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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

에반젤(복음) 2020. 2. 21. 12:10



존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
(John Owe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n the Atonement)

존 오웬(John Owen)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이면서도 가장 논쟁이 되는 내용은 구속에 대한 그의 이해이다. 특히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특별성 곧 구속의 제한성을 주장하는 책 중 가장 탁월하면서도 논쟁적인 책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배경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내용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이 책에 대해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정황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이 책에서 옹오하고 있는 구속의 특별성은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스콜라주의 혹은 극단적인 예정론에 기초를 둔 것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관계없이 존 오웬이 이 책에서 방법론적으로 사용한 스콜라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오웬이 이 책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에 대한 몰이해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사실 스콜라주의는 신학을 체계화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이었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용어는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위해 방법론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오웬의 신학에 있어서 보편타당한 진리체계로 혹은 방법으로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일반계시의 차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고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성경의 진리에 위배될 경우 언제든지 포기되었다. 이는 계시로서의 성경이 자연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을 계시의 한계 내에서 오히려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오웬이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지나치게 사용해서 성경의 계시를 넘어섰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구속에 대한 그의 논의를 살펴보면, 이 글에서도 나타나겠지만, 그에게서 스콜라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극히 제한적으로, 상식선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웬의 책의 내용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그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 자체를 반대하거나, 혹은 그의 구속과 관련된 성서해석의 오류에 대해 반대해야지, 그가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학문적 방법론 자체에 대한 비판은 논지에서 벗어난 것이다.

예정에 대한 그의 이해 또한 구속에 대한 그의 삼위일체적 이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될 때만이 보다 그 위치가 보다 분명히 들어 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비판은 오웬이 일찍부터 백스테리안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 그리고 소시니안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구속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정립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오웬은 일찍부터 구속에 대한 정통주의적 이해에 대해 확신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구속에 대해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이를 기초로 보편구속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므로 구속에 대한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구속에 대한 그의 견해를 명확히 이해하는데 필수적일 뿐 아니라, 그의 견해에 대한 찬성과 비판은 이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이해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보편구속을 반대하고 특별구속을 주장하는 오웬의 논리를 보다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이를 살펴보는 위해 필자는 그의 구속에 대한 역작인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의 내용에 대해서 분석할 것이다. 이 책은 중요성과, 이 책과 관련된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 책의 구조와 내용에 대해 아직 명확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이 책의 구조와 내용을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견해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또한 이를 위해 필요할 경우에 그의 다른 책들을 참고할 것이다.

구속에 대한 계획과 수단과 결과

오웬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의 1권 1장에서 자신의 논의를 구속의 목적과 결과라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가 실질적으로 성취하신 결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관계에 대한 명확한 관찰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배경이다.

그는 성경을 기초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은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의 구속의 결과는 그들의 실질적인 구원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런 다음에 그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해죽으셨다면, 문제는 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계획이 잘못되었든가, 그렇지 않다면 그 구속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전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완전하심을 무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오웬은 주장한다. 그런 다음에 2장에서 그는 자신의 논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해서 목적과 수단과 결과에 대한 일반적인 관찰을 제시하고 성경의 논의와 연결시킨다.

이러한 오웬의 논의의 전개에 대해 알란 클리포드(Alan Clifford)는 오웬의 특별구속에 대한 논의는 성경에 기초를 두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철학과 스콜라주의와 극단적인 예정론의 논리적 적용의 결과라고 반박한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그는 오웬이 목적, 수단, 결과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사용해서 논의를 전개시킬 뿐 아니라, 구속에 대한 계획과 그 결과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본다는 것 자체가 오웬이 예정론을 논리적으로 구속론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은 먼저 오웬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과 그와 관련된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가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오웬과 같은 개혁주의신학자들은 물론 보편타당한 진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성경과 위배되지 않는 한 일반계시라는 측면에서 보다 긍정적인 면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진리를 보다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더 나아가 목적, 수단, 결과라는 표현들을 통해서 그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에 대한 정확한 의미이다.

이는 심지어는 보편구속을 주장하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표현들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요점은 성경의 진리를 보다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나 논리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것에 대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오웬이 지금 묻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과연 모든 사람의 구속하시겠다
는 계획을 세우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계획을 세우셨다면 왜 그 계획이 실패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계획이 인간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아무리 계획을 세우셔도 인간의 반응이 없다면 결국 그 계획을 포기하실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 전지하시며 전능하시며 완전하신 분이라는 정통주의적 신관을 포기하고 피조물의 반응에 의해 자신을 제한하는 하나님으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오웬은 여기에 대해 이는 신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응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는 보편구속을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그 죽음이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다 감당한 것이었다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라고 그는 반문한다. 그것은 결국 피조물의 반응에 의해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마저 절하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러한 논의를 보다 객관화시키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한 목적과 수단과 결과에 대한 일반적 관찰을 시도한다. 이에 대해 이것이 바로 오웬의 자신의 논리의 궁색함을 보강하기위해 철학적 지지에 호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의 생각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시도하는 것은 보편구속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에 위배될 뿐 아니라, 보편타당한 논리체계를 기초로 해서 볼 때도 이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그의 논의는 하나님에 대한 정통주의적 이해와 구속의 가치에 대한 그의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구속과 삼위일체의 관계

구속의 목적, 수단, 결과라는 관점에서 특별구속의 타당성과 보편구속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을 한 오웬은 이제 더 나아가서 3-5장에서 구속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구속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웬이 왜 먼저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고 구속의 목적과 결과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한 다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경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이것이 바로 오웬이 예정론의 극단적인 적용을 통해서 특별구속을 도출해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오웬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웬이 구속에 대한 계획과 결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나서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볼 때 다소 변증적인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오웬은 보편구속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계획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라는 것을 먼저 선언한다. 이는 자신이 이 책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특별구속의 정당성과 이것을 기초로 아르미안이나, 소시니안,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백스테리안들이 주장하고 있는 보편구속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보편구속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취약점을 먼저 지적해서 그것의 한계와 특별구속의 정당성을 보다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상대를 공격할 때 그 상대의 가장 큰 취약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먼저 선언하고, 그 다음에 보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이런 방법은 사실 중세의 교육 방법이었으며 자신이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던 disputatio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오웬의 논의의 방법은 구속의 특별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은 단순히 한 교리의 논리적인 도출이나 혹은 철학적 잔재주를 통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성서를 기초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다루고 있는 그의 다른 작품 “삼위일체론에 대한 간략한 논의와 방어(A Brief eclaration and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살피고, 그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속의 문제를 다음에 다루고 있다. 이는 오웬이 구속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삼위일체 하나님에 본질과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구속이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며, 그러기 때문에 구속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이 어떻게 일하시는 가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웬은 이면에서 특별구속을 주장했던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의와 한 노선에 서 있다.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노선에서 쓰인 조직신학 책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다루고 그 다음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원의 원인적 근거로서의 예정과 더 나아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기초로 구속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구속에 대한 논의가 기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웬은 바로 이면에서 정확하게 이전이나 혹은 동시대 신학자들과 견해를 같이한다. 단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책에서 오웬이 구속에 대한 계획과 수단과 결과에 대해 미리 말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지적했든지 다소 변증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속

오웬은 구속과 관련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 상세히 논하기 전에 왜 자신이 구속을 성부와 성자와 성자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지를 간단히 밝힌다. 그에 따르면 구속의 저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외적인 사역은 분리되지 않지만, 그 사역은 위격의 질서에 따라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웬의 논의에서 우리는 그에게 있어서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속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그의 사역으로서 구속은 반드시 그분이 어떤 분이지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그분의 사역인 구속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특별구속과 보편구속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단순히 구속의 범위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구속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할 때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그러하듯이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론적 질서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속에 대한 오웬의 삼위일체적 논의는 이러한 전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제대로 해석될 수 없다. 오웬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우리는 그의 다른 여러 책에서 보다 자세히 이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서구 기독교적 이해를 수용하여 이를 구속에 대한 이해에 적용시킨다. 삼위일체에 대한 서구교회의 전통적인 이론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상 한 분이시지만, 위격상 삼위로 존재하신다.


그런데 삼위의 하나님 사이에는 존재론적 질서가 존재한다. 성부는 위격의 원천이시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고(begotten),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신 분이시다(proceeded).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적 질서는 그가 하시는 모든 외적인 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구속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당연히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삼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질서가 있지만, 그들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외적으로 하시는 모든 사역은, 본질상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위격의 차이와 존재론적 질서로 인해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로 인해 구속의 사건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으로 구분이 된다.

더 나아가 이런 삼위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에 기초한 구속과 관련된 하나님의 사역은 오웬에게 있어서 언약의 관계로 이해된다. 계속해서 그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책에서 다룰 구속과 관련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은 바로 이 언약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오웬의 특별구속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스콜라주의나, 예정론의 극단적 적용의 결과라는 주장과는 달리 구속과 관련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오웬은 언약신학의 영향을 받아 구속의 문제를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구속언약(the covenant of redemption)과 은혜은약(the ovenant of grace)로 구분한다. 구속언약은 영원 속에서 구속의 문제를 놓고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은혜 언약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인데, 이 때 주된 역할을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은혜 언약은 바로 성령을 통해 구속 언약이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에 기초한다. 또한 구속의 목적과 수단과 결과는 바로 구속 언약이 시간 속에서 은혜 언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암시했듯이 이 언약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이다. 구속언약이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 진 것은 성자가 성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령은 바로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성자의 구속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진 구속 언약은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성령이 빠진 것은 바로 삼위일체를 무시한 양신론적 태도라는 비판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존재론적 질서에 대한 오웬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더 나아가서 오웬에게 있어서 주로 구속언약에 기초한 택자의 실질적인 구원과 관련된 은혜언약은 성령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라는 것은 성령이 존재론적으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왔을 뿐 아니라, 그의 사역 또한 그 존재론적 질서에 따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언약으로 맺어진 것을 실질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은혜언약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사전에 전제하고 났을 때 우리는 오웬의 구속에 대한 이해가 아리스토텔레스철학 기초한 스콜라주의나 혹은 극단적인 예정론의 논리적인 결과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질서와 그에 기초한 구속과 관련된 경륜적 질서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속과 관련된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

오웬은 보다 구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구속의 저자(agent or chief author)임을 밝히고 각 위격의 하나님의 자신들의 존재론적인 질서에 기초해서 어떻게 구속과 관련된 사역을 하시는지를 제시한다.

성부는 세 위격의 존재의 원천으로서 구속에 대해 계획하시고 이를 실행하시는 분이시다. 성부는 특히 성자와 관련해서 두 가지 일을 행하신다. 먼저 성부는 성자를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내시고, 그 다음으로 그 아들에게 죄에 대한 형벌을 부여하신다. 성부께서 성자를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내실 때, 아들에게 성부로서 중보자의 사역을 권위를 가지고 부여 하시며, 성자는 비록 본질상 성부와 동일하시지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셨다.

그리고 성부는 성자께서 실질적으로 이 일을 실행하실 때 이를 실질적으로 진수(inauguration)하신다. 이는 성자의 탄생과 침례와 부활과 승천과 하늘보좌 위에 앉으시는 과정에 모두 나타난다. 그런데 성부께서 성자를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내실 때 성부와 성자 사이에 두 가지 약속이 맺어졌다.

성부는 성자를 자기가 택한 백성의 중보자요 구속주로 주셨다는 것과, 성부는 성자가 값을 치루고 산 은덕을 그를 믿는 택한 백성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더 나아가서 성부는 성자께서 중보자요 구속주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와 은사를 본질로서가 아니라, 위격의 관계에 따라 주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완벽히 성취되도록 보호하고 후원하시겠다는 것을 언약으로 맺으셨다.

이렇게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성부와 맺어진 언약의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구속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웬은 이에 대해 그의 책 2권, 1-3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와 관련된 다양한 성경의 본문에 대한 주석을 토대로 성자의 구속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도, 성부를 위한 것도 아니라, 잃어 버린자, 자기백성, 죄인들, 자기자녀들, 교회,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천명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과 맺은 구속언약에 따라 오직 택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성경의 주석을 기초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속의 목적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때 이것 자체가 예정론을 극단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오웬에게 있어서 구원의 긍극적인 원인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지만, 이 선택은 성부와 성자와의 존재론적 질서를 기초로 맺어진 언약으로 표현이 되었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구속의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질서와 경륜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대답을 할 수 있다. 이는 곧 선택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은 어떤 관계 속에서 일하시는 가의 문제가 선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오웬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죄로 말미암는 형벌을 부여하셨을 때, 그 형벌은 성부께서 성자와 언약 안에서 주신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형벌이 실질적으로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면, 그 형벌의 실재성과 가치를 생각할 때 당연히 그 대상은 구속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형벌이 모든 사람이 모든 죄(all the sins of all men)을 위한 것이었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처리하셨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은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그 형벌이 모든 사람의 일부의 죄(some sins of all men)나, 혹은 일부 사람의 일부의 죄(some sins of some men)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형벌을 일부사람의 모든 죄(all the sins of some men)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 모두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오웬의 논의를 생각해 볼 때 오웬은 이미 성부의 구속에 대한 계획과 더불어 성자를 통한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를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오웬의 특별구속이 예정론의 극단적 적용의 결과라는 주장의 근거를 뿌리째 흔든다.

왜냐하면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의 특별성은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만일 오웬이 주장하고 있는 특별구속에 대해 비판하려면, 그의 선택에 기초한 구속언약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에 대한 그의 생각 또한 비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구속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성부의 구속에 대한 계획과 성자의 실질적인 구속은 비록 구분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웬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속의 저자이면서, 다른 위격의 하나님보다 더 두드러진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성자의 사역에 대해 다룬다. 그에 따르면 구속은 본질상 한분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성부의 사역이 될 수도 없고, 성령의 사역이 될 수도 없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는 위격의 구분과 질서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위격의 질서에 따라 성부께서 바로 성자에게 부여하신 사역이기 때문이다.

구속과 관련되어 오웬이 지적하는 성자의 사역은 성육신(incarnation)과 수난(oblation)과 중보(intercession)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은 크게 수난에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수난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서 겪으신 모든 것이고(humilation), 중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exaltation) 자신이 수난을 받은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성부의 계획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오웬은 그리스도의 이런 수난과 중보와의 관계에 대해 1권 6, 7, 8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중보는 구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중보는 구속이 수단으로써 구속과 관련된 목적을 성취한다. 만일 이들이 구속에 대한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구속에 대한 목표가 잘못되었든지, 구속의 수단이 잘못되었든 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정말 모든 사람을 위해 수난을 받으셨다면, 그것이 참된 수난이었다면 모든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한다. 바로 그럴 때 그 수난은 참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구속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실재성과 가치를 무시한다.

특히 오웬은 수난과 중보의 범위를 다르게 설정하여 성부의 택자의 선택과 성자의 보편구속을 동시에 주장하려는 백스테리안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수난과 중보는 범위가 동일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백스테리안들은 수난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중보는 택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은 모든 사람들이 받지 않고,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중보를 기초로 오직 택자만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 땅에 오실 때 성자의 구속 혹은 수난의 목적과 성부의 구속에 대한 목적이 다를 뿐 아니라, 성자의 수난의 실질적인 가치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을 무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속언약의 내용을 변질시키게 된다. 이에 오웬은 백스테리안들의 이런 난점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구속에 대한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수난과 중보의 범위는 모두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인정할 때 성부와 성자사이에 본질과 성품의 하나 되심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웬은 마지막으로 구속이 가능하도록 하며, 그 구속을 실질적으로 적용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다룬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본질상 한분이시기 때문에 그들과 동일하게 구속의 저자이지만, 그의 역할은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이 실질적으로 시간 속에서 성취되도록 일하시며, 더 나아가 그 언약이 은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적용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구원과 관련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는 바로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셨기 때문이다. 특별히 구속과 관련해서 오웬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과 부활을 도우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성령께서 은혜언약의 저자로서 구속언약이 시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구속이 가능하도록 실질적으로 도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속의 범위와 관련해서 당연히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에 따라 이를 가능하게 하고 적용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성자의 선택과, 성자의 구속과 그 범위가 다를 수 없다. 만약 그 범위가 다르다면 이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로 나타난다. 이것은 오웬 신학에서 신성모독죄에 해당되며,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다.

이렇게 구속의 저자들로서 삼위 하나님의 각자의 사역에 대해 살피는 과정에서 보편구속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라는 것을 분명히 천명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웬이 이 책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비록 변증적인 차원이 분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와 그 범위에 대해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자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보편구속을 주장하는 이론의 허구성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판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간단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사역을 연구해 볼 때 보편구속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단순히 성경적 근거가 없이 논리적인 사색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급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책의 3권은 보편구속을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반박으로, 그리고 4권에서는 구속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에 대한 세밀한 주석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고 보편구속에 대해 주석적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는 구속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그 안에 존재하는 질서와, 그 질서에 기초한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구속과 관련된 언약과, 그것의 실질적인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리고 구속에 대한 성령의 도우심과 실질적인 적용에 대한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서 얻어낸다. 이는 그 당시 보편구속을 주장하고 있는 아르미니안들과 소시니안들, 그리고 백스테리안들에 대한 신학적이고, 주석학적인 비판이었다.

특별히 그들의 이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오웬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서구교회의 이론을 받아들여 이를 구속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전개하는데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이는 보편구속에 대한 그의 반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질서와 사역에 깊은 이해와 묵상과 이를 뒷밭침하는 성경에 대한 주석학적 연구를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특별구속에 대한 주장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한 스콜라주의나 혹은 예정론의 극단적인 적용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들 자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 뿐 아니라. 오웬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삼위일체적 체계에 대한 잘못된 관찰에 기인한다. 특히 그의 구속에 대한 대작 “그리스도의 죽음의 종식”이 취하고 있는 변증적인 체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우리로 그의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바라본 구속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간과하도록 한다.

1) 존 오웬은 17세기 명실상고 영국 최고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은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24 vols. (London: Johnston and Hunter, 1850-53), repr.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1967)으로 남아있다. 이 논문에서 주로 다루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은 10권에 나온다.

2) 오웬의 특별구속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기초한 스콜라주의와 예정론의 극단적 적용의 결과라고 주장한 사레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라: McLeod Campbell, The Nature of the Atonement and Its Relation to Remissions of Sin and Eternal Life (London: Macmillan and Co., Limited, 1915), 50-75; Alan C. Clifford, Atonement and Justification: English Evangelical Theology 1640-1790, An Eval!!uation (Oxford: Clarendon Press, 1990);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Calisle: Paternoster, 1997); H. Rolston III, John Calvin versus the Westminster Confession (Richmond: John Knox Press, 1972); James B. Torrance, "The Incarnation and 'limited Atonement'", Evangelical Quarterly 55 (1982), 83-94.

3)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신학에서 철학의 사용에 대해 우리는 Bartholomaeus Keckerman의 “참된 철학은 거룩한 신학과 싸우지 않는다(vera philosophia cum sacra. theologia nusquam pugnat)”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은 신학과 철학은 혼합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학은 철학이 보편타당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한 일반계시로서 성경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철학을 방법론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Opera Omnia quae extant, Coloniae Alloburgum, 1614, 68.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신학에서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231-50; idem, "Vera Philosophia cum sacra Theologia nusquam pugnat: Keckerman on Philosophy, Theology, and the Problem of Double Truth" in Sixteenth Century Journal, IV(3) (1984), 341-65.

4) 철학이 방법을 넘어서서 신학의 내용에 영향을 주면서, 성경의 계시를 왜곡시킨 대표적인 예에 대해 Martin I. Klauber and Glenn S. Sunshine, "Jean-Alphonse Turretini on Biblical Accomodation: Cavinist or Socinia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 (1990), 7-27을 보라.

5) 오웬의 특별구속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초한 스콜라주의나 극단적 예정론의 결과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경륜에 대한 관찰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Carl R. Trueman이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오웬에게서 사용된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역할을 방법론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또한 그는 오웬이 아르미니안주의, 소시니안주의, 백스테리안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는지 지적이며,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의 책 The Claims of Truth: John Owen's Trinitarian Theology (Carlisle: Paternoster Press, 1998), 9-19를 보라.

6) Owen,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10, 157-60.

7) Ibid.,

8) Clifford, Atonement and Justification, 95-98, 129.

9) 이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에 대해 Trueman, The Claims of Truth, 34-44를 참고하라.

10) 여기에서 오웬의 표현을 직접 살펴보는 것의 그의 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Now, the master of this opinion do see full well and easily, that if that be the end of the death of Christ which we have from the Scripture asserted, if those before recounted be the immediate fruits and products thereof, then one of these two things will necessarily follow:-that either, first, God and Christ failed of their end proposed, and did not accomplish that which they intended, the death of Christ being not a fitly-proportioned means for the attaining of that end (for any cause of failing cannot be assigned): which to assert seems to us blasphemously injurious to the wisdom, power, and perfections of God, as likewise derogatory to the worth and value of the death of Christ; -or else, that all men, all the posterity of Adam, must be saved, purged, sanctified, and glorified; surely which they will not maintained, at least the Scripture and the woful experience of millions will not allow.” Owen, The Death of Christ, 159.

11) Owen, The Death of Christ, 163-79.


12) Disputatio는 quaestio와 더불어 중세대학에서 교육을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조직신학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Aquinas의 Summa Theologica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방법들은 종교개혁시대를 걸쳐 17세기 후기 종교개혁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들은 17세기 중, 후반에 Oxford에서 강의를 했던 오웬이 학생을 가르칠 때 흔히 쓰던 방법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Per Erick Persson, Sacra Doctrina: Reason and Revelation in Aquinas, trans, Ross Mackenzie (Oxford: Basil Blackwell, 1970), 3-11; David C. Steinmezt, “The Scholastic Calvin". Protestant Scholasticism: Essays in Reassessment, Carl R. Trueman & R. S. Clark ed. (Carlisle: Paternoster, 1997) 16-30.

13) Owen, A Brief Declaration and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2, 377-13, 419-39.

14) William Ames, The Marrow of Theology, trans. John Dykstra Eusde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83-100; 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e: or, the Description of Theologie in The Works of William Perkins, Vol. 1, (Cambridge, 1629), 11-16; Johannes Polyanderus, Andrea Van Rivetus, Antonius Wallaeus, Antonius Thysius, Synopsis Purioris Theologiae, (Leiden, 1682), VI-IX, XXIV; Turretin, Francis.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Trans, James T. Dennison, Jr. (Philipsburg: P & R Publishing, 1992), 169-430.

15) Owen, The Death of Christ, 163 "The agent in, and chief author of, this great work of our redemption is the whole blessed Trinity; for all the works which outwardly are of the Deity are undivided and belong equally to each person, their distinct manner of subsistence and order being observed." 이 문제와 관련해서 Alan Spence, "John Owen and Trinitarian Agency" i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Vol. 43, 157-73를 참고하라.

16) Owen, A 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 : The Works of John Owen, Vol. 3, 66-67, 91-94, 107-8; idem. A Brief Declaration and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403-9.

17) Ibid.

18) Owen, An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The Works of John Owen, Vol. 18, 42-97; idem, A Discourse 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207-42; idem, The Death of Christ, 236-38.


19) 로버트 리탐(Robert Letham)은 구속언약은 성령을 배제시키고, 종속설적인 경향이 보이며, 삼신론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책 The Work of Christ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3), 53를 보라. 흥미로운 것은 18세기 John Gill은 구속언약에 대해 은혜언약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고 여기에 성령을 참가시켜 삼위일체적인 구원관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길의 노력은 구속과 관련된 언약인 구속언약을 구원과 관련된 은혜언약으로 확대해서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을 비교해 보면 실질적으로 17세기 언약신학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는 용어의 문제이며, 언약이라는 문제를 구속을 넘어서서 구원이라는 보다 폭 넒은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John Gill, A Complete Body of Doctrinal and Practical Divinity, A New Edition (London, 1839), 214-25.

20) Owen, The Death of Christ, 163-174.
21) Ibid., 200-21.
22) Ibid., 171-74.
23) Ibid., 174-77.
24) Ibid., 179-200. 구속의 범위와 성격의 문제와 관련해 오웬은 백스터와 논쟁을 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Of the Death of Christ"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10, 435-79를 보라.
25) Ibid., 178-79.
26) Ibid., 236-424.

내용출처 : [기타] 박홍규교수 (침례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