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로마서 강해

[스크랩] 로마서 연구

에반젤(복음) 2019. 12. 19. 09:16


                                                          

로마서 연구

 

 

차    례

Ⅰ. 들어가는 말 ------------------------------ 1
Ⅱ.역사적 상황
Ⅲ.기록연대와 장소 --------------------------- 2
Ⅳ.서신의 기록 목적
Ⅴ.서신의 신빙성 ------------------------------4
Ⅵ.로마서 내용의 타당성  ----------------------5
Ⅶ.로마서의 구조와 보전성 ---------------------7
Ⅷ.로마서의 중심 주제 ------------------------12
Ⅸ.내용의 개요 -------------------------------15
Ⅹ.로마서에 있는 사상의 발전 -----------------19
?.로마서의 주요 교리들 ----------------------20
?. 로마서의 주제별 강해 ---------------------24
ⅩⅢ. 결론 -----------------------------------30
참고도서 -------------------------------------31

 

 

Ⅰ. 들어가는 말

 

로마서는 바울의 모든 서신들중에서 가장 위대하며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신학의 최초의 위대한 작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교리적인 해석은 어거스틴의 시대로부터 서양인의 사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복음은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서나 거짓된 복음들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의 역할을 해왔다. 이것은 로마서가 타락하고 무기력한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해,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서신을 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바울을 보다 가깝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니라, 위대한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을 체계화시킬 때 왜 그것을 그토록 중요시하였는가을 이해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먼저 로마서가 쓰여진 역사적 상황과 기록 연대와 장소등을 고찰해보았다.  그후 로마서의 신빙성과 보전성에 대해 현대 신학자들의 의견을 검토해봄으로서 정경으로서의 가치를 재인식할 수 있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의 내용 개요와 그 사상의 발전 과정, 주요 교리들을 서술하여 서신의 전체적인 맥락을 분명히 이해할 수있도록 노력하였다.
이 작은 글을  통해서 주예수님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로마서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지식의 보고를 얻게 되길 기도드린다.  

Ⅱ.역사적 상황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있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 처리가 끝나갈 무렵에 고린도 지역을 방문하고 3개월간 머물렀다. 그후에 이방 교회의 대표자들과 함께 유대의 가나한 성도들에게 줄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었다.(15:14-29) 헌금을 전달한 후에 바울의 중요한 계획은 서방세계에서 새로운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스페인 여행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교회들은 바울에 의해 세워지지도 않았고 또한 그곳의 성도들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로마에 가고자 했던 또 다른 이유는 스페인이 바울에게는 온전히 낯선 처녀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게는  스페인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로마교회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그들의 도움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로마교회를 스페인 선교를 위한 교두보로 삼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Ⅲ.기록연대와 장소

서신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현 위치에 대한 암시들은 모두 그가 3차 선교여행이 끝날 무렵 헤랄 에 머물던 기간을 가리키고 있다. 그의 얼굴은 이제 명백히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를 방문하려고 계획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서바나까지 선교여행을 하거자 계획 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5:24) 이제 그의 동쬭으로의 여행은 끝났으며, 이것은 사도행전 20장의 내용과 잘들어맞는다. 게다가 그는 거기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었으며 로마서 15:25에서 가난에 부딪힌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 많은 교회들이 낸 헌금을 가지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3차 선교 여행이 끝나기 직전에 이 서신을 썼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결론을 확증하기라도 하듯 16장에는 고린도가 헌금을 급송한 장소라는 암시들이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그 헌금이 로마가 아니라 에베소로 보내졌다고 믿기 때문에 16장을 가지고 앞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이것을 제쳐두더라도 뵈뵈가 추천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녀는 고린도의 두 항구중 하나인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였다. 그리고 바울은 지나가는 말로 가이오를 언급하는데 그는 바울이 서신을 쓸 당시, 바울이 머물던 집의 주인으로 고린도 전서1:14에 언급된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로마서의 기록연대는 AD 57-59년사이라고 예측된다.  

Ⅳ.서신의 기록 목적

바울의 직접적인 목적중의 하나는 그의 서바나 선교에 대해 많은이들의  관심을 불러모아 그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선교 사역을 감당코자 했기 때문에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바나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롬15:24)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 서신의 성격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 여러 부류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아래와 같은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1.논쟁적 목적:
바우어와 그의 학파는 바울이 겨냥한 주된 목표가 유대적인 기독교였다고 주쟁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주장은 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2.타협적 목적:
로마 교회가 유대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있었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그의 이방인에 대한 위임을 변호하고 유대적 요소들과 이방적 요소들을 조화시키려고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또한 튀빙겐 학파의 전제에 기초한 주장으로서 바울의 설명과는 거리가 멀다.
3.교리적 목적:
이는 전통적인 설명으로서 이서신안에 바울의 교리적 입장이 충분히 진술되어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이 서신이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하나의 논문이며, 그것이 나오게 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로마서 9장-11장과 같은 부분은  어떤 역사적 상황(이스라엘의 불신등)에 대한 적절한 언급없이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4.독자들의 직접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목적:
바울이 로마교회의 상황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다른 동료들에 의해서 듣고 그들이 당면한 여러 신앙적인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주려고 로마서를 저술했다는 이론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의 접근방식과 대조되는 義의 원리를 기독교의 기본 교리로서 다루었고, 그후에 이스라엘의 실패와 보편적인 교회와 이스라엘이 가지는 관계를 논했던 것이다.
타당성이 있는 또 다른 주장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선교 사역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깊이 깨닫고, 그의 마음이 지금까지 계속해온 교육 사역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던 몇가지의 주요 개념들을 심사 숙고하게 되었고 그 주요 교리적 개념들을 전해주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주장이다. 그 서신의 교리적인 목적과 관계있는 더욱 확실한 문제는 유대인들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어진다.(9-11장)  이장들의 문제는 앞장들에서 제시된 주제인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의 유기로 인해 생긴 하나님의 오랜 약속의 명백한 불이행을 조화시키는 것으로서 그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심각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였다,
 
Ⅴ.서신의 신빙성

로마서의 신빙성을 문제삼을 신학자는 거의 없지만, 마지막 16장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시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바울의 저작설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그 16장이 그 서신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문제시한다. 이 의견은 여러 고찰들에 근거하고 있다. 바울이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에 그렇게 많은 개인적인 문안 인사를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아굴라, 브리스길라, 에베네도 세사람은 로마보다는 아시아와 관계가 있다.  바울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에 대해서 뵈뵈를 천거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  17-19절에서 갑자기 거짓된 가르침들을 언급한 것은 에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15:33이 서신의 종결로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찰은 결론적인 아니며, 다른 식으로 설명될 수 도 있다. 바울이 알려진 교회에서 개인을 지목하는 것은 그의 습관이 아니었고 여행하기가 편리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바울이 로마의 많은 사람들을 알았다는 것과 아시아에 있다고 알려졌던 사람들이 로마에 있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서신을 보내기에 충분할 만큼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뵈뵈를 천거한 것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없다.   로마서의 내부적인 증거에 의해 16장이 원래 독립된 것이고 에베소나 또는 다른 곳으로 보내진 것이라고 간주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축도와 송영의 위치에 대해 다른 경향들을 가진  원문상의 증거가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15,16장이 없는 서신이 회람되었다는 증거도 존재한다.
이것은 특별히 말시온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문의 증거의 모든 변형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 이론을 착지는 쉽지 않으며, 다른 다른 가정들이 제안되어왔다. 어떤 것들은 1-14장을,  다른 것들은 1-15장을, 또 다른 것들은 16장까지를  원문으로 간주한다.

Ⅵ.로마서 내용의 타당성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며, 복음서의 단순한 진리에 비해, 의와 거룩과 사람에 대해 복잡한 서술을 하나가면서 하나님의 구속과 주권을 논증함으로서 원래의 복음을 왜곡시킨다고 의심받기도 한다.
대해 우선 우리 인간이 곤경에 대해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는 생각해 보자   그는 그 원인을 인간의 불의라고 진단한다.
그는 원죄를 믿고 있으며, 그 원인은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아담과 혈육적으로  연결된 상태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의 없이 우리는 모두 그 죄에 연루 되어있다. 딸기밭의 딸기 덩굴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의 공통된 생명의 뿌리에 연결되어 있으며,
이 뿌리를 통해 악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의 진단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구태여 바울이 아담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모두 인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 선조의 죄들은 우리의 삶을 좀먹고 우리의 성격을 결정하는 유해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더우기 지난 50녀간의 경험은 피와 눈물속에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가공할만한 선악의 실험실이 되어왔으며,  얼마나 많은 악을 행헀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치료는 무엇인가?
1세기에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켰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바울과 전혀 다른 세대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도일하게 역사하고 있는가?
이 바울의 복음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에 대한 절망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사실 바울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인간안에 내주하는 죄가 우리를 항상 죄의 법아래로 끌고 가서 우리가 원치 않는 죄를 행하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할수없었던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대신 이루시고 십자가의 구속을 성취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스리는 그 하나님께서 오늘 지금도 여전히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죄의 심연을 십자가를 통해서 화목하게 하셨다.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통회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주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의 죄를 씻으셨고,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주심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의와 거룩으로 지음받은 새사람을 입고 새 삶을 살게 하셨다.  이러한 내용이 로마서3-8장에 자세히 언급되어있다.
로마서 12장은  바울의 기독교인 윤리를 제시해주는 자로서 기독교인의 성격과 행위에 대한 고귀한 조언이 되며,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 된다.
로마서 12-15장에 기록해 놓은 기독교인의 행동의 원칙들은 오늘날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도덕적 문제들에도 무한하게 적용될 수 있는 원칙들이다. 만일 우리들에게 남을 헐뜯고 비판을 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날 때 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우리중에 누구든지 가지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없고")을 기억하면서 주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신 그 형제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을 삼가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의 아가페적인 사랑의 우위성과 당위성에 대한 바울의 주장은 20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덕적으로나 행위적으로 중요한 주장이 되고 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있어서 최상의 표준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며, 이 사랑이 행해질때 율법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된다.
1세기의 초대 로마 교회의 성도들 과 같이 오늘날의 우리도 우리 삶가운데서  거짓 없는 사랑을 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며, 어떤 사람에게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떄 로마서에 나타난 복음은 시대에 뒤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실제적이고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복음인 것이다.    사실 예수님당시의 더럽혀진 유대교와 모든 윤리적인 자립문화의 대전제는 자기 스스로 삶을 영위하고 스스로 구원을 성취하려는 거의 보편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인간적 참상에 대해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애통하며 그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후 바울은 그 문제에서 그를 구원하시는 주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림으로 이 문제에 대한 처방책을 제시하고 있다. (7:25,8:2)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위 바울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즉 역사의 과정을 형성해나가시고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역사속으로 들어오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면  바울 신학의 중요한 윤곽이 확고히 잡히게 되고, 우리는 그의 신학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Ⅶ.로마서의 구조와 보전성

1.16장의 문제
16장이 로마서의 원본에 있던 것이 아니라  에베소서의 일부라는 가설을 유발시킨 몇가지 주장들이 있다. 
A. 바울이 로마를 한번도 방문한 적 이 없는데 그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그러나 만일 이런 인사들이 그가 3년동안 사역했던 에베소에서 이 서신(로마서)을  보내는 것들이라면,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B.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그들의 집에 있던 교회는 로마서보다 먼저 기록된 고린도 전서 16:19에 언급되고 있으며, 그들의 거주지는 에베소였다.  기꺼해야 2년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 바울이 로마서를 섰을 시점에, 그들은 그들의 가정을 이미 로마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를 그곳에 설립했다. 이 사실의 비현실성은 디모데 후서 4:19에서 그들이 다시 에베소에 있는 것으로 기록된 내용에서 더욱 더 강조된다.
C. 뵈뵈는 16:1,2에서 추천된다. 바울이 그런 추천을 자신이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에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가 잘 알고 있는 교회에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가능성 있는 추론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D. 16:17-19에 있는 경고의  색채는 불일치에 대한 사도의 주된 관심이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의 관계에 집중되어있는 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의 색채와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16:17-19의 경고는 에베소에서 성행했던 반율법주의의 형태를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E. 15장은 끝맺는 말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말로 끝난다. 이것은 이 서신이 전달되는 동안에 마지막 장이 첨가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인 송영의 문체와 어희가 바울 서신의 문체와 다른 모습을 뛰고 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많은 학자들은 그 송영(16장)이 바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친다. 바울의 편지들을 맨 먼저 수집했을 때 로마서가 맨 마지막에 수집되어 편집되면서 바울 서신의 전체 수집록 결론으로 이 송영이 별도로 첨가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문구나 어조는 오히려 목회서신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런 의문점은 많은 사본들가운데서 이 송영 부분이 여러 다른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점에서 더욱 가중되고 있다. 어떤 사본들에선 아예 이 송영이 나타나고있지도 않으며, 많은 사본들에선 이 송영이 14장 끝에 붙여있다. 그런가 하면 이 송영이 가장 고대 사본인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에서는 15장 끝에 첨가되어있기도 하다. 15장이 나타나지 않은 사본들이 간혹 있지만 15장이 로마서의 일부라는데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분명히 15:1-6은 아무런 무리가 없이 14장의 사상을 계속하고 있으며, '믿음이 약한자'(14:1)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를 종결짓고 있다. 그러나 16장의 문제는 다르다. 로마서는 15장에서 자연스럽게 끝나고 있으며, 또 15:33에서 간단한 축복의 말이 나온다.
여기서 문제는 16장에 바울의 친구들에 대한 긴 문안의 인사가 나오고있는 점이다. 첫째로 바울이 자기가 아직 방문해 본적이 없는 도시의 교회에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을 갖고 있었다는 점과 그들이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이는 집들과 그들의 생활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는 점(11,14-15절)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다가 문안 인사중에 나오는 아둘라와 브리스가는 클라디우스황제때 합류했었다.(행18:2-3)
그리고 그들 이름뒤에 나오는 '에배네도'도 아시아의 첫 개종자로 언급되고 있는점으로 미루어 보아 16장이 오히려 에베소에 보내진 편지일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결론에 이의가 있기도 하다. 어떻게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냈던 개인적인 문안의 편지(16장)가 독립된 한 편지로 인정될 수 있는가?   바울이 문안의 인사만 써보낸 다른 예가 있는가?
이 서신의 송영에 대한 복잡한 사본 비평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이 제거된 체 이 로마서가 회람되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사본은 하나도 없다. 15장의 끝에 송영을 넣고 있는 유일한 초기 사본인 체스터 베티 파피루스도 16장으로 끝나고 있으며, 에베소의 일부라는 지지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사실 16장이 에베소 수신지설이라는 주장은 로마서의 마지막 두 장에 대한 본문적 문제들을 전혀 해결할수 없게 만들뿐 아나라, 오히려 더 큰 혼란만 가중시킬 뿐 이다.
2.이 서신의 수정본들
A.로마에 대한 언급
1:7,15에 있는 엔로메(로마에 있는)라는 말은 한 종류의 두 언어 병행 사본에는 전적으로 빠져있고 7절에 있는 언급도 또한 하나의 소문자 사본과 남아있는 말이 '진실로 성도인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한 오리겐이 사용한 사본에서 빠져있다.
B.송영(16:25-27)
알레산드리아 계통의 서방계통의 가장 훌륭한 사본들은 이것을 모두 16장의  끝에 놓아두고 있다. 조금 덜 중요한 사본들은 이것을 14장 끝에 두었다. 이들중에 다소 중요한 것은 L사본, 많은 소문자 사보들, 오리겐에 의해 사용된 사보들, 그리고 시라아 하클레안 역이다
약간 후대의 권위 있는 문서들은 이것을 154장과 16장의 끝에 모두 기록해 놓았다. 마르키온에 의해 지지된 그리스-라틴어 사본은 이를 모두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본에는 공란이 남아있다
C.축복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 지어다. 이것은 16장에서 다음과 같이 다양한 위치에서 나타나다.
알렉산드리아 계통의 가장 훌륭한 사본들과 다른 몇가지 사본은 불가타역과 함께 이것을 20절 끝에 둔다. 단지 몇몇 사방 계통의 권위 있는 사본들은 이것을 24절에 위치시켰다. 이것들중에 몇몇이 송영을 빠뜨린 경우에 이 축복은 서신의 결론 역할을 하였다.
D.15장과 16장
마르키오의 본문에는 이 장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약간의 증거가 있다.  오리겐의 저작들을 루피누스가  라틴어로 번역한것에 보면, 마르키온이 이 송영을 옮겼고 15장과 1장은 제거했다고 한다 마르키온 자신이 사본을 직접 수정했는지 아니면 이미 그렇게 짧게 교정된 채로 존재하는 사본을 그가 발견한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터툴리안은 14장에 대한 마르키온의 취급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끝에, 즉 서시의 끝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터틀리안, 이레네우스, 키프리안등은 15, 16장으로부터는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 불가타 라틴역의 몇몇 사본들에서 볼 수 있는 자의 제목들은 이 서신이 15장과 16장 없이 회람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런 많은 사본들의 증거를 요약하면 이 서신의 짧은 수정본이 원래 사본 전래사의 어느 시기에 회람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한 듯 하다. 이 편집판이 또한 매우 이른 시기의 것이라는 사실도 최소한 가능서 있는 이야기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의 문체와 어휘는 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과 다르며, 에베소와 목회서신들의 특성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영세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된 비밀"이라는 표현(롬16:25)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곳에서의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패트는 그것이 골로새서 1:26를 넘어서며, 로마서 1:2,3:21과일치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부분에 대한 모든 이름이 이것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3.사본 비평사에 대해 제시된 해답
A.긴 수정본이 원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론
이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다른 이론들이 있다.
ⓐ라이트 푸트는 원래 긴 형태의 서신이 바울에 의해 짧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원래의 서신은 송여만 제외한 긴 형태였다고 말했다. 이것이 후에 바울 자신에 의해서 마지막 두장과 로마에 대한 언급의 삭제가 필요했던 회람 편지 형태로 바꾸었다.
그후에 송영은 14:23뒤에 추가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울이 그것을 맺음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14:23에서의 부자연스런 중단을 설명하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사실 바울의 논의는 15:13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사도가 특별히 이 가설에 근거해서 이 서시의 전체 주제를 요약하기 위해 송영을 지을 필요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부분의 토론을 중단했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긴형태의 서신이 교회에 의해 짧게 되었다는 주장.
이 견해는 호르트에 의해 확고하게 주장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가 성구집을 만들기 위해 그 서신의 종결 부분(15,16장)을 생략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리적 요소가 그 부분에는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ㄱ러구한 송영은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14장의 끝에 포함되었다.  로마에 대한 언급이 생략된 것은 필사상의 실수이고 반면에 송영의 생략은 마르키온에 의한것이거나 또는 마르키온이 사용한 초기 사본에 빠져져 있었을 것이다.
생략은 사실상 순전히 우연하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14:23의 임의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종결에 대해 바로 앞의 주장과 동일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비록 그 부자연스러운 중단을 교회의 어떤 편집자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그 문제를 약간 약화시킬수는 었었으나 ,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는 하나의 신비이다. 그 유일한 해답은 다드가 편집자의 한량없는 어리석음이라고 부른 것이 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적절한 설명은 될 수 없다
ⓒ 긴 형태의 서신이 마르키온에 의해 짧게 되었다
정경에 대한 마르키온의 전체적인 태도를 볼 때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삭제하기를 지금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마르키온이 반대한 부분은 15:8에서 "그리스도를 할례의 수종쟈, 즉 할레자들의 하인으로 묘사한 내용과 4절에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것이다,"라고 선언한 내용이다. 또한 9-12절사이에는 네 개의 구약 인용이 있으며, 그것은 이 구절들에 대한 마르키온의 싫어하는 마음을 복돋웠을 것이다.
B.짧은 수정본이 원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론
짧은 본문에 근거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데는 세가지가 있다.
ⓐ원래 서신은 1-15장으로 구성되었고, 후에 에베소에 보낸 어떤 편지의 한 부분이 덧붙여져서 확장되었다. 모패트는 원래 서신이 15:33에서 끝나며, 16:1-23은 바울의 편지들이 에베소에서 모아질 때 추가되었으며, 송영은 그후에 전체 수집된 것들에 절정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편집자가 덧붙였다는 주장을 다소 시험적으로 제기했다.
ⓑ레이크는 원래의 서신(1-14장)은 회랍용이었는데, 후에 바울 자신에 의해 확대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회람서신이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었고, 바울 자신이 방문하지 못한 교회들을 위하여 갈라디아서와 같은 시기에 기록되었다고 생가한다. 바울은 후에 로마로 편지할 기회가 있어쓴데,그때 로마에 대한 특별한 언급들과 첨부서로서의 15,16장을 덧붙임으로서 그 회람 서신을 개작하였다. 레이크는 15:1-13에서 1114장의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굴라가 바울에게 그와 같이 계속해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이론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맨슨은 원래의 서신은 1-15장으로 구성되었는데, 바울 자신에 의해 확대되었다고 주장헀다. 즉 1-15장은 로마에 보낸 것이고 1-16장은 에베소에 보낸 것이라는 것이다. 히치코크는 로마서 16장이 로마에 보낸 서신의 일부가 아니며, 뵈뵈가 로마 법정과 관련된 법률 문제에 연루되어 그녀를 위해 쓴 추천서라고 주장했다.
 C.삽입과 편집의 이론들
본문의 보전성을 의문시하는 다른 이론들중의 하나는 국가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를 논하는 13:1-7의 단락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 단락은 문단을 독립시켜, 독립된 단위로 취급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앞단락(12장)과 뒤에 따라 오는 단락에서는 바울이 공관 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상하는 듯이 보이지만, 13:1-7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바울이 세계관은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생가이 포함되어있다고 생각되었는데 여기 11113:1-7에서는 이 세상의 지배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일컫고 있다.
또 다른 비 바울적인 단편의 이론은 로마서 3:25,26에 대한 것이다.
탤버트는 이것을 전형적인 바울의 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주장은 바울 서신들의 독특한 용어의 사용과 가상된 예배 의식적 양상과 비바울적 신학, 그리고 이 부분이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키노쉬타는 편집이론을 발전시켰다. 즉 그는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서신은 원래 두 개였던 것을 하나로 편집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하나는 혼합된 인종 구성의 공동체를 위한 교본이었다. (21:1-5) 나머지 하나는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서신은 그와 같은 두 서신들의 결합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두 개의 목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개진된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Ⅷ.로마서의 중심 주제

1.하나님의 의
서신의 교리적인 부분의 서두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라는 주제를 도입하는 데 그는 그것이 믿는자에게 이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논증의 전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의라는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로마서에선 하나님의 의를 네가지 측면에서 지적한다. 첫째는 신실하심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노인데 모든 죄를 증오하는 義의 특수한 측면이며, 때때로 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뜻한다. (1:17) 사실 의와 진노는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義의 표현이다.  그것에 대한 고전적인 진술은 3:25하에서 발견된다. 네 번째는 믿음에 의한 義의 획득이다. 하나님이 드러내신 義는  믿음을 통해서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것이 바울의 신학적 특징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수동적일 뿐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라고 간주되며, 그 능동적인 역할을 통해서 본질상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었던 자들을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2.하나님의 선하심
바울은 이 서신에서 하나님의 개념을 의와 사랑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능동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바로 이 사실이 거룩과 연결된 사랑이 동기가 된다, 그러나 바울은 특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 용납하심과 길히 참으심에 대해 주의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2:4)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5:8) 그리고 이 사랑이 지속적인 성격에 대한 고전적인 진술은 8:35이하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바울은 상황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나 그 어느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스라엘의 유기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크게 강조하며 하나님의 불의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한다.(9:15)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이스라엘백성들위에 종일토록 손을 내밀고 계셨다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조차도 하나님안에 계속 역사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즉시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다.(11:22)  서신의 실용적인 부분들에서 조차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그의 뜻은 선하고 받아들일만하고 온전하다. 그는 약한자와 강한자를 모두 영접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된다. 그는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이것은 우리 자신들안에 비슷한 성품들을 발전시켜 나가자는 호소의 근간이 된다.
또한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열매에 의해 소망이 넘치게 된다. 사실 서신 전반을 통해서 바울의 사상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측면은 그것 자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3.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곳은 주로 9-11장이다.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운명과 이방인들의 운명과의 관계를 논의한다. 이 주제는 우선 하나님의 공의라는 문제를 불러 일으키며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족장 시대와 모세시대를 인용하여 그의 논점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해서 논쟁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든지 그는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사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항상 긍휼과 혼합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주권적인 의지는 이방인들을 포함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곳에도 드러난다.
이 논의 전체를 통해서 바울은 비록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단언하려고 애쓴다. 바울은 하나님의 길이 옳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11:33-36에서 위엄있는 찬양을 부르게 된다
4.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서신에서는 이 사실이 잘 드러난다. 처음의 세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구상되었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의 깜짝 놀랄만한 목록을 제시할 뿐 아니라,(1장) 이스라엘은 특권에도 불구하고 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의 논의 가 진행됨에 따라 육체에 속한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는데 그가 말하는 죄성이란 육체적인 것보다는 도덕적인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오직 죄악된 육체와는 외관상으로만 유사한 그리스도의 육체와 인간의 육체를 신중히 구별한다.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어야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는 이것이 바울의 두 아담에 대한 교리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와의 투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바울은 죄의 능력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다. 죄는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인격을 가진 원수이다.   죄는 육체를 속인다, 죄는 모든 지체를 사로잡아 바울이 죄의 법이라고 부르는 원리에 묶어 놓는데, 오직 하나님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기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대한 고찰로 이끌어진다. 바울이 가장 중요한 측면은 바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서신에서 구원 과정들에 대한 바울의 전반적인 접근과 조화된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것을 근하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실제적인 제물이라고 보여진다. 바울은 6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다루며, 그 은혜가 풍성하기 때문에 죄를 더 크게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됨을 보여준다. 이것은 바울의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교리인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합 때문에 불가능하다.  초래된 변화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례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우리가 이제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더 이상 지배권을 가지지 못한다.(6:14) 그러나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어 새로운 의무가 과거의 것을 대치하였다.
4.하나님의 법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커다란 경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계명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는 이 진술에 명백히 나타나다. 그는  또한 죄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있어서의 율법의 유용한 작용을 인정한다(7:7) 그러나 그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어떤 내재적인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속사람은 율법을 즐거워 하지만 인간 자신에게 결함이 있으므로 율법은 구원의 수단으로서는 하나도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법을 생각해 봄에 따라 바울은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법은 모세 율법의 단순한 문자들이상의 것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그가 성령의 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8:2) 그리고 특별히 성화의 사역을 행하는 성령에 대한 그의 교리는 하나님의 법과의 밀접한 관계성으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새 언약하에서는 계명들은 마음속에 새겨지며, 오직 내주하는 성령을 통해서 수행된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사항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한다.
왜냐하면 이 요구 사항은 온전히 새로운 관계하에 있는 아버지의 법들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육체에 대항하여 인간을 다스리시며 죽음대신 생명을 주시고 그리스도인들의 아들됨을 증거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율법 조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義,  평화, 기쁨, 희망, 사랑과 같은 성질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법에 근거하여 성령에 의해 새롭게 지배되는 삶이다.

Ⅸ.내용의 개요

1.인사말(도입,  1:1-15)
본서의 저자는 예수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로는 자신을 '종'으로, 공적인 관계로는 '사도'로 칭하고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와의 관계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은자'로 말한다.  그가 설명하는 복음 또는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하는 하나님의 복음이며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고 아들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을 중심하여 예언하며(3-4),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아들이 신임하고 보증한 것이다.(5-6절)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인사와 함께 그들에 대한 감사와 그들에게 가려는 계획에 관한 기도, 그들을 섬기려는 욕망과 그들에게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에서도 자랑할만한 것이라는 확신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의 능력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계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영광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복음을 위한 바울의 열심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17절)라는 말은 믿음이 구원을 이루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2. 교리(1:16-8:39)
A. 바울의 복음의  주제(1:16,17)
바울은 그의 복음을 믿음에 의해서 얻는 의로움이라고 요약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B.의(義)의 필요성(1:18-3:20)
바울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앞에서 정죄당한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첫째로 이방인들은 악덕과 우상숭배로 악명이 높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창조주를 배반한 사실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다.(1:18-32)
그 다음에 유대인들도 더 나은 상태에 있지 못했다.  즉 그들은 비록 우상 숭배는 하지 않았지만, 자기 의에 집착하고 있었다. 사람이 양심의 음성을 따르지 않거나 또는 특별계시의 음성에 순종하지 안든지에 관계없이 불순종은 죄악이다. 할례가 이 사실을 무마시킬 수 는 없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계시를 위임받았다는 점에서 특권을 가졌던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특권이 유대인 범법자들에게 깨끗함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2:1-3:8)  마침내 도달한 결론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막론하고 의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위임된 계시인 성경에 대한 호소로써 정당화되었다.
그들자신이 소유한 계시가 그들을 정죄한다.(3:9-20)
C.그들의 필요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역사(3:21-5:21)
의롭게 되어야 할 필요의 보편성을 보인후에 바울은 하나님의 응답을 살핀다.   
의로움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화목 제물을 제공하신 하나님을 믿음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 그 희생에 근거에서 용서는 값없이 베풀어지며, 사람은 의롭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자랑할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믿음에 의한 의로움은 이방인들에게도 동등하게 기회가 주어주기 때문이다.(3:27-31)  유대인들인들이 아브라함의 의(義)는 실제 행위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 도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경우가 인용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인정된 의로움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에 기초한 것임을 입증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할례를 통해서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할례이전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정황에 근거하여 그가 의롭게 되는 근거는 아브라함의 업적(모든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었음을 더욱 분명히 한다.(4장)  바울은 그 다음에 칭의에 포함된 축복들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의로움은 평화 기쁨, 소망, 인내등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한 모든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화목의 길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하심을 깨닫는다.(5:1-11)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의 효능이 아담과 그리스도사이의 대조를 통해서 예시된다. 전자로 인한 죄의 보편성은 후자(그리스도)로 인한 은혜의 풍성함에 의해 압도된다.(5:12-21)
D.개인적 삶에 대한 의로움의 적용(6:1-8:39)
세례의 상징을 사용해서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죄에 대해 죽고 부활 생명에 대해 살아났음을 보여준다. 즉  죄의 종이 된 상태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일에 헌신함으로서 사실상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6:15-23)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육체에 대항하는 성령에 의해서 활력을 얻는 새로운 종류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성령의 법은 죄악과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심지어 육체로 부터도 자유함을 준다.(8:1-13) 이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양자됨의 새로운 신분을 제공해준다.
3.이스라엘의  문제(9:1-11:36)
이스라엘이 많은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는 사도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중에서도 오직 일부만 선택되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의의 가능성은 전혀없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
 즉 진흙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가지는 주권과 힘에 의해 예시되듯이, 피조물은 자기 자신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거부된 것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의로움을 이르려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 실패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의로움은 주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이신칭의 사상과 대조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부했다고 탓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버림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남은자를 두시어 미래의 소망이 있게 하셨다. 이들을 통해 장래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회복하길 원하셨다. 이런 사상들은 사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헤아릴수 없는 지혜에 대한 감탄의 표현을 불러일으켰다.
4.실제인 삶의 교훈들(12:1-15:13)
그리스도인들은 헌신된 삶의 의무를 배워야 하며(12:1,2),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발전시켜야 하고(12:3-8), 또한 다른 사람들의 요구들에 대한 배려를 키워야 하며 가능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아야한다.(12:9-21)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반드시 충성과 질서 정연함으로 나타나야 한다.(11:1-7)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의무는 반드시 사랑의 법에 의해서 규율되어야 한다. (13:8-10)
5.맺은말(15:14-16:27)
ㅂ울은 그들의 영적인 성장을 확신하다고 말하였다. 오해를 막기 위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자신의 의무에 대한 헌신을 약술한다.(15-21)
그 원천은 하나님께 있다. 이것은 이적의 표적으로 확증되었다.(18-19)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해 개척자가 되는 것이다.(20,21절)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려는 자신의 소망을 말한다.(22-29)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이 그들로 지원해 주기를 요청하면서(30-32) 평강을 기원하는 축도롤 끝맺는다.(15:33) 그후 16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이 된 여러 성도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문안한다.
그의 인사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사도 바울은 그와 함께 있는 동역자들과 함께 문안한다.(21-23)그의 마지막 축도는 하나님을 힘있게 찬양함으로 끝맺는다(25-27)

Ⅹ.로마서에 있는 사상의 발전
1.서론과 주제
바울은 독자들에게 문안한 후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자신의 계획을 피력한다.(1:1-15) 그후 다음과 같은 주제를 제시한다(1:16-17)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義)의 선물로서 죄로부터의 구원을 주셨다는 복된 소식이 바로 그 주제였다.
2.증상: 죄악
그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칭의의 필요성을 서술하고있다.(1:18-3:20)먼저 이방세계의 죄악됨을 기술한 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유대 세계의 죄악됨을 기술하고 있다. 그후 3장에서 인류의 보편적인 죄악을 전체적으로 개괄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들은 진짜 문제의 증상에 불과하며, 그 진짜 문제는 바로 인간 실존을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인 내적인 죄성이라는 것이다.
3.치료제: 칭의
두 번째 주요단원(3:21-5:21)에서 그는 칭의가 곧 하나님의 치료제임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우리의 칭의의 기초로 , 그리고 믿음을 그분의 죽음의 유익을 사용하는 수단으로 가가 제시한다. 4자은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귀감으로 묘사한다.  
5장은 칭의로부터 오는 다양한 축복들의 명단(화평, 기쁨, 소망, 성령의 선물등)을 열거한후에 아담에게 속하는 불신자들이 위치와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신자들의 위치를 비교하고 있다.  아담안에는 죄와 죽으밍있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의와 영원한 생명이 있다.
4.결과: 성화
세번째 주요 단원(6-8장)에서 성화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주제로 발전하고 있다. 세례란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는 것을 그리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것을 가리킨다.(6장) 그러나 성화가 구약의 율법을 지키려는 자발적인 시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율법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죄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패배감을 안겨줄 뿐 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안에서 율법과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힘을 얻게 된다.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우리를 아무도 끊을 수 없음을 단언한다
5.문제: 이스라엘의 불신앙
그의 네번재 주요단원(9-11장)에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유기와 불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적 은총의 지혜를 언급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그분 뜻대로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거부된 것은 그들이 복음을 듣고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기를 거절하고 스스로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10장)
그러나 이스라엘의 제외됨은 일시적뿐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같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이스라엘민족을 자신의 은총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6.의무 사항: 기독교적인 교훈들
다섯번째 주 단원은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관련된 권면들로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고 의식상 결례에 대한 문제에서 자유하라는 명령등이 포함되어있다.
7.결론적인 말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언급한후 작별인사를 나눔으로써 본 서신의 결론을 맺고있다.(15,16장)

?.로마서의 주요 교리들

1.인간의 범죄
바울은 하박국 2:4절을 인용함으로써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1:17)는 근본적인 진리를 구약 성경이 지지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뿐 만 아니라 그는 자연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계시하고 있으므로 이방인도 핑계할 수 없다.(1:19,20)고 주장하고 있다. 2장에서 바울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의 교만과 불순종과 복음의 불신으로 인해 그들 또한 버림받을 것임을 언급한다. 그후 그는 일련의 구약 성경인용구들을 통해서 전인류가 하나님앞에서 죄인임을 말한다.
2.로마서의 율법
바울은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사람들은 의롭다하심을 받게 되고 법에 의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고 (롬10:5;갈3:12)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떠한 사람도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없음을 언급한다.(롬3:20)  그것은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쓰여 있는 법전, 즉 의문(儀文)에 의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율법에 흠이 없었음을 주장하고 있으나 동시에 어떠한 율법에도 그가 완전히 순종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롬8:7)
율법에 관해 쓸 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입게 된 자신의 경험과 그에 따른 유대교화된 사람들과의 투쟁은 바울로 하여금 유대인들로는 소유할 수 없었던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하였으며, 또 구속의 역사가운데서 율법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율법은 곧 하나님의 율법이며 또 하나님의 율법으로서 존속되고있다.(롬7:22) 율법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며(롬7:7)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이다.(롬7:12)  그러므로 율법자체는 하나님의 의(義)의 증거가 된다.(롬3:21) 여기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은 성도들의 사랑에 의해서만 울법의 명령은 충족될 수있다.(롬13:8)  행위에 의해 성취되어지는 인간적인 의는 하나님을 제외한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거부이며, 그 자체가 참된 의(義)에 대한 부정이며 부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가운데서 자랑하며 율법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교만하게 판단할 때, 그들은 그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스스로 참된 의를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있는 것이다.(롬2:17-21)
남을 판단하는 그 행위 자체가 그들을 죄인들로 정죄하는 것이 된다.(롬2:1)     죄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자기의 주인으로 여겨 창조주 하나님보다 자기 자아를 기쁘게 하려는 열망이다. 또한 바울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을 상징하는 할례란 진실로  마음의 할례가 되어야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참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믿음을  소유하느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롬2:24-29)
 유대교는 구원을 율법의 이행에 두었으나, 그들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율법에 대한 순종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하나님께서 자비가운데서  죄인인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방편이 되는  죄사함과 회개에 대한 교리와 혼돈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는 의롭고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고있으나 그 율법은 사람들을 하나님앞에서 의롭게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있다고 보고 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연약함과 사악함이 율법이 명령하고 있는 순종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울은 인간의 악한 감정이 율법을 연구함으로서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랍비의 사상을 단호하게 부인하고 있다. 또한 율법은 기록되어있는 하나의 법전이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생명이 부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것을 지킬 힘을 주지는 못한다.(롬7:6) 즉 율법의 옛 언약은 돌판위에 새겨진 계명들로 이루어져있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지만을 선포할 수 있으며,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율법은 비록 영광스러운 것이었으나 기록되어진 법전은 죄인을  저주하고있으며, 그들을 사망의 심판아래 두고있는 것이다. 율법의 실패를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하고 알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비교하여 숙고하는 가운데 바울은 하나님의 전반적인 구속의 목적가운데서 율법의 역할이 무언인가를 재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첫째로 그는 율법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밝힘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있어서 율법의 불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아래서 유대인으로서 생활하던 자신의 생활를 돌이켜보면서 이전에 가졌던 확신과는 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완수하지 못하였다는 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육신가운데 거하고 있는 죄로 말마암아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시는 의를 소유할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의지가 죄에 의해 극복되었다하더라도, 죈느 여전히 그의 사람을 지배하고있기 때문에 참된 의를 성취하기란 불가능한일이다.(17,20절) 죄와  사망의 법의  이러한 굴레로부터의 해방은 단지 예수그리스도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이룩하셨다. 즉 육신가운데 있는 죄를 저주하심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성령에 의해 사는 사람들가운데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셨다.(롬8:3-4)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의의 방편으로 가지고 오 셨으며, 의식적인 법전으로서의 율법에는 끝을 맺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율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성령의 내재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분안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통해서 율법에 의해 정죄되어진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롬8:2) 
3.화목
바울은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히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게되는 이신칭의를 강조한다.
화목(3:25)이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가리키는데 이 죽음은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달래는 방편이었다. 
4.믿음
바울은 사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을 믿음으로만 의를 얻을 수 있으므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특권이나 율법 준수에 따른 특권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실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구약 성경자체도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5.원죄: 아담 대 그리스도
5:12-14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기전에도 죽음이 지배했던 것은 온 인류가 아담의 원죄의 그죄아래 있었기 때문임을 언급한다. 한사람이 에덴에서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많은 사람들도 그 아담안에서 죄를 짓고 죽었으나 한사람(예수그리스도)이 십자가에서 의로운 행위를 실천함으로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영생을 얻었다
6.그리스도와의 연합
세례시에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일체감을 통해서 그분이 죽었을 때 자신도 죄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고백하고 또한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자신도 그분과 함께 의에 대해 살았다는 것을 고백한다.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죽었고, 또 그리스도께서 살아났을 때 살아 났다.  그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나, 사람으로 살 의무감을 짊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형성해야 한다.
7.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은 죄의 지배로부터는 자유롭지만 거룩한 삶을 위한 제한들에 대해서는 자원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종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거룩에 매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참된 종류의 자유, 즉 죄로부터의 자유뿐 만 아니라, 의로운 삶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7장에서 바울은 결혼법을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한다.  부부중 한 쪽 배우자가 죽었을 때 죽음이 결혼 관계를 말소하기 때문에, 남은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결혼할 자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세율법과 신자와 맺은 관계를 말소시킴으로써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할 자유가 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8.이스라엘의 선택과 버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중 남은자가 복음을 믿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외됨이 다른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유대인들의 질투을 유발하여 결국 유대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후 이스라엘민족은 장차 구원받을 것이다.즉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 살아있던 사람들은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받아들일 것이며 결과적으로 구원받을 것이다.
I.그리스도인의 헌신
바울의 다음과 같은 권면들은 그의 신학이 항상 삶에 영향을 주며,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높은 차원의 행동을 유지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성도들에게 자기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고 호소한 후에 , 그들에게 불신자들의 외형적인 행동을 본받지
말고 의와 진리로 거룩함을 받은 새로운 마음자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을 살라고 권면한다.(12:12)

?. 로마서의 주제별 강해

강해 1.하나님-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로마서는 '하나님-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1장부터 주 예수님의 몸의 표현인 지방교회들에 대한 16장까지, 책 전체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이며 기쁜 통보에 대한 것이다.(롬10:15)
A.하나님-사람인 주예수님의 인격
(a)다윗의 씨(마1:11,22:42-45): 인성안에서 다윗의 씨이신 주예수님은 하나님의 옛창조(옛사람, 롬6:6)에 속한 사람의 씨(골1:15하)로서, 죄의 육신의 모양 안에 계셨으나 죄는 없으셨다.(롬8:3하) 부활 안에서 주예수님의 신성은 성결의 영으로서 주예수님의 인성을 변화시켜 인성을 신성한 수준으로 높이 올리시는 거룩한 능력과 요소를 갖고 계신다.
(b)하나님의 아들:   롬1장의 성결의 영은 다윗의 씨(인성의 씨, 롬5:15,17하)안에 있는 신성(롬9:5)이다. 부활(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며 인격임) 안에서 인성안의 주예수님은 신성과 영화롭게 된 인성을 모두 소유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다.(롬8:29)
(c)모형인 주예수님과 대량복사되는 믿는이들: 믿는이들은 주예수님안에서 신격에서가 아닌 생명과 본성과 표현안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완전한 아들의 명분에 이른다. 
B.'하나님-사람'(God-Man)인 주예수님의 역사
(a)예비 단계들(영원전, 성육신, 인생):
  영원안에서 영원한 말씀이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계셨으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며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교통하시며 함께 운행하셨다. 시작이 없는 영원안에서 그리스도(아들하나님)은 삼일 하나님에 의해서 예정되었고(벧전1:20)  아버지 하나님은 요소와 범위와 통로되시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1:3-4)  주예수님의 인성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구원할 자격이 있게 했으며, 그분의 신성은 사람을 구원할 그분의 구원의 능력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보증한다. 주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인생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과 속성들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표현하기위해, 그분의 거룩한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처럼(눅10:25-27) 주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한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신성한 사랑을 통해 강화되고 능력받고 부요해진 탁월한 인간적인 사랑이었다.
(b)땅에 속한 사역(죽음과 부활)  :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와 함께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인성을 입은 자신을 십자가위에  드리심으로  그분의 죽으심은 영원히 효과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모두 아들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에 참여하셨다.
주예수님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은 하나님의 구속을 성취하고, 우주안의 모든 소극적인 것들(옛창조, 사탄, 사망, 자아등)을 처리하고, 그분 자신을 생명주는영으로 믿는이들안에 씨로 뿌릴수 있도록 역사하는 '거룩한 생명'이 해방되는 것이다.  주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영화롭게 됨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입증이며, 그분의 생명주는 영으로의 변형이며, 그분의 구속하고 생명을 분배하는 죽음의 효능의 확증이며, 그분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을 해방시켜, 믿는이들에게 새 생명을 분배하고 새 창조인 그 몸된 교회를 발아시키는 것이다.  부활하심으로 , 육
신안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주예수님은 생명주는영(생명의 영, 롬8:2, 고전15::45)이 되셨고, 성결의 영(그분의 신성)을 통해 인성이 변화되어 신성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맏아들로 인정되셨다. 생명주는 영은 하나님의 새창조인 그리스도의 몸을 발아시키는 요소이다.(고후5:17, 갈6:15)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며, 머리이신 주예수님은 요소이시고, 그분의 많은 형제들인 믿는이들(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건축(새예루살렘으로 총결되는 하나님의 새창조인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 성분들이다.   즉 주예수님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구성성분인 우리지체들안에 계시는 그몸의 근본 요소이다.
(c)하늘 사역: 
주예수님의 하늘에 속한 사역안에서 '내주하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이들이 완전한 아들의 명분(성숙되어 우리 몸의 구속까지 포함된 우리 존재의 영화롭게 됨)에 이를 수있도록 하늘에 속한 영역안과 우리의 연합된 영안에서,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 기도하시며 돌보시며 지켜보신다.(롬8:29-39)   승천하시고 완결되신 만유의 주와 왕과 몸의  머리이시며 새언약의 집행자이신 '하나님-사람'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많은 형제들인 믿는이들(하나님-사람들)이,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합안에서 모든 소극적인 환경을 이겨내고 원형이신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의 단체적이고 유기적인 몸으로 조성되고 그분의 완결된 대량 재 산출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신성한 생명의 공급을 통해 강화시키고 섬기시며 위로하시고 충만케 하신다.  부활한 그리스도(영이신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새생명이 되시며, 승천한 그리스도(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경륜적으로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 
  주예수님의 땅에 속한 사역(인생과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구성성분들로서 그분의 많은 형제들이 되는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산출했으며, 주예수님의 하늘에 속한 사역(승천과 재림)은 그분의 지체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사역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숙함에 이르도록, 곧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영화롭게 됨인 그들의 몸의 구속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며, 그분의 모든 지체들을 그분과의 연합안에 지키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성취를 위해 그분의 대량 산출을 위한 원형이신 그분의 형상을 본받게 한다.

         강해 2. 로마서 5장-8장까지의 기본요점

로마서의 기본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예수님를 위한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죄인들을 맏아들(롬8:)인 주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드시어 단체적인 몸안에서 하나님를 표현되게 하는 것이다.
A.죄인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는 수단(의, 거룩, 여광)
하나님은 어떻게 죄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시는가?
(a) 주예수님의 의가 우리의 의로움이 됨: 하나님은 주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 죄를 도말하시고 그분의 의를 우리위에 입히셨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여기셨다.(롬4:22-24)
(b)우리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거룩함: 내주하는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시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안에 들어오게 되어 날마다 우리를 변화시키며, 주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성화되개 하신다.
(c)하나님의 영광으로 영화롭게 됨(롬8:30): 주예수님를 믿는 사람은 결국 외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내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적셔지며,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분의 완전한 영광의 영역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화롭게 된 아들들이 될 것이다.
B.두가지 사실과 두가지 체험
(a)아담과 그리스도안에
아담안에서 우리는 죄를 물러받고 사망의 다스림아래 있고 죄인으로 짜여져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었다. 그러나 주예수님안에 머물므로 의와 은혜를 갖으며(롬5:17) 영원한 생명안에서 죄와 사망에 대해 왕노릇한다.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과 우리가 주예수님안에서 하나님를 향해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우리자신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릴 때 신성한 생명은  객관적인 구속 뿐 아니라 우리 존재안에서 주관적으로 거룩케 하시어 성화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b)육신과 영안에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은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않고 도리어 원치않는 악을 행하는도다"(롬7:18-19)  
당신이 선을 행하려고 결심할 때 마다 당신은 자신을 위한 계명(스스로 만든 율법)을 갖는 것이며, 그것이 모세에 의한 율법이든 자아에 의해 만들어진 율법이건 결국에는 당신이 드러날 것이다.  선을 행하려고 스스로의 힘으로 결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다만 영으로 돌이켜 영에 따라 행하고 생각을 영에 두라. 그러면 스스로 만든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될 것이며,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존재 각부분에 생명을 주시며, 이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서 죄와 사마의 법위에 왕노릇하게 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자아가 그 어느것도 스스로 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우리 생각을 항상 영위에 둘 때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을 통한 생명의 분배와 적셔짐을 누리게 될 것이다. 
C.로마서7장과 8자에 있는 법
(a)세인격과 세법:
에덴동산에는 선과 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가 있고 여기서 선의 법, 악의 법, 생명의 법을 본다.  지금 우리안에는 내주하는 그리스도(신성한 인격인 하나님)과  사탄(악한 인격, 타락한 죄의 본성)과 인간적인 인격(자아)가 있기 때문에 에덴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첫인격인 사람의 인격은 우리 존재와 자아이며 혼안에서 우리의 생각으로 대표된다. 사탄의 인격은 타락한 죄의 본성을 더러워진 부패한 육신(영적인 의미)안 에 있다. 그러나 신성한 인격이 우리 영안에 거하신다. 이 세인격은 서로 다른 종류의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화되지 못하고 언제나 싸운다.
(b)생명의 법에 의해 살아감:
  사랑하려고 노력하거나 선을 행하려고 스스로 노력치 말고 당신의 전 존재를 영으로 돌이켜고, 날마다  올바른 버튼(생명의 영)으로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주예수님 자신위에 당시의 손가락을 계속 두고, 주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영안에 머문다면 우리안의 소극적인 것들은 죽게 되고 신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D.로마서7장과 8장에 있는 생명과 사망
( a)생명의 노선과 사망의 노선:
 창세기 2장에서 생명은 생명나무로 대표되며, 사망은 선과 악의 지식나무에 의해 대표된다.(9절)  로마서5-8장에는 사람안에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사망의 근원인 사탄과 사람의 인격사이에 심각한 삼각 관계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매일 의 삶에서 한발은 생명의 노선위에 또 한발은 사망의 노선위에 두고 있다. 
그러나 새예루살렘에는 생명수의 강과 그안에서 자라는 생명나무되신 그리스도로 충만하기 때문에 신성한 생명이 충만한 성이다.(계22:1-2)    (b)생명의 왕노릇과 사망의 왕노릇 :
  "만일 한사람(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그 한사람을 통해 왕노릇하였다면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안에서 왕노릇하리롸"(롬5:21)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 대해 왕노릇하려면 새 생명의 새로움안에서 행해야 하고, 생명의 노선위에 항상 머물여야 한다. 우리가 주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아 그분과 함께 성장하는 것(롬6:4-6)이 생명의 새로움안에 있는 것이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안에서부터 우리의 생각안으로 확장되기 때문에 우리의 혼과 생각도 신성한 생명의 성령의 법울 통해 새 생명이 될 수 있고, 결국 우리 죽을 몸에도 아들의 명분을 통한 완전한 구속에 이를 것이다.
(c)우리의 생각을 영에 둠:
"육신에 둔 생각은 사망이요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롬8:6)   우리속에는 두나무가 있는데 생명나무는 우리 영안에 있고 사망나무는 우리의 육신안에 있다.  우리가 선해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육신에 , 소망없는 자아에 두는 것이다.  우리 영에 있는 신성한 전기이신 새 생명의 성령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단지 영의 스위치를 켜서(주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영으로 돌이킴) 생명안에 있을 수 있다.
(d)새로운 습관을 개발함 : 
우리는 우리자아의 힘과 천연적인 사고안에서 돌이켜 날마다 주예수님을 부름으로 그분의 영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  절연체의 얇은 선 하나로도 전기의 흐름을 끊을수  있듯이, 적은 죄와 어둠이라도 우리를 연합된 영안에 있는 생명의 흐름으로부터 차단시킬 수 있다.  이 영안에 머무는 습관을 개발하기 위해 기도하고, 주예수님을 부름으로 끊임없이 영안으로 돌이켜야 한다.  또한  우리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로 여겨야 한다.(롬6:11)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우리안에 내주하는 영으로써 옛사람의 행실을 그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될 것이다.(롬8:13)

강해 3. 아담안에서 주예수님안으로 옮김
A.아담안에
우리는 옛창조안에서 아담과 함께 타락하여 죄의 본성을 지닌 죄인으로 태어나, 이세상을 사랑하며 육체의 정욕과 공중 권세 잡은자을  따라 행하는 진노의 자식들이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고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없는 타락하여 정죄 받은 죄인이다
B.주예수님안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도록 아버지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입어 그분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고, 아들의 명분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엡1:4-5)  우리는 법적으로 구속되고, 죄사함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되었고, 유기적으로 부활안에서 주예수님의 생명안에서 거듭나 그리스도의 몸(삼일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표현하는 유기체)을 조성하는 주예수님의 많은 형제들이 되었다. 우리는 생명의 영에 으해 거룩케되고, 생명의 영에 의해 옛사람의 낡음에서 새롭게되며(롬12:2), 주예수님의 생명요소를 가진 주영에 의해 변화되고(고후3:18), 생명안의 변화를 통해  우리를 원형이신 주예수님(하나님-사람)의 대량 재산출인 많은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우리는 생명의 영에 의해 신격에서가 아닌 생명과 본성안에서 '신성한 아들의 명분'(거듭남, 거룩케됨, 새롭게됨, 변화와 형상을 본받음, 영화롭게됨)의 완전한 누림속으로 들어가게된다. 또한 주예수님안에서 죄의 능력과 율법과 세상과 옛창조의 공허함에서 해방되어, 왕인 제사장 체계와 거룩한 나라가 되고(벧전2:5,9) 사단과 세상을 이기는자들이(계12:11,요일5:5) 되며, 환경의 어려움도 넉넉히 정복하는자가 되며, 영원한 생명안에서 영원히 왕노릇하는 왕이 된다. (롬5:17) 

ⅩⅢ. 결론

로마서는 바울 서신가운데 가장 논증적인 책으로서 교회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체계를 구축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런 면에서 고찰해볼 때,  이 서신은  주예수님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신칭의 사상을 주된 축으로 하여 서술된 기독교 최고의 신학 책이라 할수있다.
이 로마서는 구원의 원천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구원의 근거가 주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이며, 구원의 조건이 믿음임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서신의 모든 내용이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만이, 죄성으로 타락한 삶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소망임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의(義)의 계시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다면, 그의(義)을 믿는 신앙의 기반위에서  그 의(義)를 성령안에서 실제 삶가운데서 살아 나타내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사람의 생활을 살 수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계시하고 변론한 후 실제적인 생활가운데 그 의(義)을 적용시킨 것같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안에서 의와 거룩와 진실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삶의 제사로 하나님께 우리 몸과 모든 것을 믿음안에서 드리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나된 삶을 살아야한다.


참고 도서

사전류
새성경사전, 기독교 문서 선교회
아가페 성경 사전 , 아가페 출판사
기독교 대백과 사전, 기독교 교문사

단행본
김철손외3인, 신약 성서 개론, 대한 기독교서회
도달드 거슬리, 신약 서론, 크리스찬 다이제스트사
김득중, 신약 개론, 컨콜디아사
로버트 H 건드리, 신약 개론, 엠마오
G.E.래드, 신약신학, 성광문화사
이한수, 바울 서신의 메시지, 총신대학교 출판부
A.M.헌터, 신약성서개론, 컨콜디아사
윗트니스리, 로마서 라이프스타디, 한국 복음 서원
메릴 F. 엉거, 엉거 성서 핸드북, 교회 교육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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