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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젤(복음) 2020. 2. 21. 11:53



삼위일체론

 

 

Ⅰ. 들어가는 말


오늘날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현대인들에게 삼위일체론은 과거의 진부한 교리에 불과하며, 인간 존재와 역사적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신학적 사변에 불과하다고들 한다. 물론 삼위일체는 이해하기 어렵고 더욱이 불가능한 교리이므로 오늘과 같은 과학 시대에 사는 이성적인 현대인들에게는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교회에서는 삼위일체는 신앙고백 속에는 존재하지만, 신학적 사고의 범주에서는 제외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삼위일체론은 모든 교리의 근본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구별하는 표이다. 근대의 대부분의 문헌에서 삼위일체론이 거의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중요한 의미도 가지지 않고 있지만, 이에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삼위일체 이해를 통해 그 중요성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삼위일체 이해


삼위일체론은 4세기에 형성된 후에 니케야(325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거쳐 계몽기까지 거의 문제시 되지 않았으며 거의 신화적 유산처럼 보호되어 왔다. 이제 삼위일체는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기 보다는 신비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에 대항한 '세르베투스'와 그후의 '소시니안주의자들'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주장을 했지만 신학적 흐름의 주제는 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 불신당하기 시작한다. 칸트는 "문자대로 생각할 때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우리는 아무런 실용적인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고, 쉴라이에르마허는 그의 교의학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는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르트에 와서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이 새로이 인식되어 지고 강조되었다. 그에게 있어 삼위일체는 그의 신학의 골격을 이루었고 새로이 삼위일체의 부흥을 일으켰다.

1. 칼 바르트(Karl Barth)


바르트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전체 교의학에 대하여 결정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을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삼위일체론은 불가피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기초, 그 뿌리는" 한 마디로 "계시'에 잇다. 즉 삼위일체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그 이유는 계시의 사건은 하나의 주체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시의 시건으로 부터 삼위일체론이 형성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해석이다. 또한 참된 삼위일체의 흔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확증을 말하는 인간성에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나타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삼위일체의 뿌리이다.


바르트의 삼위의 일체성은 하나의 본체나 신성이 셋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세 번의 반복 가운데서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며...... 그는 오직 이 반복 가운데에서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며, ..... 바로 그러므로 각 반복에 있어서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뜻한다. 삼위의 일체성의 의도는 삼신론을 방지하고 기독교의 일신론을 지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의 삼위일체론은 허지슨(Hudgson), 베일리(Baillie), 몰트만(Moltmann)에 의하여 삼위를 세 인격이라 말하지 않고 "반복" 또는 "존재양식"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벨리안적인 양태론적 독재론으로 빠지고 잇으며, 그리하여 그의 신론은 삼위일체론이 아닌 일신론적 전통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2. 틸리히(Paul Tillich)


틸리히의 삼위일체론은 '상징의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아들, 영은 곧 존재, 실존, 생명, 또는 심연, 의미 결합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모든 생명은 삼위일체적인데, 그 이유는 동력적 힘과 유한한 형식과의 결합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고 할 때, 이것은 생명이 발생하는 터전과 생명 그 자체를 표현하는 형식의 결합을 말한다. 터전은 아버지시며, 형식은 로고스 또는 아들이며, 결합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삼위일체적 용어로 사유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삼위일체론에서의 문제점은 삼위 하나님을 존재, 실존, 생명의 상징으로 볼 때, 그들 사이의 구별은 인정하더라도 이 구별이 개념적인 것인가. 아니면 실제적인 구별인가 하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삼위일체는 하나님에 대한 세 실체가 없다. 그의 구별이란 필요에 의한 구별이며 다만 개념적이다. 이는 하나의 신학적 사유의 노작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는 버릴 수도, 전통적 형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것은 본래의 기능을 다 하도록 해야 한다. 즉 인간에 대한 신적 생명의 자아 현실을 포괄적 상징에 의하여 표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다.

3. 몰트만(Jurgen Moltmann)


몰트만은 바르트와 같이 삼위일체론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 그중에서 특히 그의 삼위일체의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에게 있어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되어야 하고, 십자가는 삼위일체론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신인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삼위일체적 사건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그가 조명하는 예수의 아들 됨의 전적이고 인격적 측면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신의 본성과 그의 내적 삼위일체 사이의 이원론을 극복한다. 이 삼위일체론적 사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완전한 시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따라서 비 실제적인 신 사변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산건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석이다. 삼위일체론은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유일신론이아 무신론에 대해서 안정시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삼위일체론의 근거이며, 내용적 원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인 틀은 삼위일체론이다.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하나님의 아들의 수난으로, 그리하여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자신의 수난으로 이해한다. 그는 십자가에서 아들과 함께 수난당하신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성부 수난설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하나님의 어떠한 영원한 내적 존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경륜적 삼위일체 되심에 단 하번 계시된다. 십자가의 역사는 '역사의 역사"요, "역사의 전부"이며, 기독교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이루어지는 "역사의 원리"라고 말한다.
그는 삼위일체론이 구체적으로 오는 우리의 역사와 상황 속에서 어떤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주장함으로 삼위일체론의 사회적 의의를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정치적 일신론은 정치적으로는 단일 군주체제를 형성하여 언제나 지배권을 정당화 시켰으며, 종교적으로는 단일 군주론적인 교황의 절대론을 형성시켰다
고 비판하면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자유를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아버지 나라에서 종의 신분을 통해 자유를 얻고, 아들의 나라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자유를 얻으며, 성령의 나라에서 친구 신분으로 자유를 얻는다. 이런 자유는 영원한 영생 가운데서 누릴 수 있는 높은 자유를 지향한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의 영원한 삼위일체적 나라에서의 자유로 완성된다.


이렇게 몰트만은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에 대해서만 논의한 것에 대해, 삼위일체론은 세계의 문제, 곧 고난과 고통, 아픔등의 문제와 연결시켰다. 이렇게 그의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혹은 역사적 삼위일체론으로써 세계의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새로운 해석의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몰트만은 삼위일체적 신의 역사 참여 속에서 그의 교회론을 말하는데, 교회가 이 세상을 구속하거나 성령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통한 아들과 성령의 선교가 교회를 세웠고, 성령이 말씀과 신앙, 성례전과 은혜, 직무와 전통의 사건으로써 교회를 관할한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보냄과 성령의 창조적 보냄에 참여하며, 창조의 해방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인간의 연합에 참여하고, 신의 고난 역사에 신의 기쁨의 역사에 참여한다. 교회의 전 존재는 세계와 함께하는 신의 역사에서 참여를 통해서 표정지어진다. 따라서 몰트만의 교회론은 "교회의 신조는 삼위일체 신의 신조 속에 통합된다"라는 사도적 신앙 고백에 근거한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글쓴이 : 윤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