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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진) 敎會論 5

에반젤(복음) 2020. 2. 25. 13:13



 (김균진) 敎會論 5 


  5. 사도계승과 교회 제도의 문제
A. 사도계승의 의미와 문제점 "사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전통적인 입장은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변화는 있으나 고수되고 있는 것은 "사목적 내지 지배체제적 사제직"이라는 사도계승의 입장이다. 사도계승은 마 16:18-19을 기초로 한 신학적 입장으로 전통적 교회관의 본질이다. 이것은 주교직의 사도직 연장과 주교들의 법적 정당성과 존립 근거이며 평신도와의 구분점이고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교회의 모든 권한의 승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주교들의 지배체제를 뜻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의 계승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사도계승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1) 부활의 주님이 가지신 사건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이며 목격자인 제자들의 존재는 이후에 오는 주교들과 사제들과의 분명한 구분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포의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승될 수 있으나 목격자적 존재는 계승될 수 없다. 사도들이 죽은 다음에 남은 것은 사도직이 아니라 부활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명이다. 2) 제자들의 권한을 승계 받았다고 하는 주교들이 사도들에 의하여 직접 세워진 사도들의 후계자들이었다는 것은 가상에 불과하다. 3) 주교 서품식에서 안수함으로 성령이 자동으로 전이된다는 사고는 성령의 오심을 인간이 결정하거나 강요하는 행위로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전통적인 사도계승은 불가능하다. 복음의 진리는 머리에 손을 얻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의 물건처럼 보장되거나 전수될 수는 없는 것이다. B. 사도계승의 의도와 새로운 해석 우리는 사도계승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도계승은 교회의 사도성을 주장하고자하는 것이고 사도적 전통을 지키고자 한다. 또한 사도들과 교회의 사귐과 연속성을 말하고자 한다. 사도계승은 교회의 정통성을 말하고 교회의 내적, 우주적 통일성을 지키고자한다. 우리는 사도계승의 숨은 동기에는 동의 할 수 있으나 사도계승의 방법에는 동의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사도계승은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르게 선포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도들의 뒤를 따름으로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한 사도들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계승은 또한 사도들이 물려 준 성례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도계승은 단지 주교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세우는 공동체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참 사도계승은 단순히 교회의 여갓적 삶과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 C. 개신교의 교회관과 교회 제도의 갈등 제도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며 개인의 삶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다. 이러한 제도는 개신교의 기본 교회관과 상응하지 않는다. 개신교의 교회관은 교회를 그 본질에 있어서 제도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성도들의 사귐 내지 공동체로 파악한다. 그것은 교직자가 주체가 되는 제도적 기구나 제도가 아니라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요, "친구들의 사귐"이며 "식탁 공동체"이다. 소위 "사도계승"은 교직자에게 제한되지 않고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수행된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하나의 객관적 제도와 기구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칭하여 서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도의 사귐으로서의 교회"와 " 제도로서의 교회"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D. 근대에 있어 개인과 제도의 분열 전통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대표적인 제도였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에 급격히 권위는 약화되었다. 인간이 자기의 주체적 존재를 의식하게 되자, 제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적 제도는 개인의 자유의 실현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었다. 헤겔은 근대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러한 문제를 간파하고 개인과 사회적 제도의 중재를 시도하였다. 그는 사회의 구체적 현실이 되기 위해서 개인의 주체적 자유는 사회적 삶의 객관적 형태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개인이 사회제도에 대하여 자기를 개방하고 사회적 제도는 개인에게 창조적 활동 영역을 열어 줄 때, 개인과 제도는 중재될 수 있다는 것이다. E. 제도의 문제에 대한 최근의 토의 엘런에 의하면 인간의 결핍의 존재이다.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불확실성을 느낀다 그러므로 제도는 이러한 인간의 행동에 대하여 방향과 확실성을 부여함으로 그의 짐을 덜어 주는 기능을 가진다. 개인은 이 제도를 따름으로서 그 자신의 규정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완전히 자신을 희생할 만큼 가치 있는 사회적 제도가 있는지, 제도에 대하여 자기를 완전히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에 대하여는 게엘런은 회의적이다. 쉘스키는 근대사회의 제도들은 개인의 욕구에 대하여 제도적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있고 발전시킬 수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루만은 오늘날 사회적 제반 관계들에 있어서 모든 문제들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확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의 공동생활을 위하여 이것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아도르노 등 프랑크프르트 학파는 제도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제도는 억압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벨거와 룩크만은 개인과 사회가 중재되는 단계를 3단계로 보았다. 1. 외화 내지 소외의 단계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의 삶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의 자기 드러냄은 사회적 삶의 형식을 만들고 제도화 현상을 일으킨다. 2. 이 제도들의 세월을 지난 전승을 통해 객체화가 일어난다. 3. 개인들은 제반 제도로 구성된 그들의 삶의 세계와 사회적 현실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그들 자신과 동일화시키는 내화의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F. 교회 제도의 정당성 오늘날 교회의 제도가 제도로서 그 필요성을 토의하게 되는 이유는 교회도 엄연한 제도이고 오늘날 신학이 교회를 교직기구가 아닌 공동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예수가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는 종래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제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의미와 타당성 내지 정당성은 과연 무엇일까 ? 1) 교회의 궁극적인 근거는 소위 교회를 세우라는 예수의 명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뒤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제도가 아니다. 성도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의 삶을 따르며 이를 통하여 예수에게 근거되어 있다는 사실을 오늘의 사회 속에서 신빙성 있게 제시하는 한에서 하나의 제도로 존립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진다. 2)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성령 가운데 일어나는 예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있다. 교회가 제도로서 존재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즉 교회의 제도는 예수와 함께 시작한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하는 한에서 존립의 의미와 정당성을 가진다. 3) 교회는 개인과 사회적 체계들의 불완전성과 잠정성을 드러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그들을 개방하는 한에서 존속할 의미와 타당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개인과 사회에 대하여 증언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워 나가는 것이 교회의 제도와 모든 구조를 결정해야 한다. 4) 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 안에는 자유와 자발적인 섬김이 있다. 이 공동체가 반드시 제도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제도는 공동체의 자유와 자발적 봉사와 섬김을 가능케 하는 틀과 기반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즉 봉사 기관으로서 교회의 제도는 정당성을 가진다. G. 교직의 필요성 교회제도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교직제도 곧 공동체의 인도와 치리를 전문 직업으로 하는 교직자 제도이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의 과제와 사명을 책임적으로 수행해야 할 전문인력을 필요로 한다. 교직 내지 교직기구가 필요한 몇 가지 이유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1)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순수히 지켜 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선포하기 위하여 교직이 필요하다. 2) 공동체는 예배와 성례전의 효과적인 집행, 성도들의 친교, 교회교육, 교회행정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선교적 봉사활동을 위하여 오늘날 전문적인 지식과 훈련을 쌓은 교직자를 필요로 한다. 3) 교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신학적으로 바르게 지도함으로써 교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며, 이단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교직자가 필요하다. 4) 오늘날 교회가 담당하여야 할 과제는 과거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심각하며 범 세계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연구하고 이 문제들에 대하여 범교회적, 또 범 세계적으로 대처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문직, 곧 교직이 필요하다. H. 교직자와 교회 공동체의 관계 우리는 교직자와 평신도가 서로 권위 다툼을 하는 실정에서 우리는 평신도, 교직과 교회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가 ? 1) 공동체의 대리자로서의 교직자라는 의미는 교회공동체의 위임을 통해서 있게 된 봉사직임을 의미한다. 목사는 봉사를 의미하는 라틴어 MINISTERIUM에서 유래한다. 그는 공동체를 위하여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 부터 세워진 것이다. 공동체가 먼저냐 교직이 먼저냐는 양자가 동시에 함께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생성되는 교직은 분명히 공동체의 부름과 위탁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교직자를 부르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공동체를 통해서" 집행된다. 2)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직자의 권위는 교직이 공동체의 부름과 위임을 통하여 세워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은혜를 줄 수 없다. 은혜는 하나님만이 주신다. 그러므로 교직자는 자기를 단순히 공동체를 통하여 불리운 존재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를 교직자로 부르시고 세운 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다. 그는 특별한 자가 아니나 그는 특별한 '카리스마' 곧 세례 받은 자들이 갖지 못하며 오직 자기만이 가진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가 원하는 것을 반목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을 선포할 수 도 있는 권한을 가진다. 교직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온 교직은 공동체 앞에 서게 되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일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공동체의 일꾼인 동시에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이다. 평신도가 받은 카리스마와 교직자가 받은 카리스마가 어느 것이 높고 어느 것이 낮다고 말할 수 없다. 카리스마는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직자의 카리스마적 봉사는 공동체의 특별한 부름과 위탁에 근거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자유로운 카리스마적 봉사들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다. 이 권위는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건처럼 교직자가 소유할 수 없고 안수로 건내 줄 수있는 것도 아니다. 교직자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 가운데서 "예수의 일"을 수행함으로서 언제나 새롭게 권위를 증명해야 한다. 3) 결론적으로 교직과 공동체의 관계를 우리는 상호의존적 관계요 협동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후버 교수는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을 통하여 사람을 만나야 할"과제를 위하여 공동체 안에는 특별한 직분 곧 교직이 존재한다. 그러나 교직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사명 곧 "복음의 증인이어야 할 사명과 모순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이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한다." 교직 내지 교직기구는 그 외적 형태에 있어서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 진 것이다 . 그것은 "인간이 책임적으로 형성할 수있는 것이다. " 라고 말했다. I. 교직의 본질 오늘날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 교회의 많은 신학자들도 교직의 본질은 봉사 혹은 섬김에 있다고 말한다. 교직은 공동체를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만이 머리이다. 그 밖의 모든 지체들은 모두 평등하다. 교직은 섬김을 받음에 있지 않고 섬기는데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에 있다. 이것은 leitourgia라는 단어와 diakonia라는 의무와 섬김, 봉사를 나타내는 단어로 성서에서 확정되어진다. 교직의 본질은 섬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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