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0.18. 김세윤교수
린다스의 저서에 나타난 순서에 따라 히브리서의 성경의 사용,
히브리서1-4장까지 살펴보면 히브리서가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한 것을 볼 수 있다.
히브리서의 구약 해석이 알레고리적 해석인가? 일부 그러한 인상을 준다. 7-10장까지를 보면 구약의 내용들을 자세히 적용하는 것을 보면 그런 인상들을 받는다. 더구나 10장1절(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에는 율법은 다가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였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예루살렘 성전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의 모조품이다’라는 말을 한다. 일부 헬라적,플라톤적 본질적 이원론, 공간적 이원론을 사용하는 듯하다. ‘본래의 것은 하늘에 있고, 땅의 것은 그림자’라는 사고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쓰기에 구약 성경의 법들, 가르침들은 땅위에 관한 것들로써 저 하늘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그림자, 비유로, 모조품으로 해석한 것 같지 않는가/? 그러므로 성전에서의 짐승제사를 하는 레위기 법들은 하늘에서의 제사의 그림자로서 사용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있지않는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Philo나, 또 다른 유대 학자들은, 기독교 문서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알레고리적 구약 해석 방법을 비교하면 히브리서의 해석 방법은 전혀 다르다. 필로의 경우 구약의 모세오경에 나타나는 법들이나, 구약의 역사적 이야기들의 서술, 사건들에 대한 기술도 완전히 시간,공간적 터를 추상화시켰다. 그러므로 영혼의 덕목과 올바른 태도를 위해서 주어진 가치로 우리 영혼에 관한 상징적 기술로 그렇게 해석을 한다. ‘가령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났다’는 벧엘의 이야기는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라는 것을 역사적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추출해서 사용한다. 그런 경우와 비교해보면 히브리서의 구약성경은 알레고리라 할 수 없다. 히브리서의 구약성서는 종말론적 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세상과 오는 세상, 1: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절에 암시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준비하는 세대와 완성하는 세대, 즉 시간적인 이원론이다 이는 구약의 가르침이 앞으로 종말론적인 실재에 대한 예언적 성경을 띤다. 그러므로 필로나 알렉산드리아의 헬라의 유대교, 할레의 유대교적 기독교의 해석 방법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10장1절을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앞으로 올 것의 참 된 것의 그림자라” 여기서 앞으로 올 것의 새로운 것의 그림자라는 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diploma의 유대교인들에게 일부 플라톤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으나 그러나 시간론적 종말론적 해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비와 성취의 구도로 보는 것이다. 본질적인 위의 구도와 아래의 모조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3장,4장에서 본 출애굽세대의 광야 생활도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로의 해석대로 ‘그 세대에 있어서 신실하지 못함으로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이 아니라 일상적인 영혼에 대한 경고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영혼에 대한 경고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로 그 세대가 안식(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음. 마찬가지로 우리도 불순종하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대구속의 날에 예배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인 것과 상관없이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 구속의 날에 제사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완성했다는데 대한 의미가 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상세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필로의 해석대로 구약의 대 구속의 날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늘 적용된다고 하는 해석과는 다르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다른 저서들과 같이 구약을 예배적 사건으로 보고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둘째로, 초대교회의 다른 신약성경의 다른 짝들(바울에 있어서 ,사도행전에 모아진 설교에 있어서, 또는 베드로 전서 ,요한복음)에 공통적으로 묵상되고 인용되고 해석된 구약성경을 히브리서도 함께 인용하고 묵상하고 있다. 히브리서가 이런 의미에서 신약의 다른 저자들과 사도적 전승에 서 있는 것이다.
시2:7(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110편,사53장,이런 것들은 신약의 다른 저자들에 의해서 공통적으로 예수의 메시야됨과 그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을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에서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도 신약의 공통맥락에 서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시2:7, 시110편,사53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다른 신약의 저자들과 비교를 해 보면,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신약에 가장 많이 쓰이는 성경이 시110편1절(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이다. 이는 신약성경의 다른저자와 히브리서가 동일하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저자들에 비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더 많은 부분 즉,4절(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까지를 사용한다. ‘여호와가 나의 주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원수를 굴복하기 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는 말’과 더불어 4절에서 ’여호와가 메시야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음. 즉 멜기새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는 대제사장의 기독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시8편의 인용도 마찬가지이다. 고전15:25-28절(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이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에서 바울은 시8: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절을 인용하여 기독론적으로 사용한다. 그리스도가 만인 위에 군림하는 것은 . ...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론적으로도 사용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으나 조금 후에 천사보다 좀 더 높은 곳에 도달하도록 지으셨다. 예수는 바로 메시야로서 먼저 가서 그 길을 뚫고 온전함을 이루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완성에 이르도록 하신다.
히브리서의 구약 사용
1)알레고리가 아니라 예비적 계시, 약속에 대한 성취로 이해한다. 이는 플라톤적인 이원론의 경향이 있는 구절이 있으나 히브리서의 기자가 종말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2)신약의 공통적 전승과 비교해서 같은 구약 본문을 사용한다. 그러나 같은 구약을 좀더 깊이 묵상하여 깊이를 더한다
3)해석의 기교적인 면(기술적인 면)-랍비식 기교와 유사하다.
Chain citahan(줄줄이 이어져 풀이하는 방법, 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풀어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성경구절들을 인용해서 점 점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다른 두 구절에 같은 말이 있으면 서로 비교하는 것이 랍비적 해석 방법이다. 바울도 이런 경향이 있다. 또 다른 것은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예를 들면 바울이 ‘율법에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을 인용한다. 이것을 인용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사도가 복음으로 생계를 얻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적은 것인 소의 비유를 삼아서 더 큰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즉 하나님이 일하는 소에게도 먹을 것을 주었는데, 하물며 인간에게 ,하물며 사도에게 ...라고 하는 것이 랍비적 해석 방법이다. 이런 방법은 바울에게서도 자주 인용되지만 히브리서에서도 자주 나온다
4)히브리서 기자가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메시야됨과 그의 죽음으로 구원이 완성됨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변증을 하여야 했다.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구약이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을 인용해서 예수의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신약 다른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 성경은 사53:10-12절이다(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히브리서 기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다른 기자들과 좀 다른 것은 이 구절(사53:10-12)을 좀 더 묵상해서 폭 넓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53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죽음이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의 속죄의 제물이 됨을 증명함과 동시에(베드로,바울,요한) 그리스도가 하늘에 앉아계심(히7: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9: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이는 사53:12절을 인용한 것이다)
바울도 롬8: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에서 유사한 말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도 사53:12절을 인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나타난 것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5)히브리서의 구약 사용을 모형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Typology)
3장과 4장을 시편95편을 인용한 것을 보면 모형론의 인상을 준다 출애굽의 첫맛을 보고, 가나안의 안식의 땅을 향해 가는 것을 묘사는 구원받고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의 모형이 된다. 이는 고전 10장에 나타난 것과 비교를 했다. 바울은 이를 모형이라고 했다. 히브리서 기자도 시95편을 통해서 나타난 민수기를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바울이 고전10장에 의하면 모형이 틀림없다. 그러나 린다스는 모형이라는 단어를 반대한다. 즉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되풀이 되는 것이 있어야 모형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출애굽에 보아야 한다. 즉 예수를 제2의 모세라고 했다면 모형론이 된다. 가령 바울이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이라고 한 것은 모형론이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에게는 그런 경향이 없다. 이는 모형이라는 말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하는 가에 따라서 다르다. 바울이 인용한대로 모형론이라고 한다면 히브리서의 구약 성경 인용은 모형론적이다. 그러나 린다스의 경우처럼 엄격하게 적용을 하면 모형론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것은 신약에 있어서 종말에 완성될 것이 구약에 임시적(예비적)으로 비춰졌다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감(온전해짐)과 출애굽 세대의 가나안에 들어감을 예고해준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에 예비되고 약속한 것을 성취해가는 단계라고 보았다.
6)성령에 대한 가르침
히브리서의 성령에 대한 언급은 7번이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공통된 전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성령론 자체의 강조는 없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주요 논점에 성령의 중요한 역할이 되어지지는 않는다. 바울이나 요한에 비하면 성령론이 발전하지 않았다. 히브리서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언급들은 두 종류로 구분 할 수 있다.
하나는 선교와 관계된 성령의 역사,히2:4절에 히브리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된 것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이적들 그리고 성령 자신의 뜻에 따라 나누어 주신 성령의 은사들에 동반되어서 복음이 선포되었음, 여기에서 바울의 언어와 비교되었다. 바울도 자신의 복음이 표적과 기적에 의한 것이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의 힘과 동반됨.
2:4절(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성령의=πνευματος’에 ‘성령’ 앞에 관사가 없다는 점을 주지 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2장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때에 성령의 역사(표적, 사도들의 설교를 동반한)에서도 누가는 관사를 약한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도 가끔 다른 곳에서는 성령 앞에 관사를 넣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때에 넣기도 하고 넣지 않기도 하는가? 라는 논란이 있다. 이것을 문법적으로 확인하려는 자들과, 내용적인 차이로 분별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린다스는 누가와 사도행전에서 관사 용례와 비교하면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선교의 場에서 말씀선포를 동반하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날 때는 관사가 없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때. 그러나 반면에 10장29절(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처럼 ‘성령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적용해 주시는 중보자’라는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고자 할 때는 관사를 쓴다. 즉 성령의 인격성을 나타날 때는 관사를 쓰고, 다만 성령이 구원의 힘 자체에 관심이 집중 될 때는 관사를 쓰지 않는다.
둘째는 성경 인용과 관계 있다. 예를 들면 3:8(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등에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말하는 것으로 한다. 3:7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그러나 이 시를 ‘다윗의 시’라고 한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인간저자가 다윗임을 알고 있으나 ‘성령이 말하기를’ 라고 인용을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시95편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령이 다윗에게 영감을 주어서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의 영(영감의 영)이다.
예수의 제사장직
이는 히브리서의 중심 논지이다.
2:17(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에 처음 언급된다. 이는 2:1-4절에서의 경고(히브리인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떠나서 유대교로 돌아가면 안된다는 투), 다음에는 4:13-16절에 나타난다. 이는 또 3,4장의 경고(구원의 완성에로 ,안식에로 순례가는 도중에 출애굽 세대와 같이 우리가 성실하지 못하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받는다라는 경고). 또 5:1절부터 제사장직에 대한 조직적인 해석이 나타난다. 이러한 유형에 대해서 린다스는 정확하게 관찰하고 있다.
2:1-4 가볍게 지적하는 정도의 경고 (이러한 위대한 복음을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고 성령이 엄청난 능력으로 나타내고,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것을 저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3:12+4:1으로 가면서 점 점 강도 높게 진전한다
4:11-13절에는 좀 더 높은 강도의 경고가 있다
이러한 틈틈히 2:17,4:14-16에 대제사장을 소개한다. 우리를 잘 아시고 자비로운 대 제사장으로써의 예수. 여기에서 예수의 대 제사장에 대한 해석은 자비로운 대제사장(신앙에 지치고,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따뜻이 잘 달래려고 하는 것이다)
5:1절부터 예수의 대제사장에 대한 조직적인 해설
5:1-10-programmatic statemant
11-14-성숙한 이해에 대한 권면의 말
6: 호소와 강력한 경고를 한다(제2의 회개는 있을 수 없다. 한번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떠나가면 용서가 없음.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비로운 대 제사장직에 대한 설명을 한다)
7:-10:18 예수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해설이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이 독자들은 1:3절(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씻음 받았다’는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세례 후 자신들이 계속 죄를 짓는 다는 것,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양심의 많은 부담을 느낀다는 것, 그러므로 예수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므로 예수의 속죄에 대한 확신이 점점 약해지고,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과거 자신들의 율법에 따라 몸을 씻고, 음식을 가리고 짐승 제사를 드리던 그 관습을 기억하면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두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속죄의 제사가 한번 영원히 효력 있게 일어난 제사로써 우리의 (독자들) 죄문제를 해결하는데 효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는, 독자들이 실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실재로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 기자는 처해 있었다.
그런데 첫번째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종말론적으로 한번,영원히 효과있는 제사로써 과거의 죄 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해결 해 줄 수 있는 제사라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독자가 알고 있는 말로 해서는 (되풀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저자가 좀 새로운 논제로 전개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린다스는 예수의 대제사장 되어짐의 신학을 전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지금까지 독자들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교리를 저자가 개발하였다고 본다.
히브리서의 독특한 기독론과 구원론이 어디서 기원하였는가? 이를 설명하여야 한다.린다스는 히브리서의 구절 구절들을 본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경고 사이에 끼어있다. 즉 두가지 강조되고 있다. 첫째,그는 지금도 우리의 대제사장이다.그러므로 우리를 지금도 도울 수 있다.
둘째,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다.
여기에서 독자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였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 그런데 지금 자기들이 계속 죄를 지어간다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들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죄를 풀어 버리는 행위를 했다(제사를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제사가 유대인들에게 효력이 있다고 보고 회당에 가서 그 영향력을 받을까 하는 유혹을 받았다. 그러므로 저자는 구약의 제사는 예비적인 것이며, 예수의 제사가 참된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설득할 필요도 있지만 이미 그러한 것은 전해졌었기 때문에 효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현재 대세장되심과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를 가르쳐 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을 되풀이 해서는 소용이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성취가 지금도 효력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써 그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속죄를 드렸을 뿐 아니라, 시110편,시95편,사53:10-12에 나타난대로 그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시110:4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잠깐 동안 땅에서 있는 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이다)’. 또 53:12- 메시야가 죄인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연결하면 주후30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메시야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제사장이요,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은 현재의 우리의 죄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시고 우리를 도운다.
이러한 착안들은 독자들의 독특한 문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1994.11.1.김세윤, 히브리서
히브리서 5장,6장
히브리서 독자들의 특별한 상황에 비추어서 저자가 세례 이후 주위 문제로 시달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는 독자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대제사장 기독론이 시작되었다.
4장14절-16절(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는 과거에 십자가에서만 대제사장 노릇을 한 것이 아니고 현재도 하늘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문제를 돌보아 주시고 있다. 그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보아 주는 자비의 대제사장이다.
5장-6장. 메시야로서의 대제사장이다.
5:1-10. 대 제사장 기독론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분인가?를 원칙적으로 규명하는 구절이다.
a 1,2(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은 4장14-16절을 이어받아서 제사장은 원래 죄인들을 잘 돕도록 임명받는 자이다.
b 3절(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은 그의 사역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고 대신하는 사역이다
c 4절(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은 그는 하나님의 임명에 의해서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c' 5-6절(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예수가 하나님의 임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b' 7-8절(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예수가 우리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께 순종을 배웠다.
a' 9-10절(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은 예수가 제사장 노릇해서 구원을 이루었다.
위와 같은 chiasmus구조로 되어 있다.
6절에 다시한번 인용된 시110:4절에 의해서 본문은 예수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영원한 제사장이라 했다. 시110:4절에서는 제사장으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서에서는 거의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대 구속의 날에 있어서 대제사장의 제사지냄을 모형으로 일부러 예수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원칙적 선언에서 강조되는 것은) 목회적 역할이 죄인을 돌보고, 동정하고 대표하는 역할은 그것은 이미 4장14-16절에 이미 강조되었다.
그러나 물론 구약의 율법에서의 제사장의 역할도 목회적이었다. 죄인들의 죄문제해결을 위해서 제사를 드려주는일, 즉 어려움을 돌보는 제사장의 역할, 그러나 구약의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제사장의 역할은 제사를 드려주는 역할이 주로 강조되고 목회적 역할은 그것을 통한 간접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충분히 동정하고 우리의 문제를 중보 기도하고, 우리를 위해서 목회적 역할을 하는 대제사장이다. 직접적으로 대제사장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강조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예수가 목회적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2장, 4장, 5장7-9절에서 강조되는 바와 같이 그가 우리와 똑같은 시험과 고난을 받고 우리와 똑같이 믿음으로 고난을 참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을 배워서 시험에서 흔들림이 없이 잘 견디어 내었고 우리의 처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7절에서는 놀라운 말이 나온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기를 죽음에서 건져줄 수 있는 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눈물로 기도했다. 이 말은 예수의 이야기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예수의 전생애를 두 이야기 관점에서 요약한 것 같다. 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야기, 시험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시험 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헌신에 충실했음.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널리 알려짐. 순종을 배웠다는 것.
8절은 아들이면서 고난 가운데서 순종을 배웠다. 이 말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야기와 시험 때의 이야기가 겹쳐 있는 것 같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름으로써 자기가 아들임을 확인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그가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될 자격을 얻었다. 그런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임명하신다. 시2:7절과 시110편 4절을 인용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어받은 대제사장임을 확인한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기자가 개발한 독특한 기독론이다. 그러므로 다윗적 메시야이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대제사장임을 나타낸다
11-14절에서는 1-10절에서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종말론적인 제사를 드렸다. 그는 자비로운 분이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주요 논지이다. 이는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이를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숙한 이해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다음 6장에서는 이들은 기본적인 복음을 전수받았고,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것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것이 위험함을 알고, 그러므로 가장 강한 언어로 경고하고 히브리서 기자가 펼치고자 하는 새 교리,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서 수용하여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라고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5장11절에서 6장20절까지 나타난다.4장에서 5장10절까지 새 교리를 소개한다. 그리고 7장에서는 더 세밀하게 설명한다.
5장11-14절에서 기독교의 초보적인 진리와 더 성숙한 이해를 우유와 단단한 음식으로 비유하고, 우유를 먹는 어린아이와 단단한 음식을 먹는 성숙한 사람들로 비유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에서 하는 고전2장에 하는 언어와 아주 비슷하다. 특히 고전3장1절부터 3절(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까지의 언어. 거기에서도 우유와 단단한 음식, 어린아이(초신자)와 어른등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초대교회의 사도적 권면의 공통적 언어이었던 것 같다.
독자들이 초보는 가졌는데 문제는 이들이 초보까지도 버리려고 하는데에 있다. 그러므로 6장2-3절(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의 한 것이 아니니라 대 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에 이미 신앙의 기초를 놓았다. 죽음으로부터의 회개, 하나님께 대한 믿음, 세례들, 안수함, 죽은 자들의 부활, 영원한 심판 항목들을 신앙적인 초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의 시작을 버리고 성숙한데에 나가지 못한다. 그런데 6가지는 특별히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유대교에서도 똑같이 말하는 것 아닌가? 유대교에서도 종말의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수에 대한 가르침, 세례들(몸씻음)이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적인 것이 있는가? 특별히 세례들이라고 쓰는 것을 보면 교회에서의 한번 있는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교에 있었던 몸씻음, 죄씻음의 상징으로서의 몸씻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슨 까닭인가?
세례들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반복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독자들의 무리들에게 임하는 세례를 뜻한다. 안수도 세례 때에 행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바울적인 언어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은 죽음의 일들이라고 한다. 그런 것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세례 때에 있었던 설교와 관련이 있다. 즉 세례 때에 바울의 언어를 보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덧 입는다. 그리스도를 덧 입느다’라고 했다. 이러한 상징적 행위가 마치 예 아담을 벗어버리고 새아담인 그리스도를 옷입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는 세례 때의 철저한 회개, 철저한 새 사람이 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산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죽은 자들에 대한 부활이 약속되고 영원한 심판 때에 건짐을 받게되는 약속.
1-2절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례때의 설교의 강조점-죄에 대한 회개,믿음 확인
그런데 이보다 더 진전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믿음의 첫 걸음을 돌이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다.
4-12절은 이미 놓여진 신앙의 첫 기초를 허물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하고 있다.
우선 4-6절을 본다. 한번 빛을 본 자가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자가 그래서 앞으로 장차 올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을 맛본 자가 (세례받은 자의 축복을 다 받은 자가)돌아서면(실족하면, 신앙에서 떨어지면) 다시 회개하기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자신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더 확증하기 위해서 7-8절에서 농사일에서 볼 수 있는 그림 셋을 든다.
그러면서도 9-12절에서는 히브리인들이 4-8절에서 경고하는 믿음에서 떨어져서 불가능한데에 까지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고 말해주고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 그들을 돌이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본다.
6장 6절-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신약에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데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고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었다. 즉 제2회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죄를 짓고 늘 회개를 새롭게 한다. 그러나 본문은 제2회개는 없다. 그러므로 양심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본문이 무겁게 작용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고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신학계에서는 제한적인 적용을 한다.
첫째, 즉 타락한다라는 말은 큰 죄가 아니라, 일상에서 짓는 작은 죄를 말한다고 한다. 즉 큰 죄라고하는 것은 막3:29절‘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에 말하는 성령에 대한 범죄이다. 그러나 모든 죄가 성령을 거스리는 것이므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둘째, 또 터툴리안 이후로 많은 사람들은 요일5: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을 통해서 말을 한다. .
여기에는 두가지 죄가 있다. 죽음에 이르는 죄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이다. 본문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죄는 간음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6절의 것도 간음 같은 것을 말하는가, 혹은 고전 5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 처럼 심하게 간음한 자들을 사단에게 넘겨주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위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말하지를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버리는 의미로 타락한다라고 한다. 실제 히브리서 독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한다. 신앙을 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이는 1장1-4절까지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칭호는 죄에 대한 제사를 드리는(죄를 씻는 죄를 드림) 분으로 묘사되었는데 그것이 부인됨으로 그리스도는 다시 못박혀야 되는 것을 연출하는 결과를 나타낸다. 즉 복음의 가장 기초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0장26,29절이 본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10:26-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는 5:3-5절을 뜻한다.
10:29-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이는 6:6절의 완전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6장6절에서 믿음이 떨어진다는 것은 신앙을 완전히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에만 적용이 된다. 그러한 자에게는 제2의 회개가 없다. 그러므로 6장6절을 아무곳에나 적용하면 안된다. 오직 신앙을 완전히 버리는 것에만 적용을 해야 한다. 세례에 받았던 경험, 축복, 고백을 부인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사람은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 완전히 신앙을 부인하고 , 예수를 저주하고, 교회 사역을 방해한다. 이러한 자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제2회개가 없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가끔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시적인 낙심을 했었다.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본문은 믿은 척 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였다.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또 타락했다라는 말도 타락한 것 같지만 타락하지 않는 것이라는 단어가 아니다. 완전히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설명은 본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의 해석에 불과하다.
본문 뿐만 아니라 신약의 다른 기자들도 많이 경고한다.
예를 들면 바울도 경고를 한다.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 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구원 대신 저주를 받을 수 있다. 이를 고전에서 광야세대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경고는 파멸의 경고를 뜻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한다.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 지키심의 확신있는 말을 해준다. 이는 바울이 예정론과 견인론을 펼치는 것이다. 롬8:29절이 대표적인 구절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두가지는 항상 있다. 요한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어떠한가?
경고는 있다. 그리고 후에 예수는 자비로우시고,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를 알고 계신다.
6:1-8절까지의 경고에 비해서 9절부터는 확언(assurance)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6장6절의 말을 마지막 말처럼 이해해서는 안된다.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경고가 동일하게 등장하나 그 의도(Aussageafricht:용도)가 다르다.
바울의 경고는 책임있는 제자도에 목적을 두고 있다. 믿음에 깨어 있어서 두렵고 떨림으로 제자의 길을 책임있게 감당하라는 것이다. 반면에 바울의 확언은 시험과 고난을 이기고 용기와 인내를 가지라는 것이다. 건전한 믿음은 양자를 동시에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 하지 않고 문제를 재구성함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심으로 우리는 결코 파멸 할 수 없다고 하는 결론을 갖게 된다. 개혁신학측에 있는 자들은 확언 쪽만 강조하고(예정-견인론), 알미니안은 인간의지를 강조한다. 양측은 성경의 가르침에 신실하지 않고, 성경에서 형식적으로만 추출하고 역사철학의 문제로 둔갑시켜 문제를 재구성한다. 그럼으로써 논리적인 모순에 빠져 해결하지 못한다.
건전한 믿음은 안도(Gelassenheit:우리가 신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신다는 안도함,여유,기쁨,평화-이러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염라대왕으로 인식한다. 조금만 잘못해도 추상같은 호령을 하는 분.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뒤틀리고, 이웃과의 관계도 뒤틀린다)와 경고(경고가 없으면 방종하게 된다)가 겸비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이를 적절하게 설교를 해야 한다.
성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경고의 대목이 나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다시 결단하게 하고, 확언의 대목이 나오면 자신의 죄책감, 실패감으로 인하여 어려운 상태에 있으면 사랑의 아버지로써 나를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안도함을 되찾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는 건강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즉 양자의 적절한 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완전히 버리려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가장 큰 언어를 택했다.
린다스는 이 본문을 두고 질문을 제기한다.
‘믿음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갔다가 5년만에 기독교로 다시 돌아온 성도가 있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잘 돌아왔다고 환영 할 것이다’
9-12절까지에서는 엄중한 경고 이후에 다시 그들을 달래는 말을 한다. ‘너희들이 완전히 믿음이 떨어진 자는 아니다 ’
13-20절까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심’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 주신 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약속은 취소 할 수 없다. 바울이 하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예정의 언어로 지키심에 대한 확언을 준다.
그리고 7장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1994.11.8.화요일
히브리서 7,8장
지난번에 우리가 히브리서의 저자가 독자에게 당면한 심각한 고민하는 문제, 세례후 그리스도가 자기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가에 대해서 불분명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죄를 그때 그때 제사를 드림으로 해결하려는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초보의 지식밖에 없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좀더 성숙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유대교로 돌아 갈 수 밖에 없고, 다시는 제2의 회개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성숙한 지식은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는 것. 그것을 잘 이해하면 그들이 당면한 문제가 잘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제 7장부터 히브리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들어간다. 이 히브리서 기자가 원래의 케리그마를 예수그리스도가 부활되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어 만인의 주로 군림하게되었다는 시편110편에 근거한 기독론을, 히브리서 독자들이 당면한 문제와 비추어서 해결하도록 했다. 원래 케리그마는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에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게 하였다. 그러니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비유로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독자들의 문제: 자신들이 예수를 믿기 전이나 후에도 여전히 죄문제에 시달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기자는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 110편을 다시 묵상해 보니 4절에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 다시 앉힘을 받은 분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러고, 지금도 현재적으로 영원히 대제사장으로 계신다. 백성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속죄를 얻게 하시는 분이다. 그럼으로써 히브리서 독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답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때도 제사장이 되셨었다.
본문 7장은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부분: 예수가 메시야로서의 제사장이심-즉 레위 계열의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한시적인 속죄 효과를 갖는 레위계열의 제사와는 달리 예수가 드린 제사는 항구적으로 효과가 있다.
둘째, 예수의 대제사장으로써의 속죄로 말미암아 새언약이 출범했다. 그래서 구원의 새 시대가 출범했고 그렇기 때문에 죄를 위한 제사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셋째, 구약의 대 구속의 날에 모형론적 완성으로 그리는 것이다. 구약의 대속죄의 날이 그림자로 반영하려 했던 것들이 예수가 죽으심으로 완성했다는 것을 밝힌다.
7장을 열자마자 예수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라는 원래 근거는 시110:4절에서 왔다. 이는 시편110편의 묵상에서 익숙한 것이다. 이 저자는 시편을 묵상한 뒤 곧 창세기로 간다. 창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이야기이다. 그곳의 내용이 본문에 요약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이방왕들을 쳐서 살육한 후에 멜기세덱을 만나서 멜기세덱이 그에게 먹을 것으로 대접하고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치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다’는 이상한 이야기로 끝마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상한 이야기이다. 구약 학자들은 어떻게 이해 했는가? 린다스는 ‘당시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에 왕이 아닌가?“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되었든지 중간사시대에 멜기세덱의 이야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상상력들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쿰란 11번째 문서에서 멜기세덱에 대해서 언급되었다. 이 문서의 이름을 멜기세덱 문서라고 한다. 멜기세덱은 종말에 하나님의 대표자로 나타나서 대심판을 하는 자로 그려졌다. 자세히 보면 시81:1절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과 동일시 되어서 나타난다. 또 자세히 보면 사61장1,2절에 해석으로 주어진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문서는 정작 창14장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창14:18-20)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 문서와 히브리서의 제사장론은 내용적인 유사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쿰란문서에서 히브리서가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필로의 leg, all III권에 멜기세덱을 알리고리화 해서 장황하게 표현한다. 즉 열정을(감정을) 다스리는 이성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플라톤적인 이원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창세기와도 관련이 없고, 히브리서와도 관련이 없다. 다만 히브리서 1장에는 멜기세덱에 대한 이름이 분석되어 있다. ‘나의 왕‘이라는 분석이다. 이 처럼 또 그 예루살렘의 왕(평강의 왕)이라는 언어분석을 하고 있다. 필로도 이런 분석을 하고 있다. 필로는 히브리어를 모르고 있다. 이름과 칭호에 대해서는 ’의의 왕, 살렘의 왕,평강의 왕‘이라는 분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당시에 멜기세덱에 대한 분석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라는 말이 필로의 책에도 나온다. 이런 인식이 당시에 널리 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시110:4절과 연관을 시켜서 영원하나 대제사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다(히7:3). 히브리서 1장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는 기독론으로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바로 이에 연유한 것이다
영지주의 Nig haman이라는 문서(멜기세덱)를 분석해보면 히브리서에게 영향을 준 문서가 아니라 히브리서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11 Q Melichizedek와 Philo의 문서는 당시에 멜기세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나타낸 것과는 본질적으로 내용이 다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보다는 창14장과 시편 110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자는 멜기세덱의 대제사장과 예수의 대제사장과 되심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첫째,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음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기술과 똑 같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써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았다.
둘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것은 6절이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큰 자가 아랫사람을 축복한 것이다. 멜기세덱의 아브라함보다 제사장의 계열 레위족속보다 더 우월하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레위계열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셋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이는 레위계열의 조상인 레위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는 것은 부족적 인종적인 것을 나타낸다.-즉 레위의 제사장들이 레위의 허리에 있었고,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 이는 그 후손의 씨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멜기세덱의 레위계열의 제사장들보다 월등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racial/national solidarity)
맬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었다. 이것을 후에 교부는 중시해서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써 성찬을 베푼 것‘으로서 해석을 했다. 그러므로 성찬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상응하며, 제사로 상응한다 성찬에서 받는 떡과 포도주를 제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카톨릭의 제사신학을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를 반영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려고 한다.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베품으로써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제사에 참석하게 했다는 것에 동의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교부의 신학과는 다른 것이다. 종교개혁이래로 카톨릭이 미사(제사)로 표현하는 예배에서 성찬을 중시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졌다. 성찬이 제사라고 볼 수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유용하게 표현한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이를 인용했다면 카톨릭의 신학을 뒷받침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인용하지 않았다.
레위계열의 제사장보다 멜기세덱이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준뒤에
11절부터 28절까지 종말론적인 제사장직을 말해준다.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표현한다. 즉 종말이 이름으로 인하여 그 이전의 것은 임시성의 시효를 잃어버렸다. 즉 심판에 당도했다. 예수가 종말론적인 제사장임을 밝힌다. 예수가 레위계열의 후손이 아니고 다윗 계열의 후손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레위계열의 제사장이 될 수 없다.다윗계열의 자손으로서 종말론적인 제사장이다. 이 예수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다. 그 제사를 (예수의 죽음) 인하여 예수는 구원자이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을 베풀수 있는 분이 되었다(히7:25’그러므로 자기를 힙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예수의 대제사장으로써 그 십자가의 제사가 한시적인 레위계열의 제사에 대한 종말론적인 완성의 제사라는 것과, 그리고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레위계열의 제사로 복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옳지 않는 일이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 예수의 멜기세덱적 제사장직과 레위계열의 제사장직이 다른 것을 보여줌으로써
16절(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후계자에 의한 (상속개념) 제사장직 승계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예수는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멸망 할 수 없는 생명의 힘으로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레위 계열에 속하고 그래서 대제사장직을 상속받는 그런 개념이 적용이 안된다. 예수는 메시야적 대제사장이다.
둘째로, 레위계열의 제사장직은 그것을 제정한(출28,29)것은 맹세함이 없다. 그러나 시110:4절은 멜기세덱적 제사장직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맹세를 하셨다(영원한 대제사장이다라고). 이 점에 있어서도 멜기세덱적 제사장직이 우월하다(20,21‘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셋째,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고, 부활하고, 영원히 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는 상속할 필요도 없고, 후계자도 필요가 없다(23,24’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 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제사장직을 아버지로 물려 받아서 아들이 이어받는 이러한 레위계열의 제사장직의 승계를 예수는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넷째, 레위계열의 제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었으나, 예수 계열의 제사는 한번에 완성되는 것이어서 항구적인 것이 된다(25절,‘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영원히 사신다) 27절(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에서는 매일 드리는 제사는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독자들이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레위계열의 제사의 부족함을 설명하고 멜기세덱의 제사가 우월함을 보여준 뒤에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가 훨씬 더 월하고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것이 독자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현재형).라고 한 말은 예수의 제사에 대한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시110:4절에 멜기세덱에 대한 맹세는 구약의 언약에 대한 확신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을 8장6-3절까지 말해준다.
25절.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기 위해서 영원히 사신다(현재), 영적 언명, 무시간적 언명) 그래서 그 제사장직이 현재 효과가 있다.
26절. 거룩하심과 흠없으심, 하늘에 높이 올림 받으심. 이런 것이 예수의 대제사장직으로써 온전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하늘의 성전에서 현재 우리의 제사장직을 수행하기에 합당하심
이상의 것을 요약하면
메시야적 종말론적 영원한 대제사장
레위계열의 제사장보다 더 월등함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과거 현재까지 해결됨
반면에 레위계열의 제사는 효력을 상실했음
이 모든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대제사장이 있다’ 이 말은 시110:1절에 있는 말이다. 기자는 110:1절과 110:4절을 겸하여 쓰고 있다. 이 말은 그가 우리를 현재까지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우리의 현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제사장직을 감당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기자는 초대교회의 공통적인 케리그마에 함축된 내용을 해석해 내고 있다. 그러므로 8장1절의 하나님 우편에 우리의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의 강조가 예수의 현재적 효과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대제사장직을 이야기 하려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제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과거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제사를 논한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드린 제사는 새언약을(렘31:31-34)의미한다. 이것을 8장7절이하에서 인용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예언된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또 10:16절에 다시한번,17절에 다시한번 짤막하게 인용된다. 8장8절과 10장16절 사이에 예수의 십자가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예수의 죽음을 새언약의 제사로 해석하는 것도 당시의 일반적인 이해였다. 고후3: 이후에 언급된 바대로이다. 롬11:26,롬3:25,26 등에도 같은 내용으로 쓰여진다.
예레미야서의 새언약에 대한 이해는 쿰란 공동체에서도 중요하게 이해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새언약의 공동체라고 말했다. 다마스커스 문서를 보면 쿰란 공동체의 문서와 유사하게 취급한다.
여기에서 두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히브리서 기자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새언약의 제사로 보는 것은 초대교회의 공통 케리그마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처음 선포되었던 내용속에 이 사상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 독자들은 지금과 같은 문제에 빠져서 옛 언약으로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가? 히브리서 독자는 옛언약과 새언약의 차이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서 독자는 옛 언약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예는 사도행전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유대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하여 할례(옛언약의 상징)를 강조한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2)반면에 쿰란 공동체는 새언약의 공동체라고 자칭함으로써 옛 언약이 파기되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CD문서:다마스커스 문서-쿨만공동체 문서의 일부 또는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됨) 바울도 옛 언약이 파기되었고 새언약이 성취되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논쟁의 구조는 히브리서에 나타난 구조와 유사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언약에 의한 제사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졌는데 , 레위계열의 제사장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예수의 제사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에 의해 완전히 무효화된 것을 보여준다. 예전에 드려졌던 제사는 예수의 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종말에 실체가 왔으므로 그림자는 소용없음을 앞으로 보여줄 것이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자체에 대해서 예전에 드려졌던 제사의 장소인 성전은 하늘의 성전의 모조품이요 그림자에 불과하다(히8:7절과 출25:40절을 비교-시내산에서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모본에 따라 성전을 만들라. 그럼으로 옛 언약의 법에 의한 성전은 하늘의 성전에 모사품이다. 모형에 불과한 것이다. 이 언어가 플라톤적인 냄새를 풍긴다. 위에의 실체와 여기에서의 모조품. 아닌게 아니라 필로도 출25:40절을 애용했다.
이는 플라톤 철학에 잘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 구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를 잘 애용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히브리서에 있는 이원론은 철저히 위 아래의 수직적, 공간적 이원론이 아니라 이세대와 오는 세대 일시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 시간적 평면론적인 유대적 이원론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시간적 평면적 유대교적 이원론과 위 아래의 수직적 공간적인 이원론이 아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히브리서에서는 빈도에서 보면 플라톤적인 이원론을 요한복음보다 훨씬 작고,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언어의 유사성은 있다. 그러므로 히8:5절의 해석은 이는 구약자체에 있는 사상이 아니라, 근동에 있는 일반적인 사상이다. 모든 땅의 것들은 하늘의 원형의 모형이다라는 것이다. 에스겔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특별히 헬라적 이원론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계시록 4:5. 또 중요한 것은 헬라적 이원론은 하늘의 원형과 땅의 모형이 항상 공존한다. 그러나 히브리 구약과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하늘의 원형과 땅의 모형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종말에 실현되어서 땅의 것이 무효화되어 버린다. 하늘의 것이 땅의 것에 대해서 대체됨. 하늘에서의 성전의 실체, 하늘에서의 제사, 멜기세덱적 메시야적 제사장직에 의한 제사가 땅에 세워진 성전, 레위계열의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졌던 제사들을 완전히 대체 할 것이다. supersession,replacemant))
1994.11.15.화요일
히브리서9장과 10장
9:1-10:18=예수의 제사
7장8장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 대제사장이 자신을 제사로 드렸다. 그 제사가 두가지로 해석되어 있다. 하나는 속죄의 제사로 해석이 되어 있다. 또 하나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이다.
9장전반부에 예수의 제사를(죽음을) 레위기 16장에 규정되어 있는 대 구속의 날의 제사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고, 그 다음에 9장15절부터 예수의 제사를 출24장의 언약의 제사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16장의 대 구속의 날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구약의 모든 제사의 종말론적인 완성임을 보여준다. 완전한 속죄의 제사임을 보여준다.
반면에 예수의 죽음을 출24장의 언약의 제사에 비추어서 다시 설명하는 것은 그것이 영원토록 효과있게 드려진 제사이다. 그 제사는 지금도 효력을 발휘함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대 구속의 날에 제사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는 것은 혹 신약의 다른 곳에 그런 흔적이 있는가?라고 학자들이 논쟁을 한다. 가령 롬3:24-26절까지에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대 구속의 날의 제사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고 있음을 인용하고 있는가? 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그래서 롬3:24-26까지가 예루살렘 교회의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인용하고 있는가? 그것이 원래 신앙적인 고백이었다면 대구속의 날의 제사의 카테고리로 이해하는가 하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약간의 한 두곳에 흔적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죽음을 대구속의 날에 제사로 설명하는 것은 히브리서 외에는 없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이 중요한 논지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이 속죄의 제사라는 것이 신약의 일반적인 흐름이다. 속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대 구속의 날에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이 대 구속의 날에 드리는 제사로 설명 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둘째로 적절한 이유는 히브리서 독자들의 문제와 결부해서 적절하다.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자신들의 죄사함의 체험을 가졌으나, 세례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계속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에 대한 문제를 느끼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벽을 느끼고 유대인의 율례대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다. 이들에게서 가장 매력있는 것은 유대교에서 계속 드려지는 제사이다 그것은 대구속의 날에 드리는 제사이다. 대구속의 날은 1년에 한번 드려지는 제사였고, 그 제사로 매일 회개와 매일 매일 드리는 제사와, 또 자기들이 특별히 지은 죄를 인한 율법의 규정에 따른 제사, 이런 것(1년 내내 진행되는 제사)에도 해결되지 않는 죄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대 구속의 날에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는 죄에 대해서 한꺼번에 속죄를 받는 대구속의 날에 강력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제사가 있을 때 전 유대인 세계에서도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이 기간동안 전세계 모든 유대공동체에서 대구속의 날에 제사를 아주 엄숙하게 지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가령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유대교와는 분리되어서 살지만 유대인 공동체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속의 날을 옆에서 지켜 볼 때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부딪힐 때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대구속의 날에 입각해서 예수의 죽음을 해석해 줌으로써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 구속의 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게 하고, 종말론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함으로써 유대교적 대 구속의 날에 동경심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정공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유효 적절한 것이다.
9장에서 10장까지 걸쳐서 진행된다.
9:1-14까지 집중되어 있다
9:1-10까지는 레위기 16장에 규정되어 있는 대 구속의 날에 대한 일반적인 기술-장막의 구성(두 곳으로 되어 있음, 거룩한 곳과 지성소-성소에서 지성소로 나아가는데 장막이 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속죄소가 있음. 지성소 내에 있는 기구들에 대한 기술이다. 이는 출30:1-5,16:32절이하 등에 나타나 있다) 신약 시대에는 지성소가 텅 비어 있었다. 이는 요세푸스가 증거하고 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소가 파괴됨으로 지성소의 도구들도 약탈, 파괴되기도 함으로 제2성전에는 회복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지성소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시은소는 있지 않는가 라고 추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자는 왜 지성소의 도구를 그리는가? 히브리서 기자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에서의 실제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규정에 의해서 토론하기 때문에 지성소의 도구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지성소의 장막의 구성을 그리면서 대구속의 날을 설명하면서 특히 두 가지 점에 유의하면서 강조를 한다. 하나는 장막이 두 방으로 되어 있다는 것, 성소와 지성소, 둘째는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 그것도 1년에 한번, 대 구속의 날에 들어가서 시은좌 위에 향을 피우고, 그 위에 속죄제물의 피를 뿌렸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 두가지 사실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첫째로, 과거 율법 체제 아래서는 유대교 체제 아래서는 하나님께 나아감이 극도로 제한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대 구속의 날에 복잡한 제사를 거쳐서도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대 제사장만 나갈 뿐이었다. 또한 항상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1년에 한번만 나갔다. 이는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감’과 대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서는 진정한 속죄, 하나님과의 화해, 친교(fellowship)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방이 두개로 되어 있다는 것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저자는 본다. 8-9절(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에 의하면 성령에 의한 예라는 것으로 본다. 즉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이 레위기, 또는 모세오경의 다른 곳(민수기, 출애굽기)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도록 명한 것은 구원의 두 시대에 대한 예언을 한 셈이다. 그 성소는 지금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과 그곳에서 드려지는 상징하는 것이고, 지성소는 하늘의 성전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새언약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우선 장막 성소와 지성소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그 자체가 벌써 율법 아래에서의 성전 안에서의 제한된 효과(부족함, 불완전함)를 나타낸 것으로 히브리서기자는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9-10절에 중심 논지가 전개된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제사로서는 그것이 심지어 대구속의 날에 제사라 할찌라도 예배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었고, 기껏해야 외형적인(외적인) 정결이나 좀 이루는 그 정도에 그친다.(몸에 속하는 정결)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양심이라는 말은 (9:9,13:18등등) 히브리서 기자가 자주 쓴다. 이는 우리의 내면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간하는 것 보다는 지금 자신의 윤리적 위치(위상)에 대해서 알려주는(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가?)것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양심이란 말을 쓴다. 그런데 율법에 의한 제사는 그것이 심지어 대구속의 제사라 할지라도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하다. 독자들은 야심에 부담을느낀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죄를 짓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혹 유대교로 돌아가서, 대구속의 날에 제사를 드리면 양심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정면으로 공격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장막의 구성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대제사장 한 사람만 1년에 한번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는가 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셨는데 그 하늘의 성전은 땅의 모조품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완벽한 것일 뿐만 아니라 손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고(11절, 이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다. 새 창조에 속한 것이다. 새 세대에 속한 것이다) 거기에 들어가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14절‘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같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년 대제사장이 대구속의 날에 드려졌던 그림자에 반영되었던 실제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늘의 성전(새시대의 성전)에 들어간 것인데 그것은 구약의 율법에 대제사장들이 매년 대구속의 날에 드리어진 제사의 종말론적인 완성이다.
이것을 10:1절에 요약하고 있다“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 아래서의 제사는 그것의 반영에 불과했기 때문에 해마다 되풀이 했다. 즉 항구적인 효과가 없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여러가지로 대구속의 날 뿐 아니라 구약의 율법 자체를 여러가지 분석해서, 외적인 우리의 모습을 정결케 하는데 에는 도움이 되나, 내적인 정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과 대조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우월성, 종말의 성취를 이해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유대교의 껍데기를 벗어버릴 것을 말하고 있다.
속죄의 날에 대 구속의 날에 제사의 부족에 비추어서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으심이 종말의 효과를 강조한 후에 ....
예수의 속죄의 제사가 종말론적인 제사로서 항구적이었음을 강조했다.
그 이전에 저자는 몇가지를 지적한다.
9장에서 구약의 레16장에 드리는 제사에 비추어서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는데, 꼭 필요한 것만 인용해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12절에 ‘예수께서 하늘의 성전에 들어갔다. -εις τα αγια라고 쓴 것에 유의하라.
9장3절에 땅에 있는 것은 성전과 지성소로 되어 있다. 대 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갔다라고 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갔다고 해야 옳은데 , 왜 성소에 들어갔다고 했는가? 어떤 사람들은 필사자들이 잘못 베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하기 보다는 묵시록 (4,5장)저자나, 히브리서 저자는 두 방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되어 있다. 하늘의 성전의 모조품인 땅에 있는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으나, 하늘의 성전은 한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암시는 우리 모두가 하늘의 성소에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레16장에 대구속의 날에 중요한 의식 중 하나는 속죄양을 광야로 내 모는 의식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레16장의 법대로 하면 두 양을 택하여서 한 양은 도살해서 그 피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로 가서 제사를 하는 것이고, 한 양은 그 후에 백성의 모든 죄를 덮어 씌워서 광야로 내 몬다. 그러므로 대구속의 날에 이중 의미(하나는 우리의 죄를 양의 피로 죄를 덮음, 둘째로, 죄의 본거지로 내 모는 것을 통하여 극적인 효과를 노린다.)가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데는 제사드리는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8: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으로 이루려 하심이더라),벧전2: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요1:29절(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이하 등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진 양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몰아진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사53:4-7절에 나타난 주의 종의 노래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속죄양에 대한 노래가 아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이러한 것은 무시된다. 오직 제사드리는데에만 집중되어 있다.
대구속의 날에 양과 소의 제사로는 진정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 다음에 대제사장은 스스로 흠이 있어서 소로 제사를 드렸어야 했다. 이것에 비해서 예수의 속죄의 제사는 죄 없는 ,흠없는 예수가 (14절’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대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속죄로 드렸다. 이것도 두 가지의 강조점을 두고 있다. 죄인 일 수밖에 없는 대제사장이 짐승 제사를 먼저 드릴 수밖에 없음에 반해서,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인 자신이 제물이 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기자는 이러한 것 두 가지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유대교의 대구속의 날의 한계성에 반해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의 절대성을 확실히 부각시키는 논증을 했다.
그리고 15절부터 28절까지는 더 나아가서 대 구속의 날에 종말로서의 예수의 죽음이 항구적인 효과가 있다. 이러한 논증은 예수의 죽음이 속죄의 제사일 뿐만 아니라 새 언약의 제사이다라는 카테고리로 논증하고 있다. 이미 9:11절(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에 그 주제가 예고 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미 도래한 좋은 것들의 대 제사장이라. 대 제사장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벌써 두 시대로 나누고 있음을 율법에 의한 제사 시대에 비추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구원의 시대로 나누어짐을 암시하고 예수를 새 언약의 중보자로 지칭하고 그의 죽음이 새 언약의 제사이기 때문에 그 새언약의 덕을 입는 자에게는 (믿음과 구원에로 부름을 입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
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사는 과거의 죄를 해결하는 제사이다. 그러나 언약의 제사는 새 구원의 시대를 여는 제사이다. 그런데 바로 예수의 죽음이 속죄제사로서 우리의 과거의 죄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제사로서 항구적으로 효과 있게 한다(9:15-28)
이러한 논증의 일부에 언약 이란 말(διαθηκη )의 이중 의미(구약의 고전적인 의미, 유언이라는 헬라적인 의미)를 적절히 이용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출14:8절의 언약의 죽음으로 이해하니까 이 죽음은 언약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야 하는데 왜 헬라적인 의미로 이해하는가? 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히브리서 저자의 관점에서 ’유언‘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 얻어 내려는 것은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효과를 발생한다‘는 원칙을 얻어내려고 한다. 예수는 언약을 세우려는 분으로 스스로 자기의 죽음으로 그 언약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쉽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특별히 히브리서 저자가 구약의 언약에 담겨져 있지 않는 새로운 뜻을 가미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가 새언약의 중보자로서 그 자신이 죽음으로서 그 언약이 유효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언약을 효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막14:24‘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히브리서 기자가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렘31:31절(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에 예언된 새 언약의 제사로 설명해 주었다. 교회, 성도,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정의(벧전2: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를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양도하고 있다.
고전11:25절(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에 바울이 전승한 바에 의하면 유언의 성격이 강하다. ’이것을 나를 기념하여 행하라‘그래서 고전11:25절의 바울의 덧붙인 말이 원래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전통적인 전승이라면, 유언의 성격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새언약과 유언의 성격을 동시에 적용하여 예수의 죽으심을 설명하려고 한다.
9:23-28. 지금 까지의 자기의 논증을 요약한다.
구약의 제사는 일시적인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새언약으로서, 새 시대를 여는 항구적이고 효과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사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자는 그리스도의 제사는 항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10:1-18,지금까지 논증한 것의 실제적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의 제사였고, 우리가 새언약의 구원을 덧입는 자가 되었는데, 새언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양자의 관계)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하는 일이 있고, 우리는 언약의 관계가 요구하는 일을 할 것이 있다. 이것은 거룩함, 온전해짐이다. 이것을 지금 설명을 하고 있다. (10:1-18)
9:23-28,앞의 논증을 요약한다. 이것이 10:4절까지 지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대구속의 날이 해마다 되풀이 되었다는 것은 ’그런 제사로 항구적인 속죄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 아닌가? 즉 소나 양의 피로는 원천적으로 죄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속죄일의 제사의 원천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피 흘림의 제사로 죄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수의 피흘림은 어떻게 항구적인 효과를 얻겠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히10:5-10절에 나타난다. 시40:6-8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피를 요구하지 않고 순종을 요구한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겠다고 서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40:6-8절의 대조(제사와 순종)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의 제사와 예수의 순종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구약은 모두 예언의 책이기 때문이다.
7절에 시인이 ’내가 그렇게 순종을 제사보다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겠다‘라는 시인의 말을 그리스도께서 한 말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미리 할 말을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 시인에게 미리 말하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이 진정으로 효과 있는 것은 그것이 제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었기 때문이다. 제사는 사실 근본적으로 죄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어떻게 짐승의 피가 우리와 하나님의 완전한 화해를 가져다 주겠는가? 제사는 단순한 순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종말론적인 속죄의 제사요, 완전한 제사라고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예수의 제사는 순종 때문이다.
시40:8-내가 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려고 왔다 -고 하는데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읽어낸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거스림이다. 그러므로 거스림에 반대되는 순종을 통해서 죄를 해결 할 수 있다. 예수는 (히2장) 우리와 같이 되셨는데, 우리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사상들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한번 이러한 사상들을 모은다.
히10:10-12에서는 시110편이 다시 한번 인용(암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예수를 다시 살리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신다. 즉 원수가 발아래 있기 까지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하신 후에 재림하시기 까지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전12:25)
히10:13-18는 렘31:31-33,34을 인용한다.
히10:16-17는,렘31:33,34만 인용되었다-율법을 우리 심장에 넣고, 우리 마음에 쓴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로 순종을 규정하는 것이다.
34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새언약의 관계에서 하나님 편에서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하도록한다. 그래서 성화에 이르도록 한다( 34절은 ’내가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고, 허물을 기억하지 않겠노라‘)
10:19절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언약에 대한 요구를 하신다. 믿음 ....
*히9장과 10장은 속죄의 제사와 새 언약의 제사에 대한 내용이다.
1994.11.22.화요일
10장19절부터 13장까지의 내용
독자들이 지금까지 저자가 다시 한번 독자들의 상황과 다시 한번 연결시켜서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언약의 제사에 어떻게 믿음으로 적절하게 반응해야 하는가? 부름,초청, 실제적인 요청의 부분이다.
이는 결론 부분에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받았으니
11장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역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웅들의 예를 나열함으로써 설명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같은 믿음으로 종말의 부름에 가도록 하는 것이다
12장은 더 실제적인 것이다.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가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받게 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들로 교육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라
13장도 실제적인 것을 다루면서 히브리인들에게 제일 먼저 복음을 전했던 선생들, 지도자들의 말을 잘 듣고 그들의 모범을 잘 따라서 뒤쳐짐 없이 신실하게 나가도록 한다.
7-10:18까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로 설명을 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대 구속의 날에 제사)를 종말론적으로 완성함으로써 구약의 제사를 폐기했다. 다른 한편 한번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종말에 새언약(구원)의 시대를 열어서 지금도 직접적인 효과가 있는 일을 예수가 하셨다라고 예수의 제사를 소개한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말씀하신 그 약속이다. 그 약속이 계속 유용함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의 비밀을 옳게 깨달음으로써 믿음으로 복음에 대해서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10:19절에서 말하려고 한다.
10:19-10:39-앞에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요약한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 말해준다(10:19절). 이는 예수께서 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의 길을 텄다. 이것은 앞에서 효과적으로 그림으로 사용했듯이 대구속의 날에 대제사장이 휘장을 뚫고 지성소에 나가서 제사드린 것과 유비시켜서 설명한다. 즉 예수님이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묘사한다. 예수께서 새롭고 생명을 주는 길을 열었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길은 유대체제에서는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진정한 제사를 드릴 수 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휘장이었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영지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영지주의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곳 외에는 다른 곳에는 없다.
히브리서 2장에는 예수가 우리와 똑 같은 입장이 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셨다. 이러한 사상이 110장에도 나타난다(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들의 길을 터놓았다는 사실)그러므로 그는 유리를 대표 할 수 있는 분이 되었다. 그는 종말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마음에 피뿌림을 받아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세례의식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다-겔31:25절에 영향으르 받고 있다. 세례 요한은 세례시에 이를 적용했고, 예수도 적용했다)
2)서로 권면해야 한다
3)성도의 교제 모임속에 열심히 참석해야 한다.
*믿음을 완전히 부인한 자는 믿음을 회복 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은 모든 증인들의 증언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짓밟고 욕되게 하는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다.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27-31절까지는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러나 32절부터는 달래기 시작한다. ‘너희들이 그 상태에 이르지 않고, 그렇게 이르지 않도록 주의해라’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2:2-3절을 인용한다. 하박국도 자기들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의 개입이 지체됨으로써 신앙이 흔들렸다. 그럴 때 하박국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인들이 유대인들로 돌아가려는 원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체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체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삶은 핍박이 오지만(유대 공동체에서의 압력) 이러한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면 해결 될 수 있을 터인데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함을 뜻한다. 즉 언약하신 하나님이 언약을 꼭 지키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뒤로 물러서거나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합2:4에서는 롬1:17절에서 바울이 인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인이 됨을 논증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바울식으로 쓰지 않고 달리 쓴다. 쿰란 문서 중에 하박국서에 대한 주석이 있다. 즉 쿰란 공동체에서도 하박국 2장4절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합2:4의 전승사적인 발전의 경로를 추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와 함께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바울과 쿰란 공동체에서 공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여간 믿음은 복음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요한,신약 공동체,히브리서 저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믿음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기독교에서는 중심이다. 구원을 얻는 수단이다. 이러한 것은 기독교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는 믿음이 강조되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이 다른 종교들의 해석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할려고 들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하는 듯 하나, 힌두교 같은 곳에서는 앎이 중요하다. 즉 헬라적이다. 힌두교나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이 구원의 수단이다.
구약에 있어서도 믿음이라는 말이 빈번하지는 않다. 그런데 나올 때에는 아주 중요하게 나온다. 합2:4, 아브라함의 믿음(창12,15장),롬4장-시편의 한 두곳, ...등이다
그러나 빈도에서는 흔하지 않다. 그러므로 자연히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해서 신약시대에 사도들의 가르침에 믿음이 중심부분을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설명하는데 중심적인 카테고리로 등장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신학적인 잇슈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쳤는가? 공관복음서에서 자신의 구원의 힘을 덧입으려는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의 뜻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인다. ‘복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선포에 대한 사건,-죽음’ 이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 함축된 것은 그 구원의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신뢰함이라는 개념이다. Trust와 관계가 있다.
히브리서,바울,요한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는 다 일치한다(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임,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 그런데 바울은 기본 뜻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가? 아니면 선행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가?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옳지 않는 교리와 싸워야 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본 개념에 집중되어 잇다.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 신뢰에 근거해서 ..
즉 우리의 신앙고백을 철저히 지킴이다.
히11:1-믿음의 정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실상 υποστασις-밑에 가라앉는다(substance,foundation,assurance). 그러므로 단단하게 된다. 기초, 확신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믿음이 무엇인가? 손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실체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증거 ελεγχος-실험하다 라는 뜻이다.
이 정의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다.
3절: 믿음의 영웅들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3절은 1절의 정의와 4절에 부터의 믿음의 영웅들의 예와 다리를 놓는 다시 한번 믿음의 원칙을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믿음으로 안다.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4절부터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약속은 미래적인 것이다. 그 약속은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인 성취는 새언약의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멀리 바라보면서 살다가 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그네 같이 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와 함께(부활의 시대를 의미함)...
즉 이들이 당대에 믿음으로 삶으로써 , 당대에 축복을 받아 누렸으나 ,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재림, 부활에 선취할 것이다.
12장은 예수의 궁극적인 믿음의 예-예수께서 어떻게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2절)‘하나님과 함께함’을 향해서 믿음을 지키고 믿음의 길을 가신 분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분은 믿음의 완성하셨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죄의 문제(독자들의 죄)를 다 제거하고
3절. 피곤하여 낙심치 말고 열심히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한다. 그 길 중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있다. 그 고난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교육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을 극복하고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직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고난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니 우리의 고난을 너무 연연해 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라.
12절. 피곤한 성도는 무릎을 세우고 달려가야 한다.
14절. 고난 가운데 믿음의 길을 가는 길은 무엇인가? ‘화평을 도모, 거룩함을 좇고, 하나님으르 보는것(하나님께 나아감)’으로 구원의 완성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15절. 우상숭배하는 것, 음행, 간음, 쓴뿌리(신29:18절-쓴뿌리가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가 있어서는 안된다. 이것의 대표자는 에서이다(하나님의 약속을 경외하지 않는 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장자권을 버렸다-그러므로 유대 문서에서도 에서는 가장 악한 자의 예로써 나타난다)
18절- 시내산에 모세의 세대가 행하였던 것을 무섭게 표현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만남에 대한 약속(구원의 약속)과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에 대한 엄청난 심판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당도하는 산은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22절)’이다. 하늘의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도성,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계시록)등을 의미한다.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만남이 우리가 앞으로 하늘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만날 것을 나타내는 유비이다.
에서가 등장하는 것은 에서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이 독자들이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을 잃어 버리면 장차 하나님으로 부터 무서운 징계를 받을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이 심판 하실 때에는 시내산이 온통 흔들렸던 것처럼 온 세상이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 때에 찬송하고 예배 할 것이다.
13장.형제 사랑을 계속하고.......=구체적인 선을 제시한다.
즉 복음을 전한자와 가르치는 자들의 말을 잘 듣고 행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