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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도의공동체로서의 교회

에반젤(복음) 2020. 2. 25. 12:58



 

      

   4.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전통적인 입장은 교회는 교직자가 있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개신됴의 입장에 의하면 교회는 "성도의 공동체"내지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A.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입장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서로 결합되어 있는 성도들의 사귐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사귐인 동시에 성도들 위에 있고 그들 이전에 세워진 제도적 기구 내지는 교직기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인을 매개하는 매개체이다. 최근의 가톨릭 교회는 "원성례전"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것은 구원을 중재하는 교직 기구로서의 교회가 성도의 사귐보다 앞선다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중재하는 교회의 기능은 1. 성례전을 통하여 수행되며 2. 교리적 가르침을 통해서 수행되고 3. 교인들의 공동체의 삶과 관련된 제반 문제를 조정하며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한계를 명시하는 법적 통치를 통하여 수행된다. 그러므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엄격한 입장을 수정하고 교회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교회의 교직기구는 사도 계승의 표이며 교직기구는 주교, 사제, 복제의 세 계급으로 구성되며 성례전, 사법권, 교리권을 가진다. 교리권에 있어서 가장 큰 힘을 가지는 것은 가톨릭 교회 전체의 공회이다. 교회의 이 모든 권한은 로마주교의 "베드로 직분"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것이 교황무오설이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교회관의 핵심을 포기하지 않으나 몇 가지 면에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다. 첫째, 교회를 단순히 교직자들의 교직기구로 보지 않고 교직자와 평신도와의 사귐으로 구성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 둘째, 지배체제적인 기관으로서 교직은 사람들의 사귐 속에서 사귐을 위한 봉사를 한다고 보고 교황도 전체 주교들과의 사귐 속에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여야한다고 지적한다. 셋째로, 로마로부터 분리한 모든 기독교를 이단으로 보지 않고 그들도 구원에 참여한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B. 개신교의 전통적 입장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 제7장에 기록된 진술에 기초한다 : "교회는 복음이 그 속에서 순수히 설교되며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참된 하나 됨을 위하여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동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가서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루터로부터 유래한다. 칼빈은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내지 "선택된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이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이해에 근거하여 개신교는 교회를 철저히 성도들의 사귐 혹은 공동체로 이해한다. 이 공동체 위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계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신도들을 중재하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말씀, 그리고 복음에 일치하여 베풀어지는 성례전이다. 복음선포와 성례전은 교직자들에 의해서 집행되나 여기서 그들은 주체가 아니라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교직기구는 신적질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적 지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의 교직기구의 개념이나 사도계승을 반대한다. 교직기구는 단순히 교회의 삶의 질서와 통일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봉사기관인 것이다. 그러나 교직기구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는 통일된 것은 아니다. 각 교단마다 차이를 가지고 있다.


 

C.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질서

- 커리스마적 공동체 -

신약성서에서는 단 하나의 완결된 교회의 질서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나타난다. 교회는 각자가 받은 은사에 따라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이 은사는 사적은사와 공적은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최초의 공동체는 이러한 은사들을 받아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교회가 더 확장되면서 사목과 치리의 은사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공동체의 사목과 치리를 담당하는 공적인 칭호 가운데 감독 및 집사의 직분과 장로의 직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직분은 법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다. 직분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은사가 직분의 권위를 세운다. 그러나 성서에서 우리는 지배체제적 감독 제도를 발견할 수 없다. 특별한 계급으로서의 장로 제도도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감독 제도와 장로 제도는 하나로 결합되는 현상이 신약성서에 나타난다. 즉 동일 인물이 장로로도 감독으로도 불리운다. 그러나 교회가 더 제도화되면서 장로 제도는 사라지고 감독 제도가 교회의 유일한 제도로 등장한다. 결국 감독들은 사도들과 거의 동등한 권위를 얻게 된 것이다. 교직자와 평신도의 분리가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다수의 감독들은 단 한 사람의 감독으로 집약되기 시작한다. 이때 주교-장로직-집사의 세 계급으로된 지배체제가 발견된다. 이것이 사도계승을 주장하는 주교직의 승계로 이어진다. 물론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최초의 카리스마적 공동체와 주교를 중심으로한 교직기구로서의 공동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1. 두 공동체는 사도들의 원초적 증언과 원초적 파송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2. 복음에 대한 믿음과 공동체에 속한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사제직에 대한 확신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3. 그들의 봉사를 카리스마적 봉사로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4. 모든 봉사가 모든 신자들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바울의 공동체에서는 1. 어떠한 군주적 감독직도 확정될 수 없다. 2. 어떠한 장로직도 확정될 수 없다. 3. 어떠한 교직자 임직식도 확정될 수 없다. 케제만 교수에 의하면 신약성서는 교직기구로 표현될 수있는 기술적 개념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의하면 여러 가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적 공동체로서 교직자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에클레시아를 섬기는 성령 받은 사람들이 다스린다. 교직자들의 지배체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삶이라는 전체에서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하다.


 

D.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래 교회는 자유로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질서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를 "성도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에서 발견하게 된다. 성도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통하여 근거되기도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제직 혹은 만인 제사직으로부터 근거될 수도 있다. Communio sanctorum이란 개념은 1. 인격적으로 해석되어 "거룩한 사람의 사귐"을 뜻할 수도 있고 2. 성례전적으로 해석되어 "거룩한 사물들의 사귐"을 뜻하기도 한다. 이 두개념은 결합되어 폭 넓게 이해된다. 1. 먼저 인격적 개념으로 온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사귐을 의미하는 동시에 과거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간의 사귐을 의미한다. 2. 성례전적으로 이해되어 성례전 안에 임재하는 그리스도 자신에의 참여를 뜻한다. 이 집단은 폐쇄적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평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또 그것을 확장시키는 공동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라서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의 사귐을 뜻할 뿐만 아니라 예수가 사귐을 가졌던 사람들 곧 힘 없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사귐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E. "형제 자매의 공동체", "친구들의 공동체"

"성도의 공동체" 내지 "성도의 사귐"으로서의 교회는 "형제자매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침구들의 사귐" 내지 "친구들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친구 사이에는 평등과 신뢰와 자유가 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F. 공동체의 새로운 사회형태

교회 속에는 "아무런 지배도 없고 지배체제도 없으며 아무런 지도의 요구도 없고 특권을 가진 직분도 없다." 그것은 "계급 없는 사귐"이다. 이 공동체 안에는 기능상의 차이는 있으나 신분상의 차이는 없다. 모든 사람이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이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종교가 되자 계급화된 것이다. "통일성의 지배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나타나는 공동체의 모습에 어긋난다.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공동체는 최고의 지배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지배체제가 아니라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이다. 우리 나라의 종신직 장로제도도 이 공동체의 모습에 비하면 어긋난 교회의 모습이다. 남자들만 장로, 목사가 되는 것도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어긋난다. 기독교 공동체가 이 사회에 제시해야 할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 기능의 차이는 있지만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없으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질서 안에서 자유와 평등이 있는 "형제 자매의 공동체", "친구들의 공동체", "카리스마적 공동체"는 기독교가 신앙하는 하나님의 "사회적 삼위일체"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G. 기초공동체의 이상

교회를 지배체제로 보지 않고 평등한 공동체로 보는 개신교의 교회관은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초 공동체운동을 통하여 새롭게 실현될 수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기초공동체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이상을 가진다.

1) 기초공동체는 "공동의 삶"을 그 이상으로 가진다. 이 공동체는 교회라고 하는 특별한 공간에 모이지 않고 가정이나 아니면 일반 세속적인 공간에 모여 말씀과 식탁의 사귐을 나눈다.

2) 기초공동체는 물질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이다. 성령은 인간을 소유욕으로부터 해방하여 베푸는 사람으로 자유롭게 해준다. 사랑은 여기서 먼저 실천되고 "공동체로서 실존하는 그리스도"라는 본훼퍼의 명제가 구체적으로 체험된다.

3) 기초공동체는 힘없고 가난한 작은 형제들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있는 공동체이다.

4) 기초공동체는 소유 지향적 공동체가 아니라 봉사 지향적 공동체이다.

5) 기초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소유하는 교회가 아니라 베푸는 교회,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청빈한 교회,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당하는 교회인 것이다. 이 공동체는 세상을 위한 공동체, 타자를 위한 공동체이다.

6) 기초공동체는 비제도적, 비교권적 공동체이다. 평신도의 예배인도와 설교가 있다.

기초공동체도 나름의 문제점과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상은 기존의 교회 속에서 독립성과 자치권이 보장될 때 보다 성공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