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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너희를 상할까 염려하라 (마 7:6)

에반젤(복음) 2020. 10. 8. 00:34

너희를 상할까 염려하라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시간에 “너희를 상할까 염려하라”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강해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믿는 우리들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 몸과 마음의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찢어지고 아프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도 그만큼 찢어지고 아프시기 때문입니다.


범죄가 성령의 마음을 아프시게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상할 때도 성령님의 마음은 아프십니다. 그래서 엡4:30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 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울 때 성령께서도 탄식하시며 부르짖으십니다. 반면 우리 영혼이 기뻐하면 성령께서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 심령관리에 힘써야 합니다.


그럼 성도의 심령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은혜의 귀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이 나오고 진주가 나옵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는 깨끗하고 값진 것을 나타냅니다. 진주장사의 비유처럼 모든 것을 다 팔아 진주를 산 것처럼 진주는 가치 있고 귀한 것입니다. 이는 넓게는 하나님 나라이기도 하고 좁게는 하나님을 모신 심령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모신 이 마음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마음이 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함께 하신 것을 믿고 모신 우리의 심령이 상할까 조심해야 합니다. 태아를 가진 산모가 몸과 마음을 조심하는 것은 태아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얼마나 귀하신 분인지 안다면 함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성령님을 의식하고 조심해서 행동하면 성령께서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2. 가치를 모른 자들을 삼가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개와 돼지는 먹을 것이나 탐하지 거룩한 것이나 진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진주는 다른 자갈 모래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진주 장사꾼이 바닷가 앞 항구에 가서 많은 돈을 주고 진주 한 포대를 샀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다가 광야에서 그만 들개와 돼지 떼를 만났습니다. 들짐승들은 배가 고픈 듯이 눈을 번뜩이고 이빨을 으르렁거리면서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진주장사는 다급해서 들고 있던 포대를 열고서 그 속에 있는 진주를 한 움큼 끄집어내서 들짐승들에게 뿌렸습니다. 그러나 짐승들은 그것을 입으로 씹어보더니 속은 줄 알고 그 진주를 뱉어서 발로 짓밟고 화가 나서 진주장사에게 덤벼들어서 그를 찢어 상하게 했습니다. 들짐승에게 전혀 인간의 가치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가치를 모르는 자를 삼가야 합니다. 귀한 것을 주고 싶어도 가치를 모르고 버린다면 줄 수 없습니다. 가치를 모르면 금덩이를 가져다 엿 바꿔 먹습니다. 가치를 모르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으로 팥죽을 바꾸어 먹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우상과 탐욕과 바꾸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고전10:8-11에 이렇게 교훈합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더 가치 있게 여겼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만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3. 사랑 없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에 개가 나오고 돼지가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는 개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벧후2:22에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개와 돼지처럼 영적으로 부정한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주님 보시기에 개와 돼지였습니다. 즉 본문의 개와 돼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모양은 잘 갖추었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고통은 물론 예수님에게도 사사건전 고통을 주고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심령관리는 상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사상은 공산주의입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물론 사상에 근거하여 인권을 존중함이 없어요. 상대방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주의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4. 관계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왜 그럴까요?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개에게 옷을 입히고 침대에 잠을 재워도 개는 개입니다. 요즘 강아지를 개라고도 함부로 부르지 못한데요. 애견가들이 우리 식구나 똑 같은데 강아지를 왜 개라고 하느냐? 항의를 한대요. 개가 사람보다 더 대접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물고 찢는 것을 보면 개는 개입니다. 돼지는 돼지고요.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천국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을 물고 찢고 밟았습니다. 헤롯이나 대제사장이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 권력과 이권에만 관심이 있었지 메시아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반하면 무조건 달려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대항하지 않고 피하여 지나가셨습니다(눅4:28-30). 아주 귀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악인을 대할 때 관계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하셨습니다. 제자 중에 열심당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칼을 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열심당원들이 맛사다에서 로마에 끝까지 항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열심당이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악을 척결해야겠다는 목표는 맞습니다. 그런데 열심당 제자들의 품의 칼은 언제 사라졌을까요? 오순절 성령을 받고부터입니다. 선으로 악을 대항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의 비유의 교훈처럼 가만 두어 추수 때까지 버려두는 것이 방법입니다. 관여하면 할수록 우리 심령이 상합니다. 그럼 추수 때가 언제입니까? 궁극적으로는 재림이지만 현재적으로는 성령이 임하시는 때입니다. 재림으로만 이해하여 세상에 대한 성도의 의무를 기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대부분은 현재성 강조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악은 사라지고 마귀의 역사는 사라지게 됩니다. 각인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 이 나라에 성령이 임하실 때, 이 민족에 성령이 임하실 때 악의 세력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사에 내려오는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천사장 가브리엘이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기가 막힙니다. 얼마 되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기독교의 명맥이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러다가는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끊어질 것 같습니다. 천사들을 내려 보내서 손을 좀 보게 할까요?" 예수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내 제자들을 믿는다. 겉보기에 저들은 약해 보이지만 저들이 결국은 승리할 것임을 나는 믿는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얼마 되지 않아서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은 기독교 앞에 완전히 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악으로 악을 대하지 않고 선으로 기도로 선한 싸움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말씀합니다(롬12:17, 살전5:15). 악으로 갚으려고 하면 우리 고귀한 심령만 상할 뿐입니다. 상대를 잘 파악하시고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악에 관여하지 말고 기도로 성령으로 사랑으로 복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