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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씨름 없이 강단에 서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 중심교회 서문강목사님

에반젤(복음) 2020. 2. 9. 17:05



본문과 씨름 없이 강단에 서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도 설교를 마스터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도 설교에 대해 항상 부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 강단에 설 때 기대도 되면서 동시에 두려움도 있습니다. 거룩한 부담이 있으면서 기대가 있는 것이 설교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소명”이라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영혼을 향한 복음의 절대적 필요성을 자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가 의지하고 있는 성경 본문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없다면 설교자로서 목회를 감당할 수 없겠지요. 여기에 더해 자신은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주 강단에 올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설교 준비를 진행하십니까?

저는 본문을 정하고 나면 끊임없이 묵상하려고 노력합니다. 강해 설교를 중요한 원리로 삼고 있는데, 말씀을 읽다 보면 성도들에게 무엇을 줘야겠다는 것보다 목회적 방향에 대한 영적 시각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보면서 설교 방향을 정하게 되고 그 말씀을 부단히 묵상하려고 합니다. 월요일에 작은 말씀의 씨앗이 발아가 되는데 그것을 계속 묵상하다 보면 어느 덧 설교가 완성되지요. 성경이 어떤 의도로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가, 어떤 것이 핵심인가 등을 계속해 묵상하고 다른 분들의 책이나 주석서들은 설교를 정리하는 단계에서 참고합니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나 캠벨 몰간 목사님도 본문 묵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강조하시더라고요. 성경 본문이 어떤 상황에서 기록되었고, 성경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며,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 어떤 점을 말하고 어떤 방향으로 지원하며 격려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캠벨 몰간 목사님은 설교를 위해 본문 묵상을 40번 정도했다고 할 정도 본문을 깊이 보셨습니다. 본문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 어떤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성도들을 어떻게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을 전하면 성도들이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냈다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신통력이 있어서 맞춘 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도록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바쁜 목회 일정으로 인해 묵상에 많은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설교자가 설교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내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있기 때문에 밥 먹을 때, 길을 걸을 때, 차를 타고 갈 때라도 항상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새롭게 깨달은 중요한 내용이 있으면 메모하면서 지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묵상의 파편들이 모여 한 편의 설교가 완성됩니다. 물론 묵상은 항상 성경의 기초에 의한 것이고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되씹어 보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The Message)에 있는 시편 1편을 읽어 보니까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씹는(chewing) 사람”이라고 기록돼 있더라고요. 묵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곱씹는 것이지요.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강론하고 이마에 붙이라고 하는데, 말씀을 항상 이마에 붙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때 그 사상과 행동 속에 말씀이 함께 동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마다 얻은 은혜를 메모해 두는 습관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 준비할 시간조차 없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교회의 일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설교를 위해 다른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가져야 합니다.

목사님은 설교 준비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하십니까?

원고 작성에 보통 3~4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러나 한 주간 내내 설교를 준비합니다. 설교자들이 다양한 주석을 참고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개인이 본문과의 깊은 씨름을 하는 일입니다. 설교자가 다른 설교를 짜깁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벌이 꿀을 따러 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 남의 벌통에 가서 몰래 꿀을 가져오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설교를 표절하지 않는다고 해도 남의 설교를 모아서 짜깁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듣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 것이고 나중에 영적 신뢰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과 깊은 교류를 할 수 없게 되고 성령님께서도 그런 부정직한 것을 모두 아십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설교를 참고할 수도 있지만, 본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마치 권투 선수가 스파링 파트너와 훈련 없이 경기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너무 익숙한 본문에 대해 그 내용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설교하기 힘들다고 말하고, 낯선 본문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고 판단해 설교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 설교할 내용이 가득 쌓여 있게 된다고 봅니다. 물론 설교할 것이 없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교자가 설교에 대해 묵상하고 나면 설교에서 할 말이 없어서 고민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 주간 내내 본문과 씨름하면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전할 말이 없다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메시지를 얻기 위해 청교도 설교자들의 책을 많이 읽습니다. 청교들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깊은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들의 시각을 배우는 것은 좋은 모범을 공급받는 방법입니다.

목회자들이 너무 바빠서 설교 준비를 못하기도 하지만 목회자의 태만도 설교 준비 부족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게으름과 나태는 위험한 것입니다. 특히 목회자가 성경을 읽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있어선 안 됩니다. 거기에 여러 원인이 있는데 그 가운데 성경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일들을 많이 벌여 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 너무 익숙하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성경을 물마시듯이 항상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을 연구해 그 맥을 잡아야 합니다. 주부는 가정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매일 밥을 지어 줘야지 찬밥만 주어선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설교자에 대한 소명과 그 중심성이 점차 희석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프로그램을 강조하다 보니 설교 강단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설교 시간의 단축으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물론 설교 시간이 설교의 능력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를 강조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 대한 훈련을 교육을 통해 받을 수도 있지만, 설교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매우 고유하고 독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공부와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종교개혁이나 청교도의 특징을 보면 설교의 부흥을 통해 교회의 부흥이 일어났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설교가 성경으로 돌아갈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설교의 고유한 영역을 등한시하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회귀할 때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부에서 교회의 양적 성장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회심과 각성이 일어나 각자 자신의 부르심을 깨닫고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날, 서구 교회가 얼마나 컸습니까? 그런데 자유주의가 발현했을 때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성경 해석에 대해 무수한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신앙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런 교회는 진정한 부흥을 경험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가 서구 교회의 모래성 같은 기초를 허물고 진정한 말씀의 기초를 가진 교회로 일으키는 데 기여한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외부의 공격이 있어도 성경의 기초 위에 세워진 개혁주의와 청교도 교회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곳에 복음이 있고 부흥의 역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하기를 현대 교회는 3,000 피트의 강 너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깊이는 1인치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깊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설교의 은혜 속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설교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교회의 영성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설교는 부실한데 다른 것이 잘 돼 부흥했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봅니다. 사실 그 목회자의 설교에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설교를 통해 복음의 근본을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 설교와 관련해 관심 있게 보시는 책은 무엇입니까?

청교도에 대한 책들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존 맥아더와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책은 설교의 표준적인 역할을 감당한다고 봅니다. 교회사의 줄기를 보면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먼저 있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종결되었지만 성령님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교회사를 많이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교회사의 걸출한 인물의 전기와 자서전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을 따라 가는 삶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어느 날 갑자기 영적 거장이 된 것이 아니거든요. 그 분이 청교도로 올라가 그들의 설교와 삶과 교회들을 연구했거든요. 성령님께서 그들을 통해 어떻게 일하셨는지 살피고 영적 세계를 발견하게 될 때, 진정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신학생들에게 설교자로서 책을 보기 싫어하면 설교자가 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물론 예전에는 책을 읽지 않고도 설교를 잘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외적인 사례입니다. 예외를 가지고 법칙을 만들어선 안 됩니다. 따라서 저는 목사님들은 묵상과 기도를 위해 다른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 주십시오.

오늘날 한국 교회 목사님들 중에 성장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로 대형 교회 목회자들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는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문제점입니다. 저도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저에게도 이런 콤플렉스에 대한 유혹이 거인처럼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알게 할까 하는 고심이 아니라, 이런 콤플렉스에 휩싸이는 현실에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분이신데 어떻게 그분의 교회가 작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마 교회 수가 너무 많아서 서로 비교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가장 성경적인 것이 가장 성공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한국 목회자들은 맡겨 주신 양들을 바라보면서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