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히브리서 강해

[스크랩] 히브리서에 나타난 은혜

에반젤(복음) 2019. 12. 27. 11:06



    

2014년 10월호 [그말씀] (pp.36-51)에 게재된 원고

 

   히브리서에 나타난 은혜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총칭해서 말할 때 ‘은혜’(恩惠)라고 말한다. 또는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도 ‘은혜’라고 말한다(엡 2:8; 행 15:11; 고전 15:10 등). 이에 반해 ‘은사’(恩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가리킬 때 사용된다(약 1:16). 때로는 ‘은혜’(카리스)와 ‘은사’(카리스마)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롬 1:11; 6:23; 5:15, 20, 21 등). ‘은혜’는 전체적으로 총칭하거나 또는 그 값없이 주시는 성격을 가리키는 반면, ‘은사’는 구체적으로 ‘은혜로 주어진 것, 선물’을 가리키는 데 많이 사용된다.

 

   모든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이 다 ‘은혜’이지만, 그 가운데서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복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된다(롬 1:7; 고전 1:3; 16:23; 고후 13:13; 엡 1:2, 7, 4:7 등). 그래서 에베소서 1:7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속량’ 곧 ‘죄 사함’이 가장 크고 기본적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날마다 그의 사랑과 돌보심 가운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은혜를 가능하게 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이 큰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 하면 ‘은혜’, ‘은혜’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 할 정도로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서신서 마지막 부분의 축원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 많다(갈 6:18; 빌 4:23; 고전 16:23; 고후 13:13 등).

   그러면 히브리서에서는 이 은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히브리서의 주요 내용을 따라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I.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논증한다. 그 논증하는 방식은 예수님을 천사와 비교하면서 성경 구절을 가지고 증명하는 것이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었지만 천사는 결코 그렇게 불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 예수님은 천사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예수님을 ‘아들’이라 부른다(1:2). 하나님은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셨으며 또 그를 통해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1:2).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1:3). 그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1:3).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을 말한다(1:4-13). 먼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시 2:7)고 하신 말씀은 천사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히 1:5). 또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고 하신 말씀도 천사가 아니라 메시아 곧 예수님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히 1:5).

 

   이처럼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면서 천사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높고 뛰어난 지위에 대해 말한다. 그러면서 천사에 대해서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14).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존재이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천사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높고 뛰어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는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히 2:7; 시 8:5). 이것은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두고 말한 것인데, 왜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한다(히 2:9).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위해서는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님을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다고 한다(히 2:10).

 

   그래서 예수님(메시아)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고(2:12), 또한 ‘자녀’라 부르신다(2:13). 여기서 ‘자녀’란 단어는 원어로 ‘파이디아’(paidia)인데 아들딸이란 의미가 아니라 아이들(children)이란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근히 부르실 때 ‘얘들아’고 하셨는데(요 21:5), 원어로는 같은 ‘파이디아’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만큼 제자들을 친근히 하시고 다정하게 대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친근히 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이 모든 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위로하시기 위해 자신이 친히 낮아지고 고난당하신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여기서도 ‘자녀들’(파이디아)은 ‘아이들’이다. ‘혈과 육’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말한다. 예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혈육’을 가지셨다(요 1:14; 눅 24:39).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셨으나 죄는 없으시다(롬 8:3). 예수님은 ‘영’이나 ‘천사’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우리와는 다른 존재가 되었을 것이며,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온전한 사람’이 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우리에게 큰 은혜이며 사랑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 곧 ‘성육신’(成肉身) 자체가 큰 은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 당시에 이런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물질과 육체를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께서 악한 육신을 취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케린투스(Cerinthus) 같은 영지주의자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비둘기 같이 나사렛 예수 위에 임하였다고 본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그리스도’는 다시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본다. 이러한 가르침의 저변에는 육신을 악하게 보는 영지주의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고 한다(요일 4:2-3).

 

   오늘날에도 ‘성육신’의 놀라운 신비를 믿지 못하고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여자’의 몸에서 나실 수 있는가 의아해 하면서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르게 특별하게 나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며(마 1:18) 성령의 특별한 간섭과 역사가 있었다(눅 1:35)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율법’ 아래 나셨다(갈 4:4).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다.”(히 4:15)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신비요 이적이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II.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속죄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고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절망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속죄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월등히 뛰어난 점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먼저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들과는 달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셨다. 이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의 의문에 대한 답이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에서,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에서만 나올 수 있는데 예수님은 유다 지파 출신이었다. 유다 지파 중에서는 한 사람도 제사장이 나온 적이 없는데, 어떻게 유다 출신의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성경을 가지고 시원하게 대답해 준다. 그가 인용한 구절은 시편 110:4이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맹세하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말씀이다. 곧, 메시아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을 히브리서는 5:6; 7:17, 21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자신의 말 속에서 여러 번 사용하고 있다(5:10; 6:20; 7:11, 15).

 

   그러면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깊이 묵상하고 연구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요지는 멜기세덱은 ‘의의 왕’, ‘평강의 왕’으로서 지극히 높은 제사장이며, 레위 자손도 아브라함을 통해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레위 지파에서 난 제사장들보다 더욱 뛰어난 제사장이시다. 이 땅의 제사장들은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제사장이 세워져야만 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수가 엄청 많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었으니,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죽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뿐만 아니라 땅의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맹세로 말미암아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 이런 점에서 대제사장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제사장이시다.

 

   차이점은 또 있다. 땅에 있는 대제사장들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해마다 속죄의 제사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드리셨다(히 9:12). 하나님의 아들이 흠 없는 자신의 피를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우리는 ‘단번에’ 영원히 죄 사함을 받았다. 따라서 땅에 있는 대제사장들처럼 또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이런 점에서 교역자를 ‘제사장’ 또는 ‘사제’라고 부르며, 성찬상을 ‘제단’이라고 부르면서 날마다 미사를 통해 ‘제사’를 드리는 가톨릭교회는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말한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또 말한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뿐만 아니라 구약 제사장들의 제사와 예수님의 제사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해마다 늘 드리는 구약 시대의 제사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제사는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히 10:1). 말하자면 그런 제사 의식들은 ‘상징’일 뿐 ‘실체(實體)’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다(골 2:17). 이처럼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로는 사람들이 온전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해마다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황소와 염소의 피는 능히 죄를 없이 못하였다(히 10:4). 따라서 ‘실체’ 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를 드리셔야만 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한다(히 10:11-12).

 

 

III.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자기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여기서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유대 달력으로 7월 10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도 송아지와 염소를 피를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은 곧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오직 세움 받은 대제사장만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자기 피를 뿌리셨기 때문이다. 지성소는 곧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민 7:89).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드리시고 자기 피를 뿌리셔서 우리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라고 한다(히 10:20). 여기서 ‘휘장(揮帳)’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커튼을 의미한다. 높이 30 규빗(약 15 미터)의 높은 커튼인데 지성소 앞에 드리워져 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도 함부로 지성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고 그 양쪽에 날개를 편 천사 모양의 그룹 둘이 있는데, 그 그룹들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함부로 지성소로 들어오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이 ‘휘장’은 ‘두 번째 휘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1년 내내 굳게 닫혀 있다가 단 한 차례 대속죄일에만 열린다. 그때 오직 대제사장만이 수송아지와 수염소의 피를 가지고 이 휘장 사이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언약궤 위 속죄단(속죄소, 시은좌) 위에 피를 뿌리고 또 그 앞에 피를 일곱 번 뿌렸다(레 16:6-22).

 

   그런데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해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다. 개역개정판의 ‘새로운 살 길’보다도 개역한글판의 ‘새롭고 산 길’이란 번역이 더 낫다. ‘새롭다’(프로스파토스)는 것은 구약 시대의 의식적 제사 곧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에 비해 새로운 것, 전에는 없었던 것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자기 몸’을 제물 삼아 드리셨으니, 이것은 전혀 새로운 제사요 온전한 제사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 4:21-23)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의식적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이제 열린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었다. 여기서 ‘산 길’(호도스 조사)이란 곧 ‘생명의 길’이란 뜻이다(히 10:20). 이 길은 그냥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길이다. 영원한 생명, 참된 생명을 주는 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마 7:14).

 

   이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한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휘장’을 통해 지성소에 들어가듯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한다(마 27:51).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몸을 통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1년에 단 한 차례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비록 허물과 죄가 많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신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이며 사랑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이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하겠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한다. 구약 시대에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고 그 위에 있는 그룹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듯이(민 7:89), 하나님은 하늘의 지성소(천국 전체가 거룩한 지성소이다)에 계신다. 그 하나님의 보좌 곧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갈 때 쭈뼛쭈뼛 하거나 우물쭈물 할 필요가 없다.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뢰고 은혜를 간구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느 때든지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간구할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1년에 한 차례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힘입어 언제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담대하게 나아와야 한다. 자기 죄에 찌들어 주저주저하거나 머뭇거리거나 자학적인 분위기에 젖을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실망과 탄식이 나오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는 희망과 용기가 솟아오른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우리의 살 길이 있다.

 

 

IV.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중보자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중보자’(中保者)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속죄의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셨다. 그 후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이로써 예수님의 사역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사역을 끝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에도 계속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곧 중보(中保)의 기도를 드리시는데, 이 사역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 여기서 ‘간구한다’(엔튕카네인)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cf. 롬 8:26, 34).

 

   이처럼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쉬지 아니하시고 계속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역을 계속하신다. 예수님의 공사역은 3년이었지만, 그의 중보기도 사역은 오늘날까지 근 2천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장 오랜 사역은 중보기도 사역이다. 예수님의 이런 기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가 연약하여 자주 넘어지고 쓰러질지라도 완전히 넘어지지 않는 것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 이미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에,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회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도움으로 된 것이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벌써 넘어져서 사탄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며,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피 공로로 ‘의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것을 확신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위나 공로를 의지함이 아니다. 내가 의롭게 살거나 선행을 할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견인’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러한 성령의 기도는 우리가 깨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때에도 계속되며, 우리가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기도하지 않을 때에도 계속된다. 우리의 의식(意識)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 밖에서도 계속된다. 우리가 잘못된 길, 엇길로 갈 때에는 성령께서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우리가 옳은 길로 갈 때에는 기뻐하며 기도하신다.

 

   이러한 성령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안전하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구원은 ‘이중 안전’(더블 시큐리티) 장치가 되어 있다. 그 외에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받을 자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흔들 자가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롬 8:33)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삼중으로 안전장치가 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님의 간구’와 ‘성령의 간구’, 이런 ‘삼중 안전’(트리플 시큐리티) 장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지만 미래의 구원은 자기의 ‘행함’으로 받는다고 주장한다. 현재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은 ‘행함’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의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솔로몬도 말하기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하였다(전 7:20). 이처럼 이 세상에 절대적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시 14:2-3; 롬 3:10-18). 따라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기의 행함으로 미래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V. 은혜 받은 자의 삶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쁨’으로 율법을 지키게 된다. 구약 시대처럼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지키게 되며 은혜에 감격하여 순종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전부 다 지킨다는 말은 아니다. 다 지킬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율법을 무거운 부담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 율법 지킴을 자기의 공로로 삼지도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행하게 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전에 율법 아래 있을 때보다 더 율법을 잘 지키게 되며 더 선한 삶을 살게 한다. ‘행함’을 강조할 때는 행함이 없더니 ‘은혜’를 강조하고 나서 오히려 행함이 더 있게 된다. 말하자면 ‘윤리’를 강조할 때는 윤리가 없더니 ‘믿음’을 강조하고 나서 윤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두려움’으로 선(善)을 행한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 신자들은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여 선을 행한다. 따라서 가톨릭의 선행은 구원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며, 개신교의 선행은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함’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참된 구원의 확신은 선행을 장려하며 촉진한다. 선행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참된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거짓 구원의 확신’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선한 일을 행하게 만든다. 따라서 참된 윤리는 참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도덕 강론이나 세상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흠 없는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해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속죄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살며, 마침내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분이 먼저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찾아오시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이런 예수님의 기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으며,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도록 하자. 비록 현실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환난 중에 ‘소망’을 가지도록 하자. 오늘은 힘들게 살더라도 내일은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도록 하자. 사도 바울이 말한 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또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는 말씀을 기억하자. 이 예수님에게 우리의 구원과 영광과 소망과 모든 것이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