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이론>>>/ - 산상수훈 강해

스크랩 비판하지 말라 (마 7:1∼5)

에반젤(복음) 2020. 10. 8. 00:36

비판하지 말라 (마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 시간 “비판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언론이 발달되어 있는데 언론의 목적이 사회적 감시와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비판의 기능입니다. 언론이 비판의 기능을 상실한다면 그 언론은 진정한 언론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언론에 종사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할까요?


이 말씀 드리기 전에 비판이 무엇인지 그 의미부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비판하다.”는 말은 원문에 ‘크리노’로서 ‘정죄하다. 심판하다.’는 법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 비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 건설적 비판과 사리분별과는 다른 용어입니다.


그렇다고 맘대로 비판해도 좋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 비판은 모두 비판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그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비판은 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정죄나 심판과 같습니다.
비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런 사랑 없는 비판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비판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판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1. 내가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1-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하는 자는 누구에게 심판을 받습니까? 먼저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이 있지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혹독하게 대하면 하나님도 똑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래서 약2:13에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성경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이 의인 모르드개를 모함하여 죽이려다가 그 장대에 누가 달렸습니까? 모르드개가 달린 것이 아니라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습니다. 비판하면 사람에게서도 비판을 받습니다. 좋은 말하면 좋은 말이 오게 되어 있고 비판하면 비판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속담이 맞습니다. 사랑 없이 판단하는 말은 다 비판이라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자신도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3-4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티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들보는 뭡니까? 대들보라 해서 집에서 수직으로 지붕을 떠받쳐 들고 있는 기둥 중 가장 큰 제목이 들보입니다.


자신은 더 큰 죄인이면서 남의 작은 흠을 보고서 비판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속담에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말한다."는 말이 있지요. 솔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가랑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좀 더 저속한 속담도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한 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은 한 여인을 예수님에게로 끌고 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들은 기세등등했던 모습을 버리고 하나씩 둘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안다면 어떻게 남의 티를 보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이거나 마실에 가서 조심해야 할 사항이 남 이야기입니다. 누구에 대해서 감정이 좋지 않고 기분이 나쁘면 비판을 하게 되는데 남의 이야기 많이 하는 것 자체가 좋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 아니면 남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3. 사랑 없이 하는 비판은 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 구절에 사랑이라는 낱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라는 낱말 속에 사랑해야 할 의무가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 없이 누구의 티를 뺄 수 있겠습니까? 잘못 하다가 눈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사랑이 없이 하는 것이 악마이고 그것이 상하는 기계입니다. 의로운 율법 가지고도 사랑 없으면 무수한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게 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개인적 친분이 있을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감싸고돌지만 나와 상관이 없다 했을 때는 너무나 혹독합니다. 좀 더 우리의 사랑을 예수의 사랑으로 바꾸고 더 넓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만이 남의 티도 빼줄 수 있고 진정 바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남을 비판한다는 그 자체가 그 인격의 모순과 죄악성을 무엇보다 더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비뚤어진 사람이 남 비판하지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은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심 같이 긍휼히 여기십시다. 사랑 없는 비판은 결국 자기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