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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1주 성경통독 묵상 자료(월-토)

에반젤(복음) 2020. 9. 22. 10:17

 

41주 (월)

찬송 :(새)323장, 355장

마태복음 19:1--20:34 종교지도자들의 시험과 주님의 가르침

☞ 줄거리

예수님은 마지막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유대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때에 바리새인들이 이혼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결혼 제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이며, 음행 외에 이혼은 불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때에 한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와서 영생의 길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그 청년이 하나님보다 재물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돌아가는 청년을 보시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좆은 자신들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그들이 세상과 내세에서 몇 배로 돌려받되, 고난을 겸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포도원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헌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따라서 제자들이 자만하지 않도록 경고해 주셨습니다.

7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사람들은 자신이 희생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있습니다. 신앙도 보상심리가 근거된 공로주의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공로주의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원리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원리는 주님의 주권의 원리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한 데나리온씩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낸 후 제삼시와 제육시, 제십일시에도 놀고 있는 품꾼들을 불러 상당하게 주리라 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날이 저물어 주인은 품삯을 줄 때 나중에 온자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자까지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온자들이 주인을 원망하였습니다. 주인과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지만 나중에 온 다른 품꾼들과 비교하여 주인의 선하심을 무시하였습니다. 이들은 주인과의 약속을 생각지 않고 다른 품꾼들과 비교하여 자신들이 더 고생했다는 상대적 우월감과 배타심을 가지고 다른 품꾼들보다 더 많은 품삯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 하시면서 먼저 온자들을 책망하며 돌려보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천국은 주님의 주권의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의 뜻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곳이지 원칙이 상실된 인간적인 욕심과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위의 천국인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주권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야 진정한 교회입니다.

천국의 원리는 주님의 은혜의 원리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은 제자들에게 제자의 삶에 보상이 있음을 가르치신 직후입니다(마19:28-30). 주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될 뿐 아니라 금세에서도 포기한 것들을 여러 배나 받게 되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보상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즉 나의 공로와 수고에 따라 천국에서의 보상의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천국에서는 인간의 공로와 수고의 원칙에 따른 보상이 아닌 주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원칙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공로와 수고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지만 천국에서 보상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공로와 수고의 원리가 아닌 주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보다는 현재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그 자체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 대학인회,ESF/「일용할 양식 ,말씀 묵상」,2004. 07. 22-

살며 생각하며 : 대통령 보좌관이 된 비결

루즈벨트((Frankiln D. Roosevelt)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백악관을 방문한 한 사람이 특별보좌관으로 있는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에 대해서 대통령에게 물었습니다.

“각하, 저렇게 허약한 홉킨스 씨를 측근에 거느리고 계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답했습니다.

“저 문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옵니다. 그들은 거의 한결 같이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홉킨스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내게 봉사하는 것만을 원하지요.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하나님 곁에 머무십시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정을 헤아리시며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가페/하천덕 편저,키워드로 불러보는 설교 예화⌟ p529-

41주 (화)

찬송 :(새)605장, 287장

■ 마가복음 10:1-52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다.

☞ 줄거리

그때에 주님의 사촌이었던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모친과 함께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울 때에 자기를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이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후에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청탁을 넣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천국에서 진정한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는 집권자들이 백성들을 임의로 다스리고 주관하지만, 천국에서는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야 하며, 으뜸이 되려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읽으며 묵상하며 : 결혼과 이혼에 관한 교훈(10 :1 -12)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10:6-9)

예수님께서 베뢰아에 이르렀을 때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2).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이혼에 대해 두 학파가 나뉘어 아내가 부정을 행한 경우에만 허락할 것인지, 아니면 전적으로 남편의 권한에 둘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심했습니다. 또한, 베뢰아는 불의한 이혼과 재혼으로 인해 세례요한의 책망을 받고, 그를 처형한 헤롯 안디바의 통치구역이기도 했습니다. 곧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교리 논쟁에 휘말리게 하거나, 안디바와 충돌케 하려고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게 한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이혼을 찬성해서가 아니라(5) 오히려 아내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남편의 부당한 횡포로 인해 버림받는 아내들에게 다시 재혼할 근거를 마련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완악한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 1-4절의 조항에 근거하여 이혼을 쉽게 허락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일부다처제까지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자기 편리대로 이용하여 죄를 합리화하고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는 죄입니다.

부부는 둘이 아니요 한몸입니다. 모세의 계명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신 예수님은 최초의 결혼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결혼의 성스러움과 진지함을 설명하셨습니다(6). 결혼은 둘이 한몸이요, 하나의 생명체가 되는 행위입니다(7-8). 그러므로 이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주권을 대적하는 죄악입니다(9).

그러므로 이혼에 관한 모세율법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적용될 수 있지만 이혼을 보편화하거나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갈수록 가정이 파괴되어가고 성적 타락이 만연한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결혼관을 분명히 견지해야 합니다. 배우자의 선택 과정에는 신중한 점검이 필요하지만, 한 번 결혼한 후에는 맹세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이혼 문제에 있어서 남편뿐 아니라(11) 아내에게도 똑같은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12).

-GTM/「GT, 세계를 품는 경건의 시간」, 2005, 08, 15-

살며 생각하며 : 잠꼬대 같은 인생

어느 영화배우가 아내 아닌 여인과 사랑을 속삭이는 잠꼬대를 했습니다.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아내가 벌떡 일어나 표독스런 눈초리로 남편을 쏘아보며 씩씩거렸습니다. 문득 사태를 파악한 영화배우는 다시 이런 잠꼬대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ㄴ

“감독님, 제 연기가 어떻습니까?”

 

아들이 결혼에 대한 조언을 들으려고 부모님 방을 녹크 했습니다. 아버지는 유쾌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결혼을 결정했다니 흐뭇하구나. 결혼이란 인생에 유익한 것임을 너도 체험할거야. 나는 네 엄마와 결혼 한 이후에 늘 행복했단다. 괴로울 때나 슬플 때에 위로와 힘이 됐지.”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뜨자 아버지는 아들을 쥐어박았습니다.

“결혼 따위는 하지마, 난 다시 태어나면 결혼을 절대 안해.”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상대와 다시 결혼하겠느냐는 질문에 반 이상이 아니라고 대답을 합니다. 당신의 대답은?

결혼은 새장과 같아서 밖에 있는 새들은 쓸데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안에 있는 새들은 쓸데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는 말이 있듯이 해도 안 해도 후회하게 됩니다.

때때로 열망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낭만이 있는 결혼!

-도서 출판 누가/신현주 목사,예화 철학) p165-

41주 (수)

찬송 :(새)267장, 201장

■ 마태복음 21:1-22:46, 누가복음 19:28-20:44 : 예루살렘에서

☞ 줄거리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시려고 나귀를 타시고 온유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 바꾸는 자들과 장사하는 자들을 보시고 진노하여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악한 농부의 비유를 통해서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유대인들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메시아를 거부한 예루살렘 성이 장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 날에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 개인들이 주님을 찾아와서 여러 가지 간교한 질문으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질문에 대해서 지혜롭게 대답하셨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메시아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읽으며 묵상하며 : 권위에 대한 논쟁과 두 아들의 비유(마 21:23-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과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위협을 받을 때 당황해 합니다. 적절한 대처를 하기보다는 억지를 부리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권위의 도전을 받으셨습니다. 적대자들로부터 권위의 도전을 받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첫째로 질문공세로 대처하셨습니다 .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적대자들이 나아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자기들이 권세를 준 일이 없는데 무슨 권세로 사역을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당시 사회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자들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권세에 대한 논쟁을 일으켜 예수님의 사역을 중지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역으로 공세적인 질문을 하심으로 효과적으로 대처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에 대한 그들의 의중을 묻는 예수님의 질문공세는 오히려 적대자들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지도자들은 영적인 무지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이시며 권세가 있으신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여유 있게 대처하시며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자연스럽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으시지 않으셨다면 어찌 이렇게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비록 직접 자기 권세의 출처를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의연중 하나님이 권세의 출처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혜 있고 용기 있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둘째로 적절한 비유로 깨우치셨습니다. 질문공세를 통해서 적대자들을 제압하신 주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이들을 깨우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이들의 불신과 완악함, 형식주의와 불순종을 지적하셨습니다. 맏아들과 같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해놓고 실제적으로는 불순종했습니다. 지극히 종교적이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잘못된 메시아니즘에 젖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현실의 삶에서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다. 권력과 돈과 명예와의 결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인한 특권의식이 이들의 영적인 생명을 갉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같았던 당시의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믿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죄인 취급을 받으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믿음이 있어 하나님의 계시를 영접하여 영생을 누렸던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적절한 비유에도 회개치 않고 오히려 주님을 더 대적했습니다(45).

-기독 대학인회,ESF/「일용할 양식 ,말씀 묵상」,2004,07,28-

살며 생각하며 : 하나님의 처방전

방글라데시의 회교도들은 하루에 일곱 번 머리를 숙였다가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고 절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참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한심한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해야 자기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처방전은 하나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 외의 다른 조건들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감사하고 싶은 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너무 쉽게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저 믿으면 구원받는다니, 얼마나 기막힌 선물입니까?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쉬우니까 오히려 의심하고 안 받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합니까? 어려우면 어렵다고 안 하고, 쉬우면 쉽다고 안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구원받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시면 하나님 곁으로 오겠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마디로 속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의 길을 감사해야 합니다. -옥한음 목사/「전도 프리칭」-

정리하며 확신하며 : 거짓 교사가 성도를 유혹하는 방식(벧후2:1-22)

 

성도를 유혹하는 방식

참 고 성 경 구 절

1

성도와 접촉하는 중에 믿음의 약한 부분을 파악함

창 3: 1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을 불어넣음

창 3: 1

3

의심하는 성도를 거짓 교리로써 혼돈 시킴

창 3: 4, 5; 벧후 2: 1

4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비방함

벧후 3: 3, 4

5

여러 이적과 기사로 자신을 따르게 함

신 13: 1-3; 살후 2: 9,10

6

진리에서 떠나 자신의 헛된 사설을 따르게 함

딤후 4: 3,4

7

종국에는 자신과 함께 멸망에 이르게 함

벧후 2:20-22

성서교재 간행사/⌜그랜드종합 성경주석⌟ No16 p453

41주 (목)

찬송 :(새)144장, 144장

■ 마태복음 26:6-13, 마가복음 14:3-9,

요한복음 12:1-11 : 베다니에서 -향유를 부은 마리아

☞ 줄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6일 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곳이었습니다. 그때에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사로는 주님과 함께 앉아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마리아가 매우 귀하고 값진 향유인 나드 한 근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주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가룟 유다는 그녀가 값비싼 향유를 팔아서 이웃을 돕는데 쓰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고 말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행한 그녀의 헌신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곧 죽게 될 자기 몸을 장사하기 위해서 이 일을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든지, 이 여자가 오늘 했던 일도 이야기하여 그 일을 기념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읽으며 묵상하며 : 진정한 헌신(요 12: 1-11)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12:3)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예수님께 바친 아름다운 마리아의 모습이 나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기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념이 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어떤 것입니까?

진정한 헌신은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나옵니다.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잔치였습니다. 마리아는 조용히 예수님께 다가와 지극히 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 향유는 그녀가 고이 간직했던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처녀들은 향유를 혼수 감으로 모았다고 합니다. 시가로 300데나리온, 즉 일 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의 귀중품입니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러한 마리아의 헌신을 낭비로 여겼지만, 마리아는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무엇으로든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고, 주님을 위해 귀한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헌신은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출발합니다. 받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때 자연스럽게 헌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사로처럼 죽을 목숨을 건짐 받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알면 주님께 진정한 헌신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 가장 가난하고 비천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마리아가 이런 사실을 다 알고 향유를 부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녀의 진정한 헌신을 기쁨으로 받으시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행동으로 승화시켜 받으셨습니다. 또한 유다의 질책을 가로막고 마리아를 변호하시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 대한 진정한 헌신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칭찬과 상을 받는 일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많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가지고 나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붙잡으려고 애쓰는 명예와 권세와 부와 지식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가지고 갈수 있는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주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드린 삶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허무한 세상에서 주님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소유를 드릴 때 그것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진정한 헌신을 드리는 주의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칭찬과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헌신을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독 대학인회,ESF/「일용할 양식 ,말씀 묵상」2006, 06, 05-

살며 생각하며 : 자신을 노예로 판 소녀

우간다의 한 교회에서 교회 건축을 위하여 교인들이 헌금과 헌물을 하였습니다. 이때 한 작은 소녀도 초라한 옷 속에서 지갑을 꺼내어 금과 은을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본 선교사가 그것을 훔친 것으로 오해를 하고,

“너, 이것들을 어디에서 가져왔니? 어린 것이 이런 짓을 하면 안 돼, 주인에게 돌려주어야한다”하며 꾸짖었습니다.

소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이것은 전부 내 것이에요”했으나 “그럴 리가 없어, 넌 그러기에는 너무 가난하잖아!”하며 선교사가 다시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헌금하게 된 경위를 이야기 하자 모두들 숙연해졌습니다.

“나는 교회 건축할 헌금을 위해서 나 자신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원래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思考)밖의 일들을 이해 못하며 이미 답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교사가 소녀의 진심을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오해와 억측, 소리침으로 스스로 자신을 부끄럽게 한 이후입니다.

주님의 교회 건축을 위하여 스스로를 노예로 판 소녀는 어떤 선교사나 신학자나 전도자보다 위대한 헌신을 했습니다.

작은 드림조차 자랑하고픈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도서 출판 누가/신현주 목사,예화 철학) p256-

정리하며 확신하며 :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의 신앙 특징

 

향유를 부은 여인의 신앙 특징

참 고 성 경 귀 절

1

오직 예수를 만나는 데 열심인 신앙

눅 7:37; 요12: 2

2

예수를 기름부음 받은 자로 고백한 신앙

눅 7:38:

3

자신의 죄를 애통해 하고 진실로 회개한 신앙

눅 7:38

4

주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춘 신앙

눅 7:38,45 요12: 3

5

자신의 소중한 것마저 아낌없이 바친 신앙

눅 7:38; 요12: 3

6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여인

눅 7:38,47; 요12: 3

7

죄로부터 구원받아 평안을 얻은 신앙

눅 7:48,50

성서교재 간행사/⌜그랜드종합 성경주석⌟ 13권, p178

41주 (금)

찬송 :(새)542장, 340장

■ 마가복음 11:1-12:37 예루살렘에서의 충돌

☞ 줄거리

마가는 주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 일행은 예루살렘에서의 첫 날 밤을 성 밖에서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에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아무 것도 드시지 않아서 매우 시장하셨습니다. 주님은 먼 곳에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열매를 얻으려고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는 아무 열매도 맺혀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열매도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셨으며 그 나무는 즉시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성전에 가셔서 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모든 생활비를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그녀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액수보다 그것을 드리는 마음을 보십니다.

읽으며 묵상하며 : 예수님의 권세에 관한 논쟁 (막 11:20-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11:22-23)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기도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에만 관심이 있고 그 참뜻을 모르는 제자들에게 실망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지 못하고 그저 기적에만 놀라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능력 있는 기도의 비결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23), 두 번째로 확실한 소망이 있어야 하고(24), 셋째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25)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모든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오늘 나의 문제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와 “무슨 권세로 성전을 어지럽혔으며 누가 이런 일을 할 권세를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러한 질문 속에는 일종의 함정이 숨어 있었는데,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씌울 작정이었고, 만약 그렇지 않고 예수님께서 스스로의 권세로 그렇게 했다고 하면 산헤드린 권위를 무시한 광신자로 몰아 세워 처벌할 작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신 채, 오히려 세례 요한의 권세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들에게 반문하심으로써 간단히 음모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직면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 없었고 단지 그들이 확보한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도 혹시 주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는 없습니까?

-학생 신앙운동, SFC/「 날마다 주님과 함께, 본문해설」,2002. 07. 11-

살며 생각하며 : 나는 예수님을 위해 닦고 있다.

소피는 뉴욕시의 대형 건물에서 계단을 청소하는 여자입니다. 어느 날 그녀가 계단을 문지르며 닦고 있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소피,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알고 있는데.”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 나는 왕 되신 주님의 자녀입니다.”

“글쎄, 그렇다면 당신이 왕의 자녀이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공주로 생각하리라고 당신은 믿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고말고요.”

소피의 눈에 광채가 빛났습니다.

“그래,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이고, 당신을 왕의 자녀, 공주라고 한다면 당신 생각에 뉴욕시에서 이렇게 더러운 계단을 문지르고 있는 당신의 처지는 수준 이하라고 보이지 않소?”

누구도 소피의 기를 꺾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부끄러울 것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이 계단을 닦고 있는 것은 사장인 브라운씨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는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닦고 있답니다. -성서 연구사/「기독교 문장 대백화사전, 22권」p521 -

41주 (토)

찬송:(새)333장, 381장/ (새)342장, 395장 ◇ 이번 주 읽은 성경 요약 및 못 읽은 부분 읽고 한 주간 생활 묵상하며 가정 예배드리기

◈ 주제 : 갑절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욥 342: 7-17)

말씀묵상 : 욥이 받은 갑절의 축복(욥42: 7-1 7)

하나님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순종하는 욥에게 갑절의 축복을 주십니다. 욥을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의로운 자는 끝내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엘리바스를 책망하시면서 세 친구보다 욥이 옳았다고 인정해주십니다. 욥은 자신이 고난당하는 이유를 알지 못해서 답답하고 힘들어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거나 왜곡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그의 친구들은 인과응보 논리만을 고집하면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크게 왜곡시키고 욥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판단을 해주신 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끝내 인정을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항상 겸손하고 의로운 편에 설 것을 결심해야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욥의 중보 제사를 통하여 친구들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자신을 친히 화목제물로 드려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예표로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이웃을 향해 먼저 용서를 베풀고 중보자로서 화해를 이루는 진실된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회복과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욥은 이제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받습니다. 욥의 모든 고난은 끝이 났고 그의 재산은 갑절로 회복되었습니다(10절). 그를 비난하고 멀리했던 친지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11절). 자녀를 회복시켜 주셔서 전국에서 비교할 자가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뛰어나게 축복해주셨습니다(12~15절). 또한 그는 장수의 축복을 누립니다(16~17절). 밤 같은 과거의 모든 환난은 떠나가고 딸들의 아름다움과 같은 밝은 회복과 축복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욥의 회복과 갑절의 축복은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누리게 될 영원한 축복을 예표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뜻이 재앙이 아닌 축복과 소망임을 가르쳐줍니다. 회복과 축복은 절대적이고 의로우시며 주권적 섭리 자이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축복과 소망의 하나님을 기대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이며, 불행을 예상하는 것도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욥처럼 사랑의 하나님을 굳게 붙잡음으로 고난 속에서도 더욱 성숙해지며, 회복과 축복을 받는 성도님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 ,말씀 묵상」기독 대학인회,ESF- 2007. 11. 4

살며 : 생각하며 : 살아있다는 게 축복입니다

"제 인생은 축생(畜生)의 삶과 다를 바 없죠. 제 손으로 밥 한 술 먹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누워서라도 해가 뜨고 지는 걸 볼 수 있으니 살아있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 전 교통사고로 경추 4·5번 척수가 손상된 황원교(50) 시인의 말입니다. 그는 어깨 아래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는 오랜 재활 치료 끝에 어깨를 들썩일 수 있게 됐지만 팔의 감각을 느낄 수도, 손목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4남매의 맏이로 집안을 이끌어 왔지만 1989년 교통사고는 그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매제(妹弟)가 모는 차를 타고 가다 차가 개울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당시 그는 동아생명에 다녔고 결혼을 1주일 앞둔 때였습니다. 3년을 병원중환자실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병원 콘크리트 바닥에 자리를 깔고 숙식하며 아들에게 밥을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밤낮없이 간호하던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갔습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사람을 잡을 수 없어서"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도 떠나보냈습니다.

절망 중에 그는 문학을 붙들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시를 쓰게 됐습니다. 그대로 있으면 숨 쉬는 시체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위해 대나무 젓가락에 붕대를 감아서 입에 물고 자판을 눌려 시를 썼습니다. 입에 힘을 주니 목에 쥐가 나고 턱이 아파 밥도 제대로 씹기 힘들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익숙해져 A4 용지 한 장 치는 데 40분 정도 걸립니다.”

다행이도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운명처럼 들어선 사람이 아내 유 씨입니다. 1995년 봄에 자원봉사자로 유 씨가 황 씨의 집을 찾았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컴퓨터를 가르치려 꼬박꼬박 찾아오는 유 씨에게 황씨는 마음을 담은 쪽지를 건넸습니다.

'너는 한 그루 나무처럼 내게 왔다/ 피울음 절은 영육의 나날을 그늘 지우며/ 먼 훗날/ 어두운 무덤 속에서도/ 함께 잠들고 싶은/ 나의 반 토막.'

남다른 사랑을 이어간 지 7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유씨는 "남편이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누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대단해 보여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유씨가 돈을 벌려 직장에 나간 시간 동안 아버지가 아들의 곁을 지킵니다. 욕창을 막기 위해 2시간마다 한 번씩 아들의 자세를 바꿔 주고 물 컵을 들어 아들의 입에 갖다 대어 주고 비닐 백에 든 아들의 소변을 병에 담아 화장실에 갖다 버리는 것이 아버지 몫입니다. 185㎝에 75㎏인 황씨를 컴퓨터 앞에 앉혀주는 일은 매일 해야 할 일 중 아주 큰일입니다. 1996년 그는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2000년엔 계간지‘문학마을’에서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최근 황 시인은 산문집 '굼벵이의 노래'를 펴냈습니다. 마우스 스틱을 입에 물고 자판을 눌러 토해낸 '생(生)의 찬가'라 할 것입니다. 금년 말쯤엔 소설을 한 편 내어 놓을 계획을 세웠답니다. 또 기나긴 시간 그의 입은 자판을 콕콕 눌러 한 장 한 장 작품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시 33:3]

정충영 교수(경북대학교) 남산편지 884호 2009.01.17

돌아보며 다짐하 : 관계가 일보다 중요하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일보다는 인간관계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이야 나 혼자서 열심히 하면 성과가 보이지만, 인간관계는 나 혼자의 노력만으로는 쉽게 개선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관계가 일보다 중요합니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상사나 동료나 부하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함께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관계도 실력입니다. 일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좋은 사람이 진정한 실력자라는 뜻입니다.

인간관계를 개선하시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말을 건네 보세요. 인사하고 말을 건네는 것은 결코 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인 '친절'(kindness, 우리말 성경에는 '자비'라고 번역되었음)입니다.(갈 5:22)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먼저 인사하는 것이 처음에는 좀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시도하고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일을 잘 하려면 노력해야 하듯, 인간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서도 분명히 노력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에서 노력한 만큼 성과가 있듯, 인간관계도 노력한 만큼 그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인간관계에만 해당하는 원칙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기도보다 중요합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지 않으면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관계가 일(기도)보다 중요합니다.

-‘뜻과 의미가 있는 글‘에서-(정승옥 목사)

오늘의 기도 :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 저로 하여금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가르쳐 주십시오.

저의 마음에 어두움을 밝힘으로 말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고난이 위로와 은혜로 다가올 때 침묵하게 하소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시사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여 주시어 사도가 말한 그 말씀들을 외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저의 삶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