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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신학의 삼위일체론적 지평의 재발견

에반젤(복음) 2020. 2. 21. 12:04



동방신학의 삼위일체론적 지평의 재발견 


"오라, 민족들아 !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자 !" 동방신학은 구원론적인 죄용서로부터가 아니라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신인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삼위일체 신비의 계시야말로 동방신학에서 신앙의 모든 신비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신비이다[31] 서방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농축한 것으로가 아니라 논리적, 수학적 난제를 포함한 하나의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으로 흘러 점차적으로 삼위일체론이 의문시된 데 반하여 동방신학과 예배는 줄곧 삼위일체론적 범주들로 채색되어 있다. 서구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은 마치 정통신학을 인정하기 전에 힘겹게 넘어야만 하는 일종의 지적인 허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32] 삼위일체의 신비를 맛보는 것은 권위있는 삼위일체 성화에서 뿐 아니라, 기도와 예배를 통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무엇보다도 예배문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릴찌어다"라는 예배언어는 끊없이 반복된다. 예배의 시작에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부름이 자리잡고 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를 정결케 하소서, 주(主)여, 우리의 죄악을 사하소서, 우리의 통치자여 우리의 범죄를 사하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소서, 거룩하신 주님,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고치소서". 이와 함께 아침예배문서에는 항상 "Triadikon", 곧 삼위일체론을 찬양으로 발전시킨 구절을 반복한다[33]. 동방교회에는 삼위일체론적 송영으로 시작되지 않고 끝나지 않는 기도가 없다. 동방교회의 기도는 또한 언제나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일어남을 강하게 부각시킨다[34]. 이런 기도와 송영과 예배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 동방교회는 서방신학의 그리스도일원론(Christomonismus)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35].

서방신학에서처럼 동방신학에서는 성부의 진노와 성자의 사랑이 분열된 채 대립하지 않는다.[36]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성부의 사랑은 성자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랑이며, 성자의 사랑은 십자가에 못박힌 사랑이며, 성령의 사랑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동방신학은 고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서구신학의 자기모순을 반성할 수 있는 신학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구신학에서처럼 철학적, 일반적 유신론 혹은 유일신론의 일반범주의 영향 아래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원론적, 기독론중심주의적으로만 제한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고도 철저하게 성경계시의 경륜에 근거하여 성령론적 차원과 삼위일체론적 차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사건으로 파악한 것이다. 동방신학과 같이 고난받지 않는 신의 공의로운 세계통치라는 아프리오리한 일반종교적 범주에서 자유로와지고 삼위일체론적으로 스스로 고난받으시는 성경계시의 경륜의 아포스테리오리에 충실해질때만이 세계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의 답변을 듣게 된다.

동방신학은 세 위대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에 의지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됨을 구체적, 체험적, 인격적으로 기초시킨다: Christos Yannaras에 의하면 동방교회는 존재에 대한 인격의 우위를 강조한다: " 하나님께 대해 말할 때 동방교회는 언제나 보다 구체적인 것,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인격적 관계의 하나님을 말한다"[37]. Christos Yannaras는 서구신학이 신앙과 삶을 단절시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오지로 추방했다고 비판한다.[38] 이에 반해 동방신학은 체험의 신학을 강조한다. Karl Chistian Felmy에 의하면 동방신학에서 이 체험은 경건주의에서처럼 회심이라는 개인적 신앙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 예배, 세례와 성찬, 신비, 기도, 수도를 통한 체험, 곧 교회성이라 할 수 있다[39].

경건주의 신학과 경건이 개인적 구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관계로부터 시작되는데 반하여 동방신학의 체험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신학 아래서 구체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으로부터 시작한다.[40] 동방신학은 끊임없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송영과 예배, 기도와 찬양의 흐름 속에서 전개된다. Yannaras는 마틴 하이데거를 인용하면서 서방신학적인 사변적 신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자기 원인(causa sui)으로서의 신은 기도할 수도 예배드릴 수도 없는 신이다.


Causa sui라는 신앞에서는 우리는 경외함으로 무릎을 꿇을 수도 없고 음악으로 찬양할 수도 춤출 수도 없는 것이다"[41]. 이에 반해 동방교부들과 이를 계승하는 동방신학은 철저하게 인격적인 하나님인식을 가르쳐왔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히브리어 와 같이 사랑의 관계이다.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로 보지 않고 비인격적, 기계적으로 주체와 객체, 원인과 작용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세계로부터 단절, 추방되어지고 세계는 독립하게 된다. 사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만큼 성경적, 경륜적 삼위일체론적 신학전통에 충실하지 못하였고 자연신학적, 일반적 유신론, 유일신론적 범주와의 불운한 조우를 하게 되었다.[42] 동방신학에 있어서 성경계시에 드러난 세 위격은 케류그마의 대상으로서 신학적 사유와 도그마의 대상인 세 위격의 통일성(Monarchie)보다 선행한다.

서방신학은 비인격적, 사변적, 철학적, 일반적 하나님/세계의 관계를 낳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서방신학은 동방신학의 삼위일체론적 세계관을 통해 도전을 받고 반성되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로 정립되지 않은 지성주의적인 합리적 추론으로 도출된 하나님/세계의 관계는 주지주의적인 객관화와 효용성과 연루된 합목적성의 노예가 되고 만다. 서구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인격적인 체험과 만남의 신앙을 삶으로부터 추방하게 되고 철학적 개념 혹은 상징적 표상으로 환원하게 됨으로 세속화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동방신학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다.[43] 러시아 종교철학의 세 가지 특징, 곧 기독교적 특징, 인격주의적 특징, 공동체적 특징은 분명 물질주의적, 개인주의적, 비기독교화되어 있는 서구정신과 철학에 큰 도전과 날카로운 비판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러시아 종교철학은 서구 철학전체에 하나의 충분하가도 필수적인 대안이 되는 것이다.[44]우리는 서구의 탈기독교화, 세속화 과정은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적 색채를 퇴색시킨 非삼위일체론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대 서구신학의 당면한 반기독교적, 탈기독교적 세속화의 위기는 바로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재발견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하며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현대신학이 전통적인 유일신론을 반성하고 새롭게 철저히 구원역사적, 구원경륜적인 관점에서의 삼위일체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은 교회연합운동을 통해서 동방신학과 접촉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동방신학의 성령론적, 삼위일체론적, 예전적, 신비적, 송영적 색채에 서방신학은 깊이 도전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동방신학의 성령론적 관점은 하나의 실마리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몰트만의 경우 바로 동방신학적 전통에 대한 수용으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통한 생태학적 답변을 시도했던 것이 그 예이다. 이미 칼빈도 동방신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동방교회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부틴은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가지고 있는 동방교회와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통상 동방교회적인 삼위일체론적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내용들과의 칼빈의 이런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칼빈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동방교회적 혹은 헬라적 접근법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칼빈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지평의 한계로 볼 때 특히 그러하다. Perichoresis(circumincessio)교리도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의 다른 부분둘과 같이 칼빈 이전 시대에 이미 서방 전통의 삼위일체론의 다양한 형식 안으로 수용되었었다.


그러나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새롭게 준비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과 다른 동방교회 신학자들의 본문들을 접근할 수 있었다. 16세기의 반니케아적 논쟁으로 인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이해의 몇몇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칼빈에 대한 동방신학자들에 영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핵심적인 부분에서 동방교회 전통과 평행된 강조를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형성을 지배했던 귀납법적인 성경주석법이었다. 물론 이런 유사성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기존의 서방신학 전통에 대해 현격하게 독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확실하다"[45](Butin,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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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hilip Walker Butin, Revelation, Redemption, and Response-Calvi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 49. 이런 점에서 칼빈은 동방교회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동방교회적"인 삼위일체론적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내용들과의 칼빈의 이런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칼빈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동방교회적 혹은 헬라적 접근법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칼빈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지평의 한계로 볼 때 특히 그러하다. <Perichoresis, circumincessio>교리는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의 다른 부분둘과 같이 칼빈 이전 시대에 이미 서방 전통의 삼위일체론의 다양한 형식 안으로 수용되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새롭게 준비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과 다른 동방교회 신학자들의 본문들을 접근할 수 있었다. 16세기의 반니케아적 논쟁으로 인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이해의 몇몇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칼빈에 대한 동방신학자들에 영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핵심적인 부분에서 동방교회 전통과 평행된 강조를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형성을 지배했던 귀납법적인 성경주석법이었다. 물론 이런 유사성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기존의 서방신학 전통에 대(對)해 현격하게 독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확실하다"(ibid., p, 45).
[2] Butin, ibid., p. 41
[3] Ibid., p. 48
[4] Ibid., p.48에서 간접인용
[5] Ibid., p. 42
[6] Ibid., p. 26
[7] Ibid., p. 6
[8]. Butin, 1. Reassessing Calvin's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중에서 Calvin's View: Dialectical or Trinitarian ?을 참고하라.
[9]. Ibid., p. 39. Butin은 상당히 자세하게 칼빈에 대한 새로운 교회사적 평가논의를 통해 이 명제를 논증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Calvin's View : Dialectical or Trinitarian ? (pp. 15-25)를 참고하라. 물론 우리는 Moltmann의 입장을 따라서 하나님/인간의 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자연(창조)라는 보다 넓은 지평까지도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관계성으로 볼 것을 요청한다.
[10]. Jan Koopmans(Das Altkirchliche Dogma in der Reformation), Werner Krusche(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은 이에 대한 고전적인 저술들이다(ibid., p. 19에서 간접인용).
[11]. 이 오해는 I. John Hesselink, on Being Reformed -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Common Misunderstandings, Servant Books, Ann Arbor, Michigan, 1983에 나오는 오해(7)과 오해(8)이다.

[12] Torrance, ibid., p. 4
[13] Moltmann, a.a.O., S. 159
[14] Gunton, ibid.,p.124
[15] Moltmann, a.a.O., S. 167

[16]. 방법론적 과격성이라 함은 몰트만의 신학적 관심에 원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만 지나친 극단화를 염려하는 입장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H. Berkhof, W. Pannenberg보다 더 나아가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님 자기 자신 안의 역사'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개현에 있고 하나님의 자기역사는 모든 세계역사의 핵이며 역사의 역사(Geschichte der Geschichte)이다. 죄와 죽음으로 물든 모든 인간의 역사는 이 '하나님의 역사' 곧 삼위일체 속에 '지양되며(aufgehoben)', 하나님의 역사의 미래 속에서 통합된다. 그러나, 세계로부터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몰트만의 사고는 세계의 구체성을 손상시키며 역사를 하나님의 자기발전의 운동으로 협착화시키는 위험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J. T. Bakker, Een nieuwe theologia crucis, Tijdschrift voor theologie, 1988. 6.. pp.150-155). Kasper의 비판대로 Moltmann은 지나치게 헤겔철학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인간죄악의 역사로 해소(解消)시켜 버린 나머지, 하나님의 즉자적, 대자적 존재(Gottes An-sich- und Für-sich-Sein), 곧 내재적 삼위일체와 세계고난사(苦難史)와의 구별을 사실상 흐리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결국 인간의 한 계기(Moment)로 흡수되고 말 것이다(Kasper, a.a.O., S. 86). 이러한 몰트만 신학에 대한 비판을 깊이 염두해 둔다하더라도 몰트만의 입장이 만유내재신론적이거나 헤겔철학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17] Kasper, a.a.O., S. 368
[18]하인리히 오토는 라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구속사적으로 발생한 계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론을 구성했다는 의미에서는 사변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이 계시의 실제성의 내적이고 초월적인 필연성을 주장함에는 충분히 사변적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고 말한다(Heinrich Otto. a.a.O., S. 344).
[19]. K. Rahner, Der dreifaltige Gott als transzendenter Urgrund der Heilsgeschichte, in: Mysterium Salutis II, S. 328.
[20]. " Die Wirklichkeit Gottes in seiner Offenbarung ist nicht einzuklammern mit einem nur, als ob irgendwo hinter seiner Offenbarung eine andere Wirklichkeit Gottes stünde, sondern eben die uns in der Offenbarung begegnende Wirklichkeit Gottes ist seine Wirklichkeit in allen Tiefen der Ewigkeit" (KD 1/1, S. 503)
[21] Kasper, ibid., p. 334.
[22]. "Gott hat gehandelt -und doch Gott im Gegenüber zu Gott ", Otto Weber, Grundlagen der Dogmatik I, Verlag der Buchhandlung des Erziehungsvereins, Neukirchen Kreis Moers, 1955, S. 424.
[23] Moltmann, a.a.O., S. 177
[24] Kasper, a.a.O., S. 335
[25] Ebd., S. 336
[26] Ebd., S. 336

[27] Yves Congar, Der Heilige Geist,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82. S. 334
[28]. "Das Problem liegt im 'umgekehrt', insofern man damit von der Erkenntnis zur ontologie übergeht"(Ebd.,S. 335).
[29]. 같은 맥락에서 J. Moltmann은 다음의 테제를 제시했다: "Aussagen über die immanente Trinit t dürfen nicht im Widerspruch zu den Aussagen über die öknomische Trinität stehen. Aussagen über die ökonomische Trinität müssen den doxologischen Aussagen über die immanente Trinit ät entprechen"(S. 171).
[30]. 이 점에 대해서는 Werner Bründle이 잘 말해주고 있다. Werner Bründle, Immanent Trinität - ein 'Denkmal der Kirchengeschichte ? ', Kerygma und Dogma 38, Vandenhoeck & Ruprecht 1992.
[31] Karl Chistian Felmy, a.a.O., S. 40
[32] Gunton, ibid., p. 31
[33] Karl Chistian Felmy, a.a.O., S. 43f.
[34] Ebd., S. 106
[35] Ebd., S. 107
[36]서구신학 전통은 헬라철학적 영향아래 하나님의 고난불가능성공리를 고수한 채 성자의 고난의 구원론적 의미만을 말할 뿐 칼 라너가 주장한것처럼 삼위일체론적 의미, 곧 성부와의 관련성을 부인해 왔지만, 현대 많은 서구신학자들은 이를 반성했다. 이는 또한 동방신학의 고난의 삼위일체론적 차원과의 교회연합적 만남을 통해 자극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Moltmann이 러시아 신학자 N. Berdjajew의 사상을 수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Trinität und Reich Gottes, 5 Die Tragödie in Gott). 또한 한스 큉, 위르겐 몰트만, 키타모리, 칼 라너 등이 성자의 고난과 성부와 삼위일체론적으로 깊게 연관시킨다고 해서 이를 성부수난설이라고 쉽게 비판할 수는 없다. 성부수난설은 성부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당했다는 그런 단순한 주장만은 아니다. 성부수난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사이의 일체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 양태론적 군주론에 기초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고난과 성부수난설은 구분되어야 한다.
[37] Christos Yannaras, Person, S. 29(Ebd., S. 46에서 간접인용)
[38]. Ebd., S. 2.
[39] Ebd., S. 4
[40] Ebd., S. 5. 동방신학에 대한 재발견은 결코 하나의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서방교회도 공유하고 있는 초기 교회전통에 대한 재발견이다. 또한 종교개혁정신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이를 우리는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관계라는 기초, 유형, 동력인 성경본문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스콜라주의의 논리에 의존하는 논증 스타일을 피했다. 대신 그는 성경주석과 교회의 예전적, 교리문답적 상황 안에서의 신앙의 체험에 호소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일차적인 논증은 세례와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삼위일체론적 이해를 위한 인식론적인 길로서의 신앙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밀접히 상호연관시키는 예전적이며 체험적인 것이었다. 그의 논증의 유형은 세 위격들이라는 성경적 현상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통일성이라는 예전적이고 체험적인 필연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논증의 방향은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적 논증에 특징적인 방법들과 현격한 유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신학을 성경주석과 함께 전개시키고자 했던 칼빈의 관심은 전통적으로 삼위일체론에 대한 보다 "헬라적인" 혹은 "동방교회적인" 이해로 간주되어 온 관점들과 현격한 유사성을 낳게 했다."(Philip Walker Butin, ibd., p. 44).
[41] Ebd., S. 36에서 간접인용.

[42]. 이는 서구신학의 자기반성이다: " De Deo Uno und De Deo Trino, die schon seit langem durchgä ngig als selbstverständlich empfundene Scheidung und Reihung der Traktate De Deo Uno - De Deo trino. Sie ist erst allgemeinüblich seit der Verdrängung der Sentenzen des Lombarden durch die Summe des heiligen Thomas(Ebd., S. 323) 사실상 경륜적 De Deo Trino보다 De Deo Uno를 선행시키는 서방전통과는 달리 동방신학은 경륜적 세 위격을 선행시킨다: "Von Basilius d. Gr. läßt sich z. B. sagen: "was das trinitarische Geheimnis insgesamt anlangt, so galten ihm die drei Hypostasen als κηρυγμα, ihre Einheit dagegen, die 'Monarchie' als δογμα.. Damit war im Verstä ndnis des Großen Basilius die Dreiheit als Gegenstand der Verkündigung der Einheit als theologischer Spekulation vorgeordnet"(Ebd., S. 46)
[43]. Ebd., S. 36. "릴케가 "이 세상 어디에도 러시아만큼 하나님에게 가까운 나라는 없다"고 말할정도로 러시아 전통철학자들의 사상은 러시아 정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전체적 성격은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전통철학에는 인간의 인격에 대한 존숭사상이 깊게 각인되어있다. 곧 인간을 고등동물로서나 공신주의에서 보는 사회적, 경제적인, 즉 소유적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영적 존재로 보고 이런 영적 존재성에 인간의 본래적인 자유가 놓여 있다고 강조한다". 전광식, 마르크스 이후의 철학, 이문출판사, 1994, p. 213-214. 이러한 러시아의 전통철학의 특징은 바로 러시아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강한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44]. "서구철학은 영성의 철저한 결핍위에 수립되어 있는 반면에, 러시아 종교철학은 바로 영성을 기반으로 한 철학이다", 상게서, p. 215.
[45] Butin, ibid.,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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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5월 13일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