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상품이 아니라 신앙 고백입니다 경건주의를 공부하신 입장에서 설교와 경건주의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어느 권사님이 다짜고짜로 “목사님, 경건주의가 뭐예요?”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에 말문이 탁 막히더라고요. 아무리 경건주의를 전공했어도 ‘경건’을 간단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무튼 경건주의는 무엇보다 말씀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경건주의 시각으로 보면, 오늘날 이 세상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수사학적 표현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이지요. 17세기 당시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시연, 연출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경건주의자는 설교를 듣는 회중의 상황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경건주의 설교자들은 회중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죠. 그 당시 사람들이 처한 삶의 현상, 현장을 떠난 설교는 안 되며 회중의 삶이 변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신자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설교 언어는 획기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단어도 너무 신학적일 수 있습니다. 중고등부에서 설교할 때는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설교는 기존 신자들의 양육과 성숙을 목표로 해야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돌아오게 하는 회심의 설교도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설교 눈높이를 맞추는 설교와 예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언어는 각 시대 사람에 맞게, 그들의 언어로 전달하는 게 참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구속’(救贖)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있어서는 일반 사람들이 이 단어를 ‘구속’(拘束)으로 이해하여 설교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충분히 검토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어 사용도 잘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목회자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많은 도서들을 참고하게 되는데, 목회자들은 책읽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고전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고전을 읽다 보면,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 보입니다. 사실 오늘날 정보가 너무 많아서 그것을 모두 읽어 볼 수는 없습니다. 일부 목사님들처럼 다독할 수 있는 능력이 모든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고전을 읽으면 다른 많은 책들을 읽지 않아도 인간의 삶이 총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물을 던질 때, 가운데만 끌어당기면 전부 끌려오듯이, 고전은 인간의 삶에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들이 읽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되고 그러면 도태합니다. 반대로 장사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책을 찾는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역사에서 생존한 책이라면 인간의 삶에 대한 공통 경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얘기를 들으면, 사람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전을 통해 인간 삶의 원형적 구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을 때는 정독해야 합니다. 고전을 제대로 읽을 때, 밖에서 들어와(In) 포메이션(formation)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전을 빨리 읽으면, 다만 정보(Information)밖에 안 되죠. 고전들 중에 추천해 주실 만한 것이 있다면 어떤 책들이 있습니까? 저는 정경에 들어가지 않은 책들도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클레렌트의 서신」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앙에 매우 유익한 책입니다. 또한 내려와서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의 생애」도 좋은 책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믿음이 무엇인지 정리해 줍니다. 오늘날 이신칭의 교리에 믿음은 있지만 실천이 약하다는 말을 듣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읽은 루터는 그렇지 않습니다. 루터의 믿음이란 그 안에 강력한 시대 구조를 포함하고 있어서 상당히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고전 중에 고전입니다. 또 파스칼의 「팡세」도 중요한 책입니다. 비록 파스칼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팡세」는 개신교 신학으로 봐도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성가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추천하는 책들 중에 너무나 신비주의적인 것들도 많이 있어요. 그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요즘 영성이란 말이 유행하면서 문을 활짝 열어 버렸는데, 옛날만 해도 그런 단어는 잘 사용하지 않았거든요. 전통적인 단어는 ‘경건’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영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신학적으로 주제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이후입니다. 사실 종교 개혁 당시로 얘기하면, 영성가를 뜻하는 ‘스피리추얼리스트’(Spiritualist)는 과도한 영험주의자들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영성주의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극단적인 신비주의는 주의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관상 기도인데, 개신교 신학에 관상 기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선 회의적입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저는 말씀 묵상이 설교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이어진 것들 가운데 중세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입니다. 이것을 보통 ‘거룩한 독서’라고 번역하는데, 그것은 좋은 번역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거룩한 독서’는 보통 경건 서적을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렉티오 디비나의 근본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는데 그런 뜻에서 가장 적합한 번역은 ‘말씀 묵상’입니다. 그런데 중세에 정착한 렉티오 디비나는 초대 교회 때부터 계속 내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읽고 적용하는 것에서 유래했거든요. 따라서 말씀 묵상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신학이란 말씀에 근거해야 기본적인 토대를 세울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말씀 묵상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요,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이요, 설교의 중심입니다. 또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이 인간에게 이해가 가능하도록 다가온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말씀 묵상이란 하나님의 창조 이래 계속되는 모든 존재 역사의 비밀에 대해 묵상하고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실존의 근원을 파고들고, 존재의 현존에 참예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말씀 묵상을 이야기할 때 꼭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라는 직임 때문에 성경을 대하는 게 아니라 목회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 묵상을 한다는 것은, 제가 말씀을 전달할 재료로 본다는 게 아니라 저의 삶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요청이라는 의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주의자들의 의식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삶이 변해야 하고 그 위에서 자기 설교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 겁니다. 말씀 묵상할 시간이 없는 상황에 있는 목회자들이 배울 수 있는 말씀 묵상 방법을 소개해 주십시오. 제가 아는 말씀 묵상 방법은 ‘비움’, ‘채움’, ‘나눔’이라는 세 가지입니다. 비움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전부 비우는 것이고, 채움은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며, 그 다음에 채워진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나눔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채움 부분이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이 신앙인데, 채움 부분에서 ‘관찰’, ‘새김’, ‘기도’의 세 가지를 추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관찰이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의미하고, 새김은 성경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를 의미합니다. 또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제가 발행한 묵상잡지가 하나 있습니다. 「보시니 참 좋았더라」는 잡지인데 2001년 1월부터 발행하면서 마가복음부터 시작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미리 연구를 해 온 익숙한 책이었기에 저는 그 본문으로 새벽기도도 인도했고, 6개월을 CTS 기독교 TV에서 월~ 금요일까지 10분 정도씩 설명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마가복음에 상당히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도 말에 갑자기 말씀에 대한 공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 내 손아귀에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채워지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본문을 묵상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집필할 때나 TV 녹화를 위해 정리할 때와는 전혀 다른 묵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날 아침에 말씀묵상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정말 말씀이 열리는 체험을 한 것이지요. 그 후에 누가복음을 한 적이 있거든요. 저는 마가복음을 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은혜를 받았어요. 제게 누가복음은 마가복음만큼 익숙한 본문이 아니었는데도 귀한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 말씀이 열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이야기한 것이지만 말씀 묵상을 계속하면 설교할 내용이 많아서 걱정이지 없는 것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예화를 찾고 구성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요. 이런 이야기는 강해 설교를 잘하고, 말씀 묵상을 잘하는 분들에게서 많이 듣는 얘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말씀 묵상을 어렵게 생각지 말고, 삶에서 정착시키면 설교의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모습으로 성경을 묵상하면 목회자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말씀 묵상을 어렵게 생각지 말고 삶에서 정착시키면 자신이 말씀으로 먼저 채워질 수 있습니다. 이런 설교가 되면 설교는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 고백이 됩니다. 저는 설교란 상품을 찍어서 내보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 나타난 믿음의 체험과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 중에 설교의 경쟁력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주위의 교회들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설교가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요. 하지만 정말 이 부분은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시장의 경제 논리에 기독교 복음이 먹혀버린 게 아닙니까? 설교는 경쟁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떼들에게 소명을 갖고 받은 말씀, 삶에 연결된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지 설교의 상품성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고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며, 거기서 자기 고백을 드리는 설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동료 목사님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경건주의를 공부했지만 정말 말씀 묵상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큐티와 묵상은 경건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습니다. 큐티지를 처음 시작한 것이 경건주의자들입니다. 1720년대에 루터파 경건주의 3세대 리더인 진젠도르프 백작이 자기 공동체를 사역하면서 몸이 아파 예배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1년 365일 읽을 성경 말씀을 만들게 된 것이 큐티지의 시작이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세계적 기독교 사역에서 거룩한 열매가 절실한 실정입니다. 기도의 거룩한 열매, 중보 기도의 거룩한 열매가 정말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요즘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제가 교회사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수도원 운동 아닙니까? 중세에 봉쇄 수도원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못 나오는 수도원이지요. 거기에 들어가면 세상에선 완전히 잊혀지는 것입니다. 또 고대에 주상 성자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기둥 꼭대기에 올라가서 죽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는 것이지요. 예전에 저는 봉쇄 수도원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40대를 넘어서면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줘야 진정한 사역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현대 기독교 사역이 이런 틀을 기본으로 해서 짜여져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잊혀져도 하나님이 알아주는 인생이 된다면 복된 삶이라고 봅니다. 목회자들이 그것을 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기도 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그런 얘기를 하는데, 연세가 드시기 전에 기도를 연습해야 노후가 행복하다는 거지요. 그럴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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