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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 - 이승구 교수

에반젤(복음) 2020. 10. 9. 01:18

사도신경 강해 1 :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 본문: 요 1:1-3, 14, 18, 요 14: 26, 15;26, 16:13-15 ]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이단에 빠지지 않고 바른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좋은 길의 하나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공교회의 신앙에 충실한 것인지를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공교회의 신조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인 신조는 2세기 로마 교회의 세례 때에 신앙 고백문으로 사용된 이래로 많이들 사용되어 온 사도 신조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을 잘 정리해 주고 있는 사도 신조의 내용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도 신조의 내용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즉, 성부와 우리의 창조에 대한 부분, 성자와 우리의 구속에 대한 부분, 그리고 성령과 우리의 성화에 관한 부분으로 나누는 것입니다(제 24 문답). 다른 말로 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사도 신조를 삼위일체적 구조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신조 자체가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하고 그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서 교회 안에서 일반화된 "삼위일체"(trinitatis)라는 말로서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먼저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제 25 문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한 하나님이 있을 뿐인데, 왜 당신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에 대해서 말합니까?" 그리고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이 주어져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말씀 가운데서 당신님을 계시하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구별되는 위들이(these three distinct Persons) 하나의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제 25문 답).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을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으로 드러내신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참되고 영원하신 한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단번에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계시하여 오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한 분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들이라 칭하는 것들이 많은 상황 가운데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강조하는 것이 아주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마다 암송하는 소위 "쉐마"(shema)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shema Israel),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라고 해서 하나님의 하나이심을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계속되는 가르침이어서 이 한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거나 그와 더불어서 다른 것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구약의 중요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오직 하나이신 이 여호와는 그가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분이심에 걸맞게 절대적인 관계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아주 필수적인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은 신약에서도 명백히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quot;(딤후 6:15-16).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이 선언 속에 하나님이 홀로 한 분이신 분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계시

그런데 신약에서 가장 현저하게 계시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한 분이신 하나님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 분이 있다고 하면 그에게 하나의 인격(person)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한 인격이 한 사람, 즉 한 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와는 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한 신성이 세 위격(three persons, three hypostasis)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ousia, essentia)은 하나이지만, 이 본질이 구현되어 있는 위격(person)은 셋이시라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위격들의 삼위일체가 있다"(in the one essence of God there is a trinity of persons)는 말입니다.1)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런 용어의 사용을 통해서 말을 절약해서 표현하기 위함이며,2)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이를 표현해야 하기 위한 것입니다.3) 이 사실이 신약에서 어떻게 계시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신약 성경을 통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자신을 자신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나님, 그리하여 자신과 아버지를 구별하시면서도 또 자신을 그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시하시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시고,4) 때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죄의 선언을 하심으로써 자신이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막 2:1-12 참조). 그리고 그를 신적인 분으로 인정하는 고백을 받아들이시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의 말한 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고백을 포함한 신앙고백에 대해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시면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5) 또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도마의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는 고백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아버지라 부르신 하나님과 자신을 구별하시면서도 자신을 그 아버지와 동일시하시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시나, 또 아버지와는 구별되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이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아도 하나의 사실로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가 사역을 마치실 즈음에 그는 후에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하셨습니다(요 15:26, 요 16: 7-14 참조). 과연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셔서 교회를 인도해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지도해 가시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였습니다(행 5: 1-11 참조).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독특한 존재를 계시하시자 사람들은 난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하나님으로 섬겨 왔고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그 분과 자신을 그의 독특하신 아들로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의 관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난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일까요?


3. 두 가지 잘못된 해결책

교회가 처음 이 난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교회 안에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대립되는 잘못된 이해가 발생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이제 세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삼신론적 이단). 그러나 이는 앞서 살펴본 구약과 신약의 명확한 증거, 즉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와 명백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을 수 없는 견해이고 아주 명확한 형태의 삼신론을 교회 안에서 찾기는 좀 힘듭니다.6)

그러나 어느 정도 이에 근접하는 오해로, 성부 하나님만을 온전하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성자와 성령은 좀 못한 하나님, 제 2의 하나님이나, 제 3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이들은 많았습니다. 이런 이해도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교회에서 이단적인 생각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이런 오해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들자면 그것은 아리우스(Arius)와 그를 추종하던 이들(Arians)의 생각입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영원에서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근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에서는 성자가 "있지 않던 때가 있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한 하나님, 선을 선택하여 불변성을 얻고 신성에 이른 존재이고,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영에를 받으시기에는 합당하나 우리의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7) 성령의 지위는 더 격하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따로 계시되, 성부만이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부차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하심과 심지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잘못된 사상도 있습니다. 소위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으로 보고, 성령을 신적인 영향력으로만 보았고, 양태론(modalism)으로 알려진 이단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자신을 드러내신 세 가지 양태(three modes of manifestation)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8)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이고, 그가 성령인데, 그것은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신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자의 수난이 곧 성부의 수난이 되고 (성부수난설, patripassianism),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뚜렷이 구별되어 계시되어 있다는 것과, 또 때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에 나타나신 사건들 (예수님의 수세, 변화산 사건 등)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오해는 아주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비록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지니더라도 그런 경향에로 나아가는 모든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터툴리안(Tertullian)도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듯이 말을 한 일이 있고, 오리겐(Origen)은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고,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표현하여 소위 종속론(subordinationism)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9)

이런 문제점들은 과거의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기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성부에 비해서 성자와 성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자의 인간되심에 충실한다고 하면서 그의 신성을 무시하거나 이를 완전히 감취어진 것으로 여기는 현대의 경향이나, 성령을 향해서 명령하듯이 말을 하는 풍조나 성령의 인격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언사와 행동이 위에서 말한 첫번째 오해와 연관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면서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세 양태와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예를 들어서, 물질의 삼태(三態)에 따라서 물이 수증기, 물, 얼음으로 될 수 있으나 다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든지,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지위와 관계로 [아버지, 남편, 교사 등] 설명하든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오해와 관련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의 바른 삼위일체 이해는?

그러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데, 그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유비되지 않으시는 아주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가지셔서 그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three persons)로 존재하신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존재와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어서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각 위간에는 종속적인 면이 없고, 위격적 엄위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 계시하실 때 아버지, 아들의 용어를 써서 계시하시므로 우리는 그 계시를 따라서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고, 또 이 용어들이 지시하는 관계성과 성경의 표현에 근거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낳으시고(generate),10)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낳아지시며(is generated),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proceed, spiratio, 요 15: 26)는 표현을 써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점진적으로 계시하신 것에 근거해서 신약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인식할 수 있지만, 이 삼위의 관계는 구약에도 있던 것이고 때때로 비록 그림자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런 시사가 있는 계시도 있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11)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는 사실상 하나님이 계시면서 계속해서 있어 온 관계입니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때때로 본체론적 삼위일체, 존재론적 삼위일체라고 하며, 그 하나님이 자신을 역사적 경륜 가운데서 드러내신 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체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12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을 경륜과 계시 가운데서 드러내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존재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섬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I, viii, 5.

2) 위의 말을 한 후에 칼빈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한 마디로 성경이 진술하는 것을 말하면서 공허한 잔소리를 다 줄일 수 있을 것이다"(Institutes, I, VIII, 5).

3) Cf. Augustin, cited in Institutes, I, viii, 5: J. I. Packer, "형상을 만드신 하나님", 『포스트모던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 (서울: 엠마오, 1994), 95.

4) 이 "하나"라는 말을 "정신에서의 하나, 목적에서의 하나, 그와 함께 행동함에서의 하나"(one in mind, one in purpose, one in action with him)로 해석하려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Cf. F. F. Bruce, The Gospel of John (Hants: Pickering & Inglis, 1983), 233.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는 다음과 같은 레온 모리스의 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 본질적 통일성이 주장된 것이다. 이 둘은 함께 속하는 것이다. 이 진술은 요한복음서의 서문의 말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들과 같이 서 있는 것이다. ...... 이 말이 형이상학적인 진술로 이해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하나라고 하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사실이다"(Leon Morris, The Gospel of Joh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71], 522f.]. 또한 그와 호스킨스(Hoskyns)는 이 말씀 이후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성 모독을 문제 삼고 있는 점을 잘 지적하면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옳게 제시한다. 부루스와 같은 해석에 반하면서 아주 논리적으로 모리스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는 D. A. Carson, The Gospel of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91), 394f.도 보라.


5)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주해적 설명의 하나로 G. Vos, 『예수의 자기 계시』 (서울: 엠마오, 1986), 202-208를 보라.

6) 그러나 이런 삼신론에 가장 근접한 이들로 후기 단성론자들 중의 John Ascunages와 6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을 썼던 John Philoponus, 그리고 중세기의 극단적 유명론자였던 Roscelinus와 극단적 실재론 자였던 Gilbert de la Porree를 들 수 있다. 이들을 각기 소이송(Soissons) 공의회(1092)와 라임(Reims) 공의회(1148)에서 정죄되었다. 현대에는 헤겔의 범신론적 견해에 반해서 A. Gunter가 삼신론적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Cf.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82;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42), 1396. 오늘날에는 몰트만의 생각 가운데 삼신론적 성향이 있는지의 문제로 학문적 논의가 제시되곤 한다.

7) Bavinck, 286=『개혁주의 신론』, 420에서 재인용.

8) 이들의 선구자들은 2-3 세기의 Noetus, Praxeus, Epigonus, Cleomenes이고, 3세기에 Sabellius에 의해서 공식화되었다. 사벨리우스는 신 6:4, 출 20:3, 사 44:6, 요 10:38 등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보려고 한다. Cf. Bavinck, 421f.

9) 변증가들에게 있던 종속론적 경향에 대해서는 Bavinck, The Doctrine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51), 한역, 『개혁주의 신론』 (서울: CLC, 1988), 404-408, 오리겐의 종속론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Bavinck, 411 등을 보라.

10) 그 정확한 의미에 유의하지 않으면 혹시 오해 될 수도 있는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성경 의 용례를 따른 결과임에 유의해야 한다: 요 1:18("독생하신 하나님"), 요 1:14 ("독생자"), 시 2:7("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등. "독생자"라는 말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의 하나로 G. Vos, 『예수의 자기 계시』 , 245-63을 보라.

11) 그러나 이전의 교부들 중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창 18장의 세 천사가 삼위일체의 현현이라고 하는 등의 생경한 주장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늘 계시사적인 의미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점에 대한 논의로 졸고,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교회와 문화』 5 (2000).

12) 이 문제에 대한 논의로 졸고,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 『개혁신학 탐구』 (서울: 하나, 1999): 52-67을 보라.

 

 

 

사도신경 강의 2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 본문: 마태복음 6: 25-33 ]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우리는 지난번에 성경에 나타난 창조의 사실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사실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창조 신앙을 다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난번에 말한 대로 창조의 사실을 성경에 기록한대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창조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창조 사실은 성경에 기록한대로 믿지 않으면서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고 그것은 믿으려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현대의 신학적 정황 가운데서는 창조 사실을 성경에서 기록한 그대로 받아들이며 믿는 일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창조 사실을 나 자신과 연관시켜서 생각하고 그 일에 나의 존재를 던져 넣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26문을 따라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할 때 당신이 믿는 바는 무엇입니까?"에 대한 대답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 유신론적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일반적 유신론의 입장에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1) 기독교 유신론적 의미에서의 창조 신앙은 사실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모두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로서 지금도 그것들을 붙드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창조와 섭리에 대한 신앙); 둘째로, 그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며(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그리고 셋째는, 그런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시라는 것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다 믿는 이가 기독교적 창조 신앙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것은 유대교도들이나 이슬람교도들도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내용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믿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와 섭리를 믿는 것도 그저 유신론을 가진 이들이 창조와 섭리를 믿는 것과는 그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믿음'은 어떤 점에서 독특한 것입니까? 그것은 결국 이 창조와 섭리를 해 나가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영원 전부터 가지신 경륜을 따라서 (우리가 지난번에 생각한 바와 같이) 당신님의 뛰어나신 지혜와 크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지금도 그리고 영원까지 이 피조계를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으로 유지하시며, 통치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성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한 후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말하여(히 1:3), 지금도 온 세상을 섭리해 가시는 일을 하고 계심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도 그의 창조의 능력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오래 전에 있었던 어떤 일을 믿는다는 것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그의 창조적 능력의 붙드심이 없이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도 못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인정하는 것이 창조주를 믿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을 그의 창조적인 손길과의 대화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참으로 창조주를 믿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를 그저 과거의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참된 창조 신앙에 못 미치는 것입니다. 이 순간도 하나님의 창조적인 손길의 어루만짐이 있어서 이 세상이 존재하며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창조주를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창조 신앙은 역동적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에 동일한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살며 가르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성령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주 친근하게 "아빠"(αββα)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번에 생각한 바대로 성부와 성자의 아버지 아들 관계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만 있거나, 그 때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고, 로고스[말씀]께서 성육신 하시기 이전부터도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는 영원부터 성부(God the Father)요, 성자(God the Son)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God the Holy Spirit)과 함께 영원한 삼위일체로 계시는 것입니다.2)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창조자는 "알라"가 아니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 존재(the Ultimate)에 대해 돌려 드릴 수 있는 수많은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3)

그런데 그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나의 하나님이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까지를 믿어야 창조 신앙을 제대로 가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서 내가 창조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나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를 마련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가운데 있지 않았을 텐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내가 창조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까지를 믿는 이가 기독교 유신론적인 의미의 창조 신앙을 가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2. 창조자를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창조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 3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귀하며, 들의 백합화보다 귀하므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 31).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아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셨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 하나님이 전혀 관계하지 않는 듯이 생각하는 것은 결국 창조 신앙도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상한 돌보심을 이처럼 믿어야 창조 신앙을 바로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바라보면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하실까를 생각하고 믿는 이가 창조 신앙을 가진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가진 이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수 없습니다 (마 6:25, 31).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자들은 주어진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 나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도는 그 모든 것의 해결을 자신이 다 해야 하거나, 다 할 수 있는 듯이 노심초사하거나 안절부절못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문제에 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염려함으로 그 목숨을 한자라도 더할 수 없음을, 오히려 사실상 그것을 단축할 뿐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4) 그는 오히려 상당히 초연한 자세로 모든 것을 잘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빌 4:6). 그렇게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빌 4:7). 그러므로 참된 창조 신앙을 가진 이는 삶에 대해서 초연한 태도를 가지고,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일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염려하는 것이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의 아버지께서 창조하셔서 그에게 잘 보살피도록 맡기신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은 이 세상을 피하여 가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상만 하거나, 또 어떤 곳에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잘 살겠다고 하지 않고, 이 세상 전체의 과정과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삶의 모든 문제에 다른 어떤 이가 그럴 수 없을 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5)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다 할 수 있는 듯이 생각하지 않기에 거리를 두고 초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한가지를 끊임없이 추구해 가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노심초사하고 그것이 이루기까지는 쉬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한 추구로 그는 이 땅에 살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있어서 그 나라의 온전한 의가 우리를 하루 속히 지배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 전에라도 그 나라의 의에 조금이라도 근접하는 것이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만 그의 이 세상에서의 힘쓰는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뜻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상)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구하다, 추구하다"(ζητ?ω)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계속 추구해야(keep seeking) 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6)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이 우리가 구하고 추구하고 염려할 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신앙을 가진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에 터 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며, 이 세상에서의 구체적인 삶에서도 그 나라의 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왕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슬픈 세상에서 그 어떤 역경을 네게 보내시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나의 선을 위한 것임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일이 그것이 자신의 죄에 의해서 자초되는 것이 아닌 한 자비하신 아버지에 의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그의 삶과 관련해서는 모든 일이 잘되리라고 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욥과 같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예수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고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도 아는 이입니다.7)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며 지켜 주시는 것을 잊지 아니하며, 그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굳게 믿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손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이시므로 현세에서나 심지어는 죽어서라도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실 분이심을 바울은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3. 창조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믿는 것이지만, 특히 다음의 두 가지 속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라고 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의 어떤 힘이 능가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힘에 대한 생각이 사무쳐야 합니다. 그 전능하신 힘으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만드시고, 지금도 그것을 유지하시고 통치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경륜해 나가시며, 나를 그 나라 백성으로 삼으셔서 다스리시고 구체적으로 돌보시는 것입니다. 무(無)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전능한 힘으로 나를 돌아보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실존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전능은 그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문제와 관련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얼마나 강한 것으로 믿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연약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는 그야말로 크신 힘을 가지신 강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으신 이가 온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강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 분의 강력하나 자애로운 손길을 매 순간마다 의식하며 사는 이가 창조 신앙을 가진 이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참으로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큰소리치고,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윽박지르고, 자신의 힘을 나타내 보일 때만 무엇인가 있는 듯이 돌아보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이 세상적인 방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 같은데도,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하게 부드럽게 세상의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갚으며 살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참으로 믿는 이들은 그 하나님과 그의 전능을 의존하기에 그의 방식에 따라 부드럽고 조용하게,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주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연약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은 강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전능의 발휘가 있습니다. 그 전능은 우리의 사적인 욕망이나 개인적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사용(私用)해 보려고 하는 생각은 사실 하나님의 전능성에 반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믿음직스러우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약속하셨다면 그는 이 약속을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게 지켜 나가십니다. 그는 그야말로 신실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십니다. 그는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진리의 하나님이시므로 참으로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온 세상이 변해도 그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그는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약 1:17 하).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변하지 않으시므로, 따라서 그의 말씀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는 말씀도 결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전적으로 믿을 만한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무엇을 믿겠습니까? 그 믿음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좋은 일이 나타날 때만이 아니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불행의 순간에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그 분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상하신 돌보심에 대한 우리의 최후의 고백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리하실 수 있고.

그는 신실하신 아버님이시므로 그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우리의 유신론을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이라고 칭하고, 이런 사상의 독특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글로 다음을 보라: Corneilus 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55), pp. 9-13, 114; idem, Christian-theistic Evidences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61); idem, A Survey of Christian Epistemology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70), p. 62; and idem, Christian Theistic Ethics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71).

2) 이런 점들에 대한 논의로 이승구,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 『개혁신학 탐구』 (서울: 하나, 1999): 52-67을 보라.

3) 이는 이를 주장하는 John Hick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진술임을 이제는 누구나가 다 잘 알 것이다. Cf. John Hick,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 (London: Collins, 1977); God Has Many Names (London: Macmillan, 1980); An Interpretation of Relig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Dispute Questions in Theology and the Philosophy of Relig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3). 다음의 비판서들을 참조하라. Ronald H. Nash, Is Jesus the Only Savior? (Grand Rapids: Zondervan, 1994), 그리고 근자의 졸역, 『다원주의 논쟁』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2001)을 보라.

4) Cf. R. T. France, Matthew,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VP, 1985), p. 140.

5) 이런 활동에 대한 시사로 졸고, "복음화와 사회 참여",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부, 1995): 83-88; Paul Marshall, "노동, 소명, 그리고 쉼", Mark Noll and David Wells, eds., 『포스트모던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 (서울: 엠마오, 1994): 369-403 등을 보라.

6) Cf.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Grand Rapids: Eerdmans, 1992), p. 161, n. 105.

7)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졸고, "고난과 기독교", 『개혁신학 탐구』: 68-81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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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 3 : 섭리(攝理)란 무엇입니까?
[ 본문: 히브리서 1장 3절, 시편 104편 ]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우리는 지난번에 창조 사실과 창조 신앙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 우주와 심지어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 되는 창조의 사실을 믿고 전능하신 창조자를 생각하는 일은 피조된 이성적(합리적) 존재들에게는 당연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창조와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7세기말부터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 대륙과 당시의 신대륙인 미국에까지 번져간 이신론(理神論, deism) 또는 자연신론(自然神論)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이 세상이 그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여 나가게끔 하셨다고 생각합니다.1 그래서 이신론자들은 피조계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정교한 우주를 디자인(design)하신 창조자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경이를 느끼고, 그가 자연계에 부여하신 법칙을 애써 찾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 피조계와 어떤 직접적인 관련을 갖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을 발휘하셔서 이 세상과 역사의 과정에 관여하고 계셨고, 또 지금도 관여하고 계십니다. 이를 전통적으로 섭리(攝理, providentia, providence)라고 불러왔습니다. 섭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하였던 이신론자들은 창조는 믿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신론자들은 "가슴속에 종교에 대한 깊은 갈망을 지닌 합리주의자들이었다"고 표현한 드라이든(Dryden)의 표현은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2 그러나 창조만 믿고 섭리를 믿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대해서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하신 것을 다 믿지 않는 것 또한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섭리 교리에 대한 근대의 오해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의 또 하나는 섭리의 과정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과정을 동일시하려는 헤겔(Hegel)의 사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은 범신론(pantheism)일 것입니다. 이는 이신론과는 달리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 같으나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섭리를 이해하지 않고, 섭리의 과정이 하나님의 존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 세상 역사의 과정이 하나님 자신에게도 매우 형성적인 과정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에 의하면 창조와 섭리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며, 사실상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개념도 사라질 정도로 역사의 과정을 하나님 자신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3

그러므로 섭리 개념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마 현대에 들어 와서 가장 심각하게 왜곡되는 교리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섭리 교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섭리의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27 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답은 다음과 같이 묻는 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로써 당신이 이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섭리 개념의 이해

섭리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일이 "전능하고 항존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 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의 본유적인 능력, 특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용하셨던 그 능력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으로써 섭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항존적인" 능력이라는 또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에 섭리에 작용하는 능력이 항존적인 능력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능력은 항존적인 것이므로 우리로 하여금 전혀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는 넉넉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붙드시는 손길을 믿고 우리의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섭리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믿음이 그 배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이런 섭리가 발생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되어 지는 일들을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 전능하고 항존적인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일은 다음 두 가지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유지 또는 보존"(preservation, conservatio, sustentatio)이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통치"(government, gubernatio)라는 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도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은 지극히 거룩함과 지혜와 권능으로써 모든 창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입니다."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제 11 문답). 이 둘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그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지 이 과정들이 결코 떨어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존과 통치, 그리고 후에 말할 협력이 모두 하나의 섭리적 사역의 여러 측면들이기 때문입니다.4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유지, 또는 보존하신다는 말은 "모든 피조물을 붙드신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도 성자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의 존재가 유지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 당신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붙드시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이 피조계는 결코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그 존재의 시작에서만이 아니라 그 지속에 있어서도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께 의존해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자족적인(self-sufficient)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리스가 그의 히브리서 주석에서 잘 설명하고 있듯이, "성자의 유지시키시는 활동의 범위에서 배제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5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존재도 그 하나하나의 움직임도 다 하나님의 우리를 붙드시는 손길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과 관련을 가지지 않고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깨달은 시편 기자는 피조계 전체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습니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 27-29).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 있는 존재 전체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붙드시는 손길 때문에 이 순간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신 태양이 없어지면 자신들이 그 존재를 계속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 태양을 창조하시고 유지시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그를 인정하지도 않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한 상황입니까? 우리는 이런 현실에 대해서 깊은 통분함을 느껴야만 할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와 붙드시는 손길을 유의하고 그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와 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바빌론 포수기에서 돌아와 회개하면서 찬양을 드리는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아주 바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해야 할 것을 천명한 후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8:6). 온 세상의 피조물들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데도,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심한 통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을 그저 유지해 나가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님께서 영원 전부터 가지신 목적을 향하여 이 세상이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세상을 운영해 나가십니다. 이를 하나님의 경영 또는 경륜(oiconomia, economy)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統治, gubernatio, government]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통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역사와 민족들의 흥망성사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를 잘 깨달은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단 2:21);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입니다(단 4:25). 이 세상에 되어 지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손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 통치 행위에서 그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라는 것이(엡 1:11)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소에도 이런 사실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아주 잘 나타나는 것은 때로는 이 세상의 죄악을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심판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최후의 심판에서는 더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말로 다음과 같은 아모스의 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으로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셔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 중에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의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눔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 칼을 명하여 살육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아모스 9: 1-4).


이런 심판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섭리가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만이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인 것입니다.6 그에는 가장 사소한 것도 포함되고(마 10:29-31),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포함되며(잠 16:33, 왕상 21:19-24; 왕상 22:17, 34-36), 선한 일도(빌 2:13), 악한 일도(욥 1:11, 12; 2:4-6), 자원해서 나타나는 자유스러운 일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보존과 통치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유지하시는 것이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을 향해 잘 다스려 나가시는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려고 하는 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며, 모든 피조계가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어 나가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형성을 위하여 온 세상을 지금도 유지하시며 다스려 나가시는 것입니다.


2. 섭리의 구체적인 과정은? - 기적의 경우 외에는 동시 발생, 혹은 협력(concurrence)7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는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책임지셔야 하며, 다른 존재들은 다 그의 조종에 의해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섭리에 대한 심각한 오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원인과 결과의 연관 관계를 무시하고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강요와 억압을 부여하여 피조물들의 작용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원인 결과의 관계를 너머 서서, 즉 제 2의 원인들을 사용하지 않고, 또는 그 과정에 역행하여(contra media), 즉 자연 법칙으로 일어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직접 일으키기도 하시고, 관여하시기도 하십니다.8 그러나 이런 이적들(miracles)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비상 섭리(extraordinary providence, providentia extraordinaria)인 것입니다. 이 말 자체가 말하고 있듯이 이는 참으로 비상(非常)한 일로 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바다 가운데에 내신 길로 가게 하신 일이나,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신 일이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행하신 이적들이나, 사도들의 선포의 확증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도들로 하여금 일으키도록 하셨던 소위 "사도적 이적들"(apostolic miracles)과 같은 이적들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일을 하신 비상 섭리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또 보편적으로는 대개 이 세상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사용하셔서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는 제 2의 원인(the second cause, causa secunda)을 사용하셔서 섭리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벌써 이 세상에 되어지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중세 때 스콜라 신학자들이 즐겨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만물의 "제 일의 원인"(the prima causa)이십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것의 직접적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말이 아님에 유의해야 합니다. 제 일의 원인이신 하나님은 제 2의 원인들을 무시하고서 사역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 2의 원인들을 사용하셔서 사역하시되 그 제 2의 원인들의 성격을 잘 활용하셔서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과 제 2의 원인들이 협력하여(a concurrence of the first Cause with the second causes) 일이 이루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9 이를 협력(co-operatio, cooperation) 또는 동시 발생(concursus, concurrence)라고 우리 선배들이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제 2의 원인의 원인으로서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섭리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어떤 일을 하도록 하실 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주관하심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하시지는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바울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 13)라고 말할 때, 이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우리의 소원을 두고 행하는 일의 연관성을 잘 표현하는 것입니다.10 이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우리의 소원을 두고 행하는 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과 경영이 우리의 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자동 기계나 로봇과 같아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책임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어서 하나님의 뜻의 작용이 간접적으로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우리의 의지의 활동,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제 2의 원인이 동시 발생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섭리 교리의 실천적 의미는?

이러한 섭리 교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매우 실천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에 우연히(by chance)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일어난다는 것이 섭리 교리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에서 말했던 이적들과 같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되는 일도 있으나, 대개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등 하나님과 간접적으로라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일어나든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관장 아래에 있으므로 이 세상에는 "우연히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점을 확언해 주고 계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라도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섭리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우연에 근거하거나, 요행을 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개혁자들이 카드놀이를 금한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연이나 요행을 바라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오락으로 카드놀이 등을 즐길 수는 있습니다마는 기본적으로 요행이나 우연을 기대하는 태도는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각국마다 유행하고 있는 복권 제도입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한국이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고 열심히 복권을 사고 있습니다. 그런 일에 따르는 다른 문제점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복권 제도 배후에 있는 우연에 근거한 생각, 즉 이 세상에 우연히 요행히 되는 일도 있다는 생각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화론이 옳을 수 없는 것도 이 생각이 기본적으로는 우연에 근거하여 생물의 발생과 진화를 설명해 보려고 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우연에 근거하여 무엇을 설명해 보려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 교리의 첫 번째 실천적 의미입니다.

둘째로,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손길에서 우리에게 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좋은 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적인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들의 아버지의 손길에서 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면서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27 문에서는 "꽃잎이나 풀잎, 비나 가뭄, 풍년이나 흉년, 음식이나 음료, 건강이나 병, 번영이나 가난 이 모든 것이 사실은 ......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손길에서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따라서 섭리의 대상에는 신자나 불신자, 피조계 전체, 심지어 천사들과 타락한 천사들인 악한 영들(귀신들)이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는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계 일반보다는 인간들에게, 또 인간들 일반보다는 당신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더 특별한 섭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에게 미치는 섭리를 특별 섭리라고 하고, 그 중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미치는 섭리를 "아주 특별한 섭리"(특특별 섭리, a very special providence, providentia specialissima)라고 불러 왔습니다.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이들은 그저 세상 만사를 하나님께서 다 섭리하신다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 자녀된 자신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섭리하시는 줄 알고서, 그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고 그 인도하심에 잘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이들과 그 섭리 아래 있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큰 차이인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다 섭리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는 오직 성경적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섭리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섭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구체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음 말씀을 실천적으로 체험하며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마지막으로 바른 섭리 교리를 배운 이들에게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 요구되는 하나의 이론적인 요구가 있다면 그것은 섭리를 하나님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본 범신론에 대한 모든 비판을 염두에 두고서 그것을 교묘하게 변형시킨 만유재신론(pannentheism) 극복의 과제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 강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것은 과정신학, 몰트만과 융엘의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 큐피트 등의 비실재론적 신학, 심지어 이전 시대의 바르트의 신학에도 등 오늘날 신학계에 상당히 펴져 있는 심각한 문제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도 섭리 교리를 오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세기말과 21세기초에서도 전통적 신학을 유지하려는 이들에게는 이 만유재신론에 대한 극복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의의 주제(agenda)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섭리 개념을 성경적으로 바로 정립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미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대표적인 이신론자들로 우리는 영국의 John Toland (1670-1722), Anthony Collins (1676-1729), Matthew Tindal (1655-1729), 유럽 대륙의 Hermann Reimarus (1694-1768), (Francois-Marie Aroute Voltaire (1694-1778), 그리고 미국의 Thomas Paine (1737-1809)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를 우리의 이성에 부합하는 이성적인 종교로 만드는 일에 부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Dryden: "rationalists with a heart-hunger for religion", quoted in New Dictionary of Theology (Leicester: IVP, 1988), s.v. "Deism."

3 헤겔 사상과 그와 같은 범신론적 사상의 이런 점에 대한 좋은 지적으로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165, 166, 168을 보라.
그는 아예 "a pantheistic confusion of God with the world"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165).

4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다른 곳에서와 같이 이 문제도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개념상의 정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Berkhof, 169;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One Volume Edition (Grand Rapids: Baker, 1985), 388, 389, n. 1.

5 Leon Morris, "Hebrew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2 (Grand Rapids: Zondervan, 1981), 14. 이 본문에서 성자가 전면에 나서도록 표현된 것은 성자만이 섭리하신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모리스의 논의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이다.

6 섭리의 포괄성에 대한 좋은 논의들로 Berkhof, 176;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rans. George Musgrave Giger, vol. 1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1992), 498-501을 보라.

7 흔히 섭리를 보존, 통치, 협력으로 셋으로 나누어 말하나(Berkhof, 169-76; Mastricht, a Marck, De Moore, Brakel, Francken, Kuyper, Bavinck), 보존과 통치의 두 요소를 말하고 협력을 그것이 이루어지는 구체적 과정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던 과거의 신학자들, 특히 칼빈과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그리고 댑니(Dabney), 핫지 부자(the Hodges), 딕(Dick), 쉐드(Shedd), 맥펄슨(McPherson) 등에 따라 여기서도 이런 설명을 시도한 것임에 유의하라. 이에 대해서 Berkhof, 166을 보라.

8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Berkhof, 176을 보라.

9 이런 표현에 대해서 Berkhof, 167을 보라.

10 이 본문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되는 견해, 즉 "너희를"을 (Michaelis나 I. H. Marshall이 주장하듯이) 각각의 교인들로 볼 것인가, 아니면 (Ralph Martin이 생각하듯이) 빌립보 교회 전체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심각한 대립의 문제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여기서는 이 둘을 다 취하여 생각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11 이 점에 대한 지적으로 Berkhof, 16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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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 4 : 창조와 섭리 신앙의 유익
[ 본문: 창세기 45장, 50장 ]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창조를 믿는다는 것과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과거에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이상의 실천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창조와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창조와 섭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이런 분명한 사실들에 대해서 맹목적이게 되고, 그 사실들을 아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전혀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로(엡 2:12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창조와 섭리의 사실을 알고 인정한다고 해도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는 이들은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의 유익에 의미 깊게 동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섭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이들인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시간을 내어서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관심을 가지고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28문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태가 우리에게 불리할 때 인내할 수 있으며, 사태가 잘 되어 갈 때 감사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해서도 우리를 그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우리의 신실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선한 신뢰를 둘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온전히 그의 손에 있어서, 그의 뜻이 아니면 그들이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여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설명을 따라서 믿는 이의 태도를 찬찬히 생각해 가면서 창조와 섭리의 유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인내할 수 있는 이이다.

여기에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다가 이 세상의 복잡한 삶의 과정 가운데서 모진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잇는 그는 이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생각해고 행동해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일까요? 어려움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거나, 하나님이 계셔도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이가 아니거나, 적어도 그 순간에는 불신앙의 태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지 않거나,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를 나타내 보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탄회(坦懷)하신 일이 있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7, 28). 이처럼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한대로 잘 될 때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역경도 모두 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욥의 상황과 같이 그런 어려움이 우리게 임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는 경우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도 참으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어떤 경륜 가운데서 내게 임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 어려움을 참고 인내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참된 신앙인들은 모두 다 이같은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에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巖穴)과 토굴(土窟)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이 자신들에게 임하는 제2의 원인(the second cause, causa secunda)이 된 다른 사람들이나 상황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와 섭리를 믿으며 인내하는 이의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인내하는 이는 다른 이들을 참으로 용서하는 이입니다. 다른 이들이 관여되어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임하여 왔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들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우리에게 잘못 행하는 것을 관대히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서 섭리를 믿기 때문에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참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우리는 구약에서는 요셉을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따라서 통역도 물리치고) 아마도 그의 모국어로1 그의 형들에게 그가 했던 다음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 4-5, 8).

많은 이들은 "요셉 기사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이 말이2 하나님의 "섭리적 통제에 대한 고전적 진술의 하나"라고 말합니다.3 이 일에 사람들의 잘못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음을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만 눈을 집중시키는 그것에 섭리에 바른 이해와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4 비록 형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서 자신을 아비에 집에서 떠나게 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 과정 가운데서 자신이 모진 고생을 하였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요셉이었지만, 그는 또한 이 모든 어려움이 그저 형들의 죄악과 미움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궁극적으로 따져 올라가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통해서 자신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그는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 이야기 전체의 본질, 주제, 또는 큰 구조(macrostructure)라고 할 수 있습니다.5 그 모든 어려운 과정이 결국은 자신의 모든 가족을 보존하고, 결국은 이스라엘 족속을 보존하며 번성시키기 위한 것임을 그는 인정하면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가 정확히 언제 이런 인식을 확연하게 가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고, 본문도 그런 시사를 전혀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명확히 이런 인식 가운데서 움직여 나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가 이 과정을 겪어 가면서 점점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6 그러므로 이런 고백을 하는 요셉도 이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런 섭리적 통제를 깨닫고 고백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깨닫게 된 후에 요셉은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판 형들이나, 자신은 그 집안 일을 최선을 다해 잘 돌아보았음에도 자신을 유혹하고 누명을 씌워 옥에 넣도록 한 보디발의 아내나, 상황을 잘 알아보지 않고 자신에게 모지게 대한 보디발이나, 꿈을 잘 해석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돌아 볼 시간을 갖지 못한 관원장에게 대한 원망의 마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기에 참으로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악된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원하시는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기7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참으로 믿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원인이 되어서 당하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라도 그 원인이 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원한을 표하거나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믿으면 다른 이들을 얼마든지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식이나 빈말이 아니었음을 야곱이 죽은 후에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복수할까봐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말하는 요셉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 19-20).8

이 말씀을 포함한 요셉의 대답에 대한 가장 좋은 정리와 언급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데렉 키드너의 요약적인 그러나 풍성한 분석을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삼중의 대답의 각 문장은 구약(과 신약)의 신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대해 행해진 악행들에 대해서 모든 일이 바르게 되는 것을 다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19절, cf. 롬 12:19; 살전 5:15; 벧전 4:19); 사람의 악함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찾는 것(20절; cf. 창 45:5); 그리고 악에 대해서 용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애호와 돌봄으로 갚는 것 (21절; cf. 눅 6:27ff.) --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적인' 아니 심지어 '그리스도와 비슷한'(Christlike) 태도를 선취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9

이런 요셉의 태도, 이와 같이 관대한 마음은 모두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는 섭리에 대한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신성을 가지신 주님이시기에 하시는 말씀이시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음을 분명하고도 확실히 믿는 믿음으로부터도 나오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런 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신다고 해서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이 책임이 없거나, 그들이 아무런 죄책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결과만 좋으면 그것으로 다 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에 있어서도 잘못을 행한 형들과 보디발의 아내 같은 이들의 죄와 죄책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섭리를 인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참고 인내하며, 용서한다고 해서 그것이 죄와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정의에 대해서 맹목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나 다름 모든 이들이 분명히 의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죄에 대해서 판단하시고 공의롭게 처리하실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들도 창조와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서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잘 인내하여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 특히 억울함과 원한을 십자가의 구속의 빛에서 다 주께 맡기고서, 따라서 자신은 그로부터 참으로 벗어나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빛에서 생각해 보면 억울함, 원한, 한(恨)에 묶여 사는 이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사상 중의 하나인 한(恨)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그 인식에 근거해서 그 한(恨)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풀이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십자가가 한의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극복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섬기는 이들의 선을 위해 선으로 인간들의 악을 이기실 수 있음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10

2.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감사할 수 있는 이이다.

섭리를 믿는 이들이 역경(逆境) 가운데서는 이와 같이 어려움을 인내하며 견디어 나갈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는 순경(順境) 가운데서는 그 모든 일이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서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엄격하게 따져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왜냐 하면 되어지는 모든 일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이는 오직 섭리를 믿는 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이는 순경(順境) 가운데서 만이 아니라, 역경(逆境)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 그것은 되어지는 모든 일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모리스가 잘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정황 가운데서 감사하는 것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 모리스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기를 배우게 됩니다."12 그러므로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는 일은 참으로 섭리를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매우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근원적 원인은 참 신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13 그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면서 우리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도 그 구원을 이루신 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14

그러나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잘 알다시피 쉽게 되어지는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살전 5:18). 그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ν παντ?)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ε?χαριστε?τε). 이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역경 가운데서의 상황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말입니다. 감사하는 일이 쉽게 되어지는 일이라면 교우들에게 이를 명령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기에 이를 명령한 바울 사도는 (그가 명령한 다른 것들도 염두에 두면서)1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렇게 감사해야 하는 근거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기만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대로 행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바라시는 바의 하나가16 분명히 명시(明示)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우들에게도 같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감사의 최종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구속의 행위로 주신 유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는 성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무엇이 잘 되었을 때 그것이 자신의 선행이나 애씀과 노력의 결과로 그리되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물론 그 자신이 노력하지 않거나 애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노력과 애씀으로 좋은 결과가 왔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따지면 자신 이렇게 애쓰고 노력할 수 있는 그 동기와 힘과 마음과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가능하게 하신 것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정황을 이루셔서 좋은 열매가 있도록 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면서 하나님께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자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이는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레미아서 9:23-24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을 여러 번 하는 것입니다(고전 1:31; 고후 10:17).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연합 가운데서"라는 뜻을 전달하는17 이 "주안에서"(?ν κυρ??) "자랑하라"는 말은 주안에서 무엇을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해주신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18 결국 참된 신자에게는 자랑할 것이 주님뿐이시라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강하게 말하듯이, 그들이 가진 것 가운데 주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고전 4:7),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3:21ff.). 이를 제대로 깨달은 이들은, 칼빈이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들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데 힘을 쓰는 것입니다".19 그러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이가 참으로 감사하는 이인 것입니다. 창조와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실재적인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에게는 그 자신이나, 자신이 이룬 일이나, 자신의 옷이나 부나 명예나, 학식이나, 자신의 힘이나,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자녀나, 심지어 자신의 교회나 자신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자랑거리로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랑의 근거요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이이다.

창조와 섭리를 믿는 것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와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도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손길 안에 있는 것만큼이나, 미래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28문답의 마지막 부분이 분명히 말하듯이 "모든 피조물들이 온전히 그의 손에 있어서, 그의 뜻이 아니면 그들이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여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섭리를 믿는 이는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사망이나 ......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 38-39)는 바울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이는 그 불변하는 사랑을 믿기에 장래를 과감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이는 장래에 대해서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의 우리의 불안과 걱정을 제거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 공연한 불안에 사로잡히고 걱정하는 이는 마치 그에 대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는 실천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가 참으로 이런 상황 가운데 있다면 그는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상황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데도, 그 자신은 마치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와 돌보심이 전혀 없는 듯이 생각하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니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불신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25, 32상).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우리는 이런 염려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하). 그러므로 창조와 섭리의 주이신 천부께서 "이 모든 일 것을 [우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마 6:33하).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불안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벧전 5:7) 베드로가 권면하지 않습니까? 또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빌 4:6)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이는 미래 일을 생각하고 계획할 때 하나님을 배제하고 생각하거나 계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농부는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수확에 대한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웠고(눅 12: 16-21), 이것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가 예를 들고 있는 사람도 하나님은 전혀 배제한 채 장래의 계획을 세웠으나(약 4:13-17), 야고보는 그에 대하여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산중이나 농촌에서 새벽에 안개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이들은 이 말의 의미를 직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 물을 사람들을 위해서 야고보는 친절하게 대답하여 주기를 우리는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강조 점은 "주의 뜻이면"(??ν ? κ?ριο? θ?λ?, deo volente, D. V.)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고대 희랍어에 자주 등장하여20 나중에는 그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기는 하나,21 야고보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저 희랍적인 경건을 편입시키거나 일반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참으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서 계획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22 그리스도인도 장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하는 일을 해야 하나, 이 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서 이 일을 하며, "주의 뜻이면" 이런저런 일들을 하리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로 야고보는 그가 이전에 강조한(약 4:7)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모든 삶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23 하나님을 믿는 이이면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할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적 통제를 믿는 이다운 모습을 나타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참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을 깨달은 이는 그와 같이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주님의 뜻 안에서의 미래에 대한 계획도 언제나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과 연관되어야 합니다(마 6:33). 우리의 모든 계획은 주께서 크신 힘으로 세우시는 그 나라의 진전과 그의 의의 온전한 실현을 위한 계획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그 의(義)를 위해 사는 이들만이 미래를 참으로 창조와 섭리의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와 우리의 미래조차도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경영하시고 세우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의를 위해 사는 존재들이니 말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가 현세의 삶을 살면서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역경(逆境)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인내할 수 있고, 순경(順境)과 번영(繁榮) 가운데서도 자만(自慢)하지 않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해서 쓸데없이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믿고 염두에 두면서 그의 뜻을 따르는 계획을 세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와 섭리를 믿는 이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바로 아는 이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있었으며, 지금도 있고, 또 있게 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울과 같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living), 기동하며(moving), 있느니라(being)". 부디 우리 모두는 이런 것을 잘 알기만 하지 말고, 그것을 잘 아는 사람답게 그 모든 유익을 잘 얻어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미래를 포함하여 우리 전체를 주께 맡기고서, 우리의 모든 정황 가운데서 참으로 인내하며, 주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Cf. 비슷한 의견으로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5), 575를 보라.

2 Walter Brueggemann, Genesis, Interpretation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345. See also John H. Sailhamer, "Genesis,"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0), 257.

3 Cf. Derek Kidner, Genesis, Tyndale OTC (Leicester: IVP, 1967), 207: "one of the classic statements of providential control.".

4 Cf. Kidner, 207; Bill T. Arnold, Encountering the Book of Genesis (Grand Rapids: Baker Books, 1998), 159.

5 Cf. Gordon Wenham, Genesis 16-50, WBC 2 (Dallas, Texas: Word Books, 1994), 428.

6 비슷한 견해로 Hamilton, 575를 보라.

7 Wenham, 490.

8 그러므로 이 말씀들의 수사적 질문을 통해서 요셉이 45장의 모습과는 좀 다르고 좀 차겁게 형제들을 대한다는 Brueggemann, 371f.의 논의는 너무 지나친 것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45장과 50장의 분위기를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논의가 더 옳다고 생각된다.

9 Kidner, 224.

10 Arnold, 163.

11 Leon Morris, The Epistle of Paul to the Thessalonians, Tyndale NTC (Leicester: IVP, 1956), 103.

12 Morris, The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59), 174.

13 놀랍게도 명확히 이를 말하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James Everett Frame이다(Epistles of St. Paul to the Thessalonians, ICC [Edinburgh: T. & T. Clark, 1912], 202: "The stimulating cause of thanksgiving is the Christ within (?ν Χριστ? ?ησο?; cf. the δι? in Rom. 1:18; &;25 and especially Col. 3:17"). See also I. Howard Marshall, 1 & 2 Thessalonians, NCBC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83), 156.

14 Cf. E. Best, A Commentary on the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Black's NTC (London: 1972), 236.

15 여기서 단수인 "이는"(το?το)으로 언급된 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감사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그 앞에 나오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까지를 하나로 묶어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Morris, Tyndale, 103; Morris, NICNT, 174; Frame, 202; F. F. Bruce, 1 & 2 Thessalonians, WBC 45 (Waco, Texas: Word Books, 1982), 125; Marshall, 156;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90), 200f.; John Stott, The Gospel and the End of Time (Downers Grove, Ill.: IVP, 1991), 126.

16 모리스는 "하나님의 뜻"(θ?λημα θεο?)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에 근거해서 이 것이 하나님의 뜻 전체로 여겨질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Morris, Tyndale, 103; Morris, NICNT, 174).

17 F. W. Grosheid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53), 54.

18 Leon Morris, 1 Corinthians, Tyndale NTC,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1985), 20. Bruce는 고후 10:17의 말씀에 대해서는 주께서 (자신을 통해) 해 주신 일을 자랑하라는 뜻으로도 해석한다(Bruce, I & II Corinthians, NCBC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1; Grand Rapids: Eerdmans, 1980], 234). 고린도 교회 안에서 되어진 모든 옳은 것들은 "주께서 바울을 종으로 사용해서 하셨을지라도 주께서 이루신 것이다"는 것이 그 문맥 전체의 중심 주제의 하나이다. Cf. Paul Barnett,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7), 492.

19 John Calvin, 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trans. John W. Fraser (Edinburgh: Oliver and Boyd, 1960; 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76), 47.

20 이에 대한 예들은 ICC 주석에 잘 인용되어져 있다(James Hardy Ropes, The Epistle of St. James [Edinburgh: T. & T. Clark, 1916], 279).

21 이에 대한 지적과 인용들은 James Adamson, The Epistle of Jame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76), 181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2 이 점에 대한 가장 강한 강조로 Douglas J. Moo, James, Tyndale NTC (Leicester: IVP, 1985), 156f.을 보라. 특히 156: "이 어귀가 얼마나 폭넓게 사용되었든지 상관없이, 야고보는 성경적 세계관과 그 역사의 주권적 통치자를 위해 '세례를 주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소피 로즈는 좀더 나아가서 "그들의 용어로 미래에 대한 그들의 계획에 대한 바른 태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까지 말한다(Sophie Laws, A Commentary on The Epistle of James, Harper's NTC [Harper and Row, 1980; Peabody, Mass: Hendrickson, 1987], 192).

23 Adamson,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