마지막에서만 나타나는 경우-19?, 45, 63, 89, 100, 103편.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편에서 셀라의 위치가 약간씩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학자 사이에서 셀라의 기능적, 용어적 의미에 대하여 여전히 일치점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기능적 의미에서 볼 때, 셀라-시편의 대부분이 표제어를 갖고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표제어가 음악적 지시와 관련 있으므로 셀라도 음악적 분위기와 관련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셀라의 용어적 의미는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왔지만 현재까지 확실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고대의 사본에서조차 셀라의 용어적 의미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칠십인 역을 위시한 헬라어 역본들은 셀라를 '디아프살마'( )로 번역한 것인데, 그 뜻은 '쉼,' '간주곡' 또는 '더 큰소리로'이지만 정확한 의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탈굼, 아퀼라, 제롬에서는 셀라를 '항상' 또는 '영원히'라는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 학자 킴히(Kim i)는 셀라가 '높이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살라'(sll)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참조. 사 57:14; 시 68:5), 가수나 음악인들을 위한 어떤 지시(instruction)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셀라가 '바구니'를 뜻하는 히브리어 살(sal)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바구니 모양을 한 북을 두들기는 것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또 다른 학자들은 셀라가 답관체(acrostic)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셀라에 대한 용어적 의미를 정확히 정의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셀라라는 용어는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현재 헬라어 구약성서의 해석이 원래의 의미와 상대적으로 가깝다고 추정할 뿐이다.

4편/ 의인의 고난
1. 시인은 의인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1절). 이것은 시인 자신이 의로운 자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또한 그는 자신을 경건한 자로 말함으로써(3절), 경건한 자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의 소리를 들을 것을 확신하고 있다(3절). 그는 하나님께 의의 제사를 드릴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5절), 이러한 표현은 예배자들에 대한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표현이다. 혹자는 이를 근거로 시인이 제사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의 신앙에 큰 기쁨이 되고 있으며(6절), 그 기쁨이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보다 귀하다고 고백하고 있다(7절).

2. 시인의 고난
시인은 원수들에 의하여 고난을 받는 자이다(2절). 그는 자신의 영광이 원수들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히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다(2절).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장시간에 걸쳐 진행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2절의 "어느 때까지"). 시인의 영광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수들은 부(富)를 지닌 자로서(7절), 세상적인 일에 몰두하는 자들이었다(2절). 비록 시인은 원수만큼 풍족하지는 않지만(7절), 원수의 삶이 부질없는 것임을 신앙적으로 확신하고 있다(2절).

3. 하나님의 응답
시인은 극심한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자이다. 세상적으로 시인이 고난받는 이유는 원수들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의 해결을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1절). 이것은 고난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시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에 의하여 상달되었음을 말하고 있다(3절). 비록 시인이 고난받는 그 순간 직접적으로 고난이 극복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의하여 고난이 분명히 해결되리라고 믿고 있다(3절).

4. 평안한 잠자리
시인은 자신의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에 의해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모진 세상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의하여 편히 잠을 잘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8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밤새 시인의 잠자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5. 저녁의 기도의 시
8절의 "평안히 눕기도 하고 자기도 한다"는 표현 때문에 고대 유대인들이나 초대교회에서는 이 시를 저녁의 기도의 시로 애용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 시가 3편(비교. 시 3:6-아침 기도의 시) 다음의 순서로 편집되었던 것 같다.


5편/ 판단하시는 하나님

1.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자신의 心思가 편치 않음을 고백하고 있다. 자신의 고통의 기도가 하나님에 의하여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洞燭하소서." 2절). 그는 하루 일과의 시작인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믿고 있다(3절). 비록 시인의 고통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침부터 기도로 시작하는 모습에서 시인의 경건성을 엿보게 된다. 그가 아침부터 하나님께 기도하고 소망한다는 것은 시인이 하루 일과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한다는 보여주는 대목이다. 역설적으로 하루의 일상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 할 것으로 시인은 믿고 있는 것이다. 곧 자신의 고통이 사라지리라고 믿는 것이다.

2.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므로 죄악에 빠진 자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다(4-5절). 또한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므로 악을 행하는 자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5절). 시인은 악한 자란 '거짓말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 '속이는 자'라고 구체적으로 진술하면서(6절), 상대적으로 자신의 경건성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7절). 여기서 시인의 지적 수준을 엿보게 된다. 먼저 악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악의 줄기에 속한 원수들의 행위 역시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진술에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한 보호, 내지는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3. 원수에 의하여 고난받는 시인
시인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고난받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로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8절). 이제 시인은 악한 원수들 때문에 자신이 사실적으로 고난받고 있음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 시인은 원수를 가리켜 신실함도 없고, 마음이 악하며,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혀는 아첨하기에 급급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9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악행 하는 자 역시 그 미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시인은 그 악행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주동적인 개입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개입은 하나님의 판단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4. 판단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께 원수를 고발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원수들을 정죄하실 것이며, 그 허물로 인하여 원수들이 고통 당할 것임을 시인은 확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시인은 원수의 악행이 곧 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배반임을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다(10절).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은 결과적으로 사악한 원수들에게는 정죄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내리시고 보호해주시는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11절).


6편/ 병자의 시

표제어: 스미닛(6, 12편)
스미닛은 '여덟째'를 가리키는 음악 용어로서 6편과 12편 외에도 대상 15:21에 나타나고 있다. 대상 15:21에 의하면, 스미닛은 '여덟째 音'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스미닛에 대하여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것은 현이 여덟 개인 악기를 가리키거나 여덟 개의 음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6, 12편에서 스미닛 앞에 나타나는 전치사 알( )은 '위에,' '앞에,' '때문에,' '관하여,' '맞추어(따라서)'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알 스미닛'은 '여덟째 음에 맞추어서,' 곧 음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시인은 병자
6편의 내용 중 시인이 병자라고 추정할 수 있는 곳은 2절과 7절이다. 이 중 2절의 내용은 시인의 병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수척함과 뼈가 떨림을 말하면서, 그것이 치유되기를 간청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 고난받는 상태를 알아보자.

2. 수척하고 뼈가 떨리는 자
'수척하다'라는 히브리어적 의미는 '메마르다'(참조. 사 16:8), '쇠약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말은 꽃이 바싹 시든 것처럼 시인의 육체가 말라 가는 것을 가리킨다. 삼하 2:5과 렘 14:2에 의하면, 이 말은 육체적인 쇠약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수척하다'라는 말은 시인의 육체가 "심각하게 쇠약해졌음"을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떨리다'라는 히브리어적 의미는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본문에서 사용된 의미는 '떨다'이다. 이 말이 단순 수동으로 사용될 때는 '두려워하다'(시 83:15; 렘 51:32), '놀라다'(창 45:3; 출 15:15; 겔 7:27), '급하다'(대하 35:21; 잠 28:22; 전 5:2) 등의 뜻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인이 쇠약 상태에 빠져 '두려워서 떠는 것'을 말한다(참조. 시 104:29). 이 단어는 이어서 나타나는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3절)에서 재차 사용되고 있다. 6:2에서 '뼈가 떨림은 시인의 육체적 상태를 말하며, 6:3에서 '영혼의 떨림'은 정신적 상태를 말하는 듯하다.

3. 간청하는 자
'고치소서'라는 히브리어적 의미에는 "건강하게 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대략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죄나 허물에 대한 용서해달라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며(참조. 사 19:22; 53:5; 57:18), 다른 하나는 육체적 병 고침을 뜻하는 것이다(신 28:27; 삼상 6:3). 광의의 의미로 볼 때, 이 말에는 "변했던 상태가 원래의 상태로 회복됨"을 가리킨다(참조. 사 53:5). 특별히 이 말에는 육체적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뜻도 있다(창 50:2). 이런 맥락에서 6편에 나타나고 있는 시인은 육체적 질병을 심하게 알고 있으며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자로 추정된다(참조. 3, 4절).

4. 앞을 보지 못하는 자
이와 같이 시인은 병을 앓고 있는 자이다. 시인은 자신이 병으로 인한 고통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견책하지 말 것과 징계하지 말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1, 2절). 그는 자신의 고통이 장시간 진행되고 있음을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절규로 대신하고 있다(3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방관하지 말고 돌아와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4절).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했던 자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경건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고통받고 있는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다. 시인은 병의 고통으로 인하여 밤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6절), 육체적 고통이 급기야 정신적인 근심으로 변하였고 그 결과 앞을 보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7절).


7편/ 재판 중에 있는 무죄한 자의 고난

표제어: 식가욘
이 단어는 동사 '샤가'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샤가'는 '고함치다,' '미치다'(삼상 21:14-15; 참조. 신 28:15-68),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삼상 21:13; 참조. 왕하 9:11; 렘 29:26; 호 9:7)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7편의 표제어에 나타나는 명사 '식가욘'은 7편 외에 구약성서에서 세 번 나타나고 있다.
두 곳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내려지거나(신 28:28)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경우(슥 12:4)에 사용되었다. 다른 한 곳은 예후 왕의 광기에 차서 병거를 모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왕하 9: 20). 이런 맥락에서 구약성서에서 '식가욘'은 '미침,' '광기'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동일한 의미로 시 7편의 표제어에 적용시키기가 어렵다.
여기서 문자적,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7편에 나타난 '식가욘'의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문자적 해석이다.
고대 아카드語에서 이 단어와 동일한 어근으로 추정되는 '세구'의 뜻이 '부르짖다,' '탄식하다'로, 에디오픽語에서는 '미치다'(찬게아로, 아랍語에서는 '속삭이다,' '(音이 있는 산문 형식으로) 낭송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시 7편이 탄식시라는 점과 산문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식가욘의 히브리적 의미와 근동어 사이에 일치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7편 외에 시편 탄원시 어디에도 식가욘이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식가욘의 뜻이 탄식과 관련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편 식가욘이 산문시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합 3장을 통하여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합 3장의 내용이 서사시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형식면에서 정형화된 시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분히 산문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식가욘은 산문시 형식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단어가 멜로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합 3:10에는, 3장의 노래가 영장을 위하여 수금에 맞춘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절에서는 '시기오놋에 맞춘 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고 진술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식가욘은 어떤 멜로디를 연상케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7편의 표제어에 나타난 식가욘의 문자적 의미는 '음률과 관련 있는 산문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신학적 해석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식가욘이 사용된 내용들은 공히 전쟁의 모습과 관련 있다. 시 7편에서도 다분히 여호와 전쟁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가령, '일어나사'(6절; 비교. 민 10:35), '깨소서'(6절; 비교. 삿 5:12), '영광'(어원상 전쟁용 투구를 가리킬 수도 있다) 등에서 전쟁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문자적,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식가욘은 전쟁 상황에서 여호와께 탄식하는 모습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합 3장의 내용이 전쟁 중에 여호와의 위용이 한껏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3-16절) 식가욘은 간청자의 열광적인 염원이 담겨진 내용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1. 시인과 원수
7편은 무죄한 자가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핍박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예기치 못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그 고통이 자기의 잘못이나 실수에 의하여 비롯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잘못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7편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7편에서 시인은 스스로 무죄함을 말하고 있다. 그는 악행한 것이 없으며(3-6절), 스스로 의롭고 성실하며(8절), 정직한 자라고(10절)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의로운 자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 의하여 박해를 당하고 있다. 이들은 시인의 원수로서 사자와 같이 무서운 자들이며(2절), 회개하지 않는 자이며(12절), 악인으로서 죄를 해산하는 자이며(14절), 함정(웅덩이)을 파서 남을 모략하는 자이다(15절).

2. 송사에 빠진 시인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해결되리라고 믿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어떤 재판 중에 원수들에 의하여 모함을 당하여 고통받는 자로 볼 수 있다. 또한 시인이 하나님께 '심판'(8절), '판단'(8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시인이 법정에서 모함을 당하고 있는 자일 가능성을 높게 한다.
특별히 시인이 원수를 가리켜 '웅덩이'(함정)이를 파는 자라고 언급하는 점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은 자신이 잘못한 점이 있으면 천벌을 받겠다는 자신에 찬 자기 변호에서 그 가능성은 한층 더 높다고 볼 수 있다(3-5절).

묵 상
우리 나라의 인권이 과거와 비교해볼 때, 괄목할 만큼 신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회 곳곳에 인권이 온전하게 실현되고 있다고 보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다. 언론 매체를 통하여, 간혹 잘못된 재판에 의하여 억울하게 고통 당하거나 피해를 입은 자들을 보게 된다. 재판 중에 자기 방어능력이 부족하거나 여건상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재판관도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재판의 결과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억울하게 송사 되어 감옥에서나 법정에서 고통 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서 나오는 절규는 곧 7편의 시인의 것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의로움 때문에 법정에서나 감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면 더더욱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군사독재 하에서 억울하게 재판 당하고 사형되거나 장기수로 복역했던 많은 인사들이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울부짖었을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개 소시민이 잘못 없이 모함에 빠지거나 법정에 서게 될 때, 그 심정 또한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직 신만이 진실을 안다"고 하면서 체념할 수도 있지만, 그 체념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의 실질적인 개입을 바라는 시인의 부르짖음은 7편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모함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실로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시인은 그 고통의 중심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거나 선처를 바라고자 세상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하면서 보호를 요청하고 있다(10절).
7편은 잘못 없이 남으로부터 모함을 당하거나 박해를 당할 때, 먼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도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야함을 보여주고 있다. 악은 의로운 하나님에 의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7편을 통하여 우리 주변에서 억울하게 모함 당하거나 핍박당하는 자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나로 인하여 억울하게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는지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한다.


8편/ 창조주 하나님 찬양

표제어: 깃딧( )(8, 81, 84편)
히브리어로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포도즙 틀 또는 포도즙을 짜는 통'을 가리키는 명사 '갓'( )과 관련 있는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이 단어는 포도즙 내기 위하여 사람들이 포도주를 밟으면서 부르는 소위 勞動謠로 해석할 수 있다(참조. 사 16:10; 렘 25:30). 이 단어가 나타나는 시 8, 81, 84편에 모두 하나님에 대한 찬양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깃딧'은 즐거운 가운데 부르는 노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즐거움은 포도주를 수확하여 즙을 낼 때도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본 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다. 찬양은 기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본 시의 전체 내용에서 시인의 기쁨의 찬양을 볼 수가 있다. 또한 표제어에서('깃딧에 맞춘 노래') 이러한 기쁨을 엿볼 수 있다.

1.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하나님을 찬양
우리는 때때로 세파에 찌들고 세속화되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기보다는 육적인 삶에 더 관심을 두곤 한다. 하나님의 원대한 창조 목적을 망각하고 어떻게 하면 더 윤택해지고,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명예를 얻을까 고민하고 있다. 본 시가 쓰여진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시인은 이러한 세속적인 인간들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재삼 고백하면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하나님을 찬양함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세상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하고 무시함을 보시면서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자신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시면서 본 시의 2절을 인용하시고 있다(마 21:16).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알려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고전 1:27). 스스로 지혜 있다고 믿고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순진무구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원수를 잠잠케하시기 때문이다(2下). 하나님께서는 순진하고 약하며 미련한 듯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상적인 부나 권력 또는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2. 주의 이름이 아름답다
시인은 1절과 마지막 9절에 "주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오묘한 조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어디 하나 흠잡을 때 없는 멋진 창조사역임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온전한 하나님의 창조 작품에 대한 시인의 감탄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멋진 작품이 나올 수가 있을까 하는 시인의 경외심의 발로인 것이다.

묵 상
시인은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고 있다. 하늘의 달과 별을 본다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일상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대상물인 것이다. 시인은 누구나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자연의 대상물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시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 주위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특별한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나 기도원에서, 또는 일정한 시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 시인은 무심코 본 밤하늘의 달과 별에서 오묘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을 본 것이다. 조금한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사건에서 또는 대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창조 사역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광활한 하늘을 보면서 현재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왜소한 것을 깨달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들에게 특권을 주신 것에 대하여 놀라움과 함께 고마움을 고백하고 있다(4, 5절).


9편/ 가난한 자는 실망치 아니함

표제어: 뭇랍벤
이 단어는 9편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개역성서에서는 '뭇랍벤'으로 표기되었지만, 히브리성서에서는 이 단어가 랍벤과 알무트로 분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두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아들의 죽음'이다. 이런 점에서 뭇랍벤을 일종의 애곡(만가)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다.
미드라쉬에 의하면, '뭇랍벤'은 한 단어로서 소녀나 젊은 레위인들이 '목청을 높이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1. 9편과 10편은 단일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본 시는 원래 10편과 함께 단일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9편과 10편이 연속된 답관체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답관체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를 순서대로 각 연에 미리 써넣고 그 자음으로 시작하는 단어로서 시를 지은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詩에서 답관체는 한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알파벳 순서로 시작되는 각 '행'이나 '연'의 길이가 거의 같다는 것이다. 시편에서 답관체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은 9-10편(한편의 시로 봄), 25편, 34편, 37편, 11편, 112편, 119편 그리고 145편이다. 시인이 답관체 형식으로 작시(作詩)하였다는 것은 시인의 문학적 소양이 깊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몇몇 히브리어 사본들에는(칠십인역: 헬라어 구약성서, 불케이트: 라틴어 구약성서) 9편과 10편을 한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칠십인역에서는 114편과 115편도 한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셋째, 대다수 시편들이 표제어를 갖고 있는 반면에 10편은 표제어가 없다(1, 2, 33편도 표제어가 없다). 넷째, 두 시편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발견된다. 가령, "환난 때"(9:9; 10:1), "가난한 자"(9:12, 18; 10:2, 9, 17), "압제 당하는 자"(9:9; 10:18) 등이다.
본 시의 시인은 가난과 의(義)를 고수하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자이다. 여기서 가난은 경제적인 것이며, 의는 종교적인 것이다.

2.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관
시인은 의로운 자이다(4절).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께서 변호해 주시고 심판하실 줄로 확신하고 있다(4절). 시인은 하나님의 온전한 심판이 자신에게는 구원을,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들에게는 징벌로 다가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공의(公儀)와 정직으로 세상만민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다(8절).
시인은 자신이 의로움과 하나님의 절대의(絶對義)를 연관시킴으로써 자신이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믿고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의로움 때문에 핍박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으리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는 압제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오,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9절).

3.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
시인은 원수 때문에, 의로움 때문에, 그리고 가난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13절). 특별히 시인은 가난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자였던 것 같다. 여기서 가난은 시인의 사회적 신분과 형편을 가름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가난한 자는 사회적으로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던 사람들이다.
물질만능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 날도 가난한 자들이 더욱더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인은 그 가난 때문에 원수들의 질타를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자이다. 시인은 그러한 질타와 자신의 가난 때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사망의 문" 곧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13절). 원수들은 가난한 시인을 모함하는데 서슴지 않는 자들이다(16절).
가난하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가난은 스스로의 게으름이나 무능 때문에 비롯될 수도 있겠지만, 본 시에서 시인의 가난은 시인의 의로움과 사회의 구조적 악("원수들의 웅덩이-함정")에서 야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조적인 악에 편승하거나 사악한 자들과 결탁하여 이익을 취함으로써 당당해 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한 쪽에서는 거짓과 악으로 부(富)의 배를 채울 때, 다른 한쪽에서는 가난한 자의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본 시의 시인의 부르짖음이 오늘 날에 가난한 자들의 탄식으로 이어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모든 세상사람들이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개의치 않았으나,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4. 가난한 자는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비록 지금은 가난 때문에 힘들고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탄식을 들으시고 공의로 판단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역할 하심을 믿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스스로 자위(自慰)하고 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생(원수)들이 활개치지 못하게 일어나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19절). 여기서 "일어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원수를 쳐부순다는 소위 "거룩한 전쟁 사상"이 내포된 말이다. 시인은 악인이 잘 살고 형편이 좋다고 우쭐하지만 그저 인생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원수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20절). 이 말씀은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고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을 때 우리의 세상사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세상적으로 가난한 자이지만 하나님을 신앙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기대함으로써, 자신의 울부짖음이 미래의 희망으로 변하게 됨을 확신하고 있다.

묵 상
몇 년 전 생각도 하기 싫은 소위 IMF사태를 한국민들은 잘 기억하고 있다. 요즈음 몇몇 대기업들이 퇴출이니 법정관리이니 하면서 언론의 톱뉴스거리로 장식되고 있다. 대기업이 부도가 나면 그 하청업체의 줄줄이 연쇄부도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그러한 파장은 전체 국민의 부담으로 남게 될 것이다. 과연 과거의 IMF사태와 같은 지경에 또 이르게 될지 여간 걱정이 아니다. 본 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한층 고조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종종 어떤 사항이나 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마치 심판관처럼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나의 판단이나 결정이 하나님의 공의처럼 늘 바르게 행사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또는 교만에 의해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원수들을 심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 그들을 고소했을 뿐 하나님에 의한 공정한 판단을 기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칭하면서 세속적인 재판이나 어떤 송사에 휘말리고 또는 그리스도인들끼리 세속의 재판에 뛰어들어 아전인수격으로 서로 잘했다고 하는 모습을 가끔 보면서, 본 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와 시인의 신앙에 머리 숙여질 뿐이다.

10편/ 고통과 해결

10편은 9편과 연속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앞의 9편의 "가난한 자는 실망치 않음"을 참조할 것). 10편은 하나님, 원수, 시인의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세 가지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본 시의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
하나님은 시인으로부터 멀리 서 계시며, 숨어 계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1절). 이것은 시인이 자신의 고통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도움을 간청하는 시인의 절규인 것이다. 우리가 심각한 고통을 당하거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을 토로할 때가 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린신것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때도 있다. 시인 역시 이러한 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원수들의 사실적인 핍박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2. 원수
원수는 교만한 자로서 가련한 시인을 핍박하고 있다(2절). 그는 이익을 탐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배반하고(3절),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하는 자이다(4, 11절). 그는 웅변이 능한 자로서(7절), 시인과 같은 무죄하고 외로운 자를 괴롭히고 있다(8절). 원수 때문에 시인은 함정에 빠져(9절), 넘어지고 있다(10절). 원수의 핍박으로 인하여 시인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 빠진 자이다.
원수는 세상에 속한 자이다(18절).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적인 유익만을 위하여 살고, 세상적인 재물이나 권력으로 인하여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는 자이다(참조. 4-6절).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안중에도 없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세속적인 삶을 위하여 죄를 범하는데 개의치 않는 자이다(7절).

3. 시인
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고립된 자, 무능한 자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이 스스로 진술한 고백에서 알 수 있다. "가련한 자"(2, 9절), "무죄한 자"(8절), "외로운 자"(8, 10, 14절), "가난한 자"(12절), "고아"(14, 18절), "겸손한 자"(17절), "압제당하는 자"(18절).
시인은 경건한 자로서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그는, 위의 내용처럼, 세상적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더라도 원수와 함께 세속의 현장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경건한 자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고난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 고난은 일시적일뿐 종국에는 영광으로 승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시인 역시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영원히 이어질 것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 다만 현재의 고난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난 중에도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으며(14절), 과거의 하나님의 도우심과 감찰하심이 자신에게도 역사할 것을 확신하고 있는 자이다(14절).

묵 상
시인은 원수들의 사실적인 핍박에 대항하지 않았다(상대적인 약자로서 대항할 힘도 없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고통이 원수들에 의하여 야기되었지만, 그 해결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시며 해결자도 되시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신앙이 돋보인다. 우리는 세상적인 고통이나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통을 주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본 시를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1편/산으로 도망가라

1. 산으로 도망가라
시인은 마음이 바른 자(정직한 자. 2, 7절)로서 악인에 의하여 쫓기는 자이다. 그는 악인의 교활한 술책('어두운데서 활을 쏘려함.' 2절)을 피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대하여 단호히 거절하고 있다(1절). 주변 사람들은 시인에게 '산으로 도망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산은 속세와 구별을 상징한다. 산은 속세의 찌든 삶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안식처로 대변될 수도 있고, 단순히 피난처로서 적합한 곳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1절에서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라는 표현에서 산은 피난처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시 55:6-7에 의하면, 새는 곧 새로운 안식처 이동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주변 사람들의 세속적 권유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 그는 자신이 여호와께 피난했음을 말하고 있다. 절대 도망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적인 지혜나 권고가 얼마나 거짓이며 허위의 피난처가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자이다(사 28:15)

2. 시인의 피난처
시인은 자신의 피난처가 여호와임을 말하면서, 여호와의 정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며, 그의 보좌는 하늘에 있으며,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고 감찰하신다"(4절)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시인의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늘 보좌와 인생만사를 감찰하시는 여호와께 자신이 피했으니, 이 보다 더 완벽한 피난처가 어디 있느냐 하는 확신의 고백인 것이다. 더 나아가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피난처일 뿐만 아니라 선악을 판단하시며 그에 대한 응보를 인생들에게 내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3. 여호와의 응보
여호와께서는 시인을 보호해 주시뿐 만 아니라 시인을 괴롭히는 악인들에 대하여 분명히 보복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현재는 시인이 악인들에 의하여 궁지에 몰린 바 되어 있으나, 악인들이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이 소득이 되리라." 6절). 시인은 악인들의 최후를 '소돔과 고모라의 악인들의 최후'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4. 여호와를 뵙다
시인은 "정직한 자는 여호와의 얼굴을 뵙는다"(7절)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제의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구원을 재삼 확인하며 하나님의 현재성을 경험하는 것처럼 시인도 여호와의 현재성을 경험할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적 정직함이 여호와의 현재성 곧 사실적인 구원을 경험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는 시인의 피난처이자 시인의 구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묵 상
우리는 간혹 궁지에 몰리거나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세상적인 대책이나 해결책을 모색하곤 한다. 더 나아가 위기 상황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세상 친치이 제안한 해결책에 귀가 솔깃할 때가 있다. 본문은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아뢰고 그 해결책을 찾을 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구원이기 때문이다.


12편/ 궤변, 눌변, 하나님의 말씀

1. 인간의 궤변
시인은 경건한 자이며, 충실한 자로서 말(言)을 잘하는 이웃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이다(1절). 시인의 이웃은 거짓말과 아첨을 잘하는 자로서 이중 인격자들이다(2절).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변호에 능한 자들이며, 힘센 자에게 아첨하여 세상적인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언변(言辯)은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조건이며, 출세하는데 충분조건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언변이 뛰어난 것에 대하여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는 자들이다(4절).
그들은 땀을 흘려서(노동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이 아니라, 말로써 사람들을 현혹되게 하며,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시인의 눈에는 이들의 궤변이 불성실한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을 "충실한 자"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가증한 이웃들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이웃들은 불성실한 자들, 궤변의 입으로 먹고살며 출세하려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재판이나 토론에서도 지지 않을 만큼 언변에 능한 자들이다(4절의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2. 시인의 눌변(訥辯)
시인은 스스로를 가련한 자, 궁핍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5절). 궤변에 능한 이웃과는 달리 시인은 언변에 능숙하지 못한 자이다. 말을 잘 못하고, 붙임성도 없으니("아첨하지 못하니") 가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조건으로는 시인이 세상적으로 출세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자신이 충실하고 경건함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1절). 이것은 시인이 세상적인 유익이나 출세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종교적으로), 성실한 것이(도덕적으로)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부귀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자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불순물 없는 순은(純銀)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여 용광로에서 완벽하게 정제된("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된" 6절) 순은과 같다(6절). 여기서 '순결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타헤르(taher)인데, 이 말은 대개 구약성서의 제사문서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말은 종교적(儀式的)인 것과 도덕적인 것에 많이 사용되었던 언어이다. 특별히 이 말은 은을 단련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말 3:3).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다는 것은 곧 시인과 같이 충실하고 경건한 자에게 그 의미가 다가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궤변에 능한 시인의 이웃들에게는 순결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순결한 말씀이 자신처럼 신앙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충실한 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7절).

묵 상
세상적으로, 말을 잘하고 아첨을 잘하는 자들은 출세할 기회가 많다. 그들은 시인과 같이 약한 사람들 앞에서는 우쭐거리며 군림하기를 즐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자기 보다 힘있는 자들 앞에서는 고개 숙이며 아첨하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권세 있는 자들 앞에서 머리 숙이고 손을 비비는 예스맨이 많다.
그들은 불쌍한 자들이다. 자신의 비굴함을 가족들에게나 친지들 앞에서는 세속적인 이익으로 변명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말은 매끄러워서 청산유수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변보다는 그 충실함과 경건함을 보시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기 때문이다.


13편/ 병자의 시

이 시는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언어로 구성되었으며, 시인의 한탄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시이다.

1. 어느 때까지
개역성서에서는 모두 '어느 때까지'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마소라 본문에서는 이 말이 다음과 같이 (m h) 혹은 - (' dh-meh), (m th y) 혹은 - (' dh-m th y), - (' dh-' n h) 등으로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
(m h):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 )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4:2).
주여 어느 때까지( ) 관망하시리이까(35:17).

(m th y):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6:3).
내가 어느 때에( )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42:2).

- (' dh-' n h):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 - ) 숨기시겠나이까(13:1).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 - )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 - ) 하리이까(13:2).

세 단어들을 직역하면 '얼마 동안'인데,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숨으심과 원수의 핍박, 그리고 시인의 고통이 장시간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 시에서 '어느 때까지'라는 말은 네 번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시인의 고통이 그만큼 심각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본 시에서 이 용어가 두 번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고통을(1절), 하나는 시인 자신의 심적인 고통을(2절), 다른 하나는 원수들의 핍박에서 받는 고통을(2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잊어버리심과 숨으심에 대한 탄식, 마음의 고통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그리고 원수들의 자긍에서 오는 비통함이다. 이러한 탄식 뒤에 시인은 냉정을 찾은 듯, 하나님께 (잊지 마시고) 자신을 기억할 것(생각하사)과 자신 앞에(숨지 마시고) 나타나실 것(응답하시고)을 간청하고 있다(3절).

2. 나의 눈을 밝히소서
이 성구를 통하여 많은 구약학자들은 시인이 병자라고 주장한다. 시인이 병자일 가능성을 더 높여 주는 것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는 표현이다(3절).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하오며(3절).
구약성서에서 눈이라고 할 때, '신체적인 눈'과 '영적인 눈'으로 구분된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시인의 '눈'은 신체적 눈을 말하고 있다. 왜냐 하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자신의 눈이 어두어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이저는 시인을 병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인의 질병에 대한 세심한 관찰보다는 제의적 관점에서 13편을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시인의 육체적 고난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3절에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표현은 시인의 영육간의 건강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크레이기는 시인이 중병에서 비롯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3절에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표현은 약화된 시력에서 비롯되는 건강 상실과 그로 인한 고통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크레이기 역시 바이저의 입장처럼 시인은 건강이 악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이상의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3절; 참조. 욥 17:7).
시인은 자신의 눈이 밝게 되어 육체의 생기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참조. 스 9:8). 이러한 사실은 '밝히소서'라는 단어에서 잘 알 수 있다. '밝히소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오르(or)의 사역 능동형이다. '오르'는 '빛이 있다,' '비추다'를 가리키는 말이며,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될 때는 '빛을 주다,' '비추게 하다'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13편의 시인은 육신의 눈이 심각하게 병들었고, 그로 인한 심령의 근심이 가득한 자로서(2절), 그 증세가 생명을 빼앗길 정도로 심한 지경에 이른 것 같다.

3. 요동할 때 원수가 기뻐함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시인처럼 병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불신자들의 조롱의 눈을 피하기 어렵다. 시인은 이러한 심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진술하고 있다(4절). 하나님을 믿으면 만사 형통할 것처럼 생활하고 전도하다가, 스스로 고난에 직면할 때 그 난처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전도의 외침이 무색하게 만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묵 상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에 의하여 해결될 것으로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결국은 주의 인자하심에 의지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5절). 이러한 고백에서 우리는 시인의 위대한 신앙을 보게 되는 것이다. 비록 현재는 고통과 절망에서 몸부림치고 있지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하여 고통과 절망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는 연단의 과정이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요소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6절). 이런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5절).


14편/어리석은 자

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면서 그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1.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1절),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 자이다"(4절). 본문에서 원수는 '어리석은 자'로서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자이다(1절). 여기서 '어리석은 자(나발)'는 '어리석다'라는 동사 '나발'에서 유래한다. 이 때 '나발'은 '구원자이시며 반석이 되신 하나님을 경홀(輕忽)히 여기는 것'(신 35:15),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미 7:6) 등을 의미한다.

2. 교만한 자
또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여호와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강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을 시편에서 원수에게 적용시킬 때 후자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고 볼 수 있다(참조. 시 36:1).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믿고 스스로 든든하다고 자만에 빠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시 52:7).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모두 성취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다. 대자연의 오묘한 법칙 앞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임을 느낄 때도 있고, 삶의 여정에서 조그만 사건 앞에서도 간혹 인간으로서의 무력감도 깨달을 때가 있다. 또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과 공간이 잔혹할 정도로 우리 앞에서 변하는 것을 보고 상실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으로서의 나약함, 무력감, 또는 상실감이 피조물로서의 한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역사 안에서 자신이 조정되는 유한한 존재함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3. 악행을 일삼는 무지한 자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의 삶이 진행되고 마치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그에게 있어서 삶은 곧 절대자에 대한 의지이며 순종의 과정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역사의 흐름에 반(反)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모르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는 어리석은 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것은 곧 부패하고 가증스러운 것이다(1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이나 태도가 그에게는 없기 때문에 악행을 일삼는 것에 대하여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그를 무지한 자라고 말한 것이다(4절). 어리석은 자는 무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악행으로 인하여 타인을 핍박하며 선한 사람의 삶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6절).


15편/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

많은 주석가들은 본 시를 가리켜 "성소에 들어갈 때 그 자격을 제사장에게 묻고, 제사장은 그 자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다음과 같은 양식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예배자들이 제사장에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묻는다(1절).
제사장은 그 자격 조건에 대하여 응답한다(2-5上절).
제사장의 축복으로 끝마친다(5下절).

1. 예배자의 도덕성 강조

이 시의 특징 중 하나가 성소에 들어가는 예배자의 조건 중 도덕적 자격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2-5上절). 이 자격이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나타난다고 하여서 일부 주석가들은 십계명과 관련시키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추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직하게 행함, 공의를 일삼음, 진실을 말함, 참소치 아니함(거짓이 없음), 악행하지 않음, 비방하지 않음, 망령된 자를 멸시함,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는 신앙인, 고리대금을 받지 않음, 뇌물을 받지 않음.

이러한 내용들은 일반적인 도덕성을 열거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절대적 도덕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2. 예배자가 예배드리기 전에 자신을 살핌(1절; 참조. 고전 12:28)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이 때 예배자는 주님의 십자가 달리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개인적인 필요나 은혜에 대하여 서원하거나 감사하곤 한다. 오늘 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배드리기 전에 자신을 살핀 후,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배자가 주변의 이웃에게 죄를 짓거나, 이웃을 실족케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고전 8:12).

그러므로 예배드리기 전 형제나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마 5:23-2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예배가 깨끗하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에(롬 12:2), 예배드리기 전에 자신을 살펴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1절은 예배자가 자신을 살피는 태도로 설명할 수 있다.

3. 예배자의 인격(2절)

예배자는 인격적으로 정직해야 하며, 항상 공의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직과 공의의 기본은 진실이다. 이것은 빛의 자녀로서 당연한 태도이며(엡 5:8),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가는 모습이다. 이러한 예배자의 인격은 곧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고전 11:1). 그리스도인들의 선함은 때때로 고난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을 통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벧전 2:20).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정직, 공의 그리고 진실만을 말할 때 주위의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되며, 빛을 드러냄으로써(빌 2:15; 참조. 딛 2:7) 복음전도에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입을 통하여 진술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의하여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자의 인격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개인적이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공적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4. 예배자의 행동(3-5上절)

예배자의 인격은 거짓이 없어야 하며, 벗에게 악행하지 말아야 하며, 이웃을 비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는 것이며(요일 1:21), 혀의 거짓은 악이요 사람을 죽이는 독과 같은 것이다(약 4:8). 악행은 무지한 것으로서(시 14:4),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일삼았던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과 회개치 아니함인 것이다(고후 12:21). 이러한 행위는 육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들이다(참조. 갈 5:17-21). 그리고 비방한다는 것은 그 마음에 온유나 관용이 없는 것을 말한다(참조. 고후 10:1). 이러한 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고 사랑으로 용납하였듯이 이웃에 대한 관용과 용서가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다. 또한 남을 비방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랑할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것은 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랑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뿐이다(고후 10:15-18절). 그는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는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는 자이다(참조. 롬 2:6). 그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남의 재산을 탐하지 않는 자이다. 남에게 고리(高利)로 돈을 빌려주어 부당하게 이익을 구하거나, 뇌물을 받아 무죄한 자를 모함하는 일에 동참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묵 상

성서는 개인의 신앙 지침서 일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회성을 강조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성서는 개개인의 삶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이웃과의 화목과 덕, 그리고 나눔을 말하기도 한다. 나만 주님 앞에서 바로 서있으면 된다는 신앙은 주님의 거룩한 사업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이다. 이웃과 함께 하는 신앙은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시작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상에서 역동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16편/ 主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표제어: 믹담(참조. 56, 57, 58, 60편)

탈무드에서는 믹담이 '기록된 문서'를 가리키며,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풍자시'(epigrm)를 지칭하며, 아킬라(Aquila)와 시마커스(Symmachus)는 다윗에 대한 별칭으로서 '막'(겸손한)과 '탐'(완전한)이 결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모빙켈(Mowinkel)은 아카드語 카타무(katamu)가 '덮다'(대속하다)라는 의미가 있음을 착안하여 믹담을 '대속하다'라는 뜻과 관련 있다고 보고 있다. 만약 믹담의 뜻이 '대속하다'라는 말과 관련 있다면, 믹담이 표제어로 등장하는 시들은 '화해의 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믹담의 어원과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믹담에서 두 가지 특징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믹담이 등장하는 시편 본문의 절수(節數)가 11절과 18절로 일정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시들이 모두 다윗과 함께 배치되어 있으며 역사적 배경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본 시는 '확신의 시'로서 볼 수 있지만, 고대의 본문이 매우 파손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 시의 구조를 정확히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다만 전체의 내용으로 미루어, 시인이 어떠한 위기로부터 구원을 받기를 간구하는 내용이 본 시에 담겨져 있다는 데에는 별 이의가 없을 것 같다. 특별히 2下의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는 표현은 시인 외에 제 삼자의 고백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시는 시인의 고백 외에도 제 삼의 인물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 나타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제 삼의 인물은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면서 다른 神에게 예물을 드리고(4上), 피의 전제(奠祭)를 드리곤 하였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과 제 삼의 인물과의 신앙을 대조시키면서 여호와 신앙이 자신의 유일한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런 내용에 미루어 본 시의 구조를 서론(1절), 제 삼자의 신앙(2-4上), 그리고 시인의 확신(4下-11)으로 나눌 수 있다(대부분의 학자들은 제 삼의 인물로 보지 않고 시인의 일관된 고백으로 보고 있다. 가령 A. Weiser. 그러나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나와 같다. 가령. P. C. Craigie).

1. 主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2下절)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만이 유일신이라고 경배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방신들에게 제사지내고 섬긴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혼합주의'라고 한다. 그들은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면서도 우상숭배를 하였고,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가나안의 이방신에게 빠져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이 하나님에 의한 복임을 알면서도, 신앙적으로 혼합주의에 빠졌던 것이다(참조. 히 3:8-11).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보호하심이 우리의 복인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속화되어서 요행이나 운수에 민감한 그리스도인을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신문란에 '오늘의 운수'를 즐겨 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점을 보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들도 있다.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복권을 산다든지 투기성 이익 등에 관심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를 자신도 모르게 경감시키는 태도를 보일 때도 있다. 이러한 세속적이고 혼합주의적 신앙 태도에 대하여 시인은 자신의 신앙과 대조시키고 있다.

2.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5上)

여기서 '산업'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고랄'은 분깃(또는 몫 lot)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이 단어는 '투표'(제비)라는 뜻도 갖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서 제비뽑기를 통하여 각 지파가 땅을 분배받은 것을 알 수 있다(수 14-18, 21장). 이런 점에서 '고랄'은 추상적인 의미로서 땅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랄'이 '상속,' '소유' 등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으로 미루어, 이 단어는 운(運)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될 때도 있다(참조. 사 17:14; 34:17; 57:6; 렘 13:25). 본 시에서의 '산업'(고랄)이라는 표현은 곧 시인의 '運'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단 12:3절에 의하면. 이 단어가 종말에 이르러 부활한 자의 몫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내세적 복(福)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잔'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코스'는 단순한 잔(盞)을 지칭하지만, 추상적인 의미에서 '저주의 잔'(참조. 렘 25:15; 사 51:17, 22), '고난의 잔'(마 26:39), '구원의 잔'(시 116:13)으로 사용되었다. 본 시에서는 이 용어가 '구원의 잔'을 의미한다.

두 용어를 살펴본 결과, 시인은 혼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여호와가 단순히 자신에게 복을 주는 분"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자신의 운명이며, 구원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시인의 적극적인 신앙은 곧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다"는 고백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6下).

묵 상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 시를 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사이비 그리스도인의 유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매우 소극적인 신앙 태도인 것이다. 본문의 시인처럼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고 요동치 아니함으로(8절), 기쁨과 영광을 즐거워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9절). 시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삶을 살고자 하며, 이를 기뻐하며 영원한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이 본 시의 교훈이다(11절).


17편/ 정직한 자의 탄원

본 시의 서두에서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정직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전체 내용으로 볼 때 시인은 원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이다(9-13절). 이런 점에서 시인의 고통은 그의 정직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본문의 전체 내용에서 시인의 정직함은 도덕적 요소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정직한 자의 탄원(1下-2절).

시인은 자신의 거짓되지 않는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시인은 원수들로부터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자이다. 그는 주변 사람으로부터 어떤 이유로 해서 "거짓된 자"로 몰린 것 같다. 시인은 자신의 정직함과 거짓되지 않음을 직설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의 공평한 판단을 기대하는 자이다. 이러한 기대감은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2절)라는 간구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검증하고 시험하셨음을 확신하고 있다.

특별히 3절에서 밤에 하나님의 권고와 감찰은 시인이 밤 사이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탄원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을 슬퍼하고 고민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은 본 시의 마지막 절인 15절에서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에서 알 수 있다.

매일 밤마다 시인은 자신의 고난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탄원한 것 같다. 이제 시인은 자신의 정직함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강조하면서 자신의 고난이 극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권고하시며 감찰하셨으나 (나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3절). 시인은 더 이상 자신의 고난이 부당하다는 사실에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밤새도록 반성하고 묵상해 보아도 자신이 흠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에 시인은 작정하고('결심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자신은 정직했고 앞으로도 (물론) 범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짐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2. 정직한 자의 입(4절).

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인의 입," "원수의 입," 그리고 "하나님의 입"이 대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시편(특히 개인 탄원시)에서 등장하고 있는 입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신체적 기관을 뜻하는 것(참조. 겔 3:3)만이 아니라, 말(言)과 관련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원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악한 것으로서, 그 말들이 시인을 핍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원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악하다는 사실은 다음 성구가 잘 보여주고 있다(참조. 10:7; 59:7). 렘 9:3에 의하면, 거짓말하는 혀는 화살과 같다고 했다. 구약성서는 혀를 잘못 사용한 예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별히 개인 탄원시에서는 원수의 혀를 '신실함이 없는 혀'(5:9), '살인하는 혀'(52:2), '궤사한 혀'(120:3), '독이 있는 혀' (140:3)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원수는 악독하게 말할 뿐만 아니라, 달변가(達辯家)로서 언변에 능하지 못한 시인을(참조. 38:14) 괴롭히고 있다.

본 시에서 원수의 입(口)은 세상적인 행사를 논하며(4절), 교만하지만(10절), 시인의 입은 거짓이 없는 입술임을 말하고 있다(1절). 결과적으로 시인이 정직하고 시인의 입술이 거짓 없고 순결한 이유는, 그가 주의 입술의 말씀을 쫓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은 당연히 정직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정직한 자신이 원수의 압제로부터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13절) 하나님의 복까지 받을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14-15절).


18편/ 지도자의 덕목

본 시의 내용은 시인인 왕이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감사하여 부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본 시를 가리켜 "왕의 감사시"라고 부르고 있다(참조. 16-17절). 일부 학자는 본 시가 두 편의 시(1-30절과 32-50절)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나(포러), 그 근거가 충분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본 시가 여러 구약의 사상을 담고 있으며 아주 고대에 저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 시가 구약성서의 여러 사상을 담고있다는 증거는 다음을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 가령, 20-21절은 신명기적 사상을 강하게 담고 있으며(신명기의 주요 사상-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
31절의 내용은 사 43:11; 44:6, 8; 45:21절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 그리고 본 시의 전체 내용이 삼하 22장과 비교된다는 점이다.

또한 본 시가 고대에 저작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29절과 33절에서 "왕이 걸어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매우 고대의 전쟁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삼하 1:23; 2:18). 본 시에서 시인은 왕으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왕인 시인은 자신을 자비한 자, 완전한 자, 그리고 깨끗한 자와 동일시함으로써(25-26절), 여호와의 구원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확신하고 있는 자이다. 여기서 이 세 가지 표현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1. 자비한 자

히브리어로 이 말은 "하씨드"라고 하는데, 그 뜻은 "거룩한 자"이다. 이 말은 구약성서에서 32회 사용되며 그 중 시편에서 25회 나타나고 있다. 이 단어의 어근은 "헤세드"이며, 그 의미는 "친절," "사랑," "자비"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부 구약학자들은 이 단어에는 "계약"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참조.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계약." 창 21:23), 문자적인 의미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참조. 삼하 1:26).

특별히 이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민 14:18-19; 느 9:17; 시 86:15; 103:8; 145:8-10). 8:25절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자비한 자"라는 말은 고결한 성품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룻이 베푼 사랑(룻 3:10), 라합의 친절한 응대(수 2:12), 요나단 죽음을 충심으로 슬퍼한 다윗의 마음(삼하 9:1, 3, 7) 등에서 "헤쎄드"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 단어는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25절에서 시인이 스스로를 "자비한 자"라고 칭한 것은, 자신이 이웃과 공동체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지닌 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이 왕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백성에 대한 시인의 사랑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비롯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완전한 자

히브리어로 이 말은 "타밈"이라고 하는데, 그 어근은 타맘이다. 타맘은 "완전하다," "완성하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종교적, 도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용어가 종교적으로 사용될 때, '온전한 희생제물'(레 22:21-22), '완전하신 하나님'(신 32:4; 삼하 22:31), '여호와 앞에서 인간의 온전한 종교적 행위'(신 18:13)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타맘이 도덕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암 5:10의 "이스라엘이 정직히(타맘) 말하는 자를 미워한다"에 나타난 바와 같이 도덕적으로 '정직'한 경우에 사용된다.

본 시에서 시인이 "완전한 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자임을 말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시인이 자신의 여호와에 대한 사랑(1절),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한 사실에서(20절) 시인의 종교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3. 깨끗한 자

히브리어로 이 말은 "바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근은 "바라르"이다. "바라르"는 "정화시키다," "순화시키다," "깨끗이 하거나 밝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고대 근동어의 유사성을 들어 이 용어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 "충실하다," "헌신적이다," "깨끗하다"(아라비아語), "순수하다," "깨끗하다"(아카디아語와 우가리트語) 등이다.

구약성서에서 이 말은 "없애버리다"("더러운 것을 없애버림으로써 깨끗이 하다"라는 의미로. 겔 20:38), "정결케하다"(단 11:35; 12:10), "순수한 언어"(습 3:9), "선택된 것"(사람이나 양들이 선택된 것을 의미. 대상 7:40; 9:22; 16:41) 등을 뜻하고 있다. 특별히 본 시에서 이 용어는 수동형(니팔동사)으로 사용되고 있는데("나바르." 참조. 삼하 22:27), 이것을 직역하면 "깨끗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깨끗함을 드러내신다"라고 할 수 있다.

본 시에서 시인이 스스로 "깨끗한 자"임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순수함(purity)과 이로 인한 하나님의 선택(구원)이 보증되었음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묵 상

지금까지 세 용어를 살펴보았다. 이 용어들을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왕의 덕목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한 자"에서 지도자의 국민을 위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오늘 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한다고 하는 정치가들이 항상 기득권 옹호를 위하여 정쟁만을 일삼는 것은 이들의 마음에 국민을 위한 자비가 상실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정권창출에만 혈안이 되어 기득권 고수나 쟁취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다.

또한 "완전한 자"에서 지도자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다. 지도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으로 온전한 삶을 지향할 때, 그 민족과 국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와 은혜를 받는 것이다. 오늘 날 많은 정치가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렵고 갈수록 삶이 힘든 이 때에 지도자들의 신앙적 온전함이 유지될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그리고 "깨끗한 자"에서 오늘 날 지도자의 도덕적 덕목이 더욱 절실한 때임을 느끼게 한다. 현재 여당과 야당이 과거 정치자금 사용 때문에 서로 공방을 펼치고 있는 모습에서 지도자들의 도덕적 깨끗함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경제 위기는 단순히 경제정책의 오도나 지엽적인 제(諸) 문제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국가 구성원인 국민과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큰 문제일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신앙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이웃이나 공동체를 위하여 진실하게 삶을 영위할 것이고 불로소득이나 일확천금의 요행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국가의 도덕적 위기는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전국민이 공범에서 비롯된 위기라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족(自足)하는 마음과 자기 비움(空)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이 땅에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과 기도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19편/ 토라(율법)의 명칭, 정체, 역할

1. 토라의 중심사상

토라의 중심 사상은 여호와께서 유일한 하나님이며, 여호와가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이스라엘은 여호와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며, 여호와의 권능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약속의 땅으로 인도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들은 이스라엘의 여호와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며 구약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토라를 단순히 유대인의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개신교의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토라를 구약시대의 것으로 국한시키고, 그것을 신약의 복음과 은혜시대를 위한 과거의 한 예표로 봄으로써 그 가치를 신약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신학자 크루제만은 벨하우젠이 토라를 유대인의 것으로 고착화시킴으로써 개신교가 율법을 이해하는데 악영향을 미쳤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말은 벨하우젠을 비롯한 역사 비평적 입장에서 있는 학자들이 결과적으로 교회와 신학이 토라를 비중 있게 다루고자 하는 노력을 막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라가 기독교 정경의 일부분이라는 사실과 복음의 한 요소라는 점에서 소홀히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신약의 중심 사상이라 말할 수 있는 '이웃 사랑'(마 5:43)이 레 19:18에서 인용되었으며, 레 19:34에서는 이웃뿐만 아니라 타국인들까지도 자국민처럼 사랑할 것을 말함으로써 토라의 사상이 이미 신약의 중심과 만나고 있다.

2. 토라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또한 토라를 단순히 신학적, 종교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토라의 면면을 살펴보면 신학적, 종교적 내용뿐만 아니라 세속적 사회상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것은 토라가 법률적 실체를 나타내기보다는 인간들 사이에 상호관계적 유대를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고대로 올라갈수록 종교와 세속이 지금처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두 요소는 혼합된 상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고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적 전제 위에 세속적 사회상이 자리잡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종교와 세속간의 구분된 시각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여러 상황을 한 측면으로(특별히 종교적 측면)만 살펴본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토라에 대한 세속적 상황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토라의 세속적 사회상과 시편에 나타난 세속적 내용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정경으로서의 토라와 시편이 단지 고대 과거의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현재 세속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시편에 나타난 토라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그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시편에서 토라의 특징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편과 119편이다. 이 두 편은 1편과 함께 토라-시편이라고 할만큼 토라의 사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중에서 19편은 토라의 명칭과 정체 그리고 역할을 가장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3. 토라의 명칭, 정체, 역할

대부분의 학자들은 19편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1-6절과 7-14절). 이와 같이 보는 이유는 내용으로 볼 때 1-6절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특별히 해에 대한 찬양을, 7-14절은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神名이 하나님과 여호와로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전자는 상대적으로 긴 행의 문체로, 후자는 짧은 행의 문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하여 19편이 두 가지의 시가 하나로 편집되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본 시는 세 가지의 면에서 통일된 시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이 1-6절에서는 자연을 통하여 높임을 받는 조물주로서, 7-14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연뿐만 아니라 만물의 영장인 인간까지도 구속하시는(14절) 만유의 주이심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둘째, 해와 토라를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해 아래 (만물이) 숨을 수 없듯이(6절) 토라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허물을 감출 수 없다는 내용에서(12절)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셋째, 만물이 여호와의 계획에 의하여 움직이듯이(1절) 인간은 토라에 의해서만 참다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7-9절). 이러한 통일성에 비추어 볼 때 1-6절은 비유로서 시작되는 도입부로, 7-14절은 본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토라와 직접 관련된 7-9절의 내용에서 토라의 명칭과 정체, 그리고 역할이 명확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토라의 명칭
토라는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그리고 '여호와의 규례'로도 불러진다.

토라의 정체
토라는 완전하며, 확실하며, 정직하며, 순결하며, 정결하여 영원하며, 확실하여 다 의로운 것이다.

토라의 역할
토라는 인간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밝게 한다.


20편/ 성도의 승리

본 시는 시인의 '중보'(1-5절)와 '선포'(6-8절), 그리고 '청원'(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시에서 특징 중 하나는 동일한 용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응답하다"(아나. 1, 9절), "날"(욤. 1, 9절), "하나님의 이름"(쇔. 1, 5, 7절), "기억하다"(체콜. 3, 7절), "성소"(코데쉬. 2, 6절), "구하다"(예솨. 5, 6, 9절) 등이다. 이 시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지만, 개인적으로 군대의 출병에 앞서 드리는 예배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대하 20:5-19에서 본 시와 유사한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전쟁의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사전의 철저한 준비를 통한 군사력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시에 나타났듯이, 이스라엘의 전쟁에서의 승리여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앙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5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줄 때만이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 시는 오늘 날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승리적 삶을 교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성도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를 세우는 자(5절)

성도는 십자가의 군병이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기를 앞세우고 세상에 출병하는 용사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성도는 자신의 지식이나, 부(富), 명예, 권력 등을 내세우지는 않는다(참조 7上). 그는 항상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빌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자이다(4절).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며 그의 인도자가 되며 하나님의 이름은 성도를 이끄는 기와 같은 것이다.

2. 성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6절)

성도는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지만, 세상에서 많은 곤고를 겪기도 하며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영생을 부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자신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를 위하여 행사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3.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7절).

세상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세상적인 것을 내세운다면, 이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자랑하고 그분의 능력을 자랑하여야만 한다.

4. 성도는 바로 선 자(8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인하여 성도는 바르게 선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 전에는 넘어져 있거나 엎드려 있는 자였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께 속한 후, 인생의 지혜를 맛보고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경험한 자이다.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세상보다 더 값진 영생을 경험한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적 자긍심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이다.

묵 상

성도가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자랑하여야만 한다. 자신의 조그만 능력을 내세우거나 교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그에게서 떠날갈 것이다.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보호만을 기대할 때,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알게 모르게 세상적인 힘을 필요로 하거나 그 힘에 아첨하는 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부질없는 세속적인 삶에서 일시적인 영화를 꾀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넓고 깊은 신앙의 웅지(雄志)를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해야만 할 것이다. 이럴 때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0편/ 성도의 승리

본 시는 시인의 '중보'(1-5절)와 '선포'(6-8절), 그리고 '청원'(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시에서 특징 중 하나는 동일한 용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응답하다"(아나. 1, 9절), "날"(욤. 1, 9절), "하나님의 이름"(쇔. 1, 5, 7절), "기억하다"(체콜. 3, 7절), "성소"(코데쉬. 2, 6절), "구하다"(예솨. 5, 6, 9절) 등이다. 이 시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지만, 개인적으로 군대의 출병에 앞서 드리는 예배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대하 20:5-19에서 본 시와 유사한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전쟁의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사전의 철저한 준비를 통한 군사력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시에 나타났듯이, 이스라엘의 전쟁에서의 승리여부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앙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5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줄 때만이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 시는 오늘 날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승리적 삶을 교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성도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를 세우는 자(5절)

성도는 십자가의 군병이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기를 앞세우고 세상에 출병하는 용사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성도는 자신의 지식이나, 부(富), 명예, 권력 등을 내세우지는 않는다(참조 7上). 그는 항상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빌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자이다(4절).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며 그의 인도자가 되며 하나님의 이름은 성도를 이끄는 기와 같은 것이다.

2. 성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6절)

성도는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지만, 세상에서 많은 곤고를 겪기도 하며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영생을 부여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자신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를 위하여 행사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3.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7절).

세상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세상적인 것을 내세운다면, 이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자랑하고 그분의 능력을 자랑하여야만 한다.

4. 성도는 바로 선 자(8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인하여 성도는 바르게 선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 전에는 넘어져 있거나 엎드려 있는 자였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께 속한 후, 인생의 지혜를 맛보고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경험한 자이다.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세상보다 더 값진 영생을 경험한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적 자긍심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이다.

묵 상

성도가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자랑하여야만 한다. 자신의 조그만 능력을 내세우거나 교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그에게서 떠날갈 것이다.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보호만을 기대할 때,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알게 모르게 세상적인 힘을 필요로 하거나 그 힘에 아첨하는 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부질없는 세속적인 삶에서 일시적인 영화를 꾀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넓고 깊은 신앙의 웅지(雄志)를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해야만 할 것이다. 이럴 때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1편/ 아름다운 복과 지극한 복

본 시는 감사(1-6절), 확신(8-12절), 찬양(13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일한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절의 "주의 힘"에 대한 감사와 13절의 "주의 능력"에 대한 찬양이 같은 단어("여호와 베아츠크")를 사용하면서 시작과 끝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본 시가 양괄식(兩括式)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쁘다"(1, 6절), "구원"(1, 5절. 원래의 의미는 "승리하다"), "주다"(2, 4절), "씌우다"(3, 6<"받게 하다">, 9<"할 것이라">, 12절<"함이여">), "복"(3, 6절) 등의 단어가 반복적으로 사용된 점은 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일부 학자는 1, 5절에서 "구원하다"라는 말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 시를 군사적 승전(勝戰) 또는 출전을 앞둔 시점에서 지어진 시로 해석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 시가 과거뿐만 아니라(1-6절), 미래적 전망도 함께 나온다는 점에서(7-13절) 군사적 의미를 담은 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히브리 성서에서 "아름다운"이란 말은 "토브"인데, 원래 "즐거운," "선한," "적절한," "올바른," "보배로운"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선한 것, 즐거운 것, 올바른 것, 보배로운 것 등은 곧 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단어 자체가 "복"을 의미하기도 한다(민 10:29; 신 30:9). 여기서 "아름다운 복"이란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4절). 또한 히브리 성서에서 "지극한"이란 말은 "아드"인데, 원래 "영원불멸"의 뜻을 갖고 있다(출15:18; 시 618). 이러한 영원불멸의 복은 기쁨과 즐거움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며(6절), 하나님의 인자함으로 가능한 것이다(7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경제적 풍요, 육체적 건강 등은 부수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 칭함을 받았다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자세이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 좋은 직장에 취업하게 해달라, 어떤 명예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복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아무런 명예나 부를 취득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골고다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뿐이다. 그를 따르던 수제자까지 그를 부인하였고, 그를 통하여 병고침을 받거나 은혜를 입었던 많은 사람들도 그를 멀리하였다. 그는 외롭게 생을 마감한 분이시다. 그럼에도 그분께서 우리의 복이 되심은 무슨 이유인 것일까? 바로 그분의 본향은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영접한 자녀라고 하면서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안달이며 그것을 복의 범주로까지 해석하고 자위하면서 내세에 대한 소망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이 땅에서 세속적인 평안과 부, 명예나 권력을 향유하게 하시면서 하늘 나라까지 보장해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하시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에서 이러한 모습은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름다운 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생명을 취득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에서 이 땅에서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히 13장). 욕심을 버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의 삶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것이 곧 지극한 복이다.


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본 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시편 중에서 가장 잘 아는 시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본 시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동일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하여 번영을 누린 적이 거의 없었다. 솔로몬 시대를 전후하여 일시적이나마 국가적/민족적 번영이 있었을 뿐 항상 고난과 함께 한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과 함께 특별히 시편의 여러 부분들이 고난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본 시도 이중 하나에 속한다. 본 시는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 그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1. 표제어: 아앨렛샤할에 맞춘 노래

"아앨렛샤할"은 시 22편에 한 번 나타나는 것으로서, '암사슴'을 가리키는 '아이예레트'( )와 '동틀 때'를 의미하는 '핫샤하르'( )가 합성된 말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아앨렛샤할은 '암사슴이 동틀 때' (부르는) (노래. 앞의 '알'( )은 전치사로서 風, 또는 類로 해석할 수 있다)로 직역할 수 있다. 창 49:21에 의하면, 암사슴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는 동물로 은유하고 있다(창49:21). 사슴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이얄/아이야라( / )와 동족어로 보이는 우가리트語 'ayl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 희생제의와 관계된 짐승을 가리키는 뜻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2편의 표제어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제의와 관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두 가지 해석에서 아앨렛샤할은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암사슴이 부르는 노래와 닮은 風'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2.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단어는 하나님께 불평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서, 시편 이외의 구약성서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참조. 창 25:22; 민 11:11; 렘 14:18, 19; 사 58:3; 합 1:3; 시 44:23, 24). '어찌하여'는 두 가지 측면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 시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탄식이다. 다른 하나는 시인이 원수로 인하여 고난받을 때 나타나는 탄식의 부르짖음이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라고 부르짖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거리감,' '하나님의 숨으심,' '하나님의 버리심'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거리감: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10:1上).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22:1下).
하나님의 숨으심: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0:1下).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88:14下).

하나님의 버리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2:1上; 43:2上).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88:14上).

2. 병 때문에 고난을 받음

시인이 고난받는 일차적 이유는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병이 든 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일명 '원수')이 시인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14-15절은 시인이 병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힘이 말라( )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22:14-15).

본문에서 '어그러졌다'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트파두'의 기본형은 '파라드'입니다. '파라드'는 '사물이 나누어지거나'(창 2:10; 겔 1:11), '조화적 관계가 깨어져서 분리되는'(창 10: 5, 32; 13:9, 11, 14) 등의 의미가 있다. '히트파두'는 강조 재귀 동사로서 '스스로 분리되다' 또는 '스스로 나누어지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뼈는 어그러졌으며'라는 표현은 뼈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말한다. 이 말은 뼈가 정상적이지 못하여 뼈마디 마디가 심각하게 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독일의 신학자 크라우스는 시인이 고열(heat of fever)로 인하여 매우 고통 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말라'는 구약성서에서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수분이 결핍되어 '메마르게 되다'(창 8:7, 14; 수 2:10; 시 74:15)는 것이다. 둘째, 심판 유형에서 사용되고 것으로서 비정상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메마르다, 시들다'(왕상 13: 4; 욥 8:12; 15:30; 18:16; 겔 37:11; 슥 11:17)는 것이다. 셋째, 비유적이고 교훈적인 표현에 나타나는 '마르게 되다'(시 90:6; 사 40:7-8)는 것이다. 본문에서의 '말라'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질그릇 조각 같고" 그리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라는 표현에 비추어, 몸에 수분이 빠져나간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시에 나타나고 있는 시인은 뼈가 쑤시고 심한 갈증 상태를 느끼는 자로 생각할 수 있다.

3. 원수 때문에 고난을 받음

시인은 자신의 병 때문에 고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원수)의 조롱과 무시 때문에 더욱 고통을 당하고 있다. 본 시에서 원수가 짐승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원수의 사악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황소'(12절), '개'(16절), '사자'(13절; 57:4; 참조. 7:2; 10:9; 17:12; 22:13, 21) 그리고 '들소의 뿔'(21절)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황소'는 대개 희생 제의의 제물로 많이 언급되어 있다(참조. 출 29:1; 레 4:3, 14; 8:2; 16:6, 11; 민 7:15, 21). 본 시에서 상징적 의미로 원수를 '황소'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원수의 권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동일한 구절(12下)에 나타나고 있는 '힘센 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이 때 대조적으로 시인은 '벌레처럼 나약한 자'로 묘사되고 있다(6절). 따라서 시인이 원수를 가리켜 '황소'라고 부른 것은, 도저히 서로 경쟁이 될 수 없는 강자와 약자의 대조적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사람을 '개'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경멸'(참조. 신 23:18; 삼상 17:43)이나 '사나움'(렘 15:3)을 의미하며, 이 때 사나움은 상대방을 두려움에 빠뜨리기도 한다(참조. 시 59:6). 16절에서 원수를 '개'로 묘사한 것은 경멸보다는 원수의 포악함에서 비롯된 두려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같은 절의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라는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개'라는 은유적 묘사를 통해서, 원수는 포악한 자라고 본다면 시인은 그 포악함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참조. 20절).
구약성서에서 '사자'라는 표현은 강한 힘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리킬 때 은유적으로 묘사된 경우(참조. 사 38:13; 애 3:10)와 인간의 강한 힘을 상징할 때 묘사된 경우로 나타난다(참조. 렘 4:7; 5:6; 49:19; 50:44; 욜 1:6; 나 2:11-13). 본 시에서도 원수를 '사자'로 비유할 때, 원수의 힘이 막강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은, 원수가 시인을 괴롭히는 장면인 "사자처럼 시인을 찢다"(13, 21절; 참조. 7:2; 17:12上) 또는 "사자가 은밀하게 먹이를 찾듯이 시인을 기다리다"(10:9; 17:12下)라는 묘사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런 묘사에서 원수는 매우 강한 자며, 시인은 약한 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원수를 '들소의 뿔'과 연관시켜 묘사한 경우이다(21절). 구약성서에서 '뿔'은 힘이나 능력을 상징한다(참조. 신 33:17; 삼하 22:3; 시 18:2). 이러한 능력의 뿔(출 34:29; 합 3:4)은 하나님만이 높이거나 낮추게 하는 것이다(시 75:4-7). 이런 관점에서 원수를 '들소의 뿔'과 관련시킨 묘사에서 두 가지 추정을 하게 된다. 하나는 원수의 권능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되었을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원수의 교만을 묘사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본 시의 경우에는 해당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시인이 원수를 들소라는 짐승과 관련시켜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 '권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즉 뿔은 원수의 교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 하면 본문에서 시인이 원수의 뿔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진술되어 있는데(21절), 이것은 원수의 권능이나 교만을 하나님께서 꺽었다는 의미와 일치되기 때문이다(참조. 시 75:10).

4. 하나님 때문에

시인은 질병과 원수들 때문에 고통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그 고통을 호소하며 해결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위대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고난 상황에 개의치 않고 계심을 말한다(참조. 욥 9:25-35).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버렸다고 할 때,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범죄(호 4:10)와 종교적 배교 행위(신 28:20; 31:16; 대하 24:18; 욘 2:8) 때문이다. 그러나 본 시에서 시인의 범죄나 종교적 배교와 직접 관련된 '버림'을 말하지 않는 듯한다. 여기서 '버림'은 시인의 고난 상황이 최고조에 다다른 것을 보여주는 극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시인은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셨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 시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듣지도 응답치도 않는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실제로 버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린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1-2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관심도 갖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무관심은 시인의 고난을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끝까지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묘사되며, 찬양이 나타나고 있다(22-31절). 이것은 하나님의 '숨으심,' '분노하심,' '버리심'에 대한 탄식이 고난 중에 나타난 시인의 일시적인 탄식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시인의 확신이나 찬양은 하나님께서는 시인에 대하여 숨으시거나, 분노하시거나, 버리시지 않았음을 확인시키는 내용들이다. 이 때 확신이나 찬양이 단순히 미래적인 기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고난 상황이 어떤 형태로든지 변화되고 있음을 예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

본 시는 간결한 문체와 함께 그리스도인에게 목가적인 이미지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그 중심에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게 하는 시이다. 이런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본 시를 '확신시'로 간주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체 내용에서 여호와가 목자라는 이미지를 그려내는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기는 하나, 소수의 학자들은 5절과 6절의 내용이 앞의 1-4절의 내용과 상충한다는 점을 들어 여러 가지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의는 대부분 가설에 국한할 뿐 본 시가 여호와가 목자라는 근본적인 전제를 흔들 만큼 충분하지는 못하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됨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중동에서 유목민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든 뉴욕이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농경사회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든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목사회에서 목자의 사실적 개념과 도시사회에서의 목자의 이미지적 개념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독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본 시에 대한 감회는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목사회에서 목자는 양의 생명을 보호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 시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에는 지금도 많은 양을 이끌고 인도하는 베두인 목자들을 볼 수가 있다. 건기 때 풀 한 포기 찾기가 힘든 광야 지역에서 푸른 초장으로 안내하고 물가로 인도한다는 것은 현실적 의미에서 거의 실현 불가능한 스토리이다. 이런 점에서 양들에게 있어서 푸른 초장과 물가는 소위 '패러다이스'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 시는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이상적 이미지를 우리들에게 제공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안락과 미래적 소망을 제시해 주는 '소망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힘들고 삶에 지친 성도에게 여호와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이 시를 통하여 재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시는 돈을 목자로 삼고 지식을 목자로 삼았던 세상적 가치관을 일시에 무너뜨리게 한다. 돈이 좀 있다고, 힘이 있다고 공부 좀 하였다고 우쭐대는 사람이나 그 앞에서 머리 숙이고 이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다 부질없는 짓임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적으로 변두리에 처진 사람들에게 이 시는 소망과 안위를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2.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성도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이다. 이곳은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간혹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남기고자 하고 이 곳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세상적 욕망은 곧 사라질 것에 대한 허무만을 양산할 것이다. 이곳은 잠시 지나가는 길목과 같은 곳이다. 나그네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최종의 희망으로 알 뿐 그 여정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여정은 힘들고 고달픈 것이다. 공부를 조금 더 했다거나 권력이 있다거나 돈이 좀 있다고 하여서 우쭐대거나 잘난 체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도토리 키 재기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며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곳의 사망의 골짜기에서 성도를 보호해주시고 미래로 인도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나그네에게 희망이며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도록 하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미래이며 현재를 이기도록 하는 힘인 것이다. 이제 나그네 삶을 인정하고 서로 아끼고 위로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생에서의 삶이 그리 길지만은 않은 것이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면 이것이 바로 음침한 골짜기를 헤어나가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이다.

3.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임

이제 나그네의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힘들고 고단한 몸이 영원히 안식할 곳을 보게되는 것이다. 그 동안의 고생과 모든 수고가 이제 추억이 될 것이다. 목적지에는 푸른 초장과 물가가 넓게 펼쳐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 영원히 즐길 것이다. 그곳은 나그네의 서러움도 없고 그 여정에 대한 미련도 없을 것이다. 목자의 인도를 따른 조바심이나 궁금한 것도 없을 것이다. 목자의 지팡이가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저 바라보고 웃으며 즐거워하는 패러다이스만 있을 뿐이다.


24편/ 예배드리는 자의 자격

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세 번에 걸쳐 질문과 응답이 나타나는 것이다.

질문1: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3절).
응답1: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듯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4절).
질문2: "영광의 왕이 뉘시뇨"(8절上).
응답2: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8절下).
질문3: "영광의 왕이 뉘시뇨"(10절上).
응답3: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10절下).

이러한 질문과 응답은 본 시의 구조에서 골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본 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구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창조주에 대한 찬양(1-2절).
둘째, 제의에 참여하는 자의 자격(3-6절).
셋째, 영광의 왕(7-10절).

1. 여호와의 창조에 대한 찬양(1-2절)

1절은 창조주 여호와께서 땅과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므로 창조된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 주권 아래 만물이 속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단순히 여호와의 창조만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후 현재의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에 귀속되어 있고 창조주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시인은 2절에서 여호와가 '바다'와 '강' 위에 "세웠다," "건설했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여호와의 주동적 창조행위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와 '강'은 혼돈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창조는 곧 혼돈에서 질서를 이루신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질서를 이루신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피조물의 당연한 자세임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3-6절의 내용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2. 제의에 참여하는 자의 자격(3-6절).

인간이 피조물이라고 해서 모두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예배)을 드릴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여호와는 질서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질서는 곧 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3절)라는 질문이 대두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질서의 여호와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를 아니하는' 자라고 응답하고 있다.

질서의 여호와가 계신 곳, 곧 거룩한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는 이와 같이 선해야 하는 것이다. 선한 자의 예배는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을 것이며, 의를 얻는 것이다(5절). 예배를 통하여 예배자는 다시 한번 여호와를 찾는 족속으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 규정되고 있다(6절). 이제 예배자는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 위엄을 선포하는 책무를 안게 되는 것이다.

3. 영광의 왕(7-10절).

여기서 "영광의 왕이 누구냐"는 질문이 두 번 나타나고 있다(8절上, 10절上). 이에 대하여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며"(8절下),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10절下)라고 응답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질문과 응답은 영광의 여호와에 대한 강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응답에 나타난 '강하고 능한,' '전쟁에 능한,'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전쟁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이러한 표현은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성서에 나타난 전쟁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혼돈(바다, 강)을 타파하는 곧 악을 무너뜨려 선의 질서를 세우신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한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다.

묵 상

우리는 예배드리기 전에 "과연 내가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며(참조. 고전 11:27-29), "예배를 받으시는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를 자문해야만 할 것이다.


25편/ 젊었을 때의 죄를 회개

본 시는 시인이 과거 젊었을 때 지었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있으며, 그 죄로 인하여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고통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자신의 고통이 원수에 의하여 수치를 당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2, 3, 20절).

1. 시인이 수치를 당하는 이유

시인은 자신이 수치를 당하는 이유가 젊은 시절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면서(7절), 자신과 자신의 죄를 분리하고 있다(7절).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죄인인) 나를 기억하시되.

이것은 시인이 과거에 자신이 지었던 죄에 대하여 철저히 반성하고 후회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시 32:5을 참조할 것. 여기에는 시인이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여호와께 고백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시인은 더 이상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여호와의 교훈을 새기고 있다(8, 9절). 시인은 "여호와의 길은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라고 고백하면서(10절), 다시 한 번 자신의 죄가 크다고 말하고 있다(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 )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2. 시인의 죄
본문에서 '죄'를 가리키는 말 '아원'은 동사 '아와'에서 유래한다. '아와'는 '구부리다'(애 3:9), '뒤집다'(사 24:1), '왜곡시키다'(욥 33:27), '고통받다'(시 38:7) 등의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죄는 곧 '바른 길을 벗어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아와'는 여러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구약신학자 다후드는 시인의 큰 죄를 '우상 숭배'로, 크레이기는 '간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에 의하여 시인의 죄를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10절과 14절의 내용에 나타나고 있는 '언약'이란 용어와 연결시켜볼 때, 시인의 범죄는 계약을 파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계약이라고 할 때,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며, 둘째, 국가와 국가간(또는 민족과 민족간)의 계약이며(참조. 창 14:13; 31:44-47; 수 9장), 셋째, 사회적 계약이다. 넷째,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은 계약이다(삼상 18:3; 20:8; 23:18). 본문에서 시인이 계약을 어겼다면, 그것은 시인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나 또는 사회적 계약을 어긴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다후드는 시인의 범죄를 종교적인 것으로, 크레이기는 사회적인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인의 죄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시인이 "여호와는 선하고 정직하시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 하신다"고 말하는 것(8절)에서 생각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정직'을 의미하는 '야샤르'는 '곧다,' '바르다,'라는 '야샤르'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앞서 살펴보았던 죄라는 용어의 의미와 대조를 이루는 말이다. '정직'과 함께 '여호와의 길'이라는 말이 나타나고 있다. 이 때 여호와의 길은 '道'(4, 8절) 또는 '길' (4, 10절)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은 모두 '도로'를 나타내는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 추상적으로는 '행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시인은 과거 젊었을 때, 바르지 못한 행실로 인하여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자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시인은 젊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또는 사회에서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였다. 그러한 행동이 인과응보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까닭에(15절. '그물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죄를 사해 줄 것을 빌고 있다(17절).

묵 상
우리는 누구나 주님 앞에서 완전할 수 없다. 시인도 한 때는 주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던 자로 보인다.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면서 과거의 부끄러웠던 시간들을 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과거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도(道)로써 더욱 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유사한 죄를 재차 범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중한 범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불신자로서의 삶을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매일 반성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인은 더 이상 범죄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주님의 진리에 의하여 지도되고 교훈 되기를 바라고 있다(5, 9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신자였던 과거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교훈과 지도에 의하여 훈육되고 단련되기를 갈망해야 할 것이다. 본 시는 이런 점에서 매우 사실적이고 현재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26편/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본 시는 양괄식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본 시의 첫머리와 마지막에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시인은 종교적으로 매우 경건한 자로 추정할 수 있다. 특별히 본 시의 12절에서 "회중"(마크헤림)이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5절의 "집회"(케할)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본 시에서 "집회"는 행악자들의 모임을 가리키며 "회중"은 "예배하는 회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회중"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본 시의 배경은 시인이 예배를 드리려는 한 순례자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시인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손을 씻고 주의 단을 두루 다니는" 모습에서 더욱 지지를 받는다(6절; 참조. 시 24:4). 손을 씻는 것은 정결의식의 하나로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행하는 종교의식이었다(참조. 시 73:13). 또한 "주의 단"은 주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므로 시인이 순례자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완전하게 행하는 것

시인은 자신의 완전한 행위는 곧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 요동하지 않고 완전하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허망한 사람과 同席하지 않았으며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않았으며 행악한 자의 집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여호와에 대한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4-5절). 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사람들과 세속의 허망한 것을 나누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단순히 세상사람들과 성별(聖別)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주의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한다"고 함으로써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8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에 대하여 무가치만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미치는 곳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시인이 순례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때, 그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만끽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주일예배와 성도들간의 교제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세속의 삶에서 주일예배를 고대하고 성도간의 교제를 갈망하는 것은 곧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2.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여기서 "단련하다"는 말은 금속의 연단뿐만 아니라 불순물이 제거된 소위 정제까지도 내포하는 말이다. 시인은 자신의 단련이 "주의 인자함"과 "주의 진리"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는 자이다(3절). "주의 인자함"이란 말은 대체로 종교적인 용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시인의 도덕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물론 구약시대에 종교와 도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때, 본 시에서 이와 같이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세속의 도덕과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없지 않기 때문에 시인의 종교적/도덕적 가치관은 큰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은 커녕 세속사람과 별 차이 없이 생활하고 주일의 회개의 기도로써 자신의 부도덕성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만한 자세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곧 고도의 도덕적 삶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도덕 그 자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고매한 인격과 이웃을 위한 삶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의 인자함을 흠모하고 스스로 세속에서 경건한 신앙인으로 단련되어야 하고 단련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회개하기 위하여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이 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불가피하게 인간들에게 열려진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끄러운 선택인 것이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