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Ⅰ. 들어가는 글
서방의 전통을 최종적으로 성숙하게 표현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시대에 나타난 글 중에서 가장 유능한 것 가운데 하나인 「삼위일체론」의 저작에 자신의 성숙한 시기의 거의 30년을(기원후 400-428년) 바쳤다. 그는 성경을 세밀하게 연구함으로써 이 심원한 삼위일체론을 구상했고, 역시 심원한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자들의 도움을 받지 못햇다는 것을 통해 그의 놀라운 지력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그는 신론에 있어서는 플라톤이나 특히 신플라톤주의에 가까웠기 때문에 신비적 요소를 받아들여서, 이것을 윤리적, 인격적 사유와 결부시켰지만,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는 완전히 서구의 전통에 서 있었다.
이 책은 다른 여러 날짜에 종합한 논의이며, 그가 수락한 진리는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되는 동시에 공동본질적 즉 실체에 있어서 숫자적으로 하나이시라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전체적으로 니케아 신조와 일치하지만, 삼위일체 내의 위격들의 본질이 하나라는 것을 더 역설하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을 명확히 주장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종교 교리중에서 가장 방대한 교리이다. 그것은 신학의 토대이며, 기독교를 캐보면 결국 삼위일체 사상이다. 방대하고 자연히 신비가 되는 이 교리를, 이제 「삼위일체론」을 검토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사상을 이해하고, 우리의 삼위일체 사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또한 이 글의 구성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삼위일체론」제15권에서 자신의 글을 요약한 글과 헤네르의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켈리의「고대기독교교리사」를 인용했음을 밝힌다.
Ⅱ. 삼위일체론에 대해
1.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해설에 있어서 성경을 근거로하여 통일성과 동등성을 밝히고 있다. 그의 해설은 철두철미하게 성서적이지만 성부를 출발점으로 삼는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신적인 본성자체로서 시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책의 목적을 앞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을 통해 그의 논의의 방향을 알 수 있다.
" 삼위일체는 유일 진정한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이시라고 말하며 믿으며 깨닫는 것이 바르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제1권 제2장)
"성자와 성부는 동일한 본질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성부뿐 아니라, 삼위일체가 불사(不死)하신다. 만물이 성부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온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제1권 제6장)
그에게 있어서 본성 혹은 본질이야말로 삼위일체인 것이다. 그는 위격이나 인격의 구별에 대해서도 신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 대해 긍정되는 것은 무엇이거나 세 품격의 각개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긍정된다.
"성자는 성부보다 작으시지 않으며, 성부에게서 나셨다. 이런 말은 그가 동등하시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출생을 알린다." (제2권 제1장)
"....... 성자가 성부보다 작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뜻이다." (제2권 제3장)
"성령이 성부가 영화롭게 하시는 성자를 영화롭게 하시지만, 성부나 성자가 성령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으므로, 성령이 성부나 성자보다 크시다는 생각을 자칫 조심해야 한다." (제2권 제4장)
"성부가 말씀으로 성자를 보내셨다고 하므로, 그 보내는 일은 성부와 그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성부의 말씀은 곧 성자 자신이므로, 성부와 성자에 의해서 성자가 파견되셨다."
(제2권 제5장)
"우리는 또한 성자나 성령뿐 아니라 성부께서도, 그의 뜻에 예속된 어떤 피조물을 수단으로 삼아 구체적인 형태로 죽을 운명인 우리의 감각에 자기를 알리실 수 있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제2권제18장)
그는 제2권의 탐구를 통해 나타나신 분은 주 하나님, 즉 위격을 구별하지 않고 부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셨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는 한 위격이셨는데, 어느 위격이신가 하는 것은 성경기록에 비친 단서에 의해 결정해야 함을 말한다.
"성부 하나님과 말씀과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그 어느 분도 그 존재와 그 본성이 전혀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더군다나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 (제3권 제10장)
그는 제4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파견되신 까닭, 즉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목적을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뵈며 하나님께 밀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종의 형상으로 파견되셨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부보다 작으신 것이 아님을 말하며, 성령의 파견도 같은 이유임을 밝힌다.
"우리는 죄를 통해서 죽음으로 왔고, 그는 의를 통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제물로서 겪으신 것이다." (제4권 제12장)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신 목적은 우리가 믿음으로 깨끗이 되며 들어올림을 받아 변함 없는 진리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제4권18장)
"성부가 낳으시고 성자가 나신 것 같이, 성부가 파견하시고 성자가 파견되셨다. 그러나 낳으신 분과 나신 분이 하나이신 것과 같이,파견하신 분과 파견되신 분이 하나이시다." (제4권 제20장)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존재의 본질에서 세 분이 같은 하나이시다. 거기에는 시간적 운동이나 시간, 공간의 간격없이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 세 분은 함께 영원으로 영원까지 같은 하나이시며, 이를테면 영원 자체이시며, 그 영원에는 진리와 사랑이 없지 않다." (제4권 제21장)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이시며, 피조계에 대해서 한 창조주와 한 주이신 것과 같이, 성령과의 관계에서 한 시초이시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피조계에 대해서 한 창조주와 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한 시초이시다." (제5권 제14장)
2.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신학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으로 공헌한 것은 인간 영혼으로부터 끌어낸 유비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인격으로서의 신을 삼위일체론적 유비로써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어디에나 삼위일체의 '자취'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관념속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적인 신성의 참다운 형상을 찾으려면 속사람 즉 영혼을 찾아야 한다.
"사랑에는 마치 삼위일체의 형적처럼 세 가지 면이 있다......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 이 셋이 있다." (제8권 제10장)
"우리는 아직 하늘 일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말하지 않고, 불충분한 형상이지만 역시 형상인 사람에 대해서 말하겠다.....내가 무엇을 사랑할 때에는, 그에 관련된 것이 셋이다......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 이 셋이 있다......자기를 알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삼위일체의 형상이 있다." (제9권 제2, 3장)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르므로, 그 점에서 삼위일체를 깨닫기 시작하는것 같았다. 즉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받는 대상과사랑, 이 셋이다......지헤와 지헤자체에 대한 지혜의 지식과 지헤 자체에 대한 지헤의 사랑, 이 셋이 삼위일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서도 한 삼위일체를 발견한다." (제15권 제6장)
그는 또한 인간의 자의식을 기억과 지성과 의지라고 하여 삼위일체론의 유비로서 말한다.
"마음 자체와, 마음의 지식이며 말인 지식, 즉 그 자체에 대한 지식 제3자인 사랑 이 셋에는 삼위일체의 일종의 형상이 있으며, 이 셋은 하나이며, 실체이다. 마음은 그 존재의 분량에 따라 자체를 알므로, 그 지식은 마음보다 적지 않다. 또 마음은 자체에 대한 지식의 분량과 자체의 존재의 분량에 따라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그 사랑도 마음보다 적지 않다." (제9권 제12장)
그에게 있어 신은 통일이며, 인격이기 때문에, 밖을 향하는 신의 모든 행위는 언제나 삼위일체 전체의 행위이다. 어느 위격, 어느 인격도 그 자체만으로 행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의 실체는 삼중의 형태를 가진 사랑, 곧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은 자와 사랑하는 힘으로서의 사랑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삼위일체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기억과 이해력(또는 지성)과 의지에서 우리는 능력과 지식과 이용(利用)을 보아야 한다.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상대적·관계적으로는 셋이다." (제10권 제11장)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를 가진 마음은 삼위일체의 한 형상이다." (제10권 제12장)
"기억속에 있는 외부 물체의 형상과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눈에 박히는 그 형상의 형태와 이둘을 결부하는 의지의 목적, 이 셋이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는 외면적 인간에 속한 것임을 우리는 알았다. 그 이유는 외부에서 지각된 물체로부터 마음속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제15권 제3장)
3. 위의 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피조물에서 삼위일체의 형상을 찾아 설명했지만, 제15권에서 그 자신이 자연적인 이성으로 삼위일를 설명하기 어려움을 말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삼위일체들에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를 발견하기는 쉽지않으며, 우리의 이해를 위한 것임을 밝힌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같은 것은 우리의 외면적이며 감각적인 말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며 심적인 말에서 구해야한다. 우리의 말이나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식 사이에는 최대의 차이가 있다." (제15권 제11장)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과 다른 것과 같이, 우리의 지식에서 나는 우리의 언어도 성부의 본질적 존재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 나는 이렇게 성부의 지식, 성부의 지혜에서 난다고 말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식이신 성부에게서, 지혜이신 성부에게로 난다고 해야 한다." (제15권 제13장)
이렇게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의 차이를 말하며, 그는 다만 믿음의 도움으로 삼위일체를 알 수 있다고 하며, 성령은 무슨 까닭에 나시지 않으며, 어떻게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가 하는 문제는 천국에 이르렀을 때에만 이해된다고 고백한다.
"나는 지금까지 말을 많이 했으나 최고 삼위일체의 형언할 수 없으심에 합당한 말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공언하며, 그 분에 대한기이한 지식은 너무도 위대해서 나는 능히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시 139:6) 고백한다." (제15권 제27장)
Ⅲ. 발췌를 마치며
지금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놀라움뿐이다. 그 시대에 어떻게 지금의 기독교사상의 근거가 되는 이런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과, 또한 그 방대함에 형언할 길이 없다. 그 자신도 마지막에 고백했듯이 인간지헤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이 많은 논의를 서술한 것이긴 하지만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논의에 대해 착각에 빠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다. 인간정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는 경우에나 멀고 불완전하다는 표현이 어쩌면 제일 타당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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