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종합

스크랩 대림절 묵상 동방박사 마고스(μάγος)

에반젤(복음) 2020. 12. 18. 06:07

 

오늘은 우리가 성탄절마다 쉽게 듣고, 볼 수 있는 동방박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 동방박사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부터 짚어 보려고 합니다.

 

 

통일찬송가나 지금의 새찬송가나 찬송가 116장은 동방박사에 대한 가사로 시작됩니다. 요즘에 새찬송가로 116장을 부르다 보면 도입 부분에서 왠지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통일찬송가에서는 ‘동방 박사 세 사람’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가사가 성경 말씀과 다르다는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가사가 ‘동방에서 박사들’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찬송의 제목도 ‘동방에서 박사들’로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들이 예수님께 바친 예물이 세 가지였기 때문에, 세 사람이 동방에서 왔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헨리 반 다이크’가 1895년에 ‘네 번째 동방박사’라는 감동적인 책을 썼을 정도로, 동방 박사는 세 명이라는 점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인원수가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복수형으로 써 있기 때문에 두 명이 온 것인지, 10여명이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이들의 호칭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동방에서 왔기 때문에 동방박사라고 부릅니다. 때로 이들이 동방에서 온 왕들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이들이 왕이라는 표현은 없고, 박사라는 호칭도 조금은 애매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과거에 삼국시대부터 ‘박사’라는 벼슬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호칭을 붙여놓은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뭔가 전문적 지식, 어떻게 보면 천문학적인 지식이 높았다는 의미로 박사의 호칭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들의 명칭은 헬라어 ‘마고스(μάγος)’입니다.

‘마고스’는 라틴어로 ‘마기(magi)’인데, 영어 ‘매직(magic)’의 어원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마술사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속에서 이들은 마술사보다는 점성술사에 가깝습니다.

 

 

 

 

The Adoration of the Magi, oil painting by Albrecht, New York ⓒGetty Image

 

 

‘마고스’라는 단어는 성경 안에서 딱 세 개의 책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마태복음, 사도행전입니다.

 

다니엘 2-5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의 꿈 해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때 느부갓네살이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원어는 갈대아인)를 부르는 이야기가 몇 차례 나옵니다. 이때 ‘술객’으로 번역된 단어가 ‘마고스’입니다.

 

사도행전 13장 6절에는 ‘바예수’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사도행전은 이 사람을 ‘거짓 선지자(프슈도프로페테스 ψευδοπροφήτης)’이며 ‘마술사’라고 말합니다. 이때의 마술사도 ‘마고스’입니다.

성경의 번역이 다니엘에서는 ‘술객’, 마태복음에서는 ‘박사’, 사도행전에서는 ‘마술사’, 이렇게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고스’가 명확하게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들의 역할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있는 마태복음의 내용에 따라서 생각해본다면, 별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 점성술사(占星術師)가 가장 가까워 보입니다.

 

또 성경 전체에서 등장하는 ‘마고스’들의 이야기를 보면, 뭔가 신비한 일을 해석하는 사람, 또는 신비한 일을 행하는 사람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도사’ 정도가 적당해 보입니다.

 

그래도 저희가 워낙 오래동안 동방박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동방의 점성술사’라거나 ‘동방의 도사’라고 부르지는 않고 그냥 동방박사라고 쓰겠습니다. 다만 박사, 마고스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정도만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또 있습니다. 이 내용도 찬송가 116장으로부터 생긴 오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116장 1절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동방에서 박사들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 왔도다.’

 

사실 이들은 ‘별 따라’ 오지 않았습니다. 우선 동방에서 유다 왕의 별을 관측하였고, 관측을 토대로 유다 지역으로 왔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이 아닌 왕궁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헤롯 대왕을 만나고 왕궁에서 나왔을 때, 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렇게 밋밋하게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를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0절에 이어지는 박사들의 기쁨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별을 따라간 경로는 동방에서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루살렘 왕궁에서 베들레헴까지입니다.

 

찬송가 116장이 잘못되었으니까 폐기하자거나 부르지 말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찬송가는 그냥 은혜롭게 부르시면 됩니다. 다만 사소한 사실들이지만, 작은 오해로부터 완전히 잘못된 성경 이해가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먼저 드립니다.

 

 

다윗과의 연결고리

 

이제 오늘 본문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박사들이 헤롯대왕에게 말합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사람을 찾습니다.

박사들의 말을 들은 헤롯대왕과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가 ‘혼란스럽다’는 의미의 ‘타라쏘(ταράσσω)’입니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 1장 29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 탄생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이나 놀라고 당황했다는 의미로 ‘디아타라쏘(διαταράσσω)’가 사용되었습니다.

 

‘디아타라쏘’는 ‘타라쏘’에 ‘디아’를 붙여서 엄청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박사들의 이야기를 들은 헤롯대왕의 상태도 사실 이와 유사합니다. 우리 성경에 번역된 그냥 ‘소동했다’는 표현으로는 그의 당혹감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듯 합니다.

 

이어지는 4절을 보면, 뭔가 단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을 만나러 왔는데, 헤롯대왕은 ‘그리스도(Χριστός)’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찾도록 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너무나 익숙한 단어이기에 헤롯대왕이 그냥 예수님을 찾는가보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본래 의미를 생각해보면 헤롯대왕이 왜 ‘그리스도’를 찾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별 된 자’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히브리어 ‘메시아’가 같은 의미입니다. 오경에서는 ‘성별된 제사장’을 의미할 때, 메시아와 그리스도가 사용되지만, 왕정시대로 넘어오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 ‘성별된 왕’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렇기에 지금 헤롯대왕이 찾는 존재는 왕인 자신 이외에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의 직책을 부여받은 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헤롯의 정통성 문제는 접어두고, 현재 왕이 존재하는데, 다른 이에게 왕을 상징하는 기름이 부어졌던 또 다른 사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나오는 다윗의 기름부음 사건입니다.

 

뒤이어지는 5절과 6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베들레헴’을 언급하는 것도 다윗과의 연결성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줍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무엘상을 통해서 읽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잘못된 왕이 세워졌기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물을 택하셔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잘못된 왕 사울이 그 새로운 인물 다윗을 죽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죽이지 못하고 왕위를 넘기게 된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는 헤롯대왕을 통해 반복됩니다.

 

 

회복과 구원

 

그렇다면 마태복음이 동방박사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잘못된 왕조, 에돔 사람, 이방인 왕조를 깨부수고, 다윗 정통성을 가진 왕조를 세우자!”라는 이스라엘 왕조 혁명일까요?

 

우리는 마태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미가의 말씀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마태복음의 저자 또는 저작 집단이 의도한 내용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동방박사의 방문과 구세주의 탄생, 구세주의 왕적 권위, 그리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이라는 지명까지 명확하게 나타난 본문은 미가 5장 2절 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예레미야, 에스겔이 다윗의 자손이 다시금 일어서게 됨을 예언하고 있지만(렘23:5, 33:15, 겔34:23,24), 지명은 나오지 않습니다. 동방박사의 질문에서 핵심은 ‘어디(ποῦ)’였기 때문에 지명이 명확하게 적혀있는 미가 5장 2절은 가장 적절한 인용입니다. 이런 적절성 때문에 마태복음은 미가를 인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완성된 성경책은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미가의 이야기를 읽을 때, 다시 미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고, 미가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도록 만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가의 말씀과 마태복음의 이야기를 연결시켜서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해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가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범죄와 그 범죄로 인한 심판의 예언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미가 6장 16절에는 아합 왕이 속한 ‘오므리 왕조’ 비판이 나오기 때문에 어쩌면 헤롯 왕조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인용된 미가 5장의 말씀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에 대한 심판 선포이고, 이는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선포입니다.

 

이때 그 심판, 앗수르를 향한 심판을 수행할 사람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지금의 정통성 없는 왕조, 악을 행하는 왕조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하나님의 백성과 대적한 나라에 대한 심판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미가의 인용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을 속국으로 삼고 있는 로마에 대한 심판 선언으로 읽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은 왕조 찬탈 혁명을 넘어서 대제국 로마의 붕괴 또는 로마 심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미가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만 살펴본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앗수르의 붕괴, 원수에 대한 심판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 앞서는 ‘왜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는가?’라는 주제를 미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보여주고 있는 동방 박사의 이야기는 분명 예수님의 왕적 권위, 다윗 왕조 정통성, 다윗과 사울의 관계 속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려던 사울과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께서 지키신 다윗의 이야기,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지역인 바벨론과 페르시아가 있는 그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유대 땅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며 경배한 참된 왕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에, 또한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실천하지 못하고 헤롯대왕과 같이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사회를 향한 경고와 비판도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검게 더러워진 옷을 하얗게 만들어주는 표백제 같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잘못된 신앙과 풍조를 깨뜨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단순히 왕조를 바꾸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고치기 위해 오신 분이시고, 그렇기에 심판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이 대림절 기간에 회복의 길을,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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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초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