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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진) 敎會論 8

에반젤(복음) 2020. 2. 25. 13:07



(김균진) 敎會論 8


8. 關係 속에 있는 교회
세계의 모든 것은 관계 속에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근거가 되었던 예수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실존하였던 사회적 존재였다. 교회는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동시에 메시야적 지평에 있다. A. 이스라엘과 교회 교회와 이스라엘의 문제는 메시야적 희망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메시야적 희망의 종교이다. 그것은 생명은 온 세계 안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메시아즘에 있다. 따라서 교회가 이스라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교회가 구약성서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메시야적 희망을 회복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사실 기독교는 서구의 국가종교로서 반유대주의는 물론 유대인 배척주의에 앞장서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하여 기독교가 침묵하고 구약성서에 대하여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며 반유대주의를 취할 때 이것에 비례하여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희망을 상실하고 서구 사회의 시민종교 내지 문화종교로 전락한 역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고찰해 보면 1) 기독교와 이스라엘은 내적으로 연결성을 갖는다. 최초의 기독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 곧 유대교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특별한 종교현상을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 외에는 이스라엘 종교는 물론 그 사회와 결합되어 있다. 기독교는 자신을 "새 이스라엘",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한다. 2) 기독교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내적 연관성과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적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관계는 예수의 신앙고백 속에 이미 정초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이방인의 공동체로 발전하면서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자기를 분리시켰다. 이 분리는 이스라엘 자신의 적극적인 박해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 고백을 신성모독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후 2세기의 랍비들의 기도문에는 "이단자들과 나사렛파"라고 저주하는 말이 주요 기도문인 "Schmone 'Esre"에 삽입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더욱 심화의 과정을 거쳐서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교황들은 유대인 배척주의를 주장하였다. 십자군 원정은 유대인들을 회교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하고 진행되었다. 이 전통은 루터와 칼빈에게 와서도 이어졌다. 약 1500년동안 기독교와 서구사회는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일관한 것이다.

3)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교회의 적대적 태도는 기독교의 절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의 약속의 성취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의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타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선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태도를 계속적으로 취한다면 양자 사이에는 불화와 갈등만이 있게 되고 이 불화와 갈등은 다시 반유대주의나 유대인에 대한 인종주의를 초래할 수도 있다.

4) 로마서 9-11장은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고전적인 본문이다. 이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동일한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특별한 위치와 사명을 가진 존재로 존속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그 때까지 교회를 자극하는 교회의 동반자로 존속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강요하여서는 안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로 일어났음을 그리고 이 세계가 하나님의 의와 자비에 따라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B. 타종교와 교회 세계는 단일 문화권이 될 정도로 가까워지고 국가의 벽은 무너져가고 있다. 그리고 지구적 위기와 문제들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입장에 서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변화 속에서 기독교와 가톨릭도 타종교에 대한 관계정립을 새롭게 재 편성하고 있다. 예전에 있었던 서구적이고 공격적인 선교정책이 과거의 상처로 남은 것도 이러한 변화를 주는 큰 요인이다. 또한 서구 교회의 약화도 기독교의 타종교와의 대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1) 칼 바르트, 본훼퍼의 종교 비판 :

이러한 추세 속에서 바르트와 본훼퍼의 종교비판은 타종교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바르트의 종교비판을 생각해 보면 바르트는 종교와 계시를 구분한다. 종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에게 도달하며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활동의 총괄개념이며 계시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와 종교,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의 형식을 분명히 구분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종교의 자기 비판과 개혁을 요구하지만 결코 기독교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종교란 종교 일반이 아니라 기독교에 국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비판은 기독교가 그 대상인 것이다. 이 비판은 "종교의 지양"이라고 표현되는데 이때 지양은 폐지라는 의미보다는 고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르트는 그의 방대한 문헌을 통해서 거의 타종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신앙의 영역밖에도 다시 말하여 타종교의 영역에도 진리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속사 안에서도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진리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르트를 철저한 배타주의자로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 혹은 "기독교의 비종교화"라는 본훼퍼의 명제도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2) 칼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 :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이론에 그치지 않고 공산주의의 종교 폐기 정책의 근거로 수용되었다. 그는 종교는 종교의 제반 형식 속에 사회적 소외와 비참이 표현된다고 보고, 그 소외와 비참에 대해 종교는 소극적인 저항, 환상적인 저항을 하며 환상적인 위로를 하는 것으로 소외와 비참을 더욱 더 심화하기 때문에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소외와 비참을 일으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사라지면 종교도 폐기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그의 종교는 세상의 일반종교가 아닌 서구의 기독교를 염두해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크스에게서 교회도 모든 역사적 사회적 형태들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하며 주어진 상황 속에서 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3) 가톨릭 교회와 칼 라너의 입장 :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제2바티칸 공회를 기점으로 배타적 입장에서 다소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전향했다. 누구든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원칙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가능성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학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칼 라너이다. 라너는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은혜로운 구원의 의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용한다고 보며 하나님은 자기 존재와 의지를 모든 인간에게 알려주며 "하나님 자신을 향한 은혜로우며 초자연적인 역동성과 목적성"을 부여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누구든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의 궁극 목적으로 지향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의 역사와 파멸의 역사는 인간이 자유 가운데서 그의 현존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이에 대하여 항거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같은 "보편적이며 익명적인 구원의 역사와 계시의 역사"로부터 "명시적이고 공적인 구원의 역사와 계시의 역사"를 구분한다. 이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궁극적 자기 전달로부터 시작한다. 라너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타종교인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 "잠재적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함으로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화해를 도모하고 타종교인들마저도 기독교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4) 타종교의 타당성

우리는 타종교의 타당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1.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도 인간이 본래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죄성, 타락과 불안, 허무와 고독을 알고 있다. 타종교들도 죽음의 의미와 무의미, 인간의 구원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2.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들도 이 세계가 본래의 상태에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타종교들도 이 세계의 유한성과 허무와 타락과 구원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3. 기독교는 물론 타종교들도 인간과는 다른 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이 아는 신이 참 신이냐 아니냐의 문제점이 있지만 그들도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들도 신의 자비와 은혜, 분노와 심판을 그들 나름대로 알고 있다.

5)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 타 종교의 문제점 : 기독교는 타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시되는 타종교의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 보편적인 공통점을 연구함으로서 각 시대와 각 지역의 종교 속에 궁극적인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고 다른 종교가 그 시대와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체요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에 있어서 궁극적이며 보편적인 구원의 길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종교가 미신이요 이단이라고 그저 정죄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그보다는 기독교 자체에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고 겸손한 자세로 타 종교를 대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독특성을 지키고 유지하면서 타종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자기를 보완하는 일에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더우기 이 대화의 주제는 교리적인 면에서 국한될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세계의 문제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교회 자체에 있지 않다.

교회는 그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자기를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존립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야 하기에 자기를 고착시키지 말고 정체 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교회는 타종교와의 만남과 대화에 있어서 자가확대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되고 오히려 교회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른 종교도 그 목적에 있어서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인류의 행복에 있을 것이다. 이 목적에서 교회와 타종교는 관심이 일치함으로 공동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만남과 대화를 가질 수 있다.

C. 국가와 교회

국가와 기독교를 따로 생각할 수는 없다. 항상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취급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첫째, 교회는 어디까지나 국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요 국가의 국민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안에서 교회와 국가는 서로 관련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복음은 개인의 심령이나 교회의 제한된 영역에서만 실현될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개인의 심령과 교회는 물론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국가와 교회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

1) 중세기까지의 발전 : 신약성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주고 있지 않다.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기 이전까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이론이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381년부터 기독교는 로마의 국가종교 즉 제국종교가 되고 부터는 기독교신앙이 국가종교로 바뀌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결합된 하나의 기독교 왕국이 된 것이다. 이후로 정교합일주의로도 교황정치주의로도 변모하며 시대를 다라 교차하는 형태로 관계되어 왔다.

2) 루터의 두 왕국론과 루터교회 신학자들의 오류 : 중세기 전체가 교회와 국가를 교묘하게 결합 한데 반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구분하는 소위 " 두 왕국론"을 말한다. 이것은 루터가 아우구스틴을 계승한 것인데 갈등과 투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이원론적이 아니라 "논쟁적 구분"이다. 양자는 서로 분리된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두 가지 방편에 불과하다.

루터가 거부한 것은 정치와 종교의 합일주의이며 동시에 성직자들의 신정이다. 루터는 이를 통하여 교회를 국가로부터 해방시키고 국가를 교회로부터 해방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 신학자들의 오해로 교회와 국가는 양자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영역인 것처럼 오해되었다. 즉 하나님은 국가의 현실과 관계없는 소위 종교의 영역에 국한된 존재이고 국가는 하나님 없는 국가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터의 견해를 잘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1. 국가를 국가 되게 하며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을 가진다. 양자가 구분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도록 루터는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이런 의도가 오해되서 양자가 무관심 속에 나누어질 수도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3) 칼빈과 개혁교회의 전통의 입장 : 칼빈도 루터와 같이 국가와 교회를 구분하지만 칼빈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독립된 영역으로 단순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 개혁주의의 이러한 전통은 "바르먼 신학 선언" 제1명제와 제2명제에 잘 나타난다. 이 명제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교회는 그러므로 불의의 동지가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고 그것을 구원해야 한다.

4) 바르트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 : 바르트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속한다. 바르트는 국가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국가에 대해서도 공동의 책임을 지며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의 뒤따름을 실천해야 한다. 이 양자는 그리스도 안에 그들의 공통된 근원을 가지며 하나님의 나라에 그들의 공통된 목적을 가진다.

양자는 하나의 구심점을 가진 두 개의 원과 같다. 교회는 안쪽 원이고 국가는 외적인 자유와 평화, 사회의 인간성을 이룸으로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간접적으로 섬기는 바깥쪽 원이다. 즉 국가는 루터나 루터교회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무질서와 죄를 억누르기 위한 권위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외적이고 지상적이며 잠정적인 방편이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비가 될 수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토대로 보면 교회와 국가는 다음과 같은 관계를 가진다. 1. 교회와 국가는 영역과 형태를 달리한다. 2. 그러나 교회와 국가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다. 두개의 영역은 나누어질 수 없다. 3. 교회는 국가의 과제와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국가를 돕기도 한다. 4. 교회는 국가를 돕는 동시에 국가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행사하기도 한다. 5.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하는 국가는 교회를 돕기도 한다. 6. 이와 동시에 국가는 교회가 국가의 정당한 법질서를 따르도록 요구한다.

D. 현대사회와 교회

오늘날 과학 기술의 세 번째 혁명을 맞이하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노력을 하여야 한다.

1) 교회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

2)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외적인 제도와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無神性에 있다. 1.하나님 없는 인간에게는 죽음을 넘어서는 미래와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2. 하나님 없는 인간은 자기 중심적 욕망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다. 3. 자기 중심적 욕망은 인간을 이웃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만든다.

3) 오늘 한국의 사회에 있어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과제는 한국인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1. 먼저 교회는 지배체제적, 관료주의적 의식을 민주적 의식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2. 교회는 남자, 여자에 대해서 평등한 관계임을 인식해야 한다. 3. 윤회론적, 운명론적 의식도 변화되어야 한다.
4. 교회는 참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
5. 동양인에게는 정신과 물질은 나누고 정신적인 것을 거룩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물질적인 것을 속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의식이 숨어 있다. 이 같은 구분을 바꾸어야 한다.
6. 교회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악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다스리는 세계를 세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4) 현대사회는 이전의 어떠한 시대보다도 경제의 문제가 가장 큰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사회 정의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세계에 있어서 시급한 문제는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이 경제 정의는 공정한 부의 분배와 부의 기존적인 삶 유지를 위한 가난한 자들에게로의 환원이 관건이다. 5)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의한 정치를 고발하고 거부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도록 권고하며 정치적 정의를 요구하여야 한다. 이와 동시에 교회는 모든 인간의 평등과 평등한 권리를 선포하여야 한다. 모든 인간의 평등과 권리가 보장되는 동시에 생명에 대한 경외와 보호와 장려가 실천됨으로써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를 닮게 된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1. 인종주의의 철폐를 요구해야 하며 2. 남자와 여자의 성적 차별을 철폐하도록 촉구해야 하고 3. 장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교회는 앞장서서 일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적", "순복음적" 교회이고자 한다면 영혼 구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총체적인 구원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그의 최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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